세월은 유수(流水)라……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시간의 변화를 물에 빗대
어 설명한 것이다.
시간이 변해감에 따라 부드러웠던 아이들의 손에는 굳은살이 박히고, 온
순했던 성격들도 서서히 날카롭게 다듬어진 칼처럼 변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사 차 관문에서 그들은 날카로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고 말 테니까.
이제 그들은 아이가 아니다.
처음 이곳에 온 아이의 수는 오백 한 명이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아이
의 수는 검은 다섯 명, 도는 세 명, 기타 병기에서는 오로지 한 명만이
살아 남아 있다. 이제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아이의 수는
줄어 있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나이는 열 살이었지만 이제는 열 아홉이나 된다.
변한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마교도 변했다. 우선 적으로 이 일을 시작하게 했던 노옹(虜翁)이 세상
을 떠났다. 그리고 마교 교주의 아내인 엄여홍이 어이없게도 자결(自決)
을 하고 말았다. 유백명이 노옹의 예언 탓에 임시로 교주의 딸에게 새
워 둔 호위 무사가 엄여홍을 겁탈했다는 것이다.
엄여홍은 자결을 한 상태였고, 그 일은 마교를 일대(一大) 피 바람을 불
게 만들었다. 우선 적으로 그 무사를 소개시켜 주었던 마교 부교주 혈무
린을 향해 교주 유백명은 그 간의 우정을 버리면서 까지 칼을 들었다.
교주 유백명과 부교주 혈무린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온 죽마고우(竹
馬故友)였다. 하지만 유백명은 그를 용서 할 수가 없었고, 마침내 마교
는 두 개로 나뉘어졌다. 세력이 교주 쪽에 비해서 약했던 부교주 측은
서둘러 마교에서 빠져나갔고, 그들은 마교에 규합되지 않았던 세력인 아
수라교(阿修羅敎)를 손에 넣었다.
아수라교를 손에 넣으면서 이름을 혈교(血敎)라고 개명(改名)한 그들은
마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세력으로 급상승했다.
교주는 아내의 죽음과 함께 변하고 말았다. 유백명은 사파였지만 사람
을 죽일 때는 단칼에 끝내 주는 성격을 지닌 남자였었다. 하지만 이제
는 아니다. 피를 즐기는 남자로 변해 버린 그는 마교의 일을 뒤로하고
살육(殺戮)의 나날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마교에서는 비어 있는 부교주 자리로 죽은 엄여홍의 오빠
인 추혼객(錘魂客) 엄백린을 추대(推戴)했다. 그렇게 마교는 부교주 엄
백린의 수고로 조용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진정한 혈풍(血風)은……
막 불기 시작했을 뿐이다.
사곡의 내부에 있는 무인들이 오 년 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그 동안에
는 모두가 자신이 맡은 곳에서 할 일이 있던 탓에 모임을 가질 시간이
없던 것이다. 약속했던 오 년이라는 시간이 끝난 탓에 그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보고 해 봐."
"검 쪽에는 다섯이 살아 남았다."
"도는 셋."
"이 쪽에선 다 죽고 조를 쓰는 녀석 한 명 살았어."
풍유랑은 아홉 명이라는 숫자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다 그렇다고 치고 이 호 쪽에서는 왜 자꾸 검을 지급해 달라
는 건가?"
"검이 버티지를 못하네."
사혼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검의 길이는 아주 약간 짧지만 강도는
오히려 강한 편이다. 그런데 그런 검이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자꾸
박살이 나니 그 또한 놀랍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검이 버티지를 못한다고? 왜?"
"그 놈의 무공을 평범한 검이 도저히 버티지를 못하더군."
"혹시 그 놈이라면……"
"그래, 여운휘."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사혼의 입에서 여운휘라는 이름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 녀석 많이 강해졌나 보군."
"무척이나……"
"그렇군."
사혼은 뒤에다가 자신도 이길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일까 하
다가 기회를 놓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무림이라는 곳에 몸담은 지 이제
는 삼십 년은 된 자신이 이제 갓 십 년 됐을까 말까하는 자에게 밀린다
는 건 분명히 충격적인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고,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
만 사실이다.
"예상보다 아이들의 수준이 높은 것 같아. 평균치는 그냥 그렇지만 실력
이 괜찮은 놈들이 몇 있어. 죽이기는 아까운데 말이야……"
"사 호, 어차피 살아 나갈 수 있는 건…… 하나일 게다.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저 중에서 누군가가 '그곳'을 돌파한다면 모를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훗, 후자는 불가능하겠군. 그건 우리조차
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들은 거기서 말을 끝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
했다.
이미 이곳으로 올 때 살아 남은 자들에게 해야 할 것을 명해 놓은 상태
다. 지금부터 배우게 되는 것은 꼭 필요한 것들이다.
오 차 관문은 사 차 관문과는 달리 검 끼리나, 도 끼리 가 아닌 살아 남
은 구 인 모두가 참가하게 됐다. 넓은 산에서 자급자족하며 자신이 머물
렀다는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한 마디로 오 차 관문은 인간 사냥이
다.
어떤 사람은 사냥꾼이, 어떤 자는 사냥감이 되는 사냥. 기간은 이 년이
다.
"같이 가요!"
사무린은 여운휘의 뒤를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
려고 하는 이 마당에 사무린은 여운휘를 따라왔다. 여운휘는 뒤에서 들
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키가 많이 컸고, 얼굴에도 조금씩 거무스름한 수염이 자라있다. 옷의 소
매를 찢어 버린 탓에 드러난 팔뚝에는 오 년 간 검을 휘두른 흔적이 여
실히 드러나 있다. 크지는 않지만 돌보다도 더욱 단단해 보이는 근육들
이 여운휘의 팔을 메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운휘를 쫓아오는 사무린 또한 외모가 변한 건 매한가지
다. 예전과는 다르게 성숙해진 얼굴, 조금 더 올라간 눈 꼬리와 더욱
더 붉어진 입술. 이제는 요염(妖艶)한 분위기까지 풍기게 된 사무린은
아직까지 여운휘를 휘어잡지 못한 탓에 조급해졌다.
오 년 동안 끈덕지게 붙었거늘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말대꾸조차 해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없는 사람처럼 취급
하는 것도 다반사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일 년 안에는 자신의 것으로 녹여 놨어야 정상이거
늘, 녹이기는커녕 본인이 다급해서 녹아 죽을 마당이다.
벌써 사 차 관문도 끝나고 오 차 관문에 이르게 됐다. 아직까지는 그래
도 견딜 만 하지만 나중에 단 하나만 살아 남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
기 전까지 사무린은 여운휘를 반드시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놔야 했다.
오 차 관문은 산 속에서의 생활이니 단 둘이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
을 거라는 판단에 사무린은 여운휘를 쫓아 온 것이다. 몸을 줘서라도 우
선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놔야 나중에 살 수 있다.
검 실력이 자신이 낫다고 해도 여운휘를 같은 편으로 끌어 들여야 하는
마당인데, 검 실력 또한 여운휘에게 미치지 못한다. 여운휘는 천재다.
타고났다고 밖에는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검술을 익힌
다.
사무린 또한 사혼에게 대단한 재능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여운휘에 비
한다면 자신은 평범할 뿐이었다. 또 사무린은 여운휘가 지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내공이 얼마나 되기에 그토록 움직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일까?
분명 여운휘가 익힌 건 무상회천진결이라는 시험관들조차 고개를 젓던
심법이 아닌가. 사무린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심법을 가
지고 자신보다도 더 체력이 월등히 빼어 날 수 있는지.
이번 오 차 관문에서 여운휘를 사로잡지 못하면 사무린은 다음 관문에
서 죽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성공해야 해. 반드시.'
사무린은 여운휘에게 다가오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뭐냐."
"같이 가요. 혼자 다니면 쓸쓸할 것 같아서요."
"귀찮아. 넌 네 갈 길을 가. 나도 내 갈 길을 갈 테니."
오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뚝뚝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 무뚝
뚝한 얼굴을 부수어 놓고 싶었지만 사무린은 일단 참았다. 이제는 연기
에도 익숙해진 그녀답게 순간 이는 화도 겉으로는 결코 표현하지 않을
수 있었다.
변한 건 외모뿐만이 아니다. 더욱 독해졌고, 연기도 늘었다.
"음식 하실 줄 아세요?"
"아니, 하지만 어차피 자급자족(自給自足)해야 한다면 동물을 잡아서 구
워 먹으면 돼. 햇빛이 제대로 비치지 않아서 맛은 더럽게 없고, 드물긴
하지만 과일도 따먹으면 되고."
"제가 당신한테서 들은 말 중에서 지금 하신 게 가장 긴 것 같네요."
언제나 짧게 대답하는 여운휘다. 그런 그에게서 이 정도로 긴 말을 들었
다는 사실이 재밌기라도 한 듯이 사무린은 웃었다. 그렇지만 이 한 마디
조차 친근하게 다가서기 위한 사무린의 계책일 뿐이다.
"저희 둘이 같이 있는 다면 아마 아무도 우리를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어때요? 구미가 당기지 않아요?"
오 년 동안 사무린이 여운휘에 대해 안 것이 몇 개 있다. 귀찮은 걸 싫
어하고, 말수가 적다는 정도. 말이 없으니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사무린은 여운휘가 귀찮은 걸 싫어한다는 것을 이용했다. 그렇지만 여운
휘는 자기에게 덤빌지도 모르는 그들보다 지금 앞에서 떠드는 사무린이
더 귀찮았다. 시끄럽게 떠드는 입을 무엇인가로 막아 버릴까 하는 욕망
이 강렬하게 들 정도로.
"네가 더 귀찮으니까 당장 꺼져."
"정말 너무하네요. 그래도 오 년 동안 함께 한 동료고, 제 마음을 모르
시는 것도 아닐텐데……"
여운휘도 사무린이 자신에게 접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게 호감 때문
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확
실했다. 분명히 같이 다닌다면 편한 점도 있겠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는
다.
사무린이 처음 말을 걸었을 때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녀
에 대한 자신의 판단은 뱀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도저히 마음을
알 수가 없었지만 예전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을 거라 여운휘는 생각했
다.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
귀찮았지만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따라오든지 말든지 어차
피 상관 안 하면 그만이니까. 여운휘는 천천히 산 쪽으로 올라갔다. 앞
으로는 지급 된 제대로 된 길이의 검과, 옷 몇 벌로 이 년을 버텨야 한
다.
이곳은 맹수를 잔뜩 풀어 둔 탓에 조금만 방심을 하면 사방에서 맹수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적은 맹수뿐만이 아니다.
'인간도 적, 맹수도 적. 한시라도 빈틈을 허용하지 않게 하기 위한 훈련
이군. 거기다가 어떤 상황에라도 적응 할 수 있게 하려는 이 훈련……
이곳에서 살아 나가면 도대체 뭘 하게 하려는 거지.'
여운휘는 궁금했다. 지금 까지 한 훈련으로 이곳에서 나가 무슨 일을 하
게 될지. 삶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여운휘는 이곳에서 어서 나가고 싶었
다. 하지만 아직 사곡에서의 생활은 많이 남은 상태였다.
여운휘는 밤이 되자 나무쪽에 짐을 놔두고 동물 사냥에 나섰다. 그리고
그 옆을 사무린이 바짝 쫓았다. 여운휘에게 동물을 잡는 것은 별로 어려
운 일도 아니었다. 맹수 하나 만나지 않고 근처에서 토끼 한 마리를 잡
은 여운휘는 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불을 지폈다.
옆쪽에 자리를 잡은 사무린 또한 자신이 잡아 온 토끼의 가죽을 벗기고
불 위에 올렸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가 부서지고 있었다.
조용히 불을 응시하고 있던 여운휘가 어깨에 기대어 논 검을 살며시 잡
았다.
그리고 미처 다른 행동을 하기 전에 여운휘의 검이 뒤로 향하며 나무를
찔렀다. 검을 집어 던짐으로써 나무를 꿰뚫어버린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
어나 나무에 박힌 검을 뽑았다. 나무 건너편에서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검 끝에는 붉은 색 피가 뭍은 상태였다.
"오는 놈까지 봐 줄 정도로 난 자비롭지 않아."
찾아다니면서 죽일 생각 따위는 없다. 하지만 다가와서 자신을 죽이려
한 상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운휘는 자리에 앉아 지핀 불을 끄고
는 토끼의 다리 부분을 잡아뜯었다.
'불은 멀리서도 보이기 때문에 사람을 꼬이게 하는 군. 그리고 끄고 나
서도 연기 탓에 위치가 발각되겠어.'
누가 다가오던 상관은 없었지만 여운휘는 불을 다시 지피지 않았다. 사
무린은 어둠 속에서 묵묵히 토끼 고기를 뜯는 여운휘를 바라보며 도통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년 동안 배워야 할 것은 단순한 자급자족이 아니라 추적술과, 자신
의 움직임을 감춰야 하는 은신술이다.
그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여운휘였다.
아홉이었던 수는 여운휘의 손에 의해 한 명이 줄어들면서 여덟으로 변했
다. 그리고 그 날 밤, 또 다시 우상후의 손에 한 명이 목숨을 잃으며 남
은 사람의 수는 일곱이 됐다.
"클클, 이것 재미있는데?"
엄청나게 덩치가 큰 우상후는 죽은 자를 난도질하고 나서 즐겁다는 듯
이 웃어 제쳤다. 온 몸이 피로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후는 유쾌했
다. 커다란 덩치에 산발을 한 우상후는 피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으, 으하하하!"
우상후는 자신의 힘에 천천히 먹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주화입마(走火入
魔)의 초기 단계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살아 남았던 자들은 그 동안 배웠던 검술을 다듬
었고, 또한 추적술과 은신술, 살아가기 위한 몇 가지 잡다한 것들을 익
혔다. 그리고 마침내 이 년이라는 시간이 끝났을 때, 살아 남은 것은 여
운휘와 사무린, 우상후,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검을 익힌 세 명의 여
인 중 한 명인 혜린이라는 여자 이렇게 단 넷이었다.
산을 울리는 신호에 몸을 감추었던 그들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 있는 것을…… 축하한다."
풍유랑은 네 명의 생존자를 보며 말했다. 풍유랑은 그 말을 마치고는 살
아 남은 네 명을 이끌고 또 다시 어딘 가로 향했다. 이번에 이르게 된
곳은 사곡의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동굴 같은 곳이었다.
"너희들은 아직 경공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물론
검술을 익히면서 경공이야 대충 배웠겠지만 그 대충 이라는 게 문제다.
여기 있는 이 책을 한 권씩 줄 테니, 모두들 한 달 안에 익히도록 해
라."
풍유랑은 품속에서 네 권의 책을 꺼내 던졌다. 모두가 똑같은 경공이
다. 이제는 성인으로 변해 버린 그들은 책을 집어 들고 뒤로 물러섰다.
"그럼 난 이만 갈 테니, 한 달 후에 보도록 하지. 그 때에는 새로운 관
문에 들어서게 될 거다."
말을 마친 풍유랑은 동굴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이곳엔 이제 네
명의 생존자들 밖에 없다. 여운휘를 바라보며 우상후는 '킥킥' 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예전에 산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만 우상후는 상대하기
꺼려지는 마음에 여운휘를 피했던 적이 있다.
조금씩 미쳐 가고 있는 우상후였지만 아직 정신은 남아 있던 것이다.
"여어, 여전히 얼굴 표정은 무뚝뚝하군 그래."
우상후는 아직도 여운휘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리고 그건 여운휘도 마찬
가지였다. 다른 게 있다면 우상후는 여운휘의 이름을 알 기회가 없던 거
고, 여운휘는 관심이 없던 것의 차이다.
"지금 내 말이 무시 된 건가? 킥킥."
아무런 대답이 오지 않자 우상후는 다시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내 말에 답해 이 개자식아!"
우상후의 발이 땅을 부수며 들어갔다. 쾅 하는 굉장히 커다란 소리가 동
굴을 메웠지만 여운휘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우상후의 입술이 치켜
올라가며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화가 솟구치는 것이다.
예전과는 다르다는 생각에 우상후는 앉아 있는 여운휘의 얼굴을 향해 발
을 휘둘렀다. 우상후의 발은 빨랐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그런 발을 한
손으로 잡아냈다.
"꺼져, 멍청아."
여운휘의 발이 우상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뒤에서 충격을 받은 우상후
는 그대로 얼굴을 땅에 처박았다.
우상후의 입과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왼손으로 입을 감싸 안은 우상
후는 엎어진 채로 여운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여운휘
는 묵묵히 앉아서 책만을 바라보았다. 마치 우상후라는 존재 따위는 취
급도 안 한다는 듯이.
우상후는 화가 솟구쳤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
겠는가. 우상후는 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분해도 어쩔 수 없는
건 없는 것이다. 여운휘가 자신 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상후는 직감적으
로 느꼈다.
아직은 아니다. 괜한 오기로 덤벼들었다가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상후는 우선 분한 마음을 묻으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분하다! 제길…… 하지만 내 손에 도가 잡힌다면 그 때는 상황이 달라
질 것이다!'
분했다, 너무나도 많이.
"뭘 봐!"
애꿎은 화는 눈치를 보고 있던 혜린에게로 향했다.
풍유랑은 정확하게 한 달이 되는 날 동굴을 찾았다. 한 두 명 정도 죽었
을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예상외로 동굴 안에는 넷 모두 아무 이상 없
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흐음, 예상외로군. 한 둘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상후의 성격에 대해선 익히 들은 풍유랑이다. 도를 가리켰던 삼 호가
위험 인물이라며 자신에게 우상후에 대해서 설명해 준 적이 있다. 우상
후가 있었기에 하나 둘은 분명히 죽어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
건 예상 밖이다.
삼 호에게서 들은 우상후에 대한 설명은 살육을 즐긴다는 거다. 피를 보
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 밖에 모르는 과격한 자. 그런 그가 어째서 이곳
에서는 얌전했는지 풍유랑은 궁금했다. 그렇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감정
은 접어야 한다.
우선은 자신의 본분(本分)이 먼저다.
"예상 밖의 일이 벌어져 약간은 놀랍지만 어쨌든 다음 관문에 들어서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거다."
육 차 관문을 치르기 위해 풍유랑은 네 명을 이끌고 움직였다.
이번 관문은 여태까지 배운 모든 걸 접목해서 일 대 일 비무를 펼치는
것이다. 당연히 지는 쪽은 죽게 되기 마련, 이 번 관문이 지나면 살아
남을 아이의 수는 두 명으로 줄게 될 것이다.
'서서히 이 일도 끝나 가는 군.'
이번 관문이 끝나면 살아 남게 될 아이의 수는 두 명으로 줄어든다. 그
러면 이제 그 둘 중 단 하나만 가려내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번 관문
이 아닌 다음 관문이었다. 잘못하게 될 시엔 둘 다 죽어 버릴지도 모르
는 관문이기에 상당한 주위를 요하는.
둘 모두 죽어 버리면 이제까지 한 노력이 헛수고가 될 것이다. 거기다
가 단순히 헛수고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게 된
다. 명령을 하늘처럼 받드는 풍유랑으로서는 도저히 있어선 안 되는 일
이다.
아이의 수를 반으로 줄여야 하는 관문인 육 차 관문은 넓은 비무장에서
벌여야 했다. 이제 아이들은 예전과는 다르다. 좁은 공간에서 시합을 벌
일 정도로 아이들은 약하지 않다. 잘못하면 위력에 내려앉을 지도 모르
는 동굴을 피한 이유는 그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대결을 벌이고 두 명만 데리고 가는 게 편한 건 당연
하다. 하지만 아이들이 강해진 이상 그럴 수는 없다.
데리고 왔을 때는 분명히 무공도 모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살아 남은 이 넷은 고수가 되어 있
다. 평범하게 무공을 익힌 아이들로서는 도저히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
로 높은 위치에 이들은 서 있는 것이다.
지금 살아 있는 이 네 명과 비슷한 나이대의 무인 중에 그 누가 이렇게
혹독하게 훈련을 받았겠는가. 양지 바른 곳에서 자란 식물과 제대로 햇
빛조차 비추지 않은 곳에서 자란 잡초는 다르다.
아마 비슷한 나이 대에서는 이들의 상대가 될 만한 자들은 없을 것이
다. 그나마 상대할 적수가 몇 있다 할지라도 그들조차도 이들에 비하면
몇 수 모자랄 게 분명했다.
지금 살아 남은 넷은 생명을 걸고 이곳까지 기어 올라왔다. 당연히 그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네 명 모두를 살려서 데리고 나가고 싶지만 살게 될 것은 하나다. 하
나라도 더 살려서 데리고 나가고 싶다. 그게 풍유랑이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가 사곡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그곳'을 뚫을 수 있겠는
가.
꿈은, 꿈일 뿐이다.
네 명의 생존자들이 도착한 곳에는 약 스무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있었
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비무대 하나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운휘는 비무
대를 보는 순간 이번 관문이 어떠한 건지 알아차렸다.
'비무로군.'
여운휘는 비무대를 보고도 담담했지만 사무린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
다. 여운휘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사무린은 너무나 잘 알았다. 우상후
든 혜린이든 상관없지만 여운휘만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다른 자들이라면 모를까 여운휘만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이 년 동
안 단 둘이 계속 함께 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남자다. 목욕을 하
는 척 하면서 유혹한 적도 있지만 오히려 자기를 내버려두고 갈 정도로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사무린은 초조함을 느꼈다. 이번 관문을 운 좋게 벗어난다고 해도 나머
지 하나는 여운휘가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죽음은 확정 된 것이 아
닌가.
분명히 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녹기는커녕 얼음장이다. 마치 넘
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앞에 있을 때의 기분을 사무린은 절실히 느꼈
다.
"두 명씩 비무를 펼친다. 알겠지만 지는 쪽은 죽는 거다."
풍유랑은 여운휘와 우상후를 가리키고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둘 나와."
여운휘는 아무 말 없이 비무대에 올라섰다. 반면 여운휘와 상대하게 된
우상후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
이지 않았다. 두려움이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도만 들면 상대도 아니
라고 누누이 생각해왔다.
허나, 막상 상대를 할 생각을 하니 몸이 굳는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그저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이다.
"뭐 하는 거냐. 싸워보지도 않고 기권이냐?"
"아니!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두렵다. 당장 도망가서 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문제는 도망가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뒤로 물러서도 죽고, 앞으로 나아가도 죽을 거
다. 그나마 살 확률을 만들려면 앞으로 나아가서 싸워야 한다.
나가서 싸워야지 그나마 살 수 있다는 것을 우상후는 잘 알았다. 다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알면서도 몸이 거부하는 것이다.
우상후는 힘겹게 비무대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
는 여운휘가 마치 저승사자 같아 보인다.
"간다."
여운휘가 검을 뽑지도 않은 채 검집을 들어 올렸다. 그에 맞춰 살기 위
해 우상후도 자신의 도를 빼들고 여운휘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전살세(電殺勢)를 펼치려 하고 있다. 전살세는 빠른 속도의 쾌
검이 주를 이루는 검법이다. 또한 전살세 발도(拔刀)의 속도는 가히 번
개를 연상케 할 정도다. 여운휘가 지금 보이려 하는 것은 전살세의 발도
다.
왼손으로 검집을 비스듬하게 잡은 여운휘는 다른 손을 검의 손잡이에 가
져다 댔다. 우상후는 얼굴에 한 줄기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주화입
마에 빠져 이제는 슬슬 미쳐 가는 우상후였지만, 여운휘라는 존재를 앞
에 두고 그는 공포에 잠겼다.
여운휘의 검이 검집을 빠져 나오며 우상후를 향했다. 몸에 있는 모든 신
경을 여운휘에게 쏟고 있던 우상후는 도로 검을 걷어 냈다.
'크크, 제기랄……'
손이 얼얼하다. 원래 같았으면 검을 쳐내는 순간 폭풍 같이 밀어 쳤을
것이다. 그렇지만 손이 떨릴 정도로 강한 일격에 우상후는 오히려 절망
감을 맛봤다.
쳐낸 건 자긴데 오히려 밀린 기분이다. 이곳에서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
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죽는다고? 여태까지 어떻게 버텨왔는데 죽어? 내가? 마을 아이들의 대
장이었던 나 우상후가 저런 놈에게?'
우상후는 점점 더 미쳐가고 있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미치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천천히 웃음을 흘리던 우상후는 자
신의 도를 자신만만하게 어깨까지 들어 올렸다.
"죽어!"
무모할 정도로 우상후는 일직선으로 달려들며 도를 내리쳤다. 초식 같
은 건 없다. 정신이 없는 우상후는 단순히 내공을 실은 채로 강하게 내
리친 것뿐이다. 여운휘가 그런 공격에 맞을 리가 있겠는가?
살짝 비껴 섬으로서 도를 피한 여운휘는 옆구리를 향해 자신의 검을 날
렸다.
"크아악!"
단순한 직감으로 우상후는 몸을 비틀며 여운휘의 검을 피해냈다. 옷이
찢기며 살이 베여 피가 흘러 나왔지만 우상후에게 그런 것을 신경 쓸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상후는 다시 움직여야 했다. 여운휘의 검
을 피해.
육중한 몸을 지녔지만 우상후는 힘겹게 공중으로 솟구쳤다. 여운휘의 검
을 피하기 위함이다. 공중으로 솟구친 우상후는 떨어지면서 또 한 번 강
하게 도를 휘둘렀다.
콰앙!
비무대의 일부가 박살이 나며 우상후의 도가 그곳에 들어 박혔다. 도의
움직임이 둔화되는 순간이다. 바로 이 순간이 기회라는 것을 여운휘는
느꼈다.
검은 목표를 놓치지 않았다. 여운휘의 검이 순식간에 우상후의 등 쪽을
통해 앞으로 삐죽 뻗어 나왔다. 우상후는 여운휘가 검을 뽑아 내자 앞으
로 털썩 쓰러졌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누구의 승리인지는
이미 명백해졌다.
여운휘는 비무대에서 내려오기 위해 몸을 돌렸다. 우상후의 가슴에서 피
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이제 곧 우상후는 숨이 끊어질 것이다.
"크아악!"
그때였다. 움직이지도 못해야 정상일 우상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
운휘를 향해 도를 치켜들고 달려간 것이다. 우상후의 고함소리에 고개
를 돌렸던 여운휘는 묵묵히 달려드는 우상후를 바라보다가 가까워지는
순간 전살세의 발도를 사용하였다.
샥, 착!
단 두 가지의 소리만이 들렸다. 검집에서 검을 뽑고, 그 후에 넣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달려오던 우상후의 움직임은 멈춰 있었다. 우상후의 목
이 떨어졌다. 그리고 손에 잡혀 있던 도도 땅으로 떨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풍유랑을 비롯한 시험관들조차 간신히 눈으로 잡았을 정도의 쾌검이다.
쾌검으로 유명한 사혼조차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속도다. 분명히 우상후
는 강자였다. 이렇게 쉽게 질 정도로 상대가 약했던 것이 아니다. 단지
여운휘가 터무니없이 강했을 뿐이다.
'나조차 피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군……'
풍유랑은 사혼의 쾌검을 본 적이 많다. 하지만 저 정도까지의 속도는 난
생 처음이다. 저 정도라면 자신조차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죽은 녀석 치워라. 승자는 여운휘다. 시체를 치우면 나머지 둘 올라와
라."
사무린은 운이 좋았다. 최악의 상대 두 명을 모두 피하고 가장 수월한
상대를 만난 것이다. 단지 문제라면 이번 관문을 벗어나면 그 후에 대결
해야 할 상대는 여운휘라는 거다. 사무린은 여운휘를…… 이길 수 없다.
'제길……!'
비무대 위로 올라서고 있지만 마음은 딴 곳에 있다. 지금 상대는 혜린이
지만 사무린은 여운휘와 싸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다. 앞에 있는 혜
린은 같이 검을 배울 때부터 봐 왔다. 실력도 밑이고 내공도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
혜린은 싸워야 될 상대지만 적수(敵手)는 아니다. 적수란 건 어느 정도
실력이 비슷한 상대에게나 쓰는 말이다. 혜린은 사무린에게 그런 존재
가 될 수 없다.
사무린과 혜린 둘 다 검을 배웠다. 전살세가 쾌검이라면 금계검법은 무
거운 중검이다. 사무린은 전살세를 사용하려고 하였고, 혜린은 금계검법
을 사용하려고 한다.
"합!"
기회를 노리던 혜린이 수평으로 검을 세우고 들어왔다. 사무린은 검을
왼쪽으로 한 번 쳐내고는 빠르게 오른쪽을 다시 때렸다. 검이 혜린의 가
슴에서 멀어졌다.
이번에는 사무린이 열려 있는 혜린의 가슴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순
식간에 꿰일 것 같았지만 혜린은 발로 서둘러 검의 배(背)를 걷어찼다.
궤도를 벗어난 검을 서둘러 수습하고 다시 한 번 혜린의 몸을 노렸지만
이미 그녀의 검은 제자리를 찾은 상태였다.
캉! 카캉……!
사무린이 뒤로 물러서며, 혜린은 앞으로 나아가며 수 차례 검을 휘둘렀
다. 둘의 대결은 막상막하의 양상(樣相)을 띠었다. 분명히 사무린은 혜
린보다 고수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둘의 실력은 엇비슷해 보인다.
그건 바로 사무린의 계책이었다.
사무린은 자신 실력의 칠 할을 숨기고 삼 할 만으로 혜린을 제압하려는
것이다. 여운휘에게 방심을 이끌어 내어 단 한 순간의 기회를 노리려는
계획이다. 물론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여운휘라는 존재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남자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방심을 하거
나 할 멍청이가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이것을 빼고 사무린은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있는 유일한 방법
이기에, 사무린은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에 목숨을 걸었다고 봐도 무방
했다.
'여운휘, 저 놈은 지금 내가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몰라.'
여운휘는 알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항상 자신의 일에만 신경을 쓰는 그
이기에 사무린은 거기에 희망을 걸었다. 여운휘가 자신의 제대로 된 실
력에 대해 본 적이 없었기를.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운휘는 사무린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여운
휘는 무신경한 사람이다. 특별히 주변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
러나, 그러면서도 여운휘는 주변의 모든 것을 머리에 박아 놓는다. 그래
서 두려운 거다, 여운휘라는 존재는.
실력을 숨기고 상대하는 것이기에 결투는 조금 늘어졌지만 마침내 사무
린의 검이 혜린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잘 가요."
사무린이 말했다.
혜린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사무린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손을 피해
서 옆을 스쳐 지나갔다. '부르르' 떨리던 혜린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
다.
"좋아, 네 이름이……"
"사무린이에요."
풍유랑은 여운휘의 이름은 알지만 사무린의 이름은 몰랐다. 사무린은 아
까 여운휘의 이름은 불렀던 것을 생각해 내며 시험관조차도 그를 의식하
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번 육 차 관문을 통과한 두 사람은 여운휘와 사무린이다."
통과는 했지만 사무린은 기쁘지 않았다.
"감독관님 다음 칠 차 관문은 뭐죠?"
사무린은 우선 다음 관문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어떻
게 방책을 세워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궁금한가? 마지막이 될 칠 차 관문은 이곳을 사곡이라고 불리게 한 장
소지. 기관진식으로 가득 찬 곳, 마교에서는 그곳을 사림(死林)이라고
부른다."
사곡에 존재하는 미지의 장소 사림.
그곳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기관진식들이 설치되어 있다. 기관진식을
가동시키게 된 후에 그곳을 끝까지 지나갈 수 있는 자는 마교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 정도로 사림의 기관진식은 많기도 많기로서니 그
크기나 위력도 엄청나다.
"너희 둘 중에서 오래 버틴 자가 살아 남는 거다. 한 사람이 죽을 때까
지 기관진식은 끝나지 않는다."
여운휘와 바로 싸우는 것보다는 낫지만, 사무린은 여전히 자신이 없었
다.
'여운휘가 기관진식에서 피하고 있을 때 기습적인 공격을……'
사무린은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여운휘는 먼저 건드리지 않는
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공격해 들어오면 반드시 상대를 죽여 놓는 자
다. 그건 저번 이 년 간 산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너무나 잘 알아버린 사
실이다.
차라리 여운휘가 죽는 걸 기다리는 것이 사무린에게 안전했다.
"사림의 구역은 네 개로 나뉘어져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기관진식도
더욱 위협적일 것이다. 아, 이건 만약인데 만약 너희 둘 중 하나라도 사
림의 가장 끝에 있는 곳에 도착해 그곳에 놓여져 있는 책을 가져온다면
둘 모두 살 수 있다."
사무린은 답답했던 가슴이 일순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사무린의 머리
는 빠르게 움직이며 모든 계산을 마쳤다.
"물론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곳의 기관진식은 나조차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보통이 아니거든. 어쨌든 너희 둘은 나와 함께 사림으로 가자."
불가능해도 사무린에게 상관없다. 아니, 불가능하면 오히려 사무린에게
는 나았다. 방법이 있다. 여운휘를 이용해서 살아 날 방법이.
풍유랑을 비롯한 무인들이 경공을 사용하였기에 그 뒤를 따르는 여운휘
와 사무린도 경공을 펼쳤다. 사림은 그들이 있던 곳과는 꽤나 멀리 떨어
져 있는 것이다. 나무가 너무나도 많았기에 한치 앞도 제대로 분간이 되
지 않을 정도로 사림은 나무가 가득했다.
"앞으로 조금 나아간다면 그나마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곳을 들어서
고 한 시진 후부터 기관이 작동할 테니 방심은 금물이다. 그리고 먹을
것은 사림 곳곳에 배치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음식을 집어 들면
바로 화살이 날아오거나 하는 경우도 있을 거다. 그 점 주의하도록."
풍유랑은 사무린과 여운휘에게 연습용 검이 아닌 꽤 좋은 검을 두 자루
와 옷 몇벌을 건넸다.
"무운을 빈다. 그리고 너희들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알기 위해 한 사
람에게 우리 쪽의 무인 하나가 배치 될 것이다. 몸을 숨기고 있을 테니
특별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아마 칠 년 안에는 끝날 거다. 두 사람 모
두 오래 버틴다면."
옷 몇 벌과 검 두 자루를 가지고 여운휘와 사무린은 사림의 초입에 들어
섰다. 아직은 기간이 발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시진이 지나면 그때부
터는 기관이 쏟아질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먹을 것을 찾아 돌아 다녀
야 한다. 그러다 보면 무수히 많은 기관과 접하게 될 것이다.
사무린은 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운휘, 어떻게 할거죠?"
"뭐가."
"우리 둘 모두 버티려고 한다면 이곳에서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너무 늦는 게 아닐까요?"
아직 기관진식을 접한 적은 없지만 사무린은 자신만만했다. 단순한 버티
기라면 이 둘은 정말 오랫동안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다. 여운휘는 상대
가 공격하지 않는데 찾아가서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무린도
여운휘를 공격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이 관문은 길어지게 될 것이다. 여운휘도 사무린처
럼 말은 안 했지만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건 매한가지다.
"차라리 빨리 네 구역 모두를 통과하는 건 어떨까요?"
"……"
말이 없다. 여운휘는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좋다, 싫다를 딱 구분하는
여운휘이기에 싫었다면 바로 거절을 하고도 남았다.
"그게 낫겠군."
"저도 따라갈까요?"
좋다고 하는 순간 이미 사무린은 모든 계획이 성공했음을 느꼈다. 후에
따라 가냐고 물은 것은 이미 여운휘를 판단한 탓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니, 귀찮아."
사무린은 여운휘를 너무 잘 알았다. 사무린의 계획대로 여운휘는 혼자
네 개의 관문을 뚫겠다고 나선 것이다. 여운휘가 죽으면 자동 통과고,
죽지 않고 네 구역을 모두 뚫어도 통과가 되는 셈이다. 물론 감독관이었
던 풍유랑조차도 뚫을 수 없다고 한 기관이니 여운휘가 뚫을 수 있을 턱
이 없다고 사무린은 생각했다.
이 둘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감독관들은 여운휘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한 마디로 네 개의 구역을 뚫어 보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 두 감독관 중 하나는 풍유랑이었다. 일부로 여운휘를 따라가겠다고
나선 그는 여운휘의 행동에 혀를 찼다. 살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불가능
한 것에 목숨을 거는 여운휘가 바보 같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넌 그랬지. 불가능했던 일들을 해내며 넌 살아 있
다. 이번에도 또 다시 불가능을 깨 보거라. 허나, 만만치는 않을 것이
다.'
여운휘는 사무린과 떨어지더니 혼자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길에 음식들이 많이 있었지만 여운휘는 그것들을 챙기지 않았다. 아직
기관이 작동하지 않은 탓에 사무린은 뒤쪽에서 서둘러 음식들을 챙기고
있었지만 여운휘는 아니었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 음식은 필요 할 때마다 구하면 된다.
사무린은 여운휘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녀는 뒤쪽에서 음식들을 챙기며
한 구석에다가 조그마한 구멍을 팠다. 앞으로 이 근처를 전전하면서 여
운휘가 죽기를 기다리려고 하는 거다.
반면 여운휘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 무엇도 상관하지 않은 채.
약속 한 한 시진이 지났다.
여운휘와 사무린의 거리는 상당히 벌어졌다. 이제 사무린은 지키기 위
한 싸움을, 여운휘는 살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기이잉~!
괴이한 음성이 들렸다. 기관이 작동되는 소리다. 여운휘는 앞을 바라보
았다. 수십 개에 이르는 검이 하늘에서 아래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위치로 떨어지는 검들을 바라보며 여운
휘는 검을 뽑았다.
"와라."
하늘을 덮은 빛은 하늘 아래에서 이는 하나의 빛과 충돌했다.
사림의 숲을 덮고 있는 나무들의 잎이 바람에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