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휘, 검을 들다.
순수한 내공만의 싸움. 서로를 향해 자신의 내공을 뿜어내어 결국 상대
가 죽게 되기 십상이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지 만 끝나는 관문, 그것
이 삼차 관문이 무서움이었다.
여태까지 지나온 두 개의 관문은 그렇지 않았다. 일차 관문은 서로 싸우
긴 했지만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파
벌 같은 것이 생겼다. 그리고 이차 관문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자신과
의 싸움에서만 이기면 살 수 있는 관문이라는 거다.
하지만 세 번째 관문은 자신의 바로 옆에 있는 자와 죽일 지도 모른다
는 공포 탓에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게 됐다.
일주일이란 시간은 너무나 짧다. 천 오백 일이라는 시간도 여운휘에겐
짧았는데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정말 쏘아진 화살과도 같았다.
단상 위에 풍유랑이 오르자 아이들의 표정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풍
유랑이 단상 위로 올라가는 건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
들은 정확한 시간의 변화는 모르지만 언뜻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는 사실 정도는 직감(直感)할 수 있다.
"전에 예고했던 바대로 오늘이 삼차 관문을 겪어야 하는 날이다. 상대
를 정해야 하니 우선 스물 세 명 먼저 앞으로 나와라."
쭈뼛거리는 아이들을 밀치고 여운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우상
후도 질 수 없다는 마음에 여운휘의 뒤를 따랐다.
그 둘이 나아가자 사무린도 주저 없이 앞으로 나갔다. 사무린은 여운휘
처럼 당당해서도, 우상후처럼 질 수 없는 오기 탓에 나간 것도 아니다.
그녀는 계산을 했다.
부른 사람의 수는 스물 세 명이다. 중요한 건 사람의 숫자가 맞지 않으
니 이들 끼리 싸움은 불가능하다는 거다. 이 조와 새로 만드는 한 조끼
리 붙이게 될 것이라고 사무린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쪽 조에
들어가야 한다. 반대 편 조에 들어섰다가 여운휘나 우상후를 만났다가
는 죽을지도 모른다.
사무린의 계산은 맞아 떨어졌다.
"여기 이제 스물 세 명 모두가 모였으니 나머지 모두는 이쪽에 서라."
서로를 마주 보는 상황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를 보고 몇몇 아이들의 표
정은 일그러졌다. 자신의 앞에 강한 아이가 있는 탓이다.
"두 번째로 만들어진 조에서 가장 앞에 있는 아이 나와라."
그 아이의 앞에 있던 상대는 가장 먼저 나온 여운휘였다. 덕분에 얼굴색
이 퍼런 색으로 변해있을 정도로 아이는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렇지
만 그 아이의 상대는 여운휘가 아니었다.
"저 스물 세 명 중에서 네가 상대하고자 하는 놈을 찍어."
"예?"
너무 겁을 집어먹고 있던 탓에 아이는 풍유랑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
고 반문했다.
"저 스물 셋 중에서 네가 아무나 선택하라고."
그제야 알아들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만만해 보이는 아이를 골라
잡았다. 그렇게 서로를 죽이는 관문이 시작됐다.
여운휘는 자신의 차례(次例)가 오지 않자 아예 자리에 앉아 버렸다. 앞
에서는 두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서로를 죽이려고 손톱을 드러내고 있
다. 이제 이쪽 조에 남은 아이는 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열 여덟 명 중에서 열 한 명은 살았고 일곱 명은 죽었다. 그 말
은 곧 저쪽 조는 열 여덟 명 중에서 일곱 명이 살고 열 한 명이 죽었다
는 말이 된다.
"커억……"
한 아이가 피를 쏟고 쓰러지자 이기게 된 아이가 기쁨에 환호성을 내질
렀다. 피만 봐도 놀라 소리 지를 나이의 아이인데, 그 아이는 사람을 죽
이고도 기뻐한다. 사곡에 있는 아이들은 이제 아이라고 보기 힘들다.
아이의 순수함을 잃은……
상대편 쪽에 남은 다섯 명 중 한 아이가 호명(呼名)되어 앞으로 나섰
다. 배다른 남매 중에 오빠다.
그는 사무린을 찍었다. 남은 다섯 명 중에서 가장 만만해 보이는 탓이
다. 이제나저제나 하던 차에 상대방이 자신을 지목하자 사무린은 웃는
얼굴로 걸어 나갔다.
여기 있는 모두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난 상태다. 이용해 먹을 놈과, 그
렇지 않은 놈. 그 중에서 저 남매의 오빠는 이용해 먹을 가치가 없는 자
였다.
사무린의 웃는 얼굴에 이미 삼차 관문을 통과한 연소연은 왠지 모를 불
안을 느꼈다. 자신의 오라비가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예상
은 적중했다.
내공 대결이 시작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자신의 배다른 오라버니인
연태후가 쓰러졌다.
"이, 이…… 갈보 같은 년!"
이 안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 밖에
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자신의 오라버니였다. 연소연은 화가
나서 앞뒤 가리지 않고 사무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몇 보 딛지도 못하고 연소연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가슴에 어
느 센가 앵두 만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가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죽었다, 연소연은.
"앞으로 이런 행동을 하면 어떻게 될지 좋은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아이를 죽인 것이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여태까지 죽인
아이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안 죽였다 뿐이지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하며
풍유랑은 자기 자신을 달랬다. 승리에 기뻐하던 아이들의 표정도 이 순
간적으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다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음!"
이번에 나온 아이는 꽤나 덩치가 좋은 아이로 예전에 사곡에 들어오기
전에 외문기공을 배운 적이 있다. 그는 남은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한숨
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남은 네 명의 아이는 우상후와 여운휘를 비롯한 몸이 좋은 두 명의 남자
였다. 자기가 아는 바로는 자신은 저 몸이 좋은 두 명의 남자에게도 이
기지 못한다. 하물며 우상후는……
여운휘는 아직 싸우는 것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건들지 않
는 존재인 탓에 자신도 덩달아 상대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누구를 골라야 하는 건가……'
이길 수 없는 셋을 포기한다면 남은 건 여운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진진은 여운휘로 상대를 지목하기로 마음먹었다. 독
방에 들어가기 전에 이상한 심법을 잡았다는 것을 생각해 낸 탓이다. 비
록 구귀심법을 잡지 못해서 천왕심법을 잡았지만 설마하니 감독관마저
그토록 말하던 심법에 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 이리 나와."
우선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생각에 박력 있게 나갔지만 상대는 기가 죽기
는커녕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찮았는데 잘 됐군."
여운휘의 말에 진진은 왠지 모르게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것을 느꼈다.
두 아이는 단상으로부터 약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마주 섰다. 호명 된 여
운휘는 태연한 반면 오히려 지명을 한 진진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여
운휘의 말 때문도 있지만 마주 서서 눈을 보니 왠지 모를 공포가 진진
을 엄습(掩襲)한 탓이다.
'이게 아닌데…… 제기랄! 상대를 잘못 골랐어. 차라리 저 두 놈 중 하
나를 상대하는 게 나았을 텐데……'
그러나 후회하기는 너무 늦었다.
단상 위에 있는 풍유랑의 손이 내려지면 바로 내공 대결로 들어가야 한
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이겨야겠다고 진
진은 마음먹었다.
'최대한 버티다가, 약간 약해지는 순간 번개처럼 몰아 붙인다!'
진진은 풍유랑의 손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이 내려지는 순간 진진은
내공을 분출하려다가 문득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귀가
윙윙거리고, 눈이 붉게 물들었다. 거기다가 입으로 무슨 비릿한 것이 쏟
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뭐지……?"
그게 진진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뱉은 한마디가 되었다. 진진은 자신
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로 죽은 것이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골라서는 안 될 최악의 상대를 진진은 골라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는 목숨을 잃었다.
"다, 다음!"
놀란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풍유랑을 비롯한 이곳에 있는 감독관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이 한 번의 대결로 인해 사무린은 자신이 붙어
야 할 상대를 정했다.
'여운휘, 당신으로 정했어.'
남자를 홀릴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사무린은 여운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삼차 관문이 끝났다. 우상후 또한 질리는 없는 위인이기에 삼차 관문을
거뜬하게 통과했다. 남은 아이의 수는 연소연이 죽어 버리는 바람에 스
물 두 명이 된 상태다.
"수고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이제부터 너희들이 배우
게 될 것은 도와 검이다. 도를 배우고 싶은 아이는 저쪽, 검을 배우고
싶은 아이는 이쪽으로 와라. 아, 그밖에 조나 창 같은 다른 것을 배우
고 싶다면 먼저 손을 들어라."
검과 도가 아닌 다른 것을 배우고 싶다고 손을 든 아이의 수는 네 명이
었다. 풍유랑은 뒤쪽에 있는 자신의 부하에게 손짓해서 데리고 가라고
명령했다. 아이 넷은 풍유랑의 부하에게 이끌려 어딘 가로 향했다.
"자자, 어서 어서 움직여! 도는 저쪽이고 검은 이쪽이다!"
아이들은 서둘러 자신이 배우고 싶은 쪽으로 향했다. 도 쪽에는 우상후
를 포함한 남자 열 명이었다. 여운휘는 검이다. 그리고 사무린과 살아남
은 나머지 여자 두 명 또한 검이고.
도는 열 명, 검은 여덟 명, 그 외가 네 명이다.
"검은 이 자를 따라가고 도는 저기 있는 저 자를 따라가라."
이제부터 진정한 사곡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곳은 겨우 통로에 지나
지 않는다. 사곡은 무척이나 넓다.
풍유랑은 단상 위에 올라서서 멀어져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아이들 모두를 살리면서 마교의 고수로 만들고 싶
다. 하지만 명령인 이상 그럴 순 없다. 풍유랑은 단상 위에서 여운휘를
바라보았다.
'몇 년 후의 네 모습이 기대되는 군. 이번처럼 강해져서 나와라, 여운
휘……'
아직 살아 남을 한 명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풍유랑은 여운휘에게
걸었다.
여운휘를 비롯한 여덟 명의 아이는 앞서 나가는 남자를 따라서 사곡으
로 향했다. 약 일 각 정도를 걷자 천천히 빛이 들어오는 장소가 보였
다. 아이들은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서둘러 다가가려고 했지만 그들
을 이끌던 사혼은 그곳에서 멈추어 섰다.
"너희들은 몇 년 간 햇빛을 보지 못했다. 지금 바로 햇빛에 눈을 노출시
킨다면 눈에 심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하루정도 천천히
적응을 시키다가 나간다. 괜히 햇빛에 잘못 노출됐다가 실명(失明) 되
는 꼴이 없도록 주의해라."
강해지기 위해 아이들은 각자의 병기(兵器)를 잡게 된다. 여운휘가 잡
게 될 병기는 검(劍)이다.
하루 동안 아이들은 사혼이 이끄는 대로 조금씩 햇빛과 거리를 가까이
하며 적응 훈련에 들어섰다. 사곡, 산으로 온통 가려진 곳인지라 해도
빨리 그 모습을 감췄다.
다음 날 오후 즈음에야 아이들은 통로에서 벗어나 정말 몇 년 만으로 햇
빛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햇빛에 기뻐하고 있을 때
여운휘와 사무린만은 오히려 주변 풍경에 눈을 돌렸다.
얼마일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지내야 할 곳이다. 햇빛 정도
야 보기 싫어도 보게 될텐데 굳이 그런 곳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어리
석다고 사무린은 생각했다. 그렇게 서로가 제각각의 마음을 가진 채로
아이들은 각자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날 따라와라. 내가 너희들에게 오 년 동안 검술의 기본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사 차 관문은 그 오 년 동안 계속한다.
상대가 빈틈이 보인다면 죽여라. 그게 이번 사 차 관문이다. 오 년 동
안 살아 남는 자들만 다음 단계로 넘어 갈 수 있다. 알아들었을 테니
더 이상의 질문은 없을 거라고 믿는다."
사혼은 말을 마치고는 따라오라는 말도 없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아이
들은 앞서 걷는 사혼의 뒤를 따랐다.
나무와 풀로 가득한 곳을 걷던 중 이질적이라고 까지 느껴질 정도의 넓
은 공터가 나왔다. 인위적(人爲的)으로 손을 본 듯이 나무가 잘려서 넘
어가 있었고 그 중앙에는 집 한 채가 있었다.
"내가 검을 가지고 나올 테니 너희들은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라."
사혼은 검을 가지고 나오겠다며 집 쪽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사혼이 사
라지자 옆에서 기회를 보고 있던 사무린은 자신의 머리를 묶고 있던 끈
을 떨어트렸다.
"어머?"
여운휘의 앞으로 끈을 떨어트린 사무린은 들으라는 듯이 크게 탄성을 지
었다. 여운휘는 사무린의 탄성에 그녀를 바라보더니 곧 아래에 떨어져
있는 끈을 바라보았다.
'좋았어.'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사무린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남
자를 홀리기 좋은 눈빛을 사무린은 배우지 않고도 터득했다.
그런데 끈을 내려다 본 여운휘는 사무린을 다시 바라보더니 요지부동 않
는 것이 아닌가?
"끈 좀 주워주시지 않을래요?"
이렇게 된 이상 아예 대놓고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다. 사무린이 말
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휘는 힐끔 쳐다만 볼뿐 별다른 행동을 하
지 않았다.
"…… 네 일을 왜 나한테 시키지?"
"당신의 옆에 더 가깝잖아요?"
분명 그건 그랬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이런 일을 도와주는
것이 특별한 일도 아니다.
"고마워요."
귀찮긴 했지만 길게 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주워 주는 게 낫다고 판
단한 여운휘는 끈을 주워 줬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고 끈을 줍는 여운휘
를 보며 사무린은 감사의 뜻을 표명(表明)하면서 다시 한 번 살짝 눈웃
음을 쳤다.
"이름이 뭐죠?"
이제부터 제대로 남자를 홀리기 위한 작업의 시작이다. 우선 남과는 다
르다는 무엇인가를 심어 줘야 한다. 그래서 통성명(通姓名)이 필요하
다.
"여운휘."
"멋지네요. 제 이름은 사무린이라고 해요."
다른 남자였다면 분명히 자신의 얼굴에 혹해서 무슨 말이라도 건네려고
수작을 부릴텐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다. 사무린이 말을 거는 입장이고
여운휘는 거의 무시한다고 봐도 무방(無妨)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하지만 사무린은 지쳐서는 안 된다. 여운휘를 놓친다는 것이 생명을 놓
치게 된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무린에게 여운휘라는
존재는 일종의 담보(擔保) 같은 거다.
계속 눈웃음을 지으며 사무린은 여운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홀렸으면
좋겠지만 그게 힘들 거라는 것은 사무린은 알고 있다.
'그래도 결국엔 내게 넘어오게 될 걸.'
사무린은 지금 바로는 힘들지도 모르지만 결국엔 여운휘를 자신의 손아
귀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웃음짓고 있는 사무린을
바라보는 여운휘의 마음은 그녀의 예측과는 너무나 멀었다.
'뱀…… 이군.'
사무린을 보며 느낀 여운휘의 생각이다. 여운휘는 사무린의 눈에서 마음
을 읽었다. 정확한 상대의 속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대충이나마 상대에
대해 알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더군다나 사무린은 아직 연기가 부족하
다. 말과 눈이 따로 논다.
아무리 힘든 일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인 탓이다.
사무린이 여운휘에게보다 더 접근하려고 하는데 집 안으로 사라졌던 사
혼이 검들을 들고 나타났다. 사혼의 등장을 본 사무린은 더 이상의 접근
은 훗날로 미루고자 마음먹었다.
"자, 한 사람씩 나와서 검을 가져가라. 모든 검은 동일하니 아무거나 잡
아도 상관없다."
모든 검이 같다는 말에 아이들은 아무런 부담감 없이 검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검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양이었다. 일반 검에 비해
강도가 조금 더 좋을 뿐, 특별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생전 처음 검을 잡아 보는 것이라 자신의 손에 느껴
지는 낯선 감촉에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여운휘는 검을 수평으로 들어
옆에 있는 나무에 가져다 댔다. 길이를 재는 것이다.
'완벽하게 일반 검이군. 길이가 엄지손톱만큼 작은 것을 제한다면.'
검을 배웠던 두 명의 여인조차 느끼지 못한 것을 여운휘는 알아차린 것
이다. 그렇다. 그 검은 일반 검에 비해 강도는 좋지만 길이에는 아주 미
세한 차이를 가졌다. 그리고 어린 아이도 알아차린 그 사실을 마교 쪽에
서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또 하나의 관문이라고 보면 된다. 나중에 그들의 손에 쥐어
질 것은 제대로 된 길이의 검이다. 그렇게 되면 검의 간격이 달라진다.
안전한 거리였다고 생각했는데 베일 것이고, 낯설게 느껴지는 검 탓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풍유랑과 마찬가지로 여운휘를 눈여겨보던 사혼은 지금 하는 행동이 어
떠한 것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단순히 검의 길이만 잰 것인가, 아니면 검의 길이에서 부족함까지 느꼈
을까.'
사혼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가 여운휘가 아니고서야 어찌 본인밖에 모
를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천천히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산으로 온통 가려진 곳이라 해가
빨리 사라지기에 밤도 빨리 온다. 오늘은 서로에게 검만 쥐어 주면 된
다. 오늘밤을 위해서 말이다.
'분명 너희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기만 하면 된다 생각하겠지. 반
드시 하나가 살아 남거나 하는 것이 없으니까. 하지만…… 과연 어떨
까?'
단순하게 기회만 나면 상대를 죽이라는 말을 무턱대고 아이들이 따를 리
가 없다. 살아야 되는 사람 수를 제한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아
무도 서로를 죽이기 꺼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사혼은 이미 다른 계책
(計策)을 생각해 두었다.
'미안하긴 하지만 우리에겐 많은 고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절정 고수가 필요한 것이다. 한 여자를 지킬 수 있는 단 한 명의……'
사혼은 웅성거리는 아이들을 정돈하고 말했다.
"오늘은 이만 저 집으로 들어가서 쉬기로 한다. 그리고 말했던 바대로
빈틈이 있다면 서로를 죽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가
자신을 죽일 테니까. 죽이기도, 죽기도 싫다면 잠을 잘 때나 언제라도
항상 기척을 감지해라. 그렇지 않으면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잠시 낯빛이 변했지만 곧 애써 웃으며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
보았다. 서로간에 암묵(暗默)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말자는 생각
이 짜여 있다. 서로가 서로만 죽이지 않는다면 모두가 살아 나갈 텐데
괜히 죽일 필요가 왜 있겠는가?
사무린 또한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고 있을 때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꺼려지는 것이 아니다. 살
려고 하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다만 자기가 누군가를 죽인다면 곧 이
곳의 분위기는 삭막해 질 테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죽이기 시작할
것이다.
괜한 위험을 껴안을 필요는 없다. 가만히만 있는 다면 모두가 살아서 나
갈 수 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야 이번 관문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떨
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무린이 주의해야 할 것은 여운휘다.
이용해 먹어야 할 상대임과 더불어 여운휘는 주의해야 할 상대다. 최고
의 방패지만 또한 적이 될 때에는 최고의 창이다.
'아직은 이용할 때야. 그리고 나중에 여운휘가 창이 된다면……'
아직 검술을 익히지 않아서 훗날은 정확하게 모르는 일이지만, 여운휘
가 창이 되었을 때 자신보다 강하다면 그때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친해져야겠지. 우선은 여운휘의 마음을 빼앗는다.'
사무린은 천성(天性)적으로 뱀이다.
아이들은 피곤한 나머지 조용히 자고 있었다. 이렇게 새근새근 자고 있
는 것을 보면 이들은 영락없이 어린 아이다.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여운휘를 제하고.
여운휘는 천장 쪽에 숨어 있는 그 누군가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것이
다. 그리고 천장에 숨어 있는 자의 정체는 검의 기본을 가르쳐 주겠다
고 말했던 사혼이었다.
사혼은 여운휘가 깼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비록 모든 실력을 발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신술까지 사용하면서까지 들어온 그다. 설마 아
이 중에서 누군가가 알아차릴 거라는 것은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여운휘는 알아차렸다. 사혼이 숨겼다고 생각한 그 조그마한 기척
을 느낀 것이다.
여운휘가 깨어났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사혼은 아래쪽을 향해 아이들의 검
과 똑같은 검을 떨어트렸다.
퍼걱하는 박히는 소리와 함께 약하게 아이의 신음 소리가 세어 나왔다.
"크윽……"
사혼은 천장에서 내려와 자신의 검에 죽은 아이의 검을 가지고 사라졌
다. 모든 아이의 검이 똑같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자신의 옆에 있던 아이가, 단지 자리를 잘못 잡은
이유로 떨어지는 칼에 목숨을 다했다는 사실을.
'이거였나?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할 계책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생
각을 해 냈군.'
진실은 왜곡(歪曲)될 것이다. 하지만 그 왜곡 된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하
나 있다는 것은 사혼조차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사혼이 사라지자 여운
휘는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소변(小便)이 급한 탓에 혜린은 일찍 일어났다. 무공을 배
운 두 여자 중 한 명인 그녀는 피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가 피에 젖은 이
불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꺄, 꺄악~!"
사 차 관문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序曲)이 울렸다.
혜린의 비명에 깨어난 아이들은 죽어 있는 한 아이를 보며 침묵에 잠기
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일까 하는 의문으로 사무린
의 머리는 가득하였다.
'가만히 있었다면 모두가 살텐데 누가 이런 멍청한 짓을……'
아이들의 눈에서 천천히 경계의 빛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죽
었다. 그 다음이 자기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옆에 있던 아이가 죽이
고자 했다면 본인들 또한 지금 죽어 있는 이 아이처럼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을 무렵, 문을 열고 사혼이 들어섰다.
"비명이 들리던데 무슨 일이냐? 흠?"
사혼은 죽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 안 것처럼 태연스럽게 행동했
다. 사혼은 이불을 들처 내고 아이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미 죽었
다는 걸 사혼은 알면서도 그리 행동했다. 자신이 죽였다는 것을 아이들
이 알면 안 된다.
"…… 죽었군. 누군지 몰라도 아주 깔끔한 솜씨였다. 단 한 칼에 급소
를 찔러 버렸구나. 이건 누가 한 것이냐?"
아이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차라리 범인을 알게 되면 속이 편하겠지
만 아무도 나서지 않자 아이들의 공포심은 더욱 커져갔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게 됐다. 그 누구도……
"나서기 싫으면 나서지 않아도 된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한 말
을 잘 이행했군. 오늘 훈련이 곧 시작 될 테니 모두들 금방 가져다 줄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라."
사혼이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자 몇 명의 흑색의 옷으로 몸을 둘러싼 자
들이 나타나 그 시체와 피에 젖은 이불을 들고 사라졌다. 그걸로 끝인
것이다. 죽은 아이의 결말은.
밥이 들어오고 아이들은 그것을 먹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한 아이의 죽음이 다른 모두의 마음을 얼려 놓은 것이
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상대를 죽
이게 된다.
이제 아이들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게 됐다.
'모든 아이들이 당신의 생각대로 움직이겠어. 당신의 뜻대로 된 듯 하
군. 하지만 난…… 힘들 거야.'
여운휘는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아이들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았
다. 아니, 말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아이들이 죽던 말던 여운
휘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혼의 뜻대로 아이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연무장(演武場)으로 나섰
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사혼은 그들의 얼굴에 어린 표정을 보
며 자신의 계획이 확실히 먹혀 들어갔음을 느꼈다.
"너희들이 오 년 동안 나에게 배울 검술은 마교의 비전 검법인 전살세
(電殺勢)와 금계검법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대성한다면 아마 당금(當
今) 무림에서 너희들을 상대할 적수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여운휘를 비롯한 칠 인의 아이들의 검술 수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