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37)

                                 사곡(死谷)     

여운휘와 청송자가 마교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무렵, 마교 내에서도 준 

비에 바빴다. 이미 잡아온 아이를 관리하랴, 장소를 만드느라. 

장소는 밖에서 돕지 않으면 아무도 빠져 나올 수 없는 마교 내 최고의 

장소인 사곡(死谷)으로 정해졌다. 이 곳에서 오백 명의 아이는 모든 훈 

련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 오백 명이어야 할 아 

이가 오백 한 명이 될 거라는 사실. 또한 그것이 무림의 판도를 크게 바 

꿀만한 사건이라는 것은 아무도 알 턱이 없었다. 

청송자는 여운휘의 지치지 않는 체력에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어린 아 

이가 이 먼 거리를 이토록 쉬지 않고 움직이는데 한 마디의 투정도 없 

다. 아니, 투정은 참았다 치면 된다. 그렇지만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땀 하나 흘리지 않는 것은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되는 것인가? 

오히려 술에 몸을 망쳐버린 자신의 체력이 그 아이보다 부족하다는 것 

을 청송자는 절실히 느꼈다. 

'제길! 아무리 술 때문에 체력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아이한테까지 

질 정도라니!' 

잠시 서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자신을 위쪽에서 내려다보며 여운휘가 말 

했다. 

"지친 거야? 쉬고 갈까?" 

'말아먹을 새끼……' 

반말을 툭툭 내뱉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런 말을 하니 아예 달 

려가서 쥐어박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애늙은이가 있다면 딱 저 놈일 것 

이다. 말하는 것은 마치 세상 다 산 노인과 다름이 없는 어린 아이라 

니. 어쩔 때는 저 놈이 반로환동(返老還童)을 한 고수가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들 정도로 여운휘는 자신을 나이 어린 사람처럼 대했다. 

문제는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 뭐라고 하기도 이상하다는 점이다. 

"쉬기는 무슨! 아직 난 멀쩡하니 어서 가자!" 

청송자는 쓸데없는 오기가 일었다. 몸이 망가졌다 해도 새파랗게 어린놈 

에게 질 수는 없다. 쉬고 싶은 마음이 술 생각만큼이나 간절했지만 쉬자 

는 말을 내뱉는 것은 죽기 보다 싫었다. 

'개놈의 새끼, 그냥 죽여라 죽여.' 

어린놈에게 마음 속으로 밖에 욕을 내뱉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 

해 보이는 청송자였다. 

며칠 동안을 더 걸어 마교가 눈에 보이는 지점까지 도착한 순간 청송자 

는 눈물을 쏟아 낼 뻔했다. 결코 오랜만에 돌아온 마교의 모습을 보며 

감상에 젖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이 끔찍한 꼬맹이와 헤어져도 된다는 사 

실이 너무나 기뻤던 것이다. 

말수는 적었지만 하는 말마다 신경을 빡빡 긁는 것이 여운휘다. 

"저기가 바로 마교다." 

"…… 크군." 

여운휘는 마교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주 간단했지만 여운휘 

는 충분히 놀랐기에 그 정도 말이라도 내뱉은 것이다. 

'저기가 내가 지낼 곳……' 

자신이 가서 무슨 일을 겪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거대한 곳답게 

많은 사람이 머무를 것이다. 그 말은 곧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여운휘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뿐이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 그것을 찾기 이해 여운휘는 무작정 이곳으로 왔 

다.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따라 온 것은 아니다. 그냥 가만히 

있다 죽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자, 그럼 가자. 서두르지 않으면 늦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신나서 달려가는 청송자를 뒤에서 바라보던 여운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의 행동에 어이없어 하는 어른처럼. 

달려가는 청송자와 달리 여운휘는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 

기가 가지 않으면 청송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을 잘 알았던 탓이다. 

역시나 괜히 힘만 빼고 달려간 청송자는 그곳에서 마교의 앞을 지키는 

문지기들에게 멸시(蔑視) 어린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입구 쪽을 지키는 그 둘 또한 청송자를 너무나 잘 알았다. 명(命) 받은 

아이를 잡으러 간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그가 붉어진 얼굴로 홀로 문 앞 

에 도달하니 당연히 술만 잔뜩 처마시다가 돌아온 것이라 생각한 것이 

다. 

그게 힘들게 뛴 탓에 붉어진 것이라고는 그들은 생각지도 않았다. 

"어이, 청송자." 

"헉헉, 왜?" 

"임무 실팬가 봐? 겨우 열 살 짜리 애도 못 잡아오는 거냐 멍청한 놈." 

만약 그때 술만 마시다가 마교로 돌아왔다면 지금 저 말에 아무런 대꾸 

도 하지 못했을 터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잡아 왔다기 보다는 따라 

왔다는 것이 정답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데리고 온 것은 마찬가지니까. 

"허, 웃기고들 있군 그래. 내가 언제 임무에 실패한 것을 본적 있는가?" 

"명령을 받은 적이 없으니 실패를 한 적이 없는 거겠지." 

"어흠!" 

맞는 말이기에 청송자는 특별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술병만 껴안고 

해롱거리며 사는 자신에게 누가 마교 밖으로 나가야 하는 중대한 임무 

를 내리겠는가? 

어떻게 보자면 이번에 여운휘를 데리고 온 것이 그의 첫 번째 임무이 

자, 처음으로 성공한 임무였던 것이다. 

"어쨌든 처음 임무인 이번 것을 성공한 게 중요한 거 아니냐." 

"애도 없이 몸만 달랑 와 놓고 성공은 무슨. 네 뱃속에 술안주로 처넣 

고 왔냐?"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 됐냐?" 

"웃기고 앉았네. 야 이 새끼야, 네가 끌고 와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애가 

스스로 걸어서 오겠냐? 이거 술만 먹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완전 또 

라이 새끼 아니야?" 

마교의 입구를 지키는 두 명의 무사 중 하나인 묵철의 말에 청송자는 일 

순(一瞬)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랬다, 묵철의 말이 맞 

았다. 순순히 여기까지 따라왔다고는 하지만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다. 

여운휘가 하는 행동과 말투가 비록 애늙은이지만 그가 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이는 변덕이 심하다. 

'설마 도망친 건 아니겠지?' 

자신을 향해 뭐라고 더 쏘아붙이려는 묵철을 무시한 채로 청송자는 걸 

어 온 길을 거슬러 달렸다. 너무나 안이하게 행동했다. 비록 여운휘가 

따라온 것이라고는 하나 자신은 분명히 그 아이를 끝까지 주시(注視)해 

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걸 방관(傍觀)했다. 실수다, 너마나 큰 실수. 

자칫하면 간신히 구해 온 열산 된 아이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청 

송자는 등뒤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차라리 애초에 애를 구하 

지 못했다면 나았다. 그렇지만 지금 여운휘를 데리고 가지 못한다면 임 

무를 성공하지 못한 게 다가 아니다. 

자신 있게 묵철에게 애를 구해왔다고 말했는데 데리고 가지 못한다 

면…… 

'제발 도망가지 말았어라! 앞으로는 앞에서 걸어갈 때 뒤통수에다가 대 

고 손찌검하는 흉내도 안 낼 테니 제발!' 

내심 찔리는 바가 있었던 청송자는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며 여운 

휘를 찾았다. 얼마 달리지 않아서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여운휘가 모습을 드러냈다. 

"…… 뭐야?" 

"헉헉, 난 네가 혹시나 맹수라도 만나지 않았나 싶어서 말이야." 

차마 도망갔을 까봐 쫓아왔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청송자로서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물론 그건 말이 안 되는 변명이다. 주변 여건이 동물을 살 

만한 곳도 아니었고, 마교라는 거대한 단체가 있는데 주변에서 어슬렁거 

리며 위협을 가하는 동물을 가만 둘 턱이 있겠는가. 

여운휘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가 아니라 단지 귀찮은 탓이었다. 

그것도 모르는 청송자는 역시 애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핑계가 먹혀 들어 

갔다는 착각에 빠졌다. 만약 청송자가 여운휘의 마음을 알았다면 지금처 

럼 웃고 있지는 못하리라. 

"그럼 어서 가자."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청송자는 여운휘의 손을 잡았다. 아 

무 생각 없이 손을 잡는 순간 여운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네가 안 그래도 따라갈 테니까." 

"아, 알겠다."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손을 띤 청송자는 여운휘의 뒤에서 다시 한 번 손 

찌검하는 흉내를 냈다. 아까 도망치지만 않았다면 다시는 손찌검하는 흉 

내를 내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했던 다짐은 잊혀진지 오래다. 아니, 

애초에 그런 다짐을 했다는 것 자체를 잊은 것이다. 

신비한 눈을 지닌 아이 여운휘는 청송자와 함께 마교의 문으로 다가갔 

다. 

묵철은 청송자가 달려간 것이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다가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서 도망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나타난 청송자의 

옆에 아이가 하나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흰 피부에 말로 표현 

하기 힘든 눈빛을 지닌 잘생긴 남자아이를. 

"무, 뭐냐 그 아이는?" 

묵철은 알면서도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되물었다. 

청송자의 코가 하늘로 솟구칠 만 했다. 뒷짐까지 지고 헛기침까지 하며 

문을 지나쳐 가며 청송자는 묵철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하게. 난 임무도 마쳤으니 가서 술 한잔해야겠어. 하하!" 

열어 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청송자와 여운휘를 향해 묵환은 멍 

한 시선만 던졌다. 자신이 놀림거리가 된 것이다. 마교 내에서 인간취급 

도 해 주지 않는 그러한 놈에게. 

"끄응…… 친구 이 일에 대해선 좀 함구(緘口)해 줘. 술 살 테니까." 

이 소문이 난다면 아마 묵환은 마교 내에서 고개 들고 다니기 힘들 것이 

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옆에 있던 후호영은 묵환 

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렇지만 후호영의 입만 막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정작 중요한 청송자는 이미 이 일을 퍼트릴 생각으로 가득한데. 

마교 내부를 처음 본 여운휘는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밖에서 

놀란 이유는 마교를 보는 순간 느껴진 웅장함과 거대함 때문이다. 하지 

만 마교 내부에 들어서자 웅장함과 거대함보다는 무인들의 몸에서 뿜어 

져 나오는 기에 여운휘는 압도되었다. 

'이것이 마교의 무인들인가.'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여운휘는 청송자의 뒤를 따르는 것을 잊지 않았 

다. 여운휘에게 주변에 있는 무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들은 신비함 

자체였다. 

마교의 무인들은 패도 적인 느낌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강함…… 

그러던 중 여운휘의 눈과 어떤 무인의 눈이 맞닿았다. 평범한 아이라면 

무인과 눈이 닿는 순간 서둘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울음을 터 

트리기 일쑤다. 그것도 마교 내에서 험악한 얼굴로 유명한 사욱천이라 

면 더더욱 그랬다. 

험악한 얼굴을 한 사욱천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휘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여운휘는 그를 정면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무서운 눈으로 기선을 제압하려던 사욱천이 오히려 당황하 

였다. 마교에 있는 무인들조차도 자신이 노려보면 눈을 내리까는데 고 

작 어린 아이가 자신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이제는 오히려 그 아이의 눈에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되자 정작 시선을 돌리게 된 것은 사욱천 자신이었다. 

"아, 사욱천. 마침 잘 만났네." 

여운휘를 바라보던 사욱천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시 

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청송자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뭔가." 

"아이를 데려왔는데 어디로 데리고 가야 하나?" 

"아이를 데려 왔다고?" 

사욱천 또한 천무대(天武隊) 소속이다. 어디로 데려가야 하는지는 이미 

아이 한 명을 잡아 온 그로서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청송자의 근 

처에 아이라고는 단 하나 뿐이었다. 

자신의 시선을 지지 않고 쏘아보던 당돌한 꼬맹이 하나. 

사욱천의 시선이 여운휘에게 향하자 청송자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야. 어때? 잘생겼지?" 

"무척이나…… 잘생겼군." 

말을 하는데도 아이의 눈빛이 자신의 눈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제는 쏘 

아보기는커녕 도저히 눈을 맞출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상황이다. 

"아이는 사곡(死谷)으로 데려가." 

"사곡? 그곳으로 아이를 데려가라고?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곳으로 애 

를 데려가란 말이야?"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어서 가기나 해. 잘못하면 이미 끝났을지도 모 

르니까." 

애써 데리고 왔는데 헛수고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청송자는 인사 

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사곡을 향해 여운휘와 달려가기 시작했다. 멀 

어지는 여운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욱천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각 

에 손을 들어 그것을 만져 보았다. 

땀이다. 

'저 아이는 도대체……' 

무공을 전혀 모르는 꼬맹이였다. 하지만 기백(氣魄)에서 밀렸다. 

'아직 멀었군. 아이에게조차 지다니……' 

내심 요즘 자신의 발전에 만족하고 있던 사욱천은 이 만남을 통해 자신 

의 요즘 행동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이에게도 지면서 그 정도에 만족 

하고 있었다니. 

이미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지만 사욱천은 청송자와 여운휘가 사라 

진 방향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무인의 피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 

다. 십 년 후, 저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변해 있을 

까 하는 생각을 하자 등골에 흐르는 싸한 전율을 느꼈다. 

"재밌겠군. 아주 많이…… 킥킥!" 

사곡으로 들어가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살기 힘들 것이다. 마교에 

서 일할 아이가 필요해서 잡아 온 것은 아닐 터, 분명히 그 아이들을 강 

하게 만들기 위한 훈련을 시킬게 확실하다. 

살아 나오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사욱천은 그 아이가 살아서 나올 거라 

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사곡에서 방금 그 아이가 나온다면 그때는…… 

'도전을 하겠다.' 

식어 있던 무인의 피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누 

가 안다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좋았다. 

자신 탓에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이 생긴 것도 모른 채로 여운휘는 무작 

정 청송자의 뒤를 따랐다. 

사곡은 마교 외곽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은 높이 

도 높았지만 급한 경사 탓에 웬만한 무인이 아니고서는 올라갈 수조차 

없다. 햇빛조차 잘 들어오지 않아 골짜기에는 과일 나무 같은 것도 자라 

지 않는다. 

바람마저 피해 가는 곳. 

그곳이 바로 마교의 사곡이었다. 그리고 그 사곡에 한 아이와 한 남자 

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곡으로 들어설 수 있는 유일한 곳을 향해서. 

"천무대 소속 청송자 명 받은 아이를 잡아 왔습니다!" 

아무도 없던 입구 쪽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 

굴까지 모두 검은 색으로 가린 그 둘은 청송자와 여운휘를 향해 다가왔 

다. 

"좀 늦었군." 

"죄송합니다. 조금 먼 곳에서 데리고 오는 바람에 그렇게 됐습니다." 

청송자는 술 마시느라고 아이를 늦게 구했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 

기에 거리 핑계를 댔다. 많이 늦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곳을 지키던 남 

자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는 신호였다. 

"너는 이만 물러가고 꼬마는 날 따라와라." 

이곳부터는 아이만 지나갈 수 있다. 

헤어져야 할 것은 알았지만 이곳에 들어가게 된다면 나오기 전까지는 결 

코 만날 수 없다. 청송자는 괜히 마음이 씁쓸해졌다. 말도 막하는 꼬맹 

이였고, 별로 대화도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 십일 동안 같이 

오면서 정이 든 녀석이다. 

"쩝…… 잘 가라 운휘야." 

이 이상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껴안고 울어 젖힐 사이도 아니고, 그 

렇다고 해서 할만한 별다른 말도 없다. 잘 가라는 말, 그것으로 할 말 

은 끝났다. 

여운휘도 별다른 말이 없이 몸을 돌렸다. 

얼마를 걸어가던 여운휘가 문뜩 생각난 사실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이, 청송자." 

"왜?" 

끝까지 반말을 찍찍 뱉어내는 여운휘에게 청송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 

다. 

"난 머리 뒤에도 눈이 달렸어." 

"엥?"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청송자의 말에도 여운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 

고 다시 가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며 이제는 문 건너편으로 

사라진 여운휘. 

여운휘가 사라졌음에도 청송자는 그곳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 

다. 머리 뒤에도 눈이 달렸다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 

진짜로 머리 뒤에 눈이 달렸다는 이야기일리는 없다. 사람이 어떻게 머 

리 뒤에 눈이 달릴 수 있단 말인가? 

잠시동안 고민하던 청송자는 여운휘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제길……' 

여운휘의 뒤에서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손찌검하는 흉내를 내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한 마디로 여운휘는 다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 

다는 말 아닌가. 

끝까지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아이다. 여운휘라는 아이는. 

"정말 귀엽지 않은 아이라니까……" 

귀엽지 않은 아이라고 중얼거리고는 있었지만 청송자의 입가에는 정말 

오랜만에 지어 보는 훈훈한 미소가 걸렸다. 

한편, 문 안쪽으로 들어가게 된 여운휘는 안에서 웅성거리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무척이나 많은 수라는 것은 언뜻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거의 다가 겁을 먹은 표정이었고, 종종 흥미 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아 

이들도 보인다. 이 많은 아이로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여 

운휘의 머리에 떠올랐다. 

머리가 좋은 여운휘였지만 이 상황이 어떠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아 

무 단서도 없고, 뭔가 주워들은 것도 없는데 갑작스럽게 직면한 어떠한 

상황에 대해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운휘가 무슨 일일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검은 색으로 

온 몸을 가린 한 사람이 앞쪽에 있는 단상으로 올라섰다. 

훌쩍이는 아이들도, 흥미 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들도, 심지어 여운 

휘의 시선마저 모두 그 단상에 있는 자에게로 향했다. 단상에 올라선 그 

자는 복면을 벗었다. 얼굴의 한편이 화상을 당한 것처럼 일그러져 있는 

남자였다. 

복면을 벗어서 땅으로 내던진 그의 입이 열렸다. 

"지옥에 온걸 환영한다, 꼬맹이들아." 

겁먹고 있던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여운휘는 단 

상 위에 올라 있는 그 남자를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천천히 여운 

휘의 입이 열렸다. 

"난…… 꼬맹이가 아니야. 멍청한 자식아." 

비록 아이들의 흐느끼는 소리에 파묻혀 단상까지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한 쌍의 눈이 여운휘에게 박혔다. 

'재미있는 놈이 들어왔군.' 

몸을 숨긴 채로 여운휘에 대한 감상을 내린 남자는 현재 마교의 이인 자 

인 마교 부교주 혈무린이었다. 

지금 아이들이 있는 장소는 어두움 자체다. 종종 보이는 빛은 어둠의 일 

부를 걷을 뿐 전체를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다. 여운휘는 훌쩍거리는 아 

이들의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걸으면서까지 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소리가 부닥치면서 윙윙거리는 것을 보니 이곳은 앞과 뒤를 제하고는 사 

방이 막힌 공간일 것이다. 아마 동굴일 거라고 여운휘는 판단했다. 

흐느끼는 아이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종종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 

다. 여운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곳이 동굴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판단 

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여운휘의 생각대로 이곳은 동굴이었다. 사곡을 통하는 유일한 통로, 아 

는 사람들은 이곳은 생사로(生死路) 라고 부른다. 생과 사가 바뀌는 

곳. 이곳을 지나간 무수히 많은 사람 중에서 과연 살아서 나온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많은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잠들어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당연하게 

분위기는 스산스럽고 왠지 모르게 피 냄새 같은 것도 풍긴다. 

그때 누군가가 여운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안녕." 

덩치는 다른 애들에 비해 약간 크고 힘도 좋아 보이는 아이였다. 여운휘 

는 그 아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 이름은 표일이라고 하는데 네 이름은 뭐야?" 

귀찮았다. 쓸데없이 말을 거는 이 아이라는 존재가. 그것도 결코 좋은 

의도로 말을 건네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여운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표일은 비록 그 마을에서 뿐이긴 했지만 유명한 도장에 다닌 아이였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여운휘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을 건넨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여운휘가 강해 보이니까.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음에도 표정의 변화는커녕 발걸음조차 당당한 

여운휘를 보며 표일은 친해지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 자신보다 약한 존재는 짐이 될 뿐이다. 

그런 놈은 필요가 없다고 표일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 탓에 접근 한 것 

인데 정작 여운휘는 자신을 상대도 해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왠지 모르게 이 남자를 놓친다면 죽는다는 생각에 표일은 끈질기게 여운 

휘에게 들러붙어 말을 걸었다. 

덩치도 큰 표일이 다른 아이에 비해서도 약간 작은 여운휘에게 들러붙 

어 억지 웃음을 띠면서 말을 건네는 것이 어색한 것은 당연했다. 

꿋꿋하게 아무 말도 없이 걸어가던 여운휘는 자꾸 옆에서 떠드는 목소 

리 탓에 정신 집중이 되지 않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닥치고 꺼져." 

정신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돌려서 말할 수도 있었지만 여운휘는 자신 

의 뜻을 짧으면서도 명확하게 밝혔다. 어떻게든 친해질 건수를 만들려 

고 하던 표일은 저런 말을 들으니 막상 입이 열리지 않았다. 

욕을 먹고 어떻게 말을 이어 나가야 할지 모르는 탓이다. 

평소의 그였다면 당장 머리통을 부술 듯이 패놓고도 남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여운휘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을 결코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라고 느끼게 만들었다. 

"하, 하하…… 너도 기분이 안 좋나 봐. 허, 허기야 막상 이런 일을 당 

하니 신경이 날카롭기도 하겠지. 기분 풀리면 말해 줘. 그, 그럼 난 먼 

저 갈게." 

이곳에 살아 남기 위해 강자에게 붙자고 마음먹은 이상 한없이 비굴해지 

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표일은 애써 웃으며 여운휘의 곁에서 멀어졌 

다. 

여운휘는 표일이 사라지자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힘든 일이 될 것이 

다. 여러 가지 정황을 두고 추측해 본 바로는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 

었다. 장소와 이곳에 있는 무인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아무 감정도 일지 않았다. 어차피 삶의 이유를 찾으 

러 온 곳, 하지만 역시나 이곳에서도 그것을 찾을 수가 없을 거라는 것 

을 느꼈다. 방금 전처럼 자신의 안위(安危)를 위해 자기보다 강해 보이 

는 놈에게 붙으려는 놈들이 있는 이런 곳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가벼 

운 소망이 아니었다. 

훌쩍이기만 하던 아이들이 점점 아까 표일이 자신에게 달라붙었던 것처 

럼 강해 보이는 놈들에게 말을 걸면서 친해지려는 모습이 볼썽사나웠 

다. 

이곳에는 없다. 어떻게든 살려고 하는 감정 이외에는. 이러한 곳에서 무 

엇을 얻을 수 있을까. 

"자! 꼬맹이들아 잘 들어라." 

동굴 안에 있는 천연적인 넓은 공터에 도착하자 일행을 이끌던 무인이 

모두를 멈추게 만들었다. 

"이런 말하기 뭐 하지만 아마 너희들 중에서 살아서 밖으로 나갈 수 있 

는 건 한 명 정도 일 것이다. 더 산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겨우 잠잠해졌던 아이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다시 터졌다. 앞에서 이야기 

를 하던 무인은 짜증이 일었다. 

"모두들 주둥이 닫아! 어린놈들이라 좋게 말하려고 했는데 왜 울고 지랄 

들이야! 잘 들어라! 일차 관문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어렵지는 않을 것 

이다! 물론 반 이상의 아이들이 죽어 나가겠지만." 

아이들은 남자의 고함 소리에 놀라 침묵했다. 종종 훌쩍거리는 소리가 

터지기는 했지만 이제 울음소리는 잠잠해 진 것이다. 울음이 멈췄다고 

해서 아이들에게서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죽어 나가는 

아이도 있다는 사실에 아이들을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울음을 통해 두려움을 밖으로 분출(噴出)해 내지 못하게 되니 오히려 공 

포감은 커지기 마련이다. 

"너희들은 모두 하나의 짐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안에는 오일 치의 식량 

이 안에 들어가 있지. 그 것을 가지고…… 한 달을 버텨라." 

아이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어떻게 한 달을 오일 치의 식량을 가지 

고 버티라는 것인가. 그건 말도 되지 않는 말이었다. 모두가 죽으라는 

것이 아닌 바에야 이런 말을 할 턱이 없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들하고 있겠지? 그래, 솔직히 말해서 너희들에겐 

상당히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어. 

왜 너희에게 오일 치의 식량만 있다고 생각하지? 네 옆에 있는 놈의 짐 

을 빼앗는다면 식량은 십일 치로 변한다. 한 놈 것을 더 빼앗으면 십 오 

일 치로 변하고 말이야." 

여운휘는 그제야 지금 이 관문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게 됐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 한 마디로 강한 사람 

은 사는 거고 약한 사람은 죽는 것이다. 

'아니면 아까 그 표일이란 놈처럼 강한 놈한테 붙어도 되겠지……' 

여운휘의 옆에 다가온 어떤 자가 손에 들려 있는 짐을 넘겼다. 이게 오 

일 치의 식량일 것이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시작한다! 장소는 이 공터다. 한달 후에 살아 있는 

자만이 이 문을 통해 다음 관문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여운휘는 뭐라고 떠드는지 상관도 하지 않은 채 넓은 공터 중에서 구석 

에 짐을 놓고 주저앉았다. 그 후로도 그 자가 뭐라고 떠들었지만 여운휘 

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상관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아이들에게 이번 관문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무인이 사라지자 아이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약한 놈을 찾는 거다. 아니면 자신보 

다 강해 보이는 놈이 있으면 피하거나 같은 편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래도 여자 애들이 표적이 되기 쉬웠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서 힘이 

약하니까. 

구석에 앉아 있는 여운휘를 향해서도 몇몇의 아이들이 슬금슬금 다가왔 

다. 덩치가 작으니 힘이 없을 거라는 생각 탓이다. 고개를 파묻고 있던 

여운휘는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여운휘가 고개를 들어 노려보자 다가오던 아이들을 황급히 뒤쪽으로 도 

망쳤다. 순식간에 아이들을 압도한 것이다. 

살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청송자를 만났을 때 이미 죽으려고 

앉아 있었던 거니까. 다만 자신을 노리고 다가온다는 자체가 마음에 들 

지 않았기에 여운휘는 상대방들을 노려본 것이었다. 

여운휘는 구석에 앉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서히 시작되기 시작 

했다. 먹을 것 뺏는 아이도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이제는 파벌(派閥)조 

차 만들어지고 있다. 강한 놈과 붙어서 떡고물 하나라도 주워 먹어서 살 

아 나가려는 놈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곳에서 여운휘는 고독한 늑대와 같은 존재였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있으며 파벌 따위에 들어갈 생각은 더더욱 없는 존재. 어떻게 보 

면 여운휘는 이곳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이질적(異質的)인 존재였다.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을 뿐인데 아무도 여운휘에겐 다가오지 않았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猛獸)의 몸에서 나올만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 

져 나온 탓이다. 

아직은 맹수에게서 먹이를 훔쳐먹으려 달려들 정도로 그들은 배고프지 

않았다. 

여운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 

자 싸움은 조금 더 치열해졌다.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동굴이다. 대 

충 저녁이 된 것 같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 또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여운휘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음식을 꺼내서 먹었다. 

살려고 먹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이다. 

여운휘의 음식이 다 떨어진 것은 대략 십 오일 정도가 지난 후였다. 이 

미 그때가 되자 더 이상 동굴 안에서 웃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 

명 소리와 울음소리가 가득했고, 먹지 못한 사람들이 신음을 내뱉으며 

죽어 가는 그러한 장소로 변했다. 

여운휘는 먹을 것을 빼앗는 싸움에 끼어 들 생각이 없었다. 그냥 배고파 

서 음식을 먹었고, 이제는 음식이 없으니 굶으면 그만이다. 물론 굶다보 

면 죽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살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굶자 여운휘는 서서히 정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하루도 채 못 버티고 죽을 것이 분명했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죽어도 상관없는 인생.' 

그때 여운휘의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귀찮은 탓에 여운휘는 고개 

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음식도 남지 않았으니 빈 것을 가져가려 

면 가져가라는 생각 탓이었다. 

"뭐 하는 거냐." 

들려온 것은 예상외로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이의 목소리였다면 

무시했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여운휘는 고개를 움직일 마음이 생 

겼다. 

앞에 서 있는 것은 덩치가 좋은 남자였다. 피부는 까무잡잡했지만 인상 

이 좋아 그다지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아니 처음 네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너만을 바라보았다. 

음식이 떨어진지 이틀이 지났는데 왜 가만히 있는 것이냐? 아무것도 빼 

앗지 않고 십 오일을 버틴 것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 후로 아무것도 먹 

지 않고 이틀을 굶었다. 한 명의 것만 빼앗는다면 넌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터인데 왜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거냐?"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데 귀찮게 빼앗을 

필요가 뭐가 있겠어?" 

여운휘에게 말을 건 것은 마교 부교주 혈무린이었다. 혈무린은 나이도 

어린놈이 자연스럽게 반말을 해오자 순간 화를 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일일이 화를 낼 때가 아니라는 생각 

에 혈무린은 여운휘에게 말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 죽겠다는 거냐?" 

"응. 이곳에 온다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안에 있 

는 놈들이 너무 추악해. 내가 바란 것은 이런 게 아니야. 이 따위 생각 

이나 하는 놈들과 같이 있어 봤자 어차피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을 테 

니까 그냥 죽으려고." 

"네 녀석 똑똑한 놈인 줄 알았는데, 아주 멍청한 꼬맹이로구나?" 

"이 새끼가…… 난 꼬맹이가 아니야. 내 이름은 여운휘다." 

욕을 먹으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혈무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이 아이 하나 죽인다고 특별히 문제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아이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 탓에 혈무린은 나가려는 손 

을 참았다. 

"거참, 알겠다. 앞으로 꼬맹이라 부르지 않으마. 어쨌든 잘 들어라. 네 

말대로 이 안에서 삶의 이유 같은 걸 찾기는 힘들지. 네 말대로 이 안 

에 있는 놈의 머리 속에는 온통 한가지 생각뿐일 테니까. 그러니까 오히 

려 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어째서?" 

"살아야지 이곳을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죽으면 그걸로 모든 게 끝인 거 

야. 살아서 나가라. 그렇다면 너는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 

니까." 

맞는 말이고 약간 끌리긴 했지만 여운휘는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지 않았다. 나가서도 찾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혈무린은 여운휘의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아직 확실하게 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자 저 녀석들을 봐라." 

혈무린의 손가락은 이미 먹지 못해 땅에 쓰러져 죽은 아이를 가리켰다. 

"저게 네 삶의 이유냐? 그렇다면 굶어도 좋다." 

여운휘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니다, 정녕 저건 아니다. 입 옆으로는 

침 흘린 하얀 자국이 있고, 초췌(憔悴)해진 얼굴로 죽어 있는 아이. 

"…… 아니, 저건 아니야. 네 말대로 살아서 이곳을 나가야겠네." 

"에휴~ 어린놈한테 반말이나 들으면서까지 이런 말을 해야 하다니. 내 

팔자야." 

한숨을 내쉬며 혈무린은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살려주면서도 이런 대우를 받는데 아니 그렇겠는가. 

"아, 내가 네 소원을 들어줬으니 너도 나한테 하나 해 줘야 하는 거 아 

냐?" 

"뭐야?" 

혈무린인 기가 찼다. 기껏 살려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과 마찬가 

지 아닌가. 하지만 왠지 모르게 혈무린은 아이가 밉지 않았다. 

"좋아, 어떤 소원이냐?" 

"음……" 

여운휘는 소원 하나 들어 달라고 말을 하긴 했는데 막상 생각하니 할 것 

이 없었다. 소원으로 먹을 걸 가져다 달라는 것 따위는 너무나 우습다 

고 생각했다. 마음을 먹었으니 이제는 음식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이다. 

그런 소원말고 다른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 

질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여운휘는 입을 열었다. 

"나중에 내 소원 한 가지 들어주기. 그게 지금 내 소원이야." 

"허…… 그게 소원이냐?" 

"응. 내가 이곳을 나가게 된 후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하지." 

혈무린은 이 일이 어떠한 일인지 알았기에 순간 표정이 굳어 버렸다. 살 

기 힘들 것이다. 단 한 명이 살아 남거나, 모든 관문을 마칠 때까지 끝 

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관문까지 거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살기 위해서는 그 단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오백 명 중에 유일한 하나가…… 

"좋다, 운휘야. 네가 살아서 이곳에 나온다면 어떠한 소원이라도 들어주 

마. 나 마교 부교주 혈무린의 이름을 걸고." 

이 남자가 부교주라는 말에 여운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여운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 안 

에서 가장 강한 파벌을 형성하고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간신히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놈들의 것을 빼앗을 생각은 없다. 그들 

이 불쌍해서 따위가 아니다. 약자를 괴롭히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 

은 탓이다. 

여운휘가 다가오자 그 파벌의 우두머리인 우상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상후는 평소에 여운휘를 가리키며 저러다가 언젠가 자기 밑으로 들어 

올 거라고 자기의 부하들에게 큰소리 친 적이 있었다. 

그냥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한 말인데 정말로 여운휘가 다가오자 우상후 

는 미소를 지었다. 

'큭큭, 그러면 그렇지. 배고픈데 제까짓 놈이 어쩔 건데.' 

여운휘를 처음 볼 때부터 맘에 들지 않게 생각했지만, 부하가 된다면 

저 만큼 대단한 놈도 없을 것이다. 여운휘가 우상후의 앞에 섰다. 덩치 

는 우상후가 훨씬 컸지만 당당한 것은 오히려 여운휘였다.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먹을 거 내놔." 

"엥?" 

"먹을 거 내놓으라고 이 멍청한 자식아." 

자신의 부하로 들어온다는 말을 할 줄 알았던 우상후로서는 여운휘가 내 

뱉은 말은 당황 그 자체였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혈무린은 큭큭 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 

마 자기가 저기 있는 파벌의 우두머리였으면 지금 기분이 어떨까 생각 

해 보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먹을 것을 힘으로 빼앗는 것도 아니고 단지 달라고 말을 한 것뿐인데 파 

벌의 우두머리 녀석은 당황해서 쩔쩔매고 있다. 

'역시 재미있는 꼬맹이야. 아니…… 여운휘라 했겠다?' 

혈무린은 속으로 되뇌며 천천히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먹을 것을 받아 온 여운휘는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그것을 먹기 시 

작했다. 

'살아주마. 살아서 네 말대로 삶의 이유를 찾아보겠어. 만약 살아서도 

못 찾게 된다면 네 놈을 찾아가고 말 테다.' 

여운휘의 속마음도 모르면서 혈무린은 멀리서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 

다. 

혈무린이 어처구니없이 하게 된 이 약속은 훗날 마교의 운명을 바꾸게 

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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