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 어떠한 일도 차질이 없었으며, 또한 완벽했었다. 하지만…… 그
게 아니었다.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계획들이 단지 한 남자에 의해서 무너져 내렸
다. 고작…… 한 남자의 손에 의해서 그 원대했던 것들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것도 빌어
먹을 정도로 완벽하게.
귀검사영(鬼劍死影) 진린은 가슴에 담은 원망을 외치고 싶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
명의 남자를 이 세상에 내린 하늘을 향해서.
전 마교 교주의 딸이 도망쳤다는 소리에 그는 그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나 보군 하고
웃어 넘겼다. 그때 보고서에 그 계집을 어릴 때부터 보살피던 호위무사 하나도 같이 있는
것 같다는 문구는 그저 자잘한 내용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실수였다.
"천하를…… 움직일 남자가 될 줄은 몰랐구나."
진린의 음성은 겨울의 찬바람 탓인지 미약하게 떨린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진린을 더욱
강인해 보이게 하는 짧지만 두터운 수염이 나 있는 턱이 조금씩 떨렸다.
진린의 말에 앞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진린
을 바라볼 뿐.
"문답무용(問答無用)이라는 건가? 좋지, 좋아. 무인이 칼로 말해야지 자잘하게 수다나 떤
다는 것이 더 우습구나.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마."
검은 무복(武服)의 사나이는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나의 야망을 위해 살아 왔다. 그리고 내 힘을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 모두 사용하였지.
그렇지만 넌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 온 거냐? 네가 살아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냔 말이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도, 목숨을 건 싸움터에서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던 그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너무 작아서일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작았는지 절
정 고수인 진린마저도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진린의 표정에서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안 그는 이번에는 보다 또
렷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충(忠)이다."
전설은 노인의 입에서, 주정뱅이의 행동에서 시작됐다.
한 남자가 맞잡은 손을 비비며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초조함과 걱정스
러움이 가득 담겨 있어, 만약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본다면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한 감수성도 이 남자의 외모를 본다면 사라지고도 남을 것이다.
강인한 외모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굵은 팔뚝,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과는 달리 굼떠 보이
는 커다란 덩치. 결단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외모의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
그 정체는 무림인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거물이었다. 태산을 피로 덮어
버린 일 때문에 정파 무림인이라면 모두가 이를 가는 마교(魔敎) 제 15대 교주 냉철거도
(冷徹巨刀) 유백명.
명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사에 냉철한 그가 도대체 왜 이리도 조급해 보이는 것인지는
곧 밝혀졌다.
"교주님! 드디어, 드디어 출산하셨습니다!"
"아, 아들인가 딸인가?"
"어여쁘신 따님입니다."
딸이라는 말에 잠시 얼굴 표정이 변했던 유백명은 금세 제 얼굴빛을 찾았다. 그에겐 자식
이 태어난다는 것이 중요했지 딸이건 아들이건 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아직 불혹(不惑:40대)의 후반 밖에는 되지 않았기에 더더욱 걱정 따위는 없었다. 아직 그
에겐 시간이 많으니까.
'딸이건 아들이건 무슨 상관인가. 아들이라면 내 후대의 교주로 제대로 키워 보려 한 것이
무산 된 점이 아쉽긴 하다만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자식이라면 또 낳아도 되는 것이고 또
정 안 된다면 오늘 태어난 나의 딸이 훌륭한 남자를 얻어 그 뒤를 이어가면 되는 것을.'
유백명은 문을 박차고 자신의 아내와 새로 태어난 딸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자신의 아내와 딸이 있는 문 앞에 이르자 유백명은 숨을 길게 몰아 쉬었다. 문 안쪽에서는
지금 막 태어난 자신의 딸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딸과의 첫 대면은 자신의 옷매무새는 어떤가 마저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문득 자신이 수
염을 깍지 않았다는 사실에 돌아가서 다듬고라도 올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긴 했으나 딸을
보고 싶다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급히 문을 열게 됐다.
하얀 천이 곱게 드리워진 침대에 유백명의 눈에 낯익은 여인이 누워 있었다. 그의 아내인
엄여홍이었다. 그녀는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웃다가 유백명을 발견하고는 손짓했
다.
"예쁜 딸이에요."
"들어서 알고 있었어. 그래, 몸은 괜찮고?"
"예. 그나저나 와서 한 번 안아보시지 않을래요?"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유백명은 날아왔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빠르
게 침대로 다가와 있었다. 침대 한쪽에서 비단에 쌓인 조그마한 무엇인가를 들고 있던 시
비는 유백명에게 그것을 넘겼다.
'허어!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자신의 딸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유백명이 방에 들어왔
을 때까지 울고 있던 딸아이는 유백명을 보고 갑자기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방실방
실 웃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은 유백명을 미치도록 기쁘게 만들었다.
"다, 당장 노옹(老翁)을 불러오게! 당장!"
노옹, 그건 그 노인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전 마교 교주인 유백명의 아버지가 죽으면서 곁
에 두라고 한 노인인 그는, 정체도 알 수 없고 무공은 거의 모르는 필요 없는 노인일 지도
모르나 한 가지 신묘(神妙)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바로 별을 보고 점(占)을 쳐 미래를 어렴풋이 보는 그러한 능력이었다.
유백명은 지금 자신의 딸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시비에게 노옹을 불러오라고 시킨 지 반각 후 느릿느릿한 걸음을 하고서는 한 늙은 남자
가 나타났다. 이미 주름살이 이마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
할 정도로 나이가 차 버린 노인.
유백명은 노옹이 나타나자 자신이 그를 부른 이유에 대해서 언급했다.
"오늘 내 딸이 태어난 것은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경축 드리옵니다."
"아아, 그런 말은 됐고, 지금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이 아이의 미래를 보고 싶어서네. 큰
병에 걸리거나 하지는 않은가 이런 것을 알고 싶으니 한 번 힘 써주게."
노옹은 게슴츠레하게 뜬눈으로 유백명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언제나 점을 보기 전에 하
는 말을 내뱉었다.
"미래는 불확실한 것,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나에 따라서 변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미 귀에 신물이 날 정도로 들었으니 어서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교주님."
노옹은 태극(太極)이 그려져 있는 조그마한 것을 꺼내고는 눈을 감았다. 노옹의 입은 쉬
지 않고 움직였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작았고, 또한 알아들을 수도 없
었다. 한참을 중얼거리던 노옹이 눈을 부릅뜨자 태극 무늬에서 강렬한 빛이 쏘아졌다. 잠
시 방을 밝혔던 빛은 사라졌지만 노옹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이미 몇 차례 이러한 모습을 보아왔던 유백명은 조급해졌다. 평상시에는 이러한 빛이 사라
지고 나면 노옹이 바로 점괘를 말해주었던 것이다. 한데 지금 닫혀 있는 노옹의 입은 결코
좋은 것이라 볼 수 없었다.
"무,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리는 겐가?"
"오히려…… 그렇다면 좋겠군요. 이 아이의 미래는 정말로 참혹하기 그지없소이다. 나중
에 정파의 무리에게 유린당하고 몸을 파는 여자로 전전하게……"
"무, 뭣이! 이놈의 정파 놈들! 내 당장 그들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다!"
유백명의 화는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자신의 험악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도 미소를 지은 자
신의 어여쁘고 소중한 딸이 고작 그런 운명이라니. 피가 역류를 한다해도 이러한 기분은
느끼지 못하리라.
"그런 행동을 했음에도 미래에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그럼 어쩌란 말이냐…… 내 딸이 그런 더러운 놈들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고
만 있으라는 것이냐?"
어느새 유백명의 목소리는 약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평생동안 흘려본 적이 없는 눈물을 흘
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엄여홍은 그에게 다가와 머리를 감싸 안았
다. 잠시 자신의 주군이 흐느끼는 모습을 보던 노옹이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방법이 있다고? 그, 그게 무엇이냐! 내 어떠한 일이라도 하겠다!"
"모든 것에는 상반되는 것이 있는 법. 따님의 운명을 바꿀 방법도 하나가 있습니다."
노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도 이 방법은 선뜻 말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자신이
이 말을 뱉어냄으로서 죄 없는 오백 명의 아이들이 피를 흘릴 것이 분명했기에. 하지만 노
옹으로서는 그 방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유백명을 자신의 주군으로 받들고 있었으니까.
"아가씨가 언제 출생하셨는지 시각을 말하게."
노옹은 옆에서 조심히 서서 상황을 듣고 있던 시비를 향해 물었다.
"예. 정확하게 자시정(子時正:24시에서 1시)에 태어나셨습니다."
"주군. 열 살 된 아이들이 필요합니다. 자시정에 태어난 열 살 난 아이들 오백 명이 말입니
다."
노옹의 말에 유백명은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무슨 소린가. 설마 내 딸을 그 오백 명의 아이들의 피로 씻기기라도 해야 된다는 건
아니겠지?"
"다르긴 합니다만…… 어떻게 본다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가씨는 그 오백
명의 피로 살아나실 테니까."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린가! 답답하게 하지말고 어서 상세하게 이야기 해 보게!"
유백명은 노옹의 말을 정확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다르긴 하는데 맞을지도 모른다니, 그
렇게 애매모호(曖昧模糊)한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조용히 둘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엄여홍은 결국 참지 못하고 거들었
다.
"교주님 말씀대로 어서 말씀 좀 해 주세요. 답답해 죽겠습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오백 명의 아이를……"
한 여자의 인생 뿐 만이 아니라 정사파 모두의 운명을 바꿀 전설적인 사건의 시작은 노옹
이라는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한 노부의 입에서 시작되었다.
마교 내에서도 술만 먹기로 유명한 청송자는 오늘도 술에 빠져서 구석에서 해롱거리고 있
었다. 처음엔 가볍게 마시던 술이었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그건 독이 된다.
청송자는 술에 취했는지 허공을 보면서 헛소리를 내뱉으며 손을 휘젓고 있었다. 술에 찌들
어 산지 어언 이십 년이 지난 무인이다. 그의 검은 이미 모든 날카로움을 잃었고, 주변의
동료들로부터도 이제는 없는 사람 취급이나 받는 그러한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술만 옆에 있어 준다면 청송자는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세상 그 무엇도 귀에 들리지 않았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 될 정도로 그는 술에 취해 있지 않은 날이 드물었다.
강함을 추구하는 마교의 인물들에게 청송자는 동료는커녕,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존재
였다.
교주의 명을 받들어 아이를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던 천대호는 나가던 도중 벽에 기대
어 앉아 헛소리를 하고 있는 청송자를 발견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것이 무인이란 말인가?
이미 손에 있던 굳은 살 조차 없어진 자를 어떻게 무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칼 대신 술
병은 잡았고, 목숨을 버리는 대신 인생을 버린다. 무인으로서의 청송자는 이미 죽은 사람
이다.
"머저리 같은 놈."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천대호는 청송자가 눈에 거슬렸다. 평소에는 깨끗하게 무시하고 지
내는 사이였는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그의 모습에 화가 났다.
"이 새끼야!"
급기야 천대호는 벽에 기대서 정신을 못 차리는 청송자를 걷어차 버렸다. 옆구리를 가격
당한 청송자는 술에 취해 해롱거리고 있다가 숨이 턱 하고 막히자 정신이 확 돌아오는 것
이 느껴졌다.
그는 가격 당한 옆구리를 부여잡고 기침을 내뱉었다.
"켁켁! 이, 이런! 썅!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 천무대(天武隊)에서 이번에 임무가 내려졌다. 근데 네 놈은 지금 뭘 하는 거냐? 네
놈에겐 명령도 가지 않았지?"
"명령? 무슨 명령?"
혹시나 해서 물었던 천대호는 기대에 전혀 반하지 않는 대답이 나오자 한숨을 내쉬었다.
허기야 이런 놈에게 맡겨 봤자 일이 꼬이면 꼬였지 결코 제대로 되어 갈 턱이 없으니.
"우리 천무대 단원들에게 정확하게 자시정에 태어난 열 살의 아이를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
려졌다. 네 놈이 알아봤자 뭘 하겠냐만은…… 네 놈은 그 구석에서 처박혀 있는 게 가장 어
울리니까. 퉤!"
마치 자신과 말을 한 것조차 더럽다는 얼굴로 침을 뱉고 가는 천대호의 모습에 청송자는
부르르 떨다가 입을 열었다.
"저 놈의 새끼, 확 죽여버리고 말 테다!"
문제는 이미 천대호가 멀어지고 난 후였다는 거다. 청송자는 애써 자신이 겁을 먹은 게 아
니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자신은 겁을 먹은 게 아니라 상대방의 발걸음이 빨랐던 거라고.
"…… 젠장."
애써 되뇌어 보았지만 자신까지 속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비굴함에 욕설을 내뱉
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시정에 태어난 열 살 된 아이를 잡아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자신이 할 수 있
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천무대에게 내려진 명이라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건 곧……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술 한 번 먹겠군. 낄낄."
마교 내에서 파는 술이 아닌 제대로 된 술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에 청송자는
절로 엉덩이가 덩실거려지는 것을 느꼈다.
"술도 마시고 명령도 받들고, 이거야 원 일석이조(一石二鳥)로구나!"
이미 그의 머리 속에서 임무 따위는 뒤편으로 사라지고, 술만으로 가득 차 버린 지 오래였
다. 그런데 청송자는 한 가지 사실을 몰랐다.
천무대에서 그 명령을 받은 건 정확하게 오백 명이었다. 그렇기에 그 외에는 결코 아이를
잡아 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청송자가 알 턱이 없었다. 노옹이 말했던 아이의 수는 오백
명. 하지만 그 명을 받게 된 것은 오백 한 명이 되었다.
두 번째로 무림의 운명을 바꾸는데 공언을 하게 되는 건 마교 내에서도 술꾼이라고 불리
며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청송자다.
아이의 이름은……
마교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청송자가 향한 곳은 귀주성 이었다. 귀주성에는 중국 명주 중
하나인 모태주(茅台酒)가 있다.
예전에 한 번 마셔보았단 모태주를 청송자는 긴 시간동안 마음에 품고 지냈다. 한 모금 마
셨을 때 전신으로 싸하게 퍼지던 그 느낌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던 탓이다. 이미 열 살 된
아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귀주성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사라진지 오래였다.
귀주성에 도착한 청송자는 몇 날 몇 일을 그저 술만 마시면서 쓸데없이 시간을 죽였다.
그 날도 술을 과하게 마신 청송자는 밖으로 나가 벽에다가 토를 쏟고 있었다.
"우웩! 크윽…… 제길, 속이 뒤틀리는 군."
청송자는 토를 한곳 옆쪽에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에 일어나고 나서부터 마
셨는데 벌써 저녁이다. 아니, 밤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해를 제대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조차 모른다. 감각이 점점 무뎌져 가는 기분에 청송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술을 좋아하고, 인생의 모든 것이 술이라고 생각하는 그다. 하지만 그렇
다고 해서 자신의 모습에서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심스럽다.
예전엔 그래도 천하 제일의 무인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거늘, 지금은 그저 마을 뒷골목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주정뱅이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좋아 보일 턱이 있겠는가.
자신의 모습에서 한심함을 느끼면서도 청송자는 도저히 술에서 손을 땔 수가 없었다. 이제
는 너무 늦어 버렸다. 술에서 손을 때기에는……
술에 중독되어 버린 그에겐 이미 자제할 능력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밤하늘을 보며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한탄하던 청송자는 옆에서 부스럭 하고 들리는 소리
에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옆까지 다가오는데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한 탓이다.
청송자가 비록 술에 빠져 지내기는 하지만 무인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 다가오
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비록 그가 술에 취해 있었다 할지라도.
"누, 누구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옆쪽에 어떤 덩치가 작은 누군가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술에
취했음에도 위험을 직감한 청송자는 허리에 묶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검을 들어 어둠 속
에 몸을 묻은 채 앉아 있는 그자를 향하게 하고는 말했다.
"정체를 밝혀! 그렇지 않다면 바로 죽여버릴 테다!"
자신이 기척을 느끼지 못한 자니 싸운다 할지라도 상대가 되지 않을게 분명하다. 하지만
약하게 나가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는 판단 탓에 청송자는 없는 용기를 쥐어짜며 소리
친 것이다.
상대는 검을 들이밀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이다. 그 모습이 자기를 비웃는 것 같아 청
송자는 화가 솟구쳤다.
"이놈이 감히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조, 좋다! 어디 한 번 해 보자!"
상대가 되지 않으니 기선이라도 잡자는 생각에 청송자는 허공을 강하게 벴다. 겁을 먹고
물러서기를 바라며.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초식을 선보였거늘 상대는 고개도 들지
않는다.
'제, 제길 이렇게 되면 나 혼자 헛 지랄한 거 아냐!'
상대방이 대꾸도 없으니 손이 무안하다. 검을 휘두른 자체가 창피하고 괜한 행동을 했다
는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매웠다. 그때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자가 고개를 들었
다.
"……"
아이였다. 피부도 꽤 하얗고 얼굴도 준수한 것이 어느 부잣집 자식 같아 보이는 아이 말이
다.
그런 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청송자는 자신에게 어떻게 하려는
자인 줄 알고 검을 휘둘렀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이를 앞에 두고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
다고 생각하니 고개도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했다.
"험험, 미안하군. 그러니까 이 아저씨가 말을 하면 대답을 했어야지. 잘못해서 나의 검으
로 널 죽였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느냐."
"……"
청송자의 말에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아이에게 무시
를 당하자 아무리 청송자라고 해도 화가 났다. 가뜩이나 자신의 동료들이 자신을 무시해
서 화가 쌓인 차에 아이까지 그러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새끼가 죽……"
"…… 상관없으니까. 목숨 따윈."
욕을 내뱉으려는데 아이가 말을 하자 다시 한 번 청송자는 무안함을 느꼈다. 이 꼬맹이는
만날 때부터 왜 이렇게 자신을 무안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뭐? 목숨이 상관없다고?"
아이가 한 말에서 청송자는 의아함을 느꼈다. 나이도 어린놈이 반말을 한 사실에 처음엔
좀 기분이 상했지만 곧 그 꼬맹이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으니 궁금함이 앞섰다.
분명히 어린 아이일텐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기 싫다는 것일까. 그제야 청송자는 아이
의 눈을 보았다.
그건 칠흑(漆黑)이다. 검은색보다 더 짖은 어두움. 그 아이의 눈이 그랬다. 한 번 그 아이
의 눈을 보게 되자 도저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한없이 넋을 잃고 아이를 바라보던 청
송자가 정신을 차린 것은, 아이가 모은 다리 사이로 고개를 파묻은 덕분이다. 그렇지 않았
다면 그는 술조차 잊은 채로 죽을 때까지 멍하니 아이를 쳐다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그 아이의 눈은 왠지 모르게 사람을 잡아끌었다.
"허…… 나이가 얼마나 먹었다고 살기 싫다 어떻다 하는 거냐. 여덟 살 정도 밖에 안 먹어
놓고 그리 말한다면 나중에는 어찌 살겠다고. 쯧쯧."
"열 살."
"여덟 살이나 열 살이나 그게 그거지! 그러니 그 정도 나이에서 벌써 그렇게 세상이…… 잠
깐, 열 살…… 이라고?"
청송자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열 살이 된 남자아이를 잡아오라던 명령이 말
이다.
아이는 찾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술만 마신 그다. 이미 지금쯤은 출발해야 했지만 아이
도 찾지 못하고, 술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청송자는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않은 것이
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송자는 아이에게 물었다.
"혹시 자시정에 태어났느냐?"
"응."
아이는 짧게 답했다. 청송자는 갑자기 굴러 들어온 복에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벌려졌다.
그냥 돌아가기는 뭐하다고 생각했는데 열 살이면서도 자시정에 태어난 아이가 굴러 들어
올 줄이야!
"나와 함께 가자!"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다. 조금 출발이 늦긴 했지만 그래도 마교 내에 도착 할 때까지 서두
른다면 잘하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려 청송자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입이 열렸다.
"너와 함께 간다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아이의 물음에 청송자는 난처함을 느꼈다. 왜 마교에서 아이들을 모으는지도 모르고, 설
령 안다고 해도 과연 삶의 이유를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이런 곳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와 함께 가는 것이 낫
지 않겠냐."
"…… 그런가. 허기야,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어디든지 가보는 것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데 낫겠지. 너와 함께 갈게."
아이는 겁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가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어딘 가로 가자는 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절대 모자란 아이는 아니다.
자신과 함께 가겠다는 말에 청송자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곳에 가면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게 분명해. 아마 네가 말한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군. 그런데 난 거기 가서 뭘 하는 거지?"
이제야 궁금함이 생겼는지 아이가 물었다. 하지만 제의를 한 청송자 본인 또한 그건 모르
는 일이다.
"음……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잘은 모르지. 나도 명령을 받은 일이거든. 아, 근데 네 놈은 나
이도 어린놈이 왜 나한테 반말이냐? 너 보다 몇 배는 더 산 어른한테 반말이나 찍찍 날리
다가는 혼난다!"
"난 존대를 하지 않아. 상대가 그 누구든 간에."
"건방진 꼬맹이로구나. 전혀 귀엽지가 않아."
말은 그랬지만 그 아이가 무척이나 귀엽다고 청송자는 생각했다. 청송자는 여태까지 그 아
이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아이야 네 이름은 뭐냐? 이제 같이 움직여야 하는 사이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내 이름은 청송자다. 꼬마야 넌?"
"…… 여운휘(餘雲輝)."
"호오, 이름 한 번 멋지군 그래. 어쨌든 자 내 손을 잡고 일어나라 꼬맹아. 아, 꼬맹이가 아
니라 운휘야."
잠시동안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던 여운휘는 마침내 손을 뻗어 청송자의 손을 잡
았다. 그렇지만 청송자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처음 여운휘와 만났을 때를……
여운휘가 자신의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