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後日譚)。
“대감, 이리 와 이것 좀 보십시오.”
먼지가 쌓인 책 사이에서 고윤이 낡은 겉장에 쌓인 것을 하나 꺼냈다.
“가까이 가기엔 먼지가 너무 많습니다, 부인.”
은헌은 저만치 떨어져선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그러곤 부채를 흔들어 품에 안은 아이의 얼굴 위로 날아오는 먼지를 흩뜨려 놓았다.
고윤은 멋쩍은 얼굴로 콧등을 찌푸리곤 주위를 살폈다.
사람의 걸음이 그다지 들지 않는 구석진 곳이라 그들을 제외하곤 인기척도 없었다.
그는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한 번에 죄다 날려 버린 뒤 책을 들고 가까이 다가섰다.
“대감께서 찾던 것입니다.”
고윤이 내민 책의 겉장에 희미하게 쓰인 것을 보던 은헌이 눈웃음을 머금었다.
“용케 찾아내셨습니다.”
“몇 번 허탕 치고 찾은 것이니 그리 잘 찾은 것도 아니지요.”
벌써 몇 번이나 이곳에 다녀갔는지 모르겠다.
고윤은 코웃음 치곤 은헌의 품에 안겨 있는 춘돌이를 살폈다. 갓난아기의 모습을 한 것치곤 참으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뻗어 슬쩍 볼을 건드리자 입에 무언가 들어올 것을 기대하듯 춘돌이가 입술을 오물오물 씹어댔다.
“슬슬 배고플 때가 된 듯하니 저가 안을까요?”
한 손엔 아이를, 한 손엔 책을 들고 있던 은헌은 순순히 고윤에게 춘돌이를 넘겼다. 어지간하면 그가 품에 안고 있을 테지만, 끼니때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고윤은 아이를 넘겨받곤 엉거주춤 자세를 잡았다. 그렇게 약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잘못하면 부서질 것 같아 어정쩡하게 어깨 위로 아이를 널 듯 걸쳐 안아 올렸다. 은헌이 자세를 고쳐 안겨주자 그제야 고윤은 편안하게 제 기운을 흘렸다.
본디 파마의 기운을 지니고 난 터라 그런지 춘돌이는 사람이 먹는 것은 아직 입에 대지 못했다. 은헌이 급히 데려온 아낙의 젖을 물려보았으나 거절했고, 대신 마당 득시글거리던 혼백을 잡아먹으려 해 고윤은 아예 제 기운으로 아이의 배를 채워놓았다. 이상한 것을 먹는 것보단 나았으니 말이다.
적당히 기운을 삼켜대자 고윤은 기운을 거뒀다.
그게 못마땅한 듯 춘돌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칭얼댔으나 거기까지였다. 금방 또 기운에 취해 잠든 아이를 은헌은 다시 제 품에 데려와 안았다. 꾸물꾸물 잠투정하는 녀석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은헌이 웃었다.
“밥을 먹는 것도 아닌데 부인에게 갔다 오기만 하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본래 바위였으니 당연히 무거울 거라는 말 대신 고윤은 짧게 한숨을 뱉었다.
“찾던 책도 찾았고, 날도 슬슬 저물어가니 이만 돌아가시겠습니까?”
은헌은 아쉬움이 조금 남긴 했으나 계속 이리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고윤의 말에 동의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 옛 복장을 한 상인에게 책을 보여주고 책값을 내었다. 화어에 능숙한 은헌이 값을 치르는 동안 고윤은 거리를 내다보았다. 아주 낯선 복장을 한 이들이 거리를 메우며 어디론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허공에 풍기는 흙먼지의, 나무의 냄새마저 다르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은헌을 보았다.
돈을 들고 다니며 직접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땅에서 가장 귀하게 자란 이치곤 수월하게 값을 후려 깎아내는 솜씨는 여전히 신기했다. 유난히도 주변에 잘 스며들 듯 섞이는 것이 타고난 것만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젖먹이를 안고 책을 사러 온 이들을 수상하게 여겼던 상인이 은헌의 말재간에 금방 또 넘어가는 것을 보며 고윤은 입꼬리를 당겨 픽 웃었다.
값을 많이 깎았는지 신이 나 책을 들고 오는 은헌을 보며 고윤은 창가에 마련된 의자에서 궁둥이를 떼어내고 일어섰다.
거리로 나오자 은헌은 제 손을 태연히 붙잡아오는 손을 단단히 붙잡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고윤은 몇 번 다니며 익숙해진 골목을 헤집어가며 하룻밤 머물러 갈 객잔으로 향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위로 높게 층을 쌓아 올린 집들이 가득한 대로에 접어들자 두 사람의 걸음은 조금씩 느려졌다. 판으로 만든 벽을 떼어내어 텅 빈 그 아래층에서 오가는 이들에게 음식을 파는 주막과 같은 곳을 살피던 은헌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걸음을 빨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부인.”
고윤은 제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또 붙은 겁니까?”
좀처럼 그런 일이 드물었는데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고 경계심이 없어 보인 것인지 이번엔 유난히도 저런 좀도둑들이 들러붙었다.
“예. 아까부터 시선이 느껴지는데 좀처럼 떨어지질 않는군요.”
거리를 구경하면서도 은헌은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책 파는 곳에서 붙었나 봅니다.”
“금붙이를 꺼낸 곳이 그곳밖에 없으니 그럴 테지요.”
고윤은 그리 말하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나온 객잔으로 발을 들였다. 오가는 상인들이 득시글 앉아 끼니를 먹고 있는 곳을 지나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오르자 좁은 층계를 따라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위로 올라간 그들은 빌려둔 작은 방 하나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멈췄습니다.”
은헌은 뒤를 따라오던 이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곤 속삭이듯 고윤에게 설명했다.
고윤은 어깨를 으쓱이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밤에 오겠지요. 금야엔 이곳에서 한 번 머물러 볼까 했는데 이번에도 그러지는 못하겠습니다.”
은헌이 코웃음 쳤다.
“이곳의 침상은 싫으시다며 여태 계사정으로 매번 돌아가 침수 드시던 분께서 그리 말하는 겁니까.”
매번 방을 잡아두고 값을 치렀으나 잠깐 쉬어가는 것을 빼곤 잠든 적이 없었다.
“저만 좋자고 그리했겠습니까.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조석으로 계사정에서 반상 받으신 분이 있으니 그리했던 게지요.”
고윤은 그리 말하곤 방 안에서 길을 열었다.
“가지 않으실 것도 아니시면서…….”
“저가 부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누구 손을 잡고 가시려고요.”
은헌의 손을 꼭 잡고 고윤은 집으로 돌아왔다. 은헌의 처소가 아닌 그의 처소였다.
은헌은 방 한쪽에 있는 이부자리에 춘돌이를 곱게 눕혀두곤 등부터 켰다.
불빛이 어른대자 그림자가 비친 건지 겸종이 금세 달려왔다. 낮도깨비처럼 방 안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다시 나타난 주인을 보면서 하인들은 그게 당연하단 듯 곧장 데운 물을 길어왔다.
손과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내곤 은헌과 고윤은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별고 없었던가?”
은헌은 옷을 다 갈아입을 때쯤에 모습을 드러낸 총관에게 물었다.
“임 상궁이 낮에 다녀갔습니다.”
고윤이 날을 헤아리다 혀를 찼다.
“세 이레가 벌써 지났던가.”
“딱 세 이레째지요.”
총관은 그리 말하며 방 한쪽에 곱게 누워 잠든 아이를 보았다. 누구 한쪽이랄 것도 없이 양쪽을 꼭 빼닮은 아이는 여전히 볼 때마다 놀라웠다.
“하여 내일 아침에는 금줄을 거두셔야 할 듯합니다.”
“저런, 일곱 이레까지는 치성드려 볼까 했는데.”
은헌이 농을 던지자 고윤이 코웃음 쳤다.
“일곱 이레나요?”
아이가 태어나면 삼칠일이 지날 동안 이레마다 상을 차려 삼신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손이 귀한 집일수록 삼신께 공들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 아이가 어렵게 태어나면 칠 일에 한 번씩 사십구 일간 삼신상을 차리는 일도 있다지만, 그는 그럴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다.
은헌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이나 부인을 들여 겨우 본 자식이니 삼신께 일곱 이레까지는 치성 드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쯤이면 대감께서도 맨 미역국 27)이란 말만 들어도 진저리치시게 될 겁니다.”
“하긴. 지금도 입에서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긴 합니다.”
은헌이 뱉은 말과 그다지 심정이 다르지 않은 고윤도 몸서리를 쳤다. 남은 생 동안 먹을 미역을 한 번에 몰아 먹는 기분이었다.
“하면 어찌할까요?”
금일 석반에 올릴 것도 기름에 볶지 않은 미역국이라 총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싫다 해도 금일까지는 들어야지. 바로 상 들이게나.”
“예, 마님.”
고윤의 말에 총관이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옷 시중든 이들까지 방에서 나가자 은헌은 고윤을 붙잡아 앉았다. 은헌의 품에 붙들려 그대로 안긴 채 주저앉게 된 고윤은 이제 놀라지도 않고 태연했다.
은헌은 씩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곤 고윤의 입술에 입술을 마주 댔다. 몇 번 쪽쪽대는 것으로 모자란 기운을 채운 고윤의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것을 보며 은헌은 그제야 고윤을 바닥에 내렸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총관이 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와 고윤은 짧게 눈을 흘기곤 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내일부터는 객이 많이 들 테니 당분간 멀리 가진 못하겠군요.”
은헌의 말에 고윤은 숟가락으로 국을 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한동안은 힘들겠지만, 사람들이 계속해서 오지는 않을 테니 잠잠해질 때 또 떠나면 될 겁니다.”
은헌은 젓가락으로 고윤의 상에 산적을 옮기다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요.”
고윤은 편하게 웃는 은헌을 보며 우적우적 고기를 씹었다. 역시 기름기 없는 미역국보단 간하여 구운 고기가 나았다.
“다음엔 멀리 가지 말고, 팔도 유람이나 다녀볼까요.”
화국은 책 구하는 것만 빼면 다 별로라 고윤은 그간 가보지 못했던 팔도 명승지나 돌아다녀 볼까 싶었다.
은헌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좋지요.”
둘은 어디가 구경하기에 그리 좋다더라, 어디에 뭐가 맛나더란 말을 이어가며 한동안 떠들었다.
금줄을 거두자마자 궐에서 부름이 있을 테니 아이와 함께 입궐해야 한다던가, 영상을 비롯해 고윤의 손위 형제들이 대체 대군이 들였다는 아이가 어째서 고윤을 닮았는지 물으려 단단히 벼르고 있다던가, 산신이며 도깨비가 퍼뜨린 소문이 돌고 돌아 저 멀리 바다 건너까지 흘러가 고윤을 찾아오려는 이들이 줄을 섰다는 사실은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은 채 말이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소란스럽던 하루가 또 저물어가고 있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