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
은헌은 고윤의 서재에 걸음했다.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들어오십시오.”
은헌은 열린 문 안쪽의 풍경에 눈을 깜박였다.
“바쁜데 찾은 것입니까?”
고윤은 잠이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한데 눈은 왜 그리 붉어지셨습니까.”
“새벽부터 책을 봤더니 눈이 피곤하여 그럽니다.”
턱을 넘어 안으로 들자 은헌은 제 처의 지난밤 행적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서재에 이렇게 책이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디에서 꺼냈는지도 모를 책이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사방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은헌은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가까이에 있는 책을 들었다.
“《경사증류비급본초(經史證類備急本草)》라…….”
“비슷한 증상이라도 나와 있나 싶어서요.”
고윤은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지압하듯 지그시 눌렀다가 떼며 답했다. 그 말에 은헌 또한 한숨 섞인 얼굴로 입을 뗐다.
“여전합니까?”
“더 예민해졌습니다.”
처음 본 사람에게도 꼬리를 흔들고, 주둥이를 들이밀며 킁킁 냄새를 맡고, 긁어달라며 배를 까뒤집던 짐승은 온데간데없었다.
“상태가 더 나빠졌습니까?”
마지막으로 봤을 땐 은헌만이 볼 수 있었던 검붉은 얼룩이 몸의 반 정도까지 퍼진 뒤였다. 고윤이 바로 검은 비늘을 제거하고 처치를 해두었음에도 처음에 독이라 생각했던 검은 얼룩이 짐승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처음 보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짐승은 전혀 다른 것이 된 것처럼 변했다.
몸을 완전히 키운 짐승 때문에 은헌은 고윤의 처소에 사람 드나드는 것을 금지했다. 고윤 역시 필요한 조처를 했다.
“지난밤에 불청객이 들어 녀석이 달려들었는데 전과 달리 귀신에게 꼼짝도 못 하더군요.”
본래 지니고 있던 파마의 기운이 되레 지금의 짐승에겐 비수로 작용한 듯 귀신에게 가까이 갈수록 발작을 일으켰다. 귀신이 지닌 원한에 몸에 퍼진 검은 것이 함께 반응하듯 말이다. 그래서 고윤은 보던 의서를 집어치우곤 이름도 없는 오래된 기록들을 뒤적거리던 중이었다. 이름도 없는 잡서였다.
은헌은 어깨를 늘어뜨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닷새 내로는 움직이기가 힘들겠군요.”
고윤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어디 가야 할 곳이 있습니까?”
은헌은 곤란한 듯 웃었다.
“저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곧 상마연(上馬宴) 3)이 있을 예정이니 부인과 함께 참석하라며 말이지요.”
갑작스럽게 온 사신단이라 맞이할 때는 당황하여 서두른 면도 있었고, 은헌이 칩거를 시작할 무렵이라 하마연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나 떠날 때는 얼굴을 비춰야 할 모양이었다.
고윤이 콧등을 찡그렸다.
“저까지 말입니까.”
상마연이라 함은 사객연 4)이었고, 사객연에는 내외명부 인사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동궁에서 하는 일이라면 부부인인 그가 부러 참석할 자리는 아니었다.
“고윤 선생 앞으로 따로 부름이 온 것입니다.”
“아…….”
고윤은 침음을 흘렸다.
“저도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합니까?”
무척 귀찮다는 낯을 보며 은헌이 웃었다.
“부인께선 아마도 빈궁 저하와 함께 계실 듯합니다.”
세자빈과 함께해야 한단 말에 고윤은 한숨을 흘렸다. 세자가 서신을 보낸 속내를 알 것도 같았다.
“저하께서 이번 일에 관해 아십니까?”
은헌은 담담히 웃었다.
“제가 궐 담장 안의 일을 알려고 하면 알아볼 수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고윤은 혀를 찼다.
“그러면 도망은 못 치겠군요.”
공식적인 자리는 되도록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는데 그리는 또 안 될 모양이었다.
“전번에 궐에서 온 글월 비자가 빈궁 저하의 서신을 가져왔다 했었지요?”
은헌은 새삼스레 며칠 전 온 서신의 존재를 일깨워 줬다.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궐에 들 일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 이참에 입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한 번에 다 처리하려면 바쁘겠지만 말이다.
“상마연은 언제입니까?”
“닷새 뒤에 열린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정말로 작정하고 늦게 소식을 전해온 거였다.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전부터 준비하여 벌이는 것이 연회니 말이다.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거라곤 상을 받고 술을 마시는 것뿐인 사객연이라곤 해도 낮부터 궐에 들어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을 게 뻔했다. 그 전에 짐승의 문제도 해결을 보려면 말이다.
“벽동으로 녀석을 데려가는 것은 어렵겠습니까?”
은헌은 고윤과 그가 집을 비우는 동안 짐승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염려했다.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 정체 모를 비늘이 갑작스레 크기가 커졌던 것처럼 어느 때든 무슨 변고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되도록 그런 일이 없는 편이 좋겠지만, 장담이 되지 않았다.
고윤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는 한숨을 무겁게 뱉었다.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은헌은 그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레 고윤을 보았다. 고윤은 담담한 얼굴로 사방에 쌓인 책을 훑었다.
“그전까지 저가 도울 것은 없겠습니까?”
고윤은 은헌에게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건넸다. 은헌은 영문 모를 얼굴로 책을 받아 들었다.
“대감께서는 화어에 능통하시지 않습니까.”
“겨우 배곯지 않을 정돕니다.”
겸양 떠는 말을 흘리며 은헌은 자리를 잡고 앉아 책장을 넘겼다.
“그래서 무얼 찾으면 됩니까.”
“술객(術客)에 관한 기록입니다.”
은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은 비늘에 대해서 찾으시는 겁니까.”
고윤은 두루마리로 말린 댓조각 위의 흐릿한 글자를 읽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닷새가 금방 지나갔다.
“서두르라 하신 일을 마쳤습니다.”
은헌은 총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선 채비를 다 하셨다던가?”
“예. 다 되었다며 조금 전 알려오셨습니다. 송구하오나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총관은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췄다. 은헌은 얼른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무슨 일로 토지신께 축문을 다시 올리시는지요. 보통 그런 제는 새집에 들기 전 집터 다질 때나 하는 것이라 아랫것들이 조금 소란스럽습니다.”
은헌은 픽 웃음을 흘렸다.
“부인께서 필요하다 하여서 하는 것이라네.”
“마님께서요?”
총관은 그게 되레 불안감을 불러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주인으로 모시는 이의 재주가 남달라도 보통 남다른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대비하여야 하는 일입니까?”
“그럴 것은 아니네. 정확히 무얼 할지는 나도 잘 모르긴 하네만.”
닷새 동안 고윤은 바깥출입조차 삼가고 기록을 뒤졌다.
결과가 그다지 신통치 않은지 어제까지도 아무 말이 없었다. 입궐할 날이 다가오자 은헌은 차라리 혼자 입궐하는 것이 어떠냐 물었고, 고윤은 손이 많이 가는 수 하나를 찾았다 밝혀왔다. 그게 무엇이냐 묻자 토지문을 쓸 테니 집터에 제를 올릴 준비를 해달라 청해왔기에 은헌도 영문 모른 채 준비하라 명한 터였다.
총관의 낯이 굳었다.
“하면, 마님께 저가 직접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나와 같이 가세. 그러지 않아도 슬슬 궁금해지던 찰나였네.”
은헌은 뒤쪽 서재를 향했다.
고윤은 계사정에서처럼 벽동 집에 도착하자마자 뒤쪽 서재에 틀어박혔다. 터주신께 올릴 공물은 간단히 준비하여도 된다는 말만 하곤 말이다.
서재로 가자 마침 고윤도 문을 열고 나서고 있었다.
“마침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오셨군요.”
은헌이 웃었다.
“누가 먼저면 어떠합니까? 그나저나 하시던 것은 다 끝난 겁니까?”
은헌은 고윤의 손에 있는 것을 보았다.
경건한 마음 따위는 없지만, 기운을 들여 써낸 것이라 조금 피곤하긴 했다. 고윤은 손에 든 토지문을 은헌에게 내밀었다. 은헌이 그것을 멀뚱히 보았다.
“대감께서 읽으셔야 합니다.”
“제가 말입니까?”
“여기 집을 구하셨을 때도 대감께서 직접 축문을 올리시지 않으셨습니까?”
은헌은 기억을 더듬듯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이긴 했으나 분명 그리했지요. 그때는 외조부께서 써주신 것을 읽었군요.”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도성 바깥으로 바로 쫓겨났지만, 터주신께 이 터를 잠시 빌려 살게 되었다며 고했었다.
은헌은 축문을 펼쳤다.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쓴 것치곤 흔한 문장이었다. 그의 뒤에서 총관 또한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이제 무얼 하면 됩니까?”
은헌이 묻자 고윤은 고개를 돌려 총관을 보았다.
“제물은 다 차려두었는가?”
“예? 네. 분부 받자와 정성껏 마련하긴 했습니다.”
고윤이 콧등을 찌푸렸다.
“물만 떠다 두어도 될 것을.”
총관은 살포시 웃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그러겠습니까.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일임을 뻔히 아는데요.”
총관은 서둘러 대군과 부부인을 앞서 안내했다.
토지신께 지내는 제란 보통 집에 들어오기 전에 하는 것이라 너른 마당에서 하지만, 이번엔 고윤이 지시한 대로 집 뒤쪽 장독대가 있는 곳 앞에 터를 잡고 상을 차렸다. 그리로 가자 계사정에서 따라온 이들도, 벽동 집에 기거하던 이들도 다 같이 모여 있었다. 제를 지내는 일이니 은헌은 축문을 읽기 전 마지막으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흐트러짐 없이 갖춘 뒤에야 그는 고윤이 쓴 것을 펼쳤다.
“유월 기축 스물 나흘 왕손이자 대군 이령이 천지 사방에 황송하게 고개를 숙이나이다. 삼각산 줄기를 따라 명당이 어딘지 묻고 물어 찾으면 그곳이 이 터일 것이옵니다. 집 짓고 살아가면 부귀를 누릴 것이고, 자손을 낳으면 대대손손 효자가 되니 이것이 어찌 이 터의 주인께 받은 흥복(興福)이 아니겠습니까. 남향서풍 드는 곳에…….” 6)
낮고 선명하며 듣기 좋게 울리는 소리를 따라 작게 바람이 일었다. 고윤은 은헌이 토지문을 읽는 동안 집에 적당한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도성 내에 득시글대는 귀신들의 음기로부터 적당히 가림막을 치는 일이었다.
살결에 닿는 바람에서 습한 기운이 빠진 듯 버석버석해졌다. 지나치게 어둑한 곳이 햇볕 든 것처럼 밝아졌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깨를 움츠리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청지기들이 편한 얼굴로 은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곤 익숙하게 발을 굴려 터를 다졌다.
“천지의 위용에 두려움을 알고, 공경하며, 삼가 백배하여 이 축문을 올리옵나이다.”
은헌은 마지막 구결까지 일사천리로 읽곤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희미한 형체가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는 부르지 않은 객이 온 것인가 했으나 연기 같은 실체는 점점 더 선명해지고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냈다.
“대감!”
뒤에 서 있던 석삼이 칼을 빼 들려 하는 것을 은헌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 불길한 느낌은 없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앞에 드러난 것을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 보고 있단 것에 의아함을 담아 고윤을 돌아보았다.
고윤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와 은헌의 곁에 섰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에게 말을 붙였다.
“나오셨습니까.”
“불렀으니까요.”
어린 목소리가 답했다.
이제 완전히 사람의 꼴을 갖춘 그것은 웃으며 은헌을 보았다.
“부인?”
얼른 설명을 해 보라는 듯 은헌은 보챔을 담아 고윤을 불렀다. 그의 키에 반절의 반절까지 올까 말까 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저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분명 그를 아는 눈치였다. 그는 전혀 본 적 없는 얼굴이지만 말이다.
고윤은 주변에 선 사람들을 둘러보곤 마지막으로 은헌을 보았다.
“이 집터의 터줏대감입니다.”
자신에게 몰린 시선에 쑥스럽다는 듯 소개받은 터주신이 고개를 꾸벅였다.
고윤은 터줏대감에게 약속한 제물을 건넸다.
토지신을 실체화시킨 것은 오랜만이라 순서가 헷갈릴 뻔했으나 적당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총관의 정성 어린 마음에 토지신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터줏대감이란 말이지요?”
은헌은 신기하단 듯 몸집 작은 아이를 살폈다.
“남산골 그 겸종과는 생김이 아주 다르군요.”
“여긴 대궐이 지척이라서요.”
여러 가지로 주변의 기운이 눌려 있어서 궐에 가까울수록 터주신이 약하거나 아이에 가까운 모습을 했다. 이유는 많았지만, 그 모습이 유지하기 편하고 주변의 경계심을 허물어뜨린다는 것도 한몫했다.
“저가 무얼 하면 됩니까?”
모처럼 실체를 가진 데다 벽동에 기거하는 이에게 공손하게 대접받은 터줏대감이 기분 좋은 듯 생글거렸다. 고윤은 터주신을 불러낸 목적을 명확하게 했다.
“잠시 집을 비울 일이 생겼는데. 집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정확히는 이 터를요.”
아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할 수 있는 건 드나드는 이를 구분하여 막는 것밖에 없는걸요.”
“그로 족합니다. 저희가 떠난 뒤 밖에서 안으로 누구도 들지 못하게 막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것이라면 괜찮은지 터주신이 알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윤은 터줏대감의 기운이 벽동 집에 고루 자리 잡는 것을 보았다. 실체가 없었을 때는 이 터에 거하는 이들에게 액이 닿지 않도록 나쁜 기운을 멀리하도록 하는 것밖에 못 하지만, 몸을 가졌으니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더 늘어났다. 그의 기운으로 친 결계를 뒤덮듯 단단히 자리 잡았으니 허락받지 않은 이와 청하지 않은 이는 죄다 걸릴 터였다. 아무 데나 드나드는 혼백도 말이다.
고윤은 우선할 일이 마무리되자 그제야 짐승을 계사정에서 벽동으로 옮겨왔다. 시름시름 앓고 있던 짐승은 건너오기 무섭게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그르렁대기 바빴던 녀석은 오랜만에 덩치를 적당히 줄여 꼬리를 흔들었다.
“이거야 원. 저리도 좋아할 줄 알았으면 무계동 집에도 진작 이리할 것을 그랬습니다.”
은헌의 말에 고윤이 코웃음 쳤다.
“그 집엔 터줏대감이 없어 이리는 못 합니다.”
있었다면 진즉에 불렀을 터였다. 그리하면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귀신들을 적당한 선에서 걸러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은헌은 사정을 몰랐던 터라 미간을 구겼다.
“그 집에 들어갈 때도 똑같이 제를 지냈는데요.”
“거긴…… 말하자면 대감께서 주인으로 기거하는 곳이라 다른 터주신이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가끔 들르는 벽동 집과는 다릅니다.”
“저 때문에 터주신이 없단 말입니까?”
은헌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고윤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이 자리 잡은 터에 어느 터주신이 들어오려 하겠습니까.”
인왕산 산신이 된 호랑이마저 용이 될 잉어를 내쫓고야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제겐 부인께서 터줏대감에게 청하였던 것과 같이 불청객을 막아내는 재주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고윤이 웃었다.
“있어도 못 쓰시는 능력일 겁니다.”
“어째서요?”
고윤은 은헌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글쎄요. 어차피 쓰는 방법도 배우신 적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은헌은 그것도 맞는 말이라며 소리 내 웃곤 다시 물었다.
“하면 부인께선 하실 수 있으신 겁니까?”
고윤은 담담히 중얼거렸다.
“저가 진심으로 싫다 하여 오는 객을 막아서면 상대가 물러나는 게 아니라 소멸하는 편이라 저는 널린 마음으로 문을 활짝 열어두는 편이지요.”
* * *
세자는 환한 웃음으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은헌과 고윤은 절을 하곤 고개를 들었다.
“한질(寒疾) 7)로 크게 앓았다더니 낯빛이 나쁘지는 않구나.”
은헌은 세자의 질책에 가볍게 웃었다.
“대단치 않은 천양(賤恙) 8)이었습니다.”
숨이 넘어가긴 했어도 어쨌든 살아났으니 말이다.
“부부인께서 대군을 수발드느라 고생하셨겠소.”
고윤은 저를 치하는 말인 동시에 아우를 돌려 까는 세자의 인사에 은헌과 비슷한 얼굴로 웃었다.
“뭐, 고생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대감께서 워낙 건강하시어 하룻밤 자고 나니 훌훌 털고 일어나신 것을요.”
세자는 고윤이 태연하게 농을 던진 것처럼 웃었다. 고윤은 진심으로 한 게 없기에 그저 심드렁하니 그런 세자를 보았다.
“그래도 내의원에 한 번 보이는 것은 어떠냐?”
은헌은 곧장 손사래를 쳤다.
“쓴 약일랑 양껏 먹었으니 아우는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프다는 핑계 삼아 누워 뒹굴다 보니 여기저기서 약재들을 많이도 보내와서 말이지요.”
세자가 은헌을 보며 혀를 찼다.
“성혼하면 좀 사정 나아질 것 같더니.”
“한 번에 다 되면 그거야말로 문제가 있는 겁니다.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처럼 두려운 것이 또 있겠습니까.”
툴툴거리는 은헌의 말에 세자는 그러려니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요즘 남별궁에 눈과 귀를 심는 중인 것이냐?”
고윤의 표정이 굳은 것과 달리 여전히 은헌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도통 참지 못하는 것이 이 아우의 오랜 벽이지 않습니까.”
“호기심 채우겠다고 벌집을 들여다보면 벌에 쏘이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벌침이 뜬금없는 곳에 박히는 것을 염려하는 게지요.”
은헌은 세자의 책망에 태연히 반박했다.
“……게다가 저도 이제 일가를 이뤘으니 되도록 위험한 곳은 피해 다니고자 하는데 뭘 알아야 피하지 않겠습니까.”
세자는 고윤에게 시선을 던졌다. 고윤은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기에 그냥 담담히 있었다.
“도움 필요한 일이 있다면, 부부인께선 재지 말고 이곳으로 곧장 사람을 보내시오. 은헌대군은 가끔 무모하게 움직이는 구석이 있으니 말이오.”
그 부분은 고윤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리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지금까진 큰 문제 없으니까요.”
안심하라 던진 말에 세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소?”
고윤은 비슷한 꼴로 반문하며 낯을 굳힌 형제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만큼은 아니지만, 도성의 경계가 취약하니 되도록 주의를 충분히 기울여 행동하는 것이 당분간 필요할 것입니다. 대개 이런 일은 벌어지기 전엔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지만, 벌어지고 나면 수습하는 것이 더 큰 일이라서요.”
그는 동궁에 들어서기 전 보았던 하늘을 떠올렸다. 몇 번이고 단단히 쳐 두었다고 생각했던 궐의 경계가 여기저기 균열이 간 듯 틈새를 보였다. 도성의 음기(陰氣)가 짙어진 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급히 방비는 해두었으나 지금은 그도 기력이 쇠해 안심할 정도로 방비한 것은 아니었다.
원인이 따로 있긴 해도 경 내 벌어지는 일에 손을 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지경이라 고윤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세자는 고윤의 충고를 새겨들었다.
“서 좌랑에게 전해 듣기론 부부인이 남별궁에 거하는 이 중 누군가를 찾는다 들었는데.”
“한동안 오지 않아 아직 알아내지 못했나 했더니 그가 저하께 알린 모양이군요.”
은헌이 입을 비죽였다. 세자는 그런 아우를 보며 웃었다.
“내게도 신경 쓰이는 곳이라 주의를 충분히 기울이고 있으니 말이다. 부부인이 찾는 이는 서 좌랑보단 내가 찾는 편이 더 수월키도 하고.”
세자는 서궤에 놓인 보고를 은헌에게 내밀었다.
“사신단에 속한 이들 중에 스무 해 전 처음 이 땅에 발을 딛고, 스무 해 만에 다시 온 이가 있다. 직제는 따로 없고, 소문을 듣자 하니 화국 황실에서 유명한 술객이라더구나. 은헌, 네가 태어나기 전 그 예언을 한 술객 말이다.”
* * *
서갑령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에 오른 사신단이 육조거리를 지나 광화문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일행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나리. 무언가 찾는 것이 계십니까?”
서갑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그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말이야.”
수행으로 따라붙은 구실아치가 알 만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계속해서 서 좌랑이 신경을 쓰니 그는 아랫것들을 움직여 사신단 일행을 꼼꼼히 살피라 명했다.
『감시의 눈초리가 엄중하군요.』
술객이 중얼거렸다.
『저 앞에 있는 자가 원손의 외숙이라 했던가요?』
하 공공은 곁눈질로 술객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이를 살폈다. 저 멀리 예조의 관리가 보였다.
『그렇습니다. 왕후의 관을 지니고 태어났다 예언했던 그 세자빈의 오라비지요.』
술객은 코웃음을 쳤다.
『눈으로 본다 해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괜한 헛고생을 하는군요.』
그리 말한 술객은 품에서 부채를 꺼내 부쳤다. 하 공공은 그저 웃는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림자는 떠난 겁니까?』
『지금쯤은 당도했을 겁니다. 그것이 있는 곳이 궐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요.』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가까이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것이 제대로 손에 들어왔다면 지금쯤은 일이 끝나고도 남았을 텐데. 일에 차질이 생겨 이리도 늑장 부리게 되는군요.』
하 공공은 쓴웃음을 흘렸다.
『하나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는 그리 말하며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궐의 높은 담장과 우뚝 솟은 대문을 보았다.
* * *
“누룽지를 더 가져다드릴까요?”
총관은 공손하게 말을 붙였다. 마님이 부른 터주신이 고개를 들었다.
“더 있나요?”
“예. 하면 가져오라 할까요?”
터주신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커다란 함지박을 그득 채운 누룽지를 먹어치웠지만, 배 터질 일은 없으니 또 먹어도 괜찮았다.
“너도 먹을래?”
터주신은 조금 전까지도 그가 옆구리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짐승에게 말을 붙였다. 저보다 훨씬 큰 덩치를 지닌 짐승의 털은 푹신했고, 기대어 누워 있기에 적당한 뱃살도 가지고 있었다. 예민하여 곧장 이를 드러내고 그르렁대긴 했지만, 이 터에 있어서만큼은 터주신을 능가하는 이가 흔하지 않기에 암만 달아나려 해도 소용없었다.
“많이 주세요.”
터줏대감이 총관에게 말했다. 그러자 총관은 고개를 조아리곤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주위에 얼른대던 이들이 물러나자 터주신은 다시금 짐승의 뱃살에 얼굴을 묻곤 손바닥을 펼쳤다. 조심히 쓰다듬듯 배를 긁어주자 짐승이 기분 좋은 듯 골골거렸다.
한참이나 그리 누워 있던 터주신은 저 멀리서부터 스멀스멀 밀려드는 불쾌한 기분에 눈을 깜박였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어려운 세월 동안 이 터를 지킨 터주신이 고개를 다시 들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마당 한 켠에 물을 뿌려가며 비질을 하고 있던 이가 금방 달려왔다. 이곳 벽동 집의 행랑을 책임지는 아범이었다.
“도둑이 왔어요.”
터주신은 집 뒤쪽 담장을 통통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 담장 아래 세 명이 숨어 있어요.”
행랑아범은 낯을 굳히고는 서둘러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청지기들이 몰려들었다.
“성! 무슨 일이요?”
행랑아범이 공손하게 터줏대감을 가리켰다.
“하시는 말씀이 도둑이 들었다는구나. 뒤채 별채 쪽 담장 아래 세 명이 숨어 있다 하셨다.”
계사정에서 온 청지기들이 검을 들고 재빨리 뛰어나갔다. 남은 이들도 저마다 손에 든 것을 무기 삼아 들곤 제 위치를 찾아갔다.
* * *
고윤은 손목의 따끔함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는 혀를 차곤 시선을 내렸다. 손목 안쪽의 살결 위로 흐릿한 붉은 선이 생겼다가 지워졌다. 벽동의 터주신이 보낸 신호였다.
대비는 하였으나 정말로 변고가 생길 줄은 몰랐다.
고윤은 주위를 살폈다. 그가 있는 곳은 한참 상마연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아니라 세자빈의 처소에 달린 곁방이었다. 사객연에 참석하지 않는 그를 위해 세자빈이 따로 마련해 준 자리였다. 그 덕에 한참 무르익은 연회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닿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제 앞에 놓은 과상 위에 놓인 술잔을 슬쩍 기울여 안에 담긴 술을 그대로 부었다. 그러곤 술을 먹물 삼아 손가락으로 쓱쓱 전할 말을 썼다. 손끝을 따라 유려하게 쓴 문장은 이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술을 쏟은 줄 알고 정리하라 사람을 부르려던 최 나인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물러나 앉았다.
고윤은 다시 발이 쳐진 바깥을 응시했다.
은헌은 심드렁하니 음에 귀를 기울였다가 무언가 눈에 걸리는 것에 시선을 내렸다. 술을 쏟는 실수는 한 적이 없는데 상 위에 술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사람을 부르려던 그는 이내 멈칫했다. 방울방울 움직이던 술이 또르르 구르더니 이내 천천히 글자로 변해갔다.
〈날 저물어 등을 밝혔더니 청하지 않은 객이 문을 두드리네.〉
은헌은 입을 다물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던지며 고윤이 보냈을 것이 분명한 글을 손바닥으로 흩어냈다. 당장 고윤이 있는 곳으로 가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태산 같았으나 지금은 그리 때가 좋지 않았다.
오랜만의 공식적인 자리인 데다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상석에 앉아 있다 보니 조금만 움직여도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은헌은 연회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했다.
“어디 급한 일이라도 생겼느냐?”
은헌과 마찬가지로 앞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세자가 입을 뗐다.
은헌은 픽 웃음을 흘렸다.
“급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이리 떨어진 적이 없어 그런지 그리운 낯이 있어 그럽니다.”
세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은헌이 농을 잘 던지는 편이긴 하나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럴 성정은 아니었다. 무언가 일이 생겼구나 싶은 세자의 낯이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눈빛이 매서워졌다.
“저런. 앞으로 두 식경은 지나야 자리가 파할 것인데 곤란케 되었구나. 술이나 들거라.”
“그래야지요.”
은헌은 망설임 없이 제 앞에 놓은 잔을 들어 입에 털어냈다. 독주에 가까운 화주가 혀와 입을 쓸어내리곤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는 빈 잔에 술을 채우기 위해 다가온 내관을 붙들었다. 그러곤 고윤에게 전할 말을 재빨리 속삭였다.
“알겠네.”
고윤은 내관이 전한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전한 내관은 돌아갔고 고윤은 다시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당장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보낸 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터주신을 불러낸 것으로 이미 정리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윤은 다시 보료에 몸을 기대어 잔을 채웠다.
혼자 있는 자리라 편히 있어도 상관없었다. 그가 자리를 비워달라 청하자 최 나인마저 밖으로 물러나 망을 봐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연향 9)이 펼쳐지고 있을 보계 10)가 설치된 방향을 살폈다. 앉은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으나 풍겨오는 기운들은 적당히 가려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전혀 위협적이진 않단 말이지.”
단둘이서 붙는다 해도 전혀 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더 곤란한 문제기도 했다. 위험하지 않은 것이 위험한 것에 손을 대면 사고가 생겨도 감당하지 못하니 말이다.
고윤은 한숨 짧게 내쉬고는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은헌에게 끈질기게 만나자 청하던 이들이 돌아간다고 하니 어쩐지 앓는 이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떠나주기만 하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사신단이 떠나면 은헌도 이제 집에만 있지 않을 테니 조금 더 홀가분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터였다.
고윤은 어디 멱 감을 계곡이라도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딴생각에 마음껏 빠져들었다.
* * *
연회가 파할 무렵이 되어서야 은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갈수록 거하게 취기가 오르는 터에 한 명씩 슬쩍슬쩍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는 터라 그도 그 무리에 뒤섞일 참이었다.
세자는 마지막까지 남아 연회를 책임져야 했고 은헌은 저가 얼른 자리를 비켜주는 게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귀찮은 일을 떠넘기는 것이었지만, 이 자리의 주인이 누군지 사신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어디서 언제까지 보자 그렇게 고윤과 미리 말을 맞춰두었기에 은헌은 세자에게 슬쩍 인사를 건네곤 연회장을 벗어났다. 낮의 더위는 사라지고 어느새 차가워진 밤바람에 사람이 모여 내뿜었던 열기가 한풀 꺾여 내려갔다.
은헌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웃느라 뻣뻣해진 얼굴을 풀었다.
간만에 독주를 들이켰더니 살결이 부들부들했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몇 번 움직이곤 발걸음을 내디뎠으나 얼마 못 가 멈췄다.
“은헌대군.”
은헌은 발길 붙잡은 이를 돌아보았다.
“침언군.”
그는 순간 굳은 얼굴을 활짝 폈다.
“오래간만에 뵙니다.”
침언군은 쓴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인사드린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그럴게요.”
은헌은 그 말에 더 활짝 웃었다.
“공사는 끝나셨습니까? 산 중턱에 못을 파시던 것 말입니다.”
“은헌대군 덕에 무사히 끝났소.”
침언군은 떨떠름한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은헌은 제 덕이라 말하는 침언군을 보며 이번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상의 명을 받아 종친부의 부정축재와 군역을 하러 온 이들을 빼돌려 사사롭게 부린 이들을 처벌한 일로 종친부가 그에게 단단히 앙심 품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는 서신도 보내오지 않아 귀찮은 하루살이 떼가 떨어져 나갔구나 하며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터였다.
“한데 어찌 저를 찾으셨습니까?”
은헌은 그것이 궁금했다.
침언군은 헛기침하며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못마땅한 눈빛을 숨기지도 않고 은헌과 낯을 마주했다.
“대군에게 만나고자 청한 이가 있소이다.”
은헌은 딱딱한 얼굴로 대답했다.
“금일 밤엔 딱히 누군가를 만날 일이 없는데요.”
“원하지 않으셔도 봐야 할 겁니다.”
침언군은 그리 말하며 턱짓으로 은헌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은헌은 그리로 몸을 돌렸다. 화국 특유의 화려한 복색을 한 시동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은헌은 눈을 찌푸렸다.
『주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은헌이 당연히 알아들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단 듯 시동은 낭랑한 목소리의 화어로 말했다.
은헌은 다시 침언군을 돌아보았다. 그가 알기로 침언군은 종친 중에서도 화국과는 이렇다 할 접점이 가장 없는 이였다. 궐에 들어온 화국인이라면 분명 사신단에 속한 이일 텐데 누구와 연결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따라나서는 것이 좋지 않겠소.”
은근히 재촉하는 목소리에 은헌은 서늘한 얼굴을 했다.
“그다지 좋은 것은 없을 듯하지만.”
다만, 누구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아낼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이 이것이라 은헌은 시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네 주인께 안내하거라.”
시동은 고개를 숙이곤 길을 나섰다. 사신들이 동궁에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몇 곳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곳은 세자가 기거하는 곳이니만큼 군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은헌은 그가 예상한 곳과는 다른 장소에 다다르자 실소를 터뜨렸다. 동궁을 빠져나와 건청궁이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시동이 문을 열자 은헌은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뜰에 있던 이가 뒤로 돌아섰다.
“은헌대군.”
“오랜만이오.”
은헌은 그를 부른 이의 정체에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인사부터 했다.
“연회가 아직 파하지도 않았거늘 멀리 나오셨소.”
그는 사신단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이를 보았다. 세자와 함께 지금 연향을 즐기고 있어야 할 자가 이곳에 있단 것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하 공공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일이지 않습니까.”
“나를 만나는 것이 말이오?”
“그만큼 중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은헌은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대군인 그와 꼭 만나야 할 볼일이라는 게 대체 무언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침언군과 무슨 말을 나눴기에 이 우습지도 않은 상황에 그를 끌어들였는지도 말이다.
“그간 뵙고자 청하였는데. 칩거 중이라 사람을 보내어도 통 좋은 답이 들리지 않더군요.”
“병든 이에게 작은 기침이라도 옮았다간 고생길이지. 고향 땅에서 멀리 떨어졌을 때 아픈 것만큼 서러운 일이 또 있겠소?”
“그렇군요. 병세는 어떻습니까.”
“염려 덕분에 호전되어 이런 자리에 나올 정도는 되었소.”
은헌은 태연스레 말을 하곤 하 공공과 눈을 마주쳤다.
“그 덕에 이리 잘 가시란 인사도 하게 되었구려.”
하 공공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보내시는 겁니까.”
“멀리 배웅하러 나갈 처지가 못 되는지라.”
은헌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하 공공은 그런 은헌을 보며 금방 심각한 듯 낯을 구겼다.
“대군께서는 여전히 갇혀 계시는군요.”
그 말에 은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하 공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처지가 어떻다고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하 공공은 그런 은헌에게 넌지시 말을 보탰다.
“마음 편히 둘 곳 없는 처지라 그런 말도 안 되는 혼사도 치르셨다 전해 들었습니다. 아무리 영상의 자식이라 하나 사내와 혼사를 치르게 할 줄이야.”
은헌은 소리 내 웃었다. 고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단번에 멱살 틀어잡으며 다시 지껄여 보라 되물었을 말이었다.
“말이 되는 혼사였고, 마음 또한 편하오.”
“정말로 그러십니까?”
은헌은 픽 웃음을 흘렸다.
“사실 지금껏 살아오며 이렇게 또 즐거울 때가 또 있을까 싶지.”
하루하루가 벅차고, 즐겁고,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었다.
하 공공은 은헌을 보았다. 환히 웃고 있는 얼굴에 그늘은 분명 없었다.
“미련이 없으십니까.”
“무엇에 말이오?”
은헌은 그가 무엇에 미련을 가져야 하는지 궁금했다. 그를 만나고자 하는 이마다 죄다 그 소리라 말이다.
“대군께선 본래 왕이 되실 운명을 지니셨지 않습니까. 모후이신 중전마마께옵서도 대군께서 세제가 되어 대통을 이으실 것을 기대하시었고, 그것은 종친들 또한 마찬가지였지요.”
은헌의 낯이 굳었다.
“위험천만한 말을 하시오.”
이 궐 사는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다간 그대로 사지가 찢길 소리였다.
하 공공은 허허 웃으며 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위험이라…… 글쎄요. 하늘이 주신 천명을 거역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이 있겠습니까.”
사신은 그 말을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대군께선 별것 아니라 생각하실지도 모르시지만, 그 예언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라 저로서는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습니다. 하여 원손이 태어난 것에 염려가 크지요.”
“대통을 이을 원손이 태어났는데 무엇이 걱정이오.”
“글쎄요. 대답하긴 어려우나 하늘의 뜻이 무언지 들여다보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한데 정해진 것이 이뤄지지 않으니 무언가가 틀어지고 있단 소리고 그로 인해 어떤 변고가 있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지요.”
하 공공은 웃으며 시선을 하늘로 던졌다.
구름이 잔뜩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게다가 그 예언은 이미 반은 이뤄졌고 남은 반만 이뤄지면 끝날 일이 아닙니까. 하나, 대군께서 이렇듯 훌륭히 성장하시었는데 원손이 태어났으니 이제 앞날은 장담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셨지요. 금상에게 그럴 마음이 없고서야 어찌 적통 대군을 사내와 혼인까지 치르게 하겠습니까. 그것도 뜻에 반할 가능성 큰 영상의 세력에 묶어…….”
“그만하시오.”
은헌은 냉랭한 말투로 말을 끊어냈다.
“대군.”
“무슨 뜻인지는 알겠으나 착각하신 것이 있소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을뿐더러 원손이 태어난 것이 정말로 기쁘오. 그러니 방금 들은 이야기는 물로 귀를 씻어내듯 흘려보내겠소. 그건 내게 그대와 같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닌 오래전 내게 도움을 준 보답이오. 하니 부디 조심히 돌아가시오. 앞서 말했듯 멀리 배웅은 나가지 않을 테니 여기서 인사하리다.”
서늘한 얼굴로 말한 은헌은 그대로 돌아섰다.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 저벅저벅 밖으로 나오니 침언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헌은 침언군을 매서운 눈으로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신 겁니까.”
침언군은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른 것을 제대로 된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뿐이오.”
은헌이 코웃음 쳤다
“잘못된 것을 바른 것으로 고친다. 사사로이 국고를 축내어 빼돌리고 백성이 흘리는 고혈은 아무렇지도 않으신 침언군께서요?”
“은헌대군.”
“하신 말과 행동에 너무 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욕심 채우려 이용하는 것이라 말했다면 이리 구역질나진 않았을 텐데요.”
침언군은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일은 제 일과는 상관없는 일일뿐더러 천명이 달린 일이지요. 대군께선 정말로 그 뜻을 거스를 생각입니까?”
“하늘의 뜻이 무엇이든 저는 제 두 발 땅에 디디고 살아가고 있고, 주상께서 제게 명하신 혼인을 한 것으로 뜻을 이미 전했습니다.”
침언군은 어리석다 하는 얼굴로 은헌을 보았다.
“그게 뭐라고요. 세 번째가 있으니 네 번째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은헌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무얼 하시려는지 모르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특히, 부부인과 관련된 일은요. 그래도 얼굴 맞대고 지낸 세월이 있으니 충고 드리는 겁니다.”
“그거 무섭군요.”
은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야지요. 무서워하시는 게 침언군께 좋으실 겁니다. 정말로요.”
그는 그대로 침언군을 지나쳤다. 얼른 고윤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 * *
“부쩍 자라셨군요.”
고윤은 세자빈의 곁에 누워 있는 아기씨를 보았다. 갓 태어난 모습만 잠시 보았고 한동안 보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무럭무럭 큰 느낌이었다.
세자빈이 환히 웃었다.
“저하의 말씀으론 눈높이가 엇비슷하다 했으니 앞으로는 부쩍 클 일만 남은 게지.”
고윤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이미 다 큰 모습을 알고 있으니 되레 이렇게 어리고 약한 모습이 낯설기도 했다.
“아이란 것이 눈 깜짝할 새에 큰다더니 정말로 그렇군요. 친영 치른 것도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기씨를 보니 굉장히 오래된 일 같습니다.”
“부부인께 그러지 않아도 내 그 일로 전할 것이 있어 이리 붙들었네.”
세자빈은 곁에 앉은 상궁에게 무언가를 내오라 명했다. 고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기다리자 세자빈이 소리 내 웃었다.
“보통 혼례를 치르는 동무가 있으면 주변에서 하나둘씩 바느질 손품을 보태어 물건을 만들어준다 들었네. 사가의 일인 데다 나는 워낙 어릴 적에 궐에 들어온 터라 바느질 동무가 죄다 침방에 속한 이들이긴 하지만 말이야.”
상궁이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와 내밀었다. 세자빈이 그것을 받아 직접 풀어 고윤에게 보여주었다.
“쓰는 침구는 어마마마께옵서 직접 수놓아 전하셨다 하고, 나는 이게 좋을 것 같아서.”
“……어여쁘군요.”
고윤은 여름 이불을 보았다. 혼례에 쓰이는 원앙금침의 문양을 얇은 모시에 따로 수놓아 가볍고 시원해 보였다. 게다가 척 봐도 공이 무척 들어간 것이었다.
“은헌대군께서도 같이 덮으실 것 같아 크게 만들었네.”
고윤이 눈을 찌푸렸다.
“대감과 같이 말입니까?”
“부부지간이지 않은가.”
“뭐, 그렇긴 한데.”
고윤이 떨떠름히 대답하자 세자빈이 웃었다.
“맨살에 닿으면 땀도 시원하게 식어 내리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걸세.”
더운 여름에도 옷깃 꽉꽉 여며가며 사는 터에 맨살 닿을 일이 뭐가 있나 싶던 고윤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빈궁 저하!”
“형님이라 불러도 되네.”
세자빈이 씩씩하게 웃었다. 그러곤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자저하께선 대군을 많이 아끼시네. 그건 대군께서도 마찬가지시지. 나 역시 두 분의 그런 마음을 존경하네. 그래서 부부인과 더 가깝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야. 친동기간처럼 말일세.”
고윤은 잠시 머뭇대다 그냥 웃었다.
“그러니 무언가 필요한 일이 있거든 망설이지 말게. 사람이 염치가 없으니 무엇으로든 그간 신세 진 것을 갚아야 마음 편하지 않겠는가.”
세자빈은 고윤에게 받은 도움을 떠올리며 부끄러운 듯 웃었다.
* * *
은헌은 동궁전에 들러 곧장 고윤을 찾았다.
아직 몸도 다 풀지 못한 세자빈을 본 뒤 일찌감치 자리를 파하고 기다리고 있던 고윤이 밖으로 나서자 은헌은 환히 웃으며 맞았다.
세자가 돌아오려면 멀었으나 인사는 나중에 하고 곧장 집으로 가도 되었다.
궐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며 은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고단했다.
“한숨이 무거우십니다.”
고윤은 그런 은헌을 보다 입을 뗐다. 은헌이 멋쩍은 듯 실소를 흘렸다.
“즐길 자리가 아니라 그런지 앉아 있는 것이 힘에 부칩니다.”
고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원래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터라 이런 연회도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은헌은 그 말에 나지막하게 코웃음 쳤다.
“무동을 불러 추게 하는 화려한 무용과 악공이 연주하는 위엄 넘치는 가락보단 저잣거리 이야기꾼들의 앞뒤 맞지 않은 말재주가 더 좋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것이요?”
“예.”
이틀 연달아가면 이야기 속 주인공이 어제는 착한 일을 했다가, 오늘은 나쁜 짓을 저질러 손가락질받는 그런 것이 은헌은 좋았다. 종이에 글자로 묶여 있지 않은 그저 그 순간을 즐기고자 만든 것이 말이다.
떠들고 있던 은헌을 보다 고윤이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툭툭 가볍게 은헌의 어깨 위쪽에 무언가 묻은 듯 털어냈다.
“무엇이 묻었습니까?”
고윤은 은헌과 시선을 마주쳤다.
“속에 담은 근심이 숨결을 따라 밖으로 흘러나오면 주변의 좋지 않은 것들을 끌어옵니다.”
은헌은 픽, 한숨을 터뜨렸다.
“……근심이라.”
“누굴 만나셨습니까?”
고윤은 은헌의 주위에 자리 잡은 액운을 떨어내며 물었다. 은헌은 별것 아닌 듯 웃다가 이내 낯을 굳혔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들을 잔뜩 마주쳤습니다.”
은헌의 목소리는 어느새 흙탕물 속의 진흙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겹지도 않지요.”
고윤은 그런 은헌과 눈을 마주쳤다. 은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죄다 쓸어버릴 수도 없으니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하는데 그게 요즘 좀 어렵습니다.”
고윤은 그런 은헌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텅 빈 손이었다.
“다 싫으시거든 그냥 손만 잡으시면 됩니다.”
은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손바닥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이렇게 하면 고윤이 어디론가로 데려다줄 터였다. 사방이 꽉 틀어막힌, 빠져나가려 해서도 안 됐던 우물 속과 같았던 삶이 너른 평원으로 바뀐 것처럼 숨이 트였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십니까?”
고윤의 말에 은헌은 잠시 고민하더니 답을 내놓았다.
“어디든 부인 있으신 곳이면 좋겠지요.”
“갔다가 돌아올 일이 걱정이라서요?”
짓궂은 말에 은헌 또한 장난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래 보여도 아무 데서나 침수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며칠 전 눈 덮인 벌판에서 주무시다 입 돌아갈 뻔한 일은 새까맣게 잊으셨나 봅니다.”
둘을 마주 한 번 웃곤 동시에 한숨을 내쉬곤 손을 떼어냈다.
“집에나 가시죠.”
고윤이 말을 끌고 오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지요.”
은헌은 연회 도중에 받았던 고윤의 전언을 떠올렸다.
“대군 저의 담장을 넘다니 얼마나 간이 큰 놈들인지 확인해야지요.”
* * *
“일단 광에 넣어두었습니다.”
무계동 집이고 벽동 집이고 간에 요즘 들어 광에 곡식보단 사람 넣어두는 일이 늘어난 기분에 은헌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러다가 옥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할 판이었다.
“셋이라.”
그의 예상보다 머릿수가 많았다.
“어디서 온 이들인지는 알아보았는가?”
총관이 고개를 저었다.
“잡힌 뒤 지금까지 입 한 번 열지 않았습니다.”
은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여 혀 깨물지 못하도록 방비한 뒤 손을 좀 보라 일렀습니다.”
총관은 당당하게 고해 올렸다. 은헌은 알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복을 벗는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편히 옷을 갈아입은 뒤 은헌은 고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터줏대감과 그간 벌어진 일에 관해 말 나누던 고윤이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총관에게 간략히 전해 들었습니다.”
은헌은 그리 말하며 터주신에게 간단히 예를 차렸다. 겉모습이야 어쨌거나 이 터를 지켜주는 이였다. 터주신은 벙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때문에 들어왔는지 모른다더군요.”
은헌은 총관에게 들었던 것을 고윤에게 전했다. 고윤이 코웃음 쳤다.
“계속 입을 다물 수 있는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요.”
그는 손바닥을 쫙 펼쳤다가 오므렸다. 원치 않아도 입을 열어줘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보러 갈 참입니다.”
은헌은 광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밤이 늦은 시각이었으나 이대로 광에 가둬두고 자기에는 잠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았다. 그의 말에 고윤이 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러자 터줏대감과 짐승도 따라 내려섰다.
“같이 가시려고요?”
고윤의 물음에 터주신이 고개를 열심히도 끄덕였다. 고윤은 은헌을 보며 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콧등을 찡그렸다.
청지기들이 광을 열었다. 그러곤 횃불로 안을 밝혔다. 몇 대 이미 터진 터라 핏자국 남은 퍼런 눈두덩을 내보이며, 간 크게도 대군 저 담장 넘은 이들이 끌려 나왔다.
은헌과 고윤은 너울거리는 불빛 아래 드러난 이들을 보자마자 눈살을 구겼다.
은헌은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화국인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겠군.”
겉으로 보이는 옷은 저자에도 흔히 보이는 옷이었으나 복면 아래 드러난 얼굴은 아예 골격부터가 여기 사람이 아니었다. 콧대가 높고 눈이 움푹 파인 데다 살결의 색도 달랐다. 언뜻 보면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이 비슷해 먼 북방에서 왔나 싶기도 하지만 은헌의 눈엔 그 차이가 명확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멀쩡한 이를 보낸 것도 아니군요.”
고윤도 한숨을 삼키듯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저것 아무리 봐도 이상해요.”
고윤의 뒤에 서 있던 터주신도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은헌은 제 눈에는 그저 외인처럼 보이는 것 빼곤 이상함을 찾지 못해 물었다.
“무엇이 이상한 겁니까?”
답은 고윤이 내어놓았다.
“육신은 멀쩡한데 혼이 없습니다.”
그리 말한 고윤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서 침입자를 살폈다. 무언가를 빤히 보던 그는 묶여 있는 이들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의 옷깃을 붙잡아 젖혔다. 붉은색 돌을 가루 내어 기름 섞어 새겨 넣은 것 같은 기이한 색의 문양이 보였다.
“강(强)?”
어깨 너머로 보고 있던 은헌이 눈을 찌푸렸다. 고윤이 고개를 돌렸다.
“어릴 적 스승님께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고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은 스승에게 배워 몇 자 알고 있는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뜻도 알 수 없는 문자가 많아 해박한 이가 거의 없다 한 것을 여기서 볼 줄 몰랐습니다.”
은헌은 오래전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 듯 의아함을 표시했다.
“쓸 줄 아는 이를 만나기가 어려울 뿐 어디선가 명맥이 유지되긴 했나 봅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죽은 자를 썼겠지요.”
고윤은 혀를 찼다.
“역시 죽은 거였어요?”
터줏대감이 코를 벌름댔다.
“얘랑 비슷한 냄새가 나서 이상하긴 했는데.”
그 말에 청지기들이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댔지만 아무리 맡아봐도 알 수 없는 냄새였다.
“그것이 오래된 흙냄새입니까?”
고윤은 산신에게 들었던 것을 확인하듯 물었다. 터주신이 눈을 깜박였다.
“맞아요.”
“혹시 어디의 흙인지 알 수 있습니까?”
고윤의 물음에 터주신은 고개를 저었다.
“오래된 흙냄새가 배인 혼백이 없는 죽은 자라.”
은헌은 귀에 흘러들어 오는 말들을 이어 중얼거리다가 실소를 흘렸다.
“무덤에서라도 나온 것입니까.”
고윤은 그런 은헌을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뭐, 비슷할 겁니다.”
은헌은 인상을 쓰곤 묶여 있는 자들을 보았다.
“손을 보아도 입을 안 열었다더니 그 연유를 알 만하군요.”
고윤은 그리 말한 뒤 손바닥을 펼쳐 침입자의 얼굴을 꽉 덮어 눌렀다. 그러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아주 오래된 주를 외웠다. 고윤의 입술을 비집고 휘파람 소리와도 닮은, 새가 우는 것과도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휙―.
길게 이어진 소리가 세 번 울리고 나자, 고윤은 손을 뗐다. 그는 침입자를 본 뒤 청지기에게 입에 물린 재갈을 풀라 명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서 있던 이들이 재빨리 매듭을 풀곤 물러났다.
고윤은 몸을 숙여 침입자와 눈높이를 맞춘 뒤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화……챠…….”
그륵그륵, 돌을 바닥에 굴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갈라진 입술 새에서 흘러나왔다.
“어디 사람이냐?”
“……그……록……샤…….”
듣고 있던 이들의 얼굴에 의문이 차올랐다.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고윤 역시도 생소하여 은헌을 보았다. 은헌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록샤? 연국 사람이야?”
모두가 고개를 흔들던 찰나 터주신이 끼어들었다.
“연국이라면…… 화국의 북쪽에 있다가 오래전 멸망한 나라가 아닙니까.”
은헌이 묻자 터주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윤은 콧등을 찡그리곤 텅 빈 육신에 불러들인 혼백의 조각을 살폈다.
“잘못 불러들이진 않았는데. 이게 무슨.”
분명 육신에 남은 백을 바탕으로 초혼을 한 것이라 육신의 주인이 불려오게 되어 있었다.
“지금 연호가 무엇인가?”
은헌은 이번엔 직접 물었다.
“반호.”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오래전에 쓰였던 연호에 다시 고윤이 입을 열었다.
“여기 무엇 때문에 왔지?”
침입자의 고개가 스르륵 움직였다. 그러더니 짐승에게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따라갔다.
“저것을 잡으러…… 컥!”
말을 이어나가던 침입자는 갑자기 숨통이 틀어막힌 것처럼 컥컥대며 괴로운 소릴 냈다. 손이 묶여 있어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지더니 이내 흙 인형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고윤은 재빨리 쓰러진 침입자를 살피다가 벌어진 입안에 손가락을 서슴없이 집어넣었다. 그러곤 무언가를 뽑아내 눈앞에 들어 올렸다. 그는 그것을 은헌에게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것이 아닙니까.”
은헌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에도 익숙한 것이었다. 짐승의 몸에 박혀 있던 그 검은 비늘이었다.
* * *
소금을 태운 물에 손과 발을 씻고, 소금을 입에 넣어 물로 헹궈낸 뒤에야 고윤은 방으로 들어왔다.
먼저 씻고 들어와 서궤 앞에 앉아 있던 은헌이 고개를 들었다. 고윤이 오만상을 다 쓴 채 서 있었다.
“바닷물이라도 들이켜셨습니까?”
“그보다 더한 것을 주더이다.”
아직도 짠 내가 입에서 진동하는 듯했다. 은헌은 자리끼로 떠놓은 물을 사발에 내어 고윤에게 건넸다. 고윤은 갈증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물이 좀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대감께선 괜찮으십니까?”
“이미 한 대접 들이켰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절여질 듯하여서요.”
“총관에게 소금 좀 아껴 써라 이르겠습니다.”
고윤의 농에 은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서궤를 옆으로 치웠다. 터줏대감과 짐승에게 방 하나 내어주고 금일은 둘이서 같은 방을 쓰기로 한 터라 이부자리가 두 채 깔려 있었다.
“곧장 침수 드실 겁니까?”
자리를 찾아 이불을 들썩이고 있던 고윤이 고갤 들어 은헌과 눈을 마주쳤다.
“하실 말씀이라도 계십니까?”
은헌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들으셔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듯합니다.”
고윤은 무릎걸음을 하며 바닥을 두 손으로 짚고 있던 자세에서 몸을 바로 세웠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정좌를 한 고윤을 보며 은헌은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연회가 끝난 뒤 부인께 가는 길에 침언군을 마주쳤습니다.”
“침언군이라면…….”
“영신군의 일곱 번째 아들로 아바마마께 육촌 형제가 됩니다.”
고윤은 친영이 끝나고 인사를 돌 때 한 번 마주친 적 있는 얼굴을 기억해 냈다.
“한 번 뵌 적이 있군요.”
그때도 그랬지만 은헌과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아 보였다.
“다시 말 걸지도 않을 듯 보였는데요.”
은헌이 코웃음 쳤다.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한데 무슨 일로 말을 걸었답니까?”
“……하 공공을 만나게 해주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 공공이라면 이번 온 사객의 수장이 아닙니까? 대감께서 그리 피하시던.”
“예. 결국, 만났습니다.”
“좋은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겠군요.”
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더러 왕위에 미련이 없는지 묻더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윤이 콧방귀를 끼었다.
“미친 겁니까?”
은헌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여서요?”
고윤의 재촉에 은헌은 그가 거절했단 이야기와 하 공공과의 대화가 끝난 뒤 침언군에게 뭐라 했는지도 죄다 털어놓았다.
“대감께서 왜 그리 액운을 끌어모으셨는지 알 법도 하군요.”
고윤은 한숨 배인 얼굴로 은헌을 위로했다. 은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게 중요하여 부인께 말을 꺼낸 것이 아닙니다.”
“같이 손잡고 역모하자는 말을 들었는데요?”
고윤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게다가 타국의 사신과 종친이 손을 맞잡았다는 것부터 큰일이 아닙니까.”
“그보단…… 그록샤란 곳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부인.”
“그록샤가 왜요? 연국의 지명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긴 좀 깁니다만. 올 초에 저하의 밀명을 받자와 평안도와 경기 북부에 있는 땅과 관련된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다 침언군이 객년 말미에 군역을 진 양인을 사노비처럼 토목공사에 강제 노역시킨 것을 적발하였고요.”
그때의 조사를 그가 했다.
“유람이 아니셨군요.”
“예.”
“뭐, 어쨌든 침언군께서 양인을 데려다 노비처럼 부렸다고요?”
고윤은 떨떠름함을 넘어 못 쓸 것을 삼킨 듯 얼굴을 구겼다. 은헌은 쓰게 웃었다.
“그때 지나가는 소문으로 큰 공사를 했던 곳에서 옛 무덤을 찾았단 말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확인해 보았지만, 무덤의 흔적은 찾지 못했었고요.”
은헌은 숨을 골랐다.
“침입자들도, 짐승도 오래된 흙냄새를 풍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화국엔 죽은 이를 산 자처럼 움직이게 만드는 술법이 있고요. 비록 기담이지만.”
고윤은 의아한 얼굴로 있다가 은헌이 무엇을 지적하는지 알아채곤 헛숨을 삼켰다. 머릿속에 몇 개의 단어가 계속해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러다 무엇을 떠올린 듯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진묘수! 망할!”
은헌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듯 고윤을 보았다.
“부인?”
고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것이 하나의 실에 꿰어진 듯 정리가 되었다.
“진묘수입니다.”
“무엇이오?”
고윤은 팔을 뻗어 손으로 건넛방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놈 말입니다.”
은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진묘수라면 살아 있는 짐승이 아니라, 묘를 쓸 때 같이 묻는 석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무덤을 지켜달란 의미로 무덤 속에 부장품으로 짐승의 모양을 만들어 묻어두는 것이었다.
“산신도, 신선도, 도깨비도, 터주신도 알아채지 못한 생김새의 짐승이 무엇 있겠습니까? 게다가 오래된 주술의 냄새와 흙냄새가 나는 짐승이요. 사람 손으로 다듬어 만든 제멋대로 생긴 짐승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은.”
고윤의 반박에 은헌은 잠시 침묵했다.
“설사 그렇다 한들…… 돌로 만든 것이 어찌 산 것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최근이 아닌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전, 그런 방식의 주술을 사용할 줄 아는 이들이 흔했던 시기에 묻힌 거라면 가능합니다.”
고윤은 같은 것은 아니나 비슷한 술법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은헌이 얼굴을 굳혔다.
“그렇단 말은 침언군이 그런 종류의 짐승이 묻힌 곳을 파헤친 게 아니라 정말로 오래된 무덤을 파헤쳤단 말입니까.”
“지금으로써는 그리 추정하는 것이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고윤은 콧등을 찌푸렸다.
“대감께서 그 공사 현장을 직접 살피셨습니까.”
“직접 보았습니다. 원래 공사하려던 곳이 산등성이였고 그 중턱에 불쑥 오른 낮은 언덕이 있었는데 그것을 허물어 내리고 땅을 새로 다진 뒤였습니다. 한데 그곳이 무덤이란 소린 없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산처럼 큰 옛 무덤도 많아 은헌도 처음엔 그리 의심을 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 터에 자리 잡고 사는 이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말은 전해 오는 게 없다 했다. 조상이 쉬는 곳을 침범하는 것은 큰 죄악이라 다들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은 쉬쉬하며 전했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손대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어쨌든 진묘수가 저 녀석의 진짜 정체라면…… 생각보다 중요한 것일 겁니다.”
고윤은 하나의 설을 세우고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되짚어보았다.
“진묘수라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은헌은 그게 궁금했다. 고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본래 무덤에 들어오는 침입자와 해가 되는 액을 막는 용도로 쓰는 겁니다. 그리고 무덤을 파헤쳐 낸 이를 찾아 앙갚음하는 주술도 걸어둔다고 기록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꼭 그런 종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앙갚음이라…….”
은헌은 침언군을 떠올렸다. 무덤을 파헤친 것이 정말이라면 침언군이 위험하단 소리였다.
“무덤을 파헤치고 입을 다문 종친과 죽은 이의 육신을 살아 있는 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술객이 있는 사신단이라. 침언군이 그 때문에 하 공공과 손을 잡은 걸까요? 목숨을 부지하고자?”
고윤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짐승에게 술객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검은 비늘을 박아 넣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짐승을 부러 찾으려 하지도 않겠지요. 차라리 짐승을 움직여 침언군이 아닌 다른 것을 노리는 게 더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대감을 움직이게 상황을 꾸미려면 말입니다.”
고윤은 은헌을 보았다. 은헌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라면 머릿속에서 짐작 가는 상황이 죄다 최악이었다.
“물 밑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생각보다 더 많았나 봅니다.”
은헌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를 지고한 자리에 올리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닌데도 그리 움직이는 것을 보면요.”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태어난 조카를 죽이고, 우애 좋게 지낸 형을 죽이고, 마음에 퍽 들지 않는 아비를 죽이고 나서야 겨우 앉을 자리였다. 그렇게만 죽인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조정 대신의 반 이상은 목을 날려야 했다. 어쩌면 그 모든 것 이전에 고윤, 그를 먼저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그들도 중전 자리에 사내를 앉히진 않으려 들 테니 말이다.
“어째 제 목숨줄도 간당간당하게 느껴지는군요.”
고윤의 말에 은헌이 입꼬리만 슬쩍 당기며 웃었다.
“그리되기 전에 손을 쓰는 게 좋겠지요.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 역당의 수장이 될 듯하니 말입니다.”
은헌이 원하지 않았다 한들 역당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것이었다.
고윤은 짧게 혀를 차곤 이불 위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정말로 헛웃음밖에 흘러나오지 않았다.
“부인.”
“예.”
고윤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도 않고 고개를 들었다. 은헌은 시선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겠습니까? 누이의 이름으로 왔으니 고윤 선생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고윤은 눈을 껌벅이다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혹시나 하여 묻는 건데 지금 소박 놓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럼 됐습니다.”
고윤은 은헌의 눈을 곧게 바라보며 잘 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대감께서 무얼 걱정하는지는 알겠으나, 저보단 상대를 걱정해주는 게 나을 겁니다.”
“그 죽을 놈들을 저가 왜 염려하겠습니까. 그저 부인께서 괜스레 고생하실까 그게 걱정이지요.”
은헌은 이 상황에 할 말이 그다지 많지 않아 쓴웃음을 지었다.
“염려 마십시오. 제 성질머리가 고약하여 마음대로 못하면 울화가 좀 치밀긴 하지만은 괜찮습니다. 마음껏 성질부릴 거고, 가만두지 않을 예정이라서요.”
고윤은 그리 말하며 환히 웃었다.
* * *
은헌은 조복으로 갈아입었다. 적포를 걸치고 관을 쓰고 허리에 띠를 둘렀다. 궐에 들 채비를 마친 뒤 그는 제 시중을 드는 총관에게 물었다.
“아직 멀었다던가?”
총관은 앞이 없는 질문에도 곧잘 알아듣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님께서도 곧 채비가 끝난다고 하셨습니다.”
은헌은 알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나서 마루에 오르자 고윤이 마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은헌은 벙싯 눈웃음을 흘리며 입을 뗐다.
“일전에 제가 지어 드린 것입니까?”
고윤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려입는 것을 원체 귀찮아하다 보니 몸에 걸치는 것엔 그다지 관심 두지 않았는데 혼례 이후에도 간혹 입궐할 일이 생기면 복색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었던 터다. 법도대로 원삼 12)
일전에 사객연 때문에 입궐할 때도 문제였으나 그때는 은헌이 세자에게 허락을 구하여 도포 차림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전에 입고 다니던 공복을 입자니 그도 문제라 고민했는데 은헌이 시복(時服) 13)을 지어 내줬다. 머리에 쓴 관도 새로 한 것이었다.
“웃전께 문후드릴 것인데 여상스럽게 다니기가 면구하여서요.”
게다가 금일 만나야 할 이들이 하나같이 마주치면 껄끄럽다는 것도 한몫했다. 이럴 때일수록 갖춰 입는 게 좋았다.
“그 색이 부인께 잘 맞는지 한결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뭐, 아픈 곳이 없으니 당연하지요.”
그리 말한 고윤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만 조금 돌려도 궐이 보이는 곳이었다. 높은 담장뿐이긴 해도 말이다.
“이만 가볼까요?”
그는 그리 말하며 은헌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화국의 사신과 엮인 일이라 어찌 처리할지 밤을 새우다시피 이야기를 나누고 방안을 고민하고 다시 고민한 끝에 결정 내린 일이었다.
은헌은 한숨 대신 단단한 각오가 엿보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엔 무엇보다 그의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은헌은 고윤과 시선을 마주하곤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홀몸도 아니니 정말이지 정신 차리고 힘껏 발버둥 쳐야 했다.
* * *
은헌은 궐에 들자마자 필요한 곳에 사람을 보냈다. 고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빈궁 저하께서 알아보겠다 하셨나이다.”
“알겠네.”
고윤은 고개를 끄덕이곤 세자빈이 보낸 나인을 돌려보냈다.
“무어라 청한 것입니까.”
은헌을 보며 고윤은 코를 찡긋거렸다.
“필요한 것이 생겨 구할 수 있는지 여쭤본 것입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란 그 말을 들은 지 이틀 만에 써먹은 기회라 염치없긴 했다.
“그런 것이 있으면 제게 말씀하셔도 되었을 것을요.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저하께 청하여도 되고요.”
세자에게 말하면 흔쾌히 구해줄지도 몰랐다.
고윤은 손가락으로 턱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빈궁 저하께서 제게 빚진 기분을 가진 것 같아서요. 빚이란 것이 신세 질 때는 저 편하니 아무 생각 없다가도 갚을 때는 마음의 부담이 생기지 않습니까. 대감께서 세자저하께 신세를 지는 것보단 어차피 써야 할 기회라면 이번에 가감할 것 없이 있는 것을 없애는 편이 나을 거라 여긴 겁니다.”
은헌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제가 부인께 신세를 진 듯합니다.”
“알고 계시거든 부지런히 갚아주십시오.”
잔뜩 생색내며 으스대는 말투로 고윤이 젠체하자 은헌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제게 무엇이든 말씀하여 주십시오.”
고윤은 은헌을 빤히 보다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주시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고윤은 저가 걸치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이것도 귀한 비단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것으론 제 성에 차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직 복숭아를 받은 답례도 다 하지 못했잖습니까.”
은헌은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심부름을 보냈던 내관의 뒤로 익숙한 얼굴의 대전 내관이 함께 오고 있었다.
“일어나야겠습니다.”
은헌이 자리를 털자, 고윤도 함께 몸을 일으켰다. 고윤은 내관을 한 번 본 뒤 몸을 돌려 손을 뻗었다. 은헌은 그의 손을 꽉 쥐어오는 것에 고윤을 보며 시선을 떨궜다.
“잊지 마십시오. 대감께선 언제든 제 손만 잡으면 된다는 것을요.”
“……역시 금붙이 정돈 챙겨올 걸 그랬나 봅니다.”
도망갈 준비는 아예 해오지 않았다며 은헌이 농을 던지자 고윤은 코웃음을 쳤다.
“은헌 대감.”
대전 내관이 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 * *
고윤은 깊이 몸을 숙였다. 은헌 역시 예를 갖춰 문후를 드렸다. 머리 위에서 혀 차는 소리가 크게도 울렸다.
“고개 들라.”
은헌과 고윤은 그제야 방바닥에 박힌 듯 숙였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왕은 그들을 보며 숨을 깊이 삼켰다 세차게 내뱉었다.
“따로 부르지도 않았는데 문후를 청하다니 벽동엔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했더냐?”
은헌은 담담히 웃었다.
원손의 회임 이후 아침마다 궐에 들어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대전에 드는 발길을 끊었다.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면 부왕과 마주칠 일을 만들지 않았다.
“궐과 지척인 벽동에 해가 홀로 다른 방향으로 뜰 일이 있겠습니까. 그저 간만에 부인과 함께 문후를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은헌 네가 말이지.”
왕은 가당치도 않은 말을 들었단 듯 코웃음 쳤다.
“아들로서 온 것이냐? 더는 그 노릇 안 하기로 한 줄 알았건만.”
은헌은 그 말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웃었다.
“그러려 했으나, 천륜을 제멋대로 끊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왕은 버럭 소리 지르는 대신 그런 대군을 재밌단 듯 보았다.
“그래. 하면 금일은 누구로 걸음한 것이더냐? 아들의 단순한 문후더냐? 아니면 신하인 대군으로서의 걸음이더냐?”
은헌은 고윤에게 한 번 시선을 던지곤 입을 열었다.
“소자의 말은 귀에 담기 싫어하시니, 소신이 고하도록 하겠나이다.”
왕은 곁에 앉아 오가는 말을 기록하고 있는 사관에게 시선을 던졌다.
“고하라.”
사관은 서슴없이 붓을 움직여 모든 대화를 적었다. 은헌은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봄, 소신에게 명령을 내리셨던 종친부에 관한 조사 중 적발된 침언군의 횡령과 관련된 일이옵니다.”
왕은 눈을 찌푸렸다.
“그 일이라면 조사가 끝났고 이미 그에 따른 합당한 처벌을 하였다.”
“하나, 그 일 이후에 관한 보고는 올라오지 않았고 추가 조사 또한 없었습니다.”
왕은 잠시 말을 멈추라는 듯 은헌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다시 사관을 보았다.
“자리를 비우거라.”
“전하!”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는 사관이 황망한 얼굴을 하곤 왕과 대군을 번갈아 보았다. 왕은 그리 반발하는 게 당연하단 듯 고개를 끄덕이곤 은헌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대군은 신중히 발언하거라. 그 입에서 나온 말이 조정의 눈과 귀에 오르내린다는 것을 잊지 말고.”
경고이자 충고였다.
은헌은 짧게 숨을 끊어 뱉곤 곁에 앉은 고윤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마주치자 고윤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단 듯 손바닥을 펼쳐 보여주었다. 은헌은 사관을 향해 웃었다.
“계속해서 고하겠나이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열었다.
“사흘 전 소신이 저하의 부름으로 사객연을 위해 입궐하였다가 침언군을 보았습니다.”
횡령에 대한 처벌이 이뤄졌다곤 해도 종친부에 속한 이라 궐 출입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침언군이 소신에게 만나야 할 이가 있다 하여 따라갔더니 화국의 사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의 얼굴이 굳었다.
“무어라? 대군은 소상히 고하라.”
“그자가 소신에게 이르길 오랜 예언을 다 이루지 않음이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 하였나이다.”
“그만!”
왕은 손바닥으로 서궤를 내리쳤다.
고윤은 왕을 살폈다. 얼굴 그득 화가 가득했다.
“대군은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소신은 지난 밤에 그저 보고 들은 바를 거짓 없이 고해 올리는 것이옵니다.”
왕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은헌은 그런 왕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대전 안에 있는 누구도 소리 내지 않았다. 낼 수도 없었다. 대군이 직접 입으로 역모를 꾸미는 일을 보았다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대군을 왕으로 세우려는 역모였다. 빠짐없이 기록해 나가던 사관의 붓끝조차 잠시 멈춰 섰다.
침묵을 깬 것은 왕이었다.
“예언이라.”
왕의 목소리는 위험할 정도로 낮았다.
“하늘의 뜻을 거스른다?”
말을 되새기듯 중얼거리던 왕은 은헌의 곁에 앉은 고윤에게 시선을 던졌다.
“부부인은 그 예언이란 것을 들어보았느냐?”
고윤은 고개를 숙였다.
“혼서가 오갈 때, 부친께 전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들어 알게 된 것도 있고, 머리가 큰 뒤로 제힘을 깨우치며 알게 된 것도 있었지만 왕실에 전해졌다는 예언에 관해 구체적인 말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럼 대군의 말을 어찌 생각하느냐? 과인이 보기엔 역당의 우두머리가 저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말이다.”
고윤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왕을 보았다.
“아뢰옵니다. 소신은 원신인(元申人) 14)에게 정범의 죄를 물어 처벌한 적이 없사옵니다.”
“원신인이라?”
“범행을 저지름에 있어 악의를 지니고 행한 이가 분명 따로 있고, 그 행위를 보아 눈감지 않고 즉시 고변한 이가 있거늘. 이것을 어찌 같은 선에 놓아 죄를 묻겠나이까.”
“하지만 애초에 대군이 그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일어날 일도 아니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태를 저가 정하여 태어나는 자식은 없나이다. 부모가 자식을 원하여 천지 사방에 정성을 올리고 심신을 가다듬으며, 공덕을 쌓는 일은 있으나 자식이 어떤 부모에게 태어나고자 천지 사방에 절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바가 없나이다. 낳은 이가 전하시기에 대군께서 지금의 자리에 계신 것일 뿐, 대군께서 원하여 그리 태어난 것은 아니시지요.”
고윤은 단숨에 털어내듯 말을 뱉곤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이 나라 어느 법도에서도 태어남 그 자체에 죄를 묻지 않습니다.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대물림하여 묻는 이가 있을 뿐이지요.”
왕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과인의 부도덕함을 대군에게 떠넘겨 묻지 말라 책망이라도 하는 것이냐?”
“전하께서 그저 더 많은 백성을 돌보고자 하신 것은 아옵니다. 역병이 돌고 땅이 말라 곡식조차 나지 않으니 거리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위정자가 그것을 돌보고자 하는 것을 어찌 책망하겠나이까. 하나, 그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니지요.”
“그럼 틀린 것이냐?”
왕이 위험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고윤은 위협 따위는 느끼지도 못한 것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릇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땅 난 백성들을 위해 전하께서 무엇으로부터 등을 돌렸는지 잊지 않으셔야 전하의 등 뒤에 남은 자가 피눈물 흘리는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죄지은 것도 모르고 잘했다며 스스로 세뇌하는 것처럼 바보 같은 업보도 없었다. 누구를 희생시켰는지도 모른 채 잘한 일이라며 미안해하지 않는 것도 죄였다. 고윤은 왕에게 그 말을 꼭 한 번 하고 싶었다.
왕은 못마땅한 듯 은헌을 보았다.
“아주 발칙한 것이. 태어나길 짝으로 태어났다더니 꼭 저 닮은 것을 골랐구나.”
“소신도 그리 생각합니다.”
은헌은 담담히 웃었다.
그 얼굴에 왕은 무참히 얼굴을 구기곤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서 뭘 바라고 여기까지 온 것이냐?”
“이번 일에 관한 조사를 다시 소신에게 명하여주십시오.”
은헌은 바라는 것을 입에 올렸다.
“역당의 우두머리가 될지도 모를 네놈에게 칼자루를 쥐여달라는 말로 들리는구나.”
삐뚤어진 목소리에 은헌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소신은 세자저하께서 누구보다 선정을 펼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여 그에 방해가 되는 것을 치우고자 함입니다.”
왕은 은헌을 보며 혀를 찼다.
“욕심을 품어본 적이 없다?”
은헌은 그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말을 여기서까지 들을 줄은 몰랐다. 무엄하다 욕해도 웃음이 나왔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소신은 감히 이 나라의 내일을 그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지금에 머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요.”
그는 그리 살았다. 그저 그 하루를 더 살고자 발버둥을 쳐 왔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합니다. 소신이 무엇을 더 가지기 위해 욕심을 품겠습니까?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을 지키기에도 벅찬 것을요.”
왕은 실소를 흘렸다.
“그저 도망칠 궁리만 하며 세월 보내는 줄 알았더니, 네게도 지키고 싶은 게 생긴 모양이구나.”
예전이라면 그저 속내를 감춘 채 물 흐르듯 흘려보냈을 물음에 은헌은 확고하게 뜻을 밝혔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할 생각이냐.”
은헌은 긴장을 풀어내고 고윤과 함께 논한 계획 일부를 털어놓았다.
“우선 사신단이 경을 떠나기 전에 그들이 어떻게 침언군과 닿았는지 알아낼 것입니다.”
“사신단은 사흘 내로 이곳 도성을 떠날 것이다.”
그 사이 침언군이 공사를 벌였던 곳에 갔다 온다고 해도 일주일은 걸릴 터였다.
“사흘이면 족하옵니다.”
은헌은 그리 말하며 곁에 앉은 고윤에게 눈짓했다. 왕의 시선을 받은 고윤은 태연하게 웃었다. 사실, 사흘도 길었다.
* * *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남은 자잘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고윤은 시각을 맞춰 근정전 앞뜰에 섰다. 높은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정전에 삼도를 좌우로 품계석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정전을 비우라는 명에 금군들이 사방을 지키고 있어 조정 대신들도 근처에 발을 못 들이고 돌아갔다. 개미 하나 들지 못하도록 비운 너른 터는 고요했다.
“슬슬 움직여 볼까요.”
고윤은 하늘을 힐끗 보곤 은헌에게 말을 붙였다. 초저녁부터 지루하게 기다리던 은헌이 정말로 반가운 소리라는 듯 얼굴을 활짝 폈다. 얼른 끝내고 궐 밖으로 나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고윤은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던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별 것 아닌 행동처럼 보였으나 은헌의 눈에는 고윤을 둘러싸고 있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안개인지도 몰랐다. 어디선가 피어오른 뿌연 운무 같은 것이 사락사락 한 겹씩 더해지며 사방에 깔렸다. 그다지 눈에 거슬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고윤이 힘을 풀어내자 은헌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또다시 변해갔다. 단단히 두 발 딛고 선 땅도,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는 하늘도 달라진 것 없이 똑같은데 무언가 껍질을 한 꺼풀 벗어낸 것처럼 새것으로 바뀐 듯 반짝였다.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오며 남긴 흔적도, 비바람이 스쳐 지나며 새겨놓은 세월도 지워내면 꼭 이럴 것 같았다.
그 모든 반짝거림 속에 고윤이 서 있었다. 애초에 고윤을 중심으로 파문을 그리며 물결치듯 원을 그리며 점점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니 당연했다. 사내에게 어여쁘단 말을 써도 된다면 은헌은 고윤에게 지금 그 말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름 발라놓은 찰떡처럼 말캉말캉한 얼굴이 세상 떫은 감을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겠지만 말이다.
고윤은 제힘을 감당해 낼 수 있을 만큼의 결계를 친 뒤 입술을 오므려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살아 있는 이에게는 들리지 않는 특정한 이들을 불러들일 만큼의 휘파람이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러자 근정전 앞마당과 뒷마당 가릴 것 없이 변화가 시작되었다.
돌바닥 위로 돌을 굴리는 것 같은 긁는 소리가 났다. 은헌은 궐 안에선 조금 낯선 소리라 그 방향으로 재빨리 시선을 움직였다. 어둠에 가리어져 어슴푸레 그림자만 보이는 것에 그는 느긋하게 서 있던 자세를 고쳤다.
“제가 부른 겁니다.”
고윤의 말에 은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살폈다. 형체만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가까워지자 그의 눈이 커졌다. 퍽 익숙한 형체였다.
“저것을요?”
“예.”
근정전 기둥과 월대 난간을 포함하여 정전을 둘러 사방에 배치된 서수상 15)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방위에 따라 배치된 사방신과 그 사이사이 놓인 열두 짐승의 형상과 정방형 꼭지에 놓인 사자상, 정전의 남쪽 아래에 놓인 백택과 금천을 내려다보고 있던 천록 16)까지 빠짐없었다.
돌로 만들어진 것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기지개를 켰다가 하품을 늘어놓는 것에 은헌은 헛웃음을 흘렸다. 갸릉갸릉 울음소리까지 들으니 정말로 살아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얼굴이 조금 더 익살스럽게 생긴 것을 빼면 말이다.
고윤이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짐승들은 저마다의 위치를 잡았다. 원래 있던 방위에 발을 디디고 앉자 고윤이 허공에 손을 흔들었다. 그는 길을 열고 그 건너편을 들여다보면서 얼른 건너오라는 듯 손짓했다.
크르릉!
조금 전까지도 느긋하게 있던 석수들이 저마다 격렬하게 반응했다. 꼬리를 한껏 위로 치켜세운 것도 있었고, 솜뭉치 같았던 앞발에 어느새 발톱이 날카롭게 드러나 있었다.
은헌은 고윤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괜찮겠습니까?”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께서 계시면 무탈할 겁니다. 원래 궐을 수호하고 왕실에 들러붙는 저주나 액운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니까요.”
그러니 은헌의 몸에 흐르는 피가 왕에게서 물려받은 것인 이상 이보다 더 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원래 위치에 두고 벽동 집에 있는 짐승을 궐로 끌어들였다면 좀 말이 달랐겠지만 말이다.
은헌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길을 건너오는 짐승의 목줄을 고윤에게 건네받아 단단히 쥐었다. 짐승도 저를 향해 발톱을 드러내는 석수들의 모습에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덤빌 듯 몸을 낮췄다. 그걸 보며 은헌은 힘을 줘 짐승의 꼬리를 붙들었다. 당장 달려들어 서로 물어뜯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상황에 고윤은 크게 손뼉을 쳤다.
촤악!
어디서 쏟아붓는지 모를 물이 그대로 폭포수처럼 떨어져 석상을 뒤덮었다. 더운 날에 열 내는 것들을 시원하게 씻긴 물을 보며 고윤은 소매를 뒤져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또 뭡니까?”
은헌의 물음에 대한 답을 미처 하기도 전에 주위를 둘러싼 석수들이 먼저 반응했다.
고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손에 든 것을 결대로 찢어서 석수를 비롯해 짐승에게까지 하나씩 입에 물려놓았다. 앞발로 야무지게 붙잡고 쩝쩝 입을 오물거리며 먹기 시작한 것을 보며 고윤은 순식간에 비어버린 손에서 부스러기를 툭툭 털어냈다.
“정확히 뭐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는데 말린 고기와 비슷한 겁니다. 좋아한다 해서 구해봤고요.”
“그 거리에서 말이지요?”
“거기 아니면 파는 곳도 없을 겁니다. 석상이 먹을 수 있는 육포 같은 건요.”
은헌은 정말로 별걸 다 파는 거리라고 생각하며 눈에 보이는 것에 웃음 지었다.
“이럴 줄 알고 계셨습니까?”
“남산골 주변에 개가 무리 지어 돌아다니다가 크게 싸움 나면 누가 꼭 어디서 우물물을 길어와 흩뿌렸는데 그러면 이상하게도 금방 조용해지더군요.”
지나가다 본 것을 따라 했는데 이리도 효과가 있을 줄은 고윤도 알지 못했다. 어쨌든 발등 떨어진 불똥은 치웠으니 다음 차례였다.
고윤은 입에 넣어준 것을 다 삼키고 또 달라는 듯 발치에 앉아 꼬리를 살랑거리는 덩치가 커진 짐승을 보았다. 그는 손바닥으로 턱 아래를 쓱쓱 긁어주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 녀석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봐 줄 수 있는가?”
고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수들이 코를 킁킁댔다. 여전히 저주를 덧쓴 짐승을 향해 불편한 듯 그르렁대긴 했으나 아까만큼 날 서 있진 않았다. 가까이 다가와 코를 들이미는 석수들을 따라 부산하게 움직이려 하는 놈을 은헌이 꽉 붙잡고 눌러 앉혔다.
“가만히 있거라.”
한참이나 짐승의 냄새를 확인하던 석수 중 하나가 고개를 들고 북쪽 하늘을 응시했다. 천록이었다. 짐승과 똑같이 머리에 외뿔 하나 솟은 천록이 짐승과 북향을 번갈아 살피더니 이내 몸을 훌쩍 날렸다.
고윤은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천록의 등을 보며 주를 외웠다. 애초에 주술을 튕겨내기 위해 만든 것이라 쉽게 걸리지 않았지만, 두어 번의 실패 끝에 가까스로 추적을 위해 그의 힘을 천록의 발목에 매듭짓는 것에 성공했다.
금천을 지키던 천록 하나가 자리를 비우자 남은 석수들은 슬렁슬렁 코를 맞대더니 이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고윤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선 백택 상을 보았다. 사슴과 같은 뿔이 두 개에 온몸이 비늘로 덮인 백택은 고윤의 다리에 코를 한 번 쓱 비볐다. 그러곤 이마에 달린 눈으로 은헌을 보고 그 아래 두 개의 눈으로 고윤을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 된 것입니까?”
고윤은 몸을 돌렸다.
“뭐, 일단락은 되었습니다. 이 녀석이 대체 어디에서 온 건지 알게 되면 그 저주가 뭔지 정확한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주술의 흔적을 쫓는 데 이만한 방법도 없으니 이제 기다릴 수밖에요.”
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면 침언군이 무엇 때문에 화국과 손을 잡았는지도 알게 되겠군요.”
“그러면 좋겠지만.”
고윤은 회의적인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는 없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었다.
“어쨌건 이 녀석을 필요로 한 일이 뭔지 알면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들도 눈에 띄게 대놓고는 움직이지는 않을 테니 최대한 조용히 손을 쓰려 하겠지요.”
그게 은헌과 고윤이 세운 계책의 기본이었다. 상대가 무얼 하든 그 수를 읽고 있다면 막아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 땅을 떠나기 전까지는 죽여서도 안 되니 참으로 까다롭기도 하지요.”
은헌의 말에 고윤이 실소를 흘렸다.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사신으로 온 이를 죽여 보낸다는 의미가 본래 그러했다. 그런 면에서 보았을 때 왕이 은헌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는 게 신기한 것이었다.
은헌은 숨을 깊이 삼켰다 뱉어내곤 웃으며 고윤과 시선을 마주했다.
“천록이 돌아올 때까진 기다려야 하니 우선 돌아가 있을까요?”
궐에 들어와 하루 머물게 해달라는 청을 동궁에 전하자 세자는 전각 하나를 열어주었다. 그것도 동궁에 달린 전각이었다. 세자빈과 새로 태어난 아기씨까지 있으니 주상께서도 저번처럼 들이닥치진 않을 거란 말에 고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전에 다시 결계를 묶어두고요.”
한 번 크게 결계를 흔들었으니 어딘가 틀어진 이음새가 있을 터였다. 그 틈을 고윤은 제힘으로 메꿔 넣었다. 이렇게 하면 또 다른 문제가 있긴 하지만, 갈라진 벽에 진흙을 덧바르는 것처럼 꼼꼼히 마무리 짓고서야 그는 근정전을 떠났다.
* * *
인시(寅時)가 다 되어서야 천록에게 묶어두었던 주술에 반응이 왔다. 가물가물 눈을 뜬 고윤은 몸을 비틀 듯 옆으로 돌아누워 손을 뻗었다. 무언가에 손이 걸렸다. 앞을 가로막은 것을 확인코자 그는 손바닥으로 그것을 더듬었다. 따끈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대감.”
“예.”
그는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 방에서 곧장 들려오는 대답에 잠시 멍하니 있었다.
“침수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조금 설쳤습니다.”
고윤은 또다시 반박 늦게 침음을 흘리고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머리를 여태 받치고 있던 팔을 거두고 은헌이 몸을 일으켰다. 고윤은 그 모습을 보며 저가 왜 여기까지 굴러왔는지 확인했다. 분명 은헌과 그 사이에 사람 둘은 누워도 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잠들었는데 말이다.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드렁드렁 곯아떨어진 짐승이 저가 잠들었던 자리에 누워 사지를 뻗은 것이 보였다.
“그나저나 아주 곤하셨나 봅니다.”
은헌의 말에 고윤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를 치고, 허물고, 다시 손보는 와중에 기력을 다 쏟았는지 혼절하듯 기억이 뚝 끊겨 있긴 했다. 그러니 그 와중에 은헌에게 들러붙었을 터다. 부족한 기운을 얻겠다고 말이다.
고윤은 콧등을 찡그리곤 헛기침을 했다.
“잠버릇이 이리 심하진 않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부터 하는 고윤을 보며 은헌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탓하고자 말 꺼낸 것이 아니니 괘념치 마십시오.”
은헌은 그리 말하곤 밖에 번 서고 있는 이들을 불러들였다.
나인들이 방을 정리하는 동안 은헌과 고윤은 다른 곳으로 옮겨 의관부터 고쳤다. 여기저기 구겨진 도포를 움직이기 편한 철릭으로 갈아입었다. 은헌은 팔을 크게 휘둘러 확인하곤 옆에 선 내관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손에 올라온 검을 살피며 은헌이 웃었다. 궐에서 무기를 패용할 수 있는 자는 정해져 있기에 두고 온 그의 것 대신 세자에게 빌린 것이었다. 한데 세자가 그의 생각보다 더 귀한 검을 내어주었다.
“저하께서 이르시길 다치지 말고 귀한 사람 지키라 내어주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은헌은 짧게 웃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이제 떠날 준비는 다 된 겁니까?”
고윤은 빈손이었으나 그걸로 충분하단 듯 어깨를 으쓱였다.
“더 늦기 전에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나인들이 섬돌 위에 신을 올렸다. 신을 신고 내려선 고윤을 향해 은헌이 손을 내밀었다. 둘에게는 퍽 익숙한 일이지만 주위에 선 이들이 다급히 시선을 바닥에 떨궜다.
고윤은 앞서 성큼 걸어 나가며 길을 열 틈새를 찾았다. 궐 내부인 데다가 동궁전이라 불안하게 길이 열릴 것 같았지만, 지체할 시간은 더 없었다. 그는 비현각으로 이어지는 문으로 걸음하며 길을 열었다.
내관과 궁녀들이 뒤를 따르다 이내 걸음을 멈췄다. 문을 넘어가며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대군과 부부인의 모습에 다들 입을 굳게 다물곤 곧 아무 일도 없었단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젖은 흙냄새와 오래된 이끼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어딘지 모르게 목구멍 안이 까끌까끌해지는 느낌에 고윤은 헛기침을 뱉어 호흡을 가다듬었다.
은헌은 희미하게 밝아진 하늘을 살피곤 주위를 훑었다. 주변에 인가는 없는 곳인지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눈이 금방 적응하고 나자 희미한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언덕인 건 알겠는데 어딘지는 모르겠군요.”
분명 침언군과 관련된 곳일 거라 생각했는데 캄캄한 곳에서 보니 주변의 풍광이 많이 생소했다.
고윤은 눈앞에 보이는 언덕을 흘깃 보곤 혀를 찼다. 천록에게 묻혀둔 주술의 끈이 가리킨 곳이 여기니 이 언덕의 정체가 대충 짐작 갔다.
“언덕이 아니라 이곳이 옛 무덤일 겁니다.”
은헌은 다시금 눈앞에 둥글게 솟아오른 언덕을 보았다.
“옛 무덤 중에서도 이 정도면 꽤 권세 높았던 이겠군요.”
정확히 어디에 누구의 묘가, 능이 있다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적인 것은 배워 은헌도 알고 있었다. 아는 것이 그 정도인 것에 그쳤지만 말이다.
“뭐, 우선 돌아보며 입구를 찾아보죠. 이 녀석의 다리가 무사한 것을 보면 제대로 된 곳은 아니겠지만.”
고윤은 반가운 곳에 찾아왔다는 듯 열심히 꼬리를 흔드는 짐승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하긴. 무덤 지키는 짐승을 같이 묻어두면 다시 열었을 땐 다리를 깨어놓는다고 했으니…….”
한 번 무덤을 만들고 후에 죽은 누군가를 합장해야 할 경우가 생겨 열어야 할 때는 무덤 지키라 만든 것을 깨부순 뒤 다시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지금도 지키고 있는 풍습이었다. 다만, 동자석 같은 건 밖에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근래 들어서 다리 깬 것은 치우고 새로 세우는 일도 있었다.
은헌은 짐승을 앞세워 걸었다. 조금 걸어 언덕 아래를 돌아가자 조금 전 디뎠던 곳과는 달리 진흙이 신에 엉겨붙기 시작했다. 짐승은 끙끙 앓으며 앞발로 흙을 걷어 무덤 쪽으로 올리려 애썼다.
“여기가 맞기는 맞는가 봅니다.”
고윤은 무덤을 원상태로 돌리려는 짐승의 몸짓에 조금 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언덕 아래쪽에 무너져 내린 곳이 보였다. 고윤은 은헌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앞으로 오는 것을 막았다.
오래된 술법이지만, 여전히 강력한 힘을 지닌 진묘수를 거느린 이의 무덤이었다. 그런 무덤을 파헤쳐 놓았으니 무슨 일이 있을지는 그도 장담을 못 했다. 입구를 들여다보자 그냥 토굴처럼 어두웠다.
“일단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고윤의 말에 은헌이 낯을 굳혔다.
“혼자 가실 겁니까.”
탐탁지 않은 말투에 고윤은 짐승을 보았다.
“그게 나을 듯합니다. 크기로 봐선 금방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으니 저가 먼저 확인한 뒤 대감께서 들어오시는 게 나으실 겁니다. 망봐줄 사람도 있어야 하고요.”
은헌은 무덤 입구와 바깥을 한 번 둘러본 뒤에야 한숨을 내쉬며 동의했다.
“확실히 산 자를 제가 맡는 편이 낫겠군요.”
고윤은 대답 대신 코웃음 치곤 입구에 발을 들이밀었다.
“그렇다고 어찌 그리 매정하게 간단 말도 없이 가십니까?”
은헌은 입구 안으로 순식간에 몸을 감춘 고윤에게 투덜대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불퉁하던 그의 낯이 서늘해졌다.
“부인?”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곤 안을 살폈다. 고윤이 서두르긴 했으나 이렇게 빨리 시야에서 사라질 리 없었다.
“부인! 안에 계십니까?”
은헌은 목소릴 높여 고윤을 불렀으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숨통이 순식간에 꽉 죄어들었다.
“부인!”
* * *
고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사라지고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에 긴장했다. 뒤로 고개를 돌리자 문이 보였다. 꽉 닫혀 있는, 돌로 만들어진 문에 고윤은 짧게 숨을 골랐다. 그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모를 긴 통로는 불빛이라곤 하나도 없음에도 훤히 보였다. 그는 복도 가운데 이어 있는 좌상을 한 번 보곤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안으로 갈수록 몸에 닿는 공기가 점점 끈적끈적해졌다. 고윤은 제힘이 통하는 곳인지 아닌지 먼저 확인했다. 저번에도 무턱대고 뛰어들었다가 망량에게 얽혀 호되게 고생한 뒤엔 그나마 조심성이 늘었다. 다행히 제약은 없었다. 그렇단 말은 언제든 여길 벗어날 수 있단 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걷던 고윤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가 눈앞에서 모습을 감췄으니 은헌이 저를 찾고 있을 터였다. 안을 살피고 오겠다 했지만, 이쪽은 생각하지 못했던 곳이라 언질도 없이 그냥 왔으니 말이다.
“지금이라도 돌아 나가야 하나.”
혼잣말로 중얼대던 고윤은 이내 움찔했다.
그의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모를 앞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선 고윤은 순식간에 기운을 끌어올려 홱 하니 몸을 돌렸다.
“거기 누구시오?”
고윤의 뒤에 서 있던 흐릿한 형체가 웃음을 흘렸다.
“청하지도 않은 손이 당당하기도 하지.”
고윤은 눈을 찌푸렸다.
“이곳의 주인장 되시오?”
안개 같은 형체가 점점 선명해지더니 이내 뚜렷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눈높이만큼 올라오는, 흙으로 빚어 구운 토기 말 위로 토기로 만든 장군상이 입을 열었다.
“주인께선 깊이 잠들어 계신다.”
고윤은 토기로 만든 장군을 살폈다. 입고 있는 갑옷은 아주 오래전 쓰인 것과 닮아 있었고 등 뒤에 매달린 커다란 삭 18)이 인상적이었다. 상여에 달아놓는 꼭두 19)와 똑같이 생긴 터라 대충 어떤 의미로 여기에 있는지는 짐작이 갔다. 무덤 주인은 아니라 스스로 밝혔고, 무장한 것으로 봐선 진묘수와 마찬가지로 이 무덤을 지키는 것 중 하나일 터였다.
고윤이 장군상을 살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군상 또한 고윤을 빤히 보았다.
“이상도 하지. 산 것의 피륙 속에 어찌 그런 힘을 담고 있는 것이냐? 그것도 역신의 힘을 말이다.”
고윤은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픽 웃었다.
“타고난 것이라 저도 모릅니다.”
장군상은 코웃음 쳤다.
“그런 힘을 지니고 죽은 자의 안식처까지 들어온 것을 보면 살아 돌아나갈 생각은 없는 게로구나.”
“그럴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밖에 기다리는 이가 있어 살아는 가야 합니다.”
나가서 얼굴 맞대기 무섭게 꿍얼꿍얼 잔소리를 퍼부을 테지만 말이다.
고윤은 은헌을 떠올리며 소매를 슬쩍 움직였다.
* * *
은헌은 짐승을 데리고 무덤 안에 들어섰다. 먼저 살펴보고 부른다 했으나 고윤의 행방이 묘연해졌으니 마냥 손 놓고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해가 뜨지 않은 데다 불빛 하나 없는 토굴 같은 곳은 어둡고 습했다. 걸음 하나 내딛는 것이 조심스러워 은헌은 곧장 되돌아 나와 횃대로 쓸 만한 나무를 찾았다.
이러라고 내어준 칼도 아니지만 과감하게 한 손 잡힐 법한 나뭇가지를 베어낸 뒤 그는 옷자락에 댄 천을 뜯어내 감았다. 허리끈에 매달린 주머니 중 작은 병을 꺼내 열자 기름 냄새가 났다. 가져온 부시 깃을 꺼내 불을 붙이자 만듦새가 어설퍼도 주위는 훤히 밝힐 횃불이 활활 타올랐다.
눈으로 주위의 사물 구분이 가능해지자 은헌은 망설이지 않고 무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무너진 돌기둥을 나무로 받쳐 올린 것이 보였다. 그곳을 지나자 제대로 허리를 펴고 서도 될 것 같은 석실이 나왔다. 앞쪽으로 닫힌 문이 하나 더 보였다. 안으로 끝까지 들어왔지만, 고윤은 없었다. 은헌은 미처 못 본 곳이 있나 살폈으나 빠진 곳도 없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때, 은헌의 다리에 짐승이 주둥이를 문질렀다. 은헌은 그런 짐승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내 쓴웃음을 머금곤 짐승에게 매어놓은 목줄을 꽉 붙들었다. 만약 저번처럼 엉뚱한 곳으로 빠진다면 더 곤란한 일이 생기겠지만, 지금의 그에겐 무작정 기다리는 것 외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부인께 호되게 꾸중 들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짧게 혀를 찼다.
“부인께 가자.”
짐승이 꼬릴 흔들었다. 알아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은헌은 애써 웃으며 머릴 끄덕였다.
“그래. 부인께서 계신 곳에 가는 것이다. 알겠느냐.”
컹컹!
짐승이 걸음을 내디뎠다.
은헌은 목줄을 꽉 붙잡곤 그 뒤를 따라갔다. 한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의 불길이 치솟아 오르듯 넘실거리더니 순식간에 꺼졌다. 앞을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밀려들었으나 은헌은 앞을 응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들어갈 수 없는 안쪽까지 들어와도 분명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누군가 불을 밝힌 듯 주변이 훤해지고 있었다.
은헌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쓸모가 없어진 횃대를 던져 버린 뒤 그는 칼을 쥐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주위가 제자릴 잡기 무섭게 은헌은 그대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고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고윤을 본 은헌은 곧장 짐승을 붙잡았던 것마저 놓아버리곤 칼을 빼 들었다. 그의 눈에 희미한 혼백 같은 것이 빤히 그를 마주 보았다.
“귀신인가?”
장군상은 호탕한 소리 내 웃었다.
“죽은 자를 찾아 여기까지 온 이가 물을 말은 아니지 않나?”
은헌은 예기가 흐르는 칼을 곧게 뻗곤 남은 손으로 조심스레 고윤의 몸을 흔들었다. 아직 따뜻한 체온이 만져졌다.
“부인? 정신 차려보세요.”
“그리 곱게 깨워선 못 일어날걸?”
장군상이 대수롭잖은 말투로 충고를 던졌다. 은헌은 매서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부인께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장군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사내더러 부인이라. 여기서 좀 오래 머물고 있긴 한데. 요즘은 사내끼리도 혼례를 올리나 보지?”
장군상은 흥미롭단 듯 은헌과 고윤을 번갈아 보았다.
“저것과 혼인이라. 그러고 보니…… 너도 평범치는 않구나.”
은헌은 미간을 찡그렸다.
“썩은 흙으로 빚어 정신이 온전치 않은 것이냐? 나는 네게 부인에게 무얼 했는지 물었다.”
서늘한 목소리에 장군상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히죽거렸다.
“재웠지.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죽은 것과 다름없긴 하지만……!”
은헌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을 휘둘렀다.
“그런 것은 소용……!”
태연히 서 있던 장군상이 팔을 움켜잡고 타고 있던 말을 움직여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은헌은 검 끝에 느껴진 베이는 감각에 입꼬리를 뒤틀었다. 귀신도 베어낼 수 있다는 사인검을 준 세자에게 고마웠다.
“이번에도 헛소릴 늘어놓으면 목이 날아갈 것이다.”
장군상이 눈꼬릴 추어올렸다.
“감히! 역신의 힘을 지닌 놈을 재웠기로서니 그게 무슨 대수라고! 이 땅에 찾아온 재앙을 잠재워 뒀으니 감사의 인사는 못 들을지언정 은혜도 모르는 것이구나!”
은헌은 실소를 터뜨렸다.
“재앙이라니 누가 말이냐?”
“네가 그리도 조심스레 흔들어 깨우는 저놈……!”
“닥치시오!”
은헌은 뒤에서 들려오는 일갈에 고개를 돌렸다. 고윤이 오만상을 다 쓴 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인!”
“대감께서도 좀……!”
차마 닥치란 말은 못 하고 고윤은 큰 소리에 골이 지끈거려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괜찮으십니까.”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은헌을 향해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괜찮아 보입니다.”
“……괜찮아질 겁니다.”
“참으로요?”
은헌은 어디 부딪쳐 긁힌 곳은 없는지 고윤의 뒤통수를 살피며 물었다. 고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무탈합니다. 저를 못 믿으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은헌은 서늘한 얼굴로 반박했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것이 믿길 리가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어디서 거짓부렁이냐며 고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고윤은 멋쩍은 듯 혀를 차곤 금방 시선을 돌렸다.
고윤의 시선이 장군상에게 닿았다.
“의식 잃은 사이 꽤 멋대로 지껄여 대는군.”
장군상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 쳤다. 그러곤 이내 다 귀찮다는 듯 몸을 돌려 제 곁에서 꼬리를 흔드는 짐승을 보았다.
“이리 오너라.”
짐승은 반갑게 앞으로 나섰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짐승을 보는 장군상의 눈빛이 매서웠다.
“이건 또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리 중얼거리며 장군상은 작은 손으로 단숨에 짐승의 목덜미를 낚아채 번쩍 들어 올렸다.
“네 녀석, 자리를 비우더니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닌 것이냐?”
짐승은 울상이 되어 은헌과 고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애처롭게 울었다.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장군상은 눈을 가늘게 뜨곤 남은 빈손으로 짐승의 목에 손을 댔다.
“무슨 짓이냐!”
은헌은 갑작스레 짐승의 목을 죄는 장군상을 보며 소리쳤다. 장군상은 미간을 찌푸린 채 눈길만 움직여 은헌을 보았다. 이번에도 방해받은 것에 짜증이 난 듯했다.
“네놈은 이게 뭔 줄 알고 있는 거냐?”
“진묘수가 아니오.”
고윤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진묘수라…… 요즘은 그리 부르나? 하긴 무엇으로 불리든 상관없지. 이건 주인이 잠든 이곳의 바깥문을 지키는 아이다.”
은헌과 고윤은 짐작한 사실을 확인받은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상은 다시 짐승을 보았다.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이곳을 지키고 있을 때의 이야기고 밖으로 나가면 말이 다르거든.”
“무슨 소립니까.”
고윤은 다급히 물었다.
“무덤을 다시 열 때. 이 녀석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은 처음의 그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한데 사지 멀쩡한 것이 지켜야 할 터를 벗어나 밖으로 나갔으니 그 자체로 재앙의 씨앗이지. 무덤에 손댄 이를 쫓아갔으니. 한데 이건 또 엉뚱하게 이상한 주술이 덧씌워졌으니 상관도 없는 이를 해치게 되겠구나.”
고윤의 얼굴이 굳었다.
“이 아일 누가 주웠지?”
은헌이 눈을 깜박였다.
“내가 주웠네.”
“이 무덤을 파헤친 이와 핏줄인가 보지?”
은헌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헛숨을 토해냈다.
“핏줄이 문제가 되는가?”
장군상은 소리 내 웃었다.
“핏줄이 가까운 자일수록 저주를 강하게 받거든.”
은헌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너는 타고난 것이 있으니 그 저주를 피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그게 아닌 쪽은 글쎄.”
장군상이 말끝을 흐렸다.
“파헤친 자는? 그자는 어찌 되는가?”
고윤은 침언군이 아직 목숨 보전하고 있음을 떠올렸다. 금방이라도 짐승의 목을 비틀어댈 것 같은 장군상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죽었을 텐데…… 그쪽은?”
“여태 살아 있다면?”
은헌이 침언군을 마주쳤을 때만 해도 분명 살아 있었다. 제법 눈이 뜨인 그에게 별반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했다면 고윤이 눈치챘을 터였다.
“그런 것까지 내가 알려줘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 녀석을 죽이지 않으면 저주는 점점 더 힘을 키워.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할 것이다.”
숨통을 짓이기는 손길에 짐승의 몸이 점점 더 축 아래로 늘어졌다. 고윤은 그런 짐승을 보았다.
장군상은 짐승을 보며 매서운 말투로 꾸중했다.
“본래의 형으로 돌아가려무나. 할 일도 다하지 못하고 재앙을 퍼뜨리고 다니다니.”
짐승이 구슬피 울었다. 그러나 발아래부터 천천히 회색빛이 몸을 타고 올랐다. 점점 돌로 바뀌어가는 짐승이 또다시 고개를 돌려 은헌과 고윤을 보았다.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진 녀석의 꼬리가 몇 번 흔들리더니 이내 돌로 변해 딱딱하게 굳었다.
은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고윤 역시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듯 덮고 얼굴을 문질렀다.
애처로운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고윤은 혀를 찼다. 침언군과 사신이 저 짐승을 데리고 무슨 짓을 하려는지 얼추 알아냈으니 이제 그가 이곳에서 할 일은 분명 끝이 났다. 이제 가기만 하면 되는데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질끈 감았다가 눈을 뜬 순간 그는 제 옆자릴 박차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은헌의 등을 보았다.
“잠시 멈추게!”
은헌은 손을 뻗어 장군상을 말리려 했다. 고윤은 달려나간 은헌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컥!”
괴로운 신음이 그의 목을 타고 터져 나왔다. 고윤은 순식간에 밀려오는 흉통에 짧은 신음을 뱉었다.
“부인!”
은헌은 고윤의 몸이 무너져 내리듯 휘청이자 단숨에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짐승의 머리가 꺾인 듯 목을 뒤틀었다.
크르르르릉―!
울음이 아닌 음산한 소리가 짐승의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네 녀석!”
장군상은 짐승을 윽박지르듯 불렀다. 그러나 짐승은 얌전히 붙잡혀 있던 몸을 뒤틀었다. 굳어가는 몸을 뒤덮어가던 것이 마른 진흙처럼 갈라져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짐승은 하늘을 향해 머리를 치켜들고 울었다. 그 사이에도 덩치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검은 비늘을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녀석은 괴로운 비명을 흘리며 투레질을 쳤다.
장군상이 양손으로 다시 붙잡으려 했으나 짐승의 반응이 더 빨랐다. 흉흉한 이빨을 드러낸 녀석이 조금 전까지도 저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던 토우 말을 그대로 머리로 들이받았다.
퍽 소리가 나게 밀려 나간 장군상과 말은 일부분이 부서진 듯 파편을 날리며 뒤로 나뒹굴었다.
짐승이 고개를 돌렸다.
소를 닮았던 까맣고 큰 눈이 지금은 완전히 홱 돌아간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윤은 흉부를 지져 대는 듯한 통증에 억눌린 신음을 뱉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정신없이 손을 들었다. 입술을 여닫으며 주를 외워 짐승을 막으려 했으나 온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짐승은 이빨을 드러내고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고윤은 다시 한번 주를 외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런 그의 앞을 너른 등이 가로막았다. 은헌은 고윤의 팔을 물어뜯어 내려는 듯 달려드는 짐승의 입을 보며 손에 빼든 사인검을 꽉 쥐었다. 그리곤 그대로 역수로 쥔 채 박아 올렸다. 예리한 칼날이 짐승의 입천장을 파고듦과 동시에 은헌의 오른팔이 짐승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콰드득!
뼈와 살이 찢겨 나가는 소리에도 은헌은 냉철하게 짐승을 응시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짐승은 이번에야말로 은헌을 이빨로 물어 두 동강 낼 기세로 다시 입을 벌렸다.
“이놈!”
조금 전 짐승의 박치기 한 방에 나가 뒹굴었던 장군상이 등에 멨던 삭을 휘둘렀다. 달과 같은 날카로운 월극(鉞戟) 20)이 짐승의 몸을 두들겼다. 커다란 바위산도 단숨에 반 토막 칠 것 같은 강한 힘을 휘두르며 장군상은 다시 한번 짐승을 후려쳤다.
짐승은 은헌에게 덤비는 것을 멈추고 뒤로 돌아 뛰쳐나갔다. 그 뒤로 장군상이 황급히 따라갔다.
은헌은 그제야 고윤을 돌아보았다.
“괜찮으십니까.”
고윤은 여전히 밀려드는 고통에 이를 꽉 깨물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게 제게 물을 말입니까.”
그의 시선이 은헌의 팔을 향했다. 한순간 밀어닥친 고통에 혼절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독하단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았다. 은헌은 살점이 너덜너덜해진 제 오른팔을 아무렇지 않게 보곤 태연스레 웃었다.
“잘 가지고 갔다 오라 했는데. 귀한 검을 잊어버렸으니 저하께 크게 혼나겠습니다.”
지금 할 소리는 아니었으나 고윤은 울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 했으니 부부간의 의리로 같이 혼나 드리겠습니다.”
“그것참 기운이 납니다.”
은헌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환히 웃어보려 했으나 반쯤 잘려나가 대롱대롱 붙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팔의 고통이 극렬했다. 고통을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고 비워내려고 해도 도통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검을 들고 있었다면 확실히 도려내기라도 했을 텐데.”
그는 혀를 찼다. 이대로 두어봐야 팔은 순식간에 괴사할 거고 살점과 같이 썩은 피가 몸을 돌기 시작하면 목숨 날아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피와 함께 바닥 딛고 서 있을 기운도 날아가는 건지 은헌의 몸이 계속 아래로 무너졌다.
고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잘못된 듯 계속해서 힘이 역류해 그에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기운이 넘치는 상황이 되레 인간의 육신에 무리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됫박에 물을 날라 항아리를 그득 채울 수는 있어도 항아리에 있는 물을 한 번에 됫박으로 되돌려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짐작 가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으나 지금 여기서는 어떻게 해결할 바가 없었다.
막혀오는 숨을 골라 뱉으며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 고윤은 머릴 들었다. 은헌의 몸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실혈이 심하면 돌아가기 힘들지도 몰랐다. 얼른 손을 써야 했다. 고윤은 입꼬릴 끌어올렸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왔는데도 앞뒤 재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습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은헌은 지혈이라도 해 보려는 듯 힘들게 철릭의 허리끈을 풀어냈으나 손이 계속 헛도는 듯했다. 고윤은 은헌의 목덜미를 보았다. 푸른빛이어야 할 핏줄에 지금은 온통 검은빛이 돌았다.
고윤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무릎걸음을 걸어 은헌에게 다가갔다. 기어가듯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곤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은헌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잠깐 사이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은헌은 고윤을 보며 희미하게 웃음을 내비쳤다. 고윤은 그 웃음에 무심한 얼굴로 몸을 더 붙였다.
“대감.”
콧등에 말을 걸듯 얼굴을 가까이 붙이곤 고윤은 은헌을 불렀다.
“예.”
한 번 비슷한 일이 있었으나 그때는 은헌이 의식을 잃고 있었으니 괜찮았지만, 지금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윤은 가늠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걷어차진 마십시오.”
고윤은 그대로 입술을 맞붙였다.
그는 은헌의 입술을 혀로 핥아 올렸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술이 놀란 듯 살짝 벌어지자 고윤은 은헌에게 속에서 들끓어 넘치는 제힘을 넘겼다. 아니 넘겼다기보단 본래의 것처럼 제자릴 찾아 되돌아가는 힘을 막지 않았다. 고윤은 세상에 흩뿌렸다가 한 번에 되돌아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들끓는 것을 죄다 넘긴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막혔던 숨통이 트인 것처럼 참았던 숨이 나지막이 새어 나왔다.
은헌은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제 입술을 문질렀던 온기가 떨어져 나가자 그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뜨자 코앞에 고윤의 눈이 보였다. 은헌은 다시 눈을 깜박였다. 하얀 찰떡 같은 익숙한 얼굴 뒤로 평소와 다른 것이 보였다. 그는 고윤에게 붙잡혀 있는 몸을 물려 이번엔 그가 고윤을 붙들었다.
“부인?”
그는 잠시 말을 고르듯 머뭇댔다.
“부인의 모습이 어찌…….”
은헌은 눈을 다시 감았다 뜨며 고윤을 살폈다.
처음으로 그는 제대로 고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똑같은 껍데기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은헌이 보고 있는 고윤은 마치 세상 끔찍하고 악한 것을 다 끌어 모아둔 것 같은 불길함을 풍겼다. 가진 기운이 지독히 음울했고,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았다. 모르는 사이로 만났다면 분명 칼을 겨누었을 터였다. 평소의 따뜻하고 다정하여 온화한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은헌은 한참이나 고윤을 살피다 무언가 불현듯 떠올렸다.
“역신의 힘.”
그는 이 무덤 속 나타난 혼백이 고윤을 보며 했던 말을 다시 머금듯 입안에 삼켰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대비전에서 소란이 일었을 때도 경 상궁이 고윤을 보며 그리 말했었다. 무서운 것이라고 말이다. 정작 경 상궁은 은헌을 보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은헌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고윤과 눈을 마주쳤다. 아무리 보아도 고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불길한 것 그 자체가 주는 두려움밖에 없었다.
“용에게 꼭 있어야 한다는 비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부인께선 알고 계십니까.”
고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은헌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짐작은 갔다. 그러지 않아도 눈이 점점 트이는 것 같더니 방금 받아간 기운 때문에 막힘없이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마주쳤던 망량은 부인과 저를 두고 용과 여의주라 일컬었고요.”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을 묻고 싶으십니까.”
그는 그리 말하며 붙어 있는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나 곧 앞으로 다시 끌려갔다. 은헌은 고윤의 팔목을 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말이다.
“부인께선 제가 태어난 뒤 나셨지요. 그리고 저는 이 땅에 재앙을 부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혹여 부인께서 지닌 그 힘이 저가 이 땅에 끌어들인…….”
“재앙입니다.”
고윤은 담담히 은헌의 말을 잘라내곤 입을 열었다. 비라거나 여의주라거나 그의 정체를 지칭할 말은 있었으나 결국 그는 단 하나였다. 이 땅에 난 것들을 파탄으로 몰고갈 힘이었다.
은헌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가 다시 고윤과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부인께선…….”
고윤을 선악으로만 판단한다면 은헌은 분명 선이라 생각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원한을 해결해 주었고, 때론 지나치게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가 나타나면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선뜻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그런 이였다.
“재앙이라는 것은 보통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까.”
고윤은 콧등을 찡그렸다.
“제가 지닌 힘은 어떻게 보면 대감, 아니, 용에게 부여받은 것이지요. 대감께선 지금까지 스스로가 인간이 아니리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단 한 번도 그리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은헌은 곧장 대답을 내놓았다. 그럴 줄 알았단 듯 고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그의 안에 있는 힘이 은헌과 분리가 된 것이었다. 주인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다.
은헌은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고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주상전하를 죽이고 싶단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은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해 본 바 없습니다. 어찌 그런 참담한 말을!”
고윤은 패륜적인 말을 입 밖에 내면서도 무척이나 담담했다.
“하면 주위에 따라붙는 자들이 싫어 죄다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신 적은 있으십니까? 혹은 누군가의 불행을 간절히 바란 적은요.”
“없습니다.”
“이 땅에 난 이들에게 물이 사라져 죄다 목이 말라 죽었으면 좋겠다거나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길바닥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길 바란 적은 있으십니까.”
은헌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낯을 구겼다.
“대체 저를 어찌 보시는 겁니까.”
그는 거듭되는 고윤의 물음에 기가 찬 듯 헛웃음을 뱉었다. 고윤은 그런 은헌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겁니다. 대감께서 이 땅에 해악을 끼치길 원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고 저주하였다면 저는 타고난 명대로 재앙이 되었을 겁니다.”
혹은 은헌이 태어나자마자 죽었다면 고윤은 아마도 태어나 자라며 그의 힘의 근원을 찾아 헤매다 미쳐 모든 재앙을 이 땅에 풀어놓았을 터였다. 일전에 그 설원에서 은헌의 숨이 멎었을 때 느꼈던, 그의 안에서 무언가 뚝뚝 끊겨 나갔던 그 기분을 되새겨 보았을 때 말이다.
“대감께서 지금껏 이 땅을 저주해 본 적이 없기에 저는 재앙으로써의 명을 다하지 못하고 그저 인간으로 살아오고 있는 것이고요.”
은헌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표정으로 고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살아보고자 발버둥 친 것이 헛수고는 아니었군요.”
고윤이 혀를 찬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해도 그 예언은 은헌의 성정에 그다지 어울리는 천명은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진 힘의 근본적인 성질도 말이다.
한참이나 허허로이 웃던 은헌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한데 부인께서 가진 힘을 어찌 제게 나눠준 것입니까.”
“본래 대감께서 지니신 것이었으니 돌려준 것입니다.”
“하면 방금처럼 입을 맞춰야 돌려받을 수 있는 겁니까.”
고윤은 미간을 구긴 채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운을 전하거나 받을 수는 있지만, 좀 더 가깝게 붙을수록 효과가 좋습니다. 더는 팔이 아프지 않으시지요.”
그 말에 은헌은 너무 놀라 까먹고 있던 제 팔을 살폈다.
칼이 있었다면 베어내어 살이 썩는 것을 막아야 했을 정도로 좋지 않은 상태였었다. 반쯤 떨어져 나가 덜렁댔던 오른팔은 멀쩡하게 잘 붙어 있었다. 은헌은 손바닥을 펼쳤다가 다시 쥐었다. 짐승의 이빨에 찢겨 나간 옷자락 사이로 흉 하나 남지 않은 채 살이 아문 게 보였다. 흘린 피는 아직 굳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된 기분이었다.
“방금 하였던 것처럼 하면 이리됩니까?”
“예.”
은헌은 픽 웃고는 고윤의 팔을 붙잡았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곤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어쩐지. 몸이 아직 무겁습니다. 피를 너무 흘린 탓인 듯하니 부인 다시 한번 해 볼 수 있습니까?”
“……기운이 용솟음치시는 것이 당장 전장에 나서도 되실 듯한데요.”
고윤은 히죽대는 은헌의 낯을 보며 빈정댔다. 그렇지만 눈으론 신중하게 은헌의 상태를 살폈다.
“한데 부인께서도 같은 방법으로 괜찮아지시는 겁니까.”
“뭐, 그렇긴 한데.”
고윤은 눈을 크게 떴다. 머리를 옆으로 슬쩍 기울인 채 은헌이 그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축축하고 단단한 살이 들어와 그의 입안을 훑어냈다. 핥아 올려진 곳은 입천장인데 허리 뒤쪽이 근질근질했다. 고윤은 두 손으로 은헌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으나 커다란 손이 그의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한참이나 핥아대며 입안을 더듬던 혀가 빠져나가자 고윤은 멍해진 얼굴로 은헌을 보았다. 청반한 낯이 반짝이는 듯 은헌이 환하게도 웃었다.
“부인께서도 괜찮아지셨지요?”
“그렇다면 참 다행인데.”
머리 위에서 장군상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은헌과 고윤은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떨어졌다. 고윤은 헛기침을 터뜨리곤 퍼뜩 정신 차렸다.
“녀석은 어찌 되었습니까.”
“달아났다.”
분함을 감추지 않고 장군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고윤은 알 만하단 듯 고갤 끄덕였다. 애초에 이곳을 지키기 위해 묻힌 흙 인형이니 사정은 뻔했다.
“서둘러 궐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은헌 역시 고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챈 듯 순식간에 낯을 굳혔다. 짐승이 밖으로 나갔다면 갈 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침언군이 있는 곳이거나 그와 가까운 핏줄이 머무는 곳일 터였다. 침언군은 자식을 두지 않고, 먼 친척을 양자로 들였다. 그리고 윗대는 죄다 연세 21)했으니 따지자면 가장 가까운 핏줄은 바로 왕이었다.
고윤은 손을 뻗어 은헌의 손을 붙잡았다.
“녀석을 잡으면 무얼 해야 합니까.”
장군상은 웃었다.
“부수게. 그도 아니면 이 무덤을 파헤친 자를 녀석의 입에 집어넣든가.”
그 말에 은헌은 씁쓸히 웃었다.
고윤은 서둘러 길을 열었다. 이미 지체한 시간이 길어 머뭇거릴 일도 없었다.
순식간에 동궁전의, 세자가 내어준 방으로 돌아온 고윤은 문을 열었다.
쿠르릉! 쾅!
하늘을 찢어낼 것처럼 사나운 벼락이 내리쳤다. 비가 내리지도 않는 하늘을 번개가 순식간에 가로지르더니 궐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렸다.
대낮처럼 훤하게 사방을 밝힌 벼락은 이내 흩어지듯 사라지고 또다시 꾸르릉대며 천둥이 울렸다. 뒤이어 벼락이 떨어졌다. 비처럼 쉴 새 없이 벼락이 내리쳤지만, 궐의 가장 높은 근정전의 지붕까진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고윤은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썼다.
“어쩐지 기운이 한 번에 역류하더라니. 그 이유를 알았군요.”
은헌 역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막아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얇은 얼음을 깔아둔 것처럼 번개가 내리칠 때마다 무언가가 하얗게 서리 앉은 것처럼 눈에 보였다가 이내 다시 바람에 흩어진 듯 사라졌다.
고윤은 그가 궐에 쳐 둔 결계를 두들기는 힘을 살폈다.
자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악의를 담아 저주를 퍼부은 듯 벼락은 지치지도 않고 궐의 하늘을 두들겼다. 떠나기 전 기운을 짜내어 결계를 보강해 놓길 잘한 듯했다. 그 때문에 짐승을 붙들 기회를 놓치기는 했지만, 어떤 일에도 일희일비가 있는 법이었다.
“이제 어찌합니까.”
은헌은 고윤의 의견을 물었다.
“달아난 것을 잡아야 하고, 이 일도 해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둘 다 고윤의 힘이 필요했다. 인간의 손으론 해결하기 어려우니 사람을 움직였다간 많은 희생이 나올 수도 있었다.
“우선 저하는 뵙는 것이 좋겠지요.”
“저하를요?”
은헌은 한숨을 끊어 뱉곤 어깨를 으쓱였다.
“저하는 되도록 사인검을 되찾은 뒤에 뵙고 싶었는데요.”
고윤은 픽 웃음을 흘렸다.
“사내대장부답게 잃어버렸다 솔직하게 말하고 한 번 혼나면 될 겁니다. 제 큰형님께서도 가장 아끼시는 연적을 깼을 때 이마 한 대 쥐어박곤 용서해 주셨습니다.”
은헌은 눈을 찌푸렸다.
“이제껏 저하께 그리 혼난 적은 없었습니다. 보통 형님께 그리 혼나셨습니까?”
고윤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은헌을 보았다.
“대감께서 제 형님들 같은 형제를 두셨다면 진즉에 이 땅에 재앙을 퍼뜨렸을 겁니다. 두 번 다시 사람이 살 땅은 못되었겠지요.”
은헌이 소리 내 웃었다.
“부인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많이 엄격하셨나 봅니다.”
고윤은 코웃음 쳤다.
“어찌 된 일인지 죄다 꼬장꼬장한 게 여름 뙤약볕에 가죽 말려놓은 것 같은 성질머리를 지니고 있어서요.”
은헌은 소리 내 웃다가도 이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벼락에 서둘러 움직였다. 자선당으로 가까이 가자 익위사들이 삼엄하게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은헌 대감!”
은헌은 그를 보자마자 버선발로 마중 나오는 내관을 보고 청을 넣었다.
“저하께 여쭤주시게…….”
“드시지요. 대감께서 돌아오시거든 지체 말고 곧장 들이라 이미 하교가 있으셨나이다.”
익위사들이 길을 트자 은헌은 성큼 걸어 자선당으로 들었다. 안으로 들자 방 안에 앉아 있던 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저하.”
은헌과 고윤은 세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곤 곧이어 세자빈에게 인사를 건넸다.
“빈궁 저하.”
“앉게.”
세자는 예를 차릴 시간도 주지 않고 앉으라 손짓했다. 그러고는 은헌을 살핀 뒤 한숨을 터뜨렸다.
“어디 산이라도 구르다가 오는 길이더냐?”
은헌은 제 몰골을 떠올리곤 그저 웃었다. 팔이 잘려나갈 뻔한 것도 어찌 고쳤는지도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저하. 대군께 어찌 그러십니까.”
세자빈이 제 부군을 부르곤 고윤을 향해 눈짓을 건넸다.
“괘념치 마십시오.”
은헌은 세자빈을 보며 웃었다.
“구르다 오긴 했는데 그게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대군이 흙바닥을 굴러다닐 일이 있는데 중요치 않을 리가 없지.”
어지간한 큰일이 아니고서야 은헌이 직접 움직인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자는 낯을 굳혔다.
“하니 소상히 말해보아라.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온 것이냐?”
은헌은 정체 모를 짐승을 주운 것에서부터 짤막하게 전해야 할 말을 전하고, 가릴 것은 가려 삼켰다. 침언군과 하 공공에 관한 이야기는 상세히 전했다.
세자는 묘에 함께 묻어둔 짐승이 왕과 세자인 자신 그리고 태어난 지 겨우 한 달 된 원자를 공격할 수 있다는 말에 혀를 찼다.
“그래도 아직 궐로 향하지는 않은 것 같구나.”
궐에 내리치는 벼락이 심상치 않아 모두가 잠들어야 할 시간에 궐에 있는 누구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더군다나 보통의 벼락이라면 이미 궐 어딘가에 내리꽂혀 불이 나거나 사람이 상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 벼락이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있단 것이 특히나 그랬다. 세자는 방금까지도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 궐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정리하고 웃전의 안부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우선 그 진묘수부터 붙드는 것이 좋겠다.”
“그보단 이 모자란 아우의 청을 먼저 들어주십시오.”
“무엇이냐?”
은헌은 고개를 숙였다.
“군사를 움직여 침언군을 잡아들이십시오.”
세자가 침음을 흘렸다.
“지금 말이냐?”
세자에게 종친을 치라 청하는 은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 붙잡아들이면…… 침언군은 대군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세자가 움직이면 은헌 또한 위험했다. 조정 대신 중엔 이 모든 소란의 원인이 된 대군을 그냥 보아 넘길 리 없는 자들도 많았다.
“침언군이 하사받은 토지에서 오래된 능을 파헤쳤습니다. 비록 기려 모시어 제를 지내는 곳은 아니라 하나 능을 파헤치고도 제대로 수습조차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를 물어주십시오.”
고윤은 바로 입을 뗐다.
“침언군이 능을 파헤쳤다고?”
세자는 경악스러운 얼굴을 했다.
조상을 극진히 모시는 나라에서 그런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큰 죄였다. 더군다나 그것을 종친인 침언군이 저질렀다는 것 또한 그랬다.
“확실한 것이냐?”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흙을 다시 덮는다고 해도 흔적마저 지워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자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명분 삼아 움직일 수 있었다. 오히려 처벌을 약하게 하였다간 전국에서 상소가 빗발칠 일이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세자는 목소릴 드높여 내관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기다리고 있던 내관이 바로 안으로 들었다.
“지금 즉시 익위사에게 침언군을 잡아들이라고 하라.”
세자의 입에서 명이 떨어지자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벼락은 쉴 새 없이 떨어지며 사방을 밝혔다. 고윤은 열린 문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확인한 뒤 시간을 헤아렸다. 곧 동이 틀 터였다. 이미 궐에 생긴 변고로 사람들이 죄다 일어나 있겠지만 순라군 22)들이 거리를 다니는 이를 통제하고 있을 때 짐승을 붙들어야 했다.
“부인.”
은헌은 고윤을 불렀다. 고윤은 잠시 생각하느라 바빴던 머릿속을 정리하곤 그를 보고 있는 세자에게 송구하단 듯 머릴 숙였다.
“부부인께선 괘념치 마시오. 한데 무슨 방도라도 떠오르셨소?”
고윤은 은헌을 한 번 보곤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닙니다. 대신들이 입궐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을 정리 중이었습니다.”
“화국의 사절단과 관련된 일이오?”
세자도 은헌도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한지 동시에 눈썹을 들썩였다. 고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일이 복잡하여 다른 일부터 하고자 합니다.”
“그럴 테지.”
잘못했다간 나라 간의 다툼으로 번지는 일이니 쉬울 리가 없었다.
세자는 이 일의 주범이 누군지를 알면서도 손 놓고 있어야 한단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온 이들을 곱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그래도 염려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고윤은 태연히 입을 뗐다.
“무엇을 어찌하시려고요?”
무언가 불안함을 느낀 은헌이 되물었다.
“글쎄요. 뭐 적당히 처리할 겁니다.”
손봐줄 방법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기서 논할 것은 아니기에 고윤은 말을 돌렸다. 우선 급한 것부터 정리하는 게 좋았다. 도성 안에 부정에 물든 것이 헤집고 다니면 가뜩이나 짙어진 귀기가 더 날뛸 터였다.
“그나저나 짐승을 붙잡을 방도는 있는가?”
세자는 방법부터 확인했다. 그래야 어찌 손을 보탤 수 있는지 의논할 수 있다며 말이다.
“사냥이라면 저보단 저하와 대감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몰이가 필요할 겁니다. 사람이 다치지 않게 막을 수 있는 곳으로.”
은헌은 바로 답을 내놓았다.
“순라군과 포청의 병졸들을 동원하면 될 것이다. 적당히 호랑이가 내려왔으니 피하라 하는 것으로 하자꾸나.”
세자의 말에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사람의 이목은 막아도 몰아넣기엔 역부족이지 않겠습니까?”
은헌의 말에 고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쪽은 터주신에게 맡기면 됩니다.”
“터주신?”
잠자코 듣고 있던 세자빈이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듯 물었다.
고윤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 사는 터든 아니든 어느 곳이든 적당히 터를 지켜주는 신령이 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 터주신들이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터에서 짐승을 쫓아낼 것이었다.
* * *
“삼가 정휘가 아뢰옵니다.”
고윤이 축문을 읽을 때마다 도성 어딘가에서 터줏대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도 제각각인 이들은 저마다 제물을 챙긴 뒤 부탁을 받고 흩어졌다. 은헌은 그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았다. 그가 옆에 있으면 좀 나을 텐데, 따로 할 일이 생겨 지금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알아는 보았더냐?”
고윤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린 은헌은 석삼에게 순라군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
“호랑이 두 마리가 돌아다닌다고 하여 종로 일대와 회현까지 길을 막은 것 같습니다.”
짐승이 노리는 이가 정해져 있으니 궐로 향하는 큰길을 우선으로 정리했다. 은헌은 눈을 찌푸렸다.
“짐승을 본 이는 없느냐?”
“남별궁 근방에서 집채만 한 그림자가 지붕 위를 뛰어넘었다는 이가 있어 확인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짐승의 생김새를 아는 이를 보내 정말로 본 것인지 일일이 대조하는 중이었다. 몸집이 크건 작건 붉은 주둥이가 있어 특징을 비교하기도 쉬웠다.
그 사이에도 고윤은 쉼 없이 축문을 읽었다. 그는 한곳에 있고 터주신은 각자 제 터에 있으니 목소리를 멀리 실어 보내려면 기운을 아낌없이 써야 했다.
궐에 내리치는 벼락은 여전히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결계가 조금씩 부서지면서 힘이 역류했다.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운이 쉴 새가 없어 점점 고윤의 호흡이 가빠져 왔다.
마지막 축문을 외운 고윤의 몸이 일순간 휘청했다. 뒤로 넘어가면 대차게 엉덩방아 찧겠구나 하며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윤은 턱하고 등 뒤에서 저를 받친 이를 고개를 꺾어 확인했다.
“축지법이라도 쓰십니까?”
저쪽에 떨어져 있더니 언제 왔는지 은헌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 그런 재주는 못 배웠습니다.”
은헌은 그리 말하곤 두 손으로 쓰러져 내리는 고윤의 몸을 받쳐 올렸다.
“오늘만 몇 번 묻는 것 같지만, 괜찮으십니까?”
“다 끝내고 푹 자면 금방 나아질 겁니다.”
고윤은 기운 없단 소리 대신 투덜댔다. 무어라 더 말하려고 입을 열었던 그는 미간을 구기곤 은헌을 보았다. 정확히는 제 눈앞에서 벌렸다 닫히는 입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고윤의 시선이 어디 닿았는지 눈치챈 은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이내 짓궂은 얼굴로 고윤을 어깨에 그대로 둘러 올렸다.
“잠시 쉬고 있을 테니 연통 오거든 곧장 알리거라.”
은헌은 석삼에게 명령을 내리곤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졸지에 세상 위아래가 뒤집힌 상태로 짐 취급당한 고윤은 발버둥 칠 기운도 없이 축 늘어져 있다가 방 안에 들어 은헌이 내려주자 입을 비죽였다.
“할 일도 많은데 여기까진 왜 데리고 오신 겁니까.”
은헌은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여 내렸다. 그의 입술이 가볍게 고윤의 입술을 쓸어내듯 문질렀다. 고윤은 급히 숨을 들이 삼켰다. 그러자 은헌은 입술을 맞댄 채로 가볍게 웃곤 고개를 슬쩍 들었다.
“곤하지 않으십니까?”
고윤은 속눈썹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은 탓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면서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 묘한 갈증에 제 입술을 핥으려던 것뿐이지만, 손톱만큼도 떨어져 있지 않은 탓에 은헌의 윗입술을 핥아버린 꼴이었다. 은헌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두 손으로 고윤의 얼굴을 감싸 쥐곤 그대로 입술을 맞부딪쳤다. 가볍게 입술을 문대는가 싶더니 이내 혀로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고윤의 혓바닥을 간지럽히듯 살짝 건드렸다.
고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두 다리에 힘줘 버티고 섰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힘이 풀려 바닥에 나뒹굴 것 같았다. 바닥 드러낸 기운을 보하려 하는 것인데 되레 있는 기력마저 봄날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듯했다. 무너져 내리는 고윤의 몸을 은헌은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넣어 받쳤다.
계속해서 입술을 할짝대다 보니 어느새 벽에 닿았다. 더는 물러나지 않는 고윤을 품에 가두고 은헌은 격렬하게 그 호흡을 탐했다. 더워진 바람에 온몸이 달아올라 더는 견디기 힘들 때가 되어서야 은헌은 고윤의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나 창백하던 고윤의 두 뺨에 꽃물을 들인 듯 붉은 기가 감돌았다.
“……혈색이 무척 좋아지셨습니다.”
고윤은 웃음기가 가득한 은헌의 낯을 손바닥으로 뭉개듯 문지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냈다.
“더워 그렇습니다.”
고윤은 콧김을 내뿜으며 흐트러진 몸을 추슬렀다. 은헌은 가볍게 소리 내 웃었다. 표정은 평상시의 평온함 그 자체인데 살결을 문지르면 어쩐지 녹아 흘러내릴 것 같다 싶을 정도로 고윤에게서 열기가 느껴졌다.
“몸은 어떠십니까? 좀 나아지셨습니까?”
“뭐, 그럭저럭.”
고윤은 미간을 찌푸리곤 확인하는 은헌을 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은헌은 느릿하게 그의 입술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이리해도 그럭저럭이라…….”
고윤은 제 앞섶을 향해 다가오는 은헌의 손을 덥석 붙잡아 막았다.
“뭘 하시려고요!”
은헌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이밀어 고윤의 어깨에 턱을 걸쳤다. 그러곤 입술로 목덜미를 물었다. 생소한 일에 고윤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은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근잘근 이로 고윤의 살결을 살짝 베어 물었다.
고윤은 은헌의 숨결이 목덜미에 고스란히 쏟아지는 것에 몸을 움츠렸다.
“할 수 있는 것이야 많습니다만, 그다지 때가 좋지 못하군요.”
은헌은 귀에 속삭이듯 중얼거리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고윤은 짓궂음이라곤 없는 진중한 눈빛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섰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위협이란 것을 느껴보지는 못했는데 지금은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했다.
“대감?”
은헌은 고윤의 부름에 방긋 웃었다.
“병법이 이르길 물자의 수급과 보급이 원활치 않으면 그것부터 원활히 하여야 한다 배우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짐승을 놓치게 되면 큰일이니까요.”
저주를 몰고 올 녀석을 붙잡는 것도 정리하는 것도 큰일은 맞았다.
고윤은 그래서 그 많은 할 수 있는 것 중에 뭘 하려고 이리 구는지 캐물으려 했으나 바깥에서 기척이 들렸다.
“대감! 마님! 석삼입니다.”
“무슨 일이냐!”
밖으로 나서는 대신 은헌은 손을 뻗어 고윤의 옷깃을 정리해주며 외쳤다.
“벽동 집으로 녀석이 오고 있다 합니다.”
고윤은 옷고름을 다시 풀어 매며 쓴웃음을 뱉었다. 그가 불러들이지 않은 터주신이 있는 곳이었다. 경내 구역을 나눠 가장 붙잡기 편한 곳으로 몰아넣은 보람이 있었다.
“알았다.”
은헌은 다시 고윤에게 시선을 떨구고는 주름진 것을 손바닥으로 털었다.
“준비는 다 된 것입니까?”
고윤은 크게 고갤 끄덕였다. 어쨌든 조금 전 은헌에게서 기운을 넘겨받음으로써 쇠했던 기력이 조금이나마 다시 돌아왔다. 힘이 빠진 것도 너무 쉼 없이 기운을 써대는 탓에 육신에 무리가 온 것이었지만 말이다.
밖으로 나서자, 은헌은 짐승이 어디서 오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희미하게 번져 오는 아침녘의 밝음을 집어삼키며 먹구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짐승은 여기저기 방향을 틀려 애쓰는 듯했으나 터마다 지키고 있는 터주신의 기운에 가로막힌 듯 곧장 벽동 집을 향해 떠밀리듯 오고 있었다.
고윤은 눈에 보일 정도로 짐승이 가까워지자 손을 들었다.
“많이 달라졌네요.”
그의 기운을 빌려 실체를 감췄던 벽동 집의 터줏대감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땅에서 불쑥 솟구친 모양새에 경계를 서고 있던 청지기들이 움찔댔다. 고윤은 태연히 말을 붙였다.
“붙들 수 있겠습니까?”
“오래는 안 돼요.”
터줏대감이 눈을 찡그렸다.
“잠시면 됩니다.”
은헌은 그 말에 한숨을 내쉬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부술 겁니까?”
고윤도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붙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옛 무덤을 지키는 혼백이 짐승의 저주를 풀어내는 방법을 알려줬지만, 침언군을 짐승의 아가리에 집어넣는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면 두 개의 선택지가 아직 남아 있긴 했다.
고윤은 서둘러 결론짓지 않았다. 터주신과 말을 섞는 중간에도 짐승은 더 커다래진 몸을 이끌고 맹렬하게 허공을 밟아가며 달려들고 있었다.
터주신이 주먹을 꽉 쥐었다.
짐승은 바로 머리 위까지 당도한 뒤 그대로 궐로 향하려는 듯 맹렬하게 속도를 더했다. 궐에는 따로 결계 외에는 방비하지 않았으니 그쪽으로 빠져나가려는 듯했다. 터주신은 그가 이 터에 행할 수 있는 모든 기운을 끌어 썼다. 뛰쳐나가려 했던 짐승의 몸이 그물에 걸린 것처럼 멈춰 섰다.
카아악!
괴성을 내지르며 짐승이 몸부림쳤다.
청지기들이 결연한 얼굴로 칼을 빼 들었다. 은헌 역시 만일을 대비했다. 짐승이 괴롭게 울음을 토해낼 때마다 몸을 뒤틀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지붕을 내리찍으려 했다. 기와가 깨져 쩡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고윤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고윤은 몸부림치는 짐승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그러곤 크게 발을 굴렀다.
별것 아닌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발을 구름과 동시에 고윤은 제 주변의 모든 것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은헌의 놀란 표정을 뒤로하고 고윤은 입을 뗐다. 그는 주를 외웠다. 바람을 담아 외운 말의 힘은 이내 실체가 되어 짐승의 몸에 여전히 매달려 있던 목줄과 이어졌다. 고윤은 제 손에 쥔 끈을 당겨 연결되었음을 확인했다. 짐승은 느릿했지만, 여전히 격렬하게 저항했다.
고윤은 두 번째 주를 외웠다. 하늘하늘 휘날리는 것 같던 끈이 점점 굵기를 키워갔다. 게다가 천근처럼 무게를 더해갔다. 고윤은 끈을 마당에 내던지듯 내쳤다. 바닥에 떨어진 목 끈에서 바위로 땅을 찧는 듯한 굉음이 났다.
짐승이 하늘을 할퀴어대며 울었으나 끈은 이제 장정 한 명이 한아름에 안아 들기도 벅찰 정도의 굵기가 되어 짐승을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고윤은 휘파람을 길게 불 듯 입술을 오므리고 숨을 길게 삼켰다가 뱉었다.
쾅!
은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추락한 짐승 때문에 생긴 파편을 막듯 두 팔을 펼치고 등을 돌려 고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름드리 통나무 같은 굵기의 밧줄에 휘감겨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짐승을 발견한 이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터진 포댓자루에서 먼지 휘날리듯 일었던 흙먼지가 조금씩 가라앉자 고윤은 손부채질로 바람을 일으키곤 마루에서 마당으로 내려섰다.
짐승은 포기하지 않은 듯 목을 울리며 앞발을 휘두르려 했으나 몸부림칠수록 주술을 걸어둔 밧줄이 무거워질 뿐이었다.
“잡은 겁니까?”
은헌은 순식간에 끝난 일에 헛숨을 뱉었다.
“예.”
고윤은 몸을 숙여 짐승을 살폈다. 짐승은 흉흉하게 귀기를 흘리는 찢어진 눈과 이빨을 드러낸 채 크릉댔다. 붉은 주둥이 위로 전에 보지 못했던 검은 문양이 보였다.
“어떻습니까?”
은헌은 바로 뒤에 서서 물었다. 고윤은 고개를 꺾어 은헌과 눈을 마주쳤다.
“제가 직접 손써서 해결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럼 어찌합니까?”
고윤은 한숨을 크게 내쉬곤 짐승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곤 서슴없이 손을 뻗었다. 이 녀석의 주인을 깨우면 조금 쉬웠을지도 모르지만, 무덤 안에서 소란이 있었음에도 내다보지 않은 이를 강제로 깨울 생각은 없었다.
“우선 생각해 둔 것을 다 해 본 뒤에 저희가 직접 알아온 것을 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윤은 짐승의 이마에 손가락을 내리꽂듯 찍어 눌렀다. 짐승이 머리를 들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고윤은 그런 짐승을 보며 담담히 웃었다. 그러곤 그도 지금껏 꺼내본 적 없는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기운을 서슴없이 풀었다.
짐승은 입을 벌려 고윤을 물려 했으나 은헌의 방해에 막혔다. 은헌은 그가 박아 넣었던, 세자에게 빌렸던 사인검을 단숨에 뽑아냈다. 고통에 괴로워 움찔한 녀석을 두고 고윤은 그대로 찍어 눌렀다.
짐승의 살 위를 물들이고 있던 문양 같은 것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짐승의 몸에서 벗어나려 꿈틀댔다. 울룩불룩 살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가죽 아래 커다란 벌레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고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운을 퍼부었다.
퍽―!
오갈 데 없는 듯 껍질 아래를 헤매던 검은 것들이 은헌이 낸 상처로 고름이 터져 나오듯 터져 나왔다. 사방에 점점이 흩어질 것 같은 것이 땅으로 쏟아지지 않고 그대로 둥둥 떴다. 허공에 뜬 것들이 발버둥 치듯 일그러졌다.
고윤은 그의 뒤에 서 있던 터주신이 불쾌한 듯 오만상을 쓴 채 그것을 거둬 커다란 덩어리로 뭉치는 것을 보았다. 고윤은 다시 짐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있는 대로 커졌던 몸이 다시 줄어들고 있었다. 천천히 바람 빠지듯 줄어들기 시작한 몸은 은헌이 처음 데려왔을 때의 크기로 되돌아가더니 이내 발아래서부터 회색으로 점점 굳어갔다. 순식간에 굳은 짐승은 처음 그리 만들어진 것처럼 석수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은헌은 쓴웃음을 지은 채 몸을 내리고는 손을 뻗어 짐승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팔을 잃어버릴 뻔도 했고, 목숨도 위협받았으나 애초에 짐승이 잘못하여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회백색 석수로 변한 짐승의 몸에 매어놓은 목 끈이 다시 본래의 실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 나풀거렸다.
고윤은 혀를 차고 몸을 일으켰다.
“이거 가져가요!”
기다렸단 듯 터주신은 그가 주워 모은 저주의 파편을 고윤에게 넘겼다. 새까만 밤을 조각낸 듯한 주먹 두 개를 쥔 것보다 더 큰 것을 받아든 고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터주신은 손을 털곤 짐승을 힐끗 돌아봤다.
“저거 여기 둘 거예요?”
“잠시 봐주십시오. 오래 두진 않을 겁니다.”
고윤은 저주를 품에 집어넣고 갈무리한 뒤 터주신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터주신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은헌을 한 번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고윤도 은헌을 돌아봤다.
“이제 다시 궐로 가면 됩니다.”
침언군이 머무는 곳이 종친부의 객사라 들었으니 이미 붙잡히고도 남았을 시각이었다.
은헌은 석삼을 돌아봤다. 석삼은 눈치 빠르게 은헌이 입 밖에 내지 않은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송구하오나 아직 침언군 대감이 잡혔단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벽동 집과 종친부는 대문 나서 골목 하나 돌면 보일 정도로 지척거리었다. 오십 걸음도 가지 않아 나오는 곳이라 무슨 일이 있었다면 벌써 소식을 전해왔을 터였다.
“다시 입궐하긴 해야겠군요.”
침언군이 모습을 감췄고, 짐승은 붙들었으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뿐이었다. 고윤은 여전히 쉴 새 없이 벼락 치는 궐의 하늘을 보았다.
* * *
“텅 비어 있더구나.”
이미 준비하고 몸을 뺀 듯 침언군이 갈 만한 곳을 익위사들이 쫓아갔으나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다.
세자는 가라앉은 안색으로 대군을 보았다.
“아직 도성을 빠져나가진 않은 듯했다. 하여 종친부에 있던 이들을 죄다 불러들여 확인하는 중이다.”
겉으로 내세운 침언군의 죄에 다들 당혹해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그 일에 다른 이들도 아니고 세자가 직접 나서 종친들을 심문하고 있는 꼴이라 눈치 빠른 이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피를 이었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만큼은 커다란 족쇄와 다르지 않았다.
“은헌, 너는 이제 그들이 무엇을 도모하리라 생각하느냐?”
은헌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운을 뗐다.
“저라면 부부인을 노릴 겁니다. 부부인이 없으면 이번 일을 여기까지 막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이미 궐은 벼락에 불타올랐을 테고, 모든 것이 그들의 뜻대로 이뤄졌을지도 모릅니다.”
고윤의 능력을 어쩌면 가장 가까이에서 본 은헌이기에 할 수 있는 답이었다.
“한데 그들은 부인께서 가진 재주를 모르지요.”
세자는 픽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은헌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원손부터 노리려 들 겁니다. 지금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몰아넣은 가장 큰 원인은 저하의 뒤를 이을 원손이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로 인해 동궁전의 입지가 단단해졌으니 그 바닥부터 다시 무너뜨리려 하겠지요.”
게다가 가장 약한 부분을 노린다면 역시 원손이었다.
세자의 낯이 어두워졌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냉정하게 상황을 보면 그만큼 치명적인 수도 없었다. 원손을 해하면 이번엔 이기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그들의 바람을 이뤄줄 터였다.
“하면 어찌하는 것이 좋을꼬?”
“어디까지 하실 겁니까.”
세자는 답 대신 반문한 은헌의 말에 음울하게 웃었다.
“자식을 죽이겠다는 적을 앞에 둔 아비가 되니. 글쎄. 모르겠구나.”
* * *
“장하시게도, 깨지도 않고 푹 자고 일어났다네.”
세자빈은 이불보 위에 누워 배냇짓을 하기 시작한 원손을 보며 어둑한 낯으로 웃었다.
“담이 세실 겁니다.”
아무리 인간의 육신을 입었다 하나 본래 타고난 기질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고윤의 말에 세자빈은 다행이란 듯 웃었다.
“잘 자라시겠지? 무병하게 말일세.”
넌지시 물어오는 말에 고윤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뭐, 염려하실 필요는 없으실 겁니다. 되레 지나치게 씩씩하실까 봐 다들 걱정하지 않습니까.”
“어미 된 마음이라 그런가……. 티끌 같은 일에도 흠칫 놀라곤 하네.”
세자빈은 그리 말하며 한숨을 흘렸다.
“바깥이 많이 소란스럽더군. 지금 궐에 내리치는 철전(掣電) 23)이 보통은 아니라지.”
“예.”
고윤은 태연했다. 세자빈은 그런 태도가 되레 안심되는지 조금 편해진 얼굴을 했다.
“이보게. 나는 원손을 지키고자 하네. 이 나라 대통을 이어갈 핏줄이라 귀하여서 그런 게 아닐세. 그저 내 아이가 무탈하였으면 하는 게지.”
세자빈은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하니. 혹여 무슨 일 생기거든 원손을 자네에게 부탁하여도 되겠는가? 내 안위는 상관치 않아도 좋네.”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둔 말이었다.
“무엇을 그리 염려하십니까?”
되레 고윤에게 의문이 생겼다. 세자빈은 씁쓸히 웃었다.
“궐에 변고가 생겨 경계가 삼엄하네. 다들 대전의 안위를 신경 쓰지. 저하의 안위 또한 마찬가질세. 하나, 아바마마께서도 저하께서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되지만 원손은 그게 아니질 않은가?”
아이는 늘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 젖을 물리는 것부터 기저귀를 가는 것까지 주변에 수시로 사람이 드나들었다.
“삿된 저주로 이리 눈길을 끈 뒤 적당한 틈만 기다리면 한순간에 원손을 해할 수 있으니. 나는 사람이 가장 걱정이 되네.”
수족처럼 부리는 이라지만 결국 한 길 물속보다 들여다보기 힘든 것이 사람의 속내였다.
세자빈은 그리 생각하는 스스로가 멋쩍은 듯 나지막이 웃었다.
“저는 염려되지 않으십니까?”
고윤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세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친영례를 치르기 전에 대군께 여쭸었네. 정말로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지. 아이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언제 다 자랄지 모르는데 세제가 될 기회를 그리 포기하셔도 괜찮은지 말일세. 대군께서 내게 그러셨다네. 자네를 무척이나 아끼고 있다고. 그러니 이 숨 막히는 궐에 가둬둘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하셨지.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치마까지 입어줄 것 같진 않다고 하시더군.”
고윤은 못 들을 것을 들었단 얼굴로 몸서릴 쳤다. 세자빈은 농을 던진 듯 웃음을 흘렸다.
“말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하군요.”
“나는 대군께서 아끼는 자네를 그런 이유로 믿네. 내 눈에도 자네가 어여머리에 봉잠 24) 꽂고 싶어 할 것 같진 않거든.”
고윤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염려하시는 일도 없을 거고 원손께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그것만은 장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그는 원손을 내려 보았다. 태열이 아직 남아 있긴 했으나 이제 제법 살이 올라 아이답게 천진난만해 보였다.
밤마다 나타나 잉어를 구해다 대군에게 가져가라며 보챌 때도 그러더니 여전히 귀찮은 객이었다.
“그나저나 부탁드린 것은 어찌 되었습니까.”
세자빈은 보자기에 싼 것을 내놓았다.
“궐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담으라 했네. 더 필요하다 하면 더 구할 수도 있고.”
고윤은 보자기에 싼 것을 들었다.
“우선 이거면 될 겁니다.”
* * *
고윤은 자선당 앞뜰에 섰다. 그러곤 지붕 위를 보았다. 액운을 막기 위해 용마루 능선 따라 아래부터 위로 차례대로 잡상 25)이 앉아 있었다. 근정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휘파람을 불었다. 널리 퍼지는 소리를 따라 그의 힘이 퍼져 나갔다. 그는 다시 한번 더 세차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길게 뻗어 나간 소리는 이 궐에서 그에게 필요한 것들에게 닿았다. 지켜보고 있던 은헌과 세자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는군요.”
세자는 담담히 말하는 아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엇을 부른 것이냐?”
은헌은 고윤을 보았다.
“궐 내에 있는 서수상을 부른 것입니다.”
“돌로 만든 석상 말이냐?”
은헌은 픽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말발굽 소리와 닮은 소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익위사들이 긴장된 얼굴로 지켜보았다.
고윤은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에 몸을 돌렸다. 사람 드나드는 문 너머로 낯익은 형상이 보였다.
“들어오시게.”
그가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하자 남쪽을 지키는 주작상부터 시작해 잡상까지 방위에 맞춰 줄줄이 들어왔다. 고윤은 크게 손뼉을 치곤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석수들은 근정전을 둘러싸는 것처럼 느릿한 걸음으로 흩어져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굳었다. 그는 별일 없었단 듯 손을 털고 몸을 돌렸다.
“충분히 방비해 두었으니 원손께 문제가 될 것은 더 없을 겁니다. 삿된 기운이 접근하지 못할 테니까요.”
눈앞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에 세자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동궁전을 지키러 온 석수들의 본래 위치를 떠올렸다.
“하나 이리하면 대전이 위험해지는 것이 아닌가?”
고윤은 은헌을 한번 보곤 고개를 조아렸다.
“그쪽도 곧 방비할 것입니다.”
거긴 또 다른 준비가 필요해 잠시 미뤄둔 것이었다. 그리고 고윤은 굳이 급함의 우선을 따져 어린 것에 먼저 선을 주었을 뿐이다.
은헌은 세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여 이만 물러나고자 합니다.”
세자는 은헌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가 놓아주었다.
“그래. 무언가 알아내거든 곧장 네게 사람을 보내마.”
은헌은 세자를 보며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안심시키듯 웃었다.
* * *
근정전으로 가까이 갈수록 사람이 늘어났다.
은헌은 아직 입궐할 시각도 아닌데 궐에 들어온 이들을 보며 태연히 눈인사했다. 고윤은 아예 무시한 채 저를 알아본 이들을 향해서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귀찮아 고윤은 은헌이 앞서 걸어 나가자 그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앞에서 보면 은헌의 몸에 가리어 아예 그가 보이지 않기에 시선을 피하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정전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없을 테니 잠시만 피하면 되었다.
그리 계속 걸어 나가다 은헌은 걸음을 멈췄다. 고윤은 따라 멈춘 뒤 은헌의 등에 대고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은헌은 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고윤이 볼 수 있도록 슬쩍 몸을 틀어주었다. 고윤은 마중 나오듯 서둘러 다가오는 금군 대장을 보았다.
“은헌 대감.”
“전하를 뵙고자 하네.”
금군 대장이 상선을 찾아 말을 전하겠다 답했다.
“급한 일이니 서둘러 주시게.”
은헌은 고윤이 어떤 수를 써서 지금 궐에 내리치는 벼락을 처리할지 이미 설명을 들었다. 그 수를 쓰려면 일단 왕의 윤허를 구해야 했다.
금군 대장은 대전 안으로 들었다가 급한 걸음으로 되돌아 나왔다. 은헌은 버릇처럼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송구하오나 은헌 대감. 전하께서 부부인만 들이라 하셨습니다.”
은헌을 따라 의복을 가다듬던 고윤이 움찔했다. 은헌은 서 있는 군관들 너머 보이는 대전을 바라보곤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그렇다는군요. 다녀오십시오.”
은헌은 가벼운 목소리로 고윤의 등에 손바닥을 올리곤 도닥였다. 고윤은 은헌을 보고 픽 웃곤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갔다.
“전하! 부부인 들었사옵니다.”
상선의 읍에 고윤은 고개를 슬쩍 틀어 지붕 쪽을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안으로 들라는 윤허가 떨어지자 그는 성큼 문턱을 넘어 들어갔다.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일과를 시작한 왕은 앞에 놓인 서궤 위 가득히 쌓인 장계 26)를 읽고 있었던 듯, 손에 든 두루마리를 내려두고 고윤을 보았다.
“전하를 뵙습니다.”
“앉아라.”
두 손 모아 이마에 붙이고 절을 하려는 고윤에게 왕이 손을 내저었다. 고윤은 허리를 깊이 숙이는 것으로 예를 차리곤 왕의 앞에 앉았다.
“사흘도 길다더니 밤새 무척이나 바빴더구나.”
왕은 혀를 찼다.
아직 아침조차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는데 보가 터진 듯 사방이 소란스러웠다.
“송구합니다.”
그 모든 소란이 아무것도 아닌 듯 미안한 기색조차 없는 하얀 낯을 보며 왕이 코웃음 쳤다.
“그래. 이 소란에 무언가 알아낸 것은 있느냐?”
“은헌 대감의 추측대로 침언군이 오래된 옛 무덤을 파헤친 흔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무덤에서…….”
고윤은 차분한 목소리로 알아낸 것과 의심하는 것을 고해 올렸다. 왕은 침언군이 옛 무덤을 파헤친 것으로 인해 살(煞)을 맞을 뻔하였단 것에 실소를 흘렸다.
“그래서 이제 무얼 할 생각이냐.”
고윤은 짧게 숨을 골라 뱉었다.
“허하여 주신다면, 우선 벼락부터 정리하고자 합니다.”
왕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어떤 주술이라면 그 주술을 행한 자를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자가 누군지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을 텐데?”
“염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고윤은 단호히 최악의 가능성을 잘라냈다.
“사신단에 속한 이를 건드리는데 그 후환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렇사옵니다.”
고윤의 자신감에 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모한 것이냐? 아니면 그럴 능력이 있는 것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신에게 그럴 재주가 있는 것이옵니다.”
왕은 코웃음 쳤다.
“과인은 너가 가진 그 허무맹랑한 재주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안다. 본디 인간은 자신이 지니지 못한 것을 더 그리 여기곤 하지. 하물며 너의 그 재주는 배운다고 하여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위험하게만 보인다.”
고윤은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그 재주로 너무 낮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되레 위험해 보인다는 것도 알고 있느냐?”
고윤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어째서 저를 혼자 들인 건가 했더니 이것을 묻기 위함인가 싶었다.
상선이 무엄하단 듯 뒤에서 헛기침하여 주의하라고 경고하였으나 정작 왕은 대답을 들으려는 듯 고윤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고윤은 크게 숨을 한번 고르고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은헌의 눈을 틔웠듯 대전 안에 있는 이들에게 잠시 그의 세상을 열었다.
뒤쪽에서 열심히 붓을 움직이던 사관이 손에서 붓을 떨궜다. 데구루루 굴러가는 붓을 따라 먹물이 짙은 자국을 남겼다.
왕은 눈을 깜박이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디 멀쩡한 구석이라곤 없는 무언가가 그를 보며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감히! 무슨 짓을!”
상선이 허둥지둥 왕의 곁으로 다가섰다. 고윤은 태연하게 열린 눈을 다시 닫아줬다. 안개 걷히듯 순식간에 그의 세상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려졌다.
왕은 고윤을 보았다.
“방금 본 것이 헛것이냐? 아님 귀신이냐?”
“그저 남은 것입니다.”
고윤은 담담히 대답했다.
“전하의 서궤 위에 올려진 장계의 글씨에 묻어온 것들입니다. 이름은 힘을 가지고 무언가를 담은 글은 그릇이 되어 연관된 것들의 흔적을 같이 날라오지요.”
왕은 제 머리 위에 혀를 빼고 축 늘어져 있던 귀신을 떠올렸다.
“분명 그런 일에 관한 장계를 읽고 있었다.”
고윤은 웃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소신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늘 보입니다. 좋은 것보단 그런 나쁜 것을 더 잘 보지요. 전하께서 보시기엔 소신이 몸을 낮게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실상은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얻고자 하는 것도 다르지요. 하여 세간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소인에겐 그다지 쓸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텅 빈 대전 안을 둘러보았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뻔했구나.”
고윤은 픽 웃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애초에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군.”
왕은 그제야 고윤에게 시선을 떼어냈다. 그러곤 부름을 받아 명을 기다리고 있는 사헌부 간언을 보았다.
“앞으로 사흘간 대군과 부부인이 필요하다고 청하는 것이 있다면 내어주거라.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은헌대군에게 맡기겠다.”
사헌부 관리가 정신을 차리곤 재빨리 붓을 붙잡았다. 왕의 명을 종이에 써넣으려 했으나 쓰인 그대로 먹물이 종이에 스며들지 않고 방울져 주르륵 흘렀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어제 대군과 함께 있을 때 사관이 남긴 기록까지 종이에서 밀려 나왔다.
고윤은 몸을 돌려 왕을 보았다.
“기록에 남기기엔 조금 곤란해서요.”
그는 뻔뻔하게 웃었다. 그러곤 불필요한 기억마저 싹둑 잘라냈다. 왕의 머릿속엔 그를 향한 거리낌만을 남겨놓았다. 앞으로 무얼 하든 그저 그와는 거리를 두도록 말이다.
고윤은 뒤돌아 대전을 나서며 은헌이 함께 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 * *
은헌은 고윤이 독대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달려들어 몸부터 살폈다. 말로 꺼내지 않아도 무얼 걱정하는지 아는 터라 고윤은 별일 없었단 듯 제 어깨에 손을 올린 은헌을 보며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런 말은 정말로 괜찮지 않을 때 쓰는 것이 아닙니까.”
은헌은 입을 비죽였다. 고윤은 헛웃음을 삼키곤 어깨를 늘어뜨렸다.
“고작 사흘 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이리 지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 따지자면 고작 하룻밤 지샜는데 이런 겁니다.”
자정 무렵부터 움직이기 시작해 이제 겨우 동이 텄다.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정말로 저 벼락을 치워야겠군요.”
은헌은 하늘로 고개를 꺾어 올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게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은 기이한 광경이었다. 순식간에 뻗쳐 오는 벼락이 고윤의 힘에 가로막혀 흩어지는 것 또한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한데 정말로 치울 수 있는 겁니까?”
벼락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었고,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 계획을 전해 들었지만, 은헌은 여전히 걱정되었다.
“그것 때문에 석수들까지 옮겼으니 어떻게든 치워야 하는 거겠지요.”
고윤은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 * *
준비를 끝낸 고윤은 정전 앞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새 입궐한 대신들이 동궁전으로 이동한 석수를 보며 떠들어댔으나 금군들에게 밀려 멀찍이 물러난 상태였다.
고윤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일을 떠드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는 오늘만 몇 번째 읽는 것인지 모를 터주신께 올리는 축문을 외웠다. 다만, 앞서 한 것과 달랐다.
“목멱산 목멱 대신께 청하여, 힘을 보태어주시길 기원합니다.”
도성 남향에 자리한 목멱산 산신을 부르자. 그 방향에서 푸른 녹음의 향을 품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고윤은 같은 방식으로 도성을 둘러싼 산 주인들의 기운을 궐 내로 끌어들였다.
본디 석수들이 지키고 섰던 자리에 언제 자랐는지 모를 들꽃이 피어 하늘거렸다. 차례로 산신들의 기운을 끌어들인 고윤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힘으로 친 막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왕산 산신께 고하옵니다.”
근정전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웅성웅성 떠들어대던 이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그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늘이 졌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순식간에 뛰어든 집채만 한 호랑이가 날렵한 몸짓으로 재주를 넘더니 이내 근정전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헌은 제 눈에도 퍽 익숙한 인왕산 호랑이 산신을 보며 눈인사를 했다. 호랑이는 느긋한 얼굴로 눈을 한 번 깜박이곤 입을 열었다.
“나를 왜 불렀지?”
축문을 다 외운 고윤이 웃었다.
“저것을 좀 치워달라 청하려고요.”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쳤다. 인왕산 산신은 커다란 앞발을 핥으며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거슬리던 참인데.”
산신은 댕굴댕굴 뒹굴 것 같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곤 숨을 깊이 삼킨 뒤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크아아아앙―!
온몸의 털이 쭈뼛 설 정도로 순식간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근정전을 둘러싼 이들 중 태반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산신은 다시 한번 몸을 바로 세워 하늘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산천초목 벌벌 떨게 한다는 울음은 주위의 모든 소리를 짓이겼다. 천둥마저 순식간에 지워졌다.
크르르릉―
낮게 울리는 그르렁대는 소리에 은헌은 고개를 들었다. 새벽어둠 짙을 무렵부터 쉴 새 없던 벼락 비가 여름날 소나기 그치듯 순식간에 멎었다.
“됐지?”
산신은 뿌듯한 웃음을 머금곤 두툼한 꼬리로 바닥을 툭툭 내리쳤다.
귀를 막고 있던 고윤은 손을 떼어내곤 웃었다. 산신은 앞발을 쭉 내밀어 기지개를 켜곤 제집처럼 마당에 드러누웠다.
“이제 여기 자리 잡고 그냥 있으면 되는 건가?”
“잠시만 지켜주십시오.”
“그러지. 그래도 전에 준 술값만큼만 있을 게야!”
산신의 말에 고윤은 웃으며 소매에 손을 넣고 휘적거렸다. 그러곤 이내 보자기에 싼 것을 꺼냈다.
산신이 콧등을 찡그리며 냄새를 맡곤 이내 얼굴을 활짝 폈다.
“그건!”
“빈궁께옵서 산신께 직접 올리는 공물입니다. 궐에서 빚은 술 중에서 가장 맛이 좋은 것이랍니다.”
고윤은 세자빈이 구해준 술을 내밀었다. 산신은 콧김을 세차게 내뿜었다.
“하니 오신 김에 넉넉히 머물다 가십시오. 머무는 김에 좀 지켜주시고요.”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산신은 콧등을 찌푸렸으나 이내 두툼한 발바닥을 내밀어 술을 받아갔다.
“고작 이걸로?”
산신은 날카로운 손톱을 세워 보자기를 갈기갈기 찢어내듯 풀어내곤 단숨에 술병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두꺼운 혀가 입맛을 쩝쩝 다시기 시작했다.
“기별도 안 가는데.”
“원하시면 더 구해다 드리지요.”
“그래?”
산신은 방긋 웃고는 꼬리를 움직였다.
“무척 마음에 드니 내 이 일이 끝날 때까진 이 자리를 지켜주도록 하지.”
고윤은 은헌을 돌아봤다. 어쨌든 벼락을 치웠고, 서수상을 대신해 왕을 지켜줄 산신도 끌어들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
* * *
궐에서 나온 군사들이 남별궁을 에워쌌다.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 뒤 세자는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말 등에 올라 남별궁을 응시했다. 앞뒤 사정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곧 길을 떠나는 사신단을 배웅하러 나온 모양새였다.
“저하 은헌대군께서 준비가 다 되었다 하셨습니다.”
남별궁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 도끼를 둘러멘 장정들이 명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뒤에 은헌이 고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세자는 잠시 숨을 골라 뱉곤 외쳤다.
“마지막으로 명한다. 침언군은 밖으로 나와 오라를 받으라―!”
쩌렁쩌렁 호령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남별궁은 대답 없이 조용했다.
“문을 열어라.”
그의 명을 받은 이들이 움직였다.
사방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 울리는 소리 뒤로 도끼로 문을 내리찍는 굉음이 뒤따랐다. 두꺼운 나무문이 순식간에 부서졌다. 빗장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부숴 버린 군사들이 문을 활짝 열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소리를 치며 군사들이 움직였으나 안으로 들어가는 이는 없었다.
세자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열린 문 앞에서 은헌이 뒤를 돌아보았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헌이 대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고윤 또한 은헌의 뒤를 쫓아갔다.
세자는 주위의 군사들에게 안에서 빠져나오는 이가 없도록 단단히 방비하라 이르고는 부서진 문 너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은헌은 고윤과 함께 남별궁 깊숙한 곳으로 곧장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굳게 닫힌 문 안에서 화국의 군사들이 칼을 들고 나섰다. 그 뒤로 무장한 화국 사신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헌대군.”
마찬가지로 무장을 한 하 공공이 가볍게 예를 차렸다.
“공공.”
은헌은 담담히 그 인사를 받았다. 하 공공은 고작 두 명이 쳐들어온 것을 보며 웃었다.
“배웅하러 오신 겁니까. 배웅치곤 엉망이군요.”
은헌은 그 말에 코웃음 쳤다.
“이만하면 성대한 배웅이지.”
“고작 둘이서 온 것이 말입니까.”
“차고 넘치게 온 거라네. 사실 한 명으로도 충분하긴 하거든.”
은헌은 그게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하 공공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봐도 고작이질 않습니까. 대감께서 이리 무모하게 목숨을 내던지실 줄은 몰랐습니다.”
은헌은 서늘한 웃음을 머금었다.
“편한 대로 생각하게. 사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만 알아주면 좋겠군.”
“대군께선 잘못된 판단을 하고 계십니다. 무모한 싸움을 걸기 전에 상대가 누구인지도 살펴보셔야지요. 설마하니 밖을 둘러싼 군사를 믿고 이러시는 겁니까?”
하 공공은 그리 말하며 웃었다.
세자가 남별궁 밖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나, 이역만리에 이르는 커다란 나라 옆 조그마한 이 나라의 세자 따위가 무서울 리가 없었다.
“저가 보기엔 세자가 죽을 자리에 아우를 밀어 넣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니 지금이라도 제 손을 잡으시지요.”
“안타깝게도 내 손 임자가 바로 옆에 있어 말일세. 두 눈 부릅뜨고 있는데 그 앞에서 외간 사내 손을 잡기엔 조금 그렇군.”
은헌은 웃으며 옆으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하 공공은 그제야 은헌의 옆에 선 고윤을 보았다.
“저자가 대체 누구기에……!”
하 공공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소리도 없는 비명을 내지른 채 바닥에 뒹굴었다.
“송구합니다만, 저가 잠을 못 잔 터라 조금 빨리 일을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라서요.”
고윤은 그리 말하며 손바닥을 다시 부딪쳤다. 짝 하는 소리 한 번에 사신단에 속한 이들의 몸이 한 명씩 굳어갔다. 발아래서부터 회색빛으로 굳는 사람들 뒤에 숨어 있던 이들 중 하나가 서둘러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놈!』
주변 사람들과 복색이 조금 다른 것을 보며 은헌이 입을 뗐다.
“저자가 그 술객인가 봅니다.”
“그렇겠지요.”
고윤은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웃었다. 벽동 집에 들어온 침입자와 짐승의 몸에서 발견된 그 검은 비늘과 비슷한 기운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네놈! 해괴한 술수를 쓰는구나!』
“부인께서 해괴한 술수를 쓴다고 화를 내는군요.”
은헌은 들려오는 말을 전했다. 고윤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초면에 이리 칭찬까지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태연히 말을 받아 비꼬았다. 그러면서도 눈으론 꼼꼼하게 그 술객을 살폈다. 언뜻 보면 신선도에 흔히 그려져 있을 법한 외양이었다.
술객은 일그러진 얼굴로 수인을 맺더니 이내 사신단에게 걸린 주술을 풀어냈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져 오는 건지 몇 번이고 끅끅댔다.
고윤은 그가 쓴 술법을 풀어내는 것을 잠자코 기다려 줬다.
“부인. 그냥 바로 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은헌은 가만히 서 있는 고윤에게 슬쩍 속삭였다. 조용히 있던 고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이 정도로 비실대는 것이 오랜만이다 보니 되레 이쪽이 무뢰한 같아 말입니다. 그리고 저 연세에 저리 노력하는데 한 번은 지켜봐 주는 것이 예가 아니겠습니까.”
그 사이 술객은 주술을 죄다 풀어내곤 득의양양한 얼굴로 고윤을 보았다.
고윤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으며 이번엔 제대로 기운을 흘렸다. 그가 선 땅을 중심으로 땅이 새카맣게 썩어들어 갔다. 맑은 물에 먹을 엎어버린 듯 순식간에 검은 것이 퍼져 화국 사람들의 발아래로 번졌다. 그 검은 것은 그것에 멈추는 게 아니라 서 있는 이들의 몸을 타고 올랐다. 고윤은 손을 가볍게 허공에 휘저었다.
“컥!”
앞쪽에 서 있던 장정이 순식간에 피를 토해내며 그대로 넘어갔다. 죽은 자의 몸에서 검은 것이 빠져나와 다시 땅으로 스며들었다. 너무 손쉽고 빨랐다.
“무슨 짓을!”
정신 차린 하 공공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고윤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무얼 그리 놀라십니까. 어차피 예서 살아나갈 자가 없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니었습니까.”
“황제께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듣고 있던 은헌이 코웃음 쳤다.
“감히!”
황제를 입에 올렸음에도 비웃음당하자 하 공공은 격노를 터뜨렸다.
고윤은 그런 그를 보며 애써 한숨을 참았다.
“뭐, 어차피 기억도 못 하실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고윤은 숨을 깊이 삼켰다가 볼을 부풀리며 길게 뱉어냈다. 그가 무슨 일을 한 건지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은헌이었다.
“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실이라니…… 그게 무슨?”
하 공공은 헛숨을 터뜨렸다. 보이지 않던 것이 눈앞에서 선명해지자 사신단에 속한 이들은 아연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허공에 복잡하게 엮여 있는 이상한 실들이 보였다. 하나둘도 아니었고 거미줄처럼 얇은 실이 사방팔방 길게 뻗어 있었다.
『무슨 술법이냐!』
술객은 당황한 듯 소리쳤다.
고윤은 모두의 눈앞에 드러난 실을 보며 적당한 것을 골랐다.
“백 마디 말보단 한 번 보는 게 나을 겁니다.”
그는 아까 피를 토하고 쓰러진 이에게 이어진 실을 잘라내듯 검지와 중지를 벌렸다가 오므렸다. 손가락으로 한 가위질에 눈앞에서 그 사내에게 이어진 실이 썩둑 썩둑 잘려나갔다.
하 공공은 그것을 보다 눈을 찌푸렸다.
“무슨 짓을! 그나저나 이자는 대체 누구기에…….”
말을 늘어놓던 그가 퍼뜩 시선을 움직였다. 고윤은 그새 이번엔 살아 있는 이에게 매달렸던 실을 잘라내고 있었다. 두려움에 질린 눈동자가 실이 끊어지고 있는 이를 향했다.
모든 실이 잘린 이는 그 후로도 살아는 있었다. 그러나 곁에 선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게 그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경계하듯 저도 모르게 그자에게서 떨어졌다. 혼자가 된 그자조차 제 주위에 있는 이들을 알아보지 못해 화국 말로 누구냐며 연거푸 떠들었다.
상황을 파악한 사신단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이것은 인간인 그들로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재앙이었다.
“너는 누구냐?”
하 공공은 그제야 고윤의 정체를 확인했다. 술객 역시 목이 꽉 틀어막힌 목소리로 연거푸 고윤이 누군지 화어로 떠들었다. 고윤은 뒤에서 통역해 주는 은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혀를 찼다.
“수십 년 전 예언을 이 땅에 전했다 들었습니다. 재앙을 부르는 용이 태어난다 했다지요?”
술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예언을 했다.』
“그리고 용에게 꼭 필요한 비와 같은 존재가 태어난다 했고요.”
술객의 눈이 커졌다.
『설마!』
고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남은 말을 이었다.
“예. 부부인입니다.”
“지금 그 말을 하려고 수십 년 전 예언까지 들먹인 겁니까?”
통사 노릇 해주던 은헌이 그새를 못 참고 뒤에서 빈정댔다.
“그럼 뭐라고 말합니까. 예. 제가 그 비와 같은 존재입니다. 대감께서 이 땅에 불러낸 재앙이지요. 그리 말하고 손이라도 흔들까요.”
고윤이 입을 댓 발로 내밀고 투덜대자 은헌은 한숨을 내쉬듯 웃었다.
“하긴. 그런 걸 자기 입으로 떠들기엔 좀 그렇긴 하군요.”
은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윤은 당연하단 듯 콧방귀를 뀌곤 다시 술객을 보았다.
“뭐 그런 겁니다. 어쨌든 저는 그쪽 노인장에게 궁금한 것이 없고, 알고자 한 것을 알려드렸으면 서둘러도 되겠습니까. 아까 말했다시피 저가 잠을 좀 못 자서요.”
고윤은 그리 말하며 다시 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은헌대군!”
은헌은 급히 저를 부르는 하 공공을 보았다.
“참으로 하늘을 거스르려 하십니까. 하늘이 대군에게 왕의 명을 부여했는데 어찌 이러시오!”
은헌은 신음을 뱉었다. 고윤이 그런 은헌의 팔을 다독이듯 두들겼다.
“대군께서 왕이 되면 화국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은헌은 그를 동아줄처럼 바라보는 하 공공을 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그게 무엇이든 필요 없네.”
“대군!”
지켜보던 고윤이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무언가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어째서! 어째서 역성을 품은 용이 이토록 본성을 감춘단 말인가!』
술객 또한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은헌을 보았다.
“그만 좀 닥치게.”
은헌 또한 버럭 소릴 질렀다. 고윤은 다시 손을 흔들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놓은 끈이 재처럼 허공에서 바스러져 휘날렸다. 그리고 땅에서부터 타고 오른 검은 것에 당한 이들이 피를 토해내며 털썩털썩 쓰러져 갔다.
고윤은 마지막 한 명이 피를 게워내며 쓰러지고 나서야 손을 다시 아래로 늘어뜨렸다. 수십의 목숨이 꽃처럼 지는 동안 그는 망설임도 없이 힘을 풀어 썼다. 그러곤 다시 거둬들였다. 검은 것이 고윤의 그림자로 되돌아와 그대로 사라지자 땅은 본래의 색으로 돌아갔다.
“끝났습니다.”
은헌은 눈앞에 펼쳐진 아비규환과 같은 광경을 보았다. 사람이 죽은 자리에 남은 것들이 끔찍한 몰골로 떠올랐다.
“죄다 쓸어버리면 마음 편하여질 줄 알았더니 딱히 그렇지도 않군요.”
은헌은 고윤의 곁에 섰다. 그러곤 손을 뻗어 고윤의 손을 꽉 붙잡았다.
“손이 찹니다.”
“잠을 못 자 그럽니다.”
고윤의 말에 은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은 저가 더 못 자지 않았습니까. 그나저나 잠을 못 자면 성정만 좀 급해지는 줄 알았더니.”
“뭐, 사람 꼴이 아니긴 하지요.”
고윤은 안 쓰던 기운을 쓴 탓에 피곤한 얼굴로 픽 웃었다. 은헌은 그런 고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은 뒤 둘은 다시 앞을 보았다.
“이리 사람을 해쳤는데 부인께선 괜찮으신 겁니까.”
죽은 이의 원념이란 것이 무섭다는 것은 은헌도 잘 알고 있었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찾아들고, 산천초목을 죄다 말린 뒤 메뚜기 떼가 하늘을 뒤덮게 만들어 이듬해 뿌릴 종자까지 갉아 먹게 하여 굶어 죽는 이가 산을 이루고, 시신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독이 되어 살아 있는 이들을 몰살시키게 만드는 그런 짓은 안 저질렀으니 괜찮습니다.”
그리 말한 고윤은 땅에 남은 핏자국을 응시했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이의 인연을 끊어냈으니 당분간은 죽은 자들의 원한이나 풀어줘야겠군요.”
도성을 어지럽힌 것은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처리했을 테지만, 이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것도 처음이었다. 지은 업을 덕으로 바꿀 수는 없어도 그만큼 쌓아올려 적당히 맞춰야 앞으로 들이닥칠 재액을 또 피해갈 수 있었다.
“그 전에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을 침언군도 잡아야겠지만요.”
은헌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신호를 보내면 세자가 들어올 터였다.
“그 일은 저하께서 나서실 터니 저희는 이만 물러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말에 고윤도 세자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대감께서 저하를 공경하는 이유를 저도 알 것 같습니다.”
은헌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 * *
은헌은 대전을 빠져나왔다.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았던 화국과의 일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고윤이 그 인연의 실을 죄다 잘라낸 덕에 아무도 기억하는 이가 없는 탓이었다.
며칠 전까지 성대하게 그들을 배웅하고 연회까지 벌였으나 조정 대신 누구도 사신단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알고 있는 자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세자는 남별궁의 다락에 숨어 있던 침언군과 죽은 이들에게 그럴싸한 죄목을 뒤집어씌웠다. 은헌은 공노비 신분으로 바뀌어 목이 잘린 채 성벽에 효수된 사객들을 떠올리곤 혀를 찼다.
다만, 침언군에게 붙였던 죄목은 여전히 역모가 아니었다.
나라를 세우며 후인으로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자 몇 백 년 전의 왕실 계보를 조사해 주기적으로 제를 올리는 터에 무덤을 파헤친 일은 파장이 컸다. 왕이 가려 덮을 생각을 하지 않아 더 커졌다. 그 죄가 무엇인지 낱낱이 알려지자 유생들까지 달려들어 종친인 침언군을 엄하게 벌할 것을 요구했다. 왕의 자손이란 이유로 여태 큰 벌을 피해갔던 종친부 전체에 대한 목소리도 드높았다. 그 때문에 은헌 역시 종친부와 궐을 번갈아 드나들며 시달렸다.
“대감!”
은헌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러곤 예를 갖췄다.
“영상.”
영의정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주위를 살피며 다른 이가 없는지 확인하곤 그는 자신의 사위를 보았다. 멀쩡한 아들 넷을 낳아 길렀는데 어쩌다 보니 생긴 덤 같은 사위였다.
덤으로 생기긴 했는데 외모 또한 도성에 소문 자자할 정도로 예쁘장한 데다가 성품도 반듯하고 무엇 하나 나무랄 것이 없는 이였다. 가끔 배슬거리는 웃음으로 사람 복장 뒤집는 일을 한다며 흉보는 이가 있어도 말이다. 그런 대군이 제 막내아들과 어울려 번번이 큰 사달을 만들어내니 자연스레 영의정의 근심 또한 깊어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영의정은 이래저래 호칭을 고르지 못하고 결국 어설픈 명칭을 입 밖에 냈다.
은헌은 잠시 웃곤 입을 뗐다.
“부인께선 주무십니다.”
영의정은 기가 찬 듯 헛숨을 삼켰다.
“사고란 사고는 다 쳐 놓고 수습은 남의 일이군요.”
“하신 일이 고되었으니, 뒷정리 정돈 다른 이가 하여도 되는 것이지요.”
타국에서 온 사신단을 몰살시키고도 이리 조용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고윤이 큰일은 다 한 것이었다.
영의정은 대군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연회에 쓴 국고도 말입니까.”
사신단은 사라졌으나 그들을 대접하느라 국고의 일부분을 털어 넣었다. 쓴 사람은 없는데 큰 금액이 사라졌으니 관리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 일이라면 조만간 전하의 하교가 계실 겁니다.”
“대감, 사사로이 기록에 손을 대어선 곤란합니다.”
영의정은 기록에 남은 것을 고치는 것 자체를 염려했다. 제 입맛에 맞게 무언가를 계속 고치려 들다간 끝이 없었다. 고윤이 그러는 것을 보아 혼을 낸 적이 있으나 은헌까지 그를 말리기는커녕 나서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은헌이 환히 웃었다.
“사사로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니 고치는 것입니다.”
“화국의 기록도 말입니까?”
영의정이 눈을 번득이며 되물었다.
은헌은 턱을 문질렀다.
“조용히 움직였다고 생각하였는데요.”
누군가 의심을 할지 모른다면서 고윤은 한잠 자고 일어나더니 그대로 외출을 했다. 그러곤 저녁 늦게 돌아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화국 수도에서만 판다는 주전부리를 은헌의 손에 쥐여주곤 다시 잠든 참이었다.
영의정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 아이가 정말 갔다 오긴 했나 보군요.”
“짐작하신 겁니까?”
“세 살 버릇이 어디 갈까요.”
영의정의 말에 은헌이 웃었다. 아무래도 어렸을 적부터 그랬던가 싶었다. 작은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 사고를 친 뒤 혼나지 않으려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궁리를 거듭했을 고윤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귀여우셨겠군요.”
“뭐, 그랬긴 했습니다만.”
영의정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군을 보았다. 그러나 이내 헛기침을 흘렸다.
“어쨌든 그건 되었고. 듣자 하니 대군께서 영제교 곁에 둔 천록상 하나를 남별궁으로 옮기고자 주청 드렸다고요.”
“예.”
영의정은 어둑한 시선으로 대군을 훑었다.
“따로 연유가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이번에 생긴 일과 연관 있는 겁니까.”
은헌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께서 남별궁 터를 정화하는 데에 필요하다 하여 전하께 그리 고한 것입니다.”
“그날 남별궁에서 무얼 하셨는지는 여전히 알릴 생각이 없으시고요.”
“예.”
그날 그 터에서 벌어진 일은 여전히 은헌과 고윤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세자에게도 적당히 숨겨 알렸고,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영의정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며칠간 앓을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몸에 벅찬 짓을 하면 그러곤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은헌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영의정은 그런 은헌을 보며 웃었다.
“그래도 잘 먹이고 재워두면 또 금방 나아질 겁니다. 아비인 제가 말하기에도 좀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금수 같은 구석이 있어 말이지요.”
아들에 관해 말하는 것치곤 좀 매몰찬 말이었다.
* * *
고윤은 자다 번쩍 눈을 떴다. 귓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누가 욕을 하나.”
욕 들어먹을 곳이 하도 많아 짐작도 않고 그는 손으로 쓱쓱 귀를 문질렀다. 갈증이 나 고개를 돌리니 머리맡에 보자기로 덮어놓은 소반이 보였다. 언제 떠다 놓았는지 아직 찬 기운이 남은 물을 삼키곤 그는 몸을 뒤틀었다. 뼈마디 뒤틀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잠에서 완전히 깬 고윤은 다시 제 위에 덮인 이불을 걷어내고 밖으로 나섰다. 해가 중천을 지나다 못해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고윤은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보며 하품을 흘렸다.
“벌레 날아듭니다.”
“삼킬 것도 아닌데 뱉으면 되지요.”
그게 무슨 큰일이냐며 고윤은 고개를 돌렸다.
마루에 앉아 있던 은헌이 픽 웃었다. 고윤은 퇴궐한 지 얼마 안 된 듯 아직 공복을 입고 있는 은헌을 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어찌 되었습니까.”
“적당히 매듭지었습니다.”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손해를 보거나 이득을 얻는 일도 없이 끝날 수 있단 소리니 말이다.
“잘됐군요.”
그는 털썩 은헌의 곁에 주저앉았다.
“이제 저 녀석의 문제만 해결하면 다 끝납니다.”
고윤은 눈을 비비적대곤 마당에 떡하니 굳어 있는 짐승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방법을 찾으셨습니까?”
은헌은 돌이 된 녀석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부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볼 때마다 고민하는 중이었다.
“방법까지는 아니고, 저 녀석을 처음 만들 때 썼을지도 모르는 술법을 찾았습니다. 기록만 보자면 주인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던데.”
“주인을 바꾼다?”
높아진 은헌의 목소리에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만 하면 저 녀석 뱃속에 집어넣자고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을 침언군을 찾아가 혼백을 건져 오지 않아도 될 겁니다.”
은헌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썩 나쁘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잠시 즐겁고자 일을 늘리는 것이 몹시 나쁘게 들립니다.”
고윤은 며칠 바쁘게 돌아다닌 것만으로도 충분하단 듯 얼굴을 구겼다.
“어쨌든. 대감께서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은헌은 어떤 것이 필요한지는 모르지만 일단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가 뭘 하면 됩니까?”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 이름을 지어야 합니다.”
“이름이라…….”
은헌은 잠시 말끝을 끌더니 이내 떠오르는 것을 입 밖에 냈다.
“춘돌이?”
고윤이 미간을 구겼다.
“춘돌이요?”
은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습니까. 개 이름치곤 괜찮지 않습니까.”
“저 녀석은 개가 아니질 않습니까.”
“개나 개 비슷한 것이나. 오십보백보지요.”
“반절이나 차이가 나는데 어찌 거기서 거깁니까.”
“반이나 했으면 다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냥 반만 한 겁니다.”
고윤의 말꼬리 잡기에 은헌이 입을 비죽였다.
“저더러 지으라 하셨으니 부인께서 제 뜻에 따라주셔야지요. 춘돌이로 하겠습니다.”
고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짐승이 있는 곳을 봤다.
“저 녀석이 그 이름을 싫어하면 대감께서 책임지시는 겁니다.”
“그리하지요. 저도 저 녀석 하는 말은 알아듣지 못하니 욕을 들어도 괜찮을 겁니다.”
언제고 했던 말이 돌아오자 고윤은 그냥 웃고 말았다.
“뭐, 저 녀석이 말을 할 것도 아니니 상관없긴 할 겁니다.”
은헌도 그 말에 소리 내 웃었다.
“녀석이 깨면 어디 풍광 좋은 곳으로 나들이나 다녀올까요.”
“일전에도 비슷한 말을 나누다 결국, 책 보러 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간 일이 많아 새카맣게 까먹고 있던 일을 고윤이 떠올렸다.
“이참에 거기나 갈까요.”
“그럼 금붙이 좀 챙겨두어야겠군요.”
“그놈의 금붙이는 얼마나 모아두셨기에. 아! 그러고 보니 대감께 물을 것이 있었는데. 대체 대감께서 지닌 땅이 있는 곳마다 몇 채의 집을 사들인……. 대감?”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부인.”
“달아나시는 겁니까?”
“싸움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지 않습니까.”
“이게 싸울 일은 아니고 피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대체 민달팽이도 아니고 뭐 그리 집을 사들이신 겁니까. 몸뚱어리도 하나신데 철마다 집을 바꿔 살 것도 아니고.”
“다 쓸 데가 있어 사들인 겁니다.”
“그러니까 대체 뭐에 쓰시려고, 대감!”
벌떡 일어나 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은헌이 홱 돌아섰다.
“윽!”
바로 뒤쫓아 붙었던 고윤이 앞으로 고꾸라지듯 엎어져 은헌의 품에 그대로 안겨들었다.
“아직 해가 훤하거늘 대범하십니다.”
“이게 뭐라고요.”
은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생각에 잠겨 고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꺾어 든 고윤의 이마에 그대로 입술을 내리찍었다.
“무슨!”
“해달라고 달려드신 게 아닙니까.”
고윤이 헛숨을 뱉었다.
“대체 어찌하면 그런 곡해를 할 수……!”
은헌은 이번엔 고윤의 입술을 덮어 눌렀다. 그러곤 몇 번 입술을 춥춥 빨아 당긴 뒤 고개를 들었다.
“보채지 마시고 잠시 계십시오. 씻고 오겠습니다.”
“……어딜. 아니, 그게 아니고 갑자기 왜 씻으십니까.”
“그야 부인께선 녀석을 깨워야 하니 기운을 쓰셔야 할 거고, 지금은 기력이 그다지 충분치 않으시니 채워야 할 게 아닙니까.”
은헌은 황급히 몸을 빼려고 하는 고윤의 몸을 두 팔로 꽉 붙잡았다. 고윤은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에 입꼬리만 끌어 올리곤 웃었다.
“푹 잤더니 멀쩡해졌습니다.”
“사양치 않으셔도 됩니다. 지아비가 이 정도는 해야지요.”
“괜찮다니까요.”
은헌은 진저리치며 달아나려는 고윤을 붙잡고 키득댔다.
“부인께서도 좋으시지요?”
“말 좀 들어주십시오.”
“좋으시다니 다행이십니다. 하면 이참에 저랑 목간이나 할까요.”
“아니라니까요!”
“저가 구석구석 닦아드리겠습니다.”
“아니!”
은헌은 다시 고개를 숙여 고윤의 입술에 대고 쪽쪽댔다.
“좋으시다고요? 부인께서 좋아하시니 저도 좋습니다.”
“아니! 읍!”
고윤은 다시금 입을 틀어막듯 혀로 입천장을 핥아 올리는 입맞춤에 숨을 급히 삼켰다. 이번엔 은헌이 고개를 들자마자 고윤이 입을 꾹 다물곤 머리를 뒤로 뺐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이를 꽉 깨물고 웅얼웅얼 뱉어내는 목소리에 은헌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안채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에 청지기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님 심기가 많이 불편해지신 듯한데요.”
“대감께서 벅벅 긁어대시니 그러시지.”
석삼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두면 주먹다짐하실 것 같아요.”
문 틈새로 동태를 살피던 겸종 아이가 달려와 작게 속삭였다.
“대감께서 손쓰시면 마님께서 다치실 테니 그럴 일은 안 하실 거다.”
벽동 행랑아범이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총관이 그 이야기를 듣고 혀를 찼다.
“안 하시긴. 작년에 머리채 잡고 다투시다가 뒤뜰 못에 떨어지신 거 잊으셨나. 참, 그건 계사정 일이라 자네는 못 봤겠군.”
그들도 모시던 대군의 머리채가 잡아 뜯기는 건 그때 처음 봤다.
“지금이라도 말릴까요?”
석삼이 목을 풀며 물었다. 그 말고도 신호가 오면 뛰어들어 말려야 할 이들이 죄다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대감께서 부르기 전엔 들어오지 말라 하셨으니. 멱살은 이미 마님께 잡히신 듯하고 머리채까지 잡히시거든 그때 들어가세.”
총관이 잠시 고민하다 결론을 냈다.
“그건 너무 늦은 것 같지 않소?”
그때 담장 너머로 크게 들려오던 소리가 뚝 하고 그쳤다. 재빨리 달려간 석삼이 신중하게 담장 너머 머리를 빼꼼 내밀어 살피곤 이내 몸을 내렸다.
“어떠냐?”
총관이 몸을 숙이곤 소곤거리듯 물었다.
석삼은 담장 아래 모인 이들을 보며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대감께서 마님 모시고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래?”
다행이라는 듯 행랑아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총관 또한 한시름 놓은 얼굴로 콧김을 뿜었다.
“그럼 됐구먼. 자자, 이제 자기 자리로 다들 돌아가 볼일들 보시게. 석삼이 너는 마님께 올릴 탕약이 어찌 되었나 알아보고.”
석삼은 고개를 꾸벅이곤 자리를 떴다. 남은 청지기들도 마찬가지로 웃으며 소일거리를 찾아 흩어졌다.
* * *
은헌은 조용히 눈을 떴다. 창밖으로 밤새가 낮고 긴 울음을 토해냈다.
“뿌아―!”
이상한 소리도 말이다.
집에 들어온 괭이가 우는가 싶었는데 그는 아닌 것 같았다. 그 말고도 깨어난 이가 많은지 모래 밟는 소리가 가까이서 났다.
“대감.”
석삼의 낮은 목소리에 은헌은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어디서 나는 것이냐?”
“안채에서 들립니다.”
그리로 시선을 던지자 검을 빼든 청지기들이 언제든 급습해 들어갈 수 있도록 채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은헌은 낯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춘돌이 소리는 아닌 듯한데.”
고윤이 어제 술을 걸며 말하길 날이 밝고 해가 중천에 다다를 때쯤 되어야 깨어날 거라고 했다. 하나, 먼저 깨어났다 쳐도 발정이 난 괭이처럼 울지는 않을 듯했다. 춘돌이 주둥이가 괭이를 닮은 것도 맞지만 말이다.
은헌은 조용히 걸음 옮겨 안채로 가는 문에 손을 올렸다. 만일을 대비해 그의 뒤로 바짝 붙어선 청지기를 뒤로하고 그는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녹슬게 내버려 둔 경첩에서 소리가 나자, 이상한 울음이 잠시 멈추더니 이내 커졌다.
은헌은 마당을 살폈다.
어둠 속에 희미한 형체들이 여기저기 뭉텅이로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석삼아.”
“예, 대감.”
“네 눈에도 저것이 보이더냐?”
“예. 보입니다.”
고윤은 마루 위 우당탕 울리는 소리에 신음을 흘렸다. 그는 침음을 흘리며 머리를 들었다가 그대로 다시 누웠다.
“부인!”
그러나 그도 잠시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은헌의 부름에 한쪽 눈만 겨우 떴다.
“……금군이라도 왔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요.”
고윤은 더듬더듬 질문을 던지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벼 잠기운을 지워냈다. 눈코입이 제멋대로 문질러지며 어딘지 취한 것 같은 감각이 사라졌다. 그는 팔꿈치로 바닥을 찍어 겨우 상체를 세운 뒤 은헌이 들어온 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을 확인했다. 무슨 일이 났는지 횃불의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방은 어둑해 고윤은 바깥의 불빛에 의지해 은헌을 살폈다. 어슴푸레 비치는 은헌의 낯에 그는 벌떡 일어났다.
“대감.”
가라앉고 갈라진 목소리로 고윤은 은헌을 찾았다. 은헌의 얼굴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서늘함을 품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밖에.”
은헌은 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예, 밖에.”
“아이가 있습니다.”
“……길 잃은 혼백입니까.”
가끔 그런 귀신도 찾아드는 터라 그건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은헌이 그 혼백 때문에 저런 얼굴을 한다는 게 이상했다. 아는 이라도 온 것인가, 고윤은 그리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나섰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혼일수록 빨리 저승길 보내주는 게 좋았다. 그가 비틀대며 마루 위에 서자 서 있던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어디…….”
“저깁니다.”
은헌이 뒤따라 나와 고윤의 어깨를 붙잡고 방향을 잡아줬다. 보라는 곳으로 시선을 던지자 행랑아범이 보였다. 그러나 그뿐, 아이의 혼백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 있단 건지 물으려던 찰나 은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데려오게.”
고윤은 눈을 찌푸렸다.
은헌의 명을 받은 행랑아범이 성큼 앞으로 걸어 나섰다. 그러곤 고윤의 앞에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마루 위에 조심스레 내려진 보자기를 본 고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간밤에 춘돌이에게 덮어둔 게 아닌가. 이걸 왜.”
“부인, 안을 보십시오.”
은헌의 재촉에 고윤은 마당에 선 청지기들을 한 번 둘러보곤 몸을 숙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접혀 있는 보자기를 펼쳤다.
“까!”
통통한 손이 저를 향해 뻗어왔다.
“아이?”
고윤은 눈을 가늘게 뜨곤 아이를 봤다. 그러곤 눈을 비볐다. 한 번 더 아이의 얼굴을 살핀 고윤은 뒤로 고개를 돌려 은헌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더러 태몽이 필요할 일 없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은헌이 실소를 흘렸다.
“그러는 부인이야말로 숨겨둔 정인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무슨!”
“근데 아이 얼굴이 어찌 부인을 닮습니까.”
“……대감을 잘못 말씀하신 게 아니고요?”
고윤은 헛웃음을 흘리곤 눈을 찌푸린 채 다시 아이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이목구비가 은헌을 빼닮았는데 이 얼굴에서 저를 찾아내는 것이 어처구니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다시 아이를 보다 움찔 어깨를 떨었다.
“뭐 그리 놀라십니까. 설마 정말 아이 얼굴을 보고 기억이라도 나셨습니까? 그게 한때 죽고 못 살았던 정인은 아니셔야 할 텐데요.”
이를 박박 갈아대는 듯한 은헌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고윤은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대감.”
“왜 부르십니까.”
“그만 좀 하시고. 이거 보셨습니까?”
고윤은 몸을 틀어 저가 방금 본 것을 은헌의 눈앞에 보이게 아이의 팔을 조심스레 당겼다.
“거기 뭐가…… 그게 왜 거기 있는 겁니까?”
“그러니까 묻는 겁니다.”
은헌은 눈을 찌푸리며 고윤의 곁에 몸을 내려앉았다.
“제가 지난밤 춘돌이 몸에 달아둔 실매듭이 어째서 이 아이의 팔목에 걸려 있는 걸까요.”
다시 짐승의 형으로 되돌아오더라도 달아나지 못하도록 묶어둔 매듭이었다.
“그거 뺄 수 있었던 겁니까?”
“대감의 피와 제 피를 섞어 만든…….”
말을 하다 말고 고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은헌도 무언가 머릿속에 떠오른 듯 떨떠름한 눈으로 아이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춘돌아?”
“꺄!”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은 듯 입을 벌렸다.
“부인. 설마…… 이 아이.”
“짐작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고윤은 손가락 틈새를 벌려 그 새로 은헌을 보았다.
“춘돌입니다.”
고윤을 닮은 하얀 살결에 유난히도 붉은 입술을 지닌 아이의 얼굴을 보는 은헌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은헌의 눈매와 콧대며, 입매까지 빼다 박은 아이의 얼굴을 보는 고윤의 얼굴은 그저 멍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만 해맑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