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3부 수세지록(需世之錄) 7권) (33/35)

五。(2)

“저깁니다.”

그는 더는 가까이 가지 않은 채 높이 솟은 담장을 보았다. 은헌은 느긋한 걸음으로 고윤의 곁에 걸어와 멈춰 섰다.

“곤란한 곳을 고르셨습니다.”

고윤이 가리킨 곳은 은헌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부러 그리한 것은 아닙니다.”

은헌은 혀를 차곤 다시 앞을 보며 낯을 굳혔다. 그는 앞에 보이는 곳에 놓인 현판을 읽었다.

남별궁 1)이라…… 기세등등하게 왔으나 문턱도 넘지 못하겠군요.”

“화국의 사신단이 머무는 곳에 이리 온 것이 알려지면 말이 돌 겁니다.”

원손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사신단이 머무는 거처 앞에 대군이 사병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말이다. 남별궁의 담을 넘는 것보단 궐 담을 넘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고윤은 손에 움켜쥐고 있는 끈을 보았다. 그는 끈을 끌어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끈의 끝이 분명 남별궁 안의 무언가에 이어져 있었다.

은헌은 가라앉은 눈으로 고윤을 보았다.

“오늘은 빚을 받아낼 때가 아닌가 봅니다.”

고윤은 미련 없이 손에서 끈을 놓았다. 그러자 끈은 다시 연기가 되어 불어오는 바람에 그대로 흩어졌다.

“그럼 나중에 와야겠군요. 이만 돌아가시지요.”

추적하려면 못 할 것도 아니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남별궁 담장을 넘어 들어가야 했다. 야인의 몸이라면 거리낄 것도 없으니 당장 그리했을 테지만 은헌까지 함께 나온 길이었다. 벌집을 쑤시는 게 차라리 나은 선택이라 고윤은 담담하게 손을 털었다. 어쨌든 저 담장 안에 있는 누군가가 짐승을 알고 있단 걸 알았으니 그가 할 일도 명확해졌다.

“녀석을 산신께 맡기려 했던 계획은 취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윤은 은헌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은헌도 동의하는 바였다.

“당분간 데리고 있는 것이 좋겠지요.”

짐승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더 시급해졌다.

“석삼아.”

“예.”

길을 밝히기 위해 조족등 2)을 들고 있던 석삼이 고개를 숙였다.

은헌은 남별궁에 시선을 던지곤 입술을 뗐다.

“심부름 좀 다녀오너라. 예조의 서 좌랑에게 내가 급히 보잔다 전하려무나.”

그는 지금 필요한 정보를 알려줄 이를 찾았다.

석삼은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곁에 있는 이에게 등을 넘기곤 곧장 자리를 떠났다.

고윤은 세자빈의 오라비인 서갑령을 불러들인 은헌을 보았다. 은헌은 그 시선을 눈치챈 듯 눈웃음을 흘렸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가장 잘 알 만한 이에게 물어보는 게 확실치 않겠습니까. 바람 도깨비를 불러들인 것처럼요.”

무려 원손의 탄생을 축하하러 왔단 사신단이니, 예조좌랑만큼 잘 아는 이도 없을 터였다. 무슨 꿍꿍이인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테니 말이다.

* * *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서갑령이 예를 갖춰 인사하는 것에 고윤은 마주 고개를 숙이다 멈칫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은헌이 웃었다.

“어서 오게.”

서갑령은 은헌을 본 뒤 고윤에게 시선을 던지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가져온 보따리를 옆에서 앞으로 끌어당겨 내밀었다.

“그간 인사드릴 경황이 없어 늦게 가져 왔습니다. 혼례를 경하드립니다.”

“고맙네.”

은헌은 늦게 전해온 인사를 담담히 받았다. 고윤은 가져온 것이 혼례 선물이란 것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썩였다.

“전에도 보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언제 말입니까, 부인?”

서갑령이 헛기침을 흘렸다. 몹시도 목이 멘 듯한 모양이었다.

“차라도 내라 이르지.”

“아니, 괜찮습니다. 사레가 걸려서 그만.”

서갑령은 큼큼대며 목을 가다듬고 고윤을 보았다.

“그때 보낸 것은 의금부에서 신세 진 일로 보낸 것이었으니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주십시오.”

서 좌랑은 말을 꺼내며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고윤은 의금부 옥사 동기의 말에 알았단 듯 머릴 까닥였다. 은헌은 무심한 낯으로 서 좌랑을 보았다. 그의 머리가 깨져 생사가 오락가락하던 사이에 무슨 대화를 나눴기에 우정을 그리 도탑게 쌓았는지 몹시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대감께서 제게 보낸 이에게 앞뒤 사정을 듣긴 했는데 조금 더 자세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서갑령은 은헌의 의문을 해결해 줄 생각은 없는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말을 꺼낸 서갑령의 목소리는 잔뜩 굳어 있었다. 대군이 찾는다는 소리에 선물 챙겨 들고 한달음에 오긴 했으나 대군은 대외적으로 병으로 요양 중이었다. 아프다는 이가 그를 찾는데 그 연유가 심상치 않았던 탓이었다.

은헌은 낮게 한숨을 흘리고는 입을 뗐다.

“남별궁에 기거하고 있는 이에 관해 묻고자 함은 들었겠지?”

서갑령의 얼굴이 굳었다.

“예. 그러지 않아도 저하의 명으로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대감께서도 그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전해 들었고요.”

“그랬네. 너무 갑작스럽게 온 축하사절이지 않은가. 언제 그런 적이 있어야지.”

서 좌랑은 은헌을 보았다. 은헌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리 경계할 필요는 없네. 자네를 부른 것은 내가 아니니.”

“제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고윤이 은헌의 말을 받아 마무리했다.

“부부인께서요?”

“……예.”

서갑령의 표정이 되레 더 심각해졌다.

“무슨…… 변고라도…… 생겼습니까?”

고윤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아니고 이번 사신행에 속한 이들 중에 저와 비슷한 재주가 있는 이가 있는지 좀 알아보려 합니다.”

서갑령이 움찔했다.

“제가 직접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조심히 움직여야 할 듯해서요.”

고윤의 말에 서 좌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그를 부르는 게 차라리 나았다.

“심어놓은 이가 있으니 곧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서 좌랑은 고윤의 말을 귀담아듣듯 몇 번 확인하고 나서야 벽동 집을 나섰다.

대문까지 나서 배웅을 한 뒤 고윤은 은헌을 돌아봤다.

“한데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사람을 찾겠다며 남별궁을 들쑤시는 것 자체가 은헌에겐 여러 가지 이유로 부담되는 일이었다. 고윤은 그게 걱정이었다. 은헌은 방긋 웃곤 고윤과 시선을 마주쳤다.

“부인께서는 제 편이시지요.”

“예.”

고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바로 돌아온 답에 은헌은 눈매를 휘어가며 웃었다.

“부인께서 저를 지켜주실 텐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리고 산신도 신선도 도깨비도 알아보지 못한 짐승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은헌은 그리 말한 뒤 고윤을 보며 단호히 말했다.

“하니 부인께서는 하셔야겠다 마음먹은 일이 있으시거든 망설임 없이 하셔도 괜찮습니다.”

고윤은 잠자코 듣고 있다 코웃음을 흘렸다.

“저라고 그리 제멋대로 다 하고 살진 않았습니다. 제게도 이 땅에 묶인 연이 많아서요.”

대대로 아들 많은 집 막내로 태어나다 보니 일가친척만 모아도 열 손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조카가 있었고, 숙부와 백부가 있었다. 인간의 틈새에 인간의 꼴을 뒤집어쓰고 태어난 이상 사람답게 살라며 일갈할 사람도 차고 넘쳤다. 그게 싫어서 한때는 눈에 뵈는 것 없이 사고도 쳤지만, 세월 가다 보니 고윤은 저를 이 땅에 묶어둔 인연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쉽게 버리지도 못했고, 귀찮아도 인세에 큰 분란을 가져온 것들은 적당히 처리했다.

그는 은헌을 보았다. 은헌은 여느 때처럼 여상히 그와 시선을 마주쳐 왔다. 질기고 성긴 인연을 외면만 하다가 제대로 마주한 시선이었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땅에서 저를 해칠 만한 것은 정말로 손에 꼽을 정도라서요.”

아직 숨겨둔 밑천은 풀어놓지도 않았으니 괜찮다.

고윤의 말에 은헌은 조용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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