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32/35)

五。(1)

고윤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졸음이 밀려와 하품이 이어졌다.

“다음에 할까요?”

그런 그를 보며 은헌이 걱정스레 물었다.

고윤은 은헌의 염려에 허탈한 듯 웃었다.

정작 숨이 넘어갔다가 돌아온 이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더니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 괜찮아졌는데 그는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고 있었다.

앓아누운 적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괜스레 약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누구는 있는 기운마저 박박 긁혀서 다 뺏겼는데 말이다. 고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조치를 할 테니 한시라도 빨리 알아내는 것이 낫습니다.”

은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한잠 자고 일어난 그는 대체 어떻게 그곳으로 넘어갔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시원한 곳에 가면 좋겠다. 그리 혼잣말했는데. 그곳에 가게 된 거라고요?”

고윤은 다시금 처음부터 꼼꼼히 확인했다.

“예. 이리 말입니다.”

은헌은 뒷문으로 나설 적과 똑같은 시늉을 하며 고윤이 바닥에 그려둔 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번엔 딱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집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원했을 때와 같았다.

몇 번 다시 해 보아도 은헌은 자연스레 선 위를 오갈 뿐 길을 열지는 못하였다. 고윤은 그런 은헌을 보았다. 혹시나 그의 기운을 가져갔으니 길을 여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또 아닌 듯했다. 원래 길을 여는 것은 경계를 볼 수 있거나 이곳에 속한 것이 아닌 이들이나 가능했다.

고윤은 한참 궁리를 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해 보아도 안 되는 것을 보면 대감께서 직접 길을 여신 것은 아닌 듯합니다.”

“하면요?”

은헌은 고개를 갸웃댔다. 고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 있을 만한 것이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대군 시해 미수 건의 가장 유력한 정범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클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말이다.

고윤은 그들이 앓아누운 동안 청지기들에게 배불리 얻어먹고 그늘에서 푹 잠들었다가 깨자마자 또 먹어댄, 살이 통통하게 오른 짐승을 보았다. 저를 보고 있단 걸 알아챈 녀석이 고개를 들고 꼬리를 열심히 흔들었다.

“확실히…… 저보다야 의심 가는 구석이 많긴 합니다만.”

은헌은 말을 하다 멈췄다. 정말로 그가 아니라 저 짐승이 길을 연 것이라면 어째서 시원한 곳에 가자 한 말은 들어주고, 집으로 가고 싶단 청은 무시했는지 궁금해졌다.

고윤은 짐승을 향해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가까이 온 녀석의 목에 맨 끈에 대고 그는 주를 외웠다. 그러자 색이 다른 실 하나가 처음부터 이어진 것처럼 길게 흘러나왔다. 고윤은 그것을 단단히 손에 감아 붙들었다.

은헌은 고윤이 준비하는 것을 보곤 자신도 가까이 붙어 짐승의 목에 맨 끈을 붙잡았다.

“방에 서책을 두고 왔으니 가지러 가야겠구나.”

짐승은 저와 눈을 마주치고 말하는 고윤을 보며 입을 벌렸다.

깡!

알았다는 듯 꼬리도 흔들었다. 그러곤 은헌을 돌아보고는 발을 내디뎠다. 짐승이 걸음을 내딛는 순간 은헌이 순식간에 허공에서 자취를 감췄다. 고윤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집을 보았다. 잠시 숨을 멈췄다가 내쉬는 찰나의 기다림 끝에 허탈한 얼굴로 은헌이 사랑채의 문을 열었다. 은헌은 짐승을 안아 든 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저를 곤경에 처하게 한 범인을 붙들었습니다, 부인.”

“대군 대감을 해하려 들었으니 대역죄인이군요.”

깡깡대는 짐승을 내려놓자, 잘했느냐는 듯 환해진 얼굴로 꼬리를 쳐 댔다.

은헌은 헛웃음을 터뜨리곤 손바닥으로 짐승의 얼굴을 붙잡아 인상을 썼다.

“이놈아. 네 녀석이 지금 좋아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고윤은 그 모습을 보다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산신께 다녀와야겠습니다.”

귀신을 물리쳐 주는 것에 길을 여는 것 말고도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집에 두기엔 너무 위험한 짐승이었다.

은헌은 혼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제 다리에 얼굴을 비비적대는 녀석을 보았다. 이번엔 고윤이 어떻게든 그를 찾으러 왔지만, 다음엔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위험했고, 그만 다칠 뻔한 것이 아니라 고윤이 휩쓸려 다칠 수도 있었다.

“언제 가십니까.”

“당장 가볼 참입니다.”

고윤은 마루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은헌의 다리에 붙은 짐승을 떼어낼 참으로 팔을 내민 것인데 짐승이 대청마루에 발라당 누워 배를 내밀었다. 고윤은 그것을 보곤 반사적으로 손으로 짐승의 배를 긁었다.

“부인?”

“아니, 그게…… 저도 모르게.”

고윤이 당황하여 손을 떼려 하자 짐승이 세상 무너진 듯 구슬피 울었다. 고윤은 혀를 차곤 다시 짐승의 배를 문질렀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잘 먹였나 봅니다. 배가 이리도 통통한 걸 보면.”

은헌은 몸을 숙여 짐승의 배를 살폈다. 이틀 상간인데도 덩치가 부쩍 자란 것처럼 보였다.

“산신께 보내면 이제 얻어먹을 수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저녁이라도 먹여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래도 집에 들인 객인데 이렇게 내치기는 그렇지요.”

그리 말하며 은헌은 고윤이 문지르고 있는 짐승의 옆구리에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갸릉갸릉 만족스러운 목울음을 뱉으며 짐승이 꼬리를 흔들었다.

“좋으냐?”

은헌은 기가 찬 듯 물었다. 고윤이 코웃음 쳤다.

“그리 묻는다고 대답하겠습니까.”

은헌은 고개를 들어 고윤과 눈을 마주쳤다.

“말을 알아듣는 것을 보면 의사소통은 얼추 되는 것을요.”

“가자는 말만 알고, 돌아가자는 말을 모르면 모르는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핀잔을 던지는 고윤의 말투는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손길과는 별개로 꽤 매몰찼다.

“잠깐이라도 더 데리고 있으려면 이런 목줄로는 되지도 않겠군요.”

사람을 데리고 멋대로 길을 여는 것도 문제지만, 혼자 훌쩍 달아나기라도 하면 찾을 길이 없었다.

고윤은 주를 외웠다. 그러자 은헌의 눈에도 퍽 익숙한 매듭이 짐승의 앞발에 묶였다.

“그런데 이걸 매어두면 굳이 산신께 데려가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사고 친 것을 뒤쫓아가는 것보단 사고 치기 전에 쫓아내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고윤은 귀찮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짐승과 시선을 마주쳤다. 완전히 녹아내린 듯한 풀어진 얼굴을 보자 그 역시 금방 또 얼굴이 풀렸다. 은헌은 그런 고윤을 보곤 한숨처럼 웃음을 뱉어냈다.

“그래서야 잘도 보내겠습니다.”

“그래도 보내야 하는 겁니다.”

고윤은 애써 목소리를 굳혔다. 그는 손길을 즐기며 그새 드렁드렁 코골이하는 녀석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는 것을 깨워 갈 수도 없으니 일단 깰 때까지는 그냥 두기로 하지요. 그나저나 잠시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은헌은 의아한 듯 눈썹을 들썩였다.

“어디 가십니까?”

고윤은 슬쩍 시선을 피한 채 입을 뗐다.

“사야 할 것이 있어서요.”

은헌은 눈동자를 굴렸다.

“하면 채비하라 할까요? 장에서 무엇을 사실지는 모르나 돌아오는 길에 손이 무겁지 않습니까.”

고윤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 데리고 갈 곳은 아니고, 별로 무겁지도 않은 것을 구하러 가야 하니 혼자 가는 것이 낫습니다.”

은헌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고윤이 가겠다 한 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 * *

고윤은 화려한 거리의 틈새로 파고들었다.

으리으리하고 번쩍대는 물건을 천장까지 재어 파는 곳에는 볼 일이 없었다. 그가 찾는 것은 이 거리에서도 특별한 것이었다.

사람 하나 지나다니기도 좁은 골목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마주할 수 있는 것인데…….

“고윤 선생?”

간절히 원할수록 더 빨리 찾을 수 있는 과일 장수가 골목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에 고윤은 혀를 찼다. 일전에 필요하여 찾았을 때는 이곳에서만 꼬박 보름을 헤매고 다녔다. 그날 일이 떠오르자 입에 쓴맛이 차올랐다.

“뭐 이리 급하게 나오셨습니까.”

고윤은 저를 부른 과일 장수를 보며 투덜댔다.

이 거리의 장사치 중엔 요괴의 껍데기를 아직 뒤집어쓴 이도 있고, 껍질을 벗고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된 이도 있는데 그가 찾은 이는 후자였다. 수더분한 차림새의 과일 장수가 허허롭게 웃었다.

“찾는 이가 마음 조급하니 어쩔 수 없지.”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바라진 않았는데요.”

고윤은 그리 말하며 좁은 골목에 좌판 깔고 앉은 채과상 앞에 쪼그려 앉았다.

도성 내 난전에다 물건 떼다 파는 이처럼 눈앞의 과일 장수도 무릎 높이의 좌판에 팔고자 하는 것을 늘어놓고 있었다. 깔아놓은 물건은 커다란 복숭아였다. 짧은 털이 복슬복슬하게 올라온 뽀얗고 붉은 과실은 척 보기에도 소담스러웠다. 어린아이 머리만큼이나 크다는 것만 빼면 맛난 복숭아처럼 보였다. 딱 두 개만 놓여 있는 것을 고윤은 눈으로 꼼꼼히 훑었다.

“어느 게 더 좋습니까?”

과일 장수는 피식피식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릴 냈다.

“급히 온 게 맞는 듯한데? 굳이 고를 필요 없네. 같은 가지에서 난 것이라 비슷해.”

그러나 고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복숭아를 살폈다. 이렇게 바닥에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팔아치우고 있지만, 무려 백 년을 꼬박 키워낸 복숭아였다. 선경에 있는 복숭아밭에서 말이다. 값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참이나 고민한 끝에 고윤은 오른쪽에 놓인 것을 골랐다. 그게 더 색이 고와 보였다.

“누구 입에 들어갈 것인데 천하의 고윤 선생이 이리 고민하시는가?”

제 입에 들어가거나 부탁을 받아 사러 온 것이라면 대충 고르고 치웠을 텐데 이리 고민하는 것을 보아하니 채과상의 눈에도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그의 물음에 고윤은 복숭아만큼이나 혈색 좋은 두 뺨을 가진 이를 떠올렸다.

“집에 골골대는 병자가 한 명 있어서요.”

팔팔하기가 물속에서 막 뛰어나온 물고기처럼 힘차다는 사실은 일단 비밀에 부쳤다.

과일 장수는 누군지 알겠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그렇구먼. 한데 이 복숭아까지 사러 이리도 다급히 온 것을 보니 다 죽어가기라도 하나?”

“일이 좀 있었습니다.”

산책하러 나섰다가 졸지에 황천길 걸을 뻔했으니 일은 큰일이었다.

과일 장수가 의아함을 담아 고윤을 보았다.

“그 병자가 그 소문의 반쪽짜리라면 자네의 기운이 더 약이 될 텐데?”

고윤의 표정이 무참히 구겨졌다. 채과상은 킬킬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가 있는데 이걸 먹여 무얼 하겠나.”

“뭐, 기침은 안 하겠지요. 몸살도 빨리 낫고요.”

폐부도 얼릴 듯한 한기에 목이 상한 건지 따뜻한 물을 들이켜도 연신 기침을 뱉어내는 은헌 때문에 여기까지 나온 참이었다.

고윤의 담담한 말투에 과일 장수가 황당한 표정을 했다.

“이게 무슨 기침에 쓰라고…….”

“기침 날 때 먹여 나으면 기침약이지요. 이걸 어디 따로 쓰라고 키웁니까?”

고윤은 그가 고른 복숭아를 냉큼 챙겼다.

“얼마 내야 합니까?”

채과상은 손가락을 펼쳤다.

“백 년.”

“그렇게나요?”

“그 정도면 딱 제값이네. 백 년 공을 들여 키워낸 것이니. 고윤 선생이니까 이리 주는 것이지 다른 이가 왔으면 이 값엔 어림도 없네.”

고윤은 미간을 찡그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백 년이라면 아슬아슬하게 맞을 듯했다. 꽤 고생했지만, 혼사 전까지 한성부 일을 봐주길 잘했다 싶었다.

“백 년치가 있긴 있구먼.”

과일 장수는 고윤에게서 무언가를 가져가듯 손으로 허공을 훑어내며 물었다.

“근데 자네 뭐 하러 공덕을 이리 쌓아 올렸나?”

“덕을 높이 쌓아야 이런 것을 사지요.”

이 거리에 통용되는 화폐는 오직 그런 것이었다. 쌓아온 덕, 혹은 업이었다. 그것을 서로 바꿔가며 끌어모아 요괴가 신선이 되기도 하고 신선이 다시 요마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자넨 애초에 이쪽이 아니지 않은가.”

채과상의 말에 고윤은 입꼬릴 끌어올려 웃었다.

그의 힘은 덕을 쌓기보단 업을 쌓는 데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힘을 극대화할 업 대신 덕을 쌓았다.

“인간이란 본래 타고난 본성이 무엇이든 인의예지를 배워 갈고닦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하여서요.”

과일 장수가 코웃음을 쳤다.

“누가 그런 훌륭한 말을?”

“아버지요.”

“과연. 자네의 그 육신을 키워낸 인간다운 말이로군.”

고윤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이 거리에 있는 자들 대부분이 본성을 누르고 바뀌고자 하는 이들인데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천년을 갈고 닦아도 바뀌는 것이 없으니 아직 여기 머무르는 게지.”

과일 장수는 이내 손을 내저었다. 고윤은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채과상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물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고윤은 이왕 여기까지 걸음한 김에 짐승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볼 참이었다. 그는 산신에게 들었던 말을 선경에 드나드는 과일 장수에게 그대로 전했다.

과일 장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신도 모른다면 나도 알기 어렵네. 그런 걸 찾으려면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을 뒤지는 게 빠를 텐데. 세상 만물의 이름을 다 아는 이가 하나 있지 않은가?”

고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백택 16)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를 보면 물어보게.”

과일 장수는 어느 사이엔가 목소리만을 남겨두고 모습을 감췄다. 볼 일이 다 끝났다는 소리였다. 더는 물을 수도 없게 되었으니 고윤은 복숭아에 흠집 나지 않도록 조심히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러곤 미련 없이 집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 * *

“이게 무엇입니까?”

“선경에서 기르는 복숭아입니다. 기침에 좋아서요.”

고윤은 휘둥그레 커진 은헌의 눈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기침에 말입니까?”

신선이 산다는 곳에서 가져온 것인데 효능이 고작 그거냐는 의문이었다.

“뭐, 불로장생에도 도움 되고.”

먹고 나면 앓던 병이 싹 사라진다는 만병통치약이기도 했다.

은헌은 꿍얼꿍얼 설명을 늘어놓는 고윤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제게 주려 가져오신 겁니까?”

“……그럼 자랑하러 왔겠습니까.”

삐죽하니 대답한 고윤은 소매에서 손칼을 꺼냈다. 그러곤 은헌의 곁에 놓인, 탕 그릇 올려진 소반에 대고 거침없이 복숭아 껍질을 쓱쓱 벗겨냈다. 이내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고윤은 그것을 큼직하게 조각 내 내밀었다. 과즙이 담뿍 배어난 것이 먹음직해 보였다.

“잡숴보십시오.”

은헌은 고윤의 손목을 붙잡아 당겨 그대로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들고 드시면 될 텐데요.”

한 입 야무지게 베어 삼킨 은헌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제 손이 젖잖습니까.”

얄미운 말에 고윤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무척 오랜만에 느끼는 재수 없음이었다.

은헌은 고윤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고, 야금야금 복숭아 살점을 베어 물었다. 순식간에 조각 하나를 먹어치우곤 그는 혀를 내밀었다.

“무! ……뭘 하십니까?”

손가락 끝을 핥아 올린 은헌이 뭘 그리 놀라냐는 듯 고윤을 보았다.

“복숭아즙이 흘러내리기에요.”

그러다 은헌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조금 전 핥았던 손가락 끝을 이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손이 답니다.”

“복숭아가 달지 않습니까. 그리 깨물어봐야 제 손은 맛없으니 이거나 한 조각 더 잡수시죠.”

고윤은 한숨을 내쉬곤 손을 빼내 다시 작은 조각 하나를 더 잘라 내밀었다. 이번에도 은헌은 고윤의 손을 붙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혀가 손끝을 문질러 올 때마다 옆구리와 등허리가 같이 간질대는 것에 고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게 복숭아를 반이나 먹어치우고서야 은헌은 더는 못 먹겠다 했다.

“그나저나 이리도 큰 복숭아를 받았으니 저도 경요(瓊瑤) 17)를 구해봐야겠군요.”

복숭아를 받았으니 경요를 주었노라, 답례로 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좋은 짝이라 여겨 그렇다는 시경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고윤은 코웃음을 흘렸다.

“투과망경(投果望瓊)이라 복숭아 하나 주고 무슨 금은보화를 답례로 돌려받길 바랄까요.”

“숟가락 들 기력도 없어 문밖출입도 안 하겠다는 부인께서 저를 위해 부러 먼 길 나서 복숭아를 구해온 그 마음을 고작 금은보화로 갚을 수밖에 없는 지아비의 딱한 처지도 헤아려 주십시오.”

고윤은 은헌과 눈을 마주치곤 소리 없이 웃었다. 딱히 옥구슬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답례를 바라며 복숭아를 사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은헌이 그의 수고로움을 당연시하지 않는 것은 좋았다. 쉬운 일이라 해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했다.

“대감께서 저를 위해 해줄 것은 기침을 멈추고 낫는 겁니다. 그나저나…….”

고윤은 과일 장수에게 물어 알아온 것을 은헌에게 전했다.

“짐승의 정체를 알아내려면 백택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를지도 모른다더군요.”

은헌은 고개를 기울였다.

“백택이라…… 황제에게 그 백택 서를 내어주었다는 그 신수 말이지요.”

은헌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에 나온 존재를 떠올렸다. 고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온갖 이매망량의 이름을 다 알고 있다는 그 신수지요.”

그 모습에 은헌은 눈을 반짝였다.

“부인께선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도 본 적은 없고, 그저 흘러 다니는 소문으로 대충 전해 듣는 정도입니다. 부러 물어보지 않아도 유명한 소문이 언제고 귀에 들어오는 것처럼요.”

“사돈의 팔촌의 친구의 동생의 벗의 안부 같은 거군요.”

“예.”

당당한 고윤의 말에 은헌이 픽 웃었다.

“그래도 부인께선 백택이 어디 있는지 알면 언제든 보러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윤은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백택이 머무는 장소가 그리 접근이 쉽지 않아서요. 길을 열어 바로 갈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 곳이 있습니까? 어디기에요?”

“영제교라 부르는 다리입니다.”

은헌은 멈칫했다.

“금천에 놓인 그 다리를 일컬음입니까?”

그가 아는 영제교는 궐의 담장 안에 흐르는 금천, 흥례문 앞으로 흐르는 개천을 건너는 다리였다. 그곳 말고 영제교란 이름을 가진 다리가 또 있었나 생각해 보았지만 도통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그곳은 아니옵고.”

고윤은 설명하기 난감한 부분은 건너뛰고 대충 뭉뚱그려 입에 올렸다.

“도깨비 다리를 밟아 건너다 보면 마지막쯤에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영제교입니다.”

은헌은 긴 설명 중에 제일 귀에 잘 들어오는 것을 골랐다.

“도깨비 다리요?”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구나 하고 다시 입을 열려다 그는 그냥 설명하기를 그만뒀다. 영제교란 이름도 실제 이름이 아니라 궐 담장 안의 다리를 밟을 일이 드문 것처럼 백택이 있는 그 다리 또한 그렇다는 의미로 도깨비들이 붙인 별명 같은 것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그냥 한 번 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어차피 백택을 만나려면 다리밟기 18)를 해야 하니.”

그 말에 은헌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저도 데려가 주시는 겁니까?”

고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고 번거로워도 당분간은 은헌을 제 눈 닿는 곳에 두는 게 그의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될 듯했다.

“당장은 아니고. 우선 바람 도깨비부터 불러들여 아직 백택이 그곳에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 합니다.”

“그런 기다림쯤이야 그저 기쁨일 따름이지요.”

은헌은 콧노래라도 부를 수 있을 것처럼 해맑게 웃었다.

* * *

해가 저물고도 한참이나 지나 자정이 다 되어서야 고윤이 움직였다. 밤만 되면 주인 없는 그림자들만 우글거리는 텅 빈 마당을 질러 걸어 나간 그는 후원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시작하시는 겁니까?”

고윤이 고개를 돌리자 은헌이 뒤에서 웃었다.

“어찌 알고 오셨습니까?”

“사람 드나드는 기척이 잘 나라고 부러 이 집 어디든 문 열리는 곳의 경첩을 조금 녹슬게 해두지요. 오랜 버릇이라 고치기가 힘듭니다.”

문을 열 때마다 소리가 나기에 손 좀 보라 일러도 그대로였던 이유가 그것이었냐는 듯 고윤은 콧등을 찌푸렸다.

“그래봐야 보통 밤에 찾아드는 객이면 문보단 담장 넘어오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까.”

“제게 찾아올 야객은 오라를 받으라며 거침없이 대문부터 박차고 들어올 이들인지라.”

은헌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고윤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는 밤에 찾아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문 닫아걸어 두는 게 되레 드문 일입니다.”

“그리해서 도둑이 든 일은 없습니까?”

고윤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애초에 들어오라 청한 자들을 빼면 터주신에게 막혀 들어올 수가 없어서요.”

남산골 집의 터주신은 그런 면에서는 확실했다.

은헌은 친영을 치르고서야 알게 된, 고윤이 거하던 남산골 집의 귀 어두운 하인의 정체를 떠올리곤 웃음을 흘렸다. 어째서 부리는 종을 데려오지 않느냐 물어 알게 된 것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금야에 만날 도깨비는 어찌 부릅니까?”

책을 파는 도깨비를 불렀을 때처럼 동네 어귀 큰 나무를 찾지도 않고, 고윤은 그저 문을 활짝 열었을 뿐이었다.

고윤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곤 소맷귀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빼냈다. 그의 손에 접선이 들려 있었다. 어찌 색을 입힌 것인지는 모르나 깊고 짙은 푸른 물에 달을 녹여낸 것처럼 은은하면서도 반짝거려 화려하면서도 우아했다.

고윤은 접선을 활짝 펼치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부챗살을 따라 바람이 일었다. 그 바람에 오랜 종이에서 나는 냄새가 묻어나는가 싶더니 그 뒤를 이어 짙은 백단향이 흘러넘쳤다.

바람결에 멀리 흩어지는 향을 따라 조금 전까지도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하던 후원에 심어둔 나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헌은 가까이서 불기 시작하는 바람을 보았다. 불을 밝히라 그의 명에 따라 곳곳에 가져다 놓은 횃대의 불이 높이 치솟았다 가라앉았다. 바람 부는 것이 심상치 않다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거세지더니 이내 뚝 멈췄다.

고윤은 탁 소리가 나게 부채를 다시 접었다.

“오는군요.”

그 말에 은헌은 주위를 둘러보다 저 멀리서부터 일직선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았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인지 다른 곳에 난 가지는 흔들리지도 않는데 한 길로 쭉 이어진 곳에 자란 나뭇가지만 세찬 바람에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점차 가까워지더니 이내 열어놓은 문밖에 불쑥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달 밝은 밤 마당에 보이는 것처럼 선 자는 없는데 그림자는 점점 선명해졌다.

“김 서방 계신가?”

허공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헌은 그곳을 보았으나 아직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고윤이 문과 마주 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가 부르자 바람 도깨비가 불쑥 열린 문 안으로 커다란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은헌은 바람 도깨비를 살폈다. 겉으로 봐선 저번 보았던 책쾌와 크게 다르게 보이지는 않았다. 덩치가 컸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턱수염이 굵게 자란 장정의 모습이었다. 다만 이쪽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두꺼운 발바닥을 드러낸 채였다.

도깨비의 커다란 눈이 자신을 향해 돌아오자 은헌은 예를 갖춰 인사했다.

“이쪽은 보자…… 그 반푼이 김 서방인가?”

“은헌대군 되십니다.”

“그래. 그 반푼이.”

헛기침한 고윤이 정정해 주었으나 바람 도깨비는 원래 거칠 것 없는 성격이었다. 은헌은 멈칫하였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였다.

“어찌 그리 부르는지 연유를 여쭤도 되겠소?”

바람 도깨비가 짓궂게 웃었다.

“제대로 된 용도 아니고, 제대로 된 사람도 아니니까.”

도깨비는 그리 말하곤 은헌을 위아래로 유심히 훑어보았다.

“했나?”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뭘?”

어리둥절한 은헌과 달리 고윤은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입을 뗐다.

“아니요.”

“근데 왜 이쪽 반푼이 김 서방의 몸에서 그쪽 김 서방의…….”

고윤은 도깨비가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드는 것을 보며 기겁하여 은헌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래 봐야 눈높이까지 닿지 않아 시야를 막을 수는 없었다. 머리 위에서 은헌이 영문을 몰라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달라 중얼댔다.

도깨비는 그 모습을 보며 히죽댔다. 고윤은 속으로 바람 도깨비가 돌아가자마자 어디까지 소문이 퍼질지 예측하며 욕을 꿍얼거렸다.

바람 도깨비는 능글맞게 웃음 짓고는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내가 찾아오기도 전에 김 서방이 날 부르다니 오랜만이로군. 무슨 소문이 필요하기라도 한가?”

고윤은 곤란한 주제에서 이야기가 벗어난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래에 백택에 관한 소식을 들은 적 있으십니까?”

“백택이라?”

도깨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 백 년은 움직인 적이 없으니 여태 다리 위에 잠들어 있을걸? 김 서방도 알다시피 백택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으니 말일세.”

고윤은 자신이 알아낸 정보가 언제 것인지 몰라 확인하고자 물은 것인데 다행히도 최근의 소식이었던 듯했다. 흘러가는 시간에 그리 구애받지 않는 존재에게 얼마 전에도 그러고 있었다는 말처럼 모호한 것도 없으나 바람 도깨비가 다른 소식을 모른다면 최소한 다른 곳으로 옮겼단 소리도 없단 말이었다.

“그럼 영제교에 있겠군요.”

“그럴 테지.”

“하면 다리를 건널 수 있는 길이 언제 열립니까?”

도깨비 다리는 말 그대로 도깨비들이 만들었다가 부숴내는 다리였다. 하룻밤 만에 뚝딱 다리를 만들어냈다가 낮이 되면 사라지게 만들거나 한 식경 만에도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도 모르는 다리라, 다리를 만드는 도깨비가 가장 먼저 놓았다가 가장 마지막에 거두는 다리를 찾아 밟아 건너야 했다. 다리를 놓고 거두는 것도 제멋대로라 언제 열리는지는 도깨비만이 알고 있었다.

바람 도깨비는 털이 숭숭한 손가락을 몇 번 접었다가 펼쳤다.

“다리밟기하려고?”

고윤도 함께 날을 헤아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영제교까지 곧장 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도깨비는 인상을 썼다.

“급하다면 이달은 내일 밤이 마지막일걸?”

“금일은 닫혔습니까?”

달이 아직 저물지 않았으니 아직 다리가 있을 때였다.

“응. 그렇구먼.”

바람 도깨비는 늘어진 귀를 한 번 쫑긋대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삼경까지는 되지 않았으니 괜찮지 않을까 했던 고윤의 어깨가 처졌다.

“근데 김 서방이 백택은 왜 만나려고? 어디 이름이 궁금한 이라도 생겼나?”

고윤은 픽 웃음을 흘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정체 모를 짐승을 하나 들이게 되어서요.”

바람 도깨비의 표정이 단숨에 흥미진진해졌다.

“정체를 몰라?”

“산신도 모르고, 선경 사는 복숭아 장수도 들어본 적이 없다더군요.”

“그래?”

호기심이 동한 건지 도깨비는 고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연신 눈을 굴렸다. 잠자코 오가는 말을 듣던 은헌이 그 모습을 보곤 입을 열었다.

“한 번 보겠소? 부인께 듣기론 여기저기 돌아다녀 식견이 높다 들었소.”

고윤은 그가 뱉은 적도 없는 말을 했다 능갈치는 은헌을 보았다. 은헌은 벙싯 웃으면서 눈을 찡긋거렸다.

“봐도 되나?”

도깨비는 단번에 넘어왔다.

“어차피 여기저기 보여주면서 묻는 중입니다.”

고윤은 그리 말하며 언제 만들었는지 하인들이 뚝딱뚝딱 지어 올린 작은 개집을 가리켰다. 전에 귀신을 한 번 삼킨 적이 있었던 터라 혹시나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할까 봐 지금은 결계를 따로 쳐 기척도, 소리도, 냄새도 지워둔 상태였다.

고윤은 개집 주변에 쳐 둔 결계를 허물었다. 칭칭 둘러둔 금줄을 잡아떼는 것과 똑같았다.

결계가 사라지기 무섭게 개집 안에서 바쁘게 꼬리를 흔드는 짐승이 얼굴을 내밀었다. 배부르게 밥을 얻어먹고, 실컷 누워 잔 탓에 땡땡하게 부은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낯선 기척을 눈치챈 듯 비틀비틀 걸어 나오더니 고윤과 은헌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두 사람 말고도 낯선 도깨비 하나가 더 있는 걸 보더니 신나게 흔들리던 꼬리가 우뚝 멈춰 섰다.

도깨비는 짐승의 생김새를 요모조모 살폈다.

“처음 보는데?”

산 넘고 물 건너 서쪽 끝에서 이 동쪽 끝까지 바람 부는 곳이면 어디든 다니는 도깨비의 입에서도 처음이란 소리가 나왔다. 바람 도깨비는 산신이 그랬던 것처럼 코를 들이밀어 킁킁대며 짐승의 냄새를 맡았다.

“오래된 주술 냄새가 나긴 하는데. 그 냄새에 묻혀 다른 건 또 모르겠군.”

산신이 말한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백택에게 이 녀석의 이름을 물으려고?”

“예.”

“그럼 갈 때 같이 데려가는 게 나을걸?”

고윤은 짐승을 보았다.

“곁에 두기엔 위험한 재주가 있어 날 밝는 대로 산신께 보내려던 참입니다.”

당장 데려다주려는 것을 마지막 손님 대접한다고 저녁까지 먹여 재운 터였다.

고윤의 말에 도깨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데리고 가서 직접 보여주고 묻는 게 가장 확실할 거야.”

“그렇습니까?”

“백택에게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그쪽도 영 가능성이 없어 보이거든. 이렇게 제멋대로 생긴 건 처음인데.”

도깨비의 충고에 고윤은 눈썹을 들썩였다. 뭔지는 몰라도 이 일을 해결하려면 시간을 조금 더 들여야 할 모양이었다.

“그럼 인제 내 볼일도 볼까?”

바람 도깨비는 손바닥을 부딪친 뒤 비볐다. 그도 그럴 것이 고윤을 보는 것이 혼례 이후로는 처음이라 가뜩이나 묻고 싶은 게 많은 터였다. 도깨비는 히죽대며 눈을 굴렸다.

“따라오시오. 솜씨는 모자라지만 내 처소에 주안상 차리라 일러두었소.”

은헌은 성큼 걸어 호등재로 들어서는 도깨비를 향해 환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술이라는 말에 도깨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까 준비하라 하던 게 술상입니까?”

고윤의 속삭임에 은헌은 몸을 기울여 속닥댔다.

“부인께서 이르시길 탁주를 마시며 이야기하시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한 번 시작되면 술을 마시는 것이든 떠들어대는 것이든 좀처럼 끝날 줄 모르고 했다. 고윤은 도깨비에게까지 손님 대접하는 은헌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반푼이 김 서방. 정말로 반푼인 줄 알았는데. 자네도 제법이구먼.”

바람 도깨비는 어느 사이에 은헌의 곁에 붙어 말을 붙였다.

“그것참, 무슨 말인지 통…….”

“아, 왜 그 남자한테 참 좋은데 설명하기 힘든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김 서방이 반푼이 김 서방을 참 아낀단 말이지.”

영문 모를 소리에 은헌은 고윤에게 설명해 달라는 듯 돌아보았다. 고윤은 도깨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기에 그냥 입을 굳게 다물고 모른 척 고개를 저었다.

* * *

은헌은 오래간만에 보는 벽동 집을 살폈다.

“여긴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고윤은 집을 뜯어 한참 고친 계사정과 벽동 집을 빗대어 비교했다.

“손댄 것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삼칠일가량 비웠을 뿐인데 변할 것도 무에 있겠습니까.”

고작 한 달 사이에 큰일 난 것도 없으니 달라질 것도 없었다.

은헌은 그리 말하고는 소반 건너편에 앉은 고윤을 보았다. 계사정이야 본래 있던 안채를 고쳐 사랑으로 쓸 수 있게 만들었지만 여긴 아니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아직 고치지도 못하였고, 살림 사는 곳이 아니니 정리마저 안 된 터라 벽동집은 사랑채를 같이 써야 했다.

고윤은 짧게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 중이었다. 은헌도 그리로 시선을 옮겼다. 점점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과 달리 어둠이 밀려오는 동쪽 하늘이 보였다. 달이 없는 밤의 시작을 알리듯 별이 반짝였다.

“다리밟기는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정월 하는 것 말입니까?”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를 밟는 것은 정월 보름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건강과 무운을 빌면서 밤에 도성 내 다리를 건너고 또 건너다니는 습속이었다.

은헌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월엔 궐에 들어가야 했던 터라 궐 담장 바깥에 있는 다리를 밟아본 적은 없습니다. 대신 어린 시절에는 금천에 놓인 다리나 후원 여기저기 놓인 다리를 세자저하 손을 잡고 어마마마와 함께 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인은요?”

“저는 원체 걸어 다니는 것을 귀찮아하여서…….”

고윤은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길을 열고 등청하였다가 길을 열고 퇴청하는 것을 못 하니, 아침저녁으로 다니는 것도 피곤하여 작정하고 걷겠단 생각을 아예 안 했다.

“그래도 가끔 도깨비 다리가 놓인단 말이 들리면 부지런히 건너보려 시도는 했습니다.”

그 말에 은헌이 코웃음 쳤다.

“어째서요?”

“보통 흥인지문의 오간수문 위쪽 금위영천에서 흘러 합류하는 물길에 놓인 쳣다리인 초교부터 시작하거나 태평교, 효경교, 하랑교, 수표교, 장통교, 광통교, 모전교, 송기교 이 중에서 출발하는데 어디서 시작하든 그 밤 만들어진 다리를 죄다 건너고 나면 도깨비가 만든 귀한 물건을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다 건너신 적이 있으십니까.”

고윤은 우쭐대듯 어깨를 으쓱였다.

“예. 다 건넌 것은 딱 한 번뿐이지만요. 저가 가진 도깨비감투가 그때 구한 것입니다.”

은헌은 지난봄 고윤에게 빌려 쓴 적이 있는 감투를 떠올리곤 웃었다.

“정말로 귀보를 내어준단 말입니까?”

“그럼요. 그래도 도깨비와의 내기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지만, 이기면 얻는 것이 큽니다. 이기기가 어려워 그렇지.”

고윤은 담담히 답했다. 은헌은 생각만 해도 재미있겠단 듯 환히 웃었다.

“저도 한 번 다 건너보고 싶군요.”

고윤은 할 수 있을 거란 대답 대신 이번엔 곤란한 듯 콧등을 찡그렸다.

“뭐, 할 수 있으면 좋긴 한데. 도깨비 다리가 워낙 변화무쌍하여서요.”

내기를 좋아하고, 장난치길 좋아하는 작자들이 대놓고 벌이는 내기판과 같은 곳이다 보니, 정말로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났다. 작정하여 준비하고 덤비고 덤벼서 겨우 한 번 끝까지 도착한 터라 고윤은 그다음부턴 도전할 마음도 먹지 않았다.

그도 지학의 나이에나 무모하게 시도해 본 거지 약관의 나이를 지나 이립을 향해가는 지금에는 힘들었다.

“언제쯤 나서실 참입니까?”

고윤은 시간을 가늠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으니 이제 슬슬 나설 때가 되었다.

“해가 만들어낸 그림자가 어둠에 삼켜질 때쯤에 갈 겁니다. 쳣다리는 늘 그림자를 기워 만들거든요.”

“그림자를요?”

“곧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나저나 녀석의 배를 채워두라 했는데. 다 먹었겠습니까?”

그들만 건널 수 있는 다리도 아니고, 온갖 종류의 것들이 다 다니는 곳으로 갈 예정이다 보니 고윤은 불필요한 다툼의 소지부터 지우기로 했다. 귀신을 비롯해 다른 것을 삼키려 덤비기 전에 배를 채워두기로 한 터였다.

은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과 저가 일주일 먹을 양을 다 먹어치웠다 했으니…… 배는 부를 겁니다.”

“안 터졌답니까?”

“그저 배만 조금 부푼 듯합니다.”

은헌도 총관이 고해 올린 말에 퍽 당황하긴 했다. 고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알고 보면 그냥 돼지거나 돼지 같은 게 아닐까요?”

“발톱이 다르지 않습니까. 날개도 있고, 뿔도 있고요.”

“돼지도 날개가 달릴 수 있고, 뿔도 자랄 수 있을 겁니다.”

고윤은 그리 말하다 코웃음 쳤다.

“그리 먹었으면 옆구리가 벌써 터지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그리 멀쩡한 것을 보면 역시 돼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밖에서 짖는 소리가 우렁차게 났다.

은헌은 고윤에게 눈을 흘겼다.

“짐승도 저 욕하는 것은 알아듣습니다.”

“제가 저놈의 말은 못 알아들으니 괜찮습니다.”

캉캉대며 짖어대는 것이 욕인지 뭔지 알게 뭐냐며 고윤은 콧방귀를 뀌었다.

해가 서산으로 온전히 저물고 일찌감치 떠오른 달이 하늘 높이 솟구치자 고윤은 슬슬 나설 채비를 했다.

고윤은 짐승의 목줄을 단단히 했다. 가뜩이나 원손으로 인해 팔도의 온갖 잡귀란 잡귀는 죄다 도성으로 밀려들어 다리 위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널린 것이 혼백이었다. 그러니 그걸 보고 흥분해 갑자기 뛰어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산신께 갔을 때처럼 제가 잡는 게 어떻습니까? 부인께선 아무래도 손을 바쁘게 쓰셔야 하니 말입니다.”

고윤은 은헌을 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끈을 한 번 본 뒤 짐승을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끈을 넘겨주었다가 큰일을 당한 게 나흘도 지나지 않았다.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부인?”

고윤은 여전히 망설이며 끈을 은헌에게 내밀었다.

“제 손을 절대 놓으시면 안 됩니다.”

그는 은헌의 오른손에 목줄을 쥐여주고 왼손을 깍지 껴 단단히 붙잡았다. 은헌은 제 손에 얽힌 손가락을 내려다보다 웃었다.

“염려하는 일 없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그의 말에 고윤이 고개를 돌렸다.

“그냥 다치실까 저어되어 그런 겁니다.”

“그럼 다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은헌은 담담히 웃었다.

“제발 좀 그리해 주십시오. 다 큰 장부가 허구한 날 앓아누우시니.”

고윤은 구시렁대는 것을 그만두고 입을 다물었다. 은헌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풀린 얼굴로 헤실거리는 것에 괜스레 귓불이 달아올랐다.

“채비가 다 되었으면 이만 가시지요.”

고윤은 말을 돌리며 눈길도 돌렸다. 은헌이 쿡쿡대며 웃었다.

“예. 가시지요.”

고윤은 선 자리에서 길을 열었다. 꼬리를 흔들던 짐승이 경계 어린 목울음을 흘렸으나 고윤이 먼저 걸음을 떼고 은헌이 나란히 발맞춰 앞으로 걸어가자 녀석도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틈으로 후다닥 뛰어들었다.

* * *

고윤은 초교 근방의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이 근방은 저 아래 청계를 따라 이어진 큰길과 달리 사람 북적거리는 데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이라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래도 큰 문 근방이라 사람이 많았다. 늦기 전에 문을 나가려는 사람들이 빠지고, 뒤늦게 들어오는 이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걸어 고윤은 초교를 앞두고 섰다. 건너오는 이들이 그들을 보았으나 이내 지나쳐 갔다.

“이리로 건너면 됩니까?”

은헌이 턱짓으로 다리를 가리켰다. 고윤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곤 다시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청계도 그렇고 금위영천도 그렇고 비 올 때를 빼면 바닥이 마른 개천이었으나 며칠 내린 비에 강물이 불어 출렁였다.

“일단 건너가시죠.”

고윤은 짧은 다리를 건너며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달도 없는 밤하늘을 밝히는 별빛이 수면에서 흔들렸다. 그는 그 아래를 유심히 보았다.

다리 위를 오가는 자들이 강물에 거꾸로 비춰 보였다. 희미하게 어른대는 그곳엔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 아닌 것의 그림자도 하나, 둘 떠올랐다. 그것을 본 고윤은 다급히 은헌을 붙잡아 이끌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은헌은 영문도 모르고 재게 걸어 나가는 고윤을 따라 성큼성큼 보폭을 넓혔다. 짐승 또한 깡깡대며 달렸다.

“무슨 일입니까.”

고윤은 다리 건너편에 다다르기 무섭게 바로 뒤돌아 건너왔던 초교에 발을 올렸다. 은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방금 건너온 다리 위로 전혀 다른 세상이 보였다. 몇 걸음이면 다 건널 초교가 있던 곳에 지금은 수십 걸음은 족히 걸어야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길을 열고 경계를 넘은 것도 아닌데 손바닥 뒤집은 것처럼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여기가 저희가 건너야 할 첫 번째 다리입니다.”

쳣다리 혹은 초교라 불리는 다리의 그림자를 엮어 만든 도깨비 다리였다.

은헌은 앞을 보았다. 주변의 풍경은 그가 알던 도성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강변을 따라 바삐 걸음 옮기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기기묘묘한 혹은 사람을 홀리는 아름다운 것들이 다리의 이쪽과 저쪽에 그득했다. 그 일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 대부분이 백택 서에 그려졌다는 짐승과 생김새가 무척 닮았기도 했다.

은헌은 주위를 확인했다.

“구경은 나중에요.”

고윤은 그런 은헌을 끌어당겼다. 적은 힘에도 순순히 이끌려 오는 은헌은 고윤에게 고개를 숙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길 나중에 또 건널 수가 있습니까?”

“뭐, 이번 달은 물 건너갔지만 가지고 싶은 게 생기면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다리를 다 밟은 자에게 주는 것 말이지요.”

고윤은 다리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내디디며 웃었다.

“가끔 탐나는 것이 하나쯤 생기곤 하여서요. 그때는 건너기 싫다 하셔도 몇 번이고 건너야 하니 오늘은 서둘러 영제교에 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은헌은 바쁘게 걸음을 따라 옮기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까?”

고윤은 다리 끝에 다다를 무렵에 고개를 흔들었다.

“다리를 다 건너기 전에는 이 다리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되는 곳이지요.”

그래서 건너기가 힘든 것이다.

고윤은 다리 위에서 마지막 걸음을 떼어 건너편에 발을 올렸다. 그 뒤를 이어 은헌과 짐승 역시 차례로 도착했다.

“과연.”

은헌은 흥미롭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도 다리를 건너는 이들만 달라졌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예 눈 닿는 곳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죄다 허상이라는 듯 그는 물비늘이 반짝이는 이상한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는 하늘을 옅은 물에 녹여내어 거품으로 만들어 덧붙인 듯 기이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조금 전까지도 밤이 오고 있었는데 고작 다리 하나 건너온 이곳은 여전히 낮이었다.

“이제 두 번째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은헌은 고윤의 말에 두리번거렸으나 그의 눈 닿는 곳에 다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부인. 길을 잘못 든 듯합니다. 제 눈엔 아무리 봐도 건너갈 곳이 보이지 않아요.”

고윤은 빈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위로 고개를 들어보십시오.”

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은헌은 고개를 꺾어 올렸다. 헛웃음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도깨비들과 내기는 절대 하지 말라던 고윤의 신신당부가 이해가 갔다. 하늘을 향해서 곧게 솟구친 다리가 보였다.

“가시죠.”

“저길 말입니까?”

은헌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태어날 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어쨌든 그는 인간이라 허공을 밟고 다니는 재주는 없었다.

고윤은 픽 웃음을 터뜨리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은헌은 허둥지둥 따라갔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도깨비 다리를 건널 때는 두려워 말고 그냥 건너야 합니다.”

“시도조차 하지 못하면 영영 건널 수 없는 곳이군요.”

은헌은 당연하단 듯 허공에 발 딛고 서 있는 제 모습을 살폈다. 땅을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허공에 그냥 받침도 없이 둥둥 뜬 것처럼 보일 터였다. 금방이라도 땅으로 곤두박질 내동댕이쳐질 것도 같은 아찔함에도 은헌은 소리 내 웃었다.

“이쯤 되면 다음번 나올 다리가 궁금해집니다.”

고윤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초교를 건널 때처럼 빠르게 걸어 나갔다. 짐승도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고윤을 뒤따라 걸었다. 은헌은 진주를 가루로 갈아 흩뿌려 놓은 듯한 백사장에 마지막으로 시선을 던지곤 앞만 보며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 * *

불구덩이와 같은 용암 위를 건너는 돌다리를 다 건널 때쯤 은헌은 제 손에 감긴 목줄을 다시 확인했다. 고윤의 뒤를 따라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지금에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었다.

그의 손에 감긴 줄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앞서 바쁘게 걸어가고 있는 짐승이 그에게 더 가까이 붙은 듯했다. 곁눈질로 짐승을 살피던 은헌은 고윤을 보았다가 다시 짐승을 보았다.

고윤의 정강이 중간까지 왔던 짐승의 키가 지금은 무릎 위로 자라 있었다. 해를 끼치며 달려들던 귀신을 잡아먹을 때는 거의 인왕산 산신만큼이나 커지기도 했으니 덩치가 커지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조금씩 덩치가 커진다는 것이 이상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수상쩍은 곳과 위험한 곳을 건너는 동안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통통거리는 걸음으로 앞서가던 녀석은 이제 발소리도 묵직해졌다. 불편한 듯 수시로 앞발로 머리를 긁어대며 연신 머리를 흔드는 것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부인.”

은헌은 앞만 보고 달리는 말처럼 서두르는 고윤을 불러 세웠다. 고윤은 가던 것을 멈추고 곧장 돌아보았다.

“녀석이 이상합니다.”

고윤은 곧장 고개를 떨궈 짐승을 보았다. 대번에 무엇이 이상한지 알아챈 듯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커진 겁니까?”

“예. 덩치가 불었습니다.”

고윤은 건너던 다리의 한쪽 난간에 바짝 붙어 섰다. 그들은 아래가 까마득한 절벽 위에 걸쳐진 출렁대는 다리 위에 서 있었다. 옆으로 커다란 덩치의 요마들이 쿵쿵대며 지나갈 때마다 다리가 이리저리 흔들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곳이라 은헌은 고윤이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는 대신 고윤의 팔을 붙잡았다.

고윤은 맨땅에 선 듯 편안히 서 있는 은헌을 부러워하는 것도 잠시 몸을 숙여 짐승을 보았다. 사람이 아닌 짐승의 표정을 구분해 내는 것은 어려우나 그다지 기분 좋아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쇠그릇을 쳐 대는 것처럼 깡깡대던 울음 대신 무언가 불편한 듯 그르렁대는 목울음이 들렸다.

고윤은 짐승의 기운을 살폈다.

전에 몸집을 키웠을 때 느꼈던 파마의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되레 불길하고 서늘한 기운만 흘렀다. 닿아선 안 된다는 꺼림칙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고윤은 서슴없이 손을 뻗어 짐승의 몸을 만졌다. 무언가 불편한 듯 녀석은 앞발로 제 목에 매인 줄을 거칠게 할퀴었다. 그걸 본 고윤은 더 빨리 손을 움직였다.

그가 짐승의 목에 묶어놓은 것은 부정함을 방지할 수 있는 기운을 담아둔 것이었다. 혹여나 삿된 기운을 풍기더라도 은헌을 비롯해 청지기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방비해둔 터다. 묶어두었다곤 하나 짐승에게 해 될 것은 전혀 없었다. 지금까지 목줄을 하고도 얌전했는데 갑작스럽게 불편해졌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한참을 살피던 고윤이 짐승의 날개를 건드렸다.

“이놈!”

순간적으로 이를 드러내며 고윤을 물려 하는 놈을 은헌이 단단히 쥔 목줄을 끌어당겨 막았다. 고윤은 위로 들린 짐승의 시선을 피해 재빨리 날개를 들어 그 아래쪽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무언가 이상한 것이 눈에 보였다.

짐승이 괴롭게 울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머리 위에서 들여다보고 있던 은헌 역시 그것을 본 듯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요.”

고윤은 검은 비늘처럼 뾰족하게 돋아난 것을 보았다. 척 봐도 불길한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그는 비늘 가까이 손을 올렸다.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손끝의 살점이 따끔따끔했다. 독성 강한 것에 닿은 것처럼 살이 근질근질하기도 했다.

고윤은 그 검은 비늘이 미묘한 크기로 점점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짐승의 덩치도 조금씩 커졌다. 상처를 내며 살 아래로 박혀 들어가려는 듯 비늘이 자라면 짐승 또한 몸을 키워 아픔을 줄이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서 건드리진 못할 것 같습니다.”

고윤은 고개를 들어 은헌과 시선을 마주쳤다.

“빼기가 힘듭니까?”

“그건 아니고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이 다리가 곧 무너져 사라질 터라.”

도깨비 다리는 금방 만들어지고 금방 허물어지는 터라 다리 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정말로 짧았다. 지금 건너가지 않으면 무너지는 다리에 그대로 휩쓸려 어디로 떨어질지도 몰랐다.

“하니 이만 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대로 가도 되겠습니까?”

은헌은 바람 도깨비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곤 염려하여 물었다. 언제든 길을 열어 건너올 수 있는 곳이 아닐뿐더러 이 다리를 다 건넌 적 있다던 고윤도 초교에서 다시 시작해 몇 개의 다리를 건너와서야 도착한 곳이었다. 다음에 온다면 그때도 여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게 분명했다.

고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담담히 웃었다.

“가는 날이 장날인 날도 있고, 허탕 치는 날도 있는 거지요.”

은헌은 알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윤의 판단이 그렇다면 그리하는 편이 나았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짐승의 덩치는 조금씩 불어나고 있었다.

고윤은 계사정 집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오는 것이 어려울 뿐 돌아가는 길은 쉬웠다.

은헌은 조용한 마당에 발을 딛자마자 텅 빈 계사정을 지키는 하인들이 뛰어나오는 것을 물렸다. 고윤은 그사이 짐승을 데리고 마루 위에 올랐다.

벽동에 있어야 할 주인이 갑작스레 나타났음에도 다들 침착하게 맞이했다.

“불을 밝히거라.”

은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당을 지키고 선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겸종이 다급히 등불을 켰으나 상처를 들여다보기엔 역부족이었다.

고윤은 시력을 돋우면 된다고 말하려다 그냥 말았다. 초를 가져온 행랑아범이 짐승을 살펴보기 편하도록 사방을 밝히자 고윤은 괴로워하며 발버둥 치는 짐승에게 신경을 쏟았다.

아까보다 고통이 더해진 건지 심기가 불편한 채로 이빨을 드러내고 사방에 고개를 들이미는 짐승을 보며 고윤은 술을 외워 주박을 걸었다. 풀을 쑤어 배에 바른 듯 짐승의 몸이 순식간에 마루에 착 들러붙었다.

“잠시만 참아라. 부인께서 박힌 것을 뽑아줄 것이다.”

은헌은 눈이 돌아가기 직전으로 보이는 짐승의 콧등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고윤은 녀석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어두곤 거침없는 손길로 날개를 들어 올렸다. 다리 위에서 살필 때만 해도 검지 두 마디 정도 되는 크기였던 검은 비늘이 지금은 손가락 두 개를 합한 너비만큼 자라 있었다.

고윤은 주를 외우며 비늘에 손을 댔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에겐 액운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비늘에 손닿기 무섭게 그의 기운이 반사적으로 일었다.

검은 기류와 같은 것이 고윤의 손끝을 따라 피어나더니 이내 비늘을 휘감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단숨에 비늘을 뽑아냈다. 툭 살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짐승의 몸에서 피가 솟구치거나 흐르지는 않았다. 흠집만 남은 상처를 들여다보는 은헌의 표정이 심란했다.

“독에 당한 겁니까?”

“독이요?”

고윤은 되레 고개를 갸웃거리며 짐승의 상처를 다시 보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은헌을 보았다.

“대감께는 상처가 어찌 보이십니까?”

은헌은 눈을 한 번 깜박이곤 신중한 태도로 짐승의 날갯죽지 아래를 훑었다.

“먹물을 부은 것처럼 살이 새카맣게 물들고 고름이나 피가 찬 것처럼 물집이 크게 부풀었습니다. 피가 굳어 썩어가는 것처럼요.”

“얼마만큼 넓습니까?”

“두 치 정도 되어 보입니다.”

“그 외에 또 다른 것이 보이십니까?”

“살이 물든 주위로 심하게 멍이 든 것처럼 검붉고 그게 점점 퍼지는 것이 보입니다.”

고윤은 혀를 찼다.

그는 우선 은헌이 불러준 증상에 맞추어 필요한 주를 외웠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촛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지금은 어찌 보이십니까?”

은헌은 신중히 살피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보단 색이 연하여졌는데…… 까맣게 물든 것은 그대로입니다.”

은헌은 고윤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보았다.

“그려 보여드릴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상처라서요.”

고윤은 짐승의 상처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흙으로 만든 것이 부서진 듯 상처 주위로 움푹 파인 흠집만 보일 뿐이었다. 검게 썩어드는 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전에 살(煞)을 뒤집어쓰고 낯을 잃었던 경 상궁의 얼굴을 은헌만이 보았던 그때와 같았다.

빼낸 비늘을 붙잡고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고윤은 짧은 신음을 뱉으며 몸을 움츠렸다.

“읔!”

“부인!”

은헌이 놀라 고윤의 허리를 붙잡았다. 고윤은 손바닥을 펼치지도 않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듯 몸을 기울였다. 은헌이 고윤을 받쳐 세우곤 품에 안아 붙들었다. 비틀대는 것이 멈추자 은헌은 그제야 고윤의 몸을 바로 세워주었다.

고윤은 인상을 쓴 채 손을 펼쳤다.

짐승의 살에 박혀 있던 비늘이 그의 손바닥을 얕게 파고들고 있었다. 고윤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비늘을 붙잡아 올렸다.

“이게 무슨.”

은헌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누가 이 녀석에게 중한 용무가 있나 봅니다.”

고윤은 그리 말하곤 손바닥 얕게 베인 상처는 별것 아니란 듯 손을 몇 번 쥐었다 펼치고는 그만뒀다. 옷자락에 핏기를 문질러 닦아내려는 것을 은헌이 붙잡았다.

“거기 누구 없느냐!”

행랑아범이 곧 달려왔다.

윤기고 19)와 상처 닦을 것을 가져오게나. 소주가 있거든 그것도 가져오게.”

고윤은 낯을 굳힌 은헌을 보다 입을 열었다.

“이런 건 침만 발라도 괜찮습니다.”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살짝 까진 상처에 소주까지 가져오라 할 게 뭐가 있느냐며 고윤은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다가 멈췄다.

은헌이 혀로 상처를 할짝대곤 머릴 들어 올렸다.

“핥아도 피가 나지 않습니까.”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윤을 꾸중했다.

“……뭐, 가끔 침으로 안 되는 상처도 있겠죠.”

고윤은 조용히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은헌은 저가 핥아낸 손바닥을 다시 확인했다. 행랑아범과 겸종이 숯으로 거른 물과 햇볕에 말린 천을 가져오자 은헌은 고윤의 손바닥을 씻기곤 소주로 상처를 닦아낸 뒤 연고를 발랐다.

고윤은 손을 두텁게 싸매는 천을 보며 볼을 부풀렸으나 따로 불평을 늘어놓진 않았다. 치료하는 동안 그는 짐승의 몸에 있던 비늘을 살폈다. 끝이 날카롭고 뾰족뾰족한 것이 이빨처럼 생긴 비늘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것으로 짐승에게 나쁜 짓을 하려 했던 것은 명확했다. 그는 비늘을 빼냈음에도 여전히 앓는 소릴 내는 짐승을 보았다. 은헌도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저 녀석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누군가는 저 녀석을 해치려 드는군요.”

고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그 누군가를 찾아내면 자연스레 저 녀석의 정체도 알게 되겠군요.”

은헌은 고윤을 돌아보았다.

“피까지 보았으니 혈채는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희미하게 배어나온 정도에 불과해도 피는 피였다.

고윤의 말에 은헌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고윤은 비늘을 손바닥 위에 다시 올렸다.

아까야 방비도 하지 못하고 당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문제 없었다. 그는 입술을 꽉 베어 물었다가 터뜨리듯 입을 열었다. 숨결이 터져 나가며 그의 기운이 일었다.

은헌은 고윤의 손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보았다. 불이 붙은 듯 순식간에 일어난 연기는 곧게 위로 솟구쳤다.

고윤은 빈손으로 그 연기를 붙잡았다. 바람을 움켜쥐는 듯한 행동이었으나 허공을 헛돌지 않고 그는 확실히 연기를 쥐었다. 그러자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것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그러곤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모를 잿빛의 끈이 되었다. 마치 연기를 꼬아 새끼로 이은 듯했다.

고윤은 제 손에 들린 끈을 힘껏 붙잡아 당겼다. 무언가 반대쪽에 단단히 묶인 것처럼 줄이 끌려오지 않았다.

“됐습니다. 이제 이걸 따라가면 그 누군가의 낯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은헌은 조용히 행랑아범이 내어주는 검을 챙겨 들었다.

고윤은 끈을 따라 걸었다. 길을 열어 벽동까지는 쉽게 왔으나 끈이 이끄는 곳으로 바로 가진 못하니 직접 저잣거리를 걸어야 했다. 덕분에 호위들까지 덕지덕지 꼬리에 붙었다.

은헌은 가는 방향을 살폈다.

벽동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까워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질 정도였다. 혜정교를 지나 군기교 근방까지 다다르자 그는 낯을 굳혔다. 미동 20) 근방까지 오자 오가는 말도 없었다. 저경궁 21)을 지나 숭례문까지 내려가지 않고 고윤은 걸음을 멈췄다.

<7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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