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31/35)

四。

“마님! 마님! 소인 석삼입니다!”

아까부터 밖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이내 큰 소리로 찾는 소리에 고윤은 붓을 내려두고 팔을 뻗어 창을 열었다.

창밖에서 석삼이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소란인가.”

은헌 때문인지 그가 부리는 청지기들은 집 안에선 어지간한 일이 일어나도 다들 눈 하나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담대한 성격들이었다. 게다가 고윤 자신이 이곳으로 끌고 들어온 일도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일이다 보니 이젠 정말로 놀랄 것이 없다며 다들 이상한 자신감마저 어려 있다 들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급하고 당황스러워할 일이 무엇인지 고윤은 짐작 가지 않았다.

“대감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고윤은 혀를 찼다. 은헌이 대문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시각이었다.

“저 아래 계곡 가신다며 나서지 않으셨던가.”

“예. 그런데 사라지셨습니다.”

고윤은 낯을 굳혔다.

“자세히 말해보게.”

조금 전 짐승을 데리고 나섰으니 멀리도 못 가고 근방에 있어야 했다.

석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소인도 분명 후문으로 나서시는 대감을 뵈었는데.”

“뵈었는데?”

“먼저 걸음하시고, 큰성께서 소낙비 올 것 같단 말을 하여서 소인이 재빨리 우산을 챙겨 따라나섰습니다. 한데 문밖 어디에서도 보이시지가 않으십니다.”

아무리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고 해도 석삼이 제 주인에게서 눈을 뗀 것을 정말로 찰나와 같은 시간이었다. 아무리 불러도 은헌의 대답마저 돌아오지 않자 석삼은 주변을 훑으라 하곤 곧장 고윤에게 뛰어온 터였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보지 못했고?”

“소인이 마지막으로 뵌 곳이 후문 앞이었습니다.”

고윤은 서둘러 방을 빠져나와 후원으로 향했다.

짙은 풀 내음이 물씬거리는 후원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조용했다. 고윤은 은헌이 짐승을 데리고 지나갔을 뒷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뒤쪽 산길로 이어지는, 사람 하나 서면 딱 들어맞는 오솔길 하나만 난 외진 길이 나왔다. 비탈길을 따라 굽이지긴 했으나 시야 가리는 것이 많지 않아 꽤 멀리까지 잘 보였다.

“다른 이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석삼은 이미 길을 따라 다녀온 뒤였다 고했다.

평생토록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며 살아온 은헌대군이다. 습격에 대비하여 부지런히 무예를 수련하였는데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윤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기운을 풀어냈으나 걸리는 것이 없었다. 짐승 또한 함께 사라졌단 뜻이었다.

그는 혀를 차곤 은헌을 찾을 다른 수를 재빨리 찾아냈다.

고윤은 눈을 감으며 주를 외우곤 천천히 눈을 떠 제 손목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천천히 그가 찾던 것이 나타났다. 왼손에 묶여 있는 붉은 실이었다. 사람의 인연을 잇는 실 중에서도 가장 약하고, 가장 끈질긴 실로 고윤 또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나이 어릴 적에 호기심에 한 번 보았고 그 상대를 찾아보려다 큰 형님께 꾸중 듣고 관둔 뒤론 부러 불러낸 적이 없었다.

고윤은 손목에 매달린 실을 다른 손으로 잡아당겼다.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는 보이지 않으나 실을 더듬어 한 걸음씩 후문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후문의 문지방 위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실을 확인했다. 허공에서 뚝 끊긴 듯 어디로 이어졌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대감께서 집으로 다시 돌아오시진 않으셨는가?”

그들이 찾아 헤매는 동안 은헌이 대문으로 다시 돌아왔는지 고윤은 확인했다.

“예. 오셨다면 분명 어디 계시다 소식을 전해왔을 것입니다.”

이 담장 안에 있는 이들은 대군을 지키기 위해 붙여진 이들이었다. 은헌이 어디에 있는지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수십 년을 살아온 이들이 대군의 행방을 이렇게 오래 놓친 것도 처음이었다.

고윤은 입술을 오므렸다가 풀어내듯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곤 짧게 술을 외자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희미한 무언가가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것을 본 고윤의 눈매가 무참하게 구겨졌다.

후문의 문지방 위에 보이는 것은 실금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얇은 얼음을 밟아 부순 것처럼 보이는 파편이 떠올라 있었다.

이것은 길을 열었을 때 생기는 균열이었다.

고윤은 침음을 삼켰다.

“이보게.”

“하문하십시오.”

석삼을 보며 고윤은 짧게 숨을 뱉곤 단호한 얼굴을 했다.

“대감을 찾으러 가야 할 듯한데, 혹여 금일 내로 돌아오지 못하거든.”

석삼은 평소 은헌이 제게 당부했던 말을 떠올렸다.

“동궁에 연통을 넣을까요?”

“그래. 그리하게.”

은헌을 찾지 못하면 세자에게 알리는 게 지금으로써는 제일 나았다.

고윤은 숨을 깊이들이 마셨다가 뱉으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어디로 이어졌는지도 모를 길이었다. 남이 연 길의 흔적을 따라가는 것은 위험했으나 지금은 다른 수가 없었다.

고윤은 제 손에 매만져지는 실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의 얼굴에 긴장감은 사라지고 이내 평소의 침착함이 되돌아왔다. 어차피 그가 가는 곳은 은헌의 곁일 터였다.

“그래. 그곳이 어디든. 계신 곳까지는 갈 수 있지.”

고윤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 뒤 그 끝에 은헌이 없을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처럼 걸음을 내디뎠다.

* * *

서걱서걱 발아래가 무너져 내렸다.

은헌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을 온통 눈으로 뒤덮은 것 같은 풍경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무척이나 설레했을 광경이었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끝없는 벌판에 아래로 몇십 척인지도 알 수 없는 세상은 아름다움보단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왔다.

그가 내쉰 숨결마저 뿌옇게 연기처럼 일었다.

“영문을 모르겠구나.”

은헌은 제 발치에서 헉헉대는 짐승을 보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을 날려 버렸다.

그는 혀를 찼다. 말로 재앙을 부른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순응할 것을 그게 싫다며 시원한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설원으로 내던져졌다.

거칠게 불어오는 칼바람에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여름에 입는 얇은 적삼에 빳빳하게 풀 먹인 모시 두루마기로는 이 추위를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은헌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폈지만, 허허벌판에 바람이라도 피할 수 있는 나무도, 검불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 돌아간담.”

말은 뱉었으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이곳까지 어찌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고윤이 길을 열었던 것처럼, 어떤 길의 끝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길을 건넜는지 영문을 모르니 해결 방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은헌은 침착하게 집을 떠올렸다. 그가 생각하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입 밖에 내어 이곳까지 왔다면 돌아가는 것 또한 똑같을 터였다.

“부인께서 버선발로 마중 나오시면 좋겠구나.”

어서 붙들라며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겠지만, 분명 입은 댓 발로 나와 비죽대고, 눈은 가늘게 뜨고, 차마 소리 내 그를 욕하지는 않아도 온 얼굴로 그를 욕할 게 분명했다. 쌍욕은 뱉지 않겠지만 말이다.

집이 아니어도 좋으니 어디든 고윤의 곁으로만 갈 수 있음 되었다.

은헌은 눈을 질끈 감고 고윤을 떠올리며 몇 걸음 발을 내디뎠다. 눈을 떴을 때는 고윤의 거처로 통하는 협문을 지나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럼 환하게 웃으면서 저에게도 이상한 재주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발아래서 계속해서 눈이 서걱서걱 무너져 내렸다. 몇 번을 다시 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번의 시도에도 은헌은 여전히 눈 덮인 평원 위에 서 있었다. 추위에 손끝이 딱딱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내쉬는 숨결조차 그대로 얼어붙는 이상한 추위였다. 피륙만 언 것이 아니고 오장육부가 같이 얼어가는 듯했다.

은헌은 제 발치에서 해맑게 꼬리를 흔드는 짐승을 보았다. 이 상황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동사하기 십상팔구라 뭐라도 해 보아야겠구나.”

당장 추위를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은헌은 갓을 풀어냈다. 그러곤 너풀거리는 소매통을 걷어 올렸다. 주위에 뭔가 보이지 않으니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가장 나은 듯했다. 눈이 계속 내리기 시작하여 더는 손도 쓸 수 없게 되기 전에 은헌은 차갑고 딱딱한 눈에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땅을 헤집듯 눈을 손으로 퍼내어 뒤로 몇 번 던졌을 뿐인데, 손끝에서부터 시작에 목덜미까지 쭈뼛거리게 하는 한기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은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다시 손을 눈 속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목숨줄은 붙잡고 있어야 부인께서 날 데리러 오셨을 때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

그다지 도움도 되지 않는 못난 지아비인데, 이리도 큰 사고를 쳤으니 지금쯤 퍽 당황한 얼굴로 고윤이 그를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은헌은 힘을 내어 눈을 쌓아 올렸다. 손끝이 얼어붙을 때마다 입김으로 녹여가며 그는 바람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틈을 만들어냈다.

* * *

눈이 휘날려 싸대기를 쳤다.

고윤은 입을 앙다물었다. 발 내딛기도 어려울 만큼 세찬 바람이 불어와 앞을 가로막았다. 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해가 뜬 것처럼 사방이 환한 이상한 낮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린 길을 따라 갈라진 수많은 길 중에서 그는 제 팔목에 매여 있는 실이 이끄는 곳으로 왔다. 그랬더니 겨울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것 같은 이런 곳이었다.

고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둡지 않아 천기의 흐름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온 힘을 다해 지르보다 보니 곧 별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에서 남서쪽 그리고 서쪽으로 큰 원을 그리듯 흘러가는 빛으로 그려진 선이 뚜렷하게 비쳤다. 고윤은 반사적으로 혀를 찼다. 그 흐름이 지나치게 빨랐다. 본래 있던 세상의 잠깐이 이곳에선 며칠이었단 소리였다. 고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눈보라 휘날리는 궂은 날씨는 그에게도 위협적이었으나 은헌에게는 치명적이다.

생각을 이어나가는 대신 고윤은 설원 위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바람이 달려들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몰아쳤다. 그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로막으며 다시 걸어 나갔다.

“대감!”

고윤은 큰 목소리로 은헌을 불렀다.

휭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목소리마저 날아갔다.

“어디에 계십니까!”

고윤은 목이 터지라고 목소릴 드높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텅 빈 그의 목소리뿐이었다.

“은헌 대감!”

어디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을 터다. 고윤은 그리 생각했다. 분명 그가 데리러 올 것이라 믿을 테니 근방의 어디선가 꿋꿋하게 버티고 있을 터였다. 그는 손끝을 마주 붙잡았다. 정처 없이 떨리는 것이 그의 손인지 아니면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게에 눌려 발이 푹푹 빠지는 것을 보아서는 지금 눈 닿는 곳에 쌓인 눈은 내린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눈이란 것은 위에서 누르면 누를수록 아래쪽이 덧얼어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단단히 뭉쳐지는 법이었다.

고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다시 소리쳤다.

“대감! 저가 왔습니다! 대감! 어디 계십니까!”

그를 이곳까지 데려온 실조차 근방에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하게 찾아내기 힘들었다. 고윤은 처음 내려선 곳에서부터 시작해 방향을 잡고 걸었다. 눈보라에 휩쓸려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마다 그는 실을 뒤쫓았다. 그 잠깐 사이에도 숨결 따라 목구멍 안쪽까지 얼어붙을 것처럼 따끔거려 숨 쉬는 것이 어려웠다.

“대감!”

정 안 되면 이 근방의 눈을 다 녹여서라도 은헌을 찾을 것이라 다짐하며 고윤은 이를 꽉 깨물었다.

깡!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이 들렸다. 고윤의 고개가 사방을 살피듯 돌아갔으나 어딘지 한 번에 찾아내지 못했다.

고윤은 정신을 집중해 다음을 기다렸다. 눈을 감고 바람 속에 한참이나 선 채로 그는 머물렀다. 입이 바짝바짝 말라올 무렵 멀지 않은 곳에서 또다시 울음이 들렸다.

고윤은 번뜩 눈을 뜨고 소리가 난 곳으로 걸었다.

“대감!”

은헌의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분명 어디선가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것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눈이 쌓여 어느 사이에 발목이 푹푹 아래로 가라앉았으나 고윤은 쉬지 않고 걸었다. 그러나 한참 이어지던 소리가 또다시 끊겼다. 고윤은 다시금 사방을 둘러보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찾았다. 후다닥, 정신없이 달려온 작은 몸통을 발견한 그의 눈이 커졌다. 고윤은 마중 나가듯 뛰어나갔다.

“너!”

고윤은 제 앞에 앉아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드는 짐승을 보았다. 보통이 아닌 줄 알았으나 이 눈보라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다니는 녀석을 보아 반갑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했다. 하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대감께선 어디에 계시느냐?”

짐승은 꼬리가 떨어져 나갈 듯 격렬히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뛰어온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고윤은 그 뒤를 밟았다. 얼마 가지 않아 짐승은 걸음을 멈추고 눈뭉치가 달라붙은 앞발로 쌓인 눈더미를 툭툭 건드렸다.

고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곳보다 높이 쌓여 있긴 했으나 아무리 보아도 사람이 머물 만한 곳으론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계시기에…….”

고윤이 선 채로 가만히 있자 짐승은 앞발로 눈더미를 파헤쳤다. 사각사각 얼음 알갱이가 갈리는 소리에 고윤은 멍한 얼굴로 바라보다 자릴 박차고 뛰어나가 짐승이 파헤치고 있는 눈 무더기에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얼음장 같은 물에 손을 집어넣은 것처럼 순식간에 손이 얼어붙었다. 그런데도 고윤은 정신없이 눈을 파헤쳤다. 그는 손을 움직이며 입술을 열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뱉는 숨결에 기이한 열기가 밀려들었다.

짐승이 낑낑댔다.

고윤이 밭은 숨을 뱉을 때마다 뜨거운 물을 들이붓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푹푹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물기에 옷이 젖어들고 불어오는 찬 바람에 얼어붙었다가 다시 녹아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러길 몇 번 고윤은 쌓인 눈 아래로 몸을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파고들었다. 어느새 퉁퉁 부어오른, 얼어붙은 손으로 눈을 만지던 고윤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앉은 바로 앞에 사람의 손이 보였다. 고윤은 고개를 들었다. 쌓인 눈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 그곳에 손을 대자 눈이 후드득 아래로 녹아내렸다. 고윤은 신음을 뱉었다. 은헌이 그곳에 있었다. 저쪽의 시간으로 일각도 지나지 않았을, 찰나와 같은 헤어짐이 있기 전과 마찬가지로 단정하고 고운 얼굴로 잠든 듯 얼어붙은 채였다.

“……대감.”

고윤은 조용히 은헌을 불렀다.

은헌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고윤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다 다시 그의 입가로 가져와 입김에 손을 녹이곤 다시 내밀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은헌의 뺨에 닿았다. 매끄러운 살결이 유난히도 차가웠다.

고윤은 숨을 깊이들이 삼켰다. 얼음 알갱이가 들러붙은 긴 속눈썹 아래 까맣고 반질반질한, 짓궂음 담긴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그와 시선을 마주쳐 오며 놀랐느냐 물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굳게 감긴 눈은 뜨이지 않았다. 고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열었다. 은헌의 혼백마저 얼어붙은 것인지 육신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아직 늦지 않았다.

고윤은 갓끈을 풀어 내렸다. 그러곤 몸을 일으켜 무릎걸음으로 은헌의 몸에 바짝 다가붙었다. 추위에 웅크린 몸 위를 덮어 누르듯 앉은 뒤 고윤은 살짝 고개를 숙여 그대로 앞으로 숙였다.

이 방법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이것뿐이었다. 그는 은헌의 핏기가 가신 듯 푸르게 질린 도톰한 입술에 그대로 제 입술을 맞부딪쳤다.

고윤은 혀끝을 내밀어 은헌의 입술을 핥았다. 딱딱하게 굳은 입술 사이로 파고들 듯 숨결을 비집어 넣었다. 한 번도 해 보지 못하였으나 입을 마주 대자 아주 오래전부터 할 줄 알았던 것처럼 혀가 움직였다. 가볍게 입술로 입술을 마주 물었다가 혀로 간질이듯 살짝 갈라진 틈새를 핥아내자 은헌의 입술이 조금씩 벌어졌다.

고윤은 고개를 들었다. 어찌 숨을 쉬어야 할지 몰라 꾹 참았던 숨을 뱉어내곤 그는 물속에 자맥질하기 전처럼 몇 번이고 숨을 깊이 삼킨 뒤 다시 은헌의 입술을 덮어 눌렀다. 그러곤 제 기운을 그대로 넘겨주듯 은헌의 어깨를 붙잡고 숨을 넘겼다. 그의 숨결이 얼어붙은 은헌의 몸을 녹여내고, 그의 기운은 본래 되돌아가야 할 장소를 알 듯 은헌에게로 넘어갔다.

어떻게 할 줄도 몰라 얌전하게 비죽 내민 고윤의 혀끝에 단단하고 축축한 것이 맞닿았다. 간지럽게 핥아 올리듯 움직이던 것은 금방 고윤의 혀를 누르고 입술 사이를 비집고 넘어왔다. 이에 닿았던 것이 입천장을 문지르곤 빠져나갔다. 고윤은 벅찬 숨을 뱉으러 고개를 들어 올리려 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러나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단단한 손이 그의 뒤통수를 붙잡았다.

강하게 허리를 안아 끌어당기는 손길에 고윤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넘어갔다. 고윤은 감고 있던 눈을 더 꽉 감았다. 그의 입술과 혀의 온기를 탐하듯 강하게 빨아 당겼다. 그는 은헌의 옷깃을 붙잡은 손길에 힘을 주어 버텼다. 뒤통수를 눌렀던 커다란 손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 이끌고 남은 한 손이 허벅지를 눌렀다.

고윤은 허벅다리 안쪽을 더듬어오는 손길이 신경 쓰였으나 목구멍까지 핥아낼 기세로 제 입안을 휘젓는 혀에 금방 다시 정신을 빼앗겼다. 마음껏 가져가라 기운을 풀어내어 넘기고 있으나 탐욕스레 집어삼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고윤은 이로 은헌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만 좀 하란 뜻이었다. 그러나 되레 아까보다 더 격렬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지경이 되어야 고윤은 겨우 풀려났다. 숨을 헐떡이며 고윤은 눈을 떴다. 여전히 얼음 알갱이에 뒤덮여 있는 속눈썹이 보였다.

“……대감?”

잠겨든 목소리로 고윤은 은헌을 불렀다. 그러자 꽉 닫혀 있던 속눈썹이 흔들렸다. 파르르 흔들리던 눈꺼풀이 장막을 걷은 것처럼 열리고 그 아래로 눈동자가 드러났다.

“부인?”

고윤은 그를 알아보자마자 휘어지는 은헌의 눈웃음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의 심장이 재가 되어 흩어져 내린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도록 속이 뜨거울 리가 없었다.

“……오셨습니까.”

조금 전까지도 꽁꽁 얼어붙어 숨도 쉬지 못하였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단 듯 괜찮단 웃음 지으며 은헌은 태연스레 굴었다. 고윤은 그 모습에 숨을 삼켰다.

“……예.”

은헌은 그 짧은 대답이 무척이나 안심된다는 듯 웃었다. 그러곤 다시 눈을 감았다.

고윤은 무어라 하는 대신 재빨리 은헌의 숨결을 확인했다. 가냘프긴 했지만 습한 숨결이 손가락에 닿았다. 고윤은 안도의 숨을 돌리곤 일어섰다. 그새 기운이 바닥난 것인지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으나 그마저 그래서야 둘 다 얼어 죽는 꼴밖엔 되지 않았다.

고윤은 은헌이 그가 힘들 때 그리했던 것처럼 등을 은헌 쪽으로 돌리고 몸을 숙였다. 축 늘어진 은헌의 팔을 어깨 위로 넘겨 당긴 뒤 있는 힘을 다해 끌어 올렸다. 억하고 앞으로 몸이 무너졌다.

“빌어먹을!”

간만에 욕지거릴 뱉어내며 고윤은 차가운 바닥에 엎어진 채로 은헌을 제 등 뒤에 올리려 애썼다. 한참이나 씨름한 끝에 고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같이 서 있을 때는 그냥 머리 하나 정도의 차이였건만 어째서 은헌의 다리가 여전히 땅에 닿아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오래가진 못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허리가 그대로 꺾일 정도로 무거운 몸을 지고 집까지 가야 했다. 철갑을 두르고 사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것 같은 무게를 이겨내고 고윤은 짐승을 찾았다. 짐승은 꼬리를 살랑이며 은헌의 발끝에 코를 들이박고 킁킁댔다. 한숨이 새어 나왔으나 고윤은 입을 뗐다.

“길 잃지 말고 오너라.”

깡!

짐승이 대답하듯 고개를 들었다.

고윤은 선 자리에서 바로 길을 열었다. 주위가 일그러지며 몸을 에이게 만드는 찬바람이 사라졌다. 그는 힘겹게 한 걸음 내디뎠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걸음은 위태로웠으나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고윤은 그렇게 길을 건넜다.

* * *

“대감! 마님!”

청지기들이 큰 소리로 불렀다.

기척도 없이 은헌의 사랑으로 통하는 협문이 열리고 담장 사이를 두고 조금 전까지도 사람 하나 얼씬거리지 않던 곳에서 고윤은 은헌을 엎은 채 나타났다.

그것만으로 기함 요절한 일인데 대체 어찌하면 오뉴월 무더위에 겨울 한복판에 내던져졌던 꼴로 돌아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요부터 깔게.”

고윤은 짓눌린 목소리로 명했다.

퍼뜩 정신 차린 석삼과 행랑아범이 서둘러 움직였다. 석삼은 고윤에게 성큼 걸어와 은헌의 몸을 대신 받아 부축했다. 행랑아범이 짚신을 내던지고 대청마루 위에 우당탕 소릴 내며 올랐다.

은헌을 방 안에 옮긴 뒤 모두가 바쁘게 상황을 파악했다.

“몸이 얼어붙어 계셨네. 집에 마 뿌리가 있는가? 있으면 찧어서…….”

고윤은 은헌의 곁에 주저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동상이라면 살을 문지르면 아니 됩니다.”

고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행랑아범이 재빨리 고했다. 그러고는 상전의 말을 가로막은 것에 놀라 재빨리 몸을 숙였다.

“송구합니다.”

고윤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럼 어찌하는 게 좋겠나.”

그는 동상에 대한 그가 말한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보다 수십 년은 더 산 이의 말이니 허투루 듣지 않는 게 더 이로웠다.

“소인이 잠시 대감의 발을 살펴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게.”

행랑아범의 손짓에 겸종들이 은헌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버선을 벗겨냈다. 행랑아범은 은헌의 손과 발을 살폈다. 몸이 얼어붙었다 하나 살이 검푸르게 괴사된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상태가 나쁘진 않으니 물을 미지근하게 데워 몸을 담그게 하심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 말에 고윤은 곁을 지키고 서 있는 총관을 보았다.

“서둘러 탕에 물을 채우게.”

“물을 끓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입니다.”

총관은 난처한 듯 말을 흐렸다. 부엌에 늘 데운 물을 두었지만, 당장 사정이 급한 것치곤 발 담글 정도도 되지 않았다. 더운 여름날이라 물을 끓여놓지 않는 탓이었다.

“찬물이라도 상관없네. 그건 내 알아 하지.”

고윤의 단호한 말투에 총관은 고개를 숙이곤 서둘러 몸을 돌렸다. 고윤은 석삼에게 다시 은헌을 엎으라 했다. 석삼은 재빨리 제 주인을 들쳐 엎었다.

총관은 하인들더러 우물에서 찬물을 길어 바로바로 날라오라 소리쳤다.

목간하는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간 석삼이 커다란 욕조에 은헌을 앉히듯 내려두었다. 고윤은 곁에서 겉옷을 벗어 던지곤 신을 벗었다. 얇은 옷차림으로 그 역시 텅 빈 탕에 들어가 앉았다.

얼음장 같은 우물물을 가져오는 청지기들이 퍽 당황한 얼굴로 멈칫하자 고윤은 태연히 명령했다.

“얼른 붓게!”

단호한 말투에 엉거주춤 우물에서 가져온 얼음장 같은 찬물이 탕에 그대로 쏟아졌다. 총관과 행랑아범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길어온 것이 분명 찬물인데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더운 기가 훅 끼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대던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가 너나 할 것 없이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가 물을 날라왔다.

고윤은 은헌의 몸이 아래로 가라앉지 않도록 붙잡았다. 숨을 불어 넣고, 기운을 북돋아놓았으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을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그가 가진 재주로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의 힘은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는 기운은 되지 못했다. 애초에 은헌이기에 이 정도까지 회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청지기들이 부어 채운 물이 어깨까지 넘실거리자 고윤은 사람을 물리고 은헌과 탕에 나란히 들어앉았다.

* * *

담장 안이 들여다보이는 바위 위에 엎드려 누운 채로 그림자는 고개를 조금 더 내밀어 대군 저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폈다.

평소라면 수시로 주위를 살피며 감시하는 종놈들 때문에 이렇게 여유롭게 지켜보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각 전 무슨 일인지 순찰이 아예 멈췄다. 그 덕에 이렇게 가까이 붙어 대군 저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이해 가지 않았다.

웬 사내의 등에 업혀 마당에 나타난 이는 분명 은헌대군이었다. 초상에 그려진 것과 똑같은 옥골선풍의 은헌대군은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채였다.

그림자는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곤 품에서 종이와 붓을 꺼냈다. 세필로 상황을 적어넣은 뒤 그는 피리를 꺼내 불었다. 새소리를 닮은 피리 소리가 울리자 곧 날갯짓 소리가 들리더니 매가 그의 옆에 내려왔다. 그림자는 천을 두껍게 댄 팔을 내밀어 매를 붙들었다. 커다란 날개를 지닌 매의 발에 보고를 단단히 매듭지은 뒤 그림자는 다시 매를 날려 보냈다.

은헌대군에게 무슨 변화가 있거든 보고를 올리라 했으니 이것으로 될 터였다. 그림자는 다시금 대군 저를 눈여겨보곤 물러났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무언가 크고 두꺼운 것이 그림자의 몸을 후려쳤다. 퍽하고 나뒹구는 그림자의 몸통을 말랑말랑한 발바닥이 내리눌렀다.

그림자는 저를 후려친 것을 보았다. 하얀 털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커다란 호랑이가 조금 전 그가 날려 보낸 매를 입에 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 땅에서 온 인간아. 그다지 좋지 않은 기운을 풍기고 다니는구나.”

아직 살아 있는 매가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그림자는 그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호랑이가 말을 했다. 그것도 입에 매를 문 채였다.

그러나 그게 생각의 마지막이었다.

산신은 기절한 인간을 보았다. 앞발로 몇 번 굴리자 기절하였는지 눈을 까뒤집은 채였다. 산신은 입에 물고 있던 매를 뱉었다. 그러곤 ‘알지?’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까닥이자 매는 제 발에 묶인 종이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벅벅 긁어 풀어냈다.

산신은 허공에 재주넘기를 하여 다시 땅으로 사뿐하게 내려섰다. 고운 손으로 종이를 집어 든 산신은 그것을 펼쳐 안을 확인했다. 적어도 아는 글자는 아니었다. 산신은 고윤 선생이 있는 계사정을 한 번 보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야 인간의 일에 크게 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일 또한 고윤이 데려온 그 짐승에게 묻은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면 나와보지도 않았을 터였다.

산신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손에 든 종이를 기운으로 짓이겼다. 불이 붙은 듯 연기도 없이 타들어간 것은 금방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산신은 콧등을 찡그리곤 다시 재주를 넘어 호랑이로 변한 뒤 산 위로 한달음에 달려 올라갔다.

* * *

은헌은 눈을 깜박였다.

아주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웠다. 정신은 멍했고 몇 번 다시 눈을 깜박이면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잠을 청하는 대신 느릿하게 움직이는 시선을 옮겨 지금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있던, 눈을 다져 만든 굴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보이는 그의 방 천장을 확인한 뒤 그는 몸을 뒤척여 옆으로 돌아누웠다.

제 방에 저 말고 다른 이의 숨소리가 들릴 일 없다고 생각하여 착각인 줄 알았더니 그는 아닌 모양이었다. 새근새근 아이처럼 숨을 쉬며 잠든 고윤의 모습에 은헌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곤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히 일어섰다. 손가락 마디마다 무언가를 짓이겨 바르고 동여매 놓았는지 손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였으나 몸을 일으키는 데는 문제없었다. 은헌은 요도 깔리지 않은 찬 바닥에 누워 있는 고윤의 몸을 천천히 끌어당겨 이불 위로 들어 옮겼다. 그러곤 그가 덮었던 얇은 이불로 고윤의 몸을 덮었다.

구하러 온 것이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의식을 잃은 뒤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보이는 것이 눈밖에 없는 허허벌판에서 그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도 찾아냈다 싶었다.

은헌은 피곤한지 깊이 잠들어 깨지도 않는 고윤에게 제 팔을 베게 삼아 내어주곤 조심히 누웠다. 불편한 듯 뒤척거리더니 이내 딱 맞는 공간을 찾아냈다는 듯 고윤은 그의 품 안에서 편안한 얼굴로 다시 잠들었다. 그 얼굴을 보다가 은헌도 다시 눈을 감았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조금 더 쉬었다가 일어나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바라던 대로 고윤이 바로 곁에 있으니 더는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