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햇살이 뜨거웠다.
맑은 날이라곤 없던 흐릿한 세상 속에 드물게 만난 청량한 하늘이라 모처럼 조용하던 계사정에도 활기가 돌았다.
“그 책은 햇볕 닿으면 안 되네.”
“하면 발을 치고 그늘을 만들어두겠습니다.”
고윤은 서갑에서 책을 빼내 마루에 늘어놓았다. 긴 비에 습기 머금고 눅눅해진 책을 마루에 죄다 꺼내 바람을 쐬게 해놓곤 그도 마루 끝에 주저앉았다.
모처럼 내리쬐는 햇빛을 이렇게 보고 있으니 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바람마저 볕에 바싹바싹 말라 휘 불어오는 것에 기분까지 좋아졌다.
“마님.”
고윤은 반쯤 뜨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일인가?”
큰사랑채에서 건너온 총관이 바쁘게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고윤은 힐끗 그와 은헌의 거처 사이에 난 담을 보았다. 나지막한 담이었다. 그 너머에서 은헌은 종친부에서 가져온 서신을 읽고 수결하느라 금일은 낮것을 같이 들지 못할 것 같다며 알려왔다. 벌써 일이 끝난 것인가 싶어 그는 총관의 말을 기다렸다.
“궐에서 비자 8)가 왔습니다.”
“비자가?”
고윤은 의아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궐에서 서신을 보낸다면 보통 은헌의 앞으로 오는 터라 그에게 오는 것이 드물었다. 보낼 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도 말이다.
“차를 내고, 안으로 들이게.”
어쨌든 만나보면 알아 해소될 의문이라 고윤은 방으로 든 뒤 의관을 다시 갖췄다. 바람 들어오라 사방으로 열어놓은 창문 너머로 총관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이가 보였다. 서신을 가져온 글월 비자가 고윤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낯빛에 당황함이 없는 것에 고윤은 저를 알고 있는 이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부부인에게 서신을 가져왔는데 낯선 사내가 앉아 있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자는 공손하게 방에 들어 예를 갖췄다.
“부부인 마님을 뵙습니다.”
고윤은 과한 예는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앉게.”
서궤를 앞에 두고 비자가 앉았다. 비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서둘러 매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곤 곱게 접힌 봉투를 꺼내었다.
곁에 앉아 있던 겸종이 그것을 받아 고윤의 앞에 놓인 서궤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대비전과 중궁전, 그리고 동궁전에서 부부인께 전하라 명하신 것이옵니다.”
고윤은 침음을 삼키곤 서찰의 겉봉을 살폈다. 대비마마와 중전마마 그리고 빈궁 저하의 필체가 나란히 보였다.
“알았다. 읽고 답을 쓸 때까지 시간이 걸릴 듯하니 잠시 쉬고 있거라. 이보게, 이 아이에게 쉴 곳을 내어주게.”
“알겠습니다.”
겸종이 고개를 숙이곤 허락을 구해 일어섰다. 비자 또한 허락을 구하곤 일어서 따라나섰다.
고윤은 미간을 찡그리곤 다시 서찰을 살폈다.
궐에서 인편으로 부쳐 온 서신이니 오늘 내로 읽고 답을 줘야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대비마마께서 보내신 것에 손을 뻗었다가 봉투 위를 훑는 듯이 손을 움직여 우측에 놓인 동궁에서 온 것부터 손에 들었다. 어느 것이든 급하지 않을 게 없고, 중요하지 않을 게 있겠냐마는 이것부터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그에게 서신을 보낼 이유가 제일 없는 쪽이었으니 말이다.
세자빈이 보낸 서간의 내용은 의외로 단순했다.
“삼칠일 다 지나갔으니, 대감과 함께 원손을 보러 오시라?”
고윤은 아이를 보러오라는 초청에 잘되었다 생각했다. 이참에 궐에 들어 그가 손봐둔 결계가 여전히 단단한지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고윤은 이번엔 대비전에서 온 것을 열었다.
대비전 마루에 가끔 누가 두고 간 듯 들꽃과 개암 열매가 한 줌치 놓여 있는데 두고 간 이를 다들 본 적이 없다며, 딱 아이 손으로 집으면 될 것 같은 양이라는 말에 짐작 가는 바가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대비가 어릴 적 좋아하던 것을 놓고 가는 귀신이라면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지만, 고윤은 미간을 찡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저승길 가신 줄 알았는데 가기 싫다 되돌아 나오기라도 하셨는지 염려되니 궐에 들어가는 데로 대비전도 돌아봐야 할 듯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서신을 들었다. 어쩐지 허리를 반듯이 펴고, 조심스레 겉봉을 열어야 할 듯했다. 고윤은 크게 숨 한 번 고르고선 서찰을 펼쳤다.
서궤에 늘 올려두고 읽고 있는 서책으로 익숙해진 글씨가 담담히 그의 안부부터 물었다. 날이 더워지는데 몸 상한 곳은 없는지 묻는 말투가 귓가에 감겨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와 대군에 관한 염려와 당부밖에 없는, 그야말로 안부를 묻는 서신이었다. 살림에 부족한 것이 없는지 묻는 것에 고윤은 슬쩍 웃음을 머금곤 손가락으로 온기가 느껴지는 글씨를 손끝으로 따라 문질렀다.
고윤은 우선 답신을 쓸 준비부터 했다.
* * *
은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창밖을 확인하곤 제 앞에 앉은 객을 보았다.
“부인께서 계시니, 오가는 이도 있지요.”
중년의 사내는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대감의 혼례에 참석하고자 서두르긴 했는데 화국에서 예까지 오는 길이 워낙 멀고 험하다 보니 한참 늦어 인사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뒤늦은 축하 인사였으나 그리 오는 인사가 한둘이 아니라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은헌은 인사를 받았다.
“좋은 일에 치레를 받는 것인데 늦고 빠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멀리서 오신 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릴 일이지요.”
“그러지 않아도 인사를 드리고자 준비해 온 것이 있는데.”
은헌은 사내가 내민 청금으로 만든 연적을 보았다. 전에 그가 받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서늘했으나 얼굴만큼은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귀한 것을 구하셨습니다.”
“대감께서 지난날 제게 해주신 일에 비하겠습니까.”
비단 보자기에 싼 청금 연적을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은헌은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어 피를 토해내고 앓아눕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약재도 그렇고, 연적도 그렇고, 너무 과분한 것을 많이 받는 게 아닐까 염려됩니다.”
은헌의 말에 사내는 허허롭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은헌 대감께서 편찮으시단 소식에 하 공공께서도 염려가 무척 크십니다. 하여 저더러 꼭 찾아뵈라 하신 것이고요.”
“하 공공께서요.”
은헌은 조금 전 그가 받았던 꾸러미를 보았다.
그간 온갖 병을 핑계로 방문객을 다 거절하였으나 의원까지 데리고 직접 찾아온 화국 사신마저 돌려보낼 수가 없어 객으로 들인 참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불편함이었다.
감시의 눈초리 아래 웃는 낯으로 버티는 것도 그러했다. 한때는 이자들의 힘을 빌려 이 나라를 떠나고자 했던 탓에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며 함께 어울렸을 때도 있었다. 그게 익숙하여 이번에도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더니 거짓으로 웃는 것도 힘이 들었다.
은헌은 다시 차를 한 모금 삼켰다.
“하 공공께서는 잘 계십니까. 저번 사신행을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오셨다 들었는데요.”
사내는 크게 웃었다.
“원체 바람 같으신 분이라 머무는 것보단 돌아다니길 더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는 그리 말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만날 수 있을 때 만나는 것이 좋으신 분이지요. 곧 떠나시니 말이지요.”
“그렇군요. 그쯤 되면 이토록 오래가는 윤감(輪感) 10)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헌은 제 상태를 기어코 확인하고자 사람을 보낸 사신단의 우두머릴 떠올리며 담담히 웃었다.
“그럼 그때는 부부인도 뵙고 인사를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은헌은 아까부터 고윤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내를 조금 서늘해진 눈매로 훑었다.
화국의 풍습에 멀리 오는 객일수록 부인을 내보이며 맞이하도록 하는 습속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나라는 아니었다. 설사 그런 습속이 있다 해도 낯선 사람의 눈앞에 고윤을 들이밀 생각 따위도 없었다. 무슨 까닭으로 그의 앞에서 고윤과 관련된 말을 꺼내는 것인지 짐작 가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글쎄요. 부인께선 타고나신 몸이 약하신지라 저보다 더 요양이 필요하십니다.”
햇빛을 못 봐 낯짝 허여멀건하고, 밤에 잠을 못 자 다소 마르긴 했으나 여러모로 건장한 사내인 고윤을 떠올리며 은헌은 거짓말을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태연히 늘어놓았다.
“그렇습니까? 하면 돌아가는 대로 합우께 좋을 만한 것을 챙겨 보내겠습니다.”
필요 없다 말하려던 은헌은 잠시 멈추더니 방긋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요즘 더위에 통 먹지를 못해 염려가 컸는데 잘되었군요.”
사내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헌은 담담히 웃음을 흘렸다.
그 좋단 것이 무언지는 알 수 없으나 장담컨대 그게 고윤의 입에 들어갈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받아두는 게 좋았다. 무슨 생각으로 이리 입안의 혀처럼 구는지 알 수 있을 파비(巴鼻) 11)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다지 반갑지 않았던 객이 떠난 뒤 은헌은 협문으로 건너와 호등재로 향했다. 그가 마당에 발 딛기 무섭게 짐승이 숨을 헐떡거리며 꼬리를 신나게 흔들었다.
은헌은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 쳤다.
“날 이리도 반겨주는 걸 보면 퍽 심심했던 모양이구나.”
청지기들이라도 부지런히 오가는 그의 거처와 달리 고윤의 거처에는 시중드는 몇몇을 빼곤 사람 발길 닿는 일이 드무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은헌은 놀아달라는 듯 제게 달려드는 짐승의 턱 아래를 몇 번 긁어준 뒤 몸을 일으켰다.
“더 긁어주시지 그러십니까.”
마루 위에 얼굴 내민 고윤의 말에 은헌이 고개를 저었다.
“부인의 소일거리를 뺏을 수야 없지요.”
“저는 빼앗겨도 괜찮습니다만.”
귀찮음이 묻어나는 얼굴에 은헌의 입꼬리가 휘었다.
“지아비가 그래서야 쓰겠습니까.”
“그래도 써야지요.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석반 들려면 아직 멀었는데요.”
“어찌 그리 섭섭하게 말씀을 하십니까. 소반이 없으면 낯도 못 볼 사이도 아닌 것을…….”
은헌은 부러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고윤은 그것이 일부러 하는 것임을 알기에 얼른 말하라는 듯 담담히 볼 뿐이었다. 은헌은 불쌍한 척이 씨알도 먹히지 않자 이내 헛기침을 흘렸다.
“궐에서 글월 12)을 보내왔다고요?”
궐에 속한 무수리를 심부름 보낼 이가 정해져 있고, 고윤에게 서신을 썼으니 그 또한 손에 꼽을 만한 인물들이 은헌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은헌은 셋 중 누가 서신을 보냈는지 물었다.
“대비전과 중궁전 그리고 동궁전에서 각각 보내셨습니다.”
고윤의 대답에 은헌은 눈을 찌푸렸다.
“세 곳 모두 말입니까.”
지금은 그가 되도록 밖으로 나돌지 않는 것이 좋았고, 그것은 고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 하여 조만간 궐에 들어야 할 듯합니다.”
피하기엔 셋 다 어려우신 분들이라, 그냥 하루 내어주는 것이 낫다. 고윤은 그리 덧붙이곤 은헌을 보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계십니까?”
은헌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 건넨 말이었다. 그러나 은헌은 굳은 얼굴을 풀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부인을 두고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다만, 외간 사내가 부인께 수작질이라도 할까 그런 것이지요.”
고윤은 실소를 흘렸다.
“누가 와 부인께 수작질하거든.”
“낯짝을 뭉개놓겠습니다.”
고윤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큰 소리로 호언장담해 주었다. 은헌과 혼인하였으나 그가 사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같은 것 달린 사내놈 따위가 추파를 던지면 흔쾌히 주먹을 날릴 수 있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안심이 됩니다.”
은헌은 정말로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화국의 사신단이 고윤에게 묘하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고윤의 인품이 뛰어나니 접근하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썩 기분 좋지 않았다.
고윤은 실없는 농을 진중하게 늘어놓는 은헌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대감께도 객이 들지 않았습니까?”
“수작질 부리러 온 이라 그리 달갑지 않은 손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농인가 싶어 고윤이 되물었다.
“수작질요?”
“예전부터 제 손 붙잡고 싶어 호시탐탐 노리는 이들이 많아서요.”
은헌은 손을 들어 올렸다. 크고 굵고 길쭉하게 뻗은 손을 내밀어 보이며 그가 히죽거렸다.
“손 한번 잡아보자며 어찌나 성화던지.”
겉으로 보이는 게 죄다 속에 담아둔 말이었다. 은헌이 더위 먹고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던 고윤은 조금 전 오간 말을 되새겼다. 헛말 같았는데 정말로 그에게 수작질 부릴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린 채 은헌을 보았다.
“이젠 임자가 있는 손이니 수작질하거든 대감께서도 뭉개 버리시지요.”
은헌이 픽 웃었다.
“주먹을 잘못 휘두르면 제 손만 아플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주먹은 왜 휘두릅니까? 그냥…… 뭐, 적당히 이 집 뒷산에 묻어두면 될 것을요. 예로부터 호환 마마가 왜 무섭겠습니까.”
개밥 주듯 적당히 그릇처럼 땅을 파놓고 싱싱한 먹이를 심어두면 호랑이들이 알아 처리해 줄 터였다. 그럼 호랑이에게 먹혀 창귀 13)가 되겠지만, 어차피 이 마당 들어선 것 중 반 정도는 그리 죽은 거였다. 가까운 곳에 호랑이가 많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 편이 낫다. 아니다, 저 방법이 좋다.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끝내고 은헌은 제 발치에 머리를 비비는 짐승을 보았다.
“잠시 데리고 나가도 됩니까?”
새벽 눈 뜨자마자 한 번 데리고 나갔다 왔지만 심심해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는 다시 허락을 구했다.
고윤은 말 대신 엄지와 검지를 붙여 튕겼다. 화도(火刀) 14)에 부싯돌 맞부딪치듯 튕기는 소리가 나자 짐승의 목줄에 매듭지어졌던 끈이 느슨해졌다. 은헌은 그 줄을 손에 감았다. 며칠 전만 해도 가는 실 같던 줄이 이제는 새끼를 가느다랗게 꼰 것처럼 굵어져 쥐기에도 더 편했다.
“끈을 풀고 도망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고윤은 입으로는 은헌에게 말하며 눈으로는 짐승을 봤다.
산신도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으니 그로서도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 짐승이었다. 언제도 알게 될 날이 오겠거니 하고, 그저 기다리는 것이 때론 최선일 때도 있음을 아니까. 고윤은 그냥 기다리는 중이었다. 게다가 공들여 서둘러 알아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은헌이 녀석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리지 않도록 몇 가지 방비를 해준 뒤에야 고윤은 안심하고 손을 털었다.
“부인께서도 같이 가시면 좋을 텐데요.”
은헌은 바쁘게 무언갈 하는 고윤에게 같이 가자 청했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잠깐 내려가면 나오는 계곡까지만 가볼 참이었다. 물론 작은 고갯길 하나 넘어야 하니 땀이야 나겠지만 그래도 산에서 내려온 얼음장 같은 계곡에 손이라도 담그면 더위는 순식간에 날아가고 말 터다.
“그러고는 싶으나. 요즘 기력이 쇠하여 숟가락 들기도 버겁습니다.”
누가 봐도 귀찮다는 얼굴로 고윤은 입꼬리만 들썩여 웃었다.
“수저 들 힘마저 뺏을 수는 없지요. 쉬십시오.”
은헌은 되었다는 듯 빈손을 내저었다.
“예!”
고윤의 반색 어린 대답에 은헌은 픽 웃곤 얼른 나가자는 듯 재촉하며 꼬리가 떨어져 나갈세라 흔들고 있는 녀석을 보았다.
“가자.”
무언갈 길러본 적은 없으나 목줄 매인 신세가 어떤 것인지는 아니, 은헌은 틈틈이 저라도 데리고 다녀야겠다며 마음먹었다.
짐승은 앙증맞은 네 발을 놀려 깡충깡충 소리가 날 것 같은 몸짓으로 걸었다. 살이 오른 엉덩이가 실룩대는 것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은헌은 담담히 웃으며 저보다 앞서 걸어가는 짐승을 따라 걸었다.
“어디 가십니까?”
“그래. 내 잠깐 앞에 다녀오마.”
은헌은 대문이 아니라 후문으로 향하며 저를 따라오는 석삼에게 일렀다. 나간다고 미리 알리지 않았던 탓에 석삼이 허둥지둥 달려와 붙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금방 채비하겠습니다.”
“되었다. 그냥 담장 따라 한 바퀴 돌고 저 아래 계곡까지만 다녀올 것인데.”
“그래도.”
은헌은 손을 내저어 달라붙은 이를 물렸다.
가장 피하고 싶은 이를 집에 들였으니 더는 꾀병을 핑계 삼아 숨어 있을 이유도 없었다. 계사정을 지켜보도록 눈을 심어둔 이가 왕이든, 화국의 사신단이든 말이다. 물론 장부답게 그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대문 대신 뒷문으로 빠져나갈 테지만 말이다.
석삼을 물리고 은헌은 후원을 가로질렀다.
한여름 더위에 녹음은 점점 짙어져 바람 불 때마다 풀이며 나무며, 짙은 향취를 뽐냈다. 손톱 반절도 오지 않는 작은 흰 꽃부터 죽도화, 쉬땀나무, 꽃비자까지 이른 장맛비를 흠뻑 머금고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틔웠다.
날이 맑아지자 이때라는 듯 한 뼘씩 쑥쑥 자라 올라오는 푸른 빛을 보며 그는 웃었다.
밖으로 나와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덥긴 했다.
“나중에 시간 나거든 어디 얼음 같은 바람 부는 곳으로 가자 해야겠다.”
정신없이 통통 발을 내딛던 짐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보았다. 은헌은 시선을 마주쳐 주며 웃었다.
“더위를 피하러 가자고 하면 부인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지 않으냐. 음이 양을 향하고, 양이 음을 향하는 것이 이치라더니 더울 때는 추위가 그립고, 추울 때는 더위가 나을 것 같은 게지.”
그의 말에 짐승이 목을 울려 짧게 짖었다.
짧은 주둥이를 빼고 북슬북슬한 털에 뒤덮인 짐승을 보며 은헌은 털을 좀 솎아내야 하지 않을까 하며 잠시 궁리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곤 했지만 어쩐지 더워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둘은 쉼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은헌은 주변의 무언가가 일그러지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에서 순간적으로 헛숨이 새어 나왔다.
사각사각할 것 같은 얼음 알갱이가 나풀나풀 날아와 그의 발에 닿았다.
“이게 대체.”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뒷문으로 지나왔는데 제집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눈 닿는 곳에 있는 것이라곤 얼만치 두껍게 쌓였는지도 모를 눈이었다. 오뉴월 흔한 풍광은 아니었다.
* * *
수경 위에 뜬 잎사귀가 생명을 가진 것처럼 파르르 떨더니 이내 한 방향을 가리키며 멈췄다. 나뭇잎은 물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여 북서쪽에 바짝 붙었다. 이국의 특색 있는 옷을 입은 술객 15)이 잎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나, 들여다보기 무섭게 잎이 시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물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방해하고 있어 더는 읽어들이지를 못하는군요.”
술객은 혀를 찼다. 아주 강한 기운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찌합니까.”
하 공공은 눈을 찌푸렸다.
그것을 찾는 것은 앞으로 할 중대사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처음에 놓치지만 않았어도 벌써 일을 끝냈을 텐데 말이다. 하 공공은 뒤틀리기만 하는 계획에 혀를 찼다.
술객은 차분하게 다시 수경 위에 잎을 띄웠다.
“그래도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곧 다시 모습을 보일 겁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수경의 수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보단 은헌대군은 어찌 되었습니까.”
“본 이의 말에 의하면 멀쩡히 잘 있다는군요.”
술객은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그 또한 이상한 일이지요. 원손이 태어났으니 왕이 더는 은헌대군을 살려둘 이유가 없어졌지 않습니까. 그러니 왕이든 은헌대군이든 움직일 때가 되었는데요. 저로서는 은헌대군이 지고한 자리를 두고 욕심을 내어주었으면 하지만요.”
하 공공은 화국의 황실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이 나라까지 온 술객은 오래전 천기를 읽어 두 개의 예언을 내놓았다. 하나는 은헌대군과 관련된 예언이었고, 하나는 작금의 황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 나라 모두 용의 기운을 타고날 거라 예언 받은 이가 있었고, 그 용이 재앙을 부를 것이라 했다.
술객은 이 땅에서 용이 났다 했으나 재앙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했다. 용의 짝이라던 아이도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이와 연을 맺었다.
‘그 땅에서 재앙이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나라에서 재앙이 퍼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대비는 해두어야겠군.’
황제는 서른에 가까운 아들을 두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현명한 이를 골라 황제의 자리에 올리겠다 했다. 덕분에 겉으로든 속으로든 피비린내 나는 황위 다툼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경쟁을 붙이자 비빈들을 비롯해 황후마저 제 자식들에게 열을 쏟아부었고 그중 몇은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며 서슴지 않고 형제를 죽이고 있었다.
술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수년 전 지금의 왕에게 새로 태어날 왕자에 대해 예언을 전할 때만 해도 오늘과 같은 상황은 보이지 않았는데 어찌 된 것인지 모르겠군요.”
하 공공도 석연치 않은 얼굴을 했다.
그들은 부러 천기를 읽고 그 뜻을 전했다. 화국의 동쪽 끝에 붙은 이 나라에 술객이 내다본 앞날이 그대로 열리길 바라며 말이다. 하여 지금껏 먼 길을 오가며 대군을 왕으로 만들고자 했다. 대군이 부른 재앙이 이 땅에 내려서기를 기다린 터였다. 그도 아니면 왕이 대군을 직접 치길 바랐다. 그래야 주인을 잃은 재앙이 날뛸 테니 말이다. 어느 쪽이든 이 나라의 국운이 다했어야 했다.
“재앙을 부르는 용이 어찌 그 흉측한 본성을 억누르는 것인지.”
술객이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