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제가 들까요?”
은헌은 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짐승을 품에 안아 들었다. 깨끗이 씻기고 배부르게 먹인 뒤 푹 재웠더니 하룻밤 새 배가 통통했다.
고윤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피로 절인 것 같은 검붉은 실을 꺼내 짐승의 목이 졸리지 않을 정도로 묶어 매듭지었다. 불편한지 낑낑거리긴 했으나, 고윤은 실을 길게 연결해 목줄처럼 쥐었다.
“이제 내리셔도 됩니다.”
은헌이 팔에 힘을 풀기 무섭게 짐승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잠시 그리 있었던 것이 불만인 듯 녀석은 고윤에게 다가가 다리에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고윤은 개의치 않고 손에 든 실을 은헌에게 내밀었다.
“제가 잡아도 괜찮은 것입니까?”
“저는 대감을 붙들어야 하니 이놈까진 벅찰 듯합니다.”
한 손으론 은헌의 손을 붙들고, 남은 한 손으로 짐승의 목줄을 들면 만약의 사태에 손을 다 쓰지 못한다며 고윤이 양손을 흔들었다.
은헌은 웃으며 실을 붙잡았다. 그러곤 붙잡지 않은 빈손을 내밀자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고윤이 손목을 붙들어왔다. 은헌은 가볍게 손목을 비틀어 팔을 빼냈다. 뭘 하느냐는 듯 바라보는 고윤의 시선에 은헌은 제게 내민 하얀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그러곤 크게 팔을 흔들었다. 그 힘에 고윤의 상체가 그대로 끌려나가 무릎이 휘청거렸다.
“뭐 하십니까.”
“이리 잡는 편이 손이 풀리지도 않고 더 낫습니다.”
비가 내려 후덥지근하니 땀이 나면 손바닥이 미끄덩거려 쑥 빠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려던 고윤은 환히 웃는 은헌의 낯에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깍지 낀 손가락이 죄어드는 듯 불편했지만 금방 적응되기도 했다.
청지기들에게 출타를 알리고 둘은 대문 대신 후원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뒷문으로 향했다. 평상시라면 산을 직접 밟아 오르며 산신이 머무는 거처로 향하겠지만 동행이 늘었기에 고윤은 문을 건너며 곧장 길을 열었다.
은헌은 물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걸어가는 고윤의 뒤를 따라갔다.
젖은 숲에서 흘러넘치는 흙내와 나무 냄새가 강렬한 향취를 뽐냈다. 습습한 이끼 냄새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물비린내에 가까운 냄새가 나기도 했다. 수증기를 뒤집어쓴 것처럼 하늘은 뿌옇게 흐려 보이지 않았고 발 딛고 서 있는 땅마저 안개에 가려 단단한 대지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구름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마주 잡은 손의 온기가 아니었다면 은헌은 분명 이곳에서 길을 잃었을 터였다.
“부인.”
“예.”
멀지 않은 곳에서 퉁명스레 들려오는 대답에 은헌은 웃으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부인께서 무언가 보이십니까? 제 눈엔 그저 안개뿐이라.”
“곧 운무가 걷힐 터니 대감께서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고윤의 대답에 들려옴과 동시에 아래로 늘어진 소매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넘쳐 흐르는 물기를 지워가듯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에 한 치 앞을 살펴보기가 힘들었던 길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도 잠시 다시 가리어졌다. 사금파리처럼 작은 부분이었으나 은헌은 잠깐 보인 풍경에 넋을 빼앗긴 듯 탄성을 흘렸다. 매번 보아도 풍치가 절경이라며 걷던 산길이었는데 그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신선경을 빗댄 말에 어째서 고윤이 코웃음 쳤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절품이군요.”
이름도 알 수 없는 꽃이 핀 나무 아래를 걸으며 은헌은 탄사를 터뜨렸다. 흐드러지게 핀 꽃에서는 천 리를 가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짙은 향이 풍겼다. 겹겹이 흐드러지게 물기를 머금고 피어오른 꽃마다 생기가 돌았다. 죽어 썩어가는 것이라곤 없는 세상처럼 모든 것에 생명이 느껴졌다.
“조금 더 보여드리면 좋겠지만 지금은 가야 합니다.”
그리 말한 고윤은 은헌의 손을 붙잡아 끌며 부지런히 걸었다.
안개 속에서 높이 솟은 대문이 보였다. 그는 길의 끝에 서서 걸음을 멈추곤 숨을 골라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는데도 오늘따라 힘에 부쳤다. 그는 숨을 골라 뱉어내고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계십니까―!”
조용했다. 산신치곤 아직 어린 탓인지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는 터라 고윤은 기운을 실어 크게 불렀다.
“계십니까!”
다시 불렀을 때야 안쪽에서 기척이 났다.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으나 저절로 문이 열렸다. 고윤은 들어가겠다 크게 외치고는 몸을 돌려 은헌을 향해 고갯짓했다.
“가시죠.”
은헌은 처음 오는 곳이라 조심스레 걸음하였다.
짐승 또한 칠락팔락 꼬리를 흔들며 신이 났던 것과 달리 지금은 꼬리를 아래로 내리고 무척이나 경계하는 듯했다.
걸음걸이야 어쨌든 고윤이 먼저 문턱을 넘고, 다음으론 은헌이, 마지막으로 끌려가듯 짐승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은헌은 산신의 거처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시야를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했던 안개는 온데간데없고 청량한 햇살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먹물을 옅게 흩뿌린 듯했던 어둑함마저 걷히자 짙고 푸르며 화사한 세상이 빛을 발했다.
“이곳은 비가 내리지 않는 겁니까?”
“비를 맞으면 꼬리털이 젖어 볼품없어지거든.”
고윤을 향했던 시선을 재빨리 돌려 은헌은 낯선 음성의 주인을 찾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풀밭 위에 세워진 산신당 안에 꽉 끼인 듯 백호가 틀어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커다란 호랑이 얼굴은 불편하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편한 듯해 보였지만 되레 보는 사람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고윤은 산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꾸벅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호랑이는 커다랗고 뾰족한 이를 활짝 드러내며 길게 하품을 했다.
“고윤 선생이 터에 들어온 뒤엔 무탈할 일이 없는데.”
목멱산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산신은 여전히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거침없이 투덜댔다.
고윤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리 이른 아침부터 예까지는 무슨 일인가? 낭군 손까지 잡고 말이야.”
낭군이란 말에 웃은 것은 호랑이 산신뿐이었다. 고윤은 버릇처럼 콧등을 찡그렸고 은헌은 담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보통은 그리 말하면 경기 일으키듯 사레 걸리던데 재미없는 농이었나?”
호랑이와 시선이 마주친 은헌은 그제야 웃었다.
“부인과 혼례를 치렀으니 당연히 제가 낭군인데 사레 걸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한 것이 어찌 농이 되느냐며 그가 답하자 놀려먹으려 했던 산신이 앞발로 콧등을 긁었다.
“지나치게 태평하네.”
뭐든 허허 웃는 편이긴 했다. 고윤은 은헌의 옆모습을 보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무슨 일이지?”
고윤은 은헌의 얼굴을 보다가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은헌의 다리에 몸통을 숨기고 있는 짐승이 보였다.
“살펴봐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산신은 다시금 크게 하품을 한 뒤 도무지 어떻게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좁은 문으로 앞발부터 내밀어 쓱 흘러나왔다.
캉!
터벅터벅 걸어 나와 몸을 쭉 늘어뜨리는 호랑이의 모습에 짐승은 짧게 짖고는 그대로 돌아 들어왔던 대문으로 달려나갔다. 은헌은 순간적으로 강하게 끌려나가는 실을 붙잡았으나 워낙 얇은 실이라 손에 휘감아 끌어당길 새도 없이 손아귀에서 그대로 빠져나갔다.
쾅!
발아래가 흔들렸다.
산신은 인간 머리만 한 앞발로 밟듯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은헌은 삽시간에 놓쳐 버린 짐승 대신 고윤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곤 버티어 섰다.
정신없이 달려나가던 짐승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그대로 나뒹굴었다. 보이지 않는 담벼락에 그대로 들이박혔다가 튕겨 나오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코가 아픈지 앞발로 안 그래도 붉은데 더 붉어진 주둥이를 붙잡고 짐승이 가냘픈 울음을 터뜨렸다. 깽깽거리는 신음에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호랑이 모습 그대로 산신은 그의 머리 위를 뛰어 넘어갔다. 그러곤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산신이 사는 곳에 들었는데 허락도 없이 벗어날 생각을 하다니, 하룻강아지도 아니고.”
산신은 앞발로 짐승을 툭툭 건드리며 굴렸다.
“이상한 것을 데려왔네.”
고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모르시는 것입니까.”
명색이 산신이었다. 뭍짐승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짐승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그가 틀린 듯했다.
산신은 고개를 숙여 코를 짐승의 배에 대고 킁킁 냄새를 들이마셨다. 커다란 호랑이의 눈이 반쯤 내리 감겨 생각에 잠긴 듯해 보였다. 산신은 고개를 갸웃거리곤 몇 번이나 다시 체취를 확인했다. 짐승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앞발로 꽉 눌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산신은 이내 으르렁대며 제 발밑에 깔린 짐승을 쳐 냈다. 호랑이 앞발에 맞고 데굴데굴 굴러간 녀석이 아픈 듯 울었다. 산신이 되레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부서져도 모자랄 판에 이마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구는 걸 보면 튼튼하긴 하네.”
그걸 확인하고자 친 것이라면 거칠긴 했으나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산신은 두꺼운 꼬리를 펑펑 바닥에 내리쳤다.
“괴상한데.”
“무엇이 말입니까.”
속 시원히 이야기해 보라는 듯 고윤이 물었다.
산신은 고윤과 은헌을 번갈아 보았다. 알았다면 주웠을 리 없겠지만, 모르고 주웠다면 그도 문제였다.
“살아 있는 게 아니야, 저것.”
산신은 턱짓으로 한껏 불쌍하게 앉아 있는 짐승을 가리켰다. 겉보기엔 털도 있고, 가죽도 있고, 온기도 있으니 살아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긴 한데 산 것은 아니었다.
고윤의 표정이 변했다.
“……다른 곳에서 온 겁니까.”
“요수냐고 묻는다면, 그쪽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는 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야. 그런 건 비린내가 진동하는데 저건 오래된 흙냄새와 주술의 냄새가 짙거든. 인간의 손이 많이 닿은 것 같은데.”
산신은 비슷한 것을 떠올려 보았다. 보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것에 대해서 말 들은 것은 있었다. 그러나 산신은 떠오른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정확한 것도 아닐뿐더러 고윤이 제게 데려온 것이 인간의 손길 닿은 것이니 어디까지나 인간 세상의 일이었다.
금방 짐승에게서 흥미가 떨어진 산신은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산신당의 지붕 위로 아주 가볍게 뛰어올랐다.
위협하던 존재가 물러나자 짐승은 재빨리 다가와 은헌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들러붙었다. 고윤은 곤란한 얼굴로 혀를 찼다.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지만, 짐작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겁먹은 것을 보면 산신에게 맡기고 가겠단 생각은 접어야 할 듯했다.
은헌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대감이야말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고윤은 제게 내민 선택지를 곧장 되돌려 주었다. 은헌은 고개를 숙여 발치에 얼굴을 묻은 녀석을 보았다. 시선을 알아챈 것인지 짐승이 고개를 들었다. 까맣고 동글동글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쩐지 마음이 약해졌다.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낼 동안만 곁에 두는 것이 어떻습니까?”
위험한 것이라면 산신도 이렇게 그냥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눈에도 위험하단 느낌은 없었다.
은헌의 말에 고윤은 산신을 돌아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산에 속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존재라면, 산신의 동의 또한 구해야 했다. 산신이 받아들인다면야 고윤도 별 불만은 없었다. 산신은 목을 갸르릉 울려댔다.
“싫다 하면 내치게?”
“싫다 하시면 여기에 맡겨볼 참입니다.”
산신이 제 구역에 들이기 싫다 한 것을 집 안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윤의 말에 호랑이의 콧등이 제대로 구겨졌다.
“그게 더 싫은데.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게 눈앞에 얼쩡거리는 거.”
“그럼 허락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고윤은 다른 곳으로 보내는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이렇게 수상스러운 것을 도성 어디에 풀어 놓고 방관할 수는 없었다. 집이 아니라면 이곳밖에 없단 말투에 산신은 알아 하라는 듯 앞발을 휙휙 내저었다.
고윤은 은헌을 보며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산신이 안 된다 했으면 이 자리에서 그대로 쫓겨났을 테지만, 받아줬으니 당분간 집에 둔다고 큰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은헌은 아까 놓아버린 짐승의 목에 걸린 실을 더듬어 끌어올린 뒤 손에 단단히 감아쥐었다. 정체는 여전히 몰라도 겉보기엔 덜 자란 개처럼 느껴지니 새삼스레 거부감이 생길 리는 없었다.
고윤은 그 모습을 보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소매에 손을 집어넣고 더듬었다. 그러곤 아침부터 집 살림 맡은 이들이 바지런히 챙겨준 것을 꺼냈다.
“어이쿠, 이게 다 뭐람?”
산신이 입꼬릴 끌어올려 히죽댔다.
“산신께 올리는 공물입니다.”
은헌이 입을 열었다.
“원손이 태어났으니, 부디 무탈하게 장성하시기를 황송하게 기원하는 바입니다.”
“내게?”
은헌이 웃었다.
“저와 친분 있으신 산신이 이곳 인왕산에 계신 분밖에 없는지라.”
호랑이 꼬리가 아지랑이처럼 꼬불꼬불 흔들렸다.
“목멱대왕 6)께서 받으신 그건가? 그거라면 얼마 전에 받았는데.”
원손이 태어나자, 세자가 주관하여 도성을 둘러싼 산신에게 제물을 올리고 아이가 건강하길 기원했다. 만연한 일이었고, 어차피 정성 들여 나쁠 것이 뭐냐며 빼놓지 않고 상을 차리라 명했었다.
“두 번 받아 나쁠 것도 없지요.”
고윤은 담담히 술병을 내밀었다.
“타고난 게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자랄 텐데.”
산신은 술병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인간의 몸이란 게 생각보다 약하지 않습니까. 어린 것일수록 더더욱 그렇지요.”
은헌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 역시 용이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태어났다 했지만, 부왕의 손에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넘겨야 했다. 타고난 것만으로도 아기가 무탈하게 자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산신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별 보탬은 되지 않겠지만, 노력해 보지.”
“감읍합니다.”
산에 올라온 볼 일은 다 마쳤으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 * *
산신당 밖으로 나오자마자 은헌은 팔을 휘둘러 소매를 넓게 펼쳐 고윤의 머리 위를 가로막았다.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은헌은 주위를 살피고는 큰 나무 아래로 고윤을 붙들고 움직였다.
순식간에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슈룹을 챙겨 올 것을 그랬습니다.”
은헌은 어둑한 하늘을 살피며 혀를 찼다. 그 말에 고윤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의아한 듯 은헌이 고윤을 보았다.
“왜 그리 웃으십니까.”
“저는 살면서 한 번도 비 때문에 우산을 쓴단 생각을 하지 못하였으니 대감의 그 말이 낯설어서요.”
겸종이 고윤에게 우산을 가져왔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가로막아 피하겠다는 생각 자체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은헌은 조금은 멋쩍은 듯 콧등을 찡그렸다.
“어려서부터 저는 버릇이 되어 그렇습니다.”
“왕실에서는 당연하니까요.”
“사치스럽긴 하나 편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같은 날에는요.”
은헌은 그리 말하면서 도포를 벗었다. 한 겹 훌훌 벗어낸 도포를 은헌은 고윤의 머리 위에서부터 덮어씌웠다.
“이리 해두면 비에 덜 젖으실 겁니다.”
고윤은 물끄러미 그런 은헌을 보다가 제 어깨 위에 늘어진 옷자락을 손으로 문질렀다. 여전히 체온이 남아 있는 옷에 푹 감싸 안긴 것 같았다.
고윤은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저도 대감께 벗어 드려야 하는 겁니까?”
은헌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저가 설마 부인의 옷가지까지 탐하겠습니까. 그리 오래갈 비는 아닌 듯하니 잠시 긋고 가시지요.”
그는 시선을 돌려 앞을 보았다.
“저 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제가 아는 곳이 맞습니까?”
“처음 보시는 것도 아니실 텐데요.”
고윤 또한 저 멀리 내다보이는 도성의 모습을 보았다.
“부인과 함께 이곳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지요.”
능선 따라 이어진 성곽의 안으로 까만 지붕이 잔뜩 모여 있었다. 뿌연 안개에 가려져 보였다 안 보이기를 반복했지만 말이다.
고윤은 은헌이 보는 방향과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조금 전까지도 머물렀던 산신의 거처는 온데간데없이 험한 바위산 정상의 모습만 남아 있었다. 여기서 계사정으로 돌아가려면 필운대나 옥류동으로 내려가 창의문으로 움직여야 했다. 보통의 방법으론 말이다.
“걸어가면 미시에나 도착하겠군요.”
은헌 역시 내려갈 길을 찾아 능선을 살폈다.
아는 곳이라 내려갈 길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인왕산이란 곳이 도성 가까이 붙어 있는 산치곤 그리 평탄한 산도 아닐뿐더러 바위로 이어진 좁은 길은 지금 신고 있는 진신 7)으론 걷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이리로 빠져나올 거란 생각을 못 해 검 한 자루 챙기지도 않았다.
“비가 멈춘 뒤에 가면 더 좋겠지만, 서두르는 것이 났겠습니까?”
고윤이 있으니 위험할 일은 없겠으나 걱정을 덜어내는 편이 나은 터라 은헌은 그리 말했다.
“뭣 하러요?”
고윤은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서둘러 가자는 것이 궁금하신 겁니까. 아니면 가자는 것이 궁금하신 겁니까.”
은헌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고윤은 은헌과 눈길을 마주치면서 입꼬릴 끌어올렸다.
“할 일도 없는데 집에 서둘러 돌아갈 일이 뭐가 있겠느냐는 뜻이었습니다. 게다가 모처럼 사람 눈 없는 곳에 있지 않으십니까.”
“그야 그렇지만. 이 녀석도 함께 있으니 어디 나돌아다닐 것도 못 되지 않습니까.”
은헌은 눈을 아래로 힐끔거리며 짐승을 가리켰다. 고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담장 안에만 갇혀 있자니 좀이 쑤실 텐데도 늘 그랬던 것처럼 방구석 붙박이를 자처하는 은헌의 손을 고윤이 잡아당겼다. 은헌은 주위의 풍광이 이지러지는 것을 보았다.
요란스레 떨어지는 빗소리가 어느 사이에 창밖에서 들려왔다. 은헌은 순식간에 돌아온 집을 살피곤 방긋 웃었다.
“이리 다니면 부인께선 슈룹이 그다지 필요 없겠군요.”
“뭐, 그래도 가끔 도롱이는 걸치고 다녔습니다. 실제 비를 맞지는 않아도요.”
못 쓰는 것도 아니고 고윤은 눈이 내리거나 비가 오는 날엔 아낌없이 제 재주를 써댔다.
“그나저나.”
고윤은 제 머리 위 덮은 도포를 걷어내며 은헌을 보았다. 정확히는 여전히 은헌의 발에 매달려 있는 짐승을 보았다. 시선이 어딜 향하는지 알아챈 은헌 역시 고개를 숙였다.
“목줄을 조금 더 튼튼하게 매는 것이 어떻습니까. 마당에 묶어놓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은헌의 말에 고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당에 두시게요?”
“예. 이만 한 놈을 방 안에 둘 수도 없고 그러니 마당에 두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호등재에요.”
고윤은 제 처소에 묶어놓겠단 말에 한쪽 눈썹을 추켜 떴다. 은헌은 배시시 웃었다.
“그래야 객일 나타난 악귀 같은 것이 얼씬도 못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멀쩡한 귀신도 얼씬 못 할 테지요.”
떨떠름한 고윤의 말에 은헌의 웃음이 더 환해졌다.
“그럼 부인께서도 밤에 편히 주무실 수 있겠군요.”
고윤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현명하십니다.”
여러모로 솔깃한 소리였다. 어차피 집에 두어야 한다면 은헌보단 그의 곁에 두는 게 안심되기도 했다.
고윤은 눈을 빛내며 짐승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