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새벽달이 어스름한 빛을 내며 서산 위에 걸렸다.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한 틈에서 고윤은 길을 열고 발을 내디뎠다. 성큼 걸어가는 끝에 머지않아 익숙한 대문이 보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을 당겨 안으로 들어섰다. 심지 끝까지 녹아내린 타들어간 초 냄새가 풍겼다.
“오셨습니까.”
인시가 지나 묘시가 다 되어가는 이른 새벽에도 불구하고 은헌은 방금 일어난 이처럼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고윤을 맞이했다.
고윤은 제 방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은헌의 얼굴에 한숨을 내쉬었다.
“예서 왜 이리 계십니까.”
은헌은 펼쳐 놓았던 서책을 덮었다.
“근자에 밤이슬 밟고 다니시는 날이 느셨습니다. 어제만 하여도 더는 안 나가겠다 하시더니요.”
말투도 점잖고, 목소리도 담담한데 어째 성을 내는 듯 들려오는 것에 고윤은 콧등을 찡그렸다.
“뭐, 저라고 밤에 돌아다니고 싶어 그러겠습니까.”
고윤은 선수 치듯 변명을 늘어놓으며 몸을 내렸다. 그러곤 주먹으로 다리를 두들겼다.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걸었더니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불나방같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달려드는 것이 많아 그런 것이지요.”
그 모습을 보며 은헌이 혀를 찼다. 제 처지 곤궁함에 고윤도 한숨을 흘렸다.
관직에서도 물러났겠다, 어디 한량처럼 집에서 서책이나 읽으며 시간 보낼 줄 알았더니 어디에 묶여 있지 않아 되레 일이 더 많았다. 특히 원손이 태어난 뒤로는 가히 가관이었다. 팔도강산 떠도는 어중이떠중이는 다 모여드는 것인지 도성의 음기가 짙어져, 그에 홀린 것들 또한 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은헌은 굳은 얼굴을 풀었다.
“저가 도울 수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고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보다 사정 나쁜 이가 대감이신데 누가 누굴 돕겠다고요.”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은 귀신만이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혼백을 상대하는 것이 나았다. 생귀신과 별반 차이도 없는 이들에게 시달리는 것보단 말이다.
은헌은 원손이 태어나자 어째서인지 그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이 더 늘어나 아예 병을 핑계로 대문을 굳게 닫아걸고 칩거 중이었다. 혼례에 대한 축하를 내세워 오겠단 이들을 은헌은 앓아누웠다 소문내 막은 것이다. 덕분에 고윤에 대한 소문 또한 날개 뻗친 듯 퍼져 나가고 있었다. 세 번째로 들인 부인 또한 언제 병으로 잃을지 모를 대군의 처지에 대한 추측도 말이다.
“제가 이 모양이라 부인께서도 곤란하시게 되었습니다.”
“대감께서 이제 와 다른 맘 품으시면 더 곤란하니 지금도 나쁘진 않습니다.”
은헌은 고윤의 말에 픽 웃었다. 그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건 곧 왕이 될 야망을 품었다 함인데 평생 그럴 일은 없었다.
“중전 자리는 싫으십니까.”
은헌은 짓궂게 물었다.
“좋겠습니까?”
이렇게 부부인으로 왕실에 편입한 것만으로도 큰일 치렀는데, 중전 자리는 가당치도 않았다.
“그런 말이랑 입에 담지도 뱉지도 마십시오. 남들 귀에 들어갈까 무서우니.”
고윤은 정색했다.
“부인 앞이 아니면 할 말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누구에게 물어보겠습니까.”
은헌은 그런 고윤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고윤은 차마 욕은 못 하고 그냥 옆으로 발라당 나뒹굴었다.
“옷 구겨집니다.”
그걸 보며 은헌은 겉옷이나 벗으라 잔소리를 했다.
“손가락 까닥할 기운도 없이 다 쓰고 왔습니다.”
고윤의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은헌은 새 부리처럼 튀어나온 입술을 보며 한숨 쉬듯 웃곤 일어나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만 건너가 볼 터이니 자리에 누워 편히 쉬시지요.”
“잠들면 안 됩니다.”
그리 말하면서도 고윤은 소매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눈을 깜박이는 것에 은헌은 고개를 숙여 머리 위에서 고윤을 들여다보았다.
“어째서요.”
“오늘 중으로 대감께서 하사받은 토지와 관련된 문건을 다 처리하여야 합니다.”
“그것이라면 제가 하여도 되는 것을요.”
팔도에 흩어져 있는 땅에서 얼마만큼, 뭐가 올라오는지 봄철 농번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수십 통의 서신이 오고 갔다. 은헌은 저의 재산을 파악하느라 골머리 썩던 고윤의 낯을 떠올렸다.
“대감께서 하시는 방법과 제가 쓰는 방법이 달라 이참에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어디에 무엇이 부족하다 연락 오는 족족 서슴없이 보내는 은헌에 맡겨두자니, 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인가 가끔 의심 가는 몇 가지 구석도 있었다. 팔도에서 올라와 도성 내 쓰이는 것에 관한 것은 고윤 또한 큰 흐름을 지켜보는 쪽에 있었기에 간단한 분류만으로 수상쩍은 것은 가려낼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거리낌 없이 말하세요.”
고윤은 눈을 깜박이며 머리통 위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은헌을 보았다.
“문제가 있다면요.”
아직 관련된 것은 일 할도 다 파악하지 못했고,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을 뿐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고윤은 말을 하는 것으로 지쳐 연신 눈을 깜박거렸다. 은헌은 쓴웃음을 짓곤 고윤을 잠시 지켜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금세 다시 눈을 감더니 이내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은헌은 더 깊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고윤을 안아 올렸다. 등과 무릎 아래 팔을 넣고 올려, 조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던 보료 위에 고윤을 내려놓았다. 예전에는 곁에 붙어서기만 해도 뭐 하냐는 듯 귀찮다 돌아보던 이가, 그의 손을 탄 건지 이제는 곁에서 뭘 해도 깨지도 않고 얌전했다. 수족이 늘어진 것에 비해 무게가 적게 나가는 것이 그저 귀찮아 눈을 안 뜨는 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은헌은 고윤의 도포를 벗겨내어 대충 개켜 올려두곤 서늘해 보이는 하얗고 곧게 뻗은 손을 붙잡았다. 저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고 덩치도 반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말랐는데 고윤의 손은 또 사내답게 길쭉하니 시원스레 뻗어 있었다. 손가락을 얽어 꾹꾹 혈을 눌러주자 말랑말랑한 뺨에 홍조가 번졌다.
“좋으십니까.”
“……예.”
게슴츠레 올려 뜬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정말 좋은 듯 입꼬리가 히죽댔다.
은헌은 고윤의 손을 당겨 이리저리 만져 주고는 다른 쪽 손을 붙잡아 조물거렸다. 그동안 고윤의 숨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낮은 숨결이 고르게 이어지자 은헌은 조심스레 손을 놓곤 일어나 방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입을 떼려는 것에 은헌은 조용히 하라 손짓했다.
고윤이 잠든 곳에서 한참 떨어져 나와서야 저벅저벅 발소리가 울렸다.
은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붐하게 먼동이 터 오를 시각인데도 해 질 무렵처럼 캄캄했다.
“날이 궂겠구나.”
그는 한참이나 하늘을 살피다가 이내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게.”
“예, 대감.”
행랑아범이 얼른 곁에 붙어 섰다.
“비 떨어지거든 슈룹 1) 좀 꺼내게.”
은헌은 필요한 것을 찾았다. 행랑아범 또한 먹구름이 꾸물꾸물 대는 하늘을 슬쩍 보았다.
“출타하시렵니까?”
“멀리는 안 나가고 뒷산 좀 설렁설렁 걷다가 올 참이네.”
은헌은 고갯짓으로 해가 뜨면 물안개가 피어오를 뒷산을 가리켰다. 병을 핑계로 칩거하고 있으니 당장 담 밖으로 함부로 나서는 일은 없었으나 비가 오면 말이 달랐다.
“비가 내리면 길이 험해지니 예까지 누가 찾아오겠는가.”
찾을 사람이 없으니 감시를 피해 이참에 잠시 숨 돌릴 참이었다.
은헌의 말에 행랑아범은 지우산을 꺼내 손보겠다며 허리를 숙이곤 걸음을 옮겼다. 청지기들에게 몇 가지 일을 더 명하곤 은헌은 담장 하나 건너 제 처소로 걸음했다. 본래 있던 안채를 고쳐 작은 사랑채를 꾸린 고윤의 처소와 낮은 담 하나를 두고 마주하고 있는 곳이라 지척이었다.
처소로 돌아온 은헌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창을 열고 비를 기다렸다.
* * *
금방이라도 내릴 것 같던 비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눅눅해진 바람이 불면 든 은헌은 몇 번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먹구름 잔뜩 낀 잿빛 하늘일 뿐, 기다리는 소식은 없었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떨어질 것 같은데도 말이다.
지우산도 꺼내 손보라 하였고, 신을 이혜 2)도 꺼내라 하였는데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으니 은헌은 오늘도 나가긴 글렀구나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남의 눈치 살필 걱정 없이 잘 돌아다녔는데 어째서 제 처지가 다시 이 꼴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우습기까지 했다. 이 신세를 면하려고 무슨 일을 했는지 돌이켜 보면 더더욱 그러했다.
창문을 내다보며 하염없이 기다리던 은헌의 조바심을 알아챈 듯, 마당을 서성이던 청지기들이 어느 순간 일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대감!”
손바닥을 내밀어 긴가민가 간을 보던 석삼이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비가 옵니다!”
은헌은 마당을 살폈다. 바싹 말라 있던 바닥에 물을 흩뿌린 듯 점점이 젖어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곧 지붕을 두드리는 후드득 소리가 요란히 났다. 비를 피해 처마 아래로 몰려드는 이들을 뒤로하고 은헌은 곧장 나갈 채비를 했다. 갓을 쓰고 나서자 기다렸단 듯 지우산이 활짝 펼쳐졌다. 색을 곱게 들인 것으로 세자가 그에게 선물로 하사한 것이었다. 우산을 든 석삼이 하늘을 가로막자 은헌은 그 아래 섰다. 툭툭, 펼쳐진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만으로도 운치 있었다.
“가자.”
오랜만에 계사정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애초에 바깥출입 할 이가 고윤뿐인데, 정작 대문으로 나다니질 않으니 정말로 오랜만에 여는 문이었다.
행랑아범이 먼저 밖으로 나서 길 주위를 살폈다.
대군이 외출한다고 하였을 때부터 만일을 위해 밖을 확인하고 돌아온 호위들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다시 살폈다. 안전이 확인된 뒤에야 은헌은 밖으로 나섰다. 그는 아래로 내려가는 대신 발길을 틀어 산길을 오르는 집 옆의 좁은 협로로 움직였다.
떨어지는 비는 집 주위에 있는 큰 나무에 가려져 아직 길까지 엉망진창이 되진 않았다. 일행은 천천히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화공들이 한 번 머물며 그려보고 싶다 청해도 좀처럼 집에 객을 들이지 않는 터라 입소문만 자자한 계사정을 둘러싼 그림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예인들은 인세와의 경계가 흐릿한 듯하여 신선경을 보는 것 같다 극찬했지만, 고윤은 그저 코웃음 쳤던 풍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윤은 때때로 이 길을 걸어올라 산신이 머문다는 곳에도 가곤 했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인간의 걸음으론 평생 산을 헤매도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곳이라 했다. 그래도 그가 보았던 풍경에 견주어 비교하자면 각각의 다른 아름다움을 지녔을 뿐 빼어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은헌은 그의 창문으로 내다보면 한 폭의 산수화 같을 길을 직접 걸었다. 이대로 높이 오르면 바위가 나올 터고, 멀지 않은 곳에 도성의 둘레를 두른 성벽이 나올 터였다. 거기까지 올라가면 좀 더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은헌은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 주변 풍경도 잊고 발을 내딛다 우뚝 섰다. 그는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대감, 어찌 그러십니까.”
지우산을 받쳐 들고 선 석삼이 만약을 대비해 주변을 경계했다.
은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서 짐승 우는 소리가 나지 않느냐?”
그는 제 귀에 닿은 울음을 따라 귀를 쫑긋거렸다. 주위에 선 이들도 다시 주의를 기울여 사방을 살폈다. 전과 같으면 짐승이란 말에 칼부터 빼 들고 경계하였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호랑이 많기로 소문난 산에 백 년도 넘게 살았단 호랑이가 산신으로 들어앉은 뒤론 말이다.
고윤은 지나가는 말로 그저 알아두라는 듯이 일렀지만, 그 뒤로는 다들 산에서 짐승을 붙잡는 것도 신경을 썼고, 절로 산신을 공경하며 산을 오르내렸다.
“살펴볼까요.”
행랑아범이 나서자 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거든 그냥 두고, 짐승이면 알리게.”
명을 받은 청지기들이 짝을 지어 흩어졌다. 은헌은 조금 전보다 짙어진 안개 속을 살폈다. 비 내리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더 위로 올라가는 것은 무리인 듯했다. 고윤이 일어날 시각도 되었으니 그냥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은헌은 이참에 내려가 고윤의 옷이나 한번 볼 참이었다. 날은 점점 무더워질 텐데 아직도 두꺼운 옷을 입고 다니니 정작 더위는 안 탄다 해도 보는 그의 눈이 더웠다.
“대감! 찾았습니다!”
은헌은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 떨어진 사람도 안개에 가려 뿌옇게 윤곽만 보이는 터라 그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가까이 가자, 아까부터 들리던 낑낑대던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은헌은 청지기들이 찾았다 손짓하는 곳을 보았다.
“그게 무엇이냐?”
몸통을 봐선 호랑이 새끼도 아니고, 그간 흔히 본 산짐승은 아니었다. 가까이 내려가 살피던 행랑아범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생긴 것이 묘합니다. 몸통과 발은 개와 닮았는데 주둥이랑 귀가 삵과 비슷합니다.”
게다가 비에 젖고 털에 진흙과 부스러기가 뒤엉겨 엉망이라 자세히 살피기도 어려웠다. 은헌은 제 눈앞에 드러난 짐승을 꼼꼼히 눈으로 훑었다. 행랑아범의 말대로 크기는 어린 개만 한데 주둥이 생긴 것이 어째 다 자라지 않은 살쾡이와 닮았다.
“어찌할까요?”
은헌은 짐승을 한 번 보곤 산 위를 한 번, 산 아래를 한 번 보았다. 그런 뒤에야 결론을 냈다.
“우선 붙들어보게. 빗속을 뚫고 산신 계신 산신당까지 가는 것보단 부인께 보여드리고 꾸중 듣는 것이 나을 듯하거든.”
행랑아범이 웃는 낯을 숨기려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은헌은 픽 웃음을 터뜨리곤 청지기들에게 손짓했다.
힘세고 날랜 이들이 짐승을 둘러싸고 섰다. 낯선 이들에게 둘러싸인 것치곤 꼬리를 팔랑팔랑 흔들며 땅을 두들기는 것으로 봐선 성질이 예민한 놈은 아닌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물리지 않게 주둥이 콱 움켜쥐거라.”
행랑아범이 주의시킨 대로 청지기들이 슬슬 손을 뻗더니 단숨에 짐승을 붙잡아 올렸다. 어디에 상처가 있는 건지 깽깽 짖으며 짐승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발버둥 쳐 달아나려 하진 않았다.
은헌은 그제야 한 걸음 더 다가가 짐승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짐승이었다.
“곰도 아닌 듯하지?”
“예.”
청지기들 또한 산짐승을 많이 보았으나 선뜻 어떤 짐승인지 구분해 내기 어려워했다.
은헌은 짐승의 다리를 붙잡고 발가락을 살핀 뒤 몸통을 보았다. 그의 눈에 바로 보이는 상처는 없었다.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은헌이 말을 붙였다.
“네놈 어디 아픈 데는 보이지 않고, 배가 고픈 것이냐?”
헉헉대던 짐승이 축 늘어졌다.
은헌은 혀를 찼다.
“지금 말을 알아들은 건가?”
“예사 짐승은 아닌 듯합니다.”
행랑아범이 조심스레 답했다. 말하는 것마다 사람 말귀 알아들은 듯 반응하는 것을 보면 심상치 않았다.
은헌은 콧등을 찡그렸다.
“우선 내려가세.”
* * *
고윤은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곤 곧장 다시 눈을 감았다.
자는 사이 누가 그를 작신 밟고 지나가기라도 했는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쓸 수 있는 만큼 써야 하는데 바닥 마른지도 모르고 기운을 벅벅 긁어 써댄 것이 몸에 부담이 된 듯했다. 그 바닥 아래 또 다른 바닥이 있어도 말이다.
신음 뱉어내며 그는 몸을 뒤틀었다.
뻐근한 살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한참을 누워 바닥에 치대다 고윤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웠던 머리맡을 살피자 보를 덮어놓은 소반이 보였다. 천을 걷어내자 자리끼치곤 끈적끈적한 꿀물이 놓여 있었다. 그걸 단숨에 들이켜곤 한숨을 푹 내쉰 뒤 고윤은 목청을 높였다.
“밖에 누구 있는가?”
잠시 기다리자 문밖에서 겸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침하셨습니까.”
“방금 일어났네. 소세하려 하니 물 좀 떠주게.”
금방 준비하겠단 말을 듣곤 고윤은 제 차림새를 살폈다. 옷 벗고 잠든 기억이 없는데도 홀 겹옷인 걸 보면 은헌이 벗겨두고 간 듯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러 잠을 지워내고 그는 밖으로 나섰다.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했더니 오랜만에 내리는 장대비였다.
“대감께선 어디에 계신가?”
고윤은 씻을 물을 가져온 겸종에게 물었다.
“세 식경 3) 전에 잠시 출타하셨다가 돌아오셔선 줄곧 류하당(流河堂)에 계십니다.”
밖에 나갔다 왔단 말에 고윤은 삐뚜름하게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얼굴을 씻고, 의복을 갈아입은 그는 비 오는 마당으로 나섰다. 시중드는 겸종이 재빨리 지우산을 가져와 펼쳤다.
고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보았다. 과거를 보러 갈 때도 펼쳐 본 적 없는 우산이라 퍽 생소했다. 게다가 비를 막는 용도로 우산 쓸 일이 평생 없었으니 더더욱 낯설었다.
“마님?”
저 호칭도 여전히 감당키 어려웠다.
고윤은 한숨을 삼키곤 걷던 걸음을 계속 걸었다. 팥을 팥이라 부르고, 콩을 콩이라 부르듯 그가 부부인 작호를 받았으니 이 댁 머무는 식솔들에게는 마님이었다. 그리 불린다고 고추가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기분이 그리 좋아지진 않았다.
고윤은 우산 아래 비를 피하며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사치스럽다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비 내리는 날에 그림자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는 흐릿한 형체를 눈으로 훑으며 앞으로 걸었다.
남산골에서 이곳 계사정으로 온 뒤로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어디서 소문이 난 건지 보이지 않던 귀신들이 슬금슬금 몰려들기 시작했다. 은헌의 영향인지 아니면 이웃한 산신의 도움인지는 모르나 어설픈 잡귀가 얼씬대는 대신 무슨 원한을 지녔는지 기력이 그나마 생생한 놈들이 말이다.
고윤은 귀신들이 저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언제 죽었는지는 몰라도 어찌 죽었는지는 확실히 알 것 같은 외양의 이들이 손을 뻗쳐 왔다. 그러나 혼백의 손길로는 그를 건들지 못했다.
‘이보시오!’
‘무슨 짓이오! 내가 먼저 왔소!’
‘이놈! 나이도 어린 것이!’
‘죽어서 나이는 왜 찾소? 따지자면 죽은 건 내가 더 일찍 죽은 듯한데!’
죽은 뒤에도 저 잘났다 싸우는 것으로 봐선 며칠 더 무시해도 되겠다 싶은 고윤은 눈길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어서 드세요.”
은헌은 버선발로 나서 고윤을 맞이했다.
고윤은 멋쩍은 얼굴로 어설프게 웃었다. 새벽달 있을 때 들어와 한잠 자고 나서 이렇게 저녁때가 되어서야 마주하니 그가 몹시도 한량처럼 느껴졌다.
“몸은 어떻습니까.”
“그냥저냥 합니다.”
고윤은 은헌의 물음에 담담히 대꾸했다. 은헌의 곁에 붙는 것만으로도 한결 편해지는 것에 쓴웃음이 났다.
“몸을 보할 수 있게 약을 짓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참에 내의원을 오라 할까요?”
은헌은 여전히 창백한 낯의 고윤의 낯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러나 고윤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의원을 부른다 한들 저보단 대감 먼저 진맥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밖에 소문내길 은헌이 병을 앓고 있다고 했는데 그가 의원을 만나면 그도 문제였다. 은헌은 멋쩍게 웃다 이내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어디서 삼이라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뜩이나 날이 더워지는데 이리도 맥을 못 추시니.”
어디 귀신이 덥고 추운 것 가려가며 나온다더냐마는 예상치 않은 일에 고윤이 휩쓸리고 있으니 그의 속이 상했다.
“삼을 먹는 것보다 그저 대감과 이리 앉아 있는 것으로 충분히 기운이 납니다.”
고윤의 말에 은헌이 움찔댔다.
“그런 말을 그리 뻔뻔히도 하십니다.”
고윤은 픽 웃었다.
“사실인데 뭐가 어떻습니까.”
말 그대로였을 뿐이다. 고윤은 메마른 땅에 물을 채우듯 저를 적셔오는 기운을 음미했다. 이래서 다들 그렇게 짝을 찾았느냐며 노래를 불렀나 싶었다. 피곤함이 가시니 마음도 점차 여유로워졌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리 야경꾼 노릇을 하셔야 하는 겁니까?”
은헌은 콧등을 찡그리곤 본래 하려던 이야기를 꺼냈다.
원손에게 원귀들이 해를 끼칠 수 있는 시기가 딱 그랬다. 기일이 정해져 있으니 했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라면 이미 사달 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결국, 해야 하는 일이니 울며 나섰다가 욕을 뱉으며 돌아왔을 것이다.
은헌은 다 끝났단 말에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되면 지금보단 상황이 좀 풀리겠군요. 돌아다니는 것도 수월하겠고.”
“가고 싶으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밖으로 나다니는 것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고 싶단 곳이 있다면 그 바람을 모른 척하지 않겠다는 듯 고윤이 물었다.
은헌이 웃는 낯으로 도리질 쳤다. 고윤은 그런 은헌을 보다 적당한 곳을 떠올렸다.
“그럼 날 잡아 책이라도 사러 갈까요.”
“언제 말입니까?”
책 보러 가자는 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은헌이 반색했다. 고윤은 고개를 기울였다. 산 건너고 물 건너온 이역만리 바깥의 책을 가진 장사꾼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이 몇 없었다.
“송국이 망하기 직전쯤이면 적당하겠지요.”
은헌은 적당한 날이라도 잡으려 물었지만, 고윤은 그들이 가야 할 곳을 택한 듯했다.
은헌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혹시나 하여 묻는 것인데 강남에 가신 적은 없으십니까?”
“그곳까진 아직 갈 일이 없었습니다.”
화국의 강남은 너무 멀어 국경 넘어 다니는 상인도 잘 가지 않는 곳이었다.
고윤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곳의 지도는 구하여 본 적이 있긴 합니다.”
은헌은 사신단이 구해 들여온 지도를 떠올렸다. 국경 너머 세상이 어찌 생겼는지, 먼 땅의 모습은 어찌 생겼고, 어떤 복색으로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지, 그도 전부 책이나 지도에서 본 것이었다.
“저도 지도로만 보았습니다.”
“뭐, 이제 시간은 많으니 한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적당히 둘러가도 갈 수는 있을 겁니다.”
옆 동네 마실 갈 계획이라도 세우는 것처럼 떠드는 고윤의 말투에 은헌은 활짝 웃었다.
“그것참 기대가 큽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실망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지도요.”
“부인께서 열어주신 길 끝에 다다른 곳은 언제나 별천지 같은 곳이었는데요. 실망이 무엇입니까.”
고윤은 제 얼굴 금칠하여 주는 은헌을 보다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석반은 자셨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부인 깨셨단 말에 얼른 상 올리라 해두었습니다.”
“대감께서요?”
은헌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신경 써서 올리라는 말을 하긴 했다. 고깃국물 푹 우려내어 몸보신할 거리 좀 만들라 했으니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은헌은 저녁 들기 전에 제가 주워온 짐승에 대해 말해야지 했던 것을 떠올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계십니까?”
고윤이 머리를 기울였다.
“별것은 아니고, 낮에 산에서 산짐승 한 마리를 주워왔습니다.”
“산짐승을요?”
고윤은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했다. 은헌은 그런 고윤을 보며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산군께서 계시니 치료하여 돌려보낼 참으로 데려왔지요.”
어디가 다쳐 그렇게 울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었다.
고윤은 이제 저와 이웃이 된 커다란 호랑이 산신을 떠올렸다. 문득 인왕산이 예전부터 호환 많기로 소문난 산이라는 것도 함께 생각났다.
“호랑이 새끼를 주워오신 것은 아니시지요?”
그 말에 은헌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저가 아무리 그래도 호랑이 새끼도 못 알아보겠습니까.”
고윤은 멍하니 생각하다 은헌이 산짐승을 주웠다 말한 것을 떠올렸다. 그는 미간을 구겼다.
“그럼 대체 뭘 주우신 겁니까?”
“비를 맞아 몰골이 엉망이었던 터라 저도 정확히 무언지 모릅니다. 진흙 범벅된 것을 씻기라 했으니 이제 알아봐야지요.”
산신의 보호를 받는 것이라면 치료하고 배불리 먹이고 산으로 보내도 된다. 은헌은 창을 열고 겸종에게 짐승을 데려오라 일렀다.
고윤은 잔뜩 부풀어 오른 털 뭉치를 봤다. 붉은 주둥이를 짧은 앞발로 비비적대는 녀석은 확실히 은헌이 못 알아볼 법도 했다. 산짐승만이 아니라 신수에서 요수까지 두루 마주친 고윤도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이었다. 그가 꼼꼼히 눈으로 살피는 동안 짐승은 짧은 꼬리를 열심히 흔들며 다가왔다. 꼬리에서 파닥파닥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고윤은 제게 가까이 달라붙어 냄새를 맡는 것의 몸통을 붙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짐승의 얼굴을 훑었다.
덩치는 아직 어린 개만 한 데 얼굴 생긴 것이 개는 확실히 아니었다.
고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움찔, 한곳에 멈췄다. 그는 짐승의 머리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쭉쭉 찢긴 눈동자 위로 쭉 따라 올라가니 이마 위에 이상한 게 보였다. 사슴은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라니도 아니고, 노루도 아닌 것은 분명한데 눈썹 위로 뼈가 툭 불거진 곳에 불룩하고 튀어나온 것은 분명 사슴뿔의 밑동이었다.
“이게…… 무슨?”
고윤은 은헌에게 뿔을 보았는지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여는 대신 짐승을 내려두고 일어나 벌컥 문을 열었다. 은헌은 날카로워진 얼굴로 고윤의 움직임을 뒤쫓았다.
온몸이 쭈뼛거릴 정도로 음산한 기운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고윤은 바쁘게 시선을 움직여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저녁상을 차리려 준비하던 청지기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놀란 눈을 한 채 조용히 명을 기다렸다.
“마님. 필요한 것이 계십니까?”
행랑아범이 용기를 내 물었다.
고윤은 그제야 죽은 자들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산 자를 보았다.
“잠시 마당 좀 비우게.”
고윤이 입술을 들썩이기도 전에 뒤에서 고개를 내민 은헌이 마당에 늘어선 이들에게 명했다.
“하오나, 대감.”
“일각이면 충분하니 싹 다 물러나게. 얼른!”
청지기들은 은헌의 단호한 말투에 고개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물러섰다. 주인이 없는 그림자가 산 자의 그림자들 틈에 뒤섞여 부지런히 사라지는데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릴 지키고 선 것이 웃었다.
사람의 형은 남아 있으나, 결코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 귀밑까지 찢긴 입을 벌렸다. 혓바닥도 없이 새카만 입안만 보였다. 입과 같은 위치에 있는 눈동자가 희번덕댔다.
‘네놈!’
은헌은 소리 지르는 것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머리통이 반으로 갈라졌는데 대체 말은 어찌 하는 겁니까. 귀신이 되면 그런 재주도 생기는 것입니까?”
그는 보고 있는 것에 대한 짧은 감상을 뱉었다. 고윤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건 그저 한때 살아 있었다는 흔적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당연하단 듯 짜내어 쓰는 기운인 것이다. 그 탓에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빨리 고갈되어 이렇게 쉽게 변한다.
고윤에게 원한을 해결해 달라 청하러 왔던 귀신 중 멀쩡한 이들은 달아나고, 저것의 음기에 홀린 것들은 멋도 모르고 다가서다 순식간에 잡아 먹혔다. 혼백이 아니라 이제는 온전히 다른 것이 된 그것이 삐걱대는 움직임으로 반으로 갈라진 머리통을 손으로 붙잡아 콰드득 반대로 돌렸다. 몸통은 뒤를 보고 있는데 머리통은 앞으로 돌아 고윤과 은헌이 있는 곳을 향했다.
‘네 이놈! 이놈!’
아까부터 호통만 치는 것에 고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것이 입고 있는 복색을 살폈다.
언제 죽은 자인지는 몰라도 지금과는 옷 입는 것이 너무 달랐다. 살아 권세는 넘치도록 누렸는지 화려한 치장에 못 하나 박이지 않은 흰 손이 눈에 들어왔다.
‘이 무지렁이 같은 것이!’
고윤은 헛웃음을 뱉었다.
“십 년을 넘기는 권세도 없다건만 족히 수백 년 전의 권세로 호령이라.”
게다가 수백 년 전의 원한을 그에게 어쩌라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눈에 보였을 때 저승길까지 빨리 등 떠밀어 보낼 것을 그랬다.
고윤은 한숨을 내쉬곤 제 기운을 일으켰다. 은헌의 곁에 앉아 잠시 채운 한 줌도 되지 않는 힘이었으나 이것이면 충분히 보낼 수 있었다.
“곧 정리하겠습니다.”
살아서 무엇이었든, 죽어 무엇이 되든 그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나, 객으로 온 이가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들면 잠자코 들어주려고 해도 울컥 성질머리가 솟구치는 법이었다.
컹컹!
고윤은 제 옆에서 짖는 짐승을 보았다. 범을 앞에 둔 하룻강아지처럼 짖어대던 녀석이 몸을 낮췄다.
“가만히 있거라. 다친다.”
은헌이 짐승을 붙들려 했으나 무언가 이상했다. 그의 시선에 당혹함이 뒤섞였다.
크르릉!
낮은 목울음을 토해낸 짐승이 순식간에 귀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고윤은 귀신에게 휘두르려 했던 힘을 다시 거뒀다. 함께 터뜨렸다간 저승길 동무로 멀쩡하게 살아 있는 짐승을 보낼 수도 있었다.
‘이 방자한 것이!’
저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짐승의 모습에 더 화가 치솟은 건지 귀신이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금방이라도 맞아 나뒹굴 것 같은 짐승의 모습에 은헌도 고윤도 버선발로 마루에서 내려서려 했다.
컹!
털이 ‘펑’ 하고 터진 것도 아닌데 돼지 오줌보에 바람 불어넣듯 개만 했던 짐승이 순식간에 소처럼 덩치를 키워 날카로운 이빨로 귀신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이놈!’
짐승은 여전히 입만 시끄러운 것의 머리를 이빨로 누르고는 다시 벌려 몸통의 반을 입에 욱여넣곤 우적우적 씹었다. 이내 허공에서 아등바등 발버둥 치던 귀신의 두 다리마저 흉흉한 붉은 주둥이 안으로 사라졌다. 살점 붙은 고기 뼈를 씹는 것처럼 불룩 솟아오른 짐승의 입안에서 으그적, 으그적 소리가 요란했다.
귀신을 순식간에 삼킨 짐승이 머리를 들자 은헌은 반사적으로 고윤의 앞을 막아섰다.
“저걸 어디서 주우셨다고요?”
고윤은 등 뒤에서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뒷산에서 주웠습니다.”
은헌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앞을 주시했다. 고윤은 고개를 비죽 내밀어 다시 짐승을 보았다. 소만 한 덩치로 불어 있었고, 털은 굽이진 것이 꼭 양털 같았다. 그리고 어깻죽지 위로 새의 날개처럼 보이는 비늘이 덕지덕지 붙은 것이 파닥거렸다. 발굽은 소의 것이었고, 아까 보았던 뿔 밑동만 남아 있던 곳에 사슴뿔을 하나만 단 것과 같은 외뿔이 멋들어지게 자라 있었다.
“어쩐지 저잣거리 이야기에 흔히 나오는 불로장생에 좋은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뿔을 고아 먹으면 천 년을 산다거나 하는 전설의 짐승 같은 것 말입니다.”
은헌의 말에 고윤이 코웃음 쳤다.
“뿔을 잘라내기 전에 뼈째로 삼켜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듯합니다만.”
둘이서 빈정대는 동안 짐승은 다시 본래의 덩치로 돌아가듯 줄어들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짧아진 꼬리를 팔랑팔랑 흔들어대며 녀석은 제가 잘했는지 확인하듯 은헌을 보며 깡깡댔다.
* * *
“녹번 고개로 넘어가는 길목이었지요.”
은헌은 낮에 다녀왔던 길을 일러주었다. 흙탕물이 일어 산에서 내려오는 탓에 사람 여럿이 다닐 수 있는 큰길을 골랐다. 고윤은 고개를 들어 운무가 낀 산을 보았다. 한 치 앞을 살피기 어려울 만치 짙어진 산 구름을 보아하니 지금 걸어 올라가 직접 확인하는 것은 어려울 듯했다.
“한 놈뿐이었습니까?”
“예. 이놈 하나였습니다.”
은헌은 마른 천으로 흙이 묻은 짐승의 발을 닦았다. 아까부터 안아달라는 듯 짖으며 꼬리를 흔들던 짐승은 은헌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기 무섭게 고윤에게 달려갔다. 고윤은 제게 뛰어와 코를 들이밀며 킁킁대곤 열심히 꼬리를 흔들다가, 그 꼬리가 신경 쓰인 건지 꼬리를 붙들려 뱅글뱅글 도는 녀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윤의 시선을 알아챈 듯 짐승이 발라당 누워 배를 까뒤집었다.
은헌은 그 모습을 보며 기가 찬 듯 웃었다.
“배를 긁어주면 좋아할 것입니다.”
고윤은 미심쩍은 얼굴을 하곤 손을 뻗었다.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는 손가락을 세워 짐승의 배를 조심스레 긁었다. 만족스러운 목 울림이 그렁그렁 흘러나왔다.
은헌은 흥미롭다는 듯 중얼댔다.
“개는 아닌데 하는 짓이 개 같군요. 역시 그 이마에 달린 것이 말로만 듣던 개뿔…….”
“대감께선 가끔 개뿔 같은 소릴 하십니다.”
핀잔을 던진 고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긁어줘야 합니까?”
“글쎄요. 저도 개는 길러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은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개는 물론이고, 주변에 살아 있는 것을 둔 적이 드문 편이었다. 특히나 약해서 쉽게 죽는 여린 것들은 말이다. 은헌의 말에 고윤은 눈을 찌푸렸다.
한참이나 긁어주자 짐승의 눈이 서서히 감기다니 이내 사지가 편하게 늘어졌다.
“잠든 겁니까?”
고윤은 은헌에게 소곤소곤 물어 확인했다. 은헌도 작은 목소리로 그렇다 답했다. 고윤은 그제야 손을 거둬들였다.
짐승은 팔자 늘어지듯 발을 쭉 뻗은 채 곤히 잠들었다. 그 모습이 퍽 신기하기도 하고, 아직 어린 짐승의 모습에서 풍기는 귀여운 맛이 있는지라 은헌은 배시시 웃으며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덩치를 키워 원한에 물든 원귀를 와그작대며 씹어먹던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순해 보였다.
“그나저나…….”
은헌은 짐승이 잠든 곳이 제 방임을 알아채곤 곤란한 듯 혀를 찼다.
“예서 재워야 하는 겁니까?”
고윤 또한 짐승이 잠든 자리를 보았다. 그러곤 방 복판에 퍼진 짐승을 슬쩍 옆으로 밀었다.
드르릉―! 푸!
머리가 움직였을 뿐인데 새근새근하던 숨소리가 이내 우렁찬 코골이로 바뀌었다.
은헌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금일은 잠자리가 사납겠습니다.”
잠귀가 밝은 그로서는 봉변이 따로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리 곤히 잠든 것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빈방이 없는 것도 아니니 금일은 다른 곳에서 침수 들어야 할 모양이었다.
고윤은 태평하게 코골이까지 하며 오르락내리락하는 배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면 건너와 주무시지요.”
은헌이 고개를 갸웃댔다.
“호등재(呼燈齋)서 말입니까?”
“어차피 여기서는 석반도 들지 못할 듯하니, 이참에 건너가시지요.”
고윤은 고갯짓으로 제 처소인 작은 사랑채를 가리켰다.
“그럴까요?”
은헌은 고윤의 제안에 거부 없이 승낙했다. 적어도 고윤은 코를 골지 않았고, 뒤척거림 없이 조용히 잠드는 편이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형국이었으나, 박힌 돌은 빠진 대로 또 굴러 제 갈 길을 찾았다.
고윤은 은헌이 머무는 큰 사랑채인 류하당(流河堂)에 귀신이 얼른거리지 않도록 결계를 쳤다. 짐승이 밖으로 달아나지 않도록 막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습니까?”
은헌은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 고윤이 하는 것에 염려를 담아 물었다.
“뭐, 별일은 없을 겁니다. 만일을 대비해 두는 거라서요.”
고윤은 손가락으로 턱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별일 있다고 해도 이리 해두면 사람이 상하지는 않겠지요.”
은헌은 아련한 눈으로 제 방을 돌아보았다.
“대신 어렵게 구해온 연적이 상하겠지요.”
결계를 풀었다가 다시 치기가 귀찮은 터라 고윤은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일이 터지면 그건 그때 가서 꺼내는 것이…….”
“청금석이 섞인 것입니다.”
“……그것 말고 또 없습니까?”
대수롭지 않게 앞서 나가려던 몸을 돌려 고윤은 다시 방문 앞에 섰다.
깨질 만한 것을 죄다 정리한 뒤에야 은헌은 홀가분한 걸음으로 협문으로 이어지는 호등재에 들었다. 호등재는 본래 안채였던 곳을 사랑채로 고치며 가로막고 있던 담의 부분을 허물어 협문을 세우고 또 다른 담 하나를 더 세워 대문까지 드나들 수 있도록 길을 하나 더 튼 곳이었다. 물론, 고윤의 뜻에 따라 산 자가 다니는 문과 죽은 자가 다니는 길을 구분해 둔 것뿐이라 이 집에 거하는 이들 중 그 길을 쓰는 이는 없었다.
은헌은 자신이 건너온 협문 말고 따로 난 문에서 이어지는 길을 보았다. 아까의 소란 탓인지 평소보다 망자가 줄어든 듯했다.
“저들은 계속 저리 기다리는 것입니까?”
은헌은 고윤과 걸음을 맞추어 몸을 숙여 귀엣말했다. 고윤은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머릴 끄덕였다.
“무슨 원이 그리 깊어서요?”
“그저 살아생전 못다 한 것을 이루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죽은 자들의 사연이란 게 생각보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죽어보니, 생전에 하지 못했던 것이 원으로 남아 이승에 발목 붙잡힌 것이다. 보통은 무얼 먹어보고 싶었다. 어딜 가보고 싶었다. 제 식솔에게, 저는 괜찮으니 울지 마라 전해달라 하는 사소한 청이었다.
“그런 것이면 들어줘도…….”
은헌이 듣기에도 사소한 청탁이라 이렇게 마냥 기다리게 하며 줄 세워놓는 이유를 몰라 입을 뗐다. 그 말에 고윤은 담담히 앞을 보았다.
“애초에 죽은 이가 산 자를 통해 무언가 이루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욕심 때문에 가야 할 때를 놓친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일은 또 시간이 가면 점점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럼 원하였던 것마저 잊고 떠나는 이가 있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원하는 것만 기억하는 이가 남게 되지요. 그들 중에 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가끔 들여다보는 겁니다.”
쌓인 것이 썩어들지 않도록 말이다. 게다가 끼어들 일과 끼어들면 곤란한 일이 있었다.
“정 귀찮으면 강제로 보내는 때도 있으니 너무 관심 두지 마십시오.”
은헌은 고갤 끄덕였다.
뻔히 보이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그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나저나 모처럼 같이 잠자리에 드는데, 뭘 하면 좋을까요?”
고윤은 귀찮다는 얼굴로 신을 벗었다.
“꼭 무얼 해야 합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은헌은 배시시 웃었다.
“제 키가 지금의 반 토막 정도 되었을 때는 그런 궁리만 하였거든요. 부인이 생기면 밤마다 같이 놀아달라 청해야지. 부인께선 무얼 좋아하실까, 뭐 그런 것 말입니다.”
“저는 조용히 서책을 읽다가 잠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읽고 알게 된 것에 대해 논하다 잠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요.”
조용히는 집어치워 버리고 은헌이 방긋 웃으며 고윤과 시선을 마주쳤다. 고윤은 콧김을 흥하니 뿜어내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뭐가 그리 물어보고 싶으신 겁니까?”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주로 문답이었다. 그것도 은헌이 묻고, 고윤이 답하는 형태였다.
“이번엔 부인께서 제게 물어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뭐…….”
딱히 알고 싶은 게 없었다. 뒷말을 삼키고 고윤은 방문을 열었다.
“어찌 제게 이리 무심하십니까.”
은헌은 곧장 입을 비죽거렸다.
고윤이 가볍게 코웃음 쳤다.
“그야 살다 보면 차차 다 알게 될 터고, 때론 너무 잘 알아 다투기도 할 텐데. 서둘러 무얼 하겠습니까. 저는 대감께서 잠결에 이불을 꼭 껴안고 잠드시는 것도 알고, 날이 더워도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주무시지마는 발은 이불 밖으로 빼꼼히 내어놓는 것도 아는데요.”
은헌이 뒤따라 방에 들어서다 멈칫했다.
“그건 또 언제 보셨습니까.”
“대감께서 오수 주무실 때 너무 더워하실까 들여다봅니다. 가끔씩이지만.”
그래도 같이 사는데 마냥 집 앞에 세워둔 장승 취급하는 건 아니었다. 고윤의 말에 은헌이 조용히 웃었다.
“부인께서 제게 그리 시선을 두고 계시는지 몰랐습니다.”
“……이만 석반 들이라 하겠습니다. 이보게!”
고윤은 대답하는 대신 창을 열고 행랑아범을 불렀다. 은헌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런저런 허튼소릴 실없이 늘어놓으며 석반을 든 뒤 둘 다 조용히 책을 읽었다. 고윤이 남산골에서 가져온 장서 중엔 세상 나돌아다닐 만한 것이 못 되는 희귀한 책이 잔뜩이었다. 분서갱유 전에나 쓰였을 것 같은 오랜 책 냄새가 묻어나는 것도 있었다. 읽을 수는 없어도 말이다.
한참 글을 읽어내리던 은헌이 고개를 들곤 고윤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등잔 불빛에 고윤의 얼굴에 그림자가 일렁였다.
“왜 그리 보십니까.”
고윤은 서책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은헌은 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입소문 나면 서재부터 털릴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요.”
“남의 손 타지 않게 단단히 방비는 해두었습니다.”
이중삼중으로 덫을 쳐 뒀다며 고윤은 당당히 말해줬다. 그런 뒤에야 그는 고개를 들어 등잔의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닳은 정도로 봐선 벌써 해시에 가까울 시간이었다.
고윤은 그제야 은헌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고 갈 요량으로 건너온 터라 도포도 벗고 편한 차림새로 앉아 있는 은헌을 보며 그는 헛기침했다. 은헌은 다시 책으로 향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시각이 야심하니 이만 침수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수를 길게 주무신 터인데 잠이 오십니까?”
고윤은 콧등을 찡그렸다. 은헌의 말대로 밤낮 뒤바뀌어 한동안 돌아다닌 탓에 아직 잠들 시각이 아니었던 터라 졸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자야지요. 일찍 산에 오르려면요.”
“산에 말입니까?”
은헌은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짐승이 잠든 큰사랑채 쪽을 보았다.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를 것을 계속 집에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다 해서 못 둘 이유가 되진 않지만…….”
“두어도 되면 계속 두시려고요?”
고윤의 물음에 은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 틈에 끼어 있기에 위험한 것은 아니면 좋겠군요.”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고윤은 두말하지 않고 처리할 터였다. 그건 은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로운 것을 오래 두어봐야 정들면 손에 절로 힘만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마음의 무게만큼이나 베어내는 검이 무거워지는 법이었다.
“그런 쪽의 요수는 아닐 겁니다.”
“부인께서도 정확한 것은 모르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은헌의 말에 고윤은 담담히 대꾸했다.
“정확히 모를 뿐, 아까 보아하니 파마(破魔)의 기운이 느껴져서요.”
원귀가 된 것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제압한 것은 거칠긴 했으나 나쁜 쪽의 기운은 아니었다. 애초에 사특한 기운을 풍겼다면 지금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지도 않았을 터다.
“그럼…….”
“다른 쪽으로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겁니다.”
설사 신령한 힘을 지닌 것이라곤 해도 집에 두기엔 벅찼다.
고윤은 거기까지만 말하곤 서궤를 정리했다. 그러곤 벽장을 열어 보료를 깔았다. 평소엔 겸종이 들어 잠자리를 봐주지만, 오늘은 그가 직접 움직였다. 계사정에 들기 전엔 매일 했던 일이니 새삼스레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제 것도 가지고 오라 할 것을 그랬습니다.”
“뭣 하러요.”
은헌의 방에 있는 이불도, 고윤의 방에 있는 것도 궐에서 직접 수를 놓아 보낸 것이었고 두 사람이 누워 자기에도 넉넉한 크기였다.
“그 좁은 남산골 집에서도 잘 주무셨으면서 이제 와 내외하십니까.”
고윤의 말에 은헌이 눈웃음을 흘렸다.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은헌이 몸을 옆으로 굴려 모로 누웠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기만 한 콧대가 눈에 들어왔다.
“부인.”
“예.”
아직 잠들지 않은 고윤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내일 따라나서도 되겠습니까?”
고윤은 그대로 잘 것처럼 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산신께요?”
“예. 삼칠일도 끝나가니 치성이라도 드릴까 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집에서 흔히들 하는 일이었다. 고윤은 바로 누웠던 몸을 틀어 은헌 쪽으로 돌아누웠다. 팔에 머리를 괴자 그를 보고 있는 은헌과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술이 좋을 겁니다.”
“술이요?”
고윤은 불편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왕산 터 잡은 산신이 비단전만큼이나 드나드는 곳이 술 잘 빚기로 소문난 내외술집 5)이라서요.”
은헌은 알았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그도 잠시 그는 짓궂게 웃으며 고윤을 보았다.
“한데 그것을 왜 남 이야기하듯 하십니까.”
“그거야…….”
불 끄고 누웠다고 금세 잠귀신이 들러붙기라도 한 건지 웅얼대던 고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남의 일이지 않으냐고 말하려니 이 집 살림이 누구에게 넘어와 있는지 그제야 떠오른 탓이었다. 은헌은 집 안 곳간 열쇠는 죄다 끌어모아 그에게 쥐여주었으니 산신에게 줄 잘 빚은 술을 준비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좋은 것으로 챙겨보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은헌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