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장대 같은 그 속을 궁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비집고 다녔다. 젖은 꽃잎처럼, 어디론가 휩쓸려 가는 치맛자락을 따라 바삐 전해야 할 소식도 쫓아갔다.
은헌은 요란한 빗소리에 열어두었던 창을 닫았다. 그러곤 고개를 돌렸다. 고윤이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하던 것을 멈췄다.
무슨 일인지 물어오는 눈동자에 은헌은 조용히 손을 뻗어 다과상 위에 소담하게 놓인 우병을 들어 내밀었다. 밤 고물 묻힌 토란을 받아 입안에 굴리며 고윤은 다시 붓을 움직였다.
“다 써가십니까?”
은헌은 고윤이 부지런히 써 내려가는 것을 보며 물었다. 고윤은 여전히 바삐 손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 되었긴 한데, 어째서 저가 여기서 축문을 쓰고 있어야 하는지 여태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은헌이 코웃음 쳤다.
“그 연유를 알려면 어째서 부인과 저가 이곳에 있는지부터 따져 물어야지 않겠습니까.”
고윤은 답을 내놓는 대신 귀찮다는 얼굴로 다시 종이에 시선을 내렸다.
“그나저나 정말로 저희가 산실청에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고윤은 투덜거리면서도 염려했다. 은헌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저하께서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게 그들의 처지와 비교할 바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듯 한곳으로 돌아갔다. 채신없다 소릴 들어도 물러나지 않고 발을 드리운 방문 앞에 붙어 대청 건너편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세자가 그곳에 있었다.
세자의 명으로 궐에 들었더니 해산을 위해 산실청으로 옮겨온 세자빈의 곁을 지키는 신세가 된 은헌과 고윤은 동시에 한숨을 짧게 뱉어냈다.
고윤은 축문에 들어가야 할 몇 자리를 비워두고 마지막 문장까지 매듭지었다. 그는 허리를 반듯하게 펴곤, 은헌이 내어주는 주전부리를 몇 개 더 받아먹었다. 앞으로 할 몇 가지 일에 기운 소모가 크니 잘 먹어두어야 했다.
고윤은 조금 전까지 은헌이 내다보던 창을 열고 밖을 살폈다.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처마 끝에서 떨어져 내리는 빗물이 주르륵 이어져 내리는 것이 장막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맑은 날에 그러듯 한참이나 하늘을 살폈다. 두껍게 깔린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의 눈에는 선명하게 별이 보이는 것처럼 굴었다.
고윤은 한참이나 그리 살피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시간이 된 듯합니다.”
그가 움직이자 은헌도 세자도 덩달아 일어섰다.
방 안이 부산스러워지자 대청에서 기다리던 각 전각의 상궁들 또한 분주해졌다.
고윤은 세자에게 지금까지 쓴 축문을 내밀었다. 세자는 고윤을 한 번 보곤 손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지난밤부터 진통이 있었거늘 인제야?”
“아무래도 비가 충분치 않았던 터라…….”
수기(水氣)가 충분치 않으면 용이 나지 않는다.
고윤은 긴 설명 대신 짧게 말하고는 힘겹게 버티고 있을 세자빈이 있을 곳을 한 번 보곤 대청으로 나섰다.
“시작하겠습니다.”
세자의 허락을 구한 뒤 고윤은 산실청을 꼼꼼히 눈으로 훑었다. 태어날 아기씨를 위해 몇 달에 걸쳐 정성 들여 준비한 장소지만 몇 가지 더 준비가 필요했다. 고윤은 담담히 긴 소매를 휘날리며 허공에 팔을 내치듯 뻗었다. 소맷부리를 따라 바람이 일었다.
그는 우선 태아에게 치명적일 태살(胎殺)부터 날렸다. 특정한 날이나 어떤 장소에 때가 맞으면 맞게 된다는, 임부에게도 복중 태아에게도 위험한 기운을 치운다고 치웠으나 지금 이곳에 들어오려 하는 나쁜 기운은 시작부터가 달랐다.
고윤은 그가 선 곳을 중심으로 하여 큰바람으로 쓸어냈다.
축축한 비 냄새마저 지워내듯 산뜻해진 바람 속에서 그는 한 걸음 나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헤아리듯 바라보았다. 조금 전처럼 구역질 날 정도로 음울한 기운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고윤은 다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옵니다.”
은헌 역시 하늘을 보았다. 딱히 그의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다만, 그의 등줄기가 서늘할 정도로 거센 기운이 느껴졌다.
“소식을 전하여도 되겠군.”
세자는 침착해진 얼굴로 크게 숨을 삼켰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비전과 중궁전을 비롯해 각 전각에 소식을 전할 나인들이 앞을 다퉈 신을 신고 빗속으로 나섰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대전의 상궁뿐이었다. 느긋하게 다음을 기다리는 대전 상궁을 뒤로하고 고윤은 입술을 움직였다.
만약을 대비해 그는 사방에 제힘으로 결계를 쳤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힘의 양이 거대해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의 동작을 따라 무언가가 바뀌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으나 살에 닿는 바람의 움직임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세자는 몸을 돌려 대군을 보았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으냐.”
은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퍽 익숙해진 터라. 그보단 여태 조용히 있는 곳이 더 신경 쓰이기도 하고요.”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찰떡같이 알아들은 세자 역시 쓴웃음을 머금었다. 둘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차마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든 부정적인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게 하라는 고윤의 충고 때문이었다.
말실수라도 할까, 은헌은 재빨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쨌거나 드디어 다시 보는군요.”
순간적으로 꺼낸 말이 새삼스럽다는 듯 그는 세월을 헤아렸다. 세자빈의 회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떠올리자니 더욱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순탄히 이룰 수도 있는 것을 어렵게도 돌아 이뤄낸 일이었다.
은헌은 이젠 흔적조차 남지 않은 이마의 흉터를 문질렀다.
“엉덩이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는데.”
그날을 떠올리자 잊고 살았던 분노가 다시금 샘솟았다.
“내가 호되게 혼내주마.”
세자가 어설피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은헌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고 저하의 속 시커멓게 썩이거든 꼭 그리하십시오.”
“그래.”
세자는 실없이 웃다가도 금방 초조해진 얼굴로 세자빈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은헌 또한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준비를 마친 고윤은 위에서 쏟아지듯 강하게 찍어 누르는 거대한 기운이 무사히 가야 할 곳에 도달하도록 길을 열었다.
“조금만 더!”
오랜 산통의 끝에 마침내 아이가 나오는 것인지 의녀와 산파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드높아졌다. 힘을 더 내시라, 이제 다 되었다 외치는 소리가 연신 이어졌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모든 소리가 지워지고 아이의 우렁찬 울음이 들렸다.
“경하드립니다.”
은헌은 담담히 말을 전했다. 세자는 주먹을 꽉 쥐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바로 고윤이 건네준 축문을 들어 올렸다.
“을해년 사월 스무닷새에 천지 사방에 삼가 고하옵니다.”
이 땅에 새로 태어난 아이를 부디 어여삐 받아달라는 세자의 청에 고윤의 힘이 실렸다. 대궐의 터를 지키는 이들과 도성의 사방을 잇고 있는 산신과 하늘의 천신에게 이르기까지 축문이 널리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