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一。
까만 몸에 붉은색 꽁지깃을 지닌 새를 따라 은헌은 말을 내달렸다. 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우레처럼 울렸다.
기이한 울음을 토해내며 새가 방향을 틀었다.
“놓쳐선 안 된다!”
그 말에 모두가 새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길을 잘 아는 이가 앞에서 어디로 빠져야 새를 따라갈 수 있는지 일러주자 일사불란하게 모두가 움직였다.
은헌은 냉한 얼굴로 앞을 살폈다. 새는 그들을 이끌며 유유히 날아갔다. 새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하늘 위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주위를 살펴라!”
낮의 숲은 어둡지 않고 주변이 잘 보였다. 밤나무가 많이 우거진 숲을 지나고 낮은 모래톱이 나오자 은헌은 배를 띄울 만한 곳을 집중적으로 수색하라 일렀다.
“찾았습니다.”
보고가 올라오기 무섭게 은헌은 품을 뒤졌다.
“발견하시거든 이것을 부러뜨려 주십시오.”
고윤은 그리 말하며 복숭아 나뭇가지에 끈을 매어 내밀었다. 은헌은 부탁대로 가지를 뚝 하고 부러뜨렸다. 가지에서 단내가 풍겨 올랐다. 꿀처럼 끈적거릴 것 같은 짙은 냄새였다.
끼아아악―!
새가 울음을 토해냈다.
은헌은 말에서 내린 뒤 검을 빼 들었다.
일전에 검계를 뒤쫓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발소리를 죽이고 강가에 허름하게 서 있는 판자를 덧댄 오두막을 보았다.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예측하기 어려우니 다들 긴장한 얼굴로 수신호를 주고받았다.
포위가 끝났음을 알리자 은헌은 팔을 들어 올리고 들어가라는 듯 손을 앞으로 그어 내렸다.
쾅!
발길질 한 방에 썩은 나무판자가 우지끈 소릴 내며 떨어져 나갔다.
은헌은 뒤에 서서 문 안쪽을 살폈다.
“살, 살려주십시오!”
끌려 나온 이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안쪽을 수색하던 이가 밖으로 나와 은헌에게 보고했다.
“안에 다른 이는 없었습니다.”
은헌은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새는 여전히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오두막에 있는 자가 고윤이 말한 백면의 본신을 지닌 자란 소리였다. 은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자를 앉혀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중년의 사내를 붙잡아 하인들이 고개를 들게 했다.
“헤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리.”
간사한 웃음을 흘리는 사내의 말에 은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망량에게 갈 수 있는 골패의 위치를 알고 있던 그 장사치였다. 염소 뿔을 각의 것이라며 속여 팔던 이 말이다. 그러지 않아도 윤 의원의 일로 물어볼 것이 있어 찾았으나 순식간에 종적을 감춰 여태 꼬리도 밟지 못했던 터였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그 패가 또 필요하신 것도 아닐 테고.”
눈치를 살피며 장사치가 물었다.
일이 틀어진 것인가 싶어 은헌은 영문 모를 얼굴로 사기꾼을 살펴보았다.
“주위에서 수상쩍은 이를 보지 못했느냐?”
옆에 서 있던 호위가 윽박질렀다. 장사치는 은헌을 보며 비굴한 모습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 보지 못했겠지.”
은헌은 저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고윤이 태연하게 나무 그늘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고윤을 보자 장사치의 낯이 굳었다. 고윤은 그런 장사치를 보며 입을 뗐다. 전에 서소문 바깥의 시전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풍기는 기운이 천지 차이로 달랐다. 그때는 그저 궁상맞은 인간이었건만, 지금은 그 안에 숨겨진 망량의 요기가 고스란히 보였다.
“놈! 인간을 잡아먹고 거죽을 뒤집어쓰면 못 찾을 줄 알았더냐.”
비굴하게 굽신거리던 장사치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바닥을 타고 달려드는 맹수 같은 움직임에 은헌은 빠르게 고윤의 앞을 가로막았다. 쇠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인간의 것이 아닌 손톱이 칼을 긁어내며 튕겨 나갔다.
은헌은 휘리릭 공중제비를 돌며 앞에 내려앉은 것을 보았다. 고윤은 저벅저벅 걸어 나와 은헌의 곁에 섰다.
조금 전까지도 사람의 이목구비였던 것이 지금은 익숙한 사자탈과 똑같이 민둥한 얼굴로 바뀌었다. 입이 귀까지 찢긴 것이 기괴스러웠다.
고윤은 혀를 찼다. 그는 손에 들고 온 호리병을 들어 올렸다. 안에서 찰랑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장사치의 입이 찢어지듯 벌어졌다.
“망량이 씐 것인가?”
눈뜨곤 못 봐줄 꼴에 은헌은 작은 소리로 소곤댔다.
“말 그대로 잡아먹힌 것입니다.”
고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호리병을 막고 있던 마개를 뺐다. 놀라 달아나려는 장사치의 몸이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고윤은 망량을 붙들고 있는 원념들을 보았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원념들의 손이 망량을 붙들어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중엔 사기꾼과 똑 닮은 얼굴을 한 것도 있었다.
고윤은 손에 든 것을 흩뿌렸다.
살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망량의 번들거리는 눈이 보였다.
짙은 살기에 은헌은 고윤을 재빨리 붙잡아 뒤로 물리곤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육신을 지닌 것이니 저가 상대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망량은 덤벼드는 대신 도망을 택했다.
풀썩 넘어지는 거죽이 모두의 눈앞에서 쓰러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도 살아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 딱딱하게 굳은 바위처럼 쿵 하고 넘어갔다.
고윤은 은헌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어쩌지?”
은헌은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난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쩌긴요. 찾아내면 됩니다. 본신을요.”
사람 흉내를 내며 달아날 방법을 버렸으니 망량은 애초의 것으로 되돌아갔을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원념이 덕지덕지 붙은 물건이었다.
“제 짐작이 맞다 하면 셈노름 놓은 것이 적힌 장부일 텐데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설주마다 위장하는 것이 다 달라서요.”
고윤의 설명에 모두가 텅 빈 오두막을 보았다. 장사치의 짐이 있는 곳이었다.
“근방에 있을 겁니다.”
그게 뭐든 찾으면 된다. 명을 받은 이들이 지푸라기 사이에서 바늘을 찾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고윤은 새벽에 이를 갈며 준비해 온 닭 피를, 가지고 온 물건에 하나하나 떨어뜨려 가며 확인했다. 장사치가 가지고 있는 잡다하기 그지없는 조악한 물건부터 비롯하여 글자가 있는 어지간한 것은 다 보았으나 허탕이었다.
“바깥쪽도 뒤져 볼까요?”
“그리해 주겠습니까?”
고윤은 저의 기감에 읽히지 않은 본신을 쫓으며 대답했다.
“분명 근방에 있는 것인데.”
은헌은 여태 나오지 않은 망량의 본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리하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의 시선이 죽은 장사치를 향했다.
“대감?”
은헌은 거침없이 죽은 자의 몸을 헤집었다. 품과 소매를 죄다 뒤지고 심지어는 시신에서 바지를 벗겨내고 냄새나는 버선까지 벗겨냈다.
“이건 어떤가?”
고윤은 죽은 이의 발목에 부목처럼 두껍게 감긴 손바닥보다 더 굵은 대님을 보았다. 은헌은 대님을 풀어냈다. 고윤은 그것을 받아 손으로 더듬다가 손끝에 걸리는 것을 뜯어냈다. 대님 안쪽에서 기름 먹인 투전 패가 바닥에 쏟아졌다. 그의 입에서 헛숨이 새어 나왔다.
“그도 아닌가?”
“아니요. 가장 의심 가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이요.”
“무엇이 적혀 있기에 그런 얼굴이야?”
고윤은 투전 패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게 바로 장부입니다. 놀음하다 빚을 진 이들에게 사전(私錢)을 발행하고 무엇을 담보 잡았는지 기록한 것이요.”
그리고 빌려간 이들의 이름 위로 죄다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고윤은 망설이지 않고 투전 패를 죄다 끄집어내어 닭 피를 그 위에 부었다. 피가 방울져 떨어지기 무섭게 이 세상 것이 아닌 기괴한 비명이 울렸다. 그 사이 고윤은 재빨리 장부에 적힌 이름을 불러 쪼개진 혼백의 조각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해야 망량에게 아직 묶인 이들을 마저 풀어줄 수 있었다.
마지막 이름까지 부르고 난 후에야 고윤은 맺힌 피 위에 손가락을 올려 천천히 꾹꾹 눌러 문장을 적어 봉인했다. 그것을 따라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키에에에엑!
발악하듯 요기가 터져 나왔다.
고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봉인에 박차를 가했다. 귀성이 울리자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픈지 근방에 있는 이들이 죄다 괴로움을 호소하며 비틀거려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닭 피가 기름 아래로 배어들어 지워지지 않도록 한 뒤에야 망량은 잠잠해졌다.
더는 이상한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은헌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고윤은 핏물 배어든 손바닥으로 망량의 본신인 투전을 꽉 움켜쥐었다.
“끝났습니다.”
그의 입에서 다 되었던 말이 흘러나오니 그제야 모두가 긴장이 풀린 얼굴로 서로를 살폈다.
길고 긴 낮이 끝났다.
* * *
-하여 신원을 찾아내지 못한 두 구의 시신을 제외한 백 명의 신원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고, 식솔에게 돌려보내어 장사를 치르게 하였습니다. 이 중 셋은 식솔을 두지 않아 관에서 관련된 일을 처리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사정을 가려 살피었으니 미흡하게 실행된 부분은 추후 시간을 두고 찬찬히 지켜보기로 하였음에 이것으로 객월(客月)에 도성을 흉흉하게 하였던 분전노(分錢奴) 10)에 관해 보고를 마칩니다.
고윤은 붓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유생 시절 상소문을 올릴 때도 이리 쓴 적은 없건만.”
이전에야 왕이 읽든 말든 알게 뭐냐 싶어 속에 든 말을 거침없이 휘갈겨 일필휘지로 써 내렸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이래서 아는 이와 인척이 되면 귀찮아지는 법이었다.
먹이 마르기도 전에 번지지 않도록 말려낸 뒤 고윤은 조심스레 종이를 접었다. 그러곤 일어나 그대로 당상 대청을 가로질렀다.
그는 한성부 수장이 있는 곳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백한 낯의 판윤이 그를 보았다.
“다 된 것인가?”
“방금 끝낸 참입니다.”
고윤은 제 보고를 올렸다. 판윤은 그것을 펼쳐 확인했다. 주상께서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 직접 가져오라 한 것이었다. 잘못된 것은 없는지 빠진 부분은 없는지, 불미스러운 표현이나 쓰임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수 번 확인하고서야 판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공복을 입고 선 고윤을 보았다.
“이것으로 자네의 일도 마무리군.”
마무리라는 말에 고윤은 조금은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떠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리하라고 자네를 붙든 것이니까.”
음침한 재주에, 소문은 흉흉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체 어떻게 일을 해결하는지도 모르지만, 고윤은 어떻게든 일을 해결했다.
판윤의 말에 고윤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일을 다 끝냈다는 말을 전하자마자 그의 후임이 결정된 이유가 짐작이 갔다.
“자네 손아래 누이가 은헌 대감과 혼례를 치른다 했나?”
“……그렇습니다.”
“영상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군.”
그저 꽃분홍색 가득한 생각이었을 거다. 이게 결국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단 말을 하셨던 것을 보면 말이다.
고윤은 그리 말하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날카로운 눈이 그를 훑고 지나갔다.
“누이의 혼사로 자네가 왜 관직에서 물러나야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군. 자네 형제는 그대로 있다 들었는데.”
고윤은 관직에 남아 있는 형들을 떠올렸다. 혼사를 치르는 당사자가 아니니 당연히 그만둘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고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가 끝까지 마음에 차는 사근사근함을 보여주지 않자 판윤은 혀를 찼다.
“됐으니 가보게나. 고생하였네.”
축객령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난처한 질문에서 벗어난 고윤은 즐겁게 물러났다.
밖으로 나온 고윤은 퇴청할 준비를 마쳤다.
그는 신을 신고 저를 배웅하는 이들에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까닥이곤 관청을 나섰다. 정말로 끝나서 그런지 매일 퇴청하던 때와는 또 다른 가벼움이 느껴지는 발걸음이었다.
* * *
고윤은 곱게 접은 장옷을 들고 산에 올랐다.
순식간에 주위의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의 걸음으로 올라서는 절대로 다다를 수 없는 산의 정상에 다다랐다.
“계십니까.”
그는 계절에 맞지 않은 붉고 푸른 꽃이 가득 핀 정원에 세워진 집 대문 앞에 섰다. 고윤의 부름에 대문이 조용히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사당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하얀 털을 지닌 집채만 한 호랑이가 앞발을 날름날름 핥아내며 그를 반겼다.
고윤은 산신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잘 계셨습니까?”
호랑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보내고 있지. 그나저나 고윤 선생이야말로 잘 있었나?”
“뭐, 저도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그 말에 호랑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망량에게 등쳐 먹혔단 소문이 파다하던데?”
고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런 소문이야, 바람 도깨비가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지.”
산신은 그리 말하며 소리 내 웃었다.
“고윤 선생네 반푼이 용에게 내 나름대로 육임(六壬)도 슬쩍 알려 주었는데 그래도 노름판에서 사기당했다니.” 11)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은헌이 처음 해 본다는 노름에 그리 재주를 보이더라니, 그게 다 산신이 노름 수를 일러준 덕분이었나 싶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대감께 호의를 베푸신 겁니까?”
“그자가 때가 되면 내게 축문을 올리고 제를 지내주거든. 그때마다 보답으로 그런 운을 틔워주지. 그래도 같은 산에 둥지를 틀었는데 이웃끼리 야박하게 굴 수는 없지.”
은헌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산에다 투전을 파묻고 제를 올리는 다른 노름꾼처럼 노름판 휩쓸겠다고 한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호랑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고윤 선생에게도 운을 틔워줄까?”
고윤은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제가 노름판에 또 뛰어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젠 그런 일에 나서기도 힘들어졌는데요.”
“하긴 시집가면 당분간 힘들 테지.”
시집이란 소리에 고윤의 미간에 주름이 섰다. 그러고 보니 입 가볍기로 소문난 바람 도깨비에게 그의 소문을 흘린 것도 인왕산 산신이었다.
그는 따져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어차피 곧 거처를 옮겨야 할 텐데 산신에게 미움받았다가는 이사하는 데 문제가 생길 터다.
고윤은 대꾸하는 대신 장옷을 내밀었다.
“빌려주신 덕에 잘 썼습니다.”
호랑이는 커다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돌려준다고?”
그 말에 고윤은 되레 의문을 품었다.
“돌려주기로 한 날이 아닙니까.”
호랑이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허공에서 재주를 넘어 다시 땅으로 내려섰다. 이전에 보았던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의 모습이었다. 고윤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팔에 걸친 장옷을 내밀었다. 얼른 가져가라는 몸짓이었다.
호랑이는 장옷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걸 혼례에 쓸 줄 알고 빌려준 것인데?”
고윤은 잠시 머뭇댔다. 이내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친영에는 참석하지 않습니다.”
친영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모든 절차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할 일은 혼례가 다 치러진 뒤 은헌과 함께 종묘에 든 다음 삼전에 문후를 드리러 가는 게 다였다.
호랑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는 자네가 혼례 올릴 줄 알고 가려 했지.”
고윤은 친영례에 빠지게 된 것을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산신이라고 해도 호랑이는 호랑이였다. 게다가 지금도 치맛자락 아래로 꼬리가 삐져나와 있는데 그날이라고 제대로 변신이나 할지 의문이었다.
“혼례를 축하하여 여러 가지 준비하였는데.”
“그 마음만으로 충분합니다.”
고윤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호랑이가 콧김을 흥 내뿜었다.
“됐네. 그나저나 고윤 선생 댁 용이 섭섭해하겠군.”
“섭섭할 일이 무어가 있겠습니까?”
고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는 모르지만, 그 용이 내게 제를 올리며 고윤 선생이 이곳에 올 테니 오는 길 험하지 않게 잘 보살펴 달라 했거든. 산신인 내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앞쪽의 길에서도 제를 올리고, 고윤 선생의 본가, 남산골 모옥의 터주신에게도 제를 올렸다지?”
호랑이는 눈을 찡그린 채 꿍얼거렸다.
“그리 정성을 쏟아부어도 처음부터 보답받지 못할 마음인데. 괜한 고생만 했군.”
호랑이가 혀를 찼다. 호랑이는 이내 고윤의 팔에 걸린 장옷을 걷어갔다.
고윤의 시선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천을 따라갔다.
볼일을 끝낸 고윤은 산신의 거처에서 성큼 걸어 산에서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어 배웅했다.
* * *
목각 기러기를 든 아범을 앞세우고 은헌은 청색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차려진 상 건너편을 보았다. 비어 있는 그 자리에 오늘 혼례를 올릴 신부가 설 터였다. 그가 직접 영상의 집까지 가서 데려온 가짜가 말이다.
실체가 없는 이라 해도 남들 다 와서 보는 자리라 이 자리에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처자가 고윤을 대신하여 설 것이다.
사내와 사내의 혼사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알고, 모르는 이는 모르도록 부왕의 뜻에 맞춰 결정된 일이었다.
은헌은 새신랑답지 않게 냉한 기운을 풀풀 풍기며 섰다. 어차피 누가 오든 구색만 맞추면 되는 것이고 허례허식에 지나지 않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환호성처럼 들리기도 했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은헌은 지루한 듯 하품을 흘렸다.
가까이 오는 가짜 신부를 따라 예쁘다 곱다 하는 칭찬이 연이어 들렸다. 한숨과 짜증을 삼키고 은헌은 눈을 굴렸다. 언뜻 보이는 시야에 화려한 활옷을 갖춰 입은 이가 보였다.
‘어마마마께옵서 작정하시었구나.’
돈을 바닥에 내던져도 저 옷보다 아깝지는 않을 듯했다.
은헌은 신부가 부축을 받아 제자리에 설 때까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고윤이 어디에 있을지 궁리하느라 바빴다. 명색이 누이의 혼사니 이곳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진짜를 두고 가짜와 맞절을 할 생각을 하니 그것도 퍽 우스웠다.
은헌은 신부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아채고 그제야 시선을 움직여 정면을 보았다. 그의 눈이 일순간 휘둥그레 커졌다. 놀라서 소리치려던 그는 입술을 깨물어 가까스로 참았다.
뚱한 얼굴을 한 고윤이 건너편에 서 있었다. 전에 보았던, 산신이 빌려주었다는 장옷을 머리부터 뒤집어쓴 채였다. 여느 때처럼 평범한 도포 차림도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꾸민 모습이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던 은헌의 얼굴에 해사한 웃음과 함께 온기가 퍼져 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 쓸모없는 낭비처럼 느껴지던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닌 채 다가왔다.
고윤은 활짝 웃는 은헌을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혼사를 치르긴 하나 직접 나서지 않을 거라 몇 번이고 이야기했음에도 결국 여기였다. 스스로가 무슨 결심을 한 건지 어떤 변덕을 부린 것인지 그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전장에 나서 적군을 앞에 둔 듯 서늘하던 얼굴이 저를 보고 헤실헤실 풀어진 것만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윤은 결국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