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
바쁘게 걷는 내관을 뒤따라 은헌도 고윤도 한 마디 말없이 앞만 보며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은헌의 표정이 굳었다.
“여기는 대비전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입궐을 명한 이는 주상과 세자인데 방향이 이상했다. 그가 의문을 표하는 동안 고윤은 멀리 느껴지는 요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은헌이 돌아봤다. 은헌은 고윤의 시선이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집중하여 그 방향을 보았다.
“먹구름?”
“……사기(邪氣)입니다.”
보면 뭘 하나, 낫 놓고 기역 자 모른다고 본다고 끝이 아닌데 말이다. 고윤은 혀를 차며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은헌도 마찬가지였다. 길이라면 둘 다 알고 있기에 이내 걷던 것을 멈추고 내달렸다.
대비전이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귀기에 고윤은 밭은 숨을 쉬며 마른기침을 뱉었다. 거칠고 살벌한 기운 탓에 살이 아릴 지경이었다.
은헌은 먼저 성큼 걸어 들어가 대비전의 앞에 섰다. 궐을 지키고 있던 금군 대장이 그를 알아보고 배례했다.
“대감!”
“인사는 되었네. 안에 아바마마 계시는가?”
“그렇사옵니다. 속히 서둘러 가시옵소서.”
금군 대장은 문을 열라 외쳤다.
은헌은 바짝 굳은 얼굴로 문턱을 넘어섰다. 그의 귀에 무언가 가벼운 것이 부서져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대비전이었다. 감히 누가 주상의 모후가 있는 곳에서 난동을 부릴까, 그를 생각하니 이 소동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단숨에 알아낼 수 있었다.
“전하! 은헌 대군 대감과 한성부 정 참군 들었사옵니다!”
사가에서부터 여기까지 정신없이 안내해 온 이 내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많은 이들이 뒤돌아보았다.
“은헌!”
세자가 소리쳤다.
은헌은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마침내 가장 앞쪽까지 도착한 그가 입을 벌렸다.
“저게 다 무엇이랍니까.”
부왕께, 모후께 인사를 올리는 것도 잊고서 그가 물었다.
“소신, 전하의 명 받잡고 왔사옵니다. 늦어 송구합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고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은헌은 여전히 멍하니 있었을 터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은헌은 그제야 부왕을 보았다.
“신, 전하를 뵈옵니다.”
왕은 그 말에 눈살을 찡그렸다가 이내 혀를 차곤 손을 저었다.
“외출이 길더구나.”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어 그리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언제나 그랬듯 왕에게, 사죄의 말과 뜻한 바는 아니었다는 약간의 변명을 은헌은 건넸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앞을 살폈다.
대비전의 마당에는 아는 얼굴이 가득 모여 있었다. 부왕과 모후, 세자가 있었고 내관과 궁녀들이 잔뜩 있었다. 한데 딱하나 보이지 않는 이가 있었다.
“할마마마는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궁금하여 묻는 것이 아니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차라리 아니라고 대답 듣기 원하는 물음에 세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은헌은 다시 대비전을 보았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고윤을 알게 된 뒤로 남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사건을 많이 겪었기에 어지간한 일에는 간이 꽤 커졌다 자부하였는데 이것은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허공에 물건이 바람에 휩쓸려 뱅글뱅글 빠르게 날아다니고, 바람이 세차게 느껴질 때마다 전각의 지붕이며, 마루, 바닥을 가리지 않고 칼로 베어낸 듯 주변이 서걱서걱 썰려 나갔다. 그것만이 아니라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울음이 들렸다. 그 울음이 커질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물러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은헌은 고개를 돌렸다. 고윤이 그의 곁에 서 있었다.
“할 수 있겠는가?”
“뭐…….”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않고 고윤은 어물쩍대며 은헌을 올려다보았다. 은헌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왕을 향해 몸을 돌렸다.
“송구하오나 위험할 듯하니 물러나셔야 합니다.”
왕은 은헌과 고윤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가 재빨리 대전 내관에게 왕을 모시어라 이르고는 중궁전의 상궁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뒤로 뫼시어라 명했다.
“얼마나 물러나야 하는가?”
세자는 고윤에게 직접 물었다.
“뒤로 다섯 걸음 정도면 족하옵니다.”
고윤은 바람이 이는 거리를 보며 대답했다. 그러곤 주위에 지나치게 많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딱히 남의 시선에 크게 구애받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발소리를 내자 고윤은 제 곁을 지키고 서 있는 은헌을 보았다.
“왜?”
시선이 마주치자 은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윤은 눈을 찡그린 채 입을 뗐다.
“대감께서는 물러나지 않으십니까?”
“……나도 말인가?”
되레 이상하단 듯 반문해 오는 은헌을 보며, 고윤은 한숨을 내쉬곤 됐다는 듯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다칠 일은 없을 거라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러나 그는 곧 벌어진 일에 집중했다.
대비전 안에서 여러 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고윤은 은헌에게 주의를 시키곤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으나 상관치 않았다. 그는 앞으로 걸어 들어가며 팔을 들어 올렸다.
매서운 살기였다. 날카롭게 칼날처럼 쇄도해 들어오는 기운을 그는 소매를 휘둘러 내쳤다. 물이 가득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는 거침없이 들어가 살(煞)을 날리는 것을 보았다.
“역시.”
짐작한 바가 맞았다.
그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작게 웅크린 인영에 혀를 찼다. 망량의 것과 똑같은 요기가 느껴지더라니, 전에 궐에서 지낼 때 소동을 일으켰던 그 작은 생각시 귀신이었다. 그때는 그가 직접 본 것이 아니었고 남은 흔적과 기운을 읽었을 뿐이라 이리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오지 마!’
생각시가 귀를 꽉 틀어막고 외쳤다.
어린 목소리는 귀기를 담고, 살을 풀어 주위에 날아오는 가까운 것을 베어냈다. 고윤은 제게로 날아드는 것을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멈춰라.”
그가 가진 힘이 풀려났다.
파삭!
바닥 돌이 부서지긴 했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생각시 귀신의 울음이 멈췄다. 놀란 탓에 ‘거부’하는 것마저 풀린 탓인지 허공을 날고 있던 것이 아래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고윤은 동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어린 모습이었다. 그리고 작은 몸 여기저기 난 생채기도 보였다.
고윤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동귀를 둘러싼 기이할 정도로 짙은 살액(煞厄)은 여전히 주변의 것과 함께 아이를 상처 내고 있었다. 혼백에 상처가 날 때마다 동귀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다. 고윤은 짧게 혀를 찼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생각시 귀신은 웅크렸던 몸을 다급히 일으켰다.
“도망치지 말고 오십시오.”
저승길을 찾지 못하여 헤매봐야 업만 쌓을 뿐이다. 깨끗할수록 더러워지는 게 눈에 더 잘 들어오는 법이라 우습게도 본래 죄 없는 것들일수록 죽은 뒤 사고를 치면 더 강한 원한이 생겨나곤 했다.
‘싫어! 무서워! 저리 가! 청목이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마!’
고윤은 팔을 뻗다가 움찔했다. 그의 주의가 흐트러지자 사방을 짓누르던 기운 역시 마찬가지로 흔들렸다.
달아날 틈만 노리고 있던 생각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이답게 잽싼 움직임으로 생각시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동귀에게 닿기 직전이던 팔을 거두며 고윤은 미간을 구겼다. 그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은헌 역시 무언가를 궁리하는 듯한 복잡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할 말은 많았으나 장소가 좋지 않았다.
생각시 귀신이 사라지기 무섭게 허공에 떠있던 것들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바람도 가라앉았다.
“해결한 것이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왕이 물었다. 고윤은 일단 돌아서서 고개를 숙였다.
“미봉책에 불과하오나 우선 일의 원인이 된 것이 달아났사옵니다.”
왕은 그것만으로 기꺼운 듯 대비전으로 서둘러 발을 옮겼다.
“어마마마!”
대비를 부르며 서두르는 왕의 뒤를 울부짖는 대전의 내관과 궁녀들이 따랐다. 고윤은 일단락된 현장을 마무리하고 물러났다. 물어볼 것이 많았다.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고윤은 세자를 보며 물었다.
“사흘 전 해 질 녘부터라네.”
세자는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사흘 전, 고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대비전을 살폈다.
“낮에도 말입니까?”
양기가 강한 여름날은 아니지만, 해가 점점 길어지고 있으니 낮에는 이와 같은 기운이 일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궐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대전, 중궁전, 동궁전, 대비전은 궐내 관리들이 가장 신경 써서 관리하는 곳이니 이렇게 계속 놔뒀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아니고 백 상궁…… 자네가 처음부터 설명하는 것이 빠르겠군.”
세자는 대답하려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상궁을 불렀다. 고윤은 대비전 상궁이 나서자 고개를 꾸벅거렸다.
“낮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느냐 물으시는 것이라면 아닙니다. 처음에 소란이 일어났을 때는 인시에서 묘시로 넘어갈 무렵이었사옵니다.”
새벽이 다가오자 일찌감치 잠이 깬 상궁들은 하루를 준비하기 위해 서둘렀다.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잊힌다더니 대비의 기상 시간이 일어 대비전의 일과도 다른 전각보다 빠르게 시작되었다. 아침이 늦은 시기니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다들 서둘렀다.
당시 숙번을 맡았던 백 상궁은 처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처음에는 생각시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여 돌려보낼 참으로 꾸짖으며 말을 붙였는데.”
돌아보는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귀신 소동의 시작이었다.
상궁들은 불길한 일에 서둘러 대비가 기침하기를 기다렸다. 안 그래도 일어날 무렵이었기에 대비는 새벽부터 무슨 소란이 벌어진 것인지 확인했다. 백 상궁은 조금 전 벌어진 일을 고하고, 대비에게 전각을 옮기거나 법사를 불러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청했다. 하나 그를 막은 것은 대비였다.
궐에 모처럼 기쁜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는데 불미스러운 소동을 키우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장 양기가 충만한 시간에 대비는 채비하여 방을 나섰다. 그러자 귀곡성과 함께 물건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는 했으나, 안에서 나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특히 대비마마께옵서 나오고자 하시면…….”
물건은 더 거세게 날아다녔다.
해가 저물고 음기가 짙어지면 더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뒤 대비는 상궁들에게 입단속시켰던 것을 무르고 중전에게 큰일이 난 것을 알렸다.
그때 고윤은 은헌과 함께 도성 밖에 있었으니 중전은 그를 찾지 못해 대전과 동궁에 일을 알리고 대대적으로 두 사람을 찾으라 명이 떨어진 것이다.
사정을 들은 고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몇 가지 더 묻고자 했으나 뒤쪽의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연이은 소란에 잠을 이루지 못해 창백한 낯으로 대비가 왕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어마마마!”
중전이 달려갔다.
“할마마마!”
세자와 은헌 역시 마찬가지로 가까이 다가가 대비가 무사한지 안부를 살폈다. 고윤은 조용히 대비를 보았다.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곤란하게 되었군.”
자세한 앞뒤 사정은 몰라도 궐에서 벌어진 소란이 그가 백면을 처리하며 생긴 것과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했다.
* * *
고윤은 제 위를 덮은 장포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 몰라 눈을 깜박이다가 건너편에 저와 비슷한 몰골로 꾸벅꾸벅 고개를 연신 떨어뜨리고 있는 은헌에게 시선이 닿았다. 고윤은 흘러내리는 포를 붙잡고는 여전히 잠기운이 묻어나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었다.
익숙한 곳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그가 머물며 교육을 받았던 희정당이었다.
작게 신음을 흘리며 고윤은 몸을 움직였다. 그 소리에 깬 것인지 은헌이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고윤이 혀를 차자, 은헌은 제 곁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곤 배시시 웃으며 구겨진 몸을 바로 폈다.
“기침하셨습니까?”
“자네는? 피곤이 좀 가셨는가?”
고윤은 인정사정없이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이틀을 꼬박 지새우고, 사흘 동안 신경을 곤두세웠다가 돌아오자마자 궐에 불려왔으니 그동안 눈도 제대로 못 붙인 밤이 여섯 밤은 될 겁니다. 그게 고작 이것으로 풀리겠습니까?”
망량에게 사흘이나 잠을 빼앗긴 것이 몹시도 분하다는 듯 터져 나오는 불평에 은헌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책상머리에 앉아 종일 움직이지 않는 게 더 익숙한 이니 그럴 법도 했다. 안 그래도 햇빛을 제대로 보지 못해 하얗게 핀 얼굴에 이제는 눈 밑에 시커멓게 그늘까지 졌다.
잠만 못 잤으면 모를까, 망량을 상대하고 돌아와 대비전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혹시나 하여 방비까지 했으니 비실비실 힘을 쓰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긴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어도 벅찰 것 같군.”
“아무것도 하지 않다니…… 꿈같은 소리군요.”
넌더리가 난다는 표현이 어울릴 몸 상태에 고윤은 끙끙대며 일어났다. 잠만 겨우 잤지 그동안 끼닛거리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어지럼증이 밀려들었다.
은헌이 비틀거리는 그를 붙잡았다.
“자넨 더 쉬는 게 좋을 듯허네.”
“아닙니다. 그냥 오랜만에 햇볕을 쬐었더니 핑 돌긴 합니다만 별것 아닐 겁니다.”
“그게 어찌 별것 아닌가?”
은헌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나무라면서 고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일단 쉬게.”
그는 몸을 숙여 고윤의 맥을 확인했다. 그 뒤 열이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은헌은 방 밖으로 나섰다.
고윤은 소세할 것이니 물을 가져오고 요깃거리도 가져오라 이르는 목소리에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대군의 힘을 바닥까지 빼내어 쓴 것 같은데도 어째 그의 상태가 더 안 좋은 듯했다.
씻고, 배부르게 먹고, 다시 자라는 말에 한숨 눈 붙이고 나서야 고윤은 제정신을 되찾았다. 몸 상태가 그나마 나아졌다. 감각이 제대로 다 돌아온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숨을 고르고 난 뒤 고윤은 밖에 있을 나인을 불렀다.
잠든 사이 옷이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기침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다시 보는 최 나인이 들어와 인사했다. 고윤은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을 의복과 물을 들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날이 밝긴 했는데 아침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한껏 늘어져 게으름을 부린 것 같아 부끄러워 고윤은 작은 목소리로 청했다.
“잠시 계십시오. 그나저나 나리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세자 저하께서 동궁으로 오라 기별하셨습니다. 가겠다 전언을 넣을까요?”
고윤은 최 나인의 말에 움찔했다.
“그런 부름이 있었으면 일찍 깨워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최 나인이 웃었다.
“잠에서 혼자 깨기 전까지는 쉬시게 두라 대군 대감께서 당부하고 가셨습니다. 저하께도 대감께서 직접 가서 나중에 부르라 하셨다 들었고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고윤은 한숨을 지워냈다.
“의관을 갖춘 뒤 곧 들겠다 전하여주시겠습니까.”
윗사람을 뵙는 일이니 허락이 떨어져야 갈 수 있었다. 세자가 종일 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지금쯤 어디선가 강학을 받거나 대전에 들어 있을 시각이었다. 고윤의 말에 나인은 알았다며 물러났다.
준비해 준 공복을 입어 의관을 갖춘 뒤 고윤은 동궁으로 갔다. 은헌이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했으나 일단 세자부터 만나야 했다.
잠시 쉬었다고 멈췄던 머리가 슬슬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동궁에 도착하자 고윤은 익숙한 흑혜를 발견했다.
“대군 대감께서 같이 들어 계십니까?”
동궁전 내관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낮게 헛기침을 하여 목을 가다듬은 뒤 고윤은 저가 왔음을 고해달라 청했다. 내관이 안에 들어 알리자 들어오라는 부름이 떨어졌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비슷한 얼굴을 한 형제가 앉아 저를 돌아봤다.
“소신,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지나치게 예를 차리는군. 편히 앉게.”
예가 과하다며 세자가 손을 내저었으나 고윤은 차라리 예를 차려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나았다. 그러지 않으면 예전에 은헌에게 그랬듯 험한 말을 할지도 몰랐다.
“안색이 그나마 나아졌군.”
은헌은 고윤이 앉자마자 안색부터 살폈다. 그 모습을 보며 세자가 웃었다.
“확실히 새벽보단 낯이 나아졌네. 그래, 푹 쉬었는가?”
“……면구합니다.”
바람 불면 휘청거리는 약골도 아닌데 이렇게 과하게 걱정하여 주니 부끄러웠다. 고윤은 적당히 하라는 듯 은헌을 향해 눈을 흘겼다. 시선이 마주치자 은헌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한데 부르신 연유가…….”
세자는 길게 신음 소릴 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가 그 동귀의 정체를 알아냈는가 하여 말일세.”
고윤은 미간을 좁혔다.
“정체라 하시면.”
세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에게 맡길 일은 아닌 듯하지만, 자네가 죽은 이의 혼백과 대화를 할 수 있단 것이 떠올라 말이지.”
사실이었다. 고윤은 은헌에게 시선을 던졌다. 지금 세자가 묻는 것에 대한 답은 대군 역시 알고 있었다.
“자네가 확실하다 한 것이 없어 함구하였네.”
은헌의 말에 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들은 바가 있었더냐?”
“예. 저하께 송구하오나, 고윤과 제가 이미 추측한 바가 있긴 합니다. 상세한 내용은 고윤에게 듣는 것이 나을 것이고요.”
세자의 시선이 돌아오자 고윤은 시선을 슬쩍 떨어뜨렸다.
“어디 말해보게. 처음부터 상세하게. 숨기는 것은 없어야 할 것이네.”
그 말에 고윤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문을 열었다.
“지난달 안암동에서 이상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고윤은 읊었다. 간략하게만 말하여도 일이 많았기에 한참이나 떠들어야 했다.
세자는 차분하게 듣다, 경 상궁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여, 소신은 그리 추측하는 것입니다.”
고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세자를 보았다.
“저하께 송구합니다만, 저가 대비마마를 뵐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제가 직접 대비마마를 뵈어야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답을 구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의 청에 세자가 곤란한 듯 낯을 굳혔다.
“그게 말일세.”
“할마마마께서 앓으신 터라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옵서 자리도 비우지 않고 같이 병시중을 들고 계시다네.”
은헌은 차마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당당한 얼굴로 전해줬다.
* * *
큰 연회가 아닌 이상 왕실의 일원이 이렇게 모이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고윤은 천천히 절을 올렸다. 대비가 힘없이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미처 정신이 없어 자네가 온 줄도 몰랐군. 수고하였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고윤은 담담히 대답했다. 가진 힘이니 써야 할 때 쓰고 있었다.
“그렇구먼.”
대비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온화한 낯으로 웃었다.
“세자에게 듣자 하니, 자네가 날 보자 청했다고?”
웃전의 일을 캐내어 살피고자 하는 일이었다. 그게 필요한 일이라 해도 병환을 앓는 이를 찾아온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외람되었습니다.”
고윤은 고개를 숙였다.
“아닐세, 아니야.”
대비는 손을 내저었다.
“자네가 긴히 만나고자 한 일이 대비전에 며칠간 벌어졌던 소란 때문이라 들었다네.”
왕과 중전의 표정이 어둑해졌다.
고윤이 은헌과 함께 자취를 감췄던 그 사흘이 어찌나 길었는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몸이 불편한 와중에도 대비가 만나고자 하는 청을 받아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일을 조용히 해결할 수 있는 이가 고윤뿐이었고, 새벽녘에 동귀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쫓아낸 상태였기 때문에 말이다.
고윤은 중전에게 허락을 구하듯 시선을 던졌다. 중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대비마마를 뵙기 전 중전마마를 뵈옵고, 궐내 동귀가 모습을 드러냈던 곳을 모두 살피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중전의 말로는 대비전 이전에도 곳곳에 소란이 있었다 하였네.”
대비는 얼른 말을 해 보라는 듯 고윤에게 손짓했다. 고윤은 크게 숨을 고르고는 궐내에서 가장 먼저 동귀가 모습을 보였던 전각을 입에 담았다.
“동귀가 가장 처음 나타난 곳은 어린 생각시들이 궐에 처음 들어 훈육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다음은 경인당의 뒤뜰이었고, 희운당 그리고 대비전의 순으로 이어집니다.”
대비는 고윤의 입에서 나온 전각들의 위치를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그곳은…….”
“대비마마께옵서 처음 궐에 들어오셨을 때 머무르셨던 곳과 어린 시절을 보낸 곳 그리고 승은 상궁이 되신 뒤 머무르게 되신 거처와 현재 머물고 계신 곳이지요. 대비전 제조상궁에게 확인하니 대비마마께옵서 최근 희운당과 희정당에 방문하신 적이 있다 들었습니다.”
“그랬네.”
고윤은 그 행적을 따라 움직이면서 마침내 결론을 냈다.
“정확한 것은 아니오나 동귀는 대비마마를 뵙기 위해 각각의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마께서 희정당에 들렀던 날, 모습을 보았고 대비전까지 따라붙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것은 그 동귀가 어마마마께 무슨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것이라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왕이 의문을 표했다.
고윤은 은헌에게 시선을 던졌다. 은헌이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눈짓했다. 고윤은 머릴 끄덕였다.
“소신이 지닌 재주가 별난 것이라 혼백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소란을 일으켰던 동귀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는, 청목이란 이름을 지닌 이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저더러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요.”
대비가 눈을 감았다.
“청목이라, 오랜만에 듣는 자호로군. 이제는 그리 불러줄 이가 남지 않아 잊힌 것을.”
“소신도 대군 대감께 그리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혼란하여 대비마마를 뵙고자 청을 올린 것입니다.”
대비는 몇 번 눈을 깜박이고는 시선을 고윤에게 던졌다.
“정 참군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언가?”
“대비마마께옵서는 생각시부터 시작하여 오래도록 궐에 계셨지요?”
“그렇네.”
“하면 전에 마마를 모시었던 경 상궁 마마님은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고윤의 입에서 나온 ‘경 상궁’이란 말에 대비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경 상궁은 갑자기 왜?”
고윤은 여전히 대비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비는 잠시 고민하다 그리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경 상궁은, 그이는 생각시 시절부터 같은 방을 쓰던 동무였다네. 어린 시절부터 정이 많아 당시 궐이 무서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던 내 손을 꽉 붙잡고 다니며 이리 다니면 무서운 일 하나 없을 거라며 다독여 주던 상냥한 이였지. 한데 정 참군이 어찌 경 상궁을 아는가?”
고윤이 대답하기 전에 짧게 숨을 골랐다.
“소신은 한성부의 일을 맡아보는 고로 도성 내에서 벌어진 여러 일에 관여하고 있사옵니다. 얼마 전, 외롭게 죽은 노파의 시신이 발견되어 신원을 찾다가, 그이가 경 상궁 마마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군 대감의 도움으로 대비전에서 마마를 모시던 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은헌과 말을 맞춘 대로 고윤은 최대한 사실을 가리어 덮어 알렸다. 백면의 일을 제외하고서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어마마마!”
대비의 몸이 흔들렸다.
중전이 재빠르게 대비를 부축했다. 충격을 받은 듯 대비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어의! 어의는 어디에 있느냐?!”
왕이 밖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고윤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움직인 뒤 손을 들어 올려 흔들었다. 그러자 거칠어지던 대비의 호흡이 점차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깊은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짙고 청아한 향이 고윤으로부터 퍼져 나갔다.
대비는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은 뒤 중전의 팔을 움켜쥐어 의지한 채 고윤을 보았다.
“경 상궁이…….”
“소손이 수습하여 장례를 후하게 치르라 명했나이다.”
은헌은 최대한 담담히 고해 올렸다.
대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래, 잘하였다. 그이가 떠났구먼. 어째 요즘 들어 그 나무가 그리도 보고 싶더라니.”
“희운당의 뒤뜰에 있는 나무를 말씀하심이지요?”
희운당까지 산책 간 이유가 나무를 보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대비전 상궁에게 이미 들었다.
“그래. 그 나무를 생각시 시절 나와 경 상궁이 심어두었다네. 그때는 전각이 아니라 빈터였거든. 둘 다 궐에서 평생을 살 터니 혹 누군가 일이 생기면 나뭇가지 끝에 푸른 끈을 매어두자고, 그러면 어디에 있건 보러 가겠노라 약조를 나눴었다네.”
대비는 아주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털어놓았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던 대비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경 상궁인가?”
고윤이 고개를 숙였다.
“소신이 알아본 바, 경 상궁 마마님은 매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고, 죽기 얼마 전까지는 일고여덟 살 때의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아프면 아플수록 기억을 잃어 최근의 것은 하나도 알지 못하고 가장 어렸던 시절, 생각시로 처음 들어와 대비의 손을 붙잡고 도닥이던 그 시절밖에 기억 못 한 채 경 상궁은 망량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그때 찢긴 혼백의 조각 중 일부가 생각시의 모습을 하고 궐에 나타난 것이다. 자신을 해친 망량으로부터 벗을 지키려고 말이다.
* * *
“마마님께서 가장 즐겨 찾으시던 것입니다.”
임 상궁이 보자기로 덮어씌운 것을 내밀었다. 고윤은 그것을 감사히 받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어스름이 밀려들고, 밤이 오면 경 상궁은 생각시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터였다.
“해가 지는군.”
궐에서 밤을 보내는 것도 오랜만이라며 은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대비전 앞에 있었다. 텅 빈 전각을 지키며 말이다.
고윤은 제게 어린 생각시 시절의 기억밖에 없는 경 상궁을 달랠 주전부리를 쥐여주고 떠난 임 상궁의 기척을 살폈다.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그는 다시 단단히 경계를 쳤다. 이번엔 도망치지 못하도록 반드시 붙잡아야 했다.
“미간 좀 펴게.”
잔뜩 찡그린 이마를 은헌이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주름이 잔뜩일세.”
“졸려 그렇습니다.”
피곤한 와중에 힘까지 쓰고 있으니 인상 쓰지 않고서야 눈을 뜨고 있는 것도 어려웠다.
고윤의 말에 은헌이 픽 웃었다.
“이러다 병날까 두렵군.”
“며칠 쉬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질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바쁘지는 않을 거다. 고윤은 그렇게 위안 삼아 중얼거렸다.
“그랬으면 좋을 테지만, 여태껏 내 혼례 전에 부부인 될 이가 앓아누웠다가 죄다 내 집 문턱을 넘지도 못하고 먼 길 떠났단 말이지.”
“그것참…….”
할 말이 없었다.
고윤은 문득 혼롓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렸다. 이제 채 보름이 남지 않았다.
“뭘 했는지도 모르는데 하염없이 세월만 가는군요.”
그의 부루퉁한 말에 은헌이 키득댔다.
“무엇을 하긴. 자네는 바쁘게 공무를 보았지 않은가. 검계도 소탕하였고, 도성 바닥 떠도는 귀신 여럿의 원한도 풀어주었지. 다른 이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은 더 많이 했고 말이야.”
고윤은 앓는 소릴 냈다.
“해놓은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이번 사건에 관해 보고를 쓸 때 고생하겠군요.”
은헌은 세자에게 사건의 경위를 일러주었고, 세자는 그것을 정리하여 왕에게 자초지종을 고해 올렸다.
대비의 벗이 죽어 찾아왔다는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는 길고 길었다. 게다가 최근 도성을 어지럽히는 투전꾼과 검계까지 연루되어 있어 심기가 꽤 불편하던 차에, 매병으로 기억을 잃은 병자의 등을 처먹은 의관에까지 이르자 왕의 분노는 격렬했다.
덕분에 고윤은 제 손으로 직접 사건에 관해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를 작성하여 올려야 했다. 괴로움으로 가득한 고윤의 얼굴을 보며 은헌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사내대장부가 그것으로 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말이나 못 하면 밉지도 않을 텐데, 고윤은 눈을 흘기고는 고개를 돌렸다. 투정해 봐야 대군에게 그의 일을 시킬 수도 없었다.
잠깐 사이에 어둠이 발아래까지 밀려들어 있었다.
고윤이 입을 다물자 은헌 역시 침묵을 지켰다. 사방 이 리 이내로는 그들밖에 없었기에 순식간에 무거운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그 사이를 비집고 어디선가 작고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은헌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트인 시야에 고윤이 주술을 걸어주어 그의 눈으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허허.”
그는 허탈함에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었군. 자네의 짐작이 맞았어.”
은헌은 나이 든 이후의 모습밖에 보지 못했으나 경 상궁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앳되고 둥글둥글하고 어린 저 얼굴의 눈매와 입매가 똑같았다. 부왕께 꾸중 듣고 눈물을 훌쩍이고 있으면 단것을 가져와서 달래주었던 그 웃음을 지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얼굴이 보이십니까?”
“그렇네.”
“저는 못 보는 것입니다.”
고윤의 눈엔 머리 위쪽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눈이 더 좋아졌나 보군.”
은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시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경 상궁은 고윤을 발견하자 겁먹은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너 저리 가!’
날카로운 말투를 따라 살이 날아들었다. 고윤은 소매를 휘둘러 그것을 쳐 냈다.
“자넬 무서워하는군.”
은헌은 고윤에게 몸을 기울여 조용히 물었다.
“저는 경 상궁 마마님을 제대로 못 봐도 마마님은 저를 잘 보고 있을 테니까요.”
육신을 벗어던졌으니 경 상궁은 더 확실하게 고윤의 실체를 보고 있을 터였다. 역신이나 다름없는 용의 실질적인 힘이라 할 수 있는 그의 혼백을 말이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래서야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잖은가.”
두 사람은 경 상궁을 저승으로 강제로 보내려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고윤은 한숨을 내쉬곤 기운을 거두어 깔끔하게 갈무리했다. 그런데도 경 상궁은 여전히 가까이 다가오기를 꺼렸다.
고윤은 임 상궁이 건네어 주고 간 것을 손에 올려 내밀었다.
“드시고 싶지 않으십니까?”
귀신은 저를 위해 올린 것이 아니면 제삿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괜스레 날을 챙겨 꼬박꼬박 조상을 기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돼 아직 살아 있을 적의 습관이 남아 있을 텐데도 먹을 수가 없으니 무척이나 굶주린 상태일 것이다.
경 상궁은 고윤의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곶감말이였다. 겨울 찬바람에 꾸덕꾸덕 잘 말린 과육에 호두를 넣고 말아낸 것이 예쁘게 꽃잎 모양으로 접시 위에 피어 있었다.
생각시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나 그거 좋아해.’
“부러 가져온 것입니다.”
‘그때도 배가 무척 고팠었는데,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생전 어느 날을 떠올린 것인지 경 상궁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은헌은 쓰게 웃었다. 기왕 떠올릴 것이라면 더 좋은 기억이었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고윤은 먹을 것으로 경 상궁을 꾀어내며 천천히 경계를 좁혔다. 어차피 달아나지는 못할 터다.
은헌은 경 상궁이 조심스레 다가오자 곶감을 내밀었다.
“드시게.”
고윤에겐 그렇게도 경계심을 보이던 경 상궁은 순순히 은헌의 손에 들린 것을 받아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맛난가?”
고윤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경 상궁은 은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은헌이 소리 내 웃었다.
“어릴 적 자네가 내게 준 곶감도 이리 달았었는데.”
‘……대감께서는 아직도 어리십니다.’
생각시의 모습을 한 경 상궁은 조금 전과 다른 차분한 말투로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아기씨.’
호칭이 계속해서 바뀌었지만, 은헌은 순한 아기라도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이네.”
경 상궁은 마주 보고 멍하니 웃다가 멈칫하곤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내 다시 곶감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사이 고윤은 가까이에 있는 경 상궁의 혼백을 꼼꼼히 살폈다.
몸 주위로 검은 기류가 일며 혼백에 끊임없는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고윤은 그것을 살피다 헛웃음을 흘렸다. 혼을 찢기 위해 망량이 날린 살은 여전히 경 상궁의 혼백에 들러붙어 있었다. 참으로 지독한 술수였다. 같은 하늘을 지고는 못 산다 했을 원수에게도 이렇게까진 못했을 터였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쓰고 버리기 위해 인간의 수명을 갈취하였을 테니 더 악랄했다.
고윤은 손을 뻗어 은헌의 어깨를 두들겼다.
“경 상궁.”
생각시는 은헌을 보았다.
은헌은 침착한 태도로 웃으며 경 상궁의 손을 붙들었다. 희뿌연 형체의 작은 손을 붙잡자 끔찍할 정도로 차갑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고윤이 일러준 대로였다. 오래전 겪어보았던 고통이었다. 그런데도 은헌은 환하게 웃었다.
산 자의 온기에 맞닿은 충격이 컸는지 생각시가 정말로 어여쁘게 웃고 있었다.
‘따뜻해.’
고윤은 홀린 듯 은헌의 체온을 탐하는 혼백에게 손을 뻗었다. 허공을 헤집듯 그의 손이 거침없이 혼백에 휘감겨 있는 주술을 뜯어냈다. 액(厄)에 함부로 손을 대면 동티가 나 큰일 난다 했지만 상관치 않았다. 고윤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속았다는 얼굴로 경 상궁이 뒤를 돌아봤다.
원한 어린 기운을 따라 떼어내고 있는 살이 다시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고윤은 살을 혼백에 묶어두었던 주술을 손에 붙들고 뒤로 물러났다.
경 상궁은 괴로운 듯 기침을 뱉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검은 연무가 입술 밖으로 토해졌다. 작은 몸이 움찔움찔 튈 때마다 은헌은 이를 꽉 깨물고 경 상궁을 안은 채 버텼다.
“이제 놓으셔도 됩니다.”
쌓이고 쌓인 살을 묶어내며 고윤이 외쳤다. 은헌은 그제야 팔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은헌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괴로운 듯 속엣것을 뱉어내는 경 상궁에게 닿아 있었다. 한참이나 밭은기침으로 고생하던 경 상궁이 머릴 들었다.
‘너!’
고윤은 그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혼백과 뒤엉긴 힘을 끊어냈으니 이제 저 생각시 모습을 한 경 상궁도 그저 길 잃은 귀신일 뿐이었다.
“이제 아프지 않으실 겁니다.”
고윤은 바락바락 성질을 있는 대로 부려도 더는 일어나지 않는 기운을 살피며 담담히 말했다.
경 상궁 역시 그제야 저를 괴롭혀 온 것들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몸에 휘감겨 작은 소용돌이처럼 불어오던 바람 역시 사라졌다.
‘나 이제 안 아파?’
“나쁜 것을 다 떼어냈으니 괜찮습니다.”
경 상궁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끊임없이 몸을 베어내는 통증이 없으니 이상했다. 그 아픔은 무서운 것이 제게 붙인 것이었다. 경 상궁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선비는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그 안에는 온통―.
“너무 깊이 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제 안의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혼백이 흐트러집니다.”
고윤은 손바닥으로 경 상궁의 눈 앞을 가려 덮었다.
‘너는 무서워.’
고윤은 웃었다.
“저는 무서운 것이지요.”
‘도성에 너 말고도 무서운 게 또 있어, 알아?’
새로운 사실을 일러주듯 경 상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얀 사자탈을 뒤집어쓴 망량 말입니까?”
‘응, 너도 알아? 그것 때문에 청목이 위험할지도 몰라.’
생각시의 몸이 떨렸다.
‘청목이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다 쫓아내려 했는데.’
은헌은 그런 경 상궁을 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할마마마께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괜찮으실 거라네.”
‘어떻게?’
아이처럼 경 상궁이 되물었다.
“자네가 본 망량은 내 안해 될 사람에게 크게 혼쭐이나 도망쳤거든.”
* * *
대비는 나무 아래에 섰다.
“괜찮으실 겁니다.”
낮은 목소리와 함께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대비는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청록 치맛자락을 보며 웃었다.
“운아.”
오래도록 불러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혜야!’
꿈에도 잊을 리가 없는 그리운 목소리가 대비를 불렀다.
“그래, 나다, 혜! 네 동무.”
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둑한 건너편에서 저의 동무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수십 년이 흘렀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대비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애써 웃었다.
‘무서운 게 나타나서 사람들을 괴롭혔어.’
경 상궁은 대비에게 이르듯 얼굴을 보자마자 툭 하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한테 알려주려고 왔었는데.’
“안다. 내 다 알아.”
‘알아?’
“그럼. 운이 네가, 네가 내게 어떤 벗인데.”
대비의 말에 경 상궁의 목소리가 우는 것처럼 흐려졌다.
‘응. 네가 너무 걱정되어서. 그래서 왔어. 너는 괜찮아?’
“그래 나는 괜찮다. 내 아이들이 날 지켜주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고 있어.”
죽어서 모든 기억을 다 잃고, 자신만을 기억하여 도와주려 지켜주려고 온 동무를 대비는 인자한 얼굴로 보았다. 경 상궁은 정말로 괜찮은지 연거푸 대비의 얼굴을 들여다보곤 수줍게 웃었다. 점차 희미해지는 형체에 대비는 곁에 선 고윤을 보았다.
“마음 맺힌 것이 풀렸으니 이제 괜찮으실 겁니다.”
“그런가?”
대비는 미처 고별의 말도 나누지 못하고 가는 이를 붙잡지도 못하고 그저 웃음만 머금었다. 점차 희미해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 머리 위로 나무에 매달아놓은 푸른색 끈이 하늘하늘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