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
오랜만에 돌아온 남산골 집이었다.
고윤은 낯설다 못해 좁은 집을 보며 새삼스레 요즘 그가 머물렀던 곳을 떠올렸다.
구중궁궐 수십 칸짜리 전각들이 즐비한 곳에 있다가 한 칸짜리 제집을 보니 현실감이 확 밀려들었다. 돈이 없는 처지가 아니라 사치하지 않는 것뿐이라 해도 말이다.
“가지려면야 금은보화가 다 내 것이긴 하다만.”
고윤은 콧등을 찡그리곤 담장 안으로 들어섰다. 소매를 휘두르자 객을 위해 열려 있던 문이 굳게 닫혔다.
“계신가?”
“오셨습니까.”
고윤은 집터를 지키는 오래된 터주신을 보았다. 등이 굽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터주신이 마중했다.
“오랜만이네.”
그의 말에 터주신이 웃었다.
“바쁘신 것은 알음알음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도 종종 들러주십시오. 사람이 없으니 집이 문드러져서.”
살지 않는 집은 금방 폐허가 된다.
고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차를 내어달라 부탁했다. 곧 올리겠다는 말에 그는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물건 두는 게 드문 방이라 휑하고 서늘했다.
고윤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두들겼다.
“싸움은 치고받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게 아니라.”
그는 며칠간 계속해서 고생했던 것을 떠올렸다.
수고롭게 잠도 못 자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아직 해결 난 것이 없었다. 사기도 당하고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잘 갚아줄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며 고윤은 머리를 굴렸다.
그와 대군의 목숨 달린 문제였다. 사실 그것을 빼놓고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눈 속이는 데 한 번 성공했으니 놈은 계속해서 사람 목숨을 잡아먹으며 힘을 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본 다른 것들도 그리해도 되나 싶어 슬금슬금 발 뻗어올 것이었다. 그러니 초장에 잡아야 했다.
고윤은 입꼬리를 뒤틀어 올렸다.
* * *
은헌은 새벽부터 뜬눈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러곤 새벽 어스름이 가시기도 전에 말을 타고 남산골로 향했다. 낮은 담장을 두른 초가지붕이 보이자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여전히 이웃이 들지 않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도는 마을 끄트머리, 목멱산과 닿아 있는 집에 다다르자 은헌은 말에서 내렸다. 말고삐를 붙잡고 대문 앞에 서자, 이 집에 거하는 유일한 청지기가 빗질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몇 번 드나들어 익숙한지 청지기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그를 맞이한 뒤 바로 머릴 들었다.
“고윤은 안에 있는가?”
은헌은 귀 어두운 청지기를 보며 또박또박 입모양을 읽기 쉽게 말했다. 하인은 눈썹을 들어 올리곤 몸을 비켜섰다.
“오셨다고 할까요?”
“아닐세. 내가 가지. 자넨 계속 볼일 보시게나.”
대문 밖에서 넘어져도 코 닿을 곳에 있는 방문인데 무엇이 그리 멀다고 청지기에게 시킬까 싶었다. 은헌은 말을 맡기곤 마당을 가로질러 고윤의 방문을 두들겼다.
“고윤. 이보게, 날세. 자네 안에 있는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조용했다. 기척도 없었다. 은헌은 재빨리 시선을 떨궈 아래를 살폈다. 그가 사다 신겨준 흑혜가 섬돌 위에 예쁘게 놓여 있었다.
“신이 많이 닳았군. 하나 더, 아니, 그게 아니지.”
부지런히도 돌아다니는 이라 신발 앞코 닳은 것에 눈을 찌푸렸다가 은헌은 허둥지둥 정신을 찾았다. 신은 있는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이상했다.
“고윤, 안에 들어가겠네.”
은헌은 문고리를 잡아당겨 열었다. 아직 다 떠오르지 않은 해가 방 안을 비췄다. 그는 눈을 찌푸리곤 안을 살폈다.
열기가 조금 남아 있는 바닥에 불룩하니 이불이 솟아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은헌은 방에 들어 슬그머니 이불을 들쳐 올렸다. 조금 전까지도 들리지 않던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고르게 퍼졌다.
은헌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집에서 잘 자는 고윤을 걱정하여 한달음에 여기까지 온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은헌은 제 몸에서 묻어나는 바깥의 찬 기운이 닿을까 다시금 이불을 꼭꼭 덮어주었다.
고윤은 눈을 뜨기 무섭게 제 앞에 누워 있는 이를 보고 흠칫했다.
“대감?”
버석하게 마른 낙엽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그는 잠든 이를 불렀다. 대체 언제 온 건지, 아니, 왜 이렇게 맨바닥에 잠들어 있는지 도통 영문 모를 일이었다. 어쩐지 몸 상태가 지나치게 좋아졌다 싶었다.
고윤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은헌의 어깨에 손을 올려 흔들었다.
“잠시 일어나 보십시오.”
은헌은 길게 늘어진 속눈썹을 깜박이며 눈을 떴다. 멍하던 눈동자가 그를 보며 웃는 것에 고윤은 한숨을 삼켰다.
“대체 왜 이리 계신 겁니까?”
“……자네 자는 것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와서.”
남이 자는 것은 왜 지켜보냐며 투덜대려던 고윤은 눈을 찡그렸다. 주위 기척에 무척이나 예민하여 곧잘 깨곤 하던 자신이 이렇게 남하고 같이 붙어 자놓고도 새까맣게 몰랐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언제 오신 겁니까?”
“동틀 녘에 당도하였지.”
고윤은 바깥을 살피었다. 해가 어디까지 올랐는지 훤했다. 은헌은 말을 하며 점점 잠에서 깨는 건지 눈동자에서 잠기운이 가시고 있었다.
“지난밤에 흉흉한 꿈을 꾸어 확인하러 온 것이었는데.”
“꿈이요?”
은헌은 팔을 베어 누운 채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로 흉흉한 꿈이었다.
“꿈이 너무 생경하여 자네가 또 내 꿈에 찾아들었나 했는데 그는 아닌 것 같고.”
웅얼웅얼 흘러나오는 말에 고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꿈을 꾸신 겁니까?”
“자네가 신이 나 히죽거리면서 닭목을 비틀어대는 그런 꿈이었다네. 사방에 피 칠갑을 해놓고 피투성이가 된 손을 들여다보며 광소를 터뜨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로…….”
두서없이 중얼거리던 은헌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고윤을 보았다. 평상시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꿈 때문에 새벽이슬 밟은 것이냐며 타박할 법도 한데 지나치게 반응이 조용했다.
“설마?”
“뭐가요?”
은헌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자네 정말로 인경 무렵에 어디서 닭 목이라도 비틀고 있었던 건가?”
고윤은 시선을 돌렸다.
“광소를 터뜨리진 않았습니다만.”
“그것도 변명이라고, 대체 그 시간에 닭을 왜 잡고 있었던 건가.”
은헌의 타박에 고윤은 입술을 비죽였다.
“쓸데가 있으니 비틀었지요. 그나저나 대감이야말로 어떻게…… 아!”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고윤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긁적였다.
“대감과 저의 목숨줄을 이어놓은 것 때문에 그 영향으로 잠자리가 사나웠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뭘 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재주가 생기지는 않지만, 꿈길 열어둔 것의 영향도 같이 받은 듯했다.
은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할 일 생겼다며 남산골 가겠다더니.”
“할 일 한 겁니다.”
고윤은 뚱하니 대답했다.
“나는 그런 꿈을 꿨기에, 자네가 내 말 안 듣고 혼자 간 줄 알고…….”
“혼자 쳐들어가 망량 모가지를 닭 모가지처럼 비틀고 있는 줄 아신 겁니까?”
그 모습을 떠올린 은헌은 키득대며 웃음을 흘렸다. 퍽 잘 어울리는 광경이긴 했다.
“근데 그 많은 닭을 어디에 쓰려고?”
“한 마리 잡았습니다.”
고윤은 콧등을 찡그렸다. 대감의 꿈속에 나타난 미친놈은 그가 아니라고 주장하듯 단호한 말투였다.
“닭 피로 망량을 잡는다?”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힘을 빌려 태어난 것은 망량만이 아니라 도깨비도 마찬가지라 도깨비를 물릴 줄 알면 망량도 같지요. 보통은 백마 피를 구해다 쓰곤 합니다만, 이번엔 닭이 더 나아서요.”
“어째서 말인가?”
“닭이란 것이 본디 아침이 되면 울어 밤을 보내고 낮을 불러들이는 짐승이라서요. 망량은 밤에 속한 것이고요.”
“그래서 닭이었군.”
은헌도 닭 피를 뿌려 액막이를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있었다.
“그것 말고도 생각해 둔 게 몇 가지 더 있지만요.”
고윤은 해사하게 웃었다. 되레 불길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은헌은 꿍꿍이가 가득해 보이는 표정에 픽 웃었다.
“한데 닭 피를 구해봐야 망량을 만날 방법이 아직 없지 않은가. 윤 의원도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네.”
골패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은헌은 어찌된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 사기꾼을 다시 붙잡아 오란 명령을 내린 참이었다.
고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윤 의원의 말을 듣자 하니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요. 객으로 드나드는 방법 말고 제대로 된 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혼자 갈 생각인가?”
고윤은 은헌을 보았다.
사실 저의 힘과 망량의 기운은 본디 상성이 나빴다. 둘 다 음기가 짙은 것이라 괜스레 고생만 하고 성과도 없을 수 있었다. 게다가 저번처럼 인간의 육신을 지닌 그의 감을 속여먹는다면 또다시 속아 넘어갈 가능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목숨이 여러 개 있는 것도 아니니 되도록 은헌이 안전하게 있어주는 것이 나았지만, 지금은 수단 방법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청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기꺼운 일이지.”
은헌이 웃었다.
* * *
윤 의원이 망량에게 죽을 자를 보내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는 백면이 부려먹는 왈짜에게 목숨 얼마 남지 않은 이의 정보를 넘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럼 그 왈짜가 알아 백면에게 데려가는 것이었다.
“제 할 일을 하는 것을 탓할 수도 없고.”
쯧쯧 혀를 차며 은헌이 한탄했다.
지난밤부터 시작된 포청의 대대적인 검계 소탕으로 인해 도성만이 아니라 성저십리 안에 사는 몸에 칼자국 난 이들은 죄다 잡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잡혔단 소식이 없습니다.”
고윤은 좌우포청에 연통하여 윤 의원이 일러준 표주란 이름을 지닌 왈짜가 있는가 확인부터 하였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지.”
은헌은 한숨을 내쉬고 지도를 펼쳐 왈짜패가 몸을 숨겼을 만한 곳을 추렸다.
“윤 의원의 말론 표주란 놈이 서강(西江), 옹막 5) 부근에 은신처가 있다 하였는데.”
“알려진 곳이라면 이미 버리고 다른 장소로 옮겼을 것입니다. 선격성책(船格成册) 6)에 오른 뱃사공과 선박의 명단을 입수하여 마포나루를 오가는 배는 죄다 붙잡아 확인하고 있으니까요.”
고윤의 말에 은헌은 지도 위에 손가락을 그어 그 아래로 내렸다.
“그럼 영등포 쪽으로 빠졌을 수도 있네. 그쪽은 상대적으로 감시가 소홀하거든.”
보통 육로를 통하면 쉬이 잡혀 수로를 통해 빠져나가곤 하니 반대로 육로로 빠지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다. 전라로 빠져 그 앞바다 있는 섬으로 들어가면 찾기도 어려웠다.
“그곳은 제가 두 해 전부터 꼼꼼하게 챙겨둔 곳입니다.”
고윤은 자신이 직접 점검하였던 곳을 보았다. 은헌이 웃었다.
“주머니가 채워지면 딴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네. 내게도 매수당하였으니 놈들에게도 넘어갔을 수도 있잖은가.”
고윤은 고개를 들어 은헌과 시선을 마주쳤다. 해사하게 웃는 낯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럼 이쪽부터 뒤져 보지요. 마포나루 쪽은 군자감 7)이 있어 피하였을 테고 흑석리 8) 쪽이 가장 유력하겠군요.”
* * *
“이쪽은 배를 댈 곳이 많아, 사람 드나드는 포구보단 강기슭을 잘 보아야 합니다!”
고윤은 크게 소리쳤다.
“말 위에서 그리 떠들다 잘못하면 혀가 반 토막 나네. 나중에 이야기하세!”
꼿꼿한 고윤의 허리를 낚아채듯 붙잡아 품에 기대어 눕힌 뒤 은헌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윤이 입을 다물자 은헌은 더 빨리 말을 몰았다.
성저는 고윤이 길을 열 곳이 몇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움직여서 왈짜패를 찾아야 했다.
은헌은 공덕을 지나 노고산, 옹막의 갈림길에서 고삐를 붙잡은 손을 들어 손짓했다. 둘의 뒤를 따라 달리던 이들 중 한 무리가 길을 나눠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여섯의 무리로 나눠진 이들이 근방을 샅샅이 뒤지는 중이었다.
고윤은 달리는 말 위에서 튀어 오르는 궁둥이를 힘겹게 내리누르며 편안하게 있으려 애썼다. 그런데도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에 고생하며 한숨을 연신 내쉬었다. 홱 하니 지나가 버리는 주변의 풍경이 생각에 잠길 시간도 주지 않았다. 길 위에서 우레처럼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따라 산천초목 속 작은 소리가 지워졌다.
흑석을 향해 달리던 도중 은헌이 급히 말을 세웠다. 투레질하며 말이 울었다.
“무슨 일입니까?”
은헌은 고윤의 말에 말머리를 틀어 길옆 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여줬다.
“저것, 자네가 달려 보낸 것이 아닌가?”
고윤은 미간을 찡그리고 은헌이 말한 곳을 보았다. 말대로였다. 무언가가 팔랑팔랑 날갯짓하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것은 만약을 대비해 망량의 요기가 느껴진다면 위치를 알려올 수 있도록 은헌의 수하에게 하나씩 붙여 보낸 것이었다. 그물 펼치듯 넓게 수색하고 있어 그 사이사이 빈 틈새를 메우기 위해서 말이다.
“저 방향이라면.”
은헌은 금방 위치를 가늠했다. 그 말에 고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곳이라면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렇단 소린 한 번에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고윤은 조금 더 확실한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 날아드는 종이 나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비는 검게 물든 날개를 가지고 사뿐히 손끝에 내려앉았다. 고윤은 그것이 찢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여 조심스레 펼쳤다.
은헌은 제가 알아볼 수 없는 기괴한 문자에 눈을 찡그렸다.
“뭐라 적힌 것인가?”
고윤은 얼핏 문자처럼 보이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의미는 없습니다. 그냥 보낼 때 종이에 도깨비가 싫어하는 닭 피로 표시하여 둔 것입니다.”
“그렇군. 그나저나 의미가 없다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내긴 어렵겠군.”
그 말에 고윤이 입꼬릴 끌어 올렸다.
“글쎄요. 도착하자마자 싸움이 날지도 모르니 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 나비가 날아온 곳을 쫓아가면 그 근방에 있다는 뜻이지 정확하게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윤의 말에 둘러선 이들이 검을 손에 빼 들었다.
은헌은 고윤을 보다 한숨을 삼켰다.
“다 데려가면 고생하지 않겠는가?”
“대감!”
호위를 맡은 이들은, 은헌이 혹 자신들을 놓고 갈까 대경실색하여 불렀다. 고윤은 그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쪽에 몇이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 이쪽 머릿수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고윤 역시 많은 이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번거로워했다. 귀찮은 것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힘을 많이 쓰니 당연했다. 그래도 지금은 머릿수가 중요했다. 그의 말에 은헌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윤은 종이 나비에서 길을 뽑아내듯 손끝을 비벼가며 뒤로 길게 빼냈다. 그러자 허공의 일부분이 무너지듯 흐릿한 경계가 생겼다. 문이라는 것은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나눠 그사이를 통과할 수 있는 틈새일 뿐이었다. 한 사람의 손이라도 아쉬우니 제대로 된 길을 열어야 했다. 그들이 달려온 관도 옆으로 높이 자란 나무가 보였다. 고윤은 말에서 내려 커다란 나무에 뽑아낸 실을 매달아 묶었다. 그러곤 실을 잡아당겼다.
그의 눈에 열린 틈새가 보였다.
“한 명씩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이 놀랄 수도 있으니 내려서요.”
은헌이 가장 먼저 말에서 내렸다. 불안한 눈빛에 결연한 표정을 지은 이들이 그 뒤를 줄줄 따랐다.
“제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실을 붙잡고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고윤은 그런 이들에게 간단하게 방법을 일러줬다.
“하면 저부터 가겠습니다.”
칼을 빼 들고, 석삼이 먼저 나섰다. 그는 뒤에 선 이들을 보았다.
“다툼이 있을지도 모르니 빠르게 통과한다. 대감과 참군 나리께선 마지막으로 들어오시지요.”
“알았네.”
고윤은 바로 가도 된다며 손짓했다.
두려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비장하게 석삼이 문을 건너갔다. 앞으로 걸어갔을 뿐인데 순식간에 눈앞에서 자취를 감춘 이의 모습에 다들 침을 삼켰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멀리 길 떠나듯 결연하게 고하고 뒤이어 누군가가 실을 붙잡고 따라갔다. 줄줄이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고 난 뒤 제일 마지막에 은헌은 말을 몰아왔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고윤은 그 손을 보다가 픽 웃었다.
“가시죠.”
은헌의 손목을 붙잡은 뒤 남은 손으로는 실을 잡은 채 고윤은 앞으로 걸었다. 혹여 다른 이들이 휘말릴까 문을 확실하게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은헌은 느긋한 걸음으로 세상을 건너갔다.
발을 떼어내 앞으로 들어가자 캄캄한 숲속이 나왔다. 고윤은 실을 붙잡고 있던 손을 들어 늘어진 소매를 흔들었다. 그의 손을 따라 푸른색 불길이 일어 어둠을 잘라냈다.
은헌은 주위에 있는 이들을 살폈다. 그중 이리로 보냈던 이가 보였다.
“상황은?”
“배를 타려고 대기하는 이는 총 스물이고, 그중 표주란 놈이 함께 숨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같았다?”
“떠드는 소리는 들었으나, 직접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숨어 있는 곳에서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하는 수상쩍은 이들이 근방의 주막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는 것을 따라 쫓아왔다 말했다. 그리고 제게 있던 나비가 살아난 것처럼 날갯짓하며 날아가는 것을 본 뒤엔 확신하고 무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고했다.”
해가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니 배를 타기 전에 위치를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공이었다.
은헌은 수하를 치하하며 남은 보고를 들었다.
“어둠이 더 짙어지기 전에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달이 떠오르면 붙잡기가 더 번거로우니 말입니다.”
고윤은 고개를 들어 하늘부터 살폈다.
저녁 어스름이라 해도 아직 달이 온전히 떠오른 시각이 아니었다. 상대해야 할 것이 밤에 속한 것이라 그는 단단히 준비했다.
은헌은 고윤과 함께 왈짜가 있다는 근방까지 숨어들었다. 어둠 속에서 대화 대신 수신호가 빠르게 오갔다. 은헌은 고요한 얼굴로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곤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닥였다.
침입은 두 곳에서 시작이었다.
앞을 막고 뒤에서 돌아가는 수하들을 보며 은헌과 고윤은 기다렸다.
“웬 놈이냐!”
거친 고함이 들렸다.
고윤은 입술을 움직여 곧장 주를 외웠다. 경계를 그어 그는 빠져나가는 이가 없도록 만들었다. 그사이 수하들이 안쪽까지 들어간 건지 연신 부서지는 소리와 고함이 뒤섞여 들려왔다.
“돕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머릿수가 이쪽이 현저히 부족했다.
고윤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집중하다 물었다. 마찬가지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은헌이 픽 웃었다.
“금군에게 맞설 수 있도록 훈련된 자들이 고작 왈짜패 하나 이기지 못할까?”
“뭐, 그렇다면야 그런 것이지만. 그나저나 그런 걸 제가 알아도 되는 것입니까?”
고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은헌이 어째서 이쪽 근방의 뱃길을 열어줄 사람을 매수했는지, 행랑살이하는 이들이 금군과 맞서도록 훈련되었는지는 뻔했다. 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준비했는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은헌은 새삼스럽게 군다며 눈웃음을 흘렸다.
“자네도 이젠 한배를 타지 않았는가.”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떨떠름한 얼굴로 고윤이 반박했다.
“내릴 수 있는 배도 아니니 이만 포기하게.”
은헌이 해사하게 웃었다. 고윤은 한숨을 내쉬는 대신 소란이 줄어들고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을 보았다. 몇 번의 칼 부딪치는 소리 끝에 이젠 큰 소리는 줄어들었다.
은헌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성큼 앞서 걸어갔다. 지나가는 이들이 비를 긋고 말을 데려와 풀을 먹이는 곳이었던지 생각보다 너른 곳에 사내들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칼을 빼앗기고 주저앉아 있는 이들과 그들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보며 지켜보는 석삼이 있었다. 은헌은 앉아 있는 이들을 봤다.
“어두워서 얼굴 보기가 어렵군, 불을 가져와라.”
곧 이글이글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들어온 수하가 안을 밝혔다. 고윤은 찬찬히 안에 있는 이들을 살폈다. 유난히 요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가 있었다.
“저자입니다.”
그는 은헌에게 말했다. 은헌은 검 끝으로 그자를 가리켰다.
“표주란 놈이 네놈이더냐?”
지목받아 일으켜진 사내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이름은 모릅니다.”
또 시작인가 싶어 다들 지긋지긋하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고윤은 고개를 기울였다.
“확인할 것이 있으니 가까이 데려오게.”
수하들에게 끌려 나온 이를 보다 고윤은 손을 뻗었다. 팔을 붙잡힌 이가 움찔 몸을 떨었다. 푸른 불길이 소매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모든 것을 다 태울 것처럼 화르르 일어난 불길에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고윤은 그 불길조차 별것 아닌 듯 사내의 몸을 살폈다. 꼼꼼히 훑어보던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시취가 진동한다 했더니. 이미 죽은 놈이 남의 목숨을 빼먹고 겨우 숨을 쉬고 있구나.”
그 말에 사내가 히죽 웃었다.
사내의 혼백은 엉망진창으로 바느질된 것을 보는 듯했다. 본래의 것이 아닌 것을 모아다가 요기로 묶어놓은 것이었다. 사내의 얼굴에 아이의 몸통, 여인의 팔다리가 뒤틀린 채 매달려 있었다. 백면이 윤 의원에게 곧 죽을 자를 요구했단 소리에 예상은 하였으나, 실제로 보니 더 기괴했다.
망량의 기운으로 짐작되는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 고윤은 사내의 혼백에 손을 댔다. 어차피 죽은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연명한다 해서 제대로 된 생명이라 할 수도 없었다. 수명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되살려진 쪽이니 말이다. 게다가 이것을 빼내야 망량이 있는 곳으로 길을 열 수 있었다.
고윤은 단단히 각오하고 손을 움직였다.
끄아아아악!
세상이 찢겨 나간 것 같은 괴성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고윤은 제 손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은헌은 전에 망량에게 끄집어내진 것과 똑같은 느낌을 주는 구슬을 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쪽은 무언가 불안정해 보이고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잔뜩 금이 가 있다는 것이었다.
고윤은 그것을 들고 은헌을 본 뒤 고개를 까닥였다.
무얼 어떻게 했는지 감히 소리 내 묻는 이는 없었다. 다들 알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경련을 일으키며 게거품 문 이의 사지를 하나씩 붙잡고 한쪽 구석으로 치워냈다.
은헌은 마무리되어 가는 상황을 정리했다.
하인들이 가져온 밧줄로 왈짜패를 단단히 묶어 도망치지 않도록 했다.
“군사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서둘러 무계동으로 돌아가라.”
“하오면 대감께서는…….”
은헌은 고윤을 돌아보았다.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 늦을 것이다. 혹여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거든 저하께 소식을 전하거라.”
석삼은 멈칫했지만, 이내 머리를 조아렸다.
모든 것이 정리되자 고윤은 은헌의 소매를 붙들었다. 밖으로 나서는 것처럼 둘은 길을 건넜다.
* * *
“여전히 휘황찬란하군.”
은헌은 갑작스레 밝아진 탓에 눈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눈이 아플 정도로 사방에서 수많은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들려오는 풍악에 웃음과 괴성이 뒤섞인 곳인데도 즐겁단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느껴지는 것은 광기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방탕하고 끝이 없는 욕망을 그대로 구체화해 놓은 듯한 끈적이는 공기에 그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숨쉬기도 나쁘고요.”
더운 여름 끓는 솥 앞에 선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들었다. 고윤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사방을 살폈다.
그는 금방 기운이 제일 강하게 뭉쳐 있는 곳을 찾아냈다.
“저리로 가시지요.”
한 번 와보았던 곳이라 저번처럼 헤매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라는 마음으로 둘은 성큼성큼 안으로 파고들었다.
전에 걸었던 곳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전에는 흥청망청 놀자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그때보다 노름에 미쳐 광기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정말로 괜찮겠는가?”
은헌은 고윤을 염려하며 물었다.
“저번처럼 삼 태운 냄새만 나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
고윤은 손끝을 문지르며 태연자약하게 굴었다. 은헌은 소리 내 웃었다.
“그것참 믿음직스럽군.”
고윤은 은헌이 저를 못 미더워하는 것에 픽 웃었다.
“눈만 가려지지 않으면 됩니다.”
고윤은 걸어가며 제 힘을 풀어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감지하지 못할 기운이었으나 느낄 수 있는 이들은 달랐다.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튀어나오는군.”
은헌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으나 헐레벌떡 모여드는 주위의 것들을 보며 무언가 했구나 하고 짐작했다.
고윤은 심드렁한 얼굴로 나온 면면을 살폈다.
“무슨 짓이냐!”
뱀이 우글거리는 그림자의 주인이 외쳤다.
고윤은 한 발 앞서 걸어가며 소매를 흔들었다. 소맷귀를 따라 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빠르게 별이 흐르며 지나가던 하늘에 구름이 가득 끼더니, 그림자의 주인이 심상치 않은 울음을 토해냈다.
“인간 주제에 감히!”
구그그긍 쾅!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벼락이 내리꽂혔다. 은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순식간에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그는 소매를 들어 제 코와 고윤의 코앞을 막은 채 웅얼거렸다.
“저게 대체 뭔가?”
“허수아비입니다.”
고윤은 연기를 들이켜지 않도록 바람을 불러들였다. 그의 시선은 순식간에 조용해진 것들을 향했다. 기세등등하게 나타나더니 지금은 우물쭈물 꽁지를 빼고 있는 요괴가 보였다.
“인간의 목숨을 빼돌리고, 그 목숨을 미끼로 하여 요괴를 끌어들이고, 속임수를 써서 수명을 빼앗은 뒤 이렇게 호가호위한 것입니다.”
수백 년 살아온 것들의 수명 일부분에 요기와 귀기를 버무려 놓고 감각을 속이는 혼몽한 곳에 풀어두니 고윤조차 깜박 속았다.
고윤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서 있는 것들의 뒤에 나타난 사자탈을 보았다.
“거짓말을 하려면 원래 진실을 섞어 만들어야 잘 속아넘어가는 법이지. 그렇지 않은가?”
망량은 앞으로 다가오며 웃음을 터뜨렸다.
“속임수라니요. 속인 적은 없습니다. 모두 제 발로 찾아와 알아서 목숨을 내놓고 간 것을요. 제 손에 들어온 것이니 어찌 쓰든 그것은 제 마음이 아닙니까?”
백면은 그리 말하며 손을 저어 주위의 요괴를 물렸다.
고윤은 그 모습을 보며 힘을 한 번에 확 풀어냈다. 바람 한 점 없는 곳이건만 고윤의 옷자락이 거세게 펄럭였다. 은헌은 하늘과 땅 여기저기 금이 가는 것을 보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풍악은 끊기고 비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세상에 태연하게 서 있는 것은 그들 셋뿐이었다.
“암만 이곳을 부숴도 소용없을 겁니다. 이곳은 고윤 선생의 힘으로는 부술 수 없는 장소니까요.”
고윤은 사방을 짓누르던 제 기운을 거둬들였다.
“자신만만하시군.”
망량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럼요. 이곳에선 누구도 승부를 내기 전에는 어떤 것도 얻거나, 잃을 수가 없답니다.”
고윤도 입꼬릴 끌어 올렸다.
“그게 네 정체인가 보군.”
아무리 속이려 해도 물건에 사념이 실려 만들어진 도깨비는 처음 타고난 쓰임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했다. 바람 도깨비가 소문에 이끌려 다니고, 책 도깨비가 세상 온갖 서책의 위치를 자연스레 알게 되듯 인간의 욕망이 닿아 만들어진 망량도 그것만은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근본부터 무너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확인해 본 것이었다.
백면은 조용해졌다. 가면에 가리어 보이진 않지만, 이쪽을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은헌은 그것을 경계했다.
“위험해 보이는데?”
마치 커다란 맹수를 앞에 둔 기분이 들었다.
“해코지는 못 할 겁니다. 대감께서도 들으셨듯, 방금 저것이 말한 대로 승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은헌은 눈썹을 들썩였다. 그 말은 승부를 보기 전엔 고윤 역시 저 백면이란 것을 처리하지 못한다는 소리로 들렸다.
“뭐든 겨루어보긴 해야 하는 거군.”
속삭이듯 말한 것인데도 대답은 고윤이 아니라 백면에게서 돌아왔다.
“그렇지요.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라 하나, 주인 된 도리로 빈손으로 쫓아낼 수는 없으니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무엇으로 승패를 가리시겠습니까?”
은헌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봤으나 고윤에게는 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무엇을 할지는 고윤이 결정하기로 했었고 말이다.
“할 것이 없다면 승직도라도 펼까요?”
“사양하지.”
고윤은 웃는 얼굴로 매몰차게 거절했다.
아무 생각 없이 판에 뛰어들면 곤란했다. 그는 신중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가 찾아가야 할 것은 두 사람 몫의 수명이었다. 놀음에는 재주가 없으니 그가 불리했지만, 딱 하나, 이길 구석이 있었다. 한참 만에야 계산을 끝낸 고윤은 말문을 열었다.
“다른 이는 끌어들이지 않고, 승패를 가리는 것은 너와 나 둘이면 충분할 텐데.”
그는 숨을 깊이 삼켰다.
“단판 승부라면 투전 패라도 가져올까요?”
백면의 사자탈이 흔들렸다. 고윤은 그것을 보다가 곁을 지키고 서 있는 은헌에게 시선을 던졌다. 서늘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걱정과 염려가 담긴 눈동자의 온기가 따스했다. 그는 다시 앞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니, 말 그대로 내기다. 방법은 간단하게 진짜와 가짜를 찾는 것으로 하지.”
백면의 사자탈이 기울어졌다.
“진짜와 가짜?”
“그래. 너와 내가 각자 한 번씩 번갈아 진짜와 가짜를 섞어 보여주고, 그중 진짜를 골라내면 이기는 거다.”
고윤의 말에 백면은 흥미롭다는 듯 콧소릴 흘렸다.
“나쁘지 않군요.”
사자탈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고윤 선생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진짜를 구별해 내는 이는 저자로 하지요.”
뻗은 손이 은헌을 가리켰다. 은헌은 당황하여 입을 열려 했으나 그의 손목을 고윤이 붙잡았다.
“그리하지.”
“고윤?”
은헌의 부름에 고윤은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대감께선 저를 무척 잘 찾으시니, 괜찮으실 겁니다.”
백면은 짓궂은 웃음소릴 흘렸다.
“좋습니다. 하면 무엇을 걸겠습니까? 아니, 무엇이 가지고 싶으십니까? 금은보화? 아니면 수명?”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누가 보아도 저가 이길 것이라 확신하는 듯 말이다.
“내가 이기면 빼앗긴 수명을 돌려받지.”
“좋습니다. 제가 이기면 그때 거절한 부탁을 들어주셔야겠습니다.”
은헌은 고윤을 보았다. 이번엔 그를 돌아봐 주지 않았으나 괜찮다 대답하듯 손목을 두들기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은헌은 뭐라 반대할 수도 없었다.
“받아들이지.”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제는 제가 먼저 내겠습니다.”
백면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은헌의 주위로 뿌연 막 같은 것이 씌워지기 시작했다.
“공평하게 해야 하니 저자는 잠시 옮겨두겠습니다.”
은헌은 그 말에 고윤을 보았다. 담담함 속에 초조한 기색이 비쳤으나 애써 태연한 듯 반듯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그냥 미소 지었다.
“다녀오겠네.”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면서도 담담한 그 말투에 고윤도 마주 웃었다.
* * *
은헌은 제 앞에 나타난 길을 보았다.
주위는 온통 캄캄했고, 바닥에 길처럼 보이는 것을 빼곤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여 익숙해져도 매한가지였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곤 그는 단단한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서 있고 한 치 앞도 보여주지 않는 어둠의 저 건너편에 그를 부르는 듯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는 점 정도였다.
“갈 수밖에 없나?”
조언해 줄 고윤이 곁에 없으니 그가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은헌은 걸음을 내디뎠다.
힘들지는 않았으나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느낌이 꺼림칙했다. 앞으로 계속 걸어가자 어디선가 제 발소리와 똑같이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헌은 걸음을 멈췄다. 그보다 몇 발 늦게 움직이던 발걸음 또한 멈췄다.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허리춤의 칼을 꽉 쥐었다.
서로 간에 멈췄던 걸음이 동시에 움직였다. 은헌은 저에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의 주인이 근처에 오자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대감?”
은헌은 희끄무레 보이는 인영에 헛숨을 뱉었다.
“고윤? 자네!”
앞으로 무작정 걸어가려다 은헌은 검 끝이 정확하게 고윤의 턱 아래 닿아 있음을 깨닫고 칼부터 거뒀다. 고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곤 콧등을 찡그렸다.
“괜찮은가?”
“……뭐, 죽을 뻔한 것치곤 다친 곳은 없습니다.”
은헌은 긴장감이 풀린 얼굴로 웃었다. 그는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서 고윤을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고윤은 잘 보였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밝은 것이었다.
조금 전 헤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윤은 똑같은 모습이었다. 잠깐 새에 험한 일은 당하지 않은 듯했다.
“그나저나 이곳은 어딘지 모르겠군요.”
은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 홀로 이곳에 내팽개쳐진 것이 아니라 고윤 역시 비슷한 처지가 된 듯했다.
은헌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백면과 내기를 벌이는 줄 알았는데 함정에 걸린 건가?”
그 말에 고윤 역시 눈을 찡그렸다.
“아니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과는 분명 내기를 시작하였습니다. 한데 제가 생각한 방법과는 다르군요.”
백면과 고윤이 벌인 내기는 단순하다면 단순한 것이었다. 진짜 하나와 가짜 하나, 두 개를 섞어 그 사이에서 진짜를 찾는 것이었다. 찾아내는 이가 은헌이었으니 이렇게 만나게 해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자네. 내기에 무엇을 낼 생각이었나?”
은헌은 이 기회에 작당 모의나 해둘까 싶어 서둘러 말을 붙였다. 앞에 서 있던 고윤이 그 말에 웃었다.
“글쎄요. 아직 내기가 끝나지 않아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어차피 곧 보게 되실 텐데요.”
은헌은 문제와 답을 알려주지 않는 고윤을 보며 부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뭐가 어찌 될 줄도 모르는데 일단 이겨야 하지 않나.”
고윤은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기게 될 겁니다.”
“그리되면야 좋겠지만 말이네.”
은헌은 어깨를 으쓱이며 처음 그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목표로 하여 걸음을 내디뎠던 곳을 보았다. 고윤도 그리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 저쪽으로 가시지요.”
그리 말하며 그가 성큼 앞서 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은헌은 웃는 얼굴 그대로 발검하여 고윤의 등에 검 끝을 찔러 넣었다. 푹 쑤시는 정도가 아니라, 검이 그곳에 닿아 있다는 정도를 알려주듯 말이다. 있는 힘을 다해 누른다면 순식간에 심장을 꿰뚫을 곳이었다.
“대감?”
“그래서 진짜는 어디에 뒀나, 백면?”
시리도록 차가운 말투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고윤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은헌은 웃음기라곤 없는 삭막한 얼굴로 제 앞에 선 이를 꼼꼼히 살폈다. 분명 고윤이라 생각했다. 생긴 것만이 아니라 몸짓과 말투, 분위기가 빼다 박아 있었다. 그런데도 이것은 고윤이 아니었다. 이런 낯선 곳에서 고윤은 버릇처럼 그의 손목부터 붙잡곤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주겠다는 듯 말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움직이기 전에 손부터 잡았을 터다.
온전히 같은데도 다른 것, 은헌은 불현듯 이곳에 들었을 때 고윤이 보여줬던 것을 떠올렸다.
허수아비처럼 막 만들어진 것들이 수백 년 묶은 요물들과 같은 기운을 풍기는 이유는 그 속에 속임수로 빼앗은 수명이 섞여 있어서였다. 백면이 고윤에게서 가져간 수명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면 지금 이러한 상황도 충분히 가능했다.
“내기는 분명 시작되었다 했지. 진짜와 가짜를 섞고 그중 진짜를 찾아내면 된다고 말이야, 내가.”
가짜와 이곳에서 나눈 대화를 돌이켜 보면 틀린 것은 없었다. 내기가 진행 중이라는 것과 무슨 문제를 냈는지 곧 알게 될 거라는 얘기조차 말이다.
고윤의 움직임이 뚝 그쳤다.
“제가 진짜면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그 말에 은헌은 확신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고윤은 내기판이 망하기 직전인데 이렇게 얌전하게 다시 생각해 보라는 듯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제 멱살을 붙잡아 흔들며 정신 놓지 말라고 주먹을 날렸으면 모를까 말이다.
“진짜면 미안하네.”
은헌은 그리 말하면서 칼을 쑤셔 넣었다.
고윤은 제 가슴팍을 뚫고 나온 칼끝을 보더니 웃었다. 그는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걸어 나가 뒤로 돌아섰다. 은헌은 여전히 칼을 놓지 않고 선 채로 이번엔 목을 날려 버리겠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순간 저벅이는 발소리가 하나 또 들려왔다.
앞에 서 있는 고윤과 티끌 하나도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또 다른 고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기에는 내가 이겼군.”
뒤늦게 나타난 이가 웃자, 가짜임을 들킨 쪽이 얼굴을 뒤틀었다.
“하!”
은헌은 새로 나타난 쪽을 살피곤 실소를 터뜨렸다.
“가짜 둘을 내어놓고 진짜를 찾으라고 하는 거면 내기가 성립 안 될 텐데.”
두 번째 나타난 고윤이 무슨 소릴 하느냐는 듯 은헌을 보았다. 은헌은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였다. 나타난 순간부터 저와 한 번도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고, 백면과 대화를 하며 진짜라고 주장하는 거라면 그를 너무 만만히 본 처사였다.
게다가 가짜로 짐작되는 것을 두고, 새로 나타난 것을 살펴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가짜가 옆에 있기에 더 확연하게 문제가 보였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분명 고윤인데 정작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의 심정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고윤이 곁에 있으면 그나마 누그러드는 것 같았던 예민한 신경 줄도 마찬가지였다.
“가짜를 보여줬으면 진짜도 보여주어야지? 그래야 선택할 게 아닌가.”
두 번째 고윤은 금방이라도 칼을 찔러 넣을 것 같은 은헌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이런.”
목소리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말투가 바뀌자 분위기도 달라졌다. 고윤은 마치 사자탈을 쓴 백면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흔들흔들하더니 이내 모습이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조금 고윤의 인영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세상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다녀오겠다고 말했던 그곳이었다.
감각이 기이하게 뒤틀린 듯한 느낌을 주었던 세상으로 돌아오자 은헌은 칼을 아래로 내렸다. 그를 보고 있는 시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어째선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참았던 숨을 토해낸 뒤 은헌은 편하게 웃었다.
“괜찮네. 그럭저럭 해낸 듯하군.”
그의 말에 고윤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한시름 덜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옆에서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는 백면을 그제야 돌아봤다. 으스대는 듯한 기색은 없었다.
“이번엔 내 차례군.”
고윤의 말에 백면은 얼굴에 덮어쓴 사자탈을 흔들었다.
번갈아가면서 문제를 내기로 했으니 두 번째 내기였다. 이번에도 은헌이 진짜를 맞춘다면 내기는 비기는 것이었다.
“확실히 끝을 말하기엔 아직 이르지요.”
그렇게 말하며 쿵 하고 발을 구르자 은헌은 저를 따로 떼어놓았던 그 안개가 발치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곤 순식간에 눈앞이 번쩍거렸다. 눈이 부셔 은헌은 손을 들어 눈두덩을 지그시 눌렀다. 한 번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던지더니 이번엔 아예 못 보게 하려는 수작질이냐며 속으로 욕을 뱉었다.
어쨌든 번쩍거림이 수십 번이나 우레처럼 울리고 난 뒤에 그는 가까스로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자마자 다시 눈을 감을까 고민했지만 말이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백면은 조금 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고윤은.
“셋이 됐군.”
은헌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 갈 것 같은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똑같은 얼굴 셋이 그와 시선을 마주쳐 왔다. 뭔가 아득해지는 기분에 은헌은 한 걸음 주춤 물러났다.
“자네.”
“예.”
동시에 답을 내놓는 목소리가 울렸다. 은헌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는데 아까처럼, 낯설다는 느낌이 없었다. 셋 다 비슷한 느낌을 줬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를 찾아야만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다. 그러니 확실히 알아야 했다.
“얼른 고르시지요.”
심술궂은 말투로 백면이 재촉했다. 은헌은 눈을 찌푸리곤 세 명의 고윤을 보았다.
“적당히 할 것이지.”
그는 불만을 흘렸다. 문제가 어렵든 쉽든 그가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윤이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일 줄은 몰랐다.
은헌은 한 명씩 시선을 맞추었다. 이번엔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백면이 만들어 낸 가짜처럼 이질적인 느낌도 나지 않았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그는 결국 칼을 들었다.
“이번에도 찌를 건가? 진짜를 찌르면 볼만하겠군.”
백면은 뭐든 좋다는 듯 히죽댔다. 은헌은 태연히 검을 역수로 쥐어 날을 팔에 가져갔다.
고윤들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은헌은 망설임 없이 날을 그어 내렸다. 옷과 살이 서걱 베였다. 은헌은 제 몸에 난 상처를 살피는 것보다 빨리 앞에 서 있는 고윤의 몸을 보았다.
그의 몸과 똑같은 곳에 상처가 난 이가 딱 한 명 있었다. 왼쪽에 서 있던 자의 소매 아래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네로군.”
은헌은 피를 흘리지 않는 쪽을 골랐다. 이번엔 가짜를 골라야 내기에서 이기니 말이다.
“말도 안 돼!”
백면은 사자탈 뒤에서 신음을 뱉었다.
고윤은 소매를 휘저었다. 그러자 가짜로 만들어둔 것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고윤은 이겼음에도 마뜩잖은 얼굴로 백면을 보았다.
“이겼군.”
웃고 있는 것은 은헌뿐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백면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둘 사이에 약조가 오간 것이 아닙니까?”
고윤은 코웃음 쳤다. 그런 것이 있었으면 조금 전과 같은 사태는 애초에 방지해 뒀을 터다. 그는 팔을 들어 올렸다. 소매가 흘러내리며 팔목에 둘린 검은 선이 보였다. 은헌은 그와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어 어떤 것인지 금방 알아챘다.
“네놈과 나눈 내기의 규칙에 어긋나는 어떠한 문제도 없다는 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터. 약조를 어길 생각인가?”
말을 매듭지어 묶어둔 것을 본 백면은 잔뜩 몸을 웅크리며 소매에 손을 넣어 거칠게 뒤적였다. 그러곤 신경질 난다는 듯 커다란 구슬을 내던졌다. 은헌은 날아오는 것을 가뿐하게 낚아챘다. 고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빼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은은한 빛을 머금은 그 구슬을 보며 은헌은 고개를 돌렸다. 제 손에 들린 것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구슬이 고윤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은헌은 허공에 돌을 던지듯 제게 돌아온 수명을 턱턱 위로 던져 올렸다가 내렸다.
“대감?”
고윤은 은헌의 곁으로 다가와 붙어 섰다. 그가 은헌을 부를 때는 대체로 그 높낮이에 따라 ‘지금 뭐 하는 거냐.’ 혹은 ‘그러지 마십시오.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등등의 의미가 있었다.
은헌은 후자로 들리는 부름을 무시하곤 백면을 보았다.
“본전 찾았으니 이제 뭔가 얻어가야 그 고생하며 여기까지 만나러 온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은헌의 말에 백면의 사자탈이 흔들렸다.
“고윤 자네의 볼일이 끝났으니 이젠 내 볼일도 봐야지.”
고윤은 금방이라도 은헌의 소매를 붙잡을 듯 팔을 뻗으려 했다.
“놀음판에서 본전치기했으면 그것으로 끝내는 게 현명합니다. 그리고 말이 틀리지 않습니까.”
그는 혀를 찼다. 이곳에 오기 전에 계책 세운 것과 결말이 조금 달랐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은헌은 잽싸게 팔 닿는 곳에서 벗어났다.
“십 년 뒤에 자네가 날 두고 떠나면 내 남은 칠십 년이 너무 심심할 것 같아 말이야.”
두 사람 사이에 남은 수명의 차이가 그러했다.
고윤은 제 손에 쥔 남은 수명을 보았다. 이럴 줄은 몰랐지만, 뭔가 어렴풋이 오래 살 것 같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기에 그러려니 했다.
“제가 도깨비 같은 것들이랑 내기하는 거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고윤의 타박에 은헌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기를 한 번 더 하세. 이것을 걸고.”
은헌은 망설임 없이 제 손에 든 수명을 백면에게 던졌다.
“단판으로. 방법은 똑같이 진짜와 가짜를 섞어 진짜를 찾아내는 것으로, 이번엔 고윤이 아니라 다른 이로 해도 좋네.”
백면은 흥미롭다는 듯 콧노래를 불렀다.
“싫다면요.”
“그럴 리가?”
은헌은 눈웃음을 흘렸다. 만일 그가 백면이었다면, 애초에 이곳에 고윤과 함께 들어왔을 때부터 쫓아냈을 것이다. 무엇이 좋다고 받아줘서 내기까지 할까 싶었다. 그런데도 놈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쪽이 나가겠다 하지 않으면, 쫓아낼 수가 없는 것 같던데?”
은헌은 빈정댔다.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변덕 부리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백면이 물었다.
“내가 이긴다면 수명을 쪼개어 고윤과 내 수명을 똑같이 맞춰주게. 어떤가?”
청산유수로 은헌은 저가 원하는 것을 읊었다. 백면은 몸을 떨어대며 키득거렸다.
“좋습니다.”
백면은 머리를 홱 틀어 고윤을 보았다.
“대신 고윤 선생은 이번 내기에 관여해선 안 됩니다.”
“좋네.”
돌아가는 상황에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그에게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하긴 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은헌은 고윤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걱정하지 말라 하셔도 안 될 리가 없잖습니까.”
일 년에서 십여 년으로, 제 명대로 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었다. 고윤의 말에 은헌은 팔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여전히 손목에 검은 선이 보였다.
“사라지지 않는군.”
“내기가 이어졌으니까요.”
고윤은 손목을 문질렀다. 본래는 사라져야 했으나 은헌과 저의 목숨을 이어두었기에 자연스레 이것 또한 연장되었다.
“준비는 됐습니까.”
백면은 이번에야말로라는 듯 가벼운 말투로 웃었다. 은헌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까와 마찬가지로 캄캄한 공간이었다.
은헌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에서 동시에 여러 개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왔다.
“이것 참.”
은헌은 혀를 찼다. 사방에서 사자탈이 흔들렸다. 이번 문제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윤을 구별해 내는 문제에서 두 번이나 연속으로 이겼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히 저를 둘러싼 백면을 보았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맞출 수 있겠습니까?”
백면은 사자탈을 벗어 내렸다.
백 개의 얼굴을 지닌 이라 백면이라 이름 붙였다더니 말 그대로였다. 은헌은 바로 앞에 있는 턱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를 보았다. 그 옆으로는 염소수염을 늘어뜨린 자가 있었고, 그 옆으로는 백발성성한 노인이 서 있었다. 사내만이 아니었다. 똑같은 옷을 입은 자 중엔 여인도 있었고, 아이도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된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 내는 것인데 진짜 고윤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도 퍽 섭섭한 일이었다.
은헌은 잡생각을 물리치듯 손을 휘저었다. 지금은 백면을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한 번 죽었다 깨어난 뒤, 은헌은 조금 특별한 재주가 생겼다. 고윤이 가진 힘에 비하면 별것 아닌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코딱지만 한 재주라도 힘은 힘이었다.
은헌은 눈이 꽤 좋아졌다.
정확하게는 고윤이 시야를 틔워주지 않아도 제법 볼 수 있게 되었다. 선명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안개가 낀 듯 희미하게 보였고, 그것은 때론 불길한 것과 해가 될 것 같은 것을 골라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상하게도 고윤이 곁에 있을수록 잘 보였고, 멀리 떨어지면 희미한 아지랑이를 들여다보듯 한참을 집중해야 구분할 수 있었다. 이번엔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은헌은 몇 번이고 숨을 고르며 눈을 깜박였다. 고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근처에 있는 것인지 제법 선명하게 여러 가지가 보였다.
그는 백면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도 모를 요지경인 세상 속에 수십 개의 눈동자가 그를 돌아봤다. 섬찟한, 그다지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은헌은 고윤에게 들었던 것을 되새겼다. 고윤은 망량에 대해 알려주며, 인간의 그릇된 감정만을 담아낸 것이라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불길함만 느껴질 것이라 했다. 도깨비를 만날 때와 분명 다를 것이라면서 말이다.
은헌은 껍데기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한 것 중 다른 불길한 것 하나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한참이나 헤매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헛숨을 삼켰다.
경 상궁이 그를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모습 그대로였다. 눈가 주름진 얼굴 위로 보이는 요기에 은헌은 눈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얼굴들을 그는 다시 되돌아보았다. 모두가 다 달랐다. 같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은헌은 무거워진 발을 다시 내디뎠다.
한참 만에야 그는 다른 것을 찾았다. 어떤 인간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얼굴이 없는 것이었다. 목 위쪽으로 검은 연기가 뿌옇게 낀 것처럼 보였다.
은헌은 걸음을 멈췄다.
사자탈을 쓴 것처럼 움직이던 고갯짓이 멈췄다. 뚝 하고 그친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기이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고르셨습니까?”
산에서 외치듯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같은 목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은헌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내쉬었다. 사실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제게 기이할 정도로 운을 만들어주는 눈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그가 실패하여 일 년 뒤에 죽더라도 말이다.
“귀신이 되어 붙어 다니면 싫어하려나.”
텅 빈 마당에 우글거리는 그림자들처럼 고윤에게 말이라도 붙여보려 서성이는 신세가 된다 해도 지금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은헌은 손 대신 검을 들어 겨눴다.
“골랐네. 그대가 진짜일세.”
뒤쪽에서 비웃음이 터졌다. 마침내라는 듯 희열에 가득한 웃음이었으나 은헌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앞에 서 있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기괴한 존재를 볼 뿐이었다.
“선택할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알고 있네.”
다시 고려해 보라는 듯 넌지시 들려오는 말투에 은헌은 딱 잘라 대답했다.
“자네야.”
그는 대답을 물리지 않았다. 그저 그가 고른 선택의 결과를 기다리듯 담담한 태도였다.
백면은 조용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은헌은 짧게 숨을 골라 뱉었다.
* * *
고윤은 흔들리는 경계를 응시했다.
그는 적당히 힘을 풀었다가 거뒀다. 그럴 때마다 그들을 가둔 이 꽉 막힌 공간에 조금씩 금이 갔다.
그의 힘으로는 절대 부술 수 없을 거란 백면의 말과는 달랐다. 고윤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이 안에 득시글거리던 요괴의 기운은 지금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망량의 거짓말에 놀아나는 것은 처음으로 족했다.
은헌이 백면의 시선을 끄는 동안 고윤은 다음을 준비했다. 본래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차피 이리된 것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볼 참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눈 닿는 곳을 죄다 훑었다. 하나 망량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태어난 것이 도깨비와 같다면 그 실체가 되는 무언가가 느껴져야 하는데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기본은 같은 것.”
고윤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짜 맞추기 시작했다.
이 커다란 놀음판은 도깨비 씨름과 다르지 않다. 어둑한 고갯길 넘어갈 때 갑자기 나타난 도깨비가 씨름하자 덤비는 것은 때론 술과 고기를 뺏기 위함이기도 했고, 장난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은 백면이 만들어낸 일종의 영역이었다. 인간에게서 혼백을 빼내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씨름의 규칙은 여기에서 내기로 성립했다.
“내기하고 빚을 지게 해야 인간에게서 가져갈 수 있다.”
고윤의 머릿속에 번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칠 뻔한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고윤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은헌은 여전히 망량이 만들어낸 환영을 헤매고 있었다. 고윤의 눈에는 죄다 사자탈을 흔들어 쓴 놈들뿐이었으나, 은헌은 저마다 다른 이를 보듯 보았다. 어떤 것을 볼 때는 애틋하게 보았고, 어떤 것을 지나칠 때는 쉽게 발을 떼지 못하겠다는 듯 한참을 머뭇거렸다.
“혹시나 하였건만.”
고윤은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이 은헌을 쫓았다. 한참을 걷던 은헌은 안쪽에 서 있는 사자탈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자네야.”
은헌은 진짜를 찾아낸 듯 확신을 담아 말했다.
고윤은 팔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늘어진 소매 안에서 작은 병이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백면은 고개를 돌려 고윤이 서 있는 곳을 보았다.
“아쉽게 되었군요.”
백면은 불안스럽게 중얼거렸다.
고윤은 그 말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은헌이 가진 힘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였으면서 그런 내기를 했으니 패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백면이 만들어낸 판 위에서 풀려난 은헌은 환한 얼굴로 고윤을 돌아봤다. 잘했지? 하고 묻는 듯한 그 얼굴에 대고 귀찮게 왜 그랬냐 타박 놓는 대신 고윤은 마주 웃었다.
* * *
“여기 있습니다.”
뾰족뾰족하고 날 선 목소리로 백면은 은헌의 수명을 쪼개 내밀었다. 은헌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는 고윤에게 넘어간 제 목숨을 보았다. 척 봐도 똑같아 보이는 크기니 앞으로 남은 날들은 그리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행이군.”
“네, 뭐, 감읍합니다.”
“그리 고맙지는 않은 기색이야.”
은헌은 콧등을 찡그렸다. 힐끗 눈을 굴린 고윤은 한숨을 뱉듯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었다.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해도 말이다.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지만, 기쁜 날이니 넘어가 주겠네.”
“대감의 관대함에 몹시도 감읍하고 있습니다.”
빈죽대며 고윤은 수명을 다시 본래대로 집어넣었다. 한 번 몸에서 분리된 것이니 잘 넣어둬야 했다. 제 것을 갈무리한 뒤 그는 은헌의 손에 들린 것을 들고는 주를 외웠다. 가슴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구슬을 은헌은 신기하단 듯 보았다. 신기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단단히 매듭지어 놓고서야 고윤은 한숨을 돌렸다.
긴 밤이었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이곳은 백면의, 그야말로 개인적이고 닫힌 공간이라 이 바깥의 시간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손을 뻗어 언제나 그랬듯 은헌의 손목을 붙들었다. 은헌은 그것을 가만히 보다 이내 환히 웃었다. 더할 나위 없다는 듯 즐겁게 말이다.
“이제 볼일도 다 봤으니 가시지요.”
물론, 아직 남은 일이 있긴 했다.
고윤은 백면을 보았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오너라.”
바닥이 물결처럼 출렁였다. 그와 동시에 하늘도 땅도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했던 거리는 수백 년의 시간이 한 번에 지나간 것처럼 빛을 잃었다.
백면의 사자탈이 일그러졌다.
고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주를 외웠다.
“오너라!”
그의 명이 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네 이놈—!”
망량이 가둬놓았던 혼백의 일부분을 닮은 손과 발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해 퍼렇게 질린 발이 천천히 어둠에서 걸어 나왔다. 산 채로 조각나 더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혼백의 파편들이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백면의 몸이 일부분 부서진 것처럼 그대로 조각나 휘날렸다. 고윤은 그것을 보며 흩어진 혼백을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네놈이 감히!”
망량의 외침에 고윤은 코웃음 쳤다. 그는 여전히 제 손목에 남아 있는 말 매듭을 보여줬다.
“셈은 바로 해야지.”
내기하여 이긴 것은 은헌이나, 그 내기 또한 고윤이 한 약조의 연장이었다. 그러니 이번 내기에서 고윤은 또 하나를 더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이기거든 빼앗긴 수명을 되돌려 받기로 하지 않았더냐.”
고윤은 백면을 향해 보이냐는 듯 제 손목을 흔들었다.
“그것은 이미 돌려주었다!”
사자탈 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누구의 것이고 얼마나 돌려줄 것인지는 말 나눈 것이 없었던 듯한데.”
뻔뻔하게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네놈이 전에 말했듯 이전 판엔 두 명이 참가했으니 이쪽도 두 배의 셈을 치렀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지. 네놈이 빼앗아 간 혼백의 조각을 죄다 흩어놓아 내기판에 끼어들었으니 그 모두가 판에 끼어든 것이 아니냐. 네놈의 편이 되어 말이다. 그렇다면 네놈도 그만큼 내어놓아야지!”
고윤은 다시 한번 오라 외쳤다.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넘쳤다. 그의 예상대로 백면은 내기에서 이기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것처럼 혼백이 달아나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백면은 사자탈을 날카로운 손으로 긁었다. 요기가 일렁였다.
은헌은 만일을 대비하였다. 그는 백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소매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칼의 매끄러운 굴곡이 느껴지자 은헌은 그것을 더듬어 꺼냈다.
“괜찮겠는가?”
고윤은 대답하지 않고 이 공간에 흩어진 혼백을 죄다 끌어모았다. 한계까지 긁어모은 뒤 그는 정말로 가야 할 때임을 알아차렸다.
백면의 사자탈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요기가 크게 일렁였다.
고윤은 은헌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아까 꺼내놓은 병을 허공에 내던졌다.
“대감!”
“걱정 말게!”
은헌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병을 보며 손칼을 날렸다. 비수처럼 날아간 것이 병에 닿는 순간 고윤은 입술을 움직였다.
깨어진 파편을 따라 핏방울이 흩날렸다.
“네 이놈들—!”
고윤은 입꼬릴 끌어 올렸다.
그가 불러들인 삭풍이 불었다. 밤과 낮의 경계를 그어주는 수탉의 피에 하늘과 땅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밤을 살라내듯 어둠을 잡아먹기 시작하는 불길에 고윤은 부채질을 확실히 했다.
“안 돼!”
백면은 비명을 외치며 손톱을 세워 달려들려 했으나 닭 피가 무서워 이쪽으로 오지 못했다. 볼품없는 모양새로 아득바득 이만 가는 것을 보며 고윤은 마지막으로 준비한 것을 꺼냈다.
그가 다시 주를 외자 은헌의 무릎이 꺾여 휘청거렸다. 쓰러지지 않으려 애쓰듯 버티고 섰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고윤은 눈길 주지 않은 채 은헌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은헌은 발치로 고개를 떨궜다.
조금 전까지도 마른 땅 같았던 곳에 붉은 물기가 흥건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물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풍랑에 물결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집채만 한 붉은 파도가 들이닥쳐 모든 것을 휩쓸었다.
고윤은 길을 열고 은헌과 함께 건넜다.
* * *
“이게 닭 한 마리라고?”
핏물에 쫄딱 젖은 은헌이 제 모습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를 뒤집어쓴 모습이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광소를 터뜨리진 않았잖습니까.”
고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은헌은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침음을 흘리며 그는 고윤을 올려다보았다.
“내 힘을 빌려다 쓴다더니 탈탈 털어 쓰기라도 한 것인가?”
“정확히는 용의 힘을 꺼내어 쓴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삭풍을 불게 하고, 물을 끌어올 수 있는 것은 용밖에 없었다.
“주인도 모르는 힘을 잘도 빼내 썼군.”
은헌은 코웃음 치곤 겨우 일어섰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백면은? 실체를 알아냈는가?”
도깨비도 망량도 본신을 찾아내어 없애지 않으면, 다시 힘을 수습하여 언제든 돌아올 수 있었다.
고윤은 머릴 끄덕였다.
“설주가 쓰던 셈노름 장부인 것 같습니다.”
사람을 해하고 그 피 묻은 손으로 수결을 찍어갔다는 소문이 도는 그 장부가 지금은 가장 유력했다.
은헌은 미간을 구겼다.
“빚이 없으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게 놀음을 말하는 게 아니었군.”
“추측한 것에 불과하지만요. 어쨌든 놈도 당장에 돌아오진 못할 테니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윤은 열어놓은 길을 보았다. 열린 길 중 무작정 선택한 것이라 어디로 돌아가는 길인지는 모르나 도성으로 가는 방향인 것만은 분명했다. 고윤은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혹시나 하여 묻는 것이네만 놈이 보여준 얼굴에서 경 상궁을 보았네. 경 상궁의 혼백은 앞으로 어찌 되는가?”
은헌은 담담히 목소리를 내었다.
“놈이 묶어둔 것을 죄다 풀어내지는 못했으나, 일부분이라도 풀어 원래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길을 열어뒀습니다.”
망량이 만들어낸 세상을 박살내다시피 하여 닫힌 곳을 강제로 열었으니 도망갈 수 있는 것들은 죄다 흩어졌을 터다. 이미 조각난 것을 이어 붙여 멀쩡한 혼으로 만들어줄 수 없으니 그것이 최선이었다.
“남은 것은 백면의 본신을 찾아 장부에 오른 이름을 되찾아주면 될 것이고요.”
은헌은 남은 일을 더 캐물으려 했으나, 캄캄한 길 앞에서 빛이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고윤은 이제 인세로 되돌아감을 알려주었다.
여전히 밤인 듯 어둑했고, 한기를 품은 바람에 습한 비 냄새가 뒤섞여 불어왔다.
“여기가 대체 어디……!!”
은헌은 제게 찔러 들어오는 칼날을 순간적으로 걷어냈다.
쨍강!
쇠와 쇠가 긁혀대며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은헌은 상대가 누군지도 확인하지 않고, 칼부터 내지르는 이를 향해 혀를 찼다. 제대로 서 있기도 버거운 상태였으나 그는 등 뒤로 재빨리 고윤을 보낸 뒤 재차 베어오는 검을 쳐 냈다. 충격에 몸이 비틀거렸으나, 그는 온몸에 힘을 주어 버텨 섰다.
“이놈!”
은헌은 실소를 흘렸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귀를 기울였다.
“대체!”
그는 다릴 들어 달려드는 이의 복부를 걷어찼다. 컥 하고 신음을 뱉으며 넘어가는 이를 은헌은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칼등으로 목을 쳤다. 괴로운 소릴 뱉으며 쓰러진 이를 뒤로하고, 은헌은 다시 바깥을 살폈다.
“여기다! 이곳이다!”
어둠을 살라내며 수십 개의 횃불이 밀려들었다.
은헌은 주위를 둘러싸는 이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윤 역시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웬 놈들이냐!”
포청의 무관으로 보이는 이가 호통쳤다.
고윤은 나타난 이들의 복색을 살피며 앞으로 나섰다. 은헌도 그도 핏물에 절인 꼴을 하고 있어 둘러싼 이들이 흠칫거렸다.
“나는 한성부 참군 정휘라 하네.”
뜬금없는 장소에서 한성부 관리를 마주친 군졸들이 움찔했다.
“신분을 증명할 것이 있소?”
군관의 신중함에 고윤은 담담히 소매를 뒤져 제 호패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가까이 다가온 이에게 넘긴 뒤, 가져가 횃불에 비춰 확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신분까지 확인한 군관이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나리. 지금 검계 무리를 추포하는 중이라. 한데 그 모습은 대체.”
공손한 태도와 함께 호패가 되돌아왔다.
“그럴 일이 좀 많았네.”
고윤은 어물쩍 말을 넘기며 조금 전 은헌이 기절시켜 놓은 놈을 놨다. 군관도 그곳을 보았으나 그는 추포하란 명령을 내리는 대신 고윤의 곁에 선 은헌을 보았다.
“혹 은헌 대감 되십니까?”
“나를 아는가?”
은헌은 본 적 없는 낯선 군관의 모습에 눈썹을 들썩였다. 물어본 게 맞다 인정하는 듯한 태도에 군관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재빨리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곤 가까이 다가왔다.
“외람되오나 대군 대감께 서둘러 입궐하라 명이 내려졌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갑작스러운 말에 은헌이 의문을 표하자 군관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다는 듯 어려운 표정으로 말을 전했다.
“사흘 전 형조, 한성부, 포청 가릴 것 없이 갑작스레 명이 떨어졌습니다. 세자 저하로부터 대군 대감을 마주하면 꼭 입궐하란 명이 떨어졌다며 그 말을 전하라 했습니다. 한성부 정 참군 나리도 함께 입궐하라 명을 덧붙였다 들었고요.”
은헌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군이라면 저밖에 없으니 세자가 다른 이를 찾는 것이 아닐 터다. 게다가 고윤까지 함께 찾는 것으로 봐선 뭔가 일이 꼬인 모양이었다.
하인을 통해 은헌과 고윤의 행방을 알아보았을 텐데도 돌아오거든 들르라는 말이 아니라 되는 대로 곧장 입궐하라는 명이 떨어진 걸 보면 말이다.
군관의 안내를 받아 고윤은 은헌과 함께 자신들이 나온 곳에서 벗어났다. 그들이 있던 곳은 호화찬란한 노름판의 구석진 곳이었다. 곳곳에서 험상궂은 차림을 하거나 지나치게 화려하여 되레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한 이들이 끌려 나오고 있었다.
고윤은 길을 열어도 꼭 이런 곳을 골랐다며 혀를 찼다. 그는 은헌을 데리고 따라붙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골목으로 파고들었다.
“어디로 갈 텐가?”
“궐로는 바로 못 갑니다.”
일전에 동궁으로 길을 바로 열었다가 사달 난 것을 고윤은 잊지 않았다. 그 뒤로도 어느 정도 가진 재주를 설명하여 경계심을 낮췄지만, 궐로 바로 드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당했다.
“그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야겠군.”
“한성부 관청도 곤란하겠군요.”
가깝다면 그곳이 가장 좋았으나 지금은 들고 나는 이가 많을 때였다. 이 꼴로 가봐야 시선만 끈다.
“벽동에 있는 집으로 가세.”
궐에서는 멀었으나 길을 열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고윤은 고갤 끄덕이곤 곧장 길을 열고 은헌과 함께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빠져나온 곳은 은헌의 사랑채였다. 방문을 열고 나온 은헌은 오랜만에 오는 집을 둘러보았다.
“하룻밤 잠깐 보낸 것 같았는데 벌써 사흘이나 지났단 말인가?”
기이한 상점들이 모여 있던 그 거리와는 반대였다. 세월이 이렇게도 엇갈려 흐르는 곳이 또 있다는 사실에 은헌은 혀를 찼다.
“놀음에 날밤 새우는 줄 모른다더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고윤 역시 동의했다.
피곤함이 몰려들어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잠깐 숨 돌릴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대감!”
떠드는 소릴 들었는지 밖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은헌은 사랑채 문을 열었다. 그는 도통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제집에서 저를 반기는 내관을 보았다.
“대전의 이 내감이 예까지 무슨…….”
내관은 발을 동동 구르며 허겁지겁 달려들 듯 다가왔다.
“송구하오나, 대감. 미주알고주알 읊을 시간조차 없사옵니다. 도착하는 대로 입궐하라는 전하의 명이 있으셨나이다.”
“아바마마께옵서 말인가?”
세자에 이어 주상께서 찾으신단 말에 고윤은 당장 어디라도 달아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은헌이 그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크게 혼이 날 분위기인가?”
은헌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짐작 가는 구석이 몇 곳이나 있다 보니 저절로 기가 죽었다. 그걸 보며 고윤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뱉었다.
“어쨌든 당장 죽지 않을 거란 게 유일한 위안이군요.”
수명이 앞으로도 사십 년은 남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