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22/35)

八。

냉한 기운에 코끝이 시리자 은헌은 몸을 뒤척여 이불을 위로 당기다 멈칫했다. 무언가에 걸린 듯 이불이 무거웠다. 은헌은 반대로 돌아누워 눈을 떴다.

밤을 지새우고 낮에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 탓인지 햇살에 눈이 시렸다.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미 늦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밖을 살피곤 그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보았다.

도성 안에서 그의 수하들까지 데리고 무계동 집으로 조용히 빠져나오기 위해 많은 기운을 끌어다 쓴 탓인지 창백한 얼굴로 고윤이 잠들어 있었다. 한동안 부지런히 먹이며, 지난여름 축낸 살을 다시 찌우느라 고생하였는데, 요 며칠 상간에 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빠진 것이 보였다. 찹쌀떡 같았던 볼마저 야위어 보여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던 은헌은 멈칫했다.

일어나 부스럭거리는 몸짓이 요란했던 건지 얌전히 잠겨 있던 고윤의 눈꺼풀이 흔들렸다. 섬세한 눈꺼풀 아래로 깨끗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은헌은 웃음을 흘렸다.

“나 때문에 깬 것인가?”

멍하니 상황을 파악하듯 느릿하게, 고윤은 잠에서 깨어났다. 비척거리며 몸을 비틀어 모로 눕더니 그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잠든 겁니까?”

“해가 이제야 머리 위에 다다랐으니 그리 오래도 아니네.”

지쳐 쓰러지다시피 잠든 터라 제대로 된 이부자리도 갖추지 못하고 둘이서 홑겹 이불 하나 덮고 눈만 붙인 터였다. 그러나 그 잠깐의 휴식에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온 것인지 한결 나아진 얼굴을 한 고윤은 뻐근한 몸을 움직였다.

두 사람이 일어나자 곧 밖에서 씻을 물을 들일지 총관이 물어왔다.

은헌이 창을 열자, 시중드는 이들이 들어와 서둘러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마른 창포를 우려내어 식힌 물을 가져왔다. 그가 얼굴을 씻고 의관을 바로 하는 동안 고윤은 고개를 돌려 집 뒤쪽의 산을 보았다.

“저쪽도 이제 깬 모양이군요.”

하인들은 화창한 대낮에 유난히도 한 곳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먹구름을 애써 외면했다.

은헌은 잠시 생각하더니 저쪽의 무엇을 이르는 말인지 알아채곤 낮게 중얼거렸다.

“아! 그게 있었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태도였으나 누구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저녁까지는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너무 일찍 알려주는군.”

“그렇게 오래 두면 광인이 될 겁니다.”

“시신이 아니고?”

은헌은 해사한 얼굴로 웃었다. 고윤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죽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더 많은 것을 보게 될지도요. 살면서 지은 죄가 클수록 겪을 일이 많아지거든요.”

제 주위에 있던 이들을 속이고, 혼백을 망량에게 팔아 치웠으니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인간이 아는 세상보다 더 크고, 깊은 곳도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될 터였다.

흔히 말하는 원한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말이다. 혼백은 없더라도 그 원한이 끌어들인 념은 악귀만큼이나 강했다. 놈에게 들러붙은 것은 질척거리는 만큼 쉬이 사라지지 않아 영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오래도록 놈을 따라다닐 터다. 죽어서도 말이다. 그것을 한 번에 볼 수 있도록 눈을 틔워뒀으니 아는 만큼 보일 거다. 순식간에 미치는 경우가 그간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죄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의란 것이 없는 것들은 꿋꿋하게 버텨내기도 했다.

“그럼 당장 꺼내야 하는 게 아닌가.”

“뭣 하려고요?”

고윤은 눈을 흘겨 뜨며 먹구름 낀 곳을 살폈다.

“미치기 전에 물어볼 게 있으니 그러지.”

은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잠시 말을 끌더니 웃었다.

“하긴 일찌감치 꺼내줘 봐야 뭣 할까. 그냥 놔둬도 곧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고 싶어 할 텐데.”

고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지 않게 한 번에 처리하는 게 나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결정해야 했다. 그는 한성부에 누워 있는 다섯 구의 시신을 떠올렸다. 날이 추워 몸이 상하는 것이 느리다곤 하나 언제까지 그렇게 놓아둘 수도 없으니 서둘러 수사를 마무리하고 이제는 보내주어야 했다. 그는 여전히 코끝에 남아 있는 것 같은 지독한 시취에 코를 찡그렸다.

* * *

가볍게 미음을 끓여낸 것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도 세웠다. 그다음에야 귀찮다는 듯 한숨을 몇 번 흘린 고윤은 윤 의원을 꺼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윤 의원을 가둬둔, 집 뒤쪽 산에 허름하게 지은 광으로 갔다. 목판을 가로질러 놓은 것을 빼내자 소름 끼치는 소릴 내며 문이 열렸다.

윤 의원은 그곳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넋이 빠진 낯짝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살펴봐라.”

은헌의 지시에 청지기가 다급히 들어가 의원의 맥을 확인했다.

“대감. 숨이 멎은 듯합니다.”

은헌은 고윤을 보았다. ‘안 죽는다더니.’ 라는 뜻이 담긴 시선이었다. 고윤은 귀찮게 군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허공에 삐져나와 있는, 아니, 끄집어내진 의원의 혼을 붙잡아 좁은 상자 안에 물건을 집어넣듯 꾹꾹 눌러 쑤셔 넣었다.

“자네 그것 좀.”

일전의 일로 지금 고윤이 무얼 하고 있는지 눈치챈 은헌이 미간을 구겼다.

“그나저나 저번처럼 씐 것인가?”

고윤은 시선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 던졌다.

“끌려 나온 겁니다.”

손과 발의 형상만 남은, 그야말로 머물고 붙들기 위해 남은 원념들이 저들 마음대로 산 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자 윤이서의 혼을 붙잡아 빼낸 것이었다. 그만큼 집요하고 강한 원한이라는 소리였다. 산 자의 혼을 빼낼 정도로 말이다.

“컥!”

윤 의원의 숨통이 터졌다. 의원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자 고윤은 혼을 다시 육신에 묶어 넣었다. 한 번 떨어진 혼은 다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전보다 더 쉬웠다. 그가 윤 의원을 살리자 원념들이 원성을 내질렀다.

덜거덩. 덜커덩!

“이 무슨?”

광 안에 들려놓은 물건들이 들썩이자 하인들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고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팔을 뻗어 휘둘렀다. 힘에 짓눌린 원념은 언제 아우성쳤냐는 듯 조용해졌다. 고윤은 다시 윤 의원을 돌아보았다.

“요, 요, 요괴!”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하얗게 질린 얼굴과 손가락질에 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의원에게 해를 입힌 것은 그 자신이 이제껏 벌여온 일이었다. 원한이 차곡차곡 모여들어 숨통을 조이고, 혼을 붙잡아 저승길로 끌고 가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런 강력한 원념을 먹으며 망량이 힘을 키웠다.

퍽!

의원은 갑자기 날아온 발길질에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은헌은 윤 의원을 걷어찬 제 신을 털어냈다. 더러운 것을 털어내는 손길처럼 보였다. 뭘 한 거냐는 고윤의 시선에 은헌은 방긋 웃었다.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아 말일세.”

은헌은 그리 말하며 의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제 목숨 살려준 이에게 망발을 뱉을 리가 있나.”

“애초에 그걸 구분할 수 있는 정신머리가 남은 이가 사람을 망량에게 팔아 치우는 인면수심의, 사람이라면 못 할 짓을 저질렀겠습니까.”

사람에게 기대감이란 것이 그다지 없는 고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긴.”

은헌은 한숨을 내쉬며 손짓했다. 하인들은 곱지 않은 눈으로 윤 의원을 붙잡아 땅에 짓눌렀다.

고윤은 그런 그를 보며 입을 뗐다.

“경 상궁을 아느냐?”

윤 의원의 낯이 굳었다.

“아느냐고 물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삼덕, 김궁, 박문주, 최륜의 그리고 경운.”

고윤의 입에서 이름 하나하나가 나올 때마다 윤 의원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이들을 모르느냐? 백면에게 네 손으로 넘긴 이들이다.”

“아닙니다!”

윤 의원이 소리쳤다. 그는 마른 목에 기침을 뱉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것이냐, 아니면 팔아넘기지 않았다는 거냐?”

고윤의 말에 의원은 거친 숨을 허덕였다.

“저는 그저 그자들에게 돈놀이하는 이를 알려준 것뿐입니다.”

“돈놀이?”

뒤에 서 있던 은헌이 물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 하여, 어디로 가면 돈을 빌릴 수 있을 거라고 그리 알려준 것이 답니다.”

“셈노름 놓는 놈들에게 말이지. 그 꼴을 당하고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고윤은 멀찍이 물려낸 원념이 다시금 윤 의원의 몸 아래 스멀거리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에 혀를 찼다.

한 번이 어렵지, 시작하면 두 번 세 번은 쉬웠다. 원념 때문에 죽는다면, 저승길 문턱에 발 들이기도 전에 혼이 갈가리 찢겨나가 결국, 저가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게 될 터였다.

“나는 네게 저승길 곱게 갈 기회를 주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잘 죽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여전히 많았다. 고윤이 손을 들어 올리자 의원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네가 저지른 죄가 죽는다고 사라질 것 같으냐. 네 명줄 뒤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죽은 자의 손이 몇 개인지나 아느냐? 호시탐탐 너를 죽이려고 아우성치는 것이 말이다. 내쉬는 숨결에도 지독한 피비린내가 나는 네놈에게 남은 운이 얼마나 될 것이라고,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이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윤은 읊조렸다.

“마지막으로 묻는 것이다. 그자들을 누구에게 넘겼느냐?”

의원은 겁에 질린 얼굴로 눈을 굴렸다.

“셈노름 놓는 이가 맞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백면이란 이가 있었습니다.”

의원은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고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면이 투전판 설주인 것은 알지만, 그들이 마주친 것은 망량이었다. 윤 의원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냥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우리가 본 백면이란 놈은 사자탈을 쓴 놈이었다.”

그 말에 윤 의원은 온몸을 떨었다.

“그 요괴 놈!”

“네가 말한 백면이 그놈이 아니냐?”

은헌의 말에 윤 의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혀 다른 놈입니다. 제가 아는 설주와는 다른 낮도깨비 같은 작자였습니다.”

큰판이 벌어진다는 말을 들은 의원은 그리 갔다가 사자탈 쓴 이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전 재산을 홀라당 날린 것도 모자라 빚까지 만들었다.

“빚 대신 사람을 데려오라 했습니다.”

처음엔 그냥 돈이나 벗겨 먹을 놈을 데려오라는 줄 알고, 투전에 미친 이들 중에 몇을 골라 보냈다. 그리고 열흘 뒤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윤 의원은 그 사자탈을 쓴 우스꽝스러운 놈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백면이라고 저를 칭한 작자는 설주의 장부를 들고 다니며, 어느 날부터 사람 목숨을 돈처럼 거두어들였다. 진짜 백면이라 불리던 이는 어느 순간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자가 전면에서 움직였다. 사람을 죽이고, 죽은 이의 손에 피를 묻혀 빚을 갚았다는 수결을 장부에 찍게 한 뒤 낄낄 웃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게 언제지?”

“두 달 전입니다.”

고윤은 눈을 찌푸렸다. 그때쯤이라면 한창 바빠지기 시작했을 시기였다. 왕실 혼례에 관한 일 자체를 예조와 한성부에서 나눠 주관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혼사에 매달리다 보니 우습게도 그가 자연스레 지금의 일을 맡아 일을 처리하게 된 것이었다.

“그 뒤로도 사람을 데려오라 했고, 소개해 줬더니 죽었단 소리만 돌아왔습니다.”

의원은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검계를 피해 여기저기 다니다가 혜민서에서 일할 때 알게 된 의녀의 도움을 받아 경 상궁의 집에 숨어들었다. 대비전의 비호를 받는 노상궁이란 말에 안심하며 의원 노릇을 했다.

“그때 경 상궁이 매병을 앓고 있단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눈이 휘돌아갈 만큼 재산 꽤 모아둔 병자였다.

“그래서?”

고윤은 고개를 기울였다. 의원은 눈을 내리깔았다.

“패물을 하나씩 빼돌렸습니다.”

위협을 느껴 숨은 주제에 주머니가 차니 다시 간이 커졌다. 날밤 새우는 줄도 모르고 경 상궁의 패물을 훔쳐 돈으로 바꾸고 그 돈을 들고 투전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또다시 마주쳤다.

“이자가 태산처럼 불어나 이제는 목숨으로도 감당하기 힘들겠는데.”

백면은 그리 말하며 내달부턴 곧 죽을 사람을 데려오라 말했다. 죽을 이를 필요로 했다는 말에 고윤은 헛숨을 삼켰다.

“그래서 의원 노릇 하며…… 아픈 이들을 보냈습니다.”

의원은 거기까지 말하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전부 올해를 못 넘길 이였습니다.”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저를 살릴 구명줄이 되어 덕을 쌓으면 좋지 않으냐고 의원은 그리 생각했다.

* * *

고윤은 밖으로 나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구역질나는 인간에게 벗어나니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심경이었던 것인지 연신 숨 고르기에 바빴다.

“괜찮은가?”

은헌은 고윤의 안색을 확인했다.

무엇 때문인지 추운 바람에 땀을 흘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손을 들어 은헌은 고윤의 젖은 이마를 문질렀다.

“쉬는 게 좋겠네.”

고윤은 은헌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등과 허리를 반듯이 폈다.

“곧 움직여야 하니, 다 끝내놓고 쉬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겁니다.”

육신의 피곤함이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함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심정이야 어찌 됐건 고윤은 최대한 반듯하게 섰다. 흐트러지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자신을 다독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은헌은 한숨 섞인 웃음을 흘리곤 등 뒤에 닫힌 광을 보았다. 요즘 들어 광에 곡식 대신 사람을 가둬놓는 횟수가 늘어난 것에 기분이 묘했다. 은헌은 다시금 고윤을 보았다. 한시라도 빨리,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은헌은 고윤의 앞에 앉아 등을 내밀었다.

“업히게.”

“대감?”

은헌은 고개를 돌려 고윤과 눈을 마주쳤다.

“내려가는 길이 올라오는 길보다 험하여 그 상태론 굴러갈 듯하여 그러네.”

“지금 굴러떨어질 거라고 악담하시는 겁니까.”

고윤이 코웃음을 쳤다.

“그냥 내려가겠습니다.”

은헌은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그러곤 성큼 고윤을 붙잡아 안아 들곤 옆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석삼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서 있던 이들이 동시에 고윤을 붙잡아 허공에 띄우는 것을 보며 은헌은 뒤로 돌아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하인들이 고윤을 은헌의 등에 강제로 가져다 붙여두었다.

고윤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무슨!”

은헌은 고윤을 받친 팔에 힘을 주어 위로 들썩거렸다. 허둥지둥하던 고윤은 두 팔로 그제야 은헌의 목을 꽉 붙잡았다.

“대감!”

당황하여 내지른 고윤의 부름에 은헌은 손에 힘을 줬다.

“머리가 복잡할 때 움직이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없지. 크게 일 한 번 쳐 보니 배운 바가 없지 않아.”

혼란스러울 때는 잠시 숨을 돌리자, 은헌은 자신이 배운 바를 실천했다. 고윤은 뭐라 말할 듯 입을 열었다가 그냥 은헌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높은 산에 오르기 전에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단숨에 가면 지쳐 사고가 난다지 않던가.”

은헌은 타이르듯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

“지금은 산에서 내려가는 길이니 숨 안 고르고 가도 될 텐데요.”

“가다 얼음 낀 계곡에 수욕이라도 하고 싶은 게 아니면 좀 닥치게.”

고윤이 조용해지자 은헌은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산에서 내려온 은헌은 사랑채에 들어서야 고윤을 내려주었다.

“앉게.”

“대감. 시간이 없습니다.”

“아직 죽을 날까지는 한 해가, 아니, 삼백 일이 넘게 남았네. 차 한 잔 마시고 간다 해도 늦지 않아.”

은헌은 담담히 웃으며 창을 열곤 밖에서 기다리는 총관에게 차를 내어오라 일렀다. 기다렸다는 듯 곧장 화로와 찻물이 들어왔다.

은헌은 사람을 물린 뒤 직접 차를 우려내어 고윤에게 건넸다. 차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인 뒤에야 은헌이 입을 열었다.

“일전에 그 망량을 보았을 때, 자네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였네. 그자가 자네도 감당키 어려운 존재인가?”

은헌은 도깨비를 보았고, 신선이 되고자 수련을 한다는 이도 보았다. 고윤은 그들에게 공손하긴 했으나 어려워하는 기색은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 옴짝달싹 못 하는 것이 이상하다 여기긴 했다. 은헌이 아는 고윤은 굉장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막고 있다 해서 돌파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손쓸 수 있었다면 분명 그때 처리하였을 터다.

“그때야 실체를 알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지요.”

고윤은 차를 홀짝이며 답했다.

“알아서 무서운 것이 있고, 알고 나면 별것 아닌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체를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했다. 정체를 알게 되면 다루는 방법도 알게 되니 말이다.

은헌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했다.

“그럼 적을 알았으니, 붙잡을 것인가? 아니면 물리칠 것인가?”

“돌려받을 것이 있으니 붙잡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붙잡는다면 저번과 방법을 달리해야 하네. 고윤 자네가 그곳에서 힘을 쓰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은헌은 담담히 물음을 이어나갔다. 고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답을 내놓았다.

“그곳에 있는 수많은 요괴가 백면이란 자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였기에 무언가 있구나 싶어 섣부르게 움직이지 못한 것이었지요.”

움직인다면 자신만 다치는 게 아니라 은헌 역시 다칠 수 있으니 말이다.

은헌이 다시 물었다.

“그럼 저번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여전히 그곳은 요괴들로 우글거릴 테고, 백면은 자신이 만든 놀음판에 우리를 끼워놓고 농락하기 바쁠 터인데.”

“하여 이번엔 저 혼자…….”

탕!

은헌은 으름장을 놓듯 찻잔을 상에 내려놓았다.

“그러지 말게.”

고윤은 눈을 껌벅거렸다.

“남은 것이 얼마든 살다 가고 말지, 자네 혼자 그곳에 보낼 수는 없네.”

“하오나 대감.”

은헌은 서늘한 얼굴로 고윤을 응시했다.

“자네가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내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은 아네. 그렇다고 하여 자네에게 무작정 다 떠맡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자네도 한낱 인간일세. 피 흘리며 다칠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낮았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놈이 지난번 삼을 태워 자네의 육신부터 속여 넘겼던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한데 어찌 자넬 그냥 보내!”

고윤이 눈을 찌푸렸다.

“뭘 태워요?”

“삼 말일세. 삼베를 짜내는 그 풀.”

고윤의 눈동자가 바삐 돌아갔다. 은헌이 그 얼굴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 말 하지 않았던가?”

“처음 듣는 것입니다.”

은헌은 곰곰이 기억을 되짚다가 멍하니 신음을 뱉었다.

“그날 욕탕에서 말하려다 자네가 나한테 놈의 부탁을 들어주네, 마네, 헛소리하였기에. 내 열이 뻗쳐…….”

고윤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하?”

이내 그의 입에서 헛숨이 터졌다.

“미안하네. 내 말한 줄 알고 여태 잊고 있었지 뭔가.”

은헌은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사과했다. 그러자 고윤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보게, 고윤?”

미친 것처럼 웃어대는 고윤이 걱정되어 은헌은 조심스레 불렀다.

“그렇게 화가 난 것인가?”

고윤은 한참이나 웃다가 뚝 그쳤다. 그리곤 고개를 들었다.

“대감.”

“그래. 말해보게.”

“저는 그날 그 냄새를 맡지 못했습니다.”

은헌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럴 리가? 그토록 지독한 냄새를 어찌 못 맡아?”

“맡지 못하게 만든 것이겠지요. 그놈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도성에서 사람을 해치면 저를 보게 된다고.”

백면이 고윤에게 아는 체하였던 것을 떠올린 은헌이 혀를 찼다.

“그자가 자네가 올 것을 대비하였단 말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겁니다. 다만, 그놈이 쓴 방법이 무엇이든 제 눈을 속이긴 했겠지요.”

고윤은 입꼬릴 뒤틀었다.

“무엇을 위해 말인가?”

“보통 눈을 속인다는 것은 들키지 않기 위해섭니다. 숨긴 것이 알려지면 치명적이기 때문에요.”

은헌은 눈을 굴렸다.

“자네가 백면을 건드리지 못한 것은 거기 있는 요괴들이 지나치게 말을 잘 들었기 때문이라 했지?”

“예. 헤아리기도 힘든 오랜 세월을 살았을 이들이 어린 짐승처럼 말을 잘 들었지요.”

어렴풋하게나마 수상쩍다 여겼던 부분이 슬슬 실체를 보였다.

“하면 말일세. 그것들이 죄다 가짜라면 말이지…….”

은헌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놈의 허장성세에 속아 대감도 저도 목숨만 잃고 온 것입니다.”

사기를 당해도 제대로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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