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
고윤은 한성부 관청에 갈 채비를 마치고 방 밖으로 나섰다.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알아냈으니, 본격적으로 뛰어다닐 수 있었다. 고윤은 집을 나서기 전에 우선 은헌을 보러 갔다. 은헌 역시 의관을 갖추고 있었다.
“바쁘십니까?”
“아니네. 내가 할 일이 뭐가 있다고.”
고윤은 마당을 오가며, 새벽부터 부지런 떠는 청지기들을 보았다.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벽동에서 머물겠다는 소리에 하인들이 무계동에서 필요한 짐을 수레에 날라 오고 있었다. 그 짐 나르는 이들 틈에 섞여 무계동에서만 머물던 칼 쓸 줄 아는 이들이 대거 도성 안으로 옮겨 오고 있었고 말이다.
은헌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주변을 물리고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말에 은헌은 사랑채 주위에서 사람을 물러나게 했다. 고윤은 주위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조용해지자 그는 은헌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고윤은 맑은 정신으로 어제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감께서는 대비마마께서 궁관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은헌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쪽은 확실해질 때까진 건드리지 않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고윤은 담담하면서도 냉정하게 답했다.
“어제 대감과 제가 보았던 백면이란 자의 정체가 망량이라면요.”
은헌의 눈이 조금 커졌다.
“망량? 그것 또한 도깨비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고윤은 고개를 저었다.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저는 둘을 구별하여 부르는 편이고요. 애초에 그런 존재에 대해서 인간인 제가 다 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만, 구분하여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윤이 망량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개 인간의 끝도 없는 원한과 비통함을 뒤집어쓰고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그것들은 사람을 해치고 혼백을 빼앗아 버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래서 더 잔혹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어떤 목숨이든 장난처럼 가볍게 여기기에 말이다.
그리 말하며 그는 짧게 숨을 뱉었다.
“여태껏 저는 총오가 죽은 노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궁관이라 여겼지요. 적어도 당언문을 쓸 줄 알고, 대비마마의 자호를 들어본 이어야 할 테니까요. 한데 행적이 끊긴 노상궁은 죄다 서너 살 때부터 궐에 있었고, 대비마마께옵선 알려지길 지방 수령관의 여식으로 열셋에 경에 올라왔고 열여섯에 후궁으로 입궐했다 하여 접점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대비가 《선보》에 기록된 것처럼 열여섯이란 나이에 궐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면, 생각시 시절부터 궐에서 자랐단 소리였다. 그리고 나이만 따져 본다면 딱 한 사람과 입궐 시기가 겹쳤다.
“대감께선 경 상궁에게 대비마마의 자호를 들었다 하셨고요.”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은헌은 고윤이 최대한 말을 골라내어 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총오의 정체가 경 상궁일 수도 있다?”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렇다고 하면 이제껏 이유를 알 수 없던 것을 또 하나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제 제가 셈을 치르지 않고, 도망쳐 볼까 하여 힘을 움직이자마자 제게 살(殺)이 날아든 것을 기억하십니까?”
은헌은 그의 등 뒤에 있던 고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베였던 것을 떠올렸다.
“그 칼날 같았던 바람.”
“예. 그것입니다.”
고윤은 날이 밝자마자 일어나 지난밤 엉망이 되었던 옷을 살폈다. 지금껏 혼백을 발견하지 못했던 텅 빈 시신에 남은 흔적과 똑같았다.
“제가 대감께 백면이라고 불리는 설주의 악랄한 수법에 대해서도 알려 드린 바가 있을 겁니다. 놈은 먼저 목숨을 빼앗고, 그 뒤에 빚을 돌려받는다고요. 노파가 생전 백면에게 빚이 생겼다면 분명 그 살에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은헌이 눈을 찌푸렸다. 노파의 정체가 경 상궁이 될 수도 있으니 그다지 반가운 소린 아니었다.
“그래. 자네 말대로라 하세. 한데 그것으로 무엇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고윤은 어둑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궐에 머물렀던 나흘 중에 백면의 것과 같은 요기를 품은 것의 흔적을 희운당에서 보았습니다.”
밤마다 궐을 떠돌아다니는 생각시 귀신이 남겨놓고 간 흔적이었다.
“그리고 혼백은 생전 자신이 오래도록 머물렀던 곳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결계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니까요.”
은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니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더더욱 확실히 하여야 합니다.”
죽은 노파가 경 상궁인지, 경 상궁이라면 대비와 어린 시절 같이 자란 것이 맞는지, 그게 맞는다면 다른 물음에 대한 해답들을 찾아야 했다.
그 동귀가 경 상궁인지, 경 상궁이라면 혼백 스스로가 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아니면 망량이 그 혼백을 풀어준 것인지, 망량의 짓이라면 목적이 무엇인지 말이다.
은헌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할마마마께서는 그리 좋은 출신은 아니셨지. 양인조차 아니었다 들었네. 생각시로 들어와 침방 나인을 거쳐 대전 지밀이 되었고, 그러다 선왕이신 할바마마의 총애를 받아 승은 상궁이 되어 직첩을 받았다네. 그 뒤엔 회임하시어 아들을 낳으셨고. 당시 중전이었던 원덕 대비께서 승하하신 뒤, 세자 책봉을 앞두고 계신 부왕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빈에서 중전으로 책봉하였다 들었네. 그때 기록을 고쳤다고 했어. 명색이 왕세자의 모후에다 중전 되실 테니 집안 내력이 불분명하면 곤란하거든. 그래서 내력을 바꾸었다네.”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다. 은헌은 고윤이 대비에 대해서 알아내고자 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시바삐 경 상궁의 행방을 뒤쫓아보겠습니다.”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특정한 여러 명의 행방을 찾아 사방을 들쑤시는 것보다 하나를 집중적으로 찾는 것이 더 빨랐다.
* * *
“어떤가?”
“같습니다.”
고윤은 제 도포와 죽은 시신의 옷자락을 비교한 오작인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폭이라든가 찢어진 모양이 온전히 일치하는 것도 몇 개 있었습니다. 혹여 흉수를 만나셨습니까?”
곁에서 기록하며 지켜보고 있던 서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윤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 붙잡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누군지 의심 가는 이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 아닙니까.”
요즘 계속해서 투전판을 돌아다녔던 군관 중 하나가 반색했다.
“잡아들일까요?”
“……그리는 안 될 듯하네.”
그 말에 주위에 서 있는 이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을 굳게 붙이고 눈짓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고윤에게까지 이 일이 넘어왔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확실해질 줄 몰랐던 탓이었다.
“하면…….”
“그쪽은 내 알아서 할 터니 염려 붙들어 매고, 알아보라 한 것은 어찌 되었는가?”
서리가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넘겼다. 팔락팔락 넘어가는 종이의 끝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더듬더니 이내 멈춰 고윤에게 건넸다.
“나리의 말씀대로 각 마을에서 올라온 보고 중 비슷한 연배의 노파가 사라진 곳을 뒤져, 경 씨 성을 가진 이가 있는지 알아보았더니 딱 한 명이 나왔습니다. 이웃에게 물어보니 그쪽 또한 경 상궁처럼 갑자기 세간을 처분하고 사라졌다고 하고요. 노파를 잘 아는 이가 없느냐 물었더니, 이웃 아낙이 자신이 노파의 병시중을 들어준 적 있다기에 확인코자 불러들였습니다.”
고윤은 남은 보고를 읽다 고개를 들었다.
“시일이 많이 지나 시신의 상태가 나쁘니, 판단을 잘하여야 할걸세.”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낙의 말로는 경 씨가 손목에 통증이 있어, 수양딸이 의원을 데려와 뜸을 놓은 적이 있는데 그때 손등에 화상을 입어 흉이 생겼다 합니다. 손등이라면 살집이 적어 그나마 무탈하니 신원 확인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윤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이 끝나는 대로 곧장 알려주게.”
“염려 마십시오.”
서리가 단단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손대기 어려운 곳에 정범이 있다면 남은 것은 고윤에게 맡겨두고, 그들은 잘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되었다.
“아.”
고윤은 다시 보고 내용을 읽다 뒷걸음질로 물러나려는 서리를 불렀다.
“내가 따로 조사하라 일렀던 일은 어찌 처리했는가?”
서리는 고개를 갸웃하다 무엇을 알아챈 듯 재빨리 다가와 수첩을 넘겨 원하는 내용을 찾아주었다.
“아이의 시신은 다 찾았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도 알렸습니다. 그놈은 포청에서 남은 죄를 심문한 뒤 죄질에 따라 처벌이 결정될 것입니다.”
고윤이 붙잡아 와 포청으로 넘긴 왈짜 중 김춘배라는 이에 관한 조사였다.
“여러모로 시간이 촉박하였을 텐데 고생했네.”
“아닙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고윤이 손을 저어 축객령을 내리자 모두가 빠르게 물러났다.
고윤은 궐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미간을 찡그린 뒤 다시 사무에 집중했다. 그가 알아낸 일의 대부분은 기록으로 남기기 어려워, 사건을 정리하고 보고 올릴 내용을 짜 맞추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그는 경 상궁을 제외하고 앞서 발견된 넷의 신원과 호적에 오른 집의 위치를 확인했다. 주변인들을 수소문한 보고도 이미 올라와 있었다.
주변의 말로는 딱히 투전판과는 연관 없는 이들이었다. 한 가지 특징이라면 죄다 숙환 2)을 앓아 가세가 기울었고,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는 거였다. 식솔을 포함해서 죄다 말이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하다 그 망량과 연관되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살았던 곳과 죽어 발견된 장소를 따로 정리한 뒤 고윤은 일어섰다.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듯했다.
시신이 있던 곳은 망량이 있던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일종의 생문이었다. 출입구가 꼭 같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곳으로 통하는 무언가 작은 단서가 남겨져 있다면 반드시 찾아야 했다.
고윤은 한성부를 나서기 전 서신을 적어 은헌이 머물고 있을 벽동 집으로 보냈다.
* * *
은헌은 좁은 담장이 둘린 초가집을 보곤 이미 열려 있는 대문을 확인했다.
방 한 칸짜리 집이 도성에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제대로 관리조차 되지 않은 듯 썩어들어 가는 지붕과 갈라진 흙벽, 닳고 닳아 덜렁거리는 문틀 위에 제대로 붙어 있지도 않은 창호지까지 한숨 나오는 것뿐이었다. 그는 마당 가운데서 집을 둘러보고 있는 이에게 다가섰다.
“여기가 맞는가?”
고윤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알아낸 바로는요.”
은헌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경 상궁이 어떤 이였는지 잘 아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어렸을 적만이 아니라 커서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궐에서 일하는 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가진 재물도 넉넉하였을 텐데 이토록 빈궁한 살림이라니 헛숨만 연거푸 새나왔다.
“이웃한 이의 말로는 수양딸이 가끔 들여다보고 대부분 시간을 집 안에서 보냈다 하더군요.”
“안은 살펴보았는가?”
고윤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이사 간다고 어지간한 세간살이를 다 털어 빼갔다 하니 빈집이라고만 들었습니다.”
“수양딸이 말인가?”
고윤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헌은 성큼 앞으로 나서 바람도 제대로 못 막을 문을 열어젖혔다. 고윤의 말대로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깨진 구들장을 확인한 그는 다시 한번 실소를 터뜨렸다.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을 텐데 이토록 엉망이라니, 꼬장꼬장하였던 경 상궁의 성정에 가당치도 않았다.
“정말로 이곳에 사는 이가 경 씨 성을 쓰는 노파였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흔한 성씨가 아니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네. 대비전에서 가장 깐깐한 이를 꼽으라면 나는 단박에 경 상궁을 말했을걸세. 지금 궐에 있는 상궁 중 경 상궁의 밑에서 배우며 자란 이들도 대부분 그리 말할 거야. 자넬 가르쳤던 임 상궁 보다 열 배는 더 꼬장꼬장했단 말이네.”
은헌의 말에 고윤도 다시 방을 살폈다. 임 상궁을 겪어보았기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씀하신 바가 맞는다면 확실히 이상하군요. 그러나 그 노파가 이곳에 살았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웃 아낙이 노파의 시신을 확인해 주었다. 더 물어보아야 할 것이 많았으나 아낙도 자세한 사정은 몰랐다. 그래도 이웃이라 조금이라도 더 살펴주려 했지만, 얼굴 마주칠 일이 없으니 자연스레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다.
“건질 것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살펴보도록 하죠.”
“그게 좋겠네.”
고윤도 보고만 받았을 뿐,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바깥을 맡을 테니 자네가 안을 살피게.”
은헌은 그리 말하곤 집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윤은 어깨를 으쓱하곤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남산골의 그의 집과 그리 다르지도 않았다. 그의 집이 이 정도란 소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양쪽으로 난 문이 보였다. 한쪽은 부엌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남은 하나는 낮은 다락으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이불이나 살림을 넣어두고 벽장처럼 쓰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고윤은 우선 다락문부터 열었다. 그는 문을 열기 무섭게 훅 끼쳐 오는 짙게 밴 찌든 내에 손을 휘저어 냄새를 날렸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 그런지 빛이 들지 않는 곳은 캄캄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숨을 들이 삼켰다. 술에 취해 주정뱅이가 오줌을 싸 갈겨도 이리 심한 냄새는 아닐 것 같았다. 그가 보았던 보고에 이런 말은 없었다. 고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움직였다. 안력을 돋우자 보이는 것이 달라졌다. 그는 소매를 뒤져 초를 꺼내고, 부싯깃을 꺼내 불을 붙여 주위를 밝혔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눈에는 한낮 햇볕을 쏟아부은 것처럼 주변이 환하게 드러났다.
“하!”
고윤은 헛숨을 뱉었다. 캄캄한 저 안쪽으로 그가 전에 보았던 당언문으로 쓰인 글씨가 보였다. 손톱으로 힘껏 갈아댄 것 같은 벽과 문틀의 자국이 심상치 않았다. 벽에 발린 것처럼 눌어붙은 종이도 있었다. 고윤은 허리 높이의 다락으로 몸을 욱여넣듯 들어갔다. 안으로 갈수록 불쾌한 냄새가 그득하였으나 손짓 한 번에 사라졌다. 그는 안에 남은 것들을 빠짐없이 챙겼다. 바닥을 짚으며 안으로 들어가다가 그는 멈췄다. 이상한 얼룩이 수상쩍어 손대기도 싫을 그 바닥을 고윤은 천천히 손끝으로 눌렀다가 떼었다.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소매를 털어냈다. 퍽 소리와 함께 손바닥 길이의 단도가 떨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두텁게 바른 바닥을 얕게 도려냈다.
아래에 깔린 것은 조각 천에 싼 간찰 뭉치였다. 고윤은 겉봉을 살폈다. 누가 보내고 누가 받았는지는 그곳에 적혀 있을 터다.
-총오에게 청목이 보내네.
고윤은 벽에 시선을 던졌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
죽은 노파의 정체가 경 상궁이 확실한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었지만, 총오란 자호로 불린 이가 다락에 갇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게서 뭘 하는가?”
고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은헌이 머리를 다락 안에 들이밀고는 눈을 깜박였다.
“잠시 물러나 계십시오.”
은헌이 몸을 뒤로 물리자 고윤은 뒤로 기어가듯 천천히 다락에서 몸을 뺐다. 장정 하나가 편히 몸을 움직이기에도 불편한 좁은 곳이었다.
은헌은 고윤이 손에 쥐고 나온 것을 보았다. 얼룩진 종이 뭉치였다. 어디에 있던 것을 꺼내온 건지 벌레가 알을 깐 껍데기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대감과 제가 찾던 이가 이곳에 살긴 살았던 모양입니다.”
그 말에 은헌은 다시 다락 안쪽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안에서 말인가?”
고윤은 대답 대신 팔을 뻗었다. 은헌은 잠시 움찔하였으나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자 고윤은 손바닥을 펼쳐 은헌의 눈앞을 가렸다가 떼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직접 보시는 것이 빠르실 겁니다.”
갑작스럽게 밝아진 시야에 은헌은 연신 눈을 깜박거리며 적응했다.
“이것 참, 캄캄한 밤중에 산길로 다녀도 길 잃을 염려는 없겠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가 저물어 어둑한 집 안인데도 지나치게 잘 보였다.
“힘들게 밤에 산은 왜 탑니까. 그냥저냥 책 읽을 때나 쓰는 것입니다.”
고윤은 퉁명하게 대꾸하곤 옆으로 비켜섰다.
은헌은 그 말에 코웃음 치곤 다락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고윤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입에서도 실소가 흘렀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리운 산천이 아른거린다. 몸뚱어리는 관짝 안에 갇혔으나 혼만은 훨훨 바람을 타는구나.”
읽는 법을 알고 있기에 은헌은 순식간에 가까운 곳에 보이는 글귀를 읽었다.
“이름을 잃어버렸구나. 누구도 불러주지 않아 기억해 내지도 못하니 슬프기 짝이 없다. 어릴 적 동무에게 맡겨놓았던 이름이라도 생각나면 좋을 것을.”
손자국이 덕지덕지 남은 글귀를 읽는 은헌의 얼굴에서 온기가 점점 사라졌다.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하여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더니.”
은헌은 다락 안에 남겨진 글을 다 읽은 뒤 낮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나오지 않은 게 아니라 나오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밖으로 나오기 위해 긁어댄 손톱자국에 배여 있는 고통은 설명하지 않아도 생생했다. 고윤은 다락문 바깥 문고리에 남은 흔적들 역시 보았다.
“병자를, 멀쩡한 것도 아닌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다락에 가둬둔 그 수양딸이란 이가 누군지 심히 궁금해지는군.”
은헌은 이를 갈 듯 뱉었다.
“저도 몹시 궁금합니다. 그러니 이것도 마저 읽어봐야지요.”
고윤은 조금 전 다락에서 가져온 것들을 손으로 들어 흔들었다.
“다락에 숨겨져 있던 겁니다.”
이 집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단서였다.
서신에 습한 곰팡내가 눅눅히 배어 있었다. 그러나 은헌은 스스럼없이 고윤의 손에 있는 것을 나누어갔다. 고윤은 제 몫으로 남겨진 것의 겉봉을 열고 내용물을 꺼내어 펼쳤다.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한문으로 쓴 것과 언문으로 쓴 것, 당언문이 뒤섞여 있는 것도 있었지만, 크게 헷갈릴 정도는 아니었다.
“역시 경 상궁이 맞았군요.”
고윤은 제가 읽은 서신 첫머리에 적힌 것을 확인했다. 은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여기도 그리 적혀 있네. 그나저나 경 상궁이 매병을 앓았던 모양이군.”
첫 번째 서신을 읽고, 두 번째 서신을 읽던 은헌의 말에 고윤은 고개를 들고 들이밀었다. 고윤이 보기 편하도록 은헌은 팔을 움직여 비스듬히 서신을 기울여 줬다.
종이가 아까워 여기저기 가릴 것 없이 쓴 것이 아니라 깨끗한 종이 위에 유려한 서체로 쓴 대비의 편지였다. 매병에 걸려 궐 밖에 나가게 된 것을 염려하고, 병치레해야 하는데 주위에 도울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며 패물을 같이 보내었다, 되어 있었다.
“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이 있음에 그나마 다행이라 했는데, 어째서 이곳으로 경 상궁이 옮겨진 것일까?”
경 상궁이 살던 곳과 이 집은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매병에 걸려 기억을 점점 잃기 시작한 사람을 속이는 일이야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울 겁니다.”
고윤은 냉정하게 짚었다. 대비와 가까이 지내며 모셨던 이가 이렇게나 궁핍한 곳에서, 그것도 제대로 된 방이 아닌 다락에 갇히기까지는 많은 일이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끝내 망량에게 죽기까지도 말이다.
은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 상궁이 본래 살던 집이 어딘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이 서신을 보낸 질녀도 만나봐야겠고요.”
고윤은 대비가 보낸 것만큼은 아니지만, 깨끗하게 적혀 있는 편지를 은헌에게 넘겼다.
“드난꾼 3)을 통해 안부를 들었다? 홀로 적적하게 계신 것을 염려하여 사람을 보냈고.”
“이쪽 서신에도 수양딸에 관한 말은 없습니다.”
모실 딸이 있는데 혼자 계신 것이 염려스러울 일이 무에 있을까, 고윤은 수상한 부분을 조목조목 정리했다.
* * *
아이의 작은 걸음이 좁은 보폭으로 이어졌다.
땅따먹기 하듯 깨금발로 가볍게 뛰어 생각시는 손을 뻗어 기둥을 붙잡고 근방을 살폈다. 생각시의 표정이 멍해졌다. 기억에는 이쪽에 제 키만 한 작은 나무가 있었던 것 같은데 키보다 훌쩍 자라 저 위로 솟은 나무가 있는 낯선 풍경이 아이를 반겼다.
‘이상하다, 예가 맞는데.’
약속한 곳이었다.
교육을 받느라 정신없이 바쁘던 와중에도 시간 날 적마다 벗과 뛰어다니던 곳이라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도 아니면 어쩌지?’
생각시는 고개를 숙이고 울상을 지었다.
‘아야!’
생각시는 제 팔에 남은 상처를 봤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상처가 가득했다. 있는 줄도 몰랐으면서 상처를 보고 나니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소매로 꾹꾹 누르며 아이는 울음을 참았다.
저가 울면 곧 찾아올 벗이 더 속상해할 것이 뻔했다. 전에 손에 불똥이 튀어 화상을 입었을 때도 아픈 저보다 더 펑펑 울지 않았던가. 어깨를 들썩이며 생각시는 눈물을 참았다.
“마마!”
아이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세웠다.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소리를 뒤쫓다가 생각시는 가까운 마루 아래로 몸을 구겨 넣었다. 어느 전각의 마마인지는 몰라도 밤중에 이리 나와 돌아다니는 것을 들키면 크게 혼이 날 게 뻔했다.
사락사락, 바닥에 치맛자락 이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빛이 아른거렸다. 흔들리는 등불에 그림자가 움직였다. 들킬세라 생각시는 좁은 마루 아래로 몸을 잔뜩 욱여넣었다. 웅성거리던 말소리가 가까워졌다.
“여긴 그다지 바뀌지도 않았구먼.”
생각시의 눈이 커졌다. 벗의 목소리였다. 말투가 퍽 이상하긴 했으나, 자신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폈다. 사람들이 많아 벗이 어디에 있는지 한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 회화나무도 내가 심은 것이라네.”
‘우리가 심은 건데.’
아이는 입을 비죽였다.
“내 벗과 함께 심었지. 따뜻한 날인데도 무척 고생했었는데.”
저의 공을 빼놓지 않고 말해주는 것을 보니 제 친구가 확실했다.
“아득하고…… 그립고, 그리운 날이야.”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마마, 이만 처소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해시가 지나니 밤바람이 차가워졌습니다.”
“그래, 이만 돌아가세.”
‘안 돼.’
아이는 벗을 데리고 가려는 이를 원망하였다. 벗은 저를 만나러 온 것이 분명했다. 약속하였다. 매번 만나는 그곳에서 보자고 말이다. 멀어져 가는 발소리에 생각시는 마루 아래를 빠져나왔다.
들켜서 꾸중을 듣고, 종아리에 빨간 줄이 생기더라도 벗을 붙잡아야 했다. 생각시는 사라져 가는 발소리를 뒤쫓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