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2부 생우요록(省憂要錄) 5권) (19/35)

五。(2)

“하나 뽑으시지요.”

은헌은 어느 사이에 제 앞에 불쑥 나타나 작대기들을 내민 백면을 보았다. 하는 짓은 그렇게 위험할 것이 없어 보였으나 딱히 좋은 느낌을 주는 이가 아니었다. 특히나 저를 샅샅이 훑어내는 것 같은 집요한 시선이 걸렸다. 은헌은 고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고윤이 고개를 까닥였다.

은헌은 입을 여는 대신 신중하게 작대기 하나를 골라 들었다. 그의 입에서 침음이 새어 나왔다.

미인(美人)이란 두 글자가 선명했다.

* * *

“미인의 차례로군.”

뱀이 우글우글 뒤엉킨 머리를 한 것 같은 그림자의 주인이 가느다란 쇳소리로 중얼거렸다. 은헌은 저가 있는 위치에서 허공에 나타난 윤목 1)을 낚아챘다. 승경도알을 쥐고 굴리며 그는 매서운 눈으로 종점을 살폈다.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술과 시를 짓고, 각 명소에 어울리는 무언가를 해가며 유람하는 놀음이라 그는 빠르게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대감께서는 어떤 판이 벌어지든 이기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놀이가 시작되기 전 들었던 고윤의 충고대로 은헌은 최선을 다했다. 한 번에 끝내지 않으면, 다음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가마가 아니라 오를 생각이 없나?”

뒤에서 은헌을 바짝 뒤쫓아 오는, 정체가 뭔지 그림자를 보고도 파악하기 힘든 날카로운 기세의 괴이한 것이 빈정댔다.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승려’를 뽑은지라 ‘미인’인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거나 같은 칸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거였다. 덕분에 놈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

은헌은 제 주변에 우글거리는 수상쩍은 이와 달리 뒤에서도 앞에서도 멀지 않은 딱 중간만큼 하고 쫓아오는 고윤을 보며 주령구를 높이 던져 올렸다. 도깨비감투를 쓴 것 외에 이렇다 할 능력이 없는 그로서는 처음 이야기 나눴던 대로 재빨리 판을 끝내고 이 유람도에서 나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나무로 만든 주령구가 그의 손을 떠나 데굴데굴 굴렀다. 판 위에 말로 오른 이들의 시선이 모두 주령구에 닿았다.

“운이 좋군요.”

백면은 주령구에 나온 것을 큰소리로 외치며 사방에 확신시켜 주었다. 은헌은 성큼 걸음을 걸어 규칙대로 종점에 다다랐다.

“정말로 운이 좋군.”

대다수가 손뼉을 치며 은헌의 승리를 축하해 줬다. 은헌은 뒤를 돌아봤다. 백면은 히죽 이죽거리면서 남은 이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았다. 제일 뒤에 있던 이가 창백한 낯으로 신음을 흘렸다. 고윤과 은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이를 보며 놀려댔다.

“좋아, 좋군요!”

백면은 커다란 사자탈을 흔들며 가까이 다가섰다. 은헌은 제 얼굴에 들이밀듯 가까이 붙은 가면 너머를 경계했다.

“그럼 이제 셈을 치러야지요.”

은헌은 고윤이 돈을 가져왔는지 몰라 걱정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두 번째니, 십 년인가? 목숨 날아가는 것도 한순간이군.”

“그 정도는 눈 한 번 깜박이면 훅 지나갈 새지요.”

은헌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뒤에 있던 요물은 날카로운 손톱이 돋보이는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 뱃가죽에 박아 넣고 휘적거리더니 이내 주먹만 한 구슬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그대로 백면의 손에 넘어갔다. 그 뒤를 이어 세 번째로 선 이도 마찬가지였다. 은헌은 미간을 구기곤 고윤을 보았다. 빚을 지겠다 했지만, 돈이 아니라 수명이 오가는 판인 줄 몰랐던 것은 마찬가지라 고윤의 표정이 어둑했다.

하나둘 제 수명을 잘라내듯 꺼내 백면에게 넘기며 판을 벗어났다. 어느 사이엔가 고윤의 차례가 돌아왔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커졌다.

“고윤 선생.”

백면은 태연히 고윤을 불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날 아는군.”

“그럼요. 알고말고요. 이쪽에서 그대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요? 도성 바닥에서 사람을 해치면 고윤 선생이 찾아온다며 소문이 파다한 것을요. 하여 언제고 이렇게 걸려들 줄은 알았죠.”

백면이 말할 때마다 사자탈이 흔들렸다.

“고윤 선생이 내놓을 목숨값은 이백 년입니다.”

삼대를 살아도 쉬이 감당하기 어려운 세월이었다. 고윤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평범한 인간인지라 그런 수명은 지니고 있지 않은데.”

백면은 고윤의 말에 히죽,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사자탈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처럼 입이 쭉 찢어져 기괴한 모양새가 되었다.

“하면 제게 목숨을 빚지고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고윤은 미간을 구겼다. 어차피 빚을 지러 온 것이었지만, 그 제안이 너무 미심쩍었다. 고작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 것으로 이백 년을 깎아준다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러니 그만큼 어려운 부탁일 터였다.

“후한 제안이군.”

어쨌든 목숨을 당장 앗아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니 관대한 제안이긴 했다.

고윤의 말에 사자탈 속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흔히 말하길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윤은 애써 웃었다.

“그럼 그도 거절하지.”

백면에게서 요기가 흘러나왔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럼 그냥 죽는 편이 좋겠군요. 고윤 선생의 혼백이라면 여기저기 인기가 좋으니 잘 쪼개어 팔아 치우면 지금 내놓아야 할 목숨값만큼은 될 것입니다.”

고윤은 미간을 구겼다. 죽은 뒤에 어찌 될지는 사후에 생각해 볼 문제긴 했으나, 혼을 쪼개 팔아 치우겠단 소리는 또 처음이었다.

“저는 마지막 제안이 퍽 마음에 드는군요.”

금방이라도 고윤에게서 혼을 빼내 갈 것처럼 백면의 손톱이 길게 늘어났다.

“그도 거절하겠네.”

백면이 뒤로 돌았다. 은헌은 제게 모여든 시선에도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쪽이 끼어들 차례가 아닙니다.”

백면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가볍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굵어졌다.

“끼어들 차례가 맞네.”

은헌은 천천히 걸어 고윤의 곁으로 다가왔다.

“대감.”

고윤은 은헌이 곁으로 오자마자 그의 손목을 붙잡아 바싹 붙어 섰다. 은헌은 저를 보는 백면의 눈길을 피하지 않으며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아래로 숙였다.

“나갈 틈은 찾았는가?”

“아직요.”

놀음판이 끝나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셈이 끝나지 않은 탓인지 여전히 주위의 경계가 단단했다. 고윤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대답했다. 한 방 날리면 도망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이곳에 모인 이들의 면면이 지나치게 화려해 후환이 염려되었다.

“작당 모의를 너무 대놓고 하시는군요.”

백면이 고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안타깝게도 뒤에도 기다리는 분이 계시니 얼른 답을 해주셔야겠습니다. 고윤 선생? 어찌하렵니까? 이백 년의 수명을 내놓겠습니까? 아니면 제게 목숨을 빚지겠습니까? 그도 아니면 죽어 혼백으로 갚을 치르시겠습니까?”

전부 내키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은헌은 고윤의 손에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곤 거꾸로 붙잡아 고윤을 제 뒤로 보냈다.

“이보게 인간. 고윤 선생과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네.”

또다시 방해받은 탓에 열이 올랐는지 이번엔 말이 퍽 짧았다.

“그러니 이러는 게지.”

은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굴었다. 그런 은헌을 보며 백면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내가 딴 수명이 얼마인가?”

조금 전 벌어진 판에서 이긴 이는 분명 은헌이었다. 백면은 고개를 기울이며 불쾌한 듯 뱉었다.

“삼백 년일세.”

“이겼는데도 돌아오는 게 적군.”

중간치에 있는 고윤이 이백 년을 빼앗기는데 가장 먼저 들어온 은헌은 겨우 삼백 년을 받는다. 셈이 불공평하긴 했으나 어쨌든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거기서 이백 년을 빼주게.”

그래도 백 년이 남으니 많다면 많을 시간이었다. 은헌의 말에 사자탈 뒤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곳에선 각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놀이를 하네.”

은헌은 웃는 낯으로 고윤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내 안해님 되실 이니 남의 목숨은 아니지 않은가.”

은헌의 코앞으로 사자탈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실제로 냄새를 맡는 것처럼 코로 짐작되는 부분에 주름이 잡혔다가 펴지길 반복했다. 그러곤 기가 찬 듯 헛웃음이 터졌다.

“어쩐지 지독한 인간 냄새와 도깨비 냄새가, 썩은 용 냄새와 뒤섞여 있더라니.”

백면은 낮게 중얼거리곤 뒤로 훌쩍 몸을 날려 물러났다.

“용과 여의주라, 그래, 좋아. 따로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고윤은 은헌의 소매를 꽉 붙들었다. 은헌은 백면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고 중얼거렸다.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방심하지 마십시오.”

사면초가의 처지에서 겨우 구명줄을 움켜쥐게 된 고윤은 만약을 대비했다. 이쪽에 있는 시간이 길어짐과 동시에 백면을 가까이서 본 시간도 길어져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백면의 정체를 알아냈다. 정말로 그가 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좋아. 고윤 선생이 내야 할 수명을 인간, 네가 딴 것에서 빼주지.”

은헌은 참았던 숨을 뱉었다.

“대신 사백 년을 내놓아라.”

“어찌 셈이 그리되나?”

은헌의 항의에 백면은 코웃음을 쳤다.

“하나가 아니라 쪼개진 둘이 판에 낀 것이니 다른 이들보다 유리하지 않았나. 싫다면 고윤 선생의 이백 년을 내어놓든가.”

고윤은 슬쩍 물었다.

“거절하면?”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파공성이 터졌다.

“고윤!”

은헌은 날카로운 검이 순식간에 쇄도해 베이는 것 같은 감각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고윤은 가늘어진 눈으로 너덜너덜해진 제 소매를 들어 올렸다.

“하?”

그의 입에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익숙한 요기였다. 그를 이곳까지 오게 했던 그 괴이한 기운이 조금 전 백면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 위로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 알고 싶은 답은 이미 다 알아낸 듯했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것 또한 말이다.

은헌은 앞을 봤다. 그가 딴 것이 삼백 년 치의 수명이었으니 사백을 내어주려면 어찌 되었든 백 년의 수명이 더 있어야 했다.

“주어야 할 것이 백 년이면 어찌 내놓아야 하지?”

은헌은 웃음기를 거둬들인 얼굴로 백면을 보았다.

“인간 네게 남은 수명이 여든여덟, 고윤 선생에게 남은 것이 열넷이다. 그러니 알아서 결정하는 게 좋겠지.”

합쳐 봐야 백 년을 조금 넘기는 시간이었다.

“둘 다 일 년만 남기고 내놓겠네.”

은헌은 제 남은 수명이 길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대감!”

고윤은 은헌을 불렀다. 그러나 은헌은 백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일전에 내리 여섯 판을 이기면, 내가 바라는 것을 하나 들어주기로 하였지. 그것 지금 말하겠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게.”

고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은헌은 그 침묵에 해사하게 웃었다.

“이야기는 다 되었나?”

“그렇네. 일 년을 남기고 내어가게.”

백면이 웃었다. 그러곤 서슴없이 팔을 휘둘렀다. 은헌은 앞서 요괴들의 몸에서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주먹만 한 구슬이 제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구슬은 허공을 쏜살같이 날아가 백면의 손에 들어갔다.

고윤이 잃은 수명에 대한 셈이 끝나자, 그 뒤에 줄줄 이어 다들 목숨을 잘라 내놓았다.

“그럼 이제 셈이 다 끝났으니 새로 판을 시작해 볼까요?”

사자탈 안에서 처음 그랬던 것처럼 과장된 즐거움을 담고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는 걸 목숨이 없으니 우린 빠지겠네.”

무턱대고 시작하기 전에 은헌은 그리 말하며 고윤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고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면은 그 모습을 보며 껄껄 웃었다.

“뭐, 좋습니다.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요. 이번엔 그냥 보내 드리지요. 빼앗긴 수명을 되찾고 싶다면 언제든 다시 오십시오, 고윤 선생.”

고윤은 사방팔방 막혀 있었던 곳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곤 곧장 움직였다. 세상이 기이하게 일그러지는,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은헌이 눈을 질끈 감았다.

* * *

어둡고, 눅눅했고, 썩은 이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긴.”

고윤은 저가 빠져나온 곳을 확인하곤 헛웃음을 터뜨렸다.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화가 고스란히 토해졌다.

“……낯이 익군.”

주위를 확인한 은헌 역시 실소를 흘렸다.

“열흘도 채 지나기 전에 여길 다시 올 줄이야.”

당언문으로 쓰인 기이한 투전 패를 가지고 있던 노파가 발견된 곳이었다. 고윤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꿈이 아닌 현실을 다시 되짚어 확인했다.

“머리가 다 자란 이래로 이토록 크게 당해보긴 처음이군요.”

가진 재주가 재주였던 터라 온갖 기괴한 일에 다 휘말렸지만, 이토록 무기력하게 당한 적은 철없던 어린 시절 이후로는 없었다. 그때야 가진 힘이 얼마큼 되었는지도 몰랐고, 어찌 쓰는지도 몰라 멋모르고 당황하여 그런 것이지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러게 말일세. 도박판 알량한 손재주 믿고 날뛰다가 가산 탕진한다더니. 딱 그 짝이군.”

은헌 또한 서늘한 얼굴로 그 자신을 비웃었다.

잃은 것이 전답이 아닐 뿐, 기실 따지고 보면 가장 귀한 것을 빼앗기고 쪽박 찬 채 쫓겨난 신세였다.

고윤은 어지럽게 굴러가는 정신부터 추슬렀다. 허탈하고 허망하였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수습이라도 잘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은헌의 손목을 붙잡았다.

“우선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고윤은 은헌의 집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 * *

“대감께옵서 그곳으로 드신 뒤, 기척이 끊기어 뒤늦게 근방을 다 뒤졌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청지기가 고해 올렸다.

“드나드는 이도 없었더냐.”

은헌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 그 집만 아니라 주막까지 싹 비어 있었습니다.”

분명 떠들썩한 소리가 났고,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이 오갔는데 도무지 흔적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머리카락 하나 찾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대감께서 들어간 집에 수상쩍은 것이 있어 살펴보았더니 이것이 나왔습니다.”

하인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보자기에 싸온 것을 내밀었다. 은헌은 손을 뻗어 그것을 손끝으로 눌러보았다. 하인이 가져온 것은 재였다. 손끝에 묻어나는 것을 문지른 뒤 은헌은 코에 가져다 냄새를 맡았다.

“그곳에 들어갈 때 맡은 냄새랑 비슷하다. 이것이 무엇이냐? 쑥 같기도 한데 무언가 달라.”

“삼 말린 것에 쑥과 다른 약초를 섞어 태운 것입니다.”

행랑아범이 재 냄새를 맡아낸 뒤 미간을 찌푸렸다.

“삼베를 짜내고 남은 것을 말려 태우면 이런 낙엽 타는 냄새가 짙게 납니다. 일꾼들이 잎을 말아 종종 입에 물고 다니기도 하지요. 이 냄새를 숨기기 위해 다른 향 진한 것을 함께 태웠군요.”

은헌은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부터 한 수 접어 들어간 판이었던 거군.”

그 연기가 그곳을 드나드는 인간 외의 것들에게 영향을 끼치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인 그들에게는 확실한 효험을 보였을 터다.

은헌은 고윤이 씻고 있을 뒤뜰 별채로 들어섰다.

이 집을 지을 때부터 온욕을 위해 부러 크게 만들었다는 탕 안에 고윤이 보였다. 김이 폴폴 나는 물속에 고윤은 잠겨 들 듯 가라앉아 있었다. 은헌이 청지기에게 물을 데우라 명할 때는 그냥 찬물로 씻으면 된다며 사양하더니, 등 떠밀려 들어온 것치곤 편안해 보였다.

은헌은 그 모습을 보다가 픽 웃고는 겉옷을 벗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옷자락 소리에 고윤이 눈을 떴다.

“……오셨습니까.”

은헌은 고개를 끄덕이곤 훌훌 남은 것을 벗어 던진 뒤 탕에 발을 들이밀었다. 안쪽에 앉아 있던 고윤이 다리를 접어 앉았다.

“편히 앉아 있게.”

은헌은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어깨까지 푹 담그고 나자 꽁꽁 얼었던 몸이 풀렸다. 고윤은 손바닥으로 물을 떠 얼굴에 끼얹어 잠을 씻어냈다.

“피곤했던 모양이군.”

“……제가 한 것이 무엇이 있어 피곤하겠습니까.”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 신경 쏟느라 고생을 하였지. 나만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일은 당하지도 않았을 테고.”

은헌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윤과 시선을 마주했다.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오늘처럼 후회를 해 보기도 처음일세.”

“대감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 혼자 갔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 투전 패에서 요기를 느꼈을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저의 실책이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고윤은 속이 타올랐다. 열불이 치밀어 되레 몸이 떨려왔다. 화병이란 게 이렇게 오는 건가 싶었다. 숨을 고르려 해도 턱턱 목 끝에서 막혀왔다. 금일의 일도 그의 알량한 재주 하나 믿었기에 벌어진 것이었다. 은헌이 그때 나서주지 않았다면 목숨을 빼앗기는 것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해야 했을 터였다.

은헌은 무거운 숨을 뱉었다.

“둘 다 조급함에 어리석은 짓을 하였어.”

“죄책감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벌어진 일이 아니라 앞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한 것이니까요.”

고윤의 말에 은헌은 당연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놈의 정체는 알아냈나?”

“……예. 확실치 않아 확인해야 할 것 같지만요.”

생각이 너무 많아 정리되지 않던 머리가 잠시 여유를 가지는 것만으로 제대로 돌아갔다. 앞뒤 연관성을 찾지 못했던 상황도 하나둘 연결 고리를 발견했다.

고윤은 서늘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은헌을 살피었다. 마주치면 희미하게나마 미소 짓곤 하는 얼굴이 무척이나 냉정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감께 허락을 구하지 못할 것 같은 일을 하나 해두려 합니다.”

은헌은 제게 허락받지 못할 일을 하겠노라 당당히 선언하는 고윤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았다.

“얼굴 붉힐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는 없고요.”

고윤은 물기를 머금고 쭈글쭈글해진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손에 닿았던 물방울들이 튕겨 날아감과 동시에 은헌은 단말마의 신음을 흘렸다. 책에 베인 것처럼 손목이 따끔했다.

은헌은 미간을 좁히고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문자인지 문양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점처럼 작게 박혀 있었다.

“이게 뭔가?”

“목숨줄입니다.”

고윤은 제게도 똑같은 위치에 자리 잡은 주술을 확인했다.

“목숨줄?”

은헌은 저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되물었다.

“오늘 자로 대감과 저 둘 다 추풍낙엽 같은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본래 죽을 날이 다가오면 이런저런 액운들이 찾아들기 마련이라서요.”

수명이 한 해가 남았다 해서 그만큼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제가 다치든, 대감께서 몸이 상할 일이 생기든 나눠 받게 될 겁니다. 목숨이 위험하더라도 한 번은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요.”

은헌은 고윤의 설명에 일그러진 웃음을 머금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실감도 나지 않았다. 또한, 무어라 말을 해야 고윤의 얼굴에 어린 저 필사적인 각오와 염려를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을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들썩거렸다가 한숨처럼 뱉었다.

“조심하겠네.”

한쪽이 다치면 남은 한쪽도 같이 아플 수 있다는 소리에 무어라 하는 게 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은헌은 자신이 한 말에 고윤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을 보며 웃었다.

“그야말로 일심동체로군.”

“동상이몽에 가깝지 않을까요?”

고윤의 반박에 은헌이 소리 내 웃었다.

“하긴. 그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 그나저나 혼례를 치르자마자 초상 치를 준비부터 해야겠군.”

고윤은 억울할 상황에도 화를 내는 대신 농을 하는 은헌을 보다 해결하지 못한 의문을 떠올렸다.

“관 두 개를 짜는 것보다 하나가 더 편했을 텐데. 어찌하여 저 대신 수명까지 깎아 먹으신 겁니까.”

은헌은 고윤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혼례라는 것이 본디 죽든 살든 멀리 떨어져 있든 함께하자 약조하는 것이 아닌가. 매정하게 내가 죽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듯 어찌 자네를 죽으라 내버려 둬.”

“죽지 않고 놈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지요.”

고윤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뚱하니 제게도 선택지가 더 있었음을 일깨워 줬다. 은헌은 서늘한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그는 팔을 휘저어 정신 차리라는 듯 고윤의 얼굴을 향해 손바닥의 물을 끼얹었다.

“목숨 걸고 살려줬더니 혼쭐날 소리는 잘도 하는군. 목숨 대신 들어달라는 부탁이 뭐가 될 줄 알고?”

은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이 뭐든, 자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 그게 가장 최악의 결과였을걸세.”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고윤도 그냥 웃고 말았다. 은헌의 말이 맞았다. 겉보기엔 가장 그럴듯한 제안이었으나, 그런 존재에게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말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됐다. 그야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뤄줘야 하는 것이라서 말이다.

둘은 물이 식을 때까지 앉아 있다가 나와서는 침소로 들었다. 늦은 새벽의 고요함에 몸을 내맡긴 채 멍하니 있다,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