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18/35)

五。(1)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하인들이 불을 밝혔다.

은헌은 어둑해진 사위를 보며 창밖에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소식이 없느냐?”

“예. 큰길까지 마중을 보냈는데. 아직 참군 나리의 모습을 본 이가 없습니다.”

행랑아범 역시 초조한 듯 고해 올렸다.

해 저물 무렵 보자 했으니 늦게 오지는 않을 텐데, 고윤이 연락도 없이 늦어지고 있었다.

은헌은 남산골에 사람을 보낼까 하다 멈췄다. 다 큰 사내를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걱정하는 제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않을 이인 데다 생긴 것처럼 무른 성격도 아니었다. 오히려 칼 같은 구석이 있었다.

은헌은 문초가 끝나자마자 포도청에 끌려간 왈짜를 떠올렸다.

남이 가진 것을 뺏어 제 잇속 채우는 것이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이라지만, 결이 나빠도 한참 나쁜 작자였다. 은헌은 그날 광 안에서 본 것을 잊지 않았다. 고윤이 한 번씩 그런 것을 보여줄 때마다 저를 둘러싼 이들은 염려가 가득 섞인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은헌은 되레 고윤에 대한 걱정만 늘었다.

고윤은 사람을 가까이 두지는 않았으나 싫어하지도 않았다. 불퉁한 얼굴을 하면서도 귀찮을 법한,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버리면서도 그는 묵묵했다. 상냥한 이였다. 사람을 대할 때 불퉁하기는 하여도 그 안에 따뜻함이 감춰져 있었다. 몇 번 겪지 않은 은헌도 인간의 본성에 선함이란 것이 있는지 의심할 지경인데 고윤은 귀찮다 하면서도 선뜻 손을 내밀었다. 그게 얼마나 귀한 마음인지 알기에 고윤이 사람에게 질려 어디론가 사라질까 염려되었다.

은헌은 쓴웃음을 감췄다.

그러면 그는 고윤을 붙잡지도 못할 테니 그저 올 때까지 망부석처럼 기다리기만 해야 했다.

차를 더 내려 마시고 해가 서산 너머 온전히 몸을 감추고 나서야 은헌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윤은?”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청지기의 얼굴에도 일순간 불안감이 어렸다. 고윤이 어디 가서 쉽게 다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위험한 일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들 거라는 것을 알기에 더 그런 것이었다. 왈짜나 무뢰배가 다치는 일을 염려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인간다운 동정 어린 마음은 있었다. 차라리 칼로 푹 쑤셔지는 게 나았지, 고윤에게 살아온 인생을 들쑤셔지는 것보다야 말이다.

대체 어디 가서 어떤 나쁜 놈을 조지고 계실까, 하인들은 눈치를 살피며 은헌을 보았다.

그사이 은헌은 외출할 채비를 하고 섬돌에 발을 내렸다.

“예까지 오는 길에 헛갈릴 곳이 없긴 한데.”

새로 사들인 집의 사랑채를 도박판으로 쓰고 있으니 주변에 위험한 작자들이 많이 돌아다니긴 했다. 왈짜라는 것들이 눈치라도 있다면 다행인데 다들 발바닥에 눈이 달린 건지 영문 모를 시비를 거는 일이 많았다. 눈먼 왈짜들을 염려하며 은헌은 고윤을 마중할 채비를 했다.

신을 신고 마당에 내려섰을 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부르는 소리가 없어 행랑아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문 밖을 확인해 보겠다고 나섰다.

“대감.”

행랑아범은 방문객이 누군지 알려주기 위해 은헌의 곁으로 다가왔다.

“궐에서 오신…….”

은헌은 열린 대문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고 문턱을 넘어선 이는 고윤이 아니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누군지 한눈에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장옷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여인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구름 위를 걷듯 사뿐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얼굴이 아는 낯이 아니었다. 누구의 명을 받고 왔기에 이 시간에 그가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왔을까, 의문을 품은 은헌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여인이 점점 가까이 다가와 불빛 아래 모습이 드러나자 은헌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소리 내 웃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

걸어오던 이가 그대로 멈춰 섰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하였더니.”

가느다란 목소리에 은헌은 더 크게 웃었다. 그는 놀라워했다. 황당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은헌은 성큼 걸어 궁관의 머리 위에 쓰인 장옷을 붙잡아 내렸다.

“대감?”

청지기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벌렸다.

조금 전까지도 분명 여인으로 보였는데 장옷 아래 드러난 얼굴은 분명 고윤이었다.

뚱한 얼굴을 마주하며 은헌은 껄껄댔다.

“신기하군.”

은헌은 어깨 위에 걸쳐진 옷자락을 들어 올려 다시 머리까지 덮어주곤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사내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여염집 규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고윤은 첫눈에 들킨 것에 한숨을 삼켰다. 그의 힘이 이상하게도 은헌에게 잘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즉에 알아보았지만, 이것까지 통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하기야 사람을 현혹하는 주술이 걸린 것이니 어찌 보면 잘된 것인지도 몰랐다.

“내게 준 감투와 같은 것인가?”

고윤은 이번엔 제 손으로 장옷을 내렸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만약을 대비하여 빌려온 것입니다. 백면이란 자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는 것이 이상하여서요.”

김춘배의 말로는 백면은 중년의 사내의 모습이라 했다. 포청의 종사관 말로는 백면이란 자는 백발성성한 노인이었고, 형조에 올라온 보고상으로는 나이 어린 여인이라고도 했다. 백 개의 얼굴을 지닌 자라 백면(百面)이란 이름이 붙은 건지 직접 본 이들의 말도 다 달랐다.

“그리고 대감께 내어드린 감투는 준 것이 아니라 빌려 드린 것이니 나중에 꼭 받아갈 겁니다.”

고윤은 깐깐하게 굴었다.

“깍쟁이 같긴.”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 물건을 빌려 쓰다 보면 절로 이리됩니다.”

고윤은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예외 없이 얼마든지 매몰차게 굴 수도 있었다. 감투도 인간이 다루기엔 위험한 물건임에는 변함없었다.

“그나저나 이 장옷은 누가 쓰던 것을 빌려왔기에 여인으로 보이는 것인가?”

“얼마 전 산신 자리를 꿰찬 호랑이가 시전을 돌아다닐 때 쓰는 것이지요.”

“아하, 무계동 집 뒤의?”

“예. 그곳의.”

기어코 용이 될 잉어를 은헌의 낚싯바늘에 꿰어주고 빈 명당자리를 홀라당 삼킨 호랑이는 산신이 되었다. 그 일에 생색내며 고윤은 산신의 기운이 담긴 장옷을 빌려 몸을 가린 것이었다. 호랑이는 빌려주면서도 고생해서 마련한 것이니 잘 쓰고 가져오라며 신신당부했다.

“그나저나 준비는 다 된 것입니까?”

은헌은 고윤을 내려다보며 입꼬릴 끌어 올렸다.

“자네가 왔으니 이제 가기만 하면 된다네.”

저마다 칼을 옆구리에 꿰찬 이들이 결의를 다지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김춘배가 알려준 사기꾼은 하인들에게 보쌈당해 뒷산 구덩이에 반만 파묻힌 채 실컷 터진 뒤에야 소광교 45) 근방에 있는 기방 뒤쪽에 마련된 투전판을 알려주었다. 거기서 이기면 기방의 조방 46) 중 하나가 와서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골패 47)를 줄 것이라 했다.

은헌은 그 말대로 골패를 구해왔다. 겉으로 봐선 이상할 것이 없는 듯해도 그런 뒷방에서 굴리기엔 호사스러운 물건이었다. 사치스러운 골패를 쥐고 가라는 곳이 신창동 48)에 있는 주막이라는 것도 수상쩍긴 마찬가지였다.

고윤은 사람을 보내 이틀간 그 주막을 살피게 했다. 그곳에 투전판이 벌어지는지 아닌지 감시하는 것은 포청에서 맡았다. 그러나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깨끗했다. 되레 수상쩍은 것이 없다는 것에 다들 더 의심의 촉을 곤두세웠다. 사내 서넛만 모이면 초상집에서도 벌어지는 것이 투전판인데 도성 오가는 뜨내기들이 많은 주막이 깨끗할 리가 없었다.

고윤은 그리로 가며 은헌이 구해온 골패를 다시 살폈다.

“투전 말고 다른 것은 어떻습니까?”

“이쪽은 쉬운 편이고. 승경도 놀이 49)는 적응 안 되더군.”

타고나기를 더 올라갈 곳도 없는 신분으로 태어나 그렇다며 은헌은 농을 던졌다. 고윤은 코웃음을 흘렸다. 그도 몇 가지 해 보긴 했으나 재주는 없었다. 도박판 놀음에 패가망신하기 좋은 수준이었다.

“이왕이면 가장 잘하는 쪽으로 끼는 게 좋겠군요.”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겠지.”

은헌도 동의했다. 여차하면 판을 엎은 뒤, 주변에 깔릴 군사를 부르면 된다지만 말이다. 제 한 몸이면 실컷 지킬 수 있는데 고윤의 경우에는 남이 지나치게 위험해질 것 같아 알아서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맹수를 병아리 떼 사이에 풀어놓은 꼴이나 다름없었다.

“우선 대감께서는 어떤 판이 벌어지든 이기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고윤은 간단한 계책을 세웠다.

“자네는?”

“저는 이쪽엔 손재주가 없는 터라 빚을 져 볼까 합니다.”

고윤의 말에 은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빚을 부러 만들겠단 소린가?”

“일부러 빚질 재주까진 못 되고 잘하지 못하니 그냥 지는 겁니다. 백면이란 놈이 셈노름 놓는 설주인지라 이긴 자는 가까이할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돈을 잃어야, 만날 일이 생기겠지요.”

고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움직이다 보니 금세 도착이었다.

은헌은 저마다 나뉘어 어둠에 숨어드는 이들을 뒤로하고, 도깨비감투를 쓰곤 갓끈을 단단히 죄었다.

수상쩍은 곳에 드나드는 이들 중에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있어도 곤란했다. 고윤도 가져온 장옷을 뒤집어썼다. 은헌은 이번엔 전혀 모르는 사내로 보이는 고윤의 모습을 보곤 혀를 찼다.

“이러다 나중에 알아보지 못할까 봐 무섭군.”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익숙해지면 금방금방 알아보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무언가 말을 해두려다가 은헌은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에 앞을 살폈다. 어둑한 골목에서 들었던 대로 나막신을 신은 이들이 마른 바닥을 차며 나오고 있었다.

“누구시오?”

은헌은 신분을 밝히는 대신 소매에서 골패를 꺼내 흔들었다.

“예서 재미있는 일이 있다 들었네.”

은헌이 말을 붙이는 사이 고윤은 나타난 사내들을 살폈다. 손이라든가, 손에 든 것을 중점으로 보았다. 그는 무관이 아니었으나 포도대장이 이를 갈고 쫓아다니는, 문제가 되는 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은헌이 내보인 골패를 확인한 이들이 고갯짓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따라오시오.”

둘은 태연하게 검계 무리의 그림자를 밟아 뒤쫓았다. 갈 곳이 조용하고 외진 데 있는 주막인 줄 알았는데 거길 벗어나 그들은 멀리 마을 외곽의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은헌은 시전에 든 것처럼 시끌벅적한 기척들을 읽을 수가 있었다.

“사람이 많군.”

“큰판이 열렸지.”

은헌이 앞서 걸어가던 검계 일당에게 말을 붙이자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거적 같은 것을 걷고 들어가자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판과 모여 앉아 있는 이들이 보였다. 괴성과 비명이 오가며 기이한 열기가 공기 중에까지 퍼져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은헌은 팔을 들어 코를 막으려다 움찔했다. 무언가를 태우는 건지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그는 고윤을 보았다. 고윤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이었다.

“저쪽으로 가시오.”

은헌은 자신에게 던져진 골패를 솜씨 좋게 잡아냈다. 능청스레 웃었으나 실력을 가늠해 보듯 엉망으로 던졌던 이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여기서부턴 자네가 들고 있게.”

은헌은 그 골패를 고윤에게 넘겼다.

패를 넘겨받은 고윤은 놈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 들어갔다. 칸으로 나눠진 곳으로 들어가자 나타난 화려한 옷차림에 고윤은 눈을 찌푸렸다.

“낄 거요?”

은헌은 태연히 사내의 앞에 섰다.

“끼지 않으려면 예까지 왔겠는가?”

“돈푼 꽤 털리게 생겼는데?”

그 말에 은헌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소매를 흔들었다. 쩔렁쩔렁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가져갈 수 있거든 가져가 보시게나.”

돈 소리를 듣는 순간 앉아 있는 이들의 눈빛이 변한 것을 보며 고윤은 만약을 대비했다.

“그쪽은?”

고윤은 골패를 보여줬다.

성질 급하게 패를 섞으려던 이가 손을 멈췄다.

“길을 잘못 들었군. 그걸 들고 있으면 더 안쪽으로 가야지. 까마귀 노는 데 끼지 말고.”

별감 50)은 뒤쪽을 가리켰다.

문을 또 한 번 건너가란 소리에 은헌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윤은 다시 한번 안을 살폈다. 이곳은 커봐야 다섯 칸짜리 집의 문을 통해 들어온 곳이었다. 지금까지 들어온 곳만 해도 기둥 다섯 개는 지난 듯했다. 그런데도 안으로 더 들어갈 곳이 있다는 말에 그는 짧게 주를 외웠다.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었다.

고윤은 앞서 걸어가려는 은헌을 붙잡고 제 등 뒤로 보낸 뒤 문 앞에 섰다. 건너가라는 문을 열자 이쪽과 비교도 되지 않을 진기한 풍경이 펼쳐졌다.

고윤은 안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재빠르게 뒤를 돌아 은헌의 소맷귀를 붙잡았다.

“우리가 잘못 온 것인가?”

안으로 더 들어가라며 일러주던 별감이 누워 있던 곳은 사라지고, 홍등을 밝힌 거리가 그들의 뒤에 늘어서 있었다.

고윤은 하늘을 올려 보았다. 먹구름이 낀 듯 캄캄하여 별이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담할 수는 없었으나 어째서 그 백면이란 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는 알아냈다. 요령(妖靈)이 이렇게 모여 있는 곳을 평범한 이가 알아낼 리 만무했다.

고윤은 길을 열어보았다. 하지만 무언가가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혀를 찼다. 힘을 쓰면 빠져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여기저기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기운들이 문제였다. 족히 몇 백 년은 묵은 요기가 폴폴 풍겼다.

“나가는 길을 찾으려면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그 말에 은헌은 예전의 그 거리만큼이나 화려한 곳에 시선을 던졌다.

그 거리와 비슷했지만 달랐다.

“벌집 같군.”

죽 이어진 지붕 아래 건물들이 늘어져 있던 곳과 달리 이곳은 집은 보이지 않고 다닥다닥 붙은 수많은 칸으로 나뉘어 여기저기로 난 문들만 보였다.

“항주에 이런 정원이 있다고 들었네.”

길을 모르면 쉽게 빠져나가지도 못할 것 같았다. 고윤은 신중히 걷다가 멈추고, 걷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물들었다. 은헌도 이상함에 발을 멈추고 주위를 확인했다. 처음 발을 들이는 곳임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길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앞으로 나가고 있음에도 뱅글뱅글 돌아 제자리로 온 듯했다.

“우릴 기다리는 이가 있는가 봅니다. 아니면 가야 할 곳이 있든지요.”

고윤은 그리 말하며 그들의 앞에 나타난 문을 가리켰다. 은헌은 그 문을 보다가 실소를 흘렸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길을 잃는 경우가 무척이나 드물다네. 아까 우리가 갔던 길로 되돌아온 건가?”

앞서 좌우로 나누어진 길 중 고윤이 일부러 피한 방향에 난 문이었다.

“그런 것은 아니고, 길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는 듯합니다.”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헌이 길게 신음을 흘렸다. 평범한 인간인 그가 보기엔 계속 앞으로 걸었는데 다시 제자리니 집 구조가 대체 어떻게 돼먹었기에 이 꼬락서니냐며 욕하고 말 일인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뒤돌아 갈 수도 없으니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겠지?”

고윤은 예상치 못한 일만 일어나는 것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은헌의 말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둘은 성큼 문을 지나갔다.

* * *

우글거리는 그림자가 심상치 않았다.

“자! 마지막 참가자가 왔군요.”

고윤은 제 귀 옆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들려오는 뚜렷한 목소리에 앞에서 말하는 이를 살폈다.

“누가 이런 곳을 만들었나 했더니…….”

그보다 높은 시야를 지닌 은헌은 주위 파악을 금세 끝냈다.

“설마하니 저자가 백면인가?”

하얀 털이 성성이 51)처럼 자란 사자탈을 뒤집어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이가 흔들흔들 몸을 움직였다.

“그런 듯합니다.”

고윤은 다시 길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예 꽉 막힌 듯 뚫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그들과 함께 있는 그림자들의 주인 때문이었다. 그림자라는 것은 본디 본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였다. 요괴가 그득한 곳에 인간이라곤 은헌과 그 둘뿐이었다. 백면이라 불리는 정체 모를 이에게서도 귀기에 가까운 요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선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것들에게 선악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말이다. 까닥했다간 크게 경을 치게 생겼다. 고윤은 그들의 주변으로 서성이는 그림자들의 주인이 흘리는 요기를 읽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탈을 뒤집어쓴 이가 손을 흔들자, 바닥의 작은 흔들림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고윤은 주변의 경계가 가장 물러진 틈새를 노려 주를 외웠다.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일은 쉽게 되지 않더니 다른 것은 막힘이 없었다. 하여 고윤은 만일을 대비하여 은헌을 요기에서 보호할 수 있는 주술을 걸었다. 빠른 속도로 휘돌 듯,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가듯 어지럼증이 밀려들었으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였다.

은헌은 조금 전 있던 곳이라 상상하기도 어려운 장소에 혀를 내둘렀다.

“도깨비 놀음판이 따로 없군.”

이리저리 휙휙, 자신이 땅에 발을 제대로 디디고 서 있는 것인지도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근정전 앞의 문무백관이 모이는 너른 터만큼이나 넓은 종이 위에 그가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꺼운 종이 위에 먹으로 그은 선이 보이고, 빼곡하게 적어놓은 지명도 보였다. 그는 고윤을 향해 시선을 던진 뒤 쓴웃음을 지었다.

옮겨 온 곳의 정체가 그의 짐작대로라면 승경도 판 위였다. 방법은 같으나 적힌 것이 지명이니 승람도라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낯선 지명도 곳곳에 보였다.

어쨌거나 은헌에게 익숙하지 않은 놀음이었다. 해 본 적이 있어 어찌하는지는 알고 있어도 말이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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