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
사흘이었다.
고윤은 사흘 만에 은헌의 서신을 가져온 하인을 확인하곤 들려온 서신을 그 자리에서 펼쳐 읽었다.
알아보고 연락 준다더니 별 내용은 없이 보낸 이를 따라나서라는 간단한 명만 적혀 있었다.
“잠시 기다리게.”
고윤은 그리 말하곤 자리를 정리했다.
은헌의 소식이 끊긴 사흘 동안 그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신원을 파악할 단서가 없어 누군지 알아내기도 힘들던 다섯 구의 시신 중 셋의 신원이 밝혀졌다. 그리고 문제 되는 그 기름 먹인 투전 패를 삼켰던 노파의 신원도 어느 정도 추려졌다.
고윤은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은 없는지 깔끔히 뒷정리를 해두고 움직였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하인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가세.”
하인은 가져온 말에 고윤을 태웠다. 그러곤 천천히 육조 거릴 벗어났다. 가는 방향이 동쪽이라 고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감께서 벽동에 계신가?”
거기라면 은헌이 종종 낮에 머무르는 집이 있었다. 하인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쇤네는 대감께서 어디에 계신지는 모르옵니다. 다만 명받은 대로 나리를 모실 뿐이지요.”
먼 거리는 아니고, 가봤자 도성 안 어디겠지 싶어 고윤은 그저 말 위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청계를 따라 도성을 가로질러 철물교 42) 근방에 다다르자 하인은 주위를 살폈다. 말을 세운 뒤 그는 고윤을 보았다.
인적 드문 골목에 멈춰선 말 등 위에서 고윤은 무슨 일인지 살폈다. 하인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하더니 이내 골목 안쪽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 여기서부터는 다른 이가 모실 겁니다.”
그 말에 고윤은 하인의 시선이 닿았던 골목을 보았다. 발소리가 여럿 들린다 싶더니 골목 안에서 가마를 든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가마 옆에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참군 나리.”
고윤은 제게 아는 체하는 은헌의 호위 중 한 명을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가마로 오르시지요.”
“꼭 이걸 타야 하는가?”
“대감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은헌의 명이라니 고윤은 떨떠름함을 감추고 가마의 문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익숙하지 않아 자세 잡고 앉는 것도 불안했다. 그는 옆에 난 창을 밀어 올려 밖을 보았다.
“이보게.”
“예.”
“대체 어딜 가기에…… 윽!”
흔들거리는 가마에 고윤은 균형을 잃고 나뒹굴 뻔한 몸을 되잡았다. 그걸 보며 호위가 허리를 숙였다.
“편히 계십시오.”
편히 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고윤은 물어보아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창을 닫았다. 가마 안에서 구르더라도 남의 눈 안 닿는 곳에서 굴러야 창피함이 덜했다.
이리저리 뒹굴다 보니 도착한 듯 가마가 땅에 내려졌다. 고윤은 얼얼한 궁둥짝을 토닥이며 가마 문이 열리는 것을 가는눈으로 보았다.
가마에서 신음을 뱉으며 내린 고윤은 곧장 주위를 살폈다. 집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처음 보는 곳임은 분명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윤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누마루로 오르자 여느 때 만큼이나 평온하게 앉아 있는 인영이 보였다.
“왔는가?”
고윤은 고개를 숙였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은헌은 픽 웃음을 흘렸다.
“예가 과해졌네.”
고윤은 심드렁한 얼굴로 은헌을 보았다.
“대감과 가까워질수록 예를 차려야 다툼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리 말하며 그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딥니까?”
“우선 앉게. 지붕 내려앉을 일 없으니.”
은헌의 손짓에 하인이 두툼한 방석을 내왔다. 고윤은 콧등을 찡그리며 방석을 보았으나 그 위에 천천히 앉았다.
“얼굴 보아하니 가마가 편치 않았나 보군,”
“제가 원래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것 외에는 다 불편해합니다.”
고윤은 불퉁하니 입을 비죽였다. 여전히 엉덩이 아래가 욱신대는 기분이었다.
“그냥 왔어도 되었을 것을 뭣 하러 가마까지 보내셨습니까.”
은헌은 소리 내 웃었다.
“자네에게 한 번쯤은 가마를 태워주고 싶어서 말일세.”
그 말에 고윤의 표정이 더 새침해졌다.
“그나저나 대체 여기가 어디기에 그렇게까지 해서 부르신 겁니까?”
다시 물으며 고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은헌은 다과상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어디겠나. 새로 마련한 집이라네.”
그 말에 고윤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혹시나 하여 여쭈는 것입니다만 집이 세 채 이하면 불안하시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가 알고 있는 은헌의 거처만 세 곳이 넘었다. 그중 하나는 최근 처분했다 들었다. 세자빈의 사가와 이웃하고 있는 문제의 그 집 말이다. 이렇게 모르는 곳에서 또 집이 튀어나오니 슬쩍 염려되긴 했다. 집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인 이유가 미루어 짐작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은헌은 고윤의 직설에 낯을 붉히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이나 웃은 뒤에야 그는 저를 조심스럽게 보는 얼굴을 마주하며 입을 뗐다.
“심려하는 바는 알겠으나 그런 사정으로 구한 곳은 아니라네.”
“그럼.”
은헌은 웃음을 흘려내듯 길게 숨을 뱉었다.
“호랑이 굴을 만들어보려고.”
고윤은 눈을 찡그렸다. 은헌은 웃음기를 걷어내곤 다시 차를 홀짝였다.
“소문을 듣자 하니 그 백면이라는 자를 추적할 방법이 없다지?”
“어려움이야 있겠지만, 방법이 없겠습니까.”
날고 뛰어봐야 어쨌든 이 도성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고윤은 제게 붙은 시선만 아니면 끝나도 벌써 끝났을 일이라는 것을 둘러대려 설명했다.
“자네의 그 신통방통한 재주는 당분간 쓰기 곤란하지.”
“자중하라는 주상전하의 엄명이 내려져서요. 아버님께서도 그러시고.”
어찌 됐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힘이니 과용해 좋을 것이 없다는 데는 고윤도 동의했다.
“그래서 이 집을 마련한 것이라네.”
“제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과 호랑이 굴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만.”
은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말했잖은가, 호랑이 굴이라고. 나는 예서 투전판을 벌여볼 생각이거든.”
고윤의 어깨가 움찔했다.
“투전판을 말입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엄하게 벌해지겠지. 보통은.”
투전판을 벌이는 자뿐만 아니라 그 장소를 빌려주는 이들 또한 처벌 대상이었다.
“하지만 호랑이 굴이라면 말이 다르지 않은가. 형조, 포청 그리고 한성부에서도 알고 있는 투전판이라면 말이야.”
“호랑이를 잡으러 가는 호랑이 굴이 아니라.”
“호랑이 굴인지도 모르고 제 발로 먹히러 오는 놈들을 위한 곳이지. 겸사겸사 꾼들 사이에 도는 소문도 얻어듣고.”
은헌은 웃었다.
“도성 내 꾼들을 죄다 모아 뒤져 보면 누군가는 백면의 소식을 알고 있을걸세. 원래 그런 자들끼리 통하는 통로가 있지.”
고윤은 머릴 굴렸다. 그도 은헌이 내놓은 방법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투전판 왈짜들도 머리를 아예 굴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라 저를 잡으려는 이들의 얼굴을 죄다 외워 그 무리에 몰래 끼어드는 것이 힘들었다. 검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군이 사사로이 부리는 이들이라면 적어도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소문 긁어모으기엔 적당하였다.
“언제부터 시작하실 생각입니까?”
“이미 시작했네. 부리는 이들 중 손 빠른 몇몇을 뽑아 여기저기 보내어두었거든.”
그들이 이곳에 대한 소문을 알음알음 흘려줄 터였다.
“벌써 말입니까.”
“얼른 끝내고 손 털지 못하면 큰일 날 수도 있으니 말일세.”
은헌의 말뜻을 알아들은 고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예?”
“알아온 것이 없는가?”
그 말에 고윤이 콧등을 찡그렸다.
“알아낸 것도 있고, 말씀드려야 할 것도 있사온데. 알려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은헌의 반문에 고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외람되오나 대감께서 먼저 대답하여 주실 것이 있습니다. 전에 총오란 이름을 가진 이의 행방을 찾기 위해 경 상궁에게 가신다고 하였는데 그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은헌의 낯이 어둑해졌다.
“그러지 않아도 그 이야기는 자네가 알아온 것을 들은 뒤 하려 했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로 궐을 빠져나와 경 상궁의 행방을 수소문했더니 낙향했단 말만 들려올 뿐 도무지 연락 닿을 길이 없더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뒤져 보고 있지만, 역시 한성 드나드는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는 자네가 더 잘 알 것 같아 말일세.”
그 말을 들은 고윤이 품에서 필첩을 꺼냈다. 그가 이번 일과 관련된 사항을 정리해 옮겨놓은 것이었다. 그는 필첩과 관청에서 나오기 전에 옮겨놓은 것을 펼쳐 은헌에게 내밀었다.
“죽은 이의 신원을 밝히는 과정에서 알아낸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은헌은 적힌 이름을 살폈다.
“이게 다 뭔가?”
“죽은 노파와 비슷한 연령대 상궁들의 명부입니다.”
은헌은 다시 이름을 살폈다.
“당언문을 쓸 줄 아는 이들 중 대비전 마마의 자를 알 수도 있는 이들이라면 그쪽밖에 없지요. 궐 밖으로 나온 궁관 중에 비슷한 연령을 찾아 추리고, 그중 살아 있는 자, 도성을 떠나 낙향한 이들을 제외하니 모두 스물, 그 스물 중 행적이 끊긴 이가 다섯입니다. 그중 노파의 시신에 남은 특징과 일치하는 자가 있는지 확인 과정을 거친 이가 둘이고요.”
한성부 소속 다모와 상궁들의 행적을 알 만한 이들을 데리고 집마다 방문하여 꼼꼼하게 확인했다.
“이 둘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고, 남은 셋 중 대비전에 적을 두었다가 질환으로 인해 궐을 나온 이가 둘입니다.”
은헌은 손끝으로 익숙한 성 씨의 이름을 문질렀다.
“처음부터 경 상궁의 행방을 자네에게 쫓아달라 부탁해도 찾지 못했겠군.”
고윤은 가라앉는 마음을 추스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댁으로 사람을 보내어 신원을 확인해 줄 사람이 있는가 했더니. 집은 텅 비었고 이웃의 말로는 한 달 전 이사한다고 하여 세간살이를 죄다 처분했다 합니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어 낙향한 줄 알고 있더군요.”
“낙향하였다면 도성 출입 기록에 남아 있었을 텐데. 거기에도 없던가?”
“……네.”
그랬기 때문에 고윤은 그 이름을 지우지 않고 남겨두었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의심의 여지는 있으나 꼭 경 상궁이라 할 수는 없었다.
대비전과 관련 있는 자는 둘이라도, 궐에서 잔뼈가 박혔을 정도로 오래 일한 노상궁들이니 셋 다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렇지. 확언하여서는 안 되는 일이지.”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과 저 둘 다 알아내지 못했으니, 밝혀질 때까지는 백면이란 놈을 뒤져 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 듯합니다. 다만, 사람 부리는 것은 상관없으나…….”
고윤은 은헌을 보았다.
“앞뒤 재지 않는 이들이니 대감께서 직접 나서 가까이하실 생각일랑 마십시오.”
은헌은 웃음을 흘렸다.
“안타깝게도 그게 좀 곤란하게 되었네.”
“어째서요? 장소를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경을 칠 일인데 그보다 더 곤란한 일이 뭡니까.”
은헌이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고윤은 등줄기 서늘한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그게 말이지. 꾼들을 모아 판을 벌이려면 투전판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한번 들여다보았었는데.”
“그런데요.”
“날 이기는 이가 없어.”
“알고 보면 손 빠르다는 하인들이 다들 재주가 없는 것 아닙니까?”
찰나의 틈새도 없이 고윤은 곧장 반박했다.
“군계일학이 아니라 오합지졸 중 하나이실 수도 있지요.”
오십보백보인 실력 중 으뜸의 재주로는 판에 끼어봐야 꾼들에게 등쳐 먹히기 딱 좋았다. 가뜩이나 사기꾼에게 염소 뿔을 이각수의 뿔이라 사들이면서도 이야기가 재밌었다고 열 냥이나 내려 했던 전적이 있는 이가 고윤의 눈앞에 앉은 은헌대군이었다.
“섭섭하군.”
자신을 믿지 못하냐는 듯 애처로운 얼굴을 보이며 은헌은 입을 불퉁 내밀었다. 고윤은 되레 그 얼굴에 불신이 더 솟구쳤다.
“투전 놀음에 패가망신합니다.”
“글쎄. 생각보다 재주가 있다니까.”
“게다가 재주가 있어도 끼지 않는 것이 좋은 곳입니다. 공평하게 패를 나눠 가진다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남인 것처럼 설렁설렁 시간을 두고 한 명씩 끼어들어, 털어먹을 놈 하나만 두고 패를 짜서 농락하는 방법이 요즘 유행이었다. 투전판 끝에 가산 탕진하여 칼부림 나는 것을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니었다.
“날 건드릴 자가 있을까?”
“돈에 눈 돌아간 이를 어찌 막겠습니까.”
막을 수 있다면 이리 골머리를 썩이며 고생할 일도 없었다. 은헌은 거듭되는 고윤의 말에 골난 얼굴을 했다.
“보여줄 수도 없고.”
“보여주실 수 있으면 증명하실 겁니까?”
“그럼, 할 수 있네.”
고윤은 은헌을 봤다. 흥미를 쫓아 시작한 일에 쉽게 손 뗄 성정은 아니었다. 낚시만 해도 그랬다. 한번 시작하더니 기어코 용까지 낚아 올린 뒤 내기까지 마무리 짓고 나서야 손을 뗐다. 가끔 스승과 낚싯대를 던지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럼 저와 약조를 하나 해주십시오.”
“약조?”
“적당히 신분을 가릴 방법이 있습니다. 대감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 가서 여섯 판 이상을 연속으로 따내신다면 저도 더는 대감의 행보에 딴지 걸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번이라도 도중에 잃으시면 위험한 일에는 손을 떼고 물러나 주십시오.”
“불공평하네. 자네는 승패와 관계없이 얻는 것이 있는데. 나는 불리한 조건만 가득하지 않은가.”
고윤은 혀를 찼다.
“원하시는 바가 있습니까? 제가 들어줄 수 있는 것 중에서요.”
그 말에 은헌은 배시시 웃었다.
“당장은 없긴 한데. 만약 자네의 제안을 내가 받아들이고 이긴다면 말일세. 나중에라도 내 청을 하나 들어주는 것이 어떤가?”
“앞서 말씀 올렸다시피 제가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거참, 나는 그리 까다롭게 굴지 않았는데 너무하는구먼. 내기를 받아들일지 아닐지 아직 결정을 다 내리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고윤이 슬쩍 발을 빼자 은헌은 대차게 항의했다. 고윤은 짓궂음이 가시지 않는 눈매를 보며 한숨을 씹어 삼켰다. 어쩐지 휘말린 기분이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라도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상황이 어떻게 될 줄 모르고, 할 수 있는 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모르니 할 수 있다,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고윤 자신의 몫이었다.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면 모른 척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그는 은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은헌이 내리 여섯 판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 * *
희미한 느낌의 사내였다.
옆에 앉아 있는데도 그 존재를 잊곤 해 주막 안에 모여 있는 이들은 고개를 들고 가끔 사내의 존재를 살피며 움찔댔다. 안개처럼 스르륵 나타나 판에 낀 사내는 우습게도 내리 판을 휩쓸고 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염병!”
왈짜로 소문난 김춘배는 저가 쥐고 있는 패를 내던졌다.
“하면, 가져가겠네.”
머리에 먹물을 가득 채운 듯 고상한 사내의 말씨 역시 김춘배에겐 몹시도 거슬렸다. 따끔하게 일어난 손거스러미처럼 말이다.
“다 가져가는구먼. 홀라당 밑천마저 털어가.”
어젯밤부터 매달려 겨우 입에 풀칠한 돈이나 회수한 송 의원이 쓴맛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의 불운을 탓했다. 운기칠삼이라더니 운이란 것이 어찌 한 놈에게 벼락처럼 쏟아져선 연달아 횡재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내는 기름 먹인 두툼한 패를 내려놓더니 희멀거니 웃었다.
“날이 밝아 나는 이만 가보아야겠구려.”
그리 말하며 그는 제 앞에 쌓인 돈에서 적당히 떼어 돌려놓고 남은 것을 챙겼다. 그래도 한 재산 두둑했다. 궤짝에 실어 나귀 등에 얹어가야 할 정도로 땄으니 당연했다.
돈만 먹고 튀느냐며 사내더러 한소리 하려던 놈들은 다시 제 앞에 되돌아온 부스러기 같은 돈을 챙기느라 정신없었다. 그것이라도 있어야 다음 판에 낄 수 있으니 당연했다.
사내는 홀가분하게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여기저기 밤도 지워내고 손에 든 패를 노려보느라 핏발 선 눈을 감지도 못한 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엉망으로 엉긴 신발 더미에서 용케도 그는 제 신을 찾아 꿰어 신고 휘적휘적 주막을 나섰다.
방을 빌려주고, 술과 음식을 팔아 한몫 단단히 챙기던 주모가 그를 보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레 사내의 뒤를 곧장 따라나서는 우락부락한 덩치의 왈짜패들을 보며 아침부터 재수 없는 것을 보았다 하여 침 뱉고 돌아설 뿐이었다.
사내는 골목을 걸었다.
일전에 큰불이 난 뒤 새로 지어 올리며 얽히고설킨 처마 아래로 구불구불한 사잇길이 이어졌다. 사람 둘도 지나다니기 어려운 그곳에 발소리가 나란히 줄을 지어 이어졌다.
김춘배는 허리춤에 찬 칼을 잡고 히죽거렸다.
길흉화복, 복은 화를 부른다니 저 희멀건 낯짝의 재수 있는 놈의 재수 옴 붙은 일이 그가 되도록 힘써볼 예정이었다.
사내는 여전히 태연한 걸음으로 골목을 나섰다. 좁은 길을 다 빠져나와 조금 더 넓은 길로 이어지는 그 새에서 사내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내게 볼일이라도 남은 건가?”
김춘배는 히죽이며 눈을 흘겨 올렸다.
“일이야 많지. 되찾아 갈 것도 많고.”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젠 자네 게 아닐 텐데.”
김춘배는 제가 끌고 다니는 종을 향해 고갯짓했다. 순식간에 뽑아 든 칼끝이 사내를 둘러쌌다.
“내 것이 아니라니 무슨 개소리를. 내가 앉은 판에서 누가 이기든 간에 결국 다 내 것이었는데 말이지.”
집으로 돌아가다가 이리 털린 놈이 한둘이어야지. 김춘배는 사내를 향해 껄렁댔다.
“이 어르신이 몹시도 피곤하니. 얼른 내놓고 꺼져라. 그럼 몸이라도 성히 돌아갈 테니 목숨은 건지겠지.”
사내는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목숨값이라. 내 목숨값은 그 판에서 딴 돈으로 사기엔 턱없이 비싸다네.”
“그럼 더 이득이 아닌가. 제일 비싼 목숨 부지해서 돌아가니.”
김춘배는 이죽거렸다.
본래 성질대로라면 일단 입을 열자마자 두들겨 놓고 시작할 텐데 이리 봐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인심 쓰고 있는 것이었다.
김춘배가 한 걸음 다가서자 사내는 늘어뜨리고 있던 팔을 들었다. 손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검이 들려 있었다.
“재밌는 입담을 조금 더 즐기고 싶으나 내게도 새벽 서리 밟으며 돌아오길 기다리는 이가 있어 말이지.”
사내는 어느새 서늘해진 얼굴로 칼을 휘둘렀다.
저를 향해 쏟아지듯 달려오는 검 끝에 김춘배는 재빠르게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시정잡배에게 배운 것으로는 어림도 없을 압도적인 실력이었다. 하인들도 머릿수만 있지 실력으론 칼을 휘두르는 것이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낙엽처럼 쓸려나가는 종을 보며, 목을 찔려 쓰러져 있던 김춘배는 허겁지겁 바닥을 헤엄쳐 달아나려 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남을 쫓을 때는 제 뒤에 뭐가 있는지도 살펴야지.”
다정다감한 말투로 조곤조곤 긁어대던 사내가 웃었다.
“데려가거라.”
검은 복면으로 무장한 자들이 쓰러진 이들의 발목을 붙잡아 들었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바로 옆 골목 끝에 서면 보이는 집 후문으로 끌고 들어갔다.
사내는 다시금 주위를 확인하곤 마지막으로 후문을 넘었다. 안에 있던 이들이 문을 굳게 닫아걸자 그는 안채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안방 창이 열리고 희멀건 얼굴의 고윤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사내는 제 머리 위에 올려 쓴 갓끈을 풀어 내렸다. 단지 그뿐이었다. 희미하고 뿌연 안개가 같던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뚜렷한 존재감이 드러났다.
“바삐 뛰어다닐 동안, 자네는 열심히 졸고 있었나?”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고윤의 눈매를 훑으며 은헌은 가까이 다가섰다.
“밤을 지새우는 것이 힘에 부칠 때가 되어서요.”
“한 게 뭐가 있다고.”
핀잔을 던지며 은헌은 손에 있는 갓을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이것 정말로 편하군.”
“도깨비감투가 불편하실 분이 아니지요.”
고윤은 저가 내어준 감투를 보며 새초롬한 얼굴로 꿍얼댔다. 은헌이 히죽 웃었다.
“내기에서 연신 진 것이 아직도 분한가?”
“하도 잘하시기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재주 있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일로 인해 처음으로 투전 패를 쥐어보았다는 은헌이 순식간에 패를 다 외우곤 어지간한 실력으로 덤비지도 못할 만큼 손이 빠르다는 것에 말이다.
“본래 잡기에 능한 편이긴 하네.”
관직에 나서 입신양명할 것도 아니니 한량처럼 유유자적 있는 것이 유일하게 살길이라 은헌은 여러 손기술을 익혀보았을 뿐이다. 그게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는 신을 벗고 방 안에 들어섰다.
온돌 온기가 아직 식지 않아 따끈한 기운이 감도는 바닥에 이부자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고윤의 흰 낯이 마치 꽃물 들인 것처럼 발그스름했다.
은헌은 꼬물꼬물 움직여 상석을 내어주는 고윤에게 손을 내젓고는 편한 자리에 앉았다.
“문초는 이따 할 건가?”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정도 굶긴 뒤에 물어보려 합니다.”
은헌이 자신을 털러 오는 왈짜패를 붙잡아 집으로 끌고 온 것이 벌써 여섯 번째였다. 큰돈을 따서 나오면 필연적이라 할 정도로 그런 놈들이 꼬리처럼 붙었다.
모여든 투전꾼들에게 다른 곳의 정보를 듣고 그리로 간 은헌이 눈먼 놈들을 끌어내어 붙잡는 방법이 이다지도 효험을 보일 줄 몰랐다.
노름판 전전하며 사람 해치는 것을 업으로 삼은 놈들이라니, 고윤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한심한 작태에 콧등을 찡그렸다. 그는 의식을 잃은 왈짜들을 깨워 필요한 것을 캐낸 뒤 포청에 넘겼다. 처음 잡혀 온 놈들이 멋모르고 뻗대기만 해서, 어지간하면 고생하지 않으려 하는 고윤은 적당히 힘을 써서 강제로 입을 열었다. 그런 놈들은 자신의 등 뒤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원귀들만 보여줘도 술술 불곤 했다.
“바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낮에는 궐에 들어가 보아야 해서요. 밤이 되어야 처리할 수 있습니다.”
투전의 글귀를 풀이한 뒤 고윤은 서둘러 남은 하루를 보내고 제대로 인사도 못 올린 채 퇴궐했다. 중궁전에 얼굴이라도 비추고 나오려 했지만 바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하여 나중에 다시 궐에 들기로 하고 그대로 나온 터였다.
“그럼 그냥 굶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나도 졸리고.”
은헌도 뒤늦게 밀려드는 피곤함에 손을 들어 눈두덩을 문질렀다.
“밤을 꼬박 새우셨으니 당연하지요. 이리로 들어오십시오.”
고윤은 아랫목 따뜻하여 잠자기 좋았던 곳에서 비켜났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두들기는 것을 보며 은헌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직 친영을 치르지도 않았건만 너무 대범하지 않은가?”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윤은 입술을 뒤틀었다.
“앉아 주무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럴 수야 없지.”
은헌은 체면 차리지 않고 고윤이 내어주는 목침을 베고 누웠다. 고윤은 은헌이 편히 누운 것을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는가?”
“저는 잠이 깼으니 소세는 해야지요.”
자다 일어났으니 눈곱을 떼야지 않겠느냐며 고윤이 답하자 은헌이 픽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그냥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낯간지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그렇다네.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은헌은 조곤조곤 속삭였다. 고윤은 그게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매일같이 마당을 가득 채우는 인간 외의 것들에게 잠이나 자라, 씻으러 간다 일일이 고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는 그리 생각하다 제게도 방금 오간 말들이 퍽 낯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녀오게.”
은헌은 잠기운이 묻어나는 말로 배웅했다. 고윤은 눈꺼풀을 깜박이기 시작하는 은헌을 보며 손을 허공에 휘젓듯 움직였다. 서늘함을 꼬리에 달고 들어와 코끝 시리게 했던 바람에 적당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 * *
희정당에 들른 고윤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임 상궁이 그를 보며 마주 예를 취했다.
“그간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익숙한 예법을 방향을 달리하여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고윤은 더디긴 해도 잘 배웠다. 임 상궁의 말에 고윤은 가볍게 웃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중궁전에 인사를 올리면, 임 상궁과 이리 보는 것도 마지막일 터라 고윤은 짧은 시간이나마 그의 스승이 되었던 이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였다.
임 상궁은 그런 고윤을 보며 담담히 전할 말을 옮겼다.
“중궁전에 가시기 전에 대비전에 먼저 문후 드시라는 연통이 왔습니다.”
“대비전 말입니까?”
고윤의 고개가 급히 올라왔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중전을 만나기로 하였던 시각이 곧이었다.
“중전마마께옵서 하교하신 것입니다.”
그 말에 고민의 여지도 사라졌다.
임 상궁은 고윤을 이끌고 대비전으로 향했다. 왕과 중전이 거처하는 곳에서 동북쪽에 대비의 처소가 있었다. 그가 궐에서 머물렀던 희정당과도 그리 멀지 않았다.
“대비마마, 한성부 정 참군 들었습니다.”
대비전의 제조상궁이 움직였다. 중궁전과는 다르게 확실히 연배가 높은 큰 상궁들이 여럿 보였다. 고윤은 여태 신원이 묘연한 노파를 떠올렸다. 그가 추려놓은 셋 중 하나가 또 연락이 닿아 이제는 경 씨 성을 가진 이와 김 씨 성을 가진 이만 남았다.
“안으로 드시지요.”
임 상궁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학업 덕에 고윤은 사뿐한 몸놀림으로 문지방을 넘어 조용한 걸음으로 들었다. 서 있는 자세는 곧았고 예의 그 구부정함도 사라졌다.
방 안에 들자 족두리를 갖춰 쓴 대비가 보였다. 고윤은 배운 대로 절을 올리고 몸을 낮췄다.
“어서 오게.”
대비는 다정한 목소리로 반겼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틀어 올렸으나 젊었을 적부터 그랬을 것처럼 꼿꼿이 앉아 있던 대비가 임 상궁을 보았다.
“자네가 훈육 상궁을 맡았던가?”
“예. 한 상궁 마마님께옵서 저를 중전마마께 천거하여 그리되었습니다.”
“그렇군. 잘하였네. 그래, 정 참군이라고?”
고윤은 처음 보는 대비의 물음에 공손히 대답했다.
“예. 경조 참군, 정가(家) 휘라 합니다.”
“자네 부친은 내 잘 알고, 형제 중 한 명을 본 적이 있다네. 홍문관 43)에 몸담고 있었던 듯하였는데.”
“둘째 형님께서 홍문관 응교(應敎) 44)로 있습니다.”
“자네는 경조에 있고.”
고윤은 가볍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집안 사내가 죄다 조정에 몸을 담고 있었다. 고윤은 그중에서도 가장 말직이었다.
“예.”
대비가 그런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사화를 받았을 정도라면 문재가 뛰어났을 터인데. 대군의 문생(文生)이라 들었네. 겸은 아래서 수학을 했다지.”
“소싯적 연이 닿아 잠시 가르침을 청했을 뿐 문생이라 불릴 정도는 아닙니다. 어찌 대감과 저를 비교하겠습니까.”
대비가 그를 보며 웃었다.
“그래.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겠지만, 궐에서 보낸 것은 어떠했나?”
고윤은 저의 지난 며칠을 돌아보았다.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 중전의 말대로 쓸 수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르면 몸이 고생할 그런 지식이었다.
“생각하였던 것보다 공부하여야 하는 것이 많아 오랜만에 유생 시절로 돌아간 듯하였습니다.”
동네에서 제일 잘난 머리도 성균관에 들어서면 동네 바보가 된다더니 그것과 가장 비슷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한 번도 알아보아야 한다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것에 가르침을 얻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즐거웠다.”
대비의 목소리에 호기가 섞였다. 고윤은 담담히 나흘간의 학업에 대한 감상을 고해 올렸다.
“무지한 것보다 앎으로써 눈앞이나 주변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이해하게 되었으니 그로 인해 세상 보는 법이 전보다는 넓어지고 달라졌습니다. 저는 제가 받은 이 옷에 놓인 문양의 의미를 몰랐으나, 이것이 저의 건강과 복을 염원하여 수놓은 정성 어린 마음이란 걸 알게 되었고, 기꺼워져 절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보는 것이 넓어졌다 한 것이옵니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는, 궐의 침방 나인들이 지어준 도포를 보았다. 미색의 도포에는 겉으로 봐선 그리 화려하지 않으나 곳곳에 흰 실로 작은 문양처럼 수가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그가 사용하는 이불이나 베개, 버선에도 똑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알아보았고, 그것이 중전이 부러 같은 무늬를 수놓아 쓰라 한 것임을 전해 들었다.
대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이 처음 자네를 궐에 들여 예법이 아니라 다른 것 또한 가르치겠다 하였을 때, 사실 그리할 필요까지 있겠는가 하였지. 관직에 오른 사대부에게 무얼 가르치겠다는 건가 의문을 가졌어. 나흘 내도록 예법만 가르쳐도 부족한데 말이야. 한데 중전이 내게 이르기를 방금 자네가 말한 것과 비슷한 소릴 하였다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있는 이들은 가끔 제 발밑에 개미가 지나가는지를 모르고 산다고 말이지. 그래서 너무 익숙하여 신경 쓰지 않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어야 한다 했네. 지금 자네의 말을 듣고 있으니 중전이 무엇을 원했는지 알 듯도 하군.”
고윤은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그는 여전히 왜 배워야 하는지 의문인 것들이 있었으나 대비가 만족했다면 그것으로 다행이었다.
“자네가 그것들을 이른 시일에 익힌 것도 좋은 일이지. 그것을 배울 때 나는 큰 고생을 했었거든. 그래, 처소는 괜찮았던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대비가 아련한 웃음을 머금었다.
“희정당은 내가 승은 상궁이던 시절 머물던 처소였다네. 선왕께옵서 금상을 낳았을 때, 그 공을 치하하여 희정당이란 궁호를 지어주셨지.”
고윤은 잠자코 이야기를 듣다가 멈칫했다. 워낙 아는 바가 없긴 했지만, 대비가 궁관이었단 말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은헌에게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는 다시 대비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 * *
한성부에서 일을 처리하고 늦은 밤 돌아온 고윤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은헌이 붙잡아 광에 가뒀던 왈짜를 볼 수 있었다. 광에 깔린 짚더미 속을 파헤치고 들어가기라도 하였는지 겨 묻은 개 꼴이었다.
“물을 좀 붓거라.”
은헌의 명에 하인들이 차갑기 그지없는 우물물을 길어다가 후려치듯 뿌렸다.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던 김춘배가 활어처럼 몸을 푸덕거렸다.
“정신이 드나?”
어푸어푸하며 펄떡이던 김춘배가 고개를 들었다.
“네놈!”
“저런…….”
눈을 뜨자마자 놈의 입에서 나온 불호령에 은헌이 혀를 찼다.
“기개가 대단하군.”
칭찬은 아니었다. 고윤은 붙잡힌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둔 것을 잠시 후회했다.
“그냥 처리하고 갈 것을 시간만 버렸습니다.”
머리 위에서 오가는 대화에 김춘배가 이를 갈며 펄떡였으나 옆에 서 있던 하인을 발길질에 그대로 나뒹굴었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놈들이!”
은헌은 방싯 웃었다.
“멍석을 가져오라 할까?”
고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뭣 하러요. 더 쉬운 길이 있는데.”
그는 서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김춘배를 발로 짓이기고 있던 하인이 재빠르게 발을 떼고 물러났다.
고윤은 산 자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흘렸다. 그와 동시에 기세등등 노여움 가득하던 김춘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고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왈짜의 발목을 앙상한 손으로 붙들고 있던 아이를 보았다.
죽음이란 것이 나이 가려 오는 것도 아니고, 약한 자가 더 쉽게 죽는 법이라 귀신의 살아생전 모습이 어찌했는지 그다지 감흥 없는 고윤이었다. 하나 그런 그도 김춘배의 곁에 모여든 원념 중 반 이상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빌려온 것에 혀를 찼다.
“무…… 무슨!”
고윤은 손을 휘저어 비명을 막았다. 김춘배는 입을 연신 뻐끔대며 몸을 뒤틀었다. 누구도 건들지 않고 있는 살결 위에 손톱으로 긁어낸 것 같은 생채기가 하나둘 늘었다. 고윤은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일각 있다가 오지.”
김춘배의 눈이 커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그때 듣기로 하고.”
아이 중 하나가 김춘배의 목을 죄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고윤은 고개를 돌렸다. 같은 것을 보고 있지도 않을 텐데 은헌의 눈빛도 북풍 설한이 따로 없었다.
고윤은 그대로 사람들을 이끌어 광에서 벗어났다. 그들이 나오기 무섭게 하인들이 바로 광의 문을 닫아걸었다.
“차라도 마실까요?”
“다 마실 즘엔 송장 치울지도 모르니 관두세.”
은헌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거절하곤 닫힌 광을 돌아봤다.
“그나저나 저자, 아이들을 그렇게 죽인 것인가?”
고윤은 콧등을 찡그렸다.
“목에 난 손자국의 크기가 열 살도 채 안 된 아이의 손 크기 정도 되어 보이던데.”
은헌은 담담히 말했지만, 목소리에 숨기지 못할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고윤은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침묵과 한숨으로 진실을 전했다.
“자네가 책쾌에게서 어찌해서 벌레집을 사들였는지 가히 이해가 가는군.”
욕할 일이 끝도 없이 생겨, 화를 덜어내려 고윤이 책쾌에게 사들였던 그 책벌레의 집이 요즘 은헌에게 몹시도 간절한 것이 되었다.
그늘진 곳은 바람이 서늘하여, 햇볕 아래로 잠시 나서 몸을 녹이고 나서야 은헌은 다시 광을 열라 명했다.
은헌은 안으로 먼저 들어가려는 고윤을 붙잡고 김춘배를 밖으로 끌어내라 명했다. 하인들은 고윤에게서 광문을 열어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찬 바닥에 잠들었어도 소리칠 기운이 있던 김춘배의 꼬락서니가 햇볕 아래 드러났다. 하인들은 우물물을 길어 다시 축 늘어진 몸 위에 뿌렸다. 살결을 따라 맺혀 있던 핏방울이 물살에 휩쓸려 떨어졌다.
고윤은 다시 김춘배의 앞에 섰다.
“대답할 준비가 되었느냐?”
힘없이 늘어져 있던 김춘배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든! 뭐든 좋으니 물어봐 주십시오.”
아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새파랗게 질린 채 파들파들 떨고 있는 놈을 보며 고윤은 앞서 똑같이 당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던 이들에게 했던 질문을 던졌다.
“칼잡이를 찾는 중이다.”
“소인이 아는 칼잡이는 밤골에서 무두질하는 곽가가 전붑니다.”
“밤골 사는 곽가?”
“예.”
“그놈이 쓰는 칼을 본 적 있나.”
“봤습니다! 봤고말고요.”
“어찌 생겼는가?”
김춘배는 아는 것을 물어봐 주어 그저 감읍한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겉이 장죽처럼 생긴 검을 씁니다. 두께는 손목보다 조금 가는 지팡이처럼 보이는 것인데. 손잡이를 살짝 비틀면 안에 검이 숨겨져 있습니다.”
“창포 검인가?”
“그렇습니다. 손가락 두 마디보다 좁은 폭의 검을 쓰긴 한데. 근데 그런 검은 곽가가 아니고 저 위쪽 벽동 산다는 김 진사댁 종놈이 더 잘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고윤은 줄줄이 흘러나오는 말을 정리했다. 그런 뒤 새로 질문을 던졌다.
“그 둘 중 최근에 노름판 드나드는 놈이 있느냐?”
“최근엔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
고윤은 고개를 젓는 김춘배의 말에 혀를 찼다. 그래도 확인해 볼 가치는 있었다.
그는 이번엔 창포 검과 비슷한 상처로 죽은 시신들의 신원 중 밝혀진 이름을 불렀다. 혼백을 찾아볼 수 없는 자들이었다.
“내가 불러준 이들 중 아는 이가 있느냐?”
“죄다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고윤은 눈을 찡그렸다.
백면의 이름이 끌려 나왔기에 여태 죽은 이들도 노름판과 관련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지금까지 똑같은 질문을 받은 왈짜 중에 그 이름을 들어본 이가 없었다. 이쯤 되면 그 백면이 다른 뜻인지 의심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백면이란 놈을 알고 있느냐?”
고윤은 여상히 물었다.
“압니다!”
구명줄이라도 눈앞에 뚝 떨어진 것처럼 김춘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안다? 백면이라는 자를?”
은헌의 되물음에 김춘배의 고개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투전판 귀신 새끼, 아니, 그 백면이란 이름을 모르는 투전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네놈 말곤 아무도 모르던걸.”
네놈 앞에 다섯 정도는 말이야. 그 이름 들어본 이는 많은데 정작 마주친 자는 없었다.
은헌은 그리 말하며 웃었다.
“흙구덩이에 산 채로 묻히면서도 대답 안 한 걸 보면 모르는 게 맞는 것 같던데.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살아보겠다고 헛소리를 하는 거라면…….”
고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김춘배가 꿀꺽 침을 삼키며 머릴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참말입니다. 직접 본 적도 있습니다!”
그는 고윤을 두려운 듯 보았다.
“백면이 직접 꾸리는 판에도 참가해 본 적이 있습니다.”
“판?”
“예! 뜨내기처럼 오가는 놈은 끼지도 못하는 판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솜씨 있는 이들만 따로 추려 하룻밤 크게 놀고 사라지고 놀고 사라지고 그럽니다.”
김춘배는 아는 것을 다 털었다.
“그자를 만나려면 어찌해야 하지?”
“놈이 운영하는 판은 갑작스레 열렸다가 사라지는 터라 직접 판을 찾는 것은 무리고, 서소문 근처 장터에 가면 염소 뿔만 가져다 사기 치며 파는 놈이 있는데 그놈이 백면이랑 같이 움직이는 것으로 압니다.”
은헌과 고윤의 눈썹이 동시에 들썩거렸다.
“하여튼 그놈에게 가면, 참가할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 그리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