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모처럼 여유로운 날이었다.
“그리고 무상하고 무상하군.”
은헌은 체면도 내던지고 바닥에 뒹굴었다. 새벽녘 내린 눈은 소복이 쌓이기도 전에 녹았으나, 길이 얼어붙었다. 하여 무계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아침부터 방에 화로를 들여 소일거리 하는데도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새로 구해온 책도 다 읽고 나니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책이란 것이 본디 성현의 존귀한 뜻을 되새기며 몇 번이고 읽어도 좋은 것이라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글귀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모든 것이 그저 지겨웠다.
“대감마님.”
사랑채 마당에서 들린 소리에 은헌은 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궐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 말에 비스듬히 세워졌던 몸이 솟구쳐 올랐다. 세자와 중전이 수시로 사람을 보내곤 하니 궐에서 사람이 온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은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닫아두었던 창을 열어젖혔다. 마당을 내다보는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궐에서 왔다는 이는 그를 찾아올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한 이였다.
“대감.”
그가 고윤의 곁에 붙여뒀던 최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고윤의 곁을 비우는 일이 없도록 명까지 내렸었다. 그런데도 제집 마당에 최 나인이 서 있는 것을 보니 은헌의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아닙니다.”
최 나인은 빠르게 부정한 뒤 소매에 넣어둔 서신을 꺼내 종복에게 전했다. 총관이 그것을 받아 은헌에게 올렸다. 겉봉을 확인한 그는 눈을 찡그렸다.
“제게 직접 전해달라 말씀하시어, 믿을 만한 이에게 맡겨두고 이리 온 것입니다.”
고윤의 자호가 적힌 겉봉을 열고 은헌은 내용물을 살폈다. 한 장의 서신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이만 가봐라.”
“송구하오나 대감. 참군 나리께서 읽으신 것을 확인하고 답을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최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 말에 은헌은 한숨을 내쉬곤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그는 서신을 펼쳤다. 바로 대답을 받아오라는 것을 보아하니 평소의 고윤답지 않은 이유였다.
보낸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은헌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이내 흐드러지게 웃음꽃을 피웠다. 그는 소리 내 웃고는 여전히 마당에 서 있는 최 나인을 보았다.
“보낸 서신에 대한 답은 그저 알았다 전하면 될 것이다.”
“……예.”
“이보게 아범.”
대기하고 있던 총관이 고개를 숙였다.
“예.”
“바람이 차니, 가마 태워 궐까지 데려다주고 오게.”
최 나인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대감! 궐이 지척인데 제가 무엇이라고 가마까지 타고 가겠습니까.”
“되었다. 보모상궁의 조카기는 하나 너도 엄연히 전빈(典賓) 33)이라 이리 심부름 다닐 처지도 아닌데 예까지 나오느라 고생하였다.”
은헌은 얼른 준비하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최 나인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대감. 숙모님께서 대감을 두고 어찌 눈을 감으셨는데 제가 이런 간단한 일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하지요. 대감께서 제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데요.”
생각시로 들어와 대군을 따라 궐 밖으로 내쳐지듯 쫓겨났다가 다시 궐로 돌아간 최 나인이 웃었다. 그녀는 은헌에게 받은 대답을 답으로 알고 돌아가 보겠다며 끝내 가마를 거절하고 씩씩하게 대문을 나섰다.
최 나인이 돌아가자 은헌은 다시금 고윤의 서신을 펼쳐 확인했다.
-삼경에 달이 저물거든 그리운 님 만나고저. 아득한 꿈길 달려 빗장 열고 들어가노라.
저잣거리 풍속화에나 걸려 있을 법한 시구였다.
고윤의 성정에 이렇게 운우지정을 의미하는 문장을 써서 보냈다고, 보고 싶다거나 그립다는 마음을 전하려는 것은 결코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달이 저물어가는 시각에 꿈에서 보자는 말일 터다.
* * *
은헌은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흐르는 별의 강을 보며 웃었다. 이르게 저녁을 먹고 일찍 뻗어 자길 잘한 듯했다. 그는 변함없는 제 꿈을 살뜰히 살폈다.
그렇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그의 뒤로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헌은 바로 몸을 돌렸다. 저벅이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고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발견한 고윤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예서는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군.”
“그렇지요. 어제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은헌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길 잃어먹을 나이는 지났지.”
고윤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는 오랜만에 여는 꿈길에 적응하며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어쩐지 감각이 둔했다. 익숙할 때는 상관없으나 한동안 드나들지 않아 그런지 이물감이 느껴졌다. 깊은 물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손발에 걸리는 바람의 무게부터가 달랐다.
“한데 갑자기 이리 보자 한 연유가 뭔가? 내일 궐에서 나오면 볼 텐데 말이야.”
고윤은 콧등을 찡그렸다.
그의 시선이 은헌을 위아래로 살폈다. 여전히 고민되긴 했다. 은헌을 그의 일에 끌어들여도 괜찮은지 말이다. 하지만 궐 안에서 무언가를 하려니 그가 속을 다 까집고 내보여도 안심할 수 있는 이가 눈앞에 있는 은헌밖에 없었다. 성심을 다해서 그를 도와줄 사람도 말이다.
“대답하는 것조차 고민해야 할 일인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속을 들여다보듯 은헌은 웃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윤은 입을 열었다.
“좋은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반기며 청을 넣을까. 고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감께 제 급한 사정만 헤아려 달라 청을 드리는 것이 면구스럽기도 하고요.”
“면구하긴. 소일거리 할 게 생겨서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다네.”
은헌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일축했다.
“내 요즘 하는 일이 없어 적적하기가 이를 데에 없는 형편이라네.”
부왕의 부름이 사라지고, 세손이 생기며 그에 대해 주위의 감시와 경계가 사라지니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던 시절보다 살기는 분명 편했다. 한데 긴장이 풀려 그런지 모든 것이 권태로웠다. 의욕도 쉽게 생기지 않았다. 세자의 명으로 다녀온 일이 아니었다면 그 지루함에 일찌감치 고윤을 그의 집 담장 안에 보쌈해 왔을지도 몰랐다. 놀아달라며 말이다. 그게 괜찮은 건지 모를 일이라 고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 청이란 게 무언가? 또다시 태몽을 받아달라는 것은 아닐 테고.”
“태몽이 필요하십니까.”
고윤의 말에 은헌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일세. 얼른 이야기나 해 보시게. 내게 부탁할 일이 뭔가?”
“어제 제가 맡은 일 때문에 궐 밖으로 나선 것은 대감도 알고 계실 겁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그 일과 연관된 것이온데 죽은 자가 노파인지라 여러 가지 확인하던 중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은헌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손가락 두 개를 붙여놓은 너비에 손 한 뼘 정도 되는 길이의 기름 먹인 종이가 나왔습니다. 거기에 암어로 보이는 것이 적혀져 있었고요. 파훼법을 모르니 궐에 있는 동안 고민해 보고자 베껴왔는데. 궐에서 그와 비슷한 것을 보았습니다. 임 상궁에게 물었더니 당언문이라 하더군요.”
“당언문이라면 나도 알고 있네.”
은헌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릴 적 수발을 들던 나인들에게 배웠거든. 읽는 법과 쓰는 법 모두 말이야.”
주변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온갖 잡지식을 다 습득했었다. 은헌에게 나인들이 당언문을 가르친 것도 불의의 사태를 대비하여 목숨이라도 부지하라는 뜻에서였다. 도피용 거처를 마련해 두고 필요한 경비를 맡겨둔 장소도 당연히 당언문으로 써서 알려주었다. 대군의 뒤를 쫓을지도 모르는 금군들이 쉽게 추적하지 못하도록 보모상궁이 꾀를 낸 것이었다.
읽을 줄 안다는 은헌의 말에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가 당언문에 대해 최 나인에게 더 물어보려 하니, 최 나인이 웃으며 파훼법에 대해선 은헌이 더 잘 알 것이라 일러준 터였다. 그래서 이렇게 어렵게 꿈을 이어 다시 연 것이었다.
“시신에서 나온 꼴과 임 상궁이 알려준 것은 완전히 같은 방식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구석이 있긴 하더군요.”
“규칙이야 정하기 나름이라 하나씩 늘어갈수록 해석하기가 어렵다네. 그나저나 당언문과 같은 방식의 암어를 썼다는 건 죽은 이가 궐과 관련 있을 거란 소린가?”
은헌은 눈치 빠르게 고윤이 저를 찾아온 이유를 알아챘다.
은헌의 의문에 고윤은 느릿하게 대답을 흘렸다.
“죽은 이가 아니라 죽인 이와 관련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죽어가며 삼키려 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경고를 남기기 위해 범인이 표식을 남겨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고윤의 말에 은헌의 낯이 굳었다.
“암어를 해석하기 전에는 어느 쪽이 맞다 아니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요.”
“어느 쪽이든 궁관과 관련이 있다면 골머릴 썩겠군.”
내명부를 관리하는 것은 중전이었다. 은헌은 중전인 어마마마가 그다지 이번 일을 기꺼워하지 않을 거란 것을 알고 있었다.
고윤도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니 노파의 신원을 파악하기 전에 그 글귀가 무얼 의미하는지부터 알아내는 편이 좋겠지요.”
내용이 뭔지 알아야 그 종이에 묻어나는 요기가 어디서 온 것인지 파악 가능했다.
고윤은 설명은 그쯤 하면 되었다는 듯 소매를 뒤적였다. 소맷부리를 빠져나온 손에 붓이 들려 있었다. 언제 보아도 신통한 구경에 은헌은 골치 썩을 문제를 뒤로하고 눈을 반짝이며 지켜봤다. 붓을 꺼낸 고윤은 적당한 곳을 골랐다. 정원에 있는 누각 옆 너른 바위 앞으로 그는 걸음을 옮겼다. 고윤은 먹도 물도 묻지 않은 붓을 가볍게 놀렸다. 보드라운 마른 붓이었음에도 짙은 먹이 배어나듯 지나간 자리를 따라 뚜렷한 글귀가 적혔다.
은헌은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아는 방식은 아니었다.
“내가 배운 것과는 다르군.”
“그래도 익숙하시니, 저보다는 빨리 풀어내시지 않겠습니까.”
단숨에 외운 것을 다 옮겨 그린 고윤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붓을 허공에 털어내곤 다시 소맷부리에 쑤셔 넣었다.
“이렇게 보면 칠언시 같기도 하고.”
은헌은 바위 위에 남겨진 글귀를 이리저리 살폈다.
“어쨌건 글로 남긴 것이니 암어든 뭐든 기본적인 법도에 따라 썼을 것 같아 혼자 해 보려 했는데 단어로 풀어놓으면 문장이 되지 않아 힘들더군요.”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헌은 웃으며 글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나저나 이리 알려주어도, 꿈결에 본 것이라 깨어나면 흩어질 텐데 외우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사상누각이 따로 없는 방식에 은헌은 슬쩍 고윤을 떠보았다. 외우는 것은 어렵지 않아도, 꿈에서 본 것이라 깨어난 뒤에 기억이 흐려질 수도 있음을 염려에 둔 것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깨어나서도 보실 수 있도록 조처를 해두겠습니다. 한데.”
고윤은 점점 더 옥죄어오는 공기에 무거운 숨을 뱉었다.
“궐에서 길을 열어 그런지 역시 길이 불안정하게 열린 듯하군요.”
주술에 대비해 수십 개의 방비가 된 곳에서 기운을 쓴 것이 영향을 받았는지 고윤의 주위가 일순간 흔들렸다. 꿈의 주인인 은헌이 쫓아내려 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은헌도 꿈이 일그러진 것을 확인하곤 몸을 완전히 세웠다.
“더는 머무르기가 어렵겠습니다.”
고윤은 숨쉬기가 괴로워져 크게 숨을 뱉었다가 삼켰다.
“안색이 나빠 보이는군.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네.”
은헌은 고윤의 낯빛이 나빠져 가는 것을 염려했다. 고윤은 별것 아니라는 듯 웃었다.
“궐에서 나오는 날이 내일이라 했던가?”
“예. 집으로는 못 가고 곧장 경조 34)에 들 것입니다.”
쌓인 일이 많아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그렇게 하기로 했다. 고윤의 답에 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 보세.”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그 말을 꺼내기 무섭게 사방의 모든 것이 흔들렸다. 꿈에서 깨고 있단 듯 말이다.
* * *
또다시 눈이 내린 것인지, 사각사각 내려앉은 새벽의 서늘함에 은헌은 눈을 깜박였다. 전전반측 뒹구는 대신 그는 저를 잠에서 깨운 것에 집중했다. 그의 작은 움직임에도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은헌은 소리 나는 곳을 찾아 귀를 기울였다. 한참이나 귀로 쫓다 그는 이불을 들추고 손을 밖으로 빼냈다. 처음 보는 것이 그의 손끝에 걸려 나왔다. 겉보기엔 간찰과 다름없으니 낯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었다. 이부자리 안에 들고 들어온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은헌은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멍하니 고민하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제 손에 쥐어진 서신을 다시 살폈다.
“뭐지.”
안에 든 것을 꺼내어 봤지만,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깨끗한 종이였다.
“이게 왜.”
어안이 벙벙하여 종이를 살피던 은헌의 눈에 뭔가가 걸렸다. 은헌은 눈을 깜박이곤 다시 그것을 보았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 것도 아닌데 종이 끝이 팔랑거렸다.
그는 서신에서 손을 떼어 이불 위에 올렸다. 그러자 낙엽처럼 바람을 타고 종이가 흔들흔들 흩날렸다. 낮도깨비 장난 같은 광경이었으나 은헌은 재밌다는 듯 그것을 지켜보았다.
가볍게 팔랑대던 종이는 이내 세찬 바람에라도 휩쓸린 듯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연기 그을음도 없이 타들어갔다. 불똥이 튄 듯 곳곳에 구멍이 났다. 적당히 타다 만 종이는 이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은헌은 뜨거운 것을 집어 들 듯 조심스레 종이를 엄지와 검지로 들어 올렸다. 열기가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은헌은 구멍 난 자리를 살폈다.
은헌의 입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꿈에서 깨어나도 괜찮을 거라더니.”
진실로 그러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하루가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숨만 쉬다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눈 뜨자마자 그에게 던져진 암어조차 기꺼웠다.
* * *
고윤은 눈을 뜨기 무섭게 당언문 풀이에 몰입했다. 한잠 들었다가 일어나 맑아진 정신으로 고민하니 어제까지는 전혀 알 수 없던, 기괴함마저 느껴지는 문장들에서 두 가지 새로운 사실도 알아낼 수 있었다.
“기(奇)와 우(偶)란 말이지.”
그는 손가락으로 서탁을 두드렸다.
고윤은 문장의 첫머리와 말머리부터 구분했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아내는 것부터 말이다. 그러다 같은 음을 가진 몇 자가 규칙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기와 우 자였다. 그게 뭐가 어떠냐는 이들은 산술을 모르는 이가 틀림없었다. 뜻은 달라도 발음이 같은 기와 우가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자체가 문장을 놓는 순서가 따로 있음을 의미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꽤 유쾌한 말놀이였다.
고윤은 문장 전체에 들어 있는 기와 우 자를 옮겨 적고 순서를 고민했다. 그러곤 금방 알아냈다.
글자가 산술과 연관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획수부터 따졌다. ‘기’ 중 획수가 많고 적음을 따져 차례로, ‘우’ 자 역시 획수의 순대로 놓고, 그 사이사이에 원래의 문장을 홀짝의 순대로 재배치했다. 그리고 쓰임을 다한 기와 우를 빼내고 남은 자들을 살폈다. 읽는 순서를 알려주기 위한 허자(虛字)이니 이것은 다른 뜻이 없었다.
그렇게 빼고 나니 전형적인 오언시같이 보이는 배열이 나타났다.
“모음을 두고 자음을 변환한 것이 대부분이라 했으니.”
임 상궁에게 들은 바로는 분명 그러했다. 고윤은 일단 기본에 충실하게 풀이를 시작했다. 아무리 어려운 암어라 해도 말이 아닌 것은 아니니 기본에 충실하게 파고들다 보면 풀이법이 생기곤 했다.
모음을 떼어내고 나니 언문의 자음에 해당하는 자들이 남았다.
언문의 자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윤은 그것을 하나하나 대입하여 읽어보았다. 몇 부분 어색하고 이상하여 답이 아닌 듯했다.
“이도 아닌가?”
그래도 그나마 가장 문장이 만들어지는 방법인데 해석이 불가했다.
몇 시각을 그렇게 흘려보낸 고윤은 낮것 상을 올릴까 고하는 최 나인의 말에 어지럽힌 방을 정리했다.
오후에는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에 그는 알아낸 사실만 따로 정리하여 적었다. 그러곤 종이를 곱게 접었다. 몇 번 접었다가 펴자 새를 닮은꼴이 만들어졌다.
이틀 연달아 최 나인에게 심부름시킬 수도 없으니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었다.
고윤은 입술을 움직여 주를 외웠다. 그가 힘을 부여하여 만들어진 종이 새가 진짜 새가 된 것처럼 날개를 파닥거렸다.
“서둘러 가서 전해주거라.”
고윤은 창을 열고 손등에 올린 종이 새를 날려 보냈다. 새는 훌쩍 날아 눈앞에서 한 바퀴 돌더니 순식간에 멀리 사라졌다.
“대감!”
펄럭펄럭 힘찬 날갯짓에 하인들이 기겁하여 길을 막아섰다. 은헌은 생전 처음 보는 괴이한 생김새의 짐승이라 하기에도 뭣한 종이를 보았다.
“이 무슨.”
죽었다가 깨어나 다시 보아도 저런 것이 알에서 태어날 리가 없으니 누군가 의도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보낸 것이었다.
은헌은 대낮에 제게 이런 것을 보낼 이를 떠올렸다. 단박에 낮달처럼 희멀겋고 갓 쪄낸 찰떡처럼 말랑말랑할 것 같은 낯짝이 선명히도 떠올랐다.
“물러나라.”
당장에라도 종이를 베어낼 것 같아 고윤은 호위를 물렸다.
“하오나.”
척 봐도 수상한 것이라 말하고픈 얼굴들을 보며 은헌은 팔을 뻗었다.
“내게 보낼 간찰을 이런 식으로 전할 이가 누가 있을까. 고윤밖에 더 있겠느냐?”
하인들은 한숨 섞인 시선을 보내며 물러났다.
자신을 향한 경계가 사라지자 종이 새는 열심히 날갯짓하여 은헌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바라보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은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의 손까지 도착하는 것으로 제 할 일을 다한 듯 생동감 있게 움직이던 것은 순식간에 힘없이 널브러졌다. 은헌은 움직임이 사라진 것을 비어 있는 다른 손으로 집어 눈앞까지 들어 올린 뒤 물끄러미 보았다.
“이걸 새라고 접은 것 같으냐?”
은헌은 청지기에게 물었다.
“……날아다니는 것으로 봐선 그런 것 같습니다.”
은헌은 고윤이 제게 낮도깨비 같은 방식으로 연락을 준 것보다 그 괴상한 것의 생김새가 새라는 사실에 더 경악했다. 날아다닌다는 것을 빼면 닮은 짐승 꼴을 찾아내기도 힘들어 보였다.
은헌은 고윤에게 이런 방식은 위험하다 충고하기 전에 대체 손재주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묻고 싶었다. 눈이 삐뚤어진 게 아니라면 이런 것을 새라고 접어 보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참아내고 접힌 것을 조심스레 펼쳤다. 반듯반듯한 고윤의 필체가 나왔다.
은헌은 차분하게 보낸 서신을 읽었다.
안부를 전하려고 보낸 것은 아니었다. 고윤은 제가 알아낸 것을 충실하게 작성하여 서목 올리듯 써 보냈다. 그리고 그 끝에 내일 언제쯤 궐에서 나와 한성부에 미룬 일을 처리하러 간다 적어두었다.
“한성부에서 보자는 말이군.”
그냥 길만 열면 오갈 수 있지만, 궐내에 있다 보니 이래저래 방해를 받는 모양이었다. 감시도 붙었을 테고 말이다.
은헌은 새벽에 발견한 고윤이 남긴 또 다른 서신을 펼쳤다. 타들어간 자국을 따라 보이는 글씨를 그는 방금 일러준 방법대로 따로 분리하였다. 순서를 짜 맞추자 고윤의 말대로 그럴듯한 시구처럼 보이는 것이 나왔다. 여기까지라면 읽는 것이 편했다. 은헌은 그가 알고 있는 방법대로 문장을 해석했다. 복잡하고 까다롭게 서너 가지 방법으로 꼬아둔 것도 풀어 읽을 수 있으니 차례대로 맞춰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은헌은 이런 방식의 글을 읽는 데 능통한 편이라 금세 풀이해 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옮겨놓은 것을 한 번에 죽 읽어 내렸다. 낮은 한숨을 내쉬며 그는 미간을 좁혔다. 그의 표정에 온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시중들기 위해 곁에 대기하고 있던 이가 긴장했다.
“바로 입궐하여야겠다.”
“……지금 말입니까.”
“그래.”
“바로 채비하겠습니다.”
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에 그는 불을 밝히라 명했다. 아직 늘어지는 햇살에 방 안이 충분히 밝으니 초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고윤이 보내온 서신 두 개를 태웠다. 그리고 남은 재마저 물그릇에 담아 뭉개어 흔적을 지워냈다.
* * *
걷고, 절하고, 인사를 하고, 다시 걷고. 반듯이 움직이는 법을 몸으로 익히며 고윤은 자신에게 무재(武才)가 없음을 한탄했다. 그러곤 삐걱대는 마루를 구름 위에 노니는 것처럼 걷는 나인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임 상궁은 바른 자세가 익숙해지면 누구든 그리 걸을 수 있다고 했다. 고윤에게는 물로 바위를 단숨에 뚫을 수 있단 소리처럼 들렸다. 바른 자세를 지니지 않아도 문후를 올릴 때 별문제는 없지 않을까 하는 불만을 삼키며 그는 열심히 마루를 걸었다. 바닥이 곧 부서질 것 같은 삐걱거림에 움찔대며 말이다.
그때 저 멀리서, 처소에 남아 있던 나인이 바쁜 걸음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다니느냐?”
임 상궁이 곧장 매섭게 꾸중했다. 나인은 숨을 헐떡이며 죄송하다 이르더니 곧장 무언가를 고해 올렸다. 임 상궁이 고윤을 보았다.
“대군 대감께서 희정당에 드셨습니다.”
고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만나자 청한 날은 금일이 아닌 내일이었다. 하루만 있으면 볼 텐데 서신을 전하자마자 서둘러 입궐까지 했다니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이 틀림없었다.
“예까지 해두어도 되겠습니까?”
은헌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고윤은 지금 하는 것을 끝내기로 했다. 임 상궁은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하지만 곧 다음 학업을 위해…….”
말을 기다리던 고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임 상궁 역시 뒤에서 불쑥 나타나 마루 위에 선 고윤을 붙잡는 손길에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잠시 빌려가네.”
“대감!”
은헌은 신을 신지 않은 고윤을 어깨 위에 포댓자루처럼 둘러 들쳐 올렸다.
“할마마마나 어마마마께옵서 꾸중하시거든 내 핑계를 대시게나.”
그리 말하며 은헌은 잽싸게 섬돌 위에 놓인 고윤의 신발을 손가락에 걸어 낚아채곤 성큼성큼 움직였다. 보쌈당하는 여염집 처자도 아니고 은헌의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신세가 된 고윤은 입을 방긋 열었다가 곧 한숨을 내쉬곤 편하게 늘어졌다.
은헌은 힘들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는 주위를 둘러 적당한 곳을 골라 고윤을 바닥에 내렸다. 그러곤 그 앞에 신을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고윤의 시선이 바닥에 떨궈졌다. 대군의 태도에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신까지 챙겨 신고 나서야 고윤은 특유의 심드렁한 얼굴로 은헌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내일 정오쯤에나 궐 밖에서 뵐 줄 알았습니다.”
보낸 문장들이 다 해석이 되든 안 되든 편히 말을 나눌 수 있는 때가 그때라서 말이다. 그러나 은헌은 보기 드물게 낯을 굳히고 있었다.
“나도 그럴 줄 알았지.”
알아낸 사실이 아니라면 이리 급하게 들르지도 않았을 터다. 은헌은 가능한 고윤을 빨리 만나야 했다.
“자네가 보내준 풀이법을 참고해 새벽에 맡기고 간 문장을 읽어보았다네.”
고윤은 은헌의 말에 집중했다.
“알아내셨습니까.”
“그래.”
은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순서만 맞춰지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풀이할 수 있거든.”
그는 그리 말하며 자신이 풀어낸 문장을 입에 올렸다.
《청목(淸穆) 35)에게 총오(聰悟) 36)가 전하네. 귀관(鬼關) 37)의 귀개(貴价) 38)가 뒤를 따르네. 백면(百面)이 치장(鴟張) 39)하니 부디 만복(萬福)하게.》
고윤은 어제부터 풀어내려 애썼던 것을 들으며 입속에 혀를 굴려 몇 번이고 되새겼다. 생각보단 평범한 시구처럼 느껴졌다. 아니, 간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첫 번째 구에 나오는 청목이라는 말 말일세.”
은헌은 저를 부리나케 움직이게 한 단어를 말했다.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상대방의 건강을 물을 때 쓰는 말이라 여기서는 뭐라 묻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꼬투리를 잡자면 잡을 수 있지.”
“그게 무슨?”
은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할마마마의 자호가 청목이라네.”
고윤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자네가 보낸 문장은 당언문으로 쓰였어. 궁관들의 말이란 말이세. 당언문을 쓸 줄 아는 이가 남긴 구절에 청목이란 말을 썼는데. 풀이할 때 그게 어디 건강히 계시냐는 뜻이 되던가?”
차라리 안부 묻는 말로 쓰였다면 그렇게 이해했을 것이다. 아예 쓰지 않는 말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그런 의미는 되지 않았다.
고윤은 문장을 다시금 풀이했다.
“대비마마의…… 자호란 말이지요.”
“그렇다네. 청목이란 자호를 쓰는 이가 따로 있다면 모르겠는데 할마마마의 자호가 청목인 것 또한 확실하네.”
고윤의 얼굴도 은헌의 낯만큼이나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문제 삼고자 하면 문제가 되는 형국이군요.”
궐내 돌아가는 사정은 몰라도 삼전의 이름과 관련된 일은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건 뻔했다. 은헌은 주위를 확인했다. 그의 눈에 희운당 지붕이 보였다.
“그 이름을 아는 이도 드물거늘.”
고윤이 고개를 들었다.
“어릴 적 쓰시던 자로, 지금에 와선 불러줄 사람이 없으니 자연스레 잊힌 것이라네. 나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에나 들었던 이름이고.”
웃어른의 자호니, 글을 쓸 때 주의하도록 배운 것이었다. 궐내 담장 안의 어느 여인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이름 대신 궁호나 직첩을 따라 불리는 것이 당연시되어 일부러 외우지 않으면 알기도 어려웠다.
얼마 전까지도 왕실 계보를 정리한 《선보집략》을 읽었지만, 거기에도 없어 고윤은 알지 못하였다. 새로 첨언할 것이 생겼으나 기쁘지 않았다.
“청목에게 총오가 전하네. 귀관의 귀개가 뒤를 따르네. 백면이 치장하니 부디 만복하게.”
고윤은 청목을 이름으로 넣어 문장을 읊조렸다. 그는 두 번째 구절을 다시 읽었다. 청목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 듯했다.
“청목이란 것이 대감께서 일러주신 것과 같다면 두 번째 구절의 귀관과 귀개도 문제가 되겠군요.”
“그렇지.”
귀관은 저승문을 귀개는 심부름꾼이란 말이니 앞 구절의 청목인지 총오인지 누굴 따라가는 것인지는 몰라도 따라간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리고 백면도 말입니다.”
고윤은 그가 알고 있는 백면을 떠올렸다. 앞서 적힌 것이 누군가의 자호라면 이것도 누군가를 가리킨 말일 수 있었다. 치장하다는 것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는 의미대로 말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게 뭔지 아는가?”
은헌은 조바심을 내비치며 물었다.
사람의 이름이라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고 있다면 좀 더 수월해질 법도 한데 고윤의 표정은 되레 어둑해졌다.
“근래 도성 내 투전판에서 벌어진 사사로운 다툼이 큰 난동이 되어 조정에 여러 상소가 올라왔음을 알고 계십니까?”
“듣긴 했네.”
“형조와 좌우 포도청, 한성부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풀어 관련된 이들을 잡아들이고, 사람을 해치고 금품을 갈취하는 이들을 추포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고 있지요.”
고윤은 저가 하는 일을 떠올렸다.
“제가 지금 맡은 일도 처음에는 그런 무뢰배들의 소행이라 여겼다가 따로 추려온 것이고요.”
은헌은 사건의 내력을 읊어주는 고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왈짜를 뒤봐주는 이중 유난히 손속이 잔인한 놈이 있습니다. 놈은 투전판을 꾸리고 노름꾼을 모아 노름빚을 지게 한 뒤 사전 40)을 발행합니다. 노름꾼이 제때 돈을 갚지 못하면 그 돈을 회수하기 위해 관아에 고발하여 받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검계 놈들에게 노름꾼을 죽이라 시키곤 그 다음에 남은 식솔에게 남은 빚을 거두어가죠. 노름판 설주(卨住) 41)중에서도 악랄하기로 소문난 그놈의 이름이 백면(百面)입니다.”
둘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마주쳤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어주듯 침묵이 흘렀다. 복잡해질 수 있는 문제라 어디서 어떻게 알아낸 것을 적용하여 접근할 수 있을지 신중해져야 했다.
“우선.”
먼저 입을 뗀 것은 은헌이었다.
“한성부에서 궐내의 일에 손을 댈 수 없으니 고윤, 자네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정리하여야겠네.”
고윤은 타당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치도 않은 상황에 추측과 가정을 바탕으로 덤빌 수는 없었다. 증좌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청목이란 자호를 쓰는 다른 자가 있을 수도 있고, 백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가장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했다.
“문장이 무슨 뜻인지 알았으니 이제 죽은 노파의 신원을 밝히는 것이 급선무군요.”
“그게 빠를 거네. 그리고 이번 일은 다른 사람의 손을 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걸세.”
은헌의 말에 고윤이 침음을 흘렸다.
“왜 그러는가?”
“궐에 들기 전에 서리에게 그 투전에 쓰인 것을 베껴 쓰게 하여 판윤 영감께 보고 올리라 하였습니다.”
은헌의 표정이 굳었다.
“벌써 보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보셨다 하더라도 굳이 고생하여 파훼하려고 하시지도 않으실 테고.”
고윤은 그가 보고를 올리면 유난히 확인하길 꺼리는 상관을 떠올렸다.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조심하는 게 좋은 상황이라네.”
서두를수록 좋은 일이라 당장 처소로 가서 서신을 써야겠다며 고윤이 중얼댔다.
“그리고 총오가 누군지는 내가 알아보겠네.”
은헌의 말에 고윤이 눈을 크게 떴다.
“대감께서 직접 말씀입니까?”
“그래. 적어도 청목이란 이름이 나온 이상 이번 일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 아니야. 그러니 청목에게 백면의 소식을 전한 그 총오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도 중요치 않겠는가.”
“한데 어떻게 말입니까?”
고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경 상궁에게 물어보면 될걸세.”
고윤의 미간이 좁혀졌다. 근자에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임 상궁에게 안부를 물었던 그 경 상궁 말입니까? 병환으로 궐을 나간?”
“그래. 지금은 모르지만, 할마마마의 일이라면 경 상궁만큼 아는 이가 없다네. 청목이란 자호 또한 경 상궁에게 들어 아는 것이고.”
하긴 궐에서 오래 일한 상궁일 테니 그것도 방법이었다.
고윤은 무거운 숨을 뱉어냈다.
“그럼 그리해 주시겠습니까.”
은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답지 않게 웬일로 그리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고윤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그는 이번에도 은헌이 이 일에 상관하는 것을 막았을 터다.
“보름 뒤엔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되니까요.”
인외의 존재가 관여한 일이라 고윤은 지금 제 손에서 놓아버려도 언제고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은헌에겐 할 수 없는 일이라 했지만, 사실 나중에 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리했다간 사람은 몇이 더 죽어 나갈 테고 일은 더 커질 것이다. 그저 노름판 설주의 일로 끝나면 모를까 대비전까지 거론되었으니 어느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예측이 어려웠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동안 일을 처리해 두어야 나중이 귀찮지 않았다.
고윤은 표정을 와그작 구겼다.
“제 팔자 제가 꼰다더니 나중에 크게 혼날 일만 남았군요.”
은헌은 담담히 웃으며 고윤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마마마께옵서 혼내시거든 날 핑계로 삼게. 언제든 같이 혼나주지.”
“그거참, 퍽 마음의 위로가 됩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 얼굴로 고윤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