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5/35)

二。

궐을 나온 고윤은 곧장 육조 거리로 나서 한성부 관아를 향해 걸어갔다.

“송구합니다.”

한성부에서 온 사령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도 관의 심부름을 한 것이지만, 남산골에 당도한 뒤 고윤이 궐 안에 있다는 말에 퍽 당황하였던 터다.

“아닐세.”

고윤은 손을 내저었다. 그가 서리에게 시킨 일이니 어디든 연락을 받는 것이 마땅했다.

중전을 뵙고 희정당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고윤은 관편을 받았다. 사령의 손에 들려 보낸 서리의 보고를 읽은 그는 임 상궁을 통해 대비전과 중궁전에 윤허를 구하였다.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대군을 통해 동궁전의 도움을 받아볼까 하였는데 다행히 곧장 외출하여도 된다는 허락을 구할 수 있었다.

고작 이틀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도 조금의 낯섦이 느껴져 고윤은 가볍게 혀를 찼다.

“나리! 정 참군 나리!”

그를 발견한 서리가 서둘러 가까이 다가왔다.

“오래간만에 보네.”

“연통을 받으셨습니까. 알아낸 것을 추가하여 조금 전, 시키신 대로 본 댁으로 서신을 보냈었는데요.”

그 말에 고윤이 미간을 구겼다.

본댁으로 보냈다 했으니 팽 24)이 남산골로 곧장 향하였을 터다. 헛수고를 시킨 셈이었다.

“그것은 받지 못했네. 내가 받은 관편은 새로운 시신이 나타났다는 것뿐이었다네.”

“그렇군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서리는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예의 그 자상과 같은 상처로 죽은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포청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상처를 확인한 이들의 말로는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기에 저도 나리께 알린 것입니다. 한데.”

“한데?”

“그 시신이 아무래도 지금 조사하고 있는 첫 번째 시신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죽지 않았느냐며 오작인들이 그리 말했습니다.”

그 말에 고윤은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시일이 오래되어 시신이 많이 상했겠군.”

한참 추울 때는 살이 문드러지는 것이 더울 적보다 덜하다 해도 반달이나 지났으니 여름날 닷새가 지나 발견된 것만큼은 할 것이다.

“응달진 곳에서 발견됐고 시취가 심한 편입니다. 구더기도 끓고요. 그래도 살이 많이 문드러지진 않았습니다. 벌레가 알을 깐 것 보고 오작인 중 한 명이 첫 번째 시신만큼이나 오래된 것일 수도 있겠다 짐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서리는 자릴 비웠던 고윤을 불러내야 했던 이유를 단숨에 털어냈다.

“여인입니다. 노파요.”

지금까지 발견된 시신은 모두 사내였다. 같은 상처를 앓고 죽은 이가 여인, 그것도 나이 든 이란 소리에 고윤은 바쁘게 걸음을 옮겨갔다.

“신원은?”

“아직 파악 중입니다. 발견된 장소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고, 몸에 지닌 물건 중에서는 따로 짐작 갈 바가 없었습니다.”

“그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군.”

“게다가 호패가 지급되지 않는 여인이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고윤은 눈살을 찡그렸다. 그는 다시 걸어가며 질문을 던졌다.

“발견된 곳은 어디인가?”

약현(藥峴) 25)입니다. 시신이 발견된 곳이 고개 너머 외따로 동떨어진 데라 어제저녁 발견되었고, 포도청에서 주변을 수소문하여 보니 근방에서는 본 적 없는 노파라 했답니다.”

“시신을 본 다음 발견된 곳에 가보아야겠네.”

“준비하겠습니다.”

고윤은 거리낌 없이 시취가 짙게 배어든 곳으로 들었다. 여기저기 짚을 엮어 덮어놓은 죽은 이들 사이로 따로 구분해 둔 시신들이 보였다.

오작인들이 고윤은 반갑게 맞이했다.

“자상부터 확인하려 하네.”

바쁘게 나온 걸음이라 고윤은 인사보단 볼일부터 꺼냈다.

“다모를 부르겠습니다.”

오작인 중 한 명이 재빨리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죽었다 해도 여인의 몸이었다. 그러니 사내인 그들 대신 관청에 소속된 여노비가 확인해야 했다. 다모가 안으로 들어오자 고윤은 서두르라는 듯 손짓을 했다. 오작인들이 가벽을 세워 따로 구분해 놓은 곳으로 다모가 들어갔다. 그곳에 있는 노파의 시신은 고윤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거적을 걷게.”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린 다모가 명을 받아 거적을 걷었다.

“안을 살피겠습니다.”

다모는 그리 말하며 몸과 함께 썩어든 옷자락을 올렸다. 벽을 사이에 두고 복검이 진행되었다.

“오른쪽 팔에 상처가 크게 있다고 했습니다.”

오작인은 포청에서 넘겨온 것을 확인하여 일러주었다.

“확인해 보게.”

다모는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시신의 소매를 걷었다. 부패가 덜 된 곳에 남은 상처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떤가?

다모는 오작인이 불러주는 것과 죽은 노파의 몸에 남은 상처가 같은 흉기에 의해서 생긴 것 같다고 고해 올렸다.

“불러주신 것과 폭과 길이가 일정합니다. 그리고 나리. 목 아래와 가슴께 그리고 팔과 다리에 전체적으로 같은 상처가 있습니다.”

“시일이 오래되어 살이 부풀었는데도 노파의 상처와 갑정(甲丁)의 상처가 같단 말인가?”

고윤의 물음에 오작인이 제 손에 든 것을 넘겼다.

“그것은 아니옵고, 방금 부른 것은 첫 번째로 복검하였던 갑정의 시신에 남은 상처를 어젯밤 다시 확인하고 기록하여 비교한 것입니다. 혹시나 하여 같은 흉수에게 당한 을과 병 그리고 정, 세 구 또한 그리하였습니다.”

고윤은 시신마다 새로 잰 상처의 폭과 깊이가 지난번 것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방금 기록한 노파의 것을 비교해 보았다. 같은 시일쯤에 죽은 것이라 오작인이 그리 추측할 법도 하였다.

“상처가 어느 곳에 났는지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구분 가능한가?”

“살을 벨 때 들어가고 나온 곳의 창상의 흔적이 다르니 신중히 살피게.”

고윤의 명을 이어 오작인이 말을 덧붙였다.

다모는 신중하게 지시에 따라 상처들을 확인하고 기록했다.

“나리, 저 말고 다른 다모를 하나 더 불러 등 뒤의 상처를 보아도 되겠습니까?”

“등에도 상처가 있는가?”

“그게 마치 서 있는 상태에서 동시에 사방에서 베어낸 듯 종아리와 발목 사이에 상처가 난 것이 보입니다. 하여 위쪽도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고윤은 눈을 찡그렸다.

그의 허락에 다모 두 명이 더 들어와 시신에 남은 상처를 빠짐없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한 명은 그것을 기록하여 고윤에게 넘겼다.

“등 뒤에 난 상처의 깊이가 깊군.”

“예. 혈맥이 지나가는 자리라 이리로 피가 상당히 흘렀을 것입니다.”

오작인이 치명상으로 보이는 상처의 위치를 본 뒤 몇 가지를 덧붙였다.

“시신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바로 누워 있었던가? 아니면 엎드린 상태였던가?”

고윤의 물음에 서리가 포도청에서 기록한 것을 읽어 확인했다.

“바닥에 엎어진 상태였다 합니다.”

고윤은 다모에게 손바닥과 팔 안쪽에 상처가 있는지 보라 명했다.

“……없습니다.”

“양쪽 다 그러한가?”

“예, 나리.”

얇고 뾰족한 칼로 온몸이 베였는데 도망치거나 방어한 흔적이 없는 시신이다. 앞선 넷과 다르지 않았다.

“목격한 이도 없을 테고, 아직 신원도 나오지 않았고, 알아낸 것은 어찌 죽었는가 뿐이군.”

고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죽은 육신에 남은 요기는 그의 눈으로 직접 보아야 구분이 가능한 것이었다.

“시신의 몸을 가려 덮게. 그리고 손과 팔에 난 상처를 직접 보아야겠네.”

안쪽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이내 들려오는 되었다는 말에 고윤은 가벽 안으로 들어섰다. 다모는 노파의 몸을 천으로 덮은 뒤 고윤의 고갯짓을 따라 손목까지만 걷어 올렸다.

고윤은 시신을 보았다.

앞서 본 것처럼 짙지는 않았으나 분명 요기의 흔적이 엿보였다. 그는 시신 주위를 훑었다. 망자의 원념이라도 남아 있을까 하여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되었네. 확실하군.”

그의 말에 서리와 오작인의 낯빛이 어둑해졌다.

고윤조차 한 달째 흉수를 찾아내지 못한 사건에 또다시 시신이 나온 것이다.

* * *

은헌은 염소 뿔을 봤다.

저를 향해 염소 뿔을 들이밀고는 귀한 짐승의 뿔이라며, 이것만 고아 먹으면 무병 치레할 수 있다, 당당히 외치는 장사치가 배시시 웃었다.

“정말로 어렵게 잡은 귀한 놈의 뿔입니다.”

은헌은 대낮에 사기를 치려 하는 장사치를 향해 어수룩한 눈웃음을 지었다.

“어렵게 잡았다?”

“아이, 그럼요! 이놈이 본디 양지를 싫어하여 깊은 산속, 볕도 잘 들지 않는 곳에만 돌아다니는 놈인데. 예민하기는 또 얼마나 예민하고 잽싸기가 산군 못지않습니다. 하여서…… 큼큼. 저가 보름밤을 나뭇짐 속에 숨어 기다려 겨우겨우 붙들어 뿔을 베어오지 않았겠습니까.”

팔을 휘적거리며 믿어달라 청하는 목소리에 은헌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래? 그런 짐승이 있단 말이지? 한데 그것은 어찌 생겼는가?”

“그게! 발이 이렇게 네 굽으로 갈라져 있고, 수염은 이렇게 늘어뜨리고, 사슴처럼 몸은 큰데 꼬리는 또 말총처럼 길게 내려와 있습니다. 눈은 쫙 찢어져 밤중에 마주치면 오금이 저릴 것 같은 생김새를 지녔지 뭡니까. 각(角) 26)이란 놈이 본래 그렇게들 생겼잖습니까.”

설마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 후려치는 장사치의 능갈에 은헌은 터지려는 실소를 겨우 참아냈다. 정말로 몸에 좋다면서, 뿔 하나만 열흘 동안 달여서 마시고 나면 사내에게 그렇게 좋은데 뭐라 표현을 못 하겠다면서 장사치는 연신 떠들어댔다.

은헌은 장사치의 손에 들린, 분명 염소 뿔로 보이는 것을 다시 훑었다.

“주인장 계십니까?”

그때 옆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헌은 고개를 돌렸다. 깨끗이 차려입은 어디 높은 댁의 종으로 보이는 아이가 그의 시선에 허리를 굽신거렸다.

“말씀 나누시는 도중에 끼어들어 송구합니다.”

“큰 마님 심부름을 왔느냐?”

장사치는 아이를 잘 아는 듯 반겼다.

“예. 마님의 심부름입니다. 각의 뿔이 들어왔다 하셔서요.”

아이는 그리 말하며 품에서 동전이 철렁철렁하는 주머니를 꺼내어 내밀었다. 장사치는 돈 소리에 잠시 볼일 좀 보겠다며 은헌에게 눈웃음치더니 손에 들고 있는 염소 뿔을 이끼를 깐 함에 곱게 담기 시작했다.

“푹 달여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싹 드시라 전하거라.”

“그럼요. 이 뿔 때문에 마님께서 요즘 몸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하시는걸요.”

아이는 뿔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 말하며 은헌에게 연신 시선을 던졌다. 장사치 역시 손바닥을 비비며 은헌을 보았다.

“석삼아.”

은헌은 부채로 장사치를 가리켰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석삼이 앞으로 나섰다.

“값이 얼만가?”

“아이고. 이게 원래 흔하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서. 방금 하나가 나갔으니 남은 하나가 조금 비쌉니다.”

장사치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래쪽 숨겨진 광주리에서 염소 뿔을 하나 더 꺼내, 아이에게 내어줄 것과 똑같이 이끼를 깐 상자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삼십 냥은 너끈하게 받는 것인데, 나리께서 가져가시겠다 하면 열 냥! 제가 단돈 열 냥만 받고 드리겠습니다.”

석삼은 어찌할지 대답하지 않고 은헌을 돌아보았다. 은헌이 작게 고갯짓을 하자 그제야 석삼은 품에서 줌치를 꺼내 풀었다.

“여기 있네.”

장사치는 순식간에 환해진 얼굴로 손을 뻗어왔다.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동전을 낚아채 가려던 찰나 옆에서 들어온 팔 하나가 장사치의 손목을 붙잡았다.

은헌은 거래를 파투 내듯 끼어든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복장을 한 이가 불퉁한 얼굴로 서 있었다.

고윤은 미간을 찌푸리곤 붙잡은 장사치의 팔을 털어냈다. 그의 시선이 매섭게 장사치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예서 사기 치면 세 치 혀를 잘린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나?”

누가 보아도 관에서 나온 듯한 복장에 장사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사기라니요?”

고윤은 장사치가 담아놓은 염소 뿔을 보았다.

“저게 무엇이라고?”

“각! 각의 뿔입니다.”

고윤의 얼굴에 한숨이 스며들었다. 각(角)이란 놈이 들었다면 단숨에 뛰어나와 저를 욕보이느냐며 장사치를 들이받아도 받았을 터였다.

“각?”

“……예.”

장사치 눈알이 눈치를 살피며 데구루루 굴렀다.

“가-악? 네놈이 정말로 혀가 잘려봐야 정신 차리겠구나.”

“아이고 나리! 그게 그러니까!”

장사치는 난처한 얼굴로 쩔쩔매다가 넙죽 엎드렸다.

“잘못했습니다.”

“쯧.”

돌돌 27) 대며 고윤은 저를 따라온 군관에게 알아서 처리하라는 듯 손짓했다.

“예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고윤은 얼떨떨한 얼굴로 선 은헌을 보았다.

시전 바닥에서 차마 대군 대감이라 부를 생각은 없었는지 호칭은 썩둑 생략한 채였다.

“정말로 자네로군.”

무슨 소릴 하느냐는 듯 고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뜬금없는 곳에 아는 얼굴이 있기에 허깨비가 나타났나 했지.”

싱거운 대답이었다.

“그리고 나야 뭐, 늘 하던 대로 이리저리 구경하며 시간 보내는 중이라네.”

은헌은 해맑게도 웃었다. 고윤은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찼다.

“사기꾼 말놀음에 속아 염소 뿔도 사시고요?”

은헌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끌려가고 있는 장사치를 보았다. 아까 심부름을 하러 왔던 어린 사내아이도 연신 ‘아부지’를 외치며, 함께 따라가고 있었다.

“구경값이지. 나 하나 속여 먹겠다고 어찌나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광대놀음 하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빼닮은 아이와 남처럼 구는 것도 재밌지 않은가.”

누가 봐도 핏줄로 보이는 크고 작은 사기꾼의 뒤태를 보며 고윤은 한숨을 흘렸다.

되지도 않은 사기에 넘어가는 걸 보고 얼마나 덜떨어진 작자인지 확인하려다가 그게 은헌이라는 걸 알고 나선 터였다. 정작 그 사기에 놀아나고 있던 은헌이 재밌는 것 보았다며 구경값을 치르는 중인 줄은 몰랐다.

은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히 웃으며 눈으로 고윤을 살폈다.

“그나저나 자네는 예까지 어쩐 일인가? 아직 나올 때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차림새도 평소와 다르고.”

은헌은 이 시간에 고윤을 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고윤은 도포도 아니고 철릭을 걸치고 검을 들고 있는 전형적인 무관의 차림새였다. 뒤에 선 군관도 마찬가지였다. 한성부 참군직을 지내고 있으나 문관이라 고윤의 경우에는 드물게 차려입는 복색이었다. 검을 쓸 줄 아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체력도 좋지 않은 이가 이렇게 나타났으니 은헌의 의문은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봐야 할 것이 생겨 윤허를 받고 급히 나온 것입니다. 예의 그 일로요.”

고윤은 주위를 살피며 어물쩍 대답했다. 누군가가 눈여겨보고 있지는 않겠지만, 남의 귀에 들어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의 짧고 개떡 같은 설명에도 은헌은 찰떡처럼 알아들었다. 대군의 입에서 콧노래 비슷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랜만에 본 참인데 석반이나 같이 드세.”

참혹한 일이 벌어졌던 곳으로 향하는 길에 받은 청에 고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까 도와줄지 말지 고민하다 귀찮아졌을 때 그냥 지나갈 것을 그랬다. 대군에게 열 냥 따위가 무슨 큰돈이라고 말을 붙였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은헌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답을 기다렸다.

“머무시고 계신 곳을 일러주시면 잠시 후에 사람을…….”

“이렇게 만났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무언가? 시간이 오래 걸릴 일도 아닌 듯하니 근방에서 기다리겠네.”

“근방이요?”

차마 ‘대군께서? 네가?’라는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고윤은 흰 눈 뜨고 반문했다.

“그래. 근방.”

은헌은 그런 고윤을 보며 자신을 믿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 참군 나리.”

“신경 쓰지 말게. 허수아비라고 생각해.”

군관은 허수아비치곤 허우대가 지나치게 멀쩡한, 높은 분이 분명한 이가 있을 뒤쪽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보리 가시랭이가 까다로우냐 괭이 가시랭이가 까다로우냐 물으면 한성부 구실아치들은 하나 같이 정 참군이 가장 까다롭다 할 터다. 그런 양반이 쫓아내지 못한 것을 보면 그들은 하늘처럼 우러러봐야 할 분이 분명하였다.

“그게 안 됩니다요.”

고윤은 뒤통수에 들러붙은 것 같은 신경 줄을 억지로 떼어냈다. 근방에서 기다린다는 말에 기대를 내려놓길 잘한 듯했다. 지척 거리에서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은헌의 일행과 그의 뒤를 따라온 군관들이 묘한 조합을 이루며 길을 따라갔다.

고윤이 걸음을 멈춘 건 노파의 시신이 발견된 곳에 다다라서였다. 그는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예 계시지요. 이 앞은 곤란합니다.”

금줄을 쳐 두어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곳이 보였다. 고윤은 은헌과 곧게 눈을 마주치며 입을 뗐다.

“움직이지 마시고요.”

무례한 말투였으나 은헌도, 은헌을 호위하고 있는 이들도 지적하지 않았다.

“예서 말인가?”

“예.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고윤은 사기가 짙어지는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 손으로 가리켰다. 그 말에 되레 불안해진 얼굴로 고윤을 따라나선 군관들이 발치를 살폈다. 불안스레 이리저리 눈알 굴리는 것을 보며 고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가세.”

“저기, 나리.”

고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군관에게 윽박지를 생각은 없었으나 저렇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것을 보고 있으니 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괜찮네.”

적어도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군관들은 서로 눈만 마주칠 뿐 쉬이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괜찮은데 나는 왜 여긴가.”

반발은 군관들의 뒤에서 들려왔다. 고윤은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은헌이 손에 든 부채를 살랑이며 손을 흔들었다.

“시취가 짙어 그다지 보기 좋은 곳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게다가…….”

본인의 입으로 굳이 꺼내기엔 쑥스러운 일이나 고윤은 뻔뻔스레 다음 말을 꺼내 혀끝에 올렸다.

“혼사를 앞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부정 탈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요.”

은헌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건 자네도.”

“저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제 누이의 일인데요.”

고윤은 그리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은헌 역시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러니 거기 계십시오. 자네들은 불을 밝히고, 필요하여 부르거든 이따가 들어오게나. 먼저 들어가 살피고 있을 테니.”

고윤은 냉정하게 딱 잘라 끊어내곤 지시를 남겼다. 그러곤 은헌이 붙들기 전에 성큼 걸어 쓰러지기 직전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썩은 살이 닿아 젖은 흙에 남은 시취가 고약하게 콧구멍을 찔러 들어왔다.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삼켰다. 살이 문드러져 내는 냄새는 지독했다. 거기에 더해 습기를 머금고 썩어가는 나무 냄새와 짚 냄새가 강렬한 악취를 더했다. 어둑한 시야로 고윤은 주위를 꼼꼼히 살폈다. 시신이 놓인 자리에서, 혹은 죽은 자리에서 멀리 가지 못하는 것이 혼백이었다. 죽은 곳에서 멀리 벗어나는 경우가 있었으나 그것도 일종의 매개물이 있어야 했다. 생전의 상념이나 집착이 깃든 물건이 아니라면 대부분 근방에서 발견되곤 했다.

그러나 혼백은 보이지 않았다. 고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산 자에게 닿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요기는 남아 있는데 이렇다 할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는 일은 지난밤과 마찬가지였다. 이번 사건을 같은 자의 소행으로 묶어 넣는다면 무엇이 바뀌는 걸까. 그리 고민하며 고윤은 오두막 밖으로 나와 주위를 돌았다.

이곳은 서소문 근처로 가는 상인들이 비를 긋기 위해서 썼던 곳이었다. 작년 큰비로 토사가 밀려 내려와 지금은 다른 곳을 쓰고, 이곳은 이제 쓰지 않는다며 서리가 알려주었다.

“나리?”

군관은 밖으로 나와 뒤쪽 흙무더기 쪽으로 돌아간 고윤을 불렀다.

고윤은 고개를 돌리다 멈칫했다. 그의 입술이 조용히 벌어졌다가 오므라들었다.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을 죽은 자를 부르는 말이 허공에 힘을 가지고 흩어졌다.

“그리 부르지만 말고 앞으로 가서 어둠이라도 걷어주게.”

은헌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엉거주춤 앞으로 떠밀리듯 나선 군관은 횃불을 들이밀어 어둑함을 밀어냈다.

고윤은 저가 찾은 것을 보며 손을 움직이곤, 다시 오두막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집 뒤쪽 그늘진 곳에서 나온 고윤은 어쩐지 오싹한 기운을 풍겼다. 군관의 안색이 나빠졌다. 그들은 저들이 모시는 사람에게 붙은 온갖 소문을 꿰고 있는 이들이었다.

“들어갈까요?”

여태 금줄 바깥에 서 있던 군관은 조심히 물었다. 고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잠시 물어볼 것이 있어서.”

“……기다리겠습니다.”

살인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곳이고, 주변에 사는 이도 없는 외딴 오두막이었다. 사람은 없었다. 인기척도 없던 곳에서 누구에게 물어볼 게 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들 침묵을 지켰다. 그뿐만이 아니라 슬쩍슬쩍 궁둥이를 들썩이며 오두막에서 물러났다.

은헌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성큼 걸어 앞으로 나섰다.

“대감!”

그의 호위로 따라나선 석삼이 놀라 외쳤다.

“내 다녀올 테니 너희는 예 있거라.”

“하오나. 여기에서 기다려 달라 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고윤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머뭇거리는 하인을 보며 은헌은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참말로 위험한 것이면, 고윤이 저 성질머리에 잘도 나를 꼬리로 붙이고 다녔겠다.”

그 말에 석삼은 오두막을 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군의 상투를 붙잡고 쥐어뜯기까지 했던 양반이 뭐가 무서워서 여기까지 그들을 데리고 왔겠는가 하며 말이다.

“다녀오마.”

은헌은 앞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위험해 보이는 곳에 고윤 혼자 있다는 게 영 마음 쓰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군관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퍼렇게 질린 것도 거슬렸다.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막으라는 지시는 없어 그런지 군관들은 은헌을 붙잡지 않았다.

은헌은 오두막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밀려드는 한기에 입술을 살짝 베어 물었다. 날이 저물어가며 찬 바람이 불고 있다 하나 이렇듯 뼛속부터 저릿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추위는 그도 딱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죽어서……. 휘릭 날아왔습니다. 본 것은 그게 답니다.”

“애초부터 죽은 시신이었다?”

“예.”

고윤의 말소리와 사내인지 여인인지 분간 가지 않는 괴이쩍은 잡음이 잔뜩 낀 목소리 함께 들렸다. 은헌은 부러 바닥을 긁듯이 한 걸음을 떼어 기척을 했다. 고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은헌이 고개를 빼 살폈으나 서 있는 것은 고윤 혼자였다. 은헌은 침음을 삼켰다.

“내가 방해한 것인가?”

“……들어야 할 것은 다 들었습니다.”

고윤은 그리 말하며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꼭 객을 내쫓는 듯한 모양새로 말이다. 그러곤 눈살을 찌푸린 채 은헌을 보았다.

“잠시 계시라 하였더니.”

“칼도 못 쓰는 이가 칼까지 차고 온 곳인데. 호위라곤 붙이지도 않고 다니니 염려가 되어 말이지.”

은헌은 당당하게 변명했다.

“칼을 못 쓴다니 누가 말입니까?”

“자네 말일세.”

후려치면 부러질 것 같은 작대기 같은 몸을 하고 선 고윤이 콧김을 내뿜었다. 그런데도 딱히 반박은 안 했다.

“그래도 오시면 안 됩니다. 길일 앞두시고 부정 타실까, 염려가 상당하시던데요.”

이번 일 역시 누군가의 눈과 귀를 통해 보고가 올라갈지도 몰랐다.

“뭐 그런 것을 염려할까. 이 땅에 나고 자라 것 중에 나만큼 부정한 존재가 또 어디에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한 소리에 할 말이 없어진 쪽은 고윤이었다. 은헌은 그 침묵에 짓궂은 웃음을 머금었다.

“이럴 때는 부정부터 해줘야지.”

“그야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사실이잖습니까. 정작 고윤, 저 자신이 할 소리는 아니라 그렇지만 말이다.

고윤은 애써 튀어나오려는 뒷말을 삼켰다. 그냥 그는 대군에게 말로 이겨 먹는 것을 포기했다. 대군과 같이 다니며 터득하는 일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고윤은 그냥 저 편한 대로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주위를 살폈다. 그의 시선 닿는 곳을 은헌도 살폈다.

“도움 될 만한 것이라도 알려주던가?”

“뭐, 실마리는 있었습니다.”

“그래?”

“대감께 알려 드릴 생각은 없고요.”

고윤의 말에 은헌은 불퉁하니 입술을 비죽였다.

“어찌하여?”

“괴이쩍은 일에 대감을 끌어들였다간 제가 경을 칠 거 같아서요.”

“누가 자넬 혼낸다고.”

그 말에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더러 험한 일에 몸 사려라 충고한 이가 줄을 서서 혼낼 터다.

고윤은 현장 조사에 필요한 것을 지시하고 서둘러 한성부로 돌아왔다. 시간이 정해져 있는 외출이니 시간을 아껴 써야 했다. 은헌은 당연하단 듯 그의 뒤를 따라 관청에 들었다.

“석반은 물 건너간 듯하니 이만 댁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쫓아내질 못해 안달인 것을 보니 더 붙어 있고 싶은데.”

“그건 또 무슨 청개구리 심보시고요.”

고윤의 말에 은헌은 눈썹을 들썩였다.

“내가 있다고 한성부 대들보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던가?”

“대들보는 안 무너져도, 대감께 인사드리려고 상관들이 줄을 서겠지요.”

대군이 강림하였으니, 얼굴을 비추지 않을 리 없었다. 가뜩이나 바쁜 와중에 상관 대접까지 하려면 몸이 열두 개라도 힘들 터다.

“이미 신시가 지났는데 다들 돌아가지 않았는가?”

“가다가도 돌아올 분이 두어 분 계신 터라. 뭐, 생각해 보니 그리 오셔도 대감께서 계시니 저한테 잔소리는 안 하겠군요.”

고윤은 그냥 편하신 대로 하시라며 손을 들었다. 은헌은 픽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보는데 얼굴도 보여주려 하지 않고, 쫓아내기 바쁘다니. 매정하기가 이를 데 없군.”

“어제도 보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본 것이라고. 우리 사이에.”

은헌은 대차게 코웃음 쳤다. 고윤은 그런 대군을 보며 그냥 웃어버렸다. 한시도 떨어진 적 없는 지기처럼 붙어 다니다 한 달가량 떨어진 것뿐이었다. 애초에 곁에 사람을 둔 적도 없는 게 처음에는 그게 무척이나 적응되지 않아 이상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런 심리라면 이해가 가긴 했다. 무척이나 심심하였나 보다 싶은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잠시 여기 계셔주십시오.”

“어디를 가길래 또 기다리라고 하는 건가?”

고윤은 서리가 제 앞으로 보고해 올린 것을 읽으면서 대답했다.

“오작인에게 물을 것이 있어서요.”

낮에 보았던 그 시신에서 무언가 또 특이한 것이 나온 듯했다.

고윤은 저를 기다리는 서리의 뒤를 따라 시신을 보관하는 곳으로 들었다.

“내가 꼭 확인해야 한다는 그 입에서 나온 게 뭔가?”

그 말에 한쪽에 서 있던 오작인이 재빨리 소반에 받친 것을 들이밀었다.

“이것입니다, 나리. 목구멍 깊숙이 박혀 있던 것을 발견하여 꺼냈습니다.”

“이게 죽은 노파의 입안에 있었다고?”

고윤은 제 눈에 퍽 낯설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손 한 뼘 길이의 기름을 먹인 두툼한 종이였다.

“투전 패가 아닌가?”

“그게…… 뒤쪽에 이상한 것이 있어…….”

오작인은 말을 어물쩍거렸다. 고윤은 눈살을 찌푸리곤 직접 손을 뻗어 패를 뒤집었다.

적혀 있는 것은 괴이쩍은 기호였다. 암구어 같기도 했고, 파자 같기도 했다.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의미가 이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요기가 묻어 있었다. 낮에 보았을 때 알아채지 못한 것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짙은 기운이었다. 고윤은 패에 적힌 것을 다시 살폈다. 산 자의 염원이든 아니면 죽은 자의 염원이든 이런 요기가 배여 있는 것이 평범한 증좌일 리는 없었다.

“붓과 종이를 가져오게.”

그는 지필묵을 받아 시신의 입에서 나온 패의 문양을 그대로 베껴내듯 그려 옮겼다. 그 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주를 외웠다. 언령으로 묶인 주술이 투전 패에서 흘러나오는 요기를 막았다.

“글씨를 한 번 더 베껴낸 뒤 별지로 첨부하여 판윤께 고하고, 이것은 내가 준 봉투에 담아 사람 손 닿지 않도록 보관하게나.”

그리 말한 뒤 고윤은 고개를 돌려 오작을 보았다.

“패를 만진 이가 누군가?”

“초검을 도운 다모와 제가 다입니다.”

오작과 함께 나선 다모를 보며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손끝을 살펴보았지만 묻어난 것이 없었다.

“괜찮겠군.”

고윤은 이틀 뒤 오겠다며 그들을 뒤로하고 나섰다.

고윤은 투전패로 보이는 종이에 있던 문양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 뒤 곱게 접어 품에 갈무리했다.

“대감.”

그는 은헌이 앉아 있을 방문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오셨습니까.”

임 상궁이 고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윤의 머리도 반사적으로 내려갔다.

“아직 해시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고윤은 드물게 볼멘소릴 했다.

조금이라도 관련된 보고를 더 보고 가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불퉁한 목소리는 숨길 수가 없었는지 임 상궁은 고윤의 얼굴을 다시 살피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중전마마께서 하교하시길, 금일 궁자(窮子)를 내보내고자 하니 각 전각의 상궁들에게 만전을 기하라 하셨나이다. 하여 해시가 되기 전에 정 참군을 모시러 온 것입니다.”

궁자(窮子)란 궁귀를 말하는 것으로, 본래는 그믐날 거리에서 죽었다는 고양씨 28)의 아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전해진 풍습에 귀신에게 죽을 쒀 옷과 함께 거리에 버리고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는데 그는 귀신을 쫓아내기 위함이라, 그를 옛일에 빗대어 ‘궁자를 내보낸다.’ 하는 것이다. 29)

밤이 깊어지는 해시부터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니 그 전에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게다가 불나기 전에 굴뚝 고치라 잔소릴 한 것도 고윤이었다.

고윤은 끙끙대는 강아지처럼 궁상맞은 소릴 흘렸다. 그는 이내 한숨을 뱉곤 머리를 숙였다.

“그런 것인지도 모르고 마음만 조급하여 실수하였습니다.”

“아닙니다. 그러지 않아도 은헌 대감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임 상궁은 가볍게 웃었다.

고윤은 고개를 돌렸다. 은헌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

“대군인 나도 낯 보기가 힘들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한 것뿐이야. 그나저나 바로 가야겠군.”

은헌의 말에 고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종일 기다리게 해놓고는 훌쩍 먼저 돌아가게 생긴 터라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송구합니다.”

“됐네. 그저 날이 아니었던 것이지.”

은헌이 그리 말하며 손을 내젓자, 고윤은 콧등을 찡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성부에 오자마자 다과라도 내라 이를 것을 그랬다.

“이틀 후엔 궐에서 나올 테니 그때 보게. 그나저나 임 상궁.”

은헌은 임 상궁을 봤다.

대비전 상궁이라 그와는 별 접점이 없었지만, 본 김에 물을 것이 있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 말인데. 간만에 대비전에 문후를 여쭈러 갔는데 경 상궁이 보이지 않더군. 혹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매사 담담하던 임 상궁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흐려졌다.

“경 상궁 마마님께옵서 지난해 찬바람이 들 때부터 시령 30)을 앓으셨는데. 몸이 회복하지 못하시어 정월이 되기 전에 궐을 나서셨습니다.”

“그렇군. 할마마마의 곁에 붙어 있던 이가 한동안 보이지 않아 걱정하였는데 그리되었구먼.”

은헌은 거기에서 이야기를 끝냈다. 그는 고윤을 보며 입꼬릴 끌어 올렸다.

“퍽 안부가 궁금한 이가 있어 잠시 딴소릴 하였네. 자네도 슬슬 갈 채비를 하여야지.”

고윤은 챙길 것을 둘러보았으나 품에 든 것을 빼면 딱히 가져갈 것이 없었다.

“이대로 가도 됩니다.”

은헌이 눈을 찌푸렸다.

“그리 춥게?”

고윤은 제 차림새를 보았으나, 공복이란 것이 본디 그러하듯 예를 갖추기 위한 차림이라 방한과는 거리가 있었다. 은헌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뻗어 고윤의 전립 31)을 벗겨냈다. 그리고 그가 아까 풀어둔 남바위를 고윤의 머리 위에 덮어 내렸다. 휘장 두르듯 내리어 목 뒷덜미와 귀를 가리어 덮으니 조금 전보다는 따뜻해 보였다.

“제게 이리 주시면 대감께서는 어찌 가시려고요?”

고윤은 무슨 짐승의 털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나 보들보들한 감촉에 목을 움츠리며 물었다.

“벽동 집에서 잘 것인데 여기서 얼마나 멀다고? 몇 걸음 정도는 그냥 가도 괜찮네.”

그리 말한 은헌은 전립을 다시 고윤에게 씌워 끈을 매듭지어 묶어주었다.

곁에 선, 임 상궁은 오묘한 얼굴을 하였으나 끝내 입을 다물고 지켜보았다. 은헌이 가야 하는 벽동 집이나 고윤이 가야 하는 희정당이나 따지고 보면 비슷한 거리였다.

“하면 서둘러 가게.”

은헌은 바람 들지 않도록 고윤의 옷깃을 꽉 여미어주었다.

“나오거든 연통하고.”

“예.”

고윤은 설핏 웃는 낯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 * *

궐의 밤이 분주했다.

고윤은 지친 걸음을 디뎌 섬돌 위에 오르다가 멈췄다. 손바닥보다 더 작은 크기의, 서책이라 하기엔 너무 작은 것이 섬돌 옆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올렸다.

“에구머니나.”

당황한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흘러나왔다.

“무슨 소란이냐.”

단호한 꾸지람이 곧장 임 상궁의 입에서 떨어졌다.

“송구합니다.”

고윤은 뒤를 돌아봤다. 희정당 나인 중 하나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이것의 주인이 저 나인인 듯하였다. 고윤은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기름 먹인 종이를 같은 넓이로 열두 폭 병풍처럼 접어둔 것을 본 임 상궁이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정 참군 나리. 잠시 그것을 제가 살펴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주인이 있는 것은 분명했으나, 상궁이 나인의 물건을 들여다보고자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또 있을 테니 고윤은 순순히 허락을 내렸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임 상궁은 그것을 가져가 펼쳤다. 고윤은 대체 그게 무엇인데 이러나 싶어 보았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네 것이냐.”

임 상궁의 표정이 조금 풀려 나인을 보았다.

“그것이 제 것은 아니옵고. 부엌의 언 나인의 것이온데 제가 필요한 부분을 옮기려 빌려온 것입니다.”

고윤은 암구어도 아니고 파자도 아닌 가지런히 배열된 문양과도 같은 것을 보다가 입을 뗐다.

“그게 무엇입니까?”

“예?”

나인은 임 상궁을 한 번 보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조리서이옵니다. 언 나인의 본가가 남해도에 있는데 그 근방 나는 것들을 이용하여 만들 수 있는 조리법과 술 빚는 방법을 적어둔 것입니다.”

“아니, 그 내용 말고 글씨 말입니다.”

그게 궐에서 쓰는 조리법이든 궐 밖에서 종가 대대로 물려주는 가문의 비법이든 고윤에겐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고윤은 오늘 죽은 노파의 입에서 나온 투전 패를 떠올렸다. 그가 옮겨 적은 문양과 나인이 보려고 빌려왔다는 조리서의 글씨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비슷한 동류의 것임은 분명하였다.

“그 글씨는 어찌 쓰는 것입니까?”

자신의 것도 아닌 것을 나인도 읽을 줄 알고, 임 상궁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읽었다. 그렇다면 읽고 쓰는 방법이 정하여져 있단 소리였다. 임 상궁은 대답 대신 고갯짓으로 나인을 뒤로 물렸다.

“날이 춥습니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 서서 길게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그는 안으로 들어 곧장 자릴 잡고 앉았다. 그리고 임 상궁 역시 마주 보고 앉았다.

임 상궁은 고윤의 앞에 놓은 서책 위로 손바닥만 한 조리서를 펼쳤다. 최 나인은 어째서 고윤이 조리서에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잘 보이도록 초를 밝혀 가져왔다.

고윤은 밝은 빛 아래 드러난 글씨를 차분해진 마음으로 살폈다.

“이것은 당언문 32)으로 쓴 것입니다.”

임 상궁은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당언문이라면.”

“예. 화어와 언문을 뒤섞어 서로 약속한 방식으로 쓰고 있는 궁관들의 글씨지요.”

그것이라면 고윤도 본 적이 있었다.

“저도 일전에 보았습니다만, 생김이 무척 다릅니다.”

“규칙이란 것은 만들기 마련이라 서로 약조한 이들만 알아볼 수 있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크게 묶어 당언문이라 부르는 것일 뿐 각각 다른 꼴을 하고 있지요. 여기에 적힌 꼴 또한 그런 이유로 당언문이라 말씀 올린 것입니다.”

고윤은 임 상궁의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가리키는 글씨를 보았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 따로 읽는 방법이 없습니까? 조금 전에는 수월히 읽어내시기에 파훼법이 따로 있는 줄 알았습니다.”

임 상궁은 담담히 웃었다.

“저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규칙이란 것은 어디에든 통용되는 것이기에 추측하여 읽을 뿐이지요. 이런 글씨는 언문의 자모음을 구분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주로 모음자를 두고 자음을 바꾸지요. 파자로 바꾸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요.”

고윤은 제가 아는 범위에서 당언문으로 쓰인 조리서를 다시 살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아니 정확하지는 않아도 더듬대며 몇 개의 말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참군께서 이런 글에 관심을 가지시는 연유가 무엇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고윤은 임 상궁을 봤다.

죽은 자의 몸에서 나온 증좌를 밝히려고 그런다 하면, 대차게 꾸중 들을 것 같았다. 그는 해사하게 웃었다.

“보라고 내어준 서책에서 비슷한 글씨를 보았는데 읽을 수가 없으니 궁금해져 말입니다.”

누가 들어도 거짓이었건만, 임 상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 상궁은 궐에 들어 계속해서 책을 읽고 아는 대로 주석을 달고, 새로 추가되거나 바뀐 것은 고쳐 달아놓던 고윤의 지난날을 떠올리곤 이해한 듯했다.

“그렇군요. 또 무언가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하면 이만 쉬어도 되겠습니까?”

“고단하실 터인데 그리하시지요.”

임 상궁 역시 쉬겠다는 말에 알았노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자리를 준비하라 최 나인에게 일렀다. 고윤은 자리가 준비되는 동안 마지막으로 나인의 조리서를 눈으로 훑은 뒤 돌려주었다.

나인과 상궁이 물러나자 박 내관이 들어 그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한결 가벼운 차림새가 된 고윤은 잠시 책 읽다 자겠노라 하곤 모두를 내보냈다.

책 읽는 시늉을 하다 주위의 인기척이 모두 사라질 무렵 그는 품에서 투전 패의 글씨를 옮겨놓은 종이를 꺼내 펼쳤다.

당언문은 본디 궐내에선 사사로이 쓰는 말이 빌미가 되어 목숨이 다할 수도 있으니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 쓰는 방법이라고 했다. 많이 변형할수록 읽기가 어렵지만, 쓰는 것 또한 어려운 터라 언문에도 화어에도 능통하여 글을 읽고 쓸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글씨였다.

고윤은 그가 지금껏 받은 배움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부터 글을 외고, 당연하다는 듯이 배웠지만 쉽게 접할 수는 없는 것이 학문이었다. 천민이나 평민 중 글을 읽을 수 있는 이조차 드물다는 것을 돌이켜 봤을 때, 여러모로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당언문이란 말이지.”

이것이 노파의 것이라면 신분을 증명해 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노파와 비슷한 나이에 당언문을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자들은 사정이 생겨 궐을 나가 사는 노상궁밖에 없었다. 상궁 중 나이가 들어 병이 생기거나, 아니면 부정을 취해 퇴궁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했다. 그런 경우가 한두 건이 아니라 되레 조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반면, 범인의 것이라고 해도 궐 안 누군가와 연관된 자란 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눈에 띄는 표식을 남겼다는 것은 그것을 읽을 자가 누군지 알고 있기에 썼다는 말이었다.

궐 내부, 요기, 쇠꼬챙이 같은 칼자국.

알고 있는 것만 늘어놓으니 떠오르는 것이라곤 그가 보지는 못한 생각시 귀신밖에 없었다.

혀를 차며 고윤은 눈을 감았다. 그쪽은 당장 손대기 힘드니 나중을 기약해야 했다. 그러면 우선 죽은 노파의 것이라고 가정하여,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정했다.

한참이나 뒤척거린 뒤에 고윤은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그의 방보다 훨씬 더 넓고, 요와 이불이 구름처럼 푹신하였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은 뒤에야 고른 숨이 흘러나왔다.

* * *

‘혜야…….’

생각시는 구석진 곳에 앉아 벗을 불렀다.

아이는 하늘을 올려 보았다. 한껏 부풀어 올랐던 달에 바람이 빠진 듯 야위어지고 있었다.

‘약속을 잊어버린 건가.’

초조한 목소리가 투덜거림을 담고 흩어졌다. 그 뒤로 신음이 섞였다. 생각시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온통 베인 자국이 가득했다. 지금도 몹쓸 칼바람이 저를 따라다니며 살을 베어냈다.

아픔을 꾹꾹 눌러 참으며 생각시는 작은 주먹을 옴팡 쥐었다.

참아야 했다. 궐에서는 큰 소리로 떠들면 혼이 나니 말이다. 생각시는 자리에 앉아 구름 흘러가는 것을 보며 벗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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