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바람 도깨비는 히죽 웃었다.
고윤 선생의 거처인 남산골 작은 집 앞에 귀신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계신가?”
구경거리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바람 도깨비의 말에 귀신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돌아보았다.
“고윤 선생이 당분간 오줌 눌 새도 없을 정도로 바쁠 것 같다며 출금령(出禁令)을 내렸다네.”
“그래?”
바람 도깨비는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앞으로 파고 들어갔다.
“어이쿠.”
바람 도깨비는 코를 움켜쥐고 멈춰 섰다. 말로만 출입을 금한 것이 아니라 실력을 행사한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 벽이라도 생긴 것처럼 단단하여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귀신들이 죄다 마당에서 나와 있더라니, 이리 쫓겨난 모양이었다.
바람 도깨비는 부리부리한 눈을 찌푸린 채 담장 안을 보았다. 고윤 선생의 집터를 지키는 터주신 영감이 여느 때처럼 마당을 쓸고 있었다. 도깨비는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았다. 인간 냄새가 나는 것을 보아하니 고윤 선생이 자리마저 비운 건 아닌 듯했다.
급한 사정 헤아려 도와달라 청하러 온 귀신과 소식을 물고 온 도깨비의 처지가 달랐으니 분명 객으로 받아줄 터였다. 바람 도깨비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고는 터주신을 불렀다.
“노대! 김 서방 계신가?”
터주신이 덥수룩하게 늘어진 하얀 눈썹을 들썩였다.
“있네.”
“그렇구먼.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주시게.”
터주신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코딱지만큼이나 작은 마당을 지나 고윤이 머무는 방 앞에 섰다.
잠시 쑥떡 거리더니 이내 터주신이 뒤로 돌아 손짓했다.
“들게.”
터주신의 허락이 떨어지자 도깨비는 앞을 가로막는 장벽이 사라졌음을 알아챘다. 저를 부러워하는 귀신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도깨비는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서자 고윤 선생이 고개를 들었다.
바람 도깨비는 휘파람을 불었다.
“김 서방, 종이에 깔려 죽으려면 그보다 더 높이 쌓아야 할걸세.”
좁디좁은 방 안 여기저기에 온통 종이들이 그득했다.
“깔려 죽는 것보단 지쳐 죽는 것이 먼저겠지요.”
고윤은 내일까지 판윤에게 올릴 서목(書目) 2)을 쓰며 입만 중얼거렸다.
“오줌 눌 새도 없이 바쁘다는 일이 김 서방이 죽는 일인가?”
도깨비의 농에 그제야 고윤은 고개를 들었다.
“그 소린 또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일장 밖 담장만 넘어가면 김 서방도 들을 수 있지.”
도깨비는 눈을 찌푸렸다.
“김 서방들은 늘 일이 많군.”
“사람이다 보니 그렇습니다.”
고윤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 말을 들으며 도깨비는 연신 코를 킁킁거렸다.
“어쩐지 먹 냄새 대신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데?”
“그런 일들을 모아놓은 것이니까요.”
그리 말하며 고윤은 지금까지 정리한 것들을 둘러보았다. 이 방에 있는 것들이 전부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일들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바람 도깨비가 혀를 내둘렀다.
“질리지도 않지.”
고윤은 붓을 내려놓고 한숨을 흘렸다. 먹이 마를 동안 그는 눈앞에 객을 대접해야 했다. 바람 도깨비는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곧잘 심술부리곤 하니 말이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 말 퍽 섭섭하네. 늘 하던 대로 이런저런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인데, 김 서방 보아하니 들을 새도 없겠구먼.”
바람 도깨비는 입을 비죽 내밀고 툴툴댔다.
“들을 수는 있습니다. 눈과 손이 일하는 것이지, 귀와 입은 쉬고 있어서요.”
“그도 그렇지.”
바람 도깨비는 고윤의 말장난이 재밌다는 듯 키득댔다.
그러지 않아도 세상천지 다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주워들은 것이 많아 입이 간질간질해지려던 찰나라 고윤이 거절하였다면 심심해서 죽으려 했을 것이다.
“오다가다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야.”
고윤은 듣고 있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김 서방, 자네 시집을 간다며?”
요란한 기침 소리가 터졌다.
바람 도깨비의 히죽대는 입꼬리가 높은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올라갔다.
“참이구먼?”
역시, 남 정분난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다. 선경 드나드는 산신에게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오길 잘한 듯하였다.
고윤의 기침은 멈추지도 않고 이어졌다.
“상대가 그 소문 무성한, 되다 만 반푼이 용이라던데? 그도 참인가?”
“……아닙니다.”
고윤은 가까스로 숨을 골라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야?”
바람 도깨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고 이런 사이라며 소문났던데?”
해사하게 웃으며 도깨비는 한 손으론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고, 남은 한 손으론 중지를 들어 그 구멍에 쑥쑥 집어넣었다가 뺐다.
“얼레리꼴레리 한 것도 다 했다고, 이미 볼 장 다 봤다던…….”
“아닙니다!”
고윤은 어딘지 모르게 서슬 퍼런 낯으로 외쳤다.
“아니야?”
부리부리한 눈매가 아래로 축 처졌다.
“바다 저편까지 소문 파다하기에 진짜인 줄 알았는데. 되다 만 용이라도 용은 용이니까, 김 서방이 드디어 인간 노릇을 때려치우는가 했지.”
그 말에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때려치울 수만 있다면 해 보고는 싶군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바람 도깨비가 세상 소문을 실컷 떠들고 돌아가자, 고윤은 방 밖으로 나섰다. 그러곤 부엌에서 밥물 끓인 것을 덜어와 준비한 종이 뒤에 치덕치덕 바른 후 대문 앞에 턱 붙였다.
볼일을 마친 뒤 횅하니 돌아선 고윤이 집 안으로 사라지자 멀리 달아났던 귀신들이 우르르 몰려오려다가 멈칫했다.
“텄네. 텄어.”
누군가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귀신들은 대문 앞에서 허망한 얼굴을 했다.
고윤이 붙인 종이 위로 울(鬱), 루(壘) 3) 라 적힌 것이 보였다.
온갖 이들이 다 드나드는 곳이라 입춘축(立春祝)마저 붙은 적 없건만, 상서롭지 못한 귀신을 잡아다 호랑이 먹이로 준다는 신의 이름이 대문에 나붙은 것이다.
저마다 사연을 품은 귀신들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하였으나 고윤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더는 방법이 없었다.
달빛 아래 우글거리던 그림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 * *
-글월을 써 보내고 나니 아직 다 못 한 말이 남은 듯하여, 이 밤 다시 붓을 들었네.
“아냐, 아냐.”
은헌은 종이를 옆으로 치우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깨끗한 지서를 새로 펼쳤다.
-바람이 궂고 험해 어찌 보내고 있는가 하여 붓을 들었네. 아무쪼록 무탈하기만을 바랄 뿐이지. 일부러 사람을 시켜 서찰을 전하였는데도 소식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 태산 같아 한이 되네. 천릿길도 훌쩍 뛰어넘는 재주는 어느 시전에 내다 팔기라도 하였던가.
은헌은 다시 붓을 내렸다. 색을 곱게 입힌 시전지 위에 번진 게 글씨인지 제 한숨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안부 외의 말을 가렸다. 정혼한 이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종이를 치우곤 새것을 꺼내어 펼쳤다. 그러곤 반듯이 붓을 움직였다.
-찬바람이 머물다 간 발자취에 서리가 낀 듯한 날씨가 연잇고 있네. 그런 날은 늘 그대의 걱정을 해. 정좌(政座) 4) 에 들 때는 꼭 모선 5) 을 챙기도록 하게. 나는 이곳 송악에서 이틀째를 보내고 있네. 경(京)과는 다르면서도 같은 느낌이야. 자네도 같이 보았으면 좋았을 것들이 많아 늘 그대를 그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네. 식사 잘 챙기고, 돌아가거든 보세. 하고픈 말이 많으나 여기서 줄이겠네. 자네와 회포를 풀 날을 기다리며 말이야.
서간을 쓴 은헌은 픽, 웃음을 흘렸다. 그가 있는 곳에서 한성까지는 그리 먼 길도 아니었다. 한데도 고윤과 이리 떨어져 있는 날이 길어지니 천 리 만 길 헤어진 것처럼 이상한 그리움이 생겼다. 하루하루가 바빠, 한성부 관아에서 며칠째 숙식하며 보내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말이다.
* * *
술지게미와 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윤은 강하게 풍기는 냄새에 콧등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오작인 6)들은 복검관 7)으로 나온 고윤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고윤의 말에 오작인은 갈라진 살 틈새를 살펴보곤 길이를 표시해 둔 얇은 나무 자를 상처 옆에 대어 확인했다.
“손가락 하나만큼 됩니다.”
고윤은 그것을 듣곤 검시 보고에 곧장 기록해 넣었다.
“겉보기엔 그리 깊지 않아 보이는군.”
“초검 때 상처 주위로 뱃기름이 묻어나온 것이 보였다 했고, 장두(腸肚) 9) 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봐선 칼날이 배 속까지 들어갔으나 그 폭이 넓지 않아 그런 듯합니다.”
오작인이 상세히 보고해 올렸다. 그 말도 빠짐없이 고윤은 적어 넣었다.
그는 시신의 상처 주위로 부풀어 올라 처음의 모양새와 달리 일그러진 상처를 꼼꼼히 확인했다.
“흔히 쓰는 칼은 아니군.”
“예. 상처가 보통의 것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얇습니다.”
이런 흔적을 내려면 쇠꼬챙이처럼 아주 폭이 좁은 칼을 써야 했다.
오작인은 시신에 남은 모든 상처의 폭과 깊이, 칼이 얼마나 기울어져 상처를 냈는지까지 재고, 그 상처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살폈다.
“가장 치명적인 곳에 난 상처는 여기 이 등 뒤쪽에 남은 상처입니다. 여길 맞고 숨통이 끊어진 듯합니다.”
죽은 이의 어깨 뒤쪽에 남은 상처를 오작인이 직접 시신을 움직여 보여줬다. 다음으로 고윤은 시신의 몸에 남은 피멍을 전체적으로 훑었다. 주초 10)를 덮어 닦아낸 몸은 자색으로 물들어 있다시피 했다. 주먹다짐한 듯 검푸르게 번진 자국을 보고 있자니 죽기 전까지의 상황이 짐작 갔다.
“타물 11) 에 의한 상처는 죽기 전에 생긴 것인가?”
“예. 흉기를 감추기 위해 죽은 뒤 두들긴 것과는 다릅니다.”
“전의 그 자상과는?”
고윤의 질문에 오작인 한 명이 쌓아놓은 종이 중 하나를 꺼내 올렸다.
“나리께서 하문하신 그 자상과는 날의 폭과 깊이 파고든 모양새가 모두 다릅니다. 이자는 찔린 것이고, 그 시신에 남은 상처는 모두 베인 것이옵니다.”
“그렇군.”
고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시선은 시신이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바로 앞에 죽어 누워 있는 이와 똑같은 얼굴을 한 귀신이 고윤과 눈을 마주쳐 왔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어쩌다 죽었느냐, 흉수가 누구냐 대놓고 캐물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라면 오작인이 하는 말마다 귀신이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고 있단 거였다. 잘하고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단서가 너무 부족하군.”
고윤은 한숨 뱉듯 말을 흘렸다. 오작인은 저마다 시선을 주고받았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고윤이 초검을 끝내고 문을 나서기 무섭게, 정범이 누구인 듯하니 잡아오란 명령을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흉기도 흉수도, 목격한 이도 없는 데도 그러했다.
“신원을 밝혀졌는가?”
고윤은 저를 보는 눈길을 무시하곤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그와 똑같이 검시 보고를 작성하고 있던 서리가 고개를 숙였다.
“예. 이태원 사는 박무개라는 자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고해 올리던 서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예의 그 검계 12) 무리에 속한 놈 같습니다.”
“투전 14)판 다툼에서 죽은 검계 무리의 일원이란 말이지?”
고윤은 몇 가지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도 이자와 마찬가지로 쇠꼬챙이 같은 칼에 베여 죽은 이들이 있었다. 그쪽은 아직 정범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이자가 최근까지 어디를 다녔는지 주위 사람들을 추궁해 보게.”
보통의 칼보다 폭이 좁고 한 자를 조금 넘는 길이의 검을 쓰는 검객과 관련된 시신이니 파고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꺼내던 고윤은 귀신이 선 곳을 한 번 흘깃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귀신이 제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박무개의 옷을 뒤져 무언가 남은 것이 없는지 다시 확인해 보게.”
“예?”
서리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반문했다.
“소매 안쪽에 천을 대어 두껍게 바느질한 곳이 있는 것 같으니 그쪽을 살펴보란 말일세.”
영문 모를 명령이었으나, 그 명을 한 이가 고윤이라 서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알았노라 대답했다. 그 말대로 하면 분명 무언가가 나올 터였다.
고윤은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 검시 보고를 챙겨 밖으로 나섰다.
아직 저녁도 되지 않았는데 어둑함이 땅거미처럼 기어오는 것을 확인하며 그는 관청 마당을 가로질렀다. 진득한 죽음의 냄새를 지워내듯 불어오는 바람에 조복의 아랫자락이 펄럭였다.
겨울에는 퇴청 시간이 더 이르니 검시 보고만 처리하고 집으로 가도 상관없을 테지만, 그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고윤은 오늘 내로 반드시 정리해야 할 문서들을 떠올리곤 힘없는 걸음으로 걸었다. 귀찮고, 귀찮고, 귀찮았으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다시 베끼어 쓴 뒤에 여기저기 보내주어야 다른 이가 일을 이어 할 수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인 것을 두 달 내도록 처리하였건만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도통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죄다 사직 상소를 낸 뒤에 맡은 일이라니, 고윤은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가 낙향, 정확히는 혼례를 치를 준비해야 하니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일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체 지금까지 뭘 했는지 모를 오래된 일부터 최근의 일까지 가리지 않고 들어왔다. 형조와 포청에서 조사하였으나 범인을 잡지 못해 오리무중이던 일까지 말이다. 관직에 오르기도 쉽지 않지만, 사직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다음으로 올 내정자가 여태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도 이 일에 한몫 거들었다. 후임이 없으니 선임이 고생하는 중인 것이다.
자리로 돌아온 고윤은 최근 들어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검계와 관련된 문건을 따로 골라냈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가 다시금 밖으로 나섰을 때는 술시를 지나 해시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내일부터 나흘 연달아 쉬기로 하였으니, 전할 소식이 생기거든 심부름꾼을 보내게.”
퀭한 눈으로 고윤은 서리에게 일렀다. 초하루, 보름, 여덟째 날과 스물셋째 날 죄다 쉬지 못한 것을 이어 붙이니 꿈같은 휴일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쉰다고 해서 아예 사건에서 손을 놓는 것도 아니라 인편을 통해 연락을 받아야 했다.
서리는 알았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고윤은 몇 가지를 더 지시한 뒤 걸음을 옮겼다.
겸종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홀로 집까지 가면 되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수문장처럼 앞을 지키고 있는 그림자 여럿이 보였다.
통행이 금지된 시각이라 고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살폈다. 그러자 서 있던 이들이 그를 향해 가볍게 예를 차렸다.
장옷을 벗어 팔에 걸친 중년의 여인이 그를 보며 입을 뗐다.
“정 참군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한성부에 적을 두고 있는 참군 셋 중 정가(家)가 그뿐이라 고윤은 미심쩍은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궐에서 일하는 상궁으로, 대비전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고윤의 눈이 곤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것으로 봐선 궐에서 나온 사람들일 거라 예상은 했다. 믿을 구석 없는 이들이 야밤에 돌아다닐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을 보낸 곳이 중궁전이 아니라 대비전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동조(東朝) 15)께옵서 이 시각에 저를 찾으신단 말입니까.”
“그것은 아니옵고. 대비마마께옵서 참군에게 입궐하란 명을 내리셨습니다. 따라나서시지요.”
상궁은 그리 말하며 지척에 있는 궐을 돌아보았다.
“매일 이리 파루 16)가 치고서도 업무를 보십니까?”
어머니뻘 되는 상궁의 목소리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엿보였다.
뒤따라 걸어가며 고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설프게 웃었다.
“매일은 아닙니다. 한성부가 날마다 바쁘다면 그건 그만큼 도성 내가 소란스럽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최근 들어 숙직을 밥 먹듯 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말했다. 도성 안이 소란스러워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돌려 말해 나라님이 제대로 못 다스리고 있다는 흉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윤의 대답에 상궁은 조용히 웃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저벅저벅 발아래서 울리는 소리가 무겁게 들렸다.
상궁 나인들의 안내를 받아 고윤은 궐의 심처로 들어갔다. 광화문으로 들어 몇 개의 큰 문과 협문을 지나 담장 일곱 개를 통과한 뒤였다.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자 고윤은 의심스럽게 상궁을 보았으나 아까 대화가 끊긴 뒤론 줄곧 침묵이 이어져 말 붙이기가 뭐하였다.
“한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가는 곳을 모르니 길이 멀게만 느껴져 발이 점점 무거워졌다. 고윤의 물음에 상궁은 고개를 돌렸다.
“희정당으로 갑니다.”
“그곳엔 어찌하여 가는 것입니까?”
대비전의 명을 받고 입궐하였는데, 대비를 뵈러 가는 것도 아니라는 말에 고윤은 바로 물었다.
“가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러곤 다시 침묵이었다.
“여깁니다.”
캄캄하여 주위가 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낮에 보면 경관이 수려하여 감탄을 불렀을 법한 전각에 다다르자 상궁이 다시 입을 뗐다.
고윤은 주변을 살피는 대신 앞을 보았다.
그를 이곳까지 안내한 상궁 말고, 다른 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입니까?”
“그렇네.”
상궁은 고개를 끄덕이곤 고윤을 보았다.
“여기서부턴 임 상궁이 정 참군을 모실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이곳에 오면 알 수 있다더니 설명하여 줄 이는 떠나고 낯선 이들만 남았다.
고윤은 방에 들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임 상궁이라 소개받은 상궁에게 물었다.
“나리께선 나흘간 희정당에 머물며 학업을 받으셔야 합니다.”
나흘이란 것도 그렇고 학업이란 말이 심상치가 않았다. 고윤은 눈매를 찌푸렸다.
“면구스러우나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한직이긴 하나 아직 한성부에 매여 있는 터라 저는 내일 진시까진 관청에 들어야 합니다.”
“나흘 동안 연이어 쉬신다 들었습니다.”
임 상궁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윤의 거짓말을 추궁했다.
“지금 맡은 일이 급하여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서요.”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고윤이 찾아낸 핑곗거릴 들먹이며 환하게 웃자, 임 상궁 역시 마주 웃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성부에서 남산골에 관편 17)을 보내거든 이리로 오도록 조치해 두었습니다.”
고윤이 침음을 흘렸다.
“대비전의 명입니다.”
임 상궁은 단호한 목소리로 일렀다.
그러니 자릴 박차고 달아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고윤은 콧등을 찡그렸다. 두 달 만의 휴일이 송두리째 날아가게 생겼으니 괜스레 심통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제가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임 상궁이 입을 열었다.
“정 참군께서는 앞으로 외명부 정일품 부부인(府夫人)의 봉호(封號)를 받게 됩니다. 품계와 봉호에 따라 배움이 다르긴 하나 기본적으로 옛일에서 교훈을 얻어 앞으로 나아갈 바를 찾는 것에 대해서 배우게 되지요. 보통은 《소학》부터 새로 시작하곤 합니다만.”
“소학이라면 이미 읽었습니다.”
읽었단 말은 줄줄 외울 정도로 보았단 말이었다.
고윤의 말에 임 상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훈》, 《열녀전》, 《열녀후비지문》, 《선보집략》을 시작으로 하여 《의약론》, 《동의보감》, 《본초강목》, 《식료찬요》, 《구황벽곡반》, 《산림경제》 그리고 중전마마께옵서 직접 정 참군을 위해 열흘간 쓰신 《생우요록》만 보시면 됩니다.”
“중전마마께옵서…… 책을 쓰셨습니까?”
“예.”
임 상궁은 뒤쪽에 앉은 나인에게 서책을 건네어 받아 고윤에게 내밀었다.
“곤전께옵서도 부부인께 어린 시절 전해 들으신 것만 적으셨다며, 정 참군께 필요한 것만 고르고 골라 늘어놓으셨다 하셨나이다.”
고윤은 첫 장을 넘겼다.
무엇을 썼는지 왜 썼는지 그곳에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배운 것도 제 쓰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많으나, 모른다고 하여 알려고 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태도는 늘 경계하여야 한다. 모른다는 것은 근심이 생긴다는 것이니 이 책은 그 근심을 잊기 위한 여러 가지 중요한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쓴 것이다.’”
“중전마마의 사가에서 내려오는 것들을 정리했다 하셨으니 찬찬히 읽어보심이 좋으실 겁니다.”
“입은 은혜가 너무 커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고윤은 책의 겉장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를 위해서 중전이 일부러 책까지 썼다니 성심을 다하여 기간 내에 완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독서와 함께 나흘간 예법을 다시 익히셔야 합니다.”
고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임 상궁은 그런 그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부부인으로서 보이셔야 할 예법을 머리로는 알고 계시겠지만, 몸이 익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요.”
절하는 방법에 있어 공수할 때, 어느 손을 위로 올릴지부터 다시 몸으로 터득해야 했다.
고윤은 본능적으로 그것 때문에 저를 불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친영을 치른 후에 대군 대감과 같이 문후를 드려야 하니 그게 가장 문제겠군요.”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과거를 치고, 등용되어 관리가 된 이에게 읽어야 할 서책이 몇 권 있는 것이야 즐거움이 늘어나는 일이니 집에서 하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나 예법만큼은 달랐다. 종친이니 왕실의 삼전 18)에 인사를 올려야 하는데 그 자리에서 그의 예법이 문제가 될 게 뻔하였다.
“그런 이유에서 대비마마께옵서 입궐을 서두르라 명하신 것입니다. 좀처럼 정 참군께서 쉬는 날이 없어 기회를 보고 계시었거든요.”
고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쉬는 날이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날이었다니, 원망조차 잊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자시가 되었으니 금일은 그만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무척 바쁠 것이라 예고하는 듯한 말이었다.
“본디 부부인 되실 분의 시중은 나인이 들게 되어 있으나 불편하실 듯하여 나흘간 박 내관이 정 참군의 침수 준비를 도와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임 상궁은 인사를 올리곤 뒷걸음질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고윤은 제 처지를 떠올리며 한숨을 참아냈다.
그는 제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내관을 보았다.
박 내관은 시선을 알아채곤 공손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당분간이지만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말을 낮추셔도 되옵니다.”
내관은 공손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아직은 봉호를 받지 않았으니 공대가 맞지 않겠습니까?”
“이제 친영례만 남아 있지 않습니까. 봉호를 그때 받으신다고 하나 그조차 한 달여가 남았을 뿐입니다. 하니 하대에도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그리하시라 동궁전에서도 부러 소인을 보내신 것이고요.”
고윤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내관은 대답이 들려올 때까지 허리를 숙인 채 기다렸다.
“알겠네.”
떨떠름하게 고윤은 입을 열었다. 그제야 박 내관은 웃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갈아입으시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평소에도 곁에 시중드는 이를 두지 않아 어색했으나 고윤은 곧 순응하듯 관모부터 벗었다. 차례차례로 벗고, 차례차례로 덧입었다. 침의로 갈아입고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손발을 닦아내자 그제야 긴장도 가셨다.
박 내관은 이부자리마저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고윤에게 고했다.
“은헌 대감께서 나리께 전하라 하신 서간입니다.”
내관은 공손히 서찰을 내밀었다.
은헌의 서신이라는 말에 고윤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손을 내밀어 받아 들었다.
“그럼 쉬시옵소서.”
시중들던 박 내관마저 물러나고 겨우 홀로 남게 된 처소에서 고윤은 방 안 놓인 것 중 유일하게 그의 소유인 은헌의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그도 자신이 오늘 밤 궐 담장 안에서 잠을 청하게 될 줄 몰랐는데, 멀리 있는 대군은 어찌 알아 이곳으로 보냈는지 통 모를 일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향을 덧씌운 것 같은 시전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처럼 웃고 나니 수일 밤낮도 잊은 채 일만 했던 고단함이 조금이나마 지워졌다.
그는 조심스레 서간을 펼쳤다.
안부를 묻고, 답장을 빨리 보내지 않음을 꾸짖고, 마지막에 가선 또 몸 성히 있으란 말에 묻어나는 은헌대군의 목소리에 고윤은 미소를 머금었다.
살아온 내내 도성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도, 가까워지는 것도 안 된다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였는지 은헌은 한 달 전 멀리 유람 갔다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북부로 갔다.
정신없이 바쁘긴 했어도 얼굴 볼 시간마저 없지는 않았는데, 훌쩍 떠났다는 말에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였다. 그 섭섭함도 들이닥친 일거리에 금방 떠내려갔지만 말이다.
그렇게 떠났으니, 평상시에도 구경 다니기를 좋아하는 탓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쏘다닐 줄 알았는데 은헌은 며칠에 한 번씩 꼬박꼬박 인편을 통해 서간을 보내왔다. 어디를 다녀왔고 어떤 것을 보았는지, 무얼 먹었는데 입에 맞거나 한 경우엔 직접 보내오기도 했다. 두 번은 못 먹겠다며 투정 부리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말이다. 고윤은 그의 일상을 몹시도 궁금해하는 은헌의 여러 물음에도 답신은 그렇게 잘 쓰지 못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어오는 그의 일상이란 것이 어제는 맞아 죽은 이를 보아 부검하였고, 금일에는 창상을 입고 죽은 자를 보았다는 그런 것뿐이었다. 게다가 그의 일은 공무로 주상께 올라갈 보고가 아니라면 애초에 쓰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저 잘 지낸다, 잘 계시라, 무뚝뚝한 글 몇 줄만 보내고 있었다.
“보러 갈까.”
고윤은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글로 적어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게 나은 것 같았다. 불쑥 혼잣말한 고윤은 헛웃음을 삼켰다. 앞으로 나흘간은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고 매여 있어야 함을 아는데도 입 밖에 마음을 뱉어내고 나니 당장에라도 궐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는 다시 은헌의 서간을 읽고는 소매를 뒤적였다.
늦은 밤이라 사람을 불러 지필묵을 준비해 달라 청하기보다 그의 것을 꺼내어 쓰는 편이 빨랐다. 붓과 벼루, 연적, 종이 등 필요한 것들을 죄다 꺼내 늘어놓은 뒤 고윤은 짧게 숨을 뱉고는 거침없이 첫머리부터 적어 내렸다.
-만강이 잘 계십니까? 모처럼 안부를 전합니다.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먹 자국 위로 그의 숨결이 스며들었다.
* * *
임 상궁은 가득 들고 들어온 서책을 책상 위에 쌓아 올렸다. 모두 읽어야 할 것들인데 어제 들은 것보다 조금 더 많아 보였다.
고윤은 서책과 상궁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궁금해져 오는 것을 결국 입 밖에 내어 물었다.
“간밤 들었던 것 외에 또 읽어야 할 것이 있습니까?”
글을 읽는 것이라면 고윤이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으나 단기간 내에 머릿속에 죄다 집어넣는 것은 말이 달랐다.
임 상궁은 담담히 웃었다.
“없습니다. 하지만 참군께서 바라신다면 각 전각에 있는 서고에서 책을 빌려 읽으실 수 있습니다.”
임 상궁은 그 말을 건네며 소매에서 곱게 적힌 서찰을 꺼내 내밀었다. 그게 무엇이냐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고윤은 접힌 것을 펼쳤다.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이규운의 문집이 저하의 서고에 있다네. 청하면 흔쾌히 내어주실 게야.
“지난밤 제게 온 것입니다.”
은헌의 청탁 아닌 청탁에 상궁은 담담히 입을 뗐다.
“어찌할까요.”
“언제 가지러 가면 됩니까?”
어차피 규정된 독서 시간이었다. 뭐든 읽어야 한다면, 시중에선 구하기 힘든 서책을 읽는 것이 마땅했다. 은헌이 아니었다면 날릴 뻔한 기회를 고윤은 거침없이 붙잡았다.
글 스승을 붙여 가르치는 것이 아니니 종일 편히 책을 읽기만 하면 되었다.
소학부터 시작하여 언문으로 된 여러 서책을 보며 고윤은 그가 아는 바를 작은 종이에 따로 적었다. 임 상궁이 읽으라 내어준 책 중에는 전에 보았던 것도 있었고, 그 책을 적을 때 참고하여 적었다는 서책 또한 그에게 있던 것이라 기억나는 대로 여러 가지를 적었다. 책을 한 번 완독한 뒤 적어놓은 것들을 고윤은 책장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하면 머릿속에 든 것들이 정리되어 두 번째 읽을 때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깨우칠 수 있었다.
모처럼의 일에 고윤은 성균관 시절이 떠올랐다. 머리가 큰 뒤론 이렇게 책에 푹 파묻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간간이 부엌 나인들이 솜씨 좋게 우려내어 오는 차와 맛깔난 다과를 벗 삼아 책장을 넘기니 소학마저 재밌었다. 고윤은 이렇게 여유를 가져 본 지가 언제인지 아득한 것이 문득 슬퍼졌다. 한참이나 그렇게 주석을 달아놓는 것에 집중하는데 바깥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그는 붓을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정 참군 나리.”
아직 품계를 받지 않은 터라 훈육 상궁으로 붙여진 임 상궁은 그의 직제를 불렀다.
“중반을 젓수신 뒤에 뒤뜰로 자리를 옮겨 강학을 시작할 것입니다.”
방 안이 아니라 밖에서 한다는 말에 고윤은 예법을 배우는 것이 꽤 험난하겠구나, 그리 예감했다. 밥부터 먹이고 굴리겠다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으나 그가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고윤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은헌은 의관을 정제하고 정중하게 예를 갖춰 절을 올렸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나는 무탈하였다. 한데, 네 낯빛이 어둑하구나.”
세자는 간만에 궐에 든 은헌을 보며 웃었다.
“제가 새벽에야 성저에 들었는데. 이각 19)도 채 지나지 않아 그간의 일을 모조리 정리해 올리라 명령을 내리신 이가 있어 말이지요.”
대군에게 그런 명을 내일 수 있는 이는 왕과 세자 둘뿐이었다. 세자는 픽 웃음을 흘리며 아우의 투정을 무시했다.
“그간 네가 한민 20)도 아니고 유유자적 대기만 한고로 심부름을 보냈을 뿐인데 이 형을 탓하는 것이냐.”
은헌은 기도 안 찬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
“심부름치곤 너무 거창한 일을 많이 시키셨사옵니다.”
그는 그간의 고생을 반추하듯 미간을 구겼다. 한 달 동안 편히 쉴 새도 없이 말안장 위에 올라 떠돌아다녔더니 도톰한 방석 위에 앉아 있는데도 엉덩이 아래서 자진모리장단이 느껴졌다.
“급한 일이었지 않누.”
세자는 멋쩍음에 눈을 찡긋거렸다.
“중요한 일이긴 했지요.”
그리 말하며 은헌은 정리한 것을 세자에게 올렸다.
“저하께서 의심한 바대로 지난 몇 년간 공사가 없었음에도, 공사비를 명목 삼아 많은 금액이 그리로 흘러 나갔습니다.”
세자는 정리된 기록들을 묶어 책으로 만든 것을 살피며 혀를 찼다.
“관련된 이들이 죄다 끌려 나오게 생겼구나.”
“부왕께옵서 종친부를 정리해야겠다 벼르고 계시니까요.”
은헌은 서늘해진 낯으로 제가 알아낸 것을 기록한 서책을 살폈다. 세자 또한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횡령이 역모보단 나은 처벌을 받을 테니 불만은 없을 겁니다.”
은헌은 그리 말하며 낯을 굳혔다.
부왕 또한 전부 다 끄집어내지는 않을 터였다. 적당한 범위에서 꾸짖고 흘러 나간 국고를 회수하는 선에서 멈출 터였다.
“목숨은 붙여두시겠지요. 친영이 코앞이니까요.”
적장자가 있는데 어째서 적통을 무시하느냐며 여전히 쓸모없는 소릴 늘어놓는 종친들의 입을 막기엔 더할 나위 없는 트집이었다.
대군의 말을 듣고 있던 세자의 얼굴에 장난기가 퍼졌다.
“그러고 보니, 정 참군이 지난 두 달간 몹시도 바빴다지?”
“……바쁘겠지요. 근래에 들어 매일같이 한성부에서 숙직한다 들었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그동안 오간 서간에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세상 그렇게 매정한 안부 편지는 또 처음이라 은헌은 콧등을 구겼다.
“못 보니 섭섭하더냐.”
“그게 아니라.”
은헌은 세자를 보면서 눈을 찡그렸다.
“가까이 지내는 벗이라곤 고윤, 그자뿐이니.”
은헌은 말을 맺지 못하고 어물쩍거렸다. 세자는 웃는 낯으로 아우를 응시했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가장 먼저 챙긴 이가 벗이라? 세자는 아우를 사내와 혼인시킬 생각을 했던 여러 사정을 떠올려 보았으나,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은헌이 유일하게 마음에 그 고윤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정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던 아우가 유일하게 기꺼워하였던 이라 말이다.
“벗이라? 혼례를 치를 이와 말이지.”
“뭐……, 그런 거지요.”
사내끼리, 명목상으로는 새로 신분을 하나 더 만들어내어 허깨비 같은 감투로 덧씌운 이와의 혼례긴 했지만, 실제론 집에 객식구 하나 더 드는 것에 불과했다.
세자는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뭐, 그렇다면야, 그런 것이겠지. 하면 보지 않고 나가도 상관없겠구나.”
형의 심술궂은 말투에 은헌은 눈을 찡그렸다.
“막으실 것은 아니지요?”
“정 참군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은헌이 가볍게 웃었다.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세자는 아우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저러고도 벗이라 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 *
“허리를 더 반듯이 세우셔야 합니다.”
절하는 법부터 다시 배우며 고윤은 저의 자세가 그렇게 삐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등 뒤에 판자를 댄 것처럼 반듯했던 은헌의 태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도 알 듯했다.
“턱을 당기고, 호흡을 편안하게 내쉬셔야지요.”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숨을 내쉬려니 배에 있는 줄도 몰랐던 부위가 파르르 떨려왔다.
“항상 그리 곧게 서 계셔야 합니다.”
왕족이란 것도 할 게 못 되는 노릇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고윤은 있는 힘을 다해 버텼다.
“됐습니다.”
참았던 숨과 함께 고윤은 어딘가 비틀린 것 같은 등과 허리에 힘을 뺐다. 뻐근함이 순식간이 밀려왔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둔통에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임 상궁은 그것을 보고 눈꼬리를 추어올렸으나 잔소리까지 늘어놓지는 않았다.
“오늘은 예까지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고윤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저녁 강학 전까지는 휴식을 취하지요.”
고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는 생각마저 지워내고 주어진 짧은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최 나인이 가져온 서책을 다 읽었는데, 혹 다른 책을 구할 수도 있습니까?”
소학부터 시작된 독서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가져온 책에 주석을 다 달아놓는 것으로 끝났다. 읽는 것은 물론이요, 뜻을 알고 외우는 것은 당연했다. 다음에 누가 그 책을 보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성균관을 거쳐 과거 시험에 단번에 급제하여 어사관까지 쓴 고윤은 나쁜 글 스승은 아니었다.
물론 의서는 제외였다. 어디 가서 의원 노릇 할 것도 아니니 중전마마께서 쓰신 요록의 가르침 내용에 따라 적당히 가려 읽고 치웠다. 아픈데 이유를 모르면, 섣부르게 치료하는 것보다 잘 아는 이를 찾아 먼저 묻는 것이 답이라는 삶의 지혜에 그는 감탄을 터뜨렸더랬다.
고윤의 물음에 임 상궁은 잠시 고민하더니 웃었다.
“일전에 알려드렸다시피 다른 전각에 있는 서고에 드셔도 되고, 이곳 희정당에도 서고가 있습니다. 또한, 세자 저하께옵서 동궁에 달린 서고에서 서책을 직접 내어 볼 수 있도록 윤허해 주셨사옵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던 고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최 나인에게 말하면 길을 안내해 줄 겁니다.”
고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궁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있는 전각에서 아는 길까지 나가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으니 누릴 수 있는 만큼 한껏 누려야 할 기회였다. 고윤은 오랜만의 격렬한 운동에 고통을 호소하는 몸뚱어리를 무시하곤 곧장 나가겠다 했다.
* * *
“저쪽에 있는 이화전이 예전에 대군 대감께서 머무시던 처소입니다.”
고윤은 고개를 돌렸다. 은헌이 어릴 적 머물렀던 거처가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캄캄할 때 들어오기도 했거니와 복잡한 궐내 지리에 자신이 있는 전각이 서쪽 어디쯤인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몇몇 장소를 기준으로 최 나인이 설명해 주니 복잡했던 굽이진 길이 반듯하게 펴진 기분이었다.
최 나인은 편안한 목소리로 여기저기 알아야 할 중요한 전각이나 고윤과 관련 있는, 혹은 관련 있을지도 모를 곳들의 위치를 일러주었다.
“그리고 나리께서 보시는 방향으로 저 앞쪽 문을 건너가면 가장 바깥의 광화문이 있지요.”
“그럼 저쪽이 동궁이겠군요.”
고윤의 말에 최 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한 곳이 가까워지자 확실히 마주치는 사람들의 무리가 갈렸다. 사방에 궁관 21)들밖에 보이지 않더니 밖으로 나갈수록 조복을 갖춰 입은 이들이 보였다.
고윤은 공복이 아닌 도포를 입고 궐내를 돌아다니는 저의 얼굴과 차림새를 보고 흠칫하는 이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예를 차렸다. 인사를 받는 이들도 비슷했다. 몇몇 이들은 데면데면 본체만체 지나치기도 했다. 그런 이들은 고윤과 같이 일을 했거나 함께 성균관에 기거했던 이들이었다. 가까이 있었던 이들일수록 모른 척 지나갔다. 애초에 친한 척 할 일도 아닌지라 고윤도 가볍게 무시했다.
되레 최 나인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으나 크게 내색하지 않고 길을 안내했다. 동궁전 근처의 서고에 도착하자 고윤은 성큼 돌 위로 올랐다. 허락은 이미 받았다 했으니 서책은 얼마든지 골라도 좋다 했다.
그는 쌓여 있는 서책을 보며 들뜬 걸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옆으로 끌려 들어갔다.
비명도 채 내지르지도 못하고 고윤은 놀란 눈을 뜨고 저를 잡아당긴 이를 확인했다. 눈앞에 하얀 얼굴을 한 옥골선풍의 사내가 짓궂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대감!”
“쉿!”
은헌은 다급히 손을 들어 고윤의 입을 막았다. 그는 재빨리 고윤의 어깨 너머로 바깥의 동정을 살피고는 조심스레 손을 떼어냈다. 놀라 큰 소릴 냈던 고윤은 꽉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놀라지 않았습니까.”
고윤의 입에서 탓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자네 성정에 ‘이런 것쯤이야.’ 할 줄 알았지.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도 않으니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며 은헌이 웃었다.
“오랜만이네.”
“……그렇군요. 그간 만강하셨습니까.”
고윤은 오래도록 한양을 떠나 있었던 은헌을 눈으로 살폈다.
“길이 험해 고되긴 했으나 나쁘진 않았다네.”
“도성엔 언제 당도하신 겁니까.”
고윤은 은헌에게 마지막으로 받았던 간찰이 어디에서 왔는지 떠올렸다. 분명 개경에 도착하기 전에 써서 보냈다 했었는데 말이다.
“이틀쯤 되었지. 도착하자마자 입궐하였고.”
그 말에 고윤의 고개가 또다시 기울어졌다. 도성 당도한 지가 이틀째인데 어째서 그에게는 소식 들어온 것이 없는지 통 모를 일이었다. 귀를 닫아둔 것도 아니고, 대군이 도착하였으니 말 한번 들릴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없었다. 은헌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멀리서도 잘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고윤, 자네는?”
“예?”
“별고 없었나?”
은헌의 다정한 물음에 고윤은 움찔했다. 궐에 들어 전각에 머물며 훈육 받는 것 자체가 별난 일이긴 한데 그걸 문제 삼아 투덜댈 수는 없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단번에 답을 못 내놓자 은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고윤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고, 오랜만에 서책을 읽느라 도낏자루 썩는지도 모르고 신선놀음했습니다.”
궐에 들어와 읽은 책 중엔 은헌이 일러준 것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보내주신 간찰 덕에 귀한 책을 접했습니다.”
고윤의 말에 은헌은 코웃음 쳤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긴 하군. 나는 답신이 없어 내가 보낸 서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했는데.”
어쩐지 섭섭함이 물씬 묻어나는 말투라 고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궐에 들어와 서신을 받은 데다, 제멋대로 종이를 쓸 수가 없어서요.”
첫날 그의 소매에서 꺼낸 지필묵의 존재를 들키자마자 임 상궁에게서 꾸중이 쏟아졌다. 궐내에선 사사로이 움직이지 말고,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는 당부와 더불어 열심히 썼던 답신은 보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주술을 통해 불러낸 종이가 대군에게 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함 요절할 일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윤의 말에 은헌이 되레 의뭉스러운 얼굴을 했다.
“자네가 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탕금에서 지급하기로 되어 있을 텐데?”
“아직 내탕금 내어 쓸 처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국고를 함부로 써서는 곤란하지요.”
봉호를 받기로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함부로 굴 수는 없었다. 고윤의 말에 은헌은 가볍게 웃었다.
“그런 이유라면야 화를 낼 수도 없군.”
“송구합니다.”
고윤은 일단 사과했다. 서찰을 받고 답신을 쓰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결례였다. 은헌은 그런 그를 보다 한숨 쉬듯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네. 종이가 필요하다면 자네 처소의 최 나인에게 말하면 넉넉히 내어줄걸세.”
고윤은 조금 전 저를 이쪽 서고로 안내해 준 나인을 떠올렸다. 처소에 달린 이가 몇 명인지는 모르나 그중 최 씨 성을 지닌 이는 오늘 본 나인이 다였다. 동궁에 달린 서고 중에서 이리로 그를 안내한 이도 말이다.
“아는 사입니까?”
“내 보모상궁이었던 이와 최 나인이 아는 사이지.”
은헌은 저와는 관련 없는 이처럼 굴었으나, 그의 입김이 닿아 있는 사람이란 거였다. 궐내에, 그것도 별 관련 없을 전각에 있는 이를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인지 아닌지 분간 가지 않았다.
고윤은 눈을 찡그렸다.
“편히 생각하게.”
“편해지지 않습니다.”
그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은헌의 말에 고윤은 툴툴댔다. 은헌은 키득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벽에 있는 눈과 귀 중 무시해도 되는 게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여유가 생길걸세. 요령껏, 시선을 없앨 수도 있고.”
“그 눈과 귀 중 하나가 대감의 것인데 어찌 무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윤은 지금까지 수많은 시선 속에 살아왔다. 산 자의 시선만이 아니라 죽은 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것들이 어디 가서 제 이야기를 떠벌리지는 않는다. 그것도 체면 차리고 싶은 상대에게 가서 말이다. 그도 사람인지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인가? 정 싫으면 사람을 바꿔줄까?”
중전께 곧장 달려가 말을 꺼낼 기세라 고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며칠 지나면 궐에서 이리 머무는 것도 끝날 텐데 그리 머리 굴려서 뭘 하겠습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 것을요.”
고윤의 입에서 나온 참겠다는 말에 은헌은 읽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들지 않는다고 말해도 괜찮네.”
고윤은 은헌과 시선을 마주쳤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신경 써주신 것에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
은헌의 말대로 주위에 온통 불편한 사람뿐인 것보단 나았다. 게다가 무슨 뜻으로 사람을 붙였는지도 알 법했다. 궐 담장 안엔 은헌을 언제든 위협할 수 있는 금상이 있었고, 손 닿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빠르게 알아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저를 지키려는 방법이란 것을 알아채니 기분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자네더러 참으라 한 일은 아니었네.”
고윤은 한숨을 내쉬듯 웃었다.
“참을 수 없는 일인데 참을 것 같습니까?”
“나가도 바쁘겠군.”
은헌은 금세 말을 돌렸다. 고윤의 표정도 순식간에 바뀌었다. 썩은 것을 삼킨 듯 세상 싫은 것은 다 가져다 붙인 얼굴이었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일을 맡겨와서요.”
그동안엔 뭘 하고 있다가 이렇게 한꺼번에 일을 떠넘기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사직 상소가 빨리 처리되지 않는 건가?”
은헌의 물음에 고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처리가 되었습니다. 보름 내로 저의 후임으로 내정된 이가 온다 들었고요. 아직도 그게 누구인지는 결정이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보름 뒤엔 그만두어야 합니다.”
한 달 뒤가 친영인데 이제까지 사직 상소마저 정리되지 않았다면 큰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리 바쁘게 일을 한다고?”
자네가?
뒤에 생략한 물음마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에 고윤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그를 익히 잘 알고 있는 은헌이 의문을 표시하는 것도 당연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마음에 걸린다?”
고윤은 차마 그동안 오간 서찰에도 쓰지 못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다른 이에게는 절대로 말 못 할 일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텅 빈,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껍데기?”
고윤은 고갤 끄덕였다.
“죽은 뒤에 저승길 떠나는 망자가 있는가 하면 저잣거리 널린 귀신들처럼 이승에 발 묶여 있기도 하지요. 원한을 품고 죽었다면, 그 원한이 발을 붙잡기에 쉽게 죽은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요.”
원한을 품은 귀신이라면 은헌도 겪어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것을 말하는 건가 싶어 은헌은 고윤의 말을 기다렸다. 고윤은 설명하기 곤란한 듯 낯을 구겼다.
“그런데 그 시신은 아예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가 일부러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혼백의 흔적은 없고, 시신의 모양새로 봐선 원념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고. 시신의 주변이나 발견된 곳을 보아도 혼백을 찾을 수가 없는데 이상하게 요기(妖氣)가 느껴져서요.”
죽은 육신에 요기가 물씬 묻어났다. 그게 한두 구도 아니고 한성부에 실려 온 것만 벌써 네 구째였다.
“그쪽의 일이 분명하다면 자네에겐 더 쉽지 않은가?”
고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엔 좀 다릅니다.”
죽은 이의 몸에 남은 요기를 살펴보았으나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여태 알아내지 못했다. 이런 소문을 가장 잘 아는 바람 도깨비에게도 그런 일에 관해 들은 바가 있는지 확인하였지만, 도깨비도 처음 듣는 일이라 했다.
“이 일의 흉수가 요괴라면, 어디에서 사람을 또 해칠지 모르니 사직하기 전에는 해결해야 할 듯하여 여태 일을 하는 거지요.”
그게 아직 한성부에 남아 있는 이유였다. 지금 당장 그만두면 피해는 커지고, 몇 명이나 더 죽은 뒤에야 다시 그에게 돌아올 일이 된다는 것을 아는 탓이다. 평범한 혼백의 일이 아니라면 더더욱 말이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것은 어리석지 않습니까.”
“다정도 하지.”
은헌은 픽 웃으며 고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정은 무슨. 더 귀찮아지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이는 겁니다.”
다정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표현인가? 고윤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은헌은 몹시도 흐뭇한 듯 고윤을 내려다보았다.
“필요한 일이 있거든 언제든 연통하게.”
그 말에 고윤이 낯을 굳혔다.
“대군 대감께서 부디 안전한 곳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주시는 것이 저를 도우시는 겁니다.”
요괴가 끼어 있는 일에 은헌을 끌어들였다가는 어느 선에서 꾸지람이 떨어질지 상상조차 하기 싫어졌다. 앞뒤 사정 설명하는 것도 그가 이런 연유로 바쁘니 당분간 더 보기 힘들다고 알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것참 어려운 청을 하는구먼.”
짓궂은 얼굴로 은헌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윤이 무어라 입을 떼려는 순간 밖에서 최 나인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정 참군 나리, 이제 처소에 돌아가셔야 합니다.”
고윤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모처럼의 기회였는데 서책은 들춰보지도 못하고 잠깐의 여유 시간마저 물 흘려보내듯 다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나인의 말을 들은 은헌 역시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냐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옆에 쌓여 있는 서책을 서슴없이 집어 들어 고윤에게 내밀었다.
“가져가게.”
“이게 다 뭡니까.”
은헌은 고윤과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자네에게 없는 것들이라네. 읽고 싶어 할 것 같아 미리 골라두었지.”
덧붙인 말에 고윤의 표정이 햇볕을 쏟아부은 듯 순식간에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답신이나 제때 보내게.”
은헌은 으스대듯 생색을 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윤은 서책을 품에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소로 돌아가자마자 간찰을 쓰겠다 약조하며 말이다.
* * *
희운당의 박 나인은 목이 말라 눈을 떴다.
자기 전에 짠 것을 먹어 그런지 갈증이 난 그녀는 물을 찾아 손을 뻗었다. 분명 밤에 방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물을 가득 떠다 두었는데 막상 자리끼 그릇을 들어보니 한 모금도 채 되지 않는 물만 있었다.
박 나인은 울상을 지었다. 고개가 절로 문 쪽으로 돌아갔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둑했다.
최근 궐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는 생각시 귀신 소동에 처소마다 침번을 서는 것까지 피하려 다들 애쓰는 중이었다.
희운당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박 나인은 결국, 곁에 잠들어 있는 동기를 깨웠다. 연 나인은 잠에서 깨자마자 귀찮은 듯 볼을 부풀렸다.
“자리끼만 빨리 가져오자.”
부엌의 물 항아리에 물을 그득 채워놓았으니 마루 끝까지 빠르게 다녀오기만 해도 되었다. 내키지 않은 듯했지만 연 나인은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섰다.
박 나인과 연 나인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얼른 다녀오자며 박 나인은 걸음을 재촉했다. 아직 잠기운이 덜 가신 눈으로 연 나인 역시 종종걸음으로 뒤쫓았다. 항아리에서 물을 길어 급한 갈증을 달래고, 물그릇을 채워 돌아오는 길에도 별일 없었다. 방문 앞까지 다와 박 나인은 다행이라는 듯 연 나인을 돌아봤다.
“됐…… 너 얼굴이 왜 그러니?”
연 나인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팔을 뻗었다. 연 나인이 보고 있는 방향으로 박 나인 역시 고개를 돌렸다.
꺄아아악―!
고윤은 비몽사몽간에 정신없이 방을 나섰다. 환청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말고도 여럿의 발걸음이 같은 방향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누구냐!”
궁녀들만 있어야 할 곳에 사내가 나타나니 곧장 경계 어린 물음이 돌아왔다. 고윤은 밝은 곳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한성부의 정 참군이네.”
신분을 밝히자 여기저기 그를 아는 이들이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 경계심이 거두어지자 고윤은 그제야 주위를 확인했다.
“무슨 일이오?”
그의 물음에 궐내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금군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별일이 아니라곤 대답하지도 않았다. 여기 있는 자들 대부분이 비명을 듣고 달려온 이였으니 말이다.
고윤은 앞으로 걸어 나섰다. 서 있는 자들의 등 뒤로 겁에 질린 듯 벌벌 떨고 있는 궁녀가 보였다.
“정 참군 나리.”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임 상궁 마마님.”
“어찌 이리 나오셨습니까.”
고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비명을 들었는데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요.”
어찌 됐건 그는 도성 내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관청의 관리였다. 궐내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아도 말이다. 그의 말에 임 상궁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윤은 다시금 금군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직 무슨 일로 벌어진 소란인지 연유를 확인하지 못한 탓이었다.
“고하게. 무슨 일로 이런 소란인가.”
임 상궁도 자초지종을 파악하러 나온 건지 금군의 설명을 재촉했다. 별장은 낮은 목소리로 답하며 혀를 찼다.
“예의 그 일입니다. 생각시를 보았답니다.”
“생각시?”
“궐에 든 어린 나인 아이들을 말하는 겁니다.”
임 상궁의 설명에 고윤은 미간을 좁혔다.
“그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한데 아이 하나가 밤중에 처소를 돌아다니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허락 없이 처소를 벗어난 아이라면, 위험하니 밤엔 처소에서 멀리 나서지 말라며 꾸중하고 되돌려 보내면 될 일이었다. 고윤의 말에 임 상궁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면 족하겠습니다. 저 나인이 본 것은 생각시 모습을 한 동귀를 일컬음이옵니다.”
그제야 고윤은 새파랗게 질린 나인의 행동 이유를 알아챘다. 문제도 몇 개 더 늘어나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성큼 걸어 여전히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는 나인 앞에 섰다.
“그 동귀를 본 곳이 어딘가?”
“정 참군 나리. 지금 무엇을…….”
임 상궁이 말리듯 다가왔으나 고윤은 그 걸음을 제지하듯 손을 들어서 막았다.
“말하게. 어디서 보았는가?”
바짝 얼어 있던 나인은 겨우 목소리를 내어 방향을 일러주었다. 고윤은 나인이 말한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당장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는가?”
“그게 그러니까. 생각시 옷을 입고, 키는 제 허리께쯤 오는 작은 키였고.”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떨고 있던 두 명의 나인 중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나인이, 말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몸을 문질렀다.
“예! 얼굴이 있는 곳이…… 그 뭉개진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렸습니다. 본 것은 그게 다입니다.”
고윤은 고개를 끄덕이곤 나인이 말한 곳으로 움직였다. 그 뒤를 바쁜 걸음으로 임 상궁이 따라붙었다.
“참군 나리.”
“무슨 말씀을 하실 줄은 알지만, 확인을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야 할 연유라도 있습니까?”
고윤은 임 상궁을 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마마님께서도 저의 내력은 익히 알고 계시지요?”
임 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윤의 훈육 상궁으로 지정되었으니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객세(客歲) 22) 대군께서 크게 앓으셨던 뒤에, 저는 제가 가진 재주로 궐에 수상한 것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단단히 방비해 두라는 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세자의 명이었다. 그리고 고윤의 성의기도 했다.
책벌레를 풀어 그 여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어쨌든 사고를 쳤으니 뒷수습은 해야 했다.
고윤은 하는 김에 나중에 벌어질 여러 가지를 대비해서 정말로 단단히 방비했다. 세자빈의 복중에 놀고 있는 용도 있으니 말이다. 동티라도 날까 하여 고윤은 한 달을 골골대며 앓을 정도로 기력을 다해 일종의 경계를 둘러두었다. 궐이란 곳이 원체 사람도 많고, 다사다난한 곳이긴 해도 이렇게 귀신이 나타날 정도로 그의 힘은 약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두었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보아야지요.”
임 상궁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고윤은 나인들이 일러준 곳을 꼼꼼히 살폈다. 어둑하긴 했으나 특별히 음기가 짙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귀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횃불을 가져온 금군이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고윤은 불빛 아래 드러난 전각 아래쪽을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몸을 바닥에 붙일 것처럼 내렸다.
“그게 무엇입니까. 칼자국처럼 보이긴 하는데.”
고윤과 마찬가지로 횃불을 아래로 내리비춰 주던 군관이 물었다. 궐에서 쓰는 환도보다 좁은, 꼬챙이처럼 가느다랗게 보이는 자국이었다.
고윤은 금군에게 대답하는 대신 그 흔적 옆에 대고 손으로 대충의 폭과 길이를 쟀다. 그가 아는 흔적과 꽤 닮아 있었다. 그는 주위를 다시 확인했다. 근처에 다른 것이 있나 했지만 남은 것이라곤 이것뿐이었다.
“어째서 여기에.”
고윤은 새로 난 것이 분명한 자국을 더듬었다. 그 자국 근처에서 그가 그토록 찾던 요기가 느껴졌다.
* * *
임 상궁은 날이 밝기 무섭게 중궁전의 부름을 알려왔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중전께 문안 올릴 일이 없기에 고윤은 서둘러 채비하고 나서야 했다. 무슨 일로 이런 새벽에 그를 불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마마, 정 참군 들었사옵니다.”
고윤은 중궁전을 둘러보다 상궁들의 안내에 따라 방 안으로 들었다. 임 상궁의 닦달에 계속해서 절만 한 보람이 있었다. 매끄럽게 물 흘러내리듯 그는 인사를 올렸다.
“편히 앉게.”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온화한 목소리였다. 고윤은 사양하지 않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중전을 뵈었다. 은헌대군이 빼다 박았을 눈매가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색함이 조금은 가시었다.
“갑작스레 입궐하여 익숙지도 않았을 텐데 학업까지 받느라 그간 노고가 많았네.”
“모두가 잘해주어 어렵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럼 다행인 일이지.”
중전은 그리 말하며 웃었다. 되레 그 웃음에서 고윤은 불편한 심기를 느꼈다. 은헌과 어울린 기간이 길어서인지 웃는 낯에 가려진 불편함도 적당히 눈치챌 수 있었다.
“한데 이른 시간에 소신을 부르신 연유를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고윤은 매도 먼저 맞는 게 났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돌아가지 않고 물었다. 중전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윤을 보았다.
“듣자 하니 간밤 희운당에서 소란이 있었다지?”
“그렇습니다.”
고윤은 동귀가 목격된 장소가 희운당임을 떠올렸다. 희정당과 담 하나를 사이로 붙어 있는 곳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 일로 허락을 구하고자.”
“그러지 말게.”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썩둑 썰렸다. 고윤은 입을 다물었다. 중전은 어쩐지 가라앉아 보이는 눈동자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큰 경사를 앞두지 않았는가. 길일을 택하여 신중하게 날을 잡고, 집 안팎을 정돈하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화를 부르지 않기 위함이지. 부정한 것이 피한다고 피해지고, 사고라는 것이 원하여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 후회가 없는 법이라네.”
중전은 정론대로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자넬 불러 이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이리 말문을 트게 될 줄은 몰랐다네.”
“하문하시옵소서.”
고윤은 담담히 기다렸다.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아직 한성부 일을 그만두지 못하였다지? 내정자가 결정되었는데 판윤이 거절하여 다른 사람을 고르고 있다 들었네. 하여 내가 그 일에 나서볼까 하는데 어찌 생각하는가?”
후임이 결정되고 그것을 판윤이 거절하였다는 말은 고윤도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보통 당하관을 임명할 때에는 세 명 정도를 추천받아 그중 한 명을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그 절차가 까다롭고 길어 문제가 없다면 그대로 낙점되는 것인데, 그걸 판윤이 싫다 했으니 그 후임으로 오려던 이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고윤은 그가 하는 일마다 눈을 찡그리며, 꺼리는 기색을 보이는 상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후임자가 결정되어야 인수인계를 할 수 있음인데 아직 그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것으로 봐선 그냥 저를 고생시키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면신례(免新禮) 23)의 원한이라도 갚으려는 건가?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려는 것을 끊어내고 그는 중전을 보았다.
고윤은 짧게 생각을 정리했다.
“중전마마께옵서 무엇을 염려하는지 소신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확실히 말해, 한성부에서 지금 맡은 일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지요.”
“그럼 그만두어도 되겠군.”
“하오나, 마마. 사직할 때까지 반드시 매듭지어야 할 일이 하나 있고, 외람된 말이오나 도성 안에 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가 저뿐이옵니다.”
고윤은 쓴웃음을 머금고 고했다.
“자네가 하는 일은 형조, 사헌부 그리고 좌우포청에서도 하고 있지 않은가?”
“대부분의 일이 그러하나, 그렇지 않은 일도 있지요.”
지난밤 그가 궐 안에서 느꼈던 요기의 흔적이라거나, 도성 곳곳에서 발견된 요기가 그득한 시신과 관련된 사연을 헤아리는 일이 그러했다.
고윤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런 말을 올리는 것조차 외람된 것을 압니다만 허해주신다면 솔직히 고해 올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모든 것이 조심스러워야 했다. 고윤은 은헌과 닮은 눈매를 보며 마음을 가라앉힌 뒤 입을 뗐다.
“한서 《곽광전》에 곡돌사신(曲堗徙薪)이란 고사가 있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굴뚝이 곧으면 불이 나기 쉽고, 그 곁에 땔감을 두었으니 더 큰불이 될 것이라 방비하라 일러주었더니, 충고를 무시하고 놔두었다가 겁화에 휩쓸린 어리석은 이가 있었다. 그 어리석은 이가 불이 나기 전에 충고한 이웃은 무시하고, 불 끄러 달려와 도와준 이들에게만 대접하다 꾸중을 들었단 그런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엔 화가 닥칠 것을 알고 있기에 본 것을 일러준 이와 알면서도 방비하지 않아 화를 당한 이가 나옵니다. 타고난 재주가 불길하여 저조차 제가 가진 재주를 썩 반기지 않습니다. 하나 그 재주가 있어 저는 불이 날 굴뚝 같은 것을 종종 봅니다. 또한, 보았기에 그것을 방비하라 일러주기도 합니다. 그 이웃처럼 저의 충고를 무시하는 이도 있고, 문제가 생길 것을 알아채곤 조심하는 이도 있습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그들의 것이지만, 때론 저의 것이 될 때도 있습니다. 화마란 것이 한 집만을 태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갈 때가 더 많기에요. 하여 저는 막을 수만 있다면 불이 나기 전에 문제가 되는 것을 고쳐 막는 것이 가장 좋고, 불이 났다면 더 번지기 전에 끄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그가 무어라고 이 땅 난 것을 다 보살피려 들겠는가. 어린 시절에는 한계도 모르고 되는 대로 사방팔방 손을 뻗어 도와주었다가 크게 다치고 아팠던 적도 많았다. 그게 수년을 이어지자 고윤도 점점 무심해졌고, 귀찮아졌다. 몸을 사리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도 그만두지 않은 것은 가끔은 피해갈 수 없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종류는 초장부터 정리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편했다. 꺼려지는 일이라 하여 놔두었다가 더 크게 돌아올 때가 있어 말이다.
“또한, 스스로 맡은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물러나는 것이 저 자신의 매듭이기도 하옵니다.”
고윤은 한숨을 내쉬듯 가볍게 웃었다. 화병 나기 직전일 때는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건만, 막상 일을 그만둔다니 섭섭하였고 제대로 끝내지 않으면 후회가 될 것 같았다. 무엇 하나 미련처럼 후련하게 털어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군.”
“송구합니다.”
고윤은 고개를 숙였다.
“객년 여름 말미에 은헌 대군이 작은 함에 든 창약을 주고 갔다네. 흉을 지워주고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해줄 거라며 말이지.”
중전은 웃는 건지 아닌지 모를 얼굴로 말했다.
“그때도 대군에게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 일렀다네. 그랬더니 은헌이 그러더군.”
고윤은 듣지 않아도 어떤 대답일지 알 것 같았다.
“한 명 정돈 그런 억울함을 들을 수 있어야 이 나라가 조금 더 평안해지지 않겠느냐고 말이야. 그때의 일은 그래, 잘 해결되었던가?”
“예.”
고윤은 기억에서도 희미해진 일을 더듬었다. 꽃신을 찾아달라는 처녀 귀신의 부탁이었다. 은헌의 도움으로 신발도 무사히 찾아주었고, 성불도 시켜줬다.
중전은 한숨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되었네. 자네가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때까지는 지켜보기로 하세. 다만 궐내에서 벌어진 일은 내 소관이니 따로 상궁에게 일을 맡길걸세. 한성부 참군이 할 일은 아니지.”
“알겠습니다.”
궐내의 일이니 중전의 감시하에 처리되는 것이 맞았다. 감찰 상궁이 일을 맡는다고 하니 고윤으로서는 반론을 제시할 수조차 없었다.
“친영례 전까지는 부디 몸조심하게나.”
“분부 받잡겠습니다.”
고윤은 예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