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
고윤은 한숨을 내쉬곤 안으로 들어섰다.
내관이 그를 맞이했다.
“저하, 정 참군이 들었사옵니다.”
모두가 보았으나 모두가 잊어버린 그 새벽이 지나간 뒤로 한 달 만이었다. 고윤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세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게나.”
세자는 편안히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았다. 되레 고윤은 불편해졌지만 말이다.
세자가 그날 이후로 그를 가까이 두는 것은 알고 있는데 영문을 모르니 더 불편했다.
전하께서도 그렇고 저하도 그렇고 그가 한 짓에 대해 따로 불러들여 문책하는 일은 없으니 다행이었지만, 그걸로 괜찮은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세자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뚱한 표정의 고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외람된 말이오나 무척 닮으셨군요.”
고윤은 그 시선에 불쑥 입을 뗐다.
“누구와?”
“은헌 대감과 저하가 말입니다.”
고윤은 한 달째 소식이 뚝 끊겨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은헌을 떠올렸다.
죽은 줄 알았던 몸에 다시 호흡이 돌아오고 맥박이 뛰자 의관들이 정신없이 달라붙어 두 사람의 몸을 녹여냈다. 고윤이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궐 밖으로 옮겨졌고, 대군은 여전히 궐에 있었다. 입궐하면 볼 수 있을까 하여 어렵게 한 번 온 적이 있으나 요양을 핑계로 방문을 거절당했다.
꿈길도 막혀 잠결에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세자는 픽 웃음을 흘렸다.
“형제니 당연한 게지.”
다른 배에서 태어났어도 둘은 꽤 비슷했다. 하나같이 친탁한 외모라서 말이다.
“그래도 새로 태어날 이는 무척이나 세자빈을 닮지 않았는가.”
세자는 아직도 잊히지 않은 그 앳된 얼굴을 떠올렸다. 고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아침 빈궁이 진맥을 받았다네.”
세자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퍼졌다.
“내년엔 궐에 아이 울음소리가 요란할 것 같으이.”
“태어나시기도 전에 하신 일을 보면 뭐…….”
태몽 때문에 궐을 통째로 들쑤셔 놓은 것으로 봐선 태어난 뒤가 더 걱정이 큰 분이었다. 고윤은 쓴 것을 삼킨 얼굴로 콧등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세자가 나지막이 웃었다.
“무척이나 장난이 심할 것 같아 벌써 다들 염려가 크다네.”
빈궁의 회임 소식을 전해 들은 왕도 기뻐하기 전에 걱정부터 했다.
“하여…… 대군의 금족령이 풀렸다네.”
어쨌든 기쁜 소식이라 경하드린다, 인사 올리려던 고윤이 멈칫했다.
“죽었다 살아난 데다 깨어나고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에 크게 앓아누워 어마마마께옵서 노심초사하셨거든.”
그 일로 중전은 왕과 또 한 번 싸웠다.
어릴 적부터 도성 밖에 내돌려 대군의 몸이 상할 대로 상했느니 뭐니 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수십 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아온 것을 누가 잘못했는지 다 따지고 들 기세로 중전은 쏘아붙였다.
평생 없던 일에 왕은 기가 찬 듯 몇 번이고 헛웃음을 터뜨리곤 애꿎은 은헌을 중전이 걱정한다는 이유로 후원에서 한 발도 못 움직이게 했다.
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다. 다만, 중전이 큰 소릴 내며 화를 내도 그저 실소로 넘겼다.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고윤은 손톱을 세워 손바닥을 긁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물었다.
“그래.”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면 내관이 기다리고 있을걸세. 따라가게.”
궐의 출입이 허락된 관리라 하더라도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은 정해져 있었다. 법궁을 나와 동궐의 후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윤은 머리 위로 푸르게 우거진 빽빽한 숲길을 지나 언덕 두어 개를 올랐다가 내려갔다. 숲 가운데에 낮은 평지가 있고 집 한 채가 보였다. 전각이라 하기엔 그냥 궐 밖의 잘사는 대가 댁이었다.
“드시지요.”
내관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이 푸름이 유난히 짙은 탓인지 단청을 칠하는 짙은 색을 쓰지 않은 집은 어쩐지 유난히 희미했다. 그게 외려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기도 했다. 안으로 들자 두 개의 문이 보였다. 내관을 따라 문 하나를 또 들어가자 너르고 긴 마루가 나왔다.
문을 위로 올려 걷은 햇살 잘 드는 마루 위에 앉아 있는 인영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깊이 하는지 모르겠지만 은헌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살이 내려 가뜩이나 날카로워 보이던 턱은 뾰족했고, 광대가 선명했다. 눈가도 푹 주저앉아 거뭇했다. 피곤한 듯 까칠한 얼굴을 보며 고윤은 성큼 걸어 들어갔다.
“대감!”
그의 부름에 은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초점이 흐릿하니 풀어져 있던 눈이 순식간에 까맣게 물들었다. 그러다 이내 환하게 밝아졌다.
“자네!”
은헌은 마루에서 버선발로 내려와 고윤을 붙들었다.
“살아 있었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은헌은 손으로 고윤을 매만졌다.
“뭐…… 보시다시피 무탈합니다.”
“그렇군.”
은헌은 저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 고윤의 얼굴을 보며 다행이라며 연거푸 중얼거렸다.
“나는 내가 보름이나 넘어서야 깨어났다기에…….”
궐 안에서 어의가 살피는 대군인 그도 힘겹게 후유증을 버텨냈다. 궐 밖에 나가 있는 고윤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그는 계속해서 걱정했다. 궐내의 소식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용을 잡느라 기운을 다 써서 그런 겁니다. 인간이 쓸 수 없는 물건을 사용했으니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라 할까요.”
고윤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히 일러주었다. 그제야 은헌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면 자네는? 자네도 치렀는가?”
“저야 뭐…… 인생이 빚잔치죠.”
갚고 나면 또 빌리고, 또 갚고 빌리고…… 열심히 여기저기 돌려 막는 중이었다. 이번에 용을 도와주면서 크게 갚아내긴 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내년에 숙부가 되신다고요.”
은헌은 그 말에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고생이 많았지만 다행인 일이지.”
세자빈이 회임함으로써 그가 어쩔 수 없이 견제받으며 숙이고 또 숙여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사방에서 받던 압박이 사라지자 숨 쉬는 것도 편해졌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궐 안에서 오래 살지 않아 그런지 은헌은 궐내의 법도가 까다롭고 귀찮았다. 그는 픽 웃고는 고윤에게 팔을 뻗었다.
“이리 온 김에 차나 들게.”
그는 그대로 고윤을 붙잡아 끌었다.
마루에 앉아 발을 털고 위로 올라간 은헌을 따라 고윤도 순순히 움직였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할 말이 무척이나 많았다. 닿지 못했던 시간 내도록 바닥에 뚝뚝 떨어지던, 깨어진 도자기 파편과 함께 튄 핏자국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아 염려했다.
고윤은 한숨 내쉬듯 웃음을 흘렸다.
후일담(後日譚)
“대감! 대감, 어디 계십니까!”
은헌은 누워 뒹굴뒹굴하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은헌 대감!”
고윤의 목소리였다.
바쁜 일 없으면 쉬는 날 종종 찾아오거나 그가 보러 가기도 했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었다.
은헌은 일어나 구겨지고 흐트러진 옷차림새를 바로 했다.
“무슨 일인가?”
뒤뜰로 뛰어들 듯 달려온 고윤을 그는 담담히 맞이했다. 청지기가 먼저 고하러 온 게 아니라 직접 찾아 들어온 것을 보면 문을 열어 온 모양이었다.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보는 눈이 많아져 안 쓸 거라 하면서도 그랬다.
고윤은 은헌을 발견하자마자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은헌은 청홍 비단으로 만들어진 긴 주머니를 보았다. 힘없이 꺾이는 것을 보면 얇은 서찰이 든 듯했다. 그는 주머니를 자세히 살폈다. 꼭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그거 꼭 혼서지…….”
은헌은 저가 대답하여 놓곤 바짝 얼어붙었다.
“자네 혼인하는 건가?”
어쩐지 목이 바짝 졸린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윤이 미간을 구겼다. 그러고는 입을 벌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숨을 뱉었다.
“아니, 말을 하게.”
은헌은 답답한 듯 재촉했다.
“……제게 온 혼서지를 왜 여기 와서 묻겠습니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은헌은 슬쩍 눈치를 살피곤 낮은 목소리로 핀잔을 던졌다. 고윤은 숨을 깊이 삼켰다가 욕처럼 뱉었다.
“대체 세자 저하께 무슨 말씀을 올리셨길래…… 본가에 이런 게 옵니까?”
은헌은 점점 더 영문을 알 수 없어졌다.
“그걸 저하께서 보내셨다고?”
“정확히는 전하께서요.”
고윤의 대답에 은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체 누구랑 혼인하기에?”
그는 왕실에 속한 이들을 죄다 머릿속에 끄집어낼 것처럼 생각에 잠겼다. 직계는 세자와 저, 둘뿐이었다. 사촌 혹은 육촌까지 가면 더 있긴 했으나 전부 사내밖에 없었다. 그가 알기론 영의정 정현 역시 아들만 셋이었다.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은헌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제 손으로 넘어온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이걸 영상이 받았다고?”
고윤은 생각할수록 기가 차서 실소를 터뜨렸다.
“예.”
“자네가 막내 아니었나? 여기 있는 누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랑 사주가 제 것이라서요.”
은헌은 순식간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다시 그 종이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거기엔 고윤의 진명만이 아니라 그의 진명도 적혀 있었다.
정식으로 쓴 청혼서였다. 법도에 맞춰서 말이다.
읽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져 은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왜…….”
그는 고개를 들어 고윤을 보았다.
“나도 모르는 일이라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긴 한데 대체 내가 저하께 무슨 말을 했다고…… 이런 게 오겠나.”
고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드물게 말도 못 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듯 버벅대다 그가 외쳤다.
“저희가! ……그러니까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저하께서 당연히 대감께서 저를 책임…… 하…… 져야 할 일이라면서 아버님께…….”
은헌의 얼굴이 당혹감에 불에 타오르듯 달아올랐다.
“이 사람 참! 우리가 무슨…… 아!”
그는 더듬더듬 변명하려다 불쑥 떠오른 기억에 입을 벌렸다.
“역시 뭔가 계시지요?”
고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은헌이 낭패 어린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게 전에 태몽을 팔았던 날에 말일세. 저하께서 내게 꿈값을 치른다 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어차피 죽었으니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여서…….”
“그래서요?”
“자네 시신이라도 온전히 돌려보내 줘야겠다 싶어서…… 저하께 자네가 내게 귀한 사람이니 내가 간 뒤에 자넬 부탁한다고……. 그러니까 벗이잖은가.”
은헌은 팔까지 허공에 휘저으며 변명했다.
“그리고 내가, 아니, 저하께서 그렇게 말을 하였지만, 무언가를 하시려 해도 청혼서라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허락도 필요할 텐데?”
그의 말대로였다.
대군의 이름이 들어간 청혼서를 쓰려면 여러 가지 절차가 많았다. 왕실의 혼사니 말이다. 사람을 들이는 모든 순간이 까다롭고 법도에 맞춰 절차대로 이뤄져야 했다. 그러니 세자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해도 되는 혼사가 아니란 말이었다.
“미치겠네.”
고윤은 짐작 가는 바가 떠올라 괴로운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인제 와서 설마 아니겠지요?”
“인제 와서 뭘…….”
“전하께서 이 혼사를 허하신 이유요!”
은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자빈 저하와 제 사주가 같다는 건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게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될 것 같고, 그 외에 저를 대감께 붙여둬서 제 능력과 관련된 약점을 대감께 하나 추가하고, 저와 엮이게 되었으니 아는 사람은 더는 대감을 빌미로 저하와 태어날 아기씨를 흔들려 하지 않을 거라는 굉장히 정치적인 이유도 있을 것 같다고 여겨집니다만.”
은헌은 어째서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청혼서를 썼는지 깨달았다. 그와 고윤을 묶어둠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왕에게는 말이다.
중전 또한 언제든 반기를 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어느 누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왕실에 태어난 이상 가장 안전한 것은 보위에 오르는 방법이었다. 그것을 처음부터 막을 수도 있었다. 사내와 혼례를 치를 대군을 누가 왕으로 추대할까?
“아바마마답군.”
뜻한 대로 상황을 몰고 가 사람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처리하는 방식이 특히 말이다.
“한데 영상은 이번 혼사를 받아들인 건가? 자네에게 이걸 건넨 걸 보면?”
왕에게서 먼저 말이 나왔다곤 해도 거절은 할 수 있었다. 대쪽 같음으로 유명한 영의정이라면 말이다.
“제 목이 간당간당했잖습니까.”
고윤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보는 눈이 있어 사람 앞에선 적당히 가려야 할 능력을 전하의 앞에서 막 써댔다. 어찌 보면 왕실에서 위협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재주였다. 가진 능력만으로도 역모가 될 수도 있으니.
어찌 보면 양쪽의 이해관계가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결과가 은헌의 손에 들린 혼서였다.
은헌은 고윤과 제 손에 들린 청혼서를 번갈아 보곤 웃었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고윤은 볼멘 목소리로 입을 삐죽였다.
“어떤가 싶어서. 자네는 산 사람과 엮일 일이 없고, 나야 앞으로도 영영 여인과는 연이 없을 테지.”
은헌의 말이 길어질수록 고윤의 심기도 조금은 풀렸다.
“나는 내 목숨을 구하고, 자네는 자네의 목숨을 구하는 방법이 이것뿐이라면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굉장히 정치적이시군요.”
고윤은 가끔 자신이 생각지 않은 권력의 측면을 볼 때마다 은헌이 누구인지 새삼스러워졌다.
“이 자리가 그렇지. 어떤가? 난 나쁘지 않아. 자네가 있으면 적어도 심심치는 않거든.”
고윤은 미간을 구겼다.
“거절할 방법이나 일러주시고 선택하라 하시죠.”
그에게는 빠져나갈 곳 없는 외통수였다.
은헌은 코웃음을 흘렸다.
“선택지를 없앤 것은 내가 아니란 말일세. 그나저나 이왕 이리된 것 오늘 쉬는가?”
“예.”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온 연락을 받고 반나절은 일하고 오후는 쉬기로 했다.
“그럼 차나 하세. 어마마마께옵서 생과방에 일러 이것저것 보내오셨거든.”
설당이 든 것은 은헌의 입에 맞지 않으니 분명 고윤에게 보내신 것일 터였다. 생과방이라는 말에 혹해 고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신을 벗고 정자에 올랐다.
“차는 무엇으로?”
“전번에 마셨던 것이 좋습니다.”
은헌은 웃었다.
심통 맞은 고윤을 풀어주는 방법도 아는 것을 보니 둘 사이가 꽤 가까워졌단 생각이 들었다. 앞으론 어찌 될지 몰라도 말이다.
“그나저나 정말 어쩌실 겁니까, 저건.”
고윤은 청혼서라 부르지도 않았다.
“내가 아니라 영상에게 물어야지 그건.”
청혼서에 맞춰 허혼서를 쓰는 것은 부인이 될 쪽이었다.
고윤은 헛숨을 깊게 뱉었다. 생각할수록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그냥.”
“그냥 뭐요?”
“같은 이불 덮고 자는 벗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이불 따로 쓸 겁니다. 법도대로 방도 따로 쓰고.”
“그것도 좋지.”
은헌의 수긍에 고윤은 지금 둘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떠올리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정말로 어쩌다 이리되었을까요.”
“어쩌다 이리되긴. 태몽 들고 남의 꿈이나 드나들다 이리되었지.”
은헌은 가볍게 책망했다.
“그래도 좋은 점도 있지 않은가?”
“뭐가 말입니까?”
고윤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일에서 좋은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대체 어디에 장점이 붙었는지 찾기도 어려웠다.
“한성부를 그만둬도 궐에서 내탕금이 나온다는 것 정도?”
“듣던 소리 중 제일 혹하네요.”
집이 가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혼자 나와 먹고사는 것도 벅차지고 있었다. 게다가 한성부 쪽 사람들과는 영 친해지지 않았다. 그쪽이 일방적으로 고윤을 꺼리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사직하여 물러나도 때 되면 알아서 돈이 나온다니 정말로 혹했다.
“뭐든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지.”
은헌은 그의 부름에 달려온 하인에게 다과상을 방으로 들이라 명했다. 설당도 그득 담아오라고 말이다.
“일단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해 본다고 어찌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이미 두 사람과 상관없이 진행되는 일이었다. 혼서에 이름 적힌 당사자들인데도 말이다. 왕만 나선 것이 아니라 중전에 세자까지 동참한 일인데 누가 말리기나 할까.
될 대로 되라는 듯 고윤은 신경 쓰는 것을 포기했다. 은헌은 고개를 움직여 하늘을 봤다.
여름 햇살이 들어 뜨겁고, 더워 지루하게 느껴지는 하늘이었는데 고윤이 오니 심심함이 사라져 그런지 푸른 하늘에서 청량감마저 느껴졌다.
“요즘 집에 찾아오는 객들은 괜찮은가?”
고윤은 은헌이 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별일 없습니다. 생전에 잃어버린 꽃신을 찾아달라 울면서 집 대문 앞에서 기다리는 처녀 귀신만 아니라면요.”
“꽃신?”
고윤은 소매를 뒤적거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맷부리 안에서 접힌 종이가 나왔다.
“이런 겁니다.”
은헌은 종이를 펼쳐 모양새를 살폈다.
“어디서 본 듯한데?”
여인의 신이라 잘은 모르지만 어디서 본 것만은 확실했다.
“신발이 다 비슷하지요.”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소리! 여기 이 자수 말일세. 가죽에 이런 자수가 놓일 정도라면 꽤 공이 들어간 물건이란 말일세. 아! 일전에 궐에 진상되어 온 것 중에 비슷한 게 있었네. 상의원의 것이었던 듯도 한데.”
“정말입니까?”
고윤은 무릎을 세워 은헌의 곁으로 붙어 앉았다. 은헌은 그 모습을 보며 짓궂은 눈웃음을 흘렸다.
“알아봐 줄까?”
은근히 낮아진 목소리에 고윤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물러났다.
“끼어들 생각일랑 마십시오.”
은헌은 짐짓 억울하단 듯 콧등을 찡그렸다.
“그냥 도와주려는 걸세. 우리 사이에 말이야.”
“저희가 뭐…….”
무슨 사이라도 되냐 말하려던 고윤은 정자 바닥에 곱게 놓인 청혼서를 보며 인상을 썼다.
“어쨌든 관심 두지 마십시오. 처녀 귀신은 안 됩니다.”
“그거 어쩐지 부인께옵서 첩실은 안 된다 하는 거랑 비슷한데.”
“처녀 귀신 만나 혼쭐이 나봐야 그런 소린 못 하실 텐데.”
입술을 꽉 지르물고 뱉은 고윤의 목소리에 은헌이 키득댔다.
“알아봐 주겠네. 어차피 내일 궐에 들어 어마마마를 뵈려 했거든.”
미심쩍은 눈으로 보던 고윤이 감사하다 고개를 꾸벅였다. 어차피 그는 그런 것은 봐도 모르는 편이라 잘 아는 듯한 은헌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터였다. 그는 품에서 귀주머니를 하나 더 꺼냈다.
“이거 궐에 드실 때 가져가십시오.”
은헌은 주머니를 열어 안을 봤다. 작은 통이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 살폈다.
“궐 밖의 물건을 들이면 안 되는 것은 아는데. 그거 흉터에 정말로 좋은 것이라서요. 딱 한 번 바를 양입니다.”
고윤은 주섬주섬 말을 늘어놓았다.
은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 안에는 똑같은 것이 세 개가 들어 있었다.
그의 이마에 생긴 흉도, 세자의 손에 남은 흉도, 중전의 목에 남은 흉도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고윤이 그를 마주할 때마다 이마에 남은 흉터를 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약까지 구해올 줄은 몰랐다.
“이것은 어디서 구했나.”
“선금으로 받은 겁니다.”
고윤은 꽃신이 그려진 종이를 슬쩍 눈짓했다. 은헌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전해 드리도록 하지. 허락받고.”
“뭐, 꼭 다 털어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야기는 적당히 하셔도 됩니다.”
귀신의 손이 닿은 물건이라 또 탈이 날까 염려되긴 했다. 효과만 없었다면 가져오지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지.”
둘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1부 끝, 4권에서 2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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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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