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
“도련님!”
마당을 쓸다 나온 이가 놀란 듯 외쳤다.
고윤은 오랜만에 보는 집안 하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아버님 계시느냐?”
“예? 예! 그럼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고윤은 대문을 넘어섰다. 문을 열어준 하인이 앞서 뛰어 들어가며 그가 왔음을 고해 올렸다.
“대감마님! 마님! 막내 도련님 오셨습니다.”
다 같이 한양 사는 처지에 그것도 도성에 살면서 뭐가 이리 반가울까 싶다가도 고윤은 그가 이 집 대문을 넘은 지 언젠지 가물가물한 것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어쨌거나 그는 사랑채 바로 앞에 섰다. 하인이 외친 소리에 마루에 나와 계신 아버지가 보였다.
새벽부터 남산골까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들인 것치곤 반가운 기색 없이 범연했다.
“지체 만강하셨습니까.”
두 손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인 고윤은 인사부터 했다.
“왔으면 안으로 들거라.”
인사에 대한 답은 없었다. 무뚝뚝한 태도로 안에 들라 하는 말에 고윤은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는 사랑채로 들었다. 앞서 들어가 앉은 영의정이 홱 하고 몸을 돌렸다.
뭐 때문에 이렇게 서둘러 본가에 들어오라 했는지 짐작 가는 일이 없기에 고윤은 괜히 움찔했다. 영의정은 주먹을 꽉 쥐고 들어 올렸다가 꾹 참듯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눈치를 살피며 고윤도 얌전히 무릎을 꿇어앉았다.
“선아.”
그는 아명에 고개를 들었다.
“예, 아버지.”
“요즘 이상한 소문이 귀에 들리더구나.”
고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와 관련된 소문의 대다수는 귀신 때문에 벌어지는 괴담 같은 소리였다. 나머지는 헛소리였고 말이다.
영의정은 낡은 책상에 팔을 얹었다.
“무슨 소문인지 아느냐?”
고윤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영문을 몰랐다.
“송구합니다.”
영의정은 막내아들을 보며 혀를 찼다.
“최근 은헌 대감과 가까이 지낸다지?”
그제야 고윤은 무슨 말이 도는지 대충이지만 짐작이 갔다. 이래서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만나는 것을 걱정했는데, 이제 와 후회한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다.
“일이 있어 두 번 정도 뵈었습니다.”
내막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입에 올려 씹을 거리로 보였을 터다.
“일이라, 대군과 무슨 일로 말이야?”
고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 우연히 물건 전할 일이 생겨…….”
“선아.”
영의정은 엄한 시선으로 아들을 보았다.
“예.”
고윤은 입술을 깨물곤 말을 기다렸다.
“보통 우연히 만난 사내 둘이서 손을 붙잡고 저잣거릴 돌아다니지 않는단다.”
* * *
“영상의 막내아들과 퍽 가까이 지낸다고?”
아침 문후 자리에서 듣기엔 반갑지 않은 하문이었다.
은헌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같은 스승 아래 수학한 사이라 하여 우연히 두어 번 마주친 것이 다입니다.”
그는 스승을 담담히 팔아 치웠다. 거짓도 아니었다. 같은 스승을 둔 것은 말이다. 게다가 은헌과 고윤이 직접 얼굴 맞대고 본 것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횟수가 적었다. 사흘 전 함께 돌아다녔던 후론 계속 꿈에서만 마주치고 있어 은헌은 다행이라 여겼다.
“우연히 만났다? 같은 스승 아래 학문을 배운 이가 한성부 참군이고, 영의정의 아들이라…… 겸은이 문재를 키워냈구나.”
왕은 말끝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네가 우연히 만난 그 정 참군이 최근 세자빈의 사가와 관련된 기록을 뒤적인다지?”
은헌은 침음을 삼켰다. 손바닥을 딛고 있는 마루가 금이 가기 시작한 얇은 얼음판처럼 느껴졌다.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것은 그가 처한 상황 그 자체였다.
은헌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는 낯으로 부왕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자세히는 모르나 호적고를 관리한다 들었으니 어디 보는 것이 빈궁 저하의 것만 있겠습니까. 할 일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단 말이지.”
“예, 소자는 그저 같은 스승을 두었단 이가 있다 하여 인사를 나눴을 뿐인 것을요.”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감시가 어디까지 어떻게 보고를 올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은헌은 최대한 태연히 목소리를 내었다.
부왕은 여전히 매서운 얼굴로 옥좌에 앉아 그를 보고 있었다.
“남의 눈엔 대군의 걸음 하나하나가 크게 들어오는 법이지. 은헌은 가볍지 않게 처신하거라.”
지켜보고 있으니 조심하란 경고를 대놓고 늘어놓는 왕에게 은헌은 공손히 알았노라 답했다.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잘못되면 그만 다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새어 나오는 헛숨을 쓰게 삼켰다.
은헌은 대전을 나오자마자 동궁전으로 향했다. 평상시라면 중궁전에 걸음 하였다가 갔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세자를 뵈어야 했다.
부왕의 입에서 고윤의 이야기가 나왔다면 형님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세자빈과 관련된 부분도 말이다.
그런 일은 없을 거로 생각하지만, 만약에라도 조금이나마 염려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어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하여야 했다.
은헌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동궁전 근처에 다다르자 멈춰 서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흐트러짐 없도록 매만진 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저만치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궁인이 아니었다. 도포 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보였다. 공복 2이 아닌 옷을 입고 입궐하는 이가 드물어 그는 누군지 곧장 확인했다.
“신중히 처리하게.”
세자의 목소리에 허리를 숙인 선비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은헌은 제가 아는 목소리에 움찔했다.
바스락.
뒤에서 들려오는 풀 밟는 소리에 은헌은 화들짝 뒤를 확인했다.
“대군 대감.”
동궁전 나인 아이가 그를 불렀다.
은헌은 혀를 찼다. 저 앞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순식간에 뚝 끊겼다. 이쪽을 돌아보는 당황한 눈길에 은헌은 웃는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다가서자 세자가 그를 맞이했다.
“은헌.”
“문안드리러 온 것인데, 먼저 온 객이 있었군요.”
은헌은 예를 갖춰 인사하곤 시선을 움직였다.
“대군 대감.”
“오랜만에 보네.”
허둥지둥 인사를 하며 서갑령, 세자빈의 오라비가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서갑령의 품에 있던 것을 감싸고 있던 보자기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은헌은 그 안에 있던 것을 보았다. 그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그 함은…….”
서갑령은 허둥지둥 풀린 보따리 천을 끌어 올려 품에 안은 것을 감추었다.
은헌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꽤 특이한 문양의 함을 가지고 있군.”
“아는 물건이냐?”
위에서 지켜보던 세자가 물었다. 은헌은 형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세자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은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어서요. 화국에 갔다 온 상인이 아주 귀한 것이라며 보여주었던 함인데 값이 적당치 않아 사지는 못했습니다.”
혀끝에서 거짓말이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그렇군요. 이것도 화국에서 온 것입니다.”
“화국에서? 아, 자네가 사신단을 의주까지 마중 나섰다 선래(先來)하여 먼저 돌아왔었지? 그것 좀 잠시 볼 수 있나?”
서갑령은 조심스러운 얼굴로 함을 보였다. 은헌은 살짝 드러난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그 거리의 두꺼비 방물장수가 보여준 문양과 정말로 똑같았다.
“내가 보았던 것과 정말로 비슷하군. 서 좌랑 자넨 어디서 구하였던가? 화국에서 직접 구한 것인가?”
“그것은 아니옵고 아는 역관에게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렇군. 귀한 것을 구하셨네.”
은헌은 역관이란 말에 픽 웃었다. 그는 몇 가지 더 묻고 싶었으나 자리가 좋지 않았다.
“은헌, 내가 서 좌랑에게 일 시킨 것이 있으니 그만 묻고 보내주거라. 자네는 이만 가보게나.”
세자가 말을 끊고 서갑령에게 명했다.
“네. 그럼 대군 대감, 나중에 또 인사 올리겠습니다. 저하,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기세로 나서는 뒷모습을 보던 은헌은 다시 세자에게 몸을 돌렸다.
그 함은 분명 인간의 손이 닿아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고윤이 그리 말했다, 그게 어떤 것인지 알고 궐에 들인 건가?
은헌은 귀신이 된 역관을 떠올렸다. 화국에서 돌아와 지박령이 된 그의 휴가증을 써준 자가 서갑령이었다. 그리고 그 서갑령은 역관에게 선물 받았다며 함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세자가 그것을 신중히 처리하라 명했다.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은헌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악의 가정이 진실이 아니길 빌었다.
“안으로 들자. 오늘은 날이 덥겠구나.”
세자는 그리 말하며 대청을 질러 안으로 들어갔다. 은헌은 서갑령이 서 있던 자리를 보곤 세자를 뒤따라갔다.
“그래. 금일은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어마마마께서 문후를 받지 않으셨더냐?”
부왕께옵서는 문후를 빠르든 느리든 받고 계시니 이리도 일정을 바꿀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은헌은 가볍게 웃었다.
“어마마마께옵서 대비전에 드시어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던 터라 먼저 인사드리러 온 것입니다. 혹여 곤란할 때 온 것입니까?”
은헌의 물음에 세자가 손을 내저었다.
“내 언제 은헌, 네가 온 것을 꺼린 적이 있더냐. 언제든 오라 하지 않았어.”
“그래도 말이지요.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듯하여…….”
“은헌.”
세자는 낮은 목소리로 아우를 불렀다.
“예, 저하.”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괘념치 말거라.”
그 말에 은헌의 머릿속은 더 복잡하게 꼬였다. 그는 짧게 숨을 골라 내쉬곤 세자를 보았다.
“저하.”
“왜 그리 부르는 것이냐?”
은헌은 대수롭지 않게 보이려 애쓰며 입을 뗐다.
“제가 최근에 사귀게 된 벗이 있습니다.”
세자가 되물었다.
“전에 그 곤경에 처한 벗 말이냐?”
“아니요. 어쩌다 보니 만나게 된 자이온데. 제 글 스승의 제자라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영상의 막내 영식이라 하더군요.”
왕의 명을 받은 이들은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세자가 대군에게 붙인 호위기도 했다. 은헌은 그리 여겼다.
“그 일로 좋지 않은 말이 돈다지요.”
세자는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영상은 이제껏 어디에도 관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당파도, 궐내 벌어지는 정쟁에도 거리가 있었다. 여기저기 부르는 이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가장 공평한 인사였다. 높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널리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대군은 영상의 세력이 그에게 붙었을까 봐 신경 쓰는 부왕을 만나고 온 뒤였다. 당금의 조정은 세자빈을 폐하고 새로 들이든가, 그도 아니면 대군에게 대통을 잇게 할 준비를 하게 하든가 둘 중 하나를 염두에 두고 있을 터였다.
부왕은 영상이 은헌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일에 힘을 실을 것을 염려하였다.
세자가 짓궂게 웃었다.
“그 일로 새로 벗이 된 친우를 잃을까 걱정되느냐.”
은헌은 코웃음을 흘렸다.
“벗을 잃는다 하여 울고불고 고집 피울 나이는 아니지만.”
그는 고윤을 떠올렸다.
“섭섭하긴 할 것 같군요.”
그래서 부탁하러 온 거였다. 남들은 무슨 의도가 있을까 하여 감시의 눈으로 지켜보더라도 그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말벗일 뿐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래야지요. 벌어지지 않은 일로 걱정하다니 제가 요즘 꽤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입니다.”
아우의 속을 다 안다는 듯 세자가 웃었다.
은헌은 마주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생각난 모양새로 퍼뜩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서 좌랑이 가지고 갔던 그 함 말입니다.”
“그 함이 왜?”
세자는 다시 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썩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저도 구하려던 것이라서 그런지 계속 신경이 쓰이지 뭡니까. 서 좌랑이 그 함을 전하께 올리려 한 것입니까?”
은헌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하나 궐에 사사로이 물건을 들이면 되겠느냐? 군주가 쓰는 물건은 먼 이국의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난 것이어야 하고, 그것을 쓰며 백성을 생각하여야 하거늘. 그래서 돌려보냈다.”
세자의 담담한 말에 은헌은 고개를 숙여 표정을 숨겼다.
“저하께서 필요치 않으시다면 소제가 그것을 구하고자 하는데 윤허하여 주시겠습니까. 스승님께 최근 중요한 가르침을 얻은 터라 작게나마 보은하고 싶어서요.”
“겸은에게?”
“예.”
은헌은 차마 세자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답했다.
“좋지 않은 생각이구나. 그리고 그것은 내가 서 좌랑에게 가세에 비해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이라 조용히 처분하라 이른 물건이다. 그런 것이 너를 통해 다른 이에게 간다고 하니 썩 내키지 않는구나.”
은헌은 다시 입을 떼려 했지만, 이번엔 세자가 먼저였다.
“은헌. 관심 두지 말아라. 때론 네 호기심이 독이 될까 늘 염려스럽다.”
세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그리고 영상의 일은, 아바마마의 심기가 풀릴 때까진 잠시 거리를 두렴. 너도 어리지 않으니 때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은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자의 얼굴에 웃음이 그득했다. 그 표정을 보며 은헌도 마주 웃었다.
* * *
동궁을 나선 은헌은 여느 때처럼 궐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의 걸음은 궐 안쪽을 향했다.
몇 개의 협문을 지나 안으로 드는 그의 곁으로 어느새 내관 한 명이 따라붙었다. 동궁전 소속의 내관이었다.
조용히 걷고 걸어 인적이 없는 곳까지 들어선 뒤에야 내관이 입을 열었다.
“대감.”
작은 목소리의 부름에 은헌은 앞을 보며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대답해야 할 것이 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무엇이든 하문하시옵소서.”
은헌은 곁눈질로 내관을 보았다.
“춘궁에 서 좌랑이 들었더구나. 금일 말고 또 든 적이 있느냐?”
“두 번 있사옵니다. 그리고 두 번 모두 빈궁저하를 뵈온 뒤 세자저하를 뵈었지요.”
은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몸을 돌려 내관을 보았다.
“참이냐?”
“대감.”
내관은 고개를 숙였다.
“주인이 둘인 자는 궐에서 그리 오래 살지 못합니다. 주인께서 믿어주시지 않는 이도 마찬가지지요.”
세자가 왕의 직속 호위인 금군에 제 사람을 심어두었듯, 은헌 역시 동궁에 저의 눈과 귀를 마련해 두었다. 믿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만약의 일이 생긴다면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그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은헌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서 좌랑이 화국에서 구했다는 함을 들고 궐에 들었다.”
“그 함이라 하시면. 소인이 아는 바로는 첫 번째 방문 때 가져온 것을 오늘 내간 것입니다.”
세자와 내관의 말이 달랐다.
“……그때도 저하께서 서 좌랑을 불러들이신 것이냐?”
“예.”
은헌의 눈이 일그러졌다.
“저하께서 최근 누구를 만나셨는지 내게 소상히 일러라.”
내관은 조용히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죄다 은헌 역시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저하께서…….”
은헌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어째서 세자가 그의 외가와 척진 이들을 죄다 만났는지 물을 수가 없었다. 발아래 디디고 있는 살얼음이 죄다 깨어져 나간 듯했다.
“석삼아.”
은헌은 궐에서 나오자마자 하인을 불렀다.
“예, 대감.”
“네가 좀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구나.”
은헌은 중전인 어마마마께서 그가 어린 시절부터 준비하여 붙여준 하인이자 호위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명하십시오.”
“화국에 다녀온 사신 중 역관 김생과 알고 지낸 이를 찾아보아야겠다.”
그는 고윤이 알아온 죽은 역관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사신으로 간 역관이 한둘은 아닐 테고, 하루 이틀 지낸 것이 아니니 누군가는 알고 있을 터였다. 그 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이다.
“이것도 괜찮은데. 꿈을 담을 수 있는 함이라네. 귀한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담아 선물할 수도 있고. 나쁜 꿈을 담아 적에게 선물하면 조용히 쓱싹하기엔 딱 알맞지.”
하인이 떠나자 은헌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걸음을 옮겼다. 평소처럼 벽동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 한성부 관아가 있는 곳이었다.
고윤은 꽤 심각한 얼굴로 일러줬다.
귀신을 만나는 것 자체가 살아 있는 이에게 해가 되는 일이니 되도록 접촉하지 않는 게 좋다며 말이다.
대군은 그때 고윤이 그에게 가르쳐 주었던 말을 중얼거렸다.
귀신을 볼 수 있을 거라며 알려준 주문을 외기 무섭게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귀에 감겨들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그의 앞에 불쑥 고개를 들이민 푸른 반점이 온몸에 박힌 귀신이 팔을 흔들었다.
“그리 백날을 불러봐라. 산 자가 죽은 자의 외침을 들을 수나 있나.”
옆에서 혀를 끌끌 차는 노인 귀신의 말도 들렸다.
“한 번만 쓸 수 있다더니.”
죽은 역관과 돌아다닐 때, 혹시나 주술이 풀릴지도 모르니 비상용으로 알려준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윤이 또 사기를 친 모양이었다. 그가 다시 한번 더 해볼 거라 생각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아니면 그를 믿었거나.
자신을 비웃으며 은헌은 목적한 곳으로 걸어갔다. 사람으로 넘쳐나는 앞이 아니라 관아 뒤쪽으로 말이다.
고윤은 오늘 쉬는 날이라 했으니 한성부 관아에 없을 텐데도 주변에 귀신들이 꽤 득시글거렸다. 죽었을 때의 모습으로 서 있는 자들은 아주 옛날 의복 차림이거나 엉망으로 찢긴 옷을 입고 있었다. 몸에 상처가 난 자들도 있고 아닌 이도 있었다.
은헌은 그런 자들을 지나 역관을 찾았다. 그늘진 곳에 앉아 있는 멍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가까이 다가섰다.
“지금 시간 되나?”
그가 말을 걸자 역관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제가 보이십니까?”
“잠깐은.”
은헌은 고개를 까닥거렸다.
전엔 고윤이 모든 것을 다 해주었지만, 이번엔 은헌이 해야 했다. 그는 향낭이 든 주머니 속을 뒤졌다.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땅에 묶여 있는 귀신을 끌어당길 수 있다며 고윤이 건넨 실이었다.
겉보기에 일반 명주실과 다를 것이 없었고 그의 손으로도 뚝뚝 끊을 수 있었다. 고작 이런 것으로 귀신을 묶는다는 말에 의심스럽게 한번 당겨보니 쉽게 끊겨 나가 그날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말할 수가 없었다.
고윤에겐 끊긴 실 남은 부분은 잃어버렸다 했지만, 혹시 몰라 은헌은 늘 지니고 다니는 향낭에 갈무리하여 넣어두었다.
“이보오! 자네 우리가 보이는가?”
사방에서 온갖 잡귀들이 다 달려들었지만, 은헌은 무시했다. 대신 그는 죽은 역관 김생에게 실을 내밀었다.
“붙잡아보게.”
실을 귀신에게 묶어준 것은 고윤이라 이것만은 은헌도 방법을 몰랐다.
김생이 팔을 뻗었다. 희뿌연 손이 조심스럽게 실에 닿았다. 가볍게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그는 실을 꽉 붙잡았다.
“당겨보게.”
은헌이 시키는 대로 김생은 실을 잡아당겼다. 늘어져 있던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직접 실을 당겨 손목에 매듭지어 묶은 역관은 이번에 은헌이 데려온 말에 씌었다. 투레질을 연거푸 하며 싫어했지만, 은헌은 말에게 단것을 먹여 달랬다.
역관을 데리고 그는 움직였다.
무언가에 씌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귀신은 말의 꼬리를 붙잡고 조심스레 뒤따라 나왔다. 그렇게 은헌은 사람, 산 자들의 귀가 닿지 않는 곳까지 움직였다.
“여긴 어딥니까?”
역관은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내 집 중 한 곳이라네.”
은헌은 벽동이 아닌 다른 곳에 사둔 작은 거처를 살폈다. 사두기만 했지 직접 온 것은 그도 처음이었다.
초가지붕을 보며 은헌은 웃음을 지워냈다. 표정을 감추자 냉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자네와 말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듯하니 짧게 일러주겠네.”
“예, 말씀하십시오.”
역관은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렸다.
“자네가 찾던 그자, 그날 길에서 보았다던 자가 누군지 알아냈다네.”
은헌은 고민하던 것을 툭 던졌다.
“정말입니까?”
“이제 와 거짓말을 할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렇게 빨리 알게 된 것이 믿기지 않아 제가 실수했습니다.”
귀신은 손까지 내저어가며 다급히 변명했다.
“그자가 누굽니까? 제 가족입니까? 그날 두 번째 봤을 때도 짧게나마 살았을 적 기억이 나긴 했는데. 가까이 지낸 것 같은 느낌 외엔 통 알 수 없어서.”
“그렇군.”
대군은 텅 빈 마루에 걸터앉았다.
“자네는 그자가 누군지 알고 싶다 했지?”
“예.”
“깃털은 그자가 누군지 알려주면 내게 주겠다 했고.”
귀신은 주섬주섬 제 품을 뒤적거렸다. 그러곤 한참을 손을 움직여 품 안을 헤매더니 이내 팔을 밖으로 빼내 손바닥을 펼쳤다.
“지금 드리겠습니다.”
금을 녹여 만든 듯 찬란하고 눈부신 고운 빛깔의 깃털이었다. 선학이라고 들었지만 어떤 모습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은헌은 깃털과 김생을 번갈아 보았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의심의 싹을 틔워 이제까지 참아왔던 모든 것을 터뜨려 버릴 것 같았다.
“깃털 말고 자네가 내게 하나 더 주어야겠네.”
김생은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뭐든 좋습니다.”
은헌은 역관을 보며 조용히 속삭이듯 이름을 일러주었다. 그러곤 귀신의 손에 든 깃털을 가졌다.
죽은 역관의 살 위에 그의 체온이 겹치자 한겨울 냇가에 손을 넣은 것처럼 뼈까지 시렸다. 그런데도 은헌은 깃털을 놓지 않고 꼭 쥐었다.
“바라건대, 기억을 모두 되찾게나. 그리고 내가 묻는 것에 대답 하나를 해주면 된다네.”
그의 말에 김생이 알았다며 대답을 내놓았다.
모든 일이 끝나자 은헌은 대문을 열고 텅 빈 집을 나섰다.
* * *
“자네가 찾는 이는 서갑령이라 하네.”
이름을 듣는 순간 귀신은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번뜩했다.
“무슨 사이였는지는 모르나 그자는 예조의 관리고.”
“세자빈 저하의 오라버니지요.”
기억이 전부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
대군은 그리 말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차가운 눈으로 이곳을 보았다. 귀신은 집의 오른쪽 담장으로 걸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쭉 머물러도 된다는 대군의 허락을 받았다. 하인이 이틀에 한 번 들어 청소한다 하였으나 당분간은 오지 않을 테니 빈집과 다른 것이 없다 했다. 그러니 편히 쓰라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신은 여기가 어딘지 그 짧은 생의 기억을 되찾으며 알았다. 오른쪽 담장에 매달리자 그 너머로 익숙한 곳이 보였다.
서갑령의 집이었다.
* * *
“손님이 오셨습니다. 정 참군입니다.”
은헌은 손을 씻고 소금으로 입을 헹궜다. 물기를 닦아낸 뒤 그는 방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안에 들어 있던 이가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은헌의 얼굴을 살피던 고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지금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자네. 인제 내게 인사조차 하지 않을 텐가.”
꾸짖는 말투로 대답을 피한 은헌은 상석에 자릴 잡고 앉았다. 서 있던 고윤이 그를 보았다.
“대감.”
“도성에서 오는 길이라네. 궐에 들렀다가 집에도 갔다가 말이야.”
“저는 지금 벽동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랬군. 시전에도 들렀다 오는 길이라 엇갈렸나 보네.”
고윤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보며 은헌은 무정한 얼굴을 들었다.
“오늘따라 자네가 내게 궁금한 것이 많군.”
서늘한 목소리에 고윤 역시 비슷한 얼굴로 대군을 보았다.
“볼 줄 아는 이라면 누구나 그리 물을 겁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귀신의 사기에 물든 손을 보면요.”
은헌은 웃음을 흘렸다. 전혀 즐겁지 않은 소리였다. 그 뒤를 이어 들린 낭패감 어린 한숨에 고윤은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곧장 문으로 향했다.
“멈추게.”
은헌이 명했다.
고윤은 우뚝 섰다. 그의 고개가 뒤를 향했다.
“대감.”
“자리에 앉게나.”
은헌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고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정 참군.”
“대화는 나중에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 가보아야 할 듯합니다.”
고윤은 그리 말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리 가도 못 찾을 걸세.”
그의 뒤통수에 대고 은헌은 담담한 목소리로 사실을 일러주었다.
“귀신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자네만이 아니거든.”
고윤은 몸을 홱 돌렸다. 그는 은헌과 눈을 마주치며 몸을 아래로 내렸다. 고윤의 얼굴에도 온기가 사라졌다.
“무슨 짓을 하고 오신 겁니까?”
“짓이라니. 무례하네.”
멱살이라도 잡아 쥐고 흔들고 싶은 것을 참으며 고윤은 숨을 골랐다. 그는 다시금 대군의 모습을 살폈다.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그 얼굴이 정말로 차가웠다. 늘 환하게 웃던 얼굴이라 세상 편해 보였던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새삼스럽게도 그동안 은헌이 얼마나 그를 배려하였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누구를 통해 힘을 쓰셨습니까?”
경내에 그런 힘을 다룰 줄 아는 이는 흔하지 않았다. 고윤은 그자를 찾아 혼쭐을 내줄 참이었다.
“내가 직접 하였네.”
은헌은 숨길 것도 없이 털어놓았다.
오늘은 그의 속에 무언가를 담고 있기에 참으로 벅찼다. 안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죄다 꺼내지 않으면 숨이 턱턱 끊어질 것만 같았다.
“대감께서 직접 말입니까?”
고윤은 못 들을 소릴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 내가 하였네.”
“망할! 어떻게? 아니, 그러니까.”
고윤은 쌍소리를 뱉었다가 흠칫 어깨를 떨곤 다시 입을 열었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닫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짐작 가는 구석이 있으니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은헌이 힘을 사용할 줄 모른다 생각하고, 직접 주술을 일러준 것이 자신이었으니 그의 책임이 컸다.
고윤은 입술을 꽉 물었다가 한숨을 터뜨렸다. 앞뒤 사정 가려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은 좋으나 뒷수습이 문제였다.
“귀신을 다루려면 그에 대한 대가도 함께 치러야 합니다. 특히 죽은 자의 혼백을 좋지 못한 곳에 썼을 때는 그 인과에 따른 죗값 또한 되돌려 받습니다.”
고윤은 팔을 뻗어 대군의 소매를 붙잡아 올렸다. 체온이 사라진 것처럼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사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태연히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터였다. 차라리 손을 잘라내는 게 시원할 정도의 통증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는 은헌의 인내심에 그는 손뼉을 쳐 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귀신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면 그에 대한 인과로 대군이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보다 배는 더 아프게 될 것이 뻔했다.
“죗값이라…… 마치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군.”
은헌은 고윤의 말이 우스웠다.
“억울한 이의 원한을 풀어준 것뿐인데.”
고윤은 손을 떼어내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역관에게 서갑령에 대한 정보를 주셨습니까?”
은헌은 대답 대신 품에서 깃털을 꺼냈다. 가볍고 예민하여 작은 숨결에도 세찬 바람에 그렇듯 휘청휘청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대가로 깃털도 받아 챙기셨고요?”
기도 안 찬다는 듯 고윤이 소리를 높였다.
“처음부터 그리하기로 약조하고 도와준 것이 아닌가.”
어디서부터 잘못했다 일러줘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아 고윤은 앓는 소릴 흘렸다. 그런 고윤을 보며 은헌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낚싯대에 달 깃을 구했으니 잉어를 낚기만 하면 되겠군.”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고윤에게 물었다.
“전에 산신이, 아니지, 산군이 말한 그 잉어가 있는 못은 어딘지 알려주겠나? 이왕이면 오늘 밤 안에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리고 싶은데.”
고윤은 머리끝까지 뻗쳐 오는 울컥거림에 주먹을 꽉 쥐었다.
대군이 잉어를 낚아 그것을 제 손에서 넘겨 받아주고, 그 역관 귀신을 떨쳐 내거나 원한을 풀어 성불하도록 도와주려던 것도 본래 그가 하려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은헌의 몸에는 사기가 깃들었고, 지박령은 원귀가 되어 악귀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부정한 기운이 깃든 깃털로 용을 건드렸다간 하늘의 저주까지 받을 터였다.
엉망으로 꼬인 일을 풀어야 했다.
고윤은 은헌을 서늘한 시선으로 훑었다.
“오늘 밤은 바빠 안 될 것 같군요. 그 지박령에게 서갑령에 대한 일을 일러주신 것만으로 손이 이 지경이 될 리 없으니 근처까지 데려다주셨을 테고. 그럼 그 근방에 있을 테니 찾는 일도 그리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고윤은 또박또박 빠른 어조로 쏘아붙이듯 말을 마치곤 곧장 자릴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선 자리에서 길을 열었다.
“아직 일어나라 하지 않았네.”
은헌도 목소릴 높이며 팔을 뻗어 고윤을 붙들었다. 경계에 휩쓸릴까 봐 평소 같으면 놓고 갔을 테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고윤은 작정하고 은헌을 끌어당겼다. 그리곤 그대로 건너편에 보이는 못에 대군을 처박았다. 거센 물보라가 일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은헌이 그의 팔을 놓았다. 고윤은 몸을 바로 잡고 일어섰다.
인왕산 줄기를 따라 흘러 들어오는 계곡물이 고인 곳이라 물고기도 살지 않을 정도로 시린 연못이었다. 집 뒤뜰의 못 말이다.
고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은 채 못 가운데 선 대군을 보며 빈정거렸다.
“인제 정신이 좀 드셨습니까. 안 드셔도 잠시 그리 계시는 게 좋……!”
은헌은 머리 위에서 조잘대는 고윤의 발을 그대로 후려 찼다. 물속에서 움직이다 보니 찼다기보단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모양새였다.
풍덩! 물기둥이 솟구쳤다. 은헌은 코웃음 쳤다.
고윤은 잠시 허우적대더니 금방 일어섰다. 엉망인 몰골이었다.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퍽!
눈앞에 별이 튀었다. 은헌은 부지불식간에 날아든 주먹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
그는 손목을 털고 있는 고윤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감히!”
그 말에 고윤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러곤 망설이지도 않고 두 번째 주먹을 날렸다. 이번엔 은헌도 그냥 당하지 않았다. 그는 날아오는 팔을 쳐 내고 고윤의 멱살을 붙잡아 당겼다.
턱을 얻어맞은 고윤은 찢긴 입안 상처에서 나온 피를 뱉었다. 안 그래도 돌아간 눈빛에서 온전히 이성이란 것이 사라졌다. 사내놈들이 싸움 나면 주먹질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작정하고 달려들어 은헌의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상투를 쥐고 흔들고, 이로 살을 깨물고 손으로 옷이 아닌 살을 쥐어뜯으며 진창에서 뒹굴었다.
첨벙첨벙 때 아닌 밤중의 물소리에 하인들이 대경실색하여 몰려들었다. 그러곤 정신없이 뒤엉겨 있는 두 사람을 못 밖으로 끌어냈다.
고윤은 하인들에게 붙들린 채 숨을 헐떡였다. 물속에서 격렬하게 움직인 데다 원래 체력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다.
“벨까요?”
마찬가지로 못에서 끌어 올린 은헌의 상처를 확인한 하인이 언제 꺼냈는지도 모를 칼날을 고윤의 목에 들이밀었다.
고윤은 미간을 구겼다.
이 집 행랑채에 거하는 청지기들이 다 젊은 데다 그 손이 육체노동으로만 다져진 다부짐이 아님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으니 더 충격이라 고윤은 실소를 터뜨렸다.
대군을, 왕족을 후려치고도 웃는 그를 보는 하인들의 표정이 살벌했다.
은헌은 부축을 받고 일어나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그는 터진 입가를 닦았다. 그러고 난 뒤에야 그는 고윤을 보았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푸르다 못해 검게 죽은 것 같은 입술 색에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 목에 들이민 칼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고윤은 여전히 그를 질책하듯 보았다.
은헌은 곁에 그림자처럼 선 이를 봤다.
“안채에 군불 때고 젖은 옷을 갈아입게 준비하거라. 따뜻한 것을 가져와.”
“……알겠습니다. 하면 저자는요? 목을 벤 뒤 산에 묻을까요?”
은헌은 고윤을 봤다.
“안채로 옮겨라. 말 안 듣고 도망갈 것 같으면 그대로 후려치고.”
그는 그리 이르고는 몸을 돌렸다. 신은 애초에 신지 않아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물 먹은 버선이 발바닥 아래에서 절벅거리며 물을 뱉어냈다.
* * *
기어코 달아나려다가 재갈 물린 채 안채에 모셔진 고윤은 제 앞에 버티고 선 은헌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그래봐야 입이 끈으로 막혀 읍읍거리는 웅얼거림뿐이었다.
은헌은 눈매를 구긴 채 손을 뻗었다. 그는 고윤이 입고 있는 옷의 고름을 풀어내곤 옷을 벗겨내다가 뒤로 묶인 팔을 보았다.
힐끗 시선을 들어 올린 그는 고윤과 눈을 마주쳤다. 목까지 발갛게 변한 얼굴이 무척이나 화가 나 보였다.
“실례하지.”
은헌은 그리 말하곤 옷을 힘으로 찢어냈다. 투득 터진 솔기를 붙잡아 당기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는 옷에 고윤이 몸부림쳤다. 은헌은 힘을 주어 젖은 옷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며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햇볕에 나간 적도 없는 것처럼 창백한 살결이 점점 드러났다. 바지와 속곳에 버선까지 단숨에 홀라당 벗겨낸 은헌은 이불을 꺼내 고윤의 몸 위에 엎었다.
추위 때문인지 화가 나서 그러는지 하여튼 둘 중 하나의 이유로 고윤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은헌은 발로 바닥에 걸레가 된 천 조각들을 밀어놓곤 그제야 제 옷을 벗었다. 살결에 들러붙은 옷이 물을 잔뜩 머금은 탓에 바닥에 떨어지며 철벅거렸다. 상의를 벗고 그는 마른 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대감, 꿀물 들일까요?”
밖에서 고해 올리는 행랑아범의 말에 은헌은 문을 열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고 들어가겠습니다.”
“되었다. 그건 이리 주고, 다들 물러나거라.”
“하지만.”
“물러나래도. 내 명 없이는 후원에 들지 말아라.”
마당 아래 여전히 칼을 들고 선 이들을 훑으며 은헌은 명했다. 그의 하인들이 전부 호위로 붙은 자들이라는 사실은 누구의 눈에 들켜서도 좋을 것이 없었다.
“명 받잡습니다.”
하인들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은헌은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군불 땔 날씨는 아니지만, 바닥이 더워지니 이불로 둘둘 말아놓은 고윤의 안색이 아까보다 훨씬 나았다.
은헌은 손에 든 것을 바닥에 두곤 고윤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고윤이 눈을 흘겼다. 은헌은 한숨을 내쉬며 재갈을 풀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냥 좀 닥치게.”
은헌은 그리 말하며 손목과 발목 묶은 것을 보았다.
“닥치…… 얼른 풀어주십시오.”
고윤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풀면 또 때리려고?”
“안 합니다.”
“그럼 달아나겠군!”
“이 꼴로 어딜 갑니까!”
고윤은 울컥해 버럭 소릴 질렀다. 은헌의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쓱 훑고 지나갔다.
“그리 다니면 부끄럽긴 하겠구먼.”
고윤은 이를 꽉 깨물고 울화통을 참았다. 은헌은 그런 그를 보며 가라앉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망치지 않겠다 약조해 주게.”
고윤의 눈꼬리가 바짝 치켜 올라갔다.
“집으로도.”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은헌은 조심스럽게 고윤의 손목을 묶은 매듭을 풀었다. 발목까지 풀리자 고윤은 지금의 상황에 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분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온통 의문들만 남았다.
그는 허탈한 심정으로 은헌을 보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처음부터 이리 물었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뭘 했는지 묻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기에 평상시 화라곤 없어 보였던 대군이 그랬는지 원인부터 캐물었어야 했다.
은헌은 젖은 바지를 마저 벗고 남은 이불을 꺼내 몸에 둘렀다. 고윤과 비슷한 몰골로 앉은 그는 조용히 꿀물이 든 대접을 당겨와 내밀었다.
“들게.”
“대감!”
답답함에 고윤은 재차 입을 열었다.
“마시면서 듣게.”
은헌은 지친 목소리로 말하며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은헌은 궐에서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하여…… 이제는 이런 식으로든 찾아오지 않는 게 자네에게도 더 좋을지 모르네.”
부왕이 문제가 될 때는 분명 세자가 도와줄 거라 믿었던 은헌은 혀를 찼다. 이젠 그것조차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확인해 보고 싶으셨습니까.”
고윤은 조용히 물었다.
믿음이 배신당한 건지, 땅인 줄 알고 안심하여 딛고 서 있던 것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를 살얼음판 위였는지를요.
그는 헛숨을 삼켰다.
궐에 그런 물건이 들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것을 세자가 궐에 들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또한 말이다.
“내가 아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이 죽었다는 거라네. 그 함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르는 사람이 말일세.”
은헌은 그래서 망설임을 버렸다. 어디까지 흘러가든 끝을 보고 싶었다. 좋은 방향이든 혹은 나쁜 방향이든 모든 일에는 결국 마지막이란 게 있었다.
“하신 일에 이유가 있다는 것은 알겠으나 방법이 나빴습니다. 아니, 좋지 않았습니다. 꼬인 실을 푸는 데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고, 경우에 따라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그리하면 내 목에 칼이 채워진 채 소달구지에 올라 멀리 탐라까지 실려 가거나 사약 받는 일이 없어진다 하던가? 나만 그리되면 모를까. 자넨 적어도 저잣거리 한가운데서 능지처참이라네.”
은헌은 희망을 꿈꾸지 않았다.
기대란 것은 늘 결과가 잔혹한 법이었다.
“아바마마께선 빈궁 저하를 포기하지 않으실걸세. 그게 그분의 올바름이시니. 대신 그 옳음에 가장 방해가 되는 날 치우실 테지.”
이미 경고를 받았다.
영의정과 무슨 관계인지, 일을 꾸미는 것은 아닌지, 궐내에 비호 세력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어째서 영의정의 막내아들이 세자빈의 사가를 조사하는지도 말이다.
오이 밭에선 갓끈도 고쳐 매지 말라더니 빼도 박도 못 하고 경계심만 키워놓았다.
고윤은 은헌의 상황에 뭐라 어쭙잖은 위로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귀신은…… 그런 종류의 원한을 맺는 귀신을 움직여선 안 되었습니다. 산 자의 일을 죽은 자에게 떠넘기면 뒤탈이 더 큰 법이지요.”
그는 대군의 손을 보았다.
“그게 최선이었네. 자네도 나도 이제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될 테니. 분명 자네에게도 감시가 붙었을 거네.”
고윤의 재주가 왕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럼 분명 왕은 비방을 놓았단 이유로 고윤을 붙잡아 들일 터였다. 죄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 능력은 말이다.
“영상이 부른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은헌은 고윤이 본가에 가기 위해 쉰다 했을 때부터 그리 짐작했다.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해도 어느 곳과도 연이 없거나 어느 곳이든 연이 닿아 있을 때나 유지할 수 있는 거였다.
고윤은 미간을 구기며 혀를 찼다.
“뭐…… 그런 것도 있긴 있었겠죠.”
그도 그런 것 때문에 불린 게 아닐까 염려했기에 애써 생각한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니 차라리 비방했느냐는 추궁받는 게 기분은 훨씬 나았을지도요.”
이번엔 은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역모죄로 가문을 풍비박산이라도 내고 싶은 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감과 서로 연모하는 사이냐 추궁받는 것보단…….”
고윤은 휘둥그레 커진 은헌의 눈동자를 힐끗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그보단 나은가 했는데. 그래도 그쪽은 살아 이승에 있을 가능성이라도 있군요.”
그만 죽는 것도 아니고 왕이 작정하고 모함하면 구족이 멸족이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잔뜩 달아오른 귀를 감추지도 못하고 은헌이 버럭 내지르듯 물었다.
“자네와 내가…… 그! ……그!”
은헌은 차마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버벅댔다.
“예…… 뭐 그렇고 그런 사이요.”
고윤은 낮에 느꼈던 참담함을 다시 되새김질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대체 왜? ……어디서부터 그렇게 보여서?”
은헌은 심히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그 심정을 알기에 고윤은 되레 담담했다.
“손잡고 저잣거릴 같이 돌아다니는 것을 누가 본 모양입니다.”
“그야!”
“대감께서 저를 업고 집까지 바래다준 것도요. 게다가 저한테 일전에 구경시켜 준 답례라며 선물도 보내셨지 않습니까.”
“그게 그러니까 재미난 것을 보았으니 고맙다는 말 대신.”
“먹을 것도 보내시고요, 궐에서 나온 것들로. 거기에 더해 이 집 저 집 번갈아 자고 다녔지 않습니까.”
사실만 나열한 것뿐인데 그게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은헌은 제가 느끼는 이상함이 뭔지는 모르지만, 급히 입을 열었다.
“그거야 벗이니까!”
“벗이요?”
고윤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렇네! 친하면 보통 그 정도는…… 하지 않는가?”
고윤의 반문에 그렇다고 말하려던 은헌은 머뭇거리며 말을 매듭지었다.
“제게 물으셔도…… 어릴 적부터 이 모양이었던 터라.”
벗이라곤 붙을 새도 없이 죄다 떨어져 나갔다. 고윤은 콧등을 찡그렸다. 그는 서당과 향교를 거쳐 성균관까지 들어갔지만, 여태껏 벗 하나 없는 자신의 인생을 잠시나마 반성했다.
“그야 나도 벗은 없지만.”
어릴 적부터 말벗으로라도 붙여진 이가 없는 은헌 역시 미간을 구겼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 그런 오해를…….”
고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집을 나올 적에 혼사 들어온 것도 일방적으로 물리고 나왔던 터라.”
“그게 왜?”
은헌은 순수한 의문을 담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윤은 구들장이라도 꺼뜨릴 기세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지금 세자빈 저하께서 간택령이 내려져 간택당하신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정혼으로 용상께서 직접 혼사를 청하셨음을 알고 계시지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은헌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이유는 알고 계십니까?”
당시 세자빈의 부친은 홍문관의 관리로 권세도 없었다. 그런데도 왕은 세자의 혼사를 밀어붙였다.
“그러니까 분명 그해, 날, 시를 맞춰 왕후의 사주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기에 무사히 다섯 해를 지나면 혼례를 치르자고 정혼을 했지.”
그래서 세자빈 되시는 분은 세자와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다.
고윤은 은헌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시에 도성 안에 태어난 아이가 하나 더 있음은 알고 계십니까?”
은헌이 멈칫했다.
“타고나길 사내아이라 용상께 간택받지는 않았지만요. 아버님 말씀으론 태어나기 전까지는 여식이라 생각하고 어머님의 태교에 중궁전의 상궁이 훈육 상궁으로 붙었다 하더군요. 중궁전에서도 실제로 혼사에 관한 말을 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여아로 태어나면 어쨌든 궐 담장 안에 들어가서 살 팔자라 했었습니다만.”
고윤은 그리 말하며 픽 웃음을 흘렸다.
“타고난 팔자가 그러하고 제게 이런 재주가 있으니 사람과는 인연이 없는 줄로만 알았지 뭡니까. 그래서 집에서 나올 때 어차피 정해진 분과는 연이 없을 것 같으니 혼자 살겠다고 했지요.”
은헌은 아연한 얼굴로 고윤을 보았다.
그 이야기 속의 사내아이가 누군지는 뻔한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세자빈이 세자와 혼담이 복중에서부터 오간 것처럼 중궁전에서 혼담을 넣었을 쪽이 누군지도 뻔한 이야기였다.
“설마 날 핑계로 혼사를 거절한 건가?”
“가장 빠른 길이 있는데 뭐 하러 둘러 가겠습니까.”
은헌은 한숨을 터뜨렸다.
세자는 어린 나이에 정혼했고, 은헌은 부인을 두 번이나 들였지만, 죄다 역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중전조차 연이 없는가 보다 하여 놔뒀던 거였다. 애꿎은 처자 죽이기도 싫고 인제 와 혼인을 치러봐야 부왕께 거슬릴 것이라는 핑계를 대고 말이다.
은헌은 그 빈자리를, 저가 정말로 임자일 수도 있고, 애초에 사내 둘이라 어차피 안 될 거란 핑계를 대고 독립한 고윤을 흘겨봤다.
“농을 할 게 따로 있지!”
그러니 영의정이 혹시나 한 것일 터다.
“저도 몰랐잖습니까. 이렇게 될 줄은. 그 말을 아버님께서 여태 간직하고 계신지도 몰랐단 말입니다.”
고윤도 할 말은 있었다.
“게다가 사내로 태어났는데 제가 무슨 수로 왕후가 됩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냥 그렇구나 하고 앞으로 조심하면 됩니다. 벗이 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면서요.”
“벗이 없어서 보통이란 것을 모르니 문제지.”
“아…….”
친구 없는 서러움이 갑자기 확 밀려왔다.
“어쨌거나 사연은 잘 알았으니 이제 옷이나 내어주십시오. 그 지박령은 오늘 내로 잡아 처리해야 합니다.”
고윤은 그리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은헌이 그 빈손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됐지만 지금은 불가하네. 통행 시간도 지났고, 부왕께서 자네가 서갑령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잘도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봐주시겠군.”
이미 그쪽에도 사람이 다 붙었을 터였다. 대놓고 찾아가 봐야 엉뚱한 불똥만 튄다.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나저러나 외통수였다.
“오늘 안에 허튼짓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요.”
이 밤만 무사히 넘기면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 은헌은 그 말에 제 두 손을 들어보았다. 사기가 닿아 시커멓다는데 그의 눈에는 그저 저의 손이었다.
* * *
역관은 담에 매달렸다.
이상하게 담을 넘어갈 수가 없었다. 대군이 내어준 이 집터가 그가 갈 수 있는 전부라도 되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손톱을 담벼락에 박아 넣고 힘을 주어 버텼다.
서갑령을 만나야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봐야 했다. 그는 담장에 매달려 아등바등하였다.
“제길!”
조금만 더 하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그게 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 기억은 여전히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것 중엔 서갑령과 상관없는 기억도 많았다.
“아버지!”
작은 손이 그의 바지를 붙잡았다. 화국까지는 험하고 먼 길이었다. 풍토병도 많다 했다. 별 탈 없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하여 아내는 몇 날을 밤새워 수놓은 호부를 그에게 내밀었다.
김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것도 그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째서 그들보다 서갑령을 먼저 떠올린 걸까. 그는 그게 제 원한이 아닌가 했다. 저승길 올라갈 발목을 붙들어 저잣거리에 잡아매어 놓은 그 원한 말이다.
원한을 풀고 기억을 다 되찾으면 집까지 돌아가는 방법도 알게 되겠지.
“준비되었느냐.”
역관은 움찔, 머릴 쳐들었다.
집 뒤쪽 뜰, 담장이 가까운 곳으로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절대 사람에게 업혀 들어가는 짓을 해선 안 됩니다.”
대군의 곁에서 그를 풀어준 한성부 관리가 그에게 충고한 것이 머리를 스쳐 지났다. 그도 잔치 같은 번잡한 곳에 갔다가 객귀 들려온 사람을 종종 보아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사람의 상태가 순식간에 나빠져 금방이라도 숨이 끊길 듯 헐떡거리는 이웃을 보았다.
“업히는 순간 산 자를 해한 것이 되어 악귀가 되는 겁니다.”
진중한 얼굴로 던진 충고에도 계속해서 충동이 일었다. 아주 잠시만, 정말로 잠시만 업히면 담을 넘어 저쪽 집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말이다.
어지러운 그의 심정과 비슷한 여러 개의 부산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달려왔다.
“서갑령!”
그 선두에 나선 이를 본 역관의 눈이 커졌다.
서갑령은 피곤한 얼굴로 담장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멈춰 섰다. 그는 손에 작은 보따리를 하나 움켜쥐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눈에 익었다. 그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제 되었으니 물러나게.”
“아이고, 나리. 저희가 하겠습니다.”
“물러나라 하지 않는가.”
신경질적인 태도로 서갑령은 자신을 따라 나온 종을 돌려보냈다. 그는 주위를 비우곤 손에 든 것을 한쪽 팔로 받쳐 들곤 위쪽 매듭을 풀었다.
역관은 핏발 선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재수가 없었던 게지…… 하.”
보따리에 감쳐져 있던 것은 작은 함이었다.
“이것을 사 가시려오? 이쪽은 다루기가 무척이나 힘들 텐데?”
두꺼비를 닮은 방물장수가 저것을 그에게 팔았다. 아주 이상한 거리에 있는 가게였다. 어떻게 그 골목에 발을 들였는지는 모르나 그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문을 연 가게를 홀린 듯 찾아 들어가 저 작은 함을 샀다.
그리고 팔았다.
남에겐 절대로 넘겨서 안 된다며 방물장수가 말하였으나 서갑령이 웃돈을 얹어서라도 사겠다 했다.
세자빈의 하나뿐인 오라비였다.
그래서 내주었다.
역관은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 뒤엔 어떻게 되었지?
귀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서갑령은 자물쇠가 채워진 함을 파놓은 구덩이 안에 집어넣었다.
“사람 잡는 흉물인 줄 알았으면 그리 사지 않았을 텐데.”
“남에게 넘기면 죽을 수도 있소. 이것은 액운을 담아두는 그릇이니까.”
그 방물장수의 말을 가벼이 여기지 않아야 했다. 어째서 그 말이 지금에 와서야 떠오른 걸까.
역관은 서갑령을 보았다.
더럽고 불길한 것을 만지듯 함을 흙구덩이에 넣고 그는 그 위로 흙을 덮었다.
“이것 때문에 저하께 혼나고 누이에게도 혼나고. 이게 다 무슨 꼴이냐. 하필이면 또 그것을 대군에게 들켜서는 내 뒤를 캔단 말인가. 그 역관이 죽은 것이 내 탓도 아닌 것을.”
그 순간 역관은 담을 넘을 수 있었다. 단단한 돌 위로 손톱자국이 길게 그어졌다.
인간의 몸은 따뜻했다.
살아 있을 때는 전혀 알 수 없던 온기가 밀려들었다. 역관은 손을 들었다. 그러곤 흙을 다시 파냈다. 힘을 줘 파내자 딱딱한 것이 손끝에 금방 걸렸다.
그는 히죽거리며 함을 꺼냈다. 겉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낸 그는 자물쇠를 확인했다. 본래의 자물쇠였다. 기억나는 대로 손을 움직여 그는 잠긴 것을 풀었다.
“그래. 이것도 내 탓은 아니라오.”
역관은 저가 들어온 몸 주인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곤 웃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함을 열어젖혔다. 까만 것들이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쳐 날아갔다.
역관은 그것을 보며 히죽거렸다. 가늘어진 눈매 속에 귀기 어린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은헌은 따뜻한 것을 붙잡았다.
저 먼 머리 위로 깨진 틈새가 보였다. 그는 그제야 저가 있는 곳이 얼어붙은 못 아래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것이 언제 적의 기억이었더라, 궐에서 나오기 전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꺾어 들었다.
얼음만큼이나 차가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는 부왕이 보였다.
왜 그리도 그를 싫어하는지 언제고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세자 형님도 그도 당신의 핏줄을 이었는데 아우인 그는 어찌하여 사랑받지 못하였나.
그는 점점 얼어붙어 가는 몸을 녹이려 품에 안은 것을 더 꽉 끌어안았다. 캄캄하고 시린 세상에서 느껴지는 유일한 온기였다. 그것이 버둥대자 그는 팔에 힘을 줘 붙들었다. 그러자 이내 버둥거림이 사라졌다. 그는 온기에 기대 눈을 감았다.
까무룩 하게 잠들었던 고윤은 답답함에 몸을 뒤척였다. 잠든 사이 망태기에 담겨 어디로 옮겨지는 것도 아닐 텐데 온몸이 꽉 조이고 있었다.
대군의 얼굴을 쳤다고 이놈의 하인들이 그를 정말로 산속에 묻기라도 했나 싶었다.
그는 힘겹게 눈을 떴다. 턱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자 코도 보였다. 그의 턱과 코는 제자리에 얌전히 있을 테니 눈알에 발이 달려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면 코앞에 있는 저 얼굴은 다른 이의 것이었다.
고윤은 눈을 깜박거렸다.
힘겹게 숨을 내쉰 뒤 그는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몸을 붙잡고 있는 팔과 다리가 그를 옥죄듯 감싸 안았다.
“컥!”
숨쉬기조차 어려워져 그는 팔을 꼼지락거렸다. 그의 허리와 목 아래 베개로 받치고 있던 팔이 비슷하게 움직였다. 허릴 끌어당긴 팔이라도 떼어내고자 했는데 옆에 모로 누워 있던 훨씬 큰 덩치의 몸뚱어리가 그의 위로 타고 올라왔다. 고윤은 부지불식간에 깔려 앓는 소릴 냈다.
남의 살결에 이리도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누가 보면 정말로 오해하기 좋은 자세였다. 목덜미에서 흩어지는 숨결이며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와 체온 그리고 허벅다리 위에서 느껴지는 조금씩 꿈틀대는 듯한 묵직한 것이라거나 하는 것들이 말이다.
성균관 학재 시절에도 분명 동기와 같이 방을 나눠 썼었는데 이리 깬 적이 없었다.
“잠버릇이 무척 고약하구먼.”
그는 머리카락과 뒤통수만 보이는 은헌의 아래 깔린 팔을 끙끙대며 겨우 위로 빼냈다. 잠깐 껴 있었는데도 팔이 저릿했다. 피가 그리로 다 쏠렸는지 머리가 어질했다.
“대감.”
그는 자는 이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대감!”
몸이 움직일 때마다 샅을 파고 들어오는 방망이 같은 것이 몹시도 신경 쓰였으나 그는 멈추지 않고 대군의 잠을 깨웠다.
일어나란 말을 하며 흔들수록 몸 위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졌다. 얼굴 위로 드리워진 하얀 얼굴이 고윤의 붉어진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가 잠에서 깰 때 그러했던 것처럼 긴 속눈썹 위로 얇은 눈꺼풀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응?”
풀려 있던 눈동자의 총기가 돌아오며 눈동자 색이 순식간에 짙어졌다. 순식간에 후다닥 몸을 뒤로 물리는 은헌을 보며 고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뱉었다. 그러곤 상체를 일으켰다. 어제 찬물에 몸을 담근 채 치고받은 여파가 인제야 온 건지 온몸이 욱신댔다.
끙, 여차, 괴상한 소릴 내며 고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넋 나간 얼굴로 앉아 있던 은헌이 그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빗겨 나갔다. 서로 등 돌리고 앉은 채 둘은 한참이나 헛기침을 뱉었다.
밖에 알리자 소셋물이 들어왔다.
어젯밤까지 목에 칼을 들이밀고 죽이면 안 되냐 허락 구하던 이가 공손히 고윤의 수발을 들었다. 어색했으나 고윤은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굴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은헌에게 쏠려 있었다.
어제는 손목까지만 새까맣더니 아침에 눈을 뜨니 팔 전체가 사기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바람과 달리 귀신이 밤에 무슨 짓을 했단 소리였다. 시리고 쑤셔 손에 마비가 올 지경일 텐데도 은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느긋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역시 내 옷이라 큰 건가?”
“뼈대부터 품이 차이 나니까요.”
어깨가 무슨 소매 중간까지 내려와 손목이 아예 가려졌다. 고윤이 작은 편도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하인은 솜씨 좋게 소매를 정리해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어줬다.
고윤은 빌린 갓을 쓰고 갓끈을 정리했다. 평소 걸치던 것과 다르게 화려한 문양의 비단이 낯설었으나 품이 넉넉하여 편했다.
은헌의 의관 정제가 마무리되자 고윤은 기다렸다가 손을 뻗었다. 그는 입안에서 소리를 굴려 주를 외웠다. 은헌은 제 손목을 붙잡고 미간을 구긴 채 입술을 오물거리는 고윤을 살폈다. 아침에 눈 떴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는데 어린 시절부터 혼자 지내다 보니 누군가를 곁에 두고 잠든 것도 처음이었다.
“아프십니까?”
“응?”
은헌은 허둥지둥 상황을 파악했다.
“손가락뼈 마디마디 쑤실 텐데요.”
그 통증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고윤이 물어왔다. 은헌은 그제야 제 손을 살폈다. 고통이 그새 둔화한 건지 견딜 만했다. 참는 데는 이골이 나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괜찮네.”
고윤은 그의 대답이 썩 성에 차는 것은 아닌지 한쪽 눈썹을 들썩거렸다.
“당장 급한 처치만 해둔 겁니다.”
제대로 처치해 두면 팔에 문제는 없을 테지만, 지금은 그 역관 귀신의 일이 더 시급했다.
“귀신을 붙잡으면 더 나아질 거고요.”
은헌이 픽 웃었다.
“아직 그곳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아직 있을 겁니다. 사람에게 씌면 짐승에게 붙는 것과 달리 쉽게 벗어나지는 못하니까요.”
고윤은 한숨을 쉬고 재빠르게 대답했다.
은헌은 개나 말에 씌었다가 금방 나왔기에 사람도 그럴 줄 알았다.
“못 나오면 어찌 되는가?”
“생기를 빨릴 테니 앓다가 죽겠지요.”
은헌의 표정이 굳었다.
밖으로 나오자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 필입니까?”
안장 얹은 것이 하나뿐이라 고윤은 하인을 봤다. 밉보였다고 저더러는 걸어가란 소린가 싶어 말이다.
“송구합니다. 한 녀석이 앓아누워서요.”
“어제 끌고 나간 놈이 말이냐?”
은헌의 물음에 하인이 그렇다며 대답했다. 고윤은 한탄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내쉬고 은헌을 흘겨보았다.
“말에 태우셨습니까?”
“개는 키우지 않아서.”
선택지가 없었다. 게다가 다른 이의 눈에도 띄지 않아야 했으니 말이 가장 적당했다.
“잠시 오한을 앓는 것이니 두터운 것을 덮어주고 뜨거운 것을 적당히 식혀 먹이면 괜찮아질 거네.”
고윤이 하인에게 그리 이르자, 그는 은헌을 보며 허락을 구했다. 은헌은 그대로 하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나저나 이건 대감께서 타셔야 하니,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일러주시면 근방으로 가겠습니다.”
고윤은 문을 열 생각이었다. 은헌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 어제 도성 밖에 나와 잔 것을 벌써 다들 알고 있을 테니 그냥 말을 타고 가는 게 안전하네.”
“저더러 어디에 타라고요.”
“내 앞에. 사내 둘은 무겁겠지만, 군마로 키우던 것이었으니 뭐 어찌 되겠지.”
은헌은 그리 말하곤 편자에 발을 걸고 가뿐하게 말 위에 올라탔다.
고윤은 영 내키지 않는단 얼굴로 은헌과 말을 번갈아 보곤 한숨과 함께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붙잡아 은헌이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무게가 실리자 말이 투레질 쳤으나 토닥이는 손길에 이내 얌전해졌다.
“너희들은 벽동으로 가 있거라.”
평상시라면 하인들도 같이 움직여야 했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호위 겸 하인인 이들이 고개를 숙이자 은헌은 말고삐를 움켜쥐고 박차를 가했다. 멀리 갈 때는 길을 열고 다니는 게 편해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고윤은 익숙지 않은 높이에 몸을 잔뜩 굳혔다.
은헌은 바싹 얼어붙은 고윤을 팔로 붙잡아 잘 고정해 놓고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뿌옇게 일기 시작했다.
고윤은 멀리서 봐도 심상치 않은 사기에 혀를 내둘렀다. 창의문을 지나 연화방 3)까지는 금방이었다. 세자빈의 사가가 멀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가까웠다.
은헌은 쓰지 않는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 말부터 묶었다. 고윤은 담장 하나를 두고 거의 붙어 있는 집을 살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사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여긴 어딥니까?”
“내 집이라네.”
은헌은 입을 꾹 다문 채 선 고윤을 보며 픽 웃었다.
“자네도 집이 여러 채지 않은가?”
“한두 칸짜리 초가집 서너 채랑 같은 저울에 놓기엔 지나치게 상대가 안 되는데요.”
널찍한 마당에 도성 길 다니기 좋은 목에 자리한 집과는 더더욱 말이다.
“뭐, 우연히 사둔 곳이고 사정상 쓰지 않고 있다네.”
은헌은 그리 말하며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옆집을 향했다. 아마도 저 댁에 들르는 즉시 그의 행적에 관한 보고가 올라갈 거고 궐에선 점심나절이면 그가 뭘 했는지 다들 알게 될 터다. 신경 쓰이지 않는단 건 아니었으나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가세.”
은헌은 저가 벌인 일의 결과를 보아야 했다. 귀신이 무언가를 기억해 냈다면, 그것이 세자와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서갑령의 집에 들어가기는 쉬웠다.
은헌이 제 신분을 밝히자 하인들이 공손히 그를 모셔 갔다. 고윤은 안으로 들수록 매캐한 느낌에 숨을 가쁘게 골라냈다. 불이 난 곳에 들어간 듯 숨쉬기가 번거로웠다. 결국, 그는 밭은기침을 했다.
은헌이 걱정스럽게 그를 살폈다. 고윤은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사랑채까지 도착하자 시커먼 연기에 가려진 것밖에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인은 서갑령이 있다는 방문 앞에 서서 대군이 찾아왔음을 고해 올렸다. 뒤를 보며 은헌의 눈치를 슬쩍 보는 모양이 꽤 긴장된 모양이었다.
“나리 은헌대군 대감께서 드셨습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지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은헌은 하인이 다시 고하기를 기다렸다. 두 번째로 불렀을 때도 대답은 마찬가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웃는 얼굴로 섬돌 위에 올랐다. 신을 내던지듯 벗어 던지고 그는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방 안에 앉아 있던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고갤 들었다.
“나리!”
“되었네.”
당황한 종을 서갑령이 물러나게 했다.
은헌이 이미 쳐들어간 모양새라 고윤은 망설이지 않고 뒤따라 마루 위에 올랐다. 이른 아침부터 갑작스레 찾아와 무례하게 굴고 있는 둘을 보는 서갑령의 시선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했다.
“사람의 몸은 피하라 일러줬거늘.”
고윤의 말에 서갑령의 입꼬리가 찢기듯 올라갔다.
“보이십니까?”
서갑령, 아니, 김생은 금방 들킨 것이 재미없다는 듯 목소리를 굴렸다.
은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의 얼굴과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를 대하는 태도만 아니라면 겉으론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가 깨져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악귀라면 당연히 보이네.”
고윤은 까칠한 태도로 대답하곤 팔을 뻗어 방문을 닫아걸었다.
어차피 인간의 육신 안에 갇혀 있으니 몸만 막으면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는 문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숨을 내쉬는 동안 외우는 주와 들이마시는 숨에 담긴 사기가 부딪쳐 창문도 열지 않은 방 안에 바람이 회오리쳤다. 바람이 가라앉고 나서야 고윤은 조금 전보다 편안한 얼굴로 역관을 보았다. 그리고 몸에서 튕겨 나와 일그러진 몰골, 아니, 기괴한 모습으로 겨우 매달려 있는 서갑령의 혼백도 보았다.
고윤의 시선이 닿는 곳을 알아챈 역관은 웃음을 흘렸다. 킬킬거리며 즐겁게 웃는 것에 은헌은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고윤의 앞을 막아섰다. 살결이 저릿했다.
“꼴이 사납지요,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역관은 혀를 차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은헌은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윤이 알려준 방법을 사용하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저 인간의 육신만 보았다.
“이유가 뭔가? 역시 원한이었던가?”
“글쎄요?”
은헌은 묻고 역관은 쉽게 답하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것을 정확히 무어라 말로 풀어낼 수나 있겠습니까.”
역관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윤은 서갑령의 혼이 내지르는 비명에 재빨리 귀를 막았다. 인간에게 닿지 않는 소리가 그에게는 지나치게 잘 들렸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이대로 두면 며칠이 아니라 오늘 내로 서갑령은 죽을지도 몰랐다.
“이만 나오게.”
그는 역관과 시선을 곧게 마주쳤다. 붉은 귀기가 흐르는 것을 보아하니 아직 악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도 시간문제였다.
“그 몸의 주인과 같이 죽어봐야, 저자는 저승으로 그대는 또다시 원귀가 되어 이승에 남을 뿐이야. 아님 그 전에 소멸할 테지.”
사람을 해치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물리칠 수가 있었다. 악의가 쌓인 것들은 본래 세상에 알려진 대로 낮에는 힘을 못 쓰니 지금이 기회였다.
“저는 죽어 저잣거리에 매인 몸이 되었는데 이자는 죽어 저승에 가는 겁니까?”
역관은 실소를 터뜨렸다.
“귀신 팔자도 생전 누린 권세를 따라가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있나. 그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저주로 죽은 이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의 차이지.”
고윤은 되레 빈정댔다.
“억울해요? 이자가 말입니까? 이자는……. 그렇죠. 서갑령도 그리 지껄였습니다. 내 죽음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니라고, 재수가 없어 그리되었다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귀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저도 의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는 언제 끝날지도 모를 긴 시간을 거리에 묶여 살아가야 하는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잃어버린 채 말이다.
역관은 이 몸에 들어앉아서라도 집으로 가보려 했다. 그의 아내와 자식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육신을 지니고 있음에도 이 망할 놈의 담장을 넘지 못했다. 대문까지만 나서면 발이 묶인 듯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집에 가겠다 하였는데. 아이가 좋아할 것들도 잔뜩 사뒀는데.”
귀신의 감정이 요동치자 서갑령의 혼은 이제 종잇장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고 싶다면 보내주겠네.”
뒷짐 진 채 고윤과 귀신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은헌이 제안했다. 고윤이 홱 하고 돌아봤다.
“집으로 가고 싶다면 데려다주지. 하니 자초지종을 알려주게. 잊지는 않았겠지? 어제 내가 이리로 자넬 데려와 당부하지 않았던가.”
역관은 은헌을 보며 히죽 다시 입꼬릴 끌어 올려 웃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기억해 낸다면 묻는 것에 그 답을 알려달라 하셨지요. 무엇이 알고 싶으십니까?”
“자네가 서갑령에게 주었다는 함, 그 함을 어디서 구하였는가?”
긴 이야기라면서 역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중촌 사람으로 집안 대대로 역관 일을 했다. 어렸을 적부터 배운 것이 화어라 사신단이든 상단이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달려가 통사 노릇을 하여 밥벌이했다.
작년에 꾸려진 사신단은 그에게 좋은 기회였다. 이제야 걸음마를 뗀 큰 아이를 두고, 다시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는 처를 두고 그는 큰돈을 벌어오겠다. 굳게 다짐하며 길을 나섰다.
가는 데만 반년이 걸리고 오는 데 또 반년이 넘는 긴 육로를 따라 그는 멀리멀리 걸어갔다. 도착하여서도 잠시 쉴 새도 없었다. 관리들은 중인을 무시하여 하인 부리듯 일을 떠넘기기 일쑤였다. 역관 중에서도 가장 젊었던 그는 남들보다 더 부림을 받아야 했다.
돈을 벌 요량으로 은전을 구해 시전에서 장삿거리, 팔 물건이 될 것을 찾을 시간도 없었다. 돌아오기 전 겨우 하루 짬을 내어 그는 이 골목 저 골목 쏘다니다 이상한 골목에 발을 들였다.
머리 위로 홍등이 붉게 걸려 있고, 대로변 이 층짜리 신기한 가게들이 차고 넘치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 텅 빈 골목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두꺼비를 닮은 방물장수를 만났다.
그리고 함을 샀다.
곁에 두고 자면 좋지 않은 것들이 그리로 모여 잠을 편히 자게 해준다는 물건이었다.
방물장수는 그것을 팔며, 한 번 주인이 정해진 것이니 남에게 함부로 넘겨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 귀물이 사신단 내에서도 제일 끝바리인 그의 손에 얌전히 남아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서갑령이 탐냈군.”
역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더 큰 금액에 그는 한 번 거절하였으나, 두 번째 제안에는 거절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돈과 상자를 교환했다. 그리고 사신단이 귀국하고 며칠 뒤 거리에서 죽었다. 아무도 그의 머릴 치지 않았는데 머리가 깨진 채로 말이다.
“상자 안에 담긴 것이 액운이라고?”
“뭐 그렇습니다.”
고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은헌은 입술을 다물었다. 세자는 분명 그 물건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고 있는 듯 말을 했다. 그에게 호기심이 과하면 화를 부를 거라는 충고까지 던지었으니 말이다. 정말로 그리 쓰려고 서갑령을 궐에 들인 것인가, 그는 그저 아니기를 바랐다.
“내가 알기론 좋은 것도 담을 수 있는 것인데.”
두꺼비 상인은 은헌에게 귀한 것과 나쁜 것 둘 다 담을 수 있는 함이라 했다. 나쁜 것을 담으면 남을 해치는 것이 된다는 말도 말이다.
“그런 것도 담을 수는 있다더군요. 하지만 잠을 못 자 퀭한 정신머리에 뭐 따로 있겠습니까.”
은헌은 생각지도 못한 맹점에 혀를 찼다.
“그래서 그 상자는 어찌했나?”
고윤은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액운이 든 상자다. 그걸 주인이 아닌 자가 곁에 끼고 있다면 재액을 옮기는 저주가 된다.
“버렸습니다.”
역귀의 말에 고윤은 은헌을 보았다.
“서갑령이 저하께 함을 받았다 했으니 지금 당장 궐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은헌은 고윤의 말에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 말은 저하께 무슨 변고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소린가?”
“확실치는 않지만요.”
그 말을 하며 고윤은 역귀를 봤다. 그의 눈이 매서워졌다.
“가기 전에 일단 할 것부터 하지요.”
“무슨?”
은헌은 당장 밖으로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그 상자의 주인은 이자입니다. 죽었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승에 발이 묶인 지박령이기 때문에 더 문제였다.
“상자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주인을 바꾸면 됩니다.”
“무슨 수로?”
“있는 주인을 치워내는 수로요.”
고윤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어의란 말에 객귀의 얼굴이 바뀌었다.
“날 쫓아내려 하오?”
“그럼 천년만년 여기 눌러앉으려 했나?”
가당찮은 소리라며 일축하고 고윤은 필요한 것들을 소매에서 하나씩 꺼냈다.
“아침에 바삐 챙기던 것이 그것이었나?”
고윤은 날 선 식칼과 팥이 든 주머니를 꺼냈다.
“본래 절차가 더 복잡하긴 한데 간략하게 하죠.”
팥 주머니를 본 귀신이 뒤로 물러났다.
“나는 가기 싫소.”
“평생 여기저기 싸돌아다녔으면서 인제 와 한곳에 머물러 뭣 하려고?”
“집이 좋은 줄 죽어야 알았으니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의 그 귀중함을 죽고 나서야 역관은 몸소 깨우쳤다.
“여긴 자네 집이 아니지 않은가.”
은헌의 말에 귀신이 울컥한 듯 서갑령의 혼백을 봤다.
“집으론 이리 두 발이 생겨도 내 발론 못 돌아가니. 여기라도 붙어 있어야겠습니다.”
“갈 수 있게 해주겠다면?”
은헌의 말에 귀신은 고윤을 힐끔댔다.
“갈 수 있다면 그 몸에서 나올 텐가?”
“나가면 소멸시킬 생각이잖소.”
“그냥 머리채 붙잡고 끄집어내 강제로 소멸시키는 방법도 있지.”
고윤은 당장에라도 상투 채를 붙잡아 토막이라도 칠 것처럼 식칼을 쥐었다.
은헌은 얼른 선택하라는 듯 귀신을 봤다.
“신발 세 켤레, 옷 두 벌. 그리고 여비.”
고윤은 제물을 요구하는 귀신을 보며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준비해 주지.”
은헌은 대수롭지 않게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필요한 것은 없는가?”
역관은 고윤의 눈치를 봤다.
“제 아이 한 번만 들여다봐 주십시오.”
“그리 하겠네.”
역관은 은헌의 담담한 약조에 안심이 된다는 듯 풀린 얼굴을 했다.
“제물까지 받아가며 그 집 살림까지 떠맡기는데 뭘 그리 순순히.”
고윤이 혀를 찼다.
귀신한테 다 뜯기면서도 은헌은 차라리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간편하다 답했다. 투덜거리면서도 역관을 서갑령의 몸에서 꺼낸 고윤은 일그러진 본래의 혼을 다시 육신에 쑤셔 넣었다.
혼백이 괴로운 듯 비명을 질렀으나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은헌도 서갑령의 숨을 확인했다.
역귀가 나올 때 완전히 끊어졌던 숨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제대로 들어간 것이 맞는가?”
“꽉꽉 쑤셔 넣었는데요.”
고윤은 그리 말하며 눈을 내리깔고 서갑령의 몸을 봤다. 아직 사기가 남아 있긴 했으나 아까보단 나았다. 그는 손을 뻗어 누워 있는 이의 코를 꽉 움켜쥐었다.
“이보게!”
놀란 은헌이 말리려 손을 뻗는 순간 몹시도 괴롭단 듯 서갑령이 팔을 허우적거렸다. 입을 벌리고 컥컥대자 고윤은 그제야 막은 것을 풀어줬다. 물속에 잠겼다가 올라온 듯 서갑령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됐군요.”
진짜 서갑령이었다.
괴로운 숨을 토해내며 그는 몸을 떨었다. 고윤은 귀신을 붙들었고, 은헌은 쓰러진 서갑령의 몸을 바로 세웠다. 숨을 헐떡이며 핏발 선 눈으로 서갑령이 주위를 확인했다.
“누구…… 은헌 대감!”
“그래. 정신이 드는가?”
서갑령은 화들짝 놀라 급히 몸을 추스르려 했으나 손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 버벅댔다. 그는 은헌을 살피고 함께 온 이가 누군지 재빠르게 확인했다.
고윤은 서갑령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이 처음이었다. 오며 가며 한 번쯤 볼 법도 했지만 도통 마주칠 일이 없었다.
“저자는?”
“한성부 참군 정휘라 합니다.”
그의 소개에 서갑령의 창백한 안색이 더 하얗게 질렸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줄은 알겠으나 내 먼저 묻겠네.”
은헌은 초점 잃은 듯 흔들리는 서갑령의 어깨를 꽉 쥐었다.
“역관에게서 받은 함은 어디에 두었던가?”
퍼뜩 정신이 돌아온 듯 서갑령은 다급히 방 안을 둘렀다. 분명 뒷마당에 나가 그 함을 구덩이 안에 묻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의 기억이 온통 캄캄했다.
“뒤뜰에.”
서갑령은 그리 말하며 몸을 움직이다가 무언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기억에 바로 뒤에 세워진 병풍을 걷었다.
“이게 왜 여기에…….”
그는 아연한 얼굴로 활짝 열린 함을 주워 들었다. 은헌은 자신이 그 거리에서 보았던 것이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고윤도 함의 상태를 보곤 귀신을 돌아봤다. 어쩐지 방 안에서 느껴지는 사기가 유난히 짙다 싶었다.
“그 함을 마지막으로 곁에 두고 잠든 이가 누굽니까?”
고윤의 물음에 은헌과 서갑령이 동시에 뒤돌아봤다.
“그야 세자저하.”
“아닙니다.”
서갑령은 영문 모를 상황에도 일단 대답했다.
“세자빈 저하께서 지니고 계셨습니다. 한데 그는 왜 묻는 겁니까?”
고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능지처참과 사약 중에선 그나마 사약이 나을 것 같아서요.”
이러나저러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여도 잘 죽고 싶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은헌은 재빨리 설명을 요구했다.
“이 함은 열려선 안 되는 겁니다. 주위의 나쁜 것들을 끌어모아 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니까요.”
고윤은 그리 말하며 활짝 열린 함을 보았다.
“그동안 계속해서 액운을 담아왔을 테고 최근까지 이 함을 사용했던 이의 액운도 함에 담겼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열렸으니 그동안 모아둔 액운들이 한 번에 터져서.”
그는 손짓으로 상자의 뚜껑이 열리는 것을 설명했다.
“한 번에 되돌아가는 거죠. 마지막으로 이어진 살아 있는 자에게.”
“나쁜 것을 가져가는 함이라며?”
은헌은 박물 장수에게 들었던 설명을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나쁜 것을 걷어가 주는 거지 없애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주인을 마음대로 바꿔서도 안 되고, 절대로 열어서도 안 되는 거지요.”
가을철 떨어지는 낙엽을 한데 모아뒀다고 그 낙엽이 저절로 없어지는 게 아닌 것과 똑같았다.
“그럼 지금 안에 있었던 것은.”
서갑령이 물었다.
“이미 되돌아갔겠지요.”
고윤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서갑령을 보며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은헌 역시 냉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까닥하다간 세자빈을 상대로 비방한 것이 되어 그대로 대역죄인이었다. 어디까지 일이 크게 되기 전에 수습해 안전하게 정리해야 했다.
“두 분은 일단 저하께 가십시오. 궐은 이런 문제에 대비해 둔 게 있으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세자빈께서 이미 한 번 그 상자 때문에 앓으신 적이 있습니다.”
서갑령은 분주히 옷을 갖춰 입으며 외쳤다.
“언제?”
은헌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사신단을 마중하고 다녀와 상자를 제가 곧장 전해 드렸었습니다.”
그렇다면 한 달 전이었다.
서갑령은 저가 산 상자가 효과가 좋아 감탄하였다. 그러다 경에 들어오니 오랜만에 보는 누이가 생각났다. 조정에선 연일 회임하지 못하는 누이에게 압박을 주고 있었다. 어린 시절 유난히도 괄괄하여 망아지 같아 혼났던 누이는 이젠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산 채로 말라가고 있었다.
그는 사가의 물건을 함부로 궐에 들여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을 들고 들어갔다.
“하룻밤 못 이기는 척 곁에 두었더니 그것만으로도 몸이 무척이나 가벼워졌다고 하더이다.”
그러나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니 아무래도 궐에 둬선 안 될 듯하다며 세자빈은 염려했다. 그 말에 그도 호기심이 생겼다. 아무리 흔들어봐도 그저 텅 빈 상자라 그는 역관에게 들었던 방법대로 자물쇠를 풀어 열었다.
그날로 세자빈이 앓아누웠다.
서갑령은 그제야 제가 큰일을 저질렀음을 알았다. 그래서 황급히 세자에게 사실대로 찾아가 죄를 고하고 도움을 청했다.
“저하께서 역관 김생의 일을 아셨나?”
은헌의 물음에 서갑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닙니다. 그 일은 저 혼자 했습니다. 어떻게든 숨겨야겠단 생각에요.”
은헌은 혀를 찼다.
“대군 대감께서 부리는 한성군 참군이 저를 조사하신다기에 그래서 상자를 다시 빼내어 온 것입니다. 상자를 다시 담아 아무 손에도 닿지 않는 곳에 묻어두면 될 줄 알고.”
은헌은 한동안 세자빈이 고뿔로 고생하였단 이야기를 세자에게 들었다. 최근까지도 몸이 무척이나 나쁘다고 했던가.
“우선 두 분은 입궐하십시오. 저는 함을 정리한 뒤 방법을 찾아 가겠습니다.”
고윤은 열린 상자를 닫고 챙겨 들었다. 한 손에 함을 남은 한 손엔 귀신의 팔을 꽉 쥔 채 그는 문을 발로 걷어차고 나가면서 곧장 길을 열었다.
“이보시오! 이보……!”
다급하게 뒤따라 나선 서갑령은 텅 빈 마루에 섰다. 은헌은 그 뒤를 따라 방을 나선 뒤 아까 벗어 던졌던 신발을 보며 혀를 찼다. 급히 가느라 버선발로 먼 길 떠난 고윤의 신을 챙겨 든 뒤 그는 여전히 허깨비에 홀린 꼴을 하고 선 서갑령을 재촉했다.
“가세. 여기서 오라라도 받을 참이 아니면.”
은헌은 두 손에 신을 쥐고 빠른 걸음으로 그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 * *
고윤은 벌써 세 번째 방문하는 두꺼비의 가게를 보았다.
“여긴!”
“그래, 온갖 재앙을 다 파는 곳이지.”
김생은 거리를 둘러봤다. 그때는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던 텅 빈 거리가 무수한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그는 죽어서야 저가 그때 발길을 들였던 곳이 어딘지 알아챘다.
“오랜만이군.”
이쪽은 워낙 시간이 제멋대로라 고윤은 오랜만이라는 말에 그러냐는 듯 인사를 하곤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이 함의 주인을 바꾸고 싶소.”
두꺼비의 눈이 뱅글뱅글 돌아갔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비틀리듯 돌아가 역관을 향했다.
“저런.”
안타까움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죽어 돌아온 것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실패였나 보구먼.”
고윤은 이 거리에 있는 가게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두꺼비의 정체도 말이다.
“한 해에 두 번 간절한 바람으로 다들 이곳에 와서 값을 치르고 물건을 가져가지만 결국 이렇게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죽는다니까, 욕심 때문에 말이지.”
신선 수련을 한다는 이들 치곤 제대로 된 것들이 없었다. 어쭙잖은 요력으로 저가 신이라도 된 것처럼 장난을 치는 것 중엔 말이다.
“……주인을 바꾸는 방법이 뭡니까?”
두꺼비가 고개를 기울였다.
“알다시피 이 거리엔 대가 없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곤 어떤 것도 없다네.”
“값을 치르죠.”
“그렇다면야…….”
두꺼비의 눈이 또다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 * *
은헌은 궐에 들자마자 곧장 동궁으로 달려갔다. 공복도 입지 않고, 갓끈을 휘날리며 뛰는 그의 뒤로 서갑령 역시 숨을 헐떡이며 따라붙었다.
“대군 대감!”
동궁전에 들기 무섭게 둘을 발견한 내관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드셨습니까.”
은헌은 대꾸하지 않고 동궁을 살폈다.
“형님 저하께선 어디 계시는가?”
그의 물음에 내관은 어둑한 안색으로 몸을 틀었다. 자선당에 있는 두 개의 방 중 오른쪽이었다. 세자빈이 머무는 곳이었다.
“지금…….”
은헌은 내관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을 뗐다.
“저하!”
그가 앞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말리려던 내관은 자신을 붙잡는 거친 손길에 붙들렸다.
“빈궁 저하께선 어디 계시는가?”
“서 좌랑?”
영문 모를 일에 내관이 어리둥절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은헌은 섬돌 위에 신을 벗었다. 허락을 구하고 들어가야 했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세자를 만나야 했다.
“고하게.”
은헌은 문 앞에 선 나인에게 명했다.
“저하, 은헌대군 대감께서 드셨습니다.”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은헌은 열린 문안으로 들어섰다. 방을 가로지르듯 발이 길게 내려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안에서 세자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른 시간에 들었구나.”
평상시라면 대전에 들러 왕을 뵈어야 할 시간이었다. 은헌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긴히 드릴 말이 있어…… 왔나이다.”
장난기라곤 없는 정중한 태도에 세자는 아우를 살폈다. 복색이 궐에 들어올 차림새가 아니었다. 사저에 있을 때나 입을 옷차림새로 아침부터 궐에 들어와 저를 만날 일이 무얼까 고민하다 세자는 뒤이어 문 앞에 나타난 서갑령을 발견했다. 세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하.”
서갑령은 창백한 얼굴로 인사를 고했다.
“건너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
세자는 그리 말하곤 누워 있는 빈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방금 잠들었으니 소란을 피워 깨지 않도록 말이다.”
그 말에 모두가 조용히 빈궁의 방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이냐?”
세자는 제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은헌을 향해 물었다. 표정이 몹시도 비통해 보였다.
“어제 동궁에서 내어간 그 함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자의 시선이 뒤쪽에서 고개를 처박고 있는 서갑령을 향했다.
“제 잘못입니다.”
은헌은 형님의 시선에 마른침을 삼켰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천천히 이야기했다.
꿈을 꾸었고, 그 꿈에서 벌어진 일이 현실과 맞닿게 된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고 역관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빠른 어조로 속삭이듯 털어냈다.
“하여 아우가 그 귀신을 부러 놓아주었습니다. 서갑령의 옆집에요.”
“은헌!”
세자는 서늘한 얼굴로 아우를 봤다.
“너는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말하는지 알고 있느냐.”
“……예.”
잠깐의 욱기에 저지른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졌다. 은헌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대군이라서 어쩌면 더 크게 치를 수밖에 없는 실수에 대한 책임이었다.
“그럼 네 죗값을 치러야겠구나.”
세자가 말한 것이 아니었다. 은헌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바마마!”
세자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헌은 긴장한 얼굴로 부왕을 보았다.
왕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 가득 못마땅함이 묻어나는 시선에 은헌은 기대를 버렸다.
“감히 세자빈을 해칠 물건을 대군이 사용하였다.”
“아바마마!”
세자는 다급히 앞으로 나왔다.
왕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
“상선은 세자를 데리고 가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서갑령이 벌벌 떨며 외쳤다. 그러나 은헌은 그 모든 상황에서 한 발 떨어진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송구합니다. 저하……. 이런.”
그의 표정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왕이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얼굴로 선 고윤이 재빨리 몸을 낮춰 바닥에 엎드렸다.
“소신, 전하를 뵙습니다.”
“영상의 막내아들이로군.”
왕은 금방 고윤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는 상선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자가 어찌 여길 들어왔지?”
“그게 그것이.”
상선은 밖을 확인하곤 당황한 듯 입을 열었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내 분명 동궁전에 사람이 들지 못하도록 금군으로 지키라 명하였거늘. 궐의 수비가 허술한 게냐. 아니면 이자가 소문 무성한 그 알량한 재주를 믿고 오만한 것이냐.”
은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서 머릴 조아리고 있는 고윤을 향했다.
“아바마마.”
왕이 고개를 돌렸다.
은헌은 입술을 움직이려 했다.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이라면 그냥 닥치고 있거라.”
왕이 그를 보며 일갈했다.
“이자가 어찌 여기까지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왔는지 내 몹시도 궁금하구나. 그리고 그 손에 든 것도 말이다.”
서늘한 눈이 방 안에 모인 자들을 훑었다.
“금군 대장은 들어라. 은헌대군은 처소에 감금하고, 남은 자들은 의금부로 끌고 가라.”
“아바마마!”
은헌은 의금부라는 말에 곧장 몸을 굽혀 간청했다.
“아바마마. 소자의 말을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그곳에 보내겠다는 말은 지금 벌어진 일을 공식적으로 진행하겠단 소리였다. 세자빈과 엮인 일이었다. 그러니 죄가 있든 없든 좋게 끝날 리가 없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끌고 가지 않고!”
은헌은 고개를 들었다.
“아바마마, 제발 소자의 이야기를 들어주시옵소서.”
내관들이 은헌을 붙잡았다.
“대감, 가셔야 합니다.”
“놓게! 아바마마! 제발 소자의……!”
은헌의 몸이 휘청거렸다.
“은헌!”
세자가 부르는 이름이 멀리서 메아리치듯 들렸다. 은헌은 캄캄하게 흐려진 시야를 겨우 붙잡았다. 뜨끈한 것이 얼굴을 타고 내려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인제야 네놈이 닥치는구나. 끌고 가라!”
바닥에 파편으로 튄 조각난 도자기를 보며 고윤은 아연해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대군이 저를 보고 있었다. 피범벅된 얼굴을 하고도 짧은 순간 눈이 마주치자 은헌은 어떻게든 될 거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고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냉정히 생각하려 했지만, 속에서 울컥거림이 계속 치밀어 올랐다.
* * *
세자는 무릎을 꿇고 돌 위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바마마! 은헌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나이다. 아무것도 몰랐음을 참작하시어 대군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몰랐다?”
왕은 제 첫째 아들을 보며 혀를 찼다.
“아직도 너는 그 아이를 보호하려 드는 게냐?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어리석다 질책하는 부왕을 보는 세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은헌은 그저 도와주고 싶었던 것뿐이옵니다. 억울하게 죽은 이의 사연을 듣고 무언가 잘못된 일은 없었는지 알아보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어찌 죄라 하겠습니다.”
세자는 얼마 전 은헌이 그를 찾아와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처벌을 받아야 하냐 물었을 때 자신이 그리하라 허락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놈이 무슨!”
왕은 대군을 비웃었다.
“아바마마.”
“은헌 그 아이가 좋은 마음으로 하였다. 그래서? 결국, 어찌 되었느냐? 세자빈이 원인 모를 이유로 앓아누웠다. 그게 세자빈이 아니라 세자, 너였다면?”
왕은 주먹으로 대전 기둥을 내려쳤다.
“감히 동궁을 향해 비방을 놓고서도 좋은 마음으로 했으니 용서만 구하면 무사히 일이 끝날 줄 알았단 말이냐, 그놈의 말대로 국법이 지엄하거늘!”
세자는 고개를 들었다.
“빈궁에게 벌어진 일은 소자의 잘못이 더 크옵니다. 저가 궐 안의 법도를 어지럽힌 행위를 쉬쉬하려다 벌어진 일이오니, 부왕께선 부디 아우 대신 소자에게 죄를 물어주시옵소서.”
왕은 서늘한 눈으로 세자를 보았다.
“너 그 입 다물거라.”
“아바마마. 소자가 그리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은헌을 살려주십시오.”
“과인은!”
왕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세자에게 위협을 가하는 누구든 용서치 않겠다 했다. 대군은 선을 넘었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그것도 제 입으로 실토했으니 그에 마땅한 죗값을 치를 것이야.”
“그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어찌 진실이겠습니까. 하니 한 번만 굽어살펴 주십시오.”
세자는 포기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며 청을 올렸다.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무맹랑하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과인도 한때는 그리 생각했었다.”
그의 목소리가 위협적일 정도로 낮아졌다.
“세자는 아느냐? 은헌은 본디 괴상망측한 소문을 달고 태어났단다. 복중에 있을 때부터 말이야.”
왕은 오랜 기억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가뭄에 태어난, 재앙을 부르는 용이라 했지. 그런데도 왕이 될 사주라 하여 중전이 쉬쉬 입단속까지 하여 날 속였단다. 타고난 팔자는 귀인이나 그 운을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죽이고야 말 거라고 했던가?”
누가 믿을까 그것을?
“그런데 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나라 안에 역병이 끊이지 않았단다.”
지독한 가뭄도 연이어 왔다. 땅이 비쩍 말라 거북이 등처럼 갈라질 때도 왕은 우연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세자빈에 관한 말이 들려왔단다. 굶주린 용을 달랠 유일한 비 같은 존재라, 태어나면 반드시 짝을 지어줘야 한다고.”
왕은 그날을 떠올렸다.
“그래도 헛소리라 치부하였다. 그리고 그 예언의 날 도성 안에 여아 하나가 태어났지. 그리고 나흘 내도록 비가 내렸다.”
그때 왕은 기나긴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보며 차라리 어린 대군을 죽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거라 생각했다.
“평생을 살아가며 주위의 모든 것을 괴롭히는 팔자라니. 그 짝이라는 아이가 병으로 죽으면 혼자 남은 대군은 어찌 되는 거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게 나을 것 같았지. 그랬더니 중전이 왕후의 관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말하는 여자아이니 대군이 아니라 원자인 네게 짝을 지어주라 했다. 은헌은 그런 사주가 아니니 네가 세자가 되고 왕이 되면 대군의 불행한 우연도 허망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며 말이다.”
세자는 너무 어릴 적의 이야기라 기억도 희미했다.
“그리고 나이가 되는 대로 대군의 혼례를 치러 궐 밖으로 내보내겠다 약조했지.”
왕은 그래서 그 약조대로 했다. 중전은 아들을 살리고자 했다. 그러나 왕은 은헌을 궐 밖, 도성 안이 아니라 밖으로 쫓아냈다. 되도록 멀리 말이다.
“제게 닿은 인연을 죄다 죽일 작정인지 어렵게 맺은 혼사였다. 그런데도 죄다 죽어 나갔지.”
그 뒤로도 은헌의 곁을 지키던 보모상궁부터 나인들까지 모두가 역병으로 죽었다.
“한동안 그렇게 죽더니 또 괜찮아지곤 했다. 그래서 살려줬다.”
그 정도는 우연으로 벌어진 일이라 쳐 줄 수 있었다.
“하오나 그 일들이 어찌 은헌과 관련이 있사옵니까. 은헌은, 그 아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요.”
세자는 은헌의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몸과 머리가 크면서부터 은헌은 제 주위에 한 번도 사람을 가까이 둔 적이 없었다. 저도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으니 그랬던 걸까?
“그래, 그래서 문제인 게다. 말했잖으냐. 은헌은 왕의 기운을 타고 태어났다고.”
왕후가 될 팔자라던 세자빈은 세자와 혼례를 치르고도 여태 후사를 잇지 못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음에도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까지 생각하니 왕은 실소밖에 터지지 않았다.
정말로 세자빈과 대군이 부부의 연이라 그리된 것이라면, 대군은 정말로 재앙으로 태어난 것인가?
“과인은 그래서 정리하려 하는 거란다.”
세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면 조사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대군에 대한 처벌을 미뤄주십시오. 죄를 증명해 낼 때까지만이라도 부디 살펴주십시오.”
“그것참 추국장에서 누가 먼저 입을 열지 기대되는구나.”
당장에라도 의금부에 있는 서갑령과 고윤의 주리라도 틀 기세라 세자는 지금 지킬 수 있는 사람부터 지키고자 했다.
“세자.”
왕은 아들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정에 휩쓸리지 말아라. 그놈은 그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놈이다.”
* * *
은헌은 탁자 앞에 앉았다.
궐 안에 오래 산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곳까지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이마를 만졌다. 얼굴 전체가 얼얼한 정도의 통증이 일었다. 그 아픔이 지금의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펴고 반듯이 앉았다.
너른 탁자 건너편에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그를 추국할 참찬(參贊) 5)이 앉을 자리였다. 은헌은 눈을 감았다.
고윤이 괜찮을지 걱정되었다. 저는 그래도 궐 안 전각에 감금되어 있었지만, 고윤은 곧장 의금부로 끌려갔다. 급히 그 거리에 다녀오느라 체력도 바닥 친 상태로 말이다. 상당히 굶주려 있을 텐데 전옥에서 고생하고 있을 터였다.
그는 한숨을 뱉었다.
고윤도 걱정이었고, 세자도 걱정이었다. 저의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세자빈의 증상은 어찌 되었는지 확인조차 못 했다. 고윤이 함을 다시 들고 온 걸 보니 무슨 방법이 있는지 알아낸 것도 같은데 지금은 움직일 수도 없었다.
생각만 하고 있음에도 어쩐지 머리가 핑 돌았다. 은헌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조심스레 두들기다 숨을 멈췄다.
밖에서 발소리가 다가와 문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은헌은 남은 감정을 털어내고 지워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자, 하룻밤 잘 시간만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면 전에 그러했듯이 고윤이 그의 꿈속으로 찾아와 줄지도 몰랐다.
은헌은, 안으로 들어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은 이를 보았다. 참찬이 아니었다. 아는 이도 아니었다.
그자는 은헌에게 예를 차리곤 입을 뗐다.
그는 그리 말하곤 가는 눈을 떴다.
그의 직제를 들은 은헌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심문이 시작되자 은헌은 모든 질문에 신중하게 답했다. 어디서 어디까지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홍인제는 함에 관한 것을 직접 물었다.
“그럼 서 좌랑과 궐 밖에서 따로 만나신 것은 처음인 겁니까.”
“그렇네.”
사실도 일부 털어놓았다. 서갑령과 엮인 일에 관해서는 특히 그러했다.
“그렇다면 그 역관은 언제 알게 되었습니까.”
“기억이 나질 않는군.”
“대감.”
은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머리가 이 지경이라 지금 물어보는 것에 답하는 것도 벅찬 상태라네.”
피범벅이 된 머리는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했다. 여기로 그를 데려온 내관이 지혈한답시고 무명천을 둘러둔 것이 다였다. 금부도사는 은헌의 상처를 살피고는 웃었다.
“그럼 다른 것을 묻지요.”
“안타깝게도 기억나는 건 방금 한 이야기가 다라네.”
“아니신 듯한데요.”
“내 기억이니 내가 더 정확히 알고 있지 않겠는가.”
기록을 정리해 두던 금부도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은헌을 봤다.
“대군 대감께선 저를 모르시지만, 저는 예전에 세자저하의 호위로 잠시 있었지요. 명을 받아 대감께서 더 어렸을 적에 뒤를 따라다니기도 했고, 그래서 이번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하께선 대감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길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의금부에 있는 두 사람은 아니지요.”
은헌은 소리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다물었다.
“누군가는 입을 열어야 끝날 겁니다. 그게 참이든 거짓이든 원하는 대답이 나오길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니.”
은헌은 눈을 감았다.
“그자들이…… 고신을 받고 있는가?”
“아직은 아닙니다. 하나 멀지도 않았지요.”
은헌은 금부도사의 충고를 새겨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침묵했고, 저녁이 되자 금부도사는 내일 다시 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 * *
“들어가!”
의금부 나졸이 사정없이 등을 밀었다.
고윤은 패대기쳐지듯 돌바닥에 무릎을 찍고는 아픔에 몸을 웅크렸다.
“……빌어먹을!”
그는 이를 앙다물었다. 고개를 들자 현기증이 밀려왔다. 역모죄로 추국당하는 죄인이라 그런지 종일 끊임없이 질문만 오갔다.
고윤은 누운 김에 옆으로 모로 눕듯 뒹굴었다. 기운은 없고 배는 고프고,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문초 대부분 그의 능력과 주위에서 떠들어대는 실체 없는 헛소문에 관한 것이었다. 무슨 기이한 술수를 썼느냐는 질문에 그런 것 쓴 적도 없다 답할 수도 없었다.
고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상황에도 몸이 불편해 잠이 쉽게 오지 않아 울컥했다. 그는 결국 일어나 감옥 바닥에 깔린 지푸라기를 정리했다. 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나 조금이라도 평평하기면 하면 되겠지 싶었다.
“반대로 해야 하오. 짚을 한군데 모아 푹신하게 만드는 게 더 편하거든.”
옆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고윤은 고개를 돌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홑겹의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서갑령이 보였다. 고윤은 서갑령이 앉아 있는 자리를 보곤 조용히 넓게 펼쳤던 지푸라기로 산을 쌓듯 모아 봉긋하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그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은 괜찮소?”
고윤은 귀신이 들었다 나간 몸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버틸 만하오.”
서갑령은 그리 말하는 자신이 우스운지 실소를 터뜨렸다.
“이것도 못 버티면 안 되지 않소.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묶인 것도 아니었고 매를 맞지도 않았다.
그의 일로 세자빈은 사경을 헤매며 누워 있다고 했고, 역관의 죽음에 얽힌 일을 알아보던 대군은…….
“혹여나 하는 말이지만, 침묵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오.”
고윤은 그 말을 하는 서갑령을 조용히 응시했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끝날 일이지. 시작한 것이 나니 내가 정리하는 게 맞지 않겠소.”
서갑령의 표정은 담담했다. 고윤은 코웃음 쳤다.
“조용히 넘어가기엔 이미 글러먹은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라.”
궐 안을 허락도 없이 드나들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목이 뎅겅 썰릴 수 있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되오?”
“뭐요?”
고윤은 벽에 기댄 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원래 이것을 물어보려 시작한 일인데 멀리도 왔다. 그는 그리 생각하며 물었다.
“세자빈 저하 말고 죽은 형제가 있소? 연치 스물에 죽은.”
서갑령은 그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몸이 약하셔서 저하와 나, 남매뿐이오. 세자저하와 정혼하신 뒤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다른 형제도 없소.”
“가까운 친척이라도 죽은 이가 없소? 한 이 년쯤 내외로 말이오.”
“왜 묻는지는 모르겠으나 말하는 나이에 죽은 이는 없소. 최근에는 더더욱.”
확신을 담은 말에 고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찬바람이 불어왔다. 온몸을 에일 것 같은 칼날 같은 바람이었다. 겨울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지금은 추운 날도 아니었다.
‘이보게.’
고윤은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두운 곳을 살폈다. 화톳불이 바람에 일그러져 흔들렸다. 밝아졌다 어둑해지는 그림자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희뿌연 형체에 색이 물든 듯 조금씩 짙어지더니 이내 형체를 갖췄다. 그자였다. 고윤은 누가 봐도 서갑령과 빼다 박은 얼굴을 보았다. 형제나 친척이 아니라 자식이 있느냐 물어봤어야 했나 싶을 정도였다. 씨도둑질은 못 한다는데 이자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이보게.’
고윤은 입술을 움직였다.
* * *
밤이 깊어질수록 고요해져야 할 근정전 앞뜰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중전은 저 말고도 발을 동동 구르며 선 이들을 훑었다. 아침에 벌어진 일로 죄다 궐에 찾아온 이들이었다.
“어마마마, 밤이 깊었으니 들어가 계십시오.”
중전은 낮부터 꼼짝 않고 서서 버티고 있는 동궁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보게 상선, 다시 고해주시게.”
중전은 계속해서 내관에게 말을 걸었다.
“중전마마.”
상선은 곤란한 얼굴로 중전과 뒤쪽의 대전을 번갈아 보았다. 중전은 턱짓했고, 상선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 왕께 고했다.
이번에도 틀렸나 싶었던 찰나 그토록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긴 온통 과인의 머리 위에 있는 자들만 모인 것이냐!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 하는데 예 있는 자들은…….”
지아비의 말에 중전은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전하를 뵙습니다.”
“보지 않아도 되니 돌아가시구려.”
왕은 다시 문을 닫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지금 그 문을 닫으시면 저도 더는 참지 않겠습니다.”
왕이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 뉘한테 그런 말을 하시는 게요?”
“저와 말 섞는 자가 전하뿐이지 않습니까.”
왕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중전을 보았다.
“그래. 참지 않으면 무엇을 하실 것이오.”
중전은 왕을 올려다보며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냈다.
“최 상궁. 지금 동궁전에 있는 세자빈을 이리로 데려오게.”
“어마마마!”
세자가 다급히 중전을 불렀다. 그는 곧장 중궁전 나인들을 보았다. 중전의 명을 받은 상궁이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나고 있었다.
“지금 어딜 가는 것이냐. 멈춰라.”
세자가 불러 세웠으나 중전은 왕과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다시 입을 뗐다.
“최 상궁 네가 지금 내 명을 무시하는 것이냐. 가서 세자빈을 데려오너라.”
“……알겠습니다.”
최 상궁은 세자에게 허리를 숙이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지금 이게 무얼 하는 짓이요, 중전.”
왕의 하문에 중전은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궐 내부의 법도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중입니다. 김 상궁, 세자빈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뒤에 선 상궁이 허리를 숙였다.
“전하께 죄를 고해라.”
중전의 명에 상궁이 입을 열었다.
“세자빈 저하께옵서 사가에서 허락되지 않은 물건을 궐에 들여 사용하셨습니다.”
세자가 눈을 감았다. 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지금 저주 때문에 사경을 헤매는 세자빈을 데리고 내명부에서 조사라도 하겠다는 거요?”
“머리가 깨진 대군을 감금하여 의금부 금부도사가 조사하였다지요.”
왕은 그제야 웃음을 멈췄다. 중전은 여전히 곧은 태도로 왕을 보고 있었다.
“전하께옵서 제 자식을 죽이는데 저라고 전하의 자식을 죽이지 못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중전의 자식이라?”
왕이 헛웃음을 터뜨리자 중전 역시 코웃음 쳤다.
“전하께서 은헌대군을 한 번이라도 자식이라 여기셨다면 오늘 이리 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아비가 버린 자식이니 아비가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이 없다는데, 은헌이 전하께 그런 아픔이라도 드릴 수가 있답니까.”
왕은 대답 대신 상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너 지금 가서 동궁전에 세자빈이 한 발이라도 나오거든, 금군 대장더러 역모죄를 저지르는 자들이니 상궁들의 목을 치라 이르거라.”
중전은 그 말에 궁의 속에 감추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러곤 누가 막을 새도 없이 팔을 들어 올려 손에 든 칼을 목덜미에 가져가 댔다.
“전하께서 그것을 역모죄라 하시니 제 목부터 잘라 드리겠습니다.”
날 선 칼날을 따라 핏방울이 맺혀 들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 터라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왕의 명을 받은 상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정 죽고 싶은 게요.”
왕의 말에 중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은헌이 그녀의 앞에서 웃었던 것처럼 그린 것 같은 웃음이었다.
“아쉬울 게 무엇이랍니까.”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차라리 죽겠습니다. 죽어 더는 이 꼴을 보지 않는 편이 났겠습니다. 김 상궁 가서 최 상궁과 함께 세자빈을 데리고 오너라. 그 아이도 제 눈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 가볍게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 어찌 끝나는지.”
중전의 뒤에 서 있던 김 상궁이 대열에서 빠져나갔다.
왕은 중전을 보았다.
“과인을 협박하는 게요.”
그 말에 중전은 입꼬릴 끌어 올려 비웃었다.
“협박이라니요. 저가 그럴 처지나 된답니까. 아!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생각났군요.”
그리 말하며 중전은 손칼을 든 팔을 내리곤 빈손을 들어 머리에 꽃은 뒤꽂이를 바닥에 내던졌다.
“어마마마!”
세자가 다급히 그의 뒤에 있는 내관에게 손짓하곤 왕을 보며 몸을 숙였다.
“아바마마!”
그사이 중전은 거침없이 가채를 풀어 바닥에 내렸다. 그러곤 궁의 역시 벗었다.
“중전!”
뜰에 서 있던 이들이 죄다 엎드려 눈을 피했다.
안에 받쳐 입은 무명옷만 남긴 채로 중전은 그제야 왕을 다시 보았다.
“이제 직첩도 다 떼어 없앴으니, 폐하여 주십시오, 전하. 그러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죽어서도 전하의 곁에 묻힐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지 뭡니까.”
중전은 웃었다.
“폐하여 주십시오, 전하. 제게사약 내리시는 것조차 귀찮으실 게 아닙니까. 그러니 직접 자결하겠습니다. 저 죽은 뒤에 시신을 가져다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이라도 하시어 분을 푸십시오. 그리하시면 이제 더는 신경 쓰실 곳도 없으실 테니 편히 주무실 수 있게 되실 겁니다.”
왕은 아연한 얼굴로 중전을 보았다.
“미치셨소?”
“그럼 미치지 않은 줄 알고 계셨던 겁니까?”
중전은 되레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듯 비웃었다.
“여섯 살 난 아이가 그 추운 겨울 궐 안의 연못에 빠졌는데 아비도…… 그 주변의 누구도 얼음 구멍을 들여다볼 뿐 구하지 않았단 말을 들었을 때부터 미쳐 있었습니다. 당시 연치가 열 살이던 세자가 아우를 구하러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날 은헌이 살아났을까요?”
삼키고 또 삼켰던 원망이었다.
“겨우 목숨만 건져 생사를 오가는 아이의 머리맡에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거라 말하시며 혀를 찬 이가 지아비인데…… 여태 제가 제정신일 것이라 여기셨습니까?”
중전은 천천히 걸었다. 그러곤 엎으려 있는 군관의 손에 들린 칼을 빼 들었다. 그리곤 날을 돌려 목에 댔다.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전하. 더는 보지 못하겠습니다.”
중전의 얼굴에 환한 울음이 걸렸다. 그리곤 손이 움직였다.
“중전!”
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꿈이다.
은헌은 제집을 보며 웃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쓰러지기 전의 기억이 희미했다. 그는 손을 들어 이마를 매만졌다. 아프지 않았다. 부풀어 오른 혹도 움푹 팬 상처도 만져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뿌연 안개 같은 것만 보이고 고윤은 보이지 않았다.
“이보게!”
은헌은 저를 꿈속으로 불러들인 이를 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안개 너머에서 희미한 인영이 보였다. 은헌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뚱한 표정의 고윤이 저를 보고 있었다. 반가움에 은헌은 달려가듯 다가섰다.
그는 팔을 뻗어 은헌의 어깨를 붙들었다.
“자네 괜찮은가?”
꿈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은헌은 고윤을 머리부터 샅샅이 훑었다. 고윤이 멍한 얼굴로 있다가 픽 웃었다.
“뭐, 바람이 차서 자고 일어난 뒤가 걱정되긴 하는군요.”
“고신당하진 않았고?”
“아직 갇혀만 있습니다.”
고윤은 그 말을 하며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은헌도 뒤따라 고개를 들었지만, 그저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시간이 좀 빠듯하여 그러는데, 낚싯대 어디에 있습니까?”
고윤은 여전히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은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방에 두었네. 한데 그건 지금 뭐 때문에 찾는가?”
고윤은 은헌의 손에서 빠져나와 방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그러면서 허공에 뻗어 있는 은헌의 손을 붙잡아 끌었다.
“설명이 기니 나중에 들으시고 지금은 낚시하러 가야 합니다.”
“지금?”
“예.”
은헌은 끌려가면서 미간을 구겼다.
“날이 밝거나 잠에서 깨어나는 대로 추국장에서 고신받다 능지처참당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잉어를 낚으러 가자고?”
“정확히는 태몽이지요.”
고윤은 방 앞에서 은헌을 돌아봤다.
“낚싯대를 꺼내오십시오, 얼른! 오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은헌은 냉한 얼굴로 그런 고윤을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섬돌에 발을 올렸다.
낚싯대는 둔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그것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고윤은 연신 하늘을 보며 초조한 모습으로 마당을 서성였다. 뭐 때문에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헌은 우선 시키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죽기 전에 지켜야 할 약조는 다 해주고 가고 싶었다.
태몽을 가진다 하여 이제 와 쓸모 있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는 낚싯대를 어깨에 두른 채 섰다.
“꺼내왔네.”
고윤은 숨을 들이쉬고는 길을 열 때처럼 은헌의 소매를 붙잡았다.
지금껏 이리 따라갔지만, 주변의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마치 밤하늘을 밟아 건너는 듯했다. 하늘에 흩뿌려져 있어야 할 반짝임이 발아래서 빛났다. 쏜살같이 흘러내리는 빛의 강을 건너자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은헌은 눈을 크게 떴다.
“여긴 무릉도원인가?”
“그냥 인왕산 귀퉁입니다.”
고윤은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을 보았다. 산 위에서 물이 내려와 고였다가 다시 저 아래로 흘러가는 차가운 못이었다.
“이곳이 산군이 일러준 곳입니다.”
산군이라는 말에 대군은 아, 하고 외쳤다.
“그 산신 되고자 수련 중이라던 호랑이?”
“예. 그곳입니다.”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헌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로 보이는 거대한 바위산의 능선과 뿌옇게 낀 안개가 신비로웠다.
“이곳에 용이 될 잉어가 산단 말이지.”
“그 호랑이 말로는요. 얼른 한번 던져 보십시오.”
그리 말하며 고윤은 소맷부리에서 어떻게 집어넣었는지도 모를 길 죽장 낚싯대를 꺼냈다.
“나는 오늘 꿈에서 자넬 만나면,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 이야기나 할까 했네.”
“그건 낚시하면서도 가능하잖습니까.”
입질이 곧장 와서 끌어 올리면 모를까, 꽤 오래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야 그렇지.”
은헌은 익숙하게 말린 실을 풀어내 매듭을 엮었다. 바늘만 달린 곳에서 한참 위로 적당한 곳에 깃털이 흔들렸다. 그는 작은 쇳덩이를 달아놓은 줄을 손으로 당겼다가 대를 휘두르며 휙 하고 휘둘렀다.
“그럼…… 그 역관 이야기부터 하세.”
* * *
세자는 급히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저하!”
안에 있던 이들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세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들에게 가리어진 인영을 살폈다.
“어찌 된 것이냐.”
의관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찌 된 것이냐 묻지 않나!”
세자는 팔을 들어 올렸다.
“저하! 대체 무슨!”
피범벅이 되어 천으로 싸맨 손을 그제야 발견한 의관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세자는 상관치 않고 그들을 밀쳐 냈다.
가려져 있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이를 본 세자가 몸을 내렸다. 옷 위로 손을 올린 것뿐인데도 겨울 호수에 언 얼음에 손을 대는 듯한 한기가 느껴졌다. 한기에 살결이 따끔했다.
“은헌, 눈 좀 떠보거라.”
늦가을 서리 내려앉은 것처럼 하얀 알갱이가 끼얹어진 얼굴을 세자가 조심스레 매만졌다. 볼을 건드린 손이 코로 내려갔다. 온기라곤 자취를 감춘 몸에 숨이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세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군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의관은 무얼 하고 서 있는 게냐! 무슨 수든 써보아라!”
“저하 송구하옵게도 대군께선 벌써…….”
“닥치거라! 네놈이 지금 누구 앞에서 그따위 말을 하는 게냐.”
세자가 손을 뻗어 굳어가는 은헌의 팔과 다리를 매만졌다. 이미 은헌의 피로 더럽혀진 옷에 또다시 핏자국이 번져 나갔다.
“은헌.”
그는 어릴 적 아우를 얼음 못에서 건져 냈을 때 그러했듯 포기하지 않고 손을 놀렸다.
소식은 재빠르게 전해졌다.
대군의 몸이 오뉴월에 얼어붙은 채 숨을 거뒀단 사실이 대전까지 전해지자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모두가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왕과 중전을 보았다.
목에 난 상처를 강제로 치료받고 있던 중전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기어코, 기어코.”
중전은 상궁들을 물리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전하께선 기뻐하십시오. 대군이 죽었으니 이제 그렇게도 꿈꾸시던 시절을 맞이하시게 될 겁니다. 역병 따위도 더는 창궐하지 않을 겁니다. 경하드리옵니다. 그러니 부디…… 저승 가시는 날까지 오늘은 잊지 마십시오.”
지독히도 담담해서 더 비통한 목소리였다.
“아비가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인 날이 아닙니까.”
중전은 돌아섰다.
천천히 대전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등을 왕은 일그러진 얼굴로 지켜보았다.
세자는 계속해서 대군의 팔을 주물렀다. 그러곤 간간이 숨을 확인했다. 죽었다 하기엔 상태가 많이 이상했다.
“이불을 가져오너라! 뜨거운 물도!”
죽은 자 특유의 느낌이 없었다. 그는 다시 은헌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저하! 저희가 하겠습니다.”
내관과 의관이 나섰으나 세자는 완강히 거절했다. 이 방에 있는 자는 그의 손이 닿은 자가 아니었다. 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세자는 아우의 얼굴을 보곤 다시 손을 움직였다.
“저하!”
세자는 바깥의 소란스러움에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며 고개만 돌렸다. 좌익위 7)가 성큼 걸어 들어와 옆에 몸을 내렸다. 무관인 그의 표정이 대군의 상태를 확인하곤 삽시간에 흐트러졌다.
“알아보았느냐.”
“……예. 지금 의금부 전옥에 갇혀 있는 정 참군 역시 같은 증세를 보입니다.”
세자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지금 궐내는 온통 적의만 가득 차 피아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중전마마께서 직접 목숨을 걸고 왕을 묶어두고 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왕으로 태어나 평생 져 준다는 것을 모르고 사셨던 분이다. 그러니 저가 움직여야 했다.
“정 참군을 빼낼 수 있겠느냐.”
의금부를 건드리는 것은 조정과 왕에 반기를 들겠단 소리였다, 세자는 그가 지금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를 보았다.
“명 받잡습니다.”
익위사가 움직였다.
세자는 다시 아우를 보았다. 정 참군이 분명 꿈을 건너는 재주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분명 이것도 그 꿈의 여파일 터였다. 그러니 몸이 얼어붙지 않게 하는 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대군과 참군 둘 다 몸을 살려둬야 했다.
“돌아오너라, 령아.”
진명을 입에 담고 그는 간절하게 빌었다.
* * *
깃털은 젖었음에도 꼿꼿하게 물 위에 서 있었다.
은헌은 허탈한 듯 낚싯대를 조금씩 건드려 보았다. 동쪽 하늘에 뜬 달이 서쪽으로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는데도 입질은 여전히 없었다.
고윤은 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기운은 느껴집니다.”
계속해서 낚싯대를 휘둘렀던 대군 저의 못과 달리 여긴 물 아래서 꽤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입질이 없는 거 보아하니 미끼라도 끼워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며 은헌도 물속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그의 눈에는 캄캄한 심연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섬뜩한 기분이 드는 그런 물이었다.
은헌은 팔을 문질렀다.
“꿈인데도 이상하리만큼 춥군.”
“……물가니 그렇지요.”
고윤은 시답잖은 농을 던졌다. 그런 그도 몸을 떨고 있었다.
달이 저물어갈수록 오한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요.”
“조금 더 기다린다고 갑자기 입질이 올 리가 없지 않은가.”
은헌은 투덜대며 하늘을 보았다. 달이 저물어가고 있으니 곧 해가 뜰 터였다. 그러면 이 꿈에서 깨어나 그는 그 좁은 전각에서, 고윤은 의금부 전옥에서 눈을 뜰 터였다. 그러고 나면…….
은헌은 잠에서 깨거들랑 저의 죄를 고하여 고윤이라도 풀어줄 생각이었다.
영의정도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 자식을 구하려 최선을 다할 터였다. 둘 중 하나는 무사히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줄어드는 시간이 아쉬워 그는 서럽게 웃었다.
고윤은 하늘로 꺾어 올린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엉기고 성긴 수많은 인과의 그물 너머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열린 건가.”
“뭐가 말이야? 자네만 알지 말고 나도 좀……. 어?”
은헌은 알지 못할 소리를 늘어놓는 고윤에게 핀잔을 던지다 손에서 튕기는 낚싯대의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꽉 붙들었다.
조금 전까지도 구리거울처럼 반들반들 물결조차 없이 잔잔하던 못의 수면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온 건가?”
은헌은 콧등을 찡그리곤 깃털을 확인했다. 평온하니 물 위에 둥둥 잘 떠 있던 깃이 조금씩 위아래로 가라앉으며 흔들렸다. 낚아채 올리고 싶은 마음이 태산처럼 높았으나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나비가 날갯짓하듯 흔들리는 깃털이 물 아래로 가라앉는 순간 은헌은 대를 확 채어 뒤로 젖혔다.
“걸렸다!”
고윤은 위로 높이 들린 쇠죽이 한껏 휜 것을 보았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부턴 정말로 시간 싸움이었다.
은헌은 바위에 발을 걸쳐 올리곤 몸을 젖혔다. 바늘을 물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실을 끊어내려고 하는 놈을, 벌써 반각 가까운 시간 동안 따라다녔다.
물속에 있는 놈도 힘이 드는지 숨을 고르듯 멈췄다. 은헌은 조금씩 실을 감아올렸다. 엉키거나 꼬여 놓치는 일이 없도록 신중히 처리했다.
조금씩 끌려 올라와 수면에 가까워지자 놈은 또다시 펄떡거리며 헤엄쳤다. 은헌은 한기에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최대한 낚싯대를 강하게 움켜쥐어 위로 들었다.
힘이 온전히 빠진 듯 갑자기 그 끝이 가벼워졌다. 은헌은 빠르게 낚싯대를 돌려 실을 감았다. 실이 짧아질수록 묵직함은 그대로인데도 순순히 위로 쓱 끌어 올려지는 거 같았다.
다 된 건가 싶어 그는 희희낙락 옆에 선 고윤을 보았다.
“낚은 듯……. 어이쿠!”
순간적으로 손바닥에서 미끄러지듯 낚싯대가 빠져나갔다. 수면 가까이서 찰방찰방 펄쩍 뛰어오르는 검은 놈을 보며 은헌은 빠지기 직전의 낚싯대 끝을 붙들었다. 고윤 역시 놀란 눈으로 낚싯대를 잡았다.
끌려 나간 반동에 대가 물가에서 튕겨 오르자 은헌은 손에 힘을 주어 버텼다. 그사이 고윤이 조금씩 낚싯대를 흔들며 위로 들어 올렸다.
“다 올라왔습니다.”
고윤의 외침에 은헌은 수면을 봤다. 커다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눈으로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우리가 낚아 올린 게 잉어가 맞는가?”
은헌은 제가 알고 있는 잉어를 떠올렸다. 저리 크고 무섭게 생겼다곤 생각하지 못했다.
“용이 되려고 이제껏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보통이겠습니까.”
고윤은 미간을 좁히며 힘껏 낚싯대를 들었다. 은헌은 빙글빙글 꼬치에 꿴 고기를 굽듯이 낚싯대를 돌려 천잠사 끈을 한껏 감아올렸다.
바늘이 단단히 맞물린 건지 한참이나 몸부림치며 힘을 겨루던 놈이 마침내 늘어졌다.
은헌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그것을 뭍으로 끌어냈다. 잉어가 물가에 올라오자 고윤은 두 팔 걷고 실 끝을 따라 손을 내렸다.
고윤은 팔 하나론 안아 들기도 어려울 두꺼운 몸통을 붙들었다.
“잡았는가?”
못에서 멀찍이 물러나 잉어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잡아당긴 은헌은 그제야 낚싯대를 놓았다. 그는 다급히 고윤의 곁으로 다가와 품에 안겨든 잉어를 보았다. 지금껏 꿈속에서 본 잉어 중에서도 가장 큰 녀석이었다.
고윤은 천천히 물 밖으로 나오면서 입을 열었다.
소리도 없는 조용한 주가 입술 너머로 흘러나오자 잉어가 꼬리를 파닥거렸다.
고윤은 첫 번째 준비가 끝나자 은헌을 봤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꿈 가져왔습니다. 받아주실 겁니까.”
은헌은 픽 웃음을 흘렸다.
“약조했지 않은가, 지켜야지.”
그는 팔을 내밀었다.
이제 이것으로 고윤과 그 사이에 남은 인연은 끝이 난 것이었다. 어쩐지 시원섭섭하여 은헌은 웃었다. 콧날이 시큰했다.
고윤은 품에 안은 잉어와 눈을 마주치곤 이를 꽉 깨물고 있는 힘껏 은헌에게 내던졌다.
잉어가 허공에서 파닥대며 튀었다. 은헌은 제게 날아오는 잉어를 붙잡으려 팔을 뻗었으나 땅에서 튀는 것처럼 잉어가 튕기더니 그가 아니라 하늘로 솟구쳤다.
순식간에 머리 위로 날아오르듯 튀어 오른 잉어를 보며 은헌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커다란 놈이 꼬리를 흔들자, 검은 비늘이 희미해진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쿠그그그그긍! 쾅!
하늘을 찢어발길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사방이 번쩍였다.
잉어는 하늘로 다시 한번 있는 힘을 다해 튀었다. 은헌은 익숙하게 보았던 오색찬란한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쾅!
우레가 한 번 더 울렸을 때, 잉어의 모습이 변했다. 사람만 한 몸뚱이가 삽시간에 두꺼워지더니 순식간에 길게 위로 솟구쳤다.
연못 물이 죄다 하늘로 솟구쳐 용오름을 만들어냈다.
은헌은 거센 물보라에 팔을 들어 눈을 가리고 고윤을 찾았다. 고윤은 위로 날아오르는 용을 보며 계속해서 입술을 움직여 주를 외고 있었다.
“옵니다.”
은헌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팔을 뻗었다. 어디까지 있는지도 모를 높은 하늘로 솟구쳤던 용이 빠른 속도로 그의 품 안에 내리꽂혔다.
이러다간 꿈인데도 용에게 치여 죽겠구나 싶은 위기감에 은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윤은 용이 된 잉어가 무사히 대군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똑똑히 지켜보았다. 인간의 품에 알맞은 크기가 된 용은 뱀이 똬리를 틀듯 긴 몸을 말았다. 그러자 그 주위로 희뿌연 막이 생겨났다. 빠른 속도로 생겨난 그것은 완벽할 정도로 둥글둥글한 구슬처럼 변했다.
“이게 뭔가?”
은헌은 팔로 다 안아 들어도 벅찰 정도로 큰 진주와 비슷한 정체 모를 것을 확인했다.
“조금 전에 낚아 올린 겁니다.”
“하면 내가 지금 용을 잡은 건가?”
고윤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되었건 낚았으면 되었지요.”
은헌은 한눈에 다 담아내기도 어려운 구슬 같은 것을 안아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오래 실랑이를 벌였는데 이리 품에 안아 들고 있으니 그냥 처음부터 순순히 받았으면 어쨌을까 싶었다.
“어찌하여 그런 얼굴입니까?”
고윤의 물음에 은헌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고 싶지 않은데. 상황이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그리되는군.”
고윤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뭐, 후회만 하기에도 인간의 시간은 짧긴 하죠.”
“그렇지. 그나저나 인제 이걸 어찌한담.”
은헌은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커다란 여의주 같은 것을 내려 보았다. 예전부터 태몽을 받으면 어찌할지 생각해 왔지만, 막상 받으니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겐 소용도 없고, 선물로 줄 수도 없고 말이네.”
“꿈값을 받고 팔 수는 있지요.”
고윤은 몸을 돌려 남서쪽을 보았다. 그쪽 하늘은 빛이 찾아들기 시작한 다른 곳과 달리 여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들이 태몽을 낚는 동안에도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알아보지 못하는 건지 사기가 고스란히 궁궐 위를 헤매고 있었다.
아침에 세자빈을 볼 수만 있었어도 진즉에 끝났을 일인데 말이다.
은헌도 고윤이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꿈인데도 웬일로 근처가 아니라 멀리까지 내다보였다.
캄캄한 밤 속에서 궐이 보였다. 화려하고 밝은 것은 아니더라도 곳곳에 피어오른 불길이 반딧불처럼 반짝였다.
그는 조금 저 고윤이 했던 말의 다시 입에 올렸다.
“꿈을 판다라.”
“옛 고사에도 있지 않습니까. 사료에 적힌 일이니.”
은헌도 스승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꿈 때문에 팔자가 뒤바뀐 그 자매 이야기 말이지.”
“예.”
은헌은 궐을 다시금 보았다.
문득 이번 세자의 탄신연 때는 구해둔 선물을 전하지도 못하겠단 생각이 났다. 그때가 되면 그는 이미 죽었거나, 멀리 귀양길에 올라 유배 가 있을 터이니 말이다.
* * *
동궁전을 금군이 겹겹이 둘러쌌다.
나라의 왕은 임금이지만, 동궁전은 다음 왕이 거처하는 곳이라 군사라 하더라도 이렇게 몰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익위사들은 단단히 각오하고 동궁의 문의 다 막아섰다.
“저하!”
영의정이 담장 밖에 서서 세자를 목 놓아 불렀다.
그만이 아니었다. 새벽 일어난 소란에 입궐할 수 있는 이들은 죄다 궐에 들어와 있었다. 대군이 숨을 거두고, 중전께서 금군의 손에 이끌려 감금당하고, 세자는 의금부를 습격했다. 습격한 것도 모자라 국문을 받기 전 숨을 거둔 죄인을 빼내 궐에 들이고 동궁 문을 단단히 걷어 잠갔다.
폭풍 같았다.
“저하! 소신이옵니다!”
영의정은 자신의 막내아들이 죄인의 신분으로 있다는 말에 백방으로 사람을 만나러 다니다 너무 놀라 입궐한 상태였다.
“저하! 소신이 들어갈 수 있도록 허하여 주십시오!”
영의정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막고 싶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간청했다.
죽은 아들이다. 죽은 이를 데려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자식의 시신이라도 온전히 받아가고 싶었다.
“저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문을 부숴라.”
엎드린 영의정은 건조하고 매서운 말투에 머릴 들었다.
왕이었다.
“소신…….”
“인사는 되었다. 지금 그럴 기분도 아니니.”
왕은 지친 얼굴로 동궁전을 보았다. 중전은 감금되기 무섭게 목을 매었다. 울컥해 방문을 박차고 들어 쏘아붙일 작정이 아니었다면, 죽은 지어미를 끌어 내릴 뻔하였다.
왕은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수십 년을 같이 살았는데 한 번도 그 몸이 그렇게도 말라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중전의 눈동자는 이미 살아갈 의지라곤 없이 희미했다. 허튼짓 못 하게 감시하라 이른 뒤 그는, 세자를 처벌하라며 해도 뜨지 않은 새벽부터 입궐한 이들을 마주쳤다.
아들 중 대군은 이미 죽고 세자 하나 남았는데 그마저 벌하여 폐하면 과인더러 천년만년 살라는 소리냐며 버럭 소릴 지르고 온 참이었다.
“뭣들 하느냐. 당장 문을 부수지 않고!”
동궁전은 나라의 내일을 키우는 곳이었다. 세자는 머지않아 왕이 될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의금부를 건드린 것은 세자답지 않았다. 그에게 반기라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놈이었다.
왕은 굳게 닫힌 문을 보았다.
익위사들은 금군을 경계하여 막으려 했지만, 궐 안에서, 그것도 왕 앞에서 칼을 휘두르진 못하였다.
빗장이 부서지자 왕은 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는 신도 벗지 않고 그대로 대청에 올라 세자의 처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었을 뿐인데 전혀 다른 세상인 듯했다.
왕은 문을 건드렸던 손을 들었다.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허공에 퍼졌다. 겨울의 한복판에 다다른 듯했다.
그는 세자를 찾았다. 정신없이 손을 움직여 기이하게 얼어붙은 몸을 주물러 녹이고 있는 등이 보였다.
“세자는 일어나라.”
그는 입을 열었다.
“세자! 과인의 명이 들리지 않는 게냐!”
하나같이 어찌 이 모양이냔 말이다. 중전이 은헌의 은인이라며 어린 세자를 끼고 키웠을 때부터 이랬던가 싶었다.
“상선! 은헌대군을 데리고 나가거라.”
왕은 곁에 선 상선에게 명했다.
“아직!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세자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얼음 창고 같은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그가 지친 목소리를 냈다.
왕은 자신의 장자를 보았다.
“은헌은 죽었다. 의관이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였다 하지 않았누.”
“아닙니다.”
“세자.”
왕은 혀를 찼다.
“너는 세자빈을 지키지도 못했고, 중전도 지키지 못했다. 네 아우는 초저녁에 이미 죽었다. 너는 아무도 지키지 못하였다. 인제 와 시신을 지켜 무엇 하겠느냐.”
“아바마마. 세자빈의 열은 내리고 있고, 어마마마께옵서도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은헌 역시 곧 돌아올 거고 그 아이가 빈궁을 치료할 방법 역시 찾아올 겁니다.”
왕은 코웃음 쳤다.
“죽은 영상의 자식을 데려간 이유가 고작 그것이냐. 그 허무맹랑한 이유 탓에?”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 때문에 은헌과 정 참군이 의금부의 조사를 받았사옵니다.”
세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리석구나. 과인이 세자의 교육을 헛 시켰도다. 숨을 멈춘 지 몇 시간이나 지난 아이가 어찌 살아와!”
“한 번만!”
세자가 소릴 높였다.
“한 번만 은헌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하루도 바라지 않습니다. 어찌 이리도 쉽게 그 아이를 내치시기만 하십니까.”
“그게 왕이다.”
“그럼 저는 왕 될 자질이 없군요.”
세자는 머리 위의 관을 벗었다.
“소자를 폐하셔도 좋습니다. 그리되어도 좋으니 은헌이, 제 아우가 길 잃지 않고 돌아올 수 있도록 잠깐의 시간을 주시옵소서. 돌아오면 모든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세자 위를 걸고 올린 말에 왕은 분통을 터뜨렸다.
“어찌 이리도 하나같이!”
* * *
“이상하군.”
은헌은 궐문을 올려보았다. 꿈일 텐데 굉장히 생동감이 넘쳤다.
“들어가시죠. 곧 묘시입니다.”
고윤은 뒤에서 걸음을 재촉했다. 은헌은 알았다고 대답하곤 다시 문을 보았다. 굳게 닫혀 있었다.
“이거 통과할 수 있나?”
문이 열릴 시각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꿈인데도 굳건했다.
“……가고 싶으시면요.”
고윤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은헌은 용을 잘 안아 들고 눈을 질끈 감은 뒤, 문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통과했네!”
“예, 예. 경하드립니다.”
뒤따라 들어오며 고윤은 성의 없는 손뼉을 쳤다. 그걸 보면서 은헌은 픽 웃음을 흘렸다.
“가세.”
동궁전은 말 그대로 동쪽에 있는 궁이었다. 안으로 찾아가는 길이 멀고 복잡했지만, 문도 통과했는데 담을 못 넘을까 하며 은헌은 앞으로 쭉쭉 걸어 나갔다.
고윤은 가만히 서 있다가 무언가에 막힌 듯 돌아오는 은헌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는 발아래 놓인 길을 살폈다. 법도에 맞춰 지어진 궁은 바닥 돌을 따라 길이 놓여 있었다. 가운데 볼록 올라온 왕만 거닐 수 있는 길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무관이 다니는 길이었다.
고윤은 길의 중앙에 발을 내디뎠다.
“자네 지금 뭐 하는가. 거긴.”
은헌은 당황하여 고윤을 말리러 달려왔다.
“거긴 오르면 안 되네. 한성부 관리가 어찌 궐의 법도도 모르는가.”
단호한 말투로 꾸짖는 은헌을 무시하고 고윤은 앞으로 걸었다. 아까 평소 다니던 길 따라 걸어간 은헌이 통과하지 못한 곳까지 말이다.
그를 본 은헌의 눈이 바닥을 향했다.
고윤은 바닥 돌을 찼다.
“여기로만 갈 수 있는 모양입니다.”
은헌은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이내 발을 옮겼다.
“꿈인데 이를 가지고, 부왕께서 죄를 묻지는 않으실 테지.”
그는 조심스레 움직였다. 조금 전 그를 밀어내던 것과 같은 저항은 없었다. 편히 걸을 수 있었다.
“조금 더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고윤은 얼른 가자는 듯 재촉했다.
일단 방법을 찾자 은헌은 고윤을 데리고 서둘러 동궁전으로 향했다. 세자빈의 병에 관한 말도, 그 역관이 화국에서 가져왔다는 함에 대해서도 세자에게 일러주어야 했다.
동궁전이 가까워지자 은헌은 또다시 멈춰 섰다.
새벽인데도 대낮같이 밝혀둔 횃불과 금군이 보였다. 세자가 거하는 춘궁을 금군이 지키는 것도 아닐 텐데 무언가 이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그는 고윤을 보았다.
“혹 내가 지금 악몽을 꾸는 것인가?”
금군들이 죄다 저의 꿈에 끌려와 있지도 않을 텐데 오늘따라 그의 꿈에 불청객이 많았다. 궐에서 머리가 깨진 채 쓰러져서 잠든 여파인가 싶기도 했다. 새벽이 지고 나면 저들에게 끌려 나갈 테니 말이다.
“누구냐!”
은헌은 헛웃음을 흘렸다.
제 꿈인데도 불청객이 된 듯했다. 그는 앞으로 나섰다. 금군 대장의 얼굴이 보였다.
“이보시게, 날세.”
은헌이 입을 여느 순간 금군 대장이 칼을 빼 들었다.
“산 자면 이리 오고 귀신이면 썩 물러나라!”
은헌은 우습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여 팔을 아래로 내렸다. 그는 앞으로 조금 더 걸어 나갔다. 품에 안은 것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런가 보다 하긴 했는데 가까이 갈수록 금군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나라니까.”
은헌은 흔들리는 불빛이 일렁거리는 가장 밝은 곳으로 나섰다. 이쯤이면 알아보지 않을까 했더니 소란만 더 커졌다.
금군 대장은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가겠네.”
은헌은 그리 말하곤 안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중간중간 경악을 넘어 기절하기 직전의 얼굴로 그를 살펴보는 이도 있었다. 그는 고윤을 힐끗 보곤 계속해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으로 갈수록 아는 이가 늘어났다. 막아서는 익위사를 보며 은헌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등 뒤에서 고윤이 해가 뜨겠다며 재촉하자 멈추지도 않았다.
그렇게 둘은 동궁전에 수월하게 들어섰다.
은헌은 저가 만나러 온 세자 대신 왕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버릇처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소자 은헌이 아바마마를 뵙사옵니다.”
그는 먼저 고개를 푹 숙인 뒤에야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소자가 이리 인사를 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은헌은 사죄하며 눈치를 살폈다. 꿈이든 아니든 왕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너는 누구냐?”
은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바마마, 소자이옵니다.”
그는 사위가 어둑해 잘 보이지 않는가 싶어 한걸음 또 앞으로 나섰다.
왕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은헌.”
“예, 소자이옵니다.”
꿈이니 다정히 한 마디라도 해주시지. 여전히 화난 얼굴이라 은헌은 섭섭하여 웃었다.
왕은 실소를 터뜨렸다.
“세자!”
은헌은 세자를 부르는 소리에 안심하였다. 형님이 오면 이 태몽을 전하고, 자초지종 앞으로 해야 할 방법도 일러주고 그 뒤에 꿈에서 깨면 모든 것이 끝날 터였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러나 방에서 나온 세자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발이 허둥지둥 꼬인 걸음이 되었다.
“저하!”
동궁전에 있는 세자가 어찌 저리 엉망인 몰골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은헌!”
세자가 그를 보자마자 버선발로 내려왔다. 그러곤 팔을 뻗었다. 세자의 손이 은헌을 건드리는 순간 몸을 스쳐 그대로 지나쳤다. 주위에서 경악이 터졌다. 일그러지는 형님의 얼굴에 아우는 급히 입을 열었다.
“저하, 지금 제가…….”
은헌은 고윤의 힘을 빌렸음을 설명하려 고개를 돌렸다가 말을 멈췄다. 고윤의 몸 너머로 뒤에 선 이들이 보였다. 마치 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몸이 투명했다. 조금 전까지도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대감, 시간이 없습니다.”
멀리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은헌은 세자를 본 뒤 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동궁전 내의 익위사와 동궁전 담 밖의 금군을 떠올렸다.
그는 고개를 떨궜다. 궐이 아니라 종묘에선 가운뎃길을 조상신 걸으라며 왕조차 오르지 못하게 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신도였다. 귀신도 신은 신이었다.
고윤은 처음부터 시간이 없다고 했다.
복잡한 속을 빠르게 진정시킨 은헌은 세자를 보았다.
“저하. 아우가 전에 오래도록 기이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그러다 꿈에서 낚시를 배웠다고.”
“그래.”
은헌은 웃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용을 감싼 구슬이 흔들렸다. 세자는 급히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은헌이 먼저 입술을 떼며 품에 든 것을 내밀었다.
“낚으려던 것이 원래는 검은 비늘이 뚜렷한 잉어였는데, 잡아서 끌어 올려 보니 용이지 뭡니까.”
세자는 은헌을 보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다가오는 탄신연에 저하께 올리고자 서책을 준비하였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드리지 못할 듯하고, 대신 이것이 지금 가장 필요할 듯하여서요. 잉어 꿈도 태몽이고, 용꿈도 태몽이라. 한데 그냥 드리려 하니 저이가 제게 꿈값을 꼭 받아야 한다지 뭡니까. 그래야 확실히 형님의 태몽이 된다고.”
은헌의 말에 세자가 힘겹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으로 값을 치를까.”
은헌은 여전히 높은 곳에 계신 부왕을 보았다. 그는 숨을 깊이 삼켰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니 그저 흉내만 낼 뿐인데도 조금은 긴장이 가셨다.
“어릴 적 제가 목숨 빚을 졌는데 아직 그 은혜를 갚지 못하였으니 그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고윤이 있는 곳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은헌은 세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품에 안은 것을 건네며 빠르게 속삭였다.
“정 참군을 부탁드립니다, 형님. 제게 귀한 사람이라 저하 말곤 후일을 맡길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래, 내 너 원하는 대로 다 해줄 것이다.”
세자는 울음을 삼키며 답했다.
“그럼 되었습니다. 이제 그 태몽은 형님의 것입니다.”
은헌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세자의 손으로 넘어간 알이 흔들렸다. 그리고 오색찬란한 안개가 흘러나왔다. 단단하게 보이던 알껍데기가 거품처럼 흔들렸다.
모두가 침묵했다.
알에서 빛이 터져 나오듯 밝아졌다.
그리고 세자는 제 손의 알이 바닥에 흐르듯 녹아내리는 것을 보았다. 꿀처럼 흘러내린 것은 바닥에 고이는 게 아니라 그릇에 형상을 이뤄 채워지듯 뚜렷한 형태를 보였다.
발이 보였다. 그리고 점점 차올라 마침내 머리끝까지 다 드러난 형태는 사람과 같았다. 세자의 눈이 커졌다. 은헌도 입을 벌렸다.
그 자리에선 고윤만이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은헌은 용의 정체를 그제야 알아챘다.
그가 본 선비 귀신이었다. 앳된 얼굴의 선비는 공손히 두 손을 모아 그에게 인사하곤 세자를 보며 또 한 번 인사했다. 그 뒤 땅을 박차듯 가볍게 뛰었다.
품 안에서 잉어가 튀었을 때와 같았다.
하늘로 가볍게 뛰어오른 선비는 순식간에 거대한 용이 되어 솟구쳤다. 검은 비늘이 반짝이더니 용은 동궁전 위에서 긴 몸을 한 바퀴 돌고는 그대로 세자빈이 머무는 지붕으로 내리꽂혔다. 그 의미를 모르는 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액이 걷혔군요.”
고윤은 하늘을 확인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조금 전까지도 용이 떠 있었던 하늘을 올려보았다. 잔뜩 흐려져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던 하늘이 깨끗하게 걷혀 있었다. 서산으로 저무는 달이 은은한 빛으로 세상을 밝혔다.
“그럼 이제 할 일을 다 한 게로군.”
은헌은 태몽을 건네줌으로써 제가 할 일이 정말로 끝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시간도 다 되었습니다.”
고윤의 말에 넋 놓고 섰던 세자가 화들짝 놀라 대군을 보았다. 은헌은 시선이 마주치자 픽 웃었다.
“저승길 가는 길이 심심치는 않겠군.”
그는 형님을 보곤 염려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전에 어마마마께 인사를 올리고 가도 될까?”
은헌은 고윤에게 물었다.
세자도, 부왕도 뵈었는데 중전을 뵙지 못하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네도 부친께 인사는 해야지.”
그는 멍한 얼굴로 선 영의정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고윤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보았다.
“뭐, 꼭 하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정말로 시간이 촉박하여서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서 닭 울음이 들려왔다.
첫닭이 울었다.
고윤은 영의정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세자를 보았다.
“송구하오나 저하, 대군 대감의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세자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저가 나온 방을 돌아보았다. 더는 주무를 수조차 없을 만큼 딱딱하게 얼어붙은 은헌의 몸이 그곳에 있었다.
“가시죠.”
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죽어보긴 처음이라 많은 것이 염려되었지만, 고윤이 같이 있으니 퍽 안심이 되었다. 저승 가는 길이 그리도 험난하다던데 잘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윤은 두 번째 닭 울음이 들리는 순간 은헌의 등을 퍽 하고 밀쳤다. 방심하고 있던 대군의 몸이 그대로 기울어졌다. 팔을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며 고윤은 가볍게 발을 걸었다. 앞으로 넘어간 은헌의 몸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은헌!”
세자가 놀라 외쳤다.
고윤은 저만치 서 있는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사고를 쳐도 크게 쳤으니 당분간 뵙지 않는 게 좋을 듯한데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버지.”
영의정이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윤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뗐다.
“옥사 바닥이 몹시 찹니다. 입이 돌아갈 것 같으니 부디 솜이불 하나만 넣어주십시오. 그게 안 되면 국밥이라도.”
은헌의 몸은 동궁전에 있을 테니 깨어나면 의관이 알아 잘 보살펴 줄 테고, 그는 어쨌거나 의금부 감옥 안일 터였다. 굶은 데다 기운까지 막 써댔으니 한 달은 누워 요양해야 할 텐데 깨자마자 고생할 가능성이 더 컸다.
말이 끝나자마자 세 번째 닭 울음이 울었다. 고윤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발아래 그림자처럼 늘어나 있던 것들이 움직였다. 모두가 알아채지 못한 움직임으로 책벌레들이 퍼져 나갔다.
고윤은 주(呪)를 외웠다.
애초에 사람의 입을 타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 기록마저 남아도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니 기억을 갉아 먹으라 부러 보냈다.
그는 마지막으로 왕이 있는 곳을 보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아침 안개에 스며들 듯 희미해져 이내 연기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꿈처럼 사라진 두 사람의 행방에 누구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현실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세자는 머리 위로 밝아지는 아침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밤이 지나갔다.
동궁전의 뜰은 고요했다. 이제 뭐가 어찌 되는 건지는 누구도 몰랐다.
그 순간 은헌과 고윤을 숨겨둔 방을 지키고 있던 의관이 급히 문을 열고 나왔다.
“저하!”
의관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대군 대감께서! 대감의 호흡이…… 다시 돌아왔나이다! 맥도 뜁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의관이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세자는 고개를 떨궜다. 순간 밀려오는 모든 것들이 그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기도 전에 왕을 향해 몸을 돌렸다. 숨이 끊겼던 은헌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또다시 죽을 위기가 찾아왔다는 말이었다.
“전하.”
영의정 역시 비슷한 얼굴로 왕을 보았다.
왕은 동궁전 뜰에 선 이들이 자신을 보며 숨죽인 것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마루 위에서 섬돌을 밟고 아래로 내려섰다.
“아바마마.”
세자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왕은 팔을 들어 올렸다.
“과인이 피곤하여 이만 쉬어야겠구나.”
왕은 그리 말하곤 저를 따르는 상선을 보았다.
“너는 교태전에 들렀다가 오너라.”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상선이 허리를 숙였다. 왕은 다시 세자를 보았다.
“밤이 길었으니 꿈도 길었구나. 그렇지 않으냐.”
세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새날이 밝았으니 지난밤 꿈은 금방 희미해지는 것이겠지요.”
“그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세자는 고개를 숙였다.
왕은 앞서 걸어 나가며 영의정을 보았다.
“영상께서 과인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영의정은 평소의 담담한 어조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럼 되었군. 다들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라 이르거라.”
왕은 그리 명령을 내린 뒤 동궁전을 빠져나갔다.
“살펴 가시옵소서.”
세자는 부왕을 배웅하고 곁에 선 내관을 보았다.
“너는 달려가 어서 어의 영감을 불러오너라.”
“지금 다녀오겠습니다.”
동궁전 궁인들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이들을 보낸 뒤 세자는 영의정을 찾았다. 영의정 역시 세자를 보고 있었다.
“지금 바쁘시오?”
영의정은 냉한 얼굴로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그거 잘되었군. 내가 영상과 상의하고 싶은 것이 있소. 조반이나 들며 이야기합시다.”
세자는 평온한 태도로 웃었다. 영의정은 잠시 침묵을 지켰지만 이내 잘되었단 태도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신 역시 저하께 아뢸 것이 있습니다.”
영의정은 그리 말하곤 왕이 간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래전의 일이긴 하온데 저하께서도 아셔야 할 듯하여서 말입니다.”
세자는 눈썹을 가볍게 들썩였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라 하고 싶은데 내 처소에 지금 객이 많은지라. 만강재로 가세.”
둘은 동궁전에 달린 전각으로 옮겨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