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1부 비화담록(飛禍擔錄) 3권) (10/35)

八。(2)

은헌은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았다. 아직 깊은 밤처럼 보였다. 그들이 사는 하늘과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뗐다.

“자네 집으로 가지.”

“남산골요?”

“그래.”

“그리로 가면 도성 안에 들어온 기록을 남기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내관을 붙이셨다면서요? 들키면 곤란한 것이 아닙니까?

묻고 싶은 질문을 삼키고 고윤은 둘러 물었다.

“그야 그렇지만 자네 눈이 조금씩 풀리고 있거든.”

은헌은 아까부터 한쪽 눈꺼풀이 떨리고 있는 고윤의 얼굴을 봤다. 잠을 못 자 그런 것인지 눈썹 위로 주름이 깊게 잔뜩 생겨 있었다. 겹겹이 주름진 얇은 눈꺼풀을 보고 있자니 저 혼나지 않으려고 이 사람을 괜히 고생시키는 것도 우스웠다.

“자네 집 가서 한숨 자고 새벽에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는가?”

어차피 두 번 움직여야 하는 거라면 말이야.

은헌은 그리 덧붙였다.

고윤은 차라리 은헌을 일찍 데려다주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권유를 받아들였다. 저 피곤한 모습을 보고 배려해 주는 것이니 말이다.

“그럼 제집으로 뫼시겠습니다. 많이 누추하지만요.”

남산골은 기와 올린 집이 애초에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정상 고윤이 구한 집은 외곽의 좁은 터를 가진 곳이었다. 혼자 살아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조차 없었다.

“담 있고, 집 지붕도 있으면 금상 누각이 따로 없지.”

“이불 정도는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실없는 농을 섞으며 그들은 손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도성으로 돌아오자 은헌은 정말로 저가 살던 곳으로 왔음을 온몸으로 알았다. 바람 냄새부터 달았다. 다 똑같은 사람 사는 세상인 줄 알았던 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돌아왔군.”

하룻밤 일장춘몽에 가까운 밤 나들이였다. 은헌은 저가 누린 짧은 시간을 음미하곤 미소 지었다.

고윤은 집이 내려다보이는 산길에 서선 길을 살피곤 그제야 손을 놓았다. 은헌이 고개를 떨궈 체온이 떨어져 나간 부분을 살폈다. 어쩐지 허전하단 감각에 그는 픽 웃음을 흘렸다. 저의 몸에 이리 손을 댈 수 있는 자가 흔하지 않아 그런지 이렇게 느끼는 타인의 체온이 참으로 낯설었다. 그게 고새 적응된 모양이다.

“가시지요.”

고윤 역시 제 손을 폈다가 움켜쥐고는 손바닥에 남은 체온을 떨어냈다.

자박자박 흙길을 걷는 걸음이 나란히 붙어 섰다. 집 근처 살았던 사람들은 죄다 이사하고 빈집을 사들인 채 내버려 두다 보니 집으로 갈수록 고요했다. 키우는 짐승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바람이 점점 서늘해졌다. 그게 밤공기 탓은 아닌 게 분명했다.

은헌은 제 눈에 보이는 희뿌연 사람들을 애써 외면했다. 전에 거리에 다녀왔을 때도 충분히 주의를 받았었다. 아는 척했다간 거머리처럼 들러붙을 수 있으니 짧게라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중요했다. 고윤이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달빛에 늘어선 그림자들은 성성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있는데 정작 사람이 북적거린다는 느낌은 없다.

이것이 고윤의 세상이었다.

은헌은 지금의 감각을 잘 새겨놓았다. 사람을 알아갈 때, 사람을 둘러싼 세상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도 없었다.

“이런.”

고윤은 집이 가까워져 올수록 앞서 걸어가다가 짧게 혀를 찼다.

“이보게.”

그가 걸음을 멈추자 은헌 역시 붙어 멈춰 섰다.

“왔습니까?”

오랜만에 보는 선비 귀신이었다.

선비 귀신은 아직 은헌의 눈과 귀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평상시처럼 불쑥불쑥 나타나 말을 걸었다.

나중에 오라며 피하면 뭔가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이유로 고윤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요즘 바쁘게 돌아다니는군.”

선비 귀신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모로 기울여 옆에 선 은헌을 봤다.

“꿈에서 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 같이 나들이까지 다니는 것인가?”

저가 태몽을 주려는 자의 얼굴을 살피며 선비 귀신은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전에 제게 일러주신 일로 여러 사정이 있어 그리되었습니다.”

대군 저의 연못에 잉어가 있다 알려준 것은 눈앞의 선비 귀신이었다. 덕분에 낚시를 시작했고, 은헌이 낚시에 흥미를 보이면서 오늘 일까지 이르렀다.

“낚시는 잘 되어가고?”

“그쪽도 여러모로 사정이 많습니다.”

꿈속이라 깊은 물도 괜찮으니 못에 뛰어들어 잉어 새끼를 붙잡을까 생각도 해 봤던 고윤이 한숨을 터뜨렸다. 현실에선 허리께나 올 법한 작은 못이라도 꿈에선 용이 될 잉어가 사는 곳이었다. 그런 터는 보통 깊이라기보단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곳도 종종 있었다. 감각이 사라져 앞뒤 위아래 구분조차 불가능한 세상과 이어져서 말이다. 그러니 낚시가 답이었다.

“쉬운 일이 아니니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시지요. 게다가 마음이 바뀌어 거절하지 않기로 약조도 받은 참이라서요.”

“그래?”

선비 귀신은 은헌을 다시 한번 보곤 되도록, 하루라도 더 빨리 잉어를 잡아달라 부탁했다. 그러곤 언제 왔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고윤은 선비 귀신이 확실하게 사라진 것을 보고서야 은헌을 돌아봤다.

갑자기 귀신이 코밑까지 얼굴을 들이댄 탓인지 무척이나 창백한 얼굴이었다.

“대감?”

은헌은 새파래진 얼굴로 고윤을 보았다.

“방금 그자가 내게 태몽을 가져다주라 부탁한 자인가?”

“그렇습니다.”

은헌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자…….”

“예.”

고윤은 대군이 무얼 보았는지 궁금했다. 생각해 보니 은헌이 직접 그 선비 귀신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뭔가 알게 된 건가? 기억을 되찾고 나면 그 역시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었으나 지금은 작은 단서도 중요했다.

“아니, 아닐세. 그럴 리가 없지. 내 무언가 착각한 게 틀림없네.”

“무엇을 말입니까?”

고윤은 사소한 것이라도 알려달라 했다. 은헌은 조금 전까지 그 선비 귀신이 서 있던 자릴 노려보았다. 웃음기 따윈 없는 서늘하고 냉혹한 눈이었다.

“내 알기론…… 세자빈의 사가에 젊은 나이에 죽은 동복형제는 없는데 얼굴이 지나치게 닮았지 뭔가.”

“빈궁 저하와 말입니까?”

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니…… 사내니 내가 알고 있는 그와 더 닮았다 해야 하나?”

최근에 보았기에 더 그리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은헌은 역관과 함께 다니다 마주쳤던 얼굴을 기억했다. 이미 죽은 자의 나이를 따지려니 좀 낯설긴 했으나 귀신 쪽이 나이가 좀 더 어려 보인단 것만 빼면 눈매며 콧대, 입술까지 빼놓지 않고 얼굴이 닮아 있었다.

“그렇게나 비슷합니까?”

고윤은 선비 귀신을 떠올렸다.

“저는 입궐할 일이 드물어 먼발치에서 한 번 뵌 것이 전부이온지라.”

관직에 있는 데다 입궐할 일이 꽤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독 입궐해야 할 일이 있으면 물러나거나 남에게 떠넘기기 바빴다. 년에 몇 번 반드시 궐에 들어야 할 일이 아니면 더더욱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쪽은 생각지도 못했다.

“착각일 수도 있어. 아까도 말했지 않은가. 그 댁에는 어려서 죽은 형제가 없다네.”

“꼭 형제자매가 아닐 수도 있지요.”

그 선비 귀신이 언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고윤은 그렇게 말했다.

은헌은 픽 웃었다. 그러곤 고윤의 외관을 살폈다. 남부럽지 않은 명문가 자제라 하기엔 지나치게 검소한 차림새였다. 애초에 그런 것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 듯했다.

“차려입은 것이 최근의 것이라네.”

상재를 천시하는 나라에서 대군은 시전 구경을 즐겨 다니며 물건 보는 눈을 키웠다. 쫓겨날 때를 대비함이었다. 굶어 허덕이며 제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살아남는 것보다 그가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나았다. 어디로 쫓겨날지 모르니 어떻게든 살아남는 법을 익혀야 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법을 부러 공부했다.

어린 시절엔 보모상궁과 함께 멀리 유배 보내질 거라 생각했으니 당연한 생존 본능이었다. 거기까지 말한 은헌은 자세한 설명을 기다리는 듯 서 있는 고윤을 보았다.

잠이 달아난 얼굴로 서 있지만, 조금 전까지도 졸음을 못 이겨 연거푸 하품을 늘어놓던 상태였다.

“예서 떠들지 말고 일단 집으로 가세. 밤새워 이리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은헌은 손을 뻗어 이번엔 반대로 그가 고윤의 손목을 붙잡아 이끌었다.

집에 다다르자 귀가 어두운 하인이 용케도 주인이 늦게 돌아온 것을 알아채곤 마당에 나왔다. 그러곤 잠자리를 준비해 줬다.

은헌은 좁은 방에 바짝 붙여 깔린 요를 보고 웃었다.

“준비된 방이 하나라서 말입니다.”

고윤은 그런 그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시중드는 일이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지만.”

은헌은 갓을 풀어 내밀었다. 그도 제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이 많이 없었으나 옷을 입고 벗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다. 고윤은 옷을 받아 차곡차곡 정리하여 벽에 걸었다.

“처음치곤 잘하는군.”

“자랄 때부터 시중드는 자를 곁에 두지 않아서요.”

“혼례를 치를 생각은 없고?”

어째서 이야기가 그리로 튀는지 모르지만, 고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난 성질이 음기가 강해, 여인을 곁에 두면 여인에게 좋지 않습니다.”

집에서도 몇 번 혼담을 받았으나 멀쩡하던 규수가 그와 묶이는 순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자 앞다퉈 파혼을 청해왔다. 몇 번 그러고 난 뒤엔 혼인서도 들어오지 않았고 집에서 나온 뒤엔 아예 신경을 껐다.

“평생 이리 살 테니 손에 익혀두는 것이 편하지요.”

“과연 그렇군.”

은헌은 코웃음을 흘렸다. 그의 팔자도 별반 다르지 않아 남 말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옷을 가볍게 입고 그는 제 몫의 이부자리에 앉았다.

이불에 몸을 붙이자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그 거리에서 보낸 시간도 있고, 시간이 다른 거리에서 정신없이 쏘다니기도 했으니 꽤 피곤한 상태기도 했다. 고윤도 고개를 돌려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일단 눈 좀 붙이세.”

남하고 같은 방에 눕는 것도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둘은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웠다.

고윤은 캄캄한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몹시도 무거웠다. 이대로 잠들면 안 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해도 됩니까?”

은헌은 옆으로 돌아누웠다. 모로 눕자 풀린 눈으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고윤의 얼굴이 보였다.

“별건 아니네. 그자가 입고 있는 옷감의 무늬가 최근의 것이란 것을 알았을 뿐이네. 그리고 소맷귀도 말이야.”

통 알아듣지 못할 소리였는지 고윤의 미간에 내 천 자가 새겨졌다.

“저잣거리 돌아다니는 소위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자들의 흔한, 사치스러운 풍속이 그자가 입고 있는 옷에도 보인다는 거네. 신발 뒤축의 당초문(唐草文)도 그렇고, 그자가 비껴 차고 있던 장도의 칼집이 검은 물소 뿔이란 것도 그렇지.”

차려입은 것이 다 비슷해 보여도 세심히 살피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은헌은 그것을 보모상궁과 침방 출신의 나인에게 배웠다.

“그럼 최근에 죽었단 겁니까?”

“그러니 더 이상하지.”

은헌은 세자빈의 사가에 초상이 있었단 소린 듣지 못하였다. 그리도 닮은 얼굴이면 직계는 될 텐데도 말이다.

고윤도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은헌이 수상하게 여길 법도 했다. 그는 저가 잃어버린 기억에 생각이 닿았다. 여전히 그때 당시의 기억 빈자리에 나빴다는 느낌은 없었다.

“기억을 되찾으면 그자와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떠오를 겁니다.”

“그래야지.”

“새벽 별 지기 전에 일어나셔야 하니 이만 주무십시오.”

고윤은 어둠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몇 마디 더 떠들긴 했지만, 둘은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어찌 일어날 수는 있을까 염려했는데.”

은헌은 옷을 입으며 가라앉아 걸걸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동네 첫닭이 유난히 빨리 웁니다.”

그것도 매우 우렁차게 울었다. 닭 울음에 고윤은 비척비척 일어나 씻은 뒤 채비를 마쳤다. 하인이 준비한 데운 물을 공손히 은헌에게 건네주자 은헌도 마루 위에 앉아 씻었다. 고윤은 그 옆에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기다렸다가 건면을 주고, 머리도 빗겨주고, 옷 입는 것도 도와줬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서툰 손길이었다. 은헌은 머리끄덩이가 당겨지는데도 군말 없이 앉아 시중을 받았다.

“다음엔 그냥 댁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손이 많이 가 몹시도 귀찮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고 고윤은 은헌을 보았다. 은헌이 키득거렸다.

“나도 이런 시중은 처음이라네.”

고윤은 눈을 가볍게 흘겼다. 잠깐이지만 조금이라도 눈을 붙였더니 몸 상태가 훨씬 나아졌다.

“그럼 이제 가시지요.”

새벽에도 할 일이 많아 서둘러야 했다. 은헌은 재촉받고 일어섰다. 그러자 고윤이 손목을 곧장 붙잡았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세상이 바뀌었다.

이전에도 그랬듯 주변의 모든 것이 까마득하게 멀어졌다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기이한 감각에 은헌은 현기증이 나 비틀거렸다. 확실히 인간의 몸으로 따라다니기엔 벅찼다.

그러나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 괴로움이 그대로 날아갔다.

경천동지할 광경이었다.

그의 키보다 훌쩍 큰, 거대한 꽃이 보였다. 송이송이 핀 꽃 몽우리가 사방에 만개했다.

“여긴 대체.”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가 모르는 곳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무척 좋은 곳이죠.”

은헌은 비단결 같아진 고윤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보고 있자니 세상 모든 시름이 날아갈 광경이었다.

“잠시 계십시오. 이슬을 가져올 테니.”

고윤은 그리 말하고 눈앞에 보이는 연꽃 봉우리 중에 적당한 것을 골랐다. 그러곤 방바닥만큼이나 넓은 연잎을 조심히 뛰어넘어 가까이에 소담히 핀 흰 꽃을 골랐다. 연은 밤에 피었다가 낮이 되면 꽃잎을 닫아 멍울지는 것이라 그는 겹겹이 포개어진 꽃잎에 귀를 가져다 대곤 가볍게 꽃잎을 두들겼다. 안에서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그는 제 얼굴만 한 것을 붙잡고 손칼로 아래를 그어 꽃송이째 땄다. 무게가 있었으나 본래의 자리까지 돌아가는 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은헌은 하늘과 땅이 아닌 꽃밭이 어디까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싶은 세상을 홀린 듯 구경했다. 인간 발이 닿는 곳은 아닐 터다. 이렇게 큰 연꽃이 핀 못의 존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호수의 수면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끝도 보이지 않았다.

은헌은 웃었다. 새벽녘 분명 첫닭의 울음에 잠에서 깼는데도 꿈같았다. 이렇게도 세상이 넓었다.

그는 조심스레 꽃송이를 안고 돌아온 고윤을 봤다.

“어디에 담아올까 했더니.”

“귀찮은데 언제 그릇에 받겠습니까.”

고윤은 대담한 손길로 꽃잎 위쪽을 쫙쫙 벌렸다. 그러자 그윽하고 깊은 연향이 피어올랐다. 안을 들여다보니 맑은 이슬이 반이나 차 있었다.

고윤은 소맷부리에서 어제 방물장수에게서 받아온 실패를 꺼냈다. 여전히 새까만 것이 마치 먹물을 입힌 듯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곤 실을 통째로 꽃봉오리 안에 던져 넣었다.

은헌은 먹이 번지듯 맑았던 것이 탁하고 짙은 색으로 물드는 장면을 봤다.

“색이 그래 그런가. 어째 좋은 기억일 것 같지는 않군.”

“그야…… 책쾌에게 산 책의 본래 용도가 그런 것이니까요.”

나쁜 감정을 적어 책벌레에게 먹이고 그를 통해 울화를 털어버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쏟아 넣은 감정들인데 좋을 리가 없었다.

“그대로 잊었으면 좋았을 뻔했군.”

은헌은 혀를 찼다.

“글쎄요. 지금에 와선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제 것이니까요. 처음부터 까맣게 잊어버리려던 게 실수였는지도 모르지요.”

고윤은 그리 말하고는 끙 소릴 내며 꽃봉오리를 들었다. 출렁이는 것은 그가 잊은 과거의 조각이었다.

“게다가 이제 와선 모르는 게 문제지 않습니까.”

은헌은 침묵을 지켰다.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세자빈의 사가와 벌써 두 번이나 엮였다. 대군의 처지에서 본다면 글쎄, 어느 것이 좋은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고윤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이슬을 들이켰다. 고여 있는 것은 쓰고 맛이 없었다. 혀가 마비될 것 같은 강렬한 맛이었다. 그러나 그는 멈춤 없이 바닥에 고인 한 방울까지 다 털어 넣었다. 아침을 먹지 않고 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괜찮은가?”

은헌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지 않을 것도 없다. 고윤이 그리 말하려던 순간 그의 몸이 그대로 넘어갔다. 그대로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은헌은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고윤의 상태를 확인했다. 숨은 붙어 있었고, 안색이 창백했다. 지쳐 보이긴 했으나 여전히 맥박이 뛰고 있었다. 은헌은 안도의 숨을 내쉬곤 고윤을 품에 안다시피 부축했다.

그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부왕의 꾸중을 피해가긴 그른 듯했다.

* * *

“개울가 우짖는 강아지가 멍멍.”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비록 음률은 엉망진창이었지만 말이다.

고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굉장히 피곤할 때 그런 것처럼 둔해진 감각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무거운 무언가에 깔렸다가 벗어난 것처럼 손발도 저렸다.

그 와중에도 낯선 노랫가락이 계속해서 울렸다. 그는 힘겹게 입을 뗐다.

“……대체 저자에서 애들이나 부르고 다니는 것을 언제 배우신 겁니까.”

“나 어렸을 적에. 부인이 생긴다기에 나인에게 궐 담장 밖에 사는 이들은 뭘 하며 노느냐 했더니 이 노랠 알려줬지. 그래서 배웠다네. 귀염받고 싶었거든.”

고윤은 눈을 감은 채 헛웃음을 흘렸다.

뭔가 이상했지만, 알 것도 같았다. 같은 처지였던 적은 없었어도 말이다. 고윤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고윤은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서 깨어났는지 알아차렸다. 그가 몸을 뒤틀자 은헌이 팔에 힘을 줘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잠시 더 이리 있게.”

고윤은 거절하려 했지만,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못마땅함에 그는 짧게 혀를 찼다.

“언제부터 이렇게 있었습니까.”

“얼마 되지 않았네.”

그리 말하며 은헌은 아래로 흘러내린 고윤의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위로 추슬러 올렸다. 등에 업힌 고윤의 팔다리가 힘없이 덜렁거렸다.

고윤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주위를 파악하려 했다. 머리를 굴리자 곧장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어닥쳤지만 말이다. 그가 흘린 신음에 은헌은 가만히 있으라 꾸중했다.

은헌은 천천히 연잎 위를 걸었다. 고윤이 잠든 사이 해가 떴다가 저물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꽃들이 피어오를 때와 다시 오므라들어 봉오리가 되는 것을 그는 몇 번이나 지켜보았다.

그 때문에 고윤을 깨우려 해도 일어나진 않고 몸이 점점 식어가는 듯 체온이 떨어져 결국 그는 연잎에 눕혀두는 것을 관두고 업어들었다. 그리 업은 채로 그는 또 몇 날을 흘려보냈다. 다행히 굶주림은 없었다.

날이 많이 흘러가는 것 같아 조금 걱정되었다. 돌아가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은헌은, 아무도 모르는 세상에 이대로 갇히면 어쩌나 싶다가도 제 목덜미에 닿는 고르게 내쉬는 숨결에 무척이나 안심되었다. 가끔 팔이 아프고 허리가 묵직해져 오는 때가 있었으나 그는 고윤을 제 몸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았다.

눈을 뜬 고윤은 금방 기운을 되찾았다. 은헌은 그의 몸에 적당한 온기가 되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등에서 내려주었다.

비틀거리는 다리로 고윤은 겨우 섰다.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이라도 해야겠습니다.”

“붙잡아줄까?”

지금이라도 해 보겠냐는 듯 은헌이 손을 내밀었다. 고윤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손을 주물렀다. 피가 돌지 않았던 것처럼 몸이 지나치게 식어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관에 나가기 그른 모양입니다. 병가라도 내야겠군요.”

저가 무얼 할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미심쩍게 보는 상관이 곱게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기억을 되찾는 대로 호적고에서 그 댁을 좀 뒤져 보려 했는데 말이죠.”

“빈궁 저하의 사가를?”

“적어도 입신은 지났을 듯하고 성례를 치렀다면 호패가 나왔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세자빈의 사가는 도성에 오래 자리 잡은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그러니 직접 알아보는 방법보단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편이 쉬웠다.

“사사로이 그러지 말게나.”

“어차피 매일 하는 일이 그런 겁니다.”

한성부 당상 대청보다 더 큰 호적고 정리가 고윤의 업무였다. 새로 태어나는 자도 죽은 자도 매일 있었다.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그 기록이 정확해야 했다. 호구 단자는 삼 년에 한 번씩 받곤 했으나, 이정 1) 들이 제 마을에 무슨 변고가 생기면 관아에 꼬박 알려오고 있기에 관에 신고가 들어오는 대로 정리하곤 했다.

“게다가 그저 보는 것뿐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말을 덧붙이려던 고윤은 거기서 그쳤다.

“우선 댁으로 뫼시겠습니다.”

그는 하늘을 올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얼마나 의식을 잃었는지는 그도 모르기에 우선 돌아가 봐야 알 수 있었다.

고윤은 은헌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자 주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런.”

“노을이 예쁘군.”

불에 타는 듯 붉어진 하늘이었다. 서산 너머 걸린 붉은빛을 보는 둘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쳐 지나갔다.

“잠은 다 잤군요.”

실컷 자고 일어났는데 또다시 밤이 오고 있었다. 은헌은 웃으며 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 문이 곧장 열렸다. 열린 대문을 보며 그는 집 안을 가리켰다.

“늦었으니 쉬었다 가게나.”

“아니, 저는…….”

고윤은 돌아가겠다고 말하려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음을 떠올렸다.

“일단 주무시지요.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몸은 쉬어야 했다. 몸을 가지고 경계를 건너는 게 이래서 좀 위험했다. 지금 겉으로야 둘 다 멀쩡히 서 있지만,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터였다.

고윤이 하는 말의 뜻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은헌은 그제야 순순히 고윤을 배웅했다. 그러곤 안으로 들어와 곧장 이부자릴 깔고 잠을 청했다.

* * *

“늦었네.”

꿈속에 먼저 도착한 은헌이 고윤을 맞이했다.

고윤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저가 늦은 것이 아니라, 대군께서 꿈길을 열 정도로 깊이 잠드시지 못한 겁니다.”

꿈에서 보자, 그리 약조하고 나서 고윤은 바로 집으로 가 다시 잠이 들었다. 연꽃밭에서 실컷 잤지만, 본디 머리를 베개 대고 누워 눈을 감으면 금방 다시 오는 것이 잠이었다.

물론 그가 잠든다 해서 바로 꿈길을 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꿈의 주인이 잠들어야 그제야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내 탓인가?”

은헌은 입을 비죽였다.

“제 꿈은 아니니까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고윤이 대꾸했다. 은헌은 한숨처럼 웃음을 뱉어내곤 후원의 정자에 들었다.

육신은 이미 잠들어 누워 있고, 여긴 꿈속이라 다른 이의 시선도 없으니 둘은 편하게 앉았다.

“하루가 무척 길었군.”

은헌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을 떴다가 감기까지 해가 지는 것만 몇 번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몸이 기억하는 날은 지나가지 않았지만, 눈으로 본 것이 있어 그만큼 고단했다.

“먹지도 못하고.”

삼시 세끼 다 챙겨 먹는 일이 흔하지는 않아도 아예 먹지 못한 일도 드물었다.

“내 뱃가죽에서 그런 소리가 날 거라곤 생각도 못 하였는데.”

“뭐,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들으실 수도 있는 거지요.”

대군을 종일 굶긴 원흉이 뻔뻔하게 응수했다.

은헌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나저나.”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윤이 운을 뗐다. 웃음을 터뜨렸던 은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기다렸다.

“들인 공에 비하여 형편없는 결과가 나온 듯합니다.”

고윤의 목소리엔 짜증이 배여 있었다.

“어찌 되었기에?”

“되돌아온 기억 중엔 그자의 정체와 관련된 부분이 없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책벌레 때문에 날아간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고윤은 먹물처럼 혼탁한 기억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차분히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그 뒤 선비 귀신과 관련된 부분을 죄다 떠올려 보았으나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헛수고하였군. 괜스레 좋지 않은 것만 떠맡게 되었고.”

은헌이 혀를 찼다.

고윤이 나쁜 기억이라도 어쩔 수 없이 모든 기억을 되살린 것은 그자의 정체를 그렇게 해서라도 알아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자면, 그자가 내건 조건을 해결하면 자연스레 그자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단 거지요.”

고윤은 제 손목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무늬를 문질렀다.

“다시 원점이로군.”

“그러게요.”

은헌은 그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전에는 고윤에게서 태몽을 건네받을 수 없었다. 고윤은 은헌에게 태몽을 건네기 전에는 그자의 정체를 떠올릴 수 없었고 말이다.

둘의 머릿속에 선비 귀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일 날 밝자마자 관청에 들어 호구 단자를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나도 알아보겠다 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군.”

은헌이 쓰게 웃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위로 보고가 올라가니 되도록 얌전히 있어야 했다.

“대감께서는….”

고윤은 위로가 되는 말을 해 보려 했으나 낯이 간지러워서 관뒀다.

“일단 잉어를 낚아 올려야 받든 말든 하실 터니….”

대신 지금 그에게 가장 도움될 방법을 입 밖에 냈다.

은헌이 무거운 숨을 뱉었다.

“어찌 될지 모르지만, 열심히 해 보지.”

아직 깃털은 구해 달지 못했지만, 낚싯대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니 연습이라도 해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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