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
은헌은 도성을 벗어나 성저십리 13)를 따라 모처럼 남쪽으로 멀리 내려왔다.
어떤 보고가 올라갔는지 소상히 알 수는 없으나 몸이 좋지 않아 서강(西江) 14) 에서 배를 타고 온천 다녀오겠단 말에 부왕은 웬일로 순순히 그러라 허락해 주었다. 온양 온천 가는 길에, 그는 마포 나루 근처에 터를 잡고 물고기가 잘 낚인다는 모래톱을 물색했다. 그렇게 반나절 만에 처음 던져 보는 낚싯줄이었다.
대나무에 실을 걸고 굽은 바늘을 엮어 매단 이전의 것과 달리 실이 날아가는 소리도 경쾌하고 손에 서늘한 감촉이 착 달라붙는 기분도 좋았다.
정말로 딱 알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습한 곳에서 실 같은 지렁이도 가져와 미끼도 빼먹지 않고 걸었다. 오늘은 한 마리라도 입질이 오겠지. 심기일전하여 그는 낚싯대를 휘둘렀다.
“몇 시냐?”
“유시가 다 되었습니다.”
새벽녘 별빛 희미할 무렵부터 앉아 있었는데 벌써 해가 머리로 넘어갔고 새로운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은헌은 텅 빈 그물을 보았다.
“어찌 한 마리도 안 물꼬?”
만반의 준비를 다 하였는데 여태 입질 한 번 없었다. 은헌은 낚싯대를 보았다. 세상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좋은 낚싯대면 뭐 하나 물고기가 바늘을 물지 않는데 말이다. 그는 자신이 사기당한 게 아닌지 되짚어보았다. 고윤은 분명 그곳에 인간이 쓸 물건은 없다고 말했다. 한데도 두꺼비 같은 낯짝의 주인이 그라면 쓸 수 있다고 해서 사들인 것이었다. 뭐로 갚을 치렀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은헌의 표정이 어둑해졌다.
“사용은 가능한데 이것으로 반드시 낚을 수 있단 소린 못 들었군.”
백발백중으로 물고기를 낚아 올릴 수 있단 보증도 받아올 것을 그랬다.
그는 끙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해가 졌으니 이제 슬슬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노숙할 준비를 하고 오지 않았으니 예서 이슬 맞으며 밤을 지새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잠이 들어야 꿈을 꿀 거고 그래야 고윤을 만날 수 있었다.
“정리할까요.”
하인은 눈치를 보더니 그의 의중을 물었다. 은헌은 포기하고 줄을 거둬들였다. 낮에 그늘을 만들려고 세운 막을 걷고, 식사를 차리느라 걸어둔 솥을 내리는 하인들을 보며 은헌은 까맣게 변한 물을 봤다. 꿈에서 매일 보는 연못의 물색과 비슷했다.
“꿈에서만 쓸 수 있다는 건 또 아니겠지?”
애초에 낚아야 할 잉어가 꿈속, 그 못 안에 있으니 거기 가서도 일단 한번 해 보긴 해야 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디선가 첨벙첨벙 소리가 났다. 은헌은 상념에서 깨어나 물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았다. 어디서 온 건지 모를 노인이 낮은 배의 노를 저어오고 있었다. 이리 한 번 쓱, 저리 한 번 쓱 길게 장대를 한 번씩 휘두를 뿐인데도 순풍에 돛단 듯 배가 앞으로 쭉쭉 밀려왔다.
허름한 마의를 입은 노인을 보고 시선을 거뒀던 은헌은 다시 머릴 들고 배를 보았다. 배 앞쪽으로 낚싯대가 여럿 걸쳐 있었다.
“이보게!”
그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가 외치자 곁에 있던 하인이 물가로 달려가 급히 배를 타고 지나가는 노인을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온지요?”
집으로 가는 길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공손한 태도로 노인은 은헌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인사할 때부터 고개를 들지 못한 채였다. 은헌은 노인의 배를 다시 확인했다.
“노인장 가진 낚싯대가 많구려. 어부시오?”
물에 나가 그물을 던지는 자만 어부인가? 아니면 물고기를 낚는 사람이 어부인가?
노인은 제 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으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 낚싯대는 직접 만드셨소?”
“예. 별 솜씨는 없지만 모두 제가 만든 것입니다.”
은헌은 그 말에 두말없이 그의 낚싯대를 내밀었다. 그 거리에서 사 온 것을 말이다.
“내가 이것으로 잉어를 한 마리 낚고자 하는데, 통 입질이란 것이 없소. 뭐가 문제인지 알아볼 수 있겠소?”
노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단 낚싯대를 받아 눈으로 훑었다. 손으로 대를 몇 번 만지더니 그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것으로 고작 잉어를 낚으시려는 것입니까.”
“그렇소.”
노인은 이번엔 감겨 있는 실을 손으로 조심스레 당겼다. 침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이것으론 예서는 잉어는커녕 아무것도 못 잡습니다.”
은헌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찌해서? 이유라도 있는가?”
잘 아는 부분이라 그런지 노인은 낚싯대를 손바닥에 받쳐 들곤 대군을 보았다. 어딘지 모자란 놈을 보는 듯한 눈빛이 불경했지만, 은헌은 얼른 말하라는 듯 재촉했다.
“이 나무는 쇠죽이란 것이온데, 대나무 중에서 가끔 쇠처럼 차고 단단한 성질을 지닌 것이 나옵니다. 그것을 잘라 다듬은 것이지요. 보통의 죽보다 수배는 단단한 데다 탄성이 좋으니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습니다.”
노인은 이번엔 실을 보았다.
“이 실은 보통의 명주실이 아니라 천잠사라는 것입니다. 천잠사란 것은 겉으로 보이긴 평범한 실 같으나 그 질기기가 말 스무 필을 붙여 잡아당겨도 끊김이 없지요. 쇠죽에 천잠사를 달아 낚싯대를 만들었으니 아주 힘이 센 놈을 잡기엔 이만한 것이 없을 겁니다. 한데 문제는…….”
노인은 슬쩍 은헌을 보았다.
“이 두 개의 귀한 귀물을 써서 만든 이 낚싯대를 흔들 정도로 힘이 센 놈은 이곳엔 없습니다. 입질이 오지 않은 게 아니라 말하자면…….”
은헌은 노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어지간한 놈이 건드리지 않으면 흔들림조차 오지 않는다는 거지?”
“예. 강하기만 하니 보통의 감각이 아니고서야 바늘을 툭툭 치고 지나가는 것은 알아채기가 어렵습니다. 물 안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물 위에서 예민하게 바늘이 움직이는지 아닌지 확인할 게 필요한데 이것엔 달려 있지 않으니.”
노인은 말끝을 흐리곤 배를 세워둔 곳을 보았다. 노인의 낚싯대에는 기름을 먹여 잘 말린 깃털이 하나씩 실의 중간에 달려 있었다.
“깃털만 달면 되는가?”
“보통의 것으로 되겠습니까? 아주 가볍고 예민한 깃털이 필요할 겁니다. 그러면서도 물기에 강해야겠지요.”
그 말을 하면서 노인은 씩 웃었다. 그러곤 뒤로 돌았다.
은헌은 아직 더 물어볼 것이 있는데 말없이 자릴 뜨는 노인을 따라갔다.
“이보게. 지금 어딜!”
노인은 배가 아니라 강으로 성큼성큼 향하더니 이윽고 강물 위를 걸었다.
“어?”
은헌은 놀라 벌떡 일어섰다.
“대감!”
자갈 미끄러지는 소리가 엉덩이 아래서 거칠게 들렸다. 은헌은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온 청지기가 그를 걱정스레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노인은?”
은헌은 저를 걱정스레 살피는 하인을 보며 물었다. 하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인이라니요?”
“어부 말이다. 낚싯대로 물고기를 낚아 오던…….”
급히 설명하던 은헌은 다시 주위를 보았다. 분명 돌아가기 위해 정리하려는 중이었다. 한데 솥도 아직 걸려 있었고 하인들도 전부 멀찍이 앉아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 걷어 올렸던 낚싯대도 아직 던져져 있었다.
“대감?”
은헌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니다. 아니야.”
그는 손을 내저어 하인을 물렸다. 그러곤 다시 강을 보았다. 밤이 되며 물안개가 스멀스멀 밀려들고 있었다.
* * *
“물귀신이라도 보신 겁니까?”
고윤은 못에 낚싯대를 휘둘렀다. 평범한 대나무 낚싯대였다.
“한강수에 사는 산신령일 수도 있지.”
은헌은 그의 꿈을 따라온 그 낚싯대를 휘둘렀다. 고윤은 그런 그를 보며 낮에 귀신이 나타난 뒤 줄곧 그를 피하던 구실아치를 떠올렸다.
“물귀신일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만.”
그의 말에 은헌은 소리 내 웃었다.
“물귀신이든 신령이든 그게 뭐 대수겠는가. 물고기 잘 낚으라고 비법을 일러줬는데.”
“오죽 답답했으면 직접 나와서 알려줬을까 싶긴 하네요.”
실제로 산신령이라도…… 천년을 수련해 신선이 되었을 텐데 그 천년의 인내심을 긁어댈 수 있다니 어떤 의미론 굉장했다.
얼마나 못했으면 꿈까지 꾸게 만들어 직접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목해 줬을까. 은헌은 얄밉게 말하는 고윤은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런 것 하나도 무섭지 않다며 고윤은 코웃음 쳤다.
대신 그는 정자에 앉아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고윤이 알아본 바론 예전에 은헌에게 들었던 말과 같이 이 별장은 최근 세자가 사들여 대군에게 준 것이라 했다. 궐 밖에 나와 사는 아우를 위해서 부러 경치가 수려한 곳으로 고르고 골랐다 들었다. 그러니 터의 주인은 분명 은헌이었다.
담담히 무슨 생각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낚시에 집중하고 있는 대군을 향해 고윤은 입을 열었다.
“세자 저하께선 어떤 분이신지 물어도 됩니까?”
“저하?”
은헌은 고윤을 힐끗 보며 웃었다.
“저하께선 정말로 좋은 분이시지.”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은헌은 가볍게 한숨 쉬듯 말을 덧댔다.
“너무 좋은 사람이라 고생 많으신 분이기도 하고.”
중전의 태에서 태어나지 못했으나, 어릴 적 세자 책봉을 받아 스스로 자격 있음을 멋지게 보여주고 계셨다. 학문이면 학문, 시, 서예, 화를 비롯해 활쏘기나 그런 것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었다. 마음 씀씀이마저 말이다.
고윤은 자신이 들은 소문 속의 세자를 떠올렸다.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관리들 사이에 오가는 말은 무성하여 관심이 없어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벼려진 칼 같은 분이시다, 냉혹하고, 엄정하고, 엄격한 분이기도 하다. 재능이 넘쳐 신하를 괴롭게 만드는 군주시다. 하여튼 그런 느낌이었다.
핏줄인 아우가 보는 형님과는 전혀 사람이 다른 듯했지만 말이다.
“한데 저하에 관해서는 왜 묻는가?”
“태몽 때문에 들은 말이 있어서요.”
고윤은 의심으로 가늘어지는 은헌의 눈매를 보곤 태연히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저녁에 인왕산 산 주인이 다녀갔습니다.”
은헌은 저의 집에서 마루만 나서면 보이는 산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나라의 모든 것이 왕의 소유인데 누가 감히 산의 주인이라 나서는지 궁금했다.
“그게 누구지?”
“목멱산신 아래서 신선이 되려 수련 중인 호랑이요.”
고윤은 고운 얼굴을 한 호랑이를 떠올리며 콧등을 찡그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인왕산에 호랑이가…….”
“많죠. 그중 가장 오래 살았고 여태 한 번도 살생한 적 없는 호랑이입니다.”
그래서 산신이 될 자격을 얻었다. 고윤은 무거운 숨을 뱉었다.
은헌은 자신이 말하는 호랑이가 고윤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인지 솔직히 헷갈렸다.
“한데?”
“산신이 되면 터를 잡아야 하는데. 그 터에 먼저 자리를 차지한 선객이 있나 보더군요.”
고윤은 호랑이가 전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은헌에게 전했다. 은헌은 미간을 구겼다.
“차도살인…… 아니, 차도살어지계라고 해야 하나? 산신 되려 수련 중인 호랑이가 그래도 되는 건가?”
제가 터를 잡아야 하니 주인을 쓱싹해 달라 청한 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본인 말로는 목멱산신이 그 자리를 점찍어줬답니다. 그러니 그 터에 꼭 자릴 잡아야 한다고요.”
좋은 집터 구하려고 별것 다 하는 사람들이 많아 한성부에서도 종종 그와 관련된 다툼을 중재해 처리하기도 하지만, 곧 산신이 될 호랑이와 용이 될 잉어의 자리다툼은 그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은헌은 결론을 물었다.
“한 마리보단 두 마리가 그래도 낚을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곳은 여기보다 좁거든요.”
“그럼 낚싯바늘이 더 빨리 들키지 않을까?”
낚시란 것은 본디 물고기가 멋모르고 미끼 걸린 바늘을 물었다가 꿰이는 거였다.
“잉어잖습니까. 영성은 있어도…… 여기가 좀…….”
고윤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승천에 성공하는 용 중에 유난히 잉어로 태어나 수련을 한 이가 특히 많은 이유가 그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돌아서면 까먹으니 저가 몇 년 수련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그냥 시간을 다 채워 승천하는 거다.
은헌은 다음 꿈에서는 한강수 사는 수신이 일러준 방법으로 도전해 볼까 했다.
“근데 입질이 오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려면 그 물귀신이 일러준 대로 깃털을 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주 예민하고 가벼운 깃털을 말이다.
“그런 게 있습니까?”
고윤도 낚싯대는 잘 몰라 처음 들어봤다.
“자네가 모르는데 난들 알까.”
은헌은 차라리 그 거리로 가서 아는 존재를 찾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며 말하려 했다. 적어도 낚싯대를 파는 사람은 알고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내가 아오.”
불쑥 천장에서 머리가 거꾸로 내려왔다.
“으아아아악! 왁! 왁!”
은헌은 낚싯대를 내던지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헤집듯 물러났다. 그 모습을 구경할 새도 없이 귀신은 재빨리 천장으로 솟구쳐 몸을 피했다. 불덩이를 쏘아 날린 고윤이 눈을 크게 뜨고 서 있었다.
“뭔가?”
은헌은 드물게 큰소릴 냈다.
“귀신요. 잡귀죠.”
고윤은 아직도 쿵쾅거리는 심장 고동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화기를 뭉쳤다. 도깨비불 같은 것이 그의 몸 주위에 일렁였다. 그는 이를 갈듯 주(呪)를 외웠다.
“귀신이 왜 여길 온 건가.”
은헌은 답해줄 사람이 한 명밖에 없으니 연거푸 물었다.
“그러니까요. 악기를 지닌 것들은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어쨌거나 들어오라 청하지도 않았는데 온 걸 보니 소멸당해도 할 말 없단 뜻 아니겠습니까.”
고윤은 그리 말하며 귀신을 매섭게 쏘아봤다. 이미 죽어 창백해진 낯짝이 더 새파랗게 질렸다. 귀신은 대경실색하여 은헌과 고윤을 번갈아 봤다. 까닥하다간 순식간에 이 투명한 혼백마저 날아갈 판이었다.
귀신은 양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살려주시오.”
이미 죽은 귀신이 다급히 외쳤다.
“싫소.”
그걸 또 냉정하게 고윤은 단박에 거절했다.
귀신은 은헌을 봤다.
“깃털! 예민하고 가벼운 깃털! 그거 어디에 있는지 내가 아오!”
은헌은 나뒹군 자세 그대로 앉아 있다가 번뜩 몸을 바로 했다.
“그런 깃털을 안다고?”
귀신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빠져라, 말이다.
은헌은 고윤을 돌아봤다.
짜증이 스며든 얼굴엔 자비라곤 없었다. 그는 헛기침했다. 고윤은 그제야 귀신에게서 눈을 떼고 그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은헌은 방긋 웃었다.
“그러지 말고 어찌 된 일인지 이야기나 좀 들어보세.”
“그냥 죽기…… 아니, 혼백이라도 성히 저승 가고 싶으면 그 깃털 가져오라면 되잖습니까.”
가장 빠른 방법이 코앞에 있는데 먼 길 둘러 갈 이유가 뭐 있나, 게다가 이곳은 대군의 꿈속이었다. 귀신이 오래 있을수록 산 자의 몸에 해가 된다.
얼른 끝내자는 듯 고윤은 귀신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귀신은 은헌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도 생전에는 이 나라, 이 땅에 살던 백성이었을 텐데 내가 어찌 그리 무정하게 굴겠는가.”
은헌은 언제 놀라 나자빠졌냐는 듯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한껏 매몰차게 굴고 있는 고윤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게다가 도성 살았던 사람이면 자네가 응당 이야기를 들어줘야지.”
“죽은 사람의 몸뚱어리는 몰라도 혼백은 관아 업무가 아닙니다.”
“아니, 살았을 때 말이야. 이렇게 온 걸 보면 청이든 원한이든 가지고 있다는 거고, 혹여 억울한 사연이면 나서서 풀어줘야지.”
“도성에 살았는지 아닌지도 모르잖습니까.”
“저 한성에 살았습니다!”
귀신이 바쁘게 오가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한성부 관할이구먼.”
은헌이 반색하며 환하게 웃었다.
낮도 모자라 밤, 그것도 꿈속에서까지 일을 떠맡은 관리가 손으로 불꽃을 쥐어 터뜨렸다.
귀신은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눈 떠 처음 본 곳이 거리였습니다.”
귀신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길에서 눈을 떴다. 저잣거리라는 것은 단번에 알아챘는데, 저가 왜 거기서 깨어났는지는 몰랐다.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었지요.”
이름도, 집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귀신은 다급히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이보시오!’ 그렇게 외치며 팔을 뻗었는데 오한 든 모습으로 사람들이 몸을 잔뜩 웅크리더니 못 본 척 그를 지나쳤다. 몇 사람 더 붙잡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붙잡긴 했는데 이상하게 손바닥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뭔가 하고 한숨 쉬며 다리에서 개천을 내려다보는데.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물 위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귀신은 그때 느꼈던 두려움을 토해냈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귀신은 제 눈에 보이는 단서를 찾아 몸을 뒤적였다. 자신이 누군지는 알아야 집을 찾을 테고 그래야 죽었다고 식구에게 기별이라도 할 텐데, 하는 마음이었다. 가족이 있는지도 지금은 모르겠지만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그의 갈망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차려입은 모양새로 봐선 어느 집 종놈은 아닌 듯하고.”
귀신은 제 목 뒤에 넘어가 있는 좁은 갓과 좋아 보이지는 않아도 깔끔히 차려입은 소매 좁은 포를 확인했다.
은헌과 고윤도 귀신의 복색을 훑었다.
양반은 아니었다. 꽤 신경 써서 차려입은 듯했으나 목 뒤로 넘어가 있는 갓의 넓이가 좁았다. 신분에 따라 색과 크기가 차이 나는 것이라 단번에 남자의 신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중인, 그것도 나름 사는 집이었을 거다. 나이는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고 손에 굳은살이 없는 걸 보면 험한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책을 붙잡고 산 듯했다.
귀신은 품을 뒤져 조심스럽게 패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다 이것을 찾았습니다.”
호적고 업무가 주인 고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호패였다. 고윤은 투명하게 뒤가 비치는 나무패를 받았다.
“이름이 없군.”
검은 먹 자국만 남고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외의 정보들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살던 동네의 이름도 말이다.
“예. 그래서 그리 가보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처음 눈 뜬 위치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귀신이 되면 여기저기 움직일 수 있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왔지?”
고윤의 표정이 대번에 날카로워지자 귀신은 튀어 오르듯 크게 몸을 떨었다.
“사람에게 씌지 않고선 지박령이 된 귀신이 그 자리를 벗어날 방법이 없는데?”
“나쁜 짓은 안 했습니다.”
귀신은 억울하단 듯 외쳤다.
“그럼?”
은헌은 얼른 이야기하라는 듯 재촉했다.
“그냥 그렇게 거의 한 달을 서성이다가…… 길에서 어떤 자를 보았습니다.”
귀신은 그날을 떠올렸다.
이상한 날이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가운데 그자를 발견하자 저도 모르게 발이 그자를 따라나섰다. 놓쳐서는 안 된다는 듯 잰걸음으로 부지런히 그자의 뒤를 따라갔다. 허둥지둥 어딜 가는지도 모르고 그자를 쫓다가 벽에 부딪친 듯 몸이 튕겼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으나 가로막은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또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또 못 박힌 듯 그는 그곳에서 서성여야 했다.
“그렇게 있다가 이상한 걸 봤지요. 한성부 관아에 귀신들이 기웃기웃하는 겁니다.”
무슨 일인가 하여 그도 같이 기웃댔다. 다행히 관아 안쪽의 담벼락까지는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였다. 그는 담에 매달려 고윤을 보았다.
“귀신을 성불시켜? 백주 대낮에?”
“귀신이라고 밤에만 쏘다니라는 법도가 있습니까?”
고윤을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까지 들으니 저 잡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 것 같았다.
“한성부에 있군.”
“거긴 왜?”
은헌은 이야기가 왜 그리 튀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제가 오늘 숙직 업무를 보고 거기서 잠들어 몸이 그곳에 있으니까요.”
고윤은 삐뚤어진 웃음을 내비쳤다.
은헌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귀신을 봤다.
“그래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집에 가고 싶은 건가? 아니면 아까 보았다던 그자를 찾고 싶은 건가?”
귀신이 꿈까지 찾아와 그가 원하는 깃털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줬다. 자랑하러 온 것도 아닐 테니 깃털을 대가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의도일 터다.
귀신은 고윤의 눈치를 살피다 더듬더듬 속내를 털어놨다.
“그자를 찾고 싶습니다.”
“집이 아니라?”
귀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식솔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데 그자를 본 순간 따라가야 한다는 마음만 들었습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지박령의 발을 떼게 할 정도라면 강렬한 의지여야 했을 텐데.”
고윤은 혀를 찼다.
자리에 묶은 걸음을 남에게 씌지도 않고 따라나서려면 말이다. 그 간절함 자체가 커다란 원한일 수도 있었다.
그는 은헌을 보았다.
“깃털, 정말로 필요하십니까.”
은헌은 귀신을 보며 한숨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네에게 청하지. 이자, 마음 맺힌 것 좀 풀어주게.”
* * *
“억울한 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이지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고윤은 호적고에 들어 원하는 것을 찾았다. 귀신의 호패에 새겨진 마을의 것이었다. 성을 모르니 기록을 뒤져 보고, 새로 사망자가 생겼는지 비교해서 거슬러 올라가 볼 생각이었다. 마을에 가서 직접 물어보는 방법도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었다.
“모교 15)에서 눈을 떴고 호패에 남은 이름은 묵정동 16)이라.”
그 방향이라면 근방에 혜민서가 있었다. 귀신에게도 대군에게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지박령 같은 경우엔 보통 죽은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눈을 뜬다. 즉, 깨어난 장소 근처가 살아생전에 목숨을 잃은 곳이었다. 게다가 목숨을 잃었을 당시에 생긴 원한이 그를 거기에 붙잡아둔 것이니 평범하게도 죽지 않았다 할 수 있었다.
다리 근처에서 죽었다면 그 근방에 발견된 시신이 있는지도 알아봐야 했다. 발견된 것이 없다면 아직 그 집 식솔들이 제 가족이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묵동의 기록을 꺼내 귀신과 비슷한 연배의 사내들을 샅샅이 확인했다.
“여기서 이렇게?”
“그렇습니다.”
귀신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은헌대군은 육조거리 동쪽을 흐르는 중학천을 보았다. 거기서 머리를 돌리자 한성부 후문이 보였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귀신도 그 뒤에 따라붙었다. 귀신은 겁먹은 얼굴로 발을 내디뎠다. 아무리 움직여도 막에 가린 것처럼 튕겨 나와 한 번도 통과해 보지 못한 길이였다. 눈을 질끈 감고 귀신은 제 팔에 묶인 실이 당기는 대로 걸었다.
“어떠한가?”
귀신은 슬쩍 눈을 떴다. 그러곤 주위를 재빠르게 확인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간 온갖 몸부림을 다 쳐도 옴짝달싹 못 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멀리 빠져나와 있었다. 그는 제 몸을 묶은 실을 봤다. 그 끝을 대군이 붙잡고 있었다. 개 목에 줄 매단 모양새였으나 나쁘지 않았다. 어디로든 일단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몹시도 감격스러웠다.
“멍!”
그가 붙어 있는 개가 짖었다. 꼬리를 팔랑팔랑 돌리며 말이다.
고윤은 몇 가지 조치한 뒤 은헌에게 귀신을 묶은 실을 건네줬다. 언뜻 보면 죄인을 묶어 호송하는 오랏줄과 비슷했다. 은헌은 귀신이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단 사실을 알게 되자 곧장 온양에서 돌아왔다.
몸이 좋지 않아 사나흘 온천에 가겠단 핑계로 나선 길이었으나 애초에 아프지도 않았으니 멀쩡히 돌아와 그는 꾀병을 핑계로 앓아누워야 했다. 붙여둔 꼬리를 떼는 것이 좀 힘들었으나 그것도 고윤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겼다. 인간의 것이 아닌 힘을 남발하여 쓰는 것이 아닌가 염려되었으나 고윤은 이 정도는 괜찮다 알려주었다.
어쨌거나 귀신을 무사히 개에 씌워 저잣거리까지 나오는 데 성공했다. 은헌은 귀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소에 가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여기도 들른 적이 있습니다.”
은헌은 귀신이 가리킨 곳을 살폈다. 몇 곳은 상단이었고, 몇 곳은 중인들이 주로 들를 법한 장소였다.
“또?”
“무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와 관련한 것은 쉬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귀신은 송구하단 듯 답했다.
제게 남은 여한을 풀겠다고 한성부 관원의 꿈을 따라 뒤쫓았지만, 그게 대군 대감에게 이어져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라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제 기억을 더듬어 도성 여기저기 쏘다녀 주시는 존귀한 분을 보며 그저 감사했다.
그들은 길을 걸었다. 처음 눈 뜬 곳까지 도착해서도 은헌과 귀신은 처음 보는 장소를 보듯 주변을 확인했다.
“익숙하지만, 저는 제가 왜 여기서 눈을 떴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뚜렷하게 무언가 기억이라도 나면 좋을 텐데.
귀신은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기서 그 깃털을 주웠지요.”
정처 없이 헤매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깃털을 귀신은 챙겼다.
“예서 주웠다고?”
은헌의 목소리가 커졌다. 주위의 시선이 모여들자 귀신은 제가 붙은 강아지의 입을 빌렸다.
왈왈, 개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무슨 일인가 하여 돌아보던 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재빠르게 떨어졌다. 어딘지 머리에 꽃을 단 놈을 본 듯한 시선이 따갑게 쏟아졌다.
종일 비슷한 일의 반복이라 이젠 대수롭지도 않았다.
“여기라고?”
은헌은 강아지에게 묻듯 다정한 말투로 질문했다. 귀신은 그렇다 대답했다.
“처음 보는 새였습니다. 지금은 이렇게밖에 못 다니지만 이래 보여도 저는 꽤 신기한 구경을 많이 하였거든요. 그중에 이렇게 꽁지깃이 이렇게 큰 부채 같은 새도 있었습니다. 푸른빛과 옥빛의 몸뚱어리에 오색빛 찬란하여 새가 저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는구나 하였는데, 깃털을 떨어뜨린 새는 황금빛을 두른 듯 번쩍거리지 뭡니까.”
『그 새는 어디서 보았고?』
은헌의 질문에 귀신은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말도 마십시오. 화국까지 가서 정말로 고생고생하며 보았습니다.”
은헌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는 분명 중간에 화어로 된 질문을 던졌다.
“대국이랍시고 땅덩이는 넓고 기이한 물건은 많은데 구경만 할라치면 이 작자들이…… 어?”
귀신이 말을 멈췄다.
“자네 화어를 아는군.”
귀신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은헌의 눈매가 조금 서늘해졌다.
화어를 아는 자가 도성에 흔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 할 줄 아는 자는 있을지 몰라도 능숙한 자는 손에 꼽았다. 그도 말을 배우려 몇 번이고 사람을 찾아야 했다. 대부분은 중인 출신의 역관으로 한 달 전쯤 화국 사신이 오갈 때 바빠, 대군도 한 달째 강학을 미뤄뒀다.
은헌은 귀신이 자신에게 자랑한 새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공작새였다. 이 땅엔 자라지 않는 새였다. 왕실에 공물로 한 번 들어와 후원에서 살다 죽었다. 그런 새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면 적어도 한 번은 화국 사신 행렬에 따라나섰어야 했다.
은헌의 머릿속에 짐작 가는 이들이 있었다. 사신행에 포함되어 갔다 온 최근에야 도성에 돌아온 역관이었다. 그는 귀신을 훑었다. 옷도 다 깔끔하게 입고 있는데 귀신은 제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쫓아간 그 사내가 혹시나 가족일까 하는 추측도 했다. 은헌은 입가에 핏자국이 말라붙은 얼굴과 이마 위 머리뼈가 움푹 파여 눈알 하나가 튀어나와 있는 귀신의 모습에서 눈을 돌렸다.
“저는 역관이었을까요?”
귀신은 제 정체를 추측했다.
“모르지. 그건 답을 알고 있는 자가 따로 있지 않겠는가.”
고윤 말이다. 귀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자신이 본 그 사람을 찾는 것보다 제 호찰을 추적해 자신의 신분을 찾는 게 더 빠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은헌은 침잠한 귀신을 보며 웃었다.
“오늘은 예까지 하고 가세. 나도 문이 닫히기 전에 도성 밖으로 나서야 하거든.”
아무리 고윤이 도와준다 하나 밤까지 도성 안에 남아 있는 것은 곤란했다. 귀신은 오늘이란 말에 퍽 안심이 되어 흔쾌히 따라나섰다.
은헌은 귀신을 데리고 다시 한성부로 되돌아갔다. 관아가 모여 있는 곳이라 낮에는 사람이 들끓어도 밤에는 한적하여 다른 곳보다 나을 거란 고윤의 말 때문이었다.
“서쪽으로 이역만리를 더 가면 옛날 삼장이란 칭호를 받은 승려가 천축을 향해 갔다는 그 길도 나온다지요. 얼음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호골을 한 이들을 만날 수 있고요. 실제로 보면 코만 이렇게 주먹처럼 생긴 것 같긴 합니다만, 무척이나 잘생겼더군요.”
은헌은 저가 책에서만 보았던 것을 생생하게 떠드는 귀신을 보며 웃었다.
“그런데……!”
한 달 넘게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다 겨우 말문이 트인 귀신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은헌은 뒤로 몸을 돌렸다. 멍하니 서 있던 귀신이 다급하게 팔을 뻗었다.
“저자! 저잡니다! 그때 그자요!”
은헌은 재빨리 귀신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 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살폈다. 조금씩 선명해지는 윤곽에 그는 발을 움직여 옆으로 몸을 뺐다. 담벼락 그늘에 몸을 숨긴 그는 고개만 슬쩍 내빼 앞을 봤다.
목 끈이 당겨진 개가 요란히 짖었으나 은헌은 재빨리 안아 들어 조용히 시켰다.
“저자가 확실한가?”
관청 담장 아래 몸을 구긴 채 은헌은 다시 확인했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거칠 것 없는 귀신은 확신을 담아 그렇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지송례 18)를 한 뒤 고윤은 급히 퇴청했다. 여느 때처럼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길을 정한 뒤 그는 서둘러 움직였다. 붙잡을 사람도 없지만, 도성문 닫힐 시간이 코앞이었다.
그는 제 품에 든 서신을 확인하듯 손으로 두들겼다. 도성을 둘러싼 외성으로 다가갈수록 성문을 나가려는 이들로 길이 북적였다. 그는 창의문으로 향하는 사람들 뒤에 줄을 섰다.
은헌대군의 거처는 창의문 바깥으로 나서 백운동 외곽 길을 따라 인왕산 쪽으로도 한참 올라가야 나오는 산기슭에 있었다. 꿈길을 따라서 온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본 대군의 거처는 생각보다 더 소박했으나 안개가 낀 날이면 도원에 발을 들이는 듯한 풍광을 자랑하였다. 산수화로 담장 주위에 병풍을 두른 듯했다.
고윤은 잠시 산세를 살피다 대문을 두드렸다.
“이리 오너라.”
다 늦은 저녁의 방문에도 청지기는 당황치 않고 나와 그를 맞이했다. 그중 몇은 눈에 익었다.
“대감께선 안에 계시는가?”
“그러지 않아도 참군 나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반듯이 예를 차린 이가 앞서 나서 길을 열었다.
꿈에서 발길 닳도록 다녀 이미 다 알고 있는 집이었으나 고윤은 청지기의 뒤를 따라갔다. 은헌은 전에 들렀던 사랑이 아닌 예의 그 후원에 서 있었다.
조복 19) 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고윤은 순간 여기가 꿈인가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왔는가?”
은헌은 복잡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고윤은 후원이 잘 보이는 안채의 방으로 들어섰다. 안채의 주인이 없으니 손님방으로 쓰고 있는 곳이라 했다. 문을 열어놓고 나니 창틀이 폭이 되어 후원 담장 밖의 인왕산 능선이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곳 터에 관한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생각보다 더 좋군요.”
“이리 안개 낀 날이 특히 그러하지. 지금도 은밀하게 이 근방의 터를 팔 생각 없는지 물어보는 이들이 있다네. 아니면 하룻밤 머물러 가게 해달라 청하는 이도 있고.”
고윤은 은근히 집을 자랑하는 은헌의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은헌은 준비한 상을 들이라 명했다. 상이 들자 그는 시중을 물리고 하인들도 멀찍이 물렸다.
둘만 남자 그제야 은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감정을 천으로 닦아낸 듯 무심한 얼굴은 지독히도 건조했다.
“그래. 알아낸 것이 있는가?”
고윤은 비슷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이렇게 늦은 시간을 골라 부러 방문을 청한 것이었다.
“꿈에서는 차마 못 할 말이던가?”
둘 사이에 오갈 이야기라면 직접 보는 것보단 꿈속이 더 안전했다. 누가 엿들을 것도 아니었고 새어 나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대군을 감시하는 이들에게 들킬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됐다.
“귀신이 꿈길을 드나들 수 있으니까요.”
그에 대한 방비는 해두겠지만, 한 번 열린 길이니 어디에서 또 뚫릴 줄 몰랐다. 그래서 고윤은 이리 깨어 있는 상태로 만나자며 서신을 보냈다.
“그 역관…… 꽤 뒤져 볼 구석이 많더군요.”
“역시 역관이었나?”
고윤은 은헌이 어찌 그 사실을 알아냈는지는 묻지 않았다. 대신 품에 손을 넣어 챙겨온 것을 내밀었다.
“이게 무언가?”
은헌은 접힌 여러 장의 종이를 펼쳤다.
“한 달 전 발견된 시신의 검시 보고서입니다.”
한성부는 도성 내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포청처럼 사건을 수사할 수 있었다. 고윤은 당시 일어난 일을 뒤적이다 발견한 것들을 옮겨 가져왔다.
“두개골이 깨져 피를 흘려 죽은 줄 알았는데.”
고윤은 귀신의 사망 원인을 찾았다.
“독을 써서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머리를 깬 듯하다.”
은헌이 검시로 나온 결과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었다.
“예.”
독이 쓴 흔적이 같이 나와 어느 것이 먼저인지 확인한 검시관의 추정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먹는다고 곧장 죽지 않을 소량의 독을 쓰고 쓰러진 자의 머리를 깨고, 온몸에 지닌 것을 다 가지고 달아나 신원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적혀 있었다. 얼굴도 죽은 이후에 일부러 뭉개어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은 사건이었다.
귀신이 내민 호찰 역시 그 당시에는 발견되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래서 고윤은 다른 쪽을 뒤졌다. 호적고에 기록된 호패의 기록과 비교해 후보군을 추리고 가능성 있는 사람을 찾아 좁혔다.
“사신단을 따라 두 해 만에 돌아왔고 아직 집에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발품을 팔아 직접 확인한 바로는 그러했다.
“……그랬군.”
은헌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고윤은 고개를 들어 대군을 보았다.
“사건과는 별개로 당시 사신단과 함께 움직였던 이가 죽었는데도 여태 찾는 사람이나 실종되었다, 신고 들어온 바가 없는 것이 수상쩍어 그 연유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그 역관 앞으로 발행장을 써주었더군요. 모친의 병이 깊어, 되도록 빨리 다녀오겠다면서 두 달짜리로요.”
그런 방법으로 휴가를 쓰는 것은 이동 거리에 따라 달랐다. 두 달이라면 적어도 중부 이남까지는 내려가야 했다.
“그자의 본가는 도성 한가운데에 있는데도요.”
고윤은 당연히 그 발행장을 써준 이를 의심했다. 이미 죽어 돌아오지 않을 수하의 발행장을 써준 이가 누구겠냐며 말이다.
“그자가 누군가?”
은헌은 오늘 귀신과 함께 보았던 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자의 이름이 고윤의 입에서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서갑령. 빈궁 저하의 오라비인 것으로 압니다.”
고윤은 그리 말하며 은헌의 얼굴을 살폈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금일, 귀신의 기억에 남은 곳들을 살펴보느라 저자를 쏘다녔지 않은가. 자네가 당부한 대로 저녁에는 한성부 관아로 데려다주기로 하고 말이야. 돌아오는 길에 마주쳤다네.”
은헌은 육조거리 근처에서 제 얼굴을 들켜 좋을 것이 없음을 알기에 처음에 본 것 말고는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다.
“예조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들었지.”
세자빈과 관련된 일에는 은헌도 언제나 한발 뒤로 물러나 있는 데다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기에 남의 이야기처럼 할 수 있었다.
은헌은 세자빈의 그리고 형님의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옳건 그르건 그가 나설수록 복잡해질 문제였다.
게다가 엮인 사연이 너무도 우스웠다. 세자가 알게 되어 어째서 세자빈의 사가 사람을 의심했느냐 물으면 귀신이 일러주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곤란하게 됐군요.”
고윤은 눈을 찌푸렸다.
“그렇군.”
일이 이쪽으로 튈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은헌은 낭패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기에 그냥 깃털 가져오라 하고 깔끔히 저승길 보내는 게 맞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잣거리 뒷골목 왈짜패 두목이 따로 없구만.”
둘은 시선을 마주치며 인상을 썼다.
“어찌하실 겁니까.”
어차피 죽은 자의 일이다. 그리고 고윤은 그렇게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저 편히 지낼 방법을 최고라 여기며 넘어선 알 될 선을 넘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다.
“내일 궐에 들어가 저하를 뵙고 오겠네.”
은헌은 결정을 미뤘다.
“지금은…… 때가 그리 좋지 않아 말이야.”
“상소가 빗발친다는 소리가 자자하더이다.”
“남의 집 며느리 일에 관여할 정도로 한가한 걸 보니 부왕께서 노하신 게지.”
“그렇다고 조정에 드나드는 이들 집 며느리들은 얼마나 잘하고 있나 보자 하실 일은 아니었지요.”
이틀 전 아침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일이 터지고 나서 다들 금상께서 너무 하신 것이다, 아니다로 나뉘어 열심히 떠들었기에 고윤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무엄하네.”
은헌은 짐짓 엄중한 어조로 고윤을 꾸짖었다. 세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짝, 부왕께서 고집하시는 이상은 괜찮겠지만 대통에 관한 일이었다.
그러니 때가 더 나쁘다는 것이었다.
* * *
“대군 대감.”
은헌은 동궁전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이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청아한 보랏빛 물들인 치마 끝에 금박이 흔들렸다.
“빈궁 저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는군요.”
은헌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인사를 받는 파리한 안색의 세자빈이 곱게 미소 지었다.
“예. 한동안 감기 기운에 방을 나서지 못했더니 그리되었습니다. 세자저하를 뵈러 오신 겝니까?”
은헌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 인사 올리러 왔습니다.”
매일 입궐하여 인사를 올리는 순서가 같으니 세자가 마지막이었다. 그는 그리 말하면서 동궁전 마루 아래를 확인했다.
“한데 저하께옵서 자리를 비우셨습니까? 평소 보다 서둘렀더니 강학이 아직 끝나시지 않으셨나 봅니다.”
세자빈이 그 시선 닿는 곳을 확인하곤 설명했다.
“저하께서 대전에 드셨다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안에서 기다리시지요.”
은헌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러셔도 됩니다. 대비마마를 뵈러 가는 길이 아니면 저와 차를 마시자 청 드리겠습니다만.”
세자빈은 희멀건 웃음을 흘렸다. 은헌은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며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예, 그럼.”
대군을 뒤로하고 세자빈은 동궁전을 빠져나갔다. 은헌은 파리한 안색을 보이는 얼굴을 눈에 담아두곤 동궁에 남은 이들을 불러 비어 있는 곁방으로 들었다.
“네가 밖이 아니라 안에서 기다리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세자는 돌아오자마자 농을 쳤다.
“오늘은 서 있는 게 영 다리가 아프지 뭡니까.”
은헌은 익숙하게 말을 받았다.
“도성 돌아다니는 게 바쁜가 보구나.”
형님의 물음에 아우는 그저 함박웃음을 흘렸다.
“좋지요. 사람 많은 곳을 다니며 이것저것 신기한 것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가 바삐 지나니 얼마나 좋습니까.”
“시간을 쏜살같이 흘려보내고 싶은 것이냐.”
누군가는 가는 세월을 야속하다 여기겠지만 은헌은 아니었다.
“숨만 쉬는 것처럼 따분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지금이야 하루가 멀다 하고 입궐을 위해 도성에 들지만, 한때는 집 담장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오죽하면 중전이 열병으로 고생하는데도 도성문 앞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금군에게 가로막힌 적도 있었다. 은헌은 그제야 저가 사저에 유배당한 것을 깨달았다. 위리안치가 따로 없었다.
“그나저나 궐에 고뿔이 돌았나 봅니다. 어마마마 처소에도 상궁들 몇몇이 고뿔로 자릴 비웠는데 동궁전에 오니 빈궁 저하의 안색이 나쁜 듯하시고…….”
세자가 은헌을 보며 물었다.
“빈궁을 보았더냐.”
“요 앞에서 뵈었소. 저하께서 대전에 납시었단 말도 빈궁 저하께 전하여 들었습니다. 조금 전에는 할마마마께 가신다 나서셨고요.”
은헌의 설명에 세자는 마루 건너 온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살포시 어둑해졌다.
“지난봄부터 몸살이 심하여 앓더니, 몸이 많이 약해졌다. 그나저나 바람 부는 날에는 되도록 처소에서 보내시라 하였더니.”
대비전의 부름이라곤 하나 궂은 날씨에 빈궁이 기어코 동궁을 나간 것이 못마땅한지 세자가 콧등을 구겼다.
은헌은 그것을 보며 픽 웃었다.
“어디 바람에 날아갈까 무섭기라도 하신 겝니까?”
“찬바람에 또 고뿔을 앓을까 그런 게지.”
여름이 다 되어 가는데도 한기로 고생하는 빈궁이 안타까운지 세자가 팔불출 티를 냈다.
“그나저나 은헌, 너도 뭔가 할 말이 있어 기다린 게 아니냐. 평상시라면 벌써 궐을 나섰을 텐데 여태 기다린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은헌은 작게 웃었다. 그러곤 세자의 얼굴을 살폈다.
“뭐, 별건 아닙니다. 이 아우가 요즘 시전 구경 다니길 좋아하여 이리저리 거닐다 벗을 하나 사귀었는데, 그자가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지 뭡니까.”
그는 귀신의 일을 천천히 설명했다.
전부 다 말할 수는 없으니 뼈대만 추슬러 간략하게 말이다.
“하여 도움을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형님께서는 이 아우가 나서 도와주어야 한다 여기십니까.”
세자는 은헌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더니 물었다.
“네 새로 사귄 벗이 곤경에 처한 일에 포청이 나서기 어려운가?”
“그렇습니다.”
“네 벗이 잘못한 것은 없고?”
은헌은 눈을 깜박였다.
“아직은 모르지요. 한데 그것을 알아보려니 시시비비를 따져 묻기엔 벗과 다툰 이의 신분이…… 문제지 뭡니까.”
세자가 코웃음 쳤다.
“은헌, 너는 이 나라 대군이다. 네가 누군지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알지요. 그러니 고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은헌의 말에 세자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법에 따져 묻고, 도덕에 따져 묻거라. 네 벗이 잘못하였다면 그 죗값을 치르고, 누군지 모르나 그 다툰 이가 죄를 지었다면 정해진 법에 따라 마땅히 죄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그게 누구든 말이오?”
세자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그것이 국법의 지엄함이란다.”
엄격하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그렇지요. 새삼스레 저하께 당연한 것을 여쭸소.”
“은헌 넌 마음에 지나치게 정이 많으니까.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을 무섭게 여기지 않으냐.”
은헌은 코웃음 쳤다.
“다치면 누구든 아픈 것이니 그러지요. 사람이란 본디 자신이 아픈 것은 아는데 남 아픈 것은 잘 모르니 매사 조심해야 한다, 형님께서 아우에게 그리 이르지 않았소.”
“내가 그랬지.”
세자는 아우를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또 물을 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저하께서도 바쁘실 텐데 시간을 더 뺏을 수야 없지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은헌은 공손히 예를 갖췄다.
* * *
“역관과 관련된 다른 소식은 있는가?”
고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그 이름 없는 시신을 확인하고, 예상되는 몇 집에 사람을 보내 실종자가 있는지 파악하라 일렀습니다.”
은헌은 귀신을 떠올렸다.
“그랬군. 신분이 확인되면 초상 치를 수 있을 테니 다행이군.”
고윤은 호적고에만 앉아 있던 저가 오랜만에 나선 일이라 서리들이 괜스레 몇 번이고 힐끗힐끗 보았던 것을 비밀에 부쳤다.
“시신이 누군지 알게 되면 어찌하는가?”
“그것이 살인으로 죽은 것이라면 범인을 잡아야 하니 수사를 하겠지요. 한성부 관할에서 일어난 일이니 저나 다른 참군이 나설 것입니다.”
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알아낸 사실은 정말로 별것 아닌 듯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허술한 흔적이라면 범인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귀신이 서갑령을 지목했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말이다.
“그럼 됐네.”
은헌은 저가 직접 들쑤시고 다니는 것보다 관에 맡기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살짝 들여다보는 것보다 훨씬 안전했다. 되도록 고윤에게도 그 사건은 다른 이에게 넘기고 손을 떼라 하고 싶었다.
“국이 다 식었군. 다시 내오라 할까?”
밥상 받기 무섭게 이야기를 시작하다 보니 음식이 금세 식어가고 있었다.
고윤은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번거롭게.”
그는 별말 없이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였다. 은헌도 마찬가지였다.
“귀신은 한성부에 계속 두는 것인가?”
“해결되려면 빨라야 한 달이니 사람 없는 곳으로 옮길까 생각 중입니다.”
워낙 절차가 복잡한 데다 판결까지 나려면 한참 걸릴 일이었다. 은헌은 눈을 찡그렸다. 고윤도 마찬가지였다.
깃털을 얻고자 시작한 일인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니 인제 와 눈감을 수도 없었다.
“때가 되면 집 근처 빈집으로 옮겨야지요.”
은헌은 그게 좋을 것 같다 대답했다.
“그리하게. 그럼 오늘은 예서 자고 갈 텐가?”
식사하다 고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가면 됩니다.”
도성문은 닫혔겠지만 애초에 인간 다니는 길에 구애받지 않으니 야심한 시각이라도 집에 가는 데는 문제없었다.
“어차피 가봐야 좀 이따가 다시 볼 게 아닌가.”
깃털이 없으니 그냥 낚싯대라도 던지러 꿈속에서 봐야 했다. 고윤은 부쩍 낚시에 의욕을 내는 은헌을 의뭉스러운 얼굴로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자고 가는 게 그도 편했다.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고, 여긴 저를 찾아와 기다리는 귀신도 없었다. 제집 마당에 득시글한 혼백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절로 결정되었다.
“신세 지겠습니다. 하룻밤만요.”
“이 사람 참, 우리가 보낸 밤이 몇인데 이제 와 새삼스레.”
“수상한 소린 하지 마시고요.”
고윤의 말에 대군은 능청스레 웃었다.
식사를 끝내고 둘은 후원으로 나섰다. 현실이든 꿈이든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 그런지 여기가 대화하기 편했다.
밖으로 나선 고윤은 하늘을 올려다보곤 짧게 혀를 찼다.
“왜 그러나?”
“오늘은 쉴까 했는데, 날이 아닌가 봅니다.”
그는 팔을 내밀었다. 은헌은 어디선가 펄럭펄럭 연약한 날갯짓을 하며 날아든 눈부실 정도로 흰 나비를 봤다. 그것은 고윤의 손끝에 내려앉은 순간 새카만 먹을 뒤집어쓴 것처럼 까맣게 변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그게 뭔가?”
고윤은 제 손에 쓰인 서신을 읽었다.
“일전에 맡긴 책벌레 고치에서 실을 다 자아냈으니 찾으러 오라는 방물장수의 연락입니다.”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떨었다. 그러자 검은 얼룩이 물방울처럼 떨어져 나갔다.
“지금 갈 텐가?”
“예, 뭐.”
고윤은 눈을 찌푸렸다. 아침엔 다시 관에 들어야 하니 시간이 날 때 다녀와야 했다. 은헌은 고윤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챈 고윤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가고 싶으십니까.”
“뭐, 값은 다 냈는데 하자 있는 물건임을 알았으니 따지러 가고 싶긴 했지.”
은헌은 말을 어물쩍거렸다.
그러나 도성문이 이미 닫혔다. 예전에 갔던 그 안전한 입구로 당장 갈 수가 없으니 같이 가자 말을 못 하는 것이다. 혼자라면 모를까 저까지 데리고 가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아는 은헌은 아쉬움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조르지 않았다.
“가실 거면 같이 가시든가요.”
고윤은 준비하려면 얼른 하라는 듯 툭 던졌다.
“인간이 드나들 수 있는 입구가 아니면 위험하다면서…….”
“그건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모를 때의 일이지요. 이젠 길을 알잖습니까.”
그러니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고윤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은헌은 곧장 방으로 들어와 채비했다. 그곳 음식은 먹지 못하는데 시간이 빨리 간다 하였으니 밤에 고윤에게 야식으로 먹자 하려던 것을 죄다 챙겨 주머니에 담았다. 소매가 묵직해졌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금붙이 몇 개를 더 챙겨 넣은 뒤에 후원으로 다시 나갔다.
그사이 고윤은 길을 열 준비를 끝냈다.
“이제 가면 되네.”
그 말에 고윤은 당연하다는 듯 은헌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었다. 은헌은 후원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쓰지 않는 문으로 향하는 고윤의 뒤를 따라 바싹 붙어 걸었다.
“대감?”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후원에 뒤늦게 든 행랑아범이 조심히 움직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후원에서 말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어디에도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밀려드는 오싹함에 행랑아범은 팔을 문질렀다. 사람은 갑작스레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는다. 대군은 좀 괴짜 같은 모습을 보이실 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그러니 자리를 비우신 거였다. 그 참군과 함께 말이다.
인간다운 결론을 내린 하인은 꽉 닫아두었던 뒷문이 열린 것을 조심스레 닫고 재빠르게 후원에서 줄행랑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