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
푸름이 짙어졌다.
잎사귀마다 연한 물을 버리고 짙음을 택했다. 계절의 변화란 눈으로 볼 때마다 경이로운 것이었다.
“오늘따라 대군의 표정이 무척 밝구나.”
은헌은 중전의 말에 웃었다. 아침부터 궐에 들어왔으나 부왕에게 일이 생겨 만나지 못한 것이 얼굴에 드러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니께 오늘은 아비의 얼굴을 보지 않아 좋습니다, 그리 말할 수도 없었다.
“여름이니까요.”
딱히 여름을 기꺼워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그렇게 둘러댔다.
“은헌, 네가 여름을 좋아했던가?”
“……곧 저하의 탄일이 있지 않습니까. 제게는 형님 저하께 선물 드릴 몇 안 되는 날이니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요. 지난겨울에 귀한 곰 가죽을 받지 않았습니까.”
은헌은 조금 된 일을 꺼냈다. 그의 말에 중전은 기억을 되돌리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이번에도 준비하고 있고?”
“아직 이렇다 할 것을 못 찾아 부지런히 발품 팔고 있습니다.”
“대군이 직접?”
은헌은 웃었다.
“저하께 올릴 것이니 당연히 제가 직접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골라두었고, 사두기도 했다. 화국(華國) 사신이 들어온다 했을 때부터 준비해 둔 것이었다.
매해 누가 서로에게 더 귀한 선물을 주느냐로 경쟁하는 형제를 떠올리며 중전은 희소했다. 좋은 우애였다. 궐 안에서는 천금처럼 귀한 관계였다.
“모자 사이가 애틋하니 웃음소리가 후원 담장까지 넘는구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라면 더 좋았을 시간이었다. 은헌은 황급히 몸을 돌려 곧장 허리를 숙였다.
“아바마마.”
“전하.”
중전은 지아비를 보며 곱게 웃었다. 왕은 그런 지어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은헌은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났다. 중전께서 같이 계시니 대전에 들렀을 때처럼 되바라졌다는 소린 듣지 않겠지만, 그에게 묶여 괜히 모후가 쓴소릴 들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눈길을 바닥에 내리깔았다.
“은헌은 도성에 머무는 시간이 근래 늘었다지?”
왕의 말에 은헌은 쓴 물을 삼켰다. 그의 발 닿는 곳마다 왕이 붙인 감시가 따라다닌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숨이 막혔다.
“사신단을 따라갔다 돌아온 상단에 귀한 책이 들어왔다 하여…… 찾아보고 있사옵니다. 형님께 구해 드릴까 하고요.”
“쯧쯧, 대군이 궐의 법도란 것도 모르고 궐 담장 밖의 것을 함부로 궐내에 들이는구나.”
본래 사가의 물건을 부러 들이지 않는 것은 왕족에게 해가 될 어떤 물건이 뒤섞여 들어오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걸 알고는 있으나 학문을 갈고닦기 위해 책을 읽는 일 정도는 지금껏 관례로 봐준 것이었다.
“송구합니다.”
은헌은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대신 잘못했다 말했다. 어떻게 답하든 꾸지람밖에 들을 것이 없었다. 그를 꾸짖기 위한 일방적인 문답을 끝내고서야 왕은 중전에게 인사도 없이 못마땅한 기색만 내비치고 자리를 떴다.
“은헌.”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담긴 모래 알갱이 같은 감정을 읽었다. 처음에는 바위 같았을 테고 그 뒤로는 부서지고 부서져 작은 돌에서 이제는 모래 정도밖에 되지 않는 희미한, 묵은 감정을 말이다. 무시하려고 해도 여전히 속에 가라앉아 까끌까끌했다.
“부왕도 뵈었으니 이제 저하께 인사드리고 퇴궐해야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가거라.”
중전은 은헌을 보며 환히 웃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얼굴이었다.
둘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그 자리를 떠났다. 은헌은 허리와 등을 꼿꼿이 세웠다. 아무리 미움받아도 그는 왕의 아들이었다.
“왜 이리 풀이 죽었누.”
“배곯아 기운이 다 빠졌나 봅니다.”
은헌은 웅얼거리며 답했다. 세자는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는 동생을 보며 소매를 뒤적였다.
“뭘 내줘야 기분이 풀릴꼬.”
다 큰 아우를 대하는 형님의 농에 은헌은 실없다며 웃었다. 세자는 픽 웃음을 터뜨리곤 서책을 펼쳤다.
“너무 걱정 말아라. 지금 부리시는 심술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세자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로서도 딱히 해결 방법은 없었다.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걸음마 하던 시절부터 그의 아내였던 세자빈을 이제 와 폐하라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생각도 없었다.
“오래가더라도 길게 보내지 않으려 합니다.”
세자는 고개를 들어 은헌대군을 보았다.
“올겨울 들어서면…… 화국으로 가는 사신단이 꾸려진다 하지요.”
“은헌!”
왕자가 타국으로, 그것도 적통 대군이 사신단에 오르는 일은 오직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은헌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 아우가 화어(華語)를 열심히 공부하였지 뭡니까. 배워 쓰지도 못할 것을 뭐 하러 그리 열심히 한답니까. 절 가르친 이가 하는 말로는 밥은 충분히 사 먹을 수 있다 합니다.”
배웠으니 한 번은 써먹어봐야 하지 않겠느냔 단순한 그의 생각이었으나 그 말이 나오게 된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은헌은 세자를 봤다.
정이 많아 쉽게 사람을 버리지 못하는 분이셨다. 특히 제 사람이면 말이다. 그러니 세자가 세자빈을 놓을 리가 없었다. 부왕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빈궁, 둘 다 세자 한 명을 꼭 붙들고 있으니 반대편에 서 있는 그가 손을 놔야 했다.
“화국에서도 더 서쪽으로 가면 모래가 바다를 이루고, 산을 이루는 이상한 땅도 있다 하고, 하늘 높이 솟아 여름이 되어도 쌓인 눈이 녹지 않는 땅도 있다 하니…… 생전 한 번은 봐야 대장부다운 삶이지요.”
은헌은 키득거렸다. 생각만 하여도 좋다는 듯 말이다.
세자는 그저 한숨만 참았다.
“그 전에……”
“힘써보시려고요? 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 형님 저하께서 좀 힘내보시는 수밖엔 없는데.”
히죽이며 능갈치는 것을 보며 세자는 결국 농을 그만두라며 버럭 했다. 그가 손쓰지 않아도 대군이 사신 행렬에 낄 가능성은 적었다. 겨울이 되기 전엔 분명 결론이 어느 식으로든 날 터였다. 세자인 그가 물러나거나 아니면 왕이 고집을 꺾든가 둘 중 하나였다.
그는 대신 대군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너는 어떠냐. 이제 혼처를 구해야지.”
은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인을 둘이나 먼저 보냈으면 되었지, 저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디 장가들기 싫어 이 처지겠습니까?”
역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린 나이의 규수 둘 중 한 명은 배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살이 썩어 죽었고, 다른 이는 온몸에 푸른 반점이 번져 죽었다 했다. 그런 병은 도성 바닥에 돈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젠 혼자가 편하오. 마음 쓸 것도 없으니 홀가분하지.”
역귀는 그였다. 은헌은 자신에게 내린 엄중한 왕의 경고를 잊지 않았다.
도성에 역귀가 있으니 부부인이 죽는구나. 하니 혼사를 빌미로 세력을 빌려 저항하지 말라는, 중전인 어머니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 말은 더 신경 쓰지 않겠다 하지 않았누.”
“그렇게 될 거요.”
은헌은 배시시 웃었다.
“녀석도. 마음에 둔 이라도 있으면 내게 꼭 말하거라.”
“빈궁 저하께 가서 아우 흉보시려고 그러시오?”
“쓸데없는 말을…….”
은헌은 농을 던지며 세자빈의 얼굴을 떠올렸다. 왕비가 될 사주를 타고났다는 말을 듣고 태어났다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왕실에서 키웠다시피 했다. 걸음마를 떼자마자 세자 형님의 짝이 된 것도 그 이유였다. 은헌도 어릴 적에는 곧잘 같이 놀곤 했다. 궐에 어린아이라곤 세자와 세자빈, 그밖에 없으니 당연히 동무처럼 지냈다. 다 커서는 보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말은 해주거라.”
“생긴다면요. 그럴 일이야 있겠느냐마는.”
은헌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요즘 그가 관심 두는 것 중에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것도 저와 똑같은 시커먼 사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최근 만난 이 중에 흥미로운 ‘사람’이 사내라는 것이 나름 충격이라.”
은헌은 아무 말이나 떠들어댔다.
“사내?”
세자가 흥미가 돋았는지 확인했다.
* * *
푸에취! 에취!
요란한 재채기가 연거푸 터졌다.
고윤은 몸을 들썩거리며 기침을 뱉어내곤 엄지로 뒤집어쓴 책을 펄럭펄럭 흩어냈다.
집에 있는 부리는 이가 한 명이라 애초에 청소를 깨끗이 할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물건이 이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꼴을 보니 한숨만 나왔다.
애초에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청소를 맡긴 저의 잘못이기도 했다.
“하기야 밤마다 바빠 청소를 게을리하기도 했지.”
오늘은 볼일만 끝내고 돌아와 한번 정리해야겠다 마음먹고 그는 손에 들린 책을 확인했다. 하얀 속과 달리 무엇으로 색을 입혔는지 모를 검은빛의 가죽을 두른 책이었다.
“돌아가거라.”
그의 말에 책이 흔들렸다. 바람 불 듯 휘청이는 것은 아니었고 가볍게 펄럭했다.
그러자 검은빛이었던 가죽에서 종이로, 먹물이 번져 가듯 옮겨갔다. 그게 바로 책벌레였다.
까만색에서 본래의 갈색으로 돌아온 가죽을 보며 고윤은 찾아둔 적당한 크기의 함지박 안에 책을 던져 넣곤 보따리로 꽁꽁 싸맸다.
문제의 책을 찾았으니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신을 신으러 섬돌에 발을 내렸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혼자 훌훌 다녀오면 멀리 나서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서 금방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데리러 가겠다 약조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묶인 말이라고 해서 꼭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대군과 그가 나눈 약조는 강제성이 없었다. 어긴다면 그 즉시 매듭이 풀리고 마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해가 될 것도 없었다. 오로지 도깨비의 장난에서 기억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귀한 날에 이게 무슨 일인지.”
고윤은 신경질을 부리며 소맷자락을 털어냈다.
“왔는가?”
은헌은 버선발로 고윤을 마중 나왔다. 고윤은 마당에 서서 고개를 꾸벅 조아렸다. 은헌은 총관에게 손짓하곤 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바로 가면 되네. 나도 준비를 다 해뒀네.”
고윤은 과연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성 성곽 바깥에 사는 이가 벽동에도 집이 있다기에 무슨 소린가 했더니 궐에 들었다가 나와 옷을 갈아입는 곳인 듯했다. 빈집과 아닌 곳에도 차이가 있듯 사람이 잠깐 머물렀다 가는 곳과 머무는 곳에도 차이는 있었다.
“어떤가? 그곳 가는 것도 이만하면 되겠지?”
은헌은 보통의 선비처럼 차려입었다.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혜화를 신고 향낭과 주머니를 달고 있으니 누가 봐도 돈 많은 양반이었다. 지체 높은 댁에서 귀하게 키운 도령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 거기도 여기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물건 사고파는 곳인 것을요. 파는 쪽도 사는 쪽도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뒷말을 삼키며 고윤은 신으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둘은 집을 나서 밖으로 나왔다. 하인이 따라붙으려 했지만, 대군은 괜찮다며 내쳤다.
점심나절에 오간 서신으로 이미 이야기가 된 것이었다.
고윤은 하인이 그를 보는 시선에 경계가 어린 것을 보며 입꼬릴 끌어 올려 웃었다.
대군이 따라붙은 것으로 충분했다. 그마저도 귀찮고 피곤했다. 평범한 인간을 줄줄이 꼬리처럼 달고 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인원수는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대군은 서둘러 길을 가자 재촉했고, 고윤은 머리 위 아직 떠 있는 해의 위치를 가늠하며 느긋하게 걸었다.
청계를 따라 난 길 양쪽 가게를 지나 운종가 뒷골목에 들어서자 사람들 틈에 섞여 걸음이 더 더뎌졌다. 은헌은 전에 소리를 들었던 골목과 한참 떨어진 곳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반걸음 앞서 길 안내를 하던 고윤이 뒤를 돌아봤다.
“앞문으로 가는 게 빠른데 왜 뒷문으로 둘러 가겠습니까.”
이해하기 쉬운 비유였다. 단번에 이해한 은헌은 다시 고윤의 뒤를 따라갔다. 머리가 하나는 더 작은 키의 뒷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에게는 아우가 없었으나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고윤은 길을 찾았다. 그곳으로 향하는 입구는 여럿이었으나 모두가 다 안전한 길은 아니었다. 까닥하다간 순식간에 왕족 시해다.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지가 분리될지도 모를 사태를 방비하기 위해 그는 인간이 드나들어도 되는 길 중 가장 입구가 튼튼한 곳을 찾았다.
“도착했습니다.”
“저기?”
뒤에서 퍽 당황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예.”
고윤은 소매에 손을 넣어 뒤적거렸다. 가기 전에 대군에게 방비를 해둬야 했다. 그는 향갑을 꺼냈다. 작은 갑 안에는 인간의 코에는 닿지 않을 냄새가 났다.
“그 비릿한 냄새는 뭔가?”
고윤은 코를 움켜쥐고 손을 내젓는 은헌을 의뭉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그의 주술을 깨고 꿈속의 일을 기억할 때부터 수상쩍긴 했는데 이 냄새를 맡을 수 있다니 더더욱 이상했다.
“뭔가? 그 얼굴은…….”
“뭐긴요. 그나저나 후각이 많이 예민하십니까?”
은헌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어렸을 적에는 나인이 저 먹겠다 숨겨놓은 주전부리도 냄새로 찾은 적이 있긴 하지만,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닌데.”
고윤은 고개를 흔들었다.
괜한 의심이었다. 대군인데 이런 것에 엮일 일이 뭐가 있겠나. 있다 해도 그와는 관련 없었다. 없어야 했다.
고윤은 손에 든 향갑을 내밀었다. 은헌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키지 않는다는 듯 그를 봤다.
“내게 주는 건가?”
“목숨 걸린 것이니 잘 챙겨주십시오.”
“그렇다면 말이 다르지.”
은헌은 날름 받아 챙겨 주머니에 향갑을 집어넣었다. 원래 넣어둔 향을 꺼내 그는 교환하듯 고윤에게 건네줬다. 그러곤 더 챙겨줄 것 없냐는 듯 응시했다.
고윤은 대군의 품에 들어간 향갑을 확인하곤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어둑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해가 저문 것은 아니었다. 서산 너머로 사라진 태양이 남겨둔 낮이 아직 하늘에 걸려 있었다.
“슬슬 시간이 되었군요.”
고윤은 손을 뻗어 은헌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곤 팔을 잡아끌며 골목으로 향했다. 은헌은 담벼락으로 막힌 좁은 골목으로 거침없이 들어가는 고윤의 모습에 당황했다. 벽에 박기라도 할 듯 빠른 걸음이었다.
“이보게.”
설명을 제대로 해줘야 하지 않겠냐며 입을 떼려는 순간 주위가 일그러지듯 뭉개졌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득하게 멀어지듯 떨어졌다가 갑자기 눈앞까지 확 밀어닥쳤다. 좁았던 골목이 순식간에 넓어졌다.
운종가 중심에 발을 들인 듯 사방으로 그림자가 넘쳐 났다.
“쉿!”
은헌은 제 입을 틀어막은 불충한 손을 보았다. 고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위를 보더니 아까처럼 그를 붙잡고 옆으로 갔다.
예의 그곳처럼 한적한 골목이었다. 그곳에 다다라서야 고윤은 은헌의 입에서 손을 치웠다.
“요즘 숨통은 이렇게 끊나? 신기한 수법이군.”
은헌은 막혔던 숨통이 트이자마자 농을 던졌다. 고윤이 쓸데없는 소릴 한다는 얼굴로 그를 봤다.
은헌은 가볍게 숨을 고르곤 골목 밖을 흘깃거렸다.
“여기가 어딘가?”
“시전입니다.”
“운종가는 아닐 테지.”
고윤은 입을 다물었다. 이 거리의 이름은 그도 몰랐다. 알려고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 책 때문에 가는 곳이니 평범한 데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은헌은 말을 맺지 못하고 골목 앞을 지나가는 것의 그림자를 훑었다. 목이 뱀처럼 길게 늘어나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그러니 길 잃지 마시고 저만 잘 따라다니시면 됩니다.”
한눈만 팔지 않으면 된다. 고윤은 몇 번이고 당부했다. 몇 가지만 주의하면 인간에게도 아무 해 될 것 없는 거리였다. 어딜 가든 하지 말란 것만 하지 않으면 위험할 게 뭐가 있겠느냐 말이다.
경고를 숙지한 은헌이 단단히 경계하겠다 약조하자 둘은 그제야 골목에서 다시 나왔다.
은헌은 낯설고 기괴함에 당혹스러운 거리를 훑었다. 장안의 풍경이 이러했을까 싶었다. 어디까지 뻗었는지 모를 대로 위로 인간 아닌 것들이 분주하게 쏘다녔다. 길의 양옆으론 먼 이국의 그림에서 본 것과 같은, 위아래로 포개져 있는 집들이 들어서 있고, 그 아래마다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머리 위 하늘은 온통 흐르는 별들로 가득했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신기한 세상을, 고윤은 뭐 볼 것도 없는데 호들갑을 떤다며 갈 길을 재촉했다.
“저것 좀 보게.”
“옛날에 질리도록 봤습니다.”
“이것도?”
“예. 저렇게 보여도 가까이 가면 엄청난 악취가 나니까 근처로는 발도 들이지 마십시오.”
고윤은 길의 중심을 따라 은헌을 이끌었다. 책쾌가 일러준 가게는 입구에서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온갖 물건이 쌓인 입구 아래 두꺼비라 적힌 간판을 확인하고 고윤은 멈췄다.
“계시오.”
그는 문턱을 넘지 않고 밖에서 주인을 불렀다.
“들어오시오.”
기괴한 목소리에 은헌은 머리 위에 걸린 마른 두꺼비를 미심쩍은 눈길로 보았다.
고윤은 초대가 떨어지자 그제야 은헌의 팔을 붙잡고 문턱을 넘어갔다. 밖에서는 좁아 보였으나 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은헌은 세상 신기한 구경에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었다. 경박하게 말이다. 그는 눈을 굴려 물건들을 살폈다.
운종가 최고 상단의 창고를 털어도 여기서 가장 하품의 물건에도 미치지 못할 듯했다.
고윤은 안에서 나온 풍채 좋은 노인을 보았다. 이곳의 주인인 방물장수였다.
“신기한 손님이군. 인간 둘이라니.”
쉴 새 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던 커다란 눈이 고윤을 향해 멈췄다.
“그래, 무슨 일인가 여기까지?”
고윤은 손에 들고 온 보따리를 내밀었다.
“여길 오면 책벌레 고치에서 실을 뽑아준다 들었소.”
“책벌레 고치라. 어디 한번 보세.”
방물장수는 보따리를 받아 풀었다. 함지박이 나오고 뚜껑을 열자 먹물 냄새가 풀풀 났다.
“꽤 되는군. 해줄 수는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네.”
“얼마나 말이오?”
“그쪽 시간으로 사나흘?”
고윤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것보단 늦어지겠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방물장수가 고윤을 보았다. 눈동자의 새카만 부분이 점점 더 커져 기괴했다.
은헌은 멀리 떨어지지 않고 옆에 있는 물건을 눈으로 살폈다. 세자에게 줄 선물을 고른답시고 근래 좋은 것이 있다면 가리지 않고 다니며 보았는데 이곳에선 그보다 더한 물건도 구할 수 있을 듯했다.
고윤에게 말을 꺼내면 혼날까 싶어 은헌은 입을 꾹 다물고 눈으로만 열심히 사방 천지 번쩍거리는 것들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다 눈에 익숙한 것을 발견했다.
온통 금빛으로 번쩍이는 것들 가운데 이질적이고도 둔탁한 검은빛이었다. 낚싯대였다.
짧은 탄성을 흘리며 은헌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걸음을 뗐다.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근사했다. 그는 이곳 주인장과 고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 나누는 것을 본 뒤 다시 낚싯대를 살폈다. 한 걸음 옆에서 말하고 있는데도 벙긋거리는 입모양만 보일 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찰박거리는 물소리 같은 것만 드문드문 들렸다. 뭔가 수상쩍긴 했지만, 어차피 이런 곳이니 당연한가 싶어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낚싯대는 단단해 보였다. 튼튼해 보여 쉽게 부서지지도 않을 듯했고, 끝부분으로 갈수록 얇아 탄성도 좋을 것 같았다. 끝에 달아놓은 실도 가늘고 질겨 보였다.
“사시려오?”
“으와! 깜짝이야!”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괴상한 목소리에 은헌은 화들짝 놀라 고윤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뭐 하냐는 듯 고윤이 그를 멀뚱히 쳐다봤다. 너무 놀라 맥박이 튀고, 귀 안쪽이 욱신거리기까지 했으나 은헌은 이내 제 모습을 살피곤 멋쩍게 웃었다.
“큭.”
부끄러워하는 그를 보며 방물장수가 손을 뻗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멀찍이 떨어진 물건인데 가까이에 있는 것을 집어 올린 것처럼, 처음부터 손 닿는 곳에 있었던 것처럼 노인의 손에 낚싯대가 들려 있었다.
“낚싯대를 사려면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은 없지. 어딜 가도 말이오.”
방물장수는 시커먼 눈을 굴리며 히죽거렸다. 은헌은 여전히 놀라는 중이었으나 관심 둔 물건을 가까이서 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 있는 것 중 살 물건은 없습니다.”
고윤은 은헌을 붙잡아 말렸다.
인간이 사용하기엔 분명 위험해 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기 있는 물건 중 평범한 것이라곤 없었다. 이 가게 안에 있는 것이 겉만 멀쩡해 보인다고 괜찮을 리도 없었다.
“그렇겠지?”
도깨비에게 받은 물건에 기억을 갉아 먹혀 그걸 되찾고자 온 길이었다.
은헌은 고윤의 말에 수긍은 했다.
평범하지 않은 거리에 두꺼비 요괴가 물건을 파는 상점이었다. 낚싯대라고 평범할까? 한데 욕심이 가시지 않았다. 살아온 평생 욕심은 버리고 또 버렸던 터라 포기가 금방 되었는데 말이다. 대군으로 태어났으나 어떤 것도 쉽게 손에 쥐어서는 곤란했다. 그런 세월 동안 마음에 드는 것이라도 티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연습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것이었다. 은헌은 제 속에도 이런 충동이 있나 싶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는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거라면 인간도 쓸 수 있다오. 그쪽이라면 더더욱.”
두꺼비의 눈알이 뱅글뱅글 돌아가다 확 멈췄다. 은헌은 고윤을 봤다.
“한번 살펴봐 줄 수 있겠나?”
고윤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사시려고요?”
“우리가 낚아야 하는 놈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할 듯하여서 말일세. 낚싯대가 좋으면 좀 더 잘 잡힐 수도 있잖은가.”
고윤은 혀를 찼다. 그는 대군의 홀린 얼굴을 뒤로하고 두꺼비의 손에 있는 낚싯대를 받아 들었다. 차가웠다. 쇠처럼 단단한 감촉인데도 속이 빈 나무 같았다. 대나무처럼 탄력도 있었다. 달린 실도 튼튼했다.
게다가 이리저리 만져도 불길한 것은 붙어 있지 않았다. 누구도 쓰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다.
“괜찮군요.”
그 말에 은헌은 곧장 낚싯대를 챙겼다.
“값은 어찌 치르오.”
돈이라면 들고 오긴 했다. 그것도 두둑이 챙겼다.
방물장수가 킬킬거렸다.
“그런 것은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값은…… 아마도 이 낚싯대를 쓸 때가 되면 무엇으로 치렀는지 알게 될 겁니다. 그래도 가져가시겠습니까.”
돈도 꺼내지 않았는데 머릿속이 읽힌 듯했다. 은헌은 다시 고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괜찮냐는 얼굴이었다.
고윤은 제가 방금 본 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방물장수를 보며 입을 뗐다.
“그것으로 충분하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영문 모를 말이 오갔다. 고윤은 두꺼비의 말을 붙잡아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매듭지었다. 은헌은 말이 실처럼 묶인 것을 보고 콧김을 내뿜었다. 은헌은 고윤이 제게 해 될 일이 아니라고 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치인지는 몰라도 이미 값을 가져간 듯하니 셈도 치러졌다. 그는 낚싯대를 품에 곱게 안아 들었다.
“다 된 건가?”
“예.”
고윤은 올 때 그랬던 것처럼 팔을 뻗어 대군의 손목을 붙들었다. 은헌은 붙잡힌 팔목을 보았으나 별말 하지 않았다.
“그럼…….”
공손히 인사하는 두꺼비를 뒤로하고 그들은 다시 문턱을 넘어 나왔다.
“어?”
은헌은 눈앞에 보이는 세상에 단말마의 외침을 뱉었다.
가게에 들어갈 때만 해도 입구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들어갔는데 나오니 곧장 인세였다. 그는 자기의 눈에도 퍽 익숙한 거리를 살폈다. 뒤로 돌아보자 세상 휘황찬란한 것을 다 모아둔 가게는 사라지고 진창이 있는 좁고 냄새나는 골목만 보였다.
“주전부리도 못 샀는데…….”
그는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뭘 사요?”
옆에서 고윤이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는 듯 되물었다. 얼른 아니라고 하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주전부리 말일세. 시전을 갔으면 거기가 어디든 모름지기 그곳에 가장 맛난 것을 사서 먹는 게 법도란 말일세.”
“경국대전에 그런 법도는 없습니다.”
한성부 관리가 냉정하게 답했다.
은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사서 먹지도 못합니다.”
고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먹었다간 큰 탈이 나죠. 옛날이야기도 못 들어보셨습니까. 무릉도원 같은 곳에 발을 디뎠다가 복숭아 하나 얻어먹었을 뿐인데 시간이 굉장히 흐른 뒤에 돌아온 사냥꾼 이야기 같은 거요.”
“들은 적이야 있지만.”
민가의 이야기였으나 대군 역시 어렸을 적부터 궐 밖에서 컸기에 보모상궁에게 꽤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고윤은 설명은 그것으로 됐다는 듯 손뼉을 쳤다.
“가시죠. 그럼.”
그는 여전히 붙잡고 있는 은헌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은헌은 못 이기는 척 끌려갔다.
“어딜 가는데 그러는가?”
그는 낚싯대를 꼭 안고 따라가며 물었다.
“액땜하러 가는 겁니다.”
고윤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시전 근처의 뒷골목을 따라 들어갔다. 좁은 골목에 기름붙이 냄새가 났다. 그는 그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갔다. 대군은 낮은 마루와 흙바닥 여기저기 앉은뱅이 의자에 앉은 이들을 보았다. 고윤은 그곳을 그대로 벗어나 맞은편으로 집을 관통하듯 지나갔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 좁은 다리가 하나 나왔다. 거길 건너자 주막이 있었다. 마침 마당에 빈자리가 하나 나와 그들은 재빨리 자릴 차지해 앉았다.
고윤은 자리 잡자마자 달려온 주막 주인에게 곧장 주문했다. 은헌은 처음 와보는 주막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시전을 돌아다니며 그도 하인들과 가끔 들러 끼니를 채우긴 했으나 그런 곳조차도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나름 까탈스럽게 고르고 고른 곳이었다.
“붉은 것이 들어간 음식으로 골랐습니다.”
뭘 먹을지 물어보지도 않고 식사를 주문했던 고윤이 뒤늦게 말을 했다.
“벽사의 색이지.”
은헌은 어릴 적 좋지 않은 꿈을 꾸었던 날이면 보모상궁이 빼먹지 않고 그의 밥상에 붉은 식재료가 들어간 음식을 하나씩 올려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대부분은 팥이었다.
“그나저나 기름 냄새를 맡아 그런가? 무척 굶주린 느낌이야.”
은헌은 하늘을 보았다.
해가 막 저물 때 그곳으로 넘어가고 꽤 시간을 보내다 왔는데 여긴 이제야 해가 온전히 저물어 밤이 시작된 듯했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보이는데.”
고윤은 코웃음 쳤다.
“그쪽에서 삼 일이나 있다 왔습니다.”
“뭐?”
은헌은 화들짝 놀라 다시 하늘을 살폈다. 그런 그를 보며 고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서로 흐름이 다른 곳입니다. 그곳 하늘 역시 보지 않으셨습니까. 별이 흐르는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요.”
은헌은 새삼스러운 기분에 건너편에 앉아 있는 고윤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순식간에 삼 일이란 말이지.”
“향갑의 향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도록 했으니 머리로는 알 수 없지요. 그게 아니라면 이곳으로 나오자마자 쓰러지셨을 겁니다.”
은헌은 그것도 그렇고 고윤이 계속해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여전히 그 감각이 남아 있는 손목을 문질렀다.
어째서인가 했는데 이것도 이유가 있었는가 했다. 고윤도 은헌의 손길 닿는 곳을 보았으나 그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주인은 고윤이 시킨 음식을 부지런히 내왔다. 푸짐하게 담아낸 장국밥에 장김치, 수육까지 있었다. 한눈에도 귀티나 보이는 은헌까지 앉아 있어 그런지 굉장히 신경 쓴 것이 티 나는 상차림이었다. 은헌은 반질반질 열심히도 문질러 닦은 것 같은 수저를 들었다.
“맛나군. 솜씨가 좋아.”
고윤은 젓가락질하기 좋게 찬의 위치를 바꿔놓곤 숟가락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 은헌도 고개를 돌렸다가 짧게 숨을 뱉었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이 감겼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보인다는 것을 아는 순간 들러붙으니까요.”
고윤은 낮은 목소리로 충고한 뒤 국밥을 저어 식히곤 한 수저 떠 입에 넣었다. 뜨거운 것을 먹자 알지 못하고 있던 허기가 밀려들었다. 머리로는 아주 잠깐처럼 느껴지지만, 몸은 사흘 동안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은헌 역시 비슷했다. 첫 숟갈이 목구멍을 넘어서자 바로 뒤에서 팔 하나 덜렁거린 채 피투성이로 서 있는, 몸이 반쯤 녹아내린 귀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졌다. 어쩐지 거기서도 주전부리에 눈이 가더라니, 위장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둘은 조용히 수저를 놀리며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 올린 것을 먹어 치웠다.
어느 정도 허기가 지워지자 은헌은 붉은빛 도는 오미자 진국을 마시며 다시 주위를 살폈다.
살면서 거리에서 귀신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요즘 사람 아닌 것들을 꽤 자주 보긴 했으나 앞으로도 계속 보이는 것은 어쩐지 귀찮았다. 그는 제가 가진 호기심을 간과하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무섭기도 했으나 두려움이 가시면 보나마나 다시 말을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해 가장 잘 알 만한 이를 봤다.
“그런 자들은 앞으로 계속 보이는 건가?”
고윤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잠시 눈이 뜨인 것뿐입니다. 내일이 되면 원래대로 돌아가 아무것도 보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이 근방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그것들도 많이 와서 유난히 눈에 드는 것이고요.”
본디 사람이 많은 곳엔 귀신도 많았다. 잔치를 벌이거나 초상이 난 곳에 특히 많은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의문에 대한 답을 하나 구하고 나니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자네는 언제부터 그런 것을 보았는가?”
고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툭 하니 대답했다.
“날 때부터 이랬습니다.”
천형이나 다름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 못 해 꽤 고생했다. 덕분에 좁고 높게 담을 두른 별채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늘만 올려다보며 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머리가 자란 뒤엔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그의 주변에 담장은 없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가 생겼다.
“어렸을 적에도 봤다니 고생했겠군.”
고생의 종류는 달랐으나 어린 시절이 만만치 않았던 대군은 담담히 공감했다.
“뭐든 평범한 게 좋지.”
“유별나 봐야 고생길밖에 펼쳐진 게 없으니까요.”
왕의 아들이든 고관대작의 아들이든 지금은 이런 주막에서 귀신을 보며 밥 먹는 신세였다.
실컷 허기를 달랜 뒤 둘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배를 채우니 졸음이 밀려온 탓이었다. 잠 귀신이 올라탄 것도 아닌데 천근만근 무거워진 눈꺼풀을 비비며 고윤은 은헌을 벽동 초입까지 바래다주곤 인사했다.
남산골로 떠난 고윤을 뒤로하고 은헌도 휘적휘적 길을 걸었다. 벽동으로 올라가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는 낮에 집을 나서기 전 하인에게 일러둔 곳으로 걸음 했다.
사람이 많은 길을 벗어나 좁은 골목을 돌고 다시 큰길로 나와 그는 우포청 앞을 지났다. 그리곤 다리를 하나 건넜다. 관청들이 죄다 모여 있는 육조거리 저 끝에 궐이 있었다. 그는 궐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는 다시 북쪽으로 걸었다.
번화한 곳이 있으면 어둑한 곳도 있는 법이라 포도청에서 멀어져 위로 갈수록 길이 굽이지고 어둑한 장소가 나타났다.
은헌은 조용히 걷다 마침내 멈춰 섰다.
“어디까지 따라올 참이냐. 계속 따라나설 거면 말이라도 한 필 가져오든가, 눈치도 없는 작자들이구나.”
은헌은 뒤로 몸을 홱 돌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골목이었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 쳤다.
어둠 짙은 곳에서 그림자가 흔들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무복을 입은 이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하인들이 그림자의 목에 칼을 겨눈 채 걸어 나왔다.
“대감, 말을 대령할까요.”
석삼이 고개를 숙여 공손히 물었다. 은헌은 손을 내저었다.
“조금 더 가면 되는데 시간만 더 잡아먹는다.”
그는 앞에 선 이를 봤다. 그의 시선이 허리춤을 향했다.
“금군이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침묵으로 답이 되었다.
“오늘 보고 들은 일은 혀끝에 올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하께 아니면 저하께 말입니까.”
은헌은 비소를 머금었다.
금군은 왕 아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자의 입에서 세자가 거론되었단 말은 여러 해석이 가능했다.
“전하께 말이다.”
형님에겐 숨기는 일이 없으니 부왕의 귀를 막는 것으로 충분했다.
검은 그림자는 목에 닿은 칼날도 무시하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저하께서 전하란 말씀이 있습니다.”
“저하께서 말이냐?”
“내 아우가 호기심이 많은 것은 알고 있다만, 위험한 것에 곧잘 손을 대는구나. 이들에게 지켜보다 나서야 할 듯 같으면 망설이지 말라 했으니 대군은 귀찮더라도 멀리 물리지는 말라. 그렇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은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손을 내저었다. 하인들이 금방 칼을 거두고 그를 호위하듯 붙어 섰다.
그는 다시 휘적휘적 걸었다.
* * *
고윤은 새벽부터 바빴다.
호적고의 일은 늘 분주하였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했다. 그는 오랜만에 포청을 방문해 남부에서 발생한 변고 사건에 관한 사진 기록을 건네어 받고 검시록을 읽었다. 한성부는 기본적으로 한성 내에 일어난 일들을 관리하다 보니 고윤 역시 주로 맡아 보는 일이 호적에 관한 것이더라도 가끔 이리 형조 사건을 봐야 할 때도 있었다.
‘이보오―이보오.’
그는 붓끝에 먹을 묻혀 닦아낸 뒤 회보할 문건을 써 내려가며 코웃음 쳤다. 음기가 강한 밤 깊은 시간에만 귀신이 나타난다 말한 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찾아내면 주둥이를 곤장으로 쳐 주고 싶었다.
낮에는 산 사람의 일로도 벅찬데 죽은 자들까지 그를 찾아왔다. 여기가 저승도 아니고 멀쩡한 한성부로 어찌 알고 찾아오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고윤은 그래서 깔끔히 무시했다.
귀신과 관련된 일은 저녁부터 새벽까지만 하기로 스스로 약속하였다. 시간이 아닌데도 찾아온 객을 보통 불청객이라 했고, 손님으로 대접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창문도 열지 않았는데 바람 부는 것처럼 종이가 날려도 그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같이 일하는 자들이 한겨울 얼음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얼어붙었다. 고윤은 붓을 내려놓은 뒤 일어섰다.
“잠시 소피 좀 누고 오겠네.”
“예! 예! 살펴 갔다 오십시오.”
그는 겁먹은 듯 후다닥 뛰어 얼른 문을 열어주는 이를 무심한 걸음으로 지나쳤다. 으흑, 흑, 울먹거리며 귀신이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 얼굴이 검시소에서 보았던 죽은 이와 똑같았다. 고윤은 마루를 걸으며 조금 전 그를 보던 구실아치들의 시선을 떠올렸다. 그를 보는 살아 있는 자의 시선이란 보통 그런 것이었다. 다른 것에 대해 끔찍함과 두려움이 뒤범벅된, 자신과 다른 것을 배척하여 밀어내는 눈빛 말이다.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마주칠 때는 경계가 먼저였다.
고윤은 생글거리며 호기심을 드러낸 고운 얼굴도 같이 떠올렸다. 그날을 제외하곤 이런 종류의 일에 있어 한 번도 그런 냉한 얼굴에 어린 경계를 본 적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아진 건지 아니면 두려움을 잘 감추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말이다.
고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희멀건한 웃음을 떠올리다 이내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그러곤 멈춰 섰다.
‘이보오―이보오―’
고윤은 귀신을 봤다. 흐릿하고 투명한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입술을 움직였다. 작은 외침조차 지를 찰나도 없이 성불에 든 귀신의 형체가 햇볕 아래 먼지처럼 부서져 휘날렸다. 그는 불어오는 바람에 뒷정리를 맡기곤 다시 호적고로 향했다.
얼른 일을 끝내고 쉬었으면 싶었다.
* * *
“늦는군.”
관청에선 귀신이 찾아오더니 집에 돌아오니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
고윤은 오늘따라 다사다난했던 머릿속을 훑으며 미간을 구겼다. 이쪽은 귀신과 달리 쫓아내는 것도 번거로웠다.
“목멱산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산신을 뫼시는 호랑이가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윤 선생이 예에 있으니 늘 일이 많지.”
귀신을 끌어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음기가 늘어 산신이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덕분에 귀신을 퇴치하는 호랑이가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멍청하네.
뒤에 붙은 말이 신랄했다. 호랑이에게 멍청하다고 평가받은 고윤은 방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눈썹을 추켜올리곤 호랑이를 살폈다.
“그 옷은 뭡니까?”
여염집 귀한 아가씨처럼 곱게 차려입고 댕기까지 땋아 내린 호랑이가 히죽거렸다.
“이리 다니면 아주 편하단다. 그래서 비단전에 가서 하나 맞췄지.”
산신 밑에서 산신이 되기 위해 수련 중인 산 주인을 보며 그는 혀를 찼다. 호랑이가 도성 한가운데를 돌아다니다니, 내일부터는 경계를 강화하라 공문부터 써야 할지도 몰랐다. 사람 잡아먹는 쪽이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수백 년은 족히 묵은 호랑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고윤 선생이 요즘 잉어를 구한다지?”
“……그런데요.”
고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쓸 만한 잉어가 있어서 말이야. 한 달 내로 뛰어올라 승천하겠던걸.”
호랑이는 새침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용이 될 가능성을 품은 잉어라면 분명 그가 구하고 있는 태몽의 그것이 맞았다.
“알려주신 소식은 반가우나 이미 낚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반가운 소식에도 고윤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일단 거절했다. 호랑이가 웃었다.
“거긴 백 년을 낚아도 소용없을 텐데.”
“무슨 소립니까, 그건.”
호랑이가 모로 고개를 기울였다. 거죽만은 어여쁜 자태의 아가씨였으나 고윤은 신경도 안 썼다.
“그 못이 자리한 터의 주인이 그자 아니냐. 용의 영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 왕의 아들.”
고윤은 움찔했다.
“용이 이미 있는 터에 다른 용이 날 리가 없지.”
호랑이는 그리 말하며 웃었다.
“용이요?”
고윤은 설마하니 싶어 다시 물었다.
“그래, 용. 한때는 말이 많았는데 선생은 몰랐던 건가? 복이 아니라 재앙을 부르는 용 하나가 인간의 태를 입고 태어났단다. 덕분에 그해 아주 심한 역병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돌았지.”
“……제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서요.”
고윤은 그리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그랬던가? 어쨌든 내가 괜찮은 곳을 알고 있다고 전해주러 왔다네.”
호랑이는 치맛자락 아래 긴 꼬리를 흔들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뜻 도와달라 청하기엔 염치가 없어서요.”
고윤의 말에 호랑이는 관심 생기거든 언제든 연락하라며 일어섰다. 볼 일은 그게 다인 듯 날래게 돌아갔다.
고윤은 텅 빈 방에 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는 저가 들은 말을 다시 정리했다. 지금 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세자저하와 대군 대감 말이다. 그리고 그중 대군과 함께 낚시하는 곳은 대군 저 안에 있는 연못이었다.
그는 눈을 찡그렸다.
선비 귀신은 분명 그 터에 용이 될 잉어가 있다고 했다. 검은 잉어가 말이다.
뭔가가 맞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