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35)

五。

“남산골 고윤 선생이라면 근방 사는 이들이 모두 고개부터 젓습니다.”

하인들은 저마다 알아온 것을 고해 올렸다.

“어째서?”

은헌의 물음에 모두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하인 중에서도 가장 담이 세서 겁 없기로 유명한 석삼마저 오싹한 듯 팔을 문질렀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더냐?”

집안 대소사를 관장하는 총관의 물음에 석삼은 은헌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제가 밤에 그 집을 살피러 다녀왔습니다. 해가 지기 전부터 계속 보았는데 고윤 선생의 집 앞에 불이 쉴 새 없이 오가기에 살펴보니 도깨비불이었습니다. 게다가 어제는 달이 밝았지 않습니까.”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구름이 걷히고 달빛 아래 그 집 마당에 그림자가 우글거리더이다. 분명 마당은 텅 비어 있었는데요.”

“비었다고?”

“예. 고윤 선생이 본가에 간다며, 매일 식사를 가져다주는 이웃 아낙이 있는데 그이에게 어제는 오지 않아도 된다 하였답니다.”

주인이 없어 텅 빈 집 마당에 주인 없는 그림자만 가득하다니 정말로 기괴한 일이었다.

“게다가…….”

또 다른 청지기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제가 들은 바론 그 집 주변에 하도 이상한 일이 많아, 따지러 간 이가 있는데.”

오죽했으면 양반 댁에 하소연하러 갔을까, 그 마음 이해되어 오묘한 표정으로 청지기는 마저 고했다.

“갔다가 오는 길에 길을 잃었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을?”

근방에 사는 자가 맞지?

은헌의 의문에 청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넛집이랍니다. 대문을 열고 나와서 바로 앞이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집에 사는 이가 그 짧은 거리를 삼 일이나 걸어서야 집 대문을 발견했단다.

“그 일 이후로 주변 사는 이들이 죄 기함하여 이사 가고 빈집을 고윤 선생이 사들여 지금은 외곽에 그 혼자 산답니다.”

은헌은 혀를 찼다.

“그 정도면 마을에서 그자가 쫓겨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윤이란 작자가 산다는 남산골이면 관직에 오르진 못했지만, 선비들 많기로 유명하였다.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꽤 권세 있는 댁의 막내아들이라 하고, 고윤 선생 본인도 과거 공부하는 이가 아니라 한성부 관리라 합니다.”

집안도 괜찮고, 본인 역시 성균관에서 수학하여 과거 합격하고 주요 관직에 있을 실력이 있는 선비란 소리였다.

그런 이의 주변에 사람은 없고 귀신만 득시글하다니.

은헌은 스승이 소개해 준 문생 3)에 대해 알아보다 괜스레 고민만 늘었다. 겸은이 찾아가 보라 한 이유를 알 것도 같은데 가까이 두기엔 너무 기괴했다.

스승이 먼저 연통해 놓을 테니 걱정 안 해도 된다 하였는데 말이다.

“선물로 뭘 들고 가는 것이 좋을까?”

“가시려고요?”

기겁한 얼굴의 하인들은 내려다본 은헌은 헛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동짓날도 아니건만 팔팔 끓인 붉은 팥죽을 식혀 들고, 은헌은 남산골 자락에 도착했다.

목멱산 산줄기 아래 굽이진 터를 따라 초가지붕 얹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인 곳이 보였다.

은헌은 남산골 안으로 들어섰다. 길을 따라 산길 초입 같은 오르막을 오르니 곧 집들이 나왔다.

하인들은 이곳에 여러 번 오간 덕에 고윤의 집을 곧잘 찾았다.

이야기로만 듣기에는 대낮에도 구름 낀 듯 어둡고, 그늘이 길게 드리워져 음산한 느낌이 들 줄 알았는데, 음침한 소문 무성한 집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소담한 초가였다.

싸리로 둘러 세운 담장을 확인하고 은헌은 이미 열려 있는 대문 앞에 섰다. 대문이랄 것도 아니었다. 빗장이 풀려 느슨하게 열린 나뭇가지를 밀쳐 내고 그는 마당에 발을 내디뎠다.

“이리 오너라.”

은헌의 외침에 마당 마루에 앉아 있던 비쩍 마른 노인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곤 고개를 꾸벅였다.

“이 집에 있는 유일한 청지기인데 귀가 무척 어둡습니다.”

“눈도요.”

겸종들이 옆에서 재잘댔다.

눈과 귀가 굉장히 어둡다던 청지기가 생각보다 날랜 걸음으로 비척비척 걸어왔다.

“뉘신지요?”

주름진 눈두덩을 덮고 있는 희끗희끗한 수염 같은 눈썹을 보며 은헌은 안을 살폈다. 안채와 사랑채가 구분된 것도 없는 집이었다. 행랑도 없을 것 같은 집에 행랑살이하는 이가 있다니 그저 신기했다. 그것도 흉흉한 소문 무성한 집에 말이다.

“겸은 선생의 소개로 왔네. 주인장 계시는가?”

마루 아래 가죽신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은헌의 말에 노인은 멀뚱히 그를 보고는 곤란한 듯 옆에 있는 하인을 보았다.

연유를 모르는 은헌 대신 눈치 빠른 석삼이 앞으로 나섰다.

“노인장! 이 댁! 주인! 계시오?”

동네방네 자신들이 왔다 알리는 것 같은 외침이었다. 청지기는 그제야 웃으며 길을 열었다. 은헌은 여전히 닫힌 방문을 응시했다. 밖에서 이리 큰 소리가 나면 밖을 내다볼 법도 한데 잠잠했다.

“집에 있는 것 맞는가?”

“예. 전에도 이렇게 물어 확인했는데, 동네 사람 말로는 어지간한 큰소리가 나도 밖으론 안 나온답니다.”

은헌은 헛웃음을 흘렸다.

“주인 역시 귀가 안 들리는 게 아니고?”

그는 하인을 따라 걸었다. 몇 발짝 멀지 않으니 방문 앞에 다다른 것도 금방이었다.

은헌은 가까이 다가서자 무언가 이상함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예?”

석삼은 그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은헌은 다시금 방문 안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방 안에서 떠들고 있었다. 분명 마루 아래 놓인 신은 하나인데 적어도 둘은 되는 목소리였다.

“선객이 든 듯한데.”

석삼이 불안한 얼굴로 대군을 보았다.

“뭐가 들리십니까?”

“너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은헌의 말에 석삼이 눈을 찡그렸다.

“송구하오나 쇤네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번엔 은헌이 눈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그의 귀에는 분명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둘이서 대화하고 있구나’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은헌은 다시 제 하인을 보았다. 석삼은 주의 깊게 방문 쪽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곤 아무리 해도 들리는 것이 없다 했다.

은헌은 헛숨을 삼켰다.

대낮에 그 혼자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어째서 그의 귀에만 이 소리가 들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분명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얇은 문 안에서 하는 대화일 텐데도 멀리서 재잘대는 듯 들려왔다.

“……그 태몽이 그럼…….”

“그렇지, 그렇지. 분명 귀한 자리에 오를 운을 지니고 태어난 자만 받을 수 있는 꿈이야. 용 새끼를 받을 수 있는 자가 길바닥 돌멩이처럼 있을 리가 있나.”

“그런 말은 없었…….”

“내 알기론 그 꿈으로 태어나면 분명 왕이…… 가능성은 있지.”

“망할, 내가 그 꿈을 건네려고 지금 며칠이나 꿈에서 낚시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은헌은 신을 벗어 내던지곤 마루에 올라 문을 박차고 열어젖혔다.

방금 들은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그가 꾸고 있는 꿈과 무척이나 닮아 있는 데다 떠드는 이의 목소리가 꿈결에 들었던 것과 흡사했다.

벌컥 열린 방 안에 앉아 있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햇볕도 제대로 못 쬔 듯 허옇게 바랜 얼굴이 있었다. 마른 것치곤 둥근 턱 윤곽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말이다.

은헌은 놀라 가늘어지는 눈동자를 보며 느긋한 걸음으로 문턱을 넘었다. 그는 방 안을 둘러 확인했다. 목소리는 둘이었는데 앉아 있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사람만 있다고 치면 분명 그랬다.

은헌은 저의 자리를 맡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궤안(几案) 앞에 주저앉았다. 제게서 시선 떼지 못하는 선비를 보며 그는 말문을 열었다.

“낮에 보는 건 처음이로군.”

매일 그의 꿈에 찾아드는 객이 얼굴을 구겼다.

“향이 근사하군.”

은헌은 다향을 깊이 삼켰다.

눈도 귀도 어두운 노인은 능숙하게 다과상을 차려냈다. 작은 소반 위에 놓인 차는 궐에서도 구하기 힘든 귀품이었다. 차를 즐기는 이가 적고, 제대로 차를 내는 이도 드문 판국이다. 그래서 남산골 허름한 집에서 행랑아범에게 이런 대접을 받으리라곤 상상치도 못했다.

한 모금 삼키기에 적당한 온도로 우러난 것을 마시곤 은헌은 맞은편에 앉은 고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이 불편한 고윤은 고개를 돌려 짧게 차로 목을 축였다.

“내가 불편한가?”

“그럴 리가요.”

단박에 돌아오는 둥글둥글한 목소리에 은헌은 픽 하니 웃었다.

“이곳에선 태도가 무척이나 공손하니 낯설군.”

꿈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톡톡거리더니 말이다. 고윤은 콧등을 찡그렸다.

“무슨 소릴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은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하기 전에 내가 누군지 먼저 확인을 했어야지, 우리가 언제 본 적이 있는지도 말이야.”

당혹감이 가라앉자마자 자연스레 상석을 내어주고 다과상을 들이고 눈을 피한 이가 할 말이 아니라며 은헌은 지적했다.

“남들이 들으면 오해라도 하겠습니다. 저는 분명 대감을 가까이에서 뵌 것이 처음인데요.”

“여기서야 그럴 테지.”

“그러니까…… 어디서건 처음이란 말입니다.”

은헌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거둬냈다. 웃고 있을 때는 몰랐던 냉한 기운이 묻어나자 고윤도 마찬가지로 정색했다.

“정말로 처음이라 한다면 내 이대로 궐로 들어가 지난날 벌어졌던 일들을 부왕께 아뢰고 조사를 해달라 청해야겠군, 한 나라의 대군에게 삿된 주술을 쓴 이가 있다며 말일세.”

“삿된 주술이라…… 그런 것은 모릅니다만.”

고윤은 무슨 소릴 하느냐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래?”

단순한 되물음이었지만 목소리에 담긴 뜻이 만만치 않았다. 고윤은 낚싯대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깽판 놓겠다던 때와 다르지 않은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한숨을 끊어 내쉬었다.

“그저…… 태몽을 옮기려던 것뿐입니다.”

그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운을 뗐다.

“왕이 될 자질을 지닌 자에게 준다는 꿈 말이지.”

고윤은 다른 자에게 설명 들었던 것을 고스란히 말하는 대군을 보았다. 그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에 그는 짐작 가는 것이 있었으나 다른 이야기부터 끝내야 했다.

“그런 꿈인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더 큰일이지.”

은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정말로 큰 횡액이 따로 없었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였다.

고윤 역시 지금껏 모른 체 딱 잡아떼며 뻔뻔스레 굴던 태도를 벗어던졌다.

“알았으면 부탁을 받았더라도 처음부터 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군에게 그런 꿈을 건네다니, 다른 누가 알았다면 탈이 나도 단단히 날 일이었다. 그만 다치면 모를까 가문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었다.

고윤은 제게 그 꿈을 부탁한 이를 떠올리며 침음을 흘렸다.

“일을 받다니, 누가 사주라도 했던가?”

은헌은 냉한 기운을 지우고 금방 호기심을 드러냈다.

고윤은 인상을 썼다. 저가 하는 일이라곤 하지만 귀신과 관련된 건 남에게 떠들어봐야 좋은 일이 없었다.

그는 뾰로통한 기색을 이제 숨기지도 않았다.

“저라고 처음부터 남의 꿈을 헤집고 다니겠습니까, 그저 귀한 태몽을 꾸어야 할 사람이 있으니 그 꿈에 태몽을 가져다주라고 해서 가져다주는 거지요.”

“부부인도 없는 내게 말이지.”

고윤은 슬쩍 눈치를 봤다.

“뭐 짐작 가는 곳이라도…….”

대군의 연치가 장가들기엔 이미 한참 늦은 나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사내로서는 한창 젊을 때였다.

“없네.”

고윤은 멀쩡한 사지육신 지니고도 단칼에 아니라 대답하는 은헌대군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대군의 정체를 알아내고 나서도 가졌던 의문이었긴 한데 그럴 틈도 없었던 모양이다.

“한데 어째서 그런 태몽이 필요하다 했던 걸까요?”

은헌은 고윤이 누군가와 꿈에서 대화하던 것을 떠올렸다.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것이었으나 천천히 되짚어 찾아내 겨우 생각났다.

“혹 꿈에서 자네와 대화한 이가 내게 그 꿈을 가져다주라 한 자라면 그자가 알겠지. 그자가 누군지 아는가?”

받을 이에게는 이유가 없으니 보낸 이에게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지적이기도 했다.

“모릅니다.”

그러나 고윤은 그 꿈을 부탁한 이에게 그저 청을 받았을 뿐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다. 잘못된 인연이긴 했으나, 사람을 해하는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꿈은 분명 길한 것이었다. 보통 사람은 복(福) 받았다 할 만한 행운이었다.

손이 귀하다면 천지신명께 정성을 들여서라도 한 번은 꿈꿔보고 싶은 그런 길몽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은헌은 헛숨을 뱉었다.

“그럼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부탁으로 내게, 아니, 내 꿈에 걸음 하였다고?”

그 꿈을 꾼 것을 비방이라 생각하여 이리저리 알렸다면 큰 고초를 겪을 일이었다.

“그야…… 꿈일 뿐이니까요. 보통은 그 꿈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도 못하고요.”

“꽤 생생하게 떠올랐는데.”

“그러니 드리는 말입니다.”

고윤은 쓰게 식은 차를 목구멍에 때려 부었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실수한 것은 없는데 어째서 대군에게 걸어둔 주술이 깨져 그의 얼굴을 기억하느냔 말이다. 잠에서 깬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야 했는데.

“부탁은 왜 받았는가?”

“받으려고 받은 게 아닙니다.”

호기심도 아니었다. 고윤은 그 부분만큼은 확실히 했다. 그의 집을 수시로 찾으며 도움을 요청하는 귀신이나 인간 아닌 것들은 많았으나 그가 무슨, 뭐라도 되는 것처럼 그 바닥 일에 뛰어드는 일은 드물었다. 귀찮으면 그냥 강제로 성불시키면 속 편하고 좋았다. 악기가 도는 것들은 소멸시키는 게 빠른 답이었다. 관여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 영향이 오다 보니 이래저래 무시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럼?”

그 억울한 사연은 다 말할 수는 없고, 고윤은 가장 최근에 벌어진 일만 툭 털어냈다.

“호적고의 글씨가 죄다 도망간 적이 있습니다.”

은헌은 방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했다.

“글씨가 달아나기라도 했다는 건가?”

종이 위에 먹으로 쓴 것이?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것이든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 꽤 큰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귀히 여겨 직접 부르는 것이 예의가 아니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여, 이름들이 가득 적혀 있는 호적은 관에서도 중히 감시하고 있는데. 처음엔 그자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알겠다 하고 가더니 다음 날 글자가 죄다 달아나 한성부 호적고의 벽이 온통 까맣게 변하였지 뭡니까.”

그 일로 판윤에게 직설적인 꾸지람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경고를 받았다. 엄중하게 말이다. 어쨌거나 호적을 관리하는 것이 고윤의 일이었으니 변명할 처지도 아니었다.

은헌은 신기한 이야기에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 뒤로도 곤란한 일은 계속 일어나고, 원하는 것이 나쁜 일도 아니었던지라 그 청을 들어주었지요.”

“방법부터가 나빴던 것 같은데.”

협박에 넘어간 게 아닌가.

은헌의 말에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소멸시켜 버리려고 했는데 이유가…….”

하던 말을 멈추고 고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그 선비 귀신을 처음 봤던 날을 떠올렸다. 큰 소나기가 내린 뒤 무지개가 떴던 날이었다. 저녁노을이 져 하늘이 타오르듯 붉었고, 그믐이라 밤엔 사방이 캄캄했다. 매일같이 마당에서 떠들어대던 귀신들도 모처럼 조용해 편히 자겠구나 싶어, 일찍 잠자리를 청한 밤이었다. 이불을 깔려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게 선비 귀신이었다.

어디 봉두난발한 자도 아니고, 머리가 깨져 있거나 손발이 날아가거나 몸에 창칼을 꽂고 있는 것도 아니니 원한 어린 일은 아닌가 싶었다.

“무슨 이유가 있었는데.”

고윤은 거침없이 기억을 뒤적거리다가 머뭇댔다.

“무슨 이유? 내 숨넘어가겠네.”

은헌은 뒷이야기를 마저 하라 재촉했다. 그러나 고윤은 몹시도 불쾌한 낯짝으로 미간을 구겼다.

“기억이 안 납니다. 그날, 꿈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그 이유를 분명히 들었는데 기억이 도무지 나지 않는군요.”

“그런 경우가 있나?”

고윤은 혀를 찼다.

“그 부분만 정확하게 사라졌으니. 누군가 제 기억에 손을 댔다면 가능하지요.”

자연스럽게 잊은 것이 아니었다. 앞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세히도 생각나는데 딱 그 부분만 잘려 나간 듯 빠져 있었다.

“기억이라…… 사라진 기억이면 찾지 못하겠군.”

시전 바닥서 흘린 돈주머니보다 더 찾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찾아야지요.”

고윤은 제 머릿속에 생긴 빈틈에 짜증이 났다.

“그나저나…… 대충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아셨을 텐데,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무얼?”

은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꿈 말입니다. 저는 그 꿈을 건네주기로 약조하였으니 가져다드릴 건데. 받을 이유가 없으니 받지 않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고윤은 슬쩍 대군의 표정을 살폈다.

“그럼 이제 받아주실 겁니까?”

“받아주려고 해도 도성 바닥에서 검은 잉어는 죄다 씨가 말랐다고 들었는데.”

“누구 덕분에요.”

꿈에서 오간 이야기를 꽤 세세히도 기억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주술이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깨진 듯했다. 고윤은 말을 섞으며 대군의 상태를 거듭 확인했다.

“그래도 아직 하나 남았지 않습니까, 낚아야 하지만.”

은헌은 그 말에 해맑게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 일로 낚시를 좀 배웠다네. 꿈속 일이라곤 하지만 그렇게나 시간을 쓰는데 여태 입질 한 번 안 온 건 좀 심각하지 않나 해서…….”

고윤은 피식 웃었다.

“의욕이라도 계시니 그저 다행입니다.”

그 의욕 불살라 잉어를 건진 후 남은 일을 마저 해치우고 나서 기억을 지운 뒤 헤어지면 될 것 같았다. 현실에선 무리라도 꿈에선 가능한 몇 가지 방법을 떠올리면서 고윤은 의뭉스레 웃음을 흘렸다.

* * *

한성부는 육조거리에 있었다.

도성 내의 치안과 관아 일을 맡아 보는 곳이라 공조, 형조, 예조 등등 중요한 곳과 함께 너른 거리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고윤의 관직인 참군 또한 종7품의 낮지 않은 위치였다.

“그러면 뭣 하나.”

당상 대청보다 더 큰 호적고를 지키는 것이 그의 유일한 일이었다. 묘시에 출근하여 유시에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오부(五部) 4)에서 올라온 보고를 읽고 수결했다.

“나리. 호현과 명례 5)에서 올라온 문건은 어찌할까요?”

고윤은 구실아치가 벌벌 떨며 내민 것을 받아 확인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또다시 글자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오므렸다 펼치며 입안에서 주를 외웠다.

소리가 아닌 의지가 힘을 갖고 발현하여 글자를 옭아맸다. 다시 제자리로 찾아든 글자를 읽고 고윤은 지시를 내렸다.

넓고 넓은 도성 바닥에 사람이며 귀신이며 차고 넘쳐 처리할 일은 많고 많았다. 그는 몇 가지 중요한 문건에 수결하고 시각을 확인했다. 아침저녁으로 관을 드나드는 상관에게 인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의 입에서 못마땅한 듯 한숨이 터지자 주변 관리들이 눈치를 슬쩍 살폈다.

고윤은 지루한 관례를 끝으로 퇴청했다.

징청방 6)의 육조거리를 나오자 관아 밖으로 나온 관리들이 득시글했다.

여기저기 마주쳐 인사로 바쁜 이가 있는가 하면, 그처럼 주위에서 사람이 슬금슬금 물러나는 이도 있었다.

성균관 동재 시절부터 겪었던 일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고윤은 남산골 그의 집으로 향하는 대신 오늘은 북향으로 걸음 했다. 송교 7)를 지나 그는 적선방 8) 으로 움직였다. 길을 따라 위로 쭉 가면 그 끝에 창의문이 있었다.

도성 밖으로 나가는 길이라 그는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성문이 닫히는 시간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나가야 했다.

-퇴청하거든 잠시 들르게.

그는 낮에 받은 서신을 다시 확인했다. 대군의 직인이 찍힌 것이었다.

“찾아가는 게 현명한 짓 같지는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태도와 생긴 것 답지 않게 순한 성격이었으나 그 서신을 쓴 자는 대군이었다.

‘정말로 왕세제가 될지도 모른다더군.’

세간 떠들어대는 소리는 듣지 않으려 했으나 귀가 달렸으니 들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세자가 있고, 아직 정정한데 그 후사로 다름 아닌 아우가 거론되고 있다니 꽤 떠들 만한 소재기도 했다. 꽤 마음에 걸리는 소문이기도 했다. 특히나 고윤의 처지엔 말이다.

누가 신경이나 쓰겠나, 그는 상념을 떨쳐 냈다. 대군과 그 사이엔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자취를 감춘 기억에 이르자 고윤은 신경질적으로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이 사이에서 딱딱한 살이 씹혔다.

고윤은 늦은 봄과 초여름 사이에 그 선비 귀신을 처음 만났다. 그때는 정말로 정신이 없던 때였다. 입춘이 지나고 절기상으론 입하를 지나 소만에 들어갈 때쯤인데도 밤마다 그의 마당에 든 귀신의 행렬이 멈출 줄 몰랐다. 본래 봄에 좀 늘어났다가 여름 되면 줄어들곤 했는데 올해는 무슨 마가 꼈는지 저마다 사연 한 보따리 싸 들고 꿋꿋이도 기다렸다.

이웃에 살던 이들이 죄다 이사 간 것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 덕에 밤낮으로 울던 아이 울음도 사라진 게 고맙긴 했지만, 여전히 초대하지 않은 객들의 행렬은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난 뒤 책쾌 9)가 들었지.”

당시의 기억을 샅샅이 살피던 고윤은 금천교 근방을 지나다 멈췄다.

* * *

“분명 그자에게 무언가를 샀습니다.”

고윤은 제 앞에 내어진 잣가루를 뿌린 달과(茶乙 果) 10)를 보며 홀린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책쾌?”

은헌은 선선한 바람이 들도록 내려둔 발을 조금 걷어 올리며 되물었다.

“예. 책을 방물장수처럼 가지고 다니며 파는 이 말입니다.”

“그는 나도 아네.”

낚싯대도 못 알아보던 대군이 능청스레 혓바닥을 굴렸다. 은헌은 고윤의 이야기를 듣다가 느낀 수상쩍은 부분을 지적했다.

“한데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책쾌라면 쾌자 속에 책을 묶어 들고 다니며 파는 이니 그자에게서 뭔가를 샀다 해도 책일 게 분명하지 않은가?”

어쩌면 당연한 소리였다.

고윤은 제 몫으로 내어진 주전부리를 조심스레 덜어 입에 넣곤 퍼지는 달곰함으로 솟구치는 짜증을 밀쳐 냈다. 이런 맛이라면 멍청한 소리는 좀 참아줄 수 있었다.

“보통의 책쾌라면 그럴 것이나, 그날 방문한 책쾌의 정체가 도깨비이온지라.”

은헌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도깨비?”

“그렇습니다.”

귀신들의 등쌀에 울컥한 고윤은 이대로 판윤 11) 에게 휴가를 내기 위해 발행장 12) 이라도 제출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다 합하면 년에 두 달은 쉴 수 있는데 그 쉬는 날마저 업무에 시달리다니, 머리끝까지 찬 울화에 일을 때려치우든 인간임을 때려치우든 둘 중 하나는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열심히 고민했다.

달이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책쾌가 그를 찾아왔다.

“김 서방 오랜만이네.”

도깨비였다.

수백 년 묵은 책이 변해 도깨비가 된 그는 천지 사방 바람 따라 돌아다니며 책을 사고팔았다. 그중엔 인간의 손에는 들어올 수 없는 귀물도 있었다. 또한, 이 땅에서 구하지 못하는 옛 것도 많아 고윤은 그 책쾌에게 구하는 책이 있으면 가장 먼저 가져와 달라 청을 넣기도 했다.

“혹시 그 책쾌에서 장뭉의 기화록도 구할 수 있는가?”

은헌의 물음에 고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있습니다. 빌려 드릴까요?”

“정말? 참말로?”

그 책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선뜻 내어준다 하자 은헌은 농이 아닌지 심각하게 살폈다.

“저도 두 해 만에 구하긴 했으나 이미 다 읽은 것이니까요.”

“그럼 팔게.”

기회다 싶었는지 은헌은 대뜸 입을 뗐다.

“파는 건 곤란합니다. 도깨비의 손을 거쳐 온 것이라, 가끔 장난질 쳐진 것이 있어서요.”

고윤의 말에 은헌은 아쉬움을 내비쳤다.

“빌려주는 것은 괜찮고?”

“짧게는 방비해 드릴 수 있어서요.”

그럼 다음에 책을 빌리겠다며 은헌은 환히 웃었다. 고윤은 그 얼굴을 보며 되레 신기해했다. 안 판다고 하면 화낼 줄 알았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는 것도 그랬고, 그가 한 말에 순순히 이해하는 것도 그러했다.

“제가 한 말이 그저 빌려주기 싫어 둘러댄 말이면 어쩌려고 그리 단박에 믿으십니까.”

“거짓이라도 지금의 주인은 자네이니, 자네의 마음에 꺼리는 짓을 내가 좋자고 강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해서도 안 되고.”

은헌은 제 앞에 차려진 다담상을 보았다.

“대군으로서 누리는 것은 이런 입에 귀한 음식이 풍족한 것이면 족하다네.”

고윤은 혀끝이 저리도록 남은 단맛의 여운에 짧게 웃었다.

“어쨌거나 그날 그 책 도깨비에게 무언가를 산 것 같은데 그게 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책 말고도 가끔 신기한 귀물을 지니고 다녀 다른 것이 있을 수 있으니 염려하는 중이고요.”

은헌은 책을 팔고 다니는 도깨비 이야기가 끝나자 긴 손가락으로 소반을 툭툭 건드렸다.

“혹 도성에 그런 장사치가 많은가?”

“인간이 아닌데도 물건을 사고파는 자들 말입니까?”

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윤은 저가 아는 것을 떠올렸다.

“인간의 발길 닿는 데서 장사하는 이는 없습니다.”

괜한 호기심에 사고 생길 것을 염려하여 목소리가 딱딱했다.

거짓도 아니었다. 사람에겐 물건 팔지 않는 이도 있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저 값만 쳐 주면 팔아 치우는 이도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오가는 시전 바닥에서 장사하지 않았다. 그런 이들은 한곳에 죄다 모여 있었다. 길을 볼 줄 아는 이들이 드나드는 통로에 말이다.

“그래서 그때 못 본 건가?”

은헌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고윤은 눈썹을 깜박거렸다.

“혹시 보신 적 있습니까? 그런 자를?”

산 자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해로운 자들이라 가까이 닿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은헌은 웃었다.

“만났다고도 할 수 없네. 일전에 찾을 것이 있어 시전 가는 길에 우연히 들은 거라네. 좁은 골목 안에서 말소리가 나길래 들여다봤더니 아무도 없기에 홀렸나 했지.”

그는 그날 텅 빈 골목에서 새어 나온 대화를 옮겼다.

“앞으로는 모른 척하십시오. 발은 더더욱 들이지 마시고요.”

고윤은 엄중하게 충고했다.

“인간에게 들키기 싫어하는 존재도 있어 해를 입거나, 멋도 모르고 발을 들였다가 영영 틈새를 헤매시는 수도 있습니다.”

한낮에다 길을 볼 줄 몰라 들어서지 못한 거지 우연은 언제든 존재했다.

“위험한가 보군.”

“산 자들의 법도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인간들이 따져 묻는 가치와는 하등 상관없었다. 어렸을 적 접하는 이야기 속의 어흥 거리는 산신령이나 장난치는 도깨비는 꿈같은 소리였다.

은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하지.”

고윤은 당연한 소릴 하는 대군을 보며 눈을 흘겼다.

한 번 엮여 곤혹스러운 일을 겪고 나면 귀신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치게 될 텐데 말이다. 그가 성균관 동재에 기거하던 시절 같은 방을 쓰던 이가 그러했다.

은헌은 웃으며 딴생각하는 고윤을 지켜보았다.

새침한 얼굴을 하곤 퉁명스레 조심하라 충고하는 것을 보면 성정이 보기보단 상냥했다.

“하면 책쾌에게 무얼 샀는지는 영영 알 수 없는가?”

“방법이야 많지만…… 그것을 왜 그리 궁금해하십니까.”

고윤은 차를 마시며 물었다.

“사라진 것은 저의 기억인데요.”

“아니지.”

은헌은 고윤을 보며 정확히 선을 그었다.

“그것은 내게 그 꿈을 전해주길 원하는 그자에 관한 기억이 아닌가.”

고윤은 혀를 찼다.

“해가 되는 것이 아니니 그냥 받으시면 안 됩니까.”

어쨌거나 꿈이었다. 그냥 꿈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가능성이 없는 자에겐 소용없는 것이기도 했다. 뿌리 내릴 곳 없는 곳에 흩뿌리는 씨앗이 어찌 싹을 틔울까.

일단 대군이 태몽을 받기만 하면 거기서 이야기는 끝날 테니 기억이야 천천히 찾아도 그만이었다.

“누군지도 모를 이에게 부탁받은 것인데 그게 실이 될지 득이 될지 어찌 알겠나? 게다가 태몽이지 않은가. 함부로 굴 수야 없지.”

“누군지 확실해지면 받아주긴 하실 거고요?”

고윤은 별거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능글대며 웃는 얼굴 속의 심중을 헤아렸다.

“글쎄.”

은헌은 그리 쉽게 속내를 비치지 않았다.

“그러면 알아 뭐 하겠습니까. 그냥 꿈에서 열심히 잉어를 낚아 남은 하나마저 승천시킬 노력이나 하시지.”

고윤은 삐딱한 태도를 숨기지도 않았다. 꿈속과 별다르지 않은 행동에 은헌은 픽 웃음을 흘렸다.

“알면 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안 넘어갑니다. 괜한 호기심 채우려 하지 마십시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시지, 고윤은 차마 혀끝에 올리지 못한 말을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대군이 그의 태도를 관대하게 봐줘도 할 말, 못 할 말은 가리고 있었다.

그래도 귀신과 관련된 일에 괜한 호기심을 채우려다 골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은 꼭 해주고 싶었다. 대군만 아니라면 곧장 말해주었을 텐데 잘 알아듣지 못하게 돌려 이야기하려니 혀가 꼬였다.

“사람을 이리도 못 믿어서야. 정체를 확실히 알면 받아줄 수도 있다니까.”

“그 말씀은 안 받을 수도 있다는 거잖습니까.”

고윤은 절대 안 믿는단 얼굴로 코웃음 쳤다.

“받으면 어쩌려고?”

“받는다는 약조해 주시면 책쾌를 부르지요.”

그깟 기억 찾는 데 뭐 그리 오래 걸릴 거라고, 고윤은 자신만만했다.

“그럼 부르게나. 그럼 내 받아주지.”

은헌대군은 호기롭게 외쳤다.

“참말입니까?”

암만해도 믿기지 않았다. 고윤은 다시금 확인했다.

“대신 부르는 자리에 나도 나가겠네.”

당연하다는 듯 대군이 조건을 내걸었다. 그럴 줄 알았기에 고윤은 가볍게 헛숨을 뱉었다.

“같이 나가 무엇을 하시려고요.”

은헌은 환히 웃었다.

“도깨비지 않은가.”

그런 기회가 어디 흔하게 오냐며 덧붙인 말에 고윤은 혀를 찼다.

“쓸모없는 곳에 호기심이 과하면 좋지 않습니다.”

괜스레 명만 짧아진다. 그쪽과 뭐든 엮여 좋을 것이 없었다. 은헌은 퉁명스레 말하는 고윤을 보며 입꼬리를 들썩였다.

“가질 수 있는 것이 많지도 않은데 호기심 많은 것이 뭐 그리 허물일까.”

“대군이시니 보통 사람보다 이미 더 많이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만큼 잃은 것도 많지.”

그 말을 하며 은헌은 조용히 웃었다.

고윤은 그 웃음을 한참이나 응시하다 마침내 한숨 쉬듯 말문을 텄다.

“책쾌는 언제든 부를 수 있으나 대군께 준비가 필요하니 내일 밤 부르는 것으로 하지요. 대신 그 자리에선 제 말을 반드시 따라주셔야 하고, 기억을 되찾으면 대군께서는 그 꿈을 받아주셔야 합니다.”

“알았네. 읏!”

은헌은 대답하다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혀끝에서 번개가 치는 것처럼 따끔함이 번졌다.

고윤은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었다. 둥글게 원을 그리는 모양을 따라 투명한 실 같은 것이 나타나 휘감겨 들었다. 감겨든 실을 손끝으로 비비 꼬아내자 작은 크기의 매듭이 금방 만들어졌다.

“그게 뭔가?”

“방금 대감과 제가 나눈 약조이지요.”

고윤은 태연히 대답했다. 은헌은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무언가를 했다는 생각에 표정이 차가워졌다. 순식간에 냉해진 분위기에 고윤은 쓰게 웃었다.

그는 제 손가락에 걸린 매듭을 내밀었다.

“대군께서 지니고 계십시오. 그것을 지니고 계시면 저희가 방금 한 말을 남에게 옮기지 않게 됩니다. 옮기지 못하니 기억에서 잊어버릴 일도 없지요.”

“그게 다인가?”

“……도깨비의 장난에도 휘둘리지 않게 될 겁니다. 제 기운도 담겨 있으니까요. 도깨비들은 저마다 성격이 다르지만, 내일 만날 이는 낯을 가려 본래 약조한 이가 아니면 제멋대로 기억을 바꿔 버리거든요.”

일종의 호신부라 여기면 된다, 고윤은 설명을 마쳤다.

“그렇군. 근데 이것 외에도 하나 더 약조를 나눠야 할 듯하군.”

은헌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나는 내가 허락하지 않은 일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벌어지는 것이 싫다네. 방금처럼 말이야.”

“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자네의 모든 행동을 무턱대고 믿어줘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니 무언가를 하기 전에 내게 허락부터 구하거나 설명을 하란 말이네.”

그것도 모르냐는 듯 은헌은 혀를 찼다.

믿을 이유가 없다는 말에 고윤은 멈칫했다. 그는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곤 알았다 답했다.

“그럼 이만 쉬러 가시게나.”

은헌은 행랑아범에게 미리 방을 준비하라 일러뒀다.

그러나 고윤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아니요, 이만 집에 가봐야지요.”

은헌의 눈에 의문이 차올랐다.

달이 벌써 머리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도성문은 닫혔을 테고, 돌아다니면 안 되는 통행령이 떨어진 시간이었다. 대체 어떻게 가겠다는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은헌은 늦은 시간에 어딜 가느냐며 붙잡아 물으려 했지만, 고윤은 망설임 없이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신발 신는 소리가 났다.

은헌은 쓰게 웃었다.

그는 제 손에 올려진 매듭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날 선 목소리로 책하자 순간적으로 흐려진 고윤의 표정이 떠올라 괜히 속이 따끔했다. 예민하게 굴었다는 건 알고 있다. 상처 줄 의도는 아닌데 괜히 경계심만 돋운 듯했다.

“이를 어쩐다.”

은헌은 붙잡을 새도 없이 떠난 고윤을 뒤따라 방 밖으로 나섰다. 오늘 묶을 손님방에 모시려 기다리고 있던 청지기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찌 되었느냐?”

한성부 참군이라 하더라도 이 심야에 도성문으로 들어가는 게 쉬울까 싶었다. 가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돌아오라 사람을 보내는 게 맞았다.

“없습니다. 분명 뒤쫓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듯 청지기는 조심스레 고해 올렸다.

은헌은 그 말에 눈을 깜박였다. 무거운 한숨을 뱉어낸 뒤 그는 다시 하인을 보았다.

“내일 메밀묵 좀 쑤라 이르거라. 저녁에 쓸 것이라고.”

“메밀묵을요?”

“그래. 술도 한 병 준비하고.”

그는 그리 이른 뒤 마루에서 돌아섰다가 다시 하인을 불러 하나 더 일렀다.

* * *

궐에 들어 부왕에게 꾸지람을 듣고, 모후에게 잔소리와 염려를 듣고, 세자에게 밥상을 받은 뒤 은헌은 궐을 나와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남산골로 향했다.

한성부 관아에 사람을 보내었으나 일이 바빠 유시를 다 지나야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도 느지막이 벽동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도깨비 책쾌에게 줄 메밀묵을 가지고 말이다.

남산골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윤이 마중 나왔다. 버선발로 반겨주길 원한 것은 아니지만,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맞이할 줄도 몰랐다.

은헌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고윤은 겸종을 보았다.

“저자도 같이 갑니까?”

“아닐세. 여기 있을 거네.”

“제가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찌하시려고요.”

은헌은 고윤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심통이 났군.”

“그게 무슨.”

고윤의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갔다.

“어제는 내가 말이 과하였네. 미안하네. 그래도 그 말 자체는 물리지 않을걸세. 앞으론 뭘 하든 알고 있어야 당황하지 않을 테니까.”

은헌은 순순히 사과했으나 고집은 꺾지 않았다. 고윤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명을 못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무얼 하겠다 이야기해 주는 것만으로도 괜찮네.”

은헌의 처지에선 최대한 굽혀 양보한 것이었다. 고윤은 고민하다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로서도 양보한 것이었다.

서로 정리가 되자 은헌은 하인에게 가져온 것을 받았다.

고윤은 마루에 있던 술병을 손에 들곤 얼른 가자는 듯 재촉했다. 은헌은 자신이 가져온 술병과 메밀묵이 든 보따리를 보았으나 더는 따져 묻지 않고 한 손에 들고 뒤따라갔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목멱산 기슭에 자리한 널찍한 터였다. 빈터는 아니었고, 마을 입구에 하나씩 있을 법한 넓게 가지를 뻗은 나무 아래였다.

고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저물어 캄캄하니 아무것도 비치지 않을 밤이었다. 적당했다.

그는 고개를 내려 은헌대군을 보았다.

“책쾌는 금방 나타날 겁니다. 그자가 오거든 지나친 호기심은 보이지 마십시오. 도깨비에 대해 잘 안다는 듯한 발언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씨름이나 내기 같은 것을 하자 해도 절대로 넘어가면 안 됩니다.”

“알았네.”

은헌은 단단한 어조로 다시 한번 약조했다. 고윤은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 도포 소맷자락에 손을 넣고 잔을 꺼냈다. 작은 술잔이었다. 그는 집에서 가져온 술병을 열어 잔에 술을 담아냈다. 그윽한 향이 났다.

은헌은 꽃이 만발하는 듯한 향에 저도 모르게 코를 움직였다.

“주향이 좋군.”

“용이 되기 위해 천 년을 거듭해서 담그고 담근 술이니까요.”

잔에 술이 가득 차올랐다.

어디선가로부터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늘에서 우레가 치는 것처럼 들려 은헌은 저도 모르게 하늘부터 살폈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천지 사방이 요란한데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다. 주위를 연신 살피며 경계하는 은헌과 달리 고윤은 태연히 제 앞에 불쑥 솟아난 그림자를 맞이했다.

“김 서방!”

책쾌였다.

“오랜만일세.”

“그렇습니까?”

은헌은 걸걸하여 쇠가죽처럼 질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도깨비가 온다더니 고윤의 앞에 선 이는 얼핏 사람처럼 보였다. 눈썹 짙고 부리부리한 눈에 코가 주먹코라 우스꽝스레 보일 법도 했지만, 그래도 사람처럼 느껴졌다.

책쾌는 은헌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커다란 콧구멍이 씰룩쌜룩 살 냄새를 훑었다.

“이쪽 김 서방은…… 킁! 비린내가 나네. 사람인가?”

“사람이라네.”

은헌은 고윤의 눈치를 슬쩍 살피곤 입을 열었다.

“그래? 내기 좋아하나?”

“내기라…….”

고윤이 헛기침을 부러 흘렸다.

“씨름이라든가 술 마시기라든가 하는 것 말이야.”

책쾌는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씨름은 배운 적이 없고, 술은 못 마신다네.”

은헌은 태연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씨름도 안 배웠나? 술도 못 마시고?…… 인간 생 짧기도 한데 무슨 재미로 사나?”

금방 흥미를 잃은 건지 책쾌는 다시 고윤에게로 시선을 옮겨갔다.

“한데 무슨 일로 이리 귀한 주향까지 풍겨대며 날 찾았던가?”

고윤은 뒷짐 지고 있다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내가 전에 산 것 말이오.”

“김 서방이 전에 뭘 사 갔더라…… 어디 보자.”

도깨비는 품에 손을 넣어 낡은 종이 묶음을 꺼내 뒤적였다.

“그래, 책을 샀군.”

“책 말이오?”

“김 서방이 기억 못 하는 경우가 드문데…… 그러고 보니 이게 무슨 냄새람?”

책쾌는 말을 하다 말고 고윤에게 가까이 붙어 서서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덥석 그의 몸을 붙잡고 흔들었다.

은헌은 종잇장처럼 휘둘리는 고윤에게 황급히 다가서서 말리려 했지만, 펄럭거리던 움직임이 먼저 멈췄다.

“대체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고윤이 도깨비에게 물었다. 책쾌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올려 털이 북슬북슬 돋은 짧은 손을 내밀었다. 솥뚜껑 같은 손바닥 위에 허물이 단단하게 굳은 고치가 보였다.

고윤은 그것 중 하나를 붙잡았다.

“이건 책벌레가 아닙니까.”

“맞아.”

도깨비는 벌레 고치를 내려 보았다.

“이놈들이 자네 기억을 갉아먹었나 보군. 그래서 책 관리에 조심하라 하지 않았나. 자네답지 않게 실수했구먼.”

“저한테 벌레가 붙은 책은 없…… 혹여 제가 책벌레가 붙은 책을 샀습니까?”

책쾌가 히죽였다.

“그랬지. 그날 사 간 책이 벌레집이었거든.”

은헌은 뒤에서 듣고 있다 간질거려 오는 입을 참지 못하고 끝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언가?”

도깨비가 키득거렸다.

“뭐긴 뭐야? 말 구덩이지.”

알아듣지 못할 설명에 은헌은 고윤을 보았다.

“빈 책입니다. 제가 산 것은요. 글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책을 산 게지요.”

은헌은 눈을 찡그렸다.

“그게 종이를 묶어둔 것과 무엇이 다르기에?”

“똑같은 겁니다. 대신 거기에 책벌레를 붙여놓고, 뭐 화가 난다거나 울컥하면 막 그 감정을 담아 글을 쓰는 거지요. 그러면 벌레가 글자를 갉아 먹으면서 부정적인 감정들도 같이 먹어 치워줍니다.”

화병에 그것만 한 특효약이 없었다.

“글자 외에는 입에 잘 대진 않는 편이지만 가끔 이렇게 기억까지 갉아먹는 일도 있지.”

도깨비는 그리 말하며 손바닥 위에 있는 고치들을 굴렸다. 실컷 먹어 치우고 실을 뽑아 이제 벌레가 아닌 것으로 탈피할 준비를 끝낸 것들이었다.

고윤은 최근 들어 유난히도 호적고의 이름들이 도망친 이유를 알아내곤 탄식을 흘렸다. 제 몸에 이런 게 붙어 있는 줄도 모르고 돌아다녔으니 글자들이 기겁하여 달아날 법도 했다.

은헌은 고윤의 기억을 갉아 먹었다는 벌레 고치를 신기하게 들여다보았다. 세상천지 글자가 먹이인 벌레는 처음이었다.

“그럼 기억을 되찾으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고윤은 고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기억을 되살리려고? 중요한 기억인가, 김 서방?”

“예.”

중요했다. 그 귀신에 대한 정보도 있었고, 그자의 정체를 밝히면 세상 위험한지 모르는 천진난만한 대군과도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었다.

“그럼 그 거리에 있는 방물장수를 찾아가 보게나. 혀가 긴 쪽으로.”

“두꺼비 노인장 말씀입니까?”

“그래그래. 그자에게 가면 벌레 고치를 삶아다가 실을 빼줄 거야. 기억을 말이야.”

사람의 머릿속에 있던 것을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대듯 빼줄 거란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건 대가로…….”

책쾌는 고윤이 열어놓은 술병을 챙겼다. 그것을 보며 은헌은 제 발치에 두었던 보따리도 들어 내밀었다.

“이것도 가져가게.”

“응?”

도깨비가 고개를 기울였다.

“메밀묵이네.”

“나 주는 건가? 안 그래도 냄새가 코를 찌르긴 했는데!”

책쾌는 부리부리한 눈을 굴려 고윤을 보았다. 달도 없는 밤 그늘에서 하얀 얼굴이 새초롬해 보였다.

“가져가도 됩니다.”

“김 서방이 그렇다면야. 그쪽 김 서방도 고맙네.”

도깨비가 활짝 웃었다. 책쾌는 신이 나서 메밀묵과 술병 두 개를 챙기고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멀어졌다.

고윤은 제 손에 남은 벌레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가 방부터 뒤져야 할 듯했다. 그 책을 산 기억이 없어 몰랐는데 책벌레가 제집에 있다니 그것만큼 급한 큰일이 없었다. 까닥하다 책을 모조리 버리게 생겼다.

그는 대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은헌이 그를 보며 웃었다. 도깨비와 방금 마주친 것치곤 불쾌하다거나 기분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구경거리 난 것처럼 마냥 신기해하지도 않았다.

“그럼 인제 돌아가시지요.”

“그러지. 근데 그 방물장수한테 언제 가는가?”

고윤은 발을 내디뎠다가 삐끗했다.

“거긴 왜요?”

은헌은 고윤의 눈앞에 소매를 걷어 올려 팔을 내밀었다. 매듭이 풀리지 않고 달려 있었다.

“약조는 분명 기억을 되찾으면 내가 잉어를 받아주기로 한 것이 아닌가? 물론 잉어를 낚아야 하지만 말이야.”

잉어도 없고, 책쾌를 부를 때 말도 잘 들었는데 정작 기억을 되찾지 못했으니 당연히 찾을 때까지 같이 다녀야 하지 않겠느냐며 대군이 주장했다.

“무섭지도 않으십니까?”

“놀라긴 했네. 그래도 아무것도 몰라 두려운 것은 차차 알아가면 별것 아니게 된다네.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니까.”

알고자 하는 이유는 그뿐이라는 듯 은헌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윤은 어제 그가 건 주술에 대해 지나치게 날 선 반응을 보였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도 대군은 꺼림칙하게 반응한 이유와 정색한 이유를 그에게 또박또박 설명해 주었다.

고윤은 짧게 고민하곤 마음대로 하라는 듯 포기했다. 알고 나면 무섭지 않다니 그것이야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알게 되면 더 무서워 화들짝 도망가는데 말이다.

“방물장수에게는 이틀 뒤에 갈 겁니다.”

“이틀?”

“스물셋째 날이지 않습니까. 쉬는 날이요.”

큰 깨달음이라도 구한 듯 은헌이 감탄했다. 내일도 이른 시각에 관청에 나가야 하는 고윤이 혀를 찼다.

둘은 길을 돌아 나와 남산골 집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은헌을 반겼다. 얼굴이 좀 창백해지긴 했으나 사지 육신 멀쩡한 것을 확인한 대군은 가져온 것 중 먼저 가져가지 않은 보따리를 찾아 고윤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타래과라네.”

은헌은 멋쩍게 미소 지었다.

“이것으로 미안하단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좋아하는 듯해 가져왔네.”

고윤은 단내가 풍기는 주전부리를 사양도 없이 받아 들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먼저 저지른 것은 저이니 그런 말은 됐습니다.”

앞으로는 꼬박꼬박 설명해 드리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은헌은 그 말에 웃었다.

“그럼 이만 가볼 테니 쉬시게나. 이틀 뒤에 한성부로 사람을…… 아니, 이리로 오겠네.”

고윤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시전 있는 광통교까지 나가야 하니 아예 그쪽에서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산골까지 오면 다시 한참을 번거롭게 되돌아가야 했다. 대군은 그 말에 고민하다 고윤에게 벽동에 있는 집을 알려줬다. 광통교 근처라면 거기가 빨랐다.

“알겠습니다.”

고윤이 벽동 집에 방문하겠다고 약조 하자 은헌은 그제야 남산골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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