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2)
“게다가 꿈이긴 해도 매일 객이 찾아드니 요즘은 심심할 일도 없고요.”
그는 꿈에서 만난 객의 이야기를 꺼냈다.
세자의 얼굴에 한숨이 스며들었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그 객 말이냐.”
“그렇지요. 그래도 어제는 말도 섞었습니다. 얼굴도 희미하지만 기억나고요. 하얀 얼굴에 눈코입이 제짝 맞춰 다 자리하고 있고, 손과 발도 다 있으니 죽은 자는 아닌 듯합니다.”
게다가 죽은 자라면 산 자의 집을 알아내자마자 무척이나 당황하지는 않을 듯했다.
괴력난신의 것이 난무하는 이야기에 세자는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였다.
“한 달째 잠 설쳐 가며 익숙해졌으니 내일, 아니, 오늘은 말을 더 나눠볼까 합니다.”
“죽은 자와?”
“어찌하는지 방법은 몰라도 산 자가 분명하다니까요.”
은헌대군은 식사를 마쳤다.
끼니를 때웠으니 슬슬 동궁에서도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배 꺼뜨릴 시간도 없이 후다닥 일어서는 모양새에 세자는 한소리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오수라도 즐기고 가라며 붙잡았다, 동궁전에서 대군이 잠을 청했단 이유로 부왕이 노발대발했던 일이 여태 생생했다.
“내일은 면 말고, 밥상을 올리라 해야겠다.”
“그러지 마시오. 동궁께서 퇴선간 1) 나인들 일까지 간섭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요. 채신머리없단 소리 듣습니다.”
은헌은 키득거리며 세자에게 인사를 남겼다. 그는 얼른 일이나 하시라 형님의 등의 떠밀고는 동궁전을 뒤로했다.
높디높은 지붕들을 뒤로하고 성문 가까이 와서야 은헌대군은 한숨을 돌렸다. 부왕의 꾸지람을 듣고, 모후의 걱정스러운 당부까지 듣고 나서야 형님 저하께 반상 받고 나오는 일과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대군인데. 신세가 참.”
그는 혀를 차곤 히죽였다.
웃겨서 웃는 게 아닐지언정 웃고 있으면 기분이라도 그나마 나아졌다. 비관하고 있어봐야 그에게는 해결 방법이 없었다.
은헌은 성문을 나섰다. 나서자마자 저를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황급히 다가왔다.
“어디로 뫼실까요.”
그는 지체 없이 하인이 꺼내온 말에 올라탔다.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종친들이 입는 자색 관복을 갖추고 있으니 궐을 드나드는 이들이 죄다 그만 보고 있었다. 궐을 돌아다니는 내내 얼굴 타들어가는 줄 알았다.
그의 말에 청지기가 익숙한 듯 말고삐를 잡고 길을 나섰다. 궐의 동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은헌은 편히 말 등에 앉아 있었다.
필요가 없어져 정리하려던 벽동 집을 팔지 않고 놔두길 백번 잘했다 속으로 생각하며 말이다. 도성 안 머물 곳도 마땅치 않으니 집이라도 한 채 있어 행선지 결정하는 것도 편했다. 머물지는 않아도 옷 갈아입는 데는 문제도 없었다.
궐과 궐 사이에 들어선 검은 기와 잔뜩 올라가 있는 집들을 지나 벽동 집에 들어선 은헌은, 준비된 옷으로 곧장 갈아입었다.
관복을 벗고 포를 입고 갓을 쓰자 갑갑함이 풀렸다.
“금일은 도성 안에 뭐 재미난 구경 없다더냐?”
가라앉은 기분이 조금 오르자 은헌은 겸종에게 물었다. 한적하게 여기저길 구경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주인 덕에 겸종은 곧장 알아온 것을 고했다.
“모화관에 사신들이 떠난 지 한 달 되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때 귀한 것을 사들인 이들이 인제야 슬금슬금 장터에 물건을 내보인다 합니다.”
은헌은 소리 내 웃었다.
“귀물을 손에 쥐었다고 해서 너도나도 내놓으면 값어치가 떨어지니까?”
“장사치들이 그렇지요.”
귀물이라도 많을 때는 헐값이고 없을 때는 비싼 값이다. 그를 위해서 묵혀두었다가 파는 일 정도야 흔했다.
“그러면 오랜만에 시전 구경이나 가보아야겠다.”
“말을 전해온 이가 이르길 서책도 꽤 들어온 듯합니다.”
겸종은 제 주인이 가장 관심 있어 할 부분을 슬쩍 흘렸다.
은헌은 더욱 흥미 돋우는 소리에 얼른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도성문이 닫히기 전까지만 나가면 되니 말이다. 신분을 적당히 가리려 그는 꽤 애쓴 차림새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곤 가죽신을 신고 마당에 내려섰다. 낮에나 잠깐씩 얼굴 보이는 주인을 배웅하고자 몇 없는 종들이 나섰다.
시전 근처에 말을 묶어 여물을 먹이게 하고 은헌은 홀로 길을 걸었다. 광통교를 지나 길게 펼쳐지는 세상 진귀한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한 걸음을 내디디고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한 발 걸어 나갔다. 가다 멈추길 반복하는 사람들 사이로 은헌은 대로를 지나 좁은 골목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주로 책을 찾으러 가는 세책방은 번쩍번쩍한 비단전 뒤쪽 한적한 뒷골목에 자리하고 있으니 당연하였다.
“……잉어는, 그것도 검은 것은 더는 찾기 힘드오.”
바삐 갈 길 가려 걷는 은헌의 발길이 붙잡힌 듯 멈췄다. 잉어라는 말이 들려온 곳을 향해 그는 고개를 돌렸다.
“용이 될 놈들이면 특히나 더 그렇지, 한 달째 족족 다 가져가는 이가 있어 백 년은 보기 힘들게요.”
귓가에 간질간질 들어오는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은헌대군은 조심스레 말소리가 흘러나오는 골목을 향해 뒷걸음질로 되돌아갔다.
‘여기 이런 골목이 있었나?’
길을 외울 정도로 부지런히 쏘다닌 곳이었는데도 어째서인지 길이 낯설었다. 은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골목을 들여다보았다.
“이보게……!”
은헌은 캄캄하니 햇볕도 들지 않은 텅 빈 곳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도 흥정하는 말이 오가던 곳엔 사람 그림자라곤 없었다. 그는 막혀 있는 골목 안 틈새를 응시했다. 팔을 뻗어 허공을 휘저어보기도 했으나 그의 눈에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아무것도 없었다. 발아래 질척하게 젖은 흙이 있어 고개를 떨궈 살펴보니 그의 가죽신 아래 난 자국 외엔 다른 흔적이 없었다.
“잉어를 싹쓸이 해갔단 사람이 누군지 물어보려 했더니 이거야 원…….”
대낮에 허깨비에게 홀린 것 같았다. 멀쩡히 눈뜬 채 백일몽을 꾼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은헌은 골목을 꼼꼼히 다시 살피곤 돌아 나왔다.
“……인간이 우리 이야길 들은 건가?”
음산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가끔 귀가 유난히 밝은 자들이 있지 않은가.”
예부터 그러했다.
은헌이 떠난 골목에서 또다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