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1)
임금은 귀한 자리에 오른 이었다.
만인지상(萬人之上), 권력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 언제나 외롭고 고독한 신세였다.
제 핏줄을 잇고 태어난 형제와 자식조차 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신세 말이다.
은헌은 부왕을 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소자 은헌이 아바마마께 문후 인사 올립니다.”
그는 두 손을 머리의 눈썹까지 끌어 올린 뒤 지극히 공손하게 배례를 올렸다.
“해가 중천에 이르렀거늘 아침 문후라니, 쯧. 네 형은 일찌감치 대비전과 중전께 인사 다 올리고 강학까지 마쳤는데 은헌 너는 어디서 놀다가 이리도 늦게 온 게냐?”
형제를 비교하여 저울질하는 아비를 보며 은헌대군은 속없어 보이는 얼굴로 어리숙한 웃음을 흘렸다.
“송구하옵니다. 제가 아침에 늦게 일어났지 뭡니까. 다음부터 형님 저하 본받자와 조금 더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트집 잡으려 하는 말이었다. 새벽 동트기 전에 일어난다 하더라도 도성문 여는 시각이 정해져 있으니 궐에 도착하는 때는 달라지지 않는다. 허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들을 꾸중이라 그는 적당히 떠들었다.
“네놈 하나 때문에 도성문 관리들이 고생이구나.”
어차피 대군임을 내세워 일찍 들어온 적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입 밖엔 내지 않았다.
은헌은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부왕 앞에서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칭찬과 비난이 오가는 문후가 끝나자 상선이 왕을 뫼시고 대전을 나섰다.
왕이 떠나자 은헌대군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세자는 그런 아우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고생하였다.”
은헌은 피식 웃었다.
“형님 저하야말로 바쁘실 텐데 못난 아우 탓에 아침부터 시간만 버리셨소.”
“너만큼이나 아침이 바쁜 사람이 이 궐 안에 누가 또 있을까.”
“하긴. 그도 그렇지요.”
대군이 하루도 빠짐없이 조석으로 인사하러 입궐하러 드는 일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것도 성곽 바깥에 살면서 말이다. 왕의 심기가 불편하여 형제는 나란히 고통받는 중이었다.
“조반은?”
형님의 말에 은헌은 짐짓 괴롭다는 듯 곧게 뻗은 콧대를 구겼다.
“조만간 이 아우가 배곯아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겠소.”
그는 능청스레 투덜거렸다. 미움받고 있다곤 해도 왕과 중전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 대군이었다. 굶을 일이 극히 드물었으나 아침마다 벌어지는 소란에 식사까지 느긋하게 챙길 여유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마마마께서 불쌍하다 내어주는 다과나 얻어먹어야지요.”
세자는 한숨 내쉬듯 웃었다.
“그래. 인사드리고 길게 앉아 있지 말고 오너라.”
은헌은 히죽거리며 세자에게 예를 갖춰 공수했다.
“중전마마, 은헌대군 대감께서 드셨습니다.”
“얼른 들라 하게.”
은헌은 중궁전 나인의 뒤를 따라 마루를 건너 안으로 들어섰다. 단아하게 장식된 방 안에 앉아 계신 여전히 고운 어마마마를 보는 은헌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늦은 안부부터 여쭸다.
“간밤 별고 없으셨습니까?”
“앉아 있는 일밖에 하지 않는 이 어미가 무슨 일이 있었겠느냐.”
중전은 조금은 지친 기색으로 인사를 받았다.
“은헌, 너는 괜찮은 것이냐?”
앞뒤도 없는 질문이었으나 은헌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었습니다.”
“금일 일각이나 늦어 걱정하지 않았니.”
은헌은 책잡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방긋이 웃었다.
“길이 번잡할 것 같아 서문으로 시간 맞춰 재개 움직였는데, 도착해 보니 그 앞에서 수레가 하나 엎어져 항아리가 깨져 파편이 여기저기 튀는 바람에 말이 놀라 지나오기가 번거롭지 뭡니까. 그렇다고 저 급한 사정에 큰소리 낼 일도 아니지요. 부왕께서 백성들을 아끼시니까요.”
중전의 안색이 일순간 어둑해졌다.
“말에서 내려 파편 없는 곳까지는 걷고, 놀란 녀석을 달래어 오느라 늦었지 뭡니까.”
매화자처럼 줄줄 막힘도 없이 은헌은 매끄럽게 사정을 설명하였다.
“아침마다 성문으로 들어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벽동(壁洞)4) 에만 머물게 해주셔도 좋으련만.”
은헌은 궐의 지척에 있는 저의 사저를 떠올렸다. 본래는 외가였으나 어린 나이에 홀로 궐 밖으로 나서야 할 저를 위해 외조부께서 내어준 집이었다. 자식을 억지로 떼어놓아야 하는 중전을 위한 마음이기도 했다. 결국, 그곳에도 머물지는 못했다.
“세자 형님께서 내어주신 별저의 풍경이 도원향이 이곳인가 싶을 정도로 근사하여 신선놀음 중인 것을요.”
은헌은 그리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신선놀음은 모르겠고, 밤마다 귀신같은 객 하나가 부지런히 찾아오는 거 보니 인세 같지가 않은 면만은 도원향과 똑 닮아 있었다.
중전은 헛웃음을 지었다.
“세자께서 대군을 아끼어 고르고 고른 곳이니. 대군에게 쓰는 마음 씀씀이가 어지간해야지.”
“하나뿐인 아우가 문제라 이리저리 발바닥에 아주 불이 나시지요. 이제 형님 저하 손 붙잡고 돌아다닐 나이도 훌쩍 지났으니 놔주셔도 될 텐데요.”
중전도 은헌대군도 웃지 않았다.
“그 말을 들으면 세자가 섭섭해할 게다.”
“그래서 부러 어리광을 부리고 있지요.”
그는 나인이 들여온 다과엔 손대지 않고 차만 훌쩍였다.
중전은 염려가 그득 낀 눈으로 대군을 보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행동거지를 더 조심하거라.”
언제는 그러지 않은 적이 있었냐마는 매번 듣는 당부에도 은헌은 처음 듣는 것처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빈궁에 관한 말이 돌아 금상께서 꽤 노여워하신 모양이야.”
빈궁의 일은 세자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은헌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대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요즘 저를 두고 세제니 뭐니 왈가왈부 입에 올리는 무리가 있음은 알고 있었다. 서슬 퍼런 왕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논의된 적은 없겠지만, 빈궁을 흔들 목적이라면 은헌으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외숙께선…….”
중전은 자신의 사가를 떠올리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께옵서 사직 상소를 쓰셨단다. 이참에 낙향하여 아버님 곁에서 서책이나 읽어야겠다 하시더구나.”
딸아이가 중전이 되자마자 아버지 역시 관직에서 물러나 곧장 낙향했다. 멀리 달아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중전의 복중에 태아가 들어서고, 적통 대군이 태어나던 해엔 일가친척 모두가 귀향하였다.
“하지도 않은 일에 휩쓸려 고생하시는 것보다야 그게 나으실 테지요.”
그래도 중전 곁에 피붙이 한 명은 있어야 마음 둘 곳이 되지 않겠느냐면서 웃었던 외숙을 떠올리자 은헌의 마음 역시 무거워졌다. 그러나 태도만은 냉정했다.
“그렇지.”
중전 역시 서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설프게 굴었다간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 둘 다 이 궐에선 강자가 아니었으니 더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너무 오래 앉혀두었구나.”
은헌은 중전의 말에 웃었다. 그의 손에 들린 찻잔 안의 찻물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잠시의 여유도 없이 그를 보내려는 어머니의 마음이 우습기도 하고 딱하기도 했다.
은헌은 군말 없이 일어났다. 궐에는 어디에든 왕의 눈과 귀가 있었고 중궁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금만 굼떠서 움직여도 부왕에겐 빠짐없이 보고가 올라갈 터였다.
“그럼 내일 다시 들르겠습니다.”
은헌은 동궁이 보이자 천천히 걸었다. 이 넓은 궐에서 유일하게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곳이라 그런지 걸음걸이부터가 달라졌다.
그는 동궁으로 드는 협문을 넘어서자 뻣뻣이 굳은 얼굴을 풀었다. 동궁전 사람들도 지금까지 들렀던 어느 곳보다 그를 환대하여 맞이했다.
“역시 형님 저하밖에 없소.”
은헌대군은 치레를 늘어놓으며 동궁전 구들장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신소리는.”
대군이 들자마자, 나인이 준비한 상을 들고 와 들여놓았다. 면상이었으나 이것도 은헌에게는 감지덕지했다. 그는 대군이 궐에서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일에 짧게 한탄하며 수저를 들었다.
동궁전 주인인 세자는 주위에서 사람을 물렸다. 부왕에게 무슨 말이 들어갈지 몰라 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하는 아우를 위한 배려였다.
속없이 뭐든 괜찮다, 저가 부족하다, 그런 말이 입버릇처럼 밴 아우였으나 그렇다고 마음에 생채기가 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금일은 그래도 얼굴색이 낫구나. 며칠 잠을 설쳤다 하더니.”
은헌대군은 그 말에 새벽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처음에야 흉몽인 줄 알았으니 오금이 저려 그랬지 않습니까.”
매일 똑같은 꿈을 꾸고 또 꾸는 데다 꿈속에선 분명 얼굴을 보는데, 깨고 나면 몽달귀신처럼 이목구비가 하나도 없는 민둥한 얼굴만 둥둥 머릿속을 떠다니니 그랬다. 그것도 점차 익숙해지는 건지 지금은 희미해도 얼굴이 조금씩 기억났다.
세자가 코웃음 쳤다.
“장성한 사내가 꿈자리 사나워 잠 설쳤단 소릴 무얼 그리 당당히 하느냐.”
형님의 말에 아우는 퍽 당당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무섬증이 어디 나이 먹는다고 달아나겠습니까. 그렇다고 밤에 악몽 꾸니 같이 잠들자 청할 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은헌은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부인의 존재를 되새김질했다. 저보다 두 살 많은 부인은 역병으로 그의 집에 당도하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여덟에 홀아비가 된 그의 신세가 퍽 처량했다.
“새로 사람을 들여야지 그럼.”
“형님 저하도 참, 이 나이에 새장가가서 뭐 하겠습니까. 인제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해서 사람 붙으면 귀찮기만 합니다.”
은헌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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