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마왕VS 영웅@@]
단 하루.
짧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길 수 있다. 또한 상황과 마음가짐에 따라 시간의 관념은 달라질 수 있다. 지금 그들은 하루가 길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 길었다. 시간이 너무 안가고 있었다. 1분이 그토록 길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하루 동안 환영진 안에 갇혀야 했던 이들은 초죽음 상태가 되어 갔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몸을 쉴 틈이 없었다. 정확하고,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지옥이 기다렸다. 마법을 사용하고 싶어도 마나가 금제되어 있는 상태였다. 육체적인 능력만으로 훈련을 견뎌내야 했다. 강인한 육체가 지옥훈련 앞에서는 평범 이하였다.
허억! 허억!
몸이 너무 무거웠다. 지친 몸은 고개를 들기도 힘들게 만 들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서 본 가르딘은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이었다. 하루 만에 그들의 눈가에 독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처절하게 구르면서도 가르딘을 보며 이를 갈았다. 웃고 있는 저 면상만 보면 억장이 무너졌다.
지옥훈련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은 드래곤이었다. 가르딘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라이젠에게 하루만 드래곤들을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이다.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무진장 굴렸다. 입에서 단내가 나다 못해 흙냄새가 풀풀 풍겼다. 항상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을 유지했던 청결한 드래곤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옷은커녕 머리도 정리할 틈이 없다. 땀이 흘러 허연 소금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얼굴을 닦을 틈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게으름 피우지. 선착순 1명 실시!”
지쳤지만 가르딘의 명령에 모두 빠르게 움직였다. 늦으면 인생 종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못 하겠다고 한 드래곤이 있었다. 웜급으로 제법 연장자에 속하는 레오폴드였다. 드래곤 체면에 얼토당토않은 훈련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드래곤들도 레오폴드의 뜻에 동조하는 기색이 보였다. 가르딘이 대단한 인간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명백한 권력남용이었다. 드보원(드래곤보장위원회)에 명시된 내용을 근거로 조리 있게 설명을 해 나갔다. 차분한 목소리와, 앞뒤 전개의 탁월한 개연성, 어느 것 하나 틀린 것 없는 완벽한 논리였다.
그러나 상대는 가르딘이다. 가르딘 앞에서 논리를 따지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짓인지 알고 있어야 했다. 시답지도 않은 말을 듣다가 참지 못한 가르딘이 레오폴드의 중심을 가격했다.
퍼억!
커어어억! 부들! 부들!
가르딘의 전문특허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에그브레이크가 작렬했다. 호흡이 일시 정지했다가토해낸 레오폴드는 게거품을 토해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머리끄덩이를 잡아 댕기고 난 후 이어지는 연속 니킥공격에 코뼈가 으스러졌다. 레오폴드는 바닥에 뒹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단 두 방에 웜급의 드래곤이 기절해 버렸다. 현실적으로 이해불가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엄살떤다며 발로 개 패듯이 짓밟았다. 보고 있는 드래곤들조차 침이 꿀꺽 넘어가는장면이었다. 전신의 모공이 활짝 열리고 소름이 돋았다. 비위 약한 여성체 드래곤이 고개를 돌렸다. 더 보고 있다가는 정신이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버릴'것 같았다. 가르딘이 드래곤들을 넌지시 바라보며,
“왜 너희들도 하기 싫으냐?”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레오폴드의 [중심 무너진 사건]이 있은 후부터 드래곤들은 말을 잘 들었다. 가르딘이 레오폴드의 얼굴에 포션을 부어주면서 한 말에 드래곤들은 진저리를 쳤다.
“아프냐?”
“아... 닙니다.”
“나도 아프다.”
“그... 런!”
“발이.”
커억! 털썩!
그 자리에서 레오폴드는 기절했다. 가르딘을 말을 더 이상 듣다가는 드래곤 하트가 부서질 것 같았다. 차라리 기절하는 게 나았다. 드래곤들은 가르딘에게 개개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지독한 훈련과 벌칙이 반복되자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
하루가 지나고 난 후 환영진에서 벗어났을 때 라이젠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젠은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드래곤들을 보자 울화통이 터졌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다투었기에 하루 만에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되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어제 본 녀석들이 맞는지 확인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냥 용성교육을 좀 했습니다.”
“말이면단 줄 알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지요. 얘네 들 눈빛을 좀 보십시오.”
라이젠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지꼴을 한 드래곤들의 눈빛과 기운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기질이 변했다. 눈에서 브레스가 튀어나올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방만하고, 오만한 기질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처절하고, 사나운 기운이 무언가를 향해 이를 갈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 무언가는 바보가 아닌 이상 가르딘임을 알 수 있었다.
‘애들을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런 독한 기운이 나오는 거야!’
라이젠은 한참을 머리를 굴려 봤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존심으로 뭉쳐진 드래곤이 한순간에 성격이 변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유순한 성격을 가진 베로나조차도 이를 갈고 있었다. 가르딘에 대한 원한이 장난 아니었다. 여성체 드래곤이건 아니건 훈련은 공평하게 진행이 되었었다. 드래곤에게 남녀평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드래곤은 남자여서 강한 것이 아니라, 수명이 높을수록 강하기 때문이다.
가르딘은 아주 심하다 싶을 정도로 드래곤들을 굴렸다. 인성교육은 1년이라는 장기간의 교육기간이 필요하다. 현재 시간이 없는 관계로 1년 과정을 단 하루에 모두 집약하여 훈련시켰다. 강도와 질적인 수준이 상상히는 그 이상이었다. 더군다나 드래곤들이라 뼈대가 유난히 튼실했다. 말랑말랑 해질 때까지 굴리려면 보통의 훈련강도로는 부족했다. 그 예로 마보 7단 콤보 수련을 같이 시켰다. 마보 자세를 취한 드래곤 위로 드래곤이 올라타고, 다시 또 위로 7단을 쌓는다. 시간을 줄이면서 강도를 높인 고단위 마보자세였다. 한번 당하고 나면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하루만 더 시간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부르르르!
하루를 더 그런 말도 안 되는 훈련을 받았다가는 브레스를 거꾸로 쏴서 자살을 할지도 몰랐다. 베로나를 비롯한 드래곤들 모두 몸서리쳐야 했다. 많이 아쉽다는 가르딘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볼수록 살심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럼 전 이만 바빠서 가보겠습니다.”
라이젠이 젊은 드래곤들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렇게 악을 쓴다고 해서 가르딘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괜히 말려들어 봤자 자신들만 손해였다.
마왕이 카이로만 제국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코카 왕국을 비롯한 주변 왕국을 단숨에 쓸어버린 마왕의 마족군단이었다. 제국과 왕국, 공국들 모두 긴장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전략회의를 열고 병력의 운용과 배치현황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동쪽 대륙에 피바람을 일으킨 마족군단은 2부대로 나누 서 속전속결의 작전을 펼쳤다. 단숨에 동대륙을 무너뜨린 시간에 비해서 대륙진입은 예상보다 늦었다고 볼 수 있었다. 마치 대륙의 모든 병력이 한곳에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는 확신은 아직 없었다. 단순히 마족군단의 소모된 힘을 비축하기 위한 시간이었을 수도 있었다. 차라리 소모된 힘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다행이었다.
“마왕은 현재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병력배치는 분산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면대결이라면 우리도 힘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마족군단의 기동력은 일반적인 병력의 진군속도와는 차원이 다룹니다. 족히 15배 이상의 전진속도를 가졌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여 있는 것을 알고 역으로 돌아서 진형을 흩트려 놓는다면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될 겁니다.”
러쉬 황제의 골이 깊게 파였다. 마왕은 하나가 아니다. 둘이나 되었다. 솔직히 둘 중 한 명의 마왕이 변칙적으로 움직여 사각지역으로 돌아가게 되면 피해는 상상을 불허한다. 마족군단이 강하다고 해도 결론적으로 마왕은 일인군단을 넘어서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그대들뿐이다. 그대들이 마왕을 맞아 이겨주길 바란다.”
“맡겨 주십시오!”
러쉬 황제의 시선이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향했다. 쉴라는 신성이 영웅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를 했다.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 신이 내린 영웅이 있다면 병사들도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전투를 치를 것이다. 러쉬 황제도 스필언과 미토스가 마왕을 막아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그동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다. 이미 완벽한 그랜드 마스터 급에 달해 있었다.
“믿겠다!”
“최선을 다해 마왕의 악행을 저지하겠습니다!”
“짐도 대륙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감사합니다!”
러쉬 황제는 전투의 기본향방이 두 신성에게 달렸다는 것을 강조했다. 전 대륙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다. 신성이 마왕을 물리칠수록 있도록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했다. 전략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존재는 러쉬 황제가 과감하게 처리해 주었다.
가르딘은 회의장 안을 보면서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았다. 거대한 위험 속에 몰리자 사람들은 단결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토록 반목하던 존재들이 마왕이라는 존재로 인해 화합하여 일치단결한 것이다. 위험이 사라지고 난 후 평화가 찾아와도 과연 화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가르딘은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하긴 우선은 살고 봐야겠지.’
권력과 명예, 영광도 살아야 누릴 수 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우왕좌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희생을 줄이며 마왕을 무찌르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가르딘은 전쟁이 벌어질 장소로 향했다. 대전이 벌어지는 장소는 협소해서는 안 된다. 대륙의 모든 병력이 군집된 상태라 1천만이 넘는 병력이었다. 대군이 효율적으로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는 광활한 대지를 끼고 싸워야 한다. 또한 국지적인 전투는 단일전투능력이 뛰어날수록 유리하다. 마족의 전투능력이 강한 것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일대일로 싸울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광활한 대지 위에 1천만의 병력이 서 있었다. 각 병단은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병력배치가 이루어졌다. 병력배치는 한 병단에 5백씩, 좌우 폭이 4미터로 층층으로 배치가 되었다. 층과 층을 이루어서 병력의 회전률을 높여 지속적인 전투를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가르딘의 뒤로 필리언, 갈라, 유타가 서 있었다.
“이만한 병력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을까?”
“병력의 수는 상관없을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왕이니까! 스필언과 미토스가 격전을 벌이는 중에 마왕 한 마리라 도 살아남으면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거다.”
지금까지 전해진 정보를 종합해 보면 마왕의 전투력은 수치로 계산하기도 힘들었다. 단독으로 코카 왕국을 박살내어 버린 능력을 감안하면 수로 밀어붙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가르딘이 예상하기에 전투는 순식간에 판가름이 날것이라 보았다. 장기전은 생각할 필요가 없을 듯 보였다. 일단 마왕은 신성이 대적하게 되어 있었다. 마족들도 신성의 상대는 되지 못하고,병사들도 마왕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결국 어느 한쪽이 나서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전투는 아니라는 소리다.
‘마왕이 여유를 부린다면 좋겠지.’
마왕이 힘을 아끼고 기다리는 순간에 가르딘은 타이탄과 드래곤을 앞세워서 마족들을 청소해 버리면 되었다. 그전까지 가르딘은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미리 힘을 낭비하면 뒷일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가르딘의 시선이 넓은 대지의 끝, 보이지도 않는 지점에 향해 있었다. 움직임이 잡히지도 않는 까마득한 거리였다.
“오고 있군.”
“뭐가?”
“마왕이.”
“우린 안 보이는데.”
“그게 바로 실력 차이다.”
“실력 좀 있다고 유세냐!”
필리언, 갈라, 유타는 정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가르딘은 시야로 보이기 때문에 마왕이 온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저 느낀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마왕의 존재감이 가르딘을 자극했다.
가르딘은 손목을 보았다. 손목에는 두드러기처럼 소름이 돋아 있었다. 마왕의 존재감을 느낀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전 신을 휘몰아쳤다. 지금 이 순간 가르딘을 제외한 누구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건가.’
물론 느껴진 기운만으로는 가르딘을 능가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마왕의 능력은 이 정도가 끝이 아니라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가르딘의 표정이 굳었다.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여유로운 모습은 사라졌다.
서늘한 시린 한줄기 바람이 대지의 끝에서부터 불어왔다.
쌔애애앵!
돌풍은 대지를 황량함으로 물들였다. 가르딘은 기운의 변화를 감지한 후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천룡전성을 사용하여 마왕이 온다는 것을 알렸다. 심안의 영역에 든 가르딘은 마음만으로 원하는 곳에 있는 인물에게 뜻을 전할 수 있었다. 천룡전성은 마음의 언어, 즉 심언이었다.
‘마왕이 곧 올거다. 준비해라.’
가르딘의 심언을 들은 스필언과 미토스는 그 즉시 전장에 상황을 알렸다. 마왕의 진격을 신성에게 전한 것은 가르딘보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알리는 것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성의 능력을 병사들에게 보여 줄 필요성이 있었다. 희망과 절망은 단어 하나차이지만 그 결과는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보여준다.
마왕은 정면공격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기세가 여러 방향으로 나뉘지 않고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단숨에 몰아쳐서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의도로 보였다. 인간을 깔보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이상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전투대형을 갖추라는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마족들의 동선을 파악한 정보부대가 연락을 보내온 것이다. 1천만의 전투부대가 군진을 형성하며 전투진형을 갖추었다.
척! 척! 척! 척!
병사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마왕을 막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마왕은 피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마왕과 마족이 득세하는 곳에서 어찌 살 수 있단 말인가!
사령관을 맡은 가르딘도 기사단과 병력의 배치는 조율하고, 적을 맞을 준비를 해 나갔다. 발키리영지군은 병력의 후미에 두었고, 기사단과 창기병은 그 주변에 배치하여 병사들의 피해를 줄이도록 명령해 놓았다.
가르딘의 주변으로 라이젠과 드래곤이 나란히 섰다.
“우선은 마법으로 지원해 주십시오.”
“알겠다.”
“상급마족이 개입하기 전까지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 뒤는 라이젠 님에게 맡기겠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가르딘은 신성과 마왕의 대결도 신경을 써야 했다. 한곳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최악의 경우 가르딘은 신성을 돕기 위해 마왕과 정면대결을 벌여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라이젠에게 후방지원을 부탁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언제라도 출격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 그들은 오직 마왕을 상대하는 것만 주력했다. 그래서 일부러 병단을 움직이는 사령관의 자리에서 배제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평정심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왕을 상대로 어쭙잖은 마음가짐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항마멸사신공을 운용하여 정신과 신체의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했다. 몸 안으로 신성력이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그에 따라 샤이닝나이트와 세인트나이트가 반응을 해왔다.
-너와 내가 함께하는 한 절대지지 않는다. 결코 물러서지 마라!
‘알겠다.’
신성의 바로 뒤로 쉴라와 성기사가 배치되었다. 쉴라는 끊임없이 신언을 외우며 주신 라이니언의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찬연한 신성력이 다가오는 어둠을 밝히며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녀의 임무는 신성을 도와 마왕을 물리치는 일이었다. 신성력을 집중해서 신성에게 전달해 주었다.
‘아저씨는 왜 아직도 신기를 사용하지 못하지?
쉴라는 신성력을 끌어올리면서도 가르딘이 드래곤 나이트를 불러내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삼신기의 힘이 모두 필요했다. 쉴라는 마왕이 강림하는 순간 드래곤 나이트의 봉인이 풀릴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예상은 한참이나 빗나가 버렸다.
‘어쩌면 아저씨의 말대로 고철덩어리일지도 모르겠다.’
길게 늘어선 지평선의 끝으로 검은 기운이 형상화되어 대륙군단을 향해 다가왔다. 검은 기운은 악마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죽음의 기운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포악한 기운은 대기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마족군단의 중심에 투마왕 베르키스와 혈마왕 루이스탄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왕의 주변으로 상급마족인, 케비놈, 운 바리얼, 제네시스, 가비듬, 바리시안, 레티레톱 등이 감싸듯이 모였다. 상급마족조차 뿜어내는 기세가 완연히 달랐다. 그들 모두 고룡급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진정한 피의 축제는 지금부터다!”
“어둠의 위대한 권능을 보여 주어라!”
마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족들이 튀어나갔다. 용의 형상을 닮은 마족, 뱀의 머리를 가진 마족, 오우거보다 족히 10배는 큰 대형 마족 등 기기묘묘한 마족군단이었다. 보기에도 징그러운 마족들이 포악한 입을 벌리며 인간들을 향해 사나운 맹수의 이빨을 들이밀었다.
“크아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마족의 괴성이 대지를 울리며, 메아리쳤다. 광포한 괴성의 울림은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했다. 맞부딪쳐야 하는 인간들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었다. 소문으로 들은 마족과 실제로 본 마족은 확연히 달랐다. 귀족들과 기사들이 병사들의 음을 다잡기 위해 소리쳤다.
“우리의 수가 더 많다! 영웅과 성녀가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대륙의 존폐가 우리의 손에 달렸다! 최선을 다하라!”
틀에 박힌 말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두려움을 어느 정도는 해소해 주었다. 영웅과 성녀가 마왕을 물리쳐만 준다면 대륙을 피로 물들인 전쟁은 금세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러쉬 황제가 친히 전쟁의 한복판에 나와 기사들과 병사들을 독려했다. 황제의 굳건한 모습이 병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과연 대륙의 제황다웠다. 두려움에 움츠려들 러쉬 황제가 아니다. 태산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전방을 주시 했다.
“용기를 가져라!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륙의 정예병이다! 마족에게 굴복하지 마라! 모두 함성을 내질러 마족에게 인간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라!”
“와아아아아아!”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병사들의 함성이 대지에 퍼져나갔다. 함성은 전염병과 같았다. 가슴속에 남아 있는 두려움을, 소리를 지르지 않고서는 벗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전투가 점점 다가왔다. 마족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긴장감은 배가되었다. 기사들이 일제히 신호를 울렸다. 미리 준비한 전투병기를 마족들을 향해 쏘아대었다. 대륙의 모든 화력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동안 비밀리에 숨겨 놓은 병기들까지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두 쏴라!”
“일제히 쏴서 마족을 죽여랏!”
슈슈슝! 슈슈슝! 슈슈슝!
푸아아아앙! 푸아아앙!
마력탄을 실은 투석기가 반원을 그리며 마족들을 향해 날아갔다. 일시간에 수천 개의 전투병기가 뻗어나갔다. 하늘을 까마득히 뒤덮어 버렸다. 대륙의 전 마법사들이 모여 마법무기를 개량했다. 마족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동안 연구한 성과물을 전부 동원한 것이다. 위력은 대지를 흔들고도 남았다
쿠꽈과과꽝! 파파파파팡!
우우우우우웅!
대지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 버리고 있었다. 하급마족들이 마탄에 맞고 터져 나갔다. 마탄의 위력은 반경 5미터 안을 초토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족은 한 방에 죽지 않았다.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극성에 달한 마족들은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절대 죽지 않는 신체를 가졌다. 더군다나 재생력이 뛰어나서 신체의 절반이 부서져도 살아서 꿈틀거렸다. 징그러울 정도로 지독한 생명력이었다.
전장에 기괴한 웃음이 들려왔다. 마력탄과 마력포가 쏘아지는 살벌한 전장 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은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캬카캬캬!”
-데빌클라우드(지옥의 운무).
-데빌스틈(지옥의 폭풍).
중급마족 베리니컬이 어둠의 마법을 사용하자 주변의 마족들도 일제히 어둠의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검은 구름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폭풍이 불었다. 어둠의 구름이 병사들을 뒤덮었다.
운무에 접촉을 한 병사들이 괴성을 질러댔다. 빛을 덮은 어둠이 병사들의 내면에 숨죽이고 있는 공포를 자극했다. 환영을 본 병사는 주변에 마족들이 보였다. 병사들과 병사들이 서로를 향해 검을 들이대었다. 심령이 약한 병사들이 지옥의 운무에 포함된 어둠의 환술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병사들의 눈에는 징그럽게 보이는 마족들이 보일 뿐이었다.
“으아아아! 오지 마! 죽어!”
푸우욱!
“크윽!”
삽시간에 벌어진 일로 인해 병사들의 피해가 산처럼 불어 나갔다. 전우였던 병사가 돌변하여 찌르는 검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이 데빌클라우드를 와해하기 위해서 필생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법력으로 와해를 시키기에는 마족의 마법이 너무 강했다. 결국 마력을 합해서 구름을 밀어버리는 것 밖에는 없었다.
-윈드스톰(바람폭풍).
7서클 원드스톰을 시전한 대마법사를 도와 어둠의 구름을 몰아내었다. 하지만 그 여파에 직면해 있는 병사들이 피해를 입고 말았다. 환술에 당한 병a}들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지 못했다.
푸아아아앙!
마법과 마법이 충돌을 일으켰다. 마족은 휘청거리며 물러서는 반면에 마법사들은 마나역류로 인해 당분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전투에서 마족이 마법을 사용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워낙 극강한 신체를 타고난 마족들이었고, 직접적으로 부딪쳐서 상대하는 것을 즐겼다. 마법을 사용한 것은 마법사들이 공격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마법사는 일시적으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공황상태가 찾아왔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틈을 타 마족들은 병사들 간의 거리를 좁혔다. 전투와 피의 향연을 즐기는 마족답게, 전투경험이 탁월했다. 전장에서 필요한 감각을 본능적으로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르딘은 마족들의 전투능력이 생각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력만 강한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전투감각을 타고난 존재들이다. 그보다 가장 위협적인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료를 방패 삼아 마력포를 막다니, 지독한 놈들일세!’
동료애나 전우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투를 이기기 위해서 뭐든지 하고 있었다. 하급마족이라고 깔보다가는 어이없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가르딘은 전면에 배치된 기사와 병사들이 마족들에게 당하자 진형이 흐트러지는 것을 파악했다. 이대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면 병사들의 피해가 클 것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병력간격을 넓혀! 기사단은 간격 사이로 8열종대로 전진.”
제국과 왕국의 기사단을 공격에 본격적으로 투입시켰다. 마족과의 정면전투는 기사단에게 맞기고, 병사들은 좌우측면을 보호해 주는 형태를 취했다.
“마법병단은 궁수대를 지원하여 적의 중앙을 공격하라!”
전장의 사기는 순간순간 변화하게 된다. 사령관의 전술에 따라서 전체적인 전장의 흐름이 변화를 일으키고, 수세가 공세가 되는 형태를 반복한다. 가르딘은 최우선적으로 기사단을 투입하여 마족의 공세를 저지한 후 중앙 지점을 마법과 화살로 쏴서 마족의 움직임을 혼란시키는 데 주력했다.
“투르.”
“예.”
“10개조로 나누어서 적의 측면을 적당히 치고 들어가서 선을 그어.”
가르딘의 명령을 받은 투르가 전장의 후미를 돌아 빠르게 전장의 측면으로 이동했다. 일반적인 전투였다면 창기병만으로도 전장을 송두리째 날려 버릴 수 있겠지만 상대는 마족이다. 단순한 전투로 여겼다가는 창기병이 오히려 역으로 당할 수 있었다. 적의 측면을 치되, 속전속결의 기동성을 활용 하여 적을 가두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너희들은 투르가 흩트려 놓은 지점부터 갉아먹듯이 정리해.”
“알았어.”
“위험하니까! 진을 구축하는 것은 잊지 마.”
“걱정하지 마.”
필리언, 갈라, 유타라면 알아서 잘 해낼 것이다. 전방부터 무리하게 치고 들어가면 마족들이 눈치를 챌 수 있었다. 갯벌이 썰물에 잠기듯이 조금씩, 그러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여 마족들을 처리해 나가야 했다. 어차피 수에서는 아군이 더 많았다. 그때까치 전방을 막기 위해서는 제국과 왕국의 기사단으로서는 부족했다. 발키리영지군을 투입할 때가 되었다.
“발키리영지군은 정면을 지원하라.”
“충!”
제국과 왕국의 병사들과 다르게 발키리영지군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마족과의 전투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한 성과가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가르딘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가르딘은 마족군단의 시선 너머에 존재하는 마왕을 살폈다. 아직까지 마왕은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왕의 기운은 전과 같았다. 왜 움직이지 않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마왕도 영웅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다면 마족의 수를 줄일 수 있는 시기는 지금이었다. 가르딘은 라이젠에게 전음을 사용했다.
[마왕의 주변에 있는 놈들이 상급마족입니까?]
[그럴 거다.]
[놈들이 움직일 때 본격적으로 나서주시고, 그전까지 적당히 마법을 구사해서 마족들의 공세를 막아주십시오.]
[알겠다.]
드래곤이 전장에 벌써부터 나서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무한한 마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력을 사용하게 되면 소모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더군다나 브레스와 같은 대단위의 위력적인 공격을 가하게 되면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마력의 소모가 엄청나다. 가르딘이 가늠하기에 상급마족의 실력은 고룡급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그에 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도 드래곤의 존재 때문일 것이라 여겼다. 상급마족이 투입될 때 까지 마력을 아끼고, 기다려야 한다. 상급마족이 전투에 참여하게 되면 동선을 바꾸어서 병들과의 거리를 벌려야 한다. 드래곤과 상급마족이 모든 마력을 쏟아 붓는 지역에서 병사들이 살아남기는 힘들다. 최대한 거리를 벌인 상태에서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럼 움직여 볼까.”
가르딘이 본격적으로 전장의 정면에 나섰다.
초전에 마족의 마법에 의해서 환각을 일으키던 병사들이 대부분 죽고 나서부터 기사단과 병사들이 본격적으로 투입이 되자 전투가 더욱더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기사단은 진형을 갖추며 마족들과 일대 다수의 형태로 상대하며, 병사들이 간격과 간격에 공격과 방어를 해서 마족들의 공세를 막아내었다. 일방적인 학살은 벌어지지 않은 형태지만 마족의 공세는 여전히 흉맹했다. 힘의 우위가 아직까지 마족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가르딘이 전장을 지휘하며 앞으로 나섰다. 사령관은 전장의 지휘자다. 전장의 모든 결정을 하며, 판단을 내린다. 직접적인 전투를 웬만해서는 직접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론 직접 나서야 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와 같은 시기다.
고급형 귀족 표준 준마를 타고 가르딘이 멋지게 진격해 나갔다. 병사들과 병사들 사이가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 주었다.
가르딘의 시야에 기괴하고 거대한 마족이 분탕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기사단으로서는 쉽사리 감당하기 어려운 중급마족이다. 기사들 대부분이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사방으로 날아가 버리고 있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퍼퍽!
쿠다다다당!
아무렇게나 휘두른 주먹에 맞은 기사의 얼굴이 박살나며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다. 중급마족 데빌가이거의 완력은 오우거를 맨손으로 우그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얼굴은 악어의 형상이며, 몸은 갑옷 같은 비늘로 덮여 있어 오러조차 퉁겨내었다. 데빌가이거가 오른쪽 허벅지를 찌른 기사를 발로 차서 허공을 들어 올린 후 악어의 날카로운 이빨을 훨씬 능가하는 이빨로 허리를 물어뜯어 버렸다. 기사의 허리가 좌우로 갈라지더니 반 토막이 되어 분리되었다.
주르륵!
죽어버린 기사의 핏물이 데빌가이거의 입가와 목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를 보며 즐거워하는 데빌가이거의 잔인한 모습은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공포를 선사했다. 오러조차 뚫어내지 못하는 단단한 신체와, 오우거를 몇 십 배나 능가하는 완력, 마법에 대한 극강의 저항력까지 갖춘 괴물이 다. 상급마족도 아닌 중급마족의 능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 했다.
“벌레 주제에 어둠의 위대한 종족에게 덤빈 대가다! 크크크크!”
번쩍!
검격이 빛을 가르며 뻗어 나왔다. 공간을 가르고 가르딘이 등장하며 데빌가이거의 전면에 섰다. 기사단은 단독으로 데빌가이거의 앞을 가로막은 존재가 가르딘 공작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워하는 반면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르딘이 데빌가이거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작은 벌레라도 물면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죽어라!”
데빌가이거는 대화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을 죽이고, 피로 목욕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인간의 몸보다 큰 대도를 휘둘렀다. 가르딘은 바로 옆까지 다가오는 대도를 보면서도 반응하지 않았다.
“공작님!”
“위험합니다!”
기사와 병사들이 가르딘의 위험을 보고 소리쳤다.
휘청!
쿠쿵!
대도를 무식하게 휘두른 데빌가이거의 몸통이 사선으로 그어지며 잘려져 나갔다. 몸이 반 토막으로 잘린 데빌가이거는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믿을 수 없는 듯이 가르딘을 보았다.
“언... 제!”
“어때, 벌레에게 물려도 아프지.”
“이... 놈.”
싹둑! 데구루루!
가르딘은 망설이지 않고 데빌가이거의 목을 분리시켜 버렸다. 생명력이 최상에 달하는 마족이라고 해도 목이 잘리면 살아남지 못한다. 가르딘은 등장과 동시에 쾌검을 시용했다. 검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도 데빌가이거가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워낙 빠른 쾌검이라 느낌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급마족을 단숨에 해치우고 난 후 가르딘은 검을 쉬지 않고 휘둘렀다. 주변에 있는 중급마족과 하급마족을 차근차근 치워주었다. 살아 숨 쉬는 죄악덩어리를 남겨 둘 가르딘이 아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대들과 함께하겠다! 공격하라!”
“와아아아아아!”
가르딘의 가공할 검격과 박력 있는 과감성에 기사단과 병사들이 용기를 얻었다. 기세를 끌어올린 기사단과 병사들이 마족들을 향해 거침없이 공세를 펼쳤다. 가르딘의 가세로 자극을 받은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병사들 뒤에서 전장을 지휘하던 마스터 급 기사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파스트론 대공과 피닉스기사단이 가장 먼저 검을 뽑았다. 대륙 최강의 기사이며,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불사조와 같은 기상이 시위를 압도했다. 피닉스기사단이 마족을 향해 전진하며 양 날개를 펼쳤다. 신성한 불길이 어둠의 기운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나섰다.
파스트론 대공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형성되었다. 전설의 불사조가 불을 뿜듯이 파스트론 대공의 성명절기가 작렬했다. 바람의 검격이라고 불리는 파스트론 대공의 가공할 검법이 폭풍을 일으켰다. 불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어김없이 마족의 목이 잘려 나가 있었다. 파스트론 대공을 따르는 피닉스기사단의 능력도 가공했다. 거침없이 마족들을 상대하며 전세를 뒤집었다.
파스트론 대공의 뒤를 이어 발리스타 대공과 마이어 공작, 바자바인 공작이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리며 전장에 참여했다. 그렇게 되자 각 왕국의 마스터 급 기사들이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혼연일체가 된 인간의 저력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되면 어느 순간 기적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팽팽한 대결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마족들의 수를 줄여나 갔다. 병사들과 기사들의 희생에 비해서는 적은 변화일 수도 있으나, 전체적인 수적인 우위를 유지하며 마족들을 죽여 나갔다.
푸아아아앙!
사각의 측면에서 미친 드래곤처럼 광속으로 뻗어나가는 창기병이 있었다. 정면을 공격하던 마족들이 갑작스러운 창기병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일단은 막아설 요량으로 창기병을 향해 공격을 가했지만 창기병의 능력은 가공했다. 질풍 같은 질주 속에 오러 랜스와 마족의 공격이 부딪쳤다. 부딪친 마족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삽시간에 마족들의 공격동선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전투감각이 뛰어난 마족들은 금세 진형을 회복하고, 창기병의 기동성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질주하는 힘을 잃은 창기병이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마족들이 형성한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창기병을 지휘하는 투르가 극강의 패력을 선보이며 전진했다. 광룡창에 서린 오러 랜스가 마족들을 휘감았다. 광룡창법의 광롱포와, 광격살을 연사하였다.
퍼퍼퍼펑!
투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뒤는 항시 창기병이 따랐다. 창기병 역시도 광룡창법을 능수능란하게 선보였다. 뚫리지 않을 것 같은 마족들의 방벽이 뚫릴 때 발키리기사단이 그 옆면을 치고 들어왔다. 100명이 10명씩 1개조를 이룬 기사단은 진을 형성하며 마족들을 끌어들였다.
전후좌우에서 공격을 가하는 크레이지드래곤창기병과 발키리기사단의 연수는 톱니바퀴가 들어맞듯이 정교하게 맞아 들어갔다. 힘과 힘의 싸움에도 그다지 뒤지지 않는 창기병과 기사단의 실력은 연수합격에서 더욱더 놀라운 위력을 보여주었다. 희생이 전무한 상태에서 마족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측면의 사각지역이 흔들리자 정면에서 공격하던 마족들의 공세가 조금씩 약화되었다.
채채채챙!
중급마족 위그넘은 앞을 막아서는 놈들을 향해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위그넘은 어둠의 기사라고 불리는 마계의 검사다. 검 대신 몸의 뼈가 검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그의 몸 전체가 검이라고 불려도 어색하지 않다. 전신을 검처럼 사용하여 적을 죽이는 것이 그의 장기였다.
필리언은 간격을 벌리며 위그넘의 공세를 흡수하듯이 받아내었다. 몸이 고무처럼 늘어났다가 이어지는 회전 속에 뼈가 튀어나왔다. 뼈는 오러 블레이드에 맞먹는 강도와 예리함 을 가지고 있었다.
슈슉!
변칙적인 공격을 피한 필명언이었지만 예기까지 모두 피하지 못했는지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위그넘은 골검이 선공하지 않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필리언은 몸을 뒤로 빼면서 위그넘의 동선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일정 간격 안으로 끌어들인 필리언이 뒷발을 차며 위그넘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았다.
카아아앙!
위그넘의 뼈와 필리언의 오러 블레이드가 부딪치며 시끄러운 파공성을 내었다. 둘의 전력이 거의 엇비슷해서 서로 밀려나가지 않았다. 그때 위그넘이 무릎을 들어올렸다. 무릎에서 뼈가 튀어나와 필리언의 목을 노렸다.
파팟!
푸육!
필리언은 반 박자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물러섰다. 물러서는 필리언을 추격하며 다시 공격을 하려던 위그넘이 옆구리를 파고든 검격에 충격을 먹었다. 공격하는 와중에 마족들과의 간격이 벌어지고 말았다. 필리언을 죽이기 위해서 앞으로 전진하다가 검진에 걸렸다. 필리언은 처음부터 검진 안으로 위그넘을 유인한 것이다. 정면승부를 고집해서 오러와 체력을 낭비하는 것보다 연수합격술로 처리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비... 겁한!”
“그딴 말은 마족 따위에게 듣고 싶지 않다!”
사아악!
“크어어억!”
필리언은 위그넘이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고 단숨에 숨통을 끊었다. 재생력이 뛰어난 마족들이라 시간을 주는 것 자체가 독이었다. 마족은 시간 재지 않고 확실하게 죽여야 한다. 시간을 주게 되면 살아날 틈을 주어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다. 필리언이 마족을 처리할 때 유타와 갈라도 마족들의 수를 줄여 나갔다.
전장의 흐름이 조금씩 변화를 일으켰다. 미세한 흐름이지만 베르키스와 루이스탄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전투에서 이 정도로 팽팽한 대결을 펼친 것은 처음이었다. 중간계의 반항에 예상보다 강력했다.
하지만 마왕은 마족들의 죽음에도 그다지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저 여흥거리를 지켜보는 것처럼 느긋했다.
“반항이 제법이군.”
“그럼 판을 좀더 키워볼까?”
베르키스가 상급마족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 역시도 인간의 반항을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마족들은 마족 간의 유대감이 전혀 없다. 그저 지배와 종속의 관계일 뿐이다. 종속된 마족이 죽는다고 해서 지배자가 눈 하나 깜짝할 리 없지 않은가! 주인을 위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뿐이다.
운바리얼, 가비둠, 케비놈을 비롯한 상급마족이 진실된 실체를 드러내었다. 몸 안에 감추고 있던 어둠의 마기를 유감없이 뿜어내었다. 뿜어내는 마기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휘몰아치는 마기가 하늘을 관통하듯이 요동쳤다.
휘이이이잉!
질식해 버릴 것 같은 무서운 기운이 폭사되었다. 하급마족과 중급마족의 차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둠의 마기였다. 살을 에는 듯한 어둠의 마기가 번져 나오기가 무섭게 상급마족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우우우우웅!
상급마족의 허공 위로 마법구가 형성되었다. 직경 1미터의 어둠의 마기로 형성된 마법구였다. 30개의 마법구를 형성한 상급마족이 인간들을 향해 던졌다.
-데빌플로전(마폭).
데빌플로전이 전장의 중심에 떨어졌다. 공중에서 지상으로 살포시 떨어진 데빌플로전이지만 그 위력은 결코 얌전하지 않았다. 마력탄을 초고압으로 압축한 것 같은 위력이었다.
투꽈과과광! 꾸꽈과과광!
지면에 떨어지는 순간 데빌플로전이 폭발하면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반경 30미터 안이 그 자리에서 움푹 들어가는 폭발을 일으켰다. 허공으로 50미터 이상 치솟는 버섯 모양의 구름이 주변을 뒤덮었다. 데빌플로전의 영향권에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증발하듯이 사라져 버리는 엄청난 위력에 인간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단번에 3만에 달하는 병력이 손실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급마족의 공격을 끝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데빌플로전을 형성해서 공격을 가해 왔다. 마스터급 기사들과 7서클마법사들조차 막아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덤바인 왕국의 7서클마법사가 데빌플로전을 막아보려고 하다가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왕국의 기사단 중에 폭발의 영향력에 있던 기사들도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러쉬 황제를 비롯한 왕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기사와 병사들로서는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 상급마족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피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마법을 캔슬하거나 방어실드를 쳐야 하지만 7서클마법사조차 막아내지 못하는 마법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있는 존재는 드래곤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파아아아앙!
대기를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압도적이고, 광포한 기운이 상급마족을 향해 날아갔다. 9서클마력이 담긴 익스플로전이었다. 데빌플로전과 서로 부딪치더니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의 여파로 인해 사방으로 화염풍이 퍼져 나갔다. 불같은 기운은 기사들과 병사들의 갑옷을 녹였다. 불에 덴 듯한 상처를 입은 병사들이 신음을 내지르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병사들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생겨났다. 어느새 하늘 위로 거대한 날갯짓을 하는 위압적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까지 상상에서나 보아왔던 중간계의 절대적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드... 래곤이닷!”
“드래곤이 우리를 구하러왔다!”
드래곤의 무서움은 인간들도 알고 있다. 평상시라면 두려움에 떨며 고개조차 들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중간계를 지키기 위한 수호신으로서 드래곤이 등장했다. 드래곤의 등장은 오히려 반길만한 일이었다. 사라졌다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드래곤은 존재했었던 것이다. 상급마족의 절망적일 정도로 파괴적인 공격에 신음하던 기사들과 병사들의 사기를 다시 한 번 끌어올려 주었다.
움푹 파인 구덩이 앞에 서 있던 가르딘은 오러 블레이드를 형성하고 있었다. 상급마족이 데빌폴로전을 쏘자 가르딘이 검을 뻗어 쳐내었다. 그로 인해 가르딘의 정면에 있던 마족들이 그 충격의 여파를 고스란히 받고 증발해 버렸다.
‘잠재된 힘은 그 이상이군.’
중급마족과의 상급마족의 역량은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데빌플로전을 검으로 쳐내면서 가르딘은 역량의 차이를 잴 수 있었다. 평범한 인간의 역량으로는 상급마족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라이젠에게 출격할 것을 요청했다. 지체했다가는 병사들이 전멸당할 수도 있었다.
‘그럼, 우리도 본격적으로 나가 볼까.’
상급마족이 나섰다는 것은 마왕이 나서기 일보직전이라는 뜻이었다. 마왕이 나설 때를 기다리며 스필언과 미토스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성도 마왕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가르딘은 신성이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소 안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변S1를 겪은 것은 실력만이 아니었다. 마음의 수양 또한 깊어진 것이다. 신성은 대의를 위해 분한 •음을 참고, 가다듬고 있었다. 결국 전쟁의 승패는 마왕을 쓰러뜨리느냐에 달려 있었다. 모든 마족을 이긴다고 해도 마왕이 살아남으면 전쟁의 승패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달은 것이다.
[모두 힘을 개방해!]
가르딘이 전음을 사용해 크레이지드래곤창기병과; 발키리 기사단에게 전력을 쏟아 부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이제까지 감추고 있었던 오러 블레이드와 오러 랜스가 뻗어나가며 광영을 비추었다.
발키리기사단과 창기병의 마스터 급 기운에 주변의 기사단과 병사들이 놀라고 말았다. 1백 명이 넘는 기사단이 오러 마스터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더군다나 5백의 창기병조차 마스터 급에 달하는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시위를 압도하는 엄청난 기운과 기백이 용솟음쳤다.
“저...럴 수가!”
“저 많은 수가 마스터급기사라니!”
마족들과의 정신없는 싸움 중에도 제국과 왕국은 놀라고 말았다.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상을 불허하는 가공할 전투력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 체 누가?"
“가...르딘 공작의 기사단과 창기병이닷!”
가르딘 공작의 기사단이 전원 마스터 급의 기사다. 또한 창기병조차 그에 준하는 무력을 소유했다. 대륙최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무력부대를 갖추고 있었다.
러쉬 황제와 파스트론 대공, 발리스타 대공, 마이어 공작까지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가르딘 공작이 이처럼 대단한 전력을 가지고 있을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대륙을 전복시켜 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왕과의 전쟁이 아니라면 견제와 시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전력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는 상태다. 눈앞에 닥친 위기를 넘기는 일이 더 중요했다. 러쉬 황제가 마스터 급 기사단과 창기병의 존재를 병사들에게 알렸다. 우선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대륙의 제황다운 결정이었다.
발키리기사단과 창기병의 전력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위력 또한 굉장했다. 단숨에 마족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쿵! 쿵! 쿵!
지축을 흔드는 거대한 물체가 소환되었다. 겉으로 보이는 외관이 골렘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달랐다.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병사들과는 다르게 기사와 마법사들은 소환된 존재를 알아보았다.
“최... 종... 병... 기!”
“타... 이탄... 이라니!”
가르딘 공작의 기사가 타이탄을 소환한 것이다. 마도시대 이후에 완전히 사라졌다는 타이탄의 등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타이탄을 소환한 필리언, 갈라, 유타, 투르가 탑승했다.
마법과 연금술의 최종진화형태이자 최강의 병기라고 불리는 타이탄이 조종사와 일심동체가 되어 마족을 도륙해 나갔다. 필리언, 갈라, 유타, 투르 모두 타이탄의 조종이 능숙했다. 지닌바 역량이 그랜드 마스터 급에 달하는 그들이다. 타이탄을 탄 순간부터 드래곤에 필적하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중급마족이건, 하급마족이건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휘리리릭!
타이탄은 육중한 무게와 다르게 무척이나 빠르고 정확했다. 일검으로 덩치가 산만한 마족을미간에서 허리 아래까지 반으로 갈라 버리고. 거치적거리는 마족들을 발로 밟아서 짓이겼다. 고작 4기에 불과하지만 삽시간에 1백에 달하는 마족을 정리해 버렸다.
그 놀라운 위용과 압도적인 실력에 모든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왕국과 공국은 놀라움과 경외감을 가졌고, 카이로만 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특히 러쉬 황제는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전장이 유리하게 진행될수록 고민은 더욱 더 커졌다.
‘가르딘 공작!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알 수가 없다. 이제까지 가르딘 공작을 충신이라고만 생각 했다.
그런데 지니고 있는 무력이 제국을 능가하고 있었다. 발키리영지의 무력이 제국을 향해 검을 들이댄다면 솔직히 막아 낼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했다. 대륙을 통일할 수도 있는 엄청난 무력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다면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자라고 해도 그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면 위험했다.
하늘에서 드래곤과 상급마족이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9서클마법의 향연이 펼쳐졌다. 대단위 공격마법과 절대용언 마법이 펼쳐지고, 어둠의 궁극마법이 부딪쳤다.
퍼퍼퍼펑! 쿠아아아앙!
하늘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공기가 압축되어 폭발하는 순간에 화염이 휩싸이고, 검은 구름이 대지를 뒤덮었다. 화려하고 위력적인 공중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마뱀 주제에 제법이구나!”
“마계의 떨거지들 따위가 어디서 나불대!”
“뭐... 뭐... 라고!”
“잡소리 그만하고, 덤벼 이 새끼들아!”
“건... 방진!”
“좆 까고 있네!”
어벙!
상급마족 베리알은 기가 막혔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드래곤들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중간계를 수호한다는 드래곤은 건방지기는 해도 말투 자체는 고급스럽다. 더군다나 마법에 대한 자존심과 자긍심이 강해서 저급한 수단의 마법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드래곤들은 마족보다 입이 더 걸고, 거친 마법을 난사했다. 또한 효과적이기만 하면 저급하든 말든 닥치는 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법을 사용하며, 연수합격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제 이런 드래곤들이 있었단 말인가! 과거에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른 베리알조차도 황당하게 만들고 있었다. 잠시 당황한 베리알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감히! 도마뱀 따위가... 커억!”
우드득!
베리알이 화를 토해내기도 전에 다리를 무는 드래곤이 있었다. 현신한상태에서 입을 크게 벌린 에르반이 머뭇거리는 베리알의 다리를 아래서 위로 솟아올라 문 것이다. 자긍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이 마족의 다리를 물다니, 상식이 통하지 않고 있었다.
“놔... 라!”
-다크개......!
베리알이 마법을 사용하지 전에 베로나가 헬버스터(지옥 의 광선)을 날렸다. 아래에 신경 쓰는 사이에 벌어진 마법공격이라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위급한 상황이라 데빌실드를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전에 다리를 물고 있던 에르반이 브레스를 사용했다.
베리알이 어처구니없는 드래곤의 치사한 합격술에 당해 먼지로 사라져 버렸다. 다른 상급마족들은 동료의 죽음을 인지할 틈도 없었다. 드래곤들의 쉴 틈 없는 연속공격을 방어 하는 것도 쉽지 많은 않았다. 더군다나 드래곤들의 공격술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화려하고, 위력적인 마법공격만 구사하던 드래곤들이 전투에 필요한 마법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또한 적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서 상처를 돌보지도 않았다. 마치 마족의 전투를 보는 것 같았다.
“이것들이! 드래곤 맞아!”
“보고도 몰라!눈이 뻐였냐!”
드래곤들의 전투를 지휘하던 라이젠도 놀라기는 마족들과 비슷했다.
‘도대체 애들을 어떻게 한 거냐?’
이기는 것은 좋은데 정말 폼이 안 나는 전투를 하고 있었 다. 집안을 지키는 개도 아니고. 다리를 물다니 그게 어디 드래곤의 고귀한 전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착잡했다.
‘젠장, 우선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폼이 안 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희생을 줄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사실 상급마족을 상대로 희생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이전부터 드래곤은 마력은 강해도 상급마족에 비해서 전투력은 약한 편에 속했다. 상급마족의 다양하고 변칙적인 공격과, 전투경험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르딘의 특훈을 받은 후부터 드래곤들이 달라졌다. 눈에 독기가 가득하고, 적을 죽이기 위해서 자존심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것이 전투경험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또한 안젤리카와 파멜라가 만들어준 휴대용 항마진의 효과는 대단히 컸다. 4개의 축을 중심으로 항마진을 형성하자 마족들의 기운과 전투력이 급감했다.
‘역시 딸 키운 보람이 있구나!’
안젤리카의 대견함에 절로 흐뭇해졌다. 상급마족들을 지휘하는 케비놈과 운바리얼은 뜻하지 않촌 난관에 짜증이 치밀었다. 드래곤들의 전투력 못지않게 주변에서 느껴지는 신성한 기운이 어둠의 마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비겁한 수작 부리지 마라!”
“언제부터 드래곤이 이런 저급한 수작을 부렸나!”
자존심을 긁어 불리한 전투를 유리하게 만들어 내려고 했지만 드래곤들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았다.
“네놈들은 정당하게 싸워라! 미친놈아!”
-캐논프레임(포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9서클 캐논프레임을 날려 버리는 레오폴드였다.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간 광선이 도중에 터지더니 헬파이어에 버금가는 불꽃을 선사했다. 근접거리에서 터지는 캐논프레임의 영향을 받은 케비놈이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마법연사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기회를 잡은 드래곤들이 먹이를 잡아채듯이 연속적인 공격을 해왔다. 약세를 보일 때 득달같이 달려드는 이리떼와 같았다.
퍼퍼퍼펑!
운바리얼이 데빌실드를 치지 않았다면 케비놈은 죽었을 것이다. 상처를 입은 케비놈은 치가 떨리고 있었다.
레오폴드는 전투에서 가장 적극적이면서 지독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그 인간에게 복수할 때까지 죽을 수 없다!’
그것은 다른 드래곤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르딘에게 당한 수모, 박해, 뭉개진 자존심, 그 모든 것을 해소할 때까지 절대 죽을 수 없었다. 그것이 설혹 마왕이 될지라도 반드시 승리해서 그 인간의 비웃는 얼굴에 수심을 새겨 줄 것이다.
같은 등급의 마족이라도 실력 차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중급마족 중에서도 상급마족에 버금가는 놈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둠의 마법과, 마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기사들과 병사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마계의 독을 잔뜩 품고 있는 헬포이즌 족의 나바단이 독을 마구 뿌리고 다녔다. 독에 스치기라도 한 병사는 그 자리에 서 살이 타고, 중독이 되어 녹아 버렸다. 오러를 수련한 기사들조차 나바단의 독에는 무용지물이었다. 대전의 경우 독을 사용하는 존재는 가장 까다로운 상대일 수밖에 없다. 근접거리에 다가설 수도 없을뿐더러 조금만 호흡해도 독의 기운에 의해 힘을 쓰지 못했다. 나바단이 뿜어내는 독무로 인해 접근하는 것조차 용이치 않았다
“녹아서 한줌의 핏물이 되어라!”
나바단은 가로막는 마이어 공작의 기사들을 모조리 다 혈수로 만들었다. 비스트기사단이 죽어가자 마이어 공작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함께한 비스트기사단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사들이 죽는 것을 가만히 눈뜨고 보지 못했다. 전투를 위해 태어난 기사답게 마이어 공작은 망설이지 않고 독무로 뛰어들었다. 그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태생부터 알지 못했다. 마이어 공작의 뒤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체이슨이 소리쳤다.
“위험합니다!”
독무 속으로 뛰어드는 아버지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한 것이다. 그가 미처 저지하기도 전에 마이어 공작은 검을 뻗고 있었다. 체이슨은 안되겠다 싶은지 망설이지 않고 마이어 공작의 뒤를 따랐다.
치치치칙!
나바단의 몸에 닿기도 전에 오러 블레이드와 독무가 부딪치며 타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나바단의 독무는 보통의 독무와는 차원이 달랐다. 강기에 버금가는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뚫어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오러 블레이드를 타고 올라오는 독기는 마이어 공작의 호흡을 거칠게 만들었다. 반 호흡을 마셨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대단했다.
비틀!
마이어 공작이 비틀거리며, 신형을 다잡지 못할 때 나바단이 다크포이즌(암독)을 살포하려 했다.
“나약한 인간 주제에 덤빈 대가다! 죽어랏!”
마이어 공작은 흡입한 독기를 해소하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나바단의 독은 중간계에 존재하지 않는 마계의 극독이다. 한 줌만 가지고서도 오러 마스터조차 녹여 없애버릴 수 있었다. 뒤쫓아 온 체이슨이 다급하게 검을 뻗었지만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안... 돼!”
체이슨에게서 절절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에게 아버지는 단순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의 모든 것이자 앞으로 지향해 나가야 할 우상이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고 독무가 흔들렸다. 나바단이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검이 배를 뚫고 나왔다. 살을 뚫고 들어오는 오러 블레이드가 아래서 위로 들어 올려졌다. 나바단의 몸이 어이없이 잘렸다.
“이... 런! 제... 길! 으아아악!”
가르딘은 나바단을 처리하고 난 후 마이어 공작의 체내에 스며든 독을 천룡무상신공으로 흡입하여 중화시켰다. 순식간에 독을 중화시키는 가르딘의 능력에 마이어 공작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숨을 쉬지도 못하게 만드는 극독을 중화하려면 그에 버금가는 오러와 운용능력이 필요하다. 마이어 공작은 가르딘의 능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네, 실력을 속였군.”
착잡한 기분의 마이어 공작이었다. 얼마 전까지 검을 맞댄 가르딘에게 농락당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불가피하게 실력을 속이기는 했지만 공작님을 존경한 것은 사실입니다.”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네.”
“그렇다 해도 지금은 한가하게 오해를 풀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겠지.”
가르딘이 실력을 속인 것은 가족을 위해서다. 혼자서 독불장군할 수 있다면 실력을 드러낸다하여 누가 어찌 할 수 있을 것인가! 반면에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르딘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력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치지 않았다. 곳곳에서 쓰러져 가는 기사단과 병사들을 위해서는 마족 중에서도 위험한 놈들을 제거해야 했다.
가르딘이 마족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다가 마이어 공작의 위험을 감지한 것도 필연이었다. 물론 체이슨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면 마이어 공작을 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마이어 공작의 옆으로 체이슨이 달려왔다.
“아버지! 무사하십니까?"
“나는 괜찮다. 그보다 그의 검을 보았느냐?”
“죄송합니다.”
“그는 강하다. 너는 더 강해져야 한다!”
“반드시 가르딘 공작보다 더 강해지겠습니다!”
마이어 공작은 검을 숭상하는 기사다. 가르딘 공작의 실력을 인정하지만 절대 뒤처질 생각이 없다. 그것이 진정한 기 사의정신이라 여겼다.
마족들이 수세에 몰렸다.
상급마족을 투입하여 승세를 올리려던 마왕의 계획이 어긋난 것이다. 이제까지 느긋하기만한 마왕의 얼굴에 약간의 주름이 지어졌다. 미공자풍의 혈마왕과 투마왕이지만 그들의 본신은 드러난 모습처럼 아름답게 생기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의 어둠 속에서 오랜 시간 담금질을 한 마왕이었다. 힘의 성질 자체가 여타의 마족과는 차원이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과는 다르게 마왕의 내부는 악의 화신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부르르르!
마왕의 기질이 변하자 대기의 흐름에 작은 떨림이 발생했다. 미세한 기운이지만 그 안에 서린 파괴적인 기운은 능히 세상 전체를 부숴버리고도 남았다. 마왕의 기운은 보통 인간은 느낄 수 없었다. 마왕과 견줄 수 있는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다.
“연회의 끝을 장식해 주지.”
“저기 오는군.”
베르키스와 루이스탄이 기운을 발산한 것은 허공을 격하고 날아오는 존재를 위해서였다. 오직 그들만이 느낄 수 있도록 기운을 조절해서 발산하였다. 어둠의 기운을 대항하는 성스러운 기운으로 무장한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키스와 루이스탄의 표정이 변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성스러운 기운이 강렬해졌다. 어둠의 절대권능조차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못마땅한지 베르키스와 루이스탄이 어둠의 권능을 확장시켰다.
우우우웅!
기파가 퍼져 나갈수록 대지 전체가 흔들렸다. 마왕의 권능이 본격적인 힘을 발휘하자 마족들과 인간들조차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마왕은 모든 세상이 어둠의 권능에 수그리기를 강요했다. 근원적인 공포와 어둠이 결합되어 초극의 마를 이루었다. 수백만 년을 담금질한 어둠의 칼날이 사방을 휘저었다. 절대적인 어둠의 극한을 보는 듯했다.
파팟!
어둠의 기운과 성스러운 기운이 부딪쳤다. 절대마기를 머금은 대기의 기운이 예리한 칼날이 되어 뻗어나가는 것과 달리 성스러운 신기의 기운은 만물을 포용하며 감싸 안았다. 어둠의 기운을 상쇄하며 신성한 기운이 마왕의 눈앞에 다가섰다.
“영웅이 왔으니 이제부터 마왕의 소임을 다해야겠군.”
“그렇지. 후후후후!”
전장의 상황이 불리하게 진행되는 것과는 별개로 전투를 즐기고 있는 혈마왕과 투마왕이었다. 그들은 어둠의 절대사악이자 전투의 마왕이다. 살을 찢고 피를 흘리는 전투야말로 마왕이 원하는 것이다. 전투를 통해 적의숨통을 끊고, 원한과 분노, 절망에 비참하게 울부짖는 것을 보는 것이 마왕의 본능이자 유희였다.
절대마기를 뚫고 접근한 신성이 마왕의 앞에 섰다. 마침내 대륙을 피로 물들이게 만든 대혈전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다. 마왕과 영웅의 생사를 가르는 대결의 서막이 열렸다.
마왕의 마기가 은은하게 퍼질 때부터 가르딘은 느꼈다. 마왕이 본격적으로 대륙을 향해 검을 들이대고 있다는 것을. 스필언과 미토스도 느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필언과 미토스가 세인트나이트와 샤이닝 나이트의 봉인을 풀었다. 신기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지 못했다. 봉인을 풀고 세상에 드러난 신기는 과연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발산했다.
‘굉장하군!’
어둠을 물리치는 성스러운 기운은 따뜻하지만 위대한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신의 권능이 신기에 스며들어 있는 것 이었다.
“영웅이다!”
“영웅이 대륙을 구해줄 것이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의 함성이 들렸다. 절대악을 대적하는 영웅의 화려한 등장.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게 만들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아니 신이 정해놓고 만들어지다시피 한 영웅들이다. 그들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영웅의 등장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영웅이 마왕을 무찌르기만 하면 대륙전쟁이 끝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가르딘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왕 과 영웅의 혈전이 과연 쉬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신은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절망과 희망이 정해지도록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신이 정해 놓은 수레바퀴 속에 세상의 이치가 돌아가기에 순리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허울뿐인 망상론에 불과하다. 따라서 결과는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다.
‘근접거리까지 접근해야겠지.’
가르딘은 스필언과 미토스가 마왕을 대적하기 전에 먼저 마족들 중에서 위험한 놈들을 베어 나갔다. 풍기는 기세가 만만치 않다고는 하지만 마왕도 아닌 놈들이 가르딘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가르딘은 그랜드 마스터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검에서 수십 개의 검강이 사방으로 부챗살처럼 퍼져나갔다. 가르딘의 의지가 실린 검강은 무시무시했다.
파파파파팟!
“크으윽! 커어억!”
검강에 적중한 마족들이 비명조차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마왕과 신성의 등장으로 모든 이들이 한눈팔고 있는 사이에 벌어진 엄청난 광경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깨닫지 못하는 병사들과는 다르게 마스터 급 실력을 소유한 기사들은 가르딘의 기운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어났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저... 런 엄청난 오러라니!”
“그… 랜드 마스터다!”
볼테인 왕국의 골드만 공작이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 말이 전염이 되듯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영웅의 출현과 동시에 그랜드 마스터 급의 기사가 등장한 것이다. 검의 절대 경지로 알려진 그랜드 마스터는 인간이 발을 들일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 정석이었다. 반면에 어느 누구도 올라선 적이 없는 그랜드 마스터에 이르면 드래곤에 필적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불가능하다는 그랜드 마스터의 등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또한 카이로만 제국의 공작이라는 것에 더욱더 놀랐다. 과거 대륙제일의 검사라고 불리었던 카이로만 대제의 현신이라고 할 수있었다.
기사들이 놀라고 있거나 말거나 가르딘은 제 할 일을 해나갔다. 가르딘은 화려함과는 달리 효과적인 공격을 선호했다. 단숨에 마족의 숨통을 끊으면서 성녀에게 접근해 나갔다. 마왕과의 대결이 있을 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성녀다. 영웅의 신성력을 증폭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성녀의 주변으로 성기사들이 지키고는 있지만 부족했다. 만약 위급한 상황에서 성녀가 죽게 되면 큰일이었다. 마왕과 대적하는 신성까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카르마 단장이 성력방어진을 펼치며 마족들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중급마족 바탈리안이 성기사단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나섰다. 바탈리안은 마족이기는 해도 어둠의 기운을 발산하는 여타의 마족들과는 달리 육체적인 힘을 근간으로 하는 어둠의 종족이다. 그에 따라 신성력에 대한 저항력이 제법 강했다. 바탈리안의 육체적인 능력은 상급마족에 비견되었다. 10마리나 되는 바탈리안이 성기사단을 향해 거대 한 배틀엑스를 휘둘렀다.
휘이이익!
쿠우우우웅!
200명이나 되는 성기사가 8명씩 1개조를 이루어 바탈리안의 도끼질을 막아내었다. 바탈리안의 힘은 신성력을 통한 방어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다. 성기사들은 방어가 최선이 아닌 상황에서 역공을 간간이 가했다. 홀리소드를 형성하여 바탈리안의 신체를 가격했지만 힘뿐만 아니라 육체의 단단함도 인간의 상상을 초월했다. 홀리소드조차 바탈리안의 신체에 생채기를 내는 것이 전부였다. 상처 입은 맹수는 사납다. 성기사들의 반항이 바탈리안의 화를 자극해 버리고 말았다. 핏발을 세운 바탈리안의 사나운 맹공이 퍼부어졌다.
콰과꽝! 파파파팡!
상처를 입든 말든 성기사들을 죽이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이성을 잃은 짐승은 통제하기 어려우며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맹공을 받은 성기사단은 신성력을 통해 충격을 회복하고, 상처를 지혈했지만 바탈리안이 지속적으로 공격 을 하자 점차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으윽!’
심각한 충격을 받은 성기사 5명이 휘청거리자 성력방어진이 흔들렸다. 약세를 보는 순간 바탈리안이 득달같이 달려들 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력방어진이 밀리고 밀렸다. 이대로 계속 밀리게 되면 성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쉴라와 마족이 근접전을 벌이는 이유는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신성력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마왕이 뿜어내는 어둠의 권능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거리가 멀수록 신성력의 주입이 어려웠다. 되도록 큰 힘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는 영웅과 근접거리에까지 가야 했다.
슈슈슈슉!
공기의 흐름을 직선으로 관통했다. 대기가 미처 신형을 따라가지 못했다. 섬광을 능가하는 무섭도록 빠른 신형이었다.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뇌전의 줄기가 5개로 분리되었다. 5개로 늘어난 분신이 바탈리안을 향해 검을 출수했다. 벼락이치는 것처럼 빠른 검격이 바탈리안의 미간을 뚫고 지나갔다.
번쩍!
불에 덴 듯한 상처를 입은 바탈리안의 몸체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눈이 풀려 있고, 입이 벌어져서 침이 흘러나올 뿐이다.
쿠쿵!
7미터나 되는 바탈리안의 거대한 신체가 맥없이 쓰러졌다. 검이 뻗어 가는 궤적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바탈리안이 검격에 당해 쓰러졌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빛을 가르는 검격을 뿌린 존재가 카르마 단장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그... 렇습니다! 가르딘 공작님!”
가르딘은 카르마단장과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을뿐더러 지금은 한가하게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물론 가르딘이 오해를 풀기 위해서 귀찮을 일을 감수할 만큼 섬세한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쉴라는 끊임없이 신언을 외우며 막대한 신성력을 뿜어내 고 있었다. 온전히 모든 신성력은 신성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쉴라의 얼굴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엄청난 신성력을 지니고 있는 쉴라조차 땀을 흘릴 정도로 집중해야 할 상황이었다.
[왜 신기를 사용하지 않나요.]
[낸들 아냐.]
[정말 사용하지 못하는 거예요, 아니면 안 하는 거예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나도 사용하고 싶다고!]
쉴라가 가르딘에게 신언을 사용하여 물었다. 가르딘은 천룡심어를 통해 대답을 해주었다. 가르딘도 드래곤 나이트를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런데 응답은커녕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답답하기는 가르딘이 더 했다.
[저보다는 신성을 도와주세요.]
[너를 지키는 것도 중요해.]
[저는 스스로 지킬 수 있어요.]
[우선은 전투를 지켜보고 난 후 나설 테니 걱정하지마라.]
가르딘도 생각이 있었다. 현재 마왕과 영웅의 전투력은 엇비슷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정확하게 그렇다라고 단정을 내리지는 못했다. 가르딘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심산이었다. 현재 가진 전력만으로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섣불리 도와주다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기회를 노리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마왕이라고 해도 불의의 일격에는 장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또한 가르딘에게 거리의 제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서도 충분히 견제를 해줄 수 있었다.
‘시작하는군.’
가르딘의 시야에 마왕과 영웅의 대결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딘은 신경 쓰는 곳이 많았다. 특히 동기들과 발키리 영지군의 상태를 살펴야 했다.
세인트나이트와 샤이닝 나이트는 전신은 신의 금속이라고 불리는 하이브럴로 되어 있었다. 최강의 금속이라는 파이럴의 강도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단단함을 가졌다. 하이브럴은 단순히 단단함으로 인해 신의 금속이라 붙여진 것이 아니다. 금속 자체적으로 신성을 띠며, 복구력을 가지고 있었다. 충격을 흡수하고, 자유치유능력을 가진 신기에 가까운 금속이었다. 신의 권능으로 신의 금속을 제련하여 만들어진 최강의 타이탄이 세인트나이트와 샤이닝 나이트였다. 10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크기의 신기가 빛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마왕을 향해 정의의 검을 뽑았다.
스르렁!
스필언과 미토스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세인트나이트와 샤이닝나이트의 능력이 강한 만큼 마왕의 능력도 강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신기의 힘이 강할수록 상대적으로 어둠의 힘이 강한 것은 세상의 법칙과 같았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기 마련이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더욱더 밝게 보이는 것은 어둠이 대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최선을 다한다!’
‘빛의 검진을 펼치자!’
합공은 틈과 틈을 잘 이어나갈 수 있는 효율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 잘못하면 서로 역할이 산만해져 공간을 내주거나, 빈틈을 허용할 수 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공간과 공간의 틈을 적당히 벌렸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지점을 자리했다. 언제라도 최선의 공격을 가할 수 있으며, 방어를 할 수 있는 거리였다.
베르키스와 루이스탄은 영웅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영웅이라고 해봤자 인간이기에 저평가를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 보여주는 신성의 움직임은 평범하지 않았다. 강적을 상대로 효과적인 진형을 짜고 있었다.
“재밌겠는데.”
“그렇담 그에 걸맞은 힘을 보여주지.”
베르키스와 루이스탄은 그동안 걸치고 있던 껍질을 벗었다.
쩌저저적!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었던 베르키스와 루이스탄의 몸이 갈라지더니 점점 부풀어 올랐다. 거치적거리는 것을 떼어내 고 새로운 존재로 완전히 탈바꿈을 해나갔다.
신체가 커지면서 어둠의 마기 역시 급상승했다. 응축되어있던 마기가 활화산처럼 발산되어 나갔다. 순식간에 신기와 비슷한 크기로 커졌다. 마왕의 육중한 신체는 철갑을 두른 듯 팽팽했다. 미공자풍의 얼굴과는 다른 사나운 기백을 지닌 마의 절대적인 모습이 되었다. 극강의 신체와 더불어 등 뒤로 박쥐의 날개를 연상케 만드는 어두운 날개가 돛을 피듯 이 좌우로 펴졌다.
“그럼 시작해 볼까:’
베르키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날을 편 손을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내리그었다. 검은 마기가 잠시 번들거렸다가 사라진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쌔애애애앵!
스필언과 미토스의 정중앙을 가르며 기운이 쏘아져왔다. 응축된 어둠의 검이 공간을 좌우로 예리하게 갈라놓았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신속하게 좌우로 거리를 벌려 어둠의 검을 피했다. 쿠아아아아앙!
신성의 뒤를 시작으로 대지의 끝을 넘어서는 지점까지 반으로 갈리면서 벌어졌다. 마치 지진이 일어나서 대지를 쪼개놓은 형상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마왕의 저력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가벼운 손짓에 대지가 변형을 일으켰다. 흔들리는 대지에 서 있던 사람들은 그 엄청난 광경에 기겁했다. 단 일수에 대지가 갈리고, 산이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마왕은 인간이 접근하는 것 자체를 불허했다. 마왕은 영웅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들을 깨달았다. 영웅이 지면 대륙은 끝장이었다. 모든 이들이 영웅의 승리를 간절하게 기원했다.
쉴라를 지키고 있던 가르딘의 눈빛이 변했다. 다른 이들은 겉으로 보여 준 마왕의 위력에 놀란 반면에 가르딘은 대지를 가른 본질적인 능력을 꿰뚫어 보고 놀랐다. 고작 일수에 불과하지만 마왕의 의념이 섞여 있었다.
‘저것이 마왕의 능력인가!’
꾸욱!
가르딘은 검을 힘껏 잡았다. 진실된 힘도 아닌 그저 그런 일수에 실린 마왕의 권능이 대륙을 송두리째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소름이 돋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거 나서야 할지 모르겠는데.’
스필언과 미토스가 승리해 주기를 기원하지만 승패가 어찌될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가르딘은 마왕과 정면으로 대적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신기가 없는 상황에서 맨몸으로 나서야 하는 가르딘의 심정은 암울함 그 자체였다.
‘X됐다!’
슈우우우우웅!
스필언이 마왕의 공격을 피한 후 좌우로 현란하게 움직이며 검을 뻗었다. 세인트나이트는 스필언과의 싱크로율이 극에 이르러 있었다. 스필언이 지시하는 것 이상의 움직임이 가능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육중한 무게의 신기였지만 움직임은 깃털보다 더 가벼웠다. 세인트나이트의 세인트소드 (신성검법)가 펼쳐졌다. 세인트소드의 절대십검 중에 하나인 천격이 뻗어나갔다.
퍼어어어어엉!
루이스탄은 어둠의 진력을 한 점에 모아 만든 데빌월(어둠의 장벽)을 펼쳐 가슴을 찌르고 들어오는 천격을 막았다. 천격의 위력은 강맹했다.
하지만 데빌월 역시도 막강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충격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허공을 뒤흔들었다. 신성의 공격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스필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온 미토스가 솟구쳐 올라 루이스탄의 머리를 내리찍어 왔다.
타아아앙!
마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베르키스가 절묘하게 신형을 틀어 미토스의 검을 다크랜스(어둠의창)으로 막아내었다. 그와 동시에 루이스탄이 마법을 연사하였다. 한 방에 산을 날려버릴 수 있는 위력이었다. 마력포를 수백 배나 압축하여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마법이 신성의 눈앞에서 폭발하였다.
파파파팡! 파파파팡! 파파파팡!
지옥의 마력탄이라고 불리는 데빌붐버였다. 초열의 기운이 퍼지면서 신성의 주변을 화염으로 둘러싸이게 만들었다. 화염에 휩싸인 신성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루이스탄과 베르키스는 마법을 쉬지 않고 난사했다. 마왕은 전투를 위해 태어난 괴물이다. 적의 능력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퍼퍼퍼퍼펑!
화염과 연기가 사방을 뒤덮은 구름 속에서 튕겨 나가듯이 두 방향으로 빛이 뱀어나갔다. 빛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왕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해 들어갔다. 신기가 여러 개로 보이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신성은 이미 마왕과 근접해 있었다. 마왕의 절대적인 마법공격을 연속적으로 받은 스필언과 미토스였지만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데빌붐버가 터지기 직전에 스필언과 미토스는 빛의 검진을 펼치며 오러막(호신강기)을 형성했다. 신성력과 오러를 바탕으로 형성 한 오러막은 데빌봄버의 위력을 상쇄시켰다.
마왕은 신성의 빠른 움직임과 놀라운 대처능력에게 잠시 주춤거렸다. 신성은 그 틈을 파고들며 검을 날렸다.
시아아악! 치지지직!
베르키스의 가슴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어둠의 기운과 신성력이 부딪치며 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충격을 받은 베르키스가 뒤로 물러섰다. 미토스는 물러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망설이지 않고 베르키스를 향해 돌진했다.
씨익!
베르키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실로 오랜만에 입은 상처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마계의 5대 마왕과의 접전이 아니면 상처를 입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인간계에 와서 상처를 입었다. 자존심보다 신성의 강함에 흥분이 되고 있었다. 투마왕이라는 그의 별호가 알려주듯이 그는 전투를 즐기는 마왕이었다.
“얼터메이트그래비티!”
추응!
‘옥!’
근접거리에서 최강의 중력 마법을 걸었다. 샤이닝나이트의 몸체가 흔들거렸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이 엄청났다. 항마멸사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신형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바닥으로 추락할 뻔했다.
“이런!”
베르키스도 마법으로 미토스를 어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기는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엄청났다. 대단위 마법이라고 해도 튕겨낼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순간의 틈을 만들어낸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파아아아앙!
베르키스의 창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틈을 허용한 샤이닝나이트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퓨우응! 쿠과과과과광!
정통으로 맞은 미토스가 지면에 떨어지면서 바닥을 뒹굴렀다. 베르키스는 멈추지 않고 창을 던지려고 했다. 그때 스필언이 가만있지 않고 달려들어 베르키스에게 일격을 가했다.
퍼어엉!
스필언의 시선은 베르키스에게만 있을 수 없었다. 어느새 등 뒤를 점령한 루이스탄이 공격을 적중시켰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스필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연속공격을 시도하려고 한 루이스탄이었지만 지상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미토스의 검격을 피해야 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접전이었다. 마왕과 영웅 누구 하나 승기를 잡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마왕과 영웅이 벌인 혈전의 여파는 굉장했다. 치열한 공방의 사정권내에 있는 존재들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마왕과 영웅의 대결에 휘말렸다가는 살아 숨 쉬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다. 중간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결다웠다.
가로에서 세로, 사선에서 다시 사선으로 마족의 목을 가볍게 처리하면서도 가르딘은 마왕과 영웅의 대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왕과 영웅의 능력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단순히 육체적인 충돌로 인해서 대기가 흔들리지 않는다. 일격 일격에 실린 힘이 대지를 쪼개버릴 수 있을 수준이라는 뜻이다. 혼과 혼이 실린 공격은 하늘과 땅마다 놀라게 만들었다.
‘마왕이 괜히 마왕이 아니군.’
마왕에게서 빈틈을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공방전 속에서 빈틈을 내준 것은 신성의 공격하는 타이밍을 잡아 반격하려는 수법이었다. 살을 주고 뼈를 가르는 이대도강의 수법을 거칠 것 없이 사용했다. 더군다나 공격을 받은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아니 상처 자체가 그냥 없어 졌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가르딘은 마왕의 전투능력을 계산해서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고민해 보았다. 다른 마족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았다.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에 모의전투를 해서 확률을 계산해 보았다.
마왕과 영웅의 대결을 보느라 눈앞에서 공격하는 마족을 쳐다보지도 않는 가르딘이다.
폭풍처럼 쇄도한 데빌일루전 족의 가이멘사는 눈앞의 인간이 한눈팔자 어이없어 했다. 안간힘을 쓰며 반항을 해도 소용없을 판국에 한눈을 팔다니, 마족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따끔한 훈계를 한 후에 죽음의 고통을 맛보여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네 이놈. 죽고 크윽!”
댕강!
화끈거리는 느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이멘사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가르딘의 검이 순식간에 가이멘사의 머리를 잘라낸 것이다. 데빌일루전 족의 중급마족 패코타와 마찬가지로 가장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뭐라도 해보고 죽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았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한눈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르딘은 두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하고 있었다. 인간은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생각에 집중할 수 없다. 혼을 둘로 나누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가르딘은 심안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몸과 혼을 나누어 분리하였다. 몸은 마족과 전투를 치르는 반면에 혼은 마왕과의 가상전투를 벌였다. 몸 따로, 생각 따로 움직이며 거침없이 마족들을 죽여 나가는 가르딘을 본 마족들은 움찔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저런 괴물이!”
슈슈슈슉!
“크아아악!”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르딘의 검격이 마족의 입을 관통해버렸다. 가르딘에게 욕을 한 대가였다.
“마족 주제에 사람 보고 어디서 괴물이래.”
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귀는 뚫려 있었다. 가르딘은 마족들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성기사단의 카르마 단장조차 어이없이 바라보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럴 수도 있는 건가!’
성기사들은 마족보다 가르딘이 더 이상한 존재로 보았다. 강한 줄은 알았지만 정말 터무니없이 강했다. 영웅이야 원래 신이 정해 준 존재이기에 강하다고 하지만 보통의 사람이 저처럼 말도 안 되게 강한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수련을 했기에 저런 괴물이 됐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그나마 가르딘이 적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가르딘과 같은 존재가 적이었다면 무척이나 끔찍했을 것이다.
“너희들 뭐 하냐?”
“예?"
가르딘이 마족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했다. 얼떨결에 대답한 성기사단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검질 안 하고 노냐?”
“아... 닙니다!”
그제야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던 성기사들이 마족들을 향해 검을 뻗었다. 성기사들은 가르딘의 성격이 종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가르딘은 이제 가면을 벗어던졌다. 실력이 까발려진 마당에 성격을 숨길 필요성이 없었다.
가르딘은 되도록 무극칠검식의 절초를 사용하지 않았다. 힘의 낭비도 있지만 마왕이 눈치를 채면 곤란했다. 힘을 속성을 최대한 감추며 마왕이 방심하기를 기다렸다. 솔직히 마왕이 주시할까 봐 기를 숨겼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니다.
쿠꽈과광!
3중으로 중첩되는 마기가 천지를 진동시키며 폭발을 일으켰다. 한번 터진 폭발이 연이어 다사 폭발을 지속적으로 일으키자 대기를 흔들었다. 연속적인 폭발에 충격을 받은 스필언이 뒤로물러섰다.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회를 엿본 베르키스가 놓치지 않고 쇄도해 근접거리까지 접근하였다. 마왕의 박투술은 투로 자체가 없었다. 무의 궁극에 오르면 형을 벗어내고, 초식에 근간을 두지 않게 된다. 마왕은 무를 수련한 것은 아니지 만 궁극에 가까운 전투를 벌이면서 투로를 개척했다. 마왕이 휘두르는 전신이 모두 궁극의 위력을 선보였다.
타타탕! 퍼펑!
베르키스와 스필언이 최단거리에서 초고속으로 전투를 펼쳤다. 반경 1,000미터 안은 그들만의 공간이었다. 움직임을 눈으로 쫓기도 힘들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있어야 할 공간에 베르키스와 스필언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너무 빨라서 공간을 이동한 것처럼 보였다. 교차한 주먹과 검의 울림이 신형을 따라가지 못했다.
퍼퍼퍼퍼퍼퍽!
주먹과 주먹, 발과, 발, 무릎과 무릎이 부딪칠 때마다 천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기파가 발생하였다. 베르키스와 스필언의 주변에 있는 지형이 버티지 못하고 가루로 변했다. 산산이 부서진 가루가 대기 중으로 흩날렸다.
우우웅!
세인트나이트의 손에서 성스러운 빛이 응축되었다. 오러와 성력을 한곳에 모아 분출시켰다. 가르딘에게서 장법을 분출하는 기법을 전수받았었다. 뛰어난 장법을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장법을 사용하기 위한 오러의 운용방법을 배웠다. 스필언은 오러의 사용법을 배운 후 성력과 결합하는 방법을 새롭게 만들어 냈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은 기존의 방법을 운용하는 것보다 어렵다. 스필언와 노력과 재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필언의 장력이 뻗어나가자 베르키스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았다. 베르키스의 손에서도 어둠의 기운이 중첩되어 지독한 마기를 분출시켰다. 마기가 대기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오싹한 소름이 돋는 마기였다. 마왕의 절대마기가 주는 영향력과 파괴력은 대단했다.
푸아아앙!
기운과 기운이 부딪치며, 폭발력이 퍼져나갔다. 스필언과 베르키스의 신형이 주춤하면서 흔들렸다. 전신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위력적인 장력이 대결이었다. 거리를 둔 공간사이로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서로의 전력이 어느 정도는 파악이 되었다. 베르키스와 스필언이 기회를 엿보며 소강상태를 보이는 반면에 미토스와 루이스탄의 대결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공중으로 치솟은 미토스가 샤이닝소드의 샤이닝크래쉬(광폭)를 100연발로 연사하였다. 폭사를 하면서 터져 나가는 샤이닝크래쉬는 지상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사방에서 버섯구름이여러 방향으로 형성되었다. 숨 쉴 틈 없는 연사격을 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다.
퍼퍼퍼펑! 파파팡! 퍼퍼펑!
운석에 충돌을 한 것처럼 반경 1천 미터 안이 초토화되고 있었다. 생명체가 살아 있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공전절후한 위력이었다. 상상을 불허하는 가공할 위력에 모든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공격의 범위 안에 있는 어떤 존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푸슝!
“아니?”
미토스가 샤이닝크래쉬를 연사하는 와중에 등 뒤에서 루이스탄이 나타났다. 샤이닝크래쉬가 터지지 직전에 공간을 이동한 것이다. 어둠의 권능을 이용한 공간이동이라 시간과 주문의 제약이 존재하지 않았다. 루이스탄의 의념이 존재하는 곳으로 신형이 공간을 이동할 뿐이다.
-데빌블러드샷(지옥혈격).
쿠아아앙!
미토스의 등 뒤를 제압한 루이스탄은 피할 시간을 주지 않고 데빌블러드샷을 날렸다. 10여 개의 데빌블러드소드가 샤이닝나이트의 등 뒤를 가격했다. 막강한 충격을 받은 미토스가 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루이스 탄은 낙하하는 미토스에게 마계최강이라고 불리는 공격마법을 선사했다.
“사라져랏!”
마계의 절대권능이자 파멸의 주문이라고 불리는 데빌스트럭션이었다. 암흑의 영역에 닿은 공간 자체를 소멸시키는 무시무시한 공격이 미토스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일격을 허용하면 회복하기 힘든 충격을 받을 것이다. 팽팽한 대결을 펼치던 저울추가 기울어질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슈웅!
‘응?’
“뭐... 야?”
미토스가 공격받을 찰나에 무언가가 소환되었다. 갑작스러운 소환된 존재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루이스탄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야 했다. 마왕의 절대권능이 스며든 파괴적인 공격이었다. 어쭙잖은 방어로는 소용도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데빌스트럭션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 위력을 정면으로 고스란히 막아야 했던 정령왕 테리우스는 연방 가르딘을 욕하며 중간계에서 정령계로 강제 소환되어 버렸다.
“가... 르딘! 이 빌어... 먹을 놈아!”
슈웅!
결국 테리우스는 방패역할을 흘륭히 수행하고 역소환되었다. 그래도 한 방 이상의 역할을 해주었다.
루이스탄과 미토스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가르딘은 전투의 향방이 기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토스가 공격을 할 때 루이스탄의 움직임을 가르딘은 간파했다. 공간을 이동하는 동선이 보인 것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가르딘은 즉시 정령왕을 소환했다. 예전에 분명 정령왕은 마왕의 일격을 한방 정도는 막아줄 수 있다고 했다. 잊지 않고 기억한 가르딘은 지체하지 않고 테리우스를 소환하여 루이스탄의 데빌스트럭션을 방어했다. 테리우스가 가르딘을 욕하며 사라질 때 가르딘도 조금 바빴다. 미토스의 위기를 본 스필언이 다급하게 행동히는 바람에 베르키스의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양쪽을 모두 도와주기 힘들었던 가르딘은 베르키스를 향해 심검을 초월한 자연검의 영역인 풍검을 쥐도 새도 모르게 날려 공격타이밍을 방해했다.
느닷없는 정령왕의 출현으로 공격이 막힌 루이스탄은 짜증이 치밀었다. 이번 한수로 영웅을끝장내 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더군다나 마계의 절대권능은 마력의 소모가 큰 공격이었다. 마구잡이로 날릴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용해야 하는 마계최강의 절대권능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정령계의 떨거지 주제에 감히!”
루이스탄을 아예 소멸시켜버리지 못한 것이 분한 듯한 표정이었다.
어느새 충격에서 벗어난 미토스가 신형을 회복하고 루이스탄을 보았다. 미토스도 좀 전에는 위험을 감지했었다. 루이스탄의 공격이 범상치 않은 것을 파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어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급박하게 오러와 신성력을 결합하였지만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시기적절하게 정령왕이 나타나서 마왕의 일격을 막아주었다. 미토스는 정령왕이 등장한 원인을 찾지 않았다. 지금은 정령왕이 소환되었는지를 파악할 때가 아니었다. 마왕이 기력을 회복하기 전에 필사의 일격을 가해 승기를 잡아오는 것이 먼저였다.
미토스의 빛의 검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거대한 그물망을 형성했다. 샤이닝네트(광망)라고 불리는 샤이닝소드의 절대검법이었다. 루이스탄도 정령왕에 대한 분노를 터뜨릴 여유가 없었다.
미토스와 루이스탄의 치열한 대결이 펼쳐지는 반면에 베르키스와 스필언은 또다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상대방의 약점을 파악한 후 공격을 가하기 위한 탐색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베르키스는 좀 전에 자신을 위협한 검격을 상기했다. 스필언이 공격을 했다고 하기에는 시간적인 타이밍이 나오지 았다. 부지불식간에 날아온 검격을 확인했을 때 베르키스는 옆구리에 상처를 입었다. 마왕의 신체를 베어낼 수 있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스필언과 거리를 벌리지 않고 연이은 공격을 했다면 옆구리가 아니라 가슴이 베어질 뻔했다.
‘뭐였지?’
갑작스러운 검격의 존재를 파악하기 위해서 스필먼을 몰아붙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마왕이 기감을 확장했을 때 기운은 유령처럼 사라졌었다. 공방을 치르는 치열한 접전에서 쥐새끼처럼 숨어 방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필언이 신기를 이끌고 또다시 공격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다른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스필언의 공세는 만만하지 않았다. 본신 실력을 지닌 채 현신한 마왕을 상대로 이만한 접전을 벌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스필언이 세인트소드의 후반 3조식 중의 하나인 무변격을 사용했다. 정중앙으로 찌르는 검법이다. 일절의 변이 포함되지 않은 정직한 검이지만 그 안에 서린 거력이 만만치 않았다. 베르키스는 검력에 포함된 스필언의 의지가 보통 이상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서투른 공격으로는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후우우!”
가르딘은 들키지 않았다는 것을 만족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왕이 가르딘의 존재를 파악했다면 심히 곤란할 뻔했다. 아직까지 마왕과의 시뮬레이션이 완벽하지 않았다. 가상대결에서 어느 정도까지 유리한지 확률을 계산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괜찮은 편이었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야지.’
마왕의 힘이 많이 빠질 때 가르딘은 나설 계획을 세웠다. 그전까지 영웅이 마왕을 대적할 수 있도록 숨어서 조금씩 도와줄 생각이다.
드래곤과 상급마족의 대결도 막바지를 향해 가는지 치열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처음에는 드래곤의 상식 밖의 대응에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마족들은 순식간에 적응해 나가며 공방을 펼쳤다. 전투감각만큼은 드래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대단히 뛰어났다.
상급마족의 마력과 드래곤의 마력이 부딪치며 공방이 지속되었다. 드래곤은 최대한 브레스룰 아끼며 적절한 때만을 노렸다. 상급마족도 항마진과 거리를 적당히 조절하면서 어둠의 마력을 시기 적절하게 사용했다. 항마진이 어둠의 기운을 조절한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퍼어엉!
“크윽!”
레오폴드가 레티레톱의 공격을 받고 밀려나갔다. 항마진의 진세가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항마진의 기운이 약해지는 것을 파악한 상급마족들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약점을 향해 지속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레오폴드가 밀리면서 그 주변을 지키던 드래곤들까지 뒤로 밀리고 있었다. 레오폴드의 왼팔이 잘려 나가고, 에르반의 꼬리가 찢겼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전황이 갑작스럽게 밀리기 시작한 드래곤이었다.
“이제 끝이닷!”
상급마족이 드래곤의 흐트러진 진형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파고들었다. 상급마족의 마법과 물리적 공격에 충격을 받고 밀리기만 하던 레오폴드가 갑자기 마법을 펼치며 활발하게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상급마족들이 드래곤들의 진형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상태가 되었다.
“아니?”
“걸렸다! 이놈들아!”
항마진을 통한 전술이 통하지 않자 드래곤들이 진형을 바꾸었다. 살을 주고 마족의 목숨을 취하는 전술이었다. 레오폴드와 에르반이 미끼가 되어 연기를 하고, 그 주변의 드래곤들이 박자를 맞추어서 물러서며 새로운 진형을 갖추었다. 전술의 목적은 거리를 벌리며 마족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후우읍!”
라이젠의 입으로 대기의 숨결이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분출하기 위한 기운의 응축이 이루어졌다. 긴 호흡이 끝나고 난 후 모여 있는 상급마족을 향해 브레스룰 쏘았다. 로드가 된 라이젠의 브레스는 제국을 박살내고도 남는 위력을 가졌다. 또한 그동안 가르딘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개발한 방법까지 브레스에 가미했다.
-스크류 토네이도 브레스.
브레스의 주변아 회전을 했다. 연속적인 회전은 풍압을 발생시켰다. 브레스의 주변이 모두 끌려 들어갔다. 상급마족들이 위험함을 감지하고 피하려고 했지만 브레스의 압력이 움직임을 둔화시키고 있었다. 시간을 놓친 상급마족들은 다급함에 소리쳤다.
“안... 돼!”
퍼어어어어어어어엉!
상급마족들은 살기 위해서 모든 전력을 쏟아 라이젠의 브레스에 대항했다.
하지만 브레스의 위력이 너무 강했다. 일반적인 드래곤의 브레스와는 비교자체가 되지 않았다. 대기의 기운마저 라이젠의 브레스에 쏠려 들어갔었다. 정면으로 브레스를 막아야했던 상급마족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산천초목을 떨리게 만드는 굉음이 울리고 난 후 상급마족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비틀! 비틀!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상급마족들 대부분이 넝마처럼 망가져 있었다. 전신의 대부분이 브레스로 인해 녹거 나, 타 버리고 말았다. 마력의 소모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불의의 일격이 정통으로 들어갔다. 제아무리 상급마족들이라고 해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신속히 정신을 차리고 육체와 마력을 회복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드래곤들이 그럴 시간을 줄리 만무했다. 라이젠이 쏘고 난 후 체력을 회복한 드래곤들이 브레스를 연방 쏘아대었다.
부아아아앙!
“크아아악!”
상급마족은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브레스를 맞았다. 이미 만신창이로 망가진 상태라 방어조차 하지 못했다.
드래곤도 필사적이 기는 마찬가지였다. 브레스는 드래곤에게 최후의 무기다. 최후의 무기를 쏘고 난 후에도 이기지 못하면 충격이 반사효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 마력을 남김없이 브레스에 실었다. 수십 방의 브레스가 상급마족에게 작렬했다.
“허억! 허억!”
드래곤들이 거친 숨을 토해내었다. 더 이상 브레스를 쏠 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브레스룰 맞은 상급마족들은 먼지로 변해버렸다.
“이... 겼다!”
“어딜 중간계를 넘봐!”
“우리가 있는 이상 어림도 없다!”
드래곤들은 이겼다는 것에 안도했다. 만약 브레스를 맞고도 살아 나왔다면 죽는 것은 드래곤아 되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마왕과 영웅의 대결뿐이다. 영웅을 도와주고는 싶지만 지금 당장 마법을 시용할 힘도 없을 정도로 소진이 되었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라이젠은 영웅과 마왕을 보지 않았다.
성녀의 옆에 착 달라붙어서 중급마족과 하급마족을 상대하는 가르딘을 보았다. 영웅을 도와주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놀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응?’
라이젠은 눈이 침침해서 잘못 본 것인 줄 알았다. 가르딘이 마족들을 상대하면서 의념을 형성하는 것이 희미하게 감지되었다. 자세하게 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찰나에 형성한 기운이라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감지가 불가능할 수준이었다.
‘저... 럴 수가!’
의념이 기운이 되어 바람의 칼날을 일으켰다. 바람의 칼날은 마왕의 공격을 적절하게 방해하며 신성을 도왔다. 위기때마다 가르딘이 신성을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절묘하게 영웅의 위기를 해소해 주고 있었다.
‘별걸 다하는구나!’
가르딘이 형성한 풍검은 윈드커터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마왕의 신체를 베는 검이 보통일리 없지 않은가! 라이젠이라고 해도 막아낸다고 장담을 하지 못했다. 대기를 휘젓는 바람이 모두 검이 되어 공격한다고 생각해 보아라, 막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마왕보다 가르딘이 더 괴물처럼 느껴졌다.
‘큰일 났군.’
마왕과의 결전에서 승리하고 난 후에도 드래곤들이 가르딘에게 기를 펴고 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루이스탄이 이번에도 회심의 공격을 퍼부었다. 미토스가 공격을 준비하는 시점에 생기는 작은 틈을 블리자드(눈폭풍) 마법과 데빌프로즌(지옥빙)마법을 동시에 사용하여 휘청거리게 만든 후 데빌스트럭션을 다시 한 번 사용했다. 한번 사용하고 난 후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데빌스트럭션의 마력소모는 컸다. 절호의 기회가 아니면 다시 사용하지 않을 위력적인 공격이다.
샤이닝나이트의 관절과 관절 사이에 절대빙점의 얼음이 형성되어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녹이고 난 후 루이스탄의 마법공격을 막아내야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슈웅!
“또... 냐?”
미토스의 바로 앞에 강제소환 되었던 존재가 다시 한번 나타났다.
푸아아아아아앙!
마계의 절대권능을 정면으로 또다시 맞은 정령왕 테리우스는 미처 가르딘에게 따질 시간도 없이 강제소환이 되고 말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같은 짓을 반복한 테리우스였다. 역소환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만약 이 이상 소환되면 아예 소멸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테리우스는 가르딘의 사악함에 절로 치가 떨렸다. 심언으로 전달된 [두 번째]라는 말이 테리우스의 화를 돋웠다. 가르딘과 약속한 5가지 중에서 이제 2번째라는 뜻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약속이었다면 절대로 약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3번이나 남았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이 되었다.
“빌... 어먹을 놈!”
슈웅!
시원하게 욕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테리우스는 정령계로 역소환되어 버렸다.
루이스탄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마계의 절대마력을 쏟아 부은 회심의 공격이 또다시 정령왕에게 막혔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이대로는 마력소모만 컸다. 도대체 왜 정령왕이 시도때도 없이 소환되는지 알 수가없었다.
루이스탄과 마찬가지로 베르키스도 곤란함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공격은 아니라고 해도 스필언과의 대결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신성이 어떤 술수를 부리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이대로는 결판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베르키스와 루이스탄이 어둠의 결계를 치며 공간을 좁혔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따라붙으며 막아서려고 했지만 공간을 장악하는 능력은 마왕이 훨씬 더 뛰어났다.
“설마 이런 방법까지 사용할 줄이야!”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마왕들조차 마지막 수단을 사용할 때까지 밀리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변수가 지속적으로 개입하게 될 경우 마력만 소모하고 패배할 수도 있다고 느낀 것이다. 혈마왕과 투마왕이 서로의 마력을 한곳에 집중했다. 모든 힘을 집중해서 단번에 쓰러버리려는 의도였다.
위이이이잉!
마력과 마력의 결합으로 인한 힘의 여파가 휘몰아쳤다. 지저의 어둠이 대기를 뒤덮었다. 어둠과 어둠이 중첩되어 무엇도 보이지 않는 절대의 어둠이 형성되었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어둠 속을 투영하여 마왕의 본신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빛의 검격은 어둠에 스며들어 사라질 뿐이었다. 어둠의 위력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현재의 역량으로서는 절대어둠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 런!”
“어떡하지?"
“마왕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우리도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자!”
“알았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최후의 대결에 있을 준비를 하자 샤이닝나이트와 세나이트의 전신에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빛은 점차 사방로 퍼져 가며 영역을 넓혀갔다. 마침내 빛은 태양과 같은 광채를 뿜어내며 바라보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신의 성스러운 기운이 빛에 담겨 퍼져 나갔다.
암광과 신광이 번뜩이며 마신과 천신이 대적을 하는 것 같았다. 마왕과 영웅은 모두의 시야 를 완벽하게 가렸다. 빛과 어둠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가르딘의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어갔다. 시위를 압도하는 푸른빛은 점점 더 짙어지며 청광을 번쩍였다 가르딘은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마왕이 어떤 수를 쓰는지 반드시 알아야 했다. 돌발적인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왕의 움직임을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되었다. 천룡무상신공을 운용하여 했안의 영역을 배가시켰다. 천룡안의 청광이 어둠과 빛을 관통했다.
‘뭐... 야?’
가르딘은 어둠과 빛을 꿰뚫어 보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가르딘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오래 살다 보니 별 이상한 꼴을 다보고 있었다.
“합... 체라니!”
어둠 속에서 마왕은 융합을 하고 있었다. 서로의 마력을 일치시킨 후 가당찮은 동작을 취해 몸과 정신을 하나로 합체시켰다. 보기에는 형편없는 합체동작이지만 위력은 굉장했다. 퍼져 나오는 기세부터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빛에 휩싸인 샤이닝나이트와 세인트나이트가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더니 머리, 몸통, 팔, 다리로 형성이 되었다. 합체하기 위한 준비과정을 거친 후에 하나의 신기로 합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샤이닝나이트가 머리와 몸통이 되고, 세인트나이트가 팔과 다리가 되어 합체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1과 1이 합체하여 2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된다는 것에 있었다.
‘기가 막혀서.’
저런 기막힌 기술이 있으면 미리부터 사용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왕이 융합하기 전에 먼저 사용했으면 쉽게 이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르딘이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합체를 한 후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이 극히 짧았다. 또한 합체가 풀렸을 때의 오러소모가 만만치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마왕의 전력을 탐색하면서, 만일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어둠과 빛이 사라지고 난 후 융합과 합체가 된 마왕과 영웅이 마주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최후의 수단이 비슷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뜻하지 않게 [찌찌뽕]을 하고 말았다.
놀람도 잠시 금세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신성과 마찬가지로 마왕도 오랜 시간 융합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다. 빠른 시간 내에 끝장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극렬한 기운을 쏟아내었다 마왕은 마법 대신에 데빌블레이드를 사용했다. 어둠의 극을 이루어 형성된 마의 절대검이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샤이닝소드와 세인트소드를 결합하여 빛의 성스러운 검을 탄생시켰다.
카카카캉! 타타타탕!
숨쉴 틈 없는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마왕이 검을 찌르며 들어왔다가 아래서 위로 들어올렸다. 찌름과 동시에 이어지는 검의 궤적이 보이지도 않았다. 신성이 좌에서 옆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스텝을 밟으며 피하지 않았다면 위험한 뻔했다. 마왕과 신성은 공간을 벌리지 않고 근접에서 검과 검을 뿌렸다. 초근접거리에서 광속으로 부딪치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눈이 아닌 초감각의 영역에서 검이 뿌려졌다. 의지와 의지가 서로의 영역 안에서 검과 검을 형성하여 실제적으로 싸우는 것은 수백 개가 넘어서고 있었다. 검 하나 하나의 위력이 대지를 갈라 버리고도 남았다. 한순간의 방심이 화를 불러올 수 있을 정도로 치열했다.
쿠아아앙!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분간의 공방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웅과 마왕의 진정한 진력이 실린 검과 검이 충돌하며 거리가 벌어졌다. 마왕은 거리를 벌린 즉시 기세를 일으켰다. 그가 가진 최강의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왕이 신성을 향해 소리쳤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라! 대신 인간들은 모두 죽는다!”
데빌블레이드에 배슬(구슬)이 형성되었다. 마왕의 마력과 어둠의 기운이 응축되어 배슬에 집중되었다. 포효하는 구슬의 기운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절대악의 총화라고 불리기에 충분했다.
휘이이이이잉!
기운의 여파가 굉장했다.
신성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근접거리에서 마왕에게 거리를 내준 것이 화근이었다.
다시 거리를 좁히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왕의 계산 안에 있었던 것이었다. 마왕은 일부러 거리를 벌리고, 인간들과 마주보고 섰다. 영웅이라면 인간들을 위해 마왕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낼 것이라 여긴 것이다.
마왕의 계획대로 영웅은 물러서지 못했다. 이제는 정면으로 막아야 한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봤을 때 이 일대를 모두 날려버리고도 남았다. 영웅이 산다고 해도 인간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신성도 모든 힘을 한곳에 집중했다.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마왕의 힘과는 차이가 존재했다.
그때였다.
“물러서!”
신성은 그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옆으로 물러섰다.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는 주인공은 신성도 익히 알고 있는 존재였다. 맹렬하게 쇄도해 들어오고 있는 중년남이 거대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바로 가르딘이었다.
안전한 거리에서 융합한 마왕과 합체한 영웅이 대결하는 장면을 눈으로 쫓으며 가상전투를 벌이고 있던 가르딘이 다급하게 행동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왕이 신성과 거리를 벌린 그 순간부터 가르딘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깨달았다. 마왕이 만들어낸 기운은 측량할 수 없는 어둠의 극한을 품고 있었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막아낸다고 해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가르딘이 나서지 않으면 재앙이 눈앞에 다가올 펼쳐질 것이다. 한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유리한 상황이 될 때까지 시간을 너무 오래 재다가 똥 밟은 격이었다. 합체한 순간부터 본신의 힘을 개방해서 도움을 줘야 했었다. 괜히 최후까지 안전을 도모하려는 꼼수에 도리어 완전히 낚여 버렸다.
‘젠장!’
최후의 최후까지 웬만하면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하늘은 가르딘이 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왕의 공격으로 인해 영웅이 중상을 입거나 죽어도 심각한 문제였다. 가르딘이 나서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되었다. 가르딘은 지체하지 않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천룡무상신공을 극의로 끌어올려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갔다. 가르딘은 대륙 역사상 최강의 경지에 다다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르딘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기운이 천룡을 형상화했다.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한 기운이 가르딘에게서 형성되었다. 만물을 압도하는 절대무적의 기운이었다.
마왕이 만들어낸 데빌배슬(악의 구슬)은 절대악의 결정체였다. 어둠과 분노, 절망, 죽음, 사기가 모두 섞여 있어 만물을 울게 만들었다.
가르딘은 최선의 수를 펼치기로 작정했다. 무극칠검식의 개별적인 초식으로는 막아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무극칠검식의 연환결을 펼쳐 보여야 한다. 연환결의 위력은 메테오마저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왕의 데빌배슬은 메테오 따위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이상의 전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무극칠검식-연환결-무극생멸환만검.
가르딘의 모든 총화가 녹아 들어간 무극칠검식의 연환결이었다. 천룡무상신공의 용솟음치는 기운이 무극생멸 환만검에 퍼부어졌다. 천롱의 기운은 단순한 오러의 수준을 넘어섰다. 의지와 자연이 하나로 일치된 가르딘의 정화였다.
우우우웅!
가르딘의 검에서도 둥그런 검환이 떠올랐다. 혼돈의 극에 달한 무극의 기운과 생과 소멸 의 절대극한에 달한 기운이 융합하여 화합을 이루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기운을 발산하였다.
빠직!
가르딘의 전신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이제까지 모든 역량을 사용한 전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력의 절반을 사용하지 않아도 가볍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런 가르딘조차 마왕의 절대악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사용해야 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준 것도 없으면서 무지하게 부려먹는구나!”
물러선 영웅의 뒤에서 날아오르는 가르딘을 본 마왕은 실소를 머금었다. 영웅도 아닌 인간 따위가 정면으로 덤벼 들어오니 가소롭게 느껴진 것이다.
“건방지구나! 인간 따위가 나의 절대마력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시끄럽고 이거나 먹어랏!”
마왕의 데빌배슬이 인간들을 향해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가르딘도 검환을 날렸다. 마왕과 가르딘의 모든 전력이 한곳 에 집중되었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배슬과 검환에 실린 힘은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왕은 가르딘의 검환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결코 막아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인간의 능력으로 마왕의 권능을 막아낸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당연히 세상과 함께 한 줌의 먼지로 변할 것이라 확신했다.
푸아아앙!
마침내 어둠의 절대권능과 가르딘의 천룡무상진력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칠흑 같은 어둠의 총화가 대지를 어둡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푸른 청광을 빛내는 검환은 어둠의 기운을 푸르게 물들였다.
“아니?”
마왕은 어둠의 절대권능이 나아가지 못하고, 막히고 있다는 것 자체를 어이없어 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한 마왕은 다급해졌다. 이대로 밀리거나 양패구상을 당하게 되면 큰일이었다. 마왕은 지체하지 않고 남아 있는 모든 전력을 쏟아내었다.
“크아아아앙!”
가르딘과 마왕의 중간지점에서 대륙의 향방을 건 광대무변한 역량의 충격에 의해 대지가 포효성을 내질렀다. 사나운 포효성이 하늘과 대지를 찢어 발겼다.
가르딘도 멈추지 않고 천룡무상신공을 극한에 달하도록 끌어올려 마왕의 전력을 막아섰다. 마왕은 모든 존재를 파괴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마왕은 절대권능을 대지에 터트려, 세상 전체가 어둠과 절망 속에 잠기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폭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서는 입장이었다.
가르딘은 되도록 충격의 여파를 줄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로 인해 지닌 바 역량을 한계 이상으로 사용해야 했다. 공격을 하는 것보다 막아내고 중화시키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다.
“이대로 내가 당할 것같아!”
최후의 순간 가르딘의 뇌리에 라이나와 브리안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만나고, 결혼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낳았다. 라이나와 브리안은 가르딘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행복의 근원이자 원동력이었다. 라이나와 브리안에게 불행을 안겨 줄 수 없다. 그녀들을 위해서 가르딘은 반드시 이겨야 했다. 행복한 미래가 눈앞에 펼쳐진 마당에 마왕이라는 떨거지로 인해 망가진다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가르딘의 눈에서 의지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죽는다는 것 자체를 뇌리에서 지웠다. 흔들리지 않은 굳건한 의지와 신념이 곧추서고, 만물과 소통하여 우주의 극의에 이르게 되면 무한한 힘을 얻게 되어 마왕의 권능이 강력하다 해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무극의 최정점에 이르면 불가능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우우우우웅!
혼돈에서 파생되어 하나의 절대무변한 완성체가 되어 가는 가르딘의 천룡무상신공이었다. 극한의 미지의 영역에까지 발을 들인 가르딘이다. 가르딘에게서 한계를 초월하는 강력한 힘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극점에 달한 모든 능력을 쏟아낼 때까지 가르딘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려야 멈출 수가 없다. 정과 기, 신의 삼위일체가 이루어져 한계를 넘어 섰다.
검환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마왕 역시도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마왕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의 역량이 혈마왕과 투마왕의 전력과 비견되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단 말인가! 가르딘이 인간인지 의심이 되었다. 마왕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모든 전력을 사용하고도 인간에게 밀린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무한에 가까운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마왕이다. 마왕은 본신의 모든 역량을 넘어선 생명력까지 데빌배슬에 응집했다.
“인간 따위에게 지지 않는다!”
폭발하기 일보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었다. 터지느냐 아니면 이대로 중화되느냐의 중차대한 기로에 섰다. 마왕과 가르딘의 눈에 핏발이 서고 있었다. 모든 전력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기에 한순간의 방심이 화를 불러올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다. 어느 누가 힘을 먼저 소진하느냐에 따라서 승부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하찮은 인간... 이 감... 히!”
“가장의 무서움을 보... 여... 주마!”
인간의 최정점에 도달한 가르딘과, 마계의 최정점에 선 마왕이 마지막까지 모든 힘을 쏟아 붓자 데빌배슬과 검환이 용트림을 하며 천지개벽을 일으켰다. 지축을 마구 흔드는 기운의 여파로 인해 대지가 요동을 쳤다.
쿠구구쿵!
어둠과 청광이 허공을 반으로 가르며 영역을 넓혔다. 그 힘을 여파가 퍼지기 직전에 가르딘은 마지막 한계선을 넘어 무극의 최종극한에 다다른 힘을 발휘했다. 쥐어짜듯이 발악을 한 가르딘이다. 아내와 딸을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아내었다. 가족이 있는 가장은 끈질기고, 무한한 생명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투아아아아아앙!
마왕과 가르딘의 전력이 한순간에 중화되어 버렸다. 산천 초목을 흔들리게 만들었던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지며 잠잠해져 버렸다. 마왕의 절대사념이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인간을 전멸시키거나 영웅을 처치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박살났다. 가르딘이 전력을 쏟아 부은 결과 데빌배슬이 허공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모든 이들을 살린 가르딘은 정작 힘을 모두 소진해서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충격의 여파로 인해 허공에서 튕겨 나듯이 마왕의 반대쪽으로 끝 모르게 날아갔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가르딘의 신형을 잡으려고 할 때, 가르딘이 한마디 하자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난 할 만큼 했다. 이제는 네놈들이 알아서 해라!”
신성은 가르딘을 부축하는 대신에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서 돌아섰다. 지금은 마왕을 상대하는 것이 먼저였다. 신성은 지체하지 않고 마왕을 향해 검을 뻗었다. 마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모든 마력과 어둠의 기운, 생명력까지 전부 쏟아 부었다. 그런데도 인간의 능력을 넘어 서지 못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어... 떻게 이... 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현실이 마왕을 기다렸다. 마왕에게도 현실은 가혹했다. 푸우욱!크윽!
마왕의 근원이 신성의 검에 의해 뚫렸다. 힘을 모두 소진 한 상태라 신성의 공격을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상태였다. 뜻하지 않은 방해를 받지 않았다면 상황은 반대가 됐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마왕은 영웅의 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기 일보직전이 되었다. 영웅이 시련을 이겨내며, 마왕을 이긴 전형적인 스토리로 진행이 되어 버렸다.마왕은 눈을 부릅떴다. 생명력이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서 빛의 성스러운 기운이 어둠의 근간까지 손상을 입혔다. 마왕의 목소리가 떨렸다.
“결... 국 이... 리 되는... 구나!”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마왕은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자 허탈한 웃음을 냈다.
“후후후, 무... 엇이 빛... 이란 말이냐! 어... 둠이 존재 하... 기에 빛을 아는 것... 뿐이다. 빛도 결국에는 어둠의 반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 도 아니다!”
“그럴지도.”
스필언과 미토스는 마왕의 말은 인정했다. 어둠이 없다면 빛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음을 구분하는 것이다. 빛과 어둠 모두 세상을 감싸는 만물의 근원일 뿐이 있다. 마왕이 갑자기 뜻 모를 말을 했다.
“우리... 도 결국... 그... 분... 뜻의... 일... 부였구... 나!”
“무슨 말이냐?,
마왕은 갑작스럽게 이 모든 것이 무엇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깨닫게 되었다. 마왕은 깨달음과 동시에 환희를 느꼈다. 죽음이 다가오지만 어둠은 아직 끝나자 않았다고 확신했다.
“죽... 음... 이 다가... 오는 구나! 하지만... 혼자 죽지... 않는다!”
“이런!”
스필언과 미토스가 다급한 듯한 소리를 내었다. 마왕이 마지막으로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깨달은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마왕의 권능을 스스로 폭발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모든 존재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마왕은 자폭을 선택했다. 가르딘과의 대결에서 소모된 마력보다 현저한 차이를 보일지 몰라도 위험한 것은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스필언과 미토스의 합체 시간이 바닥이 나고 말았다. 폭발이 벌어지기 직전에 샤이닝나이트와 세인트나이트가 분리가 되어 버렸다. 상황이 무척이나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피해도 문제가 되었다. 이 근방의 인간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막는다!”
신성은 피하지 않았다. 대륙을 안녕을 위해 모든 힘 을 쏟아 부은 가르딘을 위해서라도 꼭 막아내야 했다. 신성은 항마멸사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전력을 다해 마왕의 폭발을 막아내는 데 주력했다.
“마를 멸한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신성력을 보내고 있던 쉴라도 마왕의 마지막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남아 있는 모든 신성력을 쏟아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성력은 무한하지만 신의 권능을 받는 존재는 인간이다. 쉴라의 몸이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는 뜻이다.
‘라이니언이시어! 도와주세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쉴라는 목숨을 도외시하며 신성력을 영웅에게 전달했다. 그녀는 힘이 다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을 감싸 안고 희망을 주는 존재가 성녀다. 쉴라는 성녀로의 임무를 잊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투콰꽈과과광!
우우우우우응! 휘이이이이이잉 !
마왕이 폭발하자 거센 파동과 돌풍이 불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샤이닝나이트와 세인트나이트의 전 역량을 쏟아 부어 폭발의 위력을 최소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힘의 여파를 막아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기에 신성은 한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울컥!
폭발의 여파는 굉장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폭발을 막아내느라 기혈이 뒤틀리는 충격을 받았다. 온몸이 잘게 부서지는 고통이 휘몰아쳤다. 악무는 이 사이로 핏물이 흘러 나왔다.
“아앗!”
신성력을 보내고 있던 쉴라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작용에 의한 반발력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쉴라의 몸이 연방 휘청거리고 있었다.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안타깝게 보았지만 막상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나서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그저 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슈유융!
쿠쿠쿵!
전장의 밖으로 튕겨 나간 물체가 무언가에 부딪쳤다. 피닉스의 고귀한 0이 새겨진 마차는 화려함과 웅장함, 그 자체였다. 마차는 견고한 재질과 더불어 방어마법진이 그려져 있어서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또한 마차의 주변으로 기사들과 병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대비가 충분히 가능했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체는 예상 밖이었다. 호위기사들이 떨어진 물체를 확인해 보았다. 물체는 마차에 부딪치고 난 후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을 구른 존재는 사람이었다. 귀족의 갑옷을 입은 이가 머리를 만지면서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신형으로 보아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가 일어서서 기사들을 보았다. 기사들은 다들 벙찐 표정이었다.
“가... 르딘 공작님!”
마차에 부딪친 생뚱맞은 존재는 마왕의 무쌍한 공격을 무마시켜 대륙을 구해낸 가르딘이었다. 충돌의 여파를 받은 가르딘은 전장의 밖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가르딘은 마왕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었다. 그로 인해 기력이 많이 상해 있는 상태였다.
“물.”
“예?”
“물 달라고!”
“알... 겠습니다.”
가르딘은 힘을 썼더니 목이 탔다. 미칠 듯한 갈증으로 인해 물을 마셔야 했다. 기사들이 준 물병을 받아 마신 가르딘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평상시 같으면 주의를 기울이고, 초심하겠지만 현재는 미칠 듯한 피곤이 몰려오고 그럴 여지를 두기 힘들었다. 솔직히 일어설 힘도 없는 상태였다.
“공작... 님이 어떻게 여기를?”
“여기 오면 안 되냐?”
“그런 게 아니라 한창 전투 중이실 텐데.”
“알면 다치니까, 묻지 마.”
가르딘은 쉬고 싶었다. 근처의 아무 곳에나 기대서자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한계 이상의 힘을 시용하고 난 후에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 대단할 따름이었다. 가르딘은 기사들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주변에 기댈 수 있는 그루터기를 찾아가서 앉았다. 바닥에 앉자마자 가르딘은 잠이 쏟 졌다. 눈꺼풀이 사르륵 감기더니 그대로 잠에 빠졌다.
그때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차 안에 있던 여인이 나왔다. 갑작스러운 충격과 소란스러움에 문을 열고나온 여인은 눈부신 미모를 지녔다.
“공주님! 위험해요!”
마차 안에서 엘리언이 아이시런 공주를 만류했지만 이미 문을 열고 나간 후였다. 엘리언은 어쩔 수 없이 공주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아이시런 공주의 시야에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엉뚱한 장소에서 가르딘을 본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저 능글맞은 아저씨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러게요.”
그루터기에 기대서 곤히 잠을 자다니! 황당했다. 전장에서 한참 검질을 해도 부족한 시급한 상황에서 느긋하게 잠을 자는 모습이 아이시런 공주의 고운 아미를 주름지게 만들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기사들을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게.”
말을 하기도 난감한 호위기사였다. 히늘에서 날아왔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공주가 묻는데 시간을 질질 끌 수도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었다.
“하늘에서 날아와서 마차에 부딪쳤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물을 드시고 잠들었습니다.”
“그래요.”
황당한 설명에 아이시런 공주는 수긍했다. 가르딘과 있으면 황당한 일은 다반사였다. 그 정도 가지고는 신기한 축에 속하지도 않는다.
아이시런 공주는 마왕과의 전투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못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후방에서 마왕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대륙의 운명이 결정되는 중요한 결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보든 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그녀는 전장에서 가까운 곳까지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접근하지 못했다. 미안함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인간의 이중성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연겼다. 여기사망설이고 있느냐, 아니면 당당하게 나아가 떳떳하게 행동하느냐를 결정하려고 할 때 가르딘이 나타났다.
“공작을 마차에 태워요.”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공주의 행동을 만류하지 못했다. 공주의 표정이 단호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그루터기에 자고 있는 가르딘을 둘러업고, 마차에 실었다. 평소의 가르딘이라면 즉각 반응을 할 수 있었겠지만 힘을 모두 소진한 상태라 감각이 제로였다. 반응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있다고 해도 반격할 기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차 안에 타고나서도 가르딘은 계속 수면을 취했다. 아이시런 공주는 가르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잠을 자고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가르딘의 모습을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가르딘이 비록 능글맞으면서 빈틈을 보이기는 했지만 기사로서의 빈틈은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보니 가르딘이 이처럼 허술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처음이었다. 완전히 무방비의 상태였다. 이색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이 괜히 귀엽게 보이기까지 했다. 참 시답지 않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공주님 어쩌실 생각이세요?”
“가봐야지.”
“정말이요?”
“두렵니?”
“아... 니에요!”
“두려우면 여기에 머물러도 돼.”
“공주님을 두고 제가 어디 가겠어요!”
“고마워.”
오랜 시간 함께한 엘리언이다. 그녀가 비록 시녀이기는 하지만 아이시런 공주에게는 가족과 같았다.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마왕의 마지막 발악이 마침내 끝났다. 영웅과 성녀가 모든 힘을 쏟아 막아낸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영웅이 탄생하여 어둠을 몰아내었다. 모든 이들이 영웅의 승리에 용기를 얻었다. 마왕이 죽자 마족들도 힘을 잃고 사라져 버렸다. 바탕이 사라진 모래성처럼 마족들을 쓸려 나갔다. 마왕이 죽음과 동시에 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도 끝이 났다.
“영웅께서 마왕을 물리쳤다!”
“대륙이 평화를 찾았다!”
“와아아아아아아!”
“만세! 만세!”
모든 이들이 하늘이 떠나갈 것처럼 소리쳤다. 제국, 왕국, 공국이라는 정해진 틀을 깨고, 한마음 한뜻으로 오늘의 승리를 기뻐했다.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한 영웅을 찬사했다.
쿠우웅!
샤이닝나이트와 세인트나이트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신기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할 것이다. 신기는 빛을 내었다. 그리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신기가 사라지자 영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웅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는지 의식조차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영웅을 향해 다가왔다. 특히 발리스타 대공과 파스트론 대공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같았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전신의 혈맥이 터져 있었다. 무리하게 기운을 사용한 대가였다.
“아들아!”
두 대공이 신성을 품에 않고 오열했다. 상처가 너무 심해 다시 일어선다는 보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두 대공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갔다. 대^을 위해 희생한 아들이었다. 자랑스러웠다. 또한 안타까웠다.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 아팠다. 지금 이대로 아들이 죽는다면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았다.
모든 이들이 두 대공의 슬픔을 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성기사단이 길을 열었다. 창백하고 파리안 안색의 성녀, 쉴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질적으로 그녀의 활약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기 사와 신관들은 알고 있었다. 영웅이 마왕의 자폭을 막아낸 것은 쉴라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일어서기도 힘든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을 위해서 걸었다.
“잠시만 비켜주세요.”
발리스타 대공과 파스트론 대공은 성녀의 뜻에 따라 비켜 주었다. 쓰러져 있는 스필언과 미토스의 머리에 쉴라는 손을 대었다. 그녀의 손을 타고 성스러운 기운이 스필언과 미토스의 몸으로 퍼져나갔다. 절로 고개를 숙여지게 만드는 고귀한 빛의 기운이었다. 빛은 스필언과 미토스의 몸에 난 상처들을 서서히 아물게 만들었다. 빛이 신성의 몸에 모두 스며들며 사라졌다.
비틀!
“성녀님!”
“저는 괜찮아요.”
쉴라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기력을 많이 사용했다. 서있기도 힘든 쉴라를 카르마 단장이 급히 부축을 하지 않았다면 쓰러졌을 것이다.
“마왕의 마지막 악념이 강해 지금 당장은 회복하지 못하겠지만 스필언 경과 미토스 경은 강한 분이시니 반드시 일어날 거라 믿어요.”
“고맙습니다! 성녀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파스트론 대공과 발리스타 대공은 쉴라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두 대공은 믿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스필언과 미토스는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날 것이라 확신했다.
쉴라는 힘겹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르딘 공작님은 어디 있나요?"
“아!”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던 가르딘 공작을 상기하게 된 이들이었다. 영웅이 마왕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가르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르딘의 놀라운 신위와 마왕을 대적한 용기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정작 마왕을 막아낸 후 튕겨져 나간 가르딘을 찾기는 어려웠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가르딘의 존재감보다는 영웅이 보여준 빛이 너무 강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한다. 결과적으로 마왕을 무찌른 것은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모든 관심이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발키리영지군의 진영이 분주한 상태다. 가르딘 공작의 돌연한 실종이 기사단과 창기병, 병사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 투르가 병사들을 다독이고 있지만 그들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왕과의 일전에서 뻗어나간 어둠과 청광으로 인해 시야가 가렸다. 그로 인해 가르딘의 행방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설마 죽진 않았겠지?”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
“그놈이 쉽게 죽을 놈이야!”
“하긴.”
마왕이 날린 데빌배슬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동기들은 소름이 돋았다. 당시에 느껴진 기운은 이 세상을 모두 부숴버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반면에 가르딘의 진실된 실체의 편린을 조금이나마 본 필리언, 갈라, 유타는 절대로 죽지 않았을 것이라 여겼다.
라이젠을 비롯한 드래곤들도 발키리영지군 사이에 있었다. 드래곤들도 마왕을 무찌를 수 있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존재가 가르딘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드래곤이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됐나요?”
“죽지는 않았을 거다!”
청광과 어둠이 중화되었을 당시에 생명의 반응이 느껴졌었다. 더군다나 가르딘이라는 인간이 그렇게 쉽게 단명할 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어딘가에서 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확신했다.
마왕을 무찌른 감격적인 순간이다. 모든 이들이 환호성을 내지를 때, 사두마차가 전장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따그닥! 따그닥!
마차의 외부는 카이로만 제국 황실의 문양을 상징하는 피닉스가 양각되어 있었다. 호위기사들이 주변을 에워싸며 마차는 러쉬 황제를 향해 다가갔다. 제국황실의 마차임을 안 병사들이 길을 터 주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창문을 열어 주변을 보았다. 모든 이들이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마왕을 무찌르고 승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시런 공주는 마차를 세우고 내렸다.
신이 내린 미모를 지닌 아이시런 공주가 혈전을 벌인 참혹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절망을 경험한 병사들에게 희망의 여신이 등장을 한 것 같았다. 아이시런 공주는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어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별것 아닌 간단한 표현에 불과한 손짓에 기사와 병사 모두 감격한 표정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등장했다는 생각은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버렸다. 아이시런 공주의 아름다움은 사내들의 이성 자체를 마비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러쉬 황제를 향해 걸어갔다. 대륙의 제황답게 러쉬 황제는 최후까지 병사들과 함께 전장에 남아 있었다. 카이로만 제국의 황제다운 배포였다.
러쉬 황제는 아이시런 공주가 전장에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전황이 어찌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나타났다는 것은 아이시런 공주가 전장의 근처에 있었다는 뜻이 되었다. 그녀 역시도 제국의 황녀다운 기백을 지니고 있었다. 위험을 회피하는 대신에 정면으로 당당히 맞서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카이로만 제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승리를 감축 드려요!”
“나만의 승리가 아니다. 모두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승리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의기 높은 여러분들이 있기에 마왕을 물리쳤다고 생각해요.”
아이시런 공주는 모두의 노력으로 이룩한 고귀한 승전에 고개 숙여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녀는 전에 없이 경건하고, 기품 있는 모습을 보였다. 비록 대륙을 대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닐지라도 그녀가 지닌 상징성은 컸다. 제국의 황녀가 스스로를 낮추는 행위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아이시런 공주의 진심이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었다.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을 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결정에는 반드시 책임아 따른다. 만일 마왕이 살아 있고, 전쟁의 승패를 장담하지 못했다면 아이시런 공주의 선택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 됐을 것이다. 미래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원리가 작용한다. 러쉬 황제조차 세상의 법칙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위험한 결정이라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쉬 황제는 오라비를 위해 전장에 나와 준 그녀의 선택이 고마웠다.
“두렵지 않았느냐?”
“두려웠어요.”
아이시런 공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마왕과의 결전이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마왕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은 인간의 공통적인 특성이었다. 그러나 아이시런 공주는 두려움으로 인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두렵지만, 두려움에 빠져 현실을 피해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저는 그게 더 두려웠어요.”
“장하구나! 네 뜻을 깊이 새겨두마.”
솔직하면서도 거침없이 의사를 표현했다. 왜 카이로만 제국이 대륙의 중심에 서게 됐는지 대륙의 모든 왕국과 공국의 귀족과, 기사, 병사들은 깨달았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제국의 황족만이 지닌 특유의 기질과 기품, 배포는 대륙의 지배자가 되기에 충분했다.
아이시런 공주는 형식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했다. 그녀는 직접 전장으로 들어가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했다. 대전의 승리는 이들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헛구역질이 나는 전장에서 아이시런 공주의 의연한 모습이 빛을 발했다.
러쉬 황제도 전장의 상황을 정리하고, 전후처리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제국의 기사단과 병사들을 동원하여 죽은 병사들을 한곳에 모으고, 제국과, 왕국, 공국의 피해현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반나절이 지나갔다.
전장의 상황이 어느 정도는 수습이 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끄응!
곤히 자고 있던 이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딱딱한 바닥이 아닌 아녹하고 푹신한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 기대고 있던 그루터기는 누크로 짜서 만든 베개가 대신하고 있었다.
으음!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전신의 뼈마디와 혈맥이 고통을 호소해왔다. 한계를 넘어서는 무리한 진기의 운용으로 인한 과부화를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닌 신공은 지친 몸의 대부분을 스스로 치료했다. 사선을 넘어선 그는 과거와는 완연히 다른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자연지경을 넘어서 우주지경을 바라보게 된 그는 몸을 다스리고 내면을 관조했다. 간단하게 현재의 몸 상태를 파악한 그는 닫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주변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시간이 꽤나 지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밤하늘에 보이는 달과 별이 그 증거였다.
“가르딘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물.”
“아! 여기 있습니다.”
기사는 그럴 줄 알았는지 물통을 가르딘에게 주었다. 가르딘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서는 전장의 상황을 기사에게 물었다. 전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는 있어야 했다. 기사는 알고 있는 사실을 가르딘에게 전했다. 가르딘은 묵묵히 설명을 들었다.
“마왕이 마지막 발악을 했었나.’
마왕의 자폭을 스필언과 미토스가 막아서다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에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풀었다.
‘녀석들이라면 그랬겠지.’
스필언과 미토스는 대륙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녀석들이었다. 가히 영웅의 표상이라고 할만 했다. 올곧기만 녀석들의 행동이 거슬리면서도 안타까웠다. 세상이 도대체 무엇을 해주었기에 목숨을 도외시하는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겉으로는 보기 좋을 수 있다. 그럼 희생한 이들의 생은 누가 책임지는가! 죽은 이후 숭상하고 경배를 하면 끝인가! 가르딘은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단금질했다. 기족과 타인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무게의 중심점이 다르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과연 무엇을 중시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가르딘은 현학적이면서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 보았지만 딱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훗!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 가르딘은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들과 발키리영지군의 상태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다지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보니 이상한 것이 있었다.
“내가 마차에 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나?"
“공주님이 편히 자게 놔두시라며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반나절 이상을 마차 안에 있었는데 아무도 찾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했던 가르딘이다. 사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절대 아니었다. 반나절의 휴식이 가르딘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원동력이 되었었다, 여러 사람이 훼방을 놓았더라면 정신과 신체에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가르딘은 공주의 뜻하지 않은 배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철들었나?’
확실히 꼬집어 말하기 힘들었다. 아이시런 공주의 과잉친절과 배려에 절로 부담이 갔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른 척 넘어가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아이시런 공주는 조금 달랐다. 한편으로 가르딘은 무척이나 놀랐다. 공주의 마음을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의 마음에 말이다. 그러나 곧 마음에서 지웠다. 그에게는 아내와 딸이 있다. 찜찜했던 마음을 털어 버렸다.
‘이제 돌아가야지.’
참혹하고, 치열했던 전쟁이 끝났다. 가르딘은 가족의 품에서 쉬고 싶었다. 남겨진 일 따위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