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90/93)

   @@[제2장 피에 젖는 대륙@@]

  D-day.

  찬란한 빛을 발산하던 태양이 칠흑 같은 어둠에 서서히 물들어갔다. 마침내 태양의 광채가 암광으로 변했다.

  어둠이 지상을 내리비추자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대지가 짙은 어둠에 잠겼다. 음습하고 사이한 기운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갔다. 탁 트인 대지 사이로 돌풍이 소용돌이치듯이 불어 닥쳤다. 바람소리마저 마귀의 울부짖음처럼 들려왔다. 대지가 완벽히 어두워져서 하늘과 대지 전체가 암흑으로 바뀌었을 때였다.

  우우우우웅!

  지하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악한 기운이 위로 올라오며 대지를 뒤흔들었다. 대지를 흔드는 지진이 발생하며 사방으로 흙과 바위가 솟구치며 요동쳤다. 그와 동시에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어둠 속에 또 다른 어둠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아아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파공성이 들려왔다. 가까이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서져 지옥으로 떨어질 것 같은 가공하고도 무서운 기운이었다.

  쩌저저저저적!

  대지가 좌우로 갈라졌다. 갈라진 대지의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길었다. 대지를 완벽하게 반으로 가른 것 같은 형상이었다.

  어둠이 정지하고, 바람이 멈췄다. 귀를 찢는 파공성마저 잠잠해졌다. 갈라진 대지도 흔들림이 멈췄다. 좌우로 벌려진 대지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순수한 어둠뿐이 존재하지 않았다.

  흔들! 흔들!

  어둠이 물결을 일으키며 일렁거렸다. 원을 그리며 파장을 일으킨 검은 물결이 위로 솟아오르며 서서히 모습을 갖추었다. 완벽한 어둠의 물결이 사람의 모양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검은 물이 아래로 사라지자 두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 검붉은 눈동자, 미공자 풍의 이목구비를 가진 청년이었다. 여인이 반할만한 얼굴을 가진 두 청년이지만 그 어떤 여인도 범접할 수 없는 무서운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두 청년의 몸에서 풍겨지는 기운은 어둠 그 자체였다. 짙은 어둠은 밝은 빛과는 대조적이었다. 모든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어 버릴 것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검붉은 눈동자가 하늘과 대지를 번갈아 보았다. 두 청년은 대지의 흐름과 기운을 느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 숙원이 드디어 풀렸군.” 

  “아직은 아니지.” 

  “그렇군.”

  “우리의 목적을 잊지 말아야지.” 

  두 청년이 대지를 훑으며 냄새를 맡았다.

  “피냄새가 가시지 않았군.”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탓해야지.” 

  대지는 수없이 많은 피를 머금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면 사라졌을 피냄새지만 아직 그만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미 바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원한으로 둘러싸인 원혼이 다시 일어날 때가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피의 전장을 휩쓸었다.

  “어둠의 지배자이자 전투의 제왕, 투마왕 베르키스가 명한다! 원혼을 받아들여 마계의 입구를 열어라!” 

  “마계의 지배자이자 피의 절대자, 혈마왕 루이스탄이 명한다! 마계의 전사들은 문을 열고 나오너라!”

  두 청년은 마계의 제왕이자 악의 화신인 마왕들이었다. 마계를 지배하는 5명의 마왕 중에 2명이며, 대마왕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혈마왕과 투마왕은 잔인성에서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투마왕과 혈마왕이 지상계에 강림하고 말았다.

  베르키스와 루이스탄은 지체하지 않고 마왕의 권능을 사용하였다. 어둠의 마력이 대지를 덮자 마계의 문에 가로막혀 있던 마족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왕의 권능으로 지상계에 소환한 것이다. 마왕은 자신의 권능에 종속된 마족을 임의적으로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혈마왕과 투마왕에 권능에 권속된 마족들이 지하에서 솟아올랐다. 기기묘묘한 형상을 띤 마족들이다. 저마다 특이한 형상을 이룬 마족들이지만 뿜어내는 기질 자체가 인간의 능력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왕의 부름에 따라 지상계에 소환된 마족들의 수가 족히 10만이 넘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마족의 지상계 소환이었다. 절망과 암흑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인류역사상 가장 혹독한 시절이다. 

  “크크크크크!”

  “크르르릉!”

  지옥에서 올라온 짐승들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무조건적인 살의가 대지와 하늘을 찢어발겼다. 오랜 시간동안 암흑 속에 살아온 마족들은 자연스럽게 살의가 배어 있다. 죽고 죽이는 것이 마족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피 튀기는 전율 속에 희열을 느끼는 마족들이 인간들의 피냄새에 입맛을 다셨다.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혈마왕과 투마왕이 가리켰다.

  “어둠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어라!”

  “살육의 축제를 즐겨라!” 

  “크아아아아앙!”

  광포한 야성이 폭발했다. 마족들은 마기를 억누르지 않았다. 충만한 살의를 가지고 인간의 냄새를 따라 돌진해 나갔다. 대지의 근처에 살아 있는 생명은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상급마족의 지휘하에 마족들이 피냄새를 맡으며 전진했다.

  퍼어어엉!

  마계의 불꽃이 작렬했다. 불꽃이 터지면서 인육이 사방으로 분사되었다. 막아서는 병사들은 마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병기를 들어 마족의 공격을 막아선 병사는 병기와 함께 뭉개져 버렸다. 마족은 인간의 머리와 심장을 잘근 잘근 씹으며, 살가죽을 벗겨내었다. 

  “크아아아악!”

  “마... 족이닷!” 

  비명이 마을을 메아리쳤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10만에 달하는 마족이 쳐들어와 순식간에 10개의 마을을 쓰러 버렸다. 핏물로 잠기는 시간은 10분도 되지 못했다. 5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마을을 지키는 경비병을 제외한 정예병은 모두 왕궁으로 차출이 된 상태라 무방비나 마찬가지였다.

  “살... 려! 커어억!”

  도망치는 노인의 가슴이 뻥 뚫렸다. 뚫려진 가슴으로 날카로운 손이 튀어나와 심장을 터뜨렸다. 핏물이 마족의 얼굴에 튀었다. 핏물을 혀로 할은 마족은 만족하지 않았다. 더 많은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모조리 다 죽이는 것이 소명과 같았다.

  마족들은 혈풍이 되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남겨진 것은 잔인하게 찢겨져 버린 육편과 핏물뿐이었다. 마족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더욱더 많은 피를 갈구하며 진격해 나갔다.

  왕궁의 외곽 막사 안에 앉아 있던 하이카인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족의 침입으로 인해 코카 왕국이 박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데비오왕성을 중심으로 왕국의 병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왕궁에 있는 병사들을 파견한다고 해도 늦어 버렸다.

  “어찌 이런 일이!”

  하이카인 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최악의 상황에 부딪치고 말았다. 신성제국에서 마왕의 강림에 대한 연락을 보내왔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장소는 한 달이 넘어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코카 왕국은 최대한 병력을 보존하면서 왕국을 지키려고 했다. 대륙의 지탄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우선은 국력을 보존해야만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재수 없게도 마왕이 코카 왕국을 가장 먼저 제물로 삼고 있었다.

  다급하기는 휼턴 재상과 이지마하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이 코카 왕국을 버리고 말았다. 이대로는 막아낼 수 있다고 장담을 하지 못했다. 대륙전쟁에서 패하고, 이제는 마왕까지 들이닥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한번 구르기 시작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제국과 왕국에 연락을 해!”

  “이미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최대한 병력을 보존해야 하니 지금 당장 후퇴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코카 왕국의 모든 지역을 파괴하며 파죽지세로 들이닥치고 있는 마족들이었다. 시간과 거리싸움에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이카인 왕은 최대한 버티면서 제국과 왕국의 협조를 받기로 결정했다. 이대로 정면대결을 했다가는 마족들에게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다. 만약 이긴다고 해도 코카왕국은 대륙에서 사라질 것이다. 최악의 상황만은 면해야 했다. 하이카인 왕은왕국의 보존을 위해서 왕성마저 버리기로 한 것이다. 왕의 명령을 받은 이지마하 공작이 밖으로 나가 병력을 이동시키려고 했다. 그가 나가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벼락같은 일격에 쏟아져 내렸다.

  쿠과과과과광!

  강력한 마력이 터지면서 반경 30미터 안에 있던 병사들이 한순간에 산화되어 버렸다. 단순한 소닉붐(압축공기)에 불과 하지만 그 힘의 여파는 굉장했다. 일순간에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소닉붐으로 인해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다. 삽시간에 4천에 달하는 병력이 생을 마감했다.

  “피... 해!’’

  푸아아아아앙!

  “크아아아아악!”

  마력의 힘이 8서클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연속적으로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아설 수 없는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더군다나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압축된 공기는 무서운 살인병기였다. 바로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허무한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광포한 마력공격에 하이카인 왕과 휼턴 재상이 막사 밖으로 나왔다. 하이카인 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마력탄이 터진 것처럼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폭발이 일어나면서 튀어나온 뼈와 살조각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펼쳐졌다. 전장은 아비규환의 지옥과 같았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전장은 이리저리 몸을 피하는 병사들로 인해 어지러웠다.

  하이카인 왕은 마음을 다스리고 소리쳤다.

  “어서 막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어디서 공격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법사들은 어서 적을 찾아!”

  코카 왕궁의 궁정마법시를 필두로 마법사들이 마력을 쏘아대는 존재를 찾기 위해서 마나디텍트(탐지)를 펼쳤다. 탐지 마법을 그물망처럼 형성하여 적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모든 마나를 집중했다.

  “크윽!”

  탐지마법의 기운이 하늘로 향할 때 항거할 수 없는 어둠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그 힘의 여파가 마법사들의 마법서클에 충격을 주자, 마나역류를 당했다. 내부에 충격을 받은 마법사들은 안정을 찾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허공의 끝에 떠 있는 존재가 서서히 내려왔다.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는 사람의 형체를 갖추었다. 검은 흑발에 검붉은 눈동자를 가진 미공자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불길한 기운은 측량할 수 없는 두려움을 선사해 주었다.

 하이카인 왕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적은 하나지 만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이다.

  “어서 놈을 죽여랏!”

  이대로 놈의 기운에 잠식되어 버리면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될 것이다. 처음부터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놈을 죽여야 한다고 본능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지마하 공작은 검을 잡은 손에 땀이 배어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놈을 보는 순간 번개에 맞은 것 같은 소름이 돋았다. 몸을 비롯한 정신까지 모두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생소하기까지 한 두려움이었다. 잘못하면 심령에까지 충격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빠드득!

  이지마하 공작은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이를 악물었다. 왕국제일의 마스터 급 기사가 적을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라이언기사단은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예!”

  그러나 적이 보여준 역량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적의 능력이 강하다는 것은 좀 전에 보인 마법공격으로 충분히 깨달았다. 8서클 이상의 마법을 연속적으로 날리고도 숨조차 거칠어지지 않는 존재를 만만히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차자자착!

  순식간에 소수의 강적을 상대하기 위한 전투대형을 갖춘 라이언기사단이었다. 라이언기사단의 능력은 과거에 비해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강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카이로만 제국과의 결전에서 패한 이후 이지마하 공작은 절치부심했다. 뼈를 깎는 듯한 수련과 훈련을 통해 라이언기사단을 단금질했다. 과거의 영광을 찾기 위한 처절한 노력 끝에 전성기 시절 라이언기사단의 모습을 회복한 상태였다.

  슈우우우웅!

  쿠과과꽝!

  성을 부수기 위한 공성무기가 검은 머리의 청년을 향해 날아왔다. 무지막지한 화력의 집중이었다. 집중포화된 공격을 받는다면 대마법사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런데도 청년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방으로 흘날리는 불꽃과 파편이 화려한 광경을 연출해 내었다.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폭발음이 들렸다. 청년의 존재 자체가 귀족과 병사들의 심령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쉬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인해 지속적인 공격이 이루어졌다.

  10분가량 포화가 집중되자 대지의 지형마저 변형을 일으켰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깔려 시야를 가렸다. 반경 30미터 안이 먼지로 가려져서 무엇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확인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저벅! 저벅!

   흙먼지로 가려진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먼지를 뚫고 나오는 이질적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욱한 먼지는 그의 옷깃조차 어지럽히지 못했다. 말끔한 차림의 청년은 포격을 받기 전의 모습과 전혀 변하지 않았다. 타격조차 받지 않은 모습에 병사들은 기겁하고 말았다. 인간이라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대규모 집중포화에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청년을 보고 두렵지 않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었다.

  “저... 럴... 수가!” 、

  “인... 간... 이 아니야!’’

  병사들 중 누군가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이 퍼지기가 무섭게 마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병사들이다.

  “마... 족!”

  “마... 족이닷!"

  인간은 원천적으로 마족을 두려워한다. 마족이 풍기는 기운과 전설은 인간에게는 두려움의 존재였다.

  하이카인 왕도 병사들이 두려워하는 것만큼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상대가 마족이라고 해도 나타난 수는 고작 한 마리에 불과했다. 어떤 마법을 썼는지 모르지 만 멀쩡한 것과는 다르게 타격을 입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적은 고작 하나다! 대코카 왕국의 저력을 보여주어라!”

  하이카인 왕의 지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병사들의 불안감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귀족들과 기사들까지도 두려움이 가시는 것처럼 보였다. 마족이 비록 두려운 존재이기는 하나, 한 마리에 겁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일이었다.

  “마법사는 후방지원을 하고, 기사단은 앞으로 나선다. 병사들은 주변을 포위하며 놈을 막아라!”

  강적을 상대로 차륜전을 사용하려는 듯한 포위전술이었 다. 상대가 진정 마족이라면 정면승부는 옳지 못했다. 놈의 힘을 빼놓고 서서히 말려 죽여야 한다.

  씨익!

  주변이 완벽히 포위되어 있는 진형 속에 갇힌 존재는 입가 에 미소를 지었다. 시뻘건 입술과 입술 사이로 비치는 새하얀 치아 속에 보이는 송곳니가 섬뜩함을 안겨주었다. 청년의 눈에는 벌레들이 발악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인간들의 처절한 발악을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부질없는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게 되면 어떨지 궁금하군.”

  이지마하 공작과 5백의 라이언기사단이 예리한 기세를 유지하며 서서히 청년의 주위를 조여왔다. 치고 나오는 순간 퍼지면서 좌우에서 다시 조일 수 있는 압축형 전투대형이었다. 힘을 빼고, 사각지역에서 공격을 가해 적을 죽이는 전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고립된 존재가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 먼저 공격을 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다. 보통의 존재라면 빠져나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청년은 일반적인 관념이 통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한동안 서로를 보고 있는 시간이 지속되었다. 이지마하 공작은 손바닥을 축축이 적셔 오는 땀과 등 뒤로 솟아오르는 땀으로 인해 전신이 흠뻑 적고 있었다. 이지마하 공작은 주변을 잠시 돌아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사들과 병사들의 눈에 초조함이 형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다수가 1명에게 겁을 먹고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에 잠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침내 이지마하 공작이 공격을 명령했다.

  “4진영 다이아몬드 형태를 취해 공격한다!”

  8명이 1개조를 이루어서 날카로운 창의 형태를 띠도록 형성했다. 4개의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을 가하는 형태다.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기사단은 처음부터 오러를 개방했다.

  슈우우우웅!

  예기로 번들거리는 오러가 청년을 향해 빠르게 찔러 들어갔다. 다이아몬드 진형은 제일 처음에 공격을 한 기사가 뒤 로 빠지면서 주변의 기사들이 좌우로 퍼져 공격이 가능한 전술이다. 8명이 4개의 조를 이루었으니 4번의 강력한 일격이 있은 후 28명이 일시간에 집중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푸우욱! 푸우욱! 푸우욱! 푸우욱!

  살이 뚫어지는 느낌이 검에 전해져 왔다.

  하지만 검을 찌른 기사들은 믿을 수 없는 기색이 완연했다. 동료의 검에 가슴이 뚫린 것이다. 정작 죽어야 하는 존재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제 움직였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기사들은 허상을 찌른 것에 불과했다.

  주르르르록!

  핏물이 검을 타고 바닥을 적실 때, 기사단 사이로 청년이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방에서 청년의 모습이 속속 생겨났다. 삽시간에 수십 명으로 늘어난 청년이다.

  -다크일루전.

  기사들과 병사들이 밟고 있는 대지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수가 늘어난 청년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볍게 휘두르는 채찍 같은 손에 의해 기사들이건 병사들이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촤아아아악!

  “커억! 크아아앗!”

  단말마조차 내자르지 못한 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청년의 일격에 기사는 혼이 나가버렸다. 청년이 펼친 다크일루전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다. 환영이 돼, 실체의 공격이 가능한 환영이었다. 그렇기에 공격하는 존재들은 환영을 찔러봐야 소용없었다.

  반면에 환영의 공격은 고스란히 받고 죽어야 했다. 마치 허공에 떠 있는 유령을 찌르는 것 같은 상황이다. 삽시간에 기사들과 병사들의 뇌리가 두려움에 잠식되어갔다.

  “안... 돼!”

  찌지지직! 주르르륵!

  라이언기사단의 새로운 부단장 루브론은 떨어져 나간 오른팔을 보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청년의 가슴을 찔렀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수족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검을 쥔 팔이 뜯겨졌다. 팔이 뽑혀져 나간 고통을 인식할 때 루브론의 목이 한 바퀴를 회전했다.

  우드드득!

  털썩!

 오러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이른 루브론이다. 조금만 있으면 오러 마스터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런 인재가 반항 한번 못 하고 죽어나가는 장면은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이지마하 공작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왔다. 눈앞의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법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의 시선이 마법사들에게 향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청년은 방해되는 존재를 가장 먼저 처리하고 나서 유희를 즐겼다. 일방적으로 피가 튀기는 전장이 시작되었다.

  “도... 대체 너... 는 누구냐?”

  “베르키스라고 하지, 너희들은 나를 마왕으로 부르면 된다.”

  쿠쿵!

  마왕의 강림.

  솔직히 완전히 믿지 않았다. 단순히 마족의 소환을 두고 호들갑떠는 것이라 여기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마왕의 강림은 비현실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마왕을 직접 대면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라이언기사단과 마법사들을 죽여 버린 존재를 두고 마왕이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부들! 부들!

  몸이 저절로 떨렸다. 이지마하 공작은 두려웠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마지막 힘을 검에 실었다. 오러 마스터 상급에서 최상급에 발을 들인 이지마하 공작의 전신에서 강렬한 오러의 힘이 퍼져 나왔다.

  이얍!

  -라이 언소드-불러드라이 언임팩트(혈호폭).

 최강의 힘을 실은 오러 블레이드가 베르키스를 향해 폭풍처럼 뻗어나갔다. 강력한 힘의 여파가 주변의 대기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쿠아아아앙!

  오러 블레이드가 폭발을 일으키며 강렬한 기파가 분출되었다. 응축된 기운이 터지면서 주변을 어지럽혔다. 최강의 공격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위력이다.

  그러나 검을 들이댄 이지마하 공작은 눈앞에 벌어진 참담한 현실에 말을 잊지 못했다.

  “맨… 손으로…….”

  “마왕을 너무 물로 보는군.”

  이지마하 공작의 모든 힘이 긷든 공격이 허무하게 막혔다. 마왕의 손은 오러 블레이드조차 통하지 않았다.

  쩌저저적!

  이지마하 공작의 오러 블레이드가 수천 년 된 고철처럼 금이 가며 갈라졌다. 베르키스의 손이 섬전처럼 뻗어나가 이지마하 공작의 목을 취했다.

  “마왕을 무시한 보답을 해주지.”

  목이 잡힌 순간 이지마하 공작의 모든 것이 정지했다. 활발하게 움직이던 폭발적인 오러조차 쥐 죽은 듯이 고요하게 변했다.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봐도 소용없는 짓이다. 베르키스의 손은 권능이 들어 있다. 어둠의 권능이 이지ᅵ마하 공작의 몸을 지배해 버린 것이다. 살아 남은 기사단이 덤벼들었지만 베르키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귀찮다!”

  -데빌커터(어둠의 칼날).

  쌔애앵! 쌩애앵! 쌔애애앵!

  댕강! 댕강! 댕강!

  윈드커터(바람의 칼날)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날카로움과 위력을 지녔다. 예리한 어둠의 기운이 훑고 지나가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매끄럽게 잘려나가 버렸다. 기사들은 검을 들이댄 채로 깔끔하게 절단이 되었다. 반 토막으로 잘려진 몸이 좌우로 벌어지는 장면은 병사들에게 공포를 선사했다. 가볍게 출수한 마법공격으로 인해 100명의 기사와 200명의 병사들이 잘려나갔다.

  “으으으윽!”

  고통과 공포, 분노로 인해 처절하게 울부짖는 이지마하 공작이었다.

  그러나 마왕의 권능에 잡힌 그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개미지옥에 빠져서 허우적 대봤자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죽... 여라!”

  “그냥 죽이면 재미없지.”

  베르키스의 검붉은 눈동자가 완벽한 어둠으로 잠겼다. 마치 혼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기이한 기운이 이지마하 공작의 눈동자를 뚫고 심령을 자극했다. 눈을 감으려고 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마왕의 암안에 걸린 이상 벗어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안... 돼!’

  그동안 지켜왔던 모든 신념과 이상이 베르키스의 암안에 걸리자 산산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번쩍!

  베르키스의 눈에서 암광이 번쩍였다. 지독한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 이지마하 공작의 영혼이었다. 부서진 영혼은 비명을 내질렀지만 부질없는 아우성이었다. 찢겨진 영혼이 베르키스의 권능에 의해서 다시 조합이 되었다.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신념과 이상이 완벽하게 바뀌었다.

  “피가 그립지.”

  “피... 피! 피를 줘!”

  “자, 저 앞에 네가 원하는 피가 있다. 가라.”

  “예!”

  마왕의 절대 권능인 종속의 권능이 발동되었다. 인간의 뇌리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과 잔인성을 증폭시켜, 이성의 통 제를 벗어나도록 만드는 악의 권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지마하 공작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제물들뿐이다.

  마왕에게 종속된 이지마하 공작이 기사들과 병사들을 도륙해 버렸다. 왕국의 제일 기사가 마왕에게 혼을 헌납한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다.

  하이카인 왕과 홀턴 재상은 지독한 악몽을 꾼다고 생각했다. 이지마하 공작이 저렇게 되어 버릴 줄은 몰랐다. 침음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마왕의 잔인성에 치가 떨렸다. 놈은 인간의 마음을 장난감처럼 다루고 있었다.

  “마왕을 죽여탓!”

  이지마하 공작은 상처를 입는 것도 몰랐다. 베인 살에서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났지만 관여치 않고 코카 왕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죽였다. 이지마하 공작의 돌연한 사태로 인해 사기는 바닥을 쳤다.

  100만에 달하는 병력들은 하이카인 왕의 명령에 곧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새 사방에서 어둠의 기운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5만에 달하는 마족들이 100만 대군을 포위하듯이 나타난 것이다. 베르키스로 인해 병력의 이동이 한 발 늦고 말았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마족들의 진군속도는 빨랐다.

  대지를 뒤덮은 짙은 어둠과 절망이 코카 왕국군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된 귀족, 기사, 병사들은 싸울 수밖에 없었다.

  “싸워라! 우리의 수가 더 많다!”

  수적인 우위로 마왕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한 명도 없다. 그저 살기 위해서 발악을 할 뿐이었다.

  채채챙! 카카카캉!

  마족과의 충돌이 벌어졌다. 마족의 강인한 투쟁심과 전투본능, 피에 대한 욕망과 집념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미리 부터 두려움을 갖고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로서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족들의 기세가 전투를 주도했다.

  꽈아악! 찌지지직!

  우드드득! 우드드득!

  병사의 머리통을 물어뜯은 마족이 잘근잘근 머리를 씹었다. 허연 뇌수가 이 사이로 터져 나왔다. 보는 이로 하여금 치를 떨게 만드는 잔인성이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을 포식하는 야수였다.

  하급마족의 전투력이 오러 익스퍼트 급의 기사보다 훨씬 강했다. 또한 중급마족 이상부터는 오러 마스터라고 해도 쉽사리 승부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5만에 달하는 마스터 급의 광전사가 한꺼번에 덤빈다고 생각을 해보아라. 수가 많건 적건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덜! 덜! 덜!

  참혹한 전장이다.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는 전장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일방적인 전쟁은 하이카인 왕도 처음 보았다. 마족의 잔인성은 그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

  “내... 가 뭘... 그렇게 잘못... 했단 말입니까!”

  하이카인 왕은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도대체 왜 이런 절망과 시련을 자신에게 주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대륙전쟁을 벌인 뒤틀린 욕망과 병사들의 죽음이 마왕의 본능을 자극했다. 마왕이 전장에서 강림한 것도 필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륙이 모두 하나로 움직일 때 혼자만 살기 위해서 욕심을 부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아아아악! 살... 려!”

  죽음을 앞에 둔 병사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전쟁도 어느 정도는 상대가 가능해야 전투를 치를 수 있다. 지금 병사들은 일방적인 도축을 당하고 있었다. 상대는 항복한다고 해서 살려주는 존재들도 아니다. 도망치는 것만이 살 수 있는 길이지만 사방을 포위하는 마족들의 공세는 한 사람도 살려둘 기세가 아니었다.

  대지도 핏물을 더 이상 흡수하기 힘들었는지 핏물을 토해 내었다.

  베르키스가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는 하이카인 왕에게 걸어왔다.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베르키스의 일격에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마왕을 막을 존재는 이곳에 없었다. 하이카인 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그도 곧 멈추고 마왕을 노려보았다. 자신은 일국의 왕이다. 두려움으로 인해 도망쳤다는 오명은 듣고 싶지 않았다. 안 될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하이카인 왕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기사의 검을 쥐었다.

  “마왕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겠다!”

  “허세를 부려봐야 소용없다.”

  휙!

  마왕의 손이 일직선으로 그어졌다. 그러자 검을 쥐고 있던 오른팔이 매끈하게 잘려나갔다.

  “으아아아악!”

 하이카인 왕이 고통으로 인해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언제 이런 고통을 겪어 보았겠는가! 항상 절대자의 위치에 서서 명령을 내렸을 뿐이지, 직접적인 고통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부웅!

  베르키스의 손이 다시 움직이자 하이카인 왕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벗어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노력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베르키스의 권능은 허공섭물을 능가했다. 극의에 달한 극악은 순수했다. 마의 순수한 의지가 어둠의 조화마저 마음먹은 대로 조정을 했다. 마왕의 절대권능 앞에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어둠의 권능이 하이카인 왕을 사방에서 조여왔다. 온몸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을 호소해도 도와줄 사람은 없다. 베르키스는 하이카인 왕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즐거워하였다. 인간이 절망 속에 죽어갈 때 마왕은 희열을 느꼈다.

  뿌드드드득! 뿌드드득!

   뼈가 부러지고 뭉개졌다. 하이카인 왕의 신체가 점점 조여들며, 핏물로 변했다. 죽기 전까지 몸이 박살나는 고통을 여과 없이 느껴야 하는 하이카인 왕이다. 그는 마침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핏덩어리로 화해 버렸다.

  “피의 축제 계속하라! 그분의 절대예언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크하하하하하!”

  베르키스가 코카 왕국을 부숴버리는 시각에 혈마왕 루이스탄은 터림프 왕국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단 3일 만에 2개의 왕국을 무너뜨린 마왕의 힘은 무소불위했다. 한데 그런 마왕조차 그분이라고 칭하는 존재가 있었다. 또 다른 존재의 불안감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마왕의 강림과 피를 부르는 학살은 전 대륙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마왕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지옥 그 자체였다. 코카 왕국을 시작으로 그 주변의 왕국들이 당했다. 생존자들이 전무한 상태였다. 죽음의 대지로 변해 버린 왕국들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왕국의 백성들은 처참하게 죽어나갔다. 마왕과 마족들이 벌인 피의 축제는 시작에 불과했다.

  소식을 접한 카이로만 제국은 각 왕국의 병력과 무기를 한 곳에 집중시키라고 명령을 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1개 왕국을 도와주기 위해서 대군을 움직일 여력이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마족들의 이동 동선을 따라가기에는 대군의 병력이동속도로는 불가능했다. 차라리 한곳에 자리를 잡고 마왕이 오는 길목을 막아서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그때까지 벌어지는 마왕의 학살극은 불가피했다.

  러쉬 황제의 막사에 백작 급 이상의 귀족들이 모였다. 한 동안 회의장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마왕은 백만 대군의 코카 왕국을 단 3일 만에 격파해 버렸다. 그것도 일방적인 힘의 우위로 찍어 누른 것이다. 카이로만 제국의 군사력과 비교해서 많이 부족하다고 해도 백만 대군을 우습게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왕의 강력한 능력과 무서움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각 왕국의 병력이 이곳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대륙의 모든 병력을 한곳에 집결하고, 제국과 왕국의 정예기사단과 정예마법단을 편성해서 마왕을 맞을 준비를 모색했다. 신성제국의 성녀와 성기사까지 도착해 있었다. 성녀는 죽어 가는 대륙의 백성들을 간과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의 죽음은 어쩌면 성녀 본인의 탓이기도 했다. 혼란을 조장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백성들에게 알리지 못한 것이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었다.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쉴라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도움을 줘야 합니다.”

  “그건 불가하오. 쉴라 성녀!”

 러쉬 황제가 쉴라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 당장 구원병을 보낸다고 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마왕의 군대에 각개격파를 당할 위험이 있었다. 대륙의 존폐가 걸린 전쟁에서 인정에 얽매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러쉬 황제는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결정했다.

  “그럼 저와 성기사들이라도 가겠어요.”

  “그것도 안 돼요.”

  “그럼 이대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손놓고 기다리라는 소린가요!”

  “짐이라고 비참하게 죽는 이들을' 모른 척하는 게 좋은 줄 아시오! 하지만 상황을 보시오, 만약 성녀가 죽거나 마왕에 게 사로잡한다면 그 뒤는 어찌할 생각이시오! 남아 있는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마왕에게 죽을 수도 있소. 비정한 현실이지만 지금으로서는 한곳에 모든 힘을 집중해서 마왕을 상대하는 것뿐이 없소이다!”

  쉴라 성녀는 러쉬 황제의 잔인하고 단호한 대처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러쉬 황제의 뜻이 지극히 타당했다. 마왕을 상대하가 위해서는 신성력이 필요하다. 영웅의 힘을 뒷받침해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마왕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문제는 돌이킬 수가 없다. 대륙이 모두 마왕의 손에 넘어갈 수 있었다.

  가르딘도 러쉬 황제의 의중을 따랐다. 발키리영지에서 마왕의 강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만일 그랬다면 누가 말리던 상관없이 발길을 돌릴 것이다. 만약 막아서는 존재가 있다면 그가 황제가 되었던 목을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왕은 코카 왕국에서 강림했다. 이기적이라고 욕 할지 모르지만 가르딘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가족이 연관되지 않은 이상 여기서 마왕을 막아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여겼다.

  ‘마법스크롤을 사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공간이동 마법스크롤까지 챙겨온 가르딘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난 후 가르딘은 발키리 영지군이 있는 막사로 향했다. 그 뒤로 쉴라와 성기사들이 따랐다. 가르딘의 막사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쉴라가 말했다. 

  “아저씨까지 그럴 줄은 몰랐어요!” 

  쉴라가 삐쳤는지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가르딘이 황제의 뜻에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나 혼자 반대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냐.” 

  대부분의 귀족들이 황제의 뜻을 따르는 상황에서 가르딘 혼자 쉴라의 뜻에 동조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현실이 아니다. 괜히 성녀 편에 들었다가 분란을 초래할 수 있었다. 힘을 합해도 부족한 판국에 대립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아저씨의 힘이라면 가능하잖아요!”

  “내가 힘으로 찍어 눌러야 속이 시원하냐! 만약 그렇게 해서 황제 폐하의 마음이 변했다고 치자, 그 이후 어쩔 거지. 마왕의 힘은 너도 알다시피 보통이 아니다. 드래곤이라고 해도 쉽사리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어! 다 죽어야 네 담이 편하겠니!” 

  “그... 건 아니지만!”

  “네 맘은 알고 있다. 네가 한 선택이 후회가 되겠지. 하지만 너는 성녀이기 전에 아직 어린 소녀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다면 그건 신이다. 신조차 세상의 뜻을 모두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네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알아요! 알지만 마음이 아픈 걸 어떡해요!” 

  “우리 모두 다 마음이 아프다, 너만 그런게 아니야!” 

  응?

  막사 안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기사들과 성기사들도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쉴라가 단둘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들 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성기사들도 두말하지 않고 밖에서 대기했다. 성기사들은 가르딘을 존경하고 있었다. 가르딘과의 대결로 인해 깨달음을 얻은 성기사들이었다. 그로 인해 성기사들은 과거와 다른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가르딘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성기사들도 성기사 이전에 기사다. 검을 수련하여 궁극의 길로 가는 기사로서 가르침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단둘만이 있는 공간에서 쉴라가 불쑥 가르딘의 품에 안겼다. 피하려고 미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눈물이 섞인 쉴라의 모습을 보자 가르딘은 뒷걸음질을 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옆으로 피해서 쉴라가 넘어지면 그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이게 뭐야?’

 눈물을 흘리던 쉴라가 물끄러미 가르딘을 올려다보았다. 슬품에 젖어 있는 청초한 쉴라의 모습은 사내의 본능을 자극해 왔다. 물론 일반적인 사내라면 단숨에 쉴라를 않고 자빠뜨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가르딘이다. 가르딘은 그 정도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라이나를 사랑한다. 그저 쉴라의 등 뒤를 부드럽게 토닥여 줄 뿐이었다. 그것만 해도 가르딘에게는 대단한 출혈이었다.

  '라이나를 제외하고,2명이나 가슴을 양도하다니!’

  순결을 잃었다고 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이기는 해도,라이나에게 미안한 것은 진실이었다.

  한참을 울던 쉴라가 품에서 떨어졌다.

  “이제 개운하냐?”

  “조금은요.”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지 마라. 사람은 실수도 하기 마련이다. 완벽한 존재는 이 세상에 없어. 그러니 마음 편히 먹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하자.”

  “상투적인 말을 아주 잘 하시네요.”

  “끄음, 뭐 그렇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하자. 말은 참 쉽다. 가르딘도 충분히 인정하는 문장이다. 그래도 가장 잘 써먹고, 가장 잘 먹히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가족이 그런 지경에 처했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요?"

  역시나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는 쉴라였다. 가르딘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쉴라다운 반격이었다. 가르딘이 당황하기를 기대한 쉴라였다. 반면에 가르딘은 표정의 변화 없이 단호하게 대처했다.

  “당연히 가서 구한다.”

   “황제 폐하가 반대하면요:’

  “죽인다.”

  너무 확고했다. 일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질문을 한 쉴라가 오히려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태연하게 황제를 죽인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르딘의 능력이라면 하고도 남았다. 쉴라는 가르딘이 가족을 어찌 생각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것이 조금 부러웠다.

  “이기적이네요!”

  “나도 사람이거든. 가족이 위험한데 내가 무엇이 보이겠느냐! 나는 내 가족이 무사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거다. 그것이 설혹 신이 정한 율법에서 어긋난다 해도 말이지.”

  쉴라는 문득 발키리영지에서 마왕이 강림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가르딘은 앞뒤 재지 않고 달려갔을 것이 분명하다. 쉴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 행여나 가르딘을 막아서기라도 하면 그 피해는 마왕의 피해에 버금갈지도 모른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의 약점은 명확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의 약점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 다.”

  가르딘은 가족이 약점임을 인정했다. 또한 가족이 그의 가장 큰 힘이었다. 다른 것은 속일 수도 있으나 가족에 대한 가르딘의 사랑은 진실했다. 그래서 구차한 말로 쉴라를 속이지 않았다.

  “너무 솔직해서 반박을 못 하겠네요.”

  “그것이 가족이니까.” 

  “저는 어때요?”

  “너는 내 가족 다음이다.”

  “그래도 두 번째는 되네요.” 

  “그렇지.”

  쉴라는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부러울 뿐이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죽음이 안타깝다면 전투가 아니라 정보망을 이용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예?”

  “어차피 정면대결이 아닌 분산된 전투는 승산이 많지 않아. 신성제국의 정보력과, 인포메드의 정보력, 대륙상단의 정보력을 총 동원해서 마왕의 이동 동선을 파악하고,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대피장소를 만들어 놓는 게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겠네요”

  가르딘은 지극히 현실적인 방법을 쉴라에게 알려주었다. 사실 마왕을 상대하는 것은 영웅과, 드래곤, 성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덤빈다고 해도 나머지 마족들을 견제 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가르딘은 영웅과 성녀의 단독행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승산 없는 전투를 하는 것은 어리석었다. 그럴 바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 이었다.

  가르딘과 쉴라가 막사 안에서 속닥거리고 있을 때 휘장을 걷고 대차게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도 주변을 지키는 기사들을 물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가르딘은 아이시런 공주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는 기색이었다.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전장에 공주의 방문은 정말 뜻밖이었다. 황제가 허락을 해주었는지 심히 의심이 되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언니!”

  “오랜만에 뵙네요, 가르딘 공작. 그리고 쉴라.”

  쉴라는 아이시런 공주를 반겼지만 가르딘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쉴라를 한번 훑듯이 보았다.

  ‘눈물자국.’

 쉴라의 눈에 맺힌 눈물 자국이 아직도 선명했다. 가르딘과 무슨 말을 했는지 고민이 되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위험한 줄 알면서 찾아온 것도 가르딘 공작 때문이었다. 이상하지만 가르딘 공작만 생각하면 어느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한 그를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울었니?”

  “아... 나!”

  쉴라가 말을 조금 더듬었다. 가르딘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야 말은 왜 떨어!’

  상황을 이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쉴라의 당황하는 모습이 아이시런 공주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의심이 가득한 눈동자로 가르딘의 이모저모를 관찰하듯이 바라보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왜 쉴라를 울린 거예요! 성녀를 울리고 무사할 줄 알아요!’’

  “제가 언제 울렸다고 그럽니까! 말이 이상합니다!”

  “흥, 여자를 울리는 사내는 사내가 아니라고 하던데!” 

  가르딘이 쉴라를 보며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선을 그어주었다. “언니, 별거 아니야 그냥 내가 선을 그었어.” 

  “뭔 선?”

  “아! 그게 아니고! 해결했다고.” 

  “해결이라니?”

  평소에는 사리분별이 뛰어난 쉴라와 아이시런 공주였지만 지금은 말이 자꾸 꼬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난처한 것은 가르딘이었다.

  ‘이거 해결되는 것 같지 않은데.’ 

  “쉴라야, 그게 무슨 정리나?”

  “간단하게 정리할게요.” 

  “그 말이 더 이상하다.”

  솔직히 정리할 정도의 건더기가 있는 대화와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가르딘과 쉴라의 말이 오고 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시런 공주의 의심은 더 커져만 갔다.

  “언니, 정리할게 잘 들어, 내가 마음이 아파서 아저씨의 가슴을 빌려서 눈물을 조금 흘렸어, 그래서 아저씨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어서 마음이 풀렸어. 이게 전부야! 이제 완벽하게 풀렸지.” 

  ‘응?’

  듣고 있던 가르딘은 이게 정말 정리된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쉴라의 말에 틀린 점은 하나도 없다. 분명히 사실만 전했는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가르딘의 오른쪽에 서 있던 아이시런 공주의 눈빛에 불타는 듯한 기운이 발산되었다. 

  “쉴라야, 아저씨 가슴이 눈물받이 전용으로 참 좋지.”

  “그런 것 같기는 해.”

  “오호, 그렇구나!”

  찌릿! 찌릿!

  살벌한 기운이 가르딘의 뇌리를 자극했다. 말을 할수록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해명이 해명이 아닌 게 되고, 정리가 정리가 아닌 게 되었다. 오해는 말을 할수록 쌓인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제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아저씨는 가슴이 참 헤프네요.”

  “그 무슨 참담한 말을!”

  “그럼 이번에 벌어진 사건을 어찌 설명할 건가요.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라이나 언니가 들으면 참 좋아하시겠네요.” 

  “아... 니, 사건까지야!”

  아이시런 공주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가르딘은 식은 땀이 흘렀다.

  ‘라이나가 알면 나를 뭐로 보겠어!’

  전쟁하러 보냈더니 계집질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절대 죽어도 그런 말은 들을 수 없다. 가르딘은 라이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나이가 되기로 결혼할 때 약속했다.

  아이시런 공주는 쉴라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눈가에 비친 회심의 미소가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철옹성도 약점이 있기 마련이지.’ 

  ‘아저씨는 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거예요.’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었다. 쉴라와 아이시런 공주가 어느새 연계를 한 것이었다. 그것은 발키리영지를 떠나기 전에 합의를 본 상태였다. 기회가 오기를 오랜 시간 기다린 여인들이다.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가르딘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틈틈이 쉴라의 지원검격이 아이시런 공주를 도외주었다. 물론 겉으로는 가르딘을 도와주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 동안 쉴라와, 아이시런 공주의 대화에 휘말리고 나서야 혼자가 된 가르딘이다. 쉴라는 신성제국에 알려 사람들을 구할 방도를 찾아야 했고, 아이시런 공주는 가르딘의 막사에 오래 있을 형편은 아니었다. 러쉬 황제를 만나고,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승전을 위해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했다.

  홀로 남겨진 가르딘은 비지땀을 쓸어내며 한숨을 토해내었다.

  “이거 전쟁을 치르고 말지, 뭐가 이렇게 힘들어.” 아이시런 공주와 쉴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여인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성녀와 공주가 뭐가 아쉬워서 애 딸린 유부남을 좋아한단 말인가! 지금까지는 그저 농담 식으로 말을 주고받은 것이지만 갈수록 께름칙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모르겠다.’

  마왕과의 결전이 남은 시각에 이런 시시낄렁한 일로 고민하는 것 자체가 한심한 가르딘이다. 그래서 우선은 전투에 만전을 기하는 데 주력하기로 편하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알고 있어야 했다. 시시껄렁한 일이 나중에서 진지한 일이 된다는 것을.

  필리언, 갈라, 유타, 투르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기사들과 병사들의 훈련현황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황도에 온 후부터 지금까지 훈련과 전술을 병합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매진해 왔다. 기사들과 병사들도 꽤 부리지 않고 훈련에 참여했다. 마왕의 강림을 알게 된 순간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깨달았다. 그동안 가르딘이 닦달한 것도 이해가되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허무하게 죽지 않도록 가르딘이 배려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왕을 상대하는 일이 두렵고, 무섭지만 기사들과 병사들은 가르딘을 믿었다. 이제까지 이길 수 없는 불가능한 전투를 모두 승리한 가르딘이다. 그만한 신뢰는 당연한 것이었다.

  “기사단은?"

  “이제는 오러컨트롤이 마스터 급에 달해 있어. 병사들의 전술 훈련도 거의 끝나 가는 편이야.”

  “그럼 당분간 쉬도록 해.” 

  “알았다.”

 전투 당일 전까자 무리하게 훈련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충분히 쉬어주고, 몸과 미음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몸과 마음이 피로하게 되면 전쟁 시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사리판단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을 해야 하는 전장에서 실수는 극과 극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가르딘은 필리언, 갈라, 유타, 투르의 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랜드 마스터 급의 오러를 무리하게 주입했기에 오러의 부작용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미 어느 정도는 컨트롤할 수 있게 됐어.’’

  “타이탄의 성능은 어때?”

  “발키리와 비교해서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군.”

  타이탄을 연습해야 할 장소가 마땅치는 않았다. 그렇다고 외부로 드러내놓고 하기에도 힘들었다. 그래서 가르딘은 환영진을 만들어서 공간을 확보하고, 타이탄의 능력을 체크해 보도록 했다.

  “이거 받아.”

  “뭔데?”

  “환영아이템이라고 할까나.”

  “환영아이템?”

  가르딘은 발키리 영지를 출발하기 전에 파멜라에게 환영아이템을 받았다. 안젤리카와 파멜라가 부단한 연구를 거듭해서 만든 휴대용 마나환영진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도에 도착한 후 전술훈련의 방향을 약간 수정을 가했다. 이전과 큰 차이는 없지만 8방향을 잠그는 금쇄진의 진형대로 움직이도록 훈련시켰다. 팔문금쇄진에 갇히게 될 경우 빠져나올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다.

  하지만 상대는 마족이다. 마족의 능력을 감안하면 정면승부를 할 경우 기사들과 병사들의 희생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마나환영진 아이템은 그런 위급한 상황을 대처해 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마진법의 역량이 축소판으로 들어 있는 마나환영진 아이템은 중급마정석에 환영진과 변환진, 마나진의 수식이 적혀 있었다. 드래곤의 마력까지 스며들어가 있어서 팔문금쇄진의 능력을 배가시켜 줄 것이다. 마족이라고 해도 마진법을 뚫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아다.

  “대단한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파멜라의 능력은 가르딘도 깜짝 놀라게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만약 파멜라의 말대로만 된다면 희생 없이 마족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가르딘은 회의에서 결정된 전략을 동기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제국의 대공과 공작이 전쟁의 사령관으로 임명이 되었다. 가르딘도 동서쪽을 맡은 사령관이 되었다. 각 왕국의 병력을 통솔하는 지휘권을 가지고 된 것이다.

  “아직까지 실제적인 전투가 없어서, 마족들의 능력은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했어. 아마 생각보다 더 강하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야, 절대 먼저 나서지 마라. 집중적인 표적이 되면 곤란하거든.”

  “뒤에서 마족의 능력을 가늠해 보라는 뜻이야.” 

  “그래, 희생을 먼저 치를 필요는 없지.” 

  제국과 왕국의 병사들을 희생시켜 역량을 확인하고 그에 대응하여 확실하게 마족들을 쓰러뜨리기로 결정을 했다. 다른 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잔인한 계략이 아닐 수 없다. 가르딘은 어쩔 수 없는 전술이라고 여겼다. 다른 욍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에 비해 발키리영지의 기사단, 창기병, 병사들의 수준이 훨씬 높다. 승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 전술이 최선이라고 보았다. 또한 다른 왕국을 위해 발키리영지의 병사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 가르딘의 솔직한 마음이다.

  마흔이 되어서 느낀 것은 남을 위해 희생한다고 해서 돌아오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직 힘이 있어야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힘이 없는 정의는 구차한 변명에 불과했다.

  “어차피 우리는 드래곤과, 영웅, 성녀의 조합을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거야! 그들이 온전히 마왕과 전력을 다해 상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해.”

  “그런데 너도 마왕과 싸울 거냐?”

  “그렇게 될 거 같다.” 

  “위험할 텐데.” 

  “어쩔 수 없지.”

  동기들은 가르딘이 걱정이 되었다. 가르딘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상대는 마왕이다. 마왕은 인간의 기준으로 강함을 논할 대상이 아니다. 가르딘과 동기들은 평소에는 티격태격하며 자주 싸우기는 하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은 깊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가르딘이 주도해 왔다. 가르딘이 있었기에 지금의 필리언, 갈라, 유타가 있는 것이다.

  “마치 남 일처럼 말한다. 너!” 

  “내가 설마 죽을 자리를 보고 가겠냐!” 

  “하긴!”

  “그것보다 너희들 걱정이나 해라. 상급마족 이상은 드래곤이 감당할 거야. 아마 너희들은 중급마족을 상대해야 될 거다. 그러니 전쟁 전까지 오러를 잘 가다듬도록 해.”

  “너나 잘하셔.”

  동기들과 마지막으로 필요한 사항을 조율하고 나자 저녁이 되었다. 가르딘은 저녁식사를 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전장에 나와서 제일 한가한 시간이 지금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회의에 참석해서 지속적인 전략회의를 한다. 회의가 끝나면 기사단과 창기병, 병사들의 훈련상황을 보고받고 체크를 했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하루이기에 지금밖에 마음을 가다듬고 수련을 할 시간이 없다. 가르딘도 수련을 절대 빼놓지 않고 했다. 마왕을 상대하는 날까지 실력을 키워놓아야 한다.

  가르딘은 마음을 관조했다. 사람의 마음은 우주만큼이나 넓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맞고 틀린지는 수많은 마음의 별들이 모여 하나의 생각으로 통합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가르딘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작은 틈조차 메워나가는 데 열중했다. 모든 것을 알아야 시작과 끝을 파악할 수 있다. 천룡 무상신공을 운기하지는 않았다. 그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관조를 할 뿐이다. 세상이 흥망성쇠를 반복 하듯이 사람의 기운과 마음도 변화를 일으키고, 흥과, 쇠를 반복한다. 만물의 조화가 바로 이와 같다.

  ‘무극필반, 화무십일홍이라.’ 

  공령의 지체가 올라선 가르딘은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을 정도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선과 선을 잇고 끝을 향해 나아갈수록 끝은 시작일 뿐이었다. 완벽함을 추구했을 때 만족을 느끼고, 안주하게 되면 화려하게 만발한 꽃이 어느새 지듯이 허물어지게 되어있다. 불완전에서 완전이 되고, 다시 불완전이 되는 기운의 흥망성쇠를 관조하고, 나아갈 방향을 찾아 끊임없이 구도하였다.

  번쩍!

  가르딘의 눈동자가 푸르게 변했다. 천룡안이 자연스럽게 열린 것이다. 천룡무상신공을 운용했을 때만 열리던 것이 가르딘의 의념에 의해 열렸다. 천룡안과 가르딘의 의념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게 된 것이다.

  ‘심안은 억지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구나!’

  가르딘은 부자연스럽게 연결되던 선들이 하나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만물의 변화가 스스로 찾아온다.’

  가르딘은 힘의 변화를 느낀 것이 아니라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의 기운이 스스로 대답을 해주는 것 같았다.

  응?

  기감을 열어 천룡무상신공의 영역을 확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접근이 느껴졌다. 멀리서 날아오는 기운 은 모두 17이었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대단한 존재들이 가르딘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왔다.

  “후우우!”

 가르딘은 심호흡을 하고, 의념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가르딘의 심안의 영역에 걸린 존재 들이 막사 밖에서 안으로 공간을 이동해 왔다.

  “오랜만이다. 이놈아!”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드래곤로드의 인장을 받고, 드래곤로드가 된 라이젠이 찾아왔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을 잘 맞추어서 드래곤들을 데리고 가르딘에게 온 것이다. 가르딘은 심안의 영역에 잡힌 기운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파악했지만, 라이젠의 기운은 전 과는 비교할 수없는 수준이었다.

  ‘드래곤로드의 인장이 이 정도였나.’

  인장을 물려받은 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힘을 갖춘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가르딘은 그저 드래곤의 수장이 되어서 다른 드래곤을 조율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과정이 어찌되었건 라이젠의 능력이 강해진 것은 다행이었다. 마왕과의 전투에서 라이젠의 활약이 기대되었다.

  라이젠도 가르딘을 유심히 보았다.

  ‘같은놈이 분명한데, 이상하네.’ 가르딘에게서 받은 느낌이 과거와는 또 달랐다. 기운을 들여다보아도 허허벌판을 되짚는 것 같은 공허함이 느껴졌다. 대륙 전체를 담을 것같이 담대하고 거대하지만 공허한 기운을 느낀 라이젠은 소름이 돋았다.

  ‘그사이 또 발전했구나!’

  드래곤로드가 된 후 힘의 크기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커졌다. 사실 힘의 크기보다 수양의 깊이가 남달라졌다는 것이 더 확실했다. 수백만 년을 축적해 온 역대 드래곤로드의 모든 기억이 라이젠의 뇌리로 각인되었다. 드래곤의 인장은 기억의 소산이다. 드래곤의 모든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측량할 수 없는 기억은 라이젠의 관념의 폭을 넓혔다. 그에 따라 라이젠은 지닌바 역량의 틀을 깨고, 또 다른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신의 영역에 든 10서클 마법을 어느 정도는 구현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가르딘의 역량을 파악하지 못했다. 라이젠은 가르딘을 괴물 보듯이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번에는 때를 잘 맞추셨습니다.” 

  “자꾸 그날 얘기를 들먹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 

  “지금 대륙이 피바다가 되고 있는데, 그게 과연 누구 탓일 까요?"

  가르딘이 깐죽거리자 라이젠의 인상이 구겨졌다.

  “시끄럽다, 이놈아!”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서, 전술회의를 하죠.”

  라이젠이 가르딘을 찾아온 것도 마왕을 상대할 전술회의를 위해서였다. 드래곤로드의 인장을 받으러 갈 때 가르딘이 한 말이 일리가 있었다. 무턱대고 드래곤의 힘만으로 마왕을 상대했다가는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개체수도 얼마 남지 않은 동족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르딘에게 베로나가 예의를 갖추었다. 가르딘의 진실된 힘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베로나다. 가르딘은 충분히 대접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당시에 중급마족을 가지고 논일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능글맞게 웃는 실없는 인간으로 여길 수 없었다. 반면에 가르딘을 알지 못하는 드래곤은 불쾌한 기색이 완연했다. 라이젠이 신신당부를 했기에 참고 있었지만 인간이 드래곤을 상대로 너무 건방지다고 보고 있었다. 결국 혈기왕성한 웜급의 드래곤 중에 하나인 에르반이 나서고 말았다. 영웅도 아닌 주제에 드래곤을 함부로 대한다고 여긴 것이다. 드래곤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인간 주제에 건방지구나! 감히 로드 앞에서 예의를 갖추 지 않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가르딘이 에르반을 보다가 라이젠을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라이젠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라이젠은 가르딘이 보통 인간이 아니라고 분명히 전했다. 물론 정확한 능력까지 설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에르반의 행동은 정말 아니었다. 고룡도 이기지 못하는 가르딘을 상대로 웜급의 드래곤이 나서고 있었다. 

  ‘얘가 왜 이래!’

  가르딘의 눈빛이 라이젠에게 [애들 교육 똑바로 안 시킨 것이냐고!] 말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가르딘이 쳐다보지도 않자 에르반의 노골적인 적의는 증폭되었다. 다른 드래곤들도 에르반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건방지고, 거만한 인간에게 드래곤의 위대한 능력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는 듯했다. 베로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죽고 싶은 거야!’ 저 인간이 화나면 마족도 살려 달라고 울부짖어야 했다. 마족이 울면서 살려 달라고 한 지나간 과거의 편린이 새록새록 다시 기억나고 있었다. 

  “이거 정말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하나.” 

  “정말 건방지구나!”

  “뭐, 혈기왕성한 나이 때니 건방질 수도 있겠지.” 

  “감히 인간 주제에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하지만 주제파악 못 하면......

  스르륵!

  “커어억!”

  언제 움직였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가르딘의 신형에서 바람이 불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에르반의 목이 가르딘의 손에 잡혀 허공에 떴다. 에르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인식하지도 못했다. 무언가 획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플라이 마법을 시전하지도 않았는데 발이 허공에서 바동거리고 있었다.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한 드래곤이 전무했다. 드래곤들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간의 손에 의해 들려진 수치감이 들 시간도 없다. 에르반은 벗어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을 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드래곤 하트의 충만한 마나가 무언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잠들어 버렸다. 몸이 에르반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이... 럴 수가!’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에르반은 깨달았다. 가르딘이 드래곤의 마나조차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강대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다른 드래곤들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 은 마찬가지였다. 가르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막히는 무형지기가 드래곤들의 의지를 꺾어 놓았다. 가르딘은 덤비고 싶으면 얼마든지 덤비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히 주먹을 부르는 얼굴이 아니다.

  하지만 드래곤의 의지는 가르딘의 의지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렇게 되지.”

  가르딘이 미소를 지으며 드래곤들을 의미심장하게 훑어보았다. 가르딘의 눈동자에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세상을 포용하는 지배자의 눈동자였다. 무상의 권능을 지닌 존재가 드래곤들에게 수그리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드래곤들은 절로 몸이 움츠려들고 있었다. 무한한 정신력을 소유했다고 알려진 드래곤들조차 가르딘의 천룡안을 버티지 못했다. 결국 쫄아서 눈을 돌리고 말았다.

  가르딘은 좀 전에 깨달은 천룡안의 능력을 시험 삼아 개방해 보았다.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능력이 발휘되었다. 천롱안의 권능 중에 하나인 절대 지배안이 제대로 통제가 되고 있었다.

  씨익!

  가르딘은 알아서 기는 드래곤들에게 다시 한 번 확인 사살 을 해주었다. 자존심이 강한 놈들일수록 여지를 주면 안 되었다. 다시 개갤 수 없도록 짓밟아 주어야 앞으로가 편하다. 물론 독기 없는 놈들은 한번에 기선 제압이 되겠지만 말이다.

  “개개지 마라.”

  뒷골목 건달 두목이 기선을 제압할 때나 사용하는 저급한 단어가 마구 튀어나왔다. 명색이 공작의 반열에 든 인간치고는 무척이나 쌍스러웠다.

  드래곤들의 기선을 제압하고 난 후 목을 잡아 들어 올린 에르반을 다시 바닥에 곱게 놔주었다. 에르반은 식은땀이 흘렀다. 조금 전에 보인 압도적인 기운은 에르반이 감히 덤벼들 엄두도 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조금 전에 에르반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솔직히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뻔했다.

  ‘이런 괴물 같은 인간이 있다니!’

  “나 괴물 아니다.”

  허억!

   ‘말도 안돼!’

  에르반과 드래곤들 모두 깜짝 놀라서 뒷걸음쳤다. 용심을 꿰뚫어 보는 인간은 들어보지 못했다. 신의 영역에 든 존재만이 드래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드래곤들이 놀라는 것도무리가 아니었다.

  “말 된다.”

  움찔! 움찔!

  에르반과 드래곤은 마치 고스트에 홀린 기분이었다. 속으로 생각을 했을 뿐인데, 가르딘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가르딘이 인간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았다. 드래곤의 생각을 읽는 존재를 어찌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반면에 가르딘은 드래곤들을 귀엽게 여겼다. 오랜 시간 동 안 독고다이식 생활을 해 와서 그런지 몰라도 얼굴에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경험한 가르딘에게 어쭙잖은 수작은 통하지 않았다.

  “잘해 보자.”

  “예?”

  “잘해 보자고:’

  “알... 겠습니다!”

  “그렇게 덜떨어져서 잘 할 수 있겠어.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눈치 좀 키워. 알겠지.”

  “그... 렇게 하겠습니다!”

  라이젠과 베로나는 가르딘의 대처에 할 말을 잃었다. 순식간에 모든 드래곤들의 기선을 제압하고, 가지고 놀고 있었다.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었다. 주제파악 못 하고 나선 에르반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정말 아니었다. 드래곤망신을 다 시키고 있었다. 명색이 드래곤이 인간에게 쫄아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인마, 왜 애들 기를 다 죽이고 그래.”

  “제가 언제 기를 죽였습니까? 저는 그저 어른을 대할 때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을 가르쳐 주었을 뿐입니다.”

  “예의 없기로는 네가 제일이야! 너나 잘해!” 

  “저처럼 예의바른 인간이 어디에 있다고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함부로 나불대십니까!” 

  “뭐, 나불! 그게 무슨 예의냐!”

  “제 나름대로 성의 있는 예의입니다.”

  ‘성의라는 단어를 알고서 사용하는 것이냐! 하늘 아래 어떻게 이런 빌어먹을 놈이 다 있는 거야, 내가 말을 말아야 지!’

  가르딘과 말을 오래 섞어봐야 손해였다. 라이젠은 화를 간신히 수그리며 입을 닫았다. 더 이상 말해 봐야 입만 더러워질 뿐이다.

  하지만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품위였다. 

  베로나는 한숨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드래곤로드로서의 품위가 없어 보이기는 라이젠이 더했다. 인간과 저런 쓸데없는 말싸움을 하다니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는 했다. 드래곤로드 앞에서 대놓고 깐죽대는 인간을 보게 되는 진기한 광경이었다. 베로나도 헬파이어를 처넣고 싶었는지 입이 움찔움찔 했었다.

  가르딘은 일부러 도발을 하며 기선을 제압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상하의 명령 체계가 확실해야 한다. 드래곤이라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게 되면 전투 시 일어나는 돌발적인 상황을 대처하기도 어려울 뿐만이 아니라 많은 희생을 초래할 수 있었다. 에르반을 비롯한 젊은 드래곤들의 경우 오만함이 절로 배어 나오고 있었다. 혈기가 때론 사기를 끌어올리지만 전장의 승패를 결정짓게 만들기도 한다. 저런 정신상태로는 전투를 치를 수 없다. 또한 단순한 도발과, 기세에 이처럼 어이없이 무너진다는 것은 전투경험과 오기가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탄생과 동시에 얻어진 충만한 마나와 마법으로 인해 뭐든지 쉽게 해결을 해왔을 것이다. 난관이라고는 겪어보지 못 한 드래곤이 전부였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하지위체계 와 더불어 독기와 깡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굴려 줘야겠군.’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단시간 안에 필요한 것을 취해야했다. 가르딘이 미소를 짓자 드래곤들을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드래곤의 입장에서 아주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이제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길게 느껴지게 될 것이다.

   코카 왕국을 비롯한 주변 왕국을 모조리 다 쓸어버린 마왕 베르키스와 루이스탄이 피의 향연을 멈추지 않고 대륙의 중앙으로 진격해 나갔다. 마법군단을 이끄는 마왕은 거칠 것이 없었다. 마왕이 지나간 자리를 풀뿌리조차 남지 않았다. 피가 마를 날이 없는 대지는 점점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종족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마족들은 죽은 영혼마저 갈가리 찢어 발겼다. 마족군단이 휩쓸고 간 지역은 마계를 연상시켰다. 

  “시간을 준 보람이 있군.” 

  “그럼 정해진 인과의 율을 굴려야지.” 

  베르키스와 루이스탄은 뜻 모를 말을 하고 있었다. 대륙의 3분지 1을 초토화할 때까지 중간계의 저항은 미미했다. 강림 이후 대륙중앙을 공격해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마왕은 인간들이 힘을 모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최후의 전투를 치르기 위한 준비의식과 같았다.

  마왕의 뒤로 10만에 달하는 마족군단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마족군단이 뿜어내는 검은 마기가 대지를 어둡게 만들었다. 짙은 마기는 대지에 자라나는 생명체의 생기마저 죽이고 있었다. 검은 마기와 붉은 피가 뒤섞여 검붉은 대지가 되어갔다.

  마왕이 전진을 명했다. 마족군단이 뒤를 따랐다. 이제부터 대륙의 향방이 정해지는 초유의 대륙혈전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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