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7/93)

   @@[제5장 어둠의 길드@@]

  쿠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동시에 지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마력이 폭발한 지점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폭발 지점의 주변까지도 충격의 여파가 전달되었다. 사방으로 처참하게 망가진 사람의 고깃덩어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지하 통로의 입구로 빠져나온 그란테스와 포레스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또 허탕이라니.”

  “세뇌도 통하지 않는 지독한 놈들이야.”

  어둠의 길드를 찾아 나선 그란테스와 포레스트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래곤이 나선 일이 이처럼 꼬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정신마법조차 통하지 않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드래곤들조차 예상치 못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는 뜻이다.

  어둠의 길드 총단을 찾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점 조직으로 되어 있어 찾는 것이 어려웠다. 또한 서로의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놈들은 이미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 있었다. 한 발 앞서 나가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놈들이 이런 상황에서도 인신매매를 하는 것이 이상해.” 

  “쥐새끼들처럼 자취를 감추고 있다가 다시 나타난 이유가 고작 인신매매 때문이라는 것부터가 이해되지 않기는 해.”

  잘린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둠의 길드가 다시 움직였기에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그란테스와 포레스트였다.

  하지만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숨어 있어도 모자라는 판에 인신매매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며 다시 활동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있을지 몰라.” 

  “녀석들의 실체는 인간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야. 그런 놈들이 인신매매 때문에 나선 것은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로드에게 사실을 전할 테니, 너는 라이젠 님과 베로나에게 연락해.”

  “알았어.”

  영지에 돌아오고 4일이 지났다.

  4일 동안 가르딘은 업무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가족들과 보냈다. 그리웠던 라이나의 품과, 브리안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가르딘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었다. 가끔씩 아이시런 공주, 쉴라, 리니안이 찾아와서 훼방을 놓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이미 라이나와 언니 동생 사이의 가족처럼 되어버려서 어찌하기 힘들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가끔씩 한다. 물론 가르딘도 사내이기에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첫 집무를 보기 위해서 회의를 열었다. 영지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 용병단 하나만은 아닐 것이라고 본 것이다. 빠른 경제발전을 추구하다 보니,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한 탈이었다. 훌륭한 영지가 되기 위한 과도기나 마찬가지였다.

  4일 전에 귀족들과 중앙행정관들에게 저택으로 모이라고 연통을 넣었다. 가르딘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자 귀족들과 행정관들이 모두 일어섰다. 형식적이기는 해도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였다.

  “그만 앉아.” 

  “예, 영주님!”

  가르딘이 회의를 시작하자 그동안 산재되어 왔던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재정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 밀의 연 생산량은 꾸준히 늘었고, 고구마와, 기타 작물의 생산량도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대륙의 곡물가격이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지의 재정은 날로 풍족해지고 있었다.

  “치안 악화는 영지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인원들이 늘어나고 있기에 발생한 문제입니다.”

  “용병단의 문제는 이미 조치를 내려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지.”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사이론이라면 알아서 잘 할 것이다. 가르딘에게 가장 많은 갈굼을 받아온 사이론이다.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가르딘이 어찌 나올 것이라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알아서 잘하지 못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해준다고 신신당부를 해놓았다. 살고 싶으면 용병왕이라도 되어야 구색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많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특히 헥토르 영지는 전쟁 시 손실된 인원이 많아서 피해가 더 컸습니다. 장기적으로는 발전의 저해요인이 될 것입니다. 일정수준 이상 인원을 보충해야 합니다.”

  “방법은 생각해 놨겠지.”

  “외부에 영지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지난 대륙전쟁에서 발생한 난민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곳으로 올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뜨내기들이 영지 내에 머물 수 있도록 결혼정책을 장려하는 것입니다.”

  “고작 그 정도인가?”

  상투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인구를 늘이는 방법은 노예를 사들이거나 유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수적이다. 하루아침에 발키리 영지의 영지민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이 발키리 영지를 살아갈 수 있는 영지라고 믿게 만들 수 있어야 했다. 더군다나 인구는 재산과 무력이다. 다른 영지도 인구를 빼앗기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인구가 경직되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대륙의 실정이다.

  가만히 있던 시녀장 파멜라가 나섰다. 마진법 연구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그녀는 영지의 일은 절대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영지민들의 인구통계를 정확히 내야 합니다. 각자에게 등급에 따른 패를 주어 리스트를 작성하고, 영지민들에게는 다른 영지민들보다 혜택을 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영지민들은 발키리 영지민이라는 소속감을 얻고, 외부의 인원들도 영지민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 분명합니다.” 

  제법 그럴듯한 의견이기는 했다. 하지만 경제정책과 다르게 사람에 관련된 정책은 일괄적으로 처리하기 힘들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 점까지 신중하게 처리를 해야 한다. 당장은 파멜라의 의견이 가장 현실적이기는 했다. 그녀의 의견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보완해 나갔다.

  회의는 5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산재되어진 문제를 파멜라가 대부분 걸러내기는 했지만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각보다 많았다. 기사생활만 해온 가르딘으로서는 영지 경영이 무척이나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영지의 규모가 커지고 경제가 발전할수록 그러한 문제는 더 심해졌다. 

  가르딘의 고민은 깊어졌다.

  ‘이 나이에 공부를 더 해야 하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있다. 그건 학자들에게나 하는 말이다. 기사 출신인 가르딘이 책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영지를 잘 이끌어 가려면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근원을 파헤치는 직관이 필요하다. 직관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지식을 겉만 핥아서는 영지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의가 끝나고 난 후 가르딘은 오늘 중점적으로 거론되었던 내용을 정리해서 다시 살펴보았다. 파멜라가 정리를 제대로 해놓기는 했어도 문제 해결까지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업무로 인해 퇴근 시간이 길어지지는 않았다. 정확히 6시 칼퇴근을 한 후 아침 11시부터 다시 업무를 보았다. 퇴근 후 시간은 모두 가족들과 보내야 한다. 가르딘에게 이것은 영지의 일과는 별개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주르르륵!

  붉은 핏물을 흘린 소녀는 원한에 휩싸여 죽어갔다. 그녀의 핏물은 한이 쌓여 긴 통로를 통해 한곳으로 모아졌다. 통 안에 모여진 핏물이 가득했다. 조금만 더 채우면 완전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늦어.”

  피를 채운 에빌스트는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성혈을 가진 여아가 네 명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전까지는 길드의 요원들을 이용해서 잡아오는 데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현재는 감시의 눈길이 너무 많았다. 신성제국에서 어둠의 길드를 본격적으로 수사하고 있었다. 또한 드래곤들까지 개입하는 바람에 난항을 겪는 상황이다. 이번에 경로를 바꾸어서 길드의 요원들을 보내 간신히 소녀를 납치해 왔지만, 그로 인해 길드의 거점 20곳이 박살이 났다. 잘못했다가는 어둠의 길드 총단까지 밝혀 질 뻔한 위험한 상황이었다. 

  “신성제국이야 적당히 무마하면 되겠지만 드래곤은 어쩐다.” 

  이쯤 되면 놈들도 이유를 알아챘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더욱더 집요하게 방해를 해올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기에는 위험했다. 마지막 네 명이 문제가 되었다. 성혈을 가진 여아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더 컸다. 

  에빌스트의 눈빛이 붉게 번졌다. 

  “어쩔 수 없군. 그토록 찾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가 잔인하게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신성제국은 대륙 곳곳에서 여아가 실종된다는 것을 파악한 순간부터 병력을 풀어 조사했다. 그래서 밝혀낸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단순한 인신매매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17세 이하의 어린 소녀들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성녀의 나이와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잡혀간 것이다. 밝혀낸 숫자만 해도 300명이 넘었다. 그로 인해 신성제국에 성혈을 가진 소녀들이 부족한 실정이다. 프리먼 대신관은 어둠의 길드를 악의 추종자로 선포하고, 잡아들이도록 명령했다.

  어둠의 길드가 비록 강하다고는 하지만 성기사와 병력이 투입되면 잡아들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수적 우위에 불과했다. 어둠의 길드가 가진 무력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피를 감수하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의 길드는 증거를 남기지 않는 집단이었다. 죽은 자는 있어도 산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프리먼 대신관은 그 즉시 성녀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렸다. 연락을 받은 쉴라는 왜 어둠의 길드가 소녀들을 납치하려고 했는지 고민해 보았다.

  성혈이 마혈로 바뀔 때 어둠의 시기는 도래하리라!

  신탁에 내려온 마지막 구절이었다. 쉴라는 그 점을 신중하게 되새겨 보았다. 성혈은 주신의 기운을 받은 성스럽고 고결한 피다. 그런 피가 어둠의 기운을 흡입한 마혈로 바뀐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쉽게 판단이 서지 않고 있었다. 어둠의 시기가 도래하게 되는 이유가 단순히 피가 바뀌었기 때문에 벌어진다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쉴라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놈들의 근거지를 찾아야 해.’

  이유를 알 수 없다면 어둠의 길드 총단을 찾아야 한다. 반드시 놈들의 목적을 밝히고, 막아야 한다. 마왕의 부활은 대륙 전체의 위험이다. 작은 단서조차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어둠의 길드를 찾는데 전력을 기울이라고 대신관님께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성녀님은 돌아가시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이곳에 영웅과 인도자가 있어요. 따로 떨어지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 알겠습니다.”

  쉴라는 위기가 찾아올 때 영웅과, 인도자를 같이 데려갈 생각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가르딘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은 아저씨에게 말을 해야겠다.’

  시간이 되면 같이 가야 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는 어쩌면 영웅이 아니라 인도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쉴라였다.

  집무실에서 업무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르딘에게 스필언과 미토스, 투르가 찾아왔다. 3명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 뜻밖이었다. 서로 어울려 다니기에는 조합 자체가 이상하게 보였다. 꽃미남과 야생남의 조화가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가! 그런데 계속 보고 있으니 부조화가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무슨 일이지?”

  “면벽수련을 하려고 합니다.”

  “뭐?”

  힘겨운 여정을 끝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다. 그동안에도 스필언과 미토스는 대련을 하거나, 검술 수련에 매진했다. 또한 투르와의 대전 상대까지 해주며 쉬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몸살이 걸려도 부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혹한 면벽수련을 자처하는 신성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독한 놈들!’

   사람이 독해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상식을 벗어나는 열정에 가르딘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원래 그런 놈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쳤다.

  그런데 투르까지 같이 온 것은 의외였다.

  “넌 왜 온거냐?”

  “저도 같이 가려고 합니다.”

  “뭐? 네가?”

  “그렇습니다.”

  가르딘은 투르의 대답에 기가 막혔다. 면벽수련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고심하고 명상하는 것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는 놈이 면벽수련을 한다고 하자 가르딘은 말문이 막혀왔다. 천 룡신의 경지에 든 가르딘조차 환청이 아닌가 고심해 보았다.

  “너 진심이냐?”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심입니다.”

  투르의 시선은 한 점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다잡고 온 것 같았다.

  ‘가만, 그리고 보니 많이 달라졌네.’

  패기를 항상 몸 전체에 휘감고 다니던 녀석이 이제는 안으로 갈무리를 해놓고 있었다. 이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흐르는 기세가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안정되었다. 일이 바빠서 투르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 가르딘은 조금 미안했다. 투르의 성정을 바꾸어 놓은 것은 전적으로 가르딘의 탓이다. 신경이 조금 쓰이기는 했다.

  ‘원래의 성정을 찾아가는 건가?’

  투르가 유순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건 조금 곤란했다. 솔직히 과거의 성격이 가르딘은 더 짜증이 난다. 차라리 지금이 낫다고 할 수 있었다.

  “너희들은 신기 때문일 테고, 너는 무엇 때문에 면벽수련 하려는 것이냐?”

  “대련 상대가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

  아닌 것이 확실하자 가르딘은 두말하지 않고 허락해 주었다.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적당히 하고 와.”

  “알겠습니다.”

  “수련에 성과가 있길 바란다.”

  가르딘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성과, 투르는 방문을 나섰다.

  “하여간 독한 것들끼리 잘해 봐라.”

  저런 놈들과는 어울리는 것 자체가 피곤하다. 가르딘은 사라져 버린 녀석들에게 신경을 끄고 다시 업무에 열을 올렸다. 일은 정해진 시간 동안 열심히 하고 끝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업무를 퇴근 시간 이후까지 달고 다니면 이혼사유가 될 수 있다. 가르딘은 충실한 가장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했다.

  우웅!

  한참 업무에 열폭하는 중에 공간의 뒤틀림이 느껴졌다. 공간이동 시에 느껴지는 기운의 파동이었다. 파동이 느껴지기 무섭게 공간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골드드래곤 라이젠이었다. 라이젠은 혼자 오지 않았다. 푸른색 머리카락에 잘빠진 다리를 가진 미인과 같이 왔다. 여인은 레드드래곤 베로나였다.

  가르딘은 현재 라이젠이 중요하지 않다.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일에 매진하자 라이젠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사람이 왔으면 쳐다보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드래곤이 언제부터 사람입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지금 드래곤 무시하냐!” 

  “제가 언제 무시했습니까! 지금 일 바쁜 것 안 보입니까!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찾아오십시오.”

  라이젠은 가르딘의 대꾸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놈의 인간은 대화를 하면 화나게 만드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하는 말마다 드래곤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옆에 있던 베로나도 몹시나 놀라워했다. 드래곤과 이처럼 허물없이 대화하는 가르딘도 놀라웠지만 라이젠의 태도 역시도 의외였다. 

  ‘특이한 인간이네.’

  베로나는 가르딘의 요모조모를 자세히 관찰했다. 생김새 자체는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다지 많은 오러나 마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수련하지 않은 인간들의 오러 수준이었다.

  가르딘은 오러나 마나를 완전히 숨기지 않는다. 사람이 한 줌의 기운도 발산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또한 자연스럽지 않다. 천룡신의 경지에 든 가르딘은 언제 어디서든 자연스러운 상태다. 그 상태가 최적의 움직임을 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마! 세상이 위협받고 있는 중대한 시기에 업무 따위가 눈에 들어 오냐! 세상이 망하고도 일을 할 지독할 놈일세.”

  “세상이 망하든지 말든지 그걸 왜 저한테 따지는 겁니까! 제가 세상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제가 일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것 아닙니까! 가뜩이나 머리 빠질 정도로 고민스러운데 왜 염장을 지릅니까!”

  “이놈 정말 큰일 날 놈이네. 그럼 나는 세상을 망하게 했냐! 늙어 죽을 나이가 돼서도 고생하는 내가 안쓰럽지도 않냐!”

  “그건 중간계를 지켜야 하는 드래곤의 사명 아닙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앞으로도 5천 년 이상은 더 사실 것 아닙니까! 사람이라면 늙어 죽어도 900번은 더 죽었을 겁니다!”

  “잘났다. 이놈아!”

  끝까지 지지 않고 말대답을 하는 가르딘에게 한 방 시원하게 갈려주고 싶었지만 라이젠은 한 발 물러섰다. 지금은 한가하게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었다.

  “성녀는 어디 있냐?”

  “자기 방에 있겠죠.”

  “데려와라.”

  “쉴라를 찾을 거면서 공간이동은 왜 그곳으로 한 겁니까?”

  “여기에 공간좌표를 만들어서 그런다. 그리고 한 번 말하면 따지지 좀 마라, 뭔 말이 그렇게 많냐.”

  “남이사.”

  투덜거리면서도 가르딘은 시녀를 시켜 쉴라를 불러오도록 했다. 시녀가 쉴라를 부르러간 사이에 라이젠과 베로나에게 리베시안차를 대접해 주었다. 일단 손님대접은 해주었다.

  ‘불륜은 아니겠고, 드래곤은 나이를 알 수 없으니 판단을 못하겠네, 모르겠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가르딘은 잠시 둘 사이를 고민하다가 업무를 확인하고 직인을 찍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10분 정도 기다리자 쉴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작의 방에 들어오면서도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가르딘을 제외한 또 다른 사람들을 보자 쉴라의 눈동자에서 빛이 번쩍였다. 눈을 보면 내면을 볼 수 있는 신 안이 개방되어 있는 쉴라다. 내면에 감추어진 정보가 들어왔다. 오랜 연륜과, 힘, 인간과는 다른 이질성이 느껴졌다. 상대의 정체가 인간이 아님을 간파했다. 모든 종족의 최 정점에 있는 드래곤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드래곤이시군요.”

  “신안을 개방할 정도라니 대단하군,”

  라이젠이 보기에 쉴라는 역대 성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존재감을 완전히 지운 드래곤의 실체를 한순간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었다.

  라이젠과 베로나는 자신들의 존재를 설명하고, 쉴라와 대화를 나누었다. 쉴라는 드래곤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는 것을 알자 화색을 띠었다. 이제까지 봐온 어둠의 길드는 무서운 집단이었다. 그들의 능력은 보통의 인간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신성제국의 성기사와 병력을 파견하고도 막대한 피해를 본 것을 보면 드래곤의 개입이 희소식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베로나가 이제까지 조사한 어둠의 길드에 대해 쉴라에게 알려주었다. 쉴라도 신성제국에서 조사한 정보를 아낌없이 공유했다. 짧게 끝나지 않을 분위기였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데, 차하고 과자가 더 필요하겠네요.”

  “그렇지.”

  쉴라와 라이젠이 가르딘을 쳐다보았다. 노려보는 시선을 느낀 가르딘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의 집무실에 와서 토론을 하는 것은 둘째치고, 차와 과자까지 내놓으라니 그게 주인에게 할 소린가! 주인과 손님의 입장이 뒤바뀐 상황이다.

  “양심이 있는 겁니까?”

  “양심은 네가 더 없지, 지금 세상을 구하기 위한 중대한 회의를 하는데 그까짓 차와 과자가 아까운 것이냐!”

  “그... 건... 젠장!”

  세상 구하는데 차 마시고 과자 먹을 시간이 있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가르딘이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그리고 시녀를 시켜 차와 과자를 더 내어주는 관대함과 아량까지 베풀었다.

  과자와 차가 나오자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가르딘은 서탁에 놓인 서류를 확인하는 가운데 라이젠, 베로나, 성녀는 어둠의 길드를 찾을 방법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우리의 추적을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원래라면 계속 자취를 감추어야 정상이건만, 종적이 파악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인신매매를 한다는 것 자체가 수상한 일이라고 생각돼요.”

  “제국에서 매년 성혈을 가진 여아를 선택하게 되어 있는데, 요즘 들어 성혈을 가진 여아들이 갑자기 줄어들었어요. 그 이유가 이번 납치사건에 관계되어 있다고 보고 있거든요.”

  쉴라의 설명에 라이젠과 베로나의 표정이 굳었다. 단순한 납치가 아닐 것이라 여겼는데, 여아들이 성혈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에 느낌이 좋지 않았다. 드래곤들은 직감이 뛰어나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일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신탁의 마지막에 이르면 성혈이 마혈로 바뀌게 되면 어둠의 세상이 도래하게 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있어요. 성혈은 고귀한 피예요. 마혈이 될 수 없다고 봐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

  라이젠의 생각은 달랐다. 고귀한 피를 가졌다고 해도 결국에는 인간이다. 인간은 불규칙적인 성향을 가진다. 주변의 여건에 따라서 얼마든지 성향이 바뀌게 된다. 성혈은 단순히 피가 아니다. 성스러운 기운이 포함되어 있는 피다.

  하지만 고귀함을 잃고, 변질이 된다면 성향이 바뀔 수도 있는 일이다.

  “문제는 성혈이나 마혈이 아니야, 피로 무엇을 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지.”

  단순히 성혈이 마혈로 바뀌었다고 해서 세상이 어둠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그 이유를 파악해 내기 힘들었다. 라이젠도 딱히 정답을 유추하지 못했다. 그저 그럴 것이라는 추측만을 할 뿐이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또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지. 우선은 놈들의 근거지를 찾는 게 먼저야, 우리도 나서겠지만 신성제국도 나서야 할 거야.”

  “대신관님에게 서신을 보내놨어요. 빠른 시일 내에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놈들의 위험함은 성녀도 잘 알고 있겠지, 무턱대고 덤비지 말고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게 좋을 거야.”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이번 일은 단순히 인간들을 돕기 위한 일이 아니야, 그러니 감사할 필요는 없어.”

  미드라이언 대륙을 보호하는 것은 드래곤의 사명이다. 단순히 인간들만을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라이젠, 베로나, 쉴라가 열띤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가르딘은 업무에 집중했다.

  하지만 대화 내용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마왕의 강림과 대륙의 위험에 대한 내용이다.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잠시 업무를 멈추고, 누군가에 물었다.

  ‘이봐.’

  -왜?

  ‘성혈하고 마혈, 그리고 마왕의 강림이 관계가 있냐?’

  -있지.

  ‘있다고? 정말!’

  -그래.

  ‘그럼 나와서 설명 좀 해봐.’

  테리우스가 흔쾌히 승낙했다. 이제까지 나올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일이라면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지만 마왕의 강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마왕의 강림으로 인간계가 사라지면 정령계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모든 차원은 균형이 존재한다. 어느 한쪽의 균형이 깨지면 다른 한쪽도 소멸되도록 되어 있었다. 가르딘의 오러를 받은 테리우스가 정령계에서 가르딘의 집무실로 현신했다.

  라이젠과 베로나는 느닷없이 나타난 테리우스의 존재로 인해 혼란을 겪어야 했다. 정령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정도의 존재감은 아무 정령이나 가질 수 없다.

  “설마... 정령왕.”

  -딩동댕, 정령계의 꽃미남 테리우스다.

  라이젠의 시선이 가르딘에게 향했다. 가르딘이 특이하고, 이상하게 강한 인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령왕하고 계약을 했을 줄은 몰랐다. 정령왕의 능력은 고룡급 드래곤을 능가한다고 알려졌다. 정령왕과 계약을 하려면 친화력과 동화력이 극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대륙의 역사상 인간과 정령왕이 계약을 맺은 경우는 단연코 이번이 처음이다.

  “언제 정령왕하고 계약을 맺은 거냐?”

  “어쩌다보니.”

  가르딘을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라이젠이다. 정령왕이 어쩌다가 계약할 수 있는 존재인가, 베로나도 가르딘이라는 인간의 실체를 조금 더 알게 되자 새삼스럽게 다시 봐야 했다.

   ‘정령왕과 계약한 인간이라니!’

  드래곤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라이젠이 말한 대로 고룡급을 능가하는 실력과, 정령왕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중간계에서 가르딘을 이길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삼신기의 하나인 드래곤나이트까지 소유하고 있지 않는가! 그야말로 무적의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베로나의 표정이 호기심을 넘어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베로나가 관심을 가지는 반면에 라이젠은 심기가 뒤틀렸다. 가르딘이 정령왕과 계약한 것 자체가 배가 아팠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정령왕을 소환한 거냐?”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소환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데?”

  “마왕의 강림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라이젠은 쓸데없이 소환해서 대화를 방해한 것이라면 무시해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마왕의 강림하고 관련된 내용이라면 모른 척 넘어 갈수 없는 일이었다.

  가르딘은 테리우스에게 얘기를 해보라고 했다.

  -성혈과 마혈은 라이젠이 말한 대로 변할 수 있지. 특히 원한과 증오가 증폭되었을 때 성혈은 마혈로 변하기가 더 쉬워져. 여기서 문제, 왜 성혈을 마혈로 바꾸려고 할까.

  그것은 모두가 궁금해하는 핵심 질문이다.

  “이유가 뭔데요?”

  -데빌게이트라고 불리는 마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바로 마혈이야.

  “그게 말이 되나요?”

  쉴라가 쉬이 믿을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라이젠과 베로나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혈이 마계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소리는 금시초문이었다.

  -말이 되지. 어차피 마계를 만들은 마신도 주신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어. 주신의 자식이 왜 마신이 됐겠어. 결국 변질되었다는 뜻이잖아. 성혈이 변질되어 마혈이 되니 그 힘의 여파가 마계의 입구를 여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지. 하지만 쉽지는 않아.

  “쉽지 않다니요?”

  -마계의 문을 연다는 것은 차원의 문을 연다는 뜻과 같아. 한두 명의 마혈로 될 성싶어. 적어도 1천 명의 피가 필요해, 또한 때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양의 마혈을 모아도 마계의 문을 열 수 없어.

  테리우스의 설명에 쉴라, 라이젠, 베로나는 둔탁한 둔기로 머리통을 맞은 충격을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다. 고대의 역사 어디에서 이와 같은 방법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런 내용을 아무도 알지 못했죠?”

  -이제까지 누구도 그와 같은 방법을 써본 적이 없으니까, 당연히 모르지. 설사 할 수 있다고 해도 시기를 맞추기가 어려워, 정확한 시기는 나조차도 모르거든. 주신께서 세상을 구성하는 차원을 만들 때 인간계의 힘이 마계의 힘에 비해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여러 가지 보안책을 만들어놓으신 거야. 함부로 마계의 문을 열 수 없도록 말이지. 물론 그 모든 보완책을 뚫고 마계의 문을 연다면 정말 큰일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마계의 문이 열린 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미드라이언 대륙의 역사에서 마왕의 강림은 몇 차례나 있어 왔다. 그때마다 용사와 성녀가 나타나 마왕을 마계로 역소환시켰다고 전해졌다. 쉴라가 불안해하는 것은 정령왕의 마지막 말 때문이다.

  -물론 나도 마왕과 직접 부딪쳐본 적이 있지. 하지만 그놈들은 반쪽짜리도 되지 않는 놈들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소환에 의한 마왕의 강림은 힘의 3분의 2를 마계에 놔두고 와야 해. 하지만 이것은 문을 여는 거야. 소환이 아니라 터널을 뚫는다는 뜻이지.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감이 안 오지. 마왕이 온전한 힘으로 문을 열고 넘어온다는 뜻이야.

  쿠쿵!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다. 어둠의 길드가 행하고 있는 일이 만약 테리우스의 말대로라면 대륙 전체가 위험한 것은 자명했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놔둘 수 없는 일이다. 쉴라는 신탁의 예언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어둠이 온전한 힘으로 도래한다는 뜻이 바로 그것이었군요!”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은 거기까지야. 그 이상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테리우스는 할 말을 끝내고 정령계로 돌아갔다. 남겨진 라이젠, 쉴라, 베로나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되는 말을 잔뜩 한 후 사라지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해봤자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놈들이 발각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도 성혈을 가진 여아를 납치하는 것으로 봐서는 시기가 다가왔을 가능성이 커. 어서 빨리 놈들의 근거지를 찾아야 해.” 

  “맞아요. 표면적으로 드러난 수보다 훨씬 많을 거예요.”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도 철저히 해놓아야 할 거다.” 

  가르딘도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가르딘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어둠의 길드를 찾는 일은 가르딘보다는 드래곤과 신성제국이 더 잘할 것이다. 마왕의 강림을 대륙에 알리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어쭙잖게 알렸다가는 믿지도 않을뿐더러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었다. 

  ‘이거 불안한데.’

  지금보다 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가르딘의 뇌리를 자극했다. 이제 막 돌아왔는데 더 큰 위험에 직면해 있는 느낌이었다.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어둠의 길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은밀했지만 대륙에 깔려 있는 정보망을 모두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인포메드와 각 상단의 정보력이 신성제국과 연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둠의 길드가 노골적으로 여아들을 포획하기 시작했다. 제국과 왕국, 공국에서 납치된 소녀들이 한곳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대륙의 서쪽 끝 안개로 가려진 지대가 있다. 포그랜드라고 불리는 이곳은 사시사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농도 짙은 운무가 끼어 있는 곳이다. 또한 대지의 곳곳에 끝을 알 수 없는 늪지가 존재해서 일단 빠지면 살아 나오지 못한다. 늪지 사이사이로 존재하는 늪지몬스터까지 있어 사람의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곳이다.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지대를 향해 검은 복장을 착용한 이들이 서서히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대지 곳곳에 있는 늪지대를 피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안개로 가로막혀 있어 바로 앞조차 볼 수 없는 지대에서 방향을 잡고 걸었다.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법아이템 때문에 가능했다. 네비게이터(위치추적기)라고 불리는 마법 탐지기구가 방향을 잡아주었다. 네비게이터의 작동원리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포그랜드의 각 지점마다 마나석을 뿌려놓고 지점 자체에서 뻗어 나오는 성질을 지표로 삼아 길을 찾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열 명의 인원이 기절한 다섯 명의 소녀를 메고 들어가고 있었다. 길을 안내하는 자가 천천히 중심으로 인도했다.

  이들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는 운무 속으로 사라진 자들을 추적한 포레스트와 그란테스였다. 어둠의 길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놈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가 전보다 수월해졌다. 

  “이곳이 놈들의 본거지인가?” 

  “몇 번이나 확인을 했으니 확실할 거야.” 

  “이제야 찾았군.”

  그동안 농락당한 것을 생각하면 화가 풀리지 않는 포레스트였다. 어둠의 길드 총단이 이곳에 있다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켜 버릴 생각이었다. 어둠의 종자들은 단 한 놈도 살려 둘 수 없었다. 

  포레스트가 곧장 들어가려고 하자 그란테스가 제지했다. 

  “베로나가 오면 같이 가지.” 

  “오염된 벌레들을 처리하는데 나 혼자면 충분해.” 

  “로드께서는 같이 행동하라고 하셨잖아.” 

  “겁이 나나.”

  드래곤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들이다. 포레스트의 말은 그란테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우리는 위대한 종족이다. 하찮은 벌레 따위에게 겁을 먹지는 않아.” 

  “그렇지.”

  포레스트의 뜻대로 그란테스는 베로나를 기다리지 않고 포그랜드로 들어갔다. 놈들 중 일부에게 탐지마법을 걸어놓은 상태였다. 안개 속이지만 놈들을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포레스트와 그란테스의 신형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업무가 끝나고,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가르딘은 피곤한 업무를 끝냈다는 것에 만족했다. 이제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집무실에 라이젠과 베로나가 또 찾아왔다. 5일 전에 중대한 회의를 한 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가자.”

  “어디를 갑니까?”

  “가보면 알아.”

  괜히 따라 가면 고생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쉽사리 거절하지 못했다. 라이젠과 베로나의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역시나 그냥은 움직이지 않는 가르딘이다. 라이젠은 어쩔 수 없이 간략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듣고 있던 가르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섯 시간 전부터 어둠의 길드를 추적하던 드래곤의 소식이 끊겼다는 것이다.

  “그럼 영웅들을 데려가야지, 왜 저를 데려갑니까?”

  “그놈들은 아직 수련 중이잖아!” 

  ‘아, 면벽수련!’

  일이 정말 꼬이고 있었다. 다급해하는 라이젠과 베로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가르딘을 데리고 공간이동을 했다.

  퓨슝!

  간다는 말도 없이 공간이동이 된 가르딘은 안개로 덮인 대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대지 전체가 안개로 뒤덮인 지대였다. 가르딘이 알기로 이처럼 농도 짙은 운무를 자랑하는 곳은 한곳뿐이었다.

  “포... 그랜드.”

  “그래, 이곳에서 연락이 두절되었지.”

  가르딘은 운무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드래곤이 애들도 아니고, 굳이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둠의 길드를 추적 중이라고 했잖아. 베로나가 보낸 통신조차 되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

  베로나에게 포그랜드 안으로 들어간다는 연락을 하고 난 후 연락을 다시 했는데 통신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도 연락이 되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어쩔 수 없이 라이젠에게 연락을 하고, 가르딘을 데리고 온 것이다. 지금 당장 가장 한가하게 보이는 인간이 가르딘이었다. 또한 그가 대륙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적극적으로 데려왔다.

  “그럼 들어가자.”

  “작전도 없이 그냥 들어갑니까!”

  “굳이 작전이 필요하지도 않잖아. 보이는 족족 부숴버리면 되지.”

  고룡급 드래곤, 웜급 드래곤, 대륙제일기사 파티조합만 보면 대륙최강이다. 작전을 짜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지금은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빨리 들어가서 포레스트와 그란테스를 찾아야 했다.

  결국 가르딘도 라이젠과 베로나의 뒤를 따랐다.

  가르딘은 포그랜드라는 말이 괜히 나온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운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운무 자체의 성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몸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일반적인 장소보다 족히 세 배 이상의 중력을 받았다.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는 지역에 무게까지 무겁게 되면 가라앉는 것이 당연했다.

  ‘지랄 같네.’

  방향을 잡고 있지 않으면 금세 길을 잃기 딱 좋은 지대였다. 라이젠이 마나탐색을 통해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운무가 마나의 흐름마저 방해를 하였다. 대기에 퍼진 마나를 운무가 흡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적과의 간격을 재기도 힘든 대지였다.

  “네가 길을 안내해라.”

  “내가 무슨 길잡입니까? 무슨 수로 길을 안내하라는 겁니까?”

  “정령 놔두고 수프에 끊여 먹을래.”

  “정령이 그런 것도 합니까?”

  “그것도 모르고 정령왕과 잘도 계약했구나! 어서 대지의 정령을 불러!”

  “알았으니까 윽박지르지 좀 마쇼.”

  가르딘을 데리고 온 근본적인 이유였다. 마나의 흐름마저 방해받은 대지에서 길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가르딘의 정령술이라면 도움이 될 것이라 보았다.

  “대지의 정령 나와.”

   부웅!

  가르딘이 부르자 대지의 정령 디그러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령왕과 계약한 가르딘이라 계약 없이도 모든 정령에 대한 소환이 가능했다. 디그러버는 셀카와는 다르게 다리가 짧고,약간은 통통하며 대머리였다. 그에 반해 얼굴은 귀엽게 생겼다. 소환된 디그러버가 가르딘을 향해 절도 있게 인사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길 좀 안내해 줘야겠다.”

  -알겠습니다.

  가르딘이 길을 묻자 디그러버가 안내를 했다. 드래곤과 인간의 흔적을 찾아서 정령이 안내를 했고, 가르딘과 라이젠, 베로나가 그 뒤를 따랐다. 대지의 정령은 운무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흙이 있다면 어디든지 갈수 있었다.

  30분 이상을 빠르게 달려가자 운무로 가려진 거대한 성이 보였다. 온통 검게 칠해 있어서 흉흉하게 생긴 성이었다. 악마의 소굴이니 접근하지 말라는 포스를 좔좔 풍겼다.

  “저 성으로 들어갔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포그랜드 안에 이처럼 큰 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이 정도 크기의 성이라면 많은 인력과 장비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곳에는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 자체를 볼 수 없으니 은밀히 일을 꾸미는 자들에게는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어둠의 길드 총단을 찾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들어가려는 데 라이젠과 베로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러십니까?”

  “성에 들어서기만 했는데도 마나가 불규칙하게 변하고 있어.”

  라이젠과 베로나는 성 주변에 마나방해마법진이 설치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의 경우 이 정도의 마나장애에 흔들릴 정도는 아니다. 드래곤은 마나의 총체라는 드래곤하트가 있기에 마나방해로 인한 장애를 거의 받지 않는다. 

  “그럼 들어가지 말죠.”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자는 거냐! 잔말 말고 어서 가!” 

  라이젠이 앞서 걷자 그 뒤를 가르딘과 베로나가 따라서 움직였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걷는데 안개로 인해 습기가 많아서인지 음습하고 쾨쾨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가르딘은 성 전체에서 피냄새가 진동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를 자극하는 쾨쾨한 냄새는 피가 말라서 나는 비릿한 향과 같았다.

  ‘한두 명이 죽어서 나는 피냄새가 아니다.’ 

  뭔지 모르지만 께름칙한 느낌을 받은 가르딘이다. 수없이 많은 전장을 누볐던 가르딘이다. 피의 냄새에 따라 죽은 자의 숫자까지도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피냄새의 농도를 봐서는 수천 명 이상이 죽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건가!’ 

  피냄새만으로 모든 것을 다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성안으로 한참 걸어갈 때 곳곳에서 기관장치가 터져 나왔다. 성을 지키기 위한 기관장치였다.

  -실드!

  쿠우웅! 푸아아앙!

  기관장치의 위력은 굉장했다. 그러나 고룡이 펼치는 실드를 뚫어내지는 못했다. 드래곤하트에서 발산하는 마력이 투명한 막으로 형성되어 날아오는 날카로운 기관과 암기를 모조리다 분해시켰다.

  앞으로 나서지 않는 가르딘은 기관장치가 10분 이상 지속적으로 덤벼오는데도 인기척이 없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마나를 흡수하는 운무와 성 전체에 펼쳐져 있는 마나장애 마법진으로 인해 인기척을 확인하지 못하는 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 자체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한데?’

  가르딘이 고개를 젓자 베로나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기관장치가 터지는 소리가 성 전체로 퍼지는데도 막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다른 곳도 아니고 어둠의 길드 총단이라고 생각한 장소에서 말이야.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건가.”

  “그렇네요!”

   베로나도 가르딘이 지적한 대로 이상함을 감지했다. 인기척도 없고, 낌새조차 느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초조함을 자극하고 있었다. 최소한 먼저 들어간 포레스트와 그란테스의 기운이라도 느껴져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하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저 앞에 가고 있는 위대하신 분에게 물어야지.”

  “넌 좀 닥쳐, 나는 모르는 줄 알아.”

  ‘그걸 아는 드래곤이 그래!’

  라이젠이 한 소리 내며 앞으로 전진 했다. 불안감이 남아있다고 해서 마왕이 강림할지도 모르는 곳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또한 어떤 위험이 있다고 해도 막아 낼 자신감도 있었다. 가르딘도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고 인내했다. 같은 동족이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모른 척 넘어갈 수 없는 인지상정이었다.

  기관장치로 도배를 한 긴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공터가 나왔다. 빛조차 들어오지 않은 공터는 바로 앞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라이트!

  라이트 마법이 실현되자 공터 안의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피냄새가 진득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전체를 붉은 핏물에 담가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30명이나 죽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법을 소모하고 죽은 것처럼 보였다. 또한 그들과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존재들의 시체가 형체를 구분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찢겨져 있었다.

  “설... 마?”

  베로나는 죽은 시체의 복장이 눈에 익었다. 그것은 그란테스와 포레스트의 복장이었다. 드래곤이 현신도 하지 못하고 죽어 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라이젠과 베로나는 놀람과 분노가 뒤섞인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개체수가 열여덟 마리도 되지 않는 드래곤이다. 동족의 죽음을 예전처럼 방관만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가르딘의 표정이 굳어졌다. 성안에서 풍겨 나오는 불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가르딘의 시선이 공터의 좌측으로 꺾이는 사각지역에 머물렀다. 적은 기척과 기운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성 전체가 갑작스럽게 울렸다. 마기의 공명이었다. 

  기운의 울림과 동시에 마나의 기운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들어올 때 라이젠과 베로나가 느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둠의 마기가 성안을 휘감았다. 마기의 소용돌이가 성안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라이젠과 베로나는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래곤의 마력을 억제하는 마법진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흑마법진의 가장 잔혹한 마법진이라고 불리는 크리티컬데스였다.

  하지만 크리티컬데스는 자발적인 2만 명의 희생자가 필요하다. 또한 진을 작동시키는 고서클 흑마법사들의 생명력까지 요구한다. 마계의 기운을 이용한 죽음의 마법진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흑마법이 아닌 마법은 사용자체가 불가능하다. 만약 드래곤이 아닌 일반 마법사들이라면 마법을 사용하다 마나역류로 터져버릴 수도 있었다.

  “크리티컬데스라니!”

  “라이젠 님, 정말이에요!”

  “그렇다. 이 정도의 압박이라면 희생자가 엄청났을 것이다. 지독한 것들! 목숨을 이런 식으로 희생하다니!”

  라이젠과 베로나는 놀랐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마력이 억제되기는 해도 그 정도로 죽지는 않는다. 다만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란테스와 포레스트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드래곤이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데요.”

  “뭔 소리야?”

  “저쪽에서 웅크리고 있는 놈이 우리를 놓아줄 것 같지 않습니다.”

  그제야 가르딘이 지적한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벽이 튀어나온 사각지역이었다.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봤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그때였다.

  스윽!

  아무도 없는 벽이 꿈틀거리더니 공간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붉은 눈동자를 가진 준수한 존재였다. 놀라운 것은 기척이나 기운 자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놀랍군. 어설픈 도마뱀보다 훨씬 나아.”

   라이젠이 놈의 정체를 물었다.

  “넌 누구냐?”

  “어둠의 일족 데빌일루전 패코타라고 한다.”

  어둠의 일족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마족을 뜻한다. 패코타의 뺨에 나 있는 표식을 보니 중급마족인 것 같았다. 하계에 마족이 소환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반드시 희생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힘의 제한까지 걸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급마족의 등장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네놈이 그란테스와 포레스트를 죽인 것이냐?”

  “별 볼일 없는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더군. 결국에는 살려달라고 구차하게 비는 도마뱀을 잘근잘근 씹어서 죽여줬지.”

  “마족 따위가!”

  드래곤의 능력은 상급마족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웜급의 드래곤 둘을 중급마족 혼자서 죽였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무언가 다른 함정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화가 난 베로나가 나서려고 할 때 라이젠이 제지했다. 함부로 나서다가 알지 못하는 위험이 닥칠 수도 있었다. 신중하게 놈의 움직임을 파악한 후 대응하는 것이 나았다.

  씨익!

  “운이 좋군.”

  패코타는 입맛을 다시며 혀를 날름거렸다. 드래곤들을 쳐다보는 눈빛이 먹이를 눈앞에 둔 흉악한 맹수를 보는 듯했다. 드래곤과 마족은 상극의 존재들이다.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은 본성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가 비슷한 수준이었을 때나 보일 수 있는 행동이다. 패코타의 모습은 만용을 넘어 광증에 가까웠다. 실력 차이가 명백한 상황에서 보일 수 있는 행동이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빠져나갈 수는 없지.”

  스윽!

  패코타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기척이나 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빠르게 움직였다면 대기의 흐름이 미세하게나마 떨려야 했다. 패코타는 어둠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라이젠과 베로나가 대처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뒤.’

  가르딘의 천룡심어가 라이젠과 베로나와 뇌리에 전달되었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물러섰다.

  샤아아악!

  날카로운 손톱이 허공을 갈랐다. 허공마저 패코타의 손톱에 잘려 나가는 듯한 파공성이 들렸다. 패코타는 설마 피할 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패코타가 펼친 수법은 쉐도우 디멘션이었다. 어둠 속의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이 가능한 수법이다. 포레스트와 그란테스조차 낌새를 발견하지 못하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패코타의 장기였다.

  “이거 놀라운데?”

  라이젠과 베로나는 등 뒤로 훑고 지나간 날카로운 기운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가르딘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낭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마계의 종족도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 알려지지 않은 종족도 있기 마련이다. 패코타는 라이젠과 베로나가 알고 있는 마족이 아니었다. 어떤 기술을 부릴 수 있는지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최강의 마법으로 단숨에 끝장을 내는 것이 최적의 방법이다.

  -앱솔루트홀드(절대정지)!

  라이젠은 패코타가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9서클 마법인 앱솔루트홀드를 사용했다.

  패코타는 우습다는 듯이.

  -캔슬(해제)!

  드래곤의 용언마법을 마법으로 부딪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라이젠의 마력은 드래곤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급마족 따위의 마법이 통할 리가 없다.

  하지만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패코타의 캔슬마법이 앱솔루트홀드를 풀어버렸다. 마법이 풀리자 또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니?”

  어둠 속에 숨어버린 패코타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베로나가 마나디텍트를 주변에 펼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사방에 깔린 어둠의 마기가 베로나의 마법을 방해하고 있었다. 또한 라이젠의 마법도 전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는 위력이었다. 그에 반해 패코타는 가진 마력을 마계에서와 비슷한 수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쪽은 능력이 반감되고, 다른 한 쪽은 온전한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라이젠은 이것이 크리티컬데스에 갇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판단했다. 놈의 말대로 대기의 마나뿐만 아니라 드래곤하트의 마력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본체로 현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베로나, 조심해라. 놈은 능력의 대부분을 사용할 수 있다.’

  ‘알았어요.’

  라이젠과 베로나는 사용할 수 있는 본신의 능력을 모두 끌어올려 무뎌진 감각을 보충했다. 일단 놈이 나타날 때의 작은 틈을 노려보기로 했다.

  “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들려왔다. 공터 안을 울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패코타의 웃음이 라이젠과 베로나의 기감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다. 놈은 소리에 마기를 실어 공간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후방 좌측 3미터, 선 방어 후 공격.’

  그러고 보니 가르딘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어딘가에서 라이젠과 베로나에게 천룡심어를 날리고 있었다. 가르딘이 알려준 대로 베로나가 모든 마력을 동원하여 후방에 배리어를 쳤다.

  쿠우우웅!

  패코타의 다크붐버가 베로나의 배리어에 의해 막혔다. 베로나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패코타의 마력이 예상보다 더 강했다. 베로나가 패코타의 마법공격을 막는 즉시 라이젠이 서둘러 나섰다.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면 낭패였다.

  -버스트핸즈(폭열수)!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거대한 손이 어둠의 공간을 통째로 잡아챘다. 어둠이 화염의 열기로 끓어올랐다.

  “이... 런?”

  어둠 속에 숨어 있는 패코타가 당황한 듯한 탄성을 내질렀다. 설마 위치를 이처럼 쉽사리 발견하고 방비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신속히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이젠의 마법은 하나가 아니었다.

  -플라잉피스트(풍권)!

  퍼퍼퍼퍽! 퍼퍼퍼퍽!

  바람으로 형성된 주먹이 패코탄의 신형을 가격했다. 한 수에 수십 발의 풍격을 허용한 패코타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라이젠은 고서클의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빠르게 사용할 수 있고, 타격력이 높은 수법을 골라서 사용한 것이다. 강대한 충격을 받은 패코타였지만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마족의 또 다른 장점은 빠른 재생력과 회복력, 그리고 맷집이었다.

  파팟!

  마법이 끝나는 순간의 빈틈을 발견한 패코타가 마법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위기에서 빠져나온 패코타의 전신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타들어가 있었다. 얼굴을 맞은 패코타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화를 돋워주는구나! 이제는 편히 죽이지도 않겠다. 산 채로 죽어가는 느낌이 어떤지 알려주마!”

  패코타의 몸에서 거대한 마기가 용솟음쳤다. 지금까지는 그저 상대를 농락하기 위한 수법을 펼쳤을 뿐이다. 이제부터가 진짜라고 할 수 있었다. 크리티컬데스에서 무한정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있는 이상 패코타의 능력은 원래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었다.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상대할 자신감이 충만했다.

  파아아악!

  커어어억!

  패코타의 전신에서 뻗어나가는 마기가 주변을 휘젓는 상황이었다. 가까이 접근하기도 어려운 마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쑥 손이 튀어나와 패코타의 목을 등 뒤에서 잡아채는 존재가 있었다. 한순간에 목이 제압당한 패코타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지금 심정은?”

  “으... 놔... 라!”

  패코타는 숨이 덜컥 막혀오는 고통을 맛보았다. 더군다나 마기를 사용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목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기운이 패코타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기운의 여파로 인해 패코타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이 정도의 기운은 마계에서조차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라이젠과 베로나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패코타였다. 가르딘을 의식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반면에 가르딘은 느긋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놈의 신경이 자신에게 쏠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노렸다. 지금까지 라이젠과 베로나에게 천룡심어를 사용한 것도 패코타를 제압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라이젠과 베로나는 패코타와의 결전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처럼 허무하게 가르딘에게 제압당해 버릴 줄은 몰랐다. 위험을 느낀 자신들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가르딘은 패코타를 바로 죽이지 않았다. 궁금한 것들이 있는데 그냥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마족이니 마계의 동향과 지금의 사태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우선은 가장 궁금한 질문부터 쏟아내었다.

  “마왕이 강림하는 거냐?”

  “모른... 다!”

  “그래.”

  차악! 우드드득!

  우악스럽게 패코타의 오른쪽 어깨를 잡은 가르딘이 힘을 주자 뼈가 으스러졌다. 그 상태로 가르딘은 패코타의 팔을 잡고 댕겼다.

  푸아아앗! 주르르륵!

  패코타의 오른쪽 어깨가 절반 이상 뜯겨져 나가고 있었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가르딘은 마족의 팔을 뜯으며 다시 물었다.

  “정말 몰라, 나만 알고 있을게. 말해 봐.”

  연인에게 다정스럽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말투였다. 패코타는 온몸을 옥죄는 소름이 돋았다. 극악한 고통보다 가르딘이 더 무섭게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패코타는 중급마족에 불과하다. 마왕의 강림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정말 없다. 오랜만에 중간계에 소환돼서 유희를 즐긴 것뿐이었다.

  “정...말 모...른다!”

  완전히 뜯어내지 않은 패코타의 오른팔이 어느새 회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르딘이 오른팔을 잡고 다시 한 번 잡아 당겼다. 이번에는 좀 전보다 더 힘을 주었다.

  “크아아아아악!”

  패코타의 처절한 비명이 공터 안을 울렸다. 울부짖음에 가까운 비명을 들으면서도 가르딘은 태연하게 완전히 팔을 뜯어내서 바닥에 집어 던졌다.

  팔딱! 팔딱!

  뜯겨진 팔이 싱싱한 생선처럼 팔딱거렸다. 마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는 것 같았다.

  가르딘이 패코타의 귀에 대고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그럼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해 봐.”

  “이...놈! 어서 날 죽여라!”

  패코타는 절대 인간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가르딘은 패코타의 왼팔을 뜯어내고, 오른 다리를 서서히 잘라내 버렸다. 느리게 고문하여 고통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맛보도록 했다.

  “크아아아악!”

  온몸이 찢기고 부서지는 고통의 시간이 패코타의 마족 생에 가장 길게 느껴지고 있었다.

  버티면 버틸수록 고통은 점점 더 강도를 높여갔다.

  가르딘은 지독한 고통으로 인해 바동거리며 벌벌 떨면서도 말하지 않은 패코타가 지독하다 여겼다.

  “어디까지 버틸지 지켜보지.”

  시간은 많았다. 가르딘의 고문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선은 놈의 신체를 한 번 확인해 보았다. 신체를 알아야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을 찾을 수 있다.

  패코타의 몸 안에 흐르는 기운의 흐름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기운을 비틀었다. 순행을 하던 흐름이 역행을 하게 되면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수반한다. 이런 경우를 주화입마라고 하는데, 인간의 경우 병신이 되거나 무공을 상실하게 된다. 가르딘은 기운을 뒤틀고, 분골착근의 수법을 사용해서 뼈가 역으로 꺾이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피부를 잘게 잘게 갈라내어서 도려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패코타는 미칠 것 같았다. 겉에 드러난 상처보다 안에서 뒤틀리는 고통이 상상을 초월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버텨보려고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마기의 사용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에서 패코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았다. 그저 가르딘의 고문을 받고 비명성을 내지르는 것이 전부였다.

  한참을 버티던 패코타는 항복했다.

  “말... 하겠다.”

  “아직 정신 못 차렸네.”

  가르딘은 주변에 널린 돌덩어리 한 개를 집었다. 집어 든 돌덩어리를 패코타의 입에 강제로 처넣고. 발로 차버렸다.

  퍼어어억! 으드드득!

  입 안에 있는 이와, 살 조각이 돌멩이와 함께 으스러졌다. 핏물이 입 안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라면 입 안이 뭉개진 후 말을 할 수 없겠지만 패코타의 몸은 재생력이 뛰어났다. 폭포수처럼 쏟아나던 핏물이 금세 아물었다. 가르딘은 아물어가는 패코타의 입을 발로 계속 차며 어른이 아이를 타이르듯이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네 친구나. 공손하게 말해야지.”

  옆에서 지켜보던 라이젠과 베로나도 섬뜩한 광경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베로나의 놀람은 더 컸다. 가르딘이 저처럼 지독한 인간인 줄 처음 알았다는 표정이다. 라이젠과 말장난을 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가르딘이 마족보다 더 지독한 존재였다.

  ‘앞으로 저놈 성질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무서운 인간이구나!’

  라이젠과 베로나 모두 가르딘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돌아버리면 어떤 짓을 할지 아무도 몰랐다.

  얼굴이 완전히 망가지도록 발길질을 당한 패코타였다. 넝마가 되어버린 입술과 부서져 나간 코뼈, 이전의 준수한 모습을 다시 구축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려 할 것이다. 패코타는 맞는 것이 이처럼 고통스럽고 두려운 줄 처음으로 알았다. 마지막으로 지키려고 했던 자존심마저 송두리째 짓밟혔다. 가르딘은 마족에게 마권(마족기본보장권)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는 존재에게 마권은 사치였다.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하는 것이 도리였다. 

  “모... 드... 마... 하... 게... 습... 니다!” 

  “지금 발음이 이상하잖아. 똑바로 말 못 해! 그리고 병신처럼 왜 말은 떨고 지랄이야!”

  발길질로 인해 입안이 뭉개진 상태였다. 똑바로 말을 하려면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그 새를 못 참고 윽박지르는 가르딘이었다. 패코타는 괜히 중간계에 소환되어 악마 같은 놈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저처럼 지독하고 사악한 존재는 마계에도 없을 것이다.

  패코타는 지금까지 자신이 소환되어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빠짐없이 기억해 내야 했다. 잘못 말하거나 속이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는 가르딘이었다.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발견되는 즉시 패코타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할 정도로 고통을 당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너는 그냥 이곳에 소환돼서 드래곤을 처치해 달라고 부탁 받은 것밖에 없다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네 실력으로 그게 가능한 거냐?” 

  “크리티컬데스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하긴 이상한 마법진 때문에 다 늙어 빠진 노친네가 겔겔거리기는 했지.”

  가르딘의 말투를 들었는지 라이젠이 발끈하려다 베로나의 만류에 멈추었다.

  ‘내 저놈과 상종하면 드래곤이 아니다.’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공터 안에 들어왔을 때 죽은 흑마법사 30명이 모두 7서클이라는 것과, 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패코타를 소환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곳은 어둠의 길드 총단이 아니었다. 놈들은 이곳을 미끼로 드래곤을 유인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했다. 대륙 전체에 동시 다발적으로 요원들을 총동원한 것도 모두 어둠의 길드가 부린 수작이었다.

  “그렇지만 너를 어떻게 믿지.”

  “사...실입니다!”

  패코타는 두려운 듯 살려 달라고 빌었다. 또다시 그런 지독한 고통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이대로 마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패코타의 절절한 눈빛이 통했을까!

  “믿어주지.”

  “감사... 합니다!”

  패코타는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가르딘의 다음 말에 절망감과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그래도 살려주지는 않아.”

  “치... 사한... 커억!”

  댕강! 데구르르르!

  가르딘의 검이 패코타의 목을 베어 내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가르딘의 검에서 믿을 수 없는 검력이 뻗어 나와 패코타의 전신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까지 겪어온 징그러운 놈들이 재생이라는 특수한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몇 번이나 경험한 가르딘은 손속에 적당히라는 것을 지웠다. 패코타의 흔적을 완벽히 지우고, 기운까지도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패코타가 소멸하자 마기의 기운이 변화를 일으켰다. 흐름이 변화를 일으킬 때 가르딘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불안감을 느낀 가르딘이 기감을 확장시켰다. 공터의 지하 깊은 곳에서 흐름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설마? 젠장!”

  이런 불안감은 전에도 몇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공간이동 안 되죠?”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런 제길! 어서 도망치죠.”

  가르딘이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장 신법을 전개했다. 지하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의 정체가 가르딘이 예상하는 것과 일치한다면 분명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라이젠과 베로나는 가르딘이 신속하게 도망치는 이유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우선은 뒤를 쫓았다.

  두두두두둥!

  공터를 벗어나기 일보직전에 성 전체에 작은북을 치는 듯한 진동과 흔들림이 발생했다가 멈추었다. 대기의 흔들림이 잠시 웅크리며 숨을 고르는 것 같았다. 잠시간의 흔들림이 끝나고 난 후 다크캐슬이라고 불리는 성 아래 뭉쳐져 있던 수천 개의 마력탄이 일시에 폭발을 일으켰다.

  투과과과과과과광! 꽈과과과과과과광!

  마력탄의 위력자체가 이전과는 천양지차였다. 크리티컬데스의 기운과, 마족의 기운까지 흡수를 한 것이다. 포그랜드의 운무가 흡수한 기운이 마정석에 5백 년 이상을 모아진 것이었다. 그 위력은 상상을 불허했다. 터지자마자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소멸에 가까운 위력은, 메테오를 능가했다.

  직경 1천 미터나 되는 성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그 틈에 끼인 가르딘과 라이젠, 베로나는 경악성을 터뜨렸다. 함정의 위력이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미치겠군.”

  가르딘은 천룡무상신공을 운용하여 천룡무상강기를 몸 주변에 형성했다. 무상의 강기와 폭발의 위력이 부딪치며 파공성을 내었다. 주변은 폭발로 인해서 불길이 사방을 뒤덮었다. 폭발은 10번이나 반복적으로 벌어지며 성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르딘이 불길을 뚫고 밖으로 나가자 그 뒤를 따라 라이젠과 베로나도 따라 나왔다. 사실 조금만 늦었으면 라이젠과 베로나는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마력탄의 위력은 강력했다.

  울컥!

  화염을 뚫고 나온 라이젠과 베로나는 마나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폭발의 순간 무리하게 앱솔루트배리어를 사용했다. 또한 폭발의 여파로 인해 드래곤하트까지 충격을 받았다. 내상을 치료하고, 마법력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이다.

  라이젠이 가르딘을 쏘아보았다.

  “왜 그럽니까?” 

  “치사하게 먼저 도망 치냐?”

  “저는 아내와 딸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 때문에 살지 않았습니까.”

  “나는 딸이 없나! 치사한 놈!”

  “명색이 드래곤이 그 정도에 충격을 받다니, 역시 늙으면 죽어야!” 

  “너 정말 죽을래!” 

  “농담입니다.”

  라이젠도 알지만 가르딘이 얄미워서 한소리 했다. 가르딘은 생채기 하나 남지 않았다. 브레스에 버금가는 폭발 속에서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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