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귀로@@]
가르딘과 일행은 대륙을 횡단하여 헥토르 영지로 들어섰다.
사우스랜드에서 카이로만 제국의 서북쪽으로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는 동쪽으로 돌아서 가는 것이 빨랐다. 헥토르 영지의 외곽 타리언이라는 마을에 도착한 가르딘과 일행은 마을에서 여장을 잠시 풀기로 했다. 복장에 쌓인 먼지가 수북했다. 쉬지 않고 말을 달린 결과였다.
오랜 시간 쉬지도 않고 달려왔기에 쉴라의 불만과 앙탈이 장난 아니었다. 예민한 시기도 아닌데 무척이나 예민했다. 하는 말마다 가시가 돋쳐 있는 쉴라였다. 가르딘은 고지가 바로 코앞인데 멈추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이대로 더 시간이 지났다가는 쉴라가 폭발할지도 몰랐다. 결국 가르딘도 마지못해 여관에 들어섰다.
타리언은 헥토르 왕국의 외곽이기는 해도 주변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한 교통의 중심지였다. 제법 많은 사람들과 상인들이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곳곳에 묵고 갈 수 있는 식당과 여관이 많이 보였다.
가르딘은 전쟁이 끝난 후 헥토르 영지의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서 교역로를 확보하도록 지시를 내려놓았었다. 또한 각 지역마다 특산물을 생산해 낼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해주었다. 그런 곳 중에 한 곳이 타리언이었다. 가르딘의 바람대로 그 사이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갑자기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지 치안상태가 썩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쉴라가 선택한 여관에서 복장을 풀고 피곤해진 정신과 신체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쉴라와 리니안은 복장을 푸는 즉시 목욕을 하기 위해 탕에 들어갔다. 가르딘도 방안에 들어와서 복장을 풀고 쉬었다.
목욕이 끝나고 난 후 2층에서 내려와서 식당으로 갔다. 가르딘이 미리 주문을 해놨기에 주인이 탁자에 음식을 차려놓았다.
가르딘과 신성, 쉴라, 리니안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즐겼다. 음식으로 나온 것들이 제법 입맛에 맞았다. 물론 리니안은 간단한 야채와 과일로 식사를 대신했다. 엘프들은 그다지 많이 먹지도 않는다.
“먹고 내일 출발할 거다.”
“알았어요! 그러니 재촉 좀 하지 마세요!”
가르딘과 쉴라의 티격태격은 지속되었다. 리니안은 그것이 못내 부러웠다. 가르딘과는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오행심법을 배우고 있는 그녀로서는 가르딘이 고마우면서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다. 일평생 한 사람을 반려자로 선택을 해야 하는 엘프로서는 이미 혼인을 한 사람에게 정을 줄 수도 없었다.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리니안은 마음을 좀처럼 다잡기 힘들었다.
여관의 문이 열리고 용병들 여덟 명이 들어왔다. 상단에서 교역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원을 용병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요즘 들어 용병들의 왕래가 많아진 타리언이었다. 오랫동안 용병생활을 한 용병들은 대부분 거칠고 예의가 없다. 상대가 귀족들만 아니라면 거칠 것 없이 행동하는 게 용병들이다. 더군다나 타리언의 치안 상태는 그리 좋지도 않았다. 주변에 제재를 가할 병사들이 없자 용병들이 활개 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호오!
“이것 봐라.”
한 용병의 눈에 식당의 구석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가르딘 일행이 보였다. 복장을 보니 단순히 여행을 하는 자들처럼 보였다. 능글맞은 중년인에 어려 보이는 놈들이 전부였다. 문제가 될 소지가 없음을 간파한 용병들이다. 가볍게 겁을 주면 모든 일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여겼다. 눈동자에 검상이 있는 용병이 쉴라와 리니안을 보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는 가프라는 엑스리버 용병단의 용병이었다. 가프가 쳐다보자 다른 용병도 쉴라와 리니안을 발견했다. 이런 변방의 시골영지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기막힌 매력을 지닌 여자들이었다.
쉴라와 리니안은 평상시의 모습을 하고 다니기에는 외모가 너무 눈부셨다. 가는 곳마다 마찰이 벌어질 것이라 여긴 가르딘이 그녀들의 외모를 변환시키기 위해서 마법아이템을 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생긴 얼굴이라고 할 수 없다. 쉴라와 리니안의 전신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매력이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그걸 느끼지 못하는 가르딘과 스필언, 미토스가 이상한 것이다.
가프가 눈짓을 보내자 용병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가프가 산만한 덩치를 이끌고 가르딘이 식사하고 있는 탁자에 그림자를 새겼다. 가르딘과 일행은 그들의 등장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쉴라와 리니안만이 잠시 식사를 중단하다가 설마라는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었다.
-미치지 않고서 그러지는 않겠지.
용병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무슨 짓인지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세상사가 다 그렇듯이 직접 당해봐야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큰 소리를 내며 다가왔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자 가프의 인상이 구겨졌다.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성질 급한 가프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이것들이!”
착!
가프가 탁자를 향해 팔로 내리찍었다. 용병계에서 이름 좀 알린 A급 용병인 가프였다. 탁자가 반토막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탁자 바로 위에서 멈추었다. 주먹을 내리찍기 전에 누군가 그의 팔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가프의 시선이 스필언에게 향했다. 스필언이 가프의 팔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막았다.
“어쭈! 힘 좀 쓰는데!”
가프는 팔을 다시 빼려고 했다. 당연히 빠져나올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안간힘을 다 써도 팔이 빠지기는커녕 그대로였다.
“이이이익!”
가프의 얼굴과 전신에 힘줄이 생겨났다. 모든 힘을 다 주려는 순간에 스필언이 팔을 어이없이 놓았다. 있는 힘껏 잡아당길 때 손이 풀려지는 바람에 균형을 잃은 가프가 뒤로 넘어지면서 주변의 탁자를 어지럽혔다.
쿠다다다당!
널브러진 가프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주변의 용병들이 껄껄대며 웃었다. 가프 혼자서 미끄러진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 너 뭐 하냐?”
“시끄러워!”
가프는 자신을 창피하게 만든 스필언을 그냥 두지 않을 생각이다. 세상이 무섭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해줄 작정이었다.
“이놈! 가만두지 않는다!”
가프가 화를 내든 말든 가르딘과 일행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쉴라와 리니안도 걱정이 되는 것은 용병들이었다.
“쉴라야, 전에 호신술 좀 가르쳐 달라고 했지.”
“그런데요.”
“지금 보여주마.”
일어서려는 스필언과 미토스를 제지하고 가르딘이 나섰다. 귀찮아서 웬만한 일에는 나서지도 않는 가르딘이 솔선수범하자 쉴라가 의외의 시선을 보냈다.
“웬일이세요.”
“그냥, 심술이지.”
가르딘도 저런 놈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무력만 믿고 여자를 함부로 대하려는 놈들이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따끔하게 혼을 내주어야 다시는 그런 마음을 먹지 않을 것이 다. 더군다나 쌓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라이나를 보지 못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오늘 용병들은 재수 옴 붙은 날이 될 것이다.
“당장에 호신술로 사용할 수 있는 것, 몇 가지만 알려주지.”
성난 황소처럼 가프가 달려왔다. 삽시간에 가르딘을 박살 내 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넌 비켜!”
애초부터 가프의 목표물은 스필언이었다. 가르딘은 그저 밟고 지나가는 계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계단이 한없이 높다는 것을 가프는 깨달았어야 했다.
퍼퍽! 빠각!
“으윽!”
계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큼성큼 달려오던 가프의 두 다리 사이의 중심이 가르딘의 오른발차기에 적중했다.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던 가프의 눈이 돌아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입에서 저절로 거품이 생겨 나왔다. 전신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1단계 에그브레이크다. 한 방 맞으면 사내놈들은 힘이 쭈욱 빠져 버리지.”
다음으로 가르딘이 고개를 숙이는 가프의 머리끄덩이를 한 움큼 잡아당겼다. 머리카락이 잡힌 가프는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미 중심을 걷어차인 상태라 반항할 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2단계 헤어캐치다. 머리카락을 잡으면 저항하지 못하고 수그리고 따라오게 되어 있어.”
가프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으로 인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사이에 눈을 떴더니,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아래서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파아앗!
“커어어억!”
가르딘이 가프의 턱을 무릎으로 차올린 것이다. 정확하게 턱을 맞은 가프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잡아당기는 힘을 이용해서 무릎으로 찼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다.
A급 용병이 반항 한 번 못 하고 쓰러지는 무시무시한 연속기가 아닐 수 없었다. 보기에는 저질3단콤보처럼 보이지만 위력만큼은 절대적이었다.
“3단계 니킥이다.”
“심한데요.”
“죽지는 않아.”
“그렇기는 하네요.”
쉴라도 보통 성녀라고 볼 수는 없다. 아무나 다 보살피고 사랑을 주는 성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역대 성녀 중에서 성품으로 따지면 최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세상에 마냥 착하기만 한 성녀가 옳다고 볼 수만은 없다. 성녀는 신의 선택을 받은 여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다. 사람이 어찌 모든 사람을 다 좋아 할 수 있는가! 그건 신조차도 결정하지 못한다.
바닥에 게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는 가프를 보면 절대 저처럼 태평한 소리는 하지 못할 것이다.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것이 불쌍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제야 용병들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하며 지켜보고 있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용병들이 일어나서 가르딘을 노려보았다. 용병들의 사나운 기세가 식당 안을 소용돌이쳤다. 눈빛만으로 찢어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다. 반면에 가르딘은 태연하다 못해 느긋했다. 벌레 같은 놈들이 덤벼 들어봤자 벌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 할줄 아느냐!”
“이런 짓이라. 그게 뭔데?”
“말 돌리지 마라! 이제는 아무도 못 나간다!”
“적반하장이라, 뭐, 좋아! 나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말이야.”
용병들이 가르딘의 주변을 감싸며 도망치지 못하게 막아섰다. 흉흉한 살기가 감돌았지만 가르딘을 비롯한 일행은 그것마저도 무시하고 있었다. 태연한 가르딘과 일행의 모습이 용병들의 심기를 자극했다. 두려움에 떨며 용서를 빌어도 시원찮은 놈들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느꼈다.
“죽어랏!”
무기를 꺼내 든 용병이 가르딘을 향해 찔렀다. 찔러 들어오는 검이 가르딘에게는 하품이 날 정도로 느렸다. 요즘 들어 오러마스터 이상의 놈들하고만 대결을 벌였다. 그 이하는 눈에 차지도 않았다. 검이 들어오는 동안 세수하고, 발 닦고, 잠을 자도 될 것 같았다.
용병이 찌른 검이 가르딘의 신형을 꿰뚫었다. 용병은 회심의 미소를 짓다가 눈이 돌아갔다.
빠각!
이번에도 계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을 피하고 용병의 팔 안쪽으로 파고 들어간 가르딘이 발을 차올렸다. 정확하게 낭심을 가격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용병의 허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그 순간에 머리끄덩이를 잡아끌며 니킥을 날렸다. 또다시 가프와 같은 희생양이 생겼다.
가르딘은 쓰러진 용병놈을 보고 가볍게 비웃어 주었다.
“한 번 보고도 또 당하다니, 모자란 놈이구나!”
“치사한 놈!”
한 번은 그럴 수 있지만 두 번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했다. 분명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더군다나 놈은 치사하게 사내의 중심을 당연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자신들의 중심을 가리는 동작을 했다. 맞는다는 상상만으로 전신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가르딘이 먼저 용병들 사이로 들어갔다. 여섯 명의 용병이 가르딘을 감싸듯이 에워쌌다.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그 찰나의 순간에 가르딘의 풋워크가 바닥에 작렬했다.
파파파파파팟!
“크아아아악!”
발등이 가르딘의 발에 밟히자 힘을 쓰지 못하고 쩔쩔매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힘이 실린 발 밟기는 극강의 고통을 안겨준다. 발등은 인체의 부위에서 아픈 곳 중에 하나다. 일정 수준 이상의 힘을 주어 밟게 되면 웬만한 인내심을 갖지 않고서는 참아내지 못한다. 고통이 가라앉으려면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가르딘은 그런 시간을 줄 인간이 아니다. 틈이 벌어진 그 순간 가르딘이 한 명씩 상대를 해주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젬브라는 용병이 가르딘을 빠끔 보았다. 보는 순간 젬브는 어둠과 고통이 찾아왔다.
파팟!
“아아아악! 내... 누우운!”
가르딘의 검지와 중지가 벌려지더니 젬브의 두 눈을 찔렀다. 눈을 찔린 젬브는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사방을 허우적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르딘은 젬브를 제외하고 나머지 용병놈들에게도 같은 고통을 선사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든 치사한 공격의 연속기였다. 마지막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더글라스가 눈 찌르기를 막기 위해서 손날을 들어 코에 가져다 대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번에는 가르딘이 두 손의 검지를 사용하여 찔렀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용병들을 장님으로 만든 가르딘이 차례대로 에그브레이크를 작렬시켜주었다.
빠각! 빠각! 빠각! 빠각! 빠각! 빠각!
속수무책으로 에그브레이크에 당한 엑스리버 용병단원들 이었다. 변변찮은 반항은커녕 공격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바닥을 나뒹구는 용병단원들 모두 게거품을 문 상태로 눈이 돌아가 있었다.
“어때, 쉴라야. 아주 간단하고 위력적이지.”
“쓸 만은 하네요.”
“쓸 만한 정도가 아니야, 아주 대단하지.”
“그런데 심술이라고 하기에는 아저씨가 나서는 것이 조금 이상한데요.”
“그냥 심술이 아니지, 내 영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짜증나는 일이지.”
다른 영지라면 모른 척 지나갈 수 있지만 헥토르 영지는 가르딘의 영지였다. 찌꺼기 같은 용병놈들이 영지를 어지럽히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일이었다.
싸움이 벌어지기 무섭게 도망치듯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던 식당 주인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일이 벌어지면 나 몰라라 하는 전형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르딘은 주인장의 처세술을 탓하지 않았다. 나약한 자가 배짱부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주인장은 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다. 함부로 나서서 목숨을 위협받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죽고 나면 아무 소용도 없다. 이후 가족들이 받을 고통을 생각을 해보아라.
주인장은 가르딘이 용병들을 다 처리할 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근방에서 매번말썽을 부리는 놈들이 엑스리버 용병단이다. 놈들이 가는 곳마다 말썽을 몰고 다닌다. 더군다나 제법 많은 수의 용병단이라 건드리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잘못 건드리면 화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손님, 저들은 엑스리버 용병단입니다. 이곳에 있다가는 놈들의 대장이 올지도 모릅니다. 어서 피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주인이었다. 가르딘으로 인해 자신까지도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괜한 일에 불똥 튀는 일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주인장이다.
“용병들의 피해가 많은가 보군.”
“말도 마십시오. 용병들이 이곳저곳에서 오는 바람에 마을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마을이 발전하면서 용병들이 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는 것이다. 많아진 인원을 감당할 만큼의 치안병력이 확립되지 않았기에 발생한 문제였다.
주인장의 말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한 일이었다. 이곳만의 문제라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걸리는 게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딘이 일일이 다 찾아다니면서 놈들을 처리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생각지도 않은 병폐군.’
영지발전을 하루 속히 이루려고 한 계획이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계속 발전을 해왔지만 이로 인해 발전 속도가 점점 늦어지고, 영지의 소문이 안 좋아지게 될 것이다.
끄으응!
욱신! 욱신!
가장 먼저 가르딘의 저질3단콤보를 맞고 기절해 있었던 가프가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든 가프는 하체의 중심이 욱신거렸다. 이대로는 걷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가프가 완벽히 정신을 차렸을 때 가르딘이 눈앞에 보였다.
“이...놈! 허...안 돼!”
빠각!
“크어어어어엉!”
아픈 곳을 또 맞았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파왔다. 이번에는 기절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가르딘의 발바닥이 보였기 때문이다. 또다시 맞게 되면 사내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감이 밀려왔다. 장가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청춘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살려 주십시오!”
그제야 가르딘이 발을 멈추었다.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꼰 가르딘이 가프를 내려다보았다. 가프는 고통만 사라지면 반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주변에 쓰러진 동료들을 보자 그런 생각이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버렸다. 상태를 보니 다들 자신과 같은 꼴을 당한 것이다. 극심한 고통은 겪어본 자만 알 수 있었다. 가프는 돌연 가르딘이 무섭기보다 사악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최소한 B급 이상의 용병들이 반항 한 번 못 하고 당할 정도면 상대는 그 이상의 강자라는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사한 공격을 당연하게 한 것이다. 가프는 두려웠다. 가프도 제법 흉악하다는 악명을 얻고 있었지만 가르딘은 그의 생각을 초월하고 있었다.
“용병이면 용병 일이나 할 것이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나대는 것은 목숨이 여벌로 많이 있다는 소리겠지.”
“다...음부터는 절대 못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가프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고로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네 표정을 보니 정말인 것 같군.”
가프는 가르딘이 믿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서 해방이 되자 안심이 되었다.
“그럼 가봐.”
“그냥 가도 됩니까?"
“왜 가기 싫어.”
“아... 닙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금세 일어서더니 밖으로 뛰어 나가려고 하는 가프였다. 혼자 도망치려는데 여념이 없는 가프에게 가르딘이 한소리 더했다.
“동료들도 데리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가프는 허겁지겁 동료를 깨우고 여관 밖으로 도망을 갔다. 가르딘은 사라지는 용병들을 내버려두고, 스필언에게 눈짓을 보냈다.
“따라가서 다 부숴버려.”
“예.”
가프는 가르딘을 잘 모르고 있었다. 뒤끝 있는 인간 유형 중에서도 가장 많은 뒤끝을 보유하고 있는 가르딘이다. 그냥 보내주겠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스필언에게 일 처리를 맞기고 난 후 가르딘도 여관을 나섰다.
가프와 용병들은 뒤도 보지 않고 엑스리버 용병단이 있는 장소로 달려갔다. 달리는 가운데서도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다리가 후들거리기까지 했다. 가프는 낭심이 으깨지는 고통을 잊을 수 없었다. 지독한 복수심을 느꼈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용병단을 전원 동원 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악한 놈과 애송이 두 명, 계집들까지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계획이다.
엑스리버 용병단은 타리언에 100명이 상주해 있었다. 총 용병단원이 500명이나 되는 중규모의 용병단이다. 대륙5대 용병단 중에 하나인 블러드 용병단의 단주를 비롯한 용병단의 중요인물들이 죽고 난 후 사라져 버렸다. 이후 4대 용병단을 제외한 용병단들이 힘을 규합하여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경합을 벌였다. 엑스리버 용병단도 그 중에 하나인 용병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륙5대용병단의 빈자리는 나이트윙 용병단이 차지를 했다. 전쟁 시 패망한 기사들이 용병단을 만들어 자리를 꿰찬 것이다. 분패를 당한 엑스리버 용병단은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발을 붙이기 힘든 상황에서 헥토르 영지는 힘과 세력을 모으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상단과의 교류가 활발한 반면에 인구가 적고, 병력이 적었다. 용병들을 제재할 수단이 많지 않은 것이다. 그 틈을 파고들었다. 엑스리버 용병단과 같은 용병단은 하나가 아니었다. 헥토르 영지에 들어온 용병단만 해도 족히 열두 개는 되었다. 하나같이 중규모 이상의 용병단이었다. 용병단이 난립을 하다 보니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제재하기도 힘들었다. 상단과 연계를 한 용병단이 많기 때문에 용병단을 억제하면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엑스리버 용병단의 대장인 반엑스는 꼴 같지 않게 맞고 온 가프와 용병들을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병신같이 어디서 쳐 맞고 온 거냐?”
“외지에서 온 놈들이 갑자기 덤벼들어 기습하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뭐야? 병신 삽질을 하고 다니고 있어. 그놈들 정체가 뭔데?”
“여행자인 것 같았습니다.”
“지랄을 해라, 거기 여자 있었지.”
“그... 건!”
순간 말문이 막힌 가프였다. 반엑스는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이다. 수하들의 습성을 모를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놔두는 것은 용병대의 악명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우습게 보이지 않아야 용병대를 운영하는데 편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시작을 했으면 끝장을 보던지 해야지, 도망을 쳐! 이런 병신 닭대가리 새끼들을 봤나!”
“죄... 송합니다!”
반엑스 앞에서 쩔쩔매는 가프였다. 일단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반엑스였다.
‘병신들 때문에 쌓아온 악명이 깎이게 놔둘 수는 없지.’
그가 지금까지 참고 견디며 헥토르 영지에서 힘을 모으는 것은 다시 대륙 5대 용병단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이대로 여기서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헥토르 영지에 들어온 용병단만 해도 열두 개가 넘는다. 그중 세 곳은 반엑스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곳이다. 놈들에게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놈들 어디 있어?”
“아직 여관에 있을 겁니다!”
“간다.”
“예!”
가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알이 터지는 고통을 그놈에게도 선사해 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네놈의 알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반엑스와 용병들이 여관으로 막 출동하려고 할 때 누군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용병들은 새파랗게 어린 놈 한 명이 앞을 가로막고 길을 열어주지 않자 기가 막혔다. 오늘따라 신기한 구경을 많이 하고 있는 용병들이었다.
“저놈은 그놈들 중에 한 명입니다!”
“병신같이 꼬리를 달고 온 거냐?”
“그... 것은.......”
“됐어! 그보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진짜! 고작 애송이놈에게 엑스리버 용병단이 우습게 보였다는 말이지.”
가당찮은 일이 계속 벌어지자 반엑스가 어처구니없이 웃었다. 잠시 웃었던 그의 눈가에 지어진 주름이 펴지더니 금세 흉신악살처럼 변해갔다. 살기가 번들거리는 맹수의 눈으로 변한 것이다.
“우습다면 우습지 않게 만들어주지. 조져!”
엑스리버 용병단의 무서움을 다시 한 번 알려 주려는 반엑스였다. 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용병들 3명이 청년에게 튕겨져 나갔다. 반엑스룰 호위하는 일급용병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라면 웬만한 기사라고 해도 쉽게 상대하지 못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퍼퍼퍽!
쿠다다당! 쿠다다당! 쿠다다당!
뱃가죽을 때리는 세 번의 충격음이 들리고 나서 용병 세 명이 세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한 방씩 맞은 용병들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꼴사납게 날아가 바닥에 처박혀 널브러진 상태로 기절해 버렸다.
“아니?”
너무 젊어서 애송이라고 본 놈의 실력이 굉장하다는 것을 안 반엑스였다. 주먹을 휘두를 때의 궤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상대는 절대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쫘악 뻗쳤다.
반엑스가 가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가프였다. 애송이라고 본 놈의 실력이 가프가 보기에도 굉장했다.
하지만 놀람은 시작에 불과했다.
스필언의 신형이 용병단을 향해 쏘아져 왔다. 한순간에 공간을 무로 돌린 스필언의 연속적인 권각술이 용병들을 향해 작렬했다.
빠아아악! 빠아아악!
한 방 맞을 때마다 용병들은 3미터 이상을 공중부양했다. 숫자는 스필언에게 무의미했다. 용병들은 눈이 번쩍하는 빛을 본 것이 전부였다. 주먹이 날아와서 한 대 치자 의식은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뭐...야? 커억!”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후, 좌우 거칠 것이 없는 경쾌한 움직임이었다. 반엑스는 무기조차 들지 않은 놈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을 생생하게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그가 알기로 이 정도로 강한 존재는 기사들뿐이다. 그것도 상급의 기사들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더군다나 놈의 박투술은 대단히 실전적이었다. 온실에서 검술만 익힌 애송이가 절대 아니었다.
“이런 개 같은 일이! 가프! 이 개자식아! 도대체 누굴 건드린 거야!”
“저...는 그저!”
“병신! 사람 보는 눈도 없냐! 저게 무슨 떠돌이 여행자야!”
“죄... 송... 합니... 다!”
“죄송하면 다야! 빨리 덤비지 않고 뭐 해!”
“알... 겠습니다!”
가프는 최소한 도망은 치지 않았다. 여기서 도망치면 정말 죽을 수 있었다. 차라리 싸우다 쓰러지는 게 나았다. 가프가 정신없이 용병들을 쓰러뜨리고 있는 스필언을 향해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 등 뒤로 달려들었기에 뒤에 눈이 달리지 않는 이상 칼침이 성공하리라 보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바로 정지됐다.
“커어어억! 하... 필... 떠... 그럴!”
꼴까닥!
맞은 데 고스란히 또다시 맞은 가프였다. 스필언의 무릎이 가프의 낭심을 걷어올렸다. 발도 아닌 니킥의 파워는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엄청난 살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폭풍 같은 전투가 벌어지길 10분이 지나자 서 있는 용병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반엑스조차 복부와 명치, 관자놀이를 맞고 기절해 있는 상태였다. 명색이 단장이라고 세 방까지 버텼지만 그게 한계였다. 오히려 괜히 버티다가 두 방 더 맞은 꼴이 되었다.
“끝냈습니다.”
“잘했다.”
스필언이 일을 처리하고 난 후 가르딘이 도착했다. 가르딘은 혼자 오지 않았다. 타리언의 행정관과 병사들을 데리고 온 후였다.
타리언에 파견된 행정관은 카니발 백작이 선별해서 보내온 자였다. 나이는 30세에 이름은 위트였다.
행정실에서 행정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위트는 갑자기 들어온 인물로 인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영지로 부임을 받을 당시에 가르딘 공작을 본 위트였다. 그 당시에 한 번 보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가르딘이 직접 행정실에 찾아온 것이다. 놀라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신속히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위트가 미처 대접을 하기도 전에 가르딘은 병사들을 데리고 따라오라는 소리만 했다.
“도대체?”
따라와서 본 것은 널브러진 시체(?)들이었다. 숨을 쉬는 것을 보아서는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들은 요즘 들어 타리언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엑스리버 용병단이었다. 병사들의 수가 부족해서 막을 길이 없었던 위트였다. 지금까지 내버려두기만 했던 용병들이 처참하게 쓰러졌다.
“용병들을 다 검거해.”
“알겠습니다.”
위트가 데리고 온 병사들이 쓰러져 있는 용병들을 하나둘씩 검거했다.
타리언 관저에 잡혀온 용병들은 모두 감옥에 수감이 되었다. 감옥에서 정신을 차린 용병들은 자신들이 잡혀 왔다는 것을 파악한 후 좌절감을 느꼈다. 아무리 밖에서 활개치던 놈들이라도 감옥에 갇히게 되면 절망감을 맛보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밖에서 설치던 놈들일수록 갇힌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10일 동안 그들은 내어주는 식량을 제외하고 사람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단장님!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겁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가프! 이놈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야!”
가프만 아니라면 감옥에 갇힐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재수 없게 가르딘을 건드리는 바람에 평생 동안 감옥에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갇히고 나서 알게 됐지만 그들이 건드린 사람이 제국의 공작이라는 것이었다. 공작에게 찝쩍대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신기한 상황이다. 밖에 남아 있는 용병단도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상대는 제국의 공작이다. 계란으로 파이럴을 치는 격이었다.
“가프 이 개자식!”
같이 가둬두면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가프와 떨거지들을 위해서 따로 감옥에 가둬두었다.
가프를 욕하며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지하감옥으로 사람이 내려왔다.
감옥으로 내려온 이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은 열쇠를 들고 혼자 내려왔다. 여러 개의 감방문 중에서 반엑스가 머물고 있는 곳에 섰다. 철문 틈 사이로 가르딘이 서자 반엑스가 침통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직설적으로 물었다. 의외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가지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반엑스는 두려움으로 인해 비굴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대륙5대 용병단의 자리를 차지하려던 반엑스였다. 사람을 다스릴 줄 아는 기질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어찌할 것 같으냐?”
“공작님을 모독했으니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죠!”
“당연한 소리지, 감히 내 영지를 더럽히는 놈들을 내가 가만히 둘 것이라 생각했나!”
‘으윽!’
무형의 기세가 반엑스의 전신을 압박해 왔다. 숨조차 쉬기 힘든 절대자의 기세였다. 반엑스는 오러마스터가 왜 무서운 존재인지 절실히 느꼈다. 반엑스는 A급 용병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S급 용병이 될 자질을 갖추었다. 익스퍼트 급의 실력을 갖춘 반엑스가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것이 오러마스터의 위력인가!’
반엑스는 꿈도 못 꾸는 극강의 경지였다. 반엑스도 가르딘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변방의 귀족에서 제국의 공작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지고의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죽... 이시려거든 죽이십시오!”
“호오, 제법 배짱을 부리겠다는 소리지. 그런다고 내가 못 할 것 같나. 나는 그리 관대한 사람이 아냐! 네 말대로 너를 비롯한 용병들 모두를 다 죽여주지. 남아 있는 용병놈들도 깡그리 다 죽일 테니 잘 지켜보라고.”
결코 빈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반엑스를 비롯한 용병들은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내 영지에서 깝죽거리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지.”
용병놈들은 말로 해서는 들어 처먹지가 않는다. 그런 놈들에게는 말보다 주먹이 먼저였다. 달래고 어른다고 들어먹을 놈들이라면 용병이라고 할 수 없다. 가르딘의 잔인한 응대에 반엑스는 분하고 억울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단지 이대로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억울할 따름이다.
“살... 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공작님!”
용병들이 가르딘을 향해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눈물까지 흘리는 사내놈들의 모습이 흉하기까지 했다.
“흉하군, 그냥 사내답게 죽어라. 그것이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용병들이다. 헥토르 영지는 그들에게 최적의 조건을 갖춘 영지가 아니라 최악의 영지가 되어 버렸다.
“살기 위해서 발악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흉합니까! 어쨌거나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짓밟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정해진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이 용납될 정도로 세상이 만만한 줄 알았나.”
“귀족들은 우리 같은 자들을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한 잘못은 권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혜택을 받습니다. 그런 귀족들이 언제 규칙을 지키며 살았습니까!”
반엑스는 평민이었다. 그가 본 세상은 귀족들의 세상이다. 귀족이 아닌 존재는 사람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는다.
“감히 나에게 귀족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다니 온전히 죽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구나!”
매서운 기세가 휘몰아쳤다. 당장에라도 목을 잘라 버리려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용병들이 겁에 질리는 반면에 반엑스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였다. 하고 싶은 말은 다하고 죽고 싶었다.
‘제법 강단이 있군. 이쯤에서 기회를 줘 볼까!’
가르딘도 타리언에서 계속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용병들에 대한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골칫거리로 남게 될 것이다.
“난 원래 다른 것은 원하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지. 하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이 내 것을 건드리는 것은 절대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어차피 죽이실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살길을 한 가지 알려주지.”
지금까지 죽이겠다고 온갖 협박을 하던 가르딘이 살길을 터준다고 하자 용병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반엑스가 거절하게 되면 가르딘은 당장에라도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 확신했다.
용병들의 표정을 읽은 반엑스가 물었다.
“무엇입니까?”
“내 것이 되라. 그럼 살려주지.”
“우리를 수하로 두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냥 내 것이다. 내가 쓰고 싶을 때 쓰고, 버리고 싶을 때 버리는 존재다. 그것이 너희들이다.”
“그... 런!”
수하가 아닌 물건이나 마찬가지로 여기겠다는 뜻이다. 반엑스와 용병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쓰고 버리는 소모품을 자처하고 싶은 용병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여기서 거절하면 죽음조차 편히 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을 어찌 그런 식으로 사용 한다는 말씀입니까! 당신도 다른 귀족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급귀족은 평민보다 못한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렇기에 반엑스도 가르딘 공작이 어느 정도는 자신들을 이해해 줄 것 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냉혹했다. 현실의 가혹함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귀족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죄인이다.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지. 설마 내가 너희들의 죄를 그냥 넘어가 줄 것이라 여긴 건가! 기회는 한 번뿐이다. 선택은 네가 해라. 단, 나의 인내심은 열을 넘지 않는다.”
강요가 아닌 선택이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으로 몰아놓은 선택이다. 가르딘은 용병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기다리며 조용히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카운트는 정확히 열이다. 시간이 너무 빨랐다. 생각을 하고 자시고 할 여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홉, 열! 그럼 죽어라!”
“하... 겠습니다!”
“그럼 이제 내 것인가.”
라이나와의 만남을 10일이나 연장을 하고 기다린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해서였다. 사실 용병들을 단숨에 처 죽일까 하는 독한 마음도 먹었다. 사람이야 자신이 처한 처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 정해놓은 범위를 넘어서면 봐줄 수가 없다. 용병들은 그 선을 넘은 것이다. 그것도 가르딘이 애써서 만들어놓은 법칙을 말이다.
하지만 모두 죽인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었다. 고민하던 때에 위트가 기발한 의견을 내놓았다. 용병들을 이용해서 용병들을 제압하자는 것이었다. 열두 개나 되는 용병단이 난립하는 바람에 일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단일화된 용병단을 만들자는 것이다. 어차피 용병들은 병사로 만들기 힘든 존재들이다. 정해진 규범과 규칙을 지켜야 하는 생활을 용병들은 감당해 낼 수 없다. 그럴 바에는 공작령 직속의 용병단을 대륙 제1의 용병단으로 만드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었다. 충분히 그럴 듯한 의견이었다.
하지만 기사들이 용병단을 관리하는 것은 반발을 가져오기 쉬웠다. 기사와 용병은 그 성향부터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반엑스는 반쯤 포기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모품이 되기로 수락을 한 상태였다. 그가 악질이기는 해도 약속을 어기지는 않는다. 상단과 마찬가지로 용병단도 약속이 중요하다. 약속을 어기게 되면 상단과의 거래조차 할 수 없다. 소모품이 된 이상 가르딘이 공작이 시키는 위험한 일을 해야 한다. 목숨이 여벌로 남아 있지 않는 이상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용병들은 그것이 못내 두려웠다.
“소모품이라 불안한가.”
“당연하지 않습니까! 누가 쓰다 버리는 물품이 되고 싶겠습니까!”
“나는 유용한 물품은 쉽게 버리지 않아. 뭐, 오래 쓰다 보면 정이 들기도 하겠지.”
기회는 누구에게도 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주어진 기회를 어찌 여길 것인가는 전적으로 스스로의 몫이다. 가르딘은 용병들의 쓰임새가 허용범위를 넘어서거나 쓸모가 없다면 가차 없이 처단할 생각이다. 봐주는 것은 한 번이면 족했다. 물론 용병들이 가르딘의 뜻대로 잘 따라와만 준다면 그에 대한 보답도 해줄 것이다.
가르딘의 말뜻을 이해한 반엑스였다. 반엑스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아직은 가르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기회일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은 체계를 잡아야지. 야! 내려와.”
지하감옥의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 가르딘이 부르자마자 쏜살같이 내려왔다. 그에게 있어 가르딘의 명령은 그 어떤 명령보다 우선 순위였다. 까딱해서 지키지 않으면 그날로 인생 피곤해진다.
바람처럼 내려온 존재가 가르딘의 뒤에 섰다.
“대장은 하나다. 너도 대장을 하고 싶겠지. 그럼 이놈을 이겨라. 그럼 네게 대장의 자리를 주지.”
“예? 그게 무슨?”
“난 용병단을 해체할 생각이 없다. 네 용병단을 시작으로 내 영지에 들어와 있는 용병단을 일통할 생각이다. 그런 막중한 역할을 실력도 없는 놈에게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제야 반엑스는 전신이 번개에 맞은 것 같은 전율을 맛보았다. 가르딘은 가볍게 던진 말에 불과하지만 반엑스의 심경에 불을 지폈다. 그가 오랫동안 숙원하던 일을 다시 하게 해주겠다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 했다. 만약 자신들을 빵 주무르듯이 만져 주었던 젊은 놈과 비슷한 기사라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기회가 아니라 절망이었다.
“이 녀석은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다. 그러니 걱정은 하지 말도록”
반엑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가르딘이 정체를 알려 주었다. 반엑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같은 용병이라면 일대일 대결에서 결코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던 반엑스였다.
반엑스는 철문을 열고 나와 감옥의 공터 안에 들어섰다. 가르딘은 반엑스에게서 수거한 무기를 돌려주었다.
“나는 엑스리버 용병단의 반엑스다.”
“사이론이다.”
“아!”
반엑스와 용병들은 상대의 정체를 알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륙5대 용병단의 수뇌부를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사이론이기 때문이었다. 실제 사이론의 명성은 용병들 사이에서도 크게 회자되고 있었다. 그의 실력이 S급에 달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설마 광풍의 용병을 이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주제를 모르는군. 지금 누구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거지. 설마 네가 내 상대가 될 것이라 여기는 건가.”
사이론은 시작부터 반엑스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용병은 기세가 중요하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은 기사나 귀족들에게나 먹히는 행동이다. 용병은 확을 과시하는 존재들이다. 강한 힘과 시위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이론도 귀족이기 전에 용병이다. 용병들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실제로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대의 실력이 대륙에 알려진 그대로인지 보겠다.”
“입으로만 나불거리지 말고 어서 덤벼라.”
차아앙! 차아앙!
검과 검이 뽑혔다.
반엑스는 검을 맞대고 서자 사이론의 전신에 서린 위압감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엑스가 알기로는 사이론의 실력이 익스퍼트 중급이 되지 않을 것이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검을 직접 맞대본 사이론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용병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질 수 없다.’
반엑스는 승패가 결정되기 전까지 자리를 내어주기 싫었다.
“이얍!”
반엑스가 먼저 공격을 시도했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다가 변칙적으로 방향을 틀어 사이론의 다리를 노렸다. 공격을 시도하는 중에 처음부터 다리를 노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공격이 시작되는 찰나의 방비가 허술하다.
그러나 상대는 사이론이다. 광풍의 용병이라고 불리는 사이론이 그런 변칙검술에 당할 리 만무했다. 가르딘과 주변 사람들이 너무 강해서 약해 보였을 뿐이지 사이론은 일반적인 범주에서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사아아악!
반엑스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 사이론의 신형이 없었다. 사이론은 검이 뻗어오는 궤적을 읽고 뒤로 한 발 물러서 있었다. 그 즉시 사이론은 힘이 실린 공격을 휘두른 직후 생기는 작은 빈틈을 찌르고 들어갔다. 반 박자 빠르게 뛰어 들어오는 사이론의 질풍 같은 찌르기에 반엑스는 소름이 돋았다.
타아앙!
크으윽!
반사적으로 왼손에 끼고 있는 도끼를 들어 사이론의 찌르기를 방비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껴서 반응한 것이기 때문에 효과적인 수비와는 거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찌르기에 실린 힘이 대단히 강했다. 쾌검수로 알려진 사이론의 검은 의외로 무겁고, 단단했다. 뒤로 밀린 순간에 검광이 번쩍였다. 사선에서 직선으로, 곡선에서 수평으로 검의 궤적이 현란했다.
차아앙! 차아앙! 타타탕!
반엑스는 눈앞을 어지럽히는 사이론의 검격에 반격할 틈도 없이 밀렸다. 일방적인 대결이 펼쳐졌다.
반엑스는 속수무책으로 밀리면서도 궁리를 지속적으로 했다.
‘이렇게 강하다니!’
솔직히 어느 정도는 평수를 유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붙어본 사이론의 검술은 반엑스의 실력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이대로 당하기만 할 수 없었던 반엑스가 마지막 수를 사용했다. 수세적인 입장에서 갑자기 공세를 취한 것이다. 당연히 빈틈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위험한 반격이었다. 사이론의 검이 반엑스가 휘두르는 검격을 비스듬히 피하고 난 후 검을 위로 쳐내버렸다. 검이 들려진 반엑스의 전신이 무방비 상태였다. 사이론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뻗었다.
푸우욱!
사이론의 검이 반엑스의 오른쪽 어깨를 찔러 들어갔다. 살을 파고드는 차가운 검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반엑스는 이를 악물고 도끼를 휘둘렀다. 일부러 어깨를 내주면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근접전이기에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급이 다른 실력자와의 공간을 같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사이론은 반엑스의 공격하는 성향을 보고 파악을 한 상태였다. 도끼가 미처 휘둘러지기 전에 사이론의 주먹이 반엑스의 왼쪽 어깨를 가격했다.
퍼어억!
휘둘러져야 할 도끼가 뒤로 젖혀지자 완벽한 무방비였다. 반엑스가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머리로 들이박아 보려고 했지만 사이론의 팔꿈치가 아래서 위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결국 턱을 맞은 반엑스는 충격을 받고 거칠게 피를 토했다. 입 안이 터지면서 핏물이 반엑스의 입 언저리를 붉게 물들였다.
비틀! 비틀!
반엑스의 맷집이 상당했다. 사이론은 항복하지 않는 반엑스의 전신을 마구 구타했다. 좌에서 우로 돌아가는 얼굴과, 직각으로 꺾이는 몸. 반엑스는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아야 했다. 사이론의 손속에 인정은 들어있지 않은 듯했다. 이대로 죽어버린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태세였다. 결국 마지막 한 방을 맞은 반엑스는 기절하고 말았다. 보고 있던 용병들마저 질린 듯이 사이론을 보았다. 블러드 용병단을 무너뜨렸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스톰 용병단의 단원이다.”
싫다고 거절하는 용병은 아무도 없었다. 용병들에게 힘은 권력이다. 강한 자가 이끌어야 오래 산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엑스리버 용병단은 사라지고, 스톰 용병단이 남게 되었다.
가르딘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제부터 어찌할지는 사이론에게 달려 있었다.
‘집에 돌아가기 정말 힘들군.’
가는 길마다 장애물이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찝찝했다. 결국 해결을 해놓고 가야 하는 상황이 계속 들이닥치고 있었다.
용병단의 일은 사이론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가르딘은 발키리 영지로 향했다. 반년 가까이 피곤한 여정을 했던 가르딘이다. 라이나와 브리안이 생각이 나서 참을 수가 없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과 일행이 발키리 영지에 들어서자 소식을 접한 경비병이 벌써 대기를 하고 있었다. 타리언의 행정관 위트가 발키리 영지에 소식을 전해 놓은 상태였다.
가르딘은 헥토르 영지에서 발키리 영지로 돌아오는 길을 보며 감회가 새로웠다. 그동안은 적으로 만나 전쟁을 벌였던 헥토르 왕국이다. 이제는 헥토르 왕국이 가르딘의 영지가 되었다. 피를 흘렸던 전장은 밀이 무르익어 푸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고작 4년인가.’
변화를 가져온 시간은 4년밖에 되지 않았다. 40년을 살아온 가르딘의 일생으로 따져보면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변화를 이루어내었다. 변혁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순간이다.
‘이제는 어디도 가지 않을 것이다.’
이만큼 했으면 할 만큼 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가르딘이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현실에 만족을 하였다.
영웅의 실력을 상승시키고, 신기를 찾았다. 이제는 가르딘이 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가족과 영지만 잘 다스리면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영웅, 성녀, 드래곤들이 알아서 해야한다.
사색에 잠긴지 얼마 되지 않아 저택이 보였다. 저택의 정문에 라이나와 브리안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지겨웠던 여정의 피로가 절로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가르딘의 시야에 다른 존재는 보이지도 않았다. 오직 라이나의 화사한 미소만이 가르딘의 뇌리를 잠식해 나갔다.
“당신!”
“여보!”
가르딘과 라이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감싸 안았다.
와락!
가르딘이 라이나를 품에 안고 수 바퀴를 돌았다. 그녀의 몸이 깃털처럼 날아올랐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도 가르딘과 라이나의 애정표현은 과감했으며 당당했다. 일부 기사들과 사람들은 닭살이 돋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쁘게 웃고 있었다. 영주의 귀환이 모든 영지민들에게 안도의 기쁨을 선사했다.
가르딘이 라이나를 내려놓고, 브리안을 한 손으로 들어 어깨에 올렸다.
“그새 또 자랐구나!”
“아빠도 참! 이제 나도 숙녀라고!”
“어이구, 그랬어.”
한 손에는 라이나, 다른 한 손에는 브리안. 좌우 아내와 딸이 버티고 있는 이상 가르딘은 무적이다. 그 누구도 이 손을 놓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가르딘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약간이라도 흠집 내는 것들이 있다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했다.
찌릿!
‘응?’
가르딘이 감각을 자극하는 기운을 향해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시런 공주가 가르딘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냥 웃는 게 아니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가르딘의 등골을 시리게 만들었다.
‘아직 남았구나!’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상황이다. 너무 즐거운 나머지 공주를 기다리게 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