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5/93)

    @@[제3장 추적@@]

  동굴의 지하.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곳곳에 설치된 빛 사이로 생겨난 그림자가 음습함을 더했다. 스산하게 올라오는 귀기스러운 바람은 귀곡성처럼 들려왔다. 어둠에 잠긴 긴 동굴의 터널을 지나 공터 안에서 비릿하고 역겨운 향이 풍겼다.

  좌우 폭이 60미터에 달하는 공터였다. 정면으로 보이는 단상 위의 벽면에 거대한 악마의 조각상이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악마의 조각상은 마치 살아서 움직일 것 같이 정교하게 조각이 되었다.

  악마의 조각상 아래 거대한 통이 보였다. 좌우로 10미터, 깊이는 2미터나 되는 통이었다. 통 안에서 비릿한 향이 짙게 풍겨 나왔다.

  거대한 석통의 앞에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이가 서 있었다. 어둠의 짙은 마기가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위를 압도하는 듯한 광폭한 기세가 공터 안을 지배했다.

  공터의 입구에서 소녀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까아아악! 싫... 어!”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소녀는 두려운 듯 거칠게 저항을 했다.

  하지만 그녀를 잡고 있는 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녀가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을 쳐 저항을 한다 해도 소용없는 짓에 불과했다. 어린 소녀의 힘으로 그들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공터로 진입할 때부터 풍겨 나오는 진득한 혈향이 소녀의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로드, 데려왔습니다.”

  “크크크크!”

  울부짖는 소녀의 목소리를 들은 검은 로브를 걸친 이가 소름 끼치는 웃음을 내었다. 소녀가 처절하고, 비참하게 울부짖을수록 대법은 더 가치가 있게 된다.

  “울어라! 더 크게 울부짖어라!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나로 인해서다! 억울하지 않느냐! 한을 터트려라! 너를 이렇게 만든 세상과 나를 저주해라!”

  음습한 기운을 풍기며 소녀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선사하는 에빌스트였다.

  그는 어둠의 길드를 지배하는 세 명의 다크로드 중에 마지막 인물이다.

  그는 어둠의 길드 내 외부적인 일에는 관여를 않았다. 오직 다가올 어둠의 제왕을 위한 의식준비에 모든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번이 995명째인가?”

  “그렇습니다, 로드.”

  “얼마 남지 않았구나!”

  어둠의 세상이 도래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때를 맞추어서 준비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였다. 억압받던 인고의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업을 성사시켜야 한다. 그것이 에빌스트의 사명이자 목표였다.

  덜! 덜! 덜!

  소녀는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에빌스트가 주는 공포와 위압감이 그녀의 뇌리를 잠식해 나갔다.

  “시행하라.”

  “예, 로드!”

  소녀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악했지만 결국 단상 위에 마련된 장치에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사람 몸이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었다. 형틀처럼 이루어진 공간은 붉은 핏물 과 살점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소녀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이 되었다. 형틀에 손과 발, 목을 묶은 후 또 다른 형틀로 얼굴을 제외한 그녀의 전신을 덮었다.

  푸우욱! 주르르륵!

  “까아아아아아악! 살... 려......!”

  형틀이 덮여지자 그 안에서 전신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전신을 찌르고 있었다. 바로 죽지는 않지만 붉은 핏물이 계속 흐르게 만들어져 있었다. 소녀는 고통으로 인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악!”

  고통, 원한, 분노, 공포, 두려움이 뒤섞인 한 맺힌 비명이었다. 소녀는 살려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소녀의 몸에서 흐른 핏물은 단상 아래로 모여 통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통 안에 보이는 붉은 핏물이 모두 사람의 피였던 것이다.

  씨익!

  에빌스트는 처절한 한으로 내지르는 소녀의 비명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피만 뽑는다면 죽이고 난 후 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인간이 내지르는 원한과 공포, 분노, 두려움이 피에 섞여야 한다.

  소녀는 서서히 죽어가는 순간까지 에빌스트를 향해 지독한 원한을 뿜어내었다. 자신이 왜 이런 처지를 당해야 하는지 인정할수 없었던 것이다.

  죽어 가는 소녀를 끝까지 지켜본 에빌스트가 돌아설 때 어둠의 길드 정예요원인 제롬이 소식을 전해왔다. 소식은 에빌스트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그것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어둠의 길드 중요 간부급인 세븐핸드가 모두 죽고, 다크로드인 프레인마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에빌스트조차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전에 없는 분노를 터뜨렸다. 사실 다크로드 중에서도 가장 강한 존재가 에빌스트였다. 그의 마력은 알케인과 프레인을 훨씬 능가했다. 그가 분노를 터뜨리자 정예요원들조차 저항 한 번 못 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크아아앗!”

  길드원의 비명이 울리고 나서야 감정을 다스리게 된 에빌스트였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내부는 분노로 인해 타오르고 있었다. 알케인에 이어 프레인마저 죽음을 당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이유를 밝혀 그에 대한 응징을 해주어야 했다.

  “프레인을 죽인 놈들을 찾아라!”

  “지금 당장 움직이면 길드의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내 말을 거역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어둠의 길드를 추적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얼마 전부터 어둠의 길드를 구성하는 점 조직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제롬이 가져온 정보는 프레인과 세븐핸드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놈들의 정체를 밝혀냈느냐?”

  “알려지지 않은 고서클 마법사들입니다. 정체를 밝히려고 접근했던 요원들마저 모두 전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크음!”

  좀 전까지 거칠게 분노를 터뜨렸던 에빌스트의 기운이 싸늘하게 가라앉혔다. 제롬을 비롯한 요원들은 모두 오러마스터에 비견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에 대한 저항력까지 가진 정예요원들이 흔적도 없이 전멸해 버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단순한 마법사들이 절대 아니다.

  ‘설마 드래곤!’

  충분히 일리 있는 추론이었다. 상대가 예상대로 정말 드래곤이라면 일이 정말 곤란해진다. 길드의 무력이 대륙 최강이라고는 하지만 드래곤은 예외 대상이다. 한 마리도 아닌 여러 마리가 총단을 발견하게 된다면 대업을 실패할 수도 있다. 500년간 기다려온 계획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지?’

  어둠의 길드로 활동하면서 드래곤이 달라붙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왔다. 비밀이 새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당장은 서둘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프레인과 알케인의 죽음에 평정심을 잠시 잃었던 에빌스트가 냉정을 찾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프레인과 알케인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당장 움직이면 대업에 지장을 준다. 그럴 수는 없지.’

  동료의 죽음이 마음 아프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어둠의 세상을 위한 대업에 지장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은 삼신기에 대한 추적도 중지해야 했다. 놈들이 냄새를 맡는 것 자체가 최악의 상황이다. 드래곤은 흑마법사를 절대 가만 놔두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마기와 마왕의 부활에 연관된 모든 것들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달려들 것이 분명하다.

  “성혈을 가진 여아를 서둘러 찾아라.”

  “알겠습니다.”

  “또한 요원들을 위장시켜 놈들이 움직이는 지점에 매복해라.” 

  “예, 로드!”

  정말 드래곤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만약 확실하다면 어둠의 길드 전체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 대한 비밀을 지켜야한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이 오면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명상에서 깨어났다.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것들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것이 분명했다. 가르딘이 보기에도 달라진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전에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티가 역력했었다. 지금은 풍기는 기운 자체가 달라졌다. 시위를 압도하는 위압감마저 형성하고 있었다.

  ‘내 외부의 조화를 이루었다는 말인가!’

  공령지체에 들어서는 시초를 만들었다는 뜻이 되었다. 이제 막 그랜드마스터에 든 녀석들이 중급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빠른 진전이었다. 지금의 실력이라면 데븐스조차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가르딘은 더 이상 놀고만 있을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내가 익힌 세월이 얼만데, 애송이들에게 자리를 내줄 수는 없지.’

  대륙에서 가장 큰 강으로 알려진 셀론강에 비유한 말이 있다. 강물은 흐름이 끊이지 않기에 앞서가던 물결은 뒷 물결에 밀려 나가는 것이 순리라는 명언이다. 물러설 때를 알고 구차하지 않게 자리를 내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가르딘은 인정하지 않았다. 왜 고생해서 이룬 경지를 젊은 놈들에게 추월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그럴 수는 없다. 명예는 그리 원하지 않지만 무공에 대한 호승심 은 남아 있는 가르딘이었다. 구차하지만 끝까지 위에 설 것이다. 이제까지 알게 모르게 우쭐해 있었던 것도 지닌 무공 때문이었다. 그것마저 무너지면 가르딘이 뭐가 남겠는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일어났기에 가르딘은 이제 돌아가려고 했다. 쉴라도 가르딘의 의견에 따랐다. 예기치 않게 너무 오랜 시간 엘프 마을에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지?”

  맴피스가 가르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여자가 잡아도 이상한 상황에서 나이 많은 엘프가 바지를 잡고 늘어지는 것이 못마땅한 가르딘이다.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령과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걸 왜 나한테 가르쳐 달래.” 

  "가르딘 님밖에 없습니다. 오래전 정령을 다루기 위해 익혀야 했던 비전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이제는 정령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우리의 오랜 숙원을 풀어줄 수 있는 분은 가르딘 님뿐입니다.”

  마도시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엘프들은 정령술의 가장 중요한 비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원체 자연친화력이 뛰어나서 정령을 부를 수는 있었지만 그 위력이 전과 같지 않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지금 시간이 별로 없어. 그만 하지.” 

  “제발! 부탁입니다!” 

  “아! 몰라.”

  가르딘이 매몰차게 거절하려고 하자 맴피스가 작전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쉴라를 향해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가르딘이 쉴라에게 약하다는 것을 파고든 것이다. 순수한 줄로만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맴피스였다.

  하지만 맴피스도 절박했다. 정령과의 의사소통은 엘프들의 숙원과도 같았다. 반드시 다시 회복해야 했다. 

  “성녀님 부탁입니다! 제발 우리의 숙원을 풀어주십시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신파극을 보는 것 같았다.

  쉴라는 안타깝지만 자신이 강요를 한다고 해서 가르딘이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또한 너무 오랫동안 엘프 마을에서 시간을 보냈다. 비법을 전수하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는 일인데 무턱대고 이곳에서 전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마을에 오래 머물 수가 없는 처지예요.”

  맴피스가 쉴라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엘프 여인을 지목했다. 지목당한 리니안이 가르딘과 쉴라의 앞으로 나왔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데려가십시오.”

  리니안은 자라나는 엘프들 중에서도 하이엘프의 기운을 가장 많이 타고났다. 엘프의 숙원을 풀기 위해서 같이 따라 가서 배우라는 뜻이 다분했다. 가르딘의 비술을 익힐 수만 있다면 엘프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도 있었다.

  맴피스에게 가르딘이 엘프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전한 것도 리니안이었다. 사실을 듣고 나서 맴피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약 리니안이 정령왕까지 거론했다면 뒤로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날 엘프 장로들과 오랜 시간 회의를 해야 했다. 엘프들은 어떻게 해서든 가르딘의 비술을 얻어내야 한다는 뜻을 모았다.

  하지만 가르딘은 엘프들이 강제로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방법을 구상하던 맴피스는 엘프 중에 선택된 자를 보내 배우도록 하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엘프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문제는 누굴 인간세상으로 보내는 것인 가였다. 엘프들은 인간들에 대한 적대감과 두려움이 아직도 팽배해 있었다. 쉽사리 가겠다고 나서는 엘프가 없을 것이다. 때마침 리니안이 먼저 맴피스와 장로들에게 자신이 가겠다고 뜻을 전했다. 엘프 장로들은 기꺼이 모두 찬성했다.

  쉴라는 맴피스의 뜻을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사정을 하는데 거절하는 것만도 능사가 아니었다.

  “아저씨, 부탁을 들어주시죠.”

  “지금 그 말은 나보고 밑천을 모두 내놓으라는 소리가 된다.”

  천룡심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천룡무상신공을 극성으로 터득해야만 한다. 엘프들의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전을 함부로 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쉴라가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르딘은 기사였다. 기사의 비전은 아무에게나 전해 줄 수 있는 간단한 문제라고 할 수 없다.

  “공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성녀님! 기사의 비전을 달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입니다.”

  스필언과 미토스도 반대의 입장을 내세웠다. 그들이 가르딘에게 받은 항마멸사신공이 얼마나 대단한 신공인가. 지금의 그들을 만들어준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신공을 본인이 허락하지 않는데 막무가내로 달라고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비록 엘프들이 그로 인해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고 해도 결코 허용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스필언과 미토스까지 반대의 의견을 내놓자 쉴라가 난감해졌다. 딱히 효과적인 해결책을 내놓기 어려워졌다.

  가르딘은 엘프들의 행태가 괘씸하기까지 했다.

  ‘이것들이 날로 먹으려고 하네.’

  생기는 것도 없이 베푸는 것은 스필언과 미토스만으로 충분했다. 녀석들에게 항마멸사신공을 가르쳐 주면서 이제까지 얼마나 배가 아팠는가! 녀석들이 발전하는 속도가 빠를수록 배는 더 아파왔다.

  -웬만하면 가르쳐 주지.

  ‘넌 뭔데 자꾸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거는 거냐.’

  정령왕 테리우스는 가르딘의 동의 없이도 이제는 소환이 가능해졌다. 계약자가 프리소환을 허락하게 되면 정령왕은 스스로 나오고 싶을 때 나올 수 있게 된다.

  물론 다른 정령은 가능하지 않았다. 시전자의 능력이 받쳐 주어야 하고, 정령왕쯤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녀석들이 정령비전을 잃어버린 것은 내 잘못도 있기 때문이거든.

  ‘네 잘못?’

  -마도시대에 나를 소환하기 위해서 하이엘프 20명이 모두 죽었었다.

  ‘그로 인해서 단절이 되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래. 약간이지만 책임감을 느끼거든.

  당시에 테리우스가 정령왕의 권능을 모두 발휘하자 하이엘프는 모든 힘을 쓰고 난 후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엘프들의 비전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테리우스가 원해서 한 일은 아니지만 엘프들과 정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모른 척 넘어가기에는 마음에 걸렸다.

  ‘네가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르쳐 줄 이유는 없지.’

  가르딘과 테리우스와 친한 사이도 아니다. 남의 책임감을 대신 받아줄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명색이 정령왕이 부탁하는데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해라. 너는 내가 하급정령처럼 보이냐!

  테리우스가 투덜거렸다. 반면에 가르딘은 요지부동이다. 생기는 것도 없이 무작정 베푸는 것은 성인이나 가능한 일이다. 가르딘은 그런 존재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익이 생기지 않는 일에는 나서고 싶지도 않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비전을 엘프들에게 내가 왜 전수해야 해. 내가 미쳤냐!’

  -누가 네 모든 것을 전수하라고 했냐? 그저 정령원소를 잘 느끼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라는 거지.

  ‘방법을 모르잖아!’

  -너의 오러가 모든 원소를 포함하는 것이기에 나를 소환한 것이지만 굳이 모든 것을 포용할 필요는 없잖아. 땅, 물, 바람, 불 정도의 기운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 정도면 돼.

  가르딘은 테리우스의 말을 들어보니 이해가 되었다. 천룡무상신공은 삼라만상의 모든 기운을 포용하는 대공능무적우주신공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신공의 으뜸이 바로 천룡무상신공이다. 굳이 정령비전을 가르치는데 천룡무상신공을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정령원소를 느끼는 방법이라.’

  가르딘은 신마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자 기억의 끄트머리에 존재하는 하나의 심법이 떠올랐다.

  오행심법.

  중원의 10대 초인에 속하는 오행대제 주유성의 독문심법이다. 오행대제는 오행지체를 타고난 존재로 자연의 기운을 어린 시절부터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심법과 무공을 배우고, 연구하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심법을 탄생시켰다. 오랜 깨달음 끝에 탄생한 오행심법을 익힌 후부터 그는 초인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물, 바람, 땅, 나무, 철을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엄청난 능력을 선보였다. 실제적으로 다른 10대 초인들조차 그를 상대하기 껄끄러워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행대제는 후인을 두지 못했다. 오행심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오행지체를 타고나야 한다. 일반 무인은 오행심법을 익혀봐야 제 위력을 100분지 1도 발휘하기 힘들었다. 1 천년 만에 한 명 태어나는 오행지체를 후인으로 두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실전되어 잊혀졌던 오행심법을 발견한 사람이 신마였다. 신마는 오행의 기운이 자연의 기운과 일치한다는 것을 찾아내고, 천룡무상신공의 모태로 삼았다. 가르딘의 천룡무상신공이 정령과의 교감이 잘 이루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가르딘은 오행심법을 가르쳐 주면 엘프들이 과거의 정령술을 재현해 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단, 가르쳐 준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다. 가르딘은 오행심법을 쉽게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뜻은 알겠는데, 내가 그렇다고 해서 가르쳐 줄 이유는 되지 않지.’

  -이런 망할 놈을 봤나! 너 죽을 때 그거 싸들고 갈 거냐!

  ‘난 그럴 거다’

  -너 같은 인간에게 왜 이런 엄청난 기연을 얻을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구나!

  ‘원래 세상이 다 그래. 아무리 노력해도 엉뚱한 놈들이 다 챙기는 것이 세상이거든.’

  -그래서 전수 안 해줄 거냐?

  ‘너 하는 것 봐서.’

  결국 꿍꿍이는 다른 데 있는 가르딘이다. 테리우스가 얼마나 협조를 잘 하느냐에 따라서 오행심법의 전수가 결정될 것이다. 또다시 흥정을 해야 하는 테리우스는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이번 계약은 완전 무효처리하고 싶었다. 가르딘이 영웅이 아닌 것은 괜찮았었다.

  하지만 그 옆에 영웅이 두 마리나 있고, 성녀까지 있었다. 이건 마왕을 상대하는 완벽한 조합이 아닌가!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똥물을 마셔도 맛있다고 할 지독한 놈!

  ‘어허,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이다. 가르딘은 엘프들과 친분을 나눌 이유도 없을뿐더러 잘 대해 줄 생각도 없다. 현재 아쉬운 존재는 테리우스였다. 테리우스는 또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엘프들에게 비법을 전수하려는 이유는 이후에 자신을 소환해 줄 엘프들이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서였다. 현 대륙에 가르딘을 제외하고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능력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후일을 위해 바탕을 마련해 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미래를 생각해서 한 번 희생을 감소하느냐, 아니면 그냥 정령계에 계속 눌러 사느냐를 결정해야 한다.

  결국 테리우스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원하는 게 뭐냐?

  ‘두 가지 더.’

  -징그러운 놈! 알았다! 이놈아!

   가르딘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락을 하고만 테리우스였다. 가르딘은 원래대로 정령왕을 다섯 번을 더 부려먹을 수 있게 되었다.

  간절히 부탁하는 맴피스와 리니안을 앞에 두고 가르딘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선뜻 허락을 해주었다. 뜻밖의 대답에 쉴라는 무척이나 놀라는 듯했다. 저렇게 쉽게 허락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전수해 주지.”

  “아! 감사합니다!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가르딘의 수락에 맴피스와 엘프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잊지 않은 김에 전에 마셨던 것을 좀 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전에 마신 엘프주는 정말 기가 막혔다. 생각만 해도 입 안에서 군침이 도는 가르딘이다.

  가르딘이 맴피스에게 아공간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알아서 잘 담아오라는 뜻이 명백했다.

  “주는 사람의 성의에 따라서 배움의 질적 수준이 결정된다는 것을 명심해.”

  “알... 았습니다.”

  떨떠름한 맴피스였다. 왠지 모르게 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르딘의 심령으로 테리우스가 지속적으로 욕을 해대고 있었다.

  미드라이언 대륙의 서북쪽.

  카이로만 제국과 실베니아 왕국의 접경 지역인 풀라인이라는 마을이 있다. 사람들의 접근이 그리 많지 않은 소규모의 마을이다. 풀라인의 외곽에 빼곡한 나무와 숲, 계곡으로 이루어진 자이란 산이 있다. 산에 유령이 산다는 전설이 전해져 사람들이 잘 올라가지 않는 산이다.

  자이란 산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이 울렸다.

  꽈과괴광! 퍼퍼펑!

  포격에 적중당한 것처럼 부서져 내린 곳은 붉은 용암의 대지가 되어 있었다. 곳곳에 불길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수백의 요원들이 세 명의 마법사를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3대 300명의 대결이지만 마법사들이 더 여유로운 상황이었다. 마법사들은 덤벼오는 전사들을 향해 마법의 향연을 펼쳤다. 주문영창의 시간도 없었다. 그저 주문을 외우는 즉시 마법이 난사되었다.

  바람계열마법과, 아이스계열마법, 화염계마법이 일시에 펼쳐지자 덤벼들었던 전사들이 폭죽 터지듯이 터져 나가 버렸다. 바람마법으로 인해 떠오른 전사들이 발버둥을 칠 때 아이스마법이 사용되어 삽시간에 냉동되었다. 그 순간 화염 마법이 펼쳐지자 아이스마법이 걸린 전사들은 몸이 버티지 못하고 폭발하였다.

  꿈틀!

  마법사들 중에 선두에 선 청년이 짜증이 났는지 미간이 꿈틀거렸다.

  100명이 되는 전사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사들은 공포에 떨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마법사들이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조차 없는 것 같았다. 존재감을 드러내서 한번에 쓸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포레스트, 이놈들은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아!”

  “그렇군. 하지만 결국 모두 죽는다.”

  포레스트라 불린 청년은 자신감이 충만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떼로 덤벼든다고 해도 모두 처리해 버릴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어둠의 기운을 사용하는 존재는 모두 소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멀찍이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제롬은 상대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했다. 놈들의 동선을 파악하고 일부러 이곳까지 유인을 한 제롬이다. 어둠의 길드 정예전사들을 300명이나 동 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놈들의 마법 실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이제까지 놈들에게 접근한 길드의 요원들이 소멸되어 버린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 정도의 엄청난 마법실력이라면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쉽게 끝나지 않는다!’

  놈들이 강력한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미리 준비를 한 것이 있었다. 조금 만 더 놈들을 유인해 온다면 꼼짝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파이어익스플로전(화염폭).

  푸아아아앙! 화르르르르!

   열 명의 전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들었다. 그 순간에 여인의 입에서 마법주문이 펼쳐졌다. 화염계 마법이 폭발을 일으키자 전사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흔적조차 남지 않고 타버린 것이다. 열 명이 죽음을 각오하고 난 후 전사들이 뒤로 조금씩 후퇴를 했다. 두려움 없이 덤벼든 놈들의 도주가 마법사들의 눈에 들어왔다. 포레스트, 베로나, 그란테스는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도망쳐봐야 소용없다!”

  -아이스스피어(빙창).

  그란테스의 허공에 생성된 100개의 얼음 창이 도주하는 전사들을 향해 뿌려졌다.

  슈슈슈슝! 푸욱! 푸욱!

  뒷걸음을 치던 전사들의 신체를 어김없이 꿰뚫어 버리고 날아갔다. 삽시간에 40명이나 되는 요원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마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포레스트가 썬더브레이크(뇌격)와 베로나의 파이어월(불의장벽)이 형성되어 날아갔다. 마법에 공격당한 공간 안에 있는 전사들이 썬더브레이크에 감전되거나 불의 장벽에 타 버리고 말았다. 300명의 전사들 중 살아 남은 전사들이 고작 1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어둠의 길드 최정예 요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상황이었다. 압도적인 마법의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외모만 봐서는 20대를 넘지 않은 마법사들이었다. 무한정 마력을 사용하고도 지치지도 않는 괴물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독한! 하지만 이제 끝이다!”

  200명의 사상자를 낸 결과 마법사들을 원하는 장소로 유인해 낼 수 있었다. 제롬은 그 즉시 장치를 발동했다. 놈들의 반항도 여기서 끝이 날 것이라 믿었다. 이번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다크로드는 모든 마력을 집중한 마법아이템을 만들어 주었다.

  우우우우우웅!

  포레스트, 베로나, 그란테스의 주변으로 어둠의 마기가 원을 그리며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어둠의 마기가 마법시들을 감싸버렸다. 다크홀릭(어둠의 중독)이라고 불리는 마법진이 펼쳐진 것이다. 어둠의 마기가 감싸는 곳은 백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다크로드 에빌스트의 마력으로 감싸 놓은 곳이라 어둠의 기운을 활용하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움직임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마법사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마나장애마법의 일종이었다.

  “놈들을 잡아랏!”

  제롬이 명령을 내리자 물러섰던 전사들이 다크마법진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전사들은 마법진 안에서 자유로웠다. 제롬은 놈들을 잡아 정체를 밝힐 수 있다고 확신했다.

  퍼어어어엉!

  쿠꽈과과광!

  다크마법진 안으로 뛰어들었던 전사들이 육편이 되어 사방으로 분사되었다. 제롬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저럴 수가!”

  다크홀릭에 걸려들면 8서클 마법사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놈들은 다크홀릭 안에서 마법이 자유로웠다. 8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이라는 뜻이 되었다. 젊은 마법사들 중에서 저와 같은 실력을 가진 존재는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드... 래곤?”

  어둠의 마기가 마나와 흐름을 끊어 놓고 있었다. 보통의 마법사들이라면 대기의 마나와 자신의 마나까지도 시용하지 못하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포레스트와, 베로나, 그란테스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다. 그들은 마법의 조종이자 궁극의 생명체였다. 8서클 방해마법진도 그들에게서는 소용없는 짓이 되었다. 쓸데없는 저항이 그들의 화를 자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건방진!”

  “기어이 어둠의 마법을 손에 넣었구나!”

  “절대 살려둘 수 없다!”

  8서클 다크홀릭 마법진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9서클에 이르러야 한다. 어둠을 근간으로 하여 홀로 9서클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면 어둠의 제왕과 계약을 통해야만 한다. 어둠의 기운을 얻은 자들은 중간계에서 말살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9서클 궁극의 마법이 마법사들의 손에서 펼쳐졌다. 제롬을 비롯한 전사들은 마법사가 펼치는 궁극의 위력에 휩쓸리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비명이 자이란 산을 메아리쳤다.

  어둠 속에 앉아 수정구를 보고 있던 다크로드 에빌스트는 불안감이 현실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8서클 다크홀릭 마법진이 통하지 않는 마법사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 드래곤이 나선 것이구나!”

  제롬의 몸 안에 있던 생명력까지 소멸된 것을 보니 전멸당한 것이 분명했다. 에빌스트는 드래곤이 개입한 이상 어둠의 길드 내부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놈들이 계속 좁혀오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에빌스트는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둠의 길드 자체의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대업이다. 그는 마지막 비장의 수를 생각해 내었다. 5백 년 동안 마련한 대계다. 그 대업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희생은 불가피하지.’

  사우스랜드를 벗어난 후에도 인적이 있는 곳까지 나오지 못한 가르딘이다. 말이 없는 상태라 빠르게 갈 수 없었다. 들판이 넓게 펼쳐진 평야에서 노숙을 하기로 결정했다. 사우스랜드 자체는 비가 많이 오는 편이어서 노숙할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일단 벗어나자 기후가 온난하고 후덥지근해서 노숙하는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바쁘게 노숙준비를 하는 동안 가르딘은 리니안에게 오행심법의 기초를 가르쳐주었다. 오행심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행지체여야 한다. 자연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신체를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오행심법은 엘프들을 위해 존재하는 심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엘프들은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오행심법은 자연의 다섯 가지 원소를 느끼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엘프는 태생적으로 자연의 기운을 담는 그릇 역할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되도록 많이 느끼고, 감응을 하는 것이 좋다.”

  “알겠어요.”

  “그럼 기본적인 오행심법의 토납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지. 내가 보내주는 기운의 흐름과 특성을 잘 기억해 놓도록.”

  가르딘이 본격적으로 수련을 위한 방법을 제시해 나갔다. 리니안만 익히는 것이라면 운기법에 의해서 흐름만 파악해주면 끝이 나겠지만 다른 엘프들에게도 전수를 해야 하기에 오행심법의 구결을 대륙어로 번안을 하고, 정확하게 풀어내 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가르딘이 그녀의 등뒤로 오행점을 한 수로 찍었다. 오행의 기운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오행심법은 호흡을 통해 기운을 흡입하여 체내로 보내는 진기도인법과 자연의 기운을 모아둘 수 있는 오행지정을 형성해야 한다. 오행점은 오행지정을 만들기 위한 기본 토대였다. 따라서 오행심법은 호흡을 하여 단전에 기운이 쌓는 것이 아닌 오행지정을 바탕으로 대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을 모태로 한다.

  리니안은 오행점으로 흘러 들어오는 가르딘의 손끝에 시린 기운을 느끼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혼란스러운 정신을 가다듬기 힘들었다.

  “정신 차려라. 마음을 열어! 자연과 교감하는데 불안정한 감정은 방해가 된다.”

  “죄송해요.”

  “내부로 스며드는 기운을 느끼고, 감응해라.”

  가르딘은 한곳 한곳 정성스레 짚어가며 물의 기운, 철의 기운, 땅의 기운, 나무의 기운, 불의 기운을 리니안의 오행점에 불어넣었다. 리니안은 몸 안으로 스며들어 오는 기운을 받아들여 교감하는데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는 이토록 생생한 기운을 처음 느껴보았다. 이것이 정령을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길이라 여겨졌다.

  리니안의 교감능력은 가르딘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한순간에 지나간 기운과 모두 교감을 나누었던 것이다.

  ‘빠른데.’

  가르딘은 가르치는 놈들마다 천재였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인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라면 리니안은 엘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였다. 이상하게 가르딘의 주변에 그런 존재들이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투르도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조금 모자란 면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만 배우는 속도만큼은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오행심법의 기초공사가 끝이 나자 주위가 어두워졌다.

  “오늘은 이만하지.”

  “고마워요.”

  리니안은 엘프들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가르딘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에 가르딘은 쉴라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물었다. 신기도 찾았고, 이제는 각자 할 일이 따로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요. 마왕의 부활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요.”

  “단서야 신성제국에서 알아서 찾아야지.”

  “무책임하게 말하지 마세요. 만약에라도 마왕이 부활하면 세상이 어찌될지 상상이나 해봤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발키리 영지에 둘렀다가 신성제국으로 갈 생각이에요.”

  ‘마왕의 부활에 대한 단서를 왜 우리 영지에서 찾는 거야?’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았다.

  쉴라는 마왕의 단서도 중요하지만 발키리 영지로 가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더군다나 이대로 신성을 돌려보내는 것 자체가 께름칙했다. 그들이 나서주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맘대로 해라.”

  가르딘은 속편하게 생각하며 드러누웠다. 어차피 오지 말라고 해도 쉴라는 따라올 것이다.

  돌아가는 여정을 위해서 가르딘과 일행은 모두 깊은 잠을 잤다.

  다음 날부터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들른 가르딘은 서둘러 말과 필요한 물품을 샀다. 특히 엘프인 리니안의 얼굴을 변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대륙에서 엘프의 존재가 사라졌다고 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엘프가 나타나면 탐욕에 찬 인간들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가르딘과 신성이 가로막는다면 피해는 그리 크지 않겠지만 무척이나 귀찮아질 것이 분명했다.

  맴피스가 아공간 주머니에 넣은 것은 엘프주만이 아니었다. 엘프들이 귀중히 여기는 신비한 보석까지 들어있었다. 사우스랜드에서도 희귀한 보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르딘은 그 즉시 시세를 확인하기 위해서 보석가게를 찾았다.

  ‘헛! 10만 골드!’

  작은 보석 하나가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확인한 가르딘은 그날부터 리니안을 더욱 열심히 가르쳤다. 아공간에 들어 있는 보석만 잘 세공해서 내다 팔면 상상을 불허하는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가르딘이 갑자기 리니안을 친절하게 대하자 쉴라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는 했다.

  ‘저 아저씨가 아무 이유 없이 친절하게 대할 사람이 아닌데!’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확인은 불가능했다. 가르딘이 아공간 주머니를 수중에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드리기라도 하면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한심하기까지 했다. 잠 잘 때도 아공간 주머니는 꼭 손 안에 들고 잤다.

  슈슝!

  공간이 열리고 푸른색 머리카락을 지닌 미녀가 저택 앞에 나타났다. 공간이동은 최소한 7서클 이상의 마법사만이 가능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전혀 마법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라이젠 님은 왜 이런 곳에 계시는 거지?”

  안젤리카가 태어난 후부터 라이젠은 바깥출입을 절대 하지 않았다. 얼마나 유난을 떠는지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일화가 많이 있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저택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인비저빌리티(투명)마법과, 사일런트(방음)마법을 사용하고, 기척까지 지웠다. 그녀가 담벼락을 가볍게 넘었다. 그리고 발을 지면에 내딛고 몇 걸음 가는 순간 그녀는 순간적으로 지형이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응?’

  마법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기감을 열어 주변을 확인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중심축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8서클 디텍트(탐지) 마법이 소용없었다. 마법진이라는 느낌도 없이 이처럼 순식간에 어처구니없이 걸릴 줄은 그녀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마법진의 역량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보았다.

  “7서클 마법진이 분명한데, 이건 뭐지?”

  7서클 마법진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달랐다. 마정석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도 않을뿐더러 어디에서 시작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육체를 조여오는 압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얼마 전에 당한 다크홀릭보다 더 강한 것 같았다.

  “환영도 보통 환영이 아니고!”

  그녀는 황당함을 넘어 짜증이 솟구쳤다. 마법의 조종이라고 불리는 자신이 고작 마법진에 당황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결국 그녀는 마력을 개방했다.

  그녀의 몸 안에서 번져 나오는 광포한 마력이 분출되어지는 찰나에 마법진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파아아앙!

  갑작스러운 창격이었다. 허공을 꿰뚫는 창격은 위력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에 실드 마법을 펼쳐 창을 막아내야 했다.

  터어어엉! 쩌저적!

  실드 마법이 어처구니없이 깨져 나갔다. 5서클 마력실드가 이처럼 쉽게 깨져나가는 경우도 드물었다. 창격에 실린 위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쾌속하게 뒤로 물러서며 3중으로 방어실드를 펼쳤다. 주문을 외우는 동시에 마법이 형성되었다. 3중으로 형성된 방어실드에 또다시 창이 뻗어왔다.

  “감히!”

  손끝을 타고 오는 창의 위력이 그녀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뒤로 물러선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녀는 막는 즉시 반격을 가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니?”

  공격으로 인해 물러서는 바람에 마법진의 형태가 갑자기 또 돌변해 버렸다. 마나의 흐름을 끊어 놓고, 움직임마저 둔하게 만들었다. 힘의 여파가 조금 전과는 천양지차였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서 창격이 날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영악한 수법이 아닐 수 없었다. 솟구치던 화가 호승심으로 바뀌는 상황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이처럼 당황하게 만든 존재도 드물었다. 무엇을 어찌하는지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광룡창법의 광룡격을 날린 투르는 손끝을 타고 오는 찌릿한 느낌을 확인하자 전율스러운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세븐핸드와 격돌을 벌인 투르는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패배를 겪은 직후 투르는 모든 일을 제치고 수련에 몰두했다. 광천패황신공에 매진하며, 광룡창법을 가다듬었다. 그리 길지 않은 수련이었지만 그로 인해 투르는 이전과는 다른 성취를 드러내었다. 패도무비한 기운이 사라지고, 정광이 넘치는 눈빛을 지니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에 비해 약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내부에 잠재된 힘이 전과는 비교 불가능한 경지에 이르렀다. 광천패황신공을 극성으로 터득했다는 뜻이 되었다. 광천패황신공이 극성에 이르자 본래 가지고 있던 투르의 금강지체가 완벽의 경지에 올라서게 되었다. 내, 외부의 조화를 이룬 금강불괴지신이 된 것이다. 금강불괴지신은 전신을 금강의 갑주를 뒤집어쓴 것만이 아니다. 내부적으로 흐르는 모든 혈맥과 세맥까지도 그에 버금가도록 강해졌다는 뜻이다. 지금의 투르는 세븐핸드의 누가 와도 쉽게 이길 수 없는 경지에 올라섰다.

  그런데 지금 투르의 창격이 막혔다.

  씨익!

  회심의 미소가 그려졌다. 상승된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몸이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에게 비무를 하자고 해봤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실력을 테스트 못 한 상태였다. 때마침 시험할 수 있는 최적의 상대를 만났다는 것이 한없이 기뻤다.

  투르는 진 밖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마진법의 위력은 투르도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지금도 파멜라와 안젤리카가 마진법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만약 새롭게 준비된 마진법이 펼쳐졌다면 어떤 존재도 뚫어내지 못 할 것이다.

  ‘마나의 흐름이 또 다른 마나로 인해 흩어졌다. 이어졌다는 반복하네! 거기다가 환영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마나의 흐름도 변화를 시키고 있어!’

  그녀는 세상에 이런 마법진이 있다는 것을 놀라워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7서클 마법진이지만 위력은 9서클에 비견되었다. 만약 이 상태로 조금 더 발전을 한다면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뚫어낸다 장담하지 못했다.

  그녀는 모든 마력을 끌어올렸다. 응축된 마력이 그녀와 마진법 사이의 공간을 벌렸다. 압도적인 마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치지지지직!

  ‘압력이 앱솔루트그래비티(절대중력)와 맞먹다니!’

  압축된 기운과 기운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겼다. 압력과 압력이 서로 부딪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미세한 마력의 틈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압사되어버렸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에어블라스트(공기폭발).

  푸아아아앙!

  부딪치며 형성된 대기의 압력을 이용하여 폭발을 일으킨 그녀는 재빨리 에어스톰(공기폭풍)을 펼쳐 진의 흐름을 흩트려 놓았다. 아주 미세한 공간과 시간의 틈을 파악한 그녀가 재빨리 헤이스트(가속)마법을 사용하여 파고들었다.

  쌔애애앵!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빠져나온 그녀를 맞이한 것은 투르의 창이었다. 그녀의 신형이 좌에서 우로 뻗어나가자 투르도 광룡보를 펼쳤다. 그녀의 움직임에 맞추어서 창을 연속적으로 뿌렸다. 허공 속에 생겨난 그녀의 잔상이 투르의 창격에 의해 사라졌다. 간발의 차이로 공간을 벌린 그녀가 위로 날아올라 파이어볼(화염구)를 연속적으로 날렸다. 사람 머리통 다섯 배만 한 파이어볼 열 발이었다. 6서클의 마력이 스며들어간 파이어볼이라 결코 우습게볼 수준이 아니다.

  투르가 창을 회전시켰다.

  휘리리릭!

  광룡창법의 광룡풍이 출수되었다. 극속의 회전력이 발휘된 투르의 창에 무섭도록 사나운 광풍이 형성되었다. 날아오던 파이어볼이 광룡풍에 의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튕겨 나간 불꽃이 투르의 주변을 감쌌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파이어붐(화염폭)을 시전했다. 흩어졌던 불꽃이 다시 한 번 위력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쇠도 녹일 수 있는 굉장한 화염이 투르의 주변을 완벽히 감쌌다. 그녀는 투르가 그 자리에서 녹아버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화염속에서 투르가 태연하게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불길에 그을린 자국은 있을지언정 탄탄한 몸은 생채기 하나 남지 않았다. 그녀의 놀람은 상상 이상이었다. 헬파이어(지옥의 불길)는 아닐지라도 8서클 화염계 최강 마법인 헬프레임에 버금가는 위력이라고 여겼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강인하고 단단한 육체의 소유자인 투르였다. 그에게 불길은 단순히 더운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재로 변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털어 버린 투르가 창을 바닥에 꽂았다. 그러고 나서 있는 힘껏 창을 휘었다.

  파아아앙!

  광룡창이 지면을 발판 삼아 길게 휘어진 창대를 폈다. 그러자 투르의 거대한 몸이 탄력을 받아 삽시간에 위로 솟구쳐 올랐다. 광룡창을 잡아채고 허공으로 치솟은 투르가 그녀와 거리를 좁힌 순간 광룡창법의 광룡포를 뻗었다. 헬버스터의 위력에 버금가는 투르의 광룡포가 직격하는 순간이었다. 위기의 순간 그녀는 블링크(공간이동)를 사용했다. 광룡포가 허공을 찔렀다. 투르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투르의 뒤로 공간이동을 한 것이다.

  -홀드(정지).

  투르는 허공에서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압살하는 듯한 마력이 투르의 전신을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조여왔다. 투르도 지지 않고 광천패황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몸을 옥죄여 오는 기운이 광천패황신공으로 인해 풀어졌다.

  “정말 대단하구나! 하지만 늦었다!”

  -기가썬더쇼크(천뇌격).

  치지지지지직!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린 짧은 시간에 8서클의 뇌격이 투르의 전신을 직격해 버렸다. 번개에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투르의 몸이 허공에서 지면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온몸이 불에 그슬린 듯 검게 변해 있었다.

  쿠과광!

   떨어져 내린 투르를 보고 난 후 그녀가 허공에서 내려왔다.

  “기가썬더쇼크를 맞고도 육체가 남아 있다니!”

  몸이 터져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엄청난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르는 터지지 않고 지면에 떨어졌다. 그녀는 투르가 죽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녀는 보지 못했다. 바닥에 추락한 투르가 광룡창을 잡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벌떡!

  전신이 검게 변한 투르가 눈동자를 빛내며 일어섰다. 그녀는 상식을 거부하는 투르의 육체와 투지를 보자 경악했다.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강인함이 절로 느껴지고 있었다. 전신에 서린 패기가 줄기는커녕 더욱더 강해지고 있었다. 치열한 대결은 아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투르가 또다시 달려들었다. 그녀도 이제부터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그녀의 놀람은 계속되었다. 어떤 마법을 써도 투르의 육체를 저지하기 힘들었다. 어찌나 단단하고 강력한지 대방어 마법진을 전신에 새기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철퍼덕!

  마법에 격중당한 투르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녀는 마법을 쓰다 지겹다고 느껴지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9서클 마법을 사용하고 나서야 간신히 투르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죽지 않고 일어서려는 모습은 그녀를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마지막 일격을 사용하려는 찰나에.

  사아아악!

  그녀의 신형을 베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빠르고 강력했다. 허공 자체를 베어오는 위력이 만만치 않았다. 앱솔루트실드(절대방어)를 신속하게 펼쳐 그녀의 주변을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했다.

  쿠아아아앙!

  울컥!

  앱솔루트실드와 베어져 오는 참격이 충돌을 일으켰다. 그녀는 심각한 충격을 받았는지 신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솟구쳐 오르는 마나역류를 경험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상대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존재는 그녀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타... 이탄!”

  마도시대에 인간들이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전설의 병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라져 버린 타이탄이 이곳에 나타난 것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다. 도대체 이곳이 뭐 하는 곳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더군다나 자신을 향해 포위하듯 다가오는 놈들 중에 오러마스터까지 두 명이나 되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몸으로는 그녀조차 이곳을 뚫어내기 힘들었다. 결국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다가왔다.

  “그만.”

  그녀가 현신하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라이젠이 나타났다. 싱글싱글 웃는 라이젠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주변을 감싸고 있었던 타이탄과 기사들도 모두 뒤로 물러서며 대기했다.

  그녀는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아리송했다.

  후르륵! 후르륵!

  그녀는 차를 마시며 라이젠을 노려보았다. 저택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베로나, 그만 노려봐라. 뚫어지겠다.”

  “그것보다 이곳이 새로운 라이젠 님의 레어인가요?”

  베로나는 저택을 지키는 이들이 라이젠의 가디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디언이 아니라면 그런 엄청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을 수가 없다. 라이젠이 동굴에서 나와 이곳에 레어를 새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아니.”

  “아니라고요! 그럼 그놈들은 다 뭐예요? 특히 이상하게 단단한 놈은 정체가 도대체 뭐예요?”

  “이 저택 주인의 수하들이야.”

  “예? 저택 주인이 누군데 드래곤도 때려잡을 구성을 만들어놓았대요!”

  상상을 불허하는 저택방어력이었다. 현신을 한다고 해도 뚫을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현신을 하려고 했지만 위험한 상황이었다. 현신하는 찰나에 공격 이 들어오면 빼도 박도 못 하고 죽을 수 있었다. 베로나는 라이젠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믿지 못하는 베로나를 보며 라이젠이 한술 더 떴다. 

   “그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인간은 아니겠지요?” 

  “인간 맞아.” 

  “인간이 어떻게?”

  “나도 그놈을 못 이기는데 말 다했지.” 

  휘청!

  베로나는 라이젠을 아는 드래곤 중에 하나다. 라이젠이 비록 팔불출이기는 하지만 그가 가진 마력은 드래곤들 중에서도 탑을 달린다. 로드를 제외하고 라이젠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드래곤이 없다. 베로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라이젠을 보았다. 

  “거... 짓말이죠!”

  베로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드래곤이 거짓말하는 것 봤냐.” 

  사실이라는 것이 느껴지자 베로나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고룡급 드래곤을 이길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라이젠은 베로나의 놀람을 당연하게 여겼다. 가르딘을 몰랐다면 라이젠도 쉽사리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충고를 해주어야 한다. 혈기왕성한 젊은 드래곤들이 사실을 확인하려고 가르딘을 자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놈은 대범하게 넘어가 주는 그런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드래곤들이 곤혹을 치를 수 있었다. 

  “가르딘이라는 녀석이다.” 

  “어떤 인간인지 정말 보고 싶어지네요.” 

  “보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말을 섞다 보면 너도 모르게 그놈의 마수에 빠져 버리고 말 거다. 나중에 화난다고 덤벼봐야 이로울 게 없는 놈이다. 그걸 빌미로 또다시 마 수의 그물을 칠 놈이야.”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설마가 드래곤도 잡는다는 것을 배우게 될 거다.” 

  가르딘이라는 놈은 상식을 넘어서는 존재다. 드래곤의 잣대로도 젤 수 없다. 심기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는 것이 아니라 능글맞은 성격과 좀스러운 잔머리가 상식을 넘어 선다는 뜻이다.

  라이젠의 설명을 들으니 베로나는 가르딘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그보다 무슨 일이지?”

  “얼마 전 실베니아 왕국에서 놈들의 행적을 발견했어요.”

  “그래.”

  실베니아 왕국에서 어둠의 길드 요원들과 벌인 전투를 라이젠에게 설명해 나갔다. 놈들의 능력이 제법이기는 했지만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다크홀릭 마법진을 사용한 것은 예의 주시해야 할 사항이었다. 다크홀릭 마법진은 보통 마법진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어둠의 마법사 중에서도 9서클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마법진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9서클이란 말이지.” 

  “그래요.”

  “그놈의 말대로 어둠의 길드가 마왕의 부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군.” 

  “그놈이라니요?”

  “좀 전에 말했잖아. 가르딘이라고.” 

  “그럼 마왕의 부활에 대한 사실을 밝힌 이가 가르딘이라는 자였던 건가요!” 

  “맞아.”

  베로나는 새삼 모르던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마왕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발견한 이가 라이젠인 줄 알았다. 라이젠이 드래곤로드를 비롯한 전 드래곤에서 마왕 부활에 대한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생각을 180도로 뒤집는 일이었다. 알면 알수록 가르딘이라는 인간이 신비하게 보였다.

  “다른 것은 없었어?”

  “그놈들 중에 특이한 놈을 잡았어요.”

  “물론 죽었겠지.”

  “잡히는 순간 저절로 소멸하게 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라이젠 님이 말한 대로 놈들의 핵을 한순간에 얼렸어요. 또한 주변에 마나의 접근을 할 수 없도록 마법진까지 그려 놨어요.”

  어둠의 길드 요원들은 모두 대법이 걸려 있었다. 벗어나려고 해도 대법이 있는 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어둠의 길드에 대한 물음은 절대 할 수 없도록 세뇌되어 있었다. 가르딘의 저택이 습격당하는 당시에 잡은 세븐핸드도 대법이 걸려 있어서 놈들의 위치를 밝힐 수 없었다. 라이젠은 방법을 찾기 위해 잡아 놓은 세븐핸드의 육체를 연구했다. 그래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결론을 도출 할 수 있었다. 놈들이 죽기 직전 약간의 시간적 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라이젠은 죽기 전에 냉동마법을 걸어 핵만은 얼리고, 마법진을 새기라고 드래곤들에게 알렸다. 우선은 증거를 확보하고 연구는 나중에 하겠다는 뜻이다.

  베로나는 확보한 제롬의 핵을 라이젠에게 보여주었다. 마법진과 냉동마법으로 인해 부식되지 않고 온전했다.

  하지만 마법을 푸는 순간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전에 어떤 식으로 마법이 작동하는지 파악하고, 놈들의 위치를 발견할 단서를 발견해야 한다. 

  “수고했구나. 그럼 너는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포레스트와 그란테스가 어둠의 길드를 찾고 있어요. 소식이 오는 대로 가려고요. 그동안은 여기 있으면 안 되나요.”

  가르딘을 보고 가려는 것이 짐작되지만 라이젠은 허락했다. 호기심이 많은 종족인 드래곤이다. 누가 말린다고 해서 들어 처먹을 나이는 이미 지났다.

  ‘똥이 왜 무서운지 경험해 봐야 알겠지.’

  끼이익!

  라이젠과 베로나의 방으로 안젤리카가 들어왔다. 베로나는 가끔씩 라이젠의 레어로 와서 안젤리카를 본 적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언니!”

  “어, 그래! 500년 전에 보고 오늘 또 보는구나! 그 짧은 시간에 많이 예뻐졌네!”

  시간의 개념이 인간과는 완벽히 달랐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10년도 길다고 하겠지만 드래곤은 천 년은 되어야 ‘조금 거리를 두었구나.’ 라고 생각을 한다. 

  “언니도 여전히 아름다워요.”

  “고맙구나.”

  베로나의 나이는 4,221살이다. 성룡이 된 지 1천 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고룡급은 아니지만 웜급의 드래곤이라고 할 수 있다. 베로나와 안젤리카는 서로 호흡이 잘 맞았다. 취향도 비슷해서 레어에 올 때마다 잘 어울렸다.

  “저택 좀 구경하고 싶은데 안내해 줄 수 있겠니?”

  “물론이에요.”

  베로나는 저택 안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몹시 궁금해했다. 라이젠도 제롬의 핵을 살펴봐야 하기에 따로 시간을 내 줄 수가 없었다.

  조용해진 방안에서 라이젠은 핵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세븐핸드 쏘렌토의 경우도 삽시간에 육체가 붕괴되고, 핵이 녹아버렸다. 어떤 방법으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규명을 하지 않는 이상 냉동된 핵을 풀 수가 없는 상황이다.

  ‘자존심을 건드리네. 좋아! 반드시 밝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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