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4/93)

    @@[제2장 짧은 휴식@@]

  카니발 백작은 요즘 들어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황도에서 귀족들과의 유대관계를 맺어 세력 확장을 순조롭게 진행을 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이제 카니발 백작도 황도에서 침 좀 뱉고 다녀도 될 정도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가르딘 공작이 뒤를 봐주고, 두 대공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어느 누가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황도 중앙의 집권세력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6일에 한 번씩 황궁에 들러 황제를 만나야 했다. 러쉬 황제가 자꾸 가르딘 공작이 언제 황도로 올라오느냐고 묻고 있었다. 웬만하면 적당히 넘길 수 있겠지만 러쉬 황제는 만만치 않은 황제였다. 이제 막 22살이 된 러쉬 황제지만 카니발 백작의 등 뒤로 식은땀이 나게 만들 정도로 현명했다.

  개인전용 서재의 의자에 앉아 있는 카니발 백작은 황제에게 둘러댈 핑계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파왔다.

  “이제는 아예 통신도 되지 않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젠장! 권력층이 되면 뭐 하냐고! 누구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지 않나!”

  가르딘의 무책임함에 짜증이 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발키리 영지에 통신을 다시 한 번 넣어 보았다. 때마침 필리언이 통신을 받았었다. 가르딘 공작에 대한 소식이 있냐고 물어보자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지가 알아서 오겠지!

  아무리 친구지만 공작을 대하길 너무 스스럼없이 막대하고 있었다. 카니발 백작은 가르딘 공작이 처음에 보여준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거짓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급한 대로 아이시런 공주에 대해서 다시 물었었다. 공주님이 다시 황도로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아니! 그냥 눌러 살 기세시다.

  가르딘 공작이 돌아올 때까지 황도에 갈 생각이 아예 없다는 필리언의 대답이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발키리 영지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라이나 공작부인과 언니 동생 사이까지 됐다고 한다.

  “공주님이 왜 그토록 가르딘 공작님을 보려고 하지! 진짜 설마가 사람을 잡는 것은 아니겠지.”

  만약 카니발 백작이 짐작하는 그것이 맞는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된다. 과연 러쉬 황제가 가만히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가르딘 공작이 전공을 많이 세우고, 제국의 공작이라고 해도 팔은 결국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다.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다.”

  똑똑!

  누군가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집사장 바켄이 들어와서 소식을 전했다.

  “입궁하시랍니다!”

  “알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간격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그만큼 황제의 인내심도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 아닐 수 없었다.

  ‘다크랜드에서 몬스터가 쳐들어 왔다고 해야 하나!’

  “젠장!”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세상에 이런 사소하고 얼토당토않은 일로 고민하고 있는 귀족은 카니발 백작뿐일 것이다.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애를 쓰는 귀족들과는 전혀 다른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 가르딘 공작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속으로 끙끙 알아야 하는 카니발 백작이었다.

  ‘내가 미쳤지! 그때 손을 내미는 게 아니었어. 후우우!’

  그때는 왜 그렇게 가르딘 공작이 멋있고, 위대해 보였는지, 한탄이 절로 나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 스스로 찌질이 궁상의 세상으로 들어온 격이 되었다. 이제 빠져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었다.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다. 발버둥을 쳐봐야 가르딘 공작의 마수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이 느껴진다.

   발키리 영지에 머물고 있는 아이시런 공주는 라이나와 함께 차를 마시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르딘 공작과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루했던 아이시런 공주에게 라이나는 활력소와 같았다. 라이나와는 말이 잘 통했다. 특히 공동의 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가르딘의 뒷담화는 정말 재밌었다.

  뒷담화가 끝나고 나면 여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피부미용과 취미활동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언니!”

  “왜?”

  “전보다 피부가 더 좋아진 것 같아요.”

  “호호! 그러니!”

  라이나는 아이시런 공주와 말까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상대는 누가 뭐래도 카이로만 제국의 황녀였다. 함부로 대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다. 아이시런 공주가 집요하게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편하게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대화를 해보니 아이시런 공주의 성격이 그녀와 아주 잘 맞는 편이었다. 관심사도 비슷하고, 성격도 어찌 보면 비슷했다. 억척스럽고, 고집이 강한 것은 라이나와 아이시런 공주 둘 다 가지고 있는 성품이었다.

  “비결이 뭐예요?”

  전에 비해 라이나의 모습이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보았을 때는 그저 보통의 여인처럼 보였지만 지금 보니 피부가 장난 아니었다. 살결에 흐르는 윤기와 팽팽한 탄력성이 아이시런 공주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얼굴도 전에 비해 훨씬 젊어지다 못해 어려 보였다. 사랑하면 아름다워진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이처럼 변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라이나는 젊어진 이유를 생각하다 얼굴이 붉어졌다. 말을 하게 되면 가르딘과 있었던 일을 설명해야 한다. 아이시런 공주가 비록 다 자란 성인이기는 하지만 처녀였다. 처녀에게 부부관계를 말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서로의 허물이 많이 좁혀지지 않았다면 꺼내지도 않을 내용이다. 라이나는 쉽게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저에게도 말할 수 없단 건가요?”

  “그... 건 아닌데.”

  “그럼 말해 주세요.”

  아이시런 공주의 끈질김에 라이나도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얘 아빠가 밤에......!”

  소곤! 소곤!

  라이나가 부끄러운지 작게 속삭였다. 집중해서 듣고 있던 아이시런 공주는 듣다가 덩달아 얼굴이 붉어졌다. 남녀관계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했던 아이시런 공주는 뜻하지 않게 세세한 성교육을 받게 되었다. 성교육이라는 것이 듣기에는 민망해도 남녀 간에 가장 궁금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부끄러워하면서도 귓속으로 쏙쏙 들어오는 내용을 아이시런 공주는 더욱더 집중해서 들었다. 같은 여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정말이에요?”

  “그래.”

  “그런 방법이 있단 말이에요.”

  “나도 정확히는 몰라.”

  아이시런 공주는 고민이 되었다. 설득력이 없는 내용 같지만 증거가 이렇게 버젓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아이시런 공주는 라이나의 내용 중에 사실적인 내용만을 간추려서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그녀는 핵심을 집어낼 줄 알았다.

  ‘젊어지는 오러심법이라는 소린데, 외부에서 오러를 주입하는 방법은 아주 독특해! 잘만 하면 나도 젊음을 계속 유지 할 수 있을 수도 있겠는데.’

  여인에게 피부는 생명이다. 또한 젊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모든 여인들의 로망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아이시런 공주는 큰일 날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이나가 말한 방법은 부부끼리 가능한 일이다. 가르딘을 너무 편하게 대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었다. 후일 가르딘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을 아이시런 공주가 획책하는 계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보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설마 쉴라하고......!’

  도리!도리!

  쉴라는 성녀였다. 성녀가 결혼한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 한 아이시런 공주다. 그녀의 도리질에 라이나가. 

  “뭐해?”

  “아니에요.”

  다들 가르딘을 너무 쉽게 보고 있었다. 가르딘은 절대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라이나가 철통같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빵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 우유부터 마시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자만심이었다. 관점이 독특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가르딘은 독특함을 넘어서 유니크했다.

  불타버린 잿더미.

  엘프 마을의 현재 모습이다. 하루 전의 아름다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치열한 전투를 막 끝낸 지 하루가 지난 엘프 마을은 슬픔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마을과 나무, 숲이 망가진 것도 문제지만 엘프들이 죽었다. 엘프가 슬퍼하자 그 주변의 자연마저 슬픔에 동조하는 듯했다.

  1만 년의 세월 동안 엘프가 인위적인 사고로 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가 더 흘렀다. 엘프들은 거짓말처럼 슬픔을 잊었다. 2일 전에 벌어진 일을 완벽히 잊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과는 다른 생소한 모습에 쉴라가 맴피스에게 물었다.

  “이상하네요.”

  “무엇이 그렇습니까?”

  “소중한 것을 잃게 되면 슬프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빨리 슬픔을 잊을 수 있는 건가요.”

  허허허!

  맴피스는 아름다운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웃음을 지었다. 생사에 초탈한 득도한 엘프처럼 보였다. 물론 맴피스는 인간의 나이로 따지면 죽어서 환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먹기는 했다.

  “그들은 모두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태초의 엘프는 자연에서 파생되어 왔습니다. 어머니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그리 오래 슬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함께한 추억이 생각나지는 않나요.” 

  “언젠가 우리도 자연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다시 추억을 공유하면 됩니다.” 

  “그런가요.”

  쉴라는 쉬이 납득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오랜 시간 슬픔을 간직한다. 엘프들처럼 한순간에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잊을 수 없다. 생김새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엘프는 역시 사람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기에 소중히 하는 것과, 엘프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 다른 것이다. 종족 간의 차이점이 존재했다. 단시일 내에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가르딘은 엘프 마을의 가장 한적한 장소의 나무 위에서 농땡이를 부리고 있었다. 원래는 엘프 마을을 구하는 데로 벗어나려고 했지만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부상을 치료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쉴라의 신성력으로 치료를 모두 마쳤지만 본원진기를 보충하는데 오래 걸리고 있었다. 또한 지금 신성들은 다음 경지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기였다. 본원진기를 확충하는 동시에 새로운 경지에 다가설 것이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신성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짓이었다. 가르딘은 자신만이라도 가면 안 되냐고 강력한 눈빛을 보냈지만 쉴라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가르딘도 뜻하지 않은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 싫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휴식을 취하는 겸에 알아봐야 할 것이 있기는 했었기 때문이다.

  가르딘은 손에 들린 천룡검을 보았다.

  차아앙!

  가르딘은 검집에 들어가 있는 천룡검을 뽑았다. 천룡검의 검면은 눈이 부실 정도로 잡티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수만 번의 제련과 정련을 거쳐 탄생한 천룡검이다. 검 자체적인 예기조차 대단했다. 나무 위에서 내려와 바위에 다가간 가르딘이 가볍게 내리쳐 보았다. 그러자 바위가 좌우로 가볍게 베어졌다. 단단한 돌을 베기 위해서는 속도와 오러가 필수적이다. 힘을 전혀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바위는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마치 검이 부딪치기 전에 스스로 좌우로 벌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마의 기억에 의하면 이 정도는 아닌데.”

  검의 예기가 상상 이상으로 날카로웠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데븐스를 상대할 때 힘들었던 것도 천룡검의 날카로운 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천룡검 자체적으로 뿜어 나오는 예기와 영성이 신성의 능력을 반감시키고, 항마멸사신공의 공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도록 한 것이 분명했다.

   천룡검은 확실히 명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의 천룡검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신마가 사용했을 때의 천룡검이 명검이라고 하면 지금의 천룡검은 신검이라고 불려도 어색하지 않았다. 신마가 차원이동시 모든 기운을 소멸한 것과 다르게 천룡검은 어떤 계기로 인해 힘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되었다.

  “우선은 깨워봐야겠지.”

  데븐스를 처리하기 위해서 징징대는 천룡검의 영성을 천룡무상신공으로 잠재워 놓았었다. 천룡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재워 놓은 녀석을 다시 깨워서 이상한 길로 빠진 이유를 밝 혀야 했다. 예전의 천룡검은 자연에 순응하는 힘을 지녔다.

  그런데 현재의 천룡검은 짙은 마기와 사기, 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웅!

  천룡무상신공으로 잠재웠으니, 천룡무상신공으로 다시 깨울 수 있었다. 천룡무상신공의 기운을 받은 천룡검의 검면에 천룡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검으로 타고 흐르는 천룡무상진 기의 수발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기운을 다시 받아들이는 듯이 지속적으로 흡입해 나갔다. 빨려 들어간 기운으로 인해 천룡검이 용트림을 했다.

  찌이이이잉!

  천룡검의 영성이 깨어났다. 그러자 다시 활개 치듯이 반항을 하는 것이었다. 검병과 검면이 심하게 요동쳤다. 오러마스터라고 해도 쉽사리 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반항이었다. 일렉트릭마법을 정면으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을 주고 있었다. 검의 능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타아앙!

  그러나 상대는 가르딘이다.

  쓸데없는 반항을 가만히 내버려둘 정도로 마음이 넓은 가르딘이 아니다. 검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순도 높은 쇠를 두드리는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한 번 두드리는 것에는 만족을 하지 못했는지 천룡검의 반항은 제법 오래갔다. 가르딘은 강도를 높이다가 신경질이 났는지 검면을 주먹으로 세게 팼다.

  파아아아앙!

  위이이이이잉!

  천룡검의 반항이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신마의 독문병기이기에 천룡무상신공을 경험하면 자연스럽게 검의 주인으로 인정할 것이라는 가르딘의 예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데븐스도 잘만 사용한 천룡검이 정작 주인을 몰라보자 짜증이 치민 가르딘이다. 원래 사람이건 물건이건 정신 못 차리면 뒈지게 맞아야 한다. 맞다 보면 정신이 들 것이다. 안 듣다가 부서지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끝까지 반항한다 이거지.”

  가르딘이 이번에는 검의 끝과 검병(그립)을 양손으로 잡았다. 주인을 몰라보고 반항하는 검을 그냥 놔둘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검끝과 검병에 조금씩 힘을 주어 구부렸다. 검은 탄력이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구부러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면 부러진다. 일반검이 아닌 천룡검이기에 탄력과 단단함이 대단하기는 해도 가르딘도 일반적인 검사가 아니었다. 천룡무상신공이 발휘되면 파이럴도 으그러뜨릴 수 있었다.

  천룡검이 심하게 구부러지는 상황이 되었다. 조금만 더 하면 검으로서의 생명이 다할 수 있다. 천하제일검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천룡검이 부러진다고 해도 가르딘은 그다지 아쉬 울 것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의 경지에서 검은 있으나 없으나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천룡검의 검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시점에.

  -아아아악! 그만 해, 이 야만인아!

  ‘응?’

  가르딘은 순간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뜬금없이 여인네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주변에 누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론은 쥐고 있는 천룡검이 말을 했다는 소리가 되었다. 천룡검에 영성이 있는 것은 파악했어도 말까지 할 수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신마도 천룡검이 말하는 경우는 접하지 못했었다. 잠시 당황한 가르딘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룡검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보았다. 말하는 검은 소울소드(영혼의 검)라고 하여 부르는 게 값이다. 내다가 팔면 제국의 황제도 탐을 낼 것이다. 가르딘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가 사라졌다.

  -까아아악! 말이 말 같지 않아! 그만 하라고!

   “너 말도 할 줄 알았냐?"

  그제야 힘을 푼 가르딘이었다.

  -흥! 그래 말할 줄 안다. 어쩔래!

  말을 할 줄 아는데 네 가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반항기 넘치는 천룡검이 가르딘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그동안 쌓인 것이 많았는지 한번 터진 입은 그칠 줄 모르고 남발하 고 있었다.

  참다못한 가르딘이 다시 물었다.

  “너 왜 그렇게 비뚤어졌나?”

  -신마가 날 버리는 순간 나는 비뚤어지기로 결심했다! 주인에게 버림 받은 심정을 네가 알기나 해! 그 비통함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단 말이야! 그날 이후로 나는 예전의 올 곧고, 정의감 넘치는 천룡검으로서는 역할을 버렸다!

  스스로에 대한 자화자찬이 대단했다. 검이 올곧고 정의감 넘친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그것은 주인이 어떤 성향을 띠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가르딘이 얘기를 듣다가 갸우뚱했다.

  “버렸다고? 그런 기억은 없는데.”

  신마의 기억 속에 천룡검을 버린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차원을 넘어오는 순간에 잃어버린 것으로 되어 있었다. 기억이 조작될 리는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천룡검이 오해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잘못 들은 것 아니냐!”

  -오해는 무슨! 그놈이 잘난 체하다가 바보같이 진에 빠져서 고생할 때 나를 얼마나 부려먹은 줄 알아! 그러고 나서 신경질 난다고 나를 던져서 폭발시키려고 했다고! 간신히 살아 난 내가 얼마나 이를 갈았는데!

  “음! 그런 사연이 있었나!”

  신마는 천기자가 쳐 놓은 역천무한진에 자신 있게 들어갔었다. 당대에 적수가 없었던 신마는 자신감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바로 신마였다. 그 어떤 난관도 간단하게 부숴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신마는 지닌바 무공으로 가볍게 진을 와해시키고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역천무한진은 신마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가공할 진법이었다. 모든 내공과 무공을 쏟아 부었지만 그야말로 헛수고였다. 마지막에 신마는 자신의 모든 내력을 천룡검에 집중하여 이기어검술을 사용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천룡검이 역천무한진과 공명하면서 폭발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신마와 천룡검이 미드라이언 대륙으로 건너오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고, 각자가 경험한 기억은 다르게 와전되었다. 신마는 차원이동 중에 잃어버린 것이고, 천룡검은 신마가 자신을 버린 것이 되었다.

  천룡검의 절절한 절규가 가르딘에게 전해졌다. 의외로 천룡검은 가느다란 여인의 미성이었다. 천룡의 기운은 사내의 상징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가르딘에게 뜻하지 않는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천룡검의 일방적인 설명을 들으면서도 가르딘은 그다지 공감하지 않았다. 검을 사용하는 것은 검사의 마음이다. 검을 던져서 폭발을 일으키든 말든 그것은 검사의 고유권한이라고 할 수 있다. 검이 마음이 있어 그 마음까지 보살피고, 간직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신마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천룡검이 특별한 것이다. 또한 주인을 위해 그 정도 희생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영성은 어떻게 생긴 거냐?”

  -신마가 버린 이후 갑자기 영성이 생겨났다. 폭발하는 순간, 배신감에 치를 떤 나를 신이 가엽게 여긴 것이 분명해!

  ‘퍽이나!’

  차원이동 중에 뜻하지 않게 영성이 생긴 것으로 보는 가르딘이다. 차원이동도 가능한 일이기에 영성이 생기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이상한 일이 여러 번 겹치게 되 면 무덤덤하게 인정하게 된다.

  “그럼 네가 데븐스에게 무극칠검식을 전수한 거냐!”

  -그래, 그놈이 제법 신체가 좋았지. 내가 사람이었다면 한번 사귀어 봐도 괜찮을 정도였는데.

  이상한 생각을 태연하게 말하는 천룡검이었다. 말을 들어 보니 자기가 좋아서 먼저 달려든 것처럼 보인다. 사실 당시의 데븐스는 꽃미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멋있게 생겼었다. 미드라이언 대륙의 5대 얼짱 출신이기도 하다. 우연한 기회에 천룡검을 주운 것도 모두 계획된 것이 분명했다.

  “그깟 반항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은 줄 알아.”

  -이미 버린 몸 더 버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 그리고 나는 단지 검법을 전수해 줬을 뿐이야. 그걸 사용하는 것은 내가 아니지!

  “그렇기는 하군.”

   천룡검은 자신의 비뚤어진 성향이 데븐스의 성향까지 바꾸어놓았다는 것을 빼놓고 말했다. 그로 인해 데븐스가 세상을 향해 포악한 성향을 내뿜고, 많은 혈류를 뿌린 것이다. 정말 이기적인 천룡검이 아닐 수 없었다. 천룡검이 아닌 데빌드래곤소드(마룡검)이라고 불린 이유가 있었다. 가르딘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 천룡검이었다.

  “그런데 왜 날 거부한 거지?”

  -네놈은 신마 그 개자식의 후인이잖아! 내가 날 버린 놈의 후인을 보고 기뻐서 춤이라도 출 줄 알았냐!

  “검이 춤춘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 그건 그렇고 계속 반항할 거냐?”

  -당연하지, 나는 지조 있는 검이다! 절대 네놈의 수족 따위는 되지 않아!

  천룡검의 의지가 단호했다. 그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는 독립투사의 의기와 비슷했다. 상황만 보면 가르딘이 수청을 들라고 강요를 부리는 못된 사람처럼 보인다.

  호오!

  “계속 반항하겠다는 말이지.”

  가르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그 웃음에 천룡검의 검면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천룡검은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부러지는 고통은 좀 전에 겪어봐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검면이 부러지면 영성이 부서진다.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왜...또 날 부러뜨리게......?

  “아니.”

  -그... 럼 어쩔 건데?

  “어차피 쓸 수도 없는 검, 아공간에 집어넣어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할 거다.”

  -그... 럴 거면 그냥 차라리 다른 놈에게 날 줘라! 나 보기보다 쓸모가 많은 검이야! 아 그렇지! 나와 결투한 그 두 놈에 날 주면 딱 좋겠다!

  데븐스를 선택한 본성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잘생긴 스필언과 미토스를 보자 흑심을 드러내고 있는 천룡검이었다. 말하는 본새를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본성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가르딘은 남을 위해 자신의 것을 과감하게 주는 대인배가 절대 아니다.

  “내가 미쳤냐! 남 좋은 일 시키게. 남 줄 바에는 아예 잘게 부숴서 농기구로 사용할 거다!”

  가르딘의 치사함에 열이 뻗치는 천룡검이었다. 검생에서 이토록 쪼잔하고, 잔인한 놈은 처음이었다.

  -이 치사한 놈! 

  이런 상황에서 먼저 화내면 지는 것이다. 언제나 쿨하게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천룡검은 이미 가르딘의 말발에 지고 있었다. 흥분해 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도권을 쥔 자 에게 이로울 뿐이다.

  “그럼 이만 아공간에 영원히 사라져라.”

  가르딘이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아공간을 열었다. 천룡검은 무서운 능력을 가진 검이다. 그저 단순히 검법을 가르쳤다고 해서 사람의 성격이 변하지는 않는다. 분명 천룡검이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더군다나 천룡검은 무극칠검식을 알고 있었다. 가르딘의 독문검법인 무극칠검식이 외부로 유출 되는 것은 사양이다.

  가르딘이 천룡검을 아공간에 집어넣으려고 하자.

  -잠... 깐! 너 무극칠검식의 마지막 검결 모르지. 나는 알고 있다!

  다급해진 천룡검이 마지막 회심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

  반면에 시큰둥한 가르딘이다.

  -날 풀어주면 가르쳐주지!

  검사이기에 검법에 대한 욕심이 강할 것이라 여긴 천룡검이다.

  천룡검이 정말 이상해진 것이 확실했다. 검 주제에 협상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가르딘의 능력은 신마를 뛰어 넘은 지 오래였다. 신마가 구상한 마지막 검결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걸 완성한 인간이 가르딘이다. 하물며 천룡검은 신마의 불완전한 오의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르딘이 넌지시 찔러보았다.

  “혹시 연환결이냐.”

  -허억! 그...걸 어떻게?

  발이 있었으면 놀라서 뒤로 자빠질 뻔한 천룡검이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가르딘이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 소용없겠네. 그럼 이만 아공간에 들어가야겠네.”

  회심의 카드가 소용없게 되자 천룡검은 신마를 욕하기 시작했다.

  -연환... 결은 신마 그 개자식이 나한테만 남긴 것인데! 그렇다면 그놈이 날 속인 건가!

  신마는 자신의 후인을 위해서 무극칠검식의 검결을 천룡검에 새겨 넣었었다. 불완전한 마지막 검결까지 넣어 후인이 완성시켜주기를 바란 것이다. 천룡검은 오랜 세월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불완전한 검결의 비밀을 약간이지만 풀어냈었다.

  “아니, 내가 능력이 뛰어난 결과지.”

  천룡검은 억울했다. 가르딘이 이렇게 나오면 협상카드가 무의미해져 버린다. 이대로 영원히 아공간 속에 갇히고 싶지는 않았다. 차원이동 중에 겪은 억겁의 시간이 주는 고통이 다시 떠올랐다. 검생을 마치는 한이 있어도 그건 싫었다.

  결국 천룡검이 고개를 숙였다.

  -말...잘 듣겠다.

  가르딘은 그 정도로 용납해 주지 않았다.

  “말이 짧다.”

  인내심을 발휘한 천룡검이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말...잘 듣는...다고요.

  가르딘은 무척이나 선심 쓰는 듯이 무성의하게 대답해 주었다.

  “좋아. 아량 넓은 내가 기회를 한 번 주지.”

  ‘그게 넓은 거냐! 똥통에 코 박고 흡입할 놈아!’

  천룡검이 얻어낸 심득이 무엇인지가 약간은 궁금한 가르딘이다.

  하지만 쉽사리 내색하지 않았다. 천룡검을 자연스럽게 꼬드겨서 무극칠검식의 연환결에 대한 비밀을 완성해 나가면된다. 가르딘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신마가 그 정도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몰랐었다. 충분히 연구해 볼 가치가 있었다. 만약 완성만 된다면 무극칠검식의 모든 초식을 하나의 완벽한 초식으로 구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고작 2초식을 합했을 뿐인데 위력은 거대한 운석을 송두리째 사라지게 만들었다. 무극칠검식의 모든 초식을 연환한다면 상상을 불허하는 위력이 나올 것이다. 그때는 마왕이 나와도 겁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곱게 검집에 들어가라.”

  천룡검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건 말건 천룡검을 검집에 넣은 가르딘은 심상을 끝내고 엘프 마을로 돌아갔다.

  엘프들이 마을 주변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물을 길어 왔는지 땅과 숲에 물을 뿌렸다. 물은 조금 진득한 성질을 가졌다.

  바쁘게 움직이는 엘프들을 유심히 지켜본 가르딘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뭐야?”

  엘프가 진액을 땅에 뿌리자 그 자리에서 싹이 자라나 삽시간에 다 자란 나무가 되었다. 수백 년을 자라야 완성된 나무가 되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다. 하물며 저처럼 고구마줄기 자라듯이 자라는 나무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200명의 엘프들이 분주하게 진액을 뿌리자 금세 수풀과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났다. 더군다나 그들이 사용하는 집들까지 완벽하게 복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쑥대밭이 되어 버렸던 엘프 마을이 삽시간에 원래의 마을로 변해갔다.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기에 저렇게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엘프들 사이에 끼여서 일손을 도와주고 있던 쉴라가 가르딘을 보았다.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쉴라가 가르딘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왔다.

  다다다다닥!

  그리 길지도 않은 다리로 잘만 달려왔다. 갑작스럽게 달려 온 쉴라가 가르딘에게 다연발 연사격이 가능한 석궁처럼 갈구기 시작했다. 말 하나 하나가 정확한 발음으로 이어졌다. 굉장한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성녀가 되더니 갈구는 수법조차 업그레이드를 한 것 같았다.

  “지금 양심이 있는 거예요. 다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는데 한가하게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 거예요! 부인도 이 사실을 아는 건가요! 우리 때문에 죽은 엘프들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정말 한심해서 살 수가 없다니까요!”

  ‘누가 내 대신 살아 달라고 했냐!’

  가르딘이 입을 열기도 전에 쉴라의 말이 먼저 나오고 있었다. 끼어 들 빈틈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르딘도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지금 너는 큰 착각을 하고 있다.”

  “뭘요?”

  “엘프들이 위기에 빠진 것은 우리 탓이 아니라 네 탓이지. 네가 나를 데려온 거지. 내가 가자고 한 것은 아니잖아. 안 그래.”

  “그래서 아저씨는 아무 잘못도, 책임감도 못 느끼겠단 말인가요. 어떻게 저같이 어린 소녀에게 모든 짐을 뒤집어씌울 수 있어요! 그러고도 사내라고 할 수 있나요.”

  어린 소녀는 아무한테나 책임감을 떠넘겨도 되는지 다시 한 번 고민해 보는 가르딘이다.

  “물론 나는 엘프들에 대한 약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정작 엘프들을 가장 큰 위기에서 구한 사람은 누구지. 바로 엊그제의 일이 나는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야.”

  가르딘은 자신이 한 일을 대놓고 과시했다. 결과가 명백한 일이니 쉴라도 부정을 못 했다.

  “생색내는 건가요?”

  “잘 봐. 엘프들 중 누가 감히 내게 농땡이 핀다고 따질 수 있겠어. 저기 엘프들의 표정을 봐라, 나를 존경하고 있잖아.”

  “흥! 말이나 못 하면.”

  결국 최종승자는 가르딘이 되는 순간이었다. 가르딘의 말대로 엘프들은 가르딘을 경외시하고 있었다. 그가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과, 위기에서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용기는 아무나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처음에는 하기 싫어했잖아요. 억지로 했으면서 자랑하는 건가요.”

  “억지로 하건, 하고 싶어서 하건, 결과는 좋았잖아!”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혼자서 놀러 다니는 가르딘이 얄미워서 꺼내본 말에 본전도 찾지 못한 쉴라였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오기를 부려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가르딘이 쉴라의 반박에 쐐기를 박았다. 천천히 엘프들에게 다가갔다. 가르딘이 접근하자 엘프들이 놀라는 기색이 완연했다.

  씨익!

  가르딘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가 도와줄까?”

  “아... 닙니다. 저희들이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엎드려서 절 받기나 마찬가지였다. 엘프들의 목숨을 구해 준 가르딘이다. 그런 가르딘이 도와준다고 하는데, 그걸 바로 넙죽 받아들이는 엘프는 아마 없을 것이다. 또한 가르딘처럼 단번에 알았다고 대답하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다. 한편의 연극을 보고 있어야 했던 쉴라였다. 안 봐도 의도가 뻔히 보이는 연극이건만, 반박할 단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봤지. 그럼 이만 난 쉬러 간다.”

  툭! 툭!

  수고하라며 쉴라의 어깨를 두드리고 난 후 가르딘은 여유롭게 한적한 장소를 찾아 또다시 휴식을 취하러 갔다. 가르딘은 뒤에서 쉴라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되었다. 아마 몹시도 분해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쉴라는 씩씩대고 있었다.

  ‘다음에는!’

  본원진기를 회복 중인 스필언과 미토스는 숲의 기운이 가장 융성한 세계수 근처에서 가부좌를 튼 채 명상을 하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를 제외하고 숲은 조용했다.

  풍만하고 맑은 자연의 기운이 스필언과 미토스의 주변을 감쌌다. 신성이 내뿜는 호흡에 맞추어 기운이 흡입되고, 배출되었다. 대기마저 신성의 호흡에 동화되고 있었다.

  “후으읍! 후우우우!”

  들이마시는 호흡은 짧고 빠르게, 내쉬는 호흡은 길게 이어졌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명상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들이 알고 있던 본질적인 내면의 세계를 관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능력과 내면의 능력은 같으면서도 다른 성질을 띠고 있었다. 내외의 경지를 본다 함은 합일할 수 있는 시초를 제공한 것이다. 신성은 항마멸사신공의 구결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하나하나 되풀이를 해나갔다. 그러자 이제까지 지나온 스필언과 미토스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잊어버리고 있던 아주 작은 사소한 것들까지도 기억이 났다. 기억은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로 향해 나아갔다. 태어나는 시점에서 시작한 과거로의 여정은 현재로 돌아오기 위한 단단한 바탕을 만들어 나갔다. 몸이 재구성되는 환골탈태를 하듯이 마음도 과거의 기억들과 현재의 기억들이 하나로 합일하 여 완전한 기억으로 바뀌어갔다. 잊혀진 기억들의 편린까지 모두 하나로 이어져 뇌리를 관통했다.

  스필언과 미토스의 몸에서 신비스러운 기운이 형성되었다. 기운은 그들의 머리를 맴돌다가 다시 몸으로 들어갔다.

  몸, 마음, 영혼의 정기신이 완벽하게 합일되며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오랜 시간 수련하면서도 이와 같은 경우를 처음 겪는 신성은 놀랍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마음을 명경지수와 같이 맑게 한 후 항마멸사신공을 운기하였다. 운기를 시작하자 이전과는 다른 또 다른 자아를 만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릇을 비우고 또 비워라. 채우려고 하면 잡히지 않을 것이오, 비우려고 하면 채워질 것이다. 한정된 공간을 확신 하지 마라! 그릇은 그저 기운이 지나가다 잠시 멈추는 우물에 불과하다. 세상의 기운은 무한정하다. 무한한 기운을 느끼고 소통하며 자신의 그릇을 잊고 세상과 하나가 되라. 하나가 되었을 때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항마멸사신공의 마지막 구결이었다. 머리로는 뜻을 알아도 마음으로는 뜻을 깨닫지 못했던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항마멸사신공의 처음과 시작의 구결이 하나로 일통하여 스필언과 미토스의 뇌리를 가득 메웠다. 무엇이 시작이고, 무엇이 끝인지 알 수 없는 종착지가 선명하게 선으로 그려졌다. 이것은 깨달음과는 다른 직관과 같았다. 마음에 새겨진 구결에 따라 스필언과 미토스는 선을 그려 하나의 완벽한 지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시작을 찾았다. 시작은 바로 단전이었다. 배꼽 바로 아래 하단전이 호흡의 끝이자 시작이었다.

  ‘비운다!’

  ‘모두 비운다!’

  호흡의 종착지, 단전에 모인 기운을 모두 외부로 다시 배출했다. 한 톨의 기운도 남김없이 모두 비웠다. 순식간에 마른 우물이 될 것 같았던 단전이 거짓말처럼 팽창하기 시작했다. 비워졌던 기운이 또다시 채워졌다. 기운은 비울수록 거대해졌고, 또 다른 종착지를 찾았다. 이제까지 열라고 해도 열리지 않았던 중단전이 반응하였다. 두드리려고 노력할 때는 열리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비우자 스스로 문을 개방했다. 하단전은 이제 시작이 아니라 통로가 되었다. 무한한 자연의 기운이 스쳐 지나가다 잠시 멈추는 중간 통로였다. 기운은 스스로 열린 중단전을 또다시 가득 채웠다. 채워진 기운은 융합을 하여 중단전에 자리를 잡아갔다.

  “크윽!”

  미토스와 스필언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종착지로 느껴진 중단전이 끝이 아니었다. 더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끊임없이 기운과 마음을 다시 비웠다. 그리고 다시 채워진 기운을 보내야 할 곳을 찾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그러자 희미하게나마 하나의 문이 살짝 열려 기운을 흡입해 주었다. 작은 문틈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안으로 무지막지하게 많은 기운이 흡입되었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드디어 상단전의 문을 약간이지만 열어본 것이다. 하단전과 중단전, 상단전이 일통이 된다면 천기조차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무소불위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다고 한다. 신성은 최고의 경지에 발을 담갔다.

  하지만 아직은 상단전이 모든 것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필언과 미토스는 전과 다른 경지에 이르렀다. 더불어 중요한 수확을 얻었다. 상단전의 뇌리에 잠자고 있던 세인트나이트와 샤이닝나이트의 모든 것이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흡수되었다. 그저 기운의 흡수가 아닌 모든 기억과 존재의 이유까지 합일이 되었다.

  신기는 자체적으로도 막강하지만 그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는 방법이 가해진다면 더욱 강력해진다. 세인트나이트와 샤이닝나이트의 조종법과 타이탄검술이 스필언과 미토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검술은 각자 따로 익히게 되어 있었지만 하나로 이어진 검진을 형성했을 때 최강의 위력을 낼 수 있었다.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익히고 타이탄 검술까지 손에 넣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놀고 있는 가르딘과는 참으로 대조적 이었다.

  3일이 지났을 때 엘프 마을은 원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면 한 달이 걸렸을 공사를 며칠 만에 복구해 버린 것이다. 실로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엘프가 왜 자연과 가장 밀접한 존재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가르딘은 신성의 명상수련이 끝나지 않았기에 며칠 더 마을에 머물렀다. 뭐든지 한순간에 깨닫는 놈들이 이처럼 오래 수련하는 것도 드물었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더 얻은 것이 분명했다.

  할 일 없이 쉬는 동안 가르딘은 마을 외곽을 돌아다니기만 했다. 곁에 있는 쉴라가 계속 갈구는 바람에 정신이 다 혼란스러웠다. 여자들의 바가지가 왜 무서운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제까지 한 번도 바가지를 긁지 않은 라이나와는 대조적이었다.

  쉴라는 맴피스와 함께 엘프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듣고 서로의 교류를 나누었다. 쉴라는 다른 종족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엘프도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가르딘은 슬며시 마을에서 벗어나 외곽으로 한참 걸어갔다. 엘프 마을에서 동쪽으로 한참 가다 보면 폭포수가 하나 있었다. 그동안 돌아다니면서 가르딘이 발견한 안전한 장소였다. 폭포가 떨어지는 절경과 주변의 산세가 잘 어우러진 경치 좋은 곳이었다. 가르딘은 이곳에서 라이나와 브리안을 생각하며 명상을 즐겼다. 또한 오늘은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 풀만 뜯어먹었더니 속이 다 허하네!”

  엘프와 다르게 인간은 고기를 먹어주어야 한다. 엘프들이 주는 과일이 맛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속을 채워주는 포만감을 절대로 느끼지 못했다. 여러 개를 먹어봤자 소변으로 물만 배출할 뿐이다. 고기의 육질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르딘은 침이 절로 고였다. 근력을 보충하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르딘이다. 이것은 단순히 가르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일이라고 스스로 강조했다.

  “오늘은 육해공이다.”

  바다는 한참이나 먼 곳에 있기에 계곡의 민물고기로 대신 했다.

  작정을 한 가르딘은 가장 먼저 하늘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뻥 뚫린 히늘 위로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가르딘은 적당한 새를 한 마리 포착했다. 새는 스패로우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30센티미터의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새지만 육질 하나만큼은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스패로우다. 미식가들도 스패로우를 모든 새 요리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스패로우는 잡기가 만만치 않은 새다. 지상에 잘 내려오지도 않을뿐더러 위험에 대한 감지능력이 다른 일반적인 새보다 훨씬 뛰어났다. 작은 위험에도 하늘 위로 솟구치듯이 날아올라 한 마리 잡기도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사냥꾼이 눈에 불을 키고 잡으려고 해도 잡지 못하는 스패로우였지만 가르딘은 그다지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사냥꾼과 가르딘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니 말이다. 사냥꾼이 아무리 뛰어나도 지금 선보이려고 하는 방법은 가르딘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사냥술이었다.

  주변에 널린 돌멩이를 허공섭물을 이용해서 들어 올렸다. 수백 개의 작은 돌멩이들이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가라!”

  파앙! 파앙! 파앙!

  수백 개의 돌맹이들이 발리스타가 쏘아지듯이 하늘로 날아갔다. 검으로 말하면 검탄과 비슷했다. 오러탄을 날릴 수 있다는 것은 오러마스터 이상이라는 소리다. 그러한 경지에 든 검사가 고작 새를 잡기 위해서 오러탄을 발사한 것이다. 다른 기사들이 봤으면 자괴감에 검을 물고 자살할 만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가르딘의 작전은 단순했다. 수백 개를 쏴서 하나 맞으면 된다는 식이다. 일정거리 내에 구역을 정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새를 맞히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다시 발사하면 된다. 돌멩이와 내공은 무한하니 말이다. 내공의 운기와 수발이 자유자재인 가르딘에게 내공의 소모는 그다지 많지도 않았다.

  “쏘다 보면 맞지, 지가 안 맞고 배기겠어.”

  기석의 위력은 굉장했다. ‘팡’ 하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는 이미 허공을 갈랐다.

  파팟!

  돌멩이에 맞은 스패로우가 날아가다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짝짓기 철에 암놈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다 느닷없이 당한 봉변이 아닐 수 없었다. 떨어지는 스패로우를 허공섭물을 발휘하여 잡아당겼다. 지상에 떨어지면 뼈가 박살나고 내장이 튀어나와서 맛을 제대로 낼 수 없다. 그전에 빠르게 잡아채는 게 중요했다.

  “요리 하나는 획득했고, 이제는 두 번째인가!”

  주변에 돌아다니는 짐승들이 있나 확인해 보았다. 사우스랜드는 동물들의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돌아다니다 보면 짐승들이 널려 있었다. 가르딘은 그중에서 적당한 크기의 멧돼지를 겨냥했다. 가르딘은 섬전보를 이용해서 도망치는 멧돼지의 머리통을 가볍게 두드렸다.

  꿰에에엑!

  그러자 달려가던 멧돼지가 정신을 잃고 지면에 널브러졌다. 포획한 멧돼지를 들고 스패로우 옆에 놓았다. 이번에 남은 것은 민물고기다.

  가르딘은 수면 아래를 보기 위해서 천룡안을 개방했다. 심검을 사용하기 위한 절대심안 천룡안이 수면 아래를 투시했다. 그러자 물고기들의 움직임이 가르딘에게 생생하게 전해졌다. 가르딘의 의념이 물길을 내었다. 흐르던 물의 중간이 가로막혔다. 심검의 영향으로 바닥이 훤히 보이게 되었다.

  팔딱! 팔딱!

  맨바닥을 파닥거리는 싱싱한 민물고기가 나 잡아가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실한 것을 허공섭물을 끌어당겼다. 기사들에게는 꿈에서나 가능한 그랜드마스터의 놀라운 기술이 낚시로 활용되는 상황이다. 기사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만행은 가르딘은 서슴없이 이어갔다.

  가르딘은 육해공의 음식을 허공으로 띄운 다음 심망을 형성했다. 가르딘의 마음이 담긴 심망이 멧돼지와 스패로우, 생선의 겉을 훑고 지나갔다. 미세한 조절을 하지 않으면 잘려 나갔을 상황이지만 가르딘에게 그 정도는 식은 수프 먹기였다. 멧돼지를 덮고 있던 거친 털들이 잘려 나가 말끔해졌다. 스패로우의 깃털도 깨끗하게 손질이 되었고, 생선을 덮고 있던 비늘도 모두 벗겨졌다.

  멀찍이 보이는 나무 한 그루를 심검을 사용해서 통째로 잘랐다. 공중으로 띄운 나무를 허공에서 몇 번 휘저어 장작개비로 만들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적당히 후벼 판 후 장작을 올려놓고 삼매진화로 태웠다. 내공의 조화가 초극경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삼매진화다. 가르딘은 삼매진화로 고기를 익히지는 않았다. 장작을 구해온 이유는 장작이 타면서 내는 향기가 고기에 배야 진정한 맛이 나오기 때문이다. 가르딘은 심검을 이용해서 세밀하게 음식의 내장을 골라내는 작업까지 마쳤다. 심검을 사용하는 동안 생의 기운이 살아 있도록 활검의 묘리까지 가미했다. 무극칠검식의 마지막 검초인 7절초 무극활생극의가 완숙의 경지에 이르자 죽은 생선과 멧돼지의 육질도 살아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가지고 온 양념을 뿌렸다. 양념이 안에 쏙쏙 배어들어 가도록 세밀한 구멍을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생선, 멧돼지, 스패로우를 장작불에 살짝 닿도록 내공으로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 요리를 하는 동안 가르딘은 허공섭물, 심검, 심망, 의념까지 사용했다. 직접적으로 음식에 손을 댄 것은 양념을 칠할 때뿐이었다. 상식을 넘어서는 검의 절대경지 요리경연이 아닐 수 없었다.

  가르딘을 감히 말할 것이다.

  -심검으로 요리해 봤어! 아니면 말을 말아!

  지글! 지글!

  고기가 장작불에 익어가자 기름이 흐르며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살짝 익혀진 멧돼지 고기의 겉이 노릇노릇해지고 있었다. 조금 더 훈제를 하면 완벽하게 바삭해질 것이다.

  가르딘의 기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리의 냄새가 외부로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주변에 기막까지 펼쳤다. 여기서 고기를 먹은 흔적을 쉴라가 알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고기 먹자고 같이 데려올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엘프들의 처지까지 고려하는 마음씀씀이를 보인 쉴라였다. 역정을 낼 것이 분명했다.

  생선은 금방 익었다. 그다지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가르딘이지만 그런 대로 먹을 만은 했다. 30분 정도 흐르자 스패로우와 멧돼지가 익었다. 잘 익은 스패로우와 멧돼지의 냄새는 정신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보기만 해도 입맛이 돌았다. 생선을 한곳으로 치우고 난 후 스패로우의 다리를 뜯었다. 먹을 때는 예의 차리는 것이 아니었다. 복스럽게 잘 먹는 게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가르딘도 귀족이지만 음식 앞에서 께지럭거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우걱!우걱!

  맴피스에게 비밀리에 술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흔쾌히 엘프주를 선물해 주었다. 엘프주는 엘프만이 만들 수 있다. 대륙에 엘프가 사라졌다고 알려진 이상 엘프주는 전설이나 마찬가지다. 애주가들 사이에 전해오길 엘프주 한 잔만 마실 수 있다면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물론 진짜로 술 한 잔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그 정도로 천상의 맛을 자랑한다고 한다.

  엘프주를 한 잔 마시고 멧돼지의 뒷다리를 씹었다. 그 맛이 정말 일품이 아닐 수 없었다. 먹어보지 않은 자는 알 수 없는 극상승의 묘리였다.

  “크으! 죽인다!”

  가르딘은 쉴 새 없이 고기를 입안에 처넣었다. 오랜만에 먹는 고기라 그렇지 위장에서 계속 원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들어갈지 미지수였다. 무한정 처넣고 난 후 술을 마셔 소화 시켰다. 가르딘의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결국 고기를 혼자서 다 처먹고 말았다. 30인분 이상을 먹어치운 것이다. 보는 그대로 대단한 위장이었다. 오늘 가르딘은 투르 같았다.

  배불뚝이처럼 솟아오른 배를 보며 가르딘은 만족스럽게 쓰다듬었다. 우선은 주변에 널린 음식물 잔해와 타다 남은 장작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깨끗하게 처리하기는 했지만 증거는 남았다. 가르딘은 그 모든 것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완전 범죄를 위해서는 증거인멸이 필수였다.

  가르딘이 천룡검을 뽑았다.

  스르렁!

  잠을 자고 있던 천룡검이 갑자기 깨서 신경질을 부리려고 할 때 검신은 이미 음식물쓰레기에 닿아 있었다.

  -무극칠검식-제6절초-무극만검-소멸

  무극칠검식의 후반 초식 중에 하나인 무극만검이 천룡검에서 뻗어 나왔다. 완벽의 경지에 다가선 가르딘이다. 무극만검이 극에 이르면 유를 무로 돌려버릴 수 있었다. 극강의 경지에 이른 무극만검이 허공을 장악했다. 그러자 음식물쓰레기와 장작들이 한순간에 허공에서 ‘팟’ 하고 사라졌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만약 신마가 이 장면을 봤다면 그 경지에 놀라고, 가르딘의 만행에 두 번 놀랐을 것이다. 신마조차 도달하지 못한 경지를 가르딘은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무극칠검식이 고작 음식물쓰레기처리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신마가 알면 혈압이 올라 터져 버릴 지도 모른다. 아니면 저승에서 잘 살고 있는 신마가 이승으로 기어 올라올 수도 있었다. 가르딘은 신마를 두 번 죽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증거를 소멸하고 나서 마지막 증거인 솟아오른 배를 천룡무상신공을 운기하자 소화시켰다. 배속에 들어간 고기가 순식간에 분해되어 갔다. 태산만 한 배가 거짓말처럼 들어갔다.

  “꺼어억! 역시 소화엔 천룡무상신공이라니까!”

  가르딘은 소화된 잔해를 배출하기 위해서 주변을 둘러보자 좋은 자리를 발견했다. 냇물과 마주한 곳이다.

  그곳에서 바지를 내리고 두 다리를 벌렸다.

  끄응!

  풍덩!

  가르딘이 힘을 한 번 주자 거대한 이물질이 냇물로 떨어져 나갔다. 소화가 되자마자 바로 쾌변을 보았다. 쓸려 내려가는 가르딘의 배설물 주변에 고기들의 시체들이 삽시간에 떠올랐다.

  천룡신의 육체를 가진 가르딘은 언제 어디서든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더군다나 내공의 조화가 공령의 경지에 이르러 외부적인 몸뿐만 아니라 내장까지도 최상의 상태다. 가르딘은 천룡무상신공을 얻은 후부터 한 번도 변비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모든 만병의 근원을 물리쳐 주는 천룡무상신공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가르딘은 가볍게 낮잠을 때리기로 결정했다. 마왕이 강림할지도 모르는 위기의 세상 속에서도 할 건 다하고 있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평평한 바위 위에 누워서 눈을 감으려는 순간에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르딘은 감각에 잡힌 기운이 쉴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감 을 열어 확인을 해보았다. 다행히도 쉴라는 아니었다. 요즘 들어 가르딘은 쉴라가 성녀가 아니라 마녀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수풀을 헤집고 가르딘을 찾아온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존재는 가르딘이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준 엘프 여인 리니안이었다. 리니안은 가끔씩 가르딘을 찾아와 감사의 인 사를 올렸었다.

  하지만 엘프 마을을 복구하는 데 시간을 지체할 수 없기에 몇 번 만난 적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마을에 없기에 찾아왔어요.”

  여자가 남자의 뒤를 찾아왔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당연히 마음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인 사내가 아닌가! 하지만 가르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엘프가 비록 굉장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니다. 다른 종족 간의 사랑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엘프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딘은 사람은 사람과 사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또한 라이나밖에 없는 가르딘에게 다른 여인의 마음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이미 단단한 방어벽을 쳐 놓고 있어서 들어올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마을에 무슨 일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에요.” 

  “쉴라가 찾나?” 

  “아니요.”

  “그럼 뭣 때문에 날 찾은 거야.” 

  가르딘의 직설적인 물음에 리니안은 대답이 궁색해졌다. 사실대로 관심이 있어서 왔다고 말하기에는 어색했다. 그녀는 아직 모든 것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저 마을에서 가르딘이 보이지 않자 궁금해서 찾아왔던 것에 불과했다. 우물쭈물 말을 못 하던 리니안은 허둥지둥 둘러댔다. 얼굴까지 붉어지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저...정령이 가르딘 님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정령이.”

  “예, 왠지 모르지만 그날 이후 정령이 가르딘 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수다쟁이 정령이 말이지.” 

  “수다쟁이라니요?”

  리니안은 마을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나르기 위해서 정령을 소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령은 가르딘에게 무척이나 많은 호감을 보였다. 정령과 엘프는 정신적으로 성향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의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정령이 인간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것을 그녀도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정령이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면 인간이지만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원한다면 한번 보지.” 

  “그럼 제가 정령을 소환할게요.” 

  -바람의 정령이여! 그대의 바람대로 세상에 나타날지어다!

  가르딘이 허락하자 리니안은 곧바로 정령을 소환했다. 리니안의 기운을 받은 바람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 수 있을 정도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바람의 기운이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랜만이에요. 

  “그러네.”

  -그동안 저 보고 싶지 않았어요.

  “궁금하기는 했다.” 

  -궁금하면 리니안에게 저를 소환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내가 궁금하다고 남에게 불편을 끼칠 수는 없지.” 

  가르딘은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르딘이 남이 귀찮아 한다고 해서 하지 않을 성격은 아니지 않은가!

  -그전에 제 이름도 말 안 했네요. 저는 스스로 잘 논다고 해서 셀카라고 해요. 

  “가르딘이다.”

  셀카는 이름을 안 이후부터 더욱더 친근하게 스스럼없이 말을 토해내었다. 다 쓸모 없는 내용이었는데 몇 가지는 구미가 당겼다. 

  -가르딘 님도 정령을 소환할 수 있어요. 

  “내가? 난 정령술을 모르는데.” 

  -정령술은 마법이 아니에요. 자연친화력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거든요.

  옆에서 가르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니안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령과 대화를 하는 것은 엘프들도 불가능했다. 하이엘프인 맴피스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 세세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르딘의 자연 친화력이 엘프들의 친화력을 뛰어넘는다는 소리가 되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리니안은.

  “저...정령과 대화가 가능한가요?”

  “그래.”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어쩌다 보니.”

  정령과 대화할 수 있는 이유를 가르딘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저 어쩌다 보니 심언의 언어인 천룡심어를 사용했고, 그때부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천룡심어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줄 수도 없는 일 이었다. 리니안이 안다고 해서 시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럴 때는 그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게 상책이다. 괜히 오래 말을 끌어봐야 귀찮고, 수습하기 어렵다.

  어물쩍 넘어가 버리는 가르딘이었다.

  “그리고 보니 셀카가 나보고 정령술을 배워보라는데.”

  “셀카요? 그게 정령의 이름인가요?”

  “그래.”

  “그... 렇군요!”

  이제까지 이름도 몰랐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리니안이었다. 오래전에는 정령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만 년이 흐르면서 엘프들조차 정령과의 소통이 단절이 되었다. 이유는 마도시대에 벌어진 큰 전쟁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내가 정령술을 배울 수 있는 건가?” 

  “가르딘 님의 친화력이라면 충분해요.” 

  “어렵지 않지?”

  “정령술은 수식과 빠른 두뇌회전이 필요한 마법과는 달라요. 정령과의 교감과 의식을 치를 주문만 알면 돼요.” 

  “그럼 가르쳐 줄 수 있는거지.” 

  “가르딘 님이라면 환영이에요.” 

  리니안의 임의적으로 정령술을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가르딘이라면 맴피스도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가르딘은 리니안이 설명한 대로 자연을 느껴보았다. 천룡무상신공은 삼라만상의 기운을 모두 포용하는 신공이다. 자연의 기운도 천룡무상신공의 일부일 뿐이다. 가르딘이 정령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천룡무상신공의 공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해볼까.” 

  “그러세요.”

  가르딘은 다른 정령보다는 익숙한 정령과 계약을 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판단했다. 바람을 느끼고 바람을 인식한 후 계약의 주문을 외워 보았다.

  “자연의 일부이자 자연의 전부인 그대들과 소중한 인연을 맺기를 원한다!”

  정령은 자연의 총화이자 결정체다. 계약을 위해서는 정령의 원소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물의 정령과 계약하기 위해서는 물이, 땅의 정령과 계약하기 위해서는 흙이, 불의 정령과 계약하려면 불이 필요하다. 가르딘이 계약하는 바람의 정령은 바람만 분다면 언제든지 계약이 가능하다.

  가르딘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집중했다. 천룡무상신공이 자연스럽게 운용이 되며 대기로 퍼져나갔다.

  우우우우웅!

  정령과의 계약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있었다. 리니안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인가를 고민해 보았다. 특별히 계약주문이 다르거나 가르딘의 기운이 달라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반면에 가르딘은 좀 전에 고기를 먹어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기 먹은 부작용은 아니겠지.’ 

  화기를 접한 음식을 먹게 되면 자연의 기운과 멀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찔리는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가르딘은 부정했다. 천룡무상신공으로 완벽하게 소화를 한 이상 부작용은 없을 것이라 믿었다. 우주를 포용하는 천룡무상신공이 자연의 일부를 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후우우읍!

  어느 순간 가르딘의 오러가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무상의 기운이 보호하고 있다면 외부의 기운이 침입하거 나 흡수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가르딘은 정령과의 계약을 위해서 기운을 열어놓은 상태였다. 정령은 시전자의 기운을 흡입한 후에 소환이 된다.가르딘은 빠져나가는 오러의 양을 잠시 점검해 보았다. 셀카의 정령력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 정도라면 이 정도로 많은 오러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빠져나가는 기운은 여전했다. 오기가 생긴 가르딘은 천룡무상신공을 운기하여 내공을 더 불어 넣었다.

  우우웅!

  물 빠지듯이 빠져나가던 오러가 멈추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순간 거대한 존재감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상상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리니안과 셀카는 심한 압박감을 받았다. 가르딘은 피부를 짓누르는 듯한 기운의 정체가 의문이었다. 셀카의 존재감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설마 마왕이 부활하는 것은 아니겠지.’ 

  가르딘은 뇌리에 든 재수 없는 생각을 곧바로 지웠다. 정령을 소환하려다가 마왕이 부활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래도 설마 하는 심정이 들었다.

  휘이이잉!

  가르딘과 리니안, 셀카의 주변으로 돌풍이 불었다. 지면을 휩쓸고 지나간 돌풍이 사라지고 나자 잔잔함이 찾아왔다. 좀 전까지 사방을 조여오는 듯한 압박감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가르딘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압박감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위압감은 여전했다. 시위를 지배하는 왕의 절대포스가 사라지지 않았다. 가르딘은 그러한 존재감이 허공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서히 내려온 무형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르딘의 시야에 보인 것은 무형의 사내였다.

  ‘뭐야? 이건!’

  셀카처럼 귀여운 소녀도 아니고 다 자란 사내놈이 소환된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한 가르딘이다. 더군다나 이 녀석의 표정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을 살짝 뒤덮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멋을 부리는 것까지 짜증이 나는 가르딘이었다.

  -이게 얼마 만에 강림한 것인지 모르겠어.

  “너 말할 줄 알아.”

  -오브코스(당근이지)!

  정령은 마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줄 알았다.

  그런데 나타난 정령은 사람의 말을 소리로 내고 있었다. 독특한 정령이 소환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 바람의 정령 맞냐?”

  -하하하! 본좌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정령들의 지배자이자 주인이라고 할 수 있지.

  가르딘이 셀카를 바라보았다. 미친놈이 헛소리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셀카에게 사실입증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정신 사나운 정령도 싫지만 미친 정령은 사양이었다.

  셀카는 미친 것 같은 정령을 향해 무릎을 꿇고 경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셀카의 표정을 봐서는 미친 정령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계약할 때마다 독특한 놈들이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르딘은 계약에 대한 저주가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뭐야?”

  -나는 정령의 지배자이자 미남의 결정체인 정령왕 테리우스라고 한다.

  “뭐? 정... 령왕이라고!”

  바람의 정령을 불렀더니 생뚱맞게 정령왕이 소환되었던 것이다. 뜻하지 않은 소환이었지만 정령왕이라는 말에 가르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테리우스의 말대로 정령왕이라면 횡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선은 정령왕의 정체와 신상내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정령왕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을 만큼 가르딘은 세상 짧게 살지 않았다. 

  “정말?”

  -어허! 의심이 많은 종자구나! 정령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도 모르고 있다니 상식과 교양이 한참 부족하구나! 쯧쯧!

  말투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디서 배운 것 좀 있다고 잘난 체하는 귀족놈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가르딘의 눈빛이 푸르게 변했다. 천룡안의 개방되었다. 심안의 영역에 들자 정령왕의 정체가 보였다. 겉멋만 부리는 놈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지닌바 잠재력이 대단했다. 테리우스는 가르딘의 눈빛이 변한 순간 속으로 깜짝 놀라고 있었다. 

  ‘뭐야? 이놈! 눈빛이 왜 이리 불순해!’ 

  수없이 많은 세월을 살아온 테리우스조차 가르딘의 눈빛에 서린 위압감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인간 중에 이만한 존재감을 드러낸 존재도 처음이었다. 테리우스는 애써 무시했다. 정령왕이 인간에게 쫄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분명 거짓말을 안 한다고 했지.” 

  -당연하다.

  “그럼 묻지, 왜 바람의 정령이 안 나오고 당신이 나온 거지?”

  -잠깐, 그래도 나는 명색이 정령왕인데 말투가 너무 짧지 않나!

  “왜이래, 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그냥 넘어가고 이유나 빨랑 말해.”

  테리우스는 싹수없는 놈이 소환했다고 속으로 욕을 했지만 담대하게 용서하고 넘어가 주기로 했다.

  -오랜만에 나를 부를 수 있는 친화력과 오러를 가진 인간이 있기에 바람의 정령 대신에 내가 나온 것이다. 나를 소환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대의 정령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이다. 충분히 자랑할 만한 일이다.

  마도시대에만 해도 정령왕이 몇 번 소환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마도시대가 붕괴 된 이후에 테리우스는 한 번도 소환이 된 적이 없었다. 엘프조차 정령력이 마도시대보다 떨어져서 나와보기는커녕 근처도 오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외출해 보지 못한 테리우스는 오랜만에 나올 찬스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소환되려는 바람의 상급정령을 잡아채고, 자신이 나와 버렸다. 가르딘이 정령을 소환하는데 오래 걸린 것도 상급정령이 끙탈 대는 것을 테리우스가 달래느라 그런 것이다.

  가르딘은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었다. 꼭 한 가지를 알고 싶었다.

  “그럼 나와 계약하면 당신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계약이라면 넌덜머리가 나는 가르딘이다. 드래곤나이트도 지가 꼴리면 나온다고 하고 아직도 깜깜무소식이다. 필요할 땐 나오지 않고, 뜻하지 않게 확인을 해주는 바람에 가르딘 이 개고생을 하고 있었다. 드래곤나이트처럼 지 꼴리는 대로 하는 놈들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다.

  -계약은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이다. 너의 말을 모두 들어줄 수는 없다. 대신 뜻이 일치한다면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한다는 소리네.”

  -그렇다.

  “그럼 꺼져.”

  가르딘은 더 듣기도 싫다는 듯이 계약을 취소하려고 했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정령왕 테리우스였다. 일언반구도 없이 계약을 취소해 버리는 경우는 그의 정령생에도 당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잘 못 들었는데, 다시 한 번 말해 주겠나! 

  “나이가 많아서 귀가 노쇠했나. 꺼지라고.”

  -나는 정령왕이야. 나와 계약하면 모든 정령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야.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봐!

  2만 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테리우스였다. 놀아보기도 전에 다시 정령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테리우스는 가르딘이 싹수도 없고, 생각도 없는 놈처럼 보였다. 이런 좋은 기회를 차버리려고 하는 놈이 이상한 것이다.

  ‘모든 정령을.’

  확실히 구미가 당겼다. 그렇다고 해서 넙죽 계약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급해하는 것을 보니 오랜만에 소환된 것이 분명하다. 세상구경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이대로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을 것이다. 협상과 흥정은 가르딘의 전문분야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느냐와, 주도권을 가지고 올 수 있는가에 달렸다. 가르딘은 현재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승률은 90퍼센트를 넘을 것이다.

  “얼마나 강하지?”

  -허참! 난 정령왕이야! 나를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설혹 드래곤이라고 해도 나의 상대는 되지 않아.

  테리우스는 자신의 강함을 적극적으로 자랑했다. 드래곤로드나 최고룡급이 아니면 테리우스를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에게도 드래곤은 그다지 위협적이라고 할 수 없다. 가르딘이 제압한 라이젠은 드래곤로드에 필적하는 고룡이다. 그런 고룡조차 가르딘에게 쫄아서 분기탱천하고 있었다. 테리우스의 강함이 피부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럼 마왕은?”

  -다시 한 번 말해 주겠나!

  가르딘이 잘 들으라며 귓속에다가 대고 크게 말해 주었다. 

  “마왕은?”

  -......!

  테리우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령은 테리우스의 말대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테리우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가르딘이 하필이면 마왕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었다.

  “뭐 해?”

  우물쭈물하는 테리우스룰 독촉하는 가르딘이다. 리니안과 셀카는 정령왕을 다그치는 가르딘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인간 중에서 정령왕을 저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대륙 전체 종족을 따져 봐도 존재하지 않을 특이한 사람이다.

  -그럭저럭......!

  “그럭저럭 뭐?”

  -젠장! 한 방 정도는 막아줄 수 있다! 이제 됐냐!

  말하고도 쪽팔려서 화딱지가 나는 테리우스가 가르딘에게 회를 토해내었다. 가르딘의 표정이 실망감으로 젖어들었다. 강하다고 으스대기에 조금 하는 줄 알았건만 별로 강한 편도 아닌 것 같았다.

  “뭐야 고작 한 방!”

  -고작 한 방이라니 그놈들이 얼마나 무식하게 센 줄 알아!

  “같은 왕이잖아!”

  -비교할 대상이 그렇게 없냐! 어떻게 전투에 미친 그런 무식한 놈들하고 상식과 교양을 두루 갖춘 나를 비교하냐!

  “결국 수준 떨어지는 왕이라는 소리네.”

  -너 설... 마 영웅이냐?

  순간 이상한 감정이 든 테리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껏 영웅과 섞여서 좋은 꼴 본 적이 없었던 테리우스다. 위험한 일은 자신이 다하고 모든 공은 영웅이 차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몇 번 경험을 해보자 절대 영웅하고 섞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만약 가르딘이 영웅이라면 계약이고 뭐고, 다 취소해 버리고 정령계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영웅 같나!”

  -그... 렇지는 않군.

  생긴 마스크부터가 영웅하고는 달랐다. 영웅은 언제나 꽃미남 스타일을 지향한다. 저처럼 능글맞게 생긴 놈은 절대 아니다. 그 점에서 안심이 되는 테리우스였다.

  하지만 능글맞은 중년인이 더 무섭다는 것을 테리우스는 간과하고 있었다.

  ‘대신 영웅에게 엮인 불쌍한 인생이긴 하지.’

  그 말은 속으로 삼키는 가르딘이다. 일단 마왕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약간이지만 느껴졌다. 정령왕의 능력을 보니 라이젠보다 강하거나 비등한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런 테리우스가 한 방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은 마왕의 강함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가르딘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령왕도 끌어들여야 했다. 

  우선은 협상조건을 조율하는 게 중요한 과제였다. 

  “내가 계약해도 네가 들어주지 않으면 그게 뭔 계약이야.” 

  -그래서 싫다는 말인가! 마왕을 제외하고 나를 이길 자는 없다니까! 원한다면 왕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어!

  “그건 됐고, 계약 후 어떤 경우라도 다섯 가지는 들어주었으면 해, 그럼 계약을 해주지.” -너무 많다!

  “그럼 좋아, 인심 써서 세 가지로 하지.” 

  선심 쓰는 듯이 조건을 걸고 있는 가르딘이다. 표정 자체는 전혀 아쉬울 것 없다는 듯했다. 테리우스의 짱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 돌아가는 것만 봐도 가르딘은 테리우스가 무얼 생각하는지 훤히 보였다. 아마 조건에 대해서 저울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괜히 아쉬운 척하면 테리우스가 낌새를 챌 수 있다. 여유롭게 기다리며 셀카, 리니안과 대화까지 나누는 가르딘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결국 테리우스가 손을 들었다. 

  -좋다.

  “그럼 계약하지.”

  -계약주문을 외워라.

  “태초의 근원에 명시한 대로 그대와 계약을 맺겠다.”

  -태초의 맹약에 의해 계약은 이루어졌다.

  계약은 간단했다. 서로가 합의하면 되는 것이다.

  빛의 인장이 허공에서 생겨나 가르딘과 테리우스의 이마로 스며들어 갔다. 태초의 율법에 의한 신성한 계약이라 정령왕조차 어길 수 없게 되었다. 가르딘은 계약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입가에 살포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리니안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정령왕이 나와 가르딘과 계약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가르딘이 어떤 사람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가 인간으로 강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도대체?’

  테리우스는 셀카와 함께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의식이 끝난 후에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가르딘은 그렇게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테리우스가 힘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소모되는 오러는 그리 많지 않은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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