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세인트나이트@@]
엘프마을의 수장을 비롯한 7명의 장로가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회의장 주변으로 수백 명의 엘프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1만 년 동안 벌어진 회의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회의였다.
또한 인간의 등장은 수만 년 동안 쌓인 엘프들의 적개심과 불안감을 자극했다. 엘프들은 감화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종족에 속한다.
따라서 선대의 감정과 편린이 그대로 이어지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적개심과 불안감은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하이 엘프이자 마을 최고의 어른인 맴피스가 회의를 주도 하며 의견을 조율하였다. 안건의 중요성이 큰 만큼 장로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장로들의 경우 각 엘프 종족의 수장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태초의 엘프들은 원래 각기 사랑하는 자연의 특성이 달라서 분리되어 생활을 해왔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극소수만 살아남은 엘프들이 모두 한곳에 모이게 되었다. 숲의 일족, 물의 일족, 바람의 일족, 나무의 일족 등이 규합하여 오늘날의 엘프마을을 이루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져지는 것이 하나 있다. 오늘 그곳에 인간을 출입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사항을 결정해야 했다.
"안 됩니다. 인간을 어찌 믿고 세계수를 보여줍니까!"
"그렇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세계수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세계수는 말 그대로 생명의 나무라는 뜻이다. 엘프들의 탄생과 기원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근원이 위험하거나 사라지게 될 경우 엘프들은 원래의 힘을 잃고 죽어가게 된다. 물론 단시간 내에 죽는다는 뜻이 아니다. 엘프들의 원천적인 힘과 본능을 잃고 서서히 변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세계수는 엘프들을 존재시켜 주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 생명을 잉태하고 그 안에서 자라나는 어린 엘프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엘프 들에게 세계수는 근원이자 미래일 수 있었다.
장로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인간의 접근 자체를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장로들까지 있었다.
멤피스는 반발하는 장로들에게 성녀의 존재와 이유를 설명해 나갔다.
"세계수가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는 하나, 마왕의 강림은 대륙의 존폐가 달린 일입니다. 우리의 삶을 위해서 대륙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는 일일 겁니다."
"인간들이 지어낸 일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는 성녀입니다. 성녀는 우리 엘프들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성스러운 존재입니다. 주신의 딸을 부정하라는 뜻입니까!"
맴피스의 말에 장로들은 한동안 침묵을 해야 했다. 인간들의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 치부하고 싶어도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엘프들도 성녀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었다. 주신을 부정하는 엘프는 단연코 없었다. 장로들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세상의 존폐가 달려 있을 수 있었다. 함부로 결정하여 후대의 원망을 짊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엘프마을에 온 지 반나절이 지나는 동안 가르딘과 일행은 엘프들이 제공하는 집안에서만 있어야 했다. 집 주변으로 엘프전사들 30명이 물샐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물론 가르딘과 스필언, 미토스가 작정하고 빠져 나가려고 하면 막아낼 수 없기는 마찬가지 였다.
가르딘이 피곤한 듯이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에 쉴라는 엘프들이 제공하는 과일을 먹고 있었다.
"맛있네요. 하나 드세요."
"너나 먹어라."
"그래도 하나 드세요. 정말 달아요."
"흥, 난 고기체질이야. 채식은 사양이거든."
식탁에 고기반찬이 올라와야 좋아하는 가르딘이다. 푸석 푸석한 야채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다. 채소와 과일이 맛있어 봐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아무리 맛있어도 고기반찬만 못하다.
"반나절 동안 회의만 하는 건가. 도대체 뭐가 있기에 이렇게 오래 걸라는 거야."
"엘프들에게 중요한 장소라고 하잖아요. 기다려 주세요. 우리의 넓은 인심을 보여 주자고요."
"어디 나중에 쑥대밭이 되고 나서도 뜸을 들일 수 있나 보자고."
세상이 망하고 난 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지는 가르딘이다. 마왕강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벌어진다면 이곳에서 가장 먼저 강림했으면 하는 마음까지 품었다.
"마음 좀 곱게 써요. 왜 그렇게 속이 좁아요."
"마음 넓은 너는 관용을 베풀어라. 속 좁은 나는 이렇게 살 테니."
가르딘과 일행은 엘프의 집에서 하루가 지나는 시간 동안 있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까지 결정이 나지 않아서 하루를 샜다.
더운 지방과는 다르게 엘프마을은 선선하면서도 청아한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가르딘은 청아한 기운이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운은 마을의 북쪽에서 시작되어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음을 정화하는 기운이라.'
도가의 사상을 수련하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기연이었다. 마음을 수련하여 나와 너를 잊고, 우주 만물의 근원적인 기운에 다가서는 청경하고 명아한 느낌을 주는 기운이 발산되고 있었다.
세속의 때를 긁어내는 듯한 기운은 불안정한 마음까지 깨끗하게 씻어주었다. 가르딘의 마음속에 있는 짜증조차도 시원하게 쓸어내려 보냈다.
가르딘은 엘프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언지 대충 감이 잡혀 왔다.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런 기운을 풍기는 것이라면 범상치 않은 것이라 짐작했다.
지루하게 기다리는 김에 풍겨 나오는 기운을 몸 안으로 흡수해 보았다. 흡입한 기운은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담고 있었다. 물아의 경지에 들어야만 느낄 수 있는 기운을 호흡 하는 것만으로도 느껴졌다.
가르딘의 내부에서 천룡의 기운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풍겨져 나오는 기운을 마음속으로 인도하자 천룡의 기운과 함께 나란히 서는 것이 아닌가! 서로 춤을 추듯이 어우러졌다.
-이제야 왔군요.
'응?'
'뭐야?'
갑자기 마음속에 울려 펴지는 알 수 없는 여인의 목소리에 가르딘은 이상함을 느꼈다. 환청이 들릴 리는 만무했다. 천룡무상신공의 오의는 명경지수와 같은 평정심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의지야말로 천룡무상신공의 가장 큰 힘이다. 가르딘은 감았던 눈을 떠서 주변을 보았다. 쉴라와 스필언, 미토스는 모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가르딘만이 소리의 근원을 들은 것이다. 마음속에 울리는 심언을 떠올리자 가르딘도 마음의 언어로 답을 했다.
'누구십니까?'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무엇 때문에 기다린 겁니까?'
-수만 년을 기다린 영웅의 인도자여, 어서 와서 잃어버린 성스러운 신기의 빛을 다시 밝히세요.
뜻이 선명하게 가르딘의 뇌리로 인도되었다.
청명한 기운이 사라지자 심언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가르딘은 운기행공 중에 주화입마로 인한 현상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착각은 아닌데."
"무슨 말이에요?"
쉴라가 갑자기 뜻 모를 말을 하는 가르딘에게 물었다.
"아니야."
"나이가 들어서 그러나! 이제는 헛소리까지 하세요."
"아직 나 젊다."
나이든 사람에게 진짜 나이 많이 먹었다고 하면 과연 화를 낼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을까. 정답은 화가 난다였다.
엘프들의 회의는 아침에 다시 열리기로 했다. 결정을 아직까지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 회의를 주관하기 위해서 일어난 맴피스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세계수가 그에게 말을 걸어 왔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살아가면서 세계수가 말을 걸어 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들을 기다리셨단 말인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세계수가 말을 건 것은 확실했다. 세계수는 멤피스에게 어머니이자 부모였다. 어머니의 말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상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부덕함을 탓하시는 것이구나!"
인간을 믿지 못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편협함을 안 세계수가 먼저 뜻을 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결정을 모두 뒤덮어 버릴 수 있는 확실한 뜻이 세워졌다. 맴피스는 회의장에서 세계수의 뜻을 전하고,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가르딘은 아침식사로 나온 과일과 채소를 보며 한숨을 내 쉬고 있었다. 책에 적힌 엘프의 습성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다른 것은 다 틀려도 먹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과일 한 개를 먹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아삭!
씹자마자 과일의 청아한 향이 입안을 감돌았다. 쉴라의 말대로 과일 자체의 맛이 달콤하면서도 맑았다. 맛있다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맛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동할 정도는 아니 었다.
과일을 한입 물고 창밖을 바라보던 가르딘의 눈빛이 변했다.
'침입자인가?'
엘프들과 사람의 기운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엘프마을을 포위하면서 접근하는 무리들은 이질적이면서도 어두웠다. 어둠의 근원은 살기에 가까웠다. 살기의 목표가 아직 누구인 지 짐작이 되지는 않았다.
"쉴라, 스필언, 미토스 준비해라."
"뭘요?"
"적이 쳐들어온 것 같다."
"예? 갑자가 무슨!"
"기다려 보면 알아."
엘프를 공격하기 위한 침입자들인지, 아니면 성녀와 삼신기를 노리고 온 것인지 확인이 될 것이다. 그 이후에 대처를 해도 늦지 않았다.
스필언과 미토스도 적의 기운이 느껴지자 표정이 변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가르딘의 말대로 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댕! 댕! 댕!
엘프마을에 경종이 울렸다. 마을 곳곳의 엘프들이 서둘러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서 나선 맴피스와 장로들도 갑작스러운 경종에 놀라는 눈치였다.
"무슨 일입니까?"
"침입자들입니다!"
"어서 전사들을 모으세요."
"알겠습니다."
마을의 전사들은 총 300명이었다. 전사들이 검과 화살을 가지고 적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맴피스와 장로들도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함께 나섰다.
울창한 숲으로 가로막혀 있는 지점을 뚫고 들어가는 존재들은 어둠 그 자체였다. 순백의 기운을 집어삼키는 듯한 광포한 기운이 었다. 짙은 어둠과 살기가 숲의 기운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여기에 신기가 있다는 말이지."
"성녀와 함께 모두 죽여주지."
세븐핸드의 커투어와 페시안이었다. 대륙의 끝에서 성녀를 따라 사우스랜드의 오지까지 찾아왔다. 커투어와 페시안은 추적술의 달인이었다. 작은 흔적 하나만 가지고도 목표물 을 찾아낼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의 거리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찾아온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세븐핸드는 엘프마을을 포위하면서 조여들어갔다. 빠져 나가는 것 자체를 막아버 리겠다는 의도였다.
세븐핸드와 전사들이 엘프마을의 중심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엘프전사들이 막아서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게 나타난 엘프들로 인해 커투어와 페시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이 엘프들의 서식처였던가!"
"대륙에서 사라진 줄 알았건만 여기에 다 있었군!"
인간의 탐욕스럽고 뒤틀린 성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엘프들을 모조리 다 잡아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포악한 기운이 엘프들의 맑은 기운과 대치했다.
"엘프의 맛이 어떤지 봐야겠어!"
"엘프를 잡아라."
엘프를 잡아 어둠의 길드로 데려가려는 의도였다. 뜻하지 않는 성과였다. 이곳에 마을이 있다는 것은 확신했지만 사람이 아닌 엘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엘프들을 잡아서 데 려간다면 어둠의 길드 내에서의 입지를 더욱더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의 뒤틀리고 어두운 기운이 엘프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막아서는 엘프의 수장, 맴피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이들은 성녀와는 다른 인간들이다. 인간의 가장 사악한 면을 지니고 있는 진정한 악마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맴피스가 정령술을 이용하여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을 동시에 불러들였다. 정령은 시전자의 자연친화력에 따라 능력의 사용범위가 결정된다. 맴피스는 상급의 정령술사로서 7서클 마도사급의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이여! 물의 정령이여!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저들을 막아라!
멤피스가 정령을 사용하자 그 주변의 장로들 역시 정령술을 사용하여 전사들을 도왔다. 전사들은 검과 활을 사용하여 달려 들어오고 있는 다크워리어들을 맞이했다. 다크워리어 에게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적의 말살을 위해 사용되는 전투병기일 뿐이었다.
슈슈슈숙! 휘이이익!
수백 발의 화살이 다크워리어를 향해 날아들었다. 다크워리어들은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쳐내거나 팔꿈치에 설치된 방어 실드를 이용하여 막아내었다. 마법아이템까지 갖추고 있는 다크워리어들이 었다. 전투를 위한 모든 장비가 제공되었다. 엘프전사들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다크워리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명 한 명의 전투력이 가공할 만했다. 엘프들은 화살이 통하지 않자 안색이 굳었다. 숫자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실력까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맴피스와 장로들이 정령술로 엘프들의 기세를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상급정령의 술법이 발휘되자 사나운 폭풍과 함께 물의 창이 형성되었다. 폭풍에 실린 힘이 물의 창을 더욱더 강력하게 만들어 주었다.
파파팟!
폭풍의 반발력을 이용하여 날아가는 물의 창은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다. 다크워리 어들이라고 해도 경시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의 창이 부딪치려고 할 때 세븐핸드의 커투어가 앞으로 나섰다.
"제법이지만 소용없다!"
-다크실드(어둠의 방패).
카카카카캉!
7서클 마력이 담긴 다크실드가 날아오는 물의 창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정령술을 막자마자 커투어의 마력이 분출되었다.
- 다크파이어(암화).
60발에 달하는 어둠의 불길이 커투어의 머리 위로 형성되었다. 어둠의 마력으로 형성된 불길은 7서클 화염계마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헬프레임(염화)의 위력을 넘어서고 있었 다. 암화의 기운이 맴피스와 장로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타는 듯한 어둠의 불길은 닿는 즉시 모든 것을 무력화시켜 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녔다.
멤피스가 다급하게 물의 정령을 이용하여 워터월(물의 장벽)을 만들었다.
치치치치치칙!
물과 어둠의 불길이 부딪치자 수증기가 발생하며 사방을 가득 메웠다. 정령술에 모든 힘을 기울이는 맴피스였지만 커투어의 마력역량이 예상범위를 훨씬 초월했다. 워터월이 방어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장로들이 맴피스를 도와 커투어를 공격해 보았지만 세븐핸드의 페시안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도리어 페시안의 공격을 받은 장로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퍼퍼퍼펑!
"크으으윽!"
철벽에 부딪친 듯한 충격을 받은 장로들은 땅바닥을 나뒹굴며 거친 숨을 토해내었다. 입 속을 타고 핏물이 흐르는 것을 보아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일어서려고 해도 무너지는 신형을 다시 붙잡을 타이밍이 나오지 않았다. 거리를 무시하고 순식간에 접근한 페시안이 장로들의 몸을 두들겼다. 무자비한 격타를 당한 장로들의 신형이 실 끊어지 듯 튕겨 나가면서 처참하게 쓰러졌다. 바닥에 처박힌 사비온 장로는 숨을 헐떡거리며 무언가를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내밀었던 손은 페시안의 발에 밟혀 으스러졌다.
뿌드드득!
"으아아아악!"
비명성이 숲의 조용함을 무너뜨렸다. 장로들 대부분이 사지가 부서진 채 기력을 상실했다. 죽지 않는 것은 엘프들을 사로잡기 위해서 페시안이 손속에 사정을 뒀기 때문이다. 인정을 두지 않았다면 이미 차디찬 시신이 되었을 것이다.
다크워리어와 엘프전사들의 대결도 일방적 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숲에서만 생활해 온 엘프들이 죽고 죽이는 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에 반해 다크워리어는 살인에 길들여진 병기들이었다. 실제적인 힘에서 차이가 나더라도 전투에 이골이 난 병기들이 훨씬 무섭기 마련이었다.
"안... 돼!"
삽시간에 무너지는 엘프들의 진형 속에서 엘프 여인의 안타까운 외침이 들렸다. 그녀는 가르딘과 쉴라에게 화살을 쏘고 적대감을 보인 엘프였다. 리니안은 어제와 다른 오늘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시퍼런 검을 뻗어오고 있는 다크워리어가 너무나 무서웠다. 이대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솟구쳤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녀는 무너지는 자신을 보며 마음속 깊이 간절히 기원했다. 다크워리어의 검이 그녀의 옆구리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팟!
그녀는 검이 찔러 들어오는 순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능글맞게 웃는 인간이 자신을 품에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게 무슨... 아!"
리니안은 무도한 인간을 향해 소리치려고 했지만 말하지 못했다. 능글맞은 인간이 자신을 향해 찔러들어 온 검을 손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손......!"
"괜찮다."
인간은 너스레를 떨 듯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의 말대로 손은 멀쩡했다. 오히려 검을 찌른 다크워리어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검에 힘을 주어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근의 철벽에 검이 끼여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 다크워리어 였다.
"네놈 같은 놈들 때문에 내가 어제부터 오늘까지 기다린 거야."
인간을 믿지 못하게 된 엘프들의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빠드득!
가르딘이 오른손에 힘을 주어 약간 비틀자 검을 잡고 있던 다크워리어의 손목이 일그러지듯이 부서졌다. 가르딘의 가벼운 동작에 손목이 부러지자 다크워리어는 검을 놓쳤다. 가르딘은 다크워리어의 검을 낚아챈 다음 아래서 위로 들어 올리듯이 놈의 턱 아래를 찔렸다. 턱을 관통하며 찔러 들어간 검이 뇌호혈을 뚫고 나왔다.
털썩!
머리가 뚫린 다크워리어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가르딘의 왼손은 리니안의 눈을 가려주었다.
"내 뒤에 있어."
리니안은 생전 처음으로 신기한 기분을 맛보았다. 눈앞의 인간 사내의 등이 그 누구보다 커 보였다. 또한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런 기분은 그녀조차도 처음 드는 감정이라 혼란스 러웠다. 치열한 전투 중에 상식적이지 않은 황당한 감정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고... 마... 워요......"
리니안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속삭였다.
씨익!
가르딘은 리니안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입가에 작은 호선을 지었다. 그리고 다크워리어를 향해 퉁기듯이 쏘아져 나갔다.
가르딘의 전광석화가 같은 움직임은 다크워리어의 속도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울프의 무리 속에 타이거 한 마리가 들어간 것과 같은 형상이 되었다. 가르딘은 초반부터 무서운 기세를 보였다.
'저놈들보다야 이놈들이 편하지.'
가르딘은 처음부터 계산을 하고 있었다. 사실 리니안을 구한 것도 우연에 가까웠다. 다크워리어를 상대하려고 나아갈 때 위기에 처한 리니안을 타이밍 좋게 구한 것에 불과했다.
가르딘은 다크워리어를 보자마자 전의 그놈들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부러 다크워리어를 상대하기 위해서 움직 였다. 세븐핸드의 두 놈은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배정해 준 후였다. 끈질긴 놈들이라 한 번에 끝내 버리라고 두 신성에게 신신당부했다. 또한 절대 방심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가르딘은 사람하고 싸우고 싶었다. 지겹게 재생하는 놈들은 사양이었다.
"와라!"
다크워리어는 가르딘의 기세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공격해 들어왔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검을 뽑아 들며 가르딘의 방위를 차단해 버렸다. 20명에 달하는 다크워리어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가르딘은 여유로웠다. 그것이 다크워리어의 신경을 자극했다.
"죽어!"
슈슉! 착!
가르딘은 날아오는 검격을 잡고 옆으로 틀었다. 검의 방향을 틀어 뒤에서 공격하던 다크워리어의 가슴을 찔렸다. 그상태에서 몸을 돌려 놈의 명치에 검을 박아 주었다. 연속적으로 세 번의 검격이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상대의 공격을 역공으로 전환하였다.
푸욱! 철퍼덕!
순식간에 5명의 다크워리어가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공간을 열은 가르딘이 방향을 전환하여 무섭도록 빠른 쾌검을 출수하였다.
슈아아앙!
검이 뻗어나가는 궤도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검에서 빛이 한순간 번쩍였을 뿐인데 다크워리어의 미간에 붉은 점이 생겼다. 선홍빛의 핏물이 미간을 타고 흐르기도 전에 의식은 사라졌다. 삽시간에 20명의 다크워리어가 죽어나갔다.
일발필사 혈견휴. 피를 보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 광전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섬광을 능가하는 가르딘의 검격은 다크워리어가 막아설 수 있는 범위를 한 참이나 벗어났다. 20명이 죽은 지 1분 만에 30명이 더 죽어나갔다. 일방적인 도살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장로들을 공격하고 난 후 전황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커투어와 페시안이었다. 데리고 온 다크워리어가 속수무책으로 죽어가자 눈에 핏발이 섰다. 놈을 죽이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페시안과 커투어는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수 없는 상태였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을 차단하며 공격을 해왔기 때문이다. 신성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다.
"네... 놈들!"
"신성이었구나!"
오러블레이드가 섬뜩하게 번쩍이는 것을 보자 페시안과 커투어는 상대가 제국의 신성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신성은 강했다. 이제 막 오러마스터에 올라섰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위력적인 검술을 구사했다.
"건... 방진 놈들!"
"죽여주마!"
페시안과 커투어에게서 광폭한 살기가 폭사되었다. 살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필언과 미토스는 변화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상대를 죽이기 위해 검을 뻗을 뿐이다. 신성의 무감각한 모습이 세븐핸드의 심기를 계속 자극했다.
-주신의 성스러운 기운이 만물을 치료하노라!
쉴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스러운 신성력이 쓰러져 있는 맴피스와 장로들의 몸을 회복시켜주었다. 빛은 외부의 상처뿐만 아니라 내부의 상처까지도 완벽하게 치료해 주었 다. 순식간에 원래의 신색을 회복한 맴피스와 장로들이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다친 엘프를 치료하는 게 먼저예요."
"알겠습니다."
맴피스와 장로들이 부상당한 엘프들을 쉴라에게 데려왔다. 쉴라는 신성력을 사용해서 엘프들을 차근차근 치료해 주었다. 신성력을 받고 치료가 된 엘프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쉴라를 바라보았다. 심각한 상처조차 단번에 치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맴피스는 쳐들어온 적을 막아서는 스필언과 미토스를 보며 경악했다. 맴피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만약 이들이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엘프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내심 싸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영웅이었구나!'
성녀와 함께 여행하는 이들이 영웅이라는 깨달았다. 성녀가 찾아와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으나 모든 것은 정해진 순리 였다. 순리를 따르지 않은 엘프들의 교만을 깨닫게 해주었 다.
퍼퍽! 쿠다다당!
가르딘을 상대로 120명의 다크워리어들이 달려들었다. 이미 80명이나 되는 다크워리어들이 죽었다. 다크워리어의 눈빛에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히 느껴졌다. 그들은 가르딘의 압도적인 실력을 확인하자 다크소드디펜스를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가르딘이 그럴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방진의 중심축이 형성이 되려고 할 때마다 가르딘이 검탄을 날려 축을 담당하는 다크워리어를 죽여 버렸다.
디펜스 진을 형성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가르딘이 약싹 빠르게 달려들어 10여 명의 다크워리어를 죽이고 또다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방어진을 형성하려면 치고 들어오고, 덤벼들면 뒤로 빠지면서 다크워리어를 죽이고 있었다.
"치사한... 커억!"
"떼거리로 덤비는놈이 더 치사한 거다!"
가르딘은 치사하다는 말을 한 놈의 입구멍에 검을 쑤셔 넣어 주었다. 어차피 전투를 벌이는데 비효율적으로 할 필요성은 없다.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최소의 방법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리는 것이 전투다.
120명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시간은 10분을 넘지 않았다. 외곽으로 분산해서 가르딘을 무시하고 엘프들을 인질로 잡는 것도 어려웠다. 회복한 300명의 엘프들이 다가오는 족족 화살과 정령술을 사용하여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엘프들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으려고 한 욕심이 화근이 되었다.
고작 1명에게 다크워리어가 겁을 먹는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살인병기로 길러지면서 두려움은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다. 극한에 달한 상황도 공포심 없이 덤벼들 수 있었던 다크워리어였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허무하게 죽어나가고 있었다. 뚜렷한 반항을 한 것도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허무한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퍼져나갔다.
"이... 렇게 죽을 수는!"
댕강!
가르딘의 검은 비정했다. 덤벼드는 적의 허리를 잘라내고 반동을 이용하여 뒤로 빠진 후 3명의 목을 쳐버렸다. 가르딘의 시야에는 다크워리어의 움직임 사이로 보이는 미세한 결 이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 속에 숨어 있는 결이 바로 사각지대였다.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도 가르딘의 시야에는 존재하여, 다크워리어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이다.
유령처럼 스며들어 다크워리어를 썩은 짚단처럼 베어내었다. 좀 전까지 옆에서 검을 맞대고 있던 다크워리어가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가자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이... 길 수 없어!"
"빠져나가야 해!"
가르딘의 혈진에 갇힌 이상 벗어날 수 없다. 1명이 모든 다크워리어를 가두어 버린 기이한 형상이 되었다.
"살고 싶은 자는 정체를 밝혀라. 그럼 살려주겠다."
카스틴 항구에서 처단한 놈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가르딘이다. 이놈들이 누군지 밝혀내야만 했다. 어차피 이놈들은 하수인에 불과한 것 같다. 제법 강하기는 하지만 전에 비해 그다지 강하다고 볼 수도 없는 놈들이다.
'음!'
비밀을 발설하는 다크워리어는 없었다.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밝힐 수 없다면 싸워야만 했다. 다크워리어들이 두려움을 극복한 듯이 가르딘에게 달려들었다. 가르딘은 달려 들어오는 다크워리어들을 보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일부러 공포감을 주어서 비밀을 밝히려고 했는데, 헛수고였다. 조직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하는 놈들이었다. 조직의 발설에 대한 두려움이 가르딘이 주는 공포심보다 큰 것이다.
'답답하네!'
가르딘은 덤벼드는 다크워리어를 차갑게 식은 눈으로 보았다. 죽고 싶다고 덤벼드는 놈들을 살려줄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살려두어 봤자 귀찮게 또다시 달려들 것이다.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단,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게 만들어주마!"
-무극칠검식 -제4절초 -극한살인검.
무극칠검식의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절초가 불을 뿜었다. 검속을 타고 흘러나오는 천룡무상강기의 기운이 다크워리어의 전신혈맥 중에서 고통이 가장 심한 곳을 잘라 놓았 다. 빛을 타고 흘러나오는 검속이라 막아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다크워리어들은 눈을 뜬 채로 가르딘의 검격에 맞 아 몸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크아아아아악!"
다크워리어는 입에 거품까지 물며 비명성을 내질렀다. 지켜보고 있던 엘프들조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들을 향해 거침없이 공격을 가하던 다크워리어가 괴물처럼 보였다. 무적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살인병기들이 고통에 겨워 몸부림 치는 것은 생소하기 까지했다.
"저... 럴 수가!"
"전신......!"
엘프들은 가르딘의 놀라운 검술과 압도적인 실력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감히 견줄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이었다. 200명의 다크워리어를 혼자서 처리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가르딘이 다크워리어를 처리하고 돌아서자 엘프들이 움찔거렸다. 검의 신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가르딘의 압도적인 능력을 되새기자 그전까지 함부로 대했던 것이 두려워졌 다.
가르딘은 엘프들에게 이곳의 정리를 맡겼다. 엘프들은 가르딘의 말에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순순히 따랐다. 괜한 객기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엘프들이었다.
가르딘이 걸어갈 때 리니안이 앞에 서 있었다.
"괜찮나."
"괜찮아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다행이군."
가르딘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스필언과 미토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리니안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이해는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본 사람도 아니었다. 단지 구해주었다는 그 한가지로 인해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러지?'
리니안은 지금 험난한 여정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뜯어말려야 했다.
간발의 차이로 검을 피한 페시안은 왼손에 장착된 건틀릿을 뻗었다. 쇠를 얕게 편 후 여러 겹으로 덧대어서 만들어진 후 어둠의 마력을 흡입한 건틀릿이었다. 건틀릿에 검은 피스트오러가 맺혔다.
타앗!
건틀릿에 맺힌 피스트오러를 스필언은 오러블레이드로 쳐냈다. 팔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건틀릿이 튕기자 가슴이 비어 버린 페시안이었다.
그 틈을 타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스필언이 보였다. 페시안은 오른손에 잡고 있는 검을 휘둘렸다. 동시에 주먹과 검을 자유자재로 사용을 할 수 있는 페시안이었다. 공수의 조 화가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스필언이 윈드 스텝으로 몸을 뒤로 빼냈다.
"애송이 놈이 제법이구나!"
이번에도 스필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적은 가르딘의 예상대로 상상 이상의 강자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스필언의 근원적인 힘인 항마멸사신공이 극성으로 운용되었다.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처음으로 모든 힘을 발휘하는 스필언이었다. 항마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왔다.
슈슈슝! 슈슈슝! 파파파팟!
커투어는 파이어애로우를 사용한 후 파이어캐논까지 동시에 뿌렸다. 접근하려는 미토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아니?"
미토스의 검에서 둥그런 반원의 기운이 뻗어 나왔다. 검의 망처럼 보인 위력적인 검격은 마법을 무력화시키더니 커투어를 향해 쏘아져왔다. 위기감을 느낀 커투어가 파이어윌(불의 장벽)을 만들었다.
쿠우우웅!
불의 장벽이 와해되면서 시간을 벌은 커투어가 블링크(공간이동)를 펼쳐 검력에서 벗어났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 내리고 있는 커투어였다. 애송이를 상대로 피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커투어가 모든 마력을 개방했다. 7서클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마력이었다. 검은 마력을 모두 뽑아낸 커투어가 미토스를 향해 마법을 난사했다.
"이번에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어둠의 불꽃을 미토스를 향해 집중적으로 쏘아댔다.
미토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접근전이 생각보다 용이치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회피하는 동작이 상당히 빨랐다.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좀더 안으로 접근해야 했다.
'속도를 더 높여야겠군.'
미토스도 항마멸사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적의 공세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능력을 선보여야 했다.
미토스의 신형이 빨라지자 커투어의 주문영창도 빨라졌다. 속사포를 방불케 하는 위력적인 마법력이 미토스를 향해 날아갔다. 위에서 내리치는 쏘아지는 파이어캐논은 지상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퍼어어엉! 화화화화활!
마법사와 기사의 전형적인 대결양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거리에서 공격하는 자와 근거리에서 공격을 주도하는 자와의 치열한 대결이었다. 미토스는 고서클 마법사와의 대전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법사의 능력을 확인하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모색하고 있었다.
"이제 끝이닷!"
커투어는 아무렇게 마법을 난사한 것이 아니었다. 마법역량을 곳곳에 뿌리면서 공격을 진행했다. 미토스가 눈치를 채지 못하는 순간에 어둠의 불꽃이 사방을 뒤덮었다. 그 순간 에 커투어가 결정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모든 불꽃이 한순간에 터지도록 한 것이다.
퍼퍼퍼퍼퍼펑!
불꽃이 미토스의 신형을 완벽하게 감쌌다. 7서클 마력으로 형성된 어둠의 겁화였다. 피할 수도 없을뿐더러 일단 부딪치면 모든 것을 다 녹여버릴 수 있었다.
"끝났다!"
"그러냐."
뒤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커투어가 몸을 틀었다.
하지만 상대는 커투어보다 빨랐다.
휙!
"넌... 커억!''
언제 접근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가르딘이 다가왔다. 귀신처럼 접근한 가르딘이 망설이지 않고 검을 찔렸다. 세 번의 검격이 커투어의 가슴중앙부터 배 바로 아래까지 찔러 들어갔다.
부들! 부들!
"어... 떻... 게?"
커투어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약점을 정확하게 가격한 것이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커투어는 약점은 알려진 적도 없을뿐더러, 알 수도 없었다.
또한 알았다고 해도 3곳을 동시에 찌를 동안 피하지 못했다는 것조차 인정할 수 없었다.
"장사 한두 번 해보나."
가르딘은 자칼과 알베이다를 상대하면서 왜 계속 재생하는지 살펴보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커투어의 약점을 살피기 위해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천룡안을 개방하여 놈의 약점을 살피는데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기운을 끌어올리는 시점에 커투어의 세 지점에서 파동이 느껴졌다. 너무 미세해서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약점인지 아닌지는 일단 찔러 보면 알 것 같았다. 가르딘은 그 즉시 틈을 봐서 커투어의 3곳을 찔러 넣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끊임없이 재생을 할 수 있는 커투어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사실 세븐핸드의 몸은 3개의 핵이 연동되어 있다. 한곳이 부서져도 다른 곳이 남아 있으면 재생 할 수 있기에 어떤 곳을 찔러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3곳이 동시에 파괴가 되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원동력 자체가 사라져 버리기에 재생할 수 없게 되었다.
"비... 겁... 한놈!"
"억울하면 너도 그렇게 해라."
"이... 젠... 장! 커억!"
죽어 가는 커투어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가르딘의 이죽거림을 듣고 분노했지만 그의 몸은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가르딘의 시선이 미토스에게 향했다. 미토스는 사방에서 조여들어 오는 어둠의 불꽃을 검막으로 막아내었다. 털끝하나 다치지 않은 채 멀쩡한 모습이었다. 다만 상대할 자를 잃 어버린 것이 조금은 불만인 듯 인상을 굳히고 있었다.
파팟! 터어어엉!
충격을 받고 날아간 페시안은 허공에서 멈추었다. 복부를 가격한 스필언의 묵직한 발차기가 제법 충격을 주었다.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는 스필언의 이마에도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3단 콤보로 변신을 마친 후에도 스필언과 결판을 내지 못하고 있는 페시안은 신경질이났다. 스필언도 공격을 해도 죽지 않는 페시안의 재생능력이 난감했다.
페시안이 거리를 벌리며 멀어질 때 커투어가 죽는 것을 보았다.
"설마?"
커투어는 저처럼 허무하게 죽을 존재가 아니었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스필언이 접근했다. 동료의 죽음을 생각할 겨를조차 페시안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페시안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크워리어가 모두 죽고, 이제는 커투어까지 죽었다. 어둠의 길드 내 최강이라고 자부한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날이 었다.
"이놈들! 그냥 죽이지 않는다!"
페시안이 불같이 화를 내었다. 이성보다는 적을 죽이겠다는 살의가 더 강했다. 살기를 뿜어내는 페시안은 방어를 도외시하며 파상적인 공세를 취했다. 스필언의 검격을 몸으로 맞아주었다.
푸우욱!
오러블레이드가 페시안의 심장을 꿰뚫었다.
착! 꽈악!
심장이 뚫린 페시안이 스필언의 검을 있는 힘껏 잡았다. 페시안은 일부러 심장을 열어준 것이다. 검이 빠져나갈 수 없게 잡은 후 스필언의 면상을 향해 건틀릿을 뻗었다. 주먹에 실린 피스트오러가 적중한다면 스필언의 머리통이 박살 날 것이다.
"죽어랏!"
찌릿! 찌릿!
건틀릿을 뻗는 순간 페시안의 가슴에서 전신의 핏줄을 찢어발기는 고통이 느껴졌다. 위기감을 느낀 스필언은 극성의 항마멸사신공을 검에 퍼뜨렸다. 폭발하듯이 증가하는 오러 블레이드의 타는 듯한 기운이 페시안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항마의 기운이 페시안의 재생능력을 저지하고 있었다.
멈칫!
주먹을 날리던 순간 몸을 움찔거리며 작게 멈추었다. 찰나에 스필언이 튀어 오르며 무릎으로 페시안의 턱을 걷어찼다. 턱을 맞은 페시안이 뒤로 물러설 때 스필언은 검을 다시 빼내었다.
흔들린 신형을 멈춘 페시안의 눈빛이 붉게 물들어갔다. 끝낼 수 있는 상황에서 보여준 스필언의 공격이 화를 부추겼다. 또다시 페시안이 스필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에 일직선으로 달려가던 페시안의 바로 옆에서 발이 날아왔다.
퍼퍽! 쿠다다당!
피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얼굴에 발차기를 맞은 페시안이 바닥에 처박히며 7바퀴를 굴렸다. 볼썽사납게 처박힌 페시안이 신형을 잡고 고개를 돌렸을 때 가르딘과, 스필언, 미토스가 주변을 에워쌌다. 세 방향을 모두 차단하며 서 있었기에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
빠드득!
셋 모두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신성이 아닌 자는 커투어를 손쉽게 죽인 자였다.
"네... 놈들이 그러고도 기사라고 할 수 있느냐!"
페시안 빠져나갈 궁리를 하다가 상대가 기사라는 약점을 공략했다. 기사라면 정당한 대결을 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상대는 다른 기사도 아닌 가르딘이었다. 말도 통할 상대를 가려서 해야 했다.
"그럼 기사 안 하지 뭐."
"뭐......?"
"그런 어쭙잖은 수작이 통할 거라 생각하느냐? 바보 아냐!"
"죽어랏!"
후욱!
수작이 통하지 않자 가장 신경이 쓰이는 가르딘을 향해 검을 뿌렸다. 근접거리에서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페시안은 기습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가르딘과 페시안의 신형이 근접거리까지 닿아 있었다. 한 사람의 등에 검이 뼈와 살을 가르고 튀어나왔다.
주르르룩!
"이... 럴 수가!"
페시안은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가르딘의 검이 페시안의 폐를 뚫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어 스필언과 미토스의 검이 페시안의 오른쪽 팔 아래와, 왼쪽 허벅지를 찔렸 다. 찔린 부분은 페시안의 약점이 위치한 곳이다. 가르딘의 검이 한 개의 핵을 부수고 난 후라 남아 있는 것은 2개였고, 나머지 한곳도 스필언의 검에 의해서 부서졌다.
"1개가 남았지."
"이... 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그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지. 답을 말해야 살 수 있다."
퉤!
핏물이 흐르는 더러운 침을 가르딘을 향해 뿜어낸 페시안이었다. 가르딘은 가볍게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페시안의 침을 피했다.
"제법 더럽게 반항을 하는군."
페시안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죽더라도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가르딘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가르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목숨을 도외시하는 놈들의 목적이 무언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죽고 나면 소용없는 것을 위해 끝까지 달려가다니, 어리 석구나!"
"네... 놈들도 곧 지옥을 구경하게... 될 거... 커억!"
푸욱!
가르딘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토스가 페시안의 나머지 약점을 찔러버렸다. 말이 씨가 된다고 악담을 들으면 기분이 찝찝하다. 가르딘은 더 이상 들을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페시안의 몸이 급속하게 부패되면서 녹아버리기 시작했다. 녹아내리는 페시안은 마지막으로 붉은 눈빛을 번뜩였다.
가르딘이 신성을 둘러보았다.
착잡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적의 숨통을 직접 끝내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
"내가 개입한 것이 불만인 것이냐."
"아... 닙니다."
"그럴 수 있다. 나도 기사로서 정당한 대결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만을 위해 여정을 떠나온 것이 아니 다. 세상을 위해 싸워나가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것이다. 개인의 사사로운 기분에 치우쳐 대의를 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의 마음도 편치 않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가르딘이 우울하고 자조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자 스필언과 미토스는 절로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 숙연해진 분위기를 연출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공작님의 큰 뜻을 몰랐습니다!"
미진함을 속죄하는 두 신성을 보며 가르딘이 희미하게 미소를지었다.
"괜찮다. 사나이라면 그 정도의 기개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다만 좀더 멀리 크게 봤으면 한다."
"공작님의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멋있게 태양을 등지며 돌아선 가르딘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 졌다.
'암암! 멀리 봐야지. 마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데.'
마왕은 영웅이 막는 게 당연한 원칙이다. 그전에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당하면 그 뒤를 누가 책임진다는 말인가! 아니길 바라겠지만 그렇게 되면 가르딘 혼자 마왕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이다. 지금 당장은 가르딘이 신성보다 훨씬 강하지만 일단 삼신기를 사용한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고대의 신기다운 위력을 선보이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파팟! 파팟! 파팟! 파팟!
수정구를 밝히는 빛, 4개가 한순간에 꺼지면서 수정구가 갈라져 버렸다. 지켜보고 있던 프레인이 벌떡 일어났다. 비현실적인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4개의 수정구가 빛을 잃었다는 것은 세븐핸드 4명이 죽었다는 뜻과 같았 다. 1명도 아니고 4명이 한꺼번에 죽어버린 참담한 결과에 프레인은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우우우우웅!
바람 한 점 없던 방안에 거센 기운이 퍼지면서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파괴적인 기운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부숴버릴 듯한 기세였다. 서슬 퍼런 기운과 동시에 뿜어지는 검붉은 빛은 마족의 기운과 흡사했다.
분노로 일어선 프레인이 누군가를 불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림자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안으로 들어온 자는 분노한 프레인을 보았음에도 불구 하고 놀라지 않았다.
그림자는 세븐핸드의 마지막 인물이자 실질적인 수장인 데빌나이트 데븐스였다. 그는 항상 프레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어둠의 기사였다. 다른 세븐핸드조차 그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다. 그는 한마디로 잘 벼린 검과 같았다.
"가겠다."
"예."
프레인이 명을 내리자 데븐스는 따를 뿐이다.
엘프마을은 정체 모를 존재의 습격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 인간의 사악한 일면과 엄청난 힘 앞에 엘프들은 무력한 존재였다. 가르딘과 일행이 아니었다면 모두 죽었을 위기였다.
그로 인해 가르딘, 쉴라, 스필언, 미토스는 귀빈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세계수에 접근하는 것은 쉽게 허락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하이 엘프 맴피스가 세 계수의 뜻을 전하지 않았다면 엘프들은 가르딘 일행을 막아 섰을지도 몰랐다.
맴피스와 3명의 장로가 가르딘 일행을 세계수로 안내했다. 가르딘은 말없이 뒤를 따르면서 신기한 기운이 점점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에 느낀 기운과 일치했다.
맴피스 장로가 멈춰선 곳에 세계수가 자리했다. 엘프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세계수는 신비함 그 자체였다. 전후좌우를 비교해도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였다. 더군다나 나무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하고 청아한 기운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대... 단하군."
가르딘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세계수는 신비함뿐만 아니라 범접하지 못하는 기운까지 가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자라오면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기품이었다.
"우리들의 어머니인 세계수입니다."
"안내를 해주셔서 감사해요."
쉴라는 신기의 기운이 세계수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기운 속에 스며든 성스러운 기운이 바로 신기일 것이다.
세계수 주변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세계수의 진액이 흘러 나와 작은 개울을 형성한 것이다. 진액은 엘프들의 마음을 정화하고, 숲의 기운을 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가르딘과 일행은 세계수로 좀더 접근을 했다. 아직까지 어떤 방식으로 신기를 찾을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 우선은 접근해서 직접 세계수에 손을 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모르겠어요. 신기는 세계수의 내부에서 느껴지고 있어요."
"그럼 쪼개고 빼면 되잖아."
헛! 휘청!
가르딘의 말을 들은 맴피스와 장로들이 휘청거리며 헛바람을 삼켰다.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말을 가르딘이 서슴없이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같은 세계수를 어찌 쪼갤 수 있단 말인가! 맴피스가 다급하게 가르딘을 만류했다.
"안 됩니다! 세계수는 우리에게 목숨보다 중요합니다."
정색하는 맴피스와 장로들이었다. 가르딘이 작정하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절박한 심정이었다.
"농담인데."
"그... 런 농담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행여 세계수께서 듣고 노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격 있는 나무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가르딘도 세계수를 완전히 잘라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한번 말을 꺼내 본 것에 불과했다. 나무는 생명력이 강해서 조금만 잘라내면 다시 자라날 수 있었다.
그런데 엘프들이 저처럼 절박하게 사정을 하니 더 이상 말을 꺼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쉴라까지도 쏘아보는 것을 보니 확실히 잘못 말한 것 같았다. 괜히 말 잘못했다가 본전도 찾지 못했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 무책임해요."
"내가 뭘."
"말을 말아야지. 방법이나 찾아보세요."
"뭐?"
'그걸 내가 어떻게 찾아.'
신기를 찾는 것은 전적으로 쉴라의 몫이 아닌가! 가르딘이라고 해서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쉴라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쉴라는 세계수 주변을 이리 저리 둘러보더니 나무에 손을 대고 신성력을 사용해 보았다.
성스러운 기운이 세계수 주변을 감돌다가 사라졌다. 세계수는 신성력을 흡수하기만 할뿐 어떠한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쉴라는 딱히 방법이 없다는 듯이 뚱한 표정을 지었 다. 스필언과 미토스도 시도를 해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아저씨 말대로 쪼개 말아.'
쉴라도 뚜렷한 방법이 없자 가르딘의 말대로 할까 고민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쉴라는 이번에도 가르딘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왜?"
"방법은 찾아봤어요?"
"너 자꾸 왜 나한테만 어려운 것 시키느냐!"
"인도자답게 명확한 답을 한번 내봐요."
"그럼 성녀답게 네가 한번 내봐라."
"지금 저처럼 가녀린 소녀에게 화를 내는 건가요!"
"이럴 때만 가녀리데."
"오빠! 정말 이럴 거예요!"
"알았다고 하면 되잖아!"
이제는 강요를 하는 쉴라였다. 답답하기는 가르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면 여기서 계속 있어야 한다. 라이나를 못 본지 한참이나 지났다.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방법을 찾기 위해서 골똘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고민하는 척만 하지 말고 진짜로 고민해 봐요!"
"고민한다니까! 지금 하고 있는 것 안 보여."
맴피스와 장로들은 쉴라와 가르딘의 다툼을 보며 성녀와 절정의 기사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대화만 들어보면 애들 수준보다 조금 높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잘 못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하는 약간의 후회감이 들기까지 했다.
'내가 인도자라면 분명히 무언가 계기가 있을 텐데, 아침에 흘러나온 기운과 관계가 있는 건가?'
가르딘은 아침에 느껴진 청아한 기운을 다시 한 번 흡입해 보았다. 세계수 바로 앞이라 기운의 강도가 아침보다 더 강렬했다. 가르딘은 조용히 눈을 감고 세계수에서 흘러나 오는 기운을 흡입해 보았다. 기운이 내부로 흘러 들어가 중단전과 하단전을 관통하며 상단전을 두드렸다 열었다. 상단전이 열리자 세계수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인도자를 기다렸어요.
'그렇습니까.'
-오랜 시간 기다렸어요.
별로 믿음은 가지 않는 가르딘이다. 알고 있다면 서론을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가르딘은 앞뒤 자르고 본론부터 꺼냈다.
'그럼 신기를주십시오'
-그냥 줄 수는 없고, 키스해 줘요.
'뭐요?'
가르딘이 급 당황했다.
-농담이에요.
'그런 농담은 하지 마십시오.'
-그대도 제 앞에서 농담했잖아요.
역시 성깔 있는 나무였다. 가르딘이 쪼갠다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나무지만 여자라면 달랐다. 라이나밖에 없는 가르딘에게 그런 과한 요구를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것은 다 들어주어도 입술만은 줄 수 없는 가르딘이다.
-태초의 맹약에 따라 그대의 기운을 끌어올리세요. 나의 중심에 잠들었던 빛이 다시 깨어나게 될 거예요.
'그렇게만 하면 됩니까!'
-그래요.
'그럼 알겠습니다.'
-부디 어둠이 열리는 세상의 위기를 걷어내 주기 바라겠어요.
'그건 영웅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씨익!
마지막에 표정이 없는 세계수가 의미심장하게 웃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가르딘이었다.
뒤끝이 찜찜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우선은 신기를 찾는 게 먼저였다. 가르딘은 그 즉시 천룡무상신공을 끌어올렸다. 끌어올린 기운을 세계수의 중앙에 자리한 곳에 손을 넣고 흘러 보냈다. 무상의 기운이 세계수의 기운과 합일되면서 찬란한 역광을 뿜어내었다. 푸른빛을 내던 세계수가 천룡의 기운을 흡입하자 황금빛을 내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밝은 빛이 흘러나오자 멤피스와 장로들은 저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한참 동안 기운을 불어넣는 가르딘은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세계수의 기운을 느끼자 기이한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쉴라의 성안을 볼 때랑 비슷하잖아!'
그렇다고 여기서 기운을 멈출 수도 없는 지경이다. 우선은 마음속에 방어벽을 세우고 세계수의 마음을 차단했다
'어딜 감히!'
가르딘은 절대 감화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우우우우응!
마지막 기운이 용트림을 하듯이 터져 나왔다. 절정에 다다르자 세계수의 중심에서 또 다른 빛의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황금빛으로 물들은 빛이 유영하듯 세계수 위의 허공을 맴돌았다. 마치 아래를 내려다보며 영웅의 존재를 찾는 것 같았다. 빛이 마침내 스필언에게 쏘아져 나갔다. 스필언은 다가오는 빛을 응시하였다. 숙명적으로 연결된 무언가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화아아아!
황금빛은 스필언의 내부로 스며들었다.
안으로 스며든 기운은 스필언의 심령과 연결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둠의 세상을 몰아낼 영웅이여, 그대와 함께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나를 받아들이 겠는가!
'그대를 받아들인다!'
-태초의 맹약에 의해서 나 세인트나이트는 그대와 함께 도래할 어둠을 걷어낼 것이다!
'그럼 그때 보지.'
스필언은 심령과 연결이 된 세인트나이트를 인정하고 받아들었다.
하지만 무기에 휘둘리지 말라는 가르딘의 말을 되새기며, 세인트나이트의 기운을 뇌리의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오랜 만에 나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은 세인트나이트는 때가 올 때까지 잠을 자야 했다.
스필언은 자신이 얻게 된 삼신기를 모두에게 설명해 주었다. 가르딘은 삼신기를 모두 찾았다는 것과 돌아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이제 끝났구나! 야호!'
댕! 댕! 댕!
푸아아아앙!
경종이 울렸다.
엘프마을의 동쪽이 완전히 박살이 났다. 무서운 마력이 집중포화 된 흔적으로 인해 나무집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근처에 있던 엘프들이 충격을 받고 퉁겨져 나가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일부는 시신조차 찾기 힘들었다.
엘프전사들이 침입자들을 두려운 듯이 쳐다보았다.
상대는 고작 2명에 불과했다.
얼굴을 가린 백색의 로브를 입은 자와, 검을 찬 검사였다.
"여긴가."
입을 연 로브의 마법사는 짙은 마기를 뿜어내었다. 엘프들은 마법사가 뿜어내는 질식할 것 같은 마기에 숨을 죽였다. 도저히 덤벼들 수 없는 지옥의 수렁에 빠진 듯했다.
"모조리 죽여주마!"
"크크크크크!"
기괴한 웃음이 들리자 짙은 어둠의 마기가 엘프마을을 뒤덮었다.
가르딘 전기 1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