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샤이닝나이트@@]
북쪽에서 느껴지는 신기의 기운을 따라 10일 동안 끊임없이 눈밭을 걸었다. 북으로 진입할수록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바람은 거세졌다. 흩날리는 눈바람은 사람의 마음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쌔애애애앵! 크아아아아앙!
바람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사막보다 더 황량한 느낌이 감돌았다.
가르딘은 주변 지형이 바람에 의해서 변하는 것을 감지했다. 사냥꾼이 말한 대로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갈래 길을 무사히 건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가르딘의 시선이 전방을 향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걸었기에 상당히 먼 거리를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도 없는 얼음 벌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응?'
낮 시간 동안 기후가 잠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환해지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눈폭풍이 불어온다고 사냥꾼이 설명했다.
가르딘은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이유로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눈집을 만드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가져온 헝겊을 덧대어서 간이 움막 비슷하게 만들었었다. 지금 그렇게 했다가는 눈폭풍에 모두 쓸려 나가버릴 수 있었다.
"스필언, 미토스는 얼음을 네모반듯하게 잘라와."
"예."
가르딘은 눈집을 만들 터를 만들었다.
"제가 도와 드릴게요."
"너는 가만히 있어."
신성력이 보호하고 있기에 쉴라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보통의 여인이었다면 추위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버티는 것과 힘든 일은 다른 것이다. 힘을 쓰는 일은 쉴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체력이 떨어져서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 나중에 더 고생을 한다.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일이었다. 나서봤자 번거롭기만 하다.
가르딘은 눈을 자를 수 있는 칼을 꺼냈다.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칼은 그리 날카롭지는 않지만 톱처럼 날이 세워져 있었다.
또한 추위에 버틸 수 있도록 두꺼운 헝겊으로 검집이 만들어져 있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관계로 가르딘은 검법을 사용하였다. 기를 집어넣어 검에 오러를 형성시켰다. 오러를 사용하여 필요한 부분만큼 터를 만들었다. 터는 지면보다 조금 낮게 만들었다. 눈폭풍을 버티기 위해서는 지면에 부착력이 뛰어나야 한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검으로 잘라서 가져왔다. 가르딘은 얼음을 차곡차곡 터 가장자리에 쌓았다. 얼음 덩어리를 쌓으면서 삼매진화를 일으켜 얼음이 얼었다 다시 녹으면서 붙을 수 있도록 했다. 반원에 가까운 집이 만들어지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썰매는 눈덩어리를 파서 그 안에 집어넣고 눈집에서 필요한 것들만 챙겼다.
눈집 안에 들어가서 아이스트롤을 바닥에 깔아 올라오는 한기를 막자 신기하게도 춥지가 않았다. 집안의 중앙에 가르딘이 챙겨 놓은 터블코일을 태웠다. 불을 피우자 온도가 조금씩 올라갔다. 외부와의 차단을 방비하기 위해서 공기구멍을 만들어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안이 비어 있는 막대기 통을 준비해 왔었다. 집을 지어 눈폭풍을 피한다고 해도 눈으로 인해 주변이 모두 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얼음벽으로 막혀 있는 곳에 집을 짓는 것은 위험했다. 잘못하다 얼음벽이 무너지면 그 자리에서 파묻혀 버릴 수도 있었다.
쌔애애애애앵!
눈집을 지은 지 10분이 지나고 나서부터 엄청난 바람소리가 귀청을 자극했다.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난 후 정확히 1시간 후에 눈폭풍이 불어왔다. 가르딘은 눈을 감아 바람의 세기를 감응해 보았다.
'굉장하군.'
자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여실히 깨달았다. 인간이 아무리 강해져도 눈폭풍을 막아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순간 멈출 수는 있어도 다시 불어오는 눈폭풍을 쉴 새 없이 막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람이 굉장히 세네요."
"바람만 강한 게 아니야. 눈까지 휘날려서 앞을 전혀 볼 수 없을 거다."
북쪽으로 갈수록 눈폭풍은 자주 출몰한다고 했다. 가르딘은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미 여기까지 와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뒤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기도 만만치 않음이 느껴졌다.
가르딘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고구마를 꺼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했다. 얼음집에서 고구마를 구워먹는 것도 운치는 있어 보였다.
"고구마네요."
"불도 있겠다. 구워 먹자."
"호호, 좋아요."
'소풍나온 줄아냐.'
신기를 찾는 여정을 힘들어하면서도 3년 동안 갇혀 지낸 것이 답답했는지 마냥 좋아하고 있는 쉴라였다. 가르딘은 고구마를 불에 구워서 쉴라와 스필언, 미토스에게 주었다.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는 잘 익은 고구마를 가르딘도 한입 깨물어 먹었다.
"역시 맛이 좋아."
발키리 영지에 고구마를 가져 왔을 때보다 품종이 좋아졌다. 고구마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빛을 발휘했다. 파멜라는 밀과 리베시안찻잎, 고구마의 품종개량을 위해서 품종연구실을 따로 만들어냈다. 영지민들 중에서도 농사일에 감각이 뛰어난 자들과 마법사들이 함께 연구한 결과였다.
쉴라와 스필언, 미토스는 고구마의 맛에 감탄했다. 적당히 불에 익힌 고구마는 노릇노릇하며, 단맛이 일품이었다. 포만감 또한 좋아서 식량 대신으로 탁월했다. 2개 정도를 먹자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등 따시고, 배가 부르니 눈꺼풀이 저절로 감겨왔다.
그렇게 가르딘 일행은 7일 동안 고구마를 먹어야 했다. 눈 폭풍이 7일 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질린다.'
7일 동안 고구마를 먹은 가르딘은 질렸다.
아무리 맛있어도 계속 먹으면 질리게 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고구마의 특성상 생리현상을 막을 수 없었다. 아저씨인 가르딘은 방귀를 뀌든 말든 신경 쓰는 체질이 아닌 반면에 쉴라가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가르딘은 쉴라를 대단하다 여겼다. 차오르는 가스를 신성력으로 억제한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성력이 생 리현상까지 차단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 례가 첫 사례였다.
눈집을 벗어나기 위해서 한쪽 벽면을 부쉈다. 눈폭풍이 주변을 감싸고 있어서 예상보다 더 많이 쌓여 있었다. 브라나도 대륙인들 눈집의 형태를 왜 타원으로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각이 있는 집을 만들어 눈이 쌓이면 빠져나오기 정말 힘들 것이다.
눈집에서 나오자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눈폭풍이 불고 난 후 지형지물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들어갔던 곳이 쌓여있고, 삐죽이 튀어나와 있던 곳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부숴 버렸다. 쉴라가 없었다면 방향마저 잊어버 렸을지도 몰랐다. 대륙이 변하려면 수백만 년이 걸리기 마련이건만 이곳은 7일 만에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기운이 좀더 강하게 느껴지고 있어요."
"가까이 오기는 했나 보구나."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조금 더 기운이 강해졌을 뿐이다. 바로 지척의 거리에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할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앞으로 전진할수록 돌아가는 길이 멀어질 뿐이었다.
"가자."
"예."
삼신기를 찾는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가르딘의 예상대로 10일을 더 이동했지만 아직도 목적지는 불분명한 상태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북쪽 깊숙이 들어 가야 했다.
'빌어먹을, 신기를 왜 이런 곳에 놓아 둔 거야!'
가르딘이 보기에 신은 이상한 존재인 것 같았다. 사람이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놓아두면 안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까지 했다. 가까운 곳에서 쉽게 찾아서 쉽게 사용하면 그게 뭐가 어떤가! 굳이 이처럼 개고생을 시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기를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주신은 아마 보물찾기를 좋아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빙산이 보였다. 겉은 모두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미끄러울 것 같았다.
넓게 펼쳐진 빙산은 아름답지만 올라가는 이에게는 막막함을 불러일으켰다. 쉴라에게 방향이 확실하냐고 하자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딘은 투덜거리면서 빙산에 발을 걸쳤다. 썰매를 자기가 끄는 것도 아니면서 불만은 가장 많았다. 그에 반해 스필언과 미토스는 묵묵히 썰매를 끌었다. 인내력이 대단한 녀석들이었다.
빙산의 중간 정도 올라갔을 때였다.
"이건 또 뭐야?"
온통 하얀색 털이 나 있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곰이 나타났다. 브라나도 대륙에서 아이스베어라고 불리는 곰으로 덩치만큼이나 포악한 놈들로 알려져 있다. 특히 움직이는 모든 것을 다 잡아 먹으려는 습성을 가졌다. 빙산의 고지대에 살면서 가끔씩 내려와서 사냥을 즐기는 놈들이었다.
아이스베어는 1마리가 아니 었다. 나타난 아이스베어가 족히 100마리나 되었다. 집단으로 서식하는 곳인 것 같았다.
가르딘은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덩치가 제법 크기는 하지만 빅트라이거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수준이 미달되었다. 또한 육지에서라면 빅트라이거라도 가르딘의 상대가 될리 만무했다.
"식후 간식거리도 되지 않는 것들이 감히 인간에게 덤벼 들어. 스필언, 미토스! 처리해!"
"예! 공작님!"
파팟!
스필언과 미토스가 눈발을 가르며 쏘아져 나갔다. 미끄러운 빙판을 달려 나가면서도 균형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발자국조차 눈에 남지 않는 신기막측한 신법을 구사하였다.
명령을 내리고 가르딘은 쉴라의 썰매에 앉아 구경했다.
"언제나 가만히 있네요."
"그럼 이 나이에 내가 나가리."
"그럴 줄 알았어요."
스필언과 미토스가 있는데 굳이 나서서 싸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가르딘이었다. 100마리 건 1,000마리 건 숫자는 아무 상관이 되지 못했다. 그랜드마스터 초입에 이른 스필언과 미토스에는 일검의 상대도 될리 만무했다.
사아악!
쿠더덩!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은 스필언과 미토스의 강력한 검격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순식간에 10마리의 아이스베어가 바닥에 쓰러졌다. 덩치에 비해서는 날렵한 아이스베어였지만 두 신성의 스피드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스필언과 미토스의 검은 전광석화를 방불케 하였다. 검광이 번쩍일 때 마다 아이스베어는 버티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일초지적도 되지 못하는 아이스베어가 오히려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가르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여유만만하게 지켜보았다. 곰 대 인간의 순수한 싸움이라면 곰이 이기겠지만 수련을 통해 경지를 개척한 인간에게 곰은 한낱 미물에 불과했다.
'그래봤자 미련한 곰이지.'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아이스베어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 갑자기 울부짖는 괴성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빙산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질렀다.
"크어어어어어어엉!"
굉장한 소리였다.
빅트라이거의 초고음과 맞먹는 엄청난 소리였다. 1마리가 소리를 지르자 다른 아이스베어들도 연달아 괴성을 질러댔다. 소리가 진동이 되어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가르딘은 아이스베어들이 시끄러운 괴성을 내지르자 어이 없다는 듯이 웃었다. 너무 두려워서 미친 것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리를 지른다고 강해질 것 같으냐! 상대가 되지 않으면 도망이라도 쳐야 할 것 아니야! 미련한 것들이! 쯧쯧!"
이길 수 없으면 도망쳐야 할 것 아닌가! 끝까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아이스베어의 만용이 안타까운 뿐이다. 짐승들의 수준은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여기는 가르딘이 었다.
'응?'
절반 이상의 아이스베어를 처리했다. 그때 가르딘은 감각을 이상하게 자극하는 불길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가르딘의 시선이 아이스베어가 아닌 빙산의 위를 향했다.
간밤에 내린 눈이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멀쩡하게 자리 하고 있던 눈들이 아이스베어가 내지르던 소리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헛! 이... 런 떠그럴!"
우르르! 꽈과과광!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한 소리만큼이나 빠르게 밀려 내려오는 눈덩어리였다.
아이스베어가 설마 동귀어진의 수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이스베어의 어리석음을 탓하던 가르딘이 오히려 짐승들의 수작에 당할 판국에 처했다.
가르딘의 판단과는 다르게 아이스베어는 눈사태에서도 버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오랜 시간 호흡을 멈출 수 있으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눈 속을 파고들 수도 있었다. 아이스베어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눈사태를 일으켜 먹이를 죽이고 나서 잡으려고 했다. 영리하기가 가르딘의 머리꼭대기에 있었다. 누가 누구를 멍청하다고 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상황이다.
내려오는 눈사태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났다. 이 일대를 모두 덮어 버리고도 남는 엄청난 양이었다. 눈사태는 아래로 내려오면서 가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가르딘은 그 즉시 천룡무상신공을 일으켰다. 무상의 기운이 가르딘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가르딘은 기운을 응축시켰다. 빛의 고리가 가르딘의 검에서 형성이 되었다. 형성된 빛의 고리는 지속적으로 회전하며 하나의 원을 이루었 다. 원을 둘러싼 원이 다시 원이 되어 하나의 원을 만들어내었다.
가르딘은 발판을 두드렸다. 기감을 극대화하였다. 두드리는 곳에서 들리는 미세한 진동의 파장을 느꼈다.
- 무극칠검식 - 제5식 - 파천멸환.
가르딘은 검에서 형성된 둥그런 고리의 기운을 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검환은 바닥에 쌓인 눈을 순식간에 녹여 버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검환의 기운이 퍼져나가자 바닥 이 순식간에 뚫려버렸다.
가르딘은 다급하게 신성을 불렀다.
"스필언, 미토스! 돌아와라!"
스필언과 미토스는 위에서 내려오는 눈사태를 보았다. 위급한 순간에 가르딘의 외침을 들었다.
우르르르르! 꽈과과과광!
산 전체를 울리는 굉음과 동시에 눈덩어리들이 순식간에 사방을 뒤엎어 버렸다. 삽시간에 쏟아져 내린 눈사태는 빙산의 모든 것들을 쓸고 지나갔다. 가르딘과 일행은 모두 눈사태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눈사태가 난지 1분 동안 모든 것이 달라졌다.
퍼어어어엉!
눈사태가 멈추고 2분이 지났다.
눈으로 덮인 지점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과 동시에 4개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가르딘과 일행들이었다.
가르딘은 산의 아래를 돌아보았다. 이곳이 산의 중턱이 아니라 저 아래였다면 그 깊이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쉽게 빠져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가르딘은 검환으로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면 눈사태에 휘말려 떠내려 갈 뻔 했다.
"후우우!"
가르딘은 한숨을 또다시 쉬었다. 아이스베어를 쉽게 생각 하다가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방심과 자만은 금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짐승이라고 해도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까닥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 다.
"쉴라야."
"왜요?"
"신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줄까?"
"팔자예요."
"성녀가 할 말은 아니구나."
"성녀라고 다 아나요. 저도 사람이에요. 저처럼 연약한 여인에게 도대체 뭘 바라세요."
할 말 없어지는 가르딘이었다. 세상에 드센 팔자가 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가르딘이 그와 같은 유형이었다. 팔자가 세면 가만히 있는 게 낫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 감했다.
킁! 킁!
개들이 냄새를 맡고 흔적을 찾아갔다. 사냥개는 며칠이 지나도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후각이 뛰어났다. 브라나도 대륙의 사냥꾼들이 지리를 잘 찾는 것도 개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냥꾼이 개들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길을 안내했다. 흔적을 따라가자 깎아 지르는 듯한 빙산이 보였다. 사냥꾼은 흔적이 산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자칼은 사냥꾼의 말대로 산을 올랐다. 여기 까지 오는 동안 상당한 고초를 겪어야 했던 자칼이었다. 갑자기 시작되는 눈폭풍을 무시하다가 수하들 10명을 또다시 잃어야 했다. 북해의 혹독한 기후변화를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그 뒤로 자칼은 사냥꾼의 말대로 움직여야 했다. 자칫 실수를 하는 날에는 목숨이 위험했다.
"올라간다."
눈으로 덮인 산은 무척 높고, 미끄러웠다. 올라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길드의 요원들을 이끌고 자칼은 겨우 겨우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우르르르르! 꽈과과과광!
이제 막 올라가는 시점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상상을 불허하는 굉장한 진동이 느껴졌다. 자칼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위에서부터 시작된 눈사태가 아래로 향하며 엄청난 위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마왕의 아가리와도 같았다.
사냥꾼조차 기겁할 정도로 굉장한 눈사태였다. 이 정도 규모의 눈사태는 근래에 본 적이 없을 정도다.
"이런 빌어먹을! 피해랏!"
자칼은 우선 사냥꾼과 개를 데리고 피했다. 지금 시점에서 사냥꾼과 개마저 없으면 브라나도 대륙에서 미아가 될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해 피해야 하는 상황이다. 눈이 쏟아지는 시간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뒤처져 있던 요원들 중에 몇은 눈사태를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크아아아! 우르르르! 꽈과과과광!"
비명조차 굉음으로 인해 삼켜져 버렸다. 요원들을 구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자칼의 목숨조차 위험한 상태였다.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고 나서야 겨우 눈사태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올라간 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거리를 뒤로 후퇴해야 했다.
자칼이 데리고 온 일급요원 120명 중에서 30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적과 싸운 것도 아닌 그저 자연재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하도 억울하고 기가 막혀 말문이 다 막히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졌다. 주신이 성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방해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번쩍!
자칼의 눈빛이 섬뜩하게 발했다.
"신이 방해한다고 해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이를 악물며 신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자칼이 었다.
푸숙!
눈 속을 해치고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얀색 털에 거대한 덩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아이스베어가 눈 사태에 휘말려 떠내려 왔다가 다시 눈을 해집고 나온 것이다. 아이스베어의 몸은 탄력이 강해서 웬만한 충격은 모두 흡수할 수 있었다. 따라서 눈사태가 나도 몸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는다.
"크르르렁!"
사람들을 보자 또다시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는 아이스베어들이었다. 50마리나 되는 아이스베어들이 자칼과 일급요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짐승 따위가 감히 어디서 이빨을 들이대는 것이냐! 모두 죽여랏!"
차창!
살아남은 일급요원들 역시 지독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동료를 어이없이 잃은 것에 대한 분노였다. 덤벼 오는 아이스베어 역시도 살기가 충만했다. 산의 중턱에서 잃은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서 달려들었다.
"크아아앙!"
쑤우욱! 털퍼덕!
도둑길드의 일급요원들은 빠르고 강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아이스베어였지만 요원들의 날렵한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삽시간에 5마리의 아이스베어가 죽어나갔다. 아이스베어의 우두머리는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소리는 작은 신호와 같았다. 이전처럼 큰 괴성이 아니었다.
우두머리가 신호를 보내자 아이스베어들이 그 자리에서 눈 속으로 파고들어 가 버렸다.
아이스베어가 순식간에 땅속으로 꺼지듯이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아이스베어가 뚫고 들어간 구멍뿐이었다.
자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놈들이 도망을 쳐!"
아이스베어가 도망침으로서 살의가 더 치솟고 있는 자칼이었다.
자칼의 일급요원들이 아이스베어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허억!
일급요원 중에 3명이 눈 바닥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방심한 상태에서 받은 기습적인 공격에 요원들은 속수 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눈 속에서 공격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다.
"아니?"
눈 바닥으로 끌려 들어간 일급요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흔적이 다시 나타났을 때는 붉은 핏물이 위로 솟구쳐 오를 뿐이었다. 핏물이 하얀 설원을 붉게 물들였다. 빨려 들어간 요원들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모두 내 뒤로 물러서!"
아이스베어가 눈 바닥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정면 대결이 힘들다는 것을 간파한 아이스베어가 자신들이 유리한 지점에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눈사태로 인해 눈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정예요원들을 또다시 잃어버린 자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낱 짐승에 불과한 것들에게 농락당하는 것 자체가 분노를 자극했다. 자칼의 얼굴과 몸이 꿈틀거리며 변해갔다. 분노한 자칼이 봉인된 힘을 한 단계 풀었다. 서서히 변화를 한 자칼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자칼이 검을 뽑았다.
"그대로 죽여주마!"
검에 검은 기운이 스며들어 갔다. 검은 기운은 검을 더욱 더 짙은 어둠으로 만들었다. 어둠의 기운은 스산하면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다크소드(어둠의 검법) -다크웨이브(암흑파동).
푸우욱!
검을 눈 바닥에 꽂았다.
검에서 형성된 어둠의 기운이 바닥 안으로 퍼졌다. 검은색 기류가 줄기줄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지진이 난 것처럼 바닥이 요동을 쳤다.
쩌저저저적! 푸아아아아앙!
퍼져나간 어둠의 기운이 바닥 안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눈 덩어리가 위로 솟구쳤다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눈 바닥 안 에서 먹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스베어들이 처 참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분산이 되었다. 삽시간에 수십 마리의 아이스베어가 죽어 버렸다. 굉장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칼의 뒤에 서 있던 일급요원들조차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퓨슝!
"크아아아앙!"
살아남은 1마리가 사나운 괴성을 지르며 자칼에게 달려들었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스베어였지만 야수성은 여전했다. 동료를 모두 잃은 아이스베어는 거친 괴성을 내질렀다.
"우두머리가 아직 살아 있었군."
자칼의 검이 달려들고 있던 아이스베어의 우두머리를 향했다. 자칼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위태해 보이지만 자칼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웠다. 정면대결에서는 어느 누구를 만나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세븐핸드의 검수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자칼이었다. 그의 검을 막을 자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아악!
자칼의 신형이 아이스베어의 몸을 통과해 버렸다. 서로의 방향이 반대방향에 이르렸을 때 아이스베어의 몸은 굳어 있었다.
쩌저저적!
아이스베어의 몸이 정수리 부근부터 정확하게 반쪽으로 잘라져 버렸다. 반으로 잘려진 아이스베어의 몸에서 핏물이 흘러 눈밭을 적셨다. 선혈의 진한 핏물이 눈에 닫자마자 차 갑게 식었다.
자칼은 검에 물은 핏물을 보며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시 쫓는다."
"예!"
모든 상황을 지켜본 사냥꾼의 표정이 변했다. 아이스베어 는 위험한 짐승이다. 강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영리했다. 또한 두려움이 없다.
상대가 죽을 때까지 달려드는 습성 때문에 사냥하기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그런 아이스베어 전체를 몰살시키는 것은 사냥꾼들도 불가능했다. 자칼은 사냥꾼이 생각해 온 것보다 훨씬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브라나도 대륙의 북방오지.
어느 누구의 침입도 용서하지 않는 혹한의 대지라고 불린다. 대륙의 사람들조차 이곳에 접근하지 못했다.
기온의 급격한 하락도 문제지만 바람의 세기가 더 큰 문제였다. 또한 지형의 험난함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깎아지른 듯한 빙곡과 끝을 알 수 없는 얼음 절벽이 사람의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눈 바닥의 곳곳이 텅 빈 지역이 많았다. 잘못 발을 들였다가는 끝없이 추락해 버릴 수도 있었다.
슈오오오옹! 쌔애애애앵!
가르딘은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아찔함을 맛보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곳에 발을 들이고 있는 자신이 더 신기할지경이다.
'젠장! 어떤 방법으로 여기다가 신기를 갖다 놓았지.'
정말 신의 재주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아니 신의 농간일지도 모른다는 불경한 생각마저 들었다.
여기부터는 가르딘이 앞장을 서야 했다. 바닥이 너무 불균형적으로 형성이 되었다. 자칫 잘못 움직였다가는 반경 수십 미터가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다.
가르딘은 바닥을 디디면서 감각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으로 표면의 상태를 파악하며 걸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눈발이 거세게 날렸다. 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눈은 피부를 찢는 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딘은 정면을 응시했다. 푸른색을 발하는 눈빛이 정면을 투시했다.
천룡안이 보이지 않는 곳을 투영하였다. 천룡안은 관찰안, 통찰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본질적인 모습을 투영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천룡안을 발휘하여 위험지대를 피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걸었다.
브라나도 대륙의 북방의 한계선을 벗어나 안으로 5일을 더 파고들어갔다.
가르딘 일행의 입가에는 언제나 서리가 차 있었다. 입에서 분출되는 호흡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얼음 알갱이로 떨어져 내렸다.
썰매에 타고 있는 쉴라는 얼굴까지 모두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차라리 앞을 보지 않는 게 나았다. 어차피 신기의 기운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얼굴에 동상 걸리면 피부미용에도 좋지 않다. 여인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피부노화방지를 위해서 가려주는 것이 좋았다.
다시 또 5일을 더 전진했다.
앞서 걷고 있던 가르딘은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음!'
특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바람이 잠잠해진 것이 아니라 아예 멈추었다. 바람자체가 불지 않고 있었다. 머릿결을 흔드는 미세한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물론 기온이 올라가서 따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거세지기만 했던 바람이 어느 공간에 들어서자 갑자기 멈춘 것은 신기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회전축의 중심에 들어선 것만 같군."
"그게 무슨 뜻이에요?"
가르딘의 뜻 모를 말에 쉴라가 물었다.
"모든 것은 작은 점에서 시작하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작은 점이 회전을 할 수밖에 없어. 회전하여 주변에 파동을 만들어 회오리를 만들어 내게 된다. 회전이 강할수록 외부로 퍼져나가는 힘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어. 하지만 정작 그 중심은 어느 곳보다 평온하지."
"바람의 중심에 들어섰다는 뜻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가르딘도 확신은 하지 못했다. 바람의 중심점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아무튼 바람이 불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그래요."
바람이 불고 안 불고에 따라서 체감으로 느끼는 기온의 차이가 엄청났다. 기온이 조금 높은 것보다 바람이 약간 불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신기의 느낌은 어떠냐?"
"무척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고 있어요."
"정말이냐?"
"이전까지의 느낌은 흐릿했는데, 지금은 또렷해요. 분명 가까운 곳에 있을 거예요."
가르딘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아직도 더 가야 한다면 어디까지 가야 할지 정말 장담하지 못할 뻔했다.
"빨리 가자."
"예."
빨리 찾아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가르딘이다. 솔직히 지겹기까지 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곳을 무작정 걸어간다고 생각을 해보아라. 그게 정말 뭔 짓인가! 맨땅 에 헤딩하는 것보다 더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르딘 일행은 하루 정도를 더 걸어갔다. 중심점에 다다를수록 하늘은 푸르고 청명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을 보여 주었다. 어디가 바다고 어디가 하늘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다. 물론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저기 같은데?"
"정말 그런 것 같네요!"
가르딘이 지적한 곳은 정말 그럴싸하게 생겼다. 여기 보물이 있다고 표시를 해놓은 것 같은 그림 같은 곳이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성처럼 보였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 바람과 기후가 만들어낸 천연적인 성이었다. 햇살에 반사되어 유리알 같은 투명한 빛을 내는 성은 아름다움을 맘껏 뿜어 내었다.
가르딘과 일행은 성으로 접근했다.
저벅! 저벅!
접근하면서도 가르딘은 신중하게 움직였다. 겉으로 보이는 현란함 뒤에 또다시 구린 것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안도했다가 뒤통수 맞기는 정말 싫었다. 주먹을 맞더라도 대비하고 맞는 것 하고, 대비 안 하다가 느닷없이 맞는 것하고 차이가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에 다다르자 절애가 보였다. 아래가 보이지 않는 절애와 절애 사이로 얼음 다리가 보였다. 얼음 다리는 오랜 시간 눈이 쌓여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얼음이 형성된 곳 중에서 나머지 부분이 모두 밑으로 무너져 내리고 남은 것이었다. 충격에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성 바로 앞에 있는 절애에 다다른 가르딘은 고래를 숙여 내려다보았다.
휘이이잉!
아래서 위로 솟구치듯이 올라오는 용권풍이 불었다. 거리 자체는 뛰어넘을 수도 있는 곳이다.
하지만 바람이 부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면 자칫 균형이 무너져서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일정한 시간을 재 보았다. 예상대로 바람은 불규칙적이지 않고 일정한 패턴을 보였다.
얼음 다리에 다가선 가르딘은 강도를 테스트해 보았다. 두드려보고 단단한지를 확인했다.
툭! 툭!
제법 강하게 내리쳤는데 다리는 멀쩡했다. 그제야 안심을 한 가르딘은 다리를 건녔다.
"너무 유난 떠는 것 아니에요."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다 와서 마지막에 잘못되면 그게 무슨 지랄이야."
"너무 안전하게만 살다가 나중에 큰 걸로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어요."
"작은 걸로 먼저 가는 수도 있지. 작게 죽나, 크게 죽나 다 똑같거든."
죽으면 다 똑같다.
엄청난 위험에 처해 죽으나, 작은 위험에 처해 죽으나 어차피 죽음 앞에서는 다 똑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죽음을 곁에 두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다. 마왕의 강림으로 죽 는 사람들의 수가 많을 수도 있으나, 인간들의 전쟁으로 인해 죽는 경우도 많다. 결론은 죽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바람이 부니까. 날 꼭 잡는게 좋을 거다."
"만져도 되나 몰라."
"라이나도 이건 인정해 줄 거다."
"그건 그러네요."
얼음 다리를 건너 성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멀리서 볼 때는 성의 모습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온전한 성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가르딘은 문처럼 생긴 틈으로 걸어 들어갔다. 통로는 온통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외부의 빛이 얼음에 투영되어 어둡지는 않았다. 쉴라가 느끼는 신기의 기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천연적으로 형성된 성은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한참을 들어갔는데도 통로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30분을 걸어 안으로 들어갔을 때 통로의 끝이 보였다. 그 끝은 빛이 번쩍여서 시야를 가릴 정도가 되었다.
눈부신 빛을 건너 발을 들이자 거대한 공터가 모습을 드러 냈다. 황궁의 대전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넓이였다.
성의 중심에 다다른 것이다. 빛은 위에서 아래로 굴곡진 얼음벽을 타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대단한 것은 빛이 여러 방향으로 반사되어 공터 안을 모두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어둠의 사각지대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지?"
"저기에요."
쉴라가 가리킨 공터의 중앙에 얼음으로 된 단상이 보였다. 단상의 중앙에 유독 검은 구슬이 놓여 있었다. 구슬은 얼음 안에 박혀 오랜 시간 있었던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구슬의 표면은 서리조차 끼지 않아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면 서리가 끼고, 하얗게 변해 있어야 마땅했다.
가르딘과 쉴라, 스필언, 미토스는 얼음 단상으로 다가갔 다. 이번에도 가르딘이 앞장섰다. 너무 쉽게 눈에 띈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가르딘이다. 수상한 장치가 있는지 확인을 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단상에 다다르자 가르딘과 일행은 검은 구슬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구슬은 검지만 투명했다. 검은색이 투명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마치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검은색이 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쉴라가 구슬에 손을 대려고 하자.
"잠깐."
"왜요?"
"너는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냐."
"무슨 말이에요?"
"던전을 발굴할 때 이야기도 못 들어 봤냐. 보물을 만지자 마자 동굴이 무너지거나, 성이 무너지잖아."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네요."
"상상력이라니. 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거야:'
"그냥 뽑을래요."
쉴라는 그냥 구슬에 손을 대서 뽑아내었다. 성격이 그리 급한 편은 아니지만 가르딘의 행동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르딘이 움찔하면서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툭! 슈우웅!
챙그랑!
공터의 천장 위에서 얼음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서 깨졌다. 날카로운 얼음 조각은 떨어지자마자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 로 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르딘이 화를 냈다.
"거봐. 이건 시작에 불과해! 이제 무너질지 몰라!"
잠잠!
얼음 조각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소리가 나서 강도가 약한 얼음 조각이 바닥에 떨어진 것뿐이었다. 별다른 이상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가르딘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자 점점 무안해졌다.
"뭐가 어떤데요."
"크흠!"
할 말 없어지는 가르딘이었다. 무너지지 않아서 잘된 일이기는 한데 뭔가 찜찜하기는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창피한 일이지만 가르딘은 그다지 변화는
없었다. 그저 입맛이 쓸 뿐이다.
"조심하자는 뜻으로 한 말이다."
"두 번 조심했다가는 여기서 날 새겠네요."
가르딘은 모른 척 말을 돌렸다.
"그보다 이게 신기냐?"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해요. 신성력을 한번 넣어 봐야겠어요."
"어서 해봐라."
쉴라는 검은 구슬을 잡고, 두 손을 합장한 후 신성한 언어를 영창했다. 순식간에 충만한 신성력이 검은 구슬에 스며들었다. 성스러운 기운이 공터 안을 메우며 변화가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쉴라는 1분가량 신성력을 쏟아 부은 후 검은 구슬을 다시 보았다. 검은 구슬 여전히 처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신성력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제 된 거냐?"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다. 신기는 영웅이 사용하는 것 아니냐. 그럼 영웅들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스필언 경, 미토스 경 구슬을 잡고 기운을 운용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검은 구슬을 받은 스필언은 기운을 일으켜 보았다. 단전에서 시작된 항마멸사신공의 기운이 증단전에 이르렸다가 검은 구슬에 다다랐다. 파사의 기운이 검은 구슬에 스며 들었지만 여전히 변화는 없었다. 스필언 다음으로 미토스가 기운을 운용해 보았다.
하지만 둘의 기운은 모두 항마멸사신공에서 운용되는 것이었다. 검은 구슬은 여전히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때가 되면 나오는 건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럼 어쩌지?"
검은 구슬이 신기가 맞는다고 쳐도 어떤 방식으로 운용이 되는 것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쉴라는 고민을 하다가 가르딘에게 검은 구슬을 주었다. 구슬을 받은 가르딘은 고개를 갸 웃거렸다.
"왜?"
"신기를 인도하는 자가 바로 아저씨잖아요. 한번 해보세요."
"내가 한다고 다르겠냐."
"그래도 한번 해보세요."
가르딘은 조금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검은 구슬을 받자마자 무언가 될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공령지체의 완벽한 경지에 다다르면서 육감이 비상하리만치 발달이 되었다. 또한 그 대부분의 예감이 적중했다. 신탁의 말대로 될 것 같은 느낌이 달갑지만은 않은 가르딘이다.
'응?'
검은 구슬이 손바닥 안에 착 감겼다. 가르딘은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보았다.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세워지자 천룡무상신공의 기운이 약간이나마 운용이 되었다. 기운을 통해 검은 구슬의 정체가 가르딘의 뇌리로 쏘아져 들어왔다. 검은 구슬 안은 미세한 통로로 되어 있었다. 수만 가닥의 선이 연결되어 있지만 일정한 모양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검은 구슬 내부에 펼쳐진 것은 또 하나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선이 끊어지지 않고 한 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단 한순간에 구슬 내부의 모양을 만들었다는 뜻이 된다.
미세한 선보다 가는 통로를 특정한 기운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결단코 쉽지 않다. 기운을 강하게 사용했다가는 구슬이 부서질 수도 있는 일이다. 가닥 가닥으로 나누어진 선의 통 로에는 신성력이 스며들어가 있었다. 검은 구슬 내부의 통로가 쉴라의 신성력과 두 신성의 기운을 흡수해서 저장해 놓은 것이다.
가르딘은 기운의 형상화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성력과 항마멸사신공의 기운에 반응하지 않은 것도 내부에 형성된 선의 끝자락까지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운의 세밀함이 아직은 부족했던 것이다. 단 한순간에 검은 구슬 내부의 끝자락에 완벽하게 도달해야만 반응을 할 것이다.
"지금부터 날 가만히 놔둬라."
가르딘의 말투가 진중해졌다. 쉴라와 스필언, 미토스는 묵묵히 가르딘의 뜻에 따랐다.
가르딘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마음속에 있는 티끌 같은 잡념도 방해가 되었다. 명경지수와 같은 투명함이 필요했다. 오직 검은 구슬에 집중해서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가르딘의 내부에서 무상의 신공이 검은 구슬에 다가갔다. 구슬의 처음을 찾아야 한다. 시작을 찾아야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무턱대고 구슬에 힘을 불어넣어 봤자 말짱 황이었 다.
'동일 지점에서 시작하여 끝에 다다라야 한다. 힘은 약하지도 거칠지도 않아야 하며, 연속성을 가져야만 한다.'
힘의 미세한 조절은 어렵다. 어떤 인간이라도 미세하게 조절을 하면 흐트러짐이 존재하게 된다. 그저 최적에 가까워지려고 노력을 할 뿐이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최정점에 도달한 사나이다. 대륙최강이라고 불려도 어색하지 않은 이가 바로 가르딘이다. 물론 본인은 대륙최강의 팔불출에 만족하지만 말이다.
주르륵!
가르딘의 목 사이로 땀이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집중하니 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천룡무상신공이 떨림을 잡아주었다. 천룡신의 최강경지에 이르자 가르딘의 몸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분출되어 시위를 압도해 나갔다. 대기의 기운마저 가르딘의 기운에 동요를 일으켰다.
쉴라는 가르딘의 모습에서 시원함을 느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경외감을 맛보았다. 솔직히 두 신성은 가르딘의 경지를 초월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대단하다!'
'과연 나의 스승님이시다!'
깨달음을 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역시나 착각은 자유였다. 가르딘이 전한 말도 안 되는 의미에서 깨달음을 얻은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모든 것이 스필언과 미토스의 뛰어난 재능과 능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신성은 가르딘이 지고의 경지에 있기에 가능했었다고 확신했다. 더없이 존경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가르딘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다른데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가르딘에게 중요한 당면과제는 검은 구슬의 흐름을 파 악하는 것이다.
'찾았다.'
사필시종을 되새기는 가르딘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뜻이다. 가르딘은 종착지를 향해 천룡무상신공을 최대한 억누르며 미세하게 조절하였다. 또한 흐름을 유 지하려고 노력했다.
'간다!'
우웅!
시작과 끝은 순식간이었다.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르딘은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껴졌다. 1초가 하루는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혼신의 집중력은 사물을 관조하는 느낌 자체를 달라지게 만들 었다.
홧!
검은 구슬이 푸른빛을 내다가 점점 순백의 하얀색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하얗게 변한 구슬의 내부에 존재했던 선들이 형상화되어 밖으로 표출이 되었다. 외부로 뿜어져 나간 선은 고리처럼 연결이 되어 하나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었다.
공중에 나타난 영상을 쉴라가 유심히 보았다.
"세상을 밝히는 빛의 전사가 깨어날 때가 도래하였다. 신의 빛을 받아 대륙의 어둠을 걷어 낼지어니... 등등!"
가르딘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기운을 계속 집어넣어야 영상이 출력되기 때문이다. 한번 시동을 걸면 자동으로 계속 분출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고도의 집중을 해야 하는 가르딘은 입을 열지 못했다.
'좀 빨리 읽어라! 똥줄 탄다.'
"대륙의 신화가 되어 마왕을 대적하리라!"
쉴라가 구슬에 전해진 내용을 모두 읽자 빛은 형상화되어 거대한 빛의 기사가 되었다. 기사는 타이탄과 비슷해 보였다. 투명한 색으로 빛을 내는 기사가 미토스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미토스는 뇌리를 관통하는 충격을 받았다. 빛의 타이탄은 미토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미토스는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빛은 미토스의 몸을 관통하지 않고 안으로 갈무리 되었다. 미토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가르딘은 그제야 천룡무상신공의 운용을 멈추었다. 투명한 색을 발하던 구슬은 다시 원래의 검은색으로 변했다. 종착지에 다다르고 나서야 구슬은 그저 인도자를 발견할 도구 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가르딘이다.
미토스는 내부로 들어온 빛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빛은 미토스의 심령과 연결이 되었다. 빛은 미토스와 연결이 되어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로 묶이게 되었다.
가르딘과 쉴라, 스필언은 미토스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 다. 5분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 미토스가 눈을 떴다. 정광이 번쩍였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신기 인가요?"
"신기가 맞습니다. 이름은 샤이닝나이트라고 합니다."
미토스의 심령과 연결이 된 샤이닝나이트가 자신의 존재를 밝혔다. 미토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샤이닝나이트가 고대로부터 있었던 과거의 흔적이었다. 과거의 일이 전해지자 쉴라와 스필언은 놀라는 눈치 였다.
모든 예언의 시작과 끝을 보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심드렁했다. 샤이닝나이트가 고대 삼신기 중에 빛의 기사라고 불리든지 말든지 그건 상관없었다. 찾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을 뿐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 따위는 관심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이었다. 가르딘의 일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작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가 한 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 나 존재했다.
"때가 되 면 나온다고 하지 않더냐?"
"그... 렇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어떻게?"
"아마 지가 무지하게 잘난 줄 알 거다."
'허억!'
가르딘의 말에 놀란 미토스였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정확하게 알아맞혔기 때문이다.
''고철덩어리 주제에 꼭 지들 필요할 때만 나온다냐."
가르딘의 투덜거림을 들었는지 미토스의 심령과 연결이 된 샤이닝나이트가 신경질을 부렸다. 미토스는 차마 그 것을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고대 삼신기는 정신체로 존재했던 병기였다. 인간의 수명보다 수백 배는 살아온 샤이닝나이트는 자존심이 상당히 강했다.
"어차피 네가 타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거다. 굳이 고철덩어리 따위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 네 힘이 강해지면 그까짓 것 없어도 된다."
'아!'
스필언과 미토스는 가르딘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삼신기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병기일 뿐이다. 스스로 강해지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잠시나마 병기에 의존했었던 자신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두 신성이었다. 검사의 정신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가르딘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가르딘은 또다시 어이가 없는 표정이 되었다. 고철 덩어리 주제에 자존심을 차리는 것이 못마땅해서 해본 말에 불과했다.
'이것들이 던져주기만 하면 받아먹네. 너희들이 거지냐! 다 주어먹게!'
이왕 이렇게 된 것 하는데까지 말을 던져 보는 가르딘이다.
"샤이크나이트인지, 샤이닝소드인지 모르겠지만 사용하고 싶을 때 쓰지 못하는 것은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이다. 자 내 검을 봐라! 평범한 검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것이 진짜 병기다. 알겠느냐!"
"공작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미토스의 심령과 연결이 된 샤이닝나이트가 심하게 투덜거렸지만 반항하지 못했다. 가르딘의 말대로 미토스의 의지가 강하면 샤이닝나이트는 어찌할 수 없었다. 심령과 연결이 되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미리 차단해 버리는 가르딘이었다. 이로써 수천 년 만에 깨어난 샤이닝나이트는 대화상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한동안 미토스의 뇌리 한쪽 구석에 처박히는 천덕꾸러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가르딘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병기에 의지하지 않고 수련을 통해 강해지는 것은 기사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고대 삼신기는 일반의 병기와는 차원이 다른 무서운 병기다. 신의 기운을 받아 탄생한 병기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실현해 낼 수 있다. 고대로부터 신탁으 로 내려온 병기다. 가르딘의 말처럼 허투루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삼신기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세상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태어난 병기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면 오히려 세상을 지배 하고도 남았다. 주신 라이니언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한 병기를 아무 제약도 없이 만들어 놓지는 않을 것이다. 가르딘이 신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르딘이 신을 믿지 않느냐 그것도 아니다. 다만 관심이 없을 뿐이었다. 어차피 신이 인간 세상에 강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의 수만 년 역사를 뒤져봐도 신이 강림했다는 것을 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배짱을 부릴 수 있다. 원래 왕이 없는 데에서는 그 아래 사람이 큰소리치는 게 당연한 이치다.
가르딘의 시선이 쉴라에게 향했다.
"왜 여기에 하나밖에 없냐? 고대 삼신기라고 하면 3개라는 뜻이잖아."
"전 한곳에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요."
"뭐?"
쉴라는 삼신기가 한곳에 있다고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곳까지 생고생하며 왔는데 하나를 더 찾아야 한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다시 또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에 가르딘은 염불이 터졌다.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물어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특성이다. 그 정도는 쉴라가 미리 얘기에 주어야 마땅했다.
가르딘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흥분해 봤자 손해였다.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그럼 어디에 있는데?"
"샤이닝나이트가 깨어나자 또 다른 신기가 눈을 뜬 것 같아요.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요."
삼신기는 순차적으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드래곤나이트가 눈을 떴기에 샤이닝나이트가 기운을 발산한 것이다. 이제 샤이닝나이트가 눈을 떴으니 남아 있는 신기가 기운을 발산할 차례였다. 역시 신은 만만하지 않았다. 고생 길이 훤히 보이는 길을 친절히 안내해 주고 있었다.
가르딘은 최대한 이 부근에 있기를 기대했다.
"어딘데?"
"북해는 아닌 것 같아요."
"뭐?"
"상당히 먼 거리에서 느껴져요."
"그럼 또 여행해야 하는 거냐?"
"어쩔 수 없죠."
"난 안 가면 안 되냐?"
"좀 전에도 보셨잖아요. 아저씨가 가지 않으면 신기는 힘을 발휘하지 못해요."
"그럼 너희들만 가서 가져와. 내가 발키리 영지에서 확인 해 줄게. 어때 명쾌하지."
"전혀요. 신탁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요."
쉴라는 단호했다. 신기를 찾기 전까지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몰랐다. 여기까지 오면서 가르딘이 찌질 대기는 했지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두 신성을 다독이고, 여정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손쉽게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딘과 있으면 즐겁고 재밌다. 이것은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쉽게 놓아줄 리 없는 쉴라였다.
가르딘은 신탁에 완전 낚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맛좋은 먹이를 던져 놓고 덥석 물은 꼴이 되었다. 다시 빠져나가려고 해도 이미 갈고리는 입천장을 뚫어버린 지 오래였다. 낚시꾼 라이니언이 놓아주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해준 것도 없으면서 엄청나게 부려먹네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