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3/93)

   @@[ 제4장 성녀출관@@]

  라이니언 신성제국.

  주신 라이니언을 모시는 제국에 혼란과 분란이 사라졌다. 성녀의 탄생과 동시에 제국의 분열되었던 힘이 단결되었다. 대신관을 주축으로 하는 신관파와 귀족파의 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귀족파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피에르 공작가가 몰락하면서 귀족들의 힘이 분열되었다.

  분열되었던 힘을 프리먼 대신관이 끌어안았다. 그로 인해 신정일치의 정치체제가 완비되었다. 신성제국의 초기 시절로 돌아간 것이다.

  프리먼 대신관은 관행적으로 되어왔던 귀족들의 정치폐단을 철폐하면서 제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지지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귀족 고유의 권한이 약화되었지만 귀족들은 어쩔 수가 없는 상태였다. 힘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성기사단과 군권을 신관파가 가지고 있는 이상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피에르 공작이 남겨진 세력을 이끌고 저항을 해보았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피에르 공작은 세력싸움에서 패하자 곧바로 대신관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목숨을 구명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대신관은 피에르 공작의 투항을 받아들이며 그의 권한을 모두 제한해 버렸다.

  그 이후 피에르 공작가는 자작가로 강등이 되었고, 가지고 있던 재산의 대부분이 국고로 회수가 되었다. 물론 그것만 해도 굉장한 선처가 아닐 수 없었다. 죽지 않은 것이 기적적이었다.

  프리먼 대신관의 자애로움이 빛을 발했다. 그로 인해 귀족 세력을 무리 없이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프리먼 대신관이 잔인하게 처벌을 했다면 귀족들의 반발이 예상보다 더 컸을 것이다. 귀족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호구지책이었다.

  프리먼 대신관은 신성제국의 체제를 견고히 하고 나서 카이로만 제국의 즉위식에 참여했었다. 신성제국과 카이로만 제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대외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즉위식이 있은 후 반년이 지났다.

  신성제국은 예전의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미드라이언 대륙 각국에 사절단이 대거 파견이 되고 있는 상태였다.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성제국이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프리먼 대신관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신전에서 기도를 하는 순간마다 대신관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성녀를 보필할 아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니.”

  “저희 쪽에서 찾아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누군가 성혈을 가진 아이들을 노린다는 말인가?”

  대신관 직속의 일급 신관이 된 론바인이 모아놓은 정보를 조합하여 프리먼 대신관에게 전했다.

  대신관은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성혈을 가진 아이들은 천 명 중에 한 명이 있을 정도로 희귀하다. 여태까지 신성제국에서는 각 대륙에 파견된 신관들에 의해서 일정 수의 여아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그 수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성혈을 가진 아이들을 적시에 찾을 수 있어야 했다.

   “이전에 비해 차이가 너무 큽니다. 하지만 꼬리가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수상한 움직임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해도 증거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세력이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으니 확실하게 찾아보도록. 만약 그들이 성혈을 가진 아이들을 빼돌리는 것이라면 제국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찾아와야 한다.”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성혈은 라이니언의 축복이다. 그 힘을 신성제국이 아닌 다른 세력에서 빼돌린다는 것은 신성제국의 규율을 어기는 짓이다. 신의 축복된 인재는 반드시 신성제국으로 와야 하는 것이 순리였다. 힘을 사용해서라도 다시 찾아와야 했다.

  프리먼 대신관은 신성제국의 대신전 중앙의 지하에 마련된 수련실을 찾았다. 문 앞에 선 대신관은 묵묵히 지켜서고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성녀만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때가 되어가는구나!”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녀의 출관을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 바로 프리먼 대신관이었다.

  ‘음!’

  성스러운 기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문밖에 서 있던 프리먼 대신관은 몸을 통해 전해지는 순수하면서도 성스러운 신성력에 저절로 숙연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성제국 내 최고의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프리먼 대신관조차 그 순수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끼이익!

  굳게 닫혔던 문이 살며시 열렸다. 지하실의 어둠을 물리치는 광영이 뻗어 나왔다. 빛에 닿은 프리먼 대신관은 주신 라이니언을 외치며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신이 주신 성스러운 능력에 동화된 것이다.

  “오오! 라이니언이시여!”

  빛은 점점 더 강렬해지는 것 같았다. 강렬한 빛은 세상 만물을 포용하는 관대함이 묻어 있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빛이 서서히 갈무리가 되어 사라져 갔을 때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은 순결하면서도 고결했다. 맑고 투명한 눈빛에 세상을 꿰뚫어 보는 현기가 서려 있었다. 이전의 어리고 앳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성숙한 여인이지만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고결한 여인이 되었다.

  싱긋!

  성녀로서 각성한 후 수련하기 위해 들어갔던 쉴라가 드디어 출관을 하였다. 3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으나 쉴라의 모습을 여인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길게 내려오는 금발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돋보였다. 그녀가 대신관을 보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결 부드러워지고 성숙해진 쉴라였다.

  “오랜만에 보네요.”

  “성녀님을 뵙습니다!”

  감격에 겨운 듯한 프리먼 대신관이었다. 갈무리가 되었지만 프리먼 대신관은 느낄 수 있었다. 쉴라의 내면에서 솟아 나오는 신성력은 역대 어느 성녀보다 충만하며 성스러웠다.

  “드디어 깨달음을 얻으신 겁니까!”

  “깨달음이라니 말도 안 돼요. 라이니언 님의 뜻에 좀더 가까이 갔을 뿐이에요.”

  “오오! 대단합니다!”

  신관은 신의 뜻에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 그것이 신성력을 얻는 원동력이 되며 그들이 살아가는 힘을 제곡해 주기 때문이다. 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쉴라가 더욱더 가까워졌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얻었다는 반증이었다.

  미소를 짓고 있던 쉴라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녀에게 내려진 신탁의 날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때가 도래하고 있어요.”

  “설마?”

  “맞아요.”

  “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쉴라는 자신이 받은 신탁의 내용을 프리먼 대신관에게 전해 주었다. 내용은 어둠을 지배하는 존재가 온전히 세상에 강림한다는 뜻이다. 어둠을 지배하는 존재는 마왕을 뜻한다. 수세기 동안 마왕이 강림을 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제까지는 그 힘에 제한이 있었다. 이번에는 힘의 제약이 없이 온전히 강림을 할 것이라는 신탁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이 대륙을 휩쓸고 지나가라 것이라 여겨졌다. 

   프리먼 대신관의 표정 역시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왕의 강림으로 인해 죽어갈 대륙의 모든 존재들이 걱정되었다. 이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대륙은 마왕의 강림으로 인해 사라질지 모른다.

  “그리 걱정할 일만은 아니에요.”

  “어찌 걱정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라이니언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실 거예요.”

  쉴라의 단호한 태도에 프리먼 대신관은 숙연해졌다. 그녀는 예전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이제는 대신관의 능력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그녀에게서 뻗어 나오는 밝은 빛이 프리먼 대신관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제가 너무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아니에요. 우선은 때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해요.”

  “준비라 하면 무엇을?”

  “어둠을 맞기 위해 세 개의 신기를 찾아야 해요.”

  “그렇다면 고대의 삼신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요.”

  “오랜 시간 찾아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프리먼 대신관은 회의적인 뜻을 내비치었다. 신성제국의 고대문헌에 세 개의 신기를 얻을 수 있다면 후일 벌어지는 대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문구가 있었다. 그로 인해 신성제국의 초기시절부터 삼신기를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삼신기였다.

  “호호!”

  “제가 깨어나면서 삼신기도 깨어났어요. 하나씩 힘을 발휘하게 될 거예요.”

  “그렇습니까!”

  이제까지 찾을 수 없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삼신기는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성녀만이 삼신기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프리먼 대신관이다. 그녀에게 대륙의 존폐가 달려 있었다.

  “한동안은 모른 척해 주세요. 이 일은 저와 대신관님만 아는 것이 좋아요.”

  “알겠습니다.”

  종말이 다가온다는 것을 대륙의 사람들이 알면 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인간은 종잡을 수 없는 존재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질서해지고, 혼돈이 가득한 세상이 도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오기도 전에 인간세상은 피폐해지고 망가질 것이다. 프리먼 대신관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침묵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성녀로서의 소임을 다하겠어요. 프리먼 대신관님은 비밀리에 두 사람에게 연락을 넣어주세요.”

  “그리하겠습니다.”

  성녀의 출관은 빠르게 퍼졌다. 그녀의 출관 자체가 신성제국의 축복이자 대륙의 축복이었기 때문이다.

  쉴라는 프리먼 대신관과 함께 신성제국의 신단에 모습을 드러내서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려주며 공식적인 행사를 맞이했다.

  성녀의 등장으로 신관들과 성기사단의 힘은 전보다 더 공고해지고 있었다. 성녀와 대신관 체제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힘을 죽이고 신관파에 복속이 된 귀족파는 날로 세력이 약해졌다.

  그 중심에 있던 피에르 자작은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평범한 귀족 세력 중에 하나가 되어버렸다. 예전의 화려한 영광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빌어먹을!”

  “고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그년이 나타나서 내 모든 것을 빼앗았단 말이다!”

  쉴라의 등장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피에르 자작이었다. 이전에는 고개를 들지도 못했던 놈들이 피에르 자작을 무시하며 배척하고 있었다. 신관들뿐만 아니라 귀족들조차 피에르 자작의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쌔신 길드의 뒤를 캐다가 덜미가 잡히는 바람에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목숨의 위협을 간신히 넘겼지만 남은 것은 모욕뿐이다.

  “놈들이 내 뜻을 들어줄까?”

  “그들과 손을 잡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차라리 귀족들의 힘을 다시 모으는 것이 나을 겁니다!”

  “그따위 놈들은 필요 없다. 내게 힘을 줄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할 뿐이지.”

  3개월 전에 피에르 자작에게 누군가 찾아왔었다. 그는 어둠의 길드에 속해 있는 세븐핸드의 일원이라고 하였다.

  어쌔신 길드와 사이가 좋지 않은 피에르 자작은 라칸을 시켜 놈을 죽이라고 명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들이 생각하는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일수에 라칸을 제압하고 기사들마저 제압해 버렸다.

  놀라운 실력에 피에르 자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라칸이 비록 몰락귀족의 후예지만 실력만큼은 뛰어났다. 그런 라칸을 일수에 제압한다는 것은 놈의 실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뜻이다. 

  피에르 자작은 어쩔 수 없이 상대의 말을 들었다. 조건은 성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서 알려주면 성녀와 대신관을 죽여주겠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성녀가 제국의 신전에 있기에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면 죽일 수 있다고 했다.

  피에르 자작으로서는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성녀를 죽이려고 하는 놈들의 의도가 못 미더웠다. 그들이 어떤 의도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가 의문이었다.

  “나도 놈들이 수상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느냐! 우리는 놈들의 뜻대로 움직여주고, 이후에 신성제국의 실권을 다시 잡으면 된다. 그것만 생각해라! 알겠느냐!”

  “명에 따르겠습니다.”

  피에르 자작은 지금 당장의 일이 시급했다.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성녀와 대신관은 눈엣가시였다. 그들을 반드시 죽여야 향후 신성제국의 힘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한 번 일어서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대신관과의 파벌싸움에서 항복을 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모든 힘을 쏟아 부어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참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되찾는다!”

  피에르 자작의 눈빛에 서린 복수의 열망과 권력욕은 끝을 모르고 불타올랐다. 

  휘이익!

  바람이 어둠을 타고 날아갔다.

  바람이 멈춘 곳은 주변이 수풀로 된 곳이다. 어둠 속에 동화된 존재는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수풀은 그저 어둠을 삼켰을 뿐이다. 놀라운 것은 수풀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환영이 설치되어 내부를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루젼 마법진이 걸린 지점을 넘어 어둠 속의 존재는 동굴에서 멈추어 섰다.

  “나다.”

  “들어오십시오.”

  동굴 안의 문이 열렸다. 어둠이 깔리는 시간인데도 안은 무척이나 밝고 깨끗했다. 동굴 내부는 라이트 마법구가 설치가 되어 언제나 환했다. 동굴의 규격이 네모반듯하게 깎여 있었다. 안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어둠 속의 존재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다.”

  그는 환하게 비추는 동굴의 내부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 통로의 끝에 다다랐을 때 정교하게 조각을 해놓은 문이 있었다. 조각이 된 문의 선은 상당히 세심하며 부드러웠다. 예술작품에 비견되었다. 하지만 문에 조각된 모양은 절대 아름답지 않았다. 악마의 마력이 서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알베이다입니다!”

  “들어오라.”

  문을 마주 대고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알베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어둠의 제왕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조차 방 안에 있는 존재에게는 종복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상의 존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방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컸다. 내부는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방의 중심에 알베이다를 떨리게 만든 존재가 앉아 있었다. 방 안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로브를 깊게 뒤집어쓰고 있는 상태였다.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검붉은 안광이 번쩍일 뿐이다.

  알베이다가 걸어와서 부복을 하였다. 그것이 당연한 듯한 모습니다. 눈앞의 존재는 만인을 지배하는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 되었느냐?”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리되었군.”

  “알케인 님이 당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멍청하게 잘난 체하다가 결국 죽었구나!”

  활! 활!

  로브를 입은 존재에게서 노기가 뻗쳐 나왔다.

  알케인이 죽은 일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저 알케인이 죽었다는 것을 느낌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서로를 견제하며 자존심 싸움을 벌이기는 했지만 어느 누구보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존재였다. 알케인의 죽음이 그의 분노를 터뜨리기에는 충분했다.

  허억!

  알베이다는 광포한 기운의 압박으로 인해 충격을 받고 있었다. 숨을 쉴 수조차 없는 굉장한 힘의 여파였다. 순식간에 알베이다의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로브의 주인이 힘을 더 뿜어내면 죽을 수도 있었다.

  로브의 주인은 알케인과는 또 다른 다크로드 프레인이었다. 어둠의 길드를 통솔하는 세 명의 다크로드 중에 한 명이다. 알케인이 죽었으니 두 명으로 줄어버린 상태였다.

  프레인은 분노를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알베이다는 이토록 분노하는 프레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또한 깨달았다. 그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을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프레인은 알케인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한 후에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단서가 한 가지 있었지만 석연치 않아 무시하고 있었다. 

  “가르딘이라는 놈을 알아봤느냐.”

  “카이로만 제국의 새로운 오러마스터입니다. 제국전과 내전에서 공적을 세워 공작의 반열에 들었습니다.”

  “놈이 알케인의 마지막을 봤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프레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막 오러마스터에 든 놈이 알케인을 죽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케인의 힘을 능가할 수 없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놈에 대한 것은 이쯤 하면 됐고, 어찌 됐느냐?”

  “성녀가 출관하였습니다.”

  “삼신기가 부활했겠군.”

  어둠의 길드를 지배하는 세 명의 다크로드는 각자가 맡은 일이 따로 있었다. 알케인의 경우는 제국을 지배하여 암흑의 세상을 앞당기는 역할이었고, 프레인은 후일 부활하게 될 어둠의 지배자에게 방해되는 존재인 삼신기를 찾는 것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어둠의 부활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삼신기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던 프레인이었다. 그는 삼신기가 성녀와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성녀가 탄생하기 전에 죽이려고 했었던 것이다. 실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미루게 되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쉴라를 죽이고 삼신기를 찾아내야 했다. 신의 절대무기는 어둠에 극성이었다. 내버려둘 수가 없는 일이다.

  “살쾡이를 포섭했으니 성녀가 움직였을 때 정보를 보내올 것입니다.”

  “세븐핸드의 모든 인원을 동원하는 일이 있더라도 삼신기를 찾아야 한다.”

  “예!”

  프레인은 삼신기의 행적을 찾는 데 방해되는 존재를 모두 지워버리라고 명령했다. 찾게 되면 프레인이 직접 움직일 것이다.

  카이로만 제국은 러쉬 황제의 체제가 완비되어 가고 있었다. 반년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카이로만 제국은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그 기간 동안 러쉬 황제를 비롯한 두 대공가는 무척이나 바쁜 행보를 보였다. 새로이 개혁해야 하는 일들을 빠르게 추진해야 했기 때문이다.

  개혁은 시작이 중요했다.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게 되면 결국에는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추진할 수 있을 때 밀어붙여 단숨에 고지를 점령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러쉬 황제는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던 국고를 다시 정비하고, 세수를 개혁하였다. 세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귀족들의 동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했다.

  러쉬 황제는 두 대공가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원했고, 대공가도 러쉬 황제의 뜻에 따라 세수 개혁을 단행하였다. 반발이 있을 수 있기에 세수 개혁의 공정성과 과거의 사례 등을 면밀히 살펴 시행하였다.

  러쉬 황제는 대공가와 협조를 하면서도 황권의 강화를 위해 세력을 비밀리에 규합해 나갔다. 황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완비가 되어야 내정이 일치가 되어 원활하게 목표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도 러쉬 황제는 대공가의 도움 없이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없었다. 현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후대에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전에 미리 차곡차곡 준비를 해놓아야 한다.

  황제가 된 러쉬 황제가 정사를 돌보기 위해서 바쁠 때, 아이시런 공주는 골치 아픈 일들을 어느 정도는 정리해 놓았다. 혼인을 하기 위해 찾아온 왕자들을 곤란하지 않도록 거절한 상태였다.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는 것으로는 힘들었다. 어느 정도의 설득력이 있어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 후일 좋지 않은 관계가 될 수도 있었다. 괜한 분란을 조장할 이유는 없었다. 분란이 벌어지면 지금까지 쌓아놓은 아이시런 공주의 이미지가 망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절대 원하지 않았다. 언제나 고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무슨 일이냐?”

  “그냥 오라버니의 건강이 걱정돼서 찾아왔어요.”

  “그런 것 같기는 하다만.”

  러쉬 황제는 아이시런 공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흔히 사람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 고개를 돌리기 마련이지만 아이시런 공주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붉어지기는커녕 보고 있던 러쉬 황제가 무안해질 지경이다. 철벽방어가 따로 없었다. 

  ‘얘가 무슨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군!’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지 않았다면 짐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모든 사내들이 아이시런 공주를 보며 열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가 봐도 실버폭스(은빛여우) 그 자체였다. 실버폭스는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영악한 녀석 중에 하나이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장차 아이시런 공주를 데려갈 사내가 걱정되기까지 했다.

  “오라버니가 황제가 되고 난 후 제국은 안정되어 가고 있어요. 주변 왕국과의 관계도 원활해졌고 말이에요.”

  “네가 날 너무 띄워주는구나!”

  “사실을 얘기하는 거예요.”

  “듣기에 싫지는 않구나.”

  러쉬 황제는 흐뭇했다. 아이시런 공주의 말대로 지금까지는 의도했던 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만족해하는 러쉬 황제를 보자 말을 할 때가 됐다고 여겼다. 일부러 칭찬을 하여 방심을 유도한 것이다. 방심했을 때 쐐기를 박아 빼도 박도 못하게 해야 했다.

  “이제 약속을 지켜주세요.”

  “약속?”

  러쉬 황제는 바쁜 정사로 인해 아이시런 공주와의 약속을 잊어먹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이시런 공주는 이날을 기다리며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실버폭스의 노련함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전에 제국이 안정되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했잖아요!”

  “아! 그랬던 것 같구나!”

  “그랬던 것이 아니라 확실해요.”

  “그...렇구나!”

  “저는 똑똑히 기억하는데 오라버니에게는 그저 흔한 약속이었던 건가요!”

  “아...니다. 내가 설마 그렇게까지 생각하겠느냐! 어떤 소원이든 말해 보아라!”

  러쉬 황제는 아이시런 공주의 박력에 순간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주도권이 아이시런 공주에게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러쉬 황제는 이제야 기억이 확실하게 났다. 잊어먹고 있었던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거절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주어야 미안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겉으로는 약간 흥분한 것 같은 표정이지만 아이시런 공주의 속은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냉정했다. 원하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 하며, 흥분은 금물이었다.

  “말해 보아라!”

   아이시런 공주가 뜸을 들이자 조급하게 된 러쉬 황제였다.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상황이다.

  “오라버니가 정 그렇게 사정한다면 말할게요.”

  “사정이라니. 그건 좀!”

  “흑! 오라버니는 약속을 그저 그런 것으로 여기는 건가요!”

  “아니다! 어서 말해 보렴.”

  점점 가르딘을 닮아가고 있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말투와 행동이 너무 비슷했다. 누가 보면 같은 배 속에서 나온 혈육으로 알 것 같았다. 

  “발키리 영지에 가고 싶어요.”

  “알...았다.”

  “고마워요. 그럼 내일 출발할게요.”

  “뭐?”

  쌔앵!

  목적을 얻고 난 후 아이시런 공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겨진 러쉬 황제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하하하하!”

  뒤늦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러쉬 황제가 호쾌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웃어보는 러쉬 황제였다. 지금까지 이토록 웃어본 적도 드물었다.

  “정말 시원하게 웃어보는구나.”

  예전의 발키리 영지라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가르딘 공작이 지키고 있는 곳이니 그 어떤 곳보다 안전할 것이다. 러쉬 황제는 아이시런 공주의 편의를 봐주기로 했다. 황궁에 오래 있는 것보다는 가끔씩 바람을 쐐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 보았다.

  후작의 작위를 얻고 영지를 하사 받은 스필언과 미토스가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스필언이 미토스의 영지에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은 영지를 관리하고 경영하느라 다른 곳에 정신을 팔지 못하고 있었다.

  “영지가 아름답군.”

  “검과는 다른 재미가 느껴지더군.”

  “나도 마찬가지야.”

  사람을 다루고, 영지를 다루는 일은 미토스와 스필언이 이제껏 해온 것들과는 다른 일이었다. 검만을 휘두르던 시절과는 다르게 주변을 폭넓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했다. 삶을 알아가며 배워가는 연륜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삶을 알아갈수록 검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한번 대련을 해볼까.”

  “좋지.”

  두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외부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미토스의 개인 연무장이었다.

  검을 뽑자마자 스필언과 미토스는 부딪쳤다. 연무장 안에는 검광이 번쩍이고 오러가 난무했다. 삽시간에 살벌한 대련이 되었다.

  카아앙!

  스필언의 검이 좌에서 우로 물 흐르듯이 뻗어나갔다. 미토스의 검 역시도 끊이지 않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강력한 힘의 대결로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부드러움이 강함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둘의 검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한동안 쉬면서 검에 대한 조급함이 많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자 검이 새로운 길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었다.

  30분간의 치열한 대련이 끝이 났다. 둘은 서로의 검에 만족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만족을 몰랐을 때와 만족했을 때는 엄연히 달랐다. 현실에 만족해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대련이 끝난 후 스필언과 미토스는 차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두 사람 모두 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술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어떤 때라도 냉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대를 원했다. 가르딘이 보기에 인간 같지 않은 놈들이라고 할 만했다.

   방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긴히 할 말이 있기에 방 안으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을 해놓았다.

  “자네도 받았나.”

  “그렇네.”

  “이번 일은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을 것 같네.”

  “같은 생각이네.”

  스필언과 미토스는 영지를 경영하는 동안 한 장의 서신을 받았다. 서신은 비밀리에 전달이 되었다. 편지의 내용은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상당히 무례한 내용이지만 두 신성은 거절할 수 없었다. 보낸 이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불안하지만 의욕을 불태웠다. 마치 숙명의 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스필언과 미토스의 눈빛이 생생하게 살아 올랐다.

  봄에 파종을 한 밀이 농지를 수북하게 메웠다. 발키리 영지의 기후 조건에 따라 겨울밀보다는 봄밀을 심어 가을에 추수를 하게 되어 있었다. 지금은 밀이 한창 쑥쑥 자라는 여름이었다. 여름에 자양분을 잘 얻어야 가을에 밀의 품종이 좋아진다.

  발키리 영지의 대부분이 푸른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어딜 가나 밀 농경지가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밀로 인해 마음마저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밀 농지 외의 밭에는 고구마가 풍성하게 익어갔다. 고구마는 주생산물인 밀을 제외하고 발키리 영지에서 가장 많이 나는 특산물이 되었다. 고구마를 바탕으로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개발해서 각 영지로 판로를 개척해 나갔다.

  가르딘은 집무실에만 앉아 있지 않았다. 농번기의 어려움을 알기에 직접 나와 일을 하기도 했다. 사실은 일부러 직접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영주가 솔선수범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영주님! 그만 하십시오! 저희가 하겠습니다!”

  “아닐세. 영주가 되어서 영지의 주 소출이라고 할 수 있는 밀이 어떻게 익어가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나! 또한 자네들의 어려움도 알아야 개선을 할 수 있고 말이지.”

  ‘아!’

  가르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금을 울렸다. 영지민들은 감동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다. 다시 헤어 나오기 힘든 상태였다.

  가르딘은 가끔씩 보여주기 식 감동 스펙터클 어메이징 이벤트를 했다. 물론 아주 드물게 했다. 너무 많이 하면 사람들이 익숙해진다. 그만큼 감동의 크기가 작아진다. 적당히 힘들 때 한 번씩 서비스를 해주어야 영지민들을 잘 다스릴 수 있다. 그래야 불평불만도 줄어든다.

  ‘허리 부러지겠네.’

  농사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자잘하게 손이 가는 곳이 상당히 많았다. 밀은 뿌려놓으면 그냥 자라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정성이 들어가야 좋은 품질의 밀이 자랄 수 있었다. 적당히 시간을 때운 가르딘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가르딘의 저택은 완공이 되어 주변 조경과 잘 어우러졌다.

  돈을 쏟아 부은 보람이 있었다. 파이트너 상단의 몬타나 지부장이 일 하나는 제대로 처리를 했다. 집이 지어지고 난 후 라이나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가르딘은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라이나의 행복한 모습만으로도 감사했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시원하고... 응?”

  아름다운 집을 바라보고 있던 가르딘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가르딘의 저택에는 총 두 대의 마차가 있다. 그리 고급은 아닐지라도 이동하는 데 쪽팔리지는 않는 정도의 수준이다. 그런데 지금 마차가 세 대가 있었다. 그것도 가르딘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준이 높은 마차였다.

  ‘불길한 느낌인데.’

  가르딘은 불길한 느낌을 받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언제나 가벼웠는데 오늘따라 상당한 무게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르딘이 저택에 도착하자 기사들과 병사들이 군례를 올렸다. 가르딘은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표정들이 왜 이래.’

  기사들과 병사들 모두 넋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이다. 황홀한 모습 같기도 하고, 축복을 받아서 행복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가르딘을 본 후 감동한 표정 같지는 않았다.

  “너희들 왜 그러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마차는 또 뭐고?”

  “영주님을 뵈러 온 분입니다.”

  “누군데?”

  “말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묻는데도?”

  “죄송합니다.”

  이런 황당한 경우는 발키리 영지에 온 후 처음 당해보는 가르딘이다. 기사들은 가르딘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녀석들이 묻는데 대답하지 않는 것이 수상했다. 그렇다고 딱히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영주님이 아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안다고?”

  가르딘의 시선이 마차에 향했다. 마차는 고급스럽지만 제국 고유의 문양이라고 할 수 없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마땅히 기억은 나지 않는 가르딘이다. “알았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그럼 지금이라도 말하겠습니다.”

  “아니다. 신의는 지켜야지.”

  누가 뭐라고 하든 발키리 기사단의 주인은 가르딘이다. 상대가 어찌 되었건 가르딘의 명령이 최우선이었다.

  저녁때가 다 되었다. 라이나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손님도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식당으로 왔다고 했다. 식당으로 들어선 가르딘이 한 여인을 보았다.

  가르딘의 표정이 의아함에서 놀람으로 바뀌었다.

  “안녕하세요!”

  “누구?”

  “저예요. 쉴라!”

  “응? 그런 사람 모르는데.”

  “아! 그러세요, 그럼 저는 이대로 제국으로 가서 황제 폐하를 알현해야겠네요. 누가 절 푸대접했다고 말을 하면 되나요.”

  “쉴라야! 무지하게 반갑구나!”

  쉴라의 모습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어린 모습이 사라진 것은 둘째 치고, 무척이나 아름다워졌다. 아이시런 공주와 비견되는 아름다움이었다. 물론 가르딘에게는 라이나가 전부이기에 다른 여인의 아름다움은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으로 아름다워졌다는 것을 느낀 가르딘이다. 

  상대가 쉴라라는 것을 안 가르딘은 그냥 모른 척해 보았다. 통하나 안 통하나 시험을 해보았더니 역시나 통하지 않는다. 장난이지만 성녀가 황제를 대면하면 장난이 아니게 된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 가르딘이다. 미모만큼이나 말도 능숙해졌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그냥 아저씨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정말?”

  “사실은 조금 불편한 일이 있기는 해요. 그건 있다가 둘이 얘기해요. 지금은 식사를 하는 게 먼저라고 보거든요.”

  “그러는 게 좋겠다.”

  라이나가 시녀들과 같이 음식을 가지고 왔다. 곧 있으면 브리안도 들어올 것이다. 우선은 식사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보는 가르딘이다. 심각하지 않는 이야기라고 해도 아무 이유 없이 신성제국의 성녀가 발키리 영지에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라 판단했다. 가르딘과의 친분 때문에 찾아왔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기에는 성녀라는 신분이 너무 높았다.

  “여보! 성녀님이 우리 가족을 축복해 주셨어요!”

   “아저씨는 좋겠어요. 부인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두어서요!”

  “당연한 말은 하지 마. 그러다 입이 너무 아플지도 모른다.”

  쉴라의 칭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가르딘이다. 쉴라는 가르딘과 라이나가 서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족을 위하는 가르딘과 라이나의 마음이 진정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라이나는 쉴라의 방문을 환영했다. 성녀의 방문을 마다할 사람은 대륙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라이나도 주신인 라이니언을 믿는 사람이었다. 쉴라가 축복을 빌어주자 라이나는 뛸 듯이 기뻤다. 

  “아빠!”

  때마침 브리안이 밖에서 놀다가 들어왔다. 가르딘을 보자 달려들었다. 가르딘이 브리안을 덥석 안았다. 가르딘의 품에서 얼굴을 비비던 브리안이 쉴라를 보았다.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쉴라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짧은 순간에 브리안은 많은 것을 기억에 담았다.

  씨익!

  쉴라가 브리안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예쁘구나!”

  “언니도 예뻐요.”

  “보는 것만큼이나 똑똑하고 현명해 보이네.”

  쉴라의 말에 브리안은 속으로 뜨끔했다. 그녀의 눈빛이 브리안의 뇌리를 관통했다. 그러자 브리안은 자신의 내면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브리안은 쉴라가 보통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이런 종류의 느낌을 브리안은 처음으로 받아보았다. 싫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껄끄러웠다. 

  “언니도 그래요.” 

  “나는 아빠와 잘 아는 언니야. 쉴라라고 해. 우리 잘 지내보자!”

  “브리안이에요. 저도 언니와 잘 지내고 싶어요.”

  쉴라와 마찬가지로 브리안도 잘 지내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쉽지 않음을 직감했다. 약간은 탐색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본 브리안은 시험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브리안은 알고는 있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내용을 넌지시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음, 모르겠는데. 브리안이 좀 가르쳐 줄래.”

  “예? 아! 알았어요.”

  솔직했다.

  브리안이 겪어본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른들은 대부분은 자존심 때문에 어린아이보다는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쉴라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면서 오히려 브리안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다. 어찌 보면 바보 같은 모습이지만 브리안에게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유형이었다. 그것이 당황스럽게 했다.

  브리안은 저도 모르게 아는 것을 가르쳐주고 말았다.

  “우리 딸은 아는 것도 많아. 언제 그렇게 배웠니?”

  “파멜라 언니에게 배웠어요.”

  “역시나 우리 딸은 똑똑해!”

  “나중에 유능한 재상이 될 거예요!”

  “당연하지.”

  가르딘과 라이나는 브리안의 뛰어남에 마냥 기뻐했다. 그에 반해 브리안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쉴라라는 벽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되었다.

  브리안이 오고 난 후 가르딘의 아버지와 식구들, 그리고 록산느와 파멜라까지 모두 모였다.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여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오브라이언 남작과 두 형제는 쉴라가 성녀라는 말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성녀를 눈앞에서 본 것만으로 감격하는 눈빛이었다.

  쉴라는 아버지와 두 형제에게도 축복을 내려주었다. 말 한마디에 불과하지만 축복을 받은 오브라이언 남작과 두 형제는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한 쉴라의 말에는 신성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뜻대로 이루어지는 충만한 기운이었다.

  쉴라의 등장으로 인해 가족 간의 오붓한 식사가 이루어졌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쉴라가 왜 왔는지를 생각하느라 빵이 입구멍에 넘어가는지도 몰랐다. 라이나가 구운 빵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먹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일이 잘 풀리다가 마지막에 똥통에 빠진 기분일세.’

   가족 간의 화목을 회복하고, 영지 경영도 잘 되어가고 있었다. 가르딘의 경지도 상승해서 이제는 밤마다 라이나와 브리안의 혈을 타통시키며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되었다. 가르딘은 라이나의 반노환동 대작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술술 풀리는 상황에서 쉴라가 등장했다. 이기고 있는 판을 갈아엎고 다시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결과가 예상되었다.

  ‘안부를 묻기 위해 왔다고 해줘라! 제발!’

  식사를 마치고 난 후 가르딘은 쉴라와 집무실에서 단둘이 대면했다. 쉴라는 발키리 영지의 특산물이자 특급 상품인 리베시안 차를 조용히 마셨다. 가르딘도 갈증이 나는지 차를 마셨다.

  “영지가 대단히 풍요롭네요. 사람들도 좋아하고 보기 좋아요!”

  “칭찬으로 듣겠다.”

  “칭찬이에요. 가족들도 화목하고 평화로워서 좋아요. 아저씨가 괜히 부럽네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있겠냐.”

  “저는 모든 사람들이 아저씨처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다. 사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한 사람이 행복하면 적어도 세 사람 이상이 불행한 것이 현실이었다. 가르딘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말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대답하는 것보다 나았다.

  ‘성녀라서 그런가.’

  성녀가 되었기에 대륙의 모든 사람을 위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가르딘은 편하게 생각해 버렸다.

  “왜 아무 말도 없어요. 제 말이 틀린가요.”

  “나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사람마다 행복의 감정은 다를 수 있는 것이니, 내가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또한 관심도 없다.’

  이것이 행복이라고 딱 부러지게 정의할 수 있을까! 정답은 없다. 개인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행복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불행이 될 수 있다. 행복은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가르딘은 대륙의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럴 이유도 못 느끼며, 그럴 각오도 없다. 작은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도 지키기 힘든 것이 세상인데, 그 모든 것을 챙긴다는 것은 욕심에 불과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개개인의 행복에도 척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감정이 같을 수는 없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 것 아니에요.”

  “정의를 말하는 것이라면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다.”

  “슬프네요. 아저씨는 세상이 행복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건가요.”

  “불가능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어요.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테니까요.”

  “솔직히 나는 관심 없다.”

  가르딘은 냉정하게 잘라서 대답했다. 더 이상 질질 끌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도 짜증 나는 일이었다. 쉴라는 가르딘의 대답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성격을 감안하면 이 정도도 많이 발전한 것이다.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아저씨도 알고 있잖아요.”

  “설마 신탁이 내려진 것이냐?”

  “맞아요.”

  끄응! 가르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쉴라가 발키리 영지에 왔을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길 바랐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현실이 되어버렸다.

  “영웅을 놔두고 내게 먼저 온 이유는 뭐냐?”

  스필언과 미토스가 영웅이었다. 그 녀석들은 가만히 놔두고 자신을 먼저 찾아온 것부터가 이상했다. 신탁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영웅도 곧 올 거예요.”

  “이곳으로 말이냐!”

  “그래요.”

   “그럼 그놈들이랑 해결하면 안 되냐?”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가 보려던 가르딘의 의도를 쉴라는 박살 내버렸다.

  “안 돼요.”

  “왜?”

  “‘용의 기운을 품은 자가 인도할 것이다’가 신탁의 내용 중에 하나예요.”

  “뭐?”

  ‘제기랄!’

  용의 기운이 천룡무상신공을 의미하는 것은 알겠지만, 만능도 아니고 무엇을 인도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지금 당장 아무 느낌도 없는 가르딘이다. 무얼 어떻게 인도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쉴라의 말이 얼토당토않게 느껴지고 있었다. 

  “어떤 걸 인도하라는 거냐?”

  “어둠이 온전히 세상에 강림할 때 위기는 찾아온다.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세 개의 신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게 신탁이냐?”

  “그래요.”

  “내가 세 개의 신기가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고.”

  “맞아요.”

  “거짓말!”

  “사실이에요.”

  “증거가 없잖아.”

  “주신의 뜻을 부정하지는 마세요.”

  “증거가 있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

  가르딘은 생떼를 썼다. 주신이 거짓말할 리는 없다고 보지만 여기서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가고 싶었다. 마왕과 영웅의 싸움은 네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대륙을 위해 희생하라는 같잖은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죽으면 소용없어지는 것이 세상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죽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다. 물론 라이나와 브리안을 위해서라면 몇 번을 죽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가족과 타인은 가치가 엄연히 달랐다.

  씨익!

  쉴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가르딘은 뜨끔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정 원한다면 보여줄게요.”

  “보여봐라.”

  ‘설마, 아니겠지.’

  가르딘은 쉴라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는지 몰라도 방법이 없다고 단정했다.

  쉴라가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언제 배웠는지 모르지만 쉴라의 입에서 신성한 언어가 나왔다.

  가르딘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하나도 이해 못 했다. 그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 같았다.

  쉴라의 몸에서 성스럽고 고결한 빛이 번쩍이더니 가르딘의 주변을 감쌌다. 가르딘은 놀랐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빛이 영향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고대 삼신기 중에 하나가 바로 드래곤 나이트예요.”

  “그럴 리가!”

  “사실이에요.”

  “드래곤이 가지고 있던 장난감 아니었어!”

  “아니에요. 그건 신의 이름을 빌려 탄생한 고대의 가드너급 에고 타이탄이에요.”

  “믿을... 수 없다.”

  증거를 보여주기 전에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 가르딘이다.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고 있었다. 사실 같지만 여기서 인정하면 정말 빼도 박도 못하고 쉴라의 말을 따라야 한다.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럼 보여줄게요.”

  “보여봐라!”

  -성녀의 말이 맞다.

  “커억!”

  이제까지 한 번도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드래곤 나이트 바자바인이 가르딘에게 말을 걸어왔다.

  “고철 덩어리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나는 고대 삼신기 중에 하나로 대륙을 수호하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태어난 고결한 존재다. 네가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다음부터는 좀더 나를 존중하기 바란다.

  부들! 부들!

  “이런......!”

  ‘개 같은! 고철덩어리!’

  불러도 대답 없던 녀석이 이럴 때는 나와서 흰소리하고 있었다. 차마 쉴라가 보고 있기에 더 이상의 심한 욕은 하지 못했다. 삼신기 중에 하나인 것도 모자라서 말투까지 싸가지를 빵 말아 처먹은 고철덩어리였다. 생각 같아서는 무극칠검식의 무극만검으로 소멸시켜 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다시 나타나기만 해봐라!’

  -때가 되면 다시 온다.

  쉴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사라지자 드래곤 나이트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가르딘은 허탈하기까지 했다. 또한 라이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것이 생각났다. 당시에 너무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것이 기억났다. 라이젠이 그렇게 순순히 인정할 드래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봤어야 했다. 공짜는 먹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탈이 나니 말이다.

  ‘떠넘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자존심 때문에 드래곤 나이트를 공격한 것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제 보니 라이젠에게 한 방 더 먹을 꼴이었다.

  “거봐요. 스스로 인도하게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 거예요. 아직 두 사람이 오지 않았으니까요.”

  “녀석들이 오면.”

  “신기를 찾아 떠나야죠.”

  “위치는 알고 있는 것이냐.”

  “대략의 위치는 알고 있어요.”

  “어디쯤인데.”

  “브라나도 대륙이요.”

  컥!

  순간 주화입마에 걸릴 뻔한 가르딘이다. 브라나도 대륙이 어디인지는 가르딘도 들어서 알고 있다. 

  브라나도 대륙은 북방과는 다른 곳이다. 북해의 최극단에 위치한 섬이다. 섬이지만 대륙이라고 하는 이유는 너무 크기 때문이다.

  브라나도 대륙은 사시사철 얼음으로 뒤덮여 있고, 혹한의 추위가 계속되는 곳이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으로 얼음의 대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바다를 건너야 하지 않냐?”

  “당연하죠.”

  가르딘이 브라나도 대륙에 가기 싫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너무 멀다는 것이다. 북해의 끝에 가서 바다를 건너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신기를 왜 그따위 장소에 숨겨놓은 거냐?”

  “그거야 저도 모르죠.”

  오랜만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가르딘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른 척하기에는 위험했다. 증거까지 보여줬으니 마왕의 강림이 사실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신화 속에 나온 마왕의 능력은 경천동지, 전지전능 그 자체였다. 가르딘의 실력이 최강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지만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하지 못했다. 그만큼 마왕은 강력했다. 

  마왕이 괜히 마왕이겠는가! 일반 상급 마족이 드래곤에 필적하거나 넘어서는 것이 기본이었다.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마왕이 강림한다는 것은 누군가 차원을 연다는 뜻 아니냐?”

  “그래요.”

  “그럼 그 전에 찾아야지.”

  미리 찾아서 마왕이 강림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뜻이다. 그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본 가르딘이다. 막을 수 있으면 미리 막는 게 나았다.

   “찾고는 있어요.”

  “못 찾는단 말이냐.”

  “사실 그래요.”

  “무책임하구나!”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어둠의 세력을 찾으면서 우리도 나름의 대비를 해야 해요.”

  신성제국의 정보력을 이용해서 극비리에 어둠의 존재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어느 누가 마왕의 강림을 돕고 있는지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강림 전에 찾아낸다면 좋겠지만 강림 후에 찾아내면 소용없는 짓이 된다. 따라서 마왕 강림 이후에라도 삼신기를 모아 대항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쉴라는 만일의 사태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신탁의 내용 중에 인간이 궁구하지 않으면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보장도 하지 않겠다는 신의 뜻이었다.

  “신에게 소원을 빌어서 찾아내면 안 될까?”

  “그런 방법이 있다면 내가 먼저 했겠네요.”

  “그렇겠지.”

  마왕 강림전에 찾아내서 박살내는 것이 편하고 좋은 길이지만 신은 그런 길을 가르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개고생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일이다. 안 하면 개박살 나니 가르딘으로서는 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했다.

  “잠시지만 즐겁게 지내요.”

  “지금부터 내가 즐겁게 생겼냐!”

  산통을 다 깨놓고 즐겁게 지내자니 약 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발키리 영지에서 보낸 6개월이 정말 그립게 생겼다. 6개월이 정말 개같이 맑고 화창한 날이 되었다.

  쉴라는 비밀리에 발키리 영지에 도착했다. 소수의 성기사단만 사복으로 입히고 난 후 이동을 하였기에 알고 있는 자는 극히 적었다. 쉴라는 자신의 움직임을 최대한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발키리 영지에 도착한 후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말라고 사람에게 당부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준수한 이목구비를 지닌 청년이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제법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청년은 곧바로 마을의 여관을 찾았다.

  “방 있소?”

  “있습니다.”

  “며칠 동안 묵겠소?”

  청년은 5일치를 미리 계산해 주고, 식사는 나와서 먹는다고 하였다. 방으로 들어간 청년은 옷을 정리하고 난 후 통신구를 꺼냈다. 통신 암호를 풀자 통신구에 빛이 들어왔다.

  “알베이다입니다.”

  -성녀는?

  “가르딘 공작의 저택에 머물고 있습니다.”

  -발키리 영지로 간 이유가 있더냐?

  “아직은 없습니다.”

  -우리를 속이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처리할까요?”

  -이르다. 성녀가 신기를 찾을 때 처리를 해도 늦지 않다.

  삼신기의 존재를 찾아 말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신기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성녀를 죽이게 되면 이후에 어찌 될지 알 수가 없다. 우선은 신기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 그 후에 성녀를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그것보다 가르딘 공작이 맘에 걸리는구나. 그의 이름이 계속 들리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계속 감시하라.

  “예! 다크로드.”

  알베이다는 발키리 영지 곳곳에 도둑 길드의 길드원을 배치해 놓았다. 성녀가 비밀에 출발을 한다고 해도 길드원의 거미줄 같은 그물망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가르딘은 쉴라의 부탁대로 그녀의 방문 소식을 차단해 주었다. 그녀가 발키리 영지에 온 것은 대외적으로 비밀이었다. 가르딘도 그것이 편하기에 부탁을 들어주었다. 괜히 소문이 나봐야 가르딘에게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쉴라는 발키리 영지로 오기 위해서 얼굴 변환 환영 아이템을 다시 사용했다. 가르딘이 준 것은 성녀로서의 각성 때 망가졌었다. 그녀는 환영 아이템을 착용하고 발키리 영지를 돌아다녔다. 물론 그녀의 주변은 성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성기사단장인 카르마 백작은 직접 오지 못했다. 성녀와 기사단장이 한꺼번에 없어지면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부단장인 그란테가 그녀를 수호했다.

  가르딘은 그녀가 발키리 영지를 구경할 수 있도록 기사를 붙여주어 통행에 불편하지 않게 해주었다.

  그녀가 영지 구경을 하는 동안에 가르딘은 다크랜드로 향했다. 가르딘은 최대한 빠르게 라이젠의 레어로 갔다.

  라이젠의 레어에 도착한 가르딘이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젠은 여전히 타이탄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냐?”

  “제게 할 말이 없습니까!”

  “무슨 할 말!”

  갑자기 찾아와서 신경질을 부리는 가르딘이 못마땅한 라이젠이다. 명색이 드래곤인데 이제는 맞먹으려 하는 것 같았다.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가르딘이 한 번 휘젓고 가면 며칠 동안 연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드래곤 나이트가 뭡니까?”

  “타이탄 아니냐! 그걸 물어보려고 온 거냐! 할 일 더럽게 없구나!”

  “그게 답니까!”

  “그럼 뭐가 있느냐!”

  가르딘의 물음에 라이젠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시답지 않은 일로 찾아와서 귀찮게 한다는 투가 역력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가르딘의 말에 라이젠은 당혹감을 느꼈다.

  “고대 삼신기라고 하던데요.”

  “그걸 어떻게......!”

  그 말은 빼버리고 가르딘에게 준 라이젠이다. 고대의 삼신기로서 마왕을 물리치기 위한 전투병기라고 하면 가르딘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명 귀찮다고 되돌릴 방법을 찾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말을 하지 않는 이상 가르딘이 알아낼 방법은 없기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라이젠 님 때문에 제가 지금 삼신기를 찾아 떠나야 합니다.”

  “잠깐! 다른 신기를 찾는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설마 마왕 부활의 전조가 보인다는 소리냐?”

  “마왕이 부활할지 안 할지는 저도 모릅니다. 단지 성녀가 찾아와서 신기를 찾아야 한다고 부탁을 했을 뿐입니다.”

  라이젠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가르딘의 말은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마왕 부활은 대륙의 모든 존재에게 위협이 되는 무서운 일이다. 드래곤이라고 해서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남아 있는 드래곤들도 사실을 알고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심각하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군요.”

  “당연히 심각하지. 이게 무슨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아느냐!”

  “심각하든 말든 제가 이 일에 말려들게 되었습니다. 라이젠 님이 준 그 잘난 드래곤 나이트 때문에요! 이걸 누가 책임집니까! 이게 모두 라이젠 님 때문입니다! 그때 이상한 내기만 하지 않았어도 휘말리지 않았을 텐데!”

  라이젠이 어이없다는 듯이 가르딘을 쳐다보았다. 마왕이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자신이 휘말려서 짜증난다고 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놈은 라이젠의 일생에도 처음이었다. 대륙 역사를 찾아봐도 쉽게 찾지 못할 인간 유형이었다.

  “대륙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그따위로 속 좁게 생각해도 되는 거냐!”

  “이제 알 때가 됐는데 아직도 모르십니까! 원래 저는 속이 좁습니다. 그리고 원인 없는 결과를 운운하여 제 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마십시오. 힘이 있다고 꼭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따위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진 것이 잘못입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하는구나!’

  라이젠은 가르딘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요즘 들어 할 말, 안 할 말 구분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강한 힘에는 반드시 큰 책임이 따른다는 옛 명언이 있다. 하지만 웃기는 말이다. 힘이 강하면 무조건 커다란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가르딘이 보기에 그따위 허울 좋은 말은 개소리에 불과했다. 괜한 영웅심을 가진 놈들이 세상에 드러내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겨난 것뿐이다.

  조용히 힘을 숨기고 산다면 과연 그 힘에 대한 책임이 발생할까! 아닐 것이다. 사람이 어찌 살든 그것은 개인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을 사람들은 대의라는 거창한 명목으로 치장했을 뿐이다.

  대의에 목숨 걸고 죽으면 그건 값진 죽음인가! 후대에 이름이 남겨져 봐야 정작 본인이 행복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어찌할 생각이냐?”

  “후우! 찾아야죠. 그리고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죠.”

  “결국 그럴 거면서 왜 나한테 그따위 개소리를 한 거냐?”

  “한숨이 나와서 그렇습니다. 일이 꼬이려고 하니까, 계속 꼬이는 것 같습니다!”

  가르딘도 그저 말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쉴라는 편하게 찾아왔을지 몰라도 가르딘은 엄청 부담이 되었다. 그녀의 말대로 세상의 존폐가 가르딘의 두 어깨에 달려 있는 것이다. 대의와 희생이라는 두 가지 덕목을 갖춘 이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일지 모르나 가르딘은 아니었다. 가르딘은 그처럼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영웅이 아닌, 그저 보통 사람에 불과했다.

  “네 말대로 억울할 수도 있는 문제다.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할지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면 어찌 되겠느냐. 결국에는 네게도 피해가 올 것이다. 다른 말은 나도 안 한다. 그저 너와 가족만 생각해라! 나도 내 딸의 안위만 지켜진다면 무슨 짓이든 할 테니 말이다.”

  “그 말은 저도 공감합니다.”

  가르딘도 가족의 안위만 무사하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할 것이다. 그것이 설혹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말이다. 세상의 이치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가족의 안위를 챙길 수 있다면 족했다.

  “덤으로 친구들과 영지를 지킬 수 있다면 좋겠군요.”

  “결정을 내렸으면 실행을 해야지.”

  가족을 지키고, 친구를 지키고, 발키리 영지를 지킨다. 그 다음으로 세상을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어쩔 수 없으면 물러서겠다고 다짐한 가르딘이다. 최소한 가족만은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다.

  “그래서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말해 봐라.”

  “만에 하나 제 가족이 위험할 경우 지켜주십시오. 보신의 힘을 발휘해서라도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저는 세상이 무너져도 제 힘을 쓰지 않을 겁니다.”

  가르딘의 각오와 의지가 느껴졌다. 가르딘은 처음부터 이 부탁을 하기 위해서 라이젠을 찾아왔다. 삼신기를 찾기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 발키리 영지를 비워두고 움직여야 하는 가르딘으로서는 부담이 되는 일이다. 정말로 마왕을 부활시키려는 놈들이 있다면 가르딘의 가족들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대군이 움직이는 전쟁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막아낼 수 있지만 작정하고 암습을 펼치면 막아낸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가르딘은 그것이 불안했다. 소수의 암살자들이 가족을 노리면 보통의 방법은 소용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가르딘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알겠다. 내 힘을 발휘하는 한이 있어도 네 가족을 지키마.”

  “고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무엇이냐?”

  “브라나도 대륙으로 공간이동 좀 시켜주십시오. 그곳까지 배를 타고 가기는 너무 멉니다!”

  성녀를 데리고 그 먼 곳까지 개고생하며 가고 싶지는 않았다. 공간이동을 하면 금세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사람은 편한 것에 익숙해지면 다른 것은 더 힘들어한다. 가르딘도 마찬가지였다. 쉬운 방법을 두고 돌아가는 것은 사양이었다.

  “음!”

  라이젠이 곤란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미안하지만 브라나도 대륙은 가보지 못해서 공간이동을 시켜주지 못하겠다.”

   “예? 그 나이 먹도록 세상을 다 돌아보지 않고 뭐 한 겁니까?”

  드래곤의 수명은 1만 년이 넘어간다. 그동안 인간 세상을 유희 삼아 돌아다니는 것이 드래곤들의 유일한 취미활동이었다. 가르딘도 드래곤이 안 가 본 곳이 없을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레어 안에서 평생을 방콕하는 드래곤은 없다고 보았다.

  “드래곤이 꼭 싸돌아다니기만 하는 줄 아느냐?”

  “그럼 그 긴 세월 동안 뭐 했습니까!”

  “딸 키웠다.”

  “인정.”

  딸이 탄생하기 전에는 아내와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라이젠은 젊었을 적을 제외하고 유희를 거의 하지 않았다. 1천 5백 살 청춘에 아내를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드라이스 산에서만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인 상식이 있는 상식이라면 믿지 못하겠지만 가르딘은 인정해 주었다.

  “그럼 태워주십시오.”

  “뭐?”

  “변신해서 태워달라고요.”

  “내가 네놈의 개인 마차냐! 태워주고 말고 하게!”

  “하긴, 그놈들이 이상하게 볼 수 있겠군요.”

  여정에 가르딘만 가는 것이 아니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도 같이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드래곤이 등장하면 가르딘을 이상하게 볼 수도 있었다.

  “네가 더 이상해!”

  “그게 뭐가 이상합니까!”

  “어떤 드래곤이 사람을 등에 태우냐! 나는 자존심도 없는 드래곤인 줄 아느냐!”

  “그깟 자존심, 한 번 밟히면 그게 그겁니다. 알 만큼 나이도 잡수신 분이 그것도 모릅니까!”

  “모른다, 이놈아!”

  대륙의 역사를 따져봐도 사람을 등에 태운 드래곤은 한 마리도 없다. 물론 위급하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고작 귀찮다고 태워달라는 놈을 태우고 싶지는 않았다.

  “정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지금부터는 나도 바쁘겠구나!”

  “제가 더 바쁩니다.”

  “마왕이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손 놓고 있을 드래곤이 있을 것 같으냐!”

  라이젠은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는 드래곤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대부분의 드래곤은 개인적인 사생활을 소중히 생각하기에 함께 움직이지는 않는 게 보통이지만 마왕의 부활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드래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준 것은 모두 마왕 때문이다. 그렇기에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보다 부활하기 전에 막을 방법은 없습니까?”

  “내가 신이냐, 모든 것을 다 알게?”

  “역시 그렇군요.”

  “네가 잔머리 대마왕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잔머리만 쓴다고 해결이 될 것 같으냐.”

  “아무튼 드래곤들이 오거든 찾아나 보라고 하십쇼. 운 좋으면 마왕이 강림하기 전에 놈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하다가는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가르딘이다. 어떻게 해서든 마왕이 강림하기 전에 막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다. 우리라고 마왕이 강림하기를 원하는 줄 아느냐!”

  “그럼 저는 라이젠 님만 믿고 갑니다.”

  가르딘이 돌아가고 난 후에도 라이젠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성녀가 각성하고 신탁의 예언이 점점 가시화되어 가고 있었다. 가르딘이 심각하게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정말 심각한 일이었다. 종말의 시기가 다가올 수도 있는 일이다.

  라이젠은 마력을 개방한 후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는 드래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가르딘이 못 미더운 라이젠이다. 가족이 위험하면 세상이 위험하든 말든 가장 먼저 빠져나오려고 할 것이다. 라이젠의 책임이 막중해졌다. 가르딘의 가족을 지키지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렇게 됐나!’

  고룡급 드래곤이 인간의 보모 역할을 하게 생겼다. 가르딘을 만나고 나서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쉴라가 발키리 영지에 온 후 정확히 15일이 흘렀을 때 스필언과 미토스가 찾아왔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되도록 비밀리에 움직였다. 두 신성은 발키리 영지에 오기 전에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을 찾았다. 두 사람이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대공가의 힘이 필요했다. 성녀의 호출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에게만 말했다.

  처음에는 미심쩍어 하던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도 성녀의 호출이라는 것을 알기에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발키리 영지에 와서 가르딘을 찾았다.

  “그새 많이 성장했구나.”

  “모든 것이 공작님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다 너희들의 노력 때문이다.”

  황궁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성장한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가르딘은 녀석들이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알았다. 두 신성의 실력이 그랜드마스터 초급에 이른 것 같았다.

  가르딘도 신마의 기연이 있기 전까지는 그랜드마스터가 검의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랜드마스터가 바로 절대지경의 초입을 의미했다. 지금부터의 깨달음이 중요한 시기였다.

  ‘고작 3년만에 그랜드마스터라!’

  신탁의 뜻대로 스필언과 미토스는 영웅의 그릇을 채워가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가르딘과의 만남으로 빠른 성장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스필언과 미토스의 재능과 노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새삼 신의 계시가 무섭다고 느껴지는 가르딘이다. 

  ‘어찌 된 게 하나도 틀리지 않고 예언대로 흘러갈 수 있는 거지.’

  참 신기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무수히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그 많은 변수를 고려해도 정해진 원칙을 벗어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니언의 계시는 차근차근 진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르딘은 불안했다. 예언은 마왕의 부활과 영웅의 탄생이 끝이다. 이후의 일은 어찌 될지 예언되지 않았다. 영웅이 마왕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다.

  ‘하려면 끝까지 해피엔딩으로 계시를 해야 할 것 아니야!’

  모호하고 불완전한 계시를 왜 내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지전능하다면 마지막까지 정확한 계시를 내려서 사람 불안하게 만들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것과는 다르게 가르딘은 대범하게 행동했다.

  발키리 영지까지 온 두 사람에게 하루의 휴식을 주고 난 후 집무실로 따로 불렀다. 집무실에는 쉴라도 불렀다.

  “여기까지 온 이유를 대략은 알고 있나?”

  “그저 성녀님의 요청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성녀가 보낸 서신은 간단한 내용이었다. 두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용은 만나면 얘기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두 사람도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의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쉴라가 두 신성에게 사실을 말해 주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에도 스필언과 미토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들이 생각한 것 이상의 내용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외부로 흘러나가면 대륙의 혼란은 불을 보듯 뻔했다.

  “엄청나군요.”

  “그래.”

  “이제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답을 원하는 두 신성이 가르딘에게 물었다. 가르딘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찾아서 막아야지.”

  “그렇군요.”

   스필언과 미토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천재들도 마왕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네놈들도 사람이었구나!’

  이제까지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 같은 놈들이라 여기고 있었건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스필언과 미토스도 희로애락을 아는 사람이었다. 천재라고 해서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멈추지 않고 노력해서 극복해 나갈 뿐이었다.

  “두려우냐.”

  “그렇습니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주신께서는 헤쳐 나가지 못할 일을 내려주시지 않는다. 너희들이 할 수 있기에 선택을 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쉴라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가르딘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이니언께서는 극복하지 못할 시련은 주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가르딘의 전폭적인 믿음에 감격했다. 그리고 안도했다. 믿음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두려울 것은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잠시 흔들렸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희생이라 생각하지 마라. 세상의 어둠을 걷어내는 숭고한 일이라고 여겨라.”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그러면 됐다.”

  가르딘의 대범함이 빛을 발했다. 표정에는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반면에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가르딘의 표정만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두렵다. 불안하고 무섭다. 그리고 귀찮다. 하기 싫다!’

  모든 짜증이 한데 모여 있었다.

  쉴라, 스필언, 미토스와 얘기를 나눈 후 혼자 있게 된 가르딘은 언뜻 스쳐 간 일이 기억났다. 마왕의 강림이라는 엄청난 일 때문에 잊고 있었던 것이지만 분명 중요한 단서가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고 있었던 것을 보면 가르딘이 그동안 너무 평화롭게 지냈다는 증거였다.

  “이제야 생각나는 나도 멍청한 건가!”

  마왕의 강림을 위해서는 인간계의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크로드 알케인.”

  다마트 황자는 분명 자신의 입으로 흑마법사라고 하였다. 인간 세상에 9서클 마법사가 있는 것도 대단한 것이다. 보통의 존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흑마법은 어둠의 근원적인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왕의 강림에 가장 근접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가르딘은 그 즉시 통신구를 꺼냈다.

  “라이젠 님!”

  -또 무슨 일이냐?

  “제가 안 한 말이 있는데 갑자기 생각나서요.”

  -말해 봐라.

  가르딘은 그 즉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라이젠에게 전했다. 듣고 있던 라이젠의 언성이 높아졌다. 지금까지 이토록 중요한 일을 감추고 있던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이런 중요한 얘기를 왜 지금 말하는 거냐?

  “까먹고 있었습니다.”

  -뭐? 이런 미친놈을 봤나!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제 나이가 이제 마흔입니다!”

  -지금 내 앞에서 나이 타령이냐!

  “드래곤하고 인간하고의 나이관념이 다르지 않습니까! 제 나이쯤 되면 다 그렇습니다. 아무튼 드래곤들에게 어둠의 길드를 조사하라고 하십시오.”

  -드래곤이 네 꼬붕이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게!

  “그래서 안 할 겁니까! 그럼 나도 배 째버립니다.”

  -한다! 이놈아!

  라이젠은 신이 별 미친놈에게 신탁을 내렸다고 여겼다. 어떻게 저런 놈이 신탁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사람을 선택하려면 성격 좀 보고 선택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가르딘은 라이젠과의 통신을 끝내면서 조금은 기대를 했다. 그놈들이 마왕강림을 하는 놈들이라면 잡아서 일망타진해 버리면 되었다.

  ‘걸리기만 해봐. 그냥 다 쓸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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