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2/93)

   @@[ 제3장 개같이 평화로운 나날@@]

  황제의 즉위식이 있은 지 20일이 지나갔다. 가르딘은 그동안 발키리 영지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여유롭게 지냈다. 급한 일은 모두 카니발 백작에게 위임해 놓았다. 스스로도 바쁘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 유형이었다. 가르딘과는 정반대의 타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르딘은 가끔씩 아이시런 공주의 부름을 받고 말상대나 해주면서 시간을 때웠다. 그 누구보다 한가로운 사람처럼 행동했다. 제국전 이후 바빴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카니발 백작은 가르딘이 명한 대로 30명의 인재들을 선별해 놓았다. 가르딘은 그들을 일일이 만나서 능력과 성정을 테스트해 보았다. 모두 제법 쓸 만한 녀석들이었다. 카니발 백작의 눈썰미가 대단했다. 지위만 주어진다면 맡은 일을 처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침내 황도의 일정이 모두 끝이 났다.

  떠나기 전날에 가르딘은 카니발 백작을 황궁 안에 있는 연무장으로 은밀하게 불렀다. 연무장은 사람들이 오지 못하도록 사전 차단하였다. 그 입구를 투르가 막고 있었기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들어가지 못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겁니까?”

  “그런 건 아냐. 단지 한 번 보려고.”

  “무얼 말씀하시려는 것인지?”

  가르딘의 뜬금없는 말에 카니발 백작은 의문이 들었다. 단지 얼굴을 보자고 연무장으로 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긴히 할 말이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요즘 들어 실력이 멈췄지.”

  “그걸 어떻게?”

  “보면 알지.”

  카니발 백작은 현재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자였다. 가르딘이 오러마스터라고 해도 눈으로만 보고 실력을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할 수는 없지.”

  카니발 백작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르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카니발 백작의 전신을 긴장시켰다. 순간적으로 오러를 끌어올려 대처를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가르딘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에 절로 위축이 되었다.

  “공작님은 제 예상보다 더 무서우신 분이군요!”

  “꼭 그렇지도 않아.”

  “제가 느끼기에는 괴물처럼 보입니다.”

  “사람을 괴물이라고 하면 실례일세.”

  “그래도 제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가르딘은 웃고 있지만 카니발 백작은 웃지 못했다. 이런 위압감은 아무에게나 흘러나오지 않는다. 절대자의 반열에 들어서야만 가능한 기운이다. 물론 카니발 백작이 가르딘의 기운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럴 실력은 아직 되지 못했다.

  “실없는 말은 필요 없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자네의 실력은 나이에 비해서는 확실히 대단해. 하지만 현재의 실력으로는 확신을 할 수가 없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할 거야.”

  “그건 저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련을 하려는 것이지.”

  “저도 대련과 실전이 중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설마 그런 것도 모를 것이라 보신 겁니까!”

  “물론 알지. 하지만 나하고 한 대련은 없었잖아.”

  가르딘의 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확실히 마스터 급 기사와의 대련은 카니발 백작도 없었다. 그렇지만 고작 하루 만에 실력이 상승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단한 노력과 오랜 수련만이 실력을 상승시키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믿음이 안 가겠지만 네 뒤에 있는 녀석도 내 가르침을 받고 한 단계 이상 올라섰지.”

  “시끄러! 네놈 때문에 죽을 뻔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열 뻗친다!”

  흠칫!

  카니발 백작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필리언이 태연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언제부터 등 뒤에 서 있었는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가르딘의 위압감에 위축이 되었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필리언이 등 뒤를 기습했다면 자신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

  카니발 백작은 필리언이 자신과 동급이 아니면 그보다 아래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필리언은 자신의 감각을 감쪽같이 피했다. 필리언의 실력이 마스터 급에 준하지 않을까 짐작이 되었다.

  “어때, 이제 믿음이 가지?”

  끄덕!

  카니발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검을 뽑아.”

  “예!”

  카니발 백작이 검을 뽑자 가르딘도 검을 뽑았다. 가르딘은 검을 아래로 내리며 여유로운 자세를 취했다.

  “언제든지 덤벼.”

  “방심하면 후회하실 겁니다.”

  “그건 실력이 대동소이할 때나 하는 소리지.”

  가르딘과 다르게 카니발 백작은 신중했다. 실상 가르딘의 실력을 눈으로 본 것은 몇 번 없었다. 그것도 일반 병사들을 상대로 검을 휘두를 때뿐이다. 하지만 상대는 마스터 급 기사였다. 방심했다가는 반항 한 번 못해 보고 황천길로 갈 수 있었다.

  ‘신중하되 최선을 다한다!’

  가르딘의 전신은 빈 곳이 너무 많았다. 어느 곳을 찔러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어느 곳을 찔러도 소용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더 들었다. 카니발 백작이 망설이자 가르딘이 심드렁하게 소리쳤다.

  “대련하다 밤새겠다.”

  “그러게 졸려서 하품이 다 나온다.”

  가르딘의 말에 필리언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카니발 백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대련이다. 고수가 하수에게 검의 길을 베풀고 있다. 하수는 망설여서는 안 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쳐야 하는 중요한 기회였다.

  “히얍!”

  가르딘을 향해 뛰어오던 카니발 백작이 일순간 검을 길게 뻗어왔다. 한 발의 도약에 힘을 실어 가속력을 높인 것이다. 일직선으로 뻗어오는 검세가 제법 날카로웠다. 속도 면에서는 사이론보다 훨씬 빨랐다.

  슈슈슈슉!

  카아앙!

  검과 검이 부딪혔다. 손아귀가 찢길 정도의 반탄력을 느낀 카니발 백작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충격이 예상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정신적인 타격은 더 컸다.

  “이럴 수가!”

  가르딘의 찌르기가 카니발 백작의 찌르기를 정면으로 받은 것이다. 검과 검의 작은 교차점을 정확하게 가격하여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처음부터 노린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완벽한 후발제인의 묘리였다. 먼저 가격한 자의 기를 꺾는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카니발 백작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랐다. 가르딘의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그도 미처 몰랐다.

  ‘공작님의 실력이 이 정도로 대단했단 말인가!’

  카니발 백작은 극성으로 오러를 운용하였다. 한 번의 공격으로 가르딘의 실력이 짐작이 가지 않을 만큼 높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카카카캉!

  오러와 오러가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가 연무장 안을 울렸다. 상당히 빠르고 정교한 검술의 교본을 보는 것 같았다. 카니발 백작은 가르딘의 검격이 자신의 검격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한 번 보고 검술의 특징을 파악한 것이 틀림없었다. 놀람도 여러 번 겪다 보면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이었다.

  카니발 백작은 현재 정신을 다른 데 팔 수 없는 상태였다. 가르딘의 검세가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좀더 간격이 짧고, 군더더기가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카니발 백작이 익히고 있는 샤크 검법의 오의가 가르딘의 검에 녹아들고 있었다.

  ‘인정할 수 없다!’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샤크 검법은 그 어떤 검법보다 빠르며 강력하다고 믿었다. 오랜 시간 수련한 자신보다 가르딘이 더 능숙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가르딘은 지금 오러의 수준도 카니발 백작과 비슷하게 맞추고 있었다. 순수하게 검술 실력으로 밀리고 있으니 카니발 백작은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좀 더 짧게, 타격점의 폭발력을 높여야 돼!’

  카니발 백작은 끊임없이 고민하여 검을 뻗었다. 오랜 시간 자신이 익히고 있었던 검격의 범위를 벗어나면서도 위력은 더 강해지고 있었다. 직선의 움직임에 중점을 두면서도 부딪쳤을 때에 폭발점인 힘을 싣는 데 집중했다.

  파아아앙!

  검과 검이 충돌하는 소리가 점점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오러의 폭발적인 힘이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르딘의 검이 카니발 백작이 나아갈 요소요소의 길을 조금씩 막으면서 뚫을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지만 궁구하지 않고서는 절대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막이었다.

  카니발 백작은 끊임없이 방법을 찾았다.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할수록 그의 검은 빠르고 폭발적으로 변했다.

  우우우우우우웅!

  기운과 기운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그래, 이 길이야!’

  어느 순간 카니발 백작은 희열을 맛보았다. 검이 뻗어 가는 궤적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쾌활하고 자유로웠다. 마치 검과 자신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슈슈슉! 차차차착!

  검의 충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르딘이 카니발 백작의 검격 밖으로 빠져나왔다. 강맹하게 회오리치는 기운의 소용돌이 속에서 쉽게 빠져나온 가르딘도 대단했다.

  카니발 백작은 홀로 미친 듯이 검을 뻗었다. 검과 하나가 되어 몰아지경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지금까지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던 필리언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검을 수련하는 자에게 저런 방법으로 가르쳐 준다면 어느 누구라도 상승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그런 방법이 있으면서 우리는 왜 그렇게 무식하게 했냐?”

  “그때는 나도 깨닫지 못했거든.”

  “뭐?”

  “나도 요즘 들어 얻은 심득이야. 또한 이 방법도 일정 수준 이상에 올라서야 가능한 방법이다. 카니발 백작 정도가 되지 않으면 소용없는 방법이란 말이지.”

  “그런가?”

  “사람을 좀 믿어라.”

  “아닌 것 같은데.”

  필리언은 심증만 들 뿐 더 이상 따가지 못했다. 가르딘의 말대로 아무나 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지를 개척하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방법이다.

  가르딘은 필리언의 날카로운 지적에 순간 움찔거렸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네게는 쉽게 가르쳐줄 수 없지. 암암!’

  당시나 지금이나 가르딘이 맘먹으면 쉽게 성장할 수도 있었다.

  “후우우!”

  20분 이상 미친 듯이 휘둘러 대던 카니발 백작이 검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심전력으로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도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뻗어 나오는 기운을 갈무리한 카니발 백작은 가르딘을 새롭게 보았다. 그가 보여준 길로 인해 자신은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었다. 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가르치지도 않는 비기나 마찬가지였다. 검을 수련한 자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왜 더 존경스럽냐.”

  “그렇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말이 아니다. 마음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진정한 믿음이었다. 가르딘이 베풀어준 것은 검을 수련하는 자에게는 천금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좀 전의 위압감과는 다른 무게감 없는 표정이지만 카니발 백작은 절로 고개가 수그려졌다. 가르딘의 배포에 감화된 것이다.

   “익스퍼트 최상급과 마스터 급 사이에 걸쳤군.”

  “마스터가 되지 못해 송구합니다.”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되겠지.”

  황도에 있으면서 카니발 백작에게 정적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다. 만일의 경우에 목숨을 지켜주는 것은 다른 누구의 힘도 아닌 스스로의 힘이다. 결국 검이 자신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다.

  “성심을 다해 공작님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너의 실력이라는 것을 명심해.”

  “명심하겠습니다.”

  카니발 백작의 실력을 상승시키고 난 후 가르딘은 황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제부터 홀가분하게 발키리 영지로 돌아가면 되었다. 카니발 백작이 선발한 인재들은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의 눈이 있기에 되도록 따로 행동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발키리 영지에 오기로 약속이 되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따라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황궁의 내부적인 사정이 있기에 시간을 뒤로 미루었다고 알려왔다. 그 사정을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다만 사정이 심각해서 오랫동안 황궁에 처박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람이 아닐 수 없다.

  발키리 영지로 가는 날, 하늘은 높고 청명했다. 시린 바람이 몸을 차갑게 만드는 것만 빼고는 돌아가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 날씨였다.

  가르딘이 짐을 꾸리고 출발할 때 필리언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무엇이 불만인지 입이 반이나 튀어나왔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저기를 봐라.”

  ‘응?’

  가르딘의 시선이 투르에게 향했다. 투르의 주변에 상당히 많은 젊은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투르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모습들이었다.

  그에 반해 투르는 별반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역시 여인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순둥이들의 비애가 아닐 수 없다.

  나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능력이 되어야 한다.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폼을 잡아도 따라주는 여인이 없다. 능력 없는 놈을 뭘 믿고 따르겠는가! 사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멋진 외모보다는 능력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같이 핸섬하고 멋진 중년남보다 저렇게 근육만 큰 애송이가 더 인기가 많다니 말이 되냐!”

  “그게 뭐 어때서. 투르 정도면 인기가 많을 만하지.”

  일단 나이가 어린 데다가 능력도 좋아 보인다. 겉으로는 포악해 보이는데 그게 오히려 야성적인 매력을 발산하였다.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일단은 그러한 매력이 조화를 이루어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미소 한 방이면 모든 여인을 보내버릴 수 있었는데.”

  “하긴, 네가 인기가 대단하기는 했지. 이제는 다 예전 얘기가 되어버렸구나!”

  “이럴 리가 없는데!”

  “현실을 인정해, 그래야 더 슬프지 않아.”

  “너나 인정해라! 나는 못하겠다!”

  “그나마 결혼을 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 아무리 그래도 조강지처는 남아 있잖아.”

  “그...런가!”

  인기를 잃은 중년남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사명감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되었다. 가르딘은 필리언이 나대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뒤에서 필리언의 소소한 사생활을 은밀하게 흘렸다. 여인들은 그 정보를 듣고 필리언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가르딘의 계략이었다.

  또한 필리언의 부인인 비비안의 간곡한 부탁이기도 했다. 발키리 영지를 떠나올 때 필리언이 딴 짓 하지 못하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가르딘은 생전 처음 받아보는 비비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가정에 충실하게 도와주는 것이 친구의 몫이지.’

  비비안도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가르딘이 라이나에게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비비안은 필리언의 바람기를 잡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다짐했다. 부인으로서의 오기가 발동되었다.

  가르딘이 떠날 때 카니발 백작과 두 신성이 배웅을 나왔다. 카니발 백작에게는 황도에서의 생활을 신중하게 하라고 당부를 했다. 또한 두 신성에게는 아직도 검의 길은 멀었으니 불철주야 노력하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말을 하면서도 가르딘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가르딘의 말이 아니라고 해도 스스로 깨닫는 놈들이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것이다.

  “후일 또 보자.”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오스란의 검문소에서 그들과 헤어진 가르딘은 곧장 발키리 영지로 향했다. 필리언과 투르, 고트와 사이론, 창기병이 그 뒤를 따랐다. 멀어지는 가르딘의 뒷모습을 카니발 백작과 두 신성은 말없이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가르딘은 스승이자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준 은인이었다.

  한편, 아이시런 공주는 심각한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녀에게 혼인 신청이 들어왔던 것이다. 이번 러쉬 황제의 즉위식이 있은 후 각 왕국의 왕자들이 그녀를 보고 넋이 나가버렸다. 상사병이 걸릴 정도였다.

  혼인에 관심이 없던 그녀로서는 짜증이 나는 일이 되었다. 일일이 왕자들을 만나 거절하는 데만도 진땀을 빼야 했다. 일단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되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며 시간을 벌었다. 

  아이시런 공주의 나이가 이제 열여덟 살이 되었다. 겨울이 지나면 열아홉 살이다. 혼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다.

  왕자들의 적극적인 구애는 러쉬 황제의 귀에도 들려왔다. 러쉬 황제는 이렇다 할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재며 아이시런 공주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시런 공주의 어머니인 2황후 조안나가 그녀를 찾아왔다.

  “왕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니?”

  “그건 아니에요. 아직 그럴 생각이 없을 뿐이에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니?”

  아이시런 공주는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가르딘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대공가의 공자들도 괜찮던데.”

  “그 두 사람이 싫지는 않아요.”

  “그럼 추진하는 것이 어떠냐? 네 나이면 혼인하고도 남는 시기지 않느냐!”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을 선택하면 앞으로의 정국이 어찌 될 것 같아요. 서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거잖아요.”

  “음. 네가 그 정도까지 생각하는지 몰랐구나.”

  조안나 황후는 무척이나 놀라는 눈치였다. 어린 줄만 알았던 아이시런 공주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니 아이시런 공주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두 대공가의 세력이 비슷하다. 하지만 황족과 혼인을 하게 되면 어느 한쪽으로 힘의 균형이 쏠리게 된다. 간신히 안정을 찾은 내정이 또다시 혼란스럽게 될 수도 있다. 지니언의 죽음을 이제 막 털어낸 조안나 황후는 또다시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가 왕자들의 구애를 모른 척 했구나.”

  “오라버니는 이미 알고 있었을 거예요.”

  러쉬 황제는 되도록 두 대공가와 척을 지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신중하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다. 그래서 아이시런 공주에게 혼인에 대한 부담감을 주지 않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스필언과 미토스 둘 다 너무 뛰어나다는 것이다.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이 부족하다면 어찌해 보겠지만 신은 두 신성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였다.

  아이시런 공주는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당장은 두 왕국의 왕자들을 적당한 구실로 돌려보내야 했다.

  ‘발키리 영지에 가야 하는데.’

  러쉬 황제에게 말해서 바로 떠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시간을 두고 혼사 문제를 해결하고 난 후에 떠나야 뒤탈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르딘이 떠나는 것을 두고 봐야 했다. 아이시런 공주는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가르딘은 발키리 영지에 도착했다.

  허연 먼지가 그들의 옷에 잔뜩 묻어 있었다. 바람에 날려 머리카락도 헝클어진 상태다. 가르딘의 뒤를 따라온 필리언, 투르, 고트, 사이론, 창기병까지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가르딘을 제외한 그들 모두 상당히 지쳐 보였다.

  “이 무식한 놈아! 그 먼 길을 쉬지도 않고 오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냐!”

  “영지를 돌보는 일은 미룰 수 없는 일이지.”

  “웃기고 있네. 네 부인 때문에 우리까지 개고생한 것을 모를 줄 알아!”

  “알면 입 닫아라.”

  가르딘은 라이나를 보기 위해서 황도에서 발키리 영지까지 쉬지 않고 내달렸다. 풍찬노숙은 기본이고, 하루 종일 말을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도에서의 지긋지긋한 생활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라이나의 품에 돌아오고 싶었다.

  그로 인해 가르딘을 제외한 수하들이 엄청나게 고생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태였다. 피곤이 절로 밀려오고 있었다. 생기가 돌고 있는 사람은 가르딘뿐이었다.

  필리언과 투르, 사이론, 고트는 가르딘의 팔불출 행위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어느 누가 저런 모습을 보며 공작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공작의 품위는 가르딘이 다 깎아먹고 있었다.

  “명색이 공작이 됐으면 품위를 좀 지켜라!”

  “공작은 사람 아니냐! 품위는 개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는 너무 싸 보여.”

  “괜찮아. 너만 그렇지. 누가 감히 내 앞에서 그딴 말을 할 수 있겠냐.”

  동기들을 제외하고 가르딘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 있는 자들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영지의 입구에 들어서자 경비병들이 가르딘을 알아보았다. 가르딘이 공작이 되었다는 소식은 발키리 영지에까지 퍼져 있었다. 영주가 공작이 되니 영지민들의 위상마저 높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영주님께서 돌아오셨다!

  소식은 금세 퍼졌다. 가르딘이 돌아오자 영지는 예전보다 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가르딘은 돌아오자마자 라이나에게 달려갔다.

  “여보!”

  “당신!”

  덥썩!

  주변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라이나를 덥석 안고 들어올렸다. 항상 들어봤지만 새털처럼 가벼웠다. 라이나는 이날을 위해서 식이요법과 운동을 통해 몸매관리를 열심히 받았다.

  “여전히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워!”

  “당신도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요!”

  “당신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축복이야!”

  “저도 그래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화가 서슴없이 내뱉어졌다.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처지였다. 손과 발은 계속 따로 놀고 있었다. 더 들었다가는 오그라들어서 다시 펴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요즘 들어 체중이 늘어서 걱정이에요.”

  “아니야, 당신은 아직도 새털 같다니까!”

  “이제 나이가 들었잖아요. 주름도 생기는 것 같은데!”

  그것이 라이나의 가장 큰 걱정이었다. 가르딘은 늙지 않고 있는데, 자신만 늙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고작 깨알 같은 주름 하나 생긴 것에 불과하지만 라이나에게는 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라이나는 가르딘에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고 싶었다.

  ‘라이나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니!’

  가르딘은 상당히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고단하고 힘들 것 같아서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방법을 달리 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라이나에게는 영과, 영물, 영단을 주고! 내공을 가르쳐서 기본을 만든 다음에 격체전공을 통해 환골탈태를 시켜야지!’

   가르딘의 생각은 일견 간단해 보였다. 하지만 기본공을 토대로 내공을 주입하여 기운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시전자의 막대한 역량과 내공이 필요하다. 가르딘이 아니면 시전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일단 가르딘이 구상한 대로만 되면 기본적인 내공이 오러마스터에 준할 것이다. 평생을 수련해도 익스퍼트조차 되기 힘든 기사들에게는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모를 유지하려면 주안술은 필수고, 나중에 반로환동도 생각해 봐야겠어! 아니지. 그냥 늙지 않는 거야!’

  가르딘의 생각은 점입가경이었다. 갈수록 태산이 아닐 수 없다. 라이나를 위해서라면 신의 경지까지 이를 작정이다. 오늘의 다짐이 가르딘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르딘이 멈출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해 준 것이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것들이 모두 확 바뀌게 될 것이다.

  “당신은 걱정 말아! 내가 다 해결해 줄 게!”

  “세월을 어떻게 막아요?”

  “당신 나 못 믿어!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호호! 그럼 당신만 믿을게요!”

  “우리 함께 천 년 동안 살자고!”

  “그래요.”

  가르딘이 하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진짜 천 년 동안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줍게 웃는 라이나의 모습을 보자 가르딘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 저 앙증맞은 입술에 입을 맞추지 않고서는 욕망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라이나는 이날을 위해서 입술을 촉촉하게 가꾸었다. 사내의 욕정을 자극하는 아름답고 자극적인 입술이 아닐 수 없었다. 라이나에게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마저 잊어버리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가르딘이 라이나의 얼굴에 가까이 가려 하자.

  “커흠!”

  주변에 있었던 가족들 중에 한 사람인 오브라이언 남작이 헛기침을 했다. 아들이 설마 저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다. 

  라이벨과 류카이젠도 문화적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본 가르딘은 냉정하고 잔인하며, 무섭도록 철저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라이나 앞에서는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어떻게 저런 동생이 자신들과 같은 피를 타고났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아...버지.”

  “네가 그런 성격이었더냐?”

  “제가 이럴 수밖에 없음을 라이나를 보면 딱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내가 본 것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구나!”

  오브라이언 남작은 가르딘의 팔불출 같은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알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과거의 일이 떠올라 미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정에 굶주려 있었던 것이냐! 내가 정말 못할 짓을 하고 말았구나!’

  가르딘이 라이나에게 쏟아 붓는 애정이 과거의 애정결핍에 의한 것으로 본 오브라이언 남작이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정신을 차리고 농담조로 물었다.

  “너 정말 가르딘이 맞냐?”

  “그럼 제가 가르딘이 아니고 뭡니까!”

  “참, 할 말 없어지게 만드는구나!”

  가르딘은 아버지와 두 형의 가족들에게 겉치레식의 안부를 물었다. 라이나와 브리안을 제외하고 크게 관심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냉정하지만 가르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진리였다.

  “네가 공작이 되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저는 작위 따위는 관심 없습니다. 그저 우리 가족이 화목하게 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야지.”

  “오랜만에 가족끼리 식사나 하지요.”

  “그러자꾸나!”

  가르딘이 잠시 돌아보았다. 달려 나와야 할 브리안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브리안은?”

  “놀러 나갔어요. 저녁때 들어올 거예요.”

  가르딘은 공부도 중요하지만 한창 때는 잘 노는 것이 더 좋은 교육이라고 여겼다. 여자이기에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되도록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하게 해줄 것이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까지 브리안은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대장으로서 브리안은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힘으로 제압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브리안의 카리스마에 점령당하고 있었다. 브리안의 카리스마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만들었다.

  “지금까지 배운 마법을 아무한테나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

  “왜?”

  “마법은 위험한 거야. 자칫 사람이 다칠 수도 있어. 제어되지 않는 힘은 스스로를 힘들게 할 수 있어.”

  “그렇구나!”

  브리안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아이들이 생각할 수 없는 점을 지적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나중에 내 꼬봉들이 될 놈이나 잘 가르쳐야지.’

  아이들 중 몇몇은 마나의 적응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아서 안젤리카에게 마법 수업을 받고 있었다.

  브리안은 뒤늦게 마법을 배웠지만 아이들을 앞지른 지 오래였다. 파멜라의 진법과 안젤리카의 마법, 가르딘의 무력까지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당장의 무력만 해도 아이들 전체가 덤벼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일반 장정이라고 해도 브리안의 고사리 같은 손에 맞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점점 괴물같이 변해가는 브리안이다.

  브리안은 제국의 두 신성에 비견되는 천재였다. 또한 그들이 가지지 못한 혜택을 받고 있었다. 후일 제국을 뒤흔드는 여제가 탄생할지도 몰랐다.

  아무튼 현재 브리안의 눈에 띈 아이들은 복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어린 브리안은 아이들의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앞으로의 발전 가능선만 있다면 신분 상승을 이루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 보았다. 그리고 거만한 귀족 아이들보다 평민 아이들이 훨씬 나았다.

  ‘아빠한테 검술도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브리안에게 가르딘은 뭐든지 들어줄 수 있는 만능의 아빠였다. 물론 가르딘은 브리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무엇이든 다 할 것이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는 상태였다.

  발키리 영지에 돌아온 가르딘은 3일 동안 가족과 지내면서 영지의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파멜라와 행정관들에게 맡겨놓은 상태였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가르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어려운 일들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파멜라가 알아서 잘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3일이 지나고 난 후에 가르딘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회포를 푼 가르딘은 한결 마음이 안정돼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푹 쉬었으니 할 건 해야지.”

  일은 하는 이유는 미래를 위해서다. 한 치 앞도 어찌 될지 모르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만이 살 길이었다. 사전에 준비해서 후일 개고생을 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집무실로 파멜라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집무실에 나오셨네요.”

  “그동안 네가 애를 많이 썼다. 수고 많이 했구나!”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영주님이야말로 전쟁터에서 수많은 고비를 넘으셨잖아요.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견하구나.”

  파멜라의 뛰어남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가 추진하는 발키리 영지의 발전 정책이 점차적으로 실행이 되어갔다. 겨울이 지나면 발키리 영지는 그 어느 영지보다 발전해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이번에 헥토르 영지를 하사 받은 것을 너도 알 것이다.”

  “영주님이 오시기 전에 영주권이 나왔어요. 제가 임의적으로 행정관을 헥토르 영지에 파견해서 조사를 해보았어요.”

  “어떠하더냐?”

  “재정이 심각하게 소진되었고, 군력이 너무 많이 동원된 상태예요. 영지 자체적으로 파산의 위기에 처해 있어요.”

  “황제가 3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으니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영지에 모아놓은 재산은 어느 정도나 되느냐?”

  “비축해 놓은 자금의 상당 부분을 군자금으로 소모하고 30만 골드가 남아 있어요.”

  “내가 가진 돈까지 합하면 자금 운영은 괜찮군.”

  라이젠에게서 얻은 황금이 아니었으면 심각한 재정적 압박을 받았을지도 모를 지경이다. 가르딘은 지속적으로 지출되는 돈이 아쉽게 여겨졌지만 후일 다시 걷어들일 수 있다고 보기에 아낌없이 쓰기로 결정했다.

  “현재 필요한 인원이 어느 정도나 되지?”

  “헥토르 영지에 파견을 하려면 최소한 3천의 인원이 필요할 거예요.”

  “우선은 영지의 인원을 파견하고 그에 합당한 지위를 주어야 할 거다.”

  “인원이 너무 부족해요.”

  “황도에서 카니발 백작이 지속적으로 인원을 보내주기로 했으니 그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해결이 되겠지.”

  발키리 영지가 이제 막 발전의 원동력을 얻어나가는 반면에, 헥토르 영지는 코워드 공작의 무리한 전쟁 투입으로 인해 점점 피폐해지고 있었다. 우선은 돈을 투입해서 영지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또한 무질서한 질서를 바로잡아서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발키리 영지보다 큰 헥토르 영지를 관리하려면 귀족들의 수도 더 늘려야 했다. 

  “나도 작위를 수여해야겠다.”

  “예?”

  “공작이 됐으니 임의적으로 자작까지 수여가 가능하잖아. 우선은 부족한 귀족들의 수를 유능한 인재로 대신해야지. 지금까지 영지를 위해서 노력한 녀석들을 선별해서 나에게 가져와.”

  “알겠어요.”

  “그리고 가장 노력한 네게는 자작의 작위를 줄 생각이다.”

  “예?”

  남작도 아니고 자작의 작위로 바로 올려준다는 말에 파멜라는 감동하고 말았다. 가르딘의 믿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녀가 이제까지 받은 것만 해도 고마울 지경인데, 더한 감동이 물밀듯이 회오리쳤다.

  후작과 공작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후작은 남작의 작위는 재량으로 내릴 수 있지만, 자작의 작위는 황도에 보고를 해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에 반해 공작은 자작까지의 작위를 자유롭게 내릴 수 있으며, 원하면 황도에 보고를 한 후 백작의 작위를 줄 수도 있었다. 물론 백작은 상급의 귀족이기에 황제의 직접적인 윤허가 필요하다.

  “네가 노력한다면 황제에게 말을 하는 한이 있어도 백작의 작위를 줄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어요.”

  “그만큼 네가 나에게는 필요한 인재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고마워요.”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은 파멜라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곧바로 행정실로 가서 이제까지 영지의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한 자들을 선별해 나갔다. 파멜라는 영지마다 차등을 두어 성과급에 대한 확실한 대조표를 작성한 상태였다.

  하루가 지난 후에 파멜라가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가르딘을 찾았다. 가르딘은 영지의 발전 계획과 향후 전망까지 예측한 자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들이 제안한 것들이 발키리 영지에서는 진행이 되고 있었다.

  “제법 많구나!”

  “총 20명 정도예요.”

  “그럼 이들에게 남작의 작위를 주고, 일부 인원은 헥토르 영지로 파견을 하도록 하지.”

  “알겠어요.”

  헥토르 영지에 파견되는 인원과 발키리 영지에 남는 인원을 조율해야 했다. 황도에서 오는 인재들의 경우 발키리 영지에 대한 충성심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발키리 영지에서 오랫동안 충성을 한 이들의 역할이 필요했다. 그들을 통해 인재들을 관리하여 발키리 영지와 헥토르 영지의 세력권을 통합시켜야 한다. 연계가 잘 이루어지고, 황도의 인재들까지 확실하게 포섭을 해놓는다면 이곳이 비록 변방이지만 변방이 아닌 발전된 영지가 될 수 있었다. 

  “일이 잘 되어야 할 텐데.”

  “영주님의 뜻대로 될 거예요.”

  “그럼 좋겠지.”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괜한 일에 휘말리기도 이제는 귀찮았다. 마냥 요즘만 같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 가르딘이다. 

  “황도에 있는 카니발에게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연락이 오면 되도록 들어주도록 해.”

  “그렇게 할게요.”

  “일반적인 업무는 모두 살펴봤으니 실질적으로 움직여야지.”

  집무실 안에서만 있어서는 영지의 일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직접 몸으로 뛰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작위 수여 전에 직접 시찰을 할 테니 비밀로 해둬.”

  “알겠어요.”

  작위는 아무나 줄 수 없다. 신중히 선택을 하고 주어야 한다. 그들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살피고, 꼭 주어야 하는 인재인지 판별을 하기 위해서 가르딘은 귀찮은 몸뚱이를 움직였다.

  시찰을 준비해야 하는 파멜라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임명한 자들은 모두 확실한 자들이었다.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뽑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르딘은 모처럼 발키리 영지를 비밀리에 돌아다녔다. 천변만환술을 이용해서 각 마을을 시찰해 나갔다. 영주의 모습이 아닌 일반 영지민들과 섞여 영지에서 돌아가는 일을 살폈다.

  ‘많이 변했군.’

  영지의 도로부터가 달라졌다. 잘 정돈된 도로변을 따라 집들이 나란히 지어져 있었다. 다크랜드부터 가르딘의 저택까지 이어지는 길은 헥토르 왕국의 습격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벽하게 복구되어 전보다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내었다. 영지민들의 얼굴에서는 활기가 보였다.

  가르딘은 저택 인근의 마을을 지나 발키리 영지의 곳곳을 살폈다. 수로망이 정비가 되어 각각의 밀 농지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수로의 물이 넘치거나 적을 시 필요한 저수지까지 확보가 되었다.

  ‘저수지 확보에 대한 건의를 하고 시행한 녀석은 괜찮군.’

  겨울 동안 필요한 식수를 확보하고 봄부터 시작되는 농사철을 대비한 것이다.

  가르딘은 점점 영지 외곽의 마을로 들어갔다.

  외곽은 저택 인근의 마을보다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이곳까지 모두 발전시키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가르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초적인 자급자족과 수급의 문제는 없어 보였다. 일례로 굶주리는 자가 그리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아예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최소한의 자급 요건을 갖추었단 말이지.’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이곳의 행정관도 제법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했다. 파멜라의 꼼꼼함은 가르딘의 혀를 내두르게 만들 정도였다.

  ‘하긴, 그 녀석이 선별한 녀석들이니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

  영지를 하루아침에 모두 둘러보지는 못한다. 며칠의 시간을 두고 둘러보아야 했다. 가르딘이 신법을 전개해서 빨리 돌아보지 않았다면 한 달이 걸릴 일이다.

  6일 동안 영지를 둘러본 가르딘은 드워프 마을로 이동했다. 드워프 마을로 가서 봄에 필요한 농기구를 부탁해 볼 생각이다.

  “드워프가 만들면 제법 오래가겠지.”

  루인돌프 장로가 가르딘에게 언제든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면 오라고 했다. 연장자의 말을 무시하는 것도 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가르딘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타아앙! 타탕! 타아앙! 타탕!

  드워프 마을은 이전과 달라진 것 없이 여전했다. 경쾌하게 울리는 망치 소리 역시 변하지 않았다. 몇몇의 드워프들이 가르딘을 보고 촌장을 찾았다.

  가르딘이 루인돌프 촌장을 보고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입니다.”

  “황도에는 무사히 갔다 온 모양이구먼.”

  “그렇습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농기구가 필요합니다. 해주실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나 필요한가?”

  “질이 뛰어나지 않아도 되니 되도록 많이 만들어주십시오.”

   “봄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보겠네.”

  “매번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닐세.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가르딘은 계속 받는 것이 약간은 미안했다. 드워프들에게 보탬이 되는 선물을 주고 싶은 가르딘이다. 받은 것이 많으면 그의 십분지 일이라도 갚아주는 것이 사람 사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앞으로 계속 도움을 받아야 할지 모르기에 친분을 더욱 돈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저도 뭔가 드리고 싶은데, 원한다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딱히 원하는 것이 없네.”

  드워프는 정말 물욕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인간들과 다르게 그들은 쇠를 다루며, 장인의 반열에 드는 것이 지상목표인 종족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것에 자부심은 있어도 그것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지 않았다.

  “들어나 보시죠.”

  “말해 보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는 루인돌프 촌장이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은 불을 더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입니다.”

  ‘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우리는 드워프일세. 불을 다루는 방법을 우리보다 더 잘 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루인돌프 촌장은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가르딘을 나무랐다. 루인돌프 촌장의 말이 틀리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능숙한 것과 방법은 다르기 때문이다.

  “저는 제가 더 잘 다룬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배우면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일단 한 번 경험을 해보시면 제 말 뜻을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음, 별로 기대는 되지 않는군. 하지만 자네이기에 한번 믿어보지.”

  가르딘을 보통 인간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드래곤과 친분이 있는 존재가 결코 평범할 리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으로도 절대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화로의 불길이 어느 정도인지 잠시 볼까요?”

  “자네 설마?”

  “잠깐이면 됩니다.”

  “너무 위험하네.”

  용광로의 온도는 인간의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특히 익숙하지 않은 자는 뜨거운 열기조차 버티지 못한다. 심각한 화상을 입어 평생을 고생할 수도 있다.

  가르딘은 불이 피어오르는 용광로에 손을 가까이 대었다. 루인돌프 촌장이 기겁하며 말리려고 했다. 잘못하면 화상이 아니라 손이 녹아버릴 수도 있었다. 

  “그만 하게! ...어? 이럴 수가!”

  “어떻습니까!”

  가르딘의 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불길을 끌어 들이기도 하고, 흘리기도 했다. 불길이 손의 방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불길은 가르딘의 손을 보호라도 하는 듯이 감싸고 있었다. 손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드워프조차 불을 저처럼 다루지는 못한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건가?”

  “불과 쇠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운이라고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복잡하게 설명해 봤자 머리만 아픕니다.”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구먼.”

  “배우기 싫다면 저도 어쩔 수 없지요.”

  가르딘은 더 이상 나눌 말이 없다며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자 루인돌프 촌장의 표정이 다급하게 변했다. 불을 가까이서 다룰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르딘이 보여준 방법은 대단한 것이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배우겠네! 그런데 어려운가?”

  “제가 직접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별로 어렵지는 않습니다.”

  가르딘은 우선 루인돌프 촌장의 몸을 살폈다. 몸의 체질이 인간과는 다를 수 있기에 혈의 위치를 파악할 필요성이 있었다.

   가르딘은 자신의 혈과 루인돌프 촌장의 혈을 비교하면서 그 특성이 비슷한 혈의 이동좌표를 계산해 나갔다. 그리고 확인된 좌표를 그림으로 그렸다.

  가르딘이 가르치려는 것은 금화신공으로 쇠와 불의 기운을 흡입하여 몸을 강화시키는 기공술의 일종이다. 동시에 불의 기운과 쇠의 기운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최정점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신마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병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고대 자료와 현재의 자료들을 분석한 후 한 가지 심공을 탄생시켰다. 그것이 바로 금화신공이었다. 일단 만들어낸 금화신공을 평소 알고 지내던 명공에게 가르쳐주었다. 후일 천신공이라고 불리는 자가 탄생하는 계기였다.

  천신공이 만들어낸 병기는 5대 신기라고 불리며 누구나 원하는 희대의 기물이 되었다.

  천신공으로부터 최초로 병기를 받은 자가 바로 신마였다. 신마는 천신공에게 독문병기인 천룡검을 받았다. 무극칠검식을 펼치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효율적인 병기라고 할 수 있었다. 역천무한진에 갇혀 차원이 이동되면서 잊어버리는 바람에 가르딘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현재의 가르딘은 신마의 능력을 뛰어넘어 있는 상태다. 기병이 필요한 경지는 지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천룡검이 가르딘의 손에 들어왔을 때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였다.

  천룡검은 잃어버렸어도 신마의 금화신공은 여전히 가르딘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드워프가 금화신공을 익히면 인간으로서 천하 최강의 명장이 되었던 자를 뛰어넘을 것이라 판단했다.

  가르딘은 혈을 짚은 순간 금화신공의 구결을 이용하여 루인돌프 촌장의 몸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기운의 흐름이 금화신공의 요체진결 상 운용구결에 따라 이동이 되었다. 직접 가르치는 대신에 몸으로 각인시키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였다.

  “약간은 고통스러울 겁니다.”

  “참겠네.”

  “윽!”

  약간이 아니라 상당히 큰 고통이었다.

  루인돌프 촌장은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 몸 안으로 스며드는 단단하면서도 뜨거운 기운은 루인돌프 촌장의 전신을 휘젓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30분 정도가 지속되었다. 소주천에서 시작한 기운이 대주천에 이르는 시간이었다. 보기에는 짧아도 당사자인 루인돌프 촌장에게는 짧지 않았다. 상당히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제가 기운과 기운이 흘러가는 곳에 있는 혈을 조금씩 자극할 겁니다. 그곳을 따라 이동하면 됩니다. 반드시 기억을 해야 합니다.”

  “알겠네.”

  금화신공의 기운, 즉 금화기가 회전하는 중심 혈들을 차례로 자극하여 루인돌프 촌장의 뇌리에 기억시켰다. 몸과 마음이 모두 기억해야 홀로 수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루인돌프 촌장의 몸에 금화기가 피어올랐다. 아직은 옅은 기운이라 선명하지는 않지만 금화신공을 운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가르딘은 그제야 루인돌프 촌장의 몸에서 손을 뗐다. 루인돌프 촌장은 혼자서 금화신공을 운용할 수 있었다.

  한 시간 동안 끊임없이 금화신공을 운용한 루인돌프 촌장이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축하합니다. 금화신공의 3성에 달했습니다.”

  “대단한 건가?”

  “이것을 전수받은 자가 이 장면을 봤다면 놀라서 뒤로 넘어갔을 겁니다.”

  “아무튼 대단하군!”

  루인돌프 촌장은 스스로도 믿지 못할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불의 기운과 쇠의 기운이 몸에 착 달라붙어서 호흡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의 모든 불과 쇠를 다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런데 이게 고작 3성에 불과했다. 그 이상으로 성취를 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경지에 이르면 그 어떤 쇠도 쉽게 다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어! 정말 할 말이 없어지는군.”

  “매번 부탁하기 미안해서 드리는 겁니다.”

  “이제부터 자네는 드워프 마을의 진정한 은인이네. 그 어떤 부탁이든 모두 들어주겠네. 이것은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네.”

  “그러시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가르딘과 루인돌프 촌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특히 가르딘은 루인돌프 촌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이후에 만들어진 병기는 더욱더 강력해 질 것이 분명했다. 최강의 병기는 영지의 군사력과 일치한다. 소수의 병력이라도 병기는 질에 따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라이젠 님을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드워프 마을에서의 일이 끝나고 난 후 라이젠을 찾아갔다. 라이젠은 지금까지도 타이탄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일단 목표가 너무 높았다. 최소한이 슈피리어 급의 타이탄이었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리는 만무했다. 수십 년간의 노력이 필요할지 모르는 일이다.

  가르딘은 다크랜드의 중심인 드라이스 산으로 신법을 전개하여 움직였다. 가르딘의 시야에는 바람의 결이 보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바람이 흘러가는 동선이 보였다. 가르딘은 바람에 몸을 맡기며 자연스럽게 섬전보를 펼쳤다.

  섬전보의 운용요결의 가장 중요한 점은 빠름이었다. 뇌전을 방불케 하는 빠름으로 적의 시야를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빠름만으로 모든 것을 제압할 수 없음을 가르딘은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흐름을 타는 법을 조금씩 체득해 나갔다. 그것이 바로 자연과 동화되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다. 검과 마음, 육체가 하나가 되는 검의 경지와는 또 다른 보법의 체계였다.

  별다른 수련을 하지 않고 있지만 가르딘은 스스로도 믿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호흡을 할 때마다 가르딘의 천룡무상신공은 끊임없이 발전을 유도했다.

  가르딘이 그랜드마스터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신마의 지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소진되었던 신마의 일부 기운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탕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슈우우우웅!

  바람의 탄력을 타고 도약을 하자 수십 장은 우습게 날아갔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 안에 서린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더 작아지며 효율성은 극대화되어 갔다. 가르딘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능력이었다.

  “대단한데!”

  한 줌의 진기만으로도 수백 리를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것과 비슷했다.

  드워프 마을에서부터 라이젠의 레어 근처까지 순식간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딘은 고작 일보를 걸었다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았다.

  “이거 뭐든지 되는데!”

  뭘 해도 되고 있었다. 섬전보를 운용하는 순간에 섬전보는 또다시 발전했다. 무극칠검식을 처음부터 다시 시전해 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가르딘은 잠시 멈췄다. 탄력을 받았을 때 해보는 것이 효과적인 수련 방법이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조급함을 느꼈다.

  척!

  가르딘이 멈추자 바람마저 멈추었다. 고요함이 가르딘의 주변을 점점 메워가기 시작했다.

  “무에서 시작된 혼돈은 두 가지의 상반된 힘으로 파생이 되었다. 파생된 힘은 음과 양이 되어 하나로 뭉쳐지지 않았다. 그 힘을 하나로 운용하여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이 무극의 참된 길이로다.”

  무극칠검식의 진리였다. 무극에서 파생된 힘을 일곱 가시 검식으로 표현해 낸 것이 무극칠검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무극의 힘은 천룡의 힘에서 뿜어져 나왔다.

  가르딘의 근원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천룡무상신공이 저절로 운용이 되어 사지백해로 퍼져 나갔다.

  우우우우웅!

  고요하고 조용한 가르딘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대기가 요동을 쳤다. 가르딘을 중심으로 형성된 나선의 회오리가 주변을 일정하게 휘몰아쳤다.

  스르렁!

  검집에 꽂혀 있던 검이 스스로 뽑혀 나와 가르딘의 오른손에 쥐어졌다. 주변이 모두 가르딘의 통제력 안에 있었다. 의지가 서자 모든 만물이 가르딘을 따라왔다. 삼라만상의 묘리가 가르딘의 뇌리를 강타했다. 기운은 백회혈과 뇌호혈을 직선으로 통해 머리에서 발끝까지 관통해 버렸다. 

  쿠쿵!

  하늘과 땅, 그리고 가르딘이 일치가 되었다. 삼라만상의 기운이 가르딘의 근원인 천룡무상신공과 융합이 되어갔다. 천룡무상신공의 묘리가 만물의 운용이었는데, 아직까지 완벽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불완전했던 것이 점차적으로 완성이 되어간 것이다.

  조용히 흘러 들어오는 기운과 내재된 기운을 합일한 가르딘이 드디어 움직였다. 무극칠검식의 1초식부터 시작해서 7초식까지 천천히 시전이 되었다.

  느림의 미학이자 흐름의 미학이라고 불리는 둔중유극이 펼쳐졌다. 대기마저 가르딘의 검에 의해 빨라졌다 느려졌다를 반복했다. 마치 검에 끌려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상대방의 검을 조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연마저 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름을 조율하던 가르딘의 검이 대기를 갈랐다. 마음이 대기를 가르자 대기는 이미 갈라져 있었다. 일반적인 빠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이었다. 이제까지 선보인 가르딘의 절기와는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슈웅!

  검이 뻗어갔다. 검이 지나간 공간이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공간이 뻥 뚫린 것처럼 보였다.

  가르딘의 검은 쉬지 않았다. 4초식 극한살인검과 5초식 파천멸환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광포한 힘의 변화가 가르딘의 주변 일대를 완전히 박살 내놓았다. 진기의 파동이 드라이스 산 전체를 휘젓고 있었다.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가르딘의 기운은 태풍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마음이 곧 검이다!”

  “이얍!”

  무극칠검식의 6절초 무극만검이 쏘아져 나갔다. 가르딘의 마음에 멸이 담겼다. 검격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사라졌다. 부서져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소멸해 버린 것이다. 반경 20장에 달하는 곳이 사라졌다.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플레튬 급을 만들어내었다!”

  라이젠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는 잠도 자지 않고 타이탄 제작에 매달렸다. 물론 드래곤이니 잠을 잘 필요성은 없었다. 라이젠은 자신의 모든 심력을 타이탄 제작에만 집중했다. 다른 어떤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너희들 덕분이다!”

  “아닙니다. 모든 것이 라이젠 님의 뛰어난 능력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라이젠 님이 아니라면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영혼의 주인이신 라이젠 님을 주인님으로 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라이젠이 한마디 하자 세 명이 한목소리로 라이젠을 찬양했다. 그들은 모두 라이젠을 경외하였다. 멜버른 후작은 원래 그렇게 됐으니 상관이 없겠지만, 다른 두 사람마저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변한 이는 벤투스와 가딩스타 후작이었다. 그들도 라이젠의 막강한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정신이 바뀌어 버렸다. 그 증세는 멜버른 후작과 비슷했다.

  “이제 성능을 테스트해 봐야겠지. 가딩스타, 어서 타보아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가딩스타 후작이 타이탄 앞으로 섰다. 그는 비장한 표정이었다. 반드시 라이젠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겠다고 다짐했다.

  라이젠의 시선이 벤투스에게 향했다.

  사실 벤투스가 자발적으로 영입(?)되면서 타이탄 제작에 새로운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벤투스가 골렘을 연구하며 타이탄까지 제작한 모든 노하우가 썰물 빠지듯이 라이젠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로 인해 라이젠은 빠른 시간 안에 플레튬 급 타이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벤투스의 타이탄 제작 능력만큼은 인정해 주었다. 과거의 제작 방법보다는 떨어지지만 독창성이 가미가 되어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연구하면 슈피리어 급도 가능할지 모르겠어!’

  플레튬 급과 슈피리어 급은 한 단계 차이지만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지금까지는 원형인 가이안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다음부터는 새롭게 시작을 해야 한다. 말이 쉽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라이젠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금은 그저 플레튬 급 타이탄을 제작해 내었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쿠과과과광!

  드라이스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상상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라이젠의 기감에도 잡히는 기운은 익숙하면서도 달랐다.

  “뭐야?”

   드라이스 산 근처였다. 라이젠의 레어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운의 여파가 상상을 초월했다. 라이젠의 표정이 찡그러지는 반면에 가딩스타 후작과 멜버른 후작, 벤투스는 몸이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그들조차 느껴지는 기운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 혹시?”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운을 발산하는 존재는 라이젠이 알기로 한 명뿐이다. 하지만 그전과는 너무 다른 압도적인 기운에 긴가민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라이젠은 그 즉시 이동했다. 기운이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드라이스 산이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나이 들어서 집이 없어지는 설움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드래곤의 명언에 레어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말도 있었다. 

  산천초목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무극칠검식이 펼쳐질수록 가르딘의 주변은 초토화되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천룡이 지상에 강림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가르딘은 몰아지경에 들어섰다. 무극칠검식의 마지막 검초라고 불리는 무극활생극의가 뻗어나갔다. 혼돈에서 파생된 음양의 힘을 하나로 모아 무극의 힘이 되었다.

  무극의 힘은 죽음의 힘이 되기도 하고, 생명의 힘이 되기도 했다. 활검의 능력이 가르딘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죽어 있던 나무와 풀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생의 기운이 주변을 가득 메웠기 때문에 발생하는 기적적인 일이었다.

  검이 그려가는 궤적마다 생의 기운이 대지를 충만하게 뒤덮었다.

  마지막 절초를 그려냈던 가르딘의 검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검의 끝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가르딘은 문득 이상한 감각을 맛보았다.

  ‘칠검식이 아니었던가?’

  무극의 검에서 파생된 검의 진의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가르딘의 감각을 자극했다. 그러나 검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했다. 새롭게 그려가는 검의 진의가 누군가의 등장으로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가르딘은 순간적으로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만족했다. 이제까지 가로막고 있던 벽을 한 단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절대경지에 이른 가르딘에게 한 단계는 그 무엇보다 단단한 벽이었다. 쉽게 허물 수 있는 벽이 아니었던 것이다.

  멍!

  레어 근처에서 느껴지는 말도 안 되는 기운에 이끌려 나오게 된 라이젠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폭풍처럼 휩쓸고 간 곳은 폐허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란 것은 가르딘이 마지막에 펼친 것이었다. 그것은 라이젠조차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저게 사람이냐! 괴물이냐!’

  라이젠은 가르딘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압도적인 광경을 봤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깜짝!

  어느새 가르딘이 라이젠의 눈앞에 다가왔다. 멍하니 있던 라이젠이 놀라서 뒷걸음을 쳤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라이젠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내가 쫄은 건가! 그럴 리 없다!’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가르딘의 실력이 자신을 엄청나게 앞섰다는 것에 짜증이 난 라이젠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라니! 지금 자네가 해놓은 것을 좀 보게!”

  라이젠이 주변을 가리켰다. 주변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황폐함 그 자체였다. 가르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라이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요?”

  “자네가 한 짓을 모른단 말인가!”

  “쓸모없는 산을 망가뜨렸다고 해서 그게 무슨 죄가 된다고 난리십니까!”

  사람이 살지 않는 산을 망가뜨린 것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가르딘이다. 산은 기후에 따라 얼마든지 무너질 수도 있는 곳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거나 중요한 건물이 있다면 가르딘으로서도 미안해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과는 상관이 없었다. 산은 조금만 지나면 다시 회복할 수 있다. 

  할 말 없어지는 라이젠이다. 가르딘의 말에 반박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겨우 한다는 말.

  “자연을 소중히 하게.”

  “드래곤이 자연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나는 항상 자연을 소중히 여기네.”

  “뭐, 알겠습니다.”

  말을 해놓고도 무안한 라이젠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매번 왜 내 근처에서 사고를 치는 건가?”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갑자기 깨달음이 와서요.”

  가르딘은 숨기지 않았다. 지켜보고 있었기에 상관없었다. 라이젠은 드래곤이니 어디 가서 소문내지도 않을 것이다.

  ‘이놈이 이제는 대놓고 강해졌다고 자랑하네! 알아서 기라는 소리냐!’

  라이젠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사실 이제는 이긴다고 장담을 못 할 수준이 되었다.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긴 한데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으로 갈무리했다는 뜻이 되었다. 내면에 잠재된 힘을 파악할 도리가 없는 상태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고 있었다.

  “그보다 여기는 왜 온 거냐?”

  “돈.......”

  “없다.”

  “알겠습니다.”

  “내가 돈 나오는 금고냐! 자꾸 돈을 달래.”

  “그냥 해본 말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려고 온 것인데, 너무합니다!”

  “흥, 네 속을 누가 모를 줄 알아.”

  가르딘은 정말 순수한 의도였다. 드워프 마을에서의 일을 끝내고 난 후 마침 시간이 있기에 라이젠을 보러 온 것이다. 다른 뜻은 절대 없었다. 그저 깨달음을 얻어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뿐이다.

  그에 반해 라이젠은 절대 그럴 리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잠시 방심을 하는 사이에 하나둘씩 뺏어 가는 놈이었다. 방심을 유도한 후 무언가를 훔쳐가려는 수작으로 여겼다. 가르딘이라면 그러고도 남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깨달음을 얻어 다행입니다.”

  “뭐가 다행인데?”

  “제 부인과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뭐?”

  가르딘은 자신이 구상한 ‘라이나 반로환동 대작전’을 라이젠에게 설명해 나갔다. 듣고 있던 라이젠은 기가 막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절대의 경지를 초월한 놈이 한다는 소리가 그 모든 것이 부인과 오래 살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놈은 상식하고 거리가 멀어!’

  가만히 듣고 있는 자신이 미친 드래곤이었다. 가르딘의 말이 전혀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다크랜드에 영물 같은 것은 없습니까?”

  “영물은 무슨?”

  “얼마 전에 영물을 찾기 위해서 북쪽 중간지역까지 들어갔었는데 하나도 없더라고요.”

  ‘이놈 진짜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가르딘이 농담으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가르딘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영물과 영과를 찾아 영단을 만들어서 라이나를 늙지 않게 만들어주어야 했다.

  “뭐하면 드래곤 하트라도 조금!”

  “이거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농담입니다. 후후후!”

  삐질!

  라이젠에게는 절대 농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치솟는 노기를 참을 수 없을 뻔했던 라이젠이다. 등 뒤로 식은땀이 다 나고 있었다.

  때마침 라이젠의 곁으로 벤투스와 가딩스타 후작, 멜버른 후작이 따라왔다. 라이젠을 뒤늦게 따라온 것이다.

  가르딘의 시선이 벤투스와 가딩스타 후작에게 향했다. 눈빛을 보니 멜버른 후작과 같은 세뇌를 받은 것 같았다. 죽는 것보다 더한 꼴을 당했다. 지금은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의식도 하지 못할 것이다.

  ‘세뇌당하지 않았다면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가족을 위협한 존재는 살려두지 않는 가르딘이다. 세뇌당한 것이 목숨을 보존하는 기회가 되었다.

   “타이탄 제작이 끝났는데 한 번 보겠느냐?”

  “그럴까요.”

  라이젠은 자신이 만들어낸 플레튬 급 타이탄을 은근슬쩍 자랑했다. 불과 몇 달 만에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가르딘도 은근히 놀라는 눈치였다. 타이탄은 만들겠다고 해서 뚝딱 만들어지는 병기는 아니었다. 라이젠의 능력이 뛰어나기에 가능한 것이다. 가르딘도 라이젠의 능력은 인정했다.

  ‘역시 그냥 팔불출 드래곤은 아니었어!’

  가르딘과 라이젠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딩스타 후작이 타이탄에 탔다. 타이탄의 이름은 드라이스 산의 이름을 따서 드라이스라고 붙였다. 가딩스타 후작은 타이탄 조종을 해본 경험이 있기에 특별히 조종법을 따로 배워야 할 필요는 없었다.

  기체의 크기는 노멀 급 타이탄인 발키리와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체의 생김새와 위압감의 차이 정도였다.

  “기본 성능을 테스트해 보아라!”

  -예!

  기체에 확성 마법 아이템을 달아놓았는지 가딩스타 후작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젠의 명령에 따라 가딩스타 후작은 기본적인 움직임을 선보였다. 걷고, 달리고, 뛰어올랐다.

  쿠쿠쿵!

  드라이스가 움직일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충격이 전해졌다. 움직임이 점차적으로 빨라졌다. 빨라진 기체의 움직임과 더불어 응용동작이 이어졌다.

  슈슈슈슉! 꽈과과광!

  드라이스의 검에서 뻗어나간 오러탄이 거대한 바위를 단숨에 부숴놓았다. 그리 강하게 공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타이탄은 같은 타이탄이 아니면 상대하기 어려운 병기였다. 병사들이 부딪쳤다가는 일방적인 학살을 당할 것이다. 한마디로 ‘양민 학살용’이라고 불리기 충분했다.

  “대단하군요! 가이안보다 더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가르딘은 가이안을 상대해 본 유일한 존재다. 두 타이탄의 성능 차이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가르딘이 보기에 가이안보다는 드라이스의 운용 능력과 움직임이 훨씬 더 매끄러웠다. 전투 시 파워와 기체의 움직임을 주관하는 출력도 좀더 업그레이드한 것으로 보였다.

  한 시간 정도 테스트를 해보았다. 가딩스타 후작은 타이탄에서 내리자마자 비틀거렸다. 상당히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파워가 강한 대신에 오러 소비가 만만치 않군요.”

  “그런 것 같군.”

  소비되는 오러의 양이 가이안보다 드라이스가 더 많았던 것이다. 단순비교를 하기는 어렵지만 파워는 드라이스, 지속력은 가이안 정도로 평가할 수 있었다.

  “지속력이야 출력장치를 손보면 되니 걱정할 것이 못 되지.”

  “그럼 다행이군요.”

  처음 시작하는 테스트치고는 무난했다. 이 정도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테스트를 마치고 철수하려고 하는데 가르딘이 라이젠에게 부탁을 했다.

  “저도 한번 타보면 안 될까요?”

  “자네가 말인가!”

  “안 됩니까?”

  “이유가 뭔가?”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가르딘의 무력이라면 굳이 타이탄이 필요 없을 것이라 판단한 라이젠이다. 그런데도 타보겠다는 가르딘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왠지 모르게 께름칙했다.

  ‘이놈이 이것마저 노리는 것 아냐!’

  타이탄을 탄 후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계약 자체는 할 수 없는 타이탄이지만 의심이 되었다. 지금까지 노력한 목적물이 부서질 수도 있는 일이다. 드래곤 나이트도 부숴버린 놈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것이 걱정이 된 라이젠이다.

  가르딘은 라이젠의 고민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나를 어떻게 보고!’

  ‘도둑놈으로 본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둘 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한 미소였다.

  “알다시피 제가 타이탄이 한 대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타이탄은 부르면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건 알고 있네.”

  드래곤 나이트를 말하는 것이다. 가르딘은 시험 삼아 한 번 불러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어찌 된 일인지 주인이 불렀는데도 대답 한 번 하지 않는 것이다. 허공에 대고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다가 목이 쉬어버릴 뻔했다.

  ‘이런 젠장! 나 누구랑 말하는 거니!’

  드래곤 나이트를 소유한 것은 라이젠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때가 되면 나온다고 쳐도 조종은 익숙해야 할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상태로 타이탄을 조종합니까!”

  일리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번 타보게.”

  “감사합니다.”

  가르딘은 곧장 드라이스에 올라갔다. 아직은 계약을 맺는 것을 인챈트하지 않은 상태다. 그저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가지고 나온 것이다.

  위이잉! 척!

  드라이스의 머리가 닫혔다. 가르딘이 안에 타자 내부의 물렁물렁한 것들이 타이트하게 감싸며 조여오기 시작했다.

  -싱크로율 100퍼센트.

  가르딘과 드라이스의 싱크로율이 상당히 높았다. 완벽함 그 자체였다. 

  가르딘이 일어서자 드라이스 역시 자연스럽게 일어섰다. 처음에는 조금 어설픈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가르딘은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주변을 휘저었다. 가딩스타 후작이 타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른 기동력이었다. 오러의 양과 순도가 말도 안 되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라이젠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괴물 같은 놈!’

  처음 타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쌔애애앵!

  어느 순간 가르딘이 북쪽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드라이스의 등 뒤 아래에 부착된 부스터를 가동하자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영물 좀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뭐?”

  라이젠은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르딘은 드라이스의 기동력을 이용해서 다크랜드를 편안하게 둘러보려고 한 것이다. 드라이스의 경우 안에 마나와 오러 탐지 센서가 설치되어 있었다. 영물이나 영과를 찾기에 적합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씨익!

  라이젠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최후의 방법을 모색해 놓았다. 가르딘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럴 줄 알고 방법을 고안해 놓았지.”

  -워프(공간이동).

  슈융!

  북쪽으로 한참 내달리던 드라이스가 공간이동을 해왔다. 그 장소는 라이젠의 눈앞이었다. 라이젠이 만약을 대비해서 드라이스의 안에다가 공간이동 마법진을 그려놓았다. 대륙 어디에 있어도 라이젠에게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드라이스에 탄 가르딘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좀 전에 있었던 장소로 돌아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가르딘의 원대한 계획은 이것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꼼수가 통하지 않았다.

  라이젠이 가르딘보다 한 번 더 머리를 쓴 것이다. 계획대로만 되면 영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타이탄 조종술을 익혔다는 것에 만족해야했다.

  가르딘이 조종석에서 내리면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한 방 먹었습니다.”

  “내가 너를 모르냐!”

  “이거 다음부터는 좀더 철저하게 준비해야겠습니다.”

  “어디 마음대로 해보게. 다 받아주지.”

  “과연 그럴까요.”

  가르딘은 오늘의 성과에 만족해하며 라이젠과 헤어졌다. 오늘처럼만 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발키리 영지에 돌아오고 난 후 예상대로 일이 제법 잘 풀리고 있었다.

  시간은 바람과 같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은 이미 저만치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절이 바뀌었다. 추운 겨울바람이 지나가고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지 오래였다.

  가르딘이 발키리 영지에 돌아온 지 정확히 6개월이 지났다. 겨울을 지내고, 봄을 지나 초여름이 다가왔다. 제국의 곡창지대답게 발키리 영지의 밀 농지에는 밀이 수북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밀 농지가 개척되고, 수로망이 정비되면서 예년보다 훨씬 더 많은 소출을 기대하게 되었다. 영지민들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특산물로 개발이 되고 있는 리베시안 찻잎의 개량종까지 나왔다. 1차로 시판된 때보다 열 배 가까이 발전이 되었다. 발키리 영지에서 생산되는 리베시안 찻잎이 대륙의 어떤 차보다 뛰어난 맛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파이트너 상단이 적극적으로 구매를 하고 있었다. 가격과 맛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한 가치를 나타내었다.

  도자기는 도기의 수준을 뛰어넘어 자기의 경지에 이루었다. 도자기의 성분 중에 가정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령토와 불의 온도, 유약의 성분이 전보다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도자기의 수급력과 예술성이 더 진화했다. 가르딘이 처음에 가르친 도공들은 어느새 장인의 반열에 들었다. 가르딘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개발해 내면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또한 초기 도공들이 이후에 들어오는 신입들을 가르치면서 인원이 확충되었다.

  도공과 기술력이 확보되자 파이트너 상단을 통한 대륙 진출이 훨씬 더 수월해졌다. 고가의 도자기가 대륙으로 팔리자 영지의 재정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늘어났다.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고 있는 가르딘은 모든 일이 너무 잘 되고 있자 약간은 불안감을 느꼈다. 하는 일마다 이익을 보고 있었다. 실수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파멜라가 완벽한 계획을 수립해서 그렇다고 해도 너무 잘되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가르딘의 뒤를 밀어주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불안감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잘되고 있는 상태와 극한의 상태에서 느끼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헥토르 영지도 어느 정도는 안정을 찾았고, 카니발도 황도에서 제법 세력을 모았으니 별달리 문제는 없는데.”

  헥토르 영지의 반란세력은 모두 처리한 상태였다.

  가르딘은 헥토르 영지의 경제를 살리면서 비밀리에 발키리 영지의 기사단을 파견했었다. 헥토르 영지의 곳곳에 숨어 있는 반란 세력들을 부셔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움직임은 인포메드와 파멜라의 정보력을 통해 파악을 해놓았었다.

  헥토르 영지의 반란세력은 예상보다 많았지만 강하지는 않았다. 또한 조직력과 체계가 잡혀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었다면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미연에 처리해 버린 것이 헥토르 영지의 파탄된 경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영지의 세수가 이만큼이나 성장했다니 보고 있는 나도 믿을 수가 없구나!”

  상상 이상으로 영지의 재정이 탄탄해졌다. 헥토르 영지에 들어가는 재화를 제외해도 많은 자금이 남았다. 발키리 영지 내의 정비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지금부터는 낙후된 지역을 차례로 손보아야 했다.

   헥토르 영지에 파견된 자들 역시 일을 잘 처리해 주고 있어서 분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전의 가혹한 정책을 완화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니 헥토르 영지의 영지민들도 가르딘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 지금만 같아라.”

  영지는 살찌고, 가르딘의 여가 시간은 많아졌다. 영지의 일에 손을 대지 않아도 저절로 발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르딘은 남은 시간 동안 가족들과 보내며 한가로운 시기를 보냈다. 가끔씩 황도에서 연락이 오기는 했지만 카니발 백작에게 모든 일을 떠넘겨 버렸다. 가족과 놀 수 있는 기반이 다져진다는 것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가르딘이다. 라이나, 브리안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가르딘에게는 꿀맛 같았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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