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내전종결@@]
내전이 끝이 났다. 수많은 이의 피를 요구했던 내전의 끝은 허무하게 종결이 되었다. 그 누구도 이처럼 쉽게 타협이 이루어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의문도 잠시, 내전의 진실이 공표되었다. 전해진 사실은 제국의 모든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다마트 황자와 타이가라 공작이 황제가 되기 위해 혈육을 죽였다.
다마트 황자의 성격을 알던 이들은 그 말을 쉬이 믿기 어려웠다. 그토록 조용했던 3황자가 흉포한 야심을 가지고 있을 줄 누구도 알지 못했다. 믿지 못하던 이들에게도 진실은 규명이 되었다. 그럴수록 다마트 황자의 치밀한 계략과 잔인한 독심에 혀를 내둘렀다. 일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폭군이 탄생했을 수도 있었다. 제국은 러쉬 황자의 승리에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했다.
러쉬 황자는 내전을 종결시키자마자 황도로 이동했다. 제국 내외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러쉬 황자는 일사불란하게 산재한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바이멘 후작이 사전에 미리 준비한 계획을 꼼꼼하게 검토하였고,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일의 실질적인 명령권을 가지고 진행을 하였다.
러쉬 황자 직속의 행정체제가 완비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모든 행정권과 군사력이 러쉬 황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나갔다. 제국의 주인이 바뀌어 가는 시기였다.
마이어 공작은 북방의 군사체제를 전과 동일하게 유지해 나가면서 내부의 분란세력을 솎아내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주도면밀하게 다마트 황자의 잔존 세력을 찾았다. 그리고 잔인했다. 뿌리조차 남지 못하도록 발본색원하였다.
러쉬 황자 체제의 완비가 제국의 안정을 가져오는 시기를 앞당겼다.
마이어 공작의 회유가 이루어지고 난 후 가르딘은 러쉬 황자로부터 명령을 받았다. 다마트 황자의 잔존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헥토르 공국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가르딘은 마다하지 않았다. 황도에 남아 있어 봤자 골치만 아프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 기회였다.
가르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키리 영지로 돌아왔다. 헥토르 공국을 정리하는 일을 바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우선은 라이나와 브리안을 만나서 회포를 푸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차피 헥토르 공국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시간을 조금 더 두고 보는 것이 현명했다. 굳이 무리하게 일을 진행시키지 않았다.
가르딘의 느긋함에 필리언이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너무 느긋한 것 아니냐.”
“이제 할 거다.”
“그게 언젠데.”
“곧.”
가르딘이 늦장을 부리는 이유는 헥토르 공국의 문제를 해결하고 난 후 황도로 또다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카니발 백작을 수도에 남겨두었다. 황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대응책으로 말이다. 가르딘의 후광을 입고 있는 카니발 백작이기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내전의 전공으로 인해 제국의 실질적인 실세 중에 한 명으로 가르딘이 떠올랐던 것이다.
풀 거 다 풀고, 쉴 거 다 쉬고 나 후에 가르딘은 움직였다. 제국이 점차 안정되는 시점이라 이제는 움직여야 했다.
“그럼 가볼까나.”
발키리 영지의 기사단과 병사들 모두 완비가 되어 있었다. 3만의 영지군 중 2만의 병력을 차출하였다. 내전이 끝났다는 것을 헥토르 공국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헥토르 공국은 심각한 정치적 충돌을 벌이고 있었다. 자기 살 깎아먹는 짓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워드 공작가의 와이어트와 귀족들이 각자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다툼을 벌였다. 코워드 공작이 발키리 영지와의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죽어버리자 일이 더 커지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와이어트의 입지가 작아지고 있었다.
이후 다마트 황자가 내전에서 패기가 짙어지자 더욱더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되었다. 내전이 종결된 지금에 와서 와이어트는 벼랑 끝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가르딘이 병력을 이끌고 헥토르 공국의 중심까지 진입하는 과정에서 어떤 걸림돌도 존재하지 않았다. 성을 방비하던 귀족들과 기사들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였다. 병사들도 없을뿐더러 대항할 용기도 없는 자들이었다.
가르딘은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섣불리 관용을 베풀었다가는 마이어 공작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마이어 공작은 다마트 황자와 타이가라 공작에게 강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었다는 인식을 주게 되면 나중에 가르딘이 피곤해진다.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어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헥토르 왕국 시절의 귀족들은 모두 변방으로 보내진 상황에서 코워드 공작가의 귀족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르딘은 헥토르 왕성을 점령하고 있던 코워드 공작파의 귀족들을 깨끗하게 정리해 버렸다. 그들은 항복한 자들의 권리를 외쳤다. 가르딘은 깔끔하게 그들의 권리를 묵살해 주었다.
마지막에 와이어트가 살려 달라며 가르딘의 바지 끄덩이를 잡았다.
“살려주십시오! 항복한 자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법은 없습니다!”
“너 바보냐.”
“무슨?”
“나 같으면 남아 있는 재산이라도 챙겨서 도망갔겠다. 무슨 배짱으로 남아 있었던 거냐.”
욕심이 화를 부른 꼴이다. 항복을 하고 권리를 유지한 다음에 제국의 귀족으로 남으려는 속셈이었다. 남겨진 것을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원하는 대로만 되는 경우는 드물다. 내전의 경우 반발하는 귀족들을 숙청하는 것이 기본적인 상례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귀찮기 때문이다. 나중에라도 반란을 일으키거나 제국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었다. 사전에 방비를 하고, 귀족들에게 제국의 철혈 같은 위엄을 보여주어야 했다.
물론 와이어트의 경우 무조건적인 항복을 했기에 어느 정도는 정상참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안일하게 봐주기에는 뒤탈이 있는 상황이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내 권한 밖이야.”
가르딘은 와이어트의 애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살겠다는 인간의 본능을 굳이 욕하지는 않았다. 그저 너무 늦었을 뿐이다. 차라리 내전이 끝나기 전에 먼저 항복했어야 했다. 권력다툼도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것이 일들의 실수였다.
20일 동안 차분하게 헥토르 공국을 점령해 나갔다. 공국 내부를 정리하는 동안, 의외로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왕국이 공국으로 격하되면서 쫓겨나야 했던 귀족들이 반란군을 조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가 그리 많지 않기에 별다른 위협은 되지 못했지만 자칫 큰 골칫거리가 될 뻔했다. 사전에 미리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은 후 가르딘은 또다시 황궁으로 올라가야 했다. 가르딘이 헥토르 공국을 정리하는 시간과 맞물려서 제국의 내정도 어느 정도는 안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바로 황제의 즉위식이었다.
가르딘은 라이나, 브리안과 식사를 하면서 황도로 가기 전 화목을 다졌다. 가르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다. 그날 밤 불을 뿜어 정력을 모두 소진시켰다.
황도 오스란은 황제의 즉위식으로 인해 분주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물론 신성 제국과 왕국, 공국의 사신들도 맞이해야 하는 큰 행사였다.
사신을 맞기 위해서 황도의 낡은 건물과 도로를 다시 짓거나 깔고, 내전으로 부서졌던 것들을 새롭게 고치는 작업이 한창 진행이 되었다.
러쉬 황자는 즉위식이 있는 시기까지 일정 부분 세금을 감면해 주는 혜택을 주었다. 또한 황도 내부의 공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에게 임금을 주어 생활의 편의를 봐주었다. 자연스럽게 황도는 활기가 넘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은 황제가 되기 위한 의례적인 일이다. 황도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까지 새로운 황제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게 만들기 위한 눈 가리고 아웅 정책이다.
황도의 활기찬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슬픔을 간직한 여인이 정원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수목이 자리한 정원은 차분하기만 했다. 마치 여인의 슬픔을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정원은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장소였다.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 추억의 장소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그녀였다.
저벅! 저벅!
정원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젊은 청년이 초췌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에게 다가갔다.
“매일 이곳에 오는 것이냐?”
“오셨어요.”
“아이시런! 그만 잊을 수는 없는 것이냐. 네가 슬퍼하는 것을 보기 괴롭구나.”
청년은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될 러쉬 황자였다.
아이시런 공주는 슬픈 눈망울로 러쉬 황자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내전의 진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엄청나고 잔인한 진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황실의 권력 다툼이 잔인하다는 것은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알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로 혹독했다.
“이제는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꾸나! 더 이상 과거의 일을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러기에는 너의 아름다움이 너무 아깝지 않느냐!”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즉위식이 끝난 후에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주마. 내가 이건 약속을 하마.”
“정말이요?”
“물론이다. 명색이 오라비가 되어서 그 정도 약속도 해주지 못하겠느냐.”
“고마워요.”
“그럼 이제 그만 잊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너라.”
“제가 원래 어떤데요!”
“왈가닥이지 않느냐!”
“오라버니도 참!”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아이시런 공주는 러쉬 황자가 모르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동생의 성격을 러쉬 황자가 모를 리 만무했다. 그저 동생이 귀엽기에 모르는 척 눈감고 있었을 뿐이다.
아이시런 공주는 은근슬쩍 궁금한 것을 넌지시 물었다. 물론 직선적으로 물어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논공행상이 곧 있겠네요.”
“즉위식 후에 바로 있을 거다.”
“누가 공을 많이 세웠나요?”
“너도 알다시피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가장 큰 공을 세웠지.”
“두 분이야 원래부터 대단한 분들이잖아요.”
“나를 따르는 모든 귀족들이 공을 세운 것이지. 그중에서 가르딘 후작이 참 마음에 들더구나!”
“가르딘 후작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던가요?”
아이시런 공주는 가르딘이 거론되자 그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몰론 궁금하다는 표정과 말투는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이제까지 완벽했던 연기가 러쉬 황자에게 들켰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다시 한 번 노력을 해보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제국을 위하는 마음과 충성심이 누구보다 크더구나!”
‘부인을 위한 충성심이겠지.’
“전략전술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겸손하더구나.”
‘아부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겸손은 무슨.’
러쉬 황자는 가르딘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를 전략과 전술, 임기응변, 제국에 대한 충성심 등 모든 것을 두루 갖춘 뛰어난 인재라고 보았다.
러쉬 황자의 칭찬에 아이시런 공주는 속으로 어이없어 했다. 가르딘의 성격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 아이시런 공주였다. 그녀는 가르딘이 아부를 얼마나 많이 떨었는지 능히 짐작이 갔다.
‘알 만하다. 그 인간 아부 떠는 거야 내가 경험해서 알지.’
러쉬 황자도 가르딘의 말발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시런 공주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는 것이다. 가르딘을 칭찬할수록 아이시런 공주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잘되는 것이 꼭 자신이 잘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왜 기분이 좋지?’
아이시런 공주는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모호한 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자신의 신분과 나이, 출중한 미모가 너무 아까웠다.
도리! 도리!
“왜 그러느냐?”
갑자기 도리질치는 아이시런 공주의 행동에 러쉬 황자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신이 한 행동에 얼굴이 붉어질 뻔한 아이시런 공주였다. 그녀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이 다음 공적 대상자에 대해서 물었다.
황제 즉위식이 있기 3일 전에 가르딘은 황도에 도착했다. 헥토르 공국을 정리하고 곧장 올라오는 길이었다. 라이나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즉위식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엄청나군.”
“예전에 왔을 때보다 사람이 더 많네요.”
황도에 올라오는 인파가 대단히 많았다. 줄을 잇는 사람들의 끝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다. 제국의 모든 사람이 황도에 모이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황제 즉위식이 있기 전까지 황도는 축제였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 각 지방에서 사람들이 올라온 것이다.
필리언과 투르, 고트, 사이론이 가르딘을 따라 황도에 올라왔다. 가기 싫어도 일단은 눈에 익은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한 가르딘이다.
가르딘이 황도의 검문소에 당도했다. 그러자 전에 가르딘을 검문했던 왈슨이 알아보고 달려왔다. 그는 황급히 뛰어나와서 가르딘에게 인사를 올렸다.
“가르딘 후작님, 어서 오십시오!”
“자네를 또 보는군.”
“후작님을 다시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계급이 올랐나 보군.”
“운이 좋았습니다.”
“자네가 성실해서 오른 것이겠지.”
“감사합니다.”
왈슨은 당시보다 계급이 올랐다. 이유는 내전이 있을 당시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죽는 바람에 인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병력을 보충하면서 예전부터 근무한 병사들의 계급을 올려준 것이다. 10년을 근무해도 계급이 오르지 않는 것이 정석이다. 왈슨의 경우는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가르딘의 신분을 확인한 병사들은 정중하게 안내를 하였다. 또한 주변 사람들 역시 가르딘을 보며 인사를 올렸다. 그들로서는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르딘은 부담스럽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최대한 호의를 보이면서도 위엄이 깃든 모습을 보여주었다.
필리언과 투르, 사이론, 고트 역시 가르딘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괜히 입을 열면 수준 낮아진다. 이럴 때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보는 사람들에게 무게감을 줄 수 있다.
가르딘은 가장 큰 대로변을 따라 황궁으로 이동했다. 귀족들이 이동하는 대로변이라 일반 평민들은 도로의 양끝으로 움직여야 한다.
황도에 도착한 가르딘은 피닉스가 정교하게 그려진 골드패를 받았다. 황궁에 출입하는 자의 등급에 따라 패가 주어지게 되어 있었다. 골드패는 특급에 해당하는 패로, 웬만한 곳의 출입은 모두 가능하게 해준다. 또한 황궁의 귀빈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골드패는 최소 후작급 이상만이 가질 수 있다. 가르딘은 황궁의 특급 객실을 배정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특급 객실은 제국의 공작과 후작이 자리할 수 있는데, 반대쪽에는 타 왕국의 왕자와 공작이 배정받도록 되어 있다.
황궁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공터가 보였다. 공터의 왼쪽으로 들어가야 객실로 들어갈 수 있는 복도가 나온다. 시녀의 안내를 따라 복도의 끝에 있는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르딘은 필리언, 투르와 같이 묵고, 고트와 사이론, 기사단은 밖에 묵도록 해놓았다. 기사단까지 특급 객실로 모두 들어올 수는 없었다. 기사단이 묵을 수 있는 숙소는 따로 배정이 되어 있었다.
가르딘은 숙소에 들어와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특급 객실에 머물 수는 없어도 귀족들 간의 이동은 자유로운 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르딘이 왔다는 것을 안 귀족들이 문안 인사를 왔다.
“가르딘 후작님을 뵙습니다.”
“반갑네.”
“시간이 되시면 후일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를 좋게 봐주어서 고맙네.”
“후작님이야말로 제국의 내전을 종결시킨 장본인이십니다.”
귀족들의 인사말은 대충 모두 같았다. 가르딘은 귀족들의 호의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괜한 다툼거리를 만들어놓을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지금 당장의 계급 자체는 낮을지 몰라도 후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더군다나 지금은 카니발 백작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 상태다. 카니발 백작의 세력을 형성시켜 기반을 다져놓는 데 주력해야 했다.
“내가 가급적 자주 황궁에 오겠지만 거리가 너무 머네. 카니발 백작을 잘 좀 도와주었으면 하네.”
“물론입니다.”
적은 적을수록 좋고, 아군은 많을수록 좋다. 가르딘은 그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주었다. 물론 그들에게 별다른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귀족은 역시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가르딘을 찾아왔을 뿐이다. 그저 서로의 권리를 유지하며 같은 길을 가면 되었다. 때마침 카니발 백작이 가르딘을 찾아왔다.
“인사들 하게.”
“카니발 백작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가르딘은 카니발 백작에게 호의를 더 보였다. 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편이다. 객실에 차를 시켜 담화를 나누었다. 귀족들에게 카니발 백작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화를 유도했다.
든든한 배경이 없을 때는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카니발 백작에게는 가르딘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그의 말에 담긴 힘이 결코 작지 않음을 귀족들은 느낄 수 있었다. 카니발 백작의 카리스마가 조금씩 발휘되었다. 귀족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대하는 것이 상당히 노련했다.
귀족들은 카니발 백작의 능력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운이 좋은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능력이 있는 자가 적이라면 경계하겠지만 함께하는 자라면 달랐다.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보세.”
귀족들이 가고 난 후 방 안에는 선물이 남겨져 있었다. 가르딘과 우호를 나누기 위해서 보낸 뇌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이 나가자마자 필리언이 선물을 뜯어보았다. 상자 안에 돈을 비롯해서 귀금속, 골동품이 있었다. 제법 많은 귀족들이 왔다 가서 그런지 상당한 액수였다.
“칼튼 자작은 성의가 부족한데.”
“뭘 가져왔는데?”
“찻잔.”
“카니발, 얼마짜리냐?”
“그래도 호의로 가져온 건데 가격을 매기는 것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시끄러. 돈이 호의야.”
뇌물 싫어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다. 적당한 뇌물을 받아주는 것도 인간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올바른 지름길이다. 너무 깨끗하면 물고기들이 살지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오히려 적대감만 생길 뿐이다.
“나는 네게 배경과 사람을 줄 거야. 그걸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모두 네 몫이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황도에 하루속히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후작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가르딘은 속내를 조금 드러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카니발 백작이 중도를 지켜준다면 문제는 되지 않는다. 가르딘이 귀족들과 오래 대화를 나눈 것도 그들의 속내와 심증,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한 번 보고 그들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카니발 백작에 비해 그들은 아직 애송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야 내가 더 편하지.’
카니발 백작의 세력이 커질수록 가르딘은 편해질 수 있다. 모든 일을 카니발 백작에게 떠넘기면 그만이었다. 후일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가르딘은 조금씩 카니발 백작을 수족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고 있었다.
‘진실을 약간 말해 주어야겠지.’
나중에 발키리 영지로 데려와서 진실을 맛보기로 보여줄 생각인 가르딘이다. 세력이 커졌다고 딴 생각하면 골치 아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파앙!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는 그는 옷의 이곳저곳이 베어져 있었다. 검술대결을 막 끝내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땀과 핏물이 버무려져서 귀족의 품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부단장님이 여긴 웬일입니까?”
객실로 들어온 사람은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그는 가르딘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르딘은 무슨 이유인지 몰라 물었다.
“이유를 모른단 말이냐!”
“밑도 끝도 없이 화내면 제가 어떻게 압니까?”
“마이어 공작님에게 아주 자알 말했더군!”
“아! 만나셨습니까!”
가르딘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이 어찌 된 것인지 능히 짐작이 갔다. 마이어 공작은 성격상 길게 시간을 두고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황도에 오자마자 일을 벌인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바자바인 후작으로서는 때 아닌 봉변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찾아와서 대뜸 검술 대련을 하자고 하는데 물리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상대는 바자바인 후작보다 높은 공작이니 말이다. 또한 거절한다고 해서 물러설 상대도 절대 아니다.
가르딘은 일의 전말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 능청스럽게 대답을 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면서 발뺌을 하겠단 말인가!”
“저는 그저 제 검술의 바탕을 바자바인 후작님께 배웠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게 잘못된 말입니까!”
“그건......!”
쳇!
할 말 없어지는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바자바인 후작은 대련으로 인해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마이어 공작의 사납고 광폭한 공격을 받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저 겉치레식 대련을 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살벌한 대련을 하며 간신히 방어를 해 내었지만 똥줄이 타는 경험을 해야 했다. 대련이 끝난 후 마이어 공작이 한마디 했다.
“과연 가르딘 후작이 말한 대로 방어형 검술의 극의라고 할 수 있구먼.”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이 모든 개고생이 가르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너무 흥분해 있었다. 전후의 사정을 파악했더라면 말문이 막히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사실대로 대답을 했을 뿐입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하고 있는 줄 처음 알았네! 뿌득!”
“저는 마음속으로 항상 부단장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어디 그 마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지켜보겠네.”
“일편단심이야말로 제 신념입니다.”
가르딘의 능청스러운 말에 바자바인 후작의 안면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여기서 흥분하거나 화를 내면 진다는 것을 바자바인 후작도 알고 있다. 최대한 쿨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을 했다. 억지로 냉정한 척하려고 하니 얼굴에 잔 경련이 일어났다.
“어디 누가 이기나 끝까지 가보지.”
“저는 승패에 연연하거나 뒤끝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호오! 그러셔.”
“부단장님은 아닙니까?”
“나도 물론 아닐세. 오늘은 그저 자네가 왔다기에 인사차 들른 것뿐일세.”
“제가 무척 반가웠던 모양입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오신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주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네!”
뻔뻔하게 대답하는 가르딘이 어찌나 얄미운지 한 대 치고 싶어진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가르딘의 심기에 불기름을 부어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번에는 한 방에 훅! 보내주마!’
꽈당!
바자바인 후작은 거칠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가르딘은 한숨을 쉬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결코 쉬운 상대라 할 수 없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이 되지만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까지 예상하기는 어렵다.
“카니발!”
“예, 후작님!”
“웬만하면 저 인간은 친하게 지내지 마라.”
“바자바인 후작은 실세가 아닙니까!”
“실세는 무슨.”
카니발이 바자바인 후작하고 같이 지내다가 성정이 비슷해질까 봐 걱정이 된다. 똥은 곁에 두어봤자 똥이다. 아무리 포장해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기 마련이다.
“내일부터 공작님들을 보러 가야 하니까! 카니발은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해. 나이가 들어도 그분들은 만만치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분들에게 잘 보이면 네 미래는 탄탄대로일 거다.”
가르딘이 전하는 ‘아부의 정석’이 카니발 백작에게 전수되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가르딘은 러쉬 황자와 파스트론 공작, 발리스타 공작을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가르딘의 움직임에 귀족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제국의 실세와 떠오르는 실세의 만남이기에 귀추가 주목되었다.
가르딘은 황자와 공작을 만날 때 카니발 백작을 소개시키며 그의 능력을 알렸다. 멍석을 깔아주어도 정작 당사자가 능력이 있어야 한다. 능력이 없다면 소개시키나 마나였다.
카니발 백작은 황자와 공작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소신껏 자신의 주관을 잃지 않고 말을 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대화를 나눌수록 카니발 백작이 예상보다 더욱 뛰어난 인재라는 판단을 내렸다. 특히 다마트 황자의 군대를 막을 때 보여주었던 전략전술은 정말 탁월했다.
가르딘은 마지막으로 마이어 공작에게 찾아갔다. 나머지 귀족들이야 알아서 찾아와야 했다. 이제 가르딘은 그럴 짬밥이 되었다. 이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는 것이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네.”
“저도 반갑습니다.”
“자네의 말대로 바자바인 후작의 방어형 검술은 대단했었네. 제법 즐거운 대결이었어.”
“공작님이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바자바인 후작도 영광으로 알 겁니다!”
“그보다 상처는 이제 아프지 않은가.”
“공작님의 배려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다행이군. 나중에 다시 한 번 대결을 해보세.”
“영광입니다.”
가르딘은 마이어 공작과 형식적인 대화를 나눈 후 곧바로 특급 객실로 돌아갔다. 하루 종일 황자와 공작들을 만나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였더니 쉬고 싶어졌다.
카니발 백작은 지금도 황궁에 모인 귀족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우호를 다졌다. 가르딘이 부여한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카니발 백작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이 가득 찼다.
가르딘이 객실로 돌아와서 쉬고 있을 때 아이시런 공주의 전속 시녀장 엘리언이 찾아왔다. 엘리언이 가르딘에게 인사를 하고 서신을 전했다.
가르딘은 엘리언이 왔다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생각해 보니 아이시런 공주에게는 가보지 않았다. 그에 대한 보복성 서신이 온 것이 아닌가 고민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궁에 왔으면 가장 먼저 찾아와야 할 것 아니에요!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 거예요. 이하 생략!
장문의 서신이지만 내용은 한 단어로 함축되어 있었다. 빨리 오지 않고 뭘 하냐는 뜻이다.
가르딘으로서는 난감한 일이다. 아이시런 공주를 잊었다기보다는 따로 만나는 것 자체가 꺼려지기 때문이다. 공주와 엮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기 어렵다. 항상 어려운 난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가르딘만 골치 아프다. 또한 애 딸린 유부남이 단독으로 공주를 대면하는 것도 주위 시선이 걸린다.
‘나만 나쁜 놈 되는 것 아냐!’
가르딘은 공주에게 어떤 사심도 없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할까!
결론을 말하면 아닐 수도 있다. 무언가 흑심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남자는 젊으나 늙으나 아름다운 여자를 마다하는 경우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황궁에 보는 눈도 많은데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잘못하면 러쉬 황자에게 밉보이는 수가 있다. 이제까지 쌓아놓은 이미지가 한 번에 박살 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곧 간다고 전해 다오.”
“빨리 오시지 않으면 각오하시래요.”
“그...러냐.”
가르딘은 엘리언을 따라가는 게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차라리 공주가 불러서 가는 것으로 보이는 게 낫지, 따로 찾아가는 것은 보기가 좋지 않았다. 가르딘이 곧장 따라가려 하자 엘리언이 힐끔 쳐다보았다.
“왜 그러냐?”
“빈손이네요.”
“뭐?”
“그냥 그렇다고요.”
공주를 만나러 가면서 빈손으로 간다는 것이다. 가르딘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엘리언이 보기에는 좋지 않았다. 귀족이 아름다운 공주를 찾아가는데 선물도 없이 가는 것은 품위가 떨어진다 보았다. 다른 귀족들은 공주가 불러주기만 하면 선물을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가르딘의 무성의함을 질타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달라는 것보다 더 무섭군.’
가르딘은 엘리언이 얄밉기까지 했다. 일단은 궁색하지만 선물을 가져가는 게 현명할 것이라 판단했다. 항상 아이시런 공주와 함께 있는 엘리언이 나중에 무슨 말을 할지 감당이 되지 않는다.
때마침 칼튼 자작이 남기고 간 쓸모없는 찻잔이 가르딘의 눈에 보였다. 그걸 들고 가려 하자 엘리언의 날카로운 시선이 작렬했다.
“공주님의 찻잔은 모두 최상급인데요. 그건 상급밖에 되지 않네요.”
“차 마시는 찻잔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
“무슨 그런 무책임한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나요. 차를 즐기는 귀족으로서 찻잔의 등급은 품위와 명예를 나타내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주님이 만약 그런 저급한 찻잔에 마시는 걸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그 뒷감당을 어찌할거예요.”
꾸욱!
가르딘은 주먹을 힘껏 쥐며 참을 인 자를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겼다. 가르딘은 찻잔이나 골동품에는 관심도 없다. 실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능적이고 돈이 되는 것들만 원한다.
‘고작 찻잔에 명예는 무슨! 명예가 찻잔에 왜 들어 있어!’
가르딘은 망설여졌다.
돈이 되면서도 화려한 장식품을 선물로 받은 것이 있었다. 뛰어난 세공술로 만들어진 귀걸이로, 그 재료는 금과 은, 보석류, 파이럴까지 조금 섞여 있었다. 장인이 만들어놓은 것이라 팔면 상당한 액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라이나 갖다 주려고 했는데.’
나중에 라이나에게 선물로 주려고 한 것이다. 딱 보기에도 괜찮은 것이었다. 웬만하면 무시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같잖은 것에 손이 가자 어김없이 엘리언의 날카로운 시선이 쏘아졌다. 눈에서 오러블레이드가 뻗어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걸 콱!’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가르딘은 마지못해서 귀걸이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엘리언의 눈빛이 온화해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공주님도 대충 마음에 들겠네요.”
“그러냐.”
‘대충 한 번 맞아볼래!’
보기만 해도 비싼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 여자들에게는 있는 것 같았다. 싸구려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비싸고 고급스런 물건을 싫어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건 아마 여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꼭 아랫도리를 확인해 보기 바란다. 형편이 어렵기에 괜찮다고 마다할 수는 있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원하고 있을 것이다.
쉬이이익!
가르딘이 잡고 있던 탁자의 모서리에 연기가 나면서 타기 시작했다. 확 달아오르던 가르딘이 노기를 참지 못하고 삼매진화를 일으킨 것이다.
엘리언은 연기가 나자 곧 물을 부었다.
솨아아악!
“겨울이라 불이 잘 나네요.”
“그렇구나.”
“건조할 때는 불조심해야 해요.”
“알고 있다.”
엘리언은 물을 부었지만 가르딘의 마음에는 기름이 부어졌다. 열 뻗치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난 후 공주에게 가려고하자, 엘리언이 다시 한 번 지적을 했다. 후작에게 감히 대놓고 지적질을 하고 있었다.
“꽃도 없이 가시는 건가요?”
“꽃은 왜?”
“요즘 공주님이 우울해 하시는 것 같아요. 공주님은 프리지안을 상당히 좋아하시는데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아마 상관이 있을 텐데요. 공주님이 우울하면 어디로 튈지 모르시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러냐!”
프리지안은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꽃으로 다섯 가지의 색이 오묘하게 조합이 되어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또한 꽃의 향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효능이 있다.
가르딘도 프리지안이 어떤 꽃인지는 알고 있었다. 젊었을 적 라이나에게 선물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프리지안은 대단히 비싼 꽃이었다.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한정 수량 판매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겨울이었다. 남부지방의 꽃을 구하려면 보존 마법이 걸린 것을 사야 한다. 가격이 두 배 이상 비싼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주 뽕을 뽑는구나!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들이대는 거야.’
엘리언은 딱히 가르딘에게 원한은 없다. 다만 브리안에게 당한 개망신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가르딘을 보자 당시의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시녀장으로서의 지적인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져 버린 일에 대한 여인의 소심한 복수였다.
가르딘은 사이론에게 프리지안을 사오라고 시켰다. 한 시간이 흐른 후에 사리론이 꽃을 사들고 왔다.
“이제 됐냐?”
“조촐하지만 구색은 잡혔네요.”
‘조촐? 이게?’
일반 평민이 1년 동안 배 따뜻하게 지내도 될 돈을 몇 배 이상 초월했는데 고작 구색을 맞춘 정도가 되었다. 가르딘으로서는 짜증이 치밀어 오를 만도 했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이미 준비하는 데 돈을 써버리고 난 후다. 일단 시작하면 군말하지 않는 게 낫다. 나중에 그런 말을 해봤자 궁색해 보인다.
준비를 마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엘리언을 따라 아이시런 공주를 만나러 갈 수 있게 된 가르딘이다.
‘빨리 오라는 게 맞는 건가?’
엘리언이 왔을 때 갔으면 이미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시런 공주는 황궁의 동쪽에 있는 작은 별궁에 머물고 있었다. 작다고 해도 황궁 전체적인 규모에 비해 작다는 것이지 일반적인 귀족들의 집보다는 훨씬 크다. 사람의 지위마다 생각하는 스케일이 다른 것이다.
엘리언이 앞장서 가고 그 뒤를 가르딘이 의젓하게 걸었다. 속은 별로 좋지 않지만 겉은 멀쩡했다.
반면에 사이론은 귀걸이와 꽃을 들고 가르딘의 뒤를 따랐다.
‘나는 왜?’
덩달아 사이론도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기사들과 수련하다 호출받아서 한 일이 꽃을 사오는 일이었다. 차기 용병왕으로 거론되는 광속의 용병 사이론은 쪽이 팔렸다. 그러나 안 사오면 가르딘의 눈총을 받는다. 후환이 두렵기에 빛살보다 빠르게 달려 꽃을 사와야 했다.
아이시런 공주가 머물고 있는 별궁은 아름다웠다. 그녀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전체적인 미적 감각이 대단히 뛰어난 건축 구조다. 정원의 조경과 바닥의 길, 건물의 구조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반대쪽에 대치하는 툭 튀어나온 건물의 모양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부조화와 조화가 잘 조합된 건축물이 아닐 수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보다 건물을 지은 건축사의 노력이 돋보였다.
별궁 안으로 들어간 가르딘은 긴 통로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 아이시런 공주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새하얀 빛이 들어왔다. 빛은 창가에 비추어진 햇살이 반사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시야를 가리던 빛이 사라지고 난 후 그 빛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탁자에 팔을 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신 그 자체였다. 선과 선을 따라 미끄러지는 그녀의 굴곡진 몸매와 조각 같은 미모는 사람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그녀가 입고 있는 옷조차 실로 눈부실 정도다.
멍!
한 차례 보기만 했지만 역시나 적응되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사이론은 눈을 감히 마주치기 힘들었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표정 변화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아이시런 공주의 부름을 받고 온 형식적인 표정이었다.
‘대단하다!’
사이론은 새삼 가르딘이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야말로 검을 수련하는 자에게 필수적인 요소다. 일루젼 마법에 걸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아이시런 공주의 아름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가르딘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반면에 엘리언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뾰로통했다. 모든 사내에게 연모의 정을 느끼게 만드는 아이시런 공주의 미모가 가르딘 앞에서는 너무 평범해졌다. 그것이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이다.
‘흥!’
가르딘은 엘리언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아이시런 공주의 의도였다. 무슨 의도로 자신을 불렀는지 고민을 하느라 다른 곳에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부족하지만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가르딘이 귀걸이와 꽃을 아이시런 공주에게 건네주었다. 공주가 귀걸이와 꽃을 잠시 보더니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보다 더한 선물도 많이 받아보았기에 감흥은 없는 것 같았다.
“후작의 말대로 부족해 보이긴 하네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성의를 봐서 받아줄게요.”
“감...사합니다.”
부족하다는 말에 다시 빼앗고 싶은 충동이 드는 가르딘이다. 가르딘은 준 걸 다시 빼앗을 수 있는 좁쌀만 한 아량이 있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낮은 계급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이시런 공주는 운이 좋았다. 가르딘보다 계급이 높으니 말이다.
“엘리언은 잠시 나가 있어.”
“예, 공주님!”
가르딘의 뒤에 서 있던 사이론은 멀뚱히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쯤 혼이 나가 있는 것 같았다. 공주와 가르딘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한 사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이론, 잠시 나가 있어라.”
“예? 아! 예!”
사이론은 허둥지둥 대며 밖으롤 나갔다.
둘만 남게 된 가르딘과 아이시런 공주는 차를 한 잔씩 마시면서 시간을 죽였다. 별다른 말이 없는 상태였다.
“간만에 만났는데 할 말이 없나요?”
가시가 돋친 아이시런 공주의 말투였다. 그녀의 쏘아붙이는 태도는 여전했다.
가르딘으로서는 할 말 없는 게 당연했다. 호출을 한 사람은 아이시런 공주였다. 부른 사람이 먼저 말을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가! 논리적으로 따지면 그렇지만 세상사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공주가 물었으니 대답을 해야 했다.
“혼기가 차신 공주님을 제가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만.”
“주위 시선이 후작님을 부담스럽게 한다는 뜻인가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크! 호호호호!”
갑자기 아이시런 공주가 깔깔대며 웃어젖혔다. 그녀는 이제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웃기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 아이시런 공주는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가르딘은 갑자기 웃는 아이시런 공주의 모습에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뭐가 말이 안 됩니까! 제가 이래 봬도 오러마스터입니다. 더군다나 후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유부남에다가 나이가 많잖아요. 어딜 봐서 저랑 어울린다고 생각하겠어요. 설마 다른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네요! 호호호호!”
‘음!’
아이시런 공주의 말에 가르딘은 심각하게 고민을 해보았다. 가르딘의 외모는 잘생겼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못생긴 것은 아니다. 또한 나이가 마흔이기는 해도 아직 그 정도로 늙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수명도 훨씬 길다. 아직은 청춘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서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능력을 소유했다고 자부했건만 아이시런 공주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가르딘도 사람이기에 주관적인 성향이 강하다. 객관적으로 돌아볼 여력이 필요하다.
‘그렇겠군.’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른다는 가르딘의 고민이 너무 앞서 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 가르딘이다. 주변 시선이 신경 쓰였는데 홀가분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오해를 받지 않아서 좋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가르딘이 단호하게 말하자 아이시런 공주는 서운함을 느꼈다. 자신과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 자체가 영광인 사람들이 4열종대로 연병장 200바퀴는 될 것이다. 그런데 가르딘은 그런 자들과는 틀렸다. 언제나 부인만을 생각하는 팔불출 아저씨였다. 괘씸한 마음이 든다. 여인의 마음을 외면하면 대가가 크다는 것을 가르딘은 알아야 했다.
“정말인가요?”
다시 한 번 아이시런 공주가 물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대답이 나오면 큰일이라는 것을 가르딘은 알지 못했다. 여자관계는 라이나가 끝인 가르딘이다.
“한결 마음이 편합니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어서 부르신 것입니까?”
“이번에 발키리 영지에 다시 한 번 가보려고요.”
움찔!
정신이 바짝 든 가르딘이다. 솔직히 지금 가장 놀랐다.
“저번에 다 둘러봐서 이제는 볼 것도 없습니다.”
“볼 게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판단해요.”
“그 먼 데까지 고생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냥 바람 쐬러 간다고 생각하면 돼요.”
“찬바람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오지 말라는 투로 들리네요.”
“찬바람 맞으시면 감기 걸리십니다. 그러다 전이라도 되는 날에는 엄청나게 고생하실 수도 있습니다. 전적으로 공주님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남 걱정하지 말고 후작님이나 걱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황자님이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마지막 희망은 러쉬 황자다. 혼기가 꽉 찬 공주를 밖으로 싸돌아다니게 두는 것은 오라비로서 할 짓이 아니다. 집에다가 고이 모셔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싸돌아다녀 봤자 괜한 헛바람만 든다. 아무것도 모를 때 혼인시켜 버리는 것이 현명했다.
“이미 허락했어요.”
“설마?”
“황위에 등극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준다고 했거든요.”
“그런 무책임한!”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는 멋있을지 몰라도 무슨 소원을 빌지 누가 알겠는가!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가르딘이라면 상관없지만 러쉬 황자의 경우는 틀렸다. 웬만하면 들어주려고 할 것이다.
“눌러 살 수도 있어요.”
‘헛!’
오늘 여러 번 놀라게 만드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가르딘의 영지에 눌러 산다고 살 수 있는가! 약속이라고 해도 지킬 수 있는 약속과, 지킬 수 없는 약속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공주가 발키리 영지에 눌러 살면 러쉬 황자가 가만히 있을 것인가! 공주에게는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못하기에 가르딘을 압박할 것이 분명하다. 애꿎은 자신만 고생하게 된다는 소리다.
“농담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시껍할 소리는 적당히 하지.’
하고 못 하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주가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점점 부담이 되고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계속 찾아간다는 것은 어딘지 수상해 보이기 때문이다. 의심하기 좋아하는 귀족들은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다.
“전공을 많이 세우셨다면서요.”
“제가 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여전히 겸손하네요.”
“명을 이행할 뿐입니다.”
“황도에는 얼마나 머물 건가요?”
“즉위식이 끝난 후 며칠 있다가 갈 생각입니다.”
“부인 때문에 빨리 가는 건가요!”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앞에서도 부인을 생각한 사람은 가르딘 후작뿐이에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가르딘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라이나였다. 라이나만이 가르딘이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아이시런 공주가 앞에 있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다. 부정하려 할수록 괴로울 뿐이다.
“제국의 오러마스터가 팔불출이라면 누구도 믿지 않겠죠.”
“공주님의 내숭에 비하면 저는 한 수 아래입니다.”
“절 자극하면 곤란할 텐데요.”
“저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이시런 공주는 속마음을 숨긴 채 살아가야 한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입장에 처해 있다.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반면에 가르딘은 그녀의 진실된 이면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자였다. 무엇을 말해도 편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아이시런 공주는 가르딘을 만나고 싶었다. 장난도 치고, 오기도 부릴 수 있는 자는 이제 가르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던 아이시런 공주와는 다르게 진땀을 뺀 가르딘이다. 계급이 깡패라고 말을 한 번 잘못하면 꼬여서 풀기 어렵게 되었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아쉽네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아쉬운 이별을 한 아이시런 공주와 골치를 떠안은 가르딘의 상반된 마음이 교차하였다.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되는 날이 밝아왔다. 카이로만 대제의 거대한 동상이 자리한 광장은 새롭게 단장이 되어 더욱더 화려하면서도 넓어졌다.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즉위식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아침부터 인파가 몰려 광장 안을 가득 메웠다. 추위조차 즉위식의 열기를 식혀주지는 못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조차 이때다 싶어 한몫 잡기 위해서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웅성! 웅성!
즉위식 전에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서 기사들과 병사들이 먼저 단상과 주변을 에워쌌다. 황자와 귀족들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축제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황제의 즉위식이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준비된 병사들이 구석구석에 배치가 되었다.
서서히 태양이 솟아올라 하늘의 정중앙으로 향해 갈 때 각국의 사신들과 귀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들과 사신들은 각각 지정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부우우우우우우웅!
긴 나팔 소리가 울렸다.
황제로 등극하게 된 러쉬 황자가 드디어 모든 사람 앞에 나서게 되었다. 러쉬 황자가 지나가는 길마다 제국민들이 열렬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러쉬 황자는 카이로만 광장의 단상 위까지 몸소 걸으며 제국민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례를 해주었다.
러쉬 황자는 만면에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제가 되는 날이기에 긴장할 수도 있건만 제왕의 기품이 절로 풍겨 나왔다. 만인을 굴복시키는 제왕의 피가 러쉬 황자에게 이어졌다는 반증이다.
뚜벅! 뚜벅!
러쉬 황자는 단상 위에 다다르자 감회가 새로웠다.
‘드디어 왔구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또한 시련을 겪고 이 자리까지 왔다. 무수히 많은 난관을 헤치고 절대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제국의 앞날이 결정될 것이다.
러쉬 황자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 마이어 공작을 위시한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이들과 함께 제국의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신성제국의 프리먼 대신관이 먼 길을 여행하여 어젯밤에 도착했다. 황제의 즉위식은 예로부터 신성제국의 대신관이 주관하였다. 대신관은 황제의 관을 후계자의 머리에 씌워주도록 되어 있다.
바이멘 후작이 즉위식의 시작을 선언하였다.
“대륙의 지배자이자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카이로만 제국 황제 폐하의 즉위식을 거행하는 바이다!”
와아아아아아!
함성 소리가 광장 안을 휘몰아쳤다. 함성 소리가 울려서 안으로 모였다가 다시 퍼지도록 광장이 설계되어 있었다. 제국민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들의 열망과 염원이 모두 러쉬 황자에게 쏠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든 이들이 열정적으로 환호성을 내지를 때 가르딘은 의례적인 박수를 치고 있었다. 러쉬 황자가 황제가 된 것이 다행이기는 하지만 광장 안에 모인 제국민들만큼이나 열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자신을 피곤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황제는 누가 됐든 상관없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지루하다.’
즉위식이 끝날 때까지 지루한 표정도 지어서는 안 된다. 졸리다고 하품이라도 하는 날에는 주변 귀족들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가르딘은 여느 때처럼 심공을 분리하여 생각을 이등분하였다. 눈은 멀쩡히 떠 있지만 마음속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이나와의 즐거웠던 일을 회상하며 되씹었다.
즉위식이 차츰 더 고조되고 있었다. 황제가 되기 전 약속의 서약을 하게 되어 있다. 러쉬 황자는 카이로만 제국의 초대 황제가 남겨준 서약을 제국민들 앞에서 약속하였다. 서약이 끝나고 난 후 프리먼 대신관이 러쉬 황자에게 황제가 되었음을 인정해 주었다.
“미드라이언 대륙의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신 라이니언께서 러쉬 황제의 앞날을 축복해 주실 것이다! 이로써 카이로만 제국의 황제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바이다!”
착!
프리먼 대신관이 황제의 관을 러쉬 황자의 머리에 씌웠다. 러쉬 황자는 이로써 진정한 황제가 된 것이다.
러쉬 황자가 카이로만 제국의 21대 황제로 등극하였다. 광장 안의 모든 이들이 일어서서 러쉬 황제의 등극을 경하하였다. 황제가 된 러쉬 황자는 모든 이들의 염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바람대로 제국의 번영을 이룩할 것이다.
“짐이 제국의 황제로 있는 한 카이로만 제국은 영원히 번영할 것이다!”
차아앙!
카이로만 제국을 상징하는 카이로만 대제의 검이 러쉬 황제의 손에 의해 뽑혔다. 햇살에 반사된 검이 광장 안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러쉬 황제의 위엄이 사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황자의 위치와 황제의 위치는 전혀 달랐다. 사람이 아닌 지위만 바뀌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러쉬 황자님의 등극을 감축 드립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무릎을 꿇자 모든 귀족들이 무릎을 꿇었다. 입에 발린 말은 적당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귀족들의 연례행사가 끝이 나자 각 왕국의 사신들이 선물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와서 러쉬 황제의 등극을 감축하였다. 왕국이라서 그런지 스케일이 엄청났다. 마차에 가득 담긴 선물이 줄을 이었다.
가르딘의 시선이 선물로 향했다.
‘이틀 전에 받은 것은 쨉도 안 되는군.’
가르딘이 받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이다. 괜히 초라해지고 있었다. 이럴 때는 황제가 조금 부럽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황제는 수명이 짧다. 신경 쓰는 일이 많기에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이다. 가늘고 길게 살아가는 것을 최고로 치부하는 가르딘으로서는 원하지 않는 자리다.
‘음! 코카 왕국도 왔네.’
의외로 코카 왕국에서도 사신이 왔다. 제국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신을 보내온 것이다. 카이로만 제국과 우호를 다져서 타 왕국과 교류를 트려는 목적이 컸다.
사신으로 온 자는 하이카인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휼턴 공작이었다. 코카 왕궁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재상이 왔으니 부족하지는 않았다.
“제국의 지배자이신 카이로만 제국의 러쉬 황제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제국의 번영과 함께 영세를 누리시길 바라겠습니다!”
러쉬 황제가 휼턴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휼턴 공작은 고개를 숙여 신하국임을 자처하였다. 내전이 지속됐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어려운 상황이다.
사실 코카 왕국은 제국뿐만 아니라 타 왕국의 견제까지도 받고 있었다. 힘을 계속 모으고는 있지만 실상은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갔다. 코카 왕국이 제국으로 부활하는 것을 대륙의 모든 국가들이 견제하고 있었다.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을 한다면 짐이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과거와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음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황제 폐하의 말씀을 뼛속 깊이 간직하겠나이다!”
휼턴 공작은 진정으로 뉘우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겉과 속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내면에 숨죽이고 있는 칼 같은 분노를 차분하게 다스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무너뜨리고 말겠다.’
러쉬 황제는 더 이상 휼턴 공작을 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다른 왕국과 같은 위치일 뿐이다. 그러나 러쉬 황제는 잊지 않았다. 코카 왕국은 절대 다른 왕국과 같을 수 없다. 그들이 가진 저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짐이 있는 한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코카 왕국을 당장에라도 무너뜨리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정을 다스리는 게 먼저였다. 내전 시 발생한 손실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 만약 마이어 공작과 결전을 벌였다면 제국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가르딘은 러쉬 황제와 휼턴 공작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가르딘도 짐작이 갔다. 언제 다시 전쟁을 치를지 모르지만 그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 보았다.
‘골치 아프군.’
서로 치밀한 머리싸움이 시작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즉위식은 마무리가 되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논공행상뿐이었다. 내전을 종결시킨 실세를 비롯한 귀족들의 전공을 치하해 주어야 했다.
논공행상이 시작되자 귀족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새로이 황제로 등극한 러쉬 황제가 처음으로 개최하는 논공행상의 자리다. 처음인 만큼 의미가 크다. 또한 러쉬 황제의 신임을 얻는 자리이기도 했다. 귀족들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컸다.
가장 큰 공을 세운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에게 타이가라 공작의 영지와 네벨리언 공작의 가장 중요한 영지를 선사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영지가 왕국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의 위치가 대공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대공은 한 지역의 왕이나 마찬가지다. 자치권을 인정받은 대공은 황제를 제외한 가장 강력한 실세였다. 황제가 자리를 비울 시 임시로 제국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는다. 황족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 이만한 권한을 준 적은 카이로만 제국에서는 흔치 않았다.
러쉬 황제가 두 공작에게 대공의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짐의 가장 큰 버팀목이 되었던 두 공작에게 대공의 자리를 수여하노라!”
척!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다짐했다.
“황제 폐하의 성은에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보답하겠나이다!”
카이로만 제국에 두 명의 대공이 탄생한 날이다. 만인지상일인지하의 지엄한 위치에 올라선 그들도 이제와는 또 다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형식적인 지위와 실질적인 힘이 서로 결합을 하게 되었다.
가르딘은 러쉬 황제가 두 공작에게 대공의 자리를 준 것을 보고 조금은 놀라는 눈치였다. 제국은 내부의 분열을 초래할 소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되도록 공국의 지위를 인정해 주지 않는 편이다. 헥토르 왕국을 공국으로 격하시키고 제국의 귀족을 보낸 것도 이후 제국의 영지로 만들기 위한 포섭이었다. 코워드 공작은 코스트너 황제의 뜻과는 다른 엉뚱한 마음을 품다가 가르딘에게 당한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게 남는 인생들이었다.
러쉬 황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포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당장은 공고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후일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망을 얻겠다는 소린가! 하긴 두 공작이 이제까지 해온 일을 영지와 돈으로만 해결할 수 없었겠지.’
제국전에 이어 내전까지 큰 공적을 세운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의 믿음을 지위의 상승도 없이 얻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귀족 세력이 두 공작의 휘하에 있는 상태다. 그 두 사람을 잃게 되면 내전의 성과도 없이 또다시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러쉬 황제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후에 황권을 강화하면서 점차적으로 세력을 끌어 올 것이 분명하다. 제국의 기본 척도는 황권의 강화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는 제국의 초석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번영은 꿈도 꿀 수 없다.
가르딘의 시선이 마이어 공작에게 향했다. 제국 5대 공작에 속했던 마이어 공작이다. 그가 이번 결정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의외로 마이어 공작은 침착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겠지.’
제국의 역적이나 다름없는 다마트 황자를 지지했던 마이어 공작이다. 사실을 몰랐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의 지위를 인정해 주는 것만 해도 많은 것을 받은 것이다. 지위를 얻지 못해도 마이어 공작이 북방의 수장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가 가진 지위를 잘 활용하여 힘을 키우고 세력을 만든다면 충분히 더 큰 지위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앙의 귀족들과의 정쟁은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두 공작에게 대공의 작위 수여가 끝나고 다음 전공 수여자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바이멘 후작.
-바자바인 후작.
-가르딘 후작.
당연히 나와야 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불려졌다. 바이멘 후작이 올라서자 그 뒤를 따라 바자바인 후작과 가르딘 후작이 나란히 러쉬 황제에게 걸어갔다. 가르딘과 바자바인 후작 간의 신경전이 지속되었다. 둘 사이에 암묵적으로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누가 더 유리한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발을 걸어버릴까!’
가르딘은 바자바인 후작이 단상 위에서 구르는 모습을 상상하며 발을 걸고 싶은 무지막지한 충동을 느꼈다. 상상을 해보아라. 황제와 모든 귀족, 제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후작이 나뒹구는 모습을.
‘이거 상상만 해도 즐거운데.’
가르딘을 비롯한 두 후작이 단상 위에 올라서 러쉬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그들이 전쟁에서 세운 공적이 공개되었다.
마지막으로 러쉬 황제가 세 후작의 전공을 치하하면서 공작의 지위를 하사하였다. 새로운 공작이 탄생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빠른 승급을 한 사람은 바로 가르딘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공작의 반열에 드는 엄청난 성과를 이룩하였다. 모든 귀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요건을 갖추었다.
‘결국 공작이 되었구나.’
원하지 않는 핵심세력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이후의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카니발 백작을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카니발 백작을 방패막이로 사용해서 모든 일은 그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체제를 만들어놓는 일이 시급했다.
“그대들이 있기에 짐은 든든하도다.”
“성심을 다해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가르딘, 바자바인 공작, 바이멘 공작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러쉬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다. 작위 수여 후에 러쉬 황제는 세 사람에게 영지를 수여하였다.
특히 가르딘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포상에 일순 당혹감이 들었다. 바자바인 공작과 바이멘 공작이 받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포상이었다.
“가르딘 공작에게 헥토르 영지를 포상으로 내리노라.”
러쉬 황제는 헥토르 공국을 헥토르 영지로 격하시켰다. 자치권이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는 헥토르 공국은 제국의 영토에 포용이 되었다. 왕국에서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니 위상이 격하된 것은 두말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영토의 위상이 격하되었더라도 영토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다. 헥토르 영지를 하사 받게 된 가르딘은 제국에서 가장 큰 영지를 가진 귀족이 되었다.
모든 귀족들이 가르딘을 부러워하였다.
반면에 가르딘은 골치가 아파왔다. 영토가 큰 만큼 통제가 잘 되지 않는다. 또한 헥토르 영지의 반란 세력을 모두 정리했다 확신할 수 없는 상태다. 발키리 영지에 산재한 일을 처리하기도 바쁜 상황에서 헥토르 영지까지 관리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다. 발키리 영지로 내려가면 헥토르 영지에 수족들을 파견해야만 한다. 여러모로 가르딘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
‘사람이 부족한데 영토만 주면 되냐! 젠장!’
가르딘은 러쉬 황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반발을 무마하면서도 가르딘의 역량을 테스트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부터 가르딘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또한 헥토르 영지는 제국의 변방이기에 거리가 너무 멀다. 지금 당장 가르딘을 제외하고 영지를 하사할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계산해서 가르딘을 헥토르 영지의 주인으로 선정했다.
공작의 전공 수여가 이루어지고 난 후 두 신성과 백작 위 계급의 수여가 이루어졌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최연소로 후작 위를 받는 기염을 토했다. 고작 약관의 나이에 엄청난 작위 상승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과분하다 여기지 않았다. 스필언과 미토스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모든 이가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족하다면 나머지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다.
주요 상급 귀족의 작위 수여가 끝나고, 하급 귀족들에 대한 전공 수여와 작위 수여는 일일이 부르지 않고 단체로 불러 포상을 주는 식으로 황제의 즉위식이 모두 끝이 났다.
즉위식이 끝나고 나서 광장 안의 제국민들에게 음식과 상품을 나누어주며 황제의 관용과 배포를 보여주었다.
날이 저물자 금세 어두워졌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어둠에 물들어 갈 때 황궁의 연회장은 여전히 찬란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밤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귀족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제국의 연회장은 성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러쉬 황제가 오늘 하루만큼은 마음껏 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 아니더라도 귀족들은 술을 마시며 연회장 안의 분위기를 즐겼다. 그러나 그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도 서로 교분을 나누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귀족들에게 중요한 것은 폭넓은 연줄이었다. 줄을 잘 서느냐에 따라 그들의 미래가 결정이 된다.
가르딘은 파스트론 대공, 발리스타 대공, 마이어 공작과 긴밀한 친분을 유지했다. 제국의 실세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귀족들에게 분란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가르딘은 노력했다. 가르딘은 선망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질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최대한 자신을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황도에 머물지 않을 것인가?”
“최대한 노력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제 영지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황도의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연통을 자주 넣을 수 있도록 하게.”
“공작이라는 과분한 지위를 얻었지만 엄연히 저는 기사입니다.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좋은 말이야.”
가르딘은 최대한 중도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쟁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공작의 지위에 올랐으면 그에 합당한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도태되거나 세력이 약해지면 다른 귀족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정쟁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두 대공은 가르딘의 대처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하군.’
‘기사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가르딘의 신중함과 기사로서의 소임을 높이 평가하였다.
대공과 공작을 만나고 나자, 스필언과 미토스가 찾아와서 인사를 올렸다.
“공작 위에 오르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고맙네.”
스필언과 미토스는 발키리 영지에서 얻은 기연을 제법 갈무리하고 있었다. 가르딘이 보기에 이제는 벽을 넘어선 것이 확실했다.
‘이거 가만히 있다가는 추월당하는 거 아냐!’
두 신성의 성장에 가르딘마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시 볼 때마다 매번 바뀌어 있는 모습이었다. 언제까지 성장할 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다. 10년만 지나면 세상은 괴물을 보게 될지 모른다.
“후작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훨훨 나는 일만 남았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습니다.”
“꾸준히 노력하여 원하던 경지를 넘어서겠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 거냐?’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두 신성의 잣대를 잴 수 없을 것이다.
가르딘은 스필언, 미토스와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아니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춤을 신청하려는 여인들이 줄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 왕국에서 온 공주들조차 스필언과 미토스를 보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가르딘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괜히 가르딘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끌려가자 가르딘은 오히려 편했다. 가끔씩 드는 느낌이지만 스필언과 미토스는 가르딘에게 껄끄러운 대상들이다. 가르딘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지면서 구석 자리로 이동했다.
가르딘은 연회장의 구석으로 이동하면서 필리언과 투르를 찾았다. 필리언은 여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며, 투르는 연회장 안의 음식들을 털어 넣고 있었다.
가르딘의 시야에 카니발 백작이 보였다. 카니발 백작도 가르딘을 보자 곧장 다가왔다.
“왜 구석에 계십니까?”
“난 연회장 체질이 아닌 것 같아.”
“어느 누가 그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카니발 백작은 가르딘이 웃자고 던진 농담이라 여겼다.
“그보다 황도의 귀족들은 어느 정도나 포섭했지?”
“3분의 1 정도는 포섭해 놓았습니다.”
“그중에 유능한 자들은 얼마나 되지?”
“제법 뛰어난 자들이 열 명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들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손발이 되어줄 수 있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테지.”
“물론입니다.”
가르딘은 카니발 백작을 중심으로 신진 세력을 규합하는 일을 추진시키고 있었다. 물론 두 대공과 반대되는 세력을 조직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짓을 하다가는 만들기도 전에 공중분해 되어버리기 쉽다. 두 대공과 공조를 하면서, 실리를 얻기 위해서는 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조직을 구성해 놓으려는 것이다.
황도에 아무런 세력도 없다면 가르딘에게 어떤 힘도 되어 주지 못한다. 행여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될 경우 비호하는 세력이 없어서 곤란함을 겪을 수도 있다. 만일을 대비해서 탄탄한 연대를 구축해 놓아야 했다.
“헥토르 영지를 하사받은 것을 알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인재들이 필요해.”
“그럼 이번에 모집한 자들을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야심을 가진 녀석들이 변방의 영지로 오지는 않겠지. 차라리 몰락귀족이나 황도 정치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좋을 거야.”
“그럼 적당한 자를 구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울 겁니다.”
“그런 자들이 당장 있잖아.”
“설마 네벨리언 공작 휘하의 귀족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하루라도 빨리 헥토르 영지를 귀속시키기 위해서는 제법 쓸 만한 인재가 당장 필요한 상황이야.”
“그럼 수뇌부가 아닌 자들을 엄선해서 만나보겠습니다.”
“발키리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알아봐 주었으면 좋겠다.”
“최대한 시간을 맞춰서 인재를 모집하겠습니다.”
네벨리언 공작가의 직속 휘하 귀족들의 대부분은 아직 건재했다. 네벨리언 공작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힘을 잃었고, 현재는 자중하고 있는 상태다. 시간을 보내며 힘을 키우려고 하겠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두 대공이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두 대공이나 그에 걸맞은 배경을 손에 넣어야 한다. 그들 중에서도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은 함부로 손을 잡기 어렵다. 주변으로부터 오해의 시선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되도록 하급 귀족들 중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찾아봐야 했다.
카니발 백작이라면 가르딘이 챙기지 못한 부분까지 알아서 해결을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