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70/93)

                 가르딘 전기 11 건드리고고   @@[Title [email protected]@]

     @@[제1장 노이무공-나 뭐 한 거니[email protected]@]

  휘이이잉!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어젯밤에 눈이 내리기가 무섭게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쌓인 눈이 빠르게 추워지는 기운에 의해 단단한 얼음 알갱이가 되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 불자 얼음 알갱이들이 수만 개의 칼날처럼 변해갔다.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인 눈들이 한쪽으로 쌓여 사람보다 더 큰 언덕을 만들었다. 사막의 건조함과는 다른 시린 건조함이 느껴졌다.

  쌔애애앵!

  살갗을 에는 바람이 일순간 불었다.

  파네빌트 성 위에서 지상을 순백의 향연으로 만들어놓은 눈을 보면서 가르딘은 멍했다. 아름답다거나 춥다는 느낌은 없다. 다만 공허함이 그 자리를 메울 뿐이다. 어제 회의에서 사신으로 결정되고 난 후 바람은 더 강해지고, 기온은 훨씬 더 떨어졌다.

  눈까지 내리자 가르딘은 짜증이 치밀었다. 가시는 길 눈이나 밟고 가라는 것 같았다. 

  눈은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그 내면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눈길을 걷는 것은 일반 평지를 걷는 것보다 수십 배는 힘들뿐더러, 땀이 나면 최악이다. 그 땀이 식으면 체온이 떨어지고, 동상에 걸릴 수도 있다. 겨울에 군대의 병력 이동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젠장! 하늘만 푸르네!’

  마이어 공작과의 친분이라고 해봤자 몇 번 본 것이 다였다. 그를 만나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20년 동안 게을렀던 벌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고작 3년 동안 평생 해야 할 일을 모두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된다. 그 이후에는 라이나와 안락한 생활을 즐기는 거야!’

  라이나와 브리안을 만나기 위해 다시 한 번 힘을 내자고 다짐하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은 제국과 황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 모든 충성을 바쳤다.

  부르르!

  가르딘의 몸이 추워서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찬바람을 쐬었더니 생리현상이 자연스럽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달을 보면서 우아하게 한 번 싸주는 것도 괜찮았지.’

  세 개의 달이 만삭이 되면 종종 엄청나게 밝게 보일 때가 있다. 그때는 달이 상당히 가깝게 느껴진다.

  예전, 코카 제국과의 결전이 있을 때 잠시 동안 제국의 중요 지점을 관리할 시기가 있었다. 자칫 지루해지는 시간에 생리현상을 해결하며 달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곤 했었다. 둥근 달만큼이나 마음까지도 넉넉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르딘은 곧장 화장실로 가서 볼일을 해결하고 난 후 방으로 들어갔다. 볼일을 봤더니 체온이 급격히 하락했다.

  가르딘의 방에는 두 사람이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골 때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르딘만큼이나 짜증이 난 모양이다.

  “네가 사신이 되면 나도 가야 되잖아!”

  “당연하지.”

  “이런 개빵 같은 일이!”

  “죽지는 않아.”

  “죽는 게 문제야! 귀찮잖아!”

  “그건 어쩔 수 없지.”

  필리언은 오늘따라 자신이 기사단장이라는 것에 회의감을 맛보았다. 가르딘 때문에 자신도 가야 한다. 가르딘도 움직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필리언도 그에 못지않았다. 괜한 일에 나서는 것은 더 싫어한다.

  “거봐! 부단장이 그냥 넘어갈 위인이 아니라고 했잖아!”

  “바자바인 후작이 그렇게 나올 줄 내가 알았냐!”

  “왜 몰라! 유사인종이!”

  “닥쳐! 내가 어디가 그 인간하고 같다는 거야!”

  “게으르고, 귀찮아하고, 떠넘기고! 다 똑같잖아!”

  “그건 인간 고유의 특성이다, 인마!”

  “그건 네 생각이고!”

  바자바인 후작을 건드려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며 가르딘을 타박하는 필리언이었다.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만 해라. 징징대는 것도 이제 짜증 나려고 한다.”

  “뭐, 징징대?”

  “지금은 화내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마이어 공작을 잘 설득할지를 고민해 봐야 하지 않겠냐! 카니발! 방법이 있겠지?”

  “영주님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처럼 태평하시지 않습니까.”

  마이어 공작이 쉽사리 도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다. 그가 아무리 호방하고 전투적인 인물이라도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함부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마이어 공작은 많은 업적과 공적을 쌓았다. 수십 년 동안 이루어놓은 것들을 하루아침에 모두 무너뜨리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시간이 무서운 것이다. 시간은 사람의 성격마저 좌지우지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결정은 났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마이어 공작을 어떤 식으로 끌어들이냐입니다.”

  “문제는 적당한 구실인데.”

  구실과 명분.

   이것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다 구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따위 명예와 구실에 목숨을 거는 것 자체가 어리석기까지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기기에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가르딘이라면 실리를 택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겠지만 자존심이 강한 귀족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러쉬 황자가 많은 것을 양보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따지지는 않겠지.”

  “마이어 공작이 그리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 방에 훅! 보내버릴 수 있는 확실한 게 필요하단 말이야.”

  “그렇게 매번 날로 먹다가 너도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

  필리언이 또다시 빈정거렸다.

  전략을 펼칠 때 한 가지만 구상해서는 어림도 없다.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서 전략을 짜야 한다. 많은 변수를 고려해도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기 마련인데, 한 개의 패만 가지고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르딘은 일이 매번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 것을 한탄했다. 세상은 스스로 정한 한계선을 계속 무너뜨리고 있었다. 제발 그 한정된 계획 안에서만 움직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넘어가면 짜증만 쌓인다.

  가르딘이 짜증을 부리며 필리언과 같이 바자바인 후작을 질겅질겅 씹고 있을 때였다. 타이거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독하다는 샤벨 타이거가 분명하다.

  싱글! 싱글! 

  얼굴에 웃음꽃이 핀 바자바인 후작이 상큼하게 문을 열며 가르딘을 얄밉게 쳐다보았다. 입가에 어린 오묘한 미소가 주먹질을 부르고 있었다.

  “어이! 사신! 출세했어!”

  “출세한 값을 나중에 꼭 돌려 드리지요!”

  “글쎄, 그게 가능할까!”

  찌릿! 쿠과과과광!

  가르딘과 바자바인 후작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실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뇌성벽력이 휘몰아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의 신경전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르딘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바자바인 후작을 골탕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에 대비한 바자바인 후작의 머리도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냥.”

  ‘헙!’

  카니발 백작과 필리언은 터져 나오는 헛바람을 참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상대는 피닉스 기사단의 부단장이며 제국의 실세인 바자바인 후작이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그냥’ 이라니, 상식이 통하지 않고 있었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다. 약 올린 상대를 확인 사살하여 두 번 죽이는 것이야말로 염장질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가르딘의 신경을 긁어 다시 한 번 열화가 뻗치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주먹이 쥐어지는 가르딘이다. 마음 같아서는 아구창을 한 대 날렸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저절로 말아 쥐어지는 주먹을 풀고 가르딘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염장질에서 쿨(Cool)하지 못하면 지는 것이다. 

  “시간 많은 것 같은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움찔!

  가르딘이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바자바인 후작이 한 방 먹었다는 듯한 표현을 나타내었다.

  “제법이야!”

  “그 말은 예전에도 들었습니다.”

  “그렇군. 그래도 그렇지, 손님이 왔는데 차 한 잔도 주지 않는가! 이렇게 예의가 없어서야.”

  “예의는 인격을 가진 사람한테나 차리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 차를 배 터질 때까지 마셔도 되겠군.”

  두 사람 다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유치해지고 있었다. 이것이 과연 오러마스터와 오러마스터의 말싸움인지 심히 의심이 갔다. 더 시간이 흘러갔다가는 머리끄덩이 잡고 난리 칠지도 모른다.

   “기사의 은원은 검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먼.”

  “언제 계급장 떼고 맞짱 한 번 어떠십니까!”

  “아무리 많이 컸다 해도 내 실력을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그 배짱 한번 두둑하군!”

  “사나이라면 그만한 배포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정 그렇다면 좋네.”

  “비밀대결입니다. 승패는 어디 가서 제 입으로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차마 부단장님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일세.”

  가르딘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장소가 비밀이라면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일부러 비밀대결로 몰아붙였다. 물론 지금 당장 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중에 묵사발을 만들어줄 생각이다.

  ‘염장질은 부단장님이 이겼습니다. 단! 그때 뒈지게 맞을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바자바인 후작도 절대 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겉으로 보면 바자바인 후작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다. 하지만 가르딘의 진정한 실력을 알고 있다면 저런 약속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자바인 후작은 차를 마시고 나서 곧장 돌아갔다. 염장질을 끝냈는지 쿨하게 퇴장해 주었다.

  카니발 백작은 가르딘이 걱정되었다.

  “그런 무모한 약속을 해도 됩니까!”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바자바인 후작입니다.”

  “나중에 결과를 알면 너도 인정하게 될 거다.”

  카니발 백작은 태연한 가르딘이 대단해 보였다. 기사라면 당연히 강자에게 도전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기사의 도리라고 할 수 있다. 강대한 적을 향해 도전하는 불굴의 용기를 가진 전형적인 기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르딘의 본래 성격과는 정반대로 느끼고 있는 카니발 백작이다.

  ‘역시 내가 선택을 잘했구나!’

  너무 믿고 있는 카니발 백작이다. 나중에 엄청 후회할 것이 눈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믿음이 클수록 배신감은 더 크기 마련이다. 

  3일 후에 가르딘은 사신의 자격으로 마이어 공작 진영으로 가게 되었다. 가르딘은 되도록 적은 수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많은 수의 인원을 데려가 봐야 괜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가르딘, 필리언, 카니발 백작, 투르와 창기병 20명이 일행의 전부였다. 웬만하면 투르는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곁에 두지 않으면 불안했다.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존재가 투르였다. 성질난다고 누구 하나 반병신 만들어놓으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마이어 공작은 현재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지는 아이작 성에 머물고 있었다. 제국이 북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성이다. 단단한 외벽과 험준한 주변 지형으로 인해 천혜의 요새 역할을 수행한다.

  가르딘은 아이작 성으로 가기 위해서 북방의 경계선에 위치한 두 개의 성과 네 개의 검문을 거쳐야 했다. 아이작 성으로 가는 주요 길목에 북방대군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적의 도발을 감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한발 빠른 움직임이야말로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반나절 동안 꼬박 말을 탔다. 

  한겨울의 시린 바람이 갑옷을 더욱더 차갑게 만들었다. 북방의 혹독한 추위가 왜 무서운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옷을 두껍게 입지 않고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공격도 해보기 전에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아이작 성이 보이기 시작하는군!”

  “겉으로 보면 그림 같은 성인데!”

  가르딘의 시야에 아이작 성이 보였다. 멀찍이서 볼 때는 그저 아름다운 성처럼 보인다. 햇살에 반사되는 투명한 눈과 얼음이 마음까지 하얗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작 성은 그저 아름다운 성이 아니었다. 북방의 주요 길목을 길게 차지하는 요지였다.

  성도 그렇지만 주변에 쌓인 눈이 얼어붙어 천연 성벽이 되어 있었다.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지형이다. 

  “쌓인 눈에 물을 부어서 다시 얼렸군.”

   “대단한데. 미끄러워서 올라가지도 못할 것 같아!”

  눈에 물을 부어 녹인 후 다시 얼린다. 몇 번을 반복하면 얼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가 세진다. 더군다나 얼음벽 정면은 미끄럽게 되어 있어 올라가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공성전을 벌일 때 성을 점령하기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 북방의 추위를 잘 이용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르딘이 오는 것을 본 성벽 위의 기사가 소리쳤다.

  “신분을 밝히시오!”

  “사신으로 온 가르딘 카이로스라고 한다.”

  가르딘은 이것이 허례의식이라는 것을 안다.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은 그만큼 경계가 철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방안이다. 가르딘이 신분을 증명할 패까지 보여주자 그제야 성문이 열렸다.

  열린 성문 안에는 기사와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가르딘과 일행의 사기를 죽이려는 수작이 뻔히 보인다.

  하지만 상대는 가르딘이었다. 더군다나 그를 따르는 필리언, 카니발 백작, 투르 모두 겁이라고는 모르는 존재들이다. 오히려 투기를 느끼자 발산을 해버렸다.

  투르의 사나운 투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흉포한 몬스터조차 투르의 투기를 정면으로 받으면 도망갈 것이다.

  크릉!

  광천패황신공의 화후가 높아질수록 패기 역시 짙어졌다. 그 기운은 사람의 심령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졌다.

  움찔!

  광폭한 패기가 솟구쳐 오르자 아이작 성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들 모두 야인의 성정을 타고난 전사들이다. 상대의 패기에 절대 주눅 들지 않았다.

  가르딘은 북방의 전사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간파했다. 전투를 벌일 때 물러서지 않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다. 이겨도 그 공포감을 쉽게 극복하지 못한다.

  “그만 하지.”

  패기와 패기의 싸움을 멈추게 한 가르딘이다. 이 이상 서로를 자극해 봤자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기적절하게 중간에서 기운을 끊어버렸다.

  가르딘의 기운이 보통 이상이라는 것을 마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은 알 수 있었다. 오러마스터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경계를 하면서도 오러마스터에 대한 예의를 표했다.

  기사들 중 단장으로 보이는 자가 가르딘에게 먼저 인사를 올렸다.

  “타이거 기사단의 단장, 싱글턴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르딘 후작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나도 만나서 반갑네.”

  “저를 따라오시죠.”

  “그보다 마이어 공작님은 언제 볼 수 있는 것인가?”

  “오늘은 추위에 굳었던 몸을 푸시고, 내일 뵈실 수 있을 겁니다!”

  “알겠네.”

  가르딘과 일행은 싱글턴의 안내로 방을 배정받았다. 당장은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가르딘도 알고 있었다. 아마 오늘 밤은 서로의 속내를 탐색하는 탐색전이 될 것이다.

  마이어 공작의 수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오늘 사신으로 온 가르딘에 대해서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사신이 당도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진행이 되어왔다.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우리를 회유하겠다는 뜻이 분명합니다.”

  “그렇겠지.”

  마이어 공작도 러쉬 황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눈치를 채고 있었다. 북방대군을 적으로 돌리기에는 제국으로서 손해가 만만치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내정을 안정시키고 제국이 건재함을 알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러쉬 황자가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한 것이다.

  “허나, 지니언 황자님과 네벨리언 공작의 죽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않는가!”

  지니언 황자는 마이어 공작이 믿고 따르던 인물이다. 그의 억울한 죽음을 이대로 모른 척 넘어가기에는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러쉬 황자의 비열한 계략이 떠오르자 믿음을 쉽사리 주지 못했다.

  더군다나 네벨리언 공작은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 친구의 죽음까지 외면하기에는 양심에 걸렸다.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명예였다. 여기서 러쉬 황자의 손을 들어주게 되면 결과적으로 배신을 한 것이 된다. 지금 당장은 힘이 있기에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겠지만 후일 손가락질할 것이 분명하다.

  마이어 공작가의 가신들은 모두 호전적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이어 공작이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하면 따를 것이다.

  ‘내가 여기서 항전을 선택하면 이들 모두 죽는다! 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이들을 모두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회의적이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까지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이어 공작은 좀처럼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를 한번 봐야겠다.”

  마이어 공작은 가르딘을 본 후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 안에서는 선택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다음 날.

  가르딘은 마이어 공작의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아침부터 부를 줄은 몰랐다. 어젯밤부터 해온 고민이 아직까지 발목을 잡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어젯밤에 아무 생각 없이 단잠을 잤다. 자리가 바뀌었다고 수면을 못 취하는 것은 애송이 기사들이나 하는 짓이다.

  두 기사의 안내를 받은 가르딘이 마이어 공작의 방문을 열었다. 가르딘은 마이어 공작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군. 전쟁이 시작되고 난 후 보지를 못했으니 말이야.”

  “한 번은 볼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무슨 소린가?”

  “산불 방해 작전이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마이어 공작은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침음성을 터뜨렸다. 설마 눈앞에 있는 가르딘이 그런 작전을 구사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검술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구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훗! 칭찬일세. 전장에서 사정을 봐주었다면 그건 기사로서 실격이네.”

  “감사합니다.”

  마이어 공작이 집무실의 의자에서 일어서서 가르딘과 마주 섰다. 탁자에는 마이어 공작이 주문한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 술입니까?”

  “진솔한 대화를 하는 데 술보다 좋은 게 있겠나.”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럼 오랜만에 진하게 마셔보세.”

  또르륵!

  마이어 공작이 술병을 들어 가르딘의 잔을 채워주었다. 가르딘도 술병을 들어 마이어 공작의 잔을 채웠다. 북해의 한기를 가득 담은 아이스카치라는 술이었다. 그렇다고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술은 절대 아니었다. 북해 야인들이 일반적으로 즐겨 마시는 독한 술이었다. 

  술잔은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다. 한 잔만 마셔도 정신이 핑 도는 술을 거침없이 마셔대는 가르딘과 마이어 공작이었다. 

  두 사람은 들어와서 한 말을 제외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연거푸 열다섯 잔을 마셨을 때 마이어 공작이 입을 열었다. 굉장한 주량이 아닐 수 없다.

  가르딘은 처음 한 잔을 마시자 속이 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러를 운용할 줄 아는 자는 오러로 술을 배출할 수 있지만 마이어 공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술을 한 잔도 아니고 열다섯 잔이나 마시고도 멀쩡하다니 마이어 공작이 대단해 보였다.

  ‘술이야! 독이야!’

  가르딘은 술을 마시는 것인지 독을 마시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뻗어버리고도 남을 것이다. 공령의 지체에 근접해 가는 가르딘이기에 자연스럽게 술이 해독되어 멀쩡할 수 있었다.

  “자네는 내가 어찌할 것이라 보는가?”

  마이어 공작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가르딘도 알고 있기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러쉬 황자님의 은혜를 받으셔야 합니다.”

  “나보고 배신을 하라는 소린가!”

  언성이 높아진 마이어 공작이다. 그의 격양된 목소리만큼이나 얼굴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타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 가르딘을 쏘아붙였다. 북해의 수장답지 않게 흥분한 모습이다.

  그러나 가르딘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조용하며 차분했다.

  사실은 마이어 공작도 흥분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내면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저 가르딘을 떠보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수법에 넘어갈 가르딘이 아니었다. 가르딘의 내면에는 수백 마리의 드래곤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럼 다 죽습니다.”

  “내 앞에서 그따위 말을 하다니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현실을 부정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굳이 죽고 싶다면 말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누가 이기든지 공멸할 뿐입니다.”

  가르딘의 냉정한 말은 마이어 공작에게 의외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대응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공멸을 논하다니 상식적이지 않았다. 마치 제국이 무너져도 상관없다는 투로 들렸다.

  북방의 타이거로 불리며 북방 최고의 무력을 소유한 자신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대답하는 가르딘의 모습은 생소하기까지 했다. 이전까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마냥 사람 좋은 미소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네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한두 번 만나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사신으로 왔습니다. 공작님을 설득하지 못하면 제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 상관이 없단 말인가! 기사에게 명예만큼 중요한 것이 있는가!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야말로 기사의 참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네!”

  “공작님이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지 압니다. 하지만 명예보다 소중한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있어야 명예를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죽어버린 사람에게 명예는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합니다.”

  “신의를 배반하며 오래 살아봤자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후대에 나를 뭐라고 욕을 하겠는가!”

  “소중한 사람도 지키지 못하는 명예에 연연하시다니 공작님답지 않습니다. 명예와 명성도 전쟁과 같습니다. 전쟁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결국 살아남은 자가 이기는 것입니다. 대륙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것을 공작님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가르딘은 살아남아 명예를 지키라는 뜻을 전했다.

  반면에 마이어 공작은 신의를 배반하지 않아야 명예를 지킬 수 있다고 여겼다. 팽팽한 평행선이 유지될 것 같았지만 마이어 공작은 심적으로 지고 있었다. 가르딘과 다르게 그의 말 한마디에 수십만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그것을 지고 살아가는 자의 업보였다.

  “자네는 명예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구먼!”

  “소중한 사람을 지키며 사는 것이 제 명예를 지키는 길입니다.”

  “소중한 사람이라!”

  가르딘에게 소중한 사람은 가족이다. 가족을 지키는 것이 가르딘에게는 명예를 지키는 일이 된다. 

  아니, 명예보다 소중하고 숭고한 일이다. 제 가족도 지키지 못한 자가 누굴 지키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다 자기의 허황된 욕심일 뿐이다.

  가르딘의 말이 마이어 공작의 내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도 북방의 모든 병사들을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처럼 모든 것을 내던질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의는 모두에게 좋은 것이 될 수 있으나 자신과 가족에게는 혹독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게 좋을 겁니다!’

  가르딘은 같잖은 대의 따위에 목숨을 걸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따위 것들이 잘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자신과 가족이 무너져 버리면 아무 소용도 없다. 후대에 길이 남을 영웅이나 황제가 되었던들 행복하지 않다면 무용지물이다. 

  “자네가 또다시 나를 놀라게 하는군. 지금 보니 나는 자네를 몰랐던 것 같아!”

  “저도 공작님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럼 더 알아보세.”

  “좋습니다.”

  또르르륵!

  마이어 공작이 아이스카치를 다시 한 번 가르딘의 잔에 채웠다. 가르딘은 단번에 아이스카치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마신 잔을 마이어 공작에게 내밀었다. 그는 기꺼이 잔을 받아 술을 마셨다.

  술잔이 열다섯 잔이나 돌아갔다. 이미 치사량을 넘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보통 사람은 술 마시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가 않는구나.”

  “결정을 하셔야 마음 놓고 취할 수 있을 겁니다.”

  “내 결정은 아무래도 이걸 해야 할 수 있을 것 같네.”

  마이어 공작이 집무실의 한쪽에 있는 검을 가리켰다. 가르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또!’

  가르딘은 마이어 공작이 또다시 검술대결을 원하자 짜증이 났다. 대결의 승패에 따라 결정을 하겠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침부터 만취한 상태에서 검술대결을 벌여야 하는 가르딘이다. 문제는 가르딘이 마이어 공작을 이길 수도 없다는 것에 있었다.

  “싫은가?”

  “이미 한 번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항전하면 볼만할 걸세.”

  “물러설 수 없게 만드는군요.”

  “자네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 말이지.”

  “그렇습니까!”

  “필사적이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를 하거든.”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단! 누구도 모르게 했으면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명예를 걸고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가 이런 식의 강요를 하다니 너무하지 않나!”

  “저는 몰라도 공작님은 다르지 않습니까!”

  “말로는 이길 수가 없구먼. 알겠네!”

  결국 가르딘은 마이어 공작과 2차 대결을 하게 되었다. 아이작 성의 지하에 마련된 연무장이 그 장소였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려놓았기에 대결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연무장에 들어서자 각자의 자리에 가서 섰다. 서로 마주보는 형상이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 지하 연무장이지만 미세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술기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시에 나는 진심으로 하지 않았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네. 만약 내 공격을 모두 막아낸다면 자네의 뜻대로 해주지.”

  “저는 아직 젊습니다.”

  “나도 아직은 팔팔하네! 전성기를 지났다는 말은 내게 통용되지 않지.”

  “젊음이 무섭다는 것을 아는 저는 그 말에 동감할 수 없습니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놈들의 실력 향상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이미 최상급을 넘어서려고 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얼마나 더 실력이 상승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저는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거 좋지! 어디 마음대로 해보게!” 

  “나중에 후회하실 겁니다!”

   가르딘의 시선이 마이어 공작의 주변을 관찰해 나갔다. 연무장을 이용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활용할 것을 파악해 나가는 가르딘이다. 검투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스르렁!

  검과 검이 검집에서 뽑혔다. 가르딘과 마이어 공작은 기사의 예를 취한 후 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이제부터 이긴 자가 진실이 되는 상황이다.

  마이어 공작의 전신에서 북해의 혹한과 같은 차가운 기세가 뻗어 나왔다. 차가운 기운은 가르딘의 전신을 압박했다.

  마이어 공작은 파스트론 공작과의 대결이 있은 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전까지 동수의 적과는 대결을 벌인 적이 없었던 마이어 공작에게 파스트론 공작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물론 그 당시에 비해 지금의 실력이 월등하게 나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실마리를 얻어 그때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르딘은 미묘하게 기운을 운용하여 마이어 공작의 기세를 비스듬히 흘려버렸다. 정면으로 부숴버리지 않고 흘리거나 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르딘의 표정은 처음과 같았다. 

  마이어 공작은 기세를 버티는 가르딘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전의 대결에서 전심전력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 정도까지 버티는 자는 극소수였다.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해졌군!”

  “따라오는 녀석들이 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누군가?”

  “아실 겁니다.”

  “제국의 신성들을 말하는 것이군! 자네를 따라갔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네!”

  “녀석들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더군요. 곁에서 보기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란 말인가!”

  마이어 공작은 짐짓 놀라는 표정이다. 20살의 나이에 오러마스터가 된 것도 대단한 일이건만 지금은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국전에서 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보면 놀라실 겁니다. 그래서 저도 노력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는 그 녀석들보다 오랜 수련을 해온 기사입니다. 아직 자리를 내줄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마이어 공작도 아직 물러서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그는 아직 현역이다. 기사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그런 개뼈다귀 같은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벽에 X칠할 때까지 팔팔하게 현역으로 활동해야만 한다.

  가르딘은 일부러 두 신성을 꺼내들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후일 마이어 공작의 후손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두 신성의 능력을 안다면 마이어 공작도 함부로 결단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꺼낸 말이다.

  “그럼 선공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가르딘이 검을 왼쪽 사선으로 내렸다. 그러면서 돌진 자세를 취했다. 마이어 공작은 가르딘이 공격 전에 보인 날카로운 기세를 느꼈다. 허튼 공격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타타타탁! 파팟!

  가르딘의 신형이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섬전보를 약간이나마 운용하였다. 섬전보를 극성으로 운용하면 마이어 공작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도 마이어 공작은 가르딘의 빠른 속도에 놀라는 눈치였다. 예상보다 더 빠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빠르군!”

  가르딘은 마이어 공작을 향해 돌진하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바닥을 차서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벼락같은 기운이 가르딘의 검에서 분출되었다.

  -스톰 검법-파워 웨이브(역파동).

  퍼퍼퍼펑!

  마이어 공작은 가르딘의 공격 방향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가르딘이 공격한 곳은 마이어 공작의 바로 앞에 있는 바닥이었다. 파워 웨이브가 바닥에 충격을 주자 진동이 일어나며 바닥의 돌들이 마이어 공작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파파팟!

   크고 작은 돌은 마이어 공작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역할을 하였다. 가르딘의 공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마이어 공작이 날아오는 돌들을 검으로 쳐서 막는 사이에 가르딘은 간격을 좁혀 안으로 파고들었다. 

  가르딘의 검이 마이어 공작의 심장을 노리며 찔러 들어갔다. 일렉트릭 검법의 마하 임팩트(섬광격)였다. 시야를 가린 상황에서 번개같이 찔러 들어오는 살수였다. 상대의 심장을 노린다는 것은 죽인다는 것과 진배없는 검격이었다. 매서우면서 인정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

  타아아앙!

  주르르륵!

  위로 솟구쳐 오르는 마이어 공작의 검이 가르딘의 검을 쳐내었다.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상황이다. 검을 쳐올린 힘에 의해 뒤로 밀린 가르딘은 곧바로 신형을 유지하며 마이어 공작의 검격 사정권 안에서 물러섰다.

  마이어 공작은 귀밑머리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좀 전의 공격은 상당히 위험했다. 설마 그런 식의 임기응변을 보여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단순한 검술대결인 줄 알았건만 상대는 시작부터 실전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군! 그대의 실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하지!”

  가르딘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실전에서 말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말을 하기도 전에 가르딘은 검을 휘둘렀다. 일렉트릭 검법과 스톰 검법을 교묘히 혼합하여 위력을 배가시켰다.

  카카카캉! 타탕!

  마이어 공작은 가르딘의 기습적인 공격에 처음에는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역시 북방의 타이거였다. 쉽사리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이어 공작도 차츰 가르딘의 공격이 눈에 익어갔다.

  ‘힘 조절하기 되게 힘드네.’

  상대의 공격을 무난하게 받아도 안 되며, 쉽게 공격을 성공시켜도 안 된다는 명제를 가지고 있는 가르딘이다. 그렇다고 허무하게 질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것이 더 힘든 가르딘이다.

  “이제부터 내 차례네!”

  ‘예! 예! 어련하시겠어요! 제가 이렇게 틈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가르딘이 작정하고 공격하면 마이어 공작이라고 해도 막아내지 못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일부러 일정 시간 동안 공격을 퍼붓고 빈틈을 내어주고 있는 가르딘이다.

  마이어 공작의 사나운 맹공이 퍼부어졌다. 타이거 검법의 사납고 강맹한 기운을 제대로 살리고 있었다.

  꽈아아아앙! 콰과과광!

  가르딘의 검에 오러블레이드가 솟아오르자 마이어 공작도 망설이지 않고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하였다. 기운과 기운이 충돌하면서 연무장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피부를 찌르는 듯한 살벌한 공격과 기세가 가르딘을 괴롭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딘의 검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이어 공작에게서 펼쳐지는 광폭한 절기의 향연을 방어형 검술을 이용하여 막아내고 있었다.

  파파파팡!

  마이어 공작은 공격을 하면서도 가르딘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강공과 허초를 구분하여 방어형 검술을 적절하게 운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강공은 흘리고, 허초는 반대로 역공을 취했다. 

  “방어형 검술이 대단하군!”

  “저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

  “바자바인 후작입니다.”

  “그가 그렇게 대단한가?”

  “물론입니다. 방어형 검술이 왜 무서운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한번 만나봐야겠군.”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가르딘이 방어형 검술을 구사한 이유는 바로 바자바인 후작 때문이었다. 가르딘을 사신으로 보낸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일부러 방어형 검술을 사용하였다. 후일 바자바인 후작은 마이어 공작의 검격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고생 좀 할 거다!’

  당하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 가르딘이다.

  차아앙!

   검과 검이 충돌하며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마이어 공작은 가르딘이 생각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확실히 오러마스터 중급을 넘어서고 있었다. 마이어 공작은 작은 방심이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신중하게 검을 운용하였다. 가르딘도 적당히 조절하여 검술의 극의를 펼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신형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다. 일반 기사들은 감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강맹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대결은 1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얍!”

  마이어 공작이 가르딘의 허리를 노리며 전력으로 출수했다. 그러자 가르딘이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하여 뒤로 몸을 빼다 검에 닿고 말았다.

  휘청!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몸의 균형을 잃은 모습을 연출했다. 주춤거리는 가르딘의 신형을 마이어 공작이 따라붙어 연속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가르딘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슈슈슈슈슉!

  공격 하나하나가 모두 일검필사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르딘이 아닌 다른 기사였다면 비명횡사하기 딱 좋은 공격이었다. 

  ‘슬슬 그럴듯하게 공격을 해야겠지!’

  겉으로는 위태위태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르딘은 별달리 위험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적당히 몸을 수그리며 표정 연기를 할 뿐이다. 

  -스톰 임팩트(폭풍격).

  -타이거 임팩트(호격).

  가르딘이 뒤로 밀리면서 스톰 검법의 절기를 뿜어내었다. 그러자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마이어 공작도 타이거 검법의 절기를 사용하였다. 절기와 절기가 부딪치자 사방으로 맹렬한 기운이 분출되었다. 그 충격의 여파에 있던 가르딘이 한없이 뒤로 밀려 나갔다. 마이어 공작이 찰나의 순간에 다시 검을 뻗어 가르딘의 다리를 베어갔다. 하지만 가르딘은 이미 충격의 반동을 이용하고 있었다. 

  파팟!

  사아아악!

  허공을 베어버린 마이어 공작은 그제야 가르딘이 일부러 몸을 빼기 위해 절기를 출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공격의 변칙성과 수비의 임기응변이 대단하군!’

  실제 실력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었다. 만약 전장에서 가르딘의 능력을 보았다면 훨씬 더 대단할 것이라 짐작했다. 때론 변칙성이 정통파를 무너뜨릴 때도 있다. 무수한 변수가 있는 전장이라면 더욱더 효과적일 것이다. 마이어 공작은 꼭 정통파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실전에 통하는 기술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검술이라 생각했다.

  가르딘은 거리를 벌리고 난 후 바닥에 널린 돌 조각을 발로 찼다. 

  탁! 탁!

  돌 조각은 마이어 공작의 옆을 지나쳤다. 마이어 공작은 가르딘이 조절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돌 조각이 연무장의 횃불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연무장 안을 환하게 비추는 열 개의 횃불을 가르딘이 끄고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마이어 공작은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어둠이 금세 지하 연무장 안을 가득 채웠다.

  “어둠이라고 해도 나를 벗어날 수는 없네!”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왜 그랬나!”

  “어둠이라면 공작님의 힘을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 해보게!”

  “지금부터 할 겁니다!”

  슈숙!

  가르딘이 무영투영공을 살짝 선보였다. 어둠 속에 가르딘의 신형이 발을 내밀었다. 어둠을 타고 마이어 공작의 주변을 맴돌았다.

  움찔!

   마이어 공작도 감각에서는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어둠 속에 스며든 가르딘의 신형을 쉽게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간간이 움직임의 간파가 늦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끊어지는 감각을 다시 날카롭게 유지하기 위해서 마이어 공작은 모든 심력을 쏟아 부었다. 어둠 속에서 행해지는 불의의 일격은 그 어느 때보다 무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부할 만하군!’

  자신이 아니라 다른 마스터였다면 가르딘의 일검에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이어 공작은 집중을 할수록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오감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군! 그러나 놀라워!’

  살아 있는 오감은 가르딘의 신형을 찾고 있었다. 어느 순간 가르딘이 지근거리에 접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캉! 파파팡!

  가르딘은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에 반해 마이어 공작은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하여 주변의 지형을 비추었다. 가르딘이 근접거리까지 다가올 때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순간적인 반응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고 정교했다. 가르딘이 미처 공격하기도 전에 마이어 공작의 검격 안에 막히고 말았다.

  쉽지 않은 상황이 되자 가르딘이 주변에 널린 돌 조각을 계속 날렸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날렸기에 굉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슈슈슝! 슈슈슝!

  마이어 공작은 돌 조각이 자신의 행동반경을 좁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각지역을 공격하기 위해서 가르딘이 사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우웅!

  맹렬한 기운이 마이어 공작의 오른쪽 사각지역에서 뻗어왔다. 마이어 공작은 그 즉시 눈치를 채고 검을 뻗었다.

  푸욱! 커억!

  마이어 공작의 어깨에 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스친 자리에서 핏물이 흘러내렸지만 마이어 공작은 동요하지 않았다. 작은 상처 따위는 그에게 어떤 고통도 주지 못했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오러블레이드가 옆구리를 관통하고 말았다.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가르딘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자네의 공격은 대단했지만 나의 감각을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네. 자네가 노린 지점이 너무 노출이 되었어.”

  “역시 대단합니다! 반드시 이기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군요!”

  가르딘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이어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르딘을 부축해 주었다. 이기고 싶어 하는 승부욕이야말로 기사라면 반드시 지녀야 하는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르딘에 의해서 새로운 감각을 깨우칠 수 있었던 마이어 공작이었다. 

  “자네의 실력이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네. 만약 과거의 나였다면 지금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네.”

  “그래도 진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 공작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멋진 대결을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구먼.”

  씨익!

  마이어 공작이 호쾌하게 웃었다. 가르딘도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웃었다.

  둘의 모습에서는 어떠한 앙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나이다운 대결이 아닐 수 없었다.

  가르딘의 변칙기술이 기사들에게는 정당하지 않다 할 수 있으나 그것은 애송이 기사들이나 하는 말이다. 진정한 기사는 그 어떤 상황도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 우선은 상처를 치료하도록 하게. 마법사를 보내주도록 하겠네!”

  “공작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가르딘은 상처가 났음에도 신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이어 공작은 더 마음에 들었다. 

  대결이 끝난 후 가르딘은 방으로 들어왔다.

  방까지 안내를 받는 동안 옆구리에 난 관통상을 부여잡으며 움직였다. 보는 눈이 많기에 절대로 신음을 내지 않았다.

  마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하지만 가르딘이 마이어 공작의 어깨에 상처를 낼 줄은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가르딘이 진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도 패배를 탓하지는 못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 필리언과 카니발 백작이 허둥지둥 다가왔다. 협상하러 간 사람이 배때기가 뚫려서 왔으니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문부터 닫아.”

  가르딘은 문을 닫으라고 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주변에 자신이 아는 사람만 있다는 것을 확인한 가르딘은 그 즉시.......

  “아파! 졸라! 아프다! 아아아아! 나 죽는다!”

  ...엄살을 떨기 시작했다.

  바둥! 바둥!

  이제까지 근엄했던 가르딘의 가면이 부서졌다. 전쟁에서도 이 정도의 상처를 입은 적은 결단코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르딘이 일부러 상처 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마이어 공작과의 대결에서 가르딘은 기척을 조금씩 흘리면서 공격을 유도했다. 공격할 지점을 드러내고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마이어 공작이 아닌 다른 일반 기사들 따위는 알아차릴 수도 없는 공격이다.

  공격하는 시점에 가르딘은 자연스럽게 운용되어 전신이 금강불괴로 변하는 천룡신을 억제했다. 만약 천룡신인 상태로 마이어 공작의 오러블레이드를 맞았다면 역으로 검이 튕겨 나갔을 것이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마이어 공작이 어떤 말을 하겠는가! ‘자네 몸이 정말 단단하군!’ 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제...젠장! 더럽게 아프네! 헉! 피 더 난다!”

  “창피하니 그만 해라!”

  “대...신관 데려와! 아냐! 성... 개는 아니고!”

  가르딘은 천룡신을 운용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은 고통을 참아야 한다. 마법사가 와서 치료를 해주기 전에 완치가 되어버리면 그것도 골치 아프다. 마법사가 그냥 ‘회복이 무척 빠르군요!’ 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엄살 그만 피워1 그냥 관통당한 거야!”

  “닥쳐! 네 몸 아니라고 막 말하는 거냐!”

  “그러셔!”

  꾸욱!

  “아아아아아악!” 

  필리언이 가르딘을 지혈하던 손으로 좀더 힘차게 눌렀다. 그러자 가르딘이 아프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주변에 누가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가르딘의 이 모습을 보면 기사망신 혼자 다 시킨다고 놀려댈 것이 분명했다.

  “어디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이... 상처만 나으면 너 뒈질 줄 알아!”

  꾸욱! 꾸욱!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악!”

  필리언의 손동작에 의해 화음이 형성되었다.

  곁에 있던 카니발 백작이 순간 멍한 기분을 맛보았다. 지금 보는 사람이 과연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가르딘의 얼굴이 맞았다.

  ‘이거 속은 기분인데!’

  아프다고 아우성을 내지르던 가르딘이 어느새 조용해졌다. 갑자기 조용해진 이유는 마법사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가르딘의 표정만 보면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했다. 이 정도 고통쯤은 충분히 참을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으로 기사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이어 공작가의 마법사인 휄리아는 가르딘의 모습에 놀라워했다. 관통상을 입은 자가 고통은커녕 땀조차 흘리지 않는 게 대단해 보였다.

  “고통이 클 덴데 역시 오러마스터시네요!”

   “고통보다 패배가 더 마음 아프기 때문이지.”

  “역시 대단하세요.”

  “별것 아니야.”

  가르딘의 의연한 태도는 필리언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좀 전까지 아프다고 소리 지르던 놈이 하는 말치고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멍하기는 카니발 백작이 더 했다. 

  휄리아가 정성스럽게 치료 마법을 전개했다. 힐링 마법이 전개되자 가르딘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피도 어느새 멈추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금세 회복이 될 것이다.

  “이제 됐어요. 당분간 무리하지 않으면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고맙네.”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휄리아가 물러나고 난 후 가르딘은 의연한 태도에서 다시 고통스런 표정으로 돌변했다. 겉으로는 상처가 나았을지 몰라도 속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내상을 치료해야 하니까 내 방에 들어오지 마!”

  “어련하시겠냐.”

  “너 다음에 두고 보자!”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지.”

  “난 달라.”

  가르딘은 방으로 들어가서 천룡무상신공을 운기했다. 진기가 전신으로 돌며 자연스럽게 천룡신의 상태로 변하게 되었다. 천룡신이 되자 몸의 내외부에 난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이 되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 어지럽긴 해도 그 정도는 금방 회복이 될 것이다.

  “오늘 내 금 같은 피를 봤다.”

  사신으로서 받은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르딘은 일부러 피를 봤다. 적당히 해결하려고 했는데 마이어 공작이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기에 확실하게 쐐기를 박기위해 피를 많이 보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말을 듣지 않으면 가르딘은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가르딘이 돌아버리면 어찌 감당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칼에 찔리는 게 이런 고통이구나!”

  40년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관통상을 당해보지 않았던 가르딘이다. 마치 뜨거운 용암이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까지 만난 놈들이 칼을 맞아도 악을 쓰는 것만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들이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할 것 아니야!’

  물론 그런 놈들이 아프다고 소리쳐 봐야 가르딘이 그 말을 들어줄 인간은 전혀 아니었다. 자신의 고통은 무지하게 싫어하면서 남의 고통은 상관하지 않는 유형이다.

  러쉬 황자와 두 공작이 한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뜻밖의 인물이었다. 내전이 벌어지기 전에 갑자기 사라졌던 인물이라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사실 그를 찾는 데 신경 쓸 겨를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쓰고 있던 가면을 버리는 대신에 붉은 머리카락으로 한쪽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피닉스윙의 기사단장 드윈이 러쉬 황자님을 뵙습니다!”

  “반갑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황궁에서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드윈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차분하게 설명조로 전해나갔다. 사실을 말할 때 사심이 들어가면 객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드윈이 밝혀낸 사실은 러쉬 황자와 두 공작 모두 놀라기에 충분했다. 설마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너무도 엄청난 일이라 드윈의 말만 믿기에는 신빙성이 떨어졌다.

  발리스타 공작이 다시 물었다.

  “증거는 있는가?”

  “여기 있습니다.”

  드윈이 서류와 마법 수정구를 꺼냈다. 이제까지 수집한 자료와 영상을 담은 것이었다. 명백한 자료와 증거에 러쉬 황자와 두 공작은 침음성을 터뜨렸다.

  ‘하!’

  허탈하기까지 한 내막이 아닐 수 없다. 내전이 일어난 모든 일련의 과정이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실을 전해 들은 사람 중 가장 비통한 사람은 러쉬 황자였다. 

  “다마트가 이런 엄청난 일을 했단 말인가!”

  너무도 엄청나고 잔인한 일이기에 입에 담기조차 두려웠다. 이 사실이 외부로 흘러나가는 것조차 막아야 했다. 만일 사실이 대륙에 밝혀지면 제국의 명예가 곤두박질칠 것이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우선은 이 사실을 마이어 공작에게 알리고, 내전을 종식시켜야 합니다!”

  “그럼 대외적으로 알리자는 말인가요!”

  “어쩔 수 없습니다. 내용을 공개해야 제국의 귀족들이 황자님을 따르는 데 반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국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섣불리 사실을 전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제국과 3황자님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실을 전하지 않고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모든 사실을 다 밝힐 필요는 없습니다. 적당히 필요한 사항만 전하면 될 겁니다.”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러쉬 황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고민이 되었다. 어느 누가 들어도 좋지 않은 사실이었다. 주변 왕국과 공곡의 질타도 문제지만 내적으로 아이시런 공주가 상당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러쉬 황자는 못 이기는 척 두 공작의 의견에 따랐다. 내외부적인 문제는 후일 황제가 되어 정리하면 될 것이라 판단했다. 지금은 내전을 하루속히 종식시키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 그것이 제국의 안정을 가져오는 길이라 여겼다.

  “드윈은 어서 가서 사실을 전하라.”

  “명에 따르겠습니다.”

  가르딘은 대결이 끝난 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마이어 공작에게 상처를 입힌 존재는 근래에 파스트론 공작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북방의 야인은 강자를 숭상했다. 그렇기에 가르딘의 실력을 존중해 주었다. 가르딘이 지나가는 길마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우러러보았다.

  상처를 회복한 가르딘은 마이어 공작을 다시 만나고 난 후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는 여전히 필리언과 카니발 백작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투르는?”

  “몰라. 아까 나가던데.”

  “걔 좀 잘 관리하라고 했잖아!”

  “시끄러! 걔가 내 말을 듣기나 하는 줄 알아!”

  가르딘의 핀잔에 필리언이 짜증을 냈다. 사실 투르는 가르딘을 제외한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고를 자주 치는 것도 아니다. 투르도 사리분별을 할 줄은 안다. 그저 누가 명령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뿐이다.

  “마이어 공작이 결단을 내렸습니까?”

  “아직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조만간 회유를 받아들일 것 같다.”

  “다행입니다.”

  “다 내가 피를 흘린 덕이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가르딘에게 필리언이 또다시 핀잔을 주었다.

  “엄살이나 피우는 주제에 무슨!”

  “관통상이 얼마나 아픈 줄 알아! 모르면 말을 말아!”

  “나는 수십 번도 더 당해봤다. 안 당해본 네가 이상한 것 아냐!”

  ‘응?’

  필리언은 가르딘이 아니다. 그렇기에 전투 시 무수히 많은 부상을 당해보았다. 가르딘이 아니면 죽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 전에 심각한 상처를 많이 입었었다. 당연히 관통상도 여러 번 당해보았다. 오히려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은 가르딘이 이상해 보였다. 

  ‘그렇지.’

   괜히 할 말 없어지는 가르딘이었다.

  “아! 춥다. 낮잠이나 자야겠다!”

  “저건 할 말 없어지면 저래!”

  추울 때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따뜻한 난로 옆에서 잠자는 게 제일이다. 옆에 고구마라도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가르딘은 그 즉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휘이이잉! 휘이이잉!

  바람이 흉험하게 불고 있었다. 북방 야인들도 이런 날씨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추운 기온도 문제지만 바람이 불면 체감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진다. 이런 날씨에 돌아다니면 얼어 죽기 딱 좋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육중한 신체를 가진 투르가 근육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살갗을 에는 추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눈과 얼음이 마냥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다.

  발키리 영지도 겨울에는 기온이 떨어지긴 하지만 눈이 오는 지역은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기에 신기해하고 있었다.

  2미터를 훌쩍 넘는 투르가 두리번거리면서 돌아다니자 두껍게 옷을 입고 있던 기사들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미쳤군!’

  ‘저게 사림이 할 짓이냐!’

  ‘근데 은근히 존심 상하네.’

  북방의 추위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처음 겪어보는 자가 저처럼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자 기사들은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덩치를 보니 힘이 대단할 것 같은데.’

  ‘한번 제안을 해볼까.’

  북방의 기사들은 힘자랑을 좋아한다. 힘이 강해야 사내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한 자가 있으면 도전하여 쓰러뜨려야 한다는 도전정신도 강했다. 타이거 기사단의 단원 중에 한 명인 크롬이 투르에게 다가갔다.

  투르가 크롬을 내려다보았다. 가까이 서보니 훨씬 더 커 보이는 투르였다. 크롬은 굉장한 위압감을 받았다.

  “심심하면 우리랑 같이 시합이나 할 텐가!”

  “시합!”

  “그렇네. 힘을 써서 이기면 되는 간단한 것이네.”

  “좋다.”

  “호쾌하군. 그럼 같이 가지.”

  투르도 힘자랑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다. 오늘 임자 제대로 만난 격이다. 크롬을 따라 기사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들어갔다. 거친 야인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홀로 들어감에도 투르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투르에게 두려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투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숙소라서 그런지 제법 컸다. 그렇다고 화려한 장식이 수놓아진 방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런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20명의 기사들이 투르를 보며 투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우리는 타이거 기사단의 기사들이다!”

  “크레이지드래곤 창기병의 대장 투르다.”

  육중한 덩치만큼이나 호쾌한 투르였다.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투기는 타이거 기사단의 투쟁심을 분출시키기에 충분한 원동력이 되었다. 타이거 기사단은 투르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시합은 어떻게 하는 거지?”

  “간단하다. 탁자를 마주 보고 앉아서 손을 맞잡고 힘을 겨루면 된다. 단, 근력 이외의 능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

  “좋아.”

  투르의 반말이 눈에 거슬릴 만도 하건만 그들은 격식을 따지지는 않았다. 투르가 그들 못지않은 인물임을 인정한 것이다. 

  투르가 의자에 앉자 맞은편에 기사가 와 앉았다.

  그는 타이거 기사단 내에서 완력으로만 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다. 이름은 레너스라고 한다. 어깨부터 이어지는 팔뚝까지의 근육이 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과 어깨가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리부리한 눈에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매는 가히 괴물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그에 반해 투르는 전체적으로 큰 덩치지만 움직임에 부자연스럽지 않은 근육이다.

  “레너스라고 한다.”

  “투르다.”

  착! 

  말은 필요 없다.

  시합만 있을 뿐이다. 서로 손을 맞잡고 나머지 손으로 탁자를 잡았다. 타이거 기사단은 흥미롭다는 듯이 시합을 지켜보았다. 크롬은 심판을 보기 위해 두 사람의 손을 중앙에 위치하도록 잡았다.

  “시작!”

  꽝! 벌러덩!

  시작과 동시에 누군가 졌고, 힘을 이기지 못해 의자에서 넘어져 버렸다.

  넘어진 레너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시작과 동시에 이처럼 허무하게 질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고 있던 기사들도 어안이 벙벙하긴 마찬가지였다.

  “저럴 수가!”

  “레너스가 저렇게 쉽게 지다니!”

  투르는 별것 아니라는 투였다. 그 정도 실력으로 덤빈 것 자체가 불만인 듯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은 열이 뻗쳤다. 팔씨름은 북방의 고유한 시합이다. 어느 누구도 북방인들의 힘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웬걸! 너무 쉽게 지고 말았다.

  “자네 대단하군! 그럼 다시 한 번 해볼 텐가!”

  “시시한데.”

  “너무 자만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럼 다 덤벼.”

  “후회하지 말게!”

  크롬이 투르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긴 자에게 술을 주는 것이 시합의 규칙이었다. 북방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그들은 술을 마신다. 그렇기에 술은 상이나 마찬가지다.

  반면에 투르는 술을 많이 마셔보지 못했다. 특히 아이스카치와 같은 독한 술은 처음이었다.

  광천패황신공의 공능이라면 해독이 가능하지만 투르는 사용하지 않았다. 힘으로만 해결하겠다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투르는 거칠지만 약속은 지키는 사나이였다.

  그게 문제가 되었다.

  타이거 기사단의 기사들이 투르에게 시합을 청했다. 투르는 별반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모두 벌러덩 넘어갔다. 엄청난 힘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시합이 점점 길어지자 밖에 나가 있던 기사들까지 돌아왔다. 그들 모두 시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투르의 상대는 되지도 못했다. 결국 서열 3위 내의 팔씨름 고수들이 참여해야 했다.

  “그런데 자네 몇 살인가?”

  “열여덟!”

  “설마!”

  “거짓말!”

  기사들은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어떻게 저 면상과 몸이 열여덟 살일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이라면 더 쪽팔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열여덟 살에게 기사단원 모두가 진다는 게 말이 되는가!

  “커억!”

  페드로의 팔이 꺾였다. 안간힘을 쓰며 넘어가지 않으려고 힘을 주다 다치고 말았다. 조금만 더 힘을 주었다면 팔이 부러져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페드로는 기사단 내에서 가장 강한 3인 중에 한 명이었다. 그마저 어처구니없이 당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장난 식으로 시합을 했지만 이제는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렸다.

  페드로에 이어 시안이 투르의 상대가 되었다. 시안조차 1초를 버티지 못하고 ‘꽈당!’ 해 버렸다. 당최 상대가 되지 않았다. 20명이 넘게 시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투르는 힘이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 모두 20초 안에 끝내 버렸기 때문이다.

  ‘저런 괴물 같은 놈!’

   ‘어디서 저런 놈이 태어난 거야!’

  기사들은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벌써 30잔을 마신 투르다. 잔도 보통 잔보다 두세 배는 더 큰 잔에 마셨기에 치사량에 가까웠다. 엄청난 주량과 힘에 타이거 기사단은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투르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약간은 붉기까지 했다.

  크르릉.

  투르가 취한 것이다. 삽시간에 숙소는 난장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기사들은 난감 그 자체였다. 이제야 그가 열여덟 살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술을 많이 마셔보지 않은 자에게 아이스카치는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취했다!”

  “어떻게 하냐?”

  “그러게 어린놈에게 술은 왜 준 거야!”

  “내가 열여덟 살인 줄 알았냐!”

  “막아!”

  투르 혼자인데 검을 사용하기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50명의 기사들이 모두 투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투르의 무지막지한 힘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었다.

  휘이이익! 쿠다다당!

  한 팔을 휘두르자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기사들이었다. 너덧 명이 달려들어서 투르의 팔을 잡아챘는데도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는 지경이다.

  기사들은 이제야 투르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괴물 그 자체였다. 이런 놈에게 팔씨름을 하자고 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아아악!”

  “아이고! 내 머리!”

  “무식한 놈!”

  빠직!

  술 취한 와중에도 듣기 싫은 말을 기억하는 투르다. 그 말을 한 기사가 기겁하고 말았다. 투르는 쏜살같이 다가온 것이다.

  “오지 마! 으악!”

  숙소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50명이나 되는 기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타타타탕!

  부르르르르!

  “뭐야?”

  “왜 쇳소리가 나는 거야?”

  쇠몽둥이와 검집으로 투르의 몸을 가격하자 쇠를 친 듯한 충격을 받았다.

  타이거 기사단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투르를 쳐다보았다. 몸이 강철보다 더 단단한 듯했다. 주먹은 살인무기였다. 한 방 맞는 즉시 개구리 뻗듯이 대자로 뻗어버렸다.

  “모두 쳐!”

  “이판사판이다!”

  타이거 기사단도 오기가 있었다. 그들 모두 오랜 수련을 한 기사들이다.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투르라는 것이 불운일 뿐이다. 지치지 않는 끊임없는 투기가 숙소 안을 휘몰아쳤다. 

  30분간 치열한 혈투가 벌어졌다.

  퍼퍽!

  타아아아앙!

  타이거 기사단의 절반 이상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렇게 되자 투르에게 쉽사리 공격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넘치는 힘도 문제지만 저 단단한 신체가 더 문제였다. 때려도 손이 아플 지경이다. 어디서 저런 괴물딱지가 태어났는지 의문이었다.

  주춤!

  한 시간이 되어갈 쯤에 투르가 동작을 멈추었다. 기사들은 긴장됐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투르는 사신으로 온 자들 중에 한 명이다. 만약 여기서 투르가 죽으면 문제가 엄청나게 커진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다가 모두 당하면 개망신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타이거 기사단이었다.

   “아!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응?’

  투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닥에 쓰러진 자들이며, 부서진 탁자와 장식품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투르는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듯이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왜 이렇게 됐지?”

  “몰...라서 하는 소리냐?”

  “머리가 ㅤㄲㅒㅤ질 것 같이 아프기는 한데. 속도 미식거리고.”

  허탈!

  기사들은 모두 허탈한 심정이었다. 투르가 기억을 전혀 못하기 때문이다. 투르가 취해서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기사들이 스스로 말하기에는 수치스러웠다. 정작 상대는 그저 술이 취했을 뿐이다. 술을 마시게 한 것도 자신들이었으니 누구에게 하소연하기도 힘들었다.

  “이런 개 같은 일이!”

  “아씨!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이걸 누가 믿어!”

  “나도 못 믿는다!”

  투르는 어지럽다는 말을 하고 숙소를 나갔다. 누구도 투르를 잡지 못했다. 그럴 명분도 없었다. 남겨진 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북해의 가장 최극단에 있는 얼음이 되어버렸다. 누가 와서 녹여주지 않는 이상 몸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타이거 기사단의 숙소를 나온 투르는 곧장 가르딘의 방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투르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속 시원하다.’

  한동안 심심했던 투르였다.

  하루가 지났을 때 투르와 타이거 기사단과의 시합 내용이 가르딘의 귀에도 들려왔다. 가르딘은 안 봐도 뻔하다는 것을 짐작했다. 어제 밖에 놀러 갔다 오고 난 후 투르는 얌전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가르딘이 투르를 따로 불렀다. 빤히 투르를 바라보는 가르딘이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구나.”

  “30잔인가 마시고 나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북방의 술이 독하긴 하지.”

  “처음으로 많이 마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당분간 조용히 지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가르딘은 그만 나가보라고 했다. 투르는 태연하게 대답하고 난 후 방을 나갔다. 가르딘은 속이 착잡했다.

  투르는 금강지체를 타고난 녀석이다. 더군다나 광천패황신공의 공능이 지켜주고 있는 상태다. 그런 녀석이 술을 마시고 취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얘가 언제 이렇게 능구렁이가 됐지. 아무튼 이제는 어디 가서 속고 다니지는 않겠어.”

  가르딘은 투르가 많이 약삭빨라졌다는 것에 안도했다. 이제야 사람 구실을 할 수준이 되었다고 보았다. 심성이 착한 투르를 물들여 놓았다는 양심의 가책은 가지지 않았다. 가르딘이 그럴 정도로 세심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투르의 롤모델은 가르딘이다. 가르딘이 하는 행동과 말투를 기억하고 따라 하기 마련이다 투르의 경우 가르딘보다 조금 더 즉흥적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됐는데.”

  사신으로 온 지 3일이 넘어가고 있는 시점이다. 아직까지 결정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마이어 공작이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이라 믿었다.

  어둠이 깔리는 시각.

  비밀리에 누군가 마이어 공작을 찾았다. 신분을 확인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러쉬 황자의 인장이 찍힌 신분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마이어 공작은 자신을 찾아온 자를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상대의 기세를 파악하기 위해서 무형의 기운을 운용하였다. 그런데도 상대는 흔들림이 없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제법이군!’

  척 봐도 상급을 넘어 마스터 급에 이르는 기사였다. 제국에 마스터 급에 달하는 기사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마치 새 시대가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마이어 공작이었다.

  상대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저는 피닉스윙의 기사단장 드윈이라고 합니다.”

  “황실 수호 기사단장이 여기는 웬일인가?” 

  “모든 일의 시작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말해 보게.”

  드윈은 러쉬 황자에게 말한 사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마이어 공작에게 전해 주었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마이어 공작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도 드윈이 전한 사실은 너무 엄청난 것이었다.

  번쩍!

  마이어 공작의 눈빛에 기광이 쏘아져 나갔다. 광폭한 기세가 드윈의 몸을 위축시켰다. 드윈은 마이어 공작의 타는 듯한 강렬한 눈빛에 절로 움츠러들었다. 좀 전에 보인 기세와는 천양지차였다.

  ‘굉장하구나!’

  드윈은 내심 자신의 실력이라면 5대 공작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했었다. 막상 직접 대면하자 그것이 오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인가? 증거도 없이 모함을 한 것이라면 지금 당장 네 놈의 목을 쳐서 오우거의 먹이로 주겠다.”

  마이어 공작은 진심이었다. 거짓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드윈은 위축이 되었지만 해야 할 사명을 잊지 않았다. 그는 사실과 더불어 진실이 담긴 문서와 마법 영상구를 내밀었다.

  부들! 부들!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 마이어 공작은 분노로 전신을 떨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다마트 황자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사실을 인정하자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나를 우롱했단 말인가!”

  우우웅!

  자신뿐만 아니라 네벨리언 공작까지도 다마트 황자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난 것이다. 내전이 일어난 것이 다마트 황자와 타이가라 공작의 계략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마이어 공작은 분노를 터뜨려야만 했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제국이 혼란하게 됐다. 또한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이 죄를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이어 공작은 분노보다 더한 괴로움을 느껴야 했다. 누구보다 제국을 사랑한 사람이 마이어 공작이다. 그의 명령으로 죽어간 병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밝혀야지. 숨긴다고 죄가 사라지지는 않지.”

  “공작님의 용기에 감탄했습니다.”

  “용기라. 내가 용기가 있는 것인가!”

  배신감이 들고 수치스럽지만 마이어 공작은 사실을 밝히기로 결정했다. 그는 누구보다 당당한 기사였다. 당당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숨겨서는 안 되었다.

  마이어 공작은 다마트 황자와 타이가라 공작에 대한 큰 분노를 느꼈다. 그들이 만약 살아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발겨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드윈은 바로 돌아가지 않고 가르딘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사신으로 온 가르딘에 대한 예의였다.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에도 가르딘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속에서는 타는 듯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까! 진실이 밝혀졌다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다행이군. 자네가 수고를 많이 했군.”

  “제국을 위할 뿐입니다.”

  “그렇겠지.”

  드윈은 소식을 전하고 사라졌다. 그의 목적은 내전을 종식시켜 제국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일이 끝났으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드윈이 떠나자마자 가르딘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이게 뭐야?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되잖아!’

  필리언과 카니발 백작도 떨떠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신으로 와서 온갖 고생은 다 했는데 정작 중요한 결정은 다른 사람이 얻어 갔으니 말이다.

  “헛지랄 했네.”

  “지금 약 올리냐.”

  “너 때문에 나까지 이게 뭔 개고생이야!”

  “나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건드리지 마라.”

  “역시 네 피는 쓸모가 없어.”

  “젠장! 왜 다 해결된 상태에서 오고 지랄이야!”

  “재수 없는 놈 옆에 있으니까! 덩달아 재수가 없다니까!”

  “네가 더 재수 없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티는 하나도 안 나는 일이 되었다. 물론 공적을 인정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사서 했다는 것이 짜증 날 뿐이다. 역시 뭔가를 하면 잘 안 되는 가르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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