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5/93)

    @@[제2장 실패@@]

  마린 성에서 비밀리에 3만의 원군을 펠칸 성에 투입하였다. 카비론 협곡을 지나쳐 가야 펠칸 성에 당도할 수 있었다. 마린 성과 펠칸 성으로 가는 일직선으로 가장 빠른 길이 이 곳이었다.

  차돌바인 백작이 3만의 병력을 이끌었다. 그는 발리스타 공작의 직속 수하였다. 제법 뛰어난 판단력에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를 받았다.

  “한시가 급하다! 모두 서둘러라!”

  러쉬 황자의 안위가 무엇보다 먼저 확보가 되어야 한다. 마린 성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 중에도 3만의 병력을 빼야 했던 이유가 바로 러쉬 황자 때문이었다. 펠칸 성이야 빼앗기면 다시 찾으면 되었다. 반면에 러쉬 황자가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 전쟁의 성패가 달린 위급한 일이기에 차돌바인 백작은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으면 정찰병을 보내겠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펠칸 성이 공격받은 지 한참이 지났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카비론 협곡을 지나는 차돌바인 백작은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협곡 위에 무언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기우인가!’

  애써 무시했다.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에게 신신당부를 받았다. 찰나 든 기분 나쁜 느낌으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우르르르! 꽈과과광!

  병력이 카비론 협곡의 중간을 지나가는 상황에서 바위덩어리가 떨어져 내려왔다.

  차돌바인 백작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라!”

  바위덩어리를 정면으로 맞게 되면 제아무리 뛰어난 병사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했다. 우선은 병력을 뒤로 빼야 했다.

  슈슈슈슈슉! 슈슈슈슈슉!

  곧이어 협곡 위에서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수많은 병력이 화살과 바위에 맞아죽어 나갔다. 차돌바인 백작은 더 이상의 전진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상태로 더 전진했다가는 모두 전멸당할 수도 있었다.

  “후퇴하라!”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이대로 더 가봤자 원군은커녕 도움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카비론 협곡 위에는 마이어 공작이 비밀리에 숨겨놓은 소수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협곡의 유리한 지형과 적군이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한 작전이었다.

  마린 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두 공작은 심각한 듯이 전장을 바라보았다. 차돌바인 백작이 전투에 패해 돌아왔기 때문이다. 카비론 협곡에 적군이 매복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패배의 요인이었다. 그렇다고 차돌바인 백작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이번 작전의 책임은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에게 있었다.

  “우리가 너무 서둘렀군!”

  “어쩔 수 없었지 않나!”

  “이제 어쩌지?”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지.”

  “역시 북방의 타이거다워.”

  “우리의 조급함을 탓해야겠지.”

  카론 마이어 공작이 아니라 자신들이라도 그런 작전을 세웠을 것이다. 적이 되니 새삼 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때마침 마이어 공작이 숨을 고르기 위해서 병력을 뒤로 물렸다. 마치 원하던 목적을 이루었으니 더 이상의 공격은 필요 없다는 듯했다. 그로 인해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러쉬 황자에게 원군을 보내기 위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마이어 공작의 전령이 마린 성에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마이어 공작님께서 제국 제1의 기사를 가리자고 기사대결을 신청하셨습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뜻밖의 전령에 잠시 말문을 닫았다. 펠칸 성 공략작전이 이루어진 마당에 이와 같은 황당한 대결을 벌이자고 하다니 상식적이지 않았다. 무언가 수작이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말이 다인가?”

  “자신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셨습니다!”

  “감히!”

  차분한 두 공작과 다르게 귀족들과 기사들은 분노를 표출 했다. 제국 제1의 기사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피닉스 기사단의 단장인 파스트론 공작이었다. 파스트론 공작 다음으로 발리스타 공작이 있었다. 마이어 공작은 그다음이라고 할 수 있다. 서열을 굳이 나누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정해진 것 이었다.

  “움하하하하하!”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번 결투는 마이어 공작의 독단이 분명했다. 기사로서 최고의 위치에 서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모두가 보는 가운데서 증명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다운 성격이군!”

  “어찌할 텐가?”

  “물어보나 마나지.”

  발리스타 공작이 파스트론 공작에게 뜻을 물었다. 여기서 회피하면 꼴이 우스워진다. 무대를 마련하고 대결을 신청했으니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마이어 공작으로서는 불리한 대결이었다. 파스트론 공작의 경우 진다해도 발리스타 공작이 있었다. 그에 반해 마이어 공작에게는 자신에 비견되는 자가 아직은 없었다. 그런데도 대결을 신청했다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또한 타고난 승부욕이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파스트론 공작이 승낙의 뜻을 전령에게 전달했다. 전령은 그 즉시 마이어 공작에게 돌아가 소식을 전했다.

  대결은 양 진영의 중간 지점에서 하기로 했다. 누구의 접근도 없이 모두가 보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대결이었다.

  대결이 진행되는 가운데 발리스타 공작은 마법사들을 대기시켜 펠칸 성과의 통신을 열 수 있도록 하였다. 통신간섭 마법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러 명의 마법사가 마법력을 한데 모으면 통신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펠칸 성 공격은 수많은 피해를 양산해 내었다.

  공격했던 타이가라 공작군의 대부분이 죽어 나갔다. 공격 명령을 내리던 리베이라 백작도 도저히 뚫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한참이나 늦은 후였다. 공격 했던 병사들 대부분이 죽었고, 남아 있는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정도 병력으로는 절대 펠칸 성을 점령할 수 없었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막은 거지?”

  리베이라 백작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오러마스터 두 명과 어쌔신 마스터 한 명, 또한 안에 들어갔던 일급 어쌔신과 병력들까지 합하면 절대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어야 했다. 그런데 양상은 일방적인 패배였다.

  리베이라 백작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을 해보았지만 결론은 어처구니없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끼이잉! 쿠쿵!

  굳게 닫혔던 펠칸 성의 성문이 다시 열렸다. 리베이라 백작의 표정이 급격하게 펴졌다가 다시 구겨졌다. 문이 열렸기에 성공한 줄 알았건만 그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펠칸 성에서 공격태세를 취한 것이었다.

  “당...했다!”

  말을 탄 창기병이 길을 뚫었다. 성문에서 검은 화살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엄청나게 큰 말이 타이가라 공작군을 짓밟았다. 그 뒤로 발키리 영지군이 적군을 섬멸하기 위해 나섰다. 발키리 영지군 모두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동료가 기습으로 인해 죽었기에 분노했다.

  “적을 멸하라!”

   가르딘이 기사단의 앞에 서서 오러블레이드를 꺼내 들었다. 지금처럼 적극적인 가르딘도 오랜만에 보았다. 가르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투는 재가열되었다.

  채애앵! 카카캉! 쿠쿠쿵!

  창기병이 미친 듯이 타이가라 공작군을 휘젓고, 발키리 기사단이 적군의 기사들을 쉼 없이 죽여 나갔다. 발키리 영지군의 엄청난 기세가 적진을 흔들어놓았다.

  리베이라 백작은 적군의 압도적인 기세에 절로 위축이 되었다.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기를 잃은 병력은 강병이라고 해도 제 위력을 내지 못하는 법이었다.

  특히 오러블레이드를 뿜어내어 아군 진영을 제집처럼 휘젓고 다니는 가르딘의 놀라운 검술에 수십 명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가르딘은 발키리 기사단을 이끌고 적진의 심장부를 향해 직선으로 내달렸다. 가로막는 적들은 가차 없이 죽여버렸다. 일말의 자비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발키리 영지군이 지나간 뒤를 이어 펠칸 성의 병력까지 합세하였다. 그들 역시 동료를 잃었다. 또한 펠칸 성의 수비대를 맡고 있던 수비대장인 줄리앙이 부대장의 암습에 죽었다. 이로 인해 수비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들 역시 분노로 무장한 채 적진을 향해 검을 뽑았다.

  펠칸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 보내진 병력이 총 5만이 되었다. 그중에 4만이 공성전에서 죽어 나갔다. 남겨진 1만도 원활히 싸울 수 있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베이라 백작은 도망치지 않았다.

  ‘여기서 도망치면 지옥의 저주가 기다린다!’

  빠득!

  이를 악물었다.

  도망쳐 봐야 다마트 황자의 무서운 저주에 수만 년의 고통을 받아야 한다. 타이가라 공작과 함께 다마트 황자의 본질적인 힘을 알고 있는 리베이라 백작이었다. 그럴 바에는 여기서 장렬히 산화하는 게 나았다.

  “놈들을 죽여랏!”

  리베이라 백작이 검을 뽑아 들어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병사들도 안간힘을 다 쓰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수적인 열세가 뚜렷했다. 명령을 한다고 해서 전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어느새 가르딘이 적진의 한가운데를 갈라놓았다.

  화아아악!

  컥!

  가르딘을 막아서던 기사의 몸뚱이가 반으로 쪼개지면서 핏물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가르딘은 오러블레이드를 숨기지 않았다. 오러블레이드는 적병에게 두려움을, 아군에게는 사기를 충천시킬 수 있는 훌륭한 도구였다. 이 좋은 것을 왜 쓰지 않고 가만히 놔두겠는가!

  가르딘이 적진을 뚫고 리베이라 백작에게까지 다가왔다. 가르딘을 바라보는 리베이라 백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러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없었다. 그러나 덤비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마지막에 이르자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타이가라 공작님과 네벨리언 공작님은 어찌 됐느냐?”

  ‘응?’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의 가르딘이었다. 얼굴만 봐서는 아는 얼굴이 절대 아니었다. 가르딘의 연기가 물이 올랐다. 가히 수백 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연기파 배우가 현신했다 할 수 있었다. 표정 하나하나에 서린 감정의 편린들이 조화를 이루어 ‘나 모르겠음!’을 완벽하게 표현 해 내었다.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군! 그들을 왜 내게 묻지? 설마 그 들이 왔는가!”

  “그게 무슨?”

  리베이라 백작은 순간 의문이 들었다. 가르딘의 표정에 깜빡 속아 넘어가고 있었다. 뻔뻔하게 거짓말을 서슴없이 뱉어 버리는 가르딘 앞에서 리베이라 백작은 거짓이라는 것을 전 혀 느끼지 못했다. 눈앞에 증거를 내놓아도 절대 아니라고 발뺌할 수 있는 가르딘이다. 증거도 없이 몰아붙여 봤자 소용없는 짓에 불과하다.

  ‘그럼 뭐야? 일이 어떻게 돼가는 거야?’

  가르딘이 쐐기를 박는 말을 했다.

  “그들이 왔다면 전투가 이 지경이 됐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지껄이지 마라! 감히 나를 속이려고 격장지계를 쓰다니! 그런 말에 내가 넘어갈 것 같으냐!”

  가르딘을 따라온 기사들도 타이가라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이라는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한 명이라면 모를까 기사와 병사들까지 모른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가르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오러마스터 두 명을 기사들과 병사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도 안 되는 추론이었다. 그렇기에 가르딘의 말에 진실성이 느껴졌다.

  ‘그럼 어디를 가신 건가?’

  리베이라 백작은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가르딘이 접근해 온 상태였다.

  “죽여 달라고 용을 쓰는군!”

  ‘헛!’

  그제야 사태파악을 한 리베이라 백작이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가르딘의 검이 리베이라 백작의 배때기를 가차 없이 찔렸다.

  푸욱!

  배를 뚫고 들어오는 검이 내장을 깊숙이 찔렸다. 가르딘이 검을 좌우로 돌렸다. 배 속이 뒤집어지는 충격이 고스란히 리베이라 백작의 뇌리를 강타했다. 뜨끔하던 처음의 느낌과 는 전혀 다른 충격이다.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가르딘이 단숨에 끝장을 내기 위해서 다시 한 번 검을 들려고 할 때 옆에서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가르딘은 검을 뽑아 기사들을 먼저 상대했다. 네 명의 기사가 달려들었다고 하지만 가르딘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상대의 검보다 가르딘의 검이 더 빨랐다. 기사의 검이 휘둘러지기 전에 가르딘의 검이 먼저 뻗어나가 적의 심장을 베어내었다. 덤벼오는 나머지 기사들 역시 같은 최후를 맞았다.

  털썩!

  기사들을 저승으로 보낸 가르딘이 리베이라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포션을 바른다면 살 수도 있었다.

  “항복하겠는가.”

  “항...복...은... 없다!”

  “용기가 가상하군. 적장에 대한 예의로 단숨에 죽여주겠다.”

  생각 같아서는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가르딘이다. 하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명예롭게 보내주는 것이 가르딘의 명성에 흠집이 나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가르딘은 리베이라 백작의 목을 쳐 일검에 죽여주었다.

  “항복하면 포로의 대우를 해주겠다. 그러나 항복하지 않는 자에게 자비는 없다. 모두 죽여라!”

  항복하든지 모두 죽든지 결정을 하라는 뜻이었다. 가르딘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렸다. 치열했던 전장은 리베이라 백작이 죽은 것이 알려지면서 지지부진해졌다. 더 이상의 반항은 소용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끝까지 싸우다가 죽는 병사들보다 항복하는 병사들이 더 많았다.

  가르딘의 시선이 허공을 격하고 한곳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무언가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육안으로 절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가르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는 것이 의미심장할 뿐이다.

  ‘보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다행이군.’

  펠칸 성의 치열했던 하룻밤은 저물어갔다. 날이 밝아오면서 펠칸 성 뒤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끄러웠던 밤과 대조적으로 아침은 조용했다.

  어둠이 사라지자 전장에서 죽은 시체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수만의 시체가 성 앞을 뒤덮었다. 참담함이 대지를 감돌았다. 아직도 식지 않은 핏물이 비릿한 혈향을 뿜어내었다.

  시체들 위에 선 자들은 승리를, 이미 죽은 자들은 패배를 한 극명한 대치상황이 연출되었다.

  “성 앞을 정리하라.”

  가르딘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포로들을 잡아들이고, 시체들을 한곳에 치워서 태울 준비를 했다. 수많은 병력을 파묻을 수도 없기에 태우는 것으로 결정했다.

  마린 성과 북방대군 진영의 중간 지점.

  서로의 진영을 보고 있는 가운데서 두 사람만이 홀로 걸어서 지점에 도착했다. 기사결투가 있기 전 사전에 미리 장소를 점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양쪽의 진의를 인정하더라도 꼭 필요한 절차였다.

  은색의 갑옷과 검은색의 갑옷이 대조를 이루었다. 파스트론 공작과 마이어 공작이 서로를 바라보며 마주 섰다.

  휘이잉!

 이제 막 햇살이 비추는 시각이라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시원한 바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시린 기운과는 다르게 두 사람의 눈빛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기사대결에 대한 전의가 공간을 장악해 나갔다.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에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전장에서 파스트론 공작을 보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하오. 오늘은 내 생애 가장 기분 좋은 날이 될 것 같소이다.”

  “그 말은 나도 동감하오. 하지만 누가 영광을 차지할지는 검을 맞대기 전까지 알 수 없을 것 같은데, 아니오?”

  “뜻이 일치했다니 망설일 필요는 없다고 보오.”

  “시작합시다.”

  검은 아직 뽑지 않았다. 그러나 대결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로의 영역을 차지하려고 덤벼드는 맹수와 같았다. 불타오르는 투지는 전의가 되어 상대를 압박해 나갔다. 기운과 기운이 부딪치며 충돌음이 일어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상대의 기세를 파악해 보려는 뜻이 다분했다. 약점을 보이며 물어뜯을 것이다.

  스르렁!

  차앙!

  파스트론 공작과 마이어 공작의 검이 천천히 뽑혔다. 아직도 서로의 움직임을 탐색하고 있었다. 대지가 두 공작의 대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양 진영의 모든 기사들과 병사들은 흘러나오는 침을 삼키지도 못한 채 긴장감 넘치게 바라보았다.

  둘 다 제국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검사였다. 카이로만 제국 제1의 기사가 바로 대륙 제1의 기사나 마찬가지였다. 그 영광을 누가 차지할지는 대결이 시작되면 알게 될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해서 먼저 공격을 하겠소!”

  “그러시오!”

  말은 정중하지만 기세는 사나웠다. 마이어 공작이 선공을 가하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파스트론 공작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마이어 공작의 기세를 맞받아쳤다.

  사선으로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마이어 공작의 검이 팔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부지불식간에 뻗어나갔다.

  사아악!

  검의 응축된 힘이 대기를 사선으로 잘라놓은 듯한 예리한 검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나운 공격과는 다르게 정중함이 베여 있었다. 각자의 특색이 있겠지만, 서로 기본기만으로도 충분히 절정의 기량에 달해 있었다. 과감한 선공과 더불어 그에 대한 대응 역시 준비가 되어 있는 일검 이였다. 파스트론 공작이 베어져 오는 검의 각도를 직감하고 검을 뻗었다.

  타아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쇳소리가 났다. 맑은 소리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정중한 검으로 보였지만 실상 마이어 공작의 검력은 광폭했다. 보통의 기사는 그 한 수에 충격을 받고 내상을 당했을지 모른다.

  반면에 파스트론 공작은 마이어 공작의 검에 숨은 힘을 측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응 역시 육중한 힘이 실려 있었다.

  둔탁한 충돌음이 일어나고 연속적인 공격이 쉴 새 없이 퍼부어졌다. 마이어 공작이 본색을 드러냈다. 드러내지 않던 야수성이 본격적으로 발휘되었다.

  야수의 감각을 타고난 마이어 공작은 본능적으로 적의 기세를 파악하고 달려들었다.

  그에 반해 파스트론 공작은 정교했다. 둔탁한 쇠를 오랜 시간 담금질하여 예리한 명검으로 만들어낸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누가 더 강한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양 진영의 실력 있는 기사들만이 어렴풋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일반 귀족들이나 병사들에게는 검이 움직이는 궤적조차 보이지도 않았다. 빛과 빛이 번쩍하는 섬광만이 보일 뿐이다.

  채채채챙! 커커컹! 파파파팡!

  검력이 비껴 나간 지점이 여지없이 터져 나갔다. 한수, 한 수에 실린 힘이 상상 밖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차아앙!

  묵직한 소리와 함께 두 검이 서로 부딪쳐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검과 검 사이로 보이는 두 사람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모든 오러 심법을 끌어 올려 대적을 하자 어느새 두 공작의 검에 오러블레이드가 2미터 이상 뻗어 나와 있었다. 오러블레이드가 대치되며 힘과 힘의 대결이 잠시 펼쳐졌다. 어느 누구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이야야합!”

   기합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의 검을 밀치며 거리를 벌렸다. 거리가 벌려지기가 무섭게 다시 파고들어 검을 교차하였다.

  숨 쉴 틈 없는 공수의 조화가 펼쳐졌다. 찌르기가 무섭게 옆으로 피하고 다시 이어지는 속사포 같은 검격은 환상과 같았다. 한 호흡을 쉬는 그 찰나의 틈에 열 번의 검이 휘둘러졌다. 무섭도록 빠른 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대결은 15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눈조차 깜빡일 수 없는 치열한 대결이기에 15분이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치열한 대결 속에서도 아직까지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맹공을 퍼붓는 것 같지만 힘의 배분을 적절히 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마이어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 모두 처음과 같은 표정이다. 그러나 마음속은 달랐다.

  ‘넘어섰다 여겼건만 역시 최고의 기사답구나!’

  ‘이 정도의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니!’

  사실 파스트론 공작은 네벨리언 공작과의 대결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적당히 힘을 조절하여 대결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네벨리언 공작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마이어 공작의 실력이 네벨리언 공작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스터 급 중에서도 최상급에 달하는 두 공작의 실력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발리스타 공작뿐이었다.

  꽈악!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 발리스타 공작이었다. 그 역시도 기사였다. 지칠 줄 모르는 대결로 인해 안에서 꿈틀 거리고 있는 전투본능이 끓어올랐다. 파스트론 공작과 마이어 공작이 보여주는 검투의 진의를 파악할수록 온몸에 전율스러운 소름이 돋았다.

  ‘저 정도였단 말인가!’

  파스트론 공작과 거리를 좁혔다고 생각한 발리스타 공작이었다. 그런데 실제 힘을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마이어 공작과 검을 나눈다고 해도 이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이 떨어졌다. 한동안 정치에 손을 대며 몸을 쉰 것이 발리스타 공작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검은 역시 진실을 속이지 못하는구나!’

  발리스타 공작은 마이어 공작을 인정했다. 그러나 다음에는 이런 분한 감정이 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퍼어엉!

  검폭이 일어났다. 평야의 전장이 쑥대밭이 되어갔다.

  일반적인 대결로는 승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한 파스트론 공작과 마이어 공작이 절기를 꺼내 들었다.

  물론 절기를 아무 때나 사용한다고 모두 효과적인 것은 아니었다. 때에 따라 필요할 때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승부수를 띄운다고 무조건 이길 수 있는 상대라 할 수 없다. 검과 검으로 대화를 나누며, 승부수를 펼칠 수 있는 시기를 만들어 나가야 했다.

  윈드 스텝으로 바람처럼 돌아서던 파스트론 공작을 비스트 스텝으로 감각적으로 따라붙는 마이어 공작이었다.

  야수의 발자국이라고 불리는 비스트 스텝은 본능에 충실한 스텝이었다. 적의 동선을 미 리 예측하는 야수의 움직임에서 따왔다 할 수 있었다.

  따라붙은 순간의 타이밍을 물고 들어지며 마이어 공작의 검에서 타이거 임팩트(호격)가 펼쳐졌다.

  파스트론 공작은 마이어 공작의 거친 공격에 실린 힘의 중심을 파악하고 돌격했다. 그는 정직한 그의 검과는 다르게 공세에 물러서는 얌전한 성격이 아니었다. 직접 부딪쳐 돌파구를 파악해 내었다. 거친 힘에 맞서 토네이도 검법의 토네이도 버스터(풍파)를 날렸다.

  투투투꽈과과광!

  귀를 찢는 파괴음이 펼쳐졌다. 마이어 공작은 타이거 임팩트가 가진 힘의 중심점이 무너지자 곧이어 타이거 바이트(호교)를 사용하였다. 마이어 공작의 검에서 사나운 송곳니가 튀어나와 파스트론 공작의 오른쪽 어깨를 물어뜯으려 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파스트론 공작이 왼발과 오른발을 바꾸어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마이어 공작의 사각으로 돌아선 상황에서 윈드 드래곤 스트라이크(풍룡참격)를 시전했다. 드래곤의 발톱과 타이거의 발톱이 맞부딪쳤다.

  대결이 중반을 넘어 후반에 달하자 호흡이 서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승부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둘 다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마지막 출수를 하기 위한 빈 틈을 찾았다.

   “승부를 걸겠소!”

  “나도 마찬가지요!”

  지금까지의 대결이 굉장했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서 있는 자에게 모든 영광이 돌아갈 것이다. 서로에게 가장 자신 있는 공격을 시전할 것이다.

  마침내 검이 움직였다. 검은 간단한 베기에 불과했다. 모든 검법은 베고 찌르는 것에서 파생이 되었을 뿐이다. 종착지에 도달하자 검법의 오의가 하나로 혼합되어 간단하게 보였다.

  푸아아아아아아앙!

  주르르르르르륵!

  기본적인 베기가 충돌한 것과는 다른 번천지복한 파괴력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새벽이슬로 젖은 땅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두 공작의 신형이 양쪽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발이 반쯤 파묻힐 정도로 깊게 파인 흙이 충격의 여파를 나타내었다.

  척!

  비틀!

  검을 땅에 박아서 간신히 멈춘 파스트론 공작과 마이어 공작 모두 심한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심지어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핏물이 입가를 붉게 적셨다. 쉽사리 움직일 상황이 되지 않았다. 누가 이겼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마이어 공작이 비틀거리는 신형을 곧추세우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그리고 파스트론 공작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대결은 이대로 끝나야 할 것... 같소이다! 결국 내 생애 가장 아쉬운 대결이 되고 말았소이다.”

  “나도 그렇...소!”

  “다음 기회에는 죽을 때까지 싸워봅시다!”

  “곧 그럴 것이오!”

  여전히 호기로운 마이어 공작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대결을 벌이게 되면 결국 둘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아직 죽을 수 없다. 목숨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뒷받침할 후계자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이길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마 이어 공작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파스트론 공작도 마이어 공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질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도 최강의 기사라는 호칭을 쉽게 내주고 싶지 않았다.

  대결은 결국 무승부가 되었다.

  어찌 보면 싱거운 결과지만 지켜보고 있던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너무나 엄청난 대결을 봤기 때문에 한 동안 정적이 흘렀다.

  마이어 공작은 망설이지 않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한 번 마음을 정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돌아서지 않는 것이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북방대군의 모든 귀족과 기사, 병사들은 마이어 공작의 천의무봉한 결전에 감탄하고 있었다.

  체이슨이 마이어 공작을 마중했다.

  “대단하셨습니다, 아버지!”

  “훗!”

  마이어 공작이 약간은 허무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그의 검을 넘어서기에는 내가 부족했던 것 같다.”

  “상대는 제국 최강의 기사입니다! 아버지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나는 멈추지 않는다. 상대가 누가 됐든 북방의 야인은 절대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아! 너는 나보다 더 거대한 벽과 경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절대 물러서지 마 라!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마이어 공작이 하는 말은 체이슨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북방대군 전체에 하는 말이었다. 마이어 공작의 뜻에 부합하듯이 북방대군의 전투적인 기세가 크게 팽창했다. 그들의 타고난 본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내 아들이지.”

  체이슨은 마이어 공작의 아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익스퍼트 상급에 다다라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체이슨이 경쟁해야 하는 상대는 제국의 신성이라고 불리는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마이어 공작의 도전보다 더 혹독한 도전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이슨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불굴의 정신이야말로 북방민족의 독특한 기질이었다.

  마린 성 전투는 이제 끝이 났다. 다시 돌아가 전열을 가다듬고 다음 전투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마이어 공작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모두 회군한다!”

  마이어 공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방대군이 일사불란하게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 그들은 절반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북방대군이 회군할 때 파스트론 공작이 마린 성에 들어왔다. 그는 들어와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다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발리스타 공작이 따라갔다.

  방 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파스트론 공작이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털썩!

  “괜찮으시오!”

  “별거 아니오.”

  발리스타 공작이 부축하려는 것을 파스트론 공작이 제지했다. 아직까지 누구에게 부축을 받을 정도로 나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일어나서 의자에 앉았다. 마린 성의 병사 들이 지켜보고 있기에 부상을 당하지 않은 척하였다. 괜한 일로 사기를 떨어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방심했단 말은 하지 않겠소. 그가 가진 검에 대한 열정이 나를 능가했다는 것뿐이오.”

  “허어! 그 정도란 말이오!”

  발리스타 공작은 설마 파스트론 공작이 부상당했을 줄은 몰랐다. 서로 타격을 조금 입은 것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이어 공작의 존재가 새삼 더욱더 무겁게 다가왔다. 그는 단지 용력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 대결로 인해 북방 대군의 사기는 충천했을 것이다. 불리한 도전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이득을 계산한 치밀한 대결이었다.

  “오늘 하루 몸을 보전하면 내일이면 거동이 가능할 것이오. 그러니 이 일은 공작만 알고 있으시오.”

  “알겠소이다.”

  그보다 통신이 발리스타 공작에게 왔었다. 겨우 통신방해 마법을 뚫고 펠칸 성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가르딘 후작이 펠칸 성을 지켜 냈다고 하오.”

  “음! 불행 중 다행이오!”

  “정확한 통신 내용을 전달받지 못했지만 황자님이 무사하니 이번 전쟁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진행이 될 것이오.”

  뜻밖의 희소식이었다.

  솔직히 정 안 되면 마린 성에서 나와 북방대군과 정면대결을 벌여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만만치 않은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펠칸 성의 상황이 정확히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두 공작은 암중으로 가르딘을 인정하게 되었다. 적지 않은 일을 해내었기 때문이다.

  펠칸 성은 오전 내내 부산했다.

  죽은 병사들을 정리하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통신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서 주변에 설치된 방해 마법진을 부숴버려야 했다.

  비밀 방에 숨어 있었던 러쉬 황자가 나와 기사들과 병사들의 선전을 치하해 주었다. 이들이 있기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가르딘에 대한 러쉬 황자의 신뢰가 쌓여갔다. 만약 가르딘이 없었다면 이번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봐야 했을 것이다.

  전투의 흔적을 보니 적 병력이 펠칸 성의 병력보다 배 이상 더 많았다. 배신자로 인해 성문이 열리는 상황에서 이 정도의 전과를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능력을 인정받기 충분했다.

  신뢰가 가득 담긴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은 가르딘은 속으로 생각했다.

  ‘반사!’

  별로 달갑지 않다. 신뢰가 쌓일수록 러쉬 황자의 주변에 머물러야 한다. 후일 제국의 황제가 되었을 때 최측근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공작이 될 판국이다. 불편한 상황이 가르딘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그대 덕분에 나와 펠칸 성이 무사했네. 이번에 세운 공은 내 반드시 갚아주겠네!”

   “황자님의 성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나 저는 임무를 충실히 하지 못한 죄인입니다. 성내에 배신자를 발견하지 못해 러쉬 황자님을 위험하게 만들었습니다.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설마 벌을 주겠냐!’

  마음속에 숨은 뜻과는 다르게 입은 저절로 미사어구를 난발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유치한 말을 내뱉자 주변에서 듣고 있던 필리언과 사이론은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저러고 싶을까!’

  ‘속생각을 알면 황자가 기절하겠군!’

  사이론과 필리언이 배알이 꼴리는 표정인 반면 러쉬 황자는 가르딘의 충성심에 더욱더 상찬을 하였다. 하여간 사람 가지고 노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가르딘이다. 이미 러쉬 황자는 가르딘을 무한 신뢰하는 데 한 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대의 충직함에 다시 한 번 감탄했네. 앞으로도 나를 도와 제국의 번영에 힘써 주게.”

  “그저 명에 따를 뿐입니다.”

  긴박한 전장의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서 분주한 가르딘이다. 오랜 시간 황자와 노가리를 깔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마린 성과 황궁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펠칸 성의 사정을 전달해야 했다.

  가르딘을 따라 필리언이 뒤에 달라붙었다.

  “손바닥 괜찮으냐?”

  “괜찮지 그럼.”

  “비비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너라고 별 수 있을 것 같아? 시답지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성안이나 잘 정리해.”

  “알았다, 인마.”

  필리언의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을 들어줄 시간도 없었다. 농담 따먹기 하는 시간에 마린 성과 황성이 공략당하면 펠칸 성은 고립되어 버린다.

  솔직히 러쉬 황자에 대한 의리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일이 잘못되면 러쉬 황자를 인질 삼아 살길을 도모할 생각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나중에 배반자라고 욕을 해도 지들이 어쩔 것인가! 우선은 살고 봐야 하지 않은가! 물론 되도록 의리를 지킬 생각이다. 가정의 화목을 유지하는 선에서 말이다.

  ‘그래도 음흉한 3황자는 조심해야 하는데.’

  가르딘은 어쌔신들이 계속 출몰하는 게 3황자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저 단순한 의뢰에 대륙의 어쌔신들 전체가 움직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적은 차후도 생각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공격을 했다. 뭔가 연관이 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찾으려 들면 완벽한 증거가 부족했다.

  의심은 되지만 당장은 지켜보기로 결정을 했다. 잘못 건드렸다가 벌집을 떨어뜨리는 수가 있었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질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항상 순리대로 흘러가지도 않을뿐더러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지도 않는다.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해야 했다.

  치치칙!

  통신구에 불이 들어왔다. 펠칸 성의 마법사들이 노력한 것 보다는 마린 성에서 연락이 먼저 온 것이다.

  “펠칸 성은 응답하라!”

  “펠칸 성을 사수했고, 황자님은 무사하다. 나는 가르딘!”

  치지지직!

  완벽하게 통신이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그렇기에 가르딘은 필요한 말을 우선적으로 꺼냈다. 마린 성 에서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펠칸 성과 러쉬 황자의 안위였다. 필요한 말을 해놓았으니 전황을 기다려봐야 했다.

  흔들리는 눈빛.

  이제까지 이처럼 화가 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펠칸 성에서 벌어진 소식을 전달받은 다마트 황자는 폭발할 것 같은 노기를 보였다. 아무도 없기에 망정이지 그 자리에 누군가 있었다면 기운만으로 죽음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이냐?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었다! 그런데도 실패를 하다니! 어찌 이럴 수 있지?”

  차분한 성정을 보여주던 다마트 황자의 입에서 거친 노성이 터져 나왔다.

  계획이 빗나가도 한참이나 빗나갔다. 러쉬 황자를 사로잡거나 죽였어야 했다.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는 최악의 결과였다. 이번에 사용한 전략을 다시 사용하기는 어려움이 컸다. 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대비를 할 것이다.

  화활!

  다마트 황자의 폭발적인 기운이 불꽃이 되어 앞에 놓인 탁자를 불태웠다. 불이 붙은 탁자는 삽시간에 타올라서 금세 시커먼 재가 되어버렸다.

  “크윽!”

  다마트 황자는 터져 나오는 기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가 사용하는 기운은 아직 완벽하다 할 수 없는 상태다. 원래의 몸과는 태생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목숨을 걸고 사용한다면 한계를 극복하여 사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된다.

  “목숨을 걸고 시작한 일을 여기서 실패할 수는 없다!”

  그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실패라는 것을 염두에 둔 적이 없다.

  끓어오르는 불길한 기운이 사라지자 한순간에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다마트 황자였다. 실패한 이유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았다. 원인 없는 결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원인을 찾기 위해서 그의 명석한 두뇌가 살아 움직여 나갔다.

  한참 동안 감았던 다마트 황자의 눈이 떠졌다.

  “마이어 공작과 내가 조금 무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 피해는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펠칸 성이라는 것인데.”

  펠칸 성에 보낸 병력은 어쌔신 길드의 최정예 부대였다. 길드의 모든 힘을 집중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성안에 심어놓은 내부 공모자에 의해 문이 열린 이상 정면 전투에서 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상 이상으로 펠칸 성의 병력이 강했다는 뜻이 되었다. 또한 타이가라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가르딘의 태도를 보아서는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놈이 나를 속인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인가? 놈이 그 정도의 인물일 수 있는가!”

  끊임없이 의문을 던졌다. 하지만 답을 내지는 못했다. 가르딘의 능력이 두 공작과 어쌔신 마스터를 능가한다는 터무니없는 답안을 내놓기에는 다마트 황자의 머리가 너무 이성적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 우선은 인폴트 성으로 빨리 회귀해야 한다!”

  놈들이 만약 인폴트 성을 공략하면 정말 끝장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인폴트 성을 사수하면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할 때가 되었다.

  ‘정 안 되면 같이 죽는다!’

  이대로 모든 것을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제국에 대한 애정 따위는 그에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치 모든 것을 파괴시키려고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북방대군을 이끌고 있는 마이어 공작도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확실한 전략이라고 해도 전쟁은 무수한 변수가 작용하기에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네벨리언 공작이 실종됐다는 것은 이해되지도 않을뿐더러 이해할 수도 없었다.

  오랜 시간 뜻을 같이해 온 네벨리언 공작이었다. 다마트 황자나 타이가라 공작보다 더한 믿음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믿을 수가 없군.”

  네벨리언 공작의 성격상 죽으면 죽었지 도망칠 성정이 아니었다. 그가 작정하고 움직인 작전에서 이유도 모른 채 사라졌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죽었을 것이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신이 아닌 이상 마이어 공작도 알 수 없다. 다만 그에게 어떤 모종의 원인이 작용하여 죽었다고 단정했다.

 다마트 황자가 어떻게 할지 모르나 일이 정말 어렵게 흘러가고 있었다. 다마트 황자가 보유한 귀족들과 병력의 대부분이 마이어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이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네벨리언 공작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병시들의 사기도 문제이거니와 귀족들의 동요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주인이 사라지면 당연히 혼란스럽게 될 수밖에 없다.

  “인폴트 성으로 가야 한다.”

  다마트 황자와 마찬가지로 인폴트 성을 사수하기 위해서 움직여야 했다. 인폴트 성이 무너지면 다마트 황자의 진영이 서쪽과 북쪽으로 나뉘게 된다. 결과적으로 분산이 되어 적들 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없다.

   정오가 넘어가는 시각에 펠칸 성 주변의 통신방해 마법진을 모두 해제할 수 있었다.

  가르딘은 그 즉시 마린 성과 황성, 그리고 귀족들에게 간밤에 있었던 일을 전했다. 흔들렸던 동요가 사라졌다. 이번 전투로 인해 오히려 1황자 진영이 더 유리해졌다. 적들의 계략이 훌륭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무리한 일이 되었다.

  가르딘은 소식을 모두 전하고 나서야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어젯밤부터 심력을 낭비했더니 머리가 조금 피곤했다.

  “이제 좀 한숨 놔도 되겠어."

  펠칸 성의 내외부도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필리언과 발키리 기사단이 분주하게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르딘은 쉬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곰곰이 따져보았다.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이 움직일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치지 않을 것이다.

  끼익!

  가르딘의 방으로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알고 있는 자가 들어오는 것이기에 가르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평소 성격과는 다르게 상당히 열 받아 있는 상태였다. 보기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너스레를 떨며 대하고 있는 가르딘이 어찌나 얄미운지 카니발 백작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 방 치고 싶은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람들이 왜 가르딘과 말을 섞으면 열 받는지 카니발 백작도 경험하고 있었다.

  카니발 백작은 잠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방에 가둬두면 어찌합니까? 이유도 모른 채 간밤에 비명횡사할 뻔했습니다!”

  카니발 백작은 현재 오러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방에 갇혀 있었다. 펠칸 성에 침입자들이 들어오고 나서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밖에 나갈 수 없는 카니발 백작이었다.

  만일 카니발 백작의 방에 적이 침입했다면 눈먼 검에 비명횡사할 뻔했다. 지금까지 갈고닦은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을 발휘도 못 해보고 죽었을 것이다.

  그것이 못내 두려워서 방 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그래도......!”

  “내가 포로에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그리고 그대를 노리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내가 그 정도도 계산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 같나!”

  위엄이 서린 서릿발 같은 기세에 카니발 백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가르딘이 워낙 소탈하게 대해서 자신의 신세를 망각한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자신은 아직 포로였다. 더군다나 얼마 전까지 다마트 황자를 위해 싸웠다. 가르딘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만도 감지덕지한 것이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미안한 감정을 철저히 숨겼다.

  ‘솔직히 몰랐다.’

  사실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회유하려고 데려온 유능한 놈을 잃을 뻔했다. 만일 무차별적으로 쳐들어왔다면 카니발 백작은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꿀리고 들어가면 나중에 귀찮아진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 정도까지 치밀하게 계산할 수 있으면 가르딘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보다 자네는 어찌할 텐가?”

  “사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죽을 뻔한 일로 찾아오기는 했지만 가장 큰 목적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결론은?”

  “영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뭐?”

  가르딘은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1황자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했더니 자신을 따르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권력을 지향했던 놈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자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눈빛을 보니 진실성이 느껴졌다.

  ‘이거 오해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아직 카니발 백작은 가르딘의 성격을 잘 모르고 있는 상태다. 그저 지금까지 보여준 전략, 전술과 무서운 귀계만을 봤을 뿐이다. 또한 일개 기사에서 후작 위까지 올라왔고, 앞으로는 공작이 될 수도 있다. 이후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도 있는 가르딘이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지?”

  “영주님을 보필하면 제 입지가 올라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느꼈습니다. 지닌바 역량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뒤를 받쳐 줄 충분한 배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역시나 솔직하군.”

  구태의연하게 당신의 능력에 감탄하여 수하가 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런 말을 신용하기는 힘들었다.

  ‘잠깐! 내가 변방에서 안전하게 생활을 하려면 아무래도 중앙에 귀족들 중 몇 명 정도는 내 편으로 만들어놔야겠지.’

  내전이 끝나고 난 후 당연히 논공행상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같은 목적을 가졌기에 함께했지만 권력이라는 것이 양분할 수 없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권력을 가지 기 위해서 파벌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예삿일이다.

  또한 가르딘은 더 이상의 공적이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우선은 카니발 백작을 임의대로 천거를 한 후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다. 나중에 귀족들은 그 일을 물고 늘어질 것이 뻔하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정쟁에서 한발 물러선다고 당당하게 말을 하는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게 크다 보니, 가르딘의 입지가 너무 견고해지고 있었다.

  “좋네.”

  “감사합니다.”

  “반대 진영에 있었으니 핸디캡이 조금 클 거야.”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능한 수하를 원하네. 내가 힘닿는 데까지 자네를 밀어주겠네. 대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네도 공적을 쌓아야겠지.”

  “물론입니다.”

  “내가 밀어주면 어느 정도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거네. 난 어차피 발키리 영지의 영주네. 황궁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지. 그렇기에 자네는 황도에 머물면서 세력을 키워주면 고맙겠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카니발 백작은 세력이 없어서 그렇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가르딘은 그의 실력을 인정해 주었다. 세력만 받쳐 주면 알아서 클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역량이 되었다.

  카니발 백작도 가르딘 후작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믿었다. 전쟁에서 보여준 역량과 배포는 잣대로 잴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후에 잠시 농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였다.

  또한 향후 발키리 영지와 황궁과의 연계까지 감안하고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카니발 백작이 온전히 가르딘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후일 오늘 충성한 것을 후회하는 결과가 찾아오게 될 것이다. 가르딘은 황궁과의 연계가 아니라 단절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귀찮은 일을 카니발 백작에게 모두 떠넘기는 만행을 저지른다.

  “알아서 네 선에서 해결해!”

  그 말만 달랑 남기고, 발키리 영지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게 된다. 황제가 부르는데, 그것을 카니발 백작이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양쪽에 끼여서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현재는 화기애애할 뿐이다.

  가르딘은 좋은 수하를 얻었다는 것에 만족했고, 카니발 백작도 배경을 얻었다는 것에 크게 기뻐했다.

  “하하하하!”

  뜻이 다른 둘은 크게 웃었다. 가르딘은 웃으면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간단한 서류 작성 이라는 명목 하에 귀족으로서의 명예를 서약하도록 했다.

  카니발 백작은 당연한 요식행위로 생각하고, 별 뜻 없이 지옥의 페이퍼에 서명하고 말았다. 가르딘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더욱더 진해졌다. 나중에 누가 울지 결과가 뻔히 보였다.

  * * *

   슈유유융! 콰과가가강!

  오러블레이드의 응축된 힘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가 반경 5미터 내외를 초토화시켰다. 연속적으로 절기를 펼치며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렸다.

  누군가와 대적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선을 다했다. 마치 가상의 적을 놓고 역량을 테스트하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가 적을 인식하고, 실재한다고 믿게 되면 현실적으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실전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섀도 소드라고 한다.

  시전하는 자의 역량이 높고, 두뇌가 강렬하게 인정할수록 섀도 소드의 단계는 높아진다. 그의 실력은 이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마스터 급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후우응! 후우응!

  무려 한 시간 이상 최강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보통 굳은 의지가 아니었다. 핏발이 선 그는 상대방에 대한 강렬한 복수의 의지가 보였다. 마침내 검을 멈춘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 팔이 없는 자가 로브를 입은 채 서 있었다. 그는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느는구려.”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다! 그보다 언제 만들어지는 것이지?”

  “이제 거의 다 만들었소.”

  “그것이 만들어 지면 정말 복수할 수 있는 건가?”

  “물론이오. 그리고 때마침 손을 들어줄 동지가 생길지도 모르겠소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로브를 입은 자는 이제까지 계획한 내용을 검사에게 설명해 나갔다. 이유를 들을수록 검사의 눈빛은 지독한 한기를 뿜어내었다.

  “우선은 완성된 기체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오. 완벽해진다면 아무리 그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분명하오.”

  “내 모든 것을 앗아간 놈을 절대 그냥 죽이지 않겠다. 비통해하며 처절하게 발버둥 치다 죽게 만들 것이다!”

  원한이 골수까지 사무쳐 있는 것 같았다. 로브를 입은 자는 원한에 미쳐가는 그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럴수록 이용하기는 더 쉽겠지. 이후 내 소모품이 되어 주어야겠다.'

 아무튼 두 사람에게 원한 진 인물은 발 뻗고 자기 힘들 것처럼 보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