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93)

   @@[제6장 계략(성동격서)@@]

 네킨 성 공략이 끝난 후 10일이 흘렀다. 성을 함락했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성에 대한 체제를 정비하고, 주변 영지를 다독여서 위계질서를 확립해 놓을 필요성이 있 었다. 가르딘은 10일 동안 정신없이 바빴다. 이제야 어느 정 도 체제가 잡혀서 숨이 트였다.

 -네킨 성 지하 감옥.

 네킨 성의 지하 감옥은 상당히 깊은 곳에 자리했다. 지하 로 족히 5층 깊이에 감옥이 존재했다. 어둠 속에서 횃불 하나에 의존해야 하는 극악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습한 기운 과 곰팡내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특히 이전에 수감되었던 자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핏물과 토사물들은 보기만 해도 역겨울 정도였다.

 네킨 성에 있던 귀족들도 이곳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런 귀족들이 지금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헛구역질을 해야 했다. 이런 곳에서 1분도 살지 못할 것 같았 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더러운 것보다 인간의 원초적인 것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바로 배고픔이었다. 언제 그들이 배고픔을 겪어본 적이 있었던가! 고작 2일이 지났건만 사람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욕구를 느꼈다.

 “이보... 시오!”

 “제발 먹을 것을 주시오!”

 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지하 감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는 귀족들이었다. 소리를 질러 대고 철창을 두드려도 지하 통로의 횃불만 흔들릴 뿐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들은 이대로 굶어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굶어죽는 공포는 상상 이상으로 무서웠다. 가르딘에 대한 절망감과 분노가 교차할 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누군가 온다는 것을 안 귀족들이 통로를 쳐다보았다. 사람이 보이기도 전에 냄새가 풍겨왔다. 냄새는 강렬하지 않았다. 푸석푸석한 빵 냄새가 이처럼 선명하게 느껴질 수 있다 는 것을 귀족들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지하 감옥으로 내려온 자는 사이론이었다. 사이론이 병사2명과 함께 빵을 가져왔다. 빵은 일반병사들이 먹는 볼품없는 밀빵이었다. 재료에 들어가는 것이 밀 이외에 아무것도 없기에 맛보다는 배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이론이 빵을 주려고 하자 귀족들이 쇠창살 사이로 마구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귀족체면을 버린 지 오래였다. 사이론은 귀족들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했다. 하필이면 가르딘에게 밉보여서 이런 꼴을 당하니 말이다. 물론 그들이 한 짓은 죽어도 마땅했다. 만약 저와 같은 처지에 처한다면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간만에 들어가는 음식이라 체할지도 모르니 물을 먼저 마시고 먹는 게 좋을 거다.”

 사이론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귀처럼 음식을 먹는 귀족들 이다. 빵은 그들이 먹어본 어떤 음식보다 달콤하고 맛있었다. 시장이 반찬이 라는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

 아구! 아구!

 빵은 무제한으로 주었다. 그러나 갑자기 많은 양의 빵을 먹을 수도 없었다. 또한 먹을수록 빵은 맛이 없어졌다. 예전에 먹었던 온갖 산해진미가 그리워지는 귀족들이다. 지금의 처지가 서글플 뿐이다.

 “물어볼 것이 있소.”

 루벨 자작은 배를 채우고 나자 궁금증이 생겼다. 이대로 여기에 계속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고 싶었다.

 "말해 봐라."

 사이론은 선뜻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귀족들 모두 가장 궁금한 질문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평생 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직 나도 몰라. 영주님이 바쁘셔서 신경을 못 쓰고 있거든.

 “우리를 이곳에 평생 놔둘 생각이시오!”

 "나야 모르지.”

 가르딘 후작이 아예 신경을 끊고 있다는 말에 공포감이 들었다. 어쩌면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솟구쳤다.

 “우리 얘기를 후작님께 해주시오! 그럼 뭐든지 들어 드리리다.”

 나한테 그래봐야 소용없어. 뭐 그래도 일단 말은 한 번 해볼게.”

 “고... 맙소이다!”

 귀족들이 누군가에 고맙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이 순간 사이론이 진심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그가 아니었다면 굶어 죽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가르딘은 이미 그들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잡아 놓은 포로를 굶겨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면 가르딘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는다. 그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다. 사이론이 빵을 갖다 준 것도 가르딘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그럼 더 궁금한 것이 없으면 나는 이만 가겠다.”

 “이... 보시오!”

  “왜 그러지?”

 “카니발 백작은 어떻게 됐소이까?”

 “그건 좀 말하기 곤란한데.”

 사이론이 망설이는 듯하자 더 궁금해진 루벨 자작과 귀족 들이었다. 모든 귀족들이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카니발 백작만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이상하게 느껴진 귀족들이었다.

 “카니발 백작이 걱정이 되어 그렇소이다. 우리가 듣는다고 뭔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소!”

 “그렇긴 하네. 카니발 백작님은 지금 성내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시고 있지. 가끔씩 영주 님과 긴히 중요한 담화를 나누시기도 하고, 잘 지내시지 너무 걱정들 마시게.”

 사이론은 답변을 해주고 지하 감방에서 벗어났다. 사이론도 여기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귀족들의 비위가 예상보다 튼튼한 것 같았다.

 루벨 자작이 설마 카니발 백작이 걱정돼서 물어봤겠는가! 카니발 백작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이론의 말을 들어보니 카니발 백작이 가르딘 후작에게 넘 어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 아닌가! 자신들은 쓰레기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데 카니발 백작은 귀 빈대접을 받고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카니발 백작에 대한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들이 카니발 백작에게 한 행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루벨 자작님! 그자가 배신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기어이 우리를 배신했구나!”

 “절대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그자를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간단한 이간질이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역시 이간질 대마 왕 가르딘다웠다.

 카니발 백작은 사이론의 말대로 성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다만 카니발 백작 주변으로 기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몰라도 카니발 백작은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르딘이 무언가 자신의 몸에 금제를 가한 것을 알았다. 오랜 시간 비밀리에 오러를 갈고 닦았다. 피나는 노력으로 이룩한 상급의 오러가 모두 사라지자 허탈감이 밀려왔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섭섭하긴 하군.’

 가르딘이 제안을 했었다. 오러를 다시 사용하고 싶으면 1황자를 지지하라고 말이다. 반강제적인 제안이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이만큼이나 인정해 준 이가 처음 이었기에 솔직히 기쁜 마음이 들었다.

 하루에 한 번 정도씩 가르딘은 카니발 백작을 불렀다. 그 둘은 지금 치열한 머리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한 수만 물러주게.”

 “후작님답지 않습니다.”

 “너무 매정하군.”

 가르딘의 이마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웬만한 일에는 땀조차 흘리지 않는 가르딘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가르딘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설마 5일 만에 자신이 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카니발 백작은 바둑을 한 번도 두어 보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르딘이 5일 만 에 완벽하게 밀려 버렸다. 신마의 신변잡기 중에 하나인 기 예가 바로 바둑이었다. 국수의 반열에 들 정도로 대단 한 실력을 가진 신마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졌다. 물론 신마 에 비해서 많이 부족하지만 단 5일 만에 질 정도는 아니다.

 처음에는 10수를 잡아주어도 이길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그 수가 줄어들더니 이제는 동수에서 지게 생겼다. 개망신이 따로 없었다.

 "바둑이라는 것 참 재미있습니다. 하나의 돌을 놓았을 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렇게 하나둘씩 쌓여갈수록 전략이 맞아 들어가고, 그 안에 수만 가지의 전술 이 들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냐.”

 “상대의 수를 읽고, 미리 예측하여 그 안에서 담긴 진실을 파악하는 놀이 중에 놀이 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후작님은 이미 저를 마음먹은 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무슨 뜻이지?”

 “성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후작님과 긴요한 대화를 나눈다고 귀족들에게 말했을 것 아닙니까.”

 ‘호오!’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미 알고 있었다. 역시 범상치 않은 두뇌를 가지고 있다. 검만 수련해도 상급의 오러에 이르기 어려울 텐데 대단한 녀석이었다.

 “알고 있었나.”

 “돌아갈 수 없게 만들고 회유라니 정말 치사하십시다.”

 “치사해도 어쩔 수 없지. 확실한 방법이니 말이야.”

 “그래서 저도 이곳에서 물러서지 못하겠습니다.”

 탁!

 “허억!, , 

 가르딘에게서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바둑판의 중심에서 외곽이지만 가르딘의 사혈에 해당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끊어 버리는 카니발 백작의 일격필수였다. 가르딘의 심장으로 흘러가는 길을 끊어버리자 더 이상의 반항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자네 이러긴가!”

 “확실한 곳 아닙니까.”

 “후작의 권위로 위협하면 어떨까!”

  “그냥 절 죽이십시오.”

 “심지가 굳어서 좋겠네.”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좋아 다시 한 번 두지.”

 “그러지요.”

 가르딘도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쪽이 너무 팔린다. 이번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신마의 지식을 모두 사용해 보았다. 이제까지는 그저 가르딘의 임의대로 판단을 내렸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카니발 백작도 쉽지 않은 상황이 펼쳐졌다. 치열한 머 리싸움이 계속되었다.

 “동쪽을 공략하는 척하면서 서쪽을 치다니 !”

 “후작님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를 북쪽으로 유인해서 중심을 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성동격서와 조호이산지계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바둑판의 배열이 마치 제국을 둘로 나누는 것처럼 흰색과 검은색이 양분되어가고 있었다. 5판을 두었는데 2:2인 상황이었다. 마지막 판에 마지막 수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큭!’

 가르딘이 둔 신의 한수에 누란지위의 위태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백척간두의 어려움을 느끼듯이 카니발 백작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마지막 한 수를 놓기 위해 무한한 심력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적의 심장부를 공격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돌아왔다. 그것이 발목을 잡아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졌... 습니다.”

 “어... 떤가! 내 실력이!”

 “장... 하십니다.”

 “그... 렇지.”

 5일 배운 자를 이기기 위해 엄청난 심력을 쏟아 부은 가르딘이다. 오늘처럼 이기고 싶어 하는 가르딘도 근래에 보지 못했다. 가르딘의 오기가 만들어낸 집념의 승리였다.

 “심력을 소비했더니 목이 컬컬하군. 술이나 한잔할까.”

 “좋습니다.”

 '‘주량이 어떻게 되나?”

 “말술입니다.”

 “좋군.”

 끼이익!

 필리언이 술 냄새를 맡고 들어왔다. 술 냄새라면 기가 막히게 맡는 굉장한 코를 가지고 있었다.

 가르딘과 필리언은, 카니발 백작은 서로 나이가 비슷하다. 가르딘이 실력을 끝까지 숨기고 있었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관계였다. 그래서 허심탄회하게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카니발 백작은 굉장한 주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가르딘과 필리언도 주량이 상당했다. 하루 종일 퍼마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르딘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야 했다. 어제 술통을 통째로 마셨는지 배는 아직도 더부룩한 상태였다. 일부러 취하기 위해서 조금 무리를 했었다. 메롱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가볍게 천룡무상신공을 운기했다. 역시 숙취해소에는 천룡무상신공 만한게 없었다. 취기를 몰아내고 뻑적지근한 몸을 달랜 가르딘은 지하 감옥에 가둬둔 귀족들을 보기 위해서 움직였다. 일부러 기사나 병사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홀로 성의 지하로 내려갔다.

 5층까지 내려오자 메케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러나 가르딘은 이런 경험이 적지 않다. 이 정도에 비위를 상하지 않는다.

 횃불이 비쳐지는 지하감옥의 쇠창살 사이로 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10일 동안 극도의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식사는 꼭 2일 만에 한 번씩 주었다. 배가 고파야 음식의 고마움을 알기 때문이다. 가르딘의 발걸음 소리에 잠을 팬 귀족들이 었다.

 “잘들 지냈나?”

 무미건조한 음성이 귀족들의 심령을 흔들었다. 설마 가르딘 후작이 직접 이곳까지 내려올 줄은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던 귀족들을 대신해서 루벨 자작이 대표로 물었다.

 “우리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우리는 항복을 했습니다.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

 “설마 우리를 죽이실 작정이십니까! 만약 그렇게 되었다 가는 후작님의 명예가 떨어질 것입니다!”

 ‘음!’

 가르딘은 고민하는 척했다.

 “죽일까.”

 덜! 덜! 덜!

 죽인다는 가르딘의 말에 몸을 움찔거리며 떠는 귀족들이었다.

 “말까.”

 가르딘의 선택에 의해 귀족들의 생사가 달려 있었다. 그들에게 가르딘은 지옥에서 올라온 마족으로 보였다.

 “며칠 전에 황자 전하께서 이것을 내게 보냈지.”

 가르딘은 1황자에게 받은 포로에 대한 처분권을 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귀족들은 서신을 보자 절망감이 느꼈다. 모든 권한이 가르딘에게 있다는 뜻이다. 귀족들은 이대로 죽기 싫었다. 살기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저희들이 가진 재산을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누가 보면 내가 네놈들의 재산을 노리는 줄 보이잖아.”

  “아닙니다. 그저 저희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겠지만 조금 의심이 되는데.”

 “살려만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3황자님은 어떻게 하고.”

 “저희들은 원래 3황자를 싫어합니다!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가르딘이 철창의 횃불 바로 옆에 있는 무언가를 떼어내었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작은 수정구였다. 가르딘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이 맺혔다.

 “이게 뭔지 모르겠지.”

 “무엇... 입니까?”

 가르딘은 수정구에 저장된 내용을 처음부터 다시 돌렸다. 그러자 귀족들의 얼굴이 점점 시퍼렇게 질리고 있었다. 설마 감옥에 마법수정구가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수정구에 찍힌 내용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만약 이 수정구가 밖으로 유출이 되면 그들의 명예는 모두 무너질 것이다. 특히 마지막에 한 말이 3황자에게 들어가면 목숨도 위험했다.

 “그렇게 떨 거 없어. 자네들의 성의가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면 절대 유출되지 않을 거야. 사생활 보호라는 게 있는데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하겠어.”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후작님의 명예를 걸고 약속해 주십시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루벨 자작과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가르딘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동안 숨겨 놓은 재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용하기위해 필요한 인장과 암호 등 대부분을 가르딘에게 말했다.

 “그대들의 성의가 확보되는 대로 풀어주지.”

 “감... 사합니다!”

 가르딘은 원하던 목적을 얻고 나서 감옥을 나왔다. 남겨 진 귀족들은 얼이 빠져 있었다. 가르딘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복수할 여력도 되지 않는다. 만 약 그랬다가는 가르딘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약점을 제대로 잡히고 말았다.

 “루벨 자작님! 이제 어떻게 하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젠...장!’

 가르딘은 귀족들이 숨겨 논 재산을 대부분 찾아내었다. 물론 모두 빼앗지는 않았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위험한 짓을 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의 재력을 남겨 두어야 나중에 딴말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잃은 자는 때론 무서운 일도 벌인다. 그것을 알기에 적당히 반 이상 걷어 들였다.

 “자식들 많이도 모아놨네.”

  ‘크크크!’

 가르딘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렸다.

 하급귀족들 주제에 많이도 뒤로 빼돌려 놓았다. 상급귀족이 되기 위해서는 아부를 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 남이 모르는 비자금을 꼬불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르딘은 우선 네킨 성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고 난 후 주변 영지의 상태를 파악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영지에 필요한 운용자금을 대폭적으로 풀었다. 1황자가 주는 것이라 고 명목상 선전을 하고, 돈은 귀족들이 모은 재산을 이용하였다. 그렇게 하니 금세 영지가 안정이 되고, 영지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보여준 귀족들의 행태에 질려 있었던 터라 돈발이 잘 먹혔다. 시대를 살아가면서 약소계층 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돈과 식량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데 직빵이었다.

 가르딘은 명성 따위는 상관없었다. 영지민들이 1황자를 지지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되었다. 그들의 인심을 얻어내고 난 후 남은 돈은 모두 가르딘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비밀자 금이라 뒤탈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인폴트 성에 있는 다마트 황자에게 밀명을 받은 마이어 공작이 본격적으로 병력을 움직였다. 인폴트 성 주변에 머물고 있는 병력을 이동시켰다. 1황자가 지키고 있는 펠칸 성의 동쪽으로 길게 벗어나가는 지점에 마린 성이 있다. 마린 성은 펠칸 성과 마찬가지로 수문역할을 하는 곳이다. 펠칸 성 다음으로 중요한 지점으로 뚫리게 되면 펠칸 성이 받는 타격이 심각해진다.

 북방의 50만 대군이 일시에 움직이기에 그 위용이 엄청났다. 북방인들은 거친 야성과 타고난 체격을 가졌기에 일반 전투병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코카 제국의 뒤통수를 칠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마이어 공작이었다. 대다수의 왕국을 점령하면서도 병력 피해가 거의 없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가 풀한 포기 자라지 않는 것만 봐도 북방군의 위력이 어떤지 짐작이 갔다.

 타이거가 포효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검은 중갑옷을 입은 마이어 공작이 대군을 이끌었다. 전장을 압도하는 마이어 공작의 카리스마가 저절로 형성되어 시위를 장악했다.

 ‘재미있군.’

 마이 어 공작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그는 이번 전투에 흥미를 느꼈다. 3황자는 마린 성을 대대적으로 치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의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보다는 전투에 대한 기대감이 마이어 공작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마린 성에 대한 공략이 이루어진다는 소식이 1황자에게 전달이 될 것이다. 마이어 공작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그에 버금가는 자들뿐이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마이어 공작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움직일 것이다.

 ‘우열을 가릴 시기가 드디어 왔군.’

 5대 공작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기로 소문난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다. 그리고 아래로 평가받지만 실제적인 무력은 결코 낮지 않다고 평가받는 카론 마이어 공작이었다. 셋 중에 누가 더 강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누구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마이어 공작은 순수하게 누가 강한지 이번 전투로 확인하고 싶었다. 북방의 태생적인 전투본능이 꿈틀거렸다.

 “전군 마린 성으로 진격한다!”

 “크어어엉!”

 북방군의 사나운 포효소리가 천지를 흔들어 놓았다.

 카론 마이어 공작의 북방대군이 진격한다는 정보가 펠칸 성에 전달되었다. 발리스타 공작의 정보원들이 50만 북방대군의 움직임을 놓칠 리 만무했다. 그들이 움직이자마자 바로 연락을 보냈다. 이제까지의 전투와는 질적으로 다른 엄청난 전투가 벌어질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1황자 진영은 서둘러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이어 공작이 진격하는 곳은 마린 성이었다. 펠칸 성 다음으로 중요한 고지로 마린 성이 점령당하면 펠칸 성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함께 가세요.”

 “저희 중 1명은 남아서 황자님을 보필해야 합니다!”

 러쉬 황자는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에게 함께 가라고 명을 내렸다.

 "마이어 공작은 위험한 자입니다. 한 명이 상대한다면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두 분이 함께 가야 확실하게 승부를 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바자바인 후작과 두 신성이 있습니다. 또한 가르딘 후작이 곧 올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이 마린 성에 간다고 해도 이곳에는 3명의 오러 마스터가 있었다. 또한 가르딘까지 합세하게 되면 4명의 오러 마스터가 존재한다. 견고한 펠칸 성 과 오러 마스터가 버티고 있는 한 위험은 없을 것이다.

 “반드시 승리하여 승전을 황자 전하에게 바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러쉬 황자의 명령에 따라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이 대군을 이끌고 마린 성으로 출병하였다. 마이어 공작의 진격이 상당히 빠른 편에 속해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상황 이었다.

 두 공작이 출병을 한 후 2일이 지났을 때 1황자에게 갑작스러운 소식이 또 들려왔다. 다마트 황자가 대군을 이끌고 황도로 진격한다는 정보였다. 3황자가 보유한 대부분의 병 력을 이끌고 직접 출병한다는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격전 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러쉬 황자는 다마트 황자가 마린 성을 치는 것으로 유인한 다음 황도를 치려고 한다고 판단을 내렸다. 이유가 어찌되었던 황도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황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러쉬 황자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3황자가 황도를 빼앗고, 마린 성에서 병력을 뒤로 물리면 러쉬 황자로서는 상당한 타격을 받는다. 더군다나 황도에는 어머니와 동생이 있다. 다마트가 그럴 리는 없다고 보지만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바자바인 후작! 두 신성을 데리고 황도로 가게.”

 “그렇게 되면 펠칸 성이 비어 버리게 됩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자네도 알다시피 다마트는 전 병력을 이끌고 황도로 가고 있네. 펠칸 성을 도모할 병력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또한 곧 가르딘 후작이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도착할 것이네. 그러니 가서 황궁을 지키게.”

 ‘반드시 황도를 사수하겠습니다!”

 “어머님과 동생을 부탁하네.”

 러쉬 황자는 아직 펠칸 성을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마린 성과 황도 사이에서 교두보 역할을 하는 곳이 펠칸 성이었다. 더군다나 전장을 지휘하는 능력은 발리스타 공작, 파스

 트론 공작, 바자바인 후작이 더 뛰어났다. 만일 전쟁터로 나갔다가 위험한 일이 발생하면 전세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러쉬 황자는 펠칸 성에서 전쟁을 조율하면 서 기다려야 했다. 확실한 상황일 때 러쉬 황자는 움직일 것 이다.'

 네킨 성에서 통신을 받은 가르딘은 펠칸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도 시시각각으로 급변하는 전장상황을 지속적으로 전달받았다. 마이어 공작의 본격적인 마린 성 침공으로 인해 전쟁의 향방이 더 치열해졌다. 가르딘으로서는 내전의 분위기가 점점 더 위험해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예상보다 더 힘든 전투가 될지 모르겠네.”

 “그렇겠지.”

 마이어 공작만 같은 편으로 만들었다면 내전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마이어 공작의 호탕한 모습과 거친 성격을 감안해 보면 절대 그냥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었다. 타고난 감각과 부단한 노력으로 지금의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그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가르딘은 걱정이 되었다. 물론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을 못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쟁은 무수한 변수가 존재하는 곳이다. 두 사람이 꼭 한 사람을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카니발 백작 그대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저는 아직 적입니다. 그런 걸 제게 물어보셔도 되는 겁니까?”

 "에이, 우리 사이에 그러지 말고 말 좀 해보지 그래.”

 카니발 백작은 입을 닫았다.

 솔직히 마이어 공작이 이길지 두 공작이 이길지 확신하지 못했다. 확신할 수 없을 때는 입을 닫고 있는 게 나았다.

 가르딘은 펠칸 성으로 가는 도중에 또다시 통신을 받았다. 이번에 받은 통신 역시 상당히 중한 정보였다.

 “속력을 높여야겠다.”

 “무슨 일인데?”

 “3황자가 황도로 진격한다는 정보야.”

 “젠장! 전쟁이 너무 갑작스럽게 진행되는데!”

 “결단을 내린 거겠지.”

  가르딘은 마린 성공략보다는 황도 공략을 노린다고 보았다. 마이어 공작이 뛰어나다고 해도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그에 반해 황도 진격은 3황자를 비롯한 네벨리언 공 작, 타이가라 공작이 합세할 것이다. 그들이 모두 움직인다면 성공확률은 제법 높을 것이다.

 ‘펠칸 성에서 1황자를 보호하는 게 내 임무가 될 테지.’

 적의 주요 병력이 마린 성과 황도에 몰려 있는 상황이니 펠칸 성에 대한 공격은 없을 것으로 단정 지었다. 있다고 해도 소수의 병력으로 펠칸 성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르딘이 보유한 1만의 병력과 펠칸 성의 2만 병력을 합하면 총 3만이 된다. 적군의 수가 적어도 3배는 되어야 할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운데.’

 일말의 불안감이 들지만 아직은 1황자가 유리하다. 그것을 위안 삼으며 가르딘은 진군 속도를 높였다.

 2일 동안 행군해서 펠칸 성에 도착했다. 겉에서 본 펠칸 성은 확실히 규모면에서 엄청났다. 성의 높이가 일반 성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성의 벽면 전부가 스펜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스펜리석은 일반 돌보다 강도 면에서 몇 배는 단단하며 일정 수준 이상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까지 있었다.

 하지만 스펜리석은 쉽사리 가공이 되지 않아 성벽으로 쌓으려면 엄청난 인력과 돈, 시간이 필요하다. 왜 철혈의 방패라고 불리는지 이해가 쉽게 되었다. 정면전투로 펠칸 성을 무너뜨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있다면 안에서 내부자가 문을 열어 주는 것뿐이다.

 ‘문만 걸어 잠그면 안전하겠어.’

 가르딘은 펠칸 성을 보자 굳이 피 터지게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안정감이 들었다. 펠칸 성의 정문에 다다르자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문이 열렸다. 문을 지탱하는 기계설비 에 마정석이 들어가 있어 인간의 힘으로 열고 닫지 않아도 되었다. 성문을 수비하는 성 벽수비대장 줄리앙 자작이 가르딘을 마중 나왔다.

 “성벽수비를 맡고 있는 줄리앙이라고 합니다. 제국의 새로운 검을 보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반갑네 줄리앙 자작.”

 “러쉬 황자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알겠네.”

 가르딘은 줄리앙 자작을 따라 펠칸 성의 심장부로 들어갔다. 펠칸 성 내부도 결코 만만치 않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중 삼중으로 길이 나 있고, 길과 길 사이에 기관장치와 매복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가르딘은 성안을 유심히 관찰했다. 줄리앙 자작을 따라가기 전에 필리언에게 전음을 보내 펠칸 성의 구조를 파악하라고 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걸어야 펠칸 성의 심장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심장부는 외부와 약간 격리가 되어 있어 중간에 침입자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뚜벅! 뚜벅!

 발소리가 상당히 선명했다. 바닥 재질이 소리가 잘 나도록 되어 있었다. 발소리를 작게 조절해도 소리가 퍼지도록 설계가 되었다. 설계자가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거 집에다 설치해 봐야겠다.’

  라이나와 브리안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러쉬 황자가 머무는 심장부, 즉 성안의 요새에 드디어 당도했다. 가르딘은 러쉬 황자가 나올 때까지 거실에서 기다렸다.

 안을 둘러보며 잠시 동안 시간을 보낸 가르딘은 러쉬 황자 가 나오는 것을 보자 그 즉시 인시를 올렸다.

 “대륙의 영원한 제국을 이어가실 러쉬 황자님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척!

 정중하게 귀족적인 예의를 다했다. 그와 동시에 제국의 기사였다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가르딘의 예의를 흡족하게 본 러쉬 황자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경망스럽지도 않고 부자 연스럽지도 않은 제왕다운 기상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나에게 2번이나 승전보를 전해준 가르딘 후작을 이제야 보게 되는군. 그대의 공을 진작부터 치하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서 미안하군.”

 “아니옵니다. 저는 그저 제국의 번영을 위해 노력했을 뿐입니다.”

 러쉬 황자를 위해서 싸웠다는 말을 하게 되면 가르딘이 너무 싸게 보인다.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돌려 말하긴 했어도 1황자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제국의 번영을 위한 일이라는 뜻이 된다. 엎어치나 매치나 그게 그 뜻이었다. 귀족들은 괜히 유식한 척 돌려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야 자신의 능력과 존재감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르딘은 허례의식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통상적인 예의를 따라줄 필요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대와는 말이 잘 통할 것 같군.”

 “영광이옵니다.”

 러쉬 황자는 가르딘에게 차를 권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가벼운 대화부터 시작해서 이번 전투까지의 총체적인 설명을 가르딘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도 본인이 말을 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었다. 가르딘에 대한 관심이 있음을 보여주는 태도였다.

 가르딘은 약간의 영웅심과 더불어 과장을 조금 섞었다. 사실만 말해 봤자 긴장감과 재미가 떨어진다.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섞어주어야 이야기가 그려질 수 있다. 가르딘은 제법 말을 잘했다. 유쾌하면서도 철저한 면을 러쉬 황자에게 인식 시켰다.

 “검을 수련하기도 바뿔 텐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수준도 상당하군!”

 “사내가 검만 수련해서 되겠습니까! 음주가무도 좋아합니다. 싫어한다면 사내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호탕하기까지 하군.”

 한번 마음에 들자 러쉬 황자는 가르딘이 더욱더 마음에 들었다. 은연중에 아부를 섞어 러쉬 황자의 기분을 맞춰주는 가르딘이었다. 과장되지 않은 아부는 때론 마음을 열게 해주 는 기폭제가 된다. 둘의 대화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진행이 되었다.

 황도 오스란의 서쪽 평야지대에 대규모의 병력이 응집했다. 평야를 까마득하게 뒤엎는 듯한 엄청난 병력 수였다. 이 들은 3황자가 이끄는 병력이었다. 3황자는 황도의 서쪽에서 포위하듯이 조금씩 진격해 나갔다. 공격의 속도를 높이기보다는 시간을 끄는 듯한 모습이 었다. 

 오스란에 거의 다다르자 다마트 황자는 진군을 멈추고 진영을 구축했다. 적 병력이 황도에 당도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형님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빠르군요.”

 “이미 예상한 일입니다. 맡겨만 주신다면 황도를 점령하겠습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마이어 공작이 움직이면 그때 움직여도 됩니다.”

 아직 마린 성은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마이어 공작은 마린 성 앞에서 진을 치며 바람이 부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이 보낸 이가 바자바인 후작과 두 신성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빌링턴 백작이 대답했다.

 “후작과 신성이 제 상대라는 말이군요. 형님이 저를 너무 만만히 본다는 생각이 는군요.”

 다마트는 황도를 포위하면서 기회가 된다면 공격할 계획이었다. 물론 귀족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필사적이지는 않았다. 황도 공격도 작전의 일부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따로 있었다.

 때마침 마이어 공작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통신이 들어왔다. 다마트 황자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전쟁이 시작되자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이제 시작하지요. 전군에 공격명령을 내리세요.”

 “명을 받듭니다!”

 다마트 황자의 황도 공격이 시작되었다.

 슈웅! 푸아아앙!

 슈웅! 푸아아앙!

 “공격하라!”

 화살이 빗발치고, 공성병기가 하늘로 높게 솟구쳤다 떨어진다. 마린 성을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빗발치는 화살을 막아내며 성벽으로 용감하게 돌진하는 마이어 공작군 이었다. 그들은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날아오는 화살을 방패진형을 막아내며 조금씩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마이어 공작은 돌진하는 병력을 엄호하기 하기 위해 궁 수대와 공성병기를 동시에 사용하였다. 집중포화로 공격력을 배가시켰다.

 그에 대응하는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냉정했다. 적의 주요 공격지점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겉으로는 마이어 공작이 광폭하게 유린하는 것 같지만 실효성은 두 공작이 더 높았다. 서로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아군이었을 때는 든든했던 존재들이 적이 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게 해주는 치열한 전투였다.

 공격하는 창이 강한가, 방어하는 방패가 더 단단한가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마이어 공작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모든 무기를 다 쏟아 부어라!”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맹공을 퍼부었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은 신중하게 적을 응시했다.

 “역시 북방의 타이거답군!”

 “만만치가 않네.”

 성벽 위를 사수하는 병력도 상당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서로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가르딘은 며칠 동안 펠칸 성의 방어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또한 외곽 지역에 정찰병을 파견하여 적의 기습작전에 대비해 놓았다. 아무리 완벽한 성이라고 해 도 나태한 정신 상태에서는 허점이 발견되기 마련이다. 가르딘은 방심하다가 허를 찔리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패배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납득될 수 없다. 지면 끝장나는 것이 전쟁이다.

 성안의 정보력을 이용해서 적 병력의 이동상황을 파악해 놓았다.

 “지금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겠지.”

 “그럴 거다.”

 “우린 너무 한가한 것 아니냐?”

 “방심은 금물이야.”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라!”

 가르딘은 필리언에게 절대 방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밤에는 발키리기사단이 성벽 위를 교대하며 순찰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펠칸 성에 어둠이 깔려 왔다. 오늘따라 구름이 달을 가려 시야가 매우 좁았다. 횃불만으로 성 주변을 감시하기에는 무척이나 어려웠다. 서서히 조여 오는 그림자가 사방에서 나타 났다. 그들 모두 신속한 움직임을 보였다.

 사사사삭!

 어둠 속에 동화되어 있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그 들 모두 상당히 날래고 재빨랐다. 그림자는 펠칸 성에서 눈치 채지 못하도록 접근해 나갔다. 펠칸 성으로 보내는 정보력을 차단하기 위해서 정찰병을 극히 짧은 시간에 저 세상으 로 보내버렸다.

 어두운 그림자 중에 하나가 소리를 내었다.

 부어어엉!

 부엉이 우는 소리를 내며 약속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굳게 닫힌 펠칸 성의 성문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펠칸 성의 성문을 담당하는 성벽수비대장 줄리앙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둥 뒤에서 찌른 검이 가슴을 뚫고 나와 있었다.

 “네... 가 왜?”

 “미안하지만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오랜 시간 줄리앙을 보필했던 부대장 베르사채가 그의 등에 검을 찌른 것이다. 방심한 상황에서 당했기에 속수무책이 었다. 베르사채를 따르는 경비병들 20명이 동료들을 순식간 에 정리해 버렸다. 그들도 모두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이라 전혀 대비를 하지 못했다. 베르사채는 부엉이 소리가 나자마자 성문을 열었다.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성 벽 위의 병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적이 침입했다!”

 댕! 댕! 댕!

 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가르딘은 일말의 불안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때마침 비상종이 울렸다. 그 즉시 검을 들고 일어섰다. 갑옷을 입을 시간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가르딘은 일부러 발키리가사단과 병사들의 위치를 가까운 곳에 배치 해 놓았다. 가르딘이 방에서 나오자 필리언, 투르, 사이론, 발키리기사단이 나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적이 침입했어.”

 “뭐? 어떻게?”

 “안에서 누가 성문을 열어준 것 같아!”

 “젠장!”

 가르딘의 입에서 욕이 치밀어 올랐다. 가장 안전한 장소인 줄 알았더니 똥 밟은 격이었다. 아무래도 놈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가르딘은 우선 사이론과 고트에게 기사단 10명을 이끌고 러쉬 황자에게 가라고 했다.

 가르딘은 발키리기사단을 이끌고 쳐들어오는 적을 맞으러 갔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는 막아내야 한다.

 “차차차창! 크아아악!”

 밖으로 나오자 적병이 성문 안으로 무섭게 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적은 보통 수준을 넘었다. 병사들을 죽이는 솜씨가 대단히 빠르고 정교했다. 전문적인 살수들 같았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성안에는 3만의 병력이 있다. 병력을 효과적으로 지위해서 적을 막아야 한다.

 “필리언! 성벽 위를 사수해. 절대 올라오지 못하게 해!”

 “알았어!”

 “나는 성문을 막겠다!”

 가르딘이 성문을 막기 위해 뛰어나갔다. 이제 막 일어나는 병사들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 적들은 한곳이 아닌 사방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병사들을 죽여 나가고 있었다. 난전을 유도하는 것 같았다. 우선은 기세를 다시 되돌려 놔야 한다.

 “투르! 다 죽여!”

 “예! 영주님!”

 가르딘의 말을 기다린 투르였다.

 투르가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을 이끌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광폭함의 대명사 투르가 가는 길에 찢겨진 육편만 남을 뿐이다. 삽시간에 전율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투르를 따르는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이 곧 놀라운 위력을 발휘 하였다. 또한 그 뒤를 따라 발키리기사단도 전투에 참여하였다.

  ‘응?’

 가르딘은 기운을 느꼈다. 그것도 상당히 익숙한 기운들이었다. 그들은 러쉬 황자를 찾아 성안으로 들어갔다. 가르딘은 그들을 막기 위해서 조용히 움직였다.

 적은 성안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 그들을 안내하는 놈이 눈에 익었다.

 ‘저놈이 배반했구나!’

 가르딘은 지금 당장 저들을 막아서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신경 쓰이는 놈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서게 되면 가르딘은 힘을 발휘해야 한다. 시선이 집중되지 않는 한적한 장소가 필요했다.

 러쉬 황자의 거처로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곳 중에 빈 공터가 자리했다. 장소는 무척이나 협소하다. 3명 이상 지나가기 어렵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가르딘은 곧바로 섬전행을 전개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한 번의 도약으로 건너뛰었다. 너무 빨라 신형이 보이지도 않았다.

 침입자들을 베르사채가 안내했다.

 “이곳으로 가면 됩니다.”

 굽이굽이 미로처럼 되어 있기에 베르사채가 아니었다면 상당히 애를 먹었을 것이다. 오래전에 첩자로 파견해 놓은 보람이 있었다.

 “들어가는 즉시 러쉬 황자를 생포한다! 어렵다면 죽여도 좋다!”

 러쉬 황자의 거처로 가는 좁은 통로가 보였다. 저곳만 통과하면 러쉬 황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좁은 통로로 침입자들이 달려 나갔다.

 슈슈슈슈슉!

 달려 들어갔던 3명의 침입자가 갑자기 쏟아지는 검격에 맞고 즉사했다. 반항할 틈도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날카로운 검격이었다. 그들을 막아선 존재를 본 침입자들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오히려 가로막은 놈이 나타나서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드디어 네놈을 죽일 수 있구나!”

 침입자 중 한 명에게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일생일대의 적을 만난 듯한 표정이었다.

 “어디 죽일 수 있으면 해보시지.”

 침입자들은 놀랍게도 네벨리언 공작과 타이가라 공작이었다. 다마트 황자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애초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였다.

 가르딘의 몸에서 진한 살기가 베어져 나왔다. 살기가 칼날이 되어 적들을 향해 쏘아졌다. 이제까지 감추어진 본성이 꿈틀거리면 솟구쳤다.

 「가르딘 전기」10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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