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93)

   @@[제3장 코워드 공작의 기습(?)@@]

 황궁에 참사가 벌어지던 날 코워드 공작이 병력을 규합하고 출전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타이가라 공작에게서 연락이 온 상황이었다. 발키리 영지를 기습 공격하라는 전언이었다. 10일 전부터 병력을 소집한 코워드 공작이었다. 보유하고 있는 10만의 병력과 더불어 새로이 징병한 2만의 병력까지 합하면 12만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일개 공국 정도는 단숨에 점령이 가능한 병력이다. 더군다나 일전에 전투를 치르면서 경험이 어느 정도는 쌓여 있었다. 예전보다는 병사들의 질적 수준이 강해진 상황이었다.

 “발키리 영지의 대비는 어떠한가?”

 “우리가 침입할 줄 전혀 모를 겁니다.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하기도 바쁜 상황입니다.”

 “그렇겠지. 내가 보내준 우호적인 선물을 받았으니 안심하고 있겠지.”

 “그럴 겁니다. 털끝만한 의심도 하지 않고 있을 겁니다.” 

 코워드 공작은 자신만만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발키리 영지의 가르딘 후작과 우호를 다진다는 표현으로 영지 경영에 필요한 물자를 보내주었다. 사실 코워드 공작은 조금만 보내려고 했지만 비린스 자작과 버루거 자작이 화끈하게 보내자고 했다. 이유는 후일 다시 뺏어 오면 된다는 논리였다.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귀가 얇은 것은 공작이나 자작들이 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했다.

 “병력은 확실하게 준비했겠지.”

 “물론입니다. 이미 전술훈련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비밀리에 훈련을 했으니 눈치 채지 못했을 겁니다.”

 “방심은 금물이다. 상대는 제국이 인정하는 오러 마스터다.”

 “저희 사전에 방심은 없습니다.”

 상대를 얕보고 있는 것은 공작과 자작 모두 마찬가지였다. 핵토르 공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정적인 존재가 가르딘 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을 조금만 현실적으로 봐도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안타깝군.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 많은 도움이 됐는데 말이야. 선택이 잘못됐으니 아쉽게 됐어.”

 “코워드 공작님처럼 앞날을 예견하지 못한 자입니다. 전황을 읽지 못하는 자는 공작님 곁에 있어봤자 소용없는 존재 입니다.”

 “그런가.”

 비린스 자작과 버루거 자작은 코워드 공작을 위해 손금이 없어지도록 아부를 떨었다. 또한 가르딘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가르딘이 코워드 공작 옆에 있게 되 면 비린스 자작과 버루거 자작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가르딘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까지 밥그릇 싸음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원천적인 욕망 중에 하나인 욕심이 화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날 밤 코워드 공작은 군대를 일으켜서 발키리 영지로 향했다. 해가 지고 어듬이 깔리는 시간을 이용하여 병력을 이동시켰다. 제법 머리를 굴렸지만 대규모 병력이 움직이는데 조용할 리 만무했다. 말발굽 소리와 병사들의 전진 소리가 시끄럽게 밤하늘을 울렸다.

 20일 전.

  ‘허!,

 가르딘은 선물을 받으며 어이 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상당한 액수의 돈과 곡식, 영지 경영에 필요한 물품이 전달되었다. 코워드 공작이 우호를 다지자고 보내온 선물이었다. 선물의 양과 코워드 공작의 우호적인 서신을 보면 진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대는 가르딘이었다. 3황자를 지지하는 코워드 공작이 난데없이 우호적인 선물을 보낸다는 것 자 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치 나는 절대 너를 침범하지 않는다고 과대포장 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가르딘은 동기들과 같이 선물을 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 머리 좀 쓴다고 한 것이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이 정도 상식은 있을 것이다.

 “공격하겠다고 대놓고 광고하는데 이걸 좋아해야 하냐!”

 “웃기지도 않는군.”

 “핵토르 공국이 제국에 보낸 진상품과 뭐가 달라.”

 “하여간 독창성이라고는 쥐뿔도 없어.”

 코워드 공작의 계략은 이미 핵토르 공국에서 한 번 써먹은 작전이었다. 핵토르 공국이야 오랜 시간 동맹국이었기에 약발이 통한 반면에 코워드 공작은 가르딘과 전혀 우호적인 관 계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적대관계에 있는 가르딘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내는 게 오히려 의심을 유발시키는 일이었다. 그동안 가르딘이 코워드 공작에게 가식적으로 보여준 호의가 통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가르딘이 코워드 공작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가르딘의 연기가 상당한 수준이니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알겠지만 주변 상황에 눈이 너무 어두웠다.

 “발전하지 않는 전략이라.”

 “가르딘! 이거 네 말대로 되겠는데.”

 “얼마나 잘 걸리는지 우리 내기 할까.”

 “그래도 전쟁인데!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한번 고대로 작전을 짜 보는 거야.”

 대규모 병력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가르딘과 동기들이 코워드 공작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예 생각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우선은 정보원을 파견해서 코워드 공작의 움직임을 파악 해.”

 “걱정하지 마라! 그 정도는 알아서 할 테니.”

 코워드 공작이 준 선물이 오히려 가르딘에게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가르딘은 그 즉시 영지내의 정보력 을 총동원하여 핵토르 공국을 감시하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서 핵토르 공국과 발키리 영지 사이에 병력을 배 치하여 적의 움직임을 사전에 미리 파악하도록 명령했다.

 “알아서 공격 시기를 알려 주는데 그에 대한 대비를 해줘야지.”

 "이거 눈감고 쥐새끼 잡겠는데.”

 가르딘은 코워드 공작이 공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만, 그 시기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단 한 가지 불안감이었다. 그런데 코워드 공작이 알아서 공격 시기를 얼추 알려 주고 있었다. 지금부터 적의 움직임을 간파하여 공격하는 곳곳에 함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가르딘은 남겨진 시간 동안 병력을 추가로 징집하면서 핵토르 공국을 주시했다. 감시병들이 적의 움직임을 세세히 파악하며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마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통신구는 정보전달력과 시간, 타이밍을 계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템이 아닐 수 없었다.

 가르딘은 라이젠에게 통신구를 받은 것이 가장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전략과 전술도 중요하지만 시간도 중요했다. 훌륭한 전략과 전술도 시간과 상황이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전략과 전술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작전이 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움직였군.”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도 심상치 않은 상황이니, 기습공격으로 빠르게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것 같아.”

 “기습이라. 이게 과연 기습인가!”

 기습이란 적이 방심하고 있을 때 또는 예기하지도 않던 시간이나 장소에서 갑자기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적이 알지 못해야 효과가 있는 것이다. 모두 알고 있는 기습공격 이 과연 기습공격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알고 있다고 해도 쥐새끼의 병력이 12만이나 된다.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당연하지.”

 “기사들과 병력을 소집시키고, 출전할 수 있도록 준비 철저히 하도록 해.”

 가르딘이 곧장 일어섰다.

 전쟁이 벌어졌으니 이제부터는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성이 있었다. 웃고 떠들며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 기사와 병사들의 목숨과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 가르딘에게 달려 있었다. 허술하게 행동하여 낭패를 당한다면 씻을 수 없는 과욕이 될 것이다. 매번 같은 말이지만 전쟁은 참혹하다. 아군이 이긴다면 성쇠를 누리겠지만 진다면 지옥이 기다릴 것이다. 반드 시 이겨야만 하는 것이 전쟁이다.

 “필리언, 계곡 작전을 한번 펴 보자.”

 “준비는 이미 되어 있으니까 명령만 내리면 될 거야.” 

 핵토르 공국으로 가는 협곡은 전쟁 중에 막혔다. 그 뒤로 힘겹게 돌들을 치워놓은 상태였다.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관계로 치워놓았다.

 당시에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궁에 같다 온 후 코워드 공작이 적이 됐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따그닥! 따그닥!

 어두운 밤.

 대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움직이는 코워드 공작이었다. 말 위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발키리 영지로 향했다. 달빛이 가리는 어두운 밤. 수많은 햇불이 길을 비추었다.

 코워드 공작의 주변으로 귀족들이 떼로 몰려 있었다. 또한 이번에는 코워드 공작의 아들인 와이어트도 출병했다. 와이어트는 발키리 영지에서 겪었던 치욕적인 일을 잊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음모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에게 모욕을 준 파멜라는 잊지 못했다.

 ‘두고 보자. 기필코 네년을 처참하게 굴복시켜 버리겠다!’

 와이어트가 이번 전쟁에 참여한 두 번째 이유는 전공 때문이었다. 코워드 공작만큼이나 전공에 대한 탐욕이 강했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 같았다. 다만 쓸데없는 것까지 유전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부대의 이동속도가 잠시 주춤했다. 앞에 트윈유니크 협곡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진영이 바뀌니 발키리 영지로 들어가는 길목이 되어 있었다.

 “가르딘 후작도 멍청하군.”

 "그렇습니다. 돌아가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길을 치워 논 것부터가 실수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핵토르 공국과의 협정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무너진 협곡을 인력을 동원하여 원상태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병력의 이동속도가 더 빨라진 것에 만족해하는 코워드 공작과 귀족들이었다.

 협곡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듯했다. 진군을 서두르라는 나팔소리만 밤하늘을 시끄럽게 울렸다.

 협곡 위에 서 있는 가르딘과 안젤리카는 병력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핵토르 공국이 사용한 이번 작전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본 코워드 공작이었다. 그런데도 정찰 한 번 하지 않고 서슴없이 협곡 안으로 들어 오다니 조심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한 번 당하면 면역력이 생겨서 다시 당하지 않으 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코워드 공작은 그런 일반 상식을 넘어선다고 볼 수 있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 사람 잡는군.”

 “영주님 말씀 대로네요.”

 가르딘은 병력이 협곡 안으로 들어온 후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기다렸다. 3만의 병력 중 1만 정도가 협곡을 빠져나와 발키리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시간을 들여 기다린 이유는 병력의 분산을 위해서였다. 핵토르 공국의 경우 병력 수가 현격히 부족하고 체력적으로 지쳐 있는 상태라 공성전을 벌인 것이지만 가르딘은 달랐다. 체력적으로도 완벽했으며, 병력도 충분했다. 적병의 수를 많이 줄여 놓을수록 다음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가르딘이 신호를 보냈다. 그 즉시 안젤리카가 협곡의 양끝에 마법력을 사용하였다. 예전부터 부서지기 좋도록 준비를 해놓았다. 작은 공격에도 쉽게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우르르르! 과과과과광!

 굉음과 함께 바위덩어리들이 협곡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가르딘은 일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바위에 깔려 죽을 병사들이 안타깝지만 주인을 잘못 만난 것도 실수라면 실수였다. 적에게 자비를 베풀면 아군이 그만큼 죽는다. 누구의 생존이 중요한가! 당연히 아군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적의 생사는 전쟁 후에 생각하면 되었다. 

 “쏴라!”

 가르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숙련된 궁수대가 협곡 아래로 화살을 발사했다. 궁수대가 화살을 쏘고 일반 병사들이 협곡 아래로 기름을 부었다. 기름이 부어지는 동시에 불을 던졌다.

 협곡 아래에 갇히게 된 코워드 공작군은 우왕좌왕했다. 어둠 속에서 벌어진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방비할 틈이라고는 전혀 없다. 어디를 가도 화살비가 내렸고, 그 주변으로 돌 덩이와 불 기름이 떨어졌다. 처참하게 죽어 가는 병사들의 신음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크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살... 려!”

 “피... 해라!”

 귀족과 기사들도 허둥대기는 마찬가지였다. 곳곳에 쓰러진 병사들과 불에 타 죽은 병사들이 속출했다.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연상케 만들었다. 죽은 병사들은 차라리 나았다. 몸과 팔다리에 떨어진 암석과 불덩어리에 맞고 살아 있는 병사들은 더 비참했다. 불에 타 들어가며 죽은 병사는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광경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광경을 나타내었다.

 협곡을 통과한 병사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협곡 안에 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비통한 신음이 병사들의 귀마저 어지럽혔다. 동료가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어 떤 방법도 없었다. 그러나 병사들에게 생각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1만의 병력을 3만의 병력이 포위하며 다가섰기 때문이다.

 발키리 영지군이 코워드 공작군을 포위하며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그 앞으로 크레 이지 드래곤 창기병이 광폭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투르의 눈빛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전투에 굶주리고 있었던 투르였다. 눈앞에 보이는 코워드 공작군은 먹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로막는 먹이를 향해 굶주린 수가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쳐랏!”

 필리언이 명령을 내리자 발키리기사단과 병사들이 일거에 검과 창을 들고 뛰어나갔다. 그전에 먼저 투르가 창기병을 이끌고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타다다다다닥!

 무섭도록 빠른 다크호스였다. 500기의 창기병이 일직선으로 포위하며 달려 나가는 모습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기운을 발산했다. 혼란한 병사들이 창기병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일시에 몰아닥친 투르의 창기병은 코워드 공작군을 짓밟아 버리고 있었다. 창기병 앞에 병사들은 한없이 나약했다.

 “푸아아아아아앙! 크아아아아악!”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다 죽어랏!”

 창기병과 부딪친 병사들이 튕겨나가거나 그대로 밟혀 짓이겨지고 있었다. 한순간에 2천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다. 병사들에게 투르와 창기병은 악마의 화신으로 보였다. 모두 흉악한 살기와 광기를 번들거리고 있었다. 인간의 기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투르가 휘두르는 배틀 엑스에 맞은 병사들은 반으로 쪼개지거나 사지가 완전히 박살나 버렸다.

 코워드 공작군의 12만의 대군 중 현재 전투를 치르는 병력은 고작 1만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발키리 영지는 창기병과 기사단, 수준 높은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대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병사들의 수까지도 적었다. 일방적인 도살극이 벌어 졌다.

 협곡 밖에 있는 코워드 공작과 귀족들은 어둠 속에서 벌어진 참담한 일에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협곡 위로 올라 가기에는 길이 너무 좁고, 어두웠다. 더군다나 상대 병력의 수도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협곡 위로 올라가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결국 3만의 병력을 써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적에게 헌납한 꼴이 되어 버렸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부들! 부들!

 전신이 떨려올 정도로 분노한 코워드 공작이었다.

 “이런 젠장! 빨리 손을 써 보란 말이야!”

 귀족들도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있다면 협곡을 돌아서 가는 길뿐이다. 귀족들은 자기 몸 챙기기에 바빴다. 여기서 앞으로 나갔다가는 개죽음 당할 수도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가르딘 후작이 알 리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정보가 새어 나간 것 같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정보가 너무 많이 새어 나가서 막고 있는 줄도 몰랐던 가르딘이다. 그냥 대놓고 공격한 걸 가지고 화를 내고 있는 코워드 공작이었다.

 코워드 공작은 공격명령을 내리는 대신에 병력을 뒤로 물렸다. 여기서 공격을 했다가는 전번처럼 엄청난 피해를 봐야 할지 몰랐다. 그날의 악몽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겼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전투였었다.

 “가르딘, 네놈을 너무 얕보았구나!”

 “놈들이 협곡전을 계획했다는 것은 병력의 수가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날이 밝는 대로 움직인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협곡 옆으로 빠르게 돌아가서 공격하면 승산이 있었다. 발키리 영지군은 많아봤자 2만을 넘지 않는 것으로 파악이 되었다. 아직 9만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오러 마스터가 있다고 해도 절대 지지 않는 병력 수였다. 코워드 공작은 버루거 자작의 의견에 따라 병사들을 우회시켰다.

 코워드 공작군이 우회하는 모습을 협곡 위에서 본 가르딘은 머리를 긁적였다. 특별한 전략을 구사한 것도 아니었다. 협곡전투는 미리 정찰병을 보내기 때문에 웬만하면 잘 통하지 않는 전술이 되었다. 그런데도 한 번 써먹은 전술이 너무 잘 통했다. 멋쩍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거 누가 보면 가르딘이 지략가인 줄 착각할지도 모른다.

 “쉬워서 할 말이 없어지네. 차라리 협곡 위로 올라왔으면 괜찮았을 텐데. 이럴 때는 쓸데없는 짱구를 굴린단 말이야.”

 “코워드 공작이라면 그 정신 나간 아들을 데려온 사람이죠.”

 “그래.”

 “머리가 안 좋은 사람이네요.”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하겠다.”

 가르딘은 협곡 위에 궁수대만 배치시켜 놓았다. 병력은 모두 뒤로 빼놓도록 명령을 내렸다. 일단 협곡 위로 올라온다는 가정을 배제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머리 굴리는 것도 있지만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협곡 위로 올라왔다면 가르딘으로서도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다.

 안젤리카가 처음으로 본 사람은 가르딘이다. 가르딘은 놀라운 인간이었다. 지닌바 실력도 드래곤을 능가하는 데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엄청난 전략과 화술이었다. 화술을 따라가기에는 라이젠조차 버거웠다. 안젤리카는 가르딘을 보자 인간이 궁금해졌고, 그와 동시에 가르딘과 비슷한 인간들이 있지 않을까 고민을 해보았다. 결론은 없었다. 가르딘에게 비견되는 인간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편 한심한 인간들을 여럿 보았다. 특히 코워드 공작과 그 주변의 존재들은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 같았다. 가르딘만 제외하면 드래곤으로서 체면상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단정 지었다.

 도리! 도리!

 가르딘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럼 내가 불리한데.”

 “뭐가요?”

 “그런 게 있어. 지금 스코어가 1:0인가.”

 가르딘과 동기들이 한 내기가 있었다. 가르딘으로서는 코워드 공작이 조금 더 분발해 줬으면 좋겠지만 애당초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주변머리를 기대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가르딘은 궁수대를 귀환시키고 난 후 협곡 아래로 내려갔다.

 “이만 내려가지.”

 “예.”

 -워프(공간이동).

 협곡 주변으로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무참히 죽어버린 코워드 공작의 병사들이 지면을 가득 메웠다. 흘러내린 핏물은 아직도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가르딘은 시체들 옆으로 안젤리카와 걸었다. 안젤리카는 처참하게 죽어 있는 시체를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발키리 영지의 기사단과 영지군이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한 점의 흐트러짐도 볼 수 없을 정도의 정예군이었다. 전쟁을 치르고 나면 일견 흥분하기 마련이다. 잠깐의 휴식으로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경험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필리언, 피해는?”

  “부상자는 있어도 죽은 자는 없어.”

 “대단한데.”

 “그런 말은 저놈한테 해라.”

 필리언이 가리 킨 인물은 투르였다. 투르는 사로잡은 포로들 사이에 서 있었다. 1만의 병사들 중에서 4천 명을 포로로 잡아들였다. 죽은 병사들 대부분이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의 창에 죽었다. 특히 투르의 손에 죽은 자들만 해도 상당했다. 투르는 죽여도 그냥 죽이지 않았다. 병사들을 육체분시 해버렸다. 포로들은 투르가 고개를 돌리는 모습만 봐도 두려운 듯 진저리를 쳤다. 병사들을 죽일 때 투르의 모습은 아군이 봐도 기가 질릴 정도였으니 병사들의 공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가르딘도 알만했다. 투르는 아직도 더 죽이지 못해 씩씩대고 있었다.

 “자자, 돌아갈 준비해.”

 가르딘은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죽은 시체들을 치워줄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날이 밝아 오는 시간까지 코워드 공작군은 쉼 없이 전진했다. 밤중에 속력을 올리다 보니 병사들의 피로가 점점 쌓여 갔다. 그러나 코워드 공작에게 병사들의 피로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대군을 이끌고 온 첫 전투에서 패배한 충격이 너무 컸다. 다시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트윈유니크 협곡 주변으로 펼쳐진 능선을 우회하여 발키리 영지로 진격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 가는 병사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버루거 자작이 병사들의 지친 모습을 보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물론 병사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병사들이 지쳐 있으면 전투에서 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공작님! 병사들이 너무 지쳤습니다. 조금 쉬어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지금 그런 말이 나오나.”

 “하지만 이것도 놈들의 작전일 수 있습니다. 잠시 쉬고 난 후 병력을 제정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버루거 자작의 말은 일 리가 있어 보였다. 코워드 공작도 행군하는 동안 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로한 병사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숨을 헐떡이는 병사들이 보였다. 빨리 진격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발키리 영지로 오는 길에 물을 보충할 수 있는 곳이 한곳 있다. 다크랜드에서 흘러나오는 냇물이 있었다. 그곳에서 코워드 공작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병사들은 행군보다 전날 있었던 충격적인 전투로 인해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병력을 이끌고 냇가 근처로 이동하는데 거대한 나무 표지판에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코워드 공작!

 쥐새끼처럼 생겨 가지고 비열한 짓을 아주 잘하는구나!

 남의 뒤통수를 치려는 자가 그렇게 무능해서야 어디 써먹을 데가 있을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쥐구멍에 숨어 있으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냇가의 물은 마셔도 될지 모르겠다.

 가르딘 카이로스’

 부르르르르!

 읽으면 읽을수록 코워드 공작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얼마 전까지 공손했던 가르딘은 이제 없었다. 철저히 상대를 농락하는 가르딘이었다. 코워드 공작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을 대놓고 해버렸다. 핵토르 공국의 왕과 귀족들이 왜 가르딘을 그토록 죽이려고 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감히! 후작 따위가 나를 능멸하는 것인가!”

 “고정하십시오! 후작님을 격분시키려고 하는 놈의 수작입니다!”

 일국의 국왕도 함부로 대한 가르딘이었다. 변방의 공작 따위에게 예를 차려 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알면서도 참지 못하는 이유는 가르딘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무능한 놈에게 무능하다고 욕을 하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네 이놈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아버님을 능멸한 놈을 반드시 제 손으로 죽이겠습니다!”

 코워드 공작이 분노하자 와이어트가 동조했다. 부모와 자식은 이런 면에서 일심동체였다. 귀족들도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냉정하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의 격장지계에 넘어가게 되면 트윈유니크 협곡에서의 참상을 또다시 겪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출세도 살아 있어야만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참으셔야 합니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협곡과 같은 지형이 나오지 않습니다. 정면대결을 한다면 오러 마스터라고 해도 승산이 없습니다. 체력을 보충하고 병력을 재정비하여 전투를 해야 합니다.”

 “알겠다.”

 코워드 공작은 분노를 잠시 삭였다. 이성을 잃고 화를 내 봤자 코워드 공작만 손해였다.

 “그보다는 놈의 마지막 글이 신경이 쓰입니다.”

 “그게 뭔가?”

 “물에 뭔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릅니다.”

 ‘음!’

 예전에 핵토르 공국도 이곳에서 물을 마시고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가르딘이 말한 적이 있었다. 다크랜드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그날따라 독이 스며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현재 물이 다 떨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물 없이 전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마법사들에게 물을 조사해 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마법사들이 냇가의 물을 조사해 보았다. 마법력을 사용하여 물에 독이 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해도 물에서는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먹어도 이상이 없는 깨끗한 물로 판명이 났다. 마법사와 기사들이 모두 깨끗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워드 공작은 쉽사리 물을 마시라고 하지 못했다. 일단은 일반 병사 중에서 몇 명을 골라 물을 마시도록 했다. 가르딘이 마법사와 기사들에게는 효과가 없다고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8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물 없이 이동할 수는 없었다. 피로가 누적된 상황에서 물까지 마시지 못하면 병사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지쳐서 쓰러질 것이다.

 코워드 공작과 수하귀족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가르딘은 적군이 나타나기를 여유롭게 기다렸다. 이미 안전지대까지 병력을 이동시킨 상황이었다. 포로들에 대한 감시로 인해 일부 병력을 빼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네 말이 통했나 보 네.”

 하루 정도는 더 있어야 올 것 같다.”

 “그럼 일대일인가?”

 “그렇지.”

 “참 말이라는 게 우스워. 그냥 대충 한 말을 사실처럼 느끼니 말이야.”

 “말도 상황에 따라 거짓이 사실로 변하기 마련이잖아.”

 가르딘의 말대로 코워드 공작군이 발키리 영지로 오려면 하루가 더 걸리게 되었다. 사실 가르딘은 냇가에 독을 풀지 않았다. 독을 만들기 위해서는 영약이 필요했다. 영약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아니고 쉽사리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냇가 전체에 독을 분포하기 위해서는 보통 영약으로는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예전 오러 볼을 만들 때 사용한 것처럼 만년 이상 된 영약이어야 한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설치한 쥐덫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걸리냐!”

 “먹을 게 있으면 달려들 수밖에 없는 본능만 가진 쥐새끼의 특징이지.”

 “위험에 대한 본능이 있으면 그렇지도 않을걸.”

 필리언, 갈라, 유타는 쥐덫에 매번 걸려드는 코워드 공작의 머리에 혀를 내둘렸다. 어떻게 이런 자가 공작의 반열에 올랐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르딘은 파멜라, 안젤리카와 같이 진법을 다시 점검해 보았다. 시간이 남으니 철저히 준비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유타는 평지 옆으로 솟아 있는 능선에 올라 발리스타를 점 검했다. 핵토르 공국과의 전투에서 발리스타의 위력은 검증이 되었다. 그 엄청난 위력은 필리언, 갈라, 유타도 놀랄 수밖에 없다. 오러 마스터라도 부지불식간에 맞으면 비명횡사할 수 있었다. 과연 드워프가 만들은 신기의 무기였다.

 진법의 축이 드워프가 만들 때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가르딘은 안젤리카에게 강화마법인 스트랭스를 걸어 달라고 했다. 강화마법은 강도와 세기의 크기에 따라 마법서클이 높아진다. 보통 3서클부터 사용할 수 있으며 6서클의 마력이 들어가게 되면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도 없다.

 “이곳, 이곳에 마법을 걸어줘.”

  “알겠어요.”

 안젤리카는 가르딘이 지시하는 곳에 5서클 정도의 마력을 사용하여 강화마법을 걸었다. 그와 동시에 인비저빌리티(투명) 마법을 걸도록 했다. 가르딘이 파멜라와 안젤리카를 동시에 데려 다니면서 진법을 살피는 이유는 마법과 진법의 궁합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진법에 마법을 걸고, 마법에 진법을 섞어 놓는다면 더욱 효과적인 작전수행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고단위 진법과 고서클 마법의 결합하는 차원이 다른 말이다. 파멜라가 작정하고 최강의 진법을 설계하면 마법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또한 드래곤이 작정하고 마법을 설치하면 인간들이 아무리 발악해도 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 다 최상승에 이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 파멜라는 고단위 진법을 만들 사정이 되지 못한다. 시간도 문제지만 기술자와 장비를 구하지 못했다. 또한 안젤리카도 9서클 마법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쥐새끼를 상대하는데 그 정도로 엄청난 진법과 마법진은 필요하지도 않다.

 “저 앞에다가 마법 방해진을 설치하면 어떨까?”

 “그럴 필요는 없어요. 진법의 축은 모두 감춰놨으니까. 불필요한 마법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어요.”

 “그럼, 이 정도만 하지.”

 진법을 확인하고 난 후 코워드 공작군이 오는 곳으로 가르딘은 창기병을 이끌고 움직였다. 전쟁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철저한 준비가 희생을 줄인다는 것이다. 가르딘은 발키리 영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영지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몇 가지 안배를 해놓았다. 안배라고 해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저 시간을 늦추거나 적 병력에 손실을 주는 것 정도였다.

 부들! 부들!

 8시간이 흐르고 난 후 코워드 공작은 몹시 분한지 주먹을 꽉 쥐었다. 가르딘의 말에 속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에는 아무런 독도 타지 않았다. 병력들을 쉬게 하면서 일부 병력에게 물을 마시게 했다. 시간이 지나도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결국 가르딘의 말에 속아서 소중한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되었다.

 코워드 공작의 심기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귀족들도 코워드 공작의 눈치를 보느라 숨을 죽이고 있었다. 행여나 눈치 없이 말했다가는 지금까지의 억눌린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지도 몰랐다.

 물도 보충하고 쉴 만큼 쉬었다. 병사들의 피로는 거의 풀린 상태였다. 코워드 공작은 그 즉시 진격 명령을 내렸다.

 “모두 진격한다.”

 코워드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귀족들과 병사들이 재빠르게 병사들을 움직였다. 지체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주면 큰일 난다. 코워드 공작은 속이 좁다. 귀족들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둥! 둥! 둥!

 진격하기 위한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코워드 공작은 분노를 품은 채 발키리 영지로 향했다. 이전까지는 발키리 영지를 점령하고, 좋은 말로 설득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감히 나를 능멸해! 네놈이 오러 마스터라고 해도 후작이다! 공작인 나를 능멸하고 살아 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마!’

 공작이 되면서 자존심도 더욱 상승했다. 전형적인 소인배다웠다. 자신의 잘못은 생각도 하지 않고, 남의 탓만 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직접 놈의 목을 치겠습니다!”

 “오냐.”

 와이어트가 자신만만하게 가르딘을 죽이겠다고 큰소리쳤다. 전날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와이어트는 잘 보일 필요성이 있었다. 연회장에서 일어났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후끈거린다. 어떤 누구도 그 당시에 벌어졌던 일을 말하지 못하도록 단속했지만 기억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공을 세우려고 안달이 난 와이어트였다. 물론 가르딘을 직접 상대한다는 말은 아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실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이 오러 마스터를 어떻게 상대한다는 말인가! 와이어트의 자신만만한 말을 듣고 있던 귀족들 역시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러 마스터를 죽이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어차피 직접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귀족들은 침묵했다. 그들도 와이어트와 똑같은 족속들이었다.

 발키리 영지로 향하는 길가에 평야가 자리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곳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길을 제외하고 그 주변으로 풀이 자라나서 어른 키만 했다. 원래는 없었던 곳에 풀이 자라는 것이 수상하게 보였다. 풀은 가을이 되어서 대부분 말라 있었다.

 코워드 공작은 넓게 펼쳐진 갈색의 풀들을 보자 골치가 아팠다. 화공전이라도 하는 날에는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휘이이잉!

 코워드 공작의 콧등을 간질이는 바람이 불었다. 처음에는 산들거리는 바람이 점차 거세지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정찰병을 보내라.”

 “예, 공작님!”

 시간이 아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풀밭으로 이루어진 곳에서 일이 벌어지면 대단히 곤란했다.

 귀족들의 지시에 의해 100명의 정찰병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정찰병들은 주변을 살피면서 풀밭의 끝까지 확인을 모두 마쳤다. 숨어 있는 적군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확인이 끝난 후에 코워드 공작은 진격을 서둘렸다. 시간을 계속 지체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갑자기 이곳에 풀이 자라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짜증만 날 뿐이다.

 정찰병이 다녀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는 창기병이 있었다. 창기병을 이끌고 앞에 서 가르딘이 돌아가는 정찰병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피식!

 불에 타기 좋은 풀숲이 있는데 조사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문제는 굳이 먼저 나타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충분히 불을 지필 수 있었다. 가르딘은 정찰병을 기감으로 확인할 때까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풀밭이 있는 이유는 가르딘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물을 주고 알 수 없는 풀들을 대량으로 심어 놓았다. 다크랜드에서 막 자라는 풀이라서 그런지 생명력이 끈질겼다. 자랄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만 마련해 주니 알아서 잘 자라주었다. 때마침 풀들도 말라 있는 상태였다.

 가르딘은 또다시 불장난하는 것이 마음에 쓰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전생에 방화범이 아닐까 의심을 해보았다.

 바람도 제때에 불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불지르라고 주변 상황이 도와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아주 적절하네.”

 “그렇습니다. 영주님!”

 가르딘의 옆으로 산만 한 덩치를 가진 투르가 있었다. 그런 투르를 가르딘이 돌아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흘러나오는 기도와 기운부터가 전혀 달랐다. 과연 저 모습을 투르는 원했을까! 지금에 와서 가르딘은 확실하게 그렇다고 말하지 못했다.

 “넌 지금이 좋냐! 예전이 좋냐?”

 “지금이 훨씬 좋습니다. 저는 절대로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망설임 없이 대답해 버리는 투르였다. 과연 투르다운 대답이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었다. 흐지부지하게 대답하는 것은 성정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시원하면 말해 버리니 가르딘도 덩달아 쌓인 똥이 모두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겠지.’

 단, 성정이 변했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대답은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가르딘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넘겨 버렸다. 남의 마음까지 배려할 정도로 성실한 척하는 것도 위선자처럼 느껴졌다.

 상념을 떨쳐 버린 가르딘은 작전을 설명해 주었다.

 “병력이 지근거리에 왔을 때까지 기다린다. 놈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불화살을 쏘고 돌아간다.”

 아주 간단한 작전이다.

 이 작전은 다크호스가 있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적들이 아무리 빨라도 다크호스보다는 느렸다.

 가르딘의 기감에 병력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넓은 벌판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작은 생명력까지 감지가 되었다. 가르딘은 느낄 수 있었다. 세상 안에 일치가 되어 빠져들수록 몸 안에서 꿈틀대는 천룡무상신공의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자연스럽게 강해지는 것이다. 노력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조급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가르딘은 코워드 공작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코워드 공작군의 움직임에 성급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가르딘에 대한 증오가 쌓여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만약 가르딘이었다면 시간이 들더라도 풀숲을 돌아가든가 다 제거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애초부터 적군의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풀숲이었다. 

 ‘코워드 공작이 선두에 서지는 않았을 테지.’

 쥐새끼도 무리를 이끌기 위해서는 선두에 서서 지휘를 하건만 코워드 공작은 앞에 나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는 안전한 사각지대에서 명령만 내릴 뿐이다. 목숨에 연연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본성, 탓할 생각은 없다. 그저 실력 없는 자의 종말이 어떤지 알게 해줄 뿐이다.

 코워드 공작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9만의 병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수풀을 헤치고 진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뚫려 있는 길로 코워드 공작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르딘은 코워드 공작보다 지형이 높은 곳에 있다.

 “코워드 공작!”

 우우우우우웅!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퍼뜨렸다. 강렬한 기운이 소리에 실려 대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코워드 공작이 가르딘의 목소리를 들었다.

 말에 타고 있던 코워드 공작이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울린 장소를 올려다보았다. 소리를 진원지에 말을 타고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거리가 제법 멀어 잘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르딘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르딘 후작인가?”

 “그렇습니다. 가르딘 후작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귀족들도 목소리가 가르딘이라고 확신했다.

 “죽으려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인가, 마법사를 불러라!”

 코워드 공작은 마법사를 불러 확성마법을 걸도록 했다. 놈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말로써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었다. 거리만 가까워지면 단숨에 사로잡아 버리면 되었다. 놈이 아무리 강해도 숫자 앞에서는 장사 없음을 알아야 했다.

 “네놈이 감히 공작인 나를 능멸한 것이냐!”

 “능멸! 웃기지도 않는군. 네놈 따위에게 공작은 너무 과분하다!”

 가르딘이 바로 대답해 주었다. 사실 확성마법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가르딘의 기감이 코워드 공작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작은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놈! 내게 보인 것이 모두 거짓이었구나!”

 “그걸 지금 아냐! 멍청함이 아주 극에 달해 있구나!”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 네놈과 영지 그리고 네가 아끼는 모든 것을 다 부숴주마! 그때에도 내 앞에서 큰소리치는지 두고 보겠다!”

 “흥!”

 코워드 공작의 협박에 가르딘은 코웃음쳤다. 그러나 싸늘했다. 어떤 누구도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다. 그것이 신이나 황제라고 해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봐준다라 날 여태까지 봐줬다 이 말이지. 상대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허영심만 가득 찬 네놈이 날 봐줬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구나.”

 “네놈이 기어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하지만 주제를 알아야지. 지금의 작위도 네놈에게는 가당치도 않다. 그걸 알지 못하면 너는 끝까지 쥐새끼 수준밖에 되지 못하는 족속이겠지.”

 부르르르!

 코워드 공작은 분노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칼날 같은 말이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상관없지만 코워드 공작은 아니었다. 대대로 유지해 온 권력을 이어받았을 뿐이다. 그런 자에게 아킬레스건이 바로 가르딘이 한 말이었다.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한편으로 알고 있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저놈을 잡아 내 앞에 데려와라! 내 친히 저놈의 입을 찢어발기겠다!”

 코워드 공작이 명령을 내리자 기병대가 앞으로 나섰다. 적 병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3천의 기병대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기병대가 달려 나가려는 찰나였다.

 ‘응?’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들 모두 활을 겨냥했다. 활촉에는 불길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목표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푸슝! 푸슝! 푸슝!

 강궁으로 만들어진 화살은 멀리 날아갔다.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며 코워드 공작의 코앞으로 날아왔다. 날아온 화살은 풀숲에 떨어졌다. 대처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무리가 따랐다.

 가르딘의 명령에 따라 화살은 사방으로 쏘아졌다. 풀숲 전체를 향해 날아갔기에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활촉에 매달린 기름 든 주머니가 터지면서 풀숲에 불길이 거세게 번지기 시작했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멍하게 있던 코워드 공작군의 병사들은 불길이 거세지자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뭣들 하는 것이냐! 불길을 꺼라!”

 화공의 무서운 점은 불길보다 연기다. 연기가 사방을 가득 메우면 시야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눈과 입을 뜰 수 없게 만든다. 코워드 공작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공격은커녕 뒤로 물러서야 할 판이었다. 이미 앞으로 나간 병력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이 눈에 선했다.

 코워드 공작에게 가르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가리가 멍청하니 수하들만 고생하는구나! 그럼 나중에 보지. 그때까지 불이나 쬐라고!”

 허공으로 가르딘의 웃음이 퍼져 나갔다.

 “하하하하하!”

 코워드 공작은 곳곳에 번져 가는 불길보다 마음속에 번지는 불길이 더 강했다. 하는 말마다 코워드 공작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놈이 코앞까지 나타나서 태연하게 도망치는데도 잡을 수가 없음에 더 화가 났다.

  “이런 빌어먹을!”

 병사들도 가르딘의 조롱을 다 들었다. 워낙 크게 내공을 키워서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기저하는 두말할 나위 없었다.

 “콜록! 콜록!”

 와이어트는 생전 처음 당하는 화공전에 눈을 뜰 수 없는 상태였다. 연이어 기침이 터져 나오고 눈은 매웠다. 병사들이 불에 타 죽는 것까지 생생하게 보였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빌어먹을!”

 와이어트도 분노할 뿐 마땅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하는 짓이 어쩜 저리 똑같은지 혈연관계가 정말 뚜렷했다.

 코워드 공작은 터져 나오는 분노를 뒤로하고 마법사들과 병사들에게 불길을 잡으라고 명령했다.

 마법사들이 연신 마법을 사용하여 불을 끄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바람도 불거니와 연기가 너무 많이 나왔다. 질식하는 병사들까지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한참 흘러가고 나서야 겨우 불길을 잡을 수가 있었다.

 불이 모두 꺼지고 나서 보니 처참한 지경 그 자체였다. 불에 타 죽은 병사보다는 질식한 병사들이 더 많았다. 피해가 생각보다 많았다. 족히 8천의 병력이 화공전에 당했다. 또한 나머지 병사들조차 불길에 고생한 흔적인 역력했다. 검게 그 흘린 병사들은 또다시 피로감에 젖었다. 치열한 대결을 벌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대의 전략에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었다. 귀족들의 무능을 병사들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버루거 자작과 비린스 자작은 협곡전과 화공전을 보면서 가르딘을 다시 보게 되었다. 상대는 검술만 뛰어난 기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함정에 빠뜨리는 지략가였다. 단번에 점령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많이 줄어들었다.

 ‘무서운 자다!’

 ‘이런 자는 쉽게 끝나지 않을 텐데.’

 ‘돌아가자고 할까!’

 ‘그랬다가는 먼저 죽을걸.’

 버루거 자작과 비린스 자작은 생명에 대한 감각이 제법 뛰어난 편이었다.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차마 입을 열지는 못했다. 코워드 공작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눈동자에 핏발이 드러나 있었다. 잘못 말하면 두 번 다시 입을 놀리지 못하는 수 있다. 이런 때는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진군한다!”

 “병력을 좀 쉬게 하시는 것이!”

 “닥쳐랏! 어차피 이곳을 지나면 평야다! 결국 놈도 정면대결을 벌어야 할 것이다! 병력 수에서 모자라는 것을 알기에 놈이 계속 수작을 부리는 거다! 그러니 내 말에 토 달지 말고 진격해!”

 버루거 자작과 비린스 자작은 가만히 있었다. 결국 다른 귀족이 입을 열다가 불화살을 맞고 입을 닫았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는 상식이 통했다.

 코워드 공작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핵토르 공국도 평야에서는 정면대결을 벌었다. 당시에 상대방의 전력도 절반 이상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20만 대 10만의 대결이었지만 이번은 8만 대 2만의 대결이다. 전력상 4배 이상 차이가 났다. 가르딘이 오러 마스터라는 것을 감안해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전력이었다.

 남아 있는 병사들의 수를 자신감의 척도로 삼는 코워드 공작 이하 귀족들이었다. 전력의 뚜렷한 우위를 점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기는 했다.

 따그닥! 따그닥!

 맹렬하게 달리지도 않았다. 가르딘은 느긋하게 풍경 구경하면서 아군 진영으로 돌아갔다. 뒤에서 쫓아와 봐야 시간 차이도 많이 날뿐더러 따라오지도 못한다. 지근거리까지 와도 도망갈 자신이 있었다.

 “투르야! 너는 저렇게 당하면 어떻게 할 거냐?”

 “그냥 돌진합니다.”

 ‘'막는데도!”

 “부수고 돌진합니다!”

 “천 길 낭떠러지면.”

 “그냥 뛰어넘습니다.”

 “그러냐. 너 장하구나!”

 “감사합니다.”

 역시 투르는 시원시원했다. 차라리 투르처럼 무식하면 오히려 머리 쓰다 당할 수도 있다. 한길 방향밖에 모르는 자가 그래서 무서운 것인지도 모른다. 가르딘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면서 투르가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앞으로 큰일 낼 놈이다.’

 광천패황신공의 화후가 벌써 9성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어떤 변화를 겪을지 가르딘도 예상하지 못할 수준이 되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 속도는 더 빨라졌다.

 “놈들이 쫓아오는 것 같으니 지금부터 속도를 높인다.”

 “예! 영주님!”

 또!

 또 있다.

 대문짝만 한 글자판이 코워드 공작의 시야에 보였다. 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용이 코워드 공작의 심기를 어지럽힐 뿐이다. 귀족들은 가르딘이 심리전의 대가임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상대방을 어떡해하면 약을 올릴 수 있는지만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당했으면 이만 돌아가지.

 그래도 오겠다면 함정이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가르딘이 코워드 공작을 위해서 함정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권고의 말을 써 놨다. 앞에는 평지로 되어 있다. 지금부터 함정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코워드 공작은 가르딘의 농간으로 치부해 버렸다.

 “전원 전진하라!”

 착! 착! 착! 착!

 조금만 더 가면서 발키리 영지다. 코워드 공작은 귀족들과 기사들을 다독이며 병사들의 투쟁심을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당한 것은 모두 가르딘의 비겁한 술책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죽은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전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불어넣었다. 제법 괜찮은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코워드 공작의 머리에서 그런 주변머리가 나왔다는 것이 대견할 따름이다.

 쿠다다당!

 “크아아악! 크아아악!”

 돌진하는 병사들 중에 일부가 바닥이 꺼지면서 땅속에 떨어졌다. 그리 깊지는 않지만 웅덩이 안에 꼬챙이가 솟아 있어 병사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곳곳에 설치한 웅덩이는 제법 많았지만 엉성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걸리지 않았을 함정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함정에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경각심과 사기 저하는 피할 수 없었다. 주변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 코워드 공작은 또다시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르딘의 격장지계에 속아 너무 앞서간 것이 탈이었다.

 “비겁한 놈! 언제까지 수작을 부릴 것이냐! 네놈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가르딘의 전략을 비겁한 수작으로 치부해 버리는 코워드 공작이었다. 전쟁에서 소수의 병력을 이용하여 적군을 교묘히 유린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긴다. 대군으로 소군을 이기는 것은 그다지 뛰어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물론 대군이 있다면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면에서 가르딘은 훌륭한 전략가라고 부를 수 있었다. 칭찬을 해도 부족하지 않는 전략이었다. 물론 아주 뛰어나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코워드 공작에게만 통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뛰어난 귀족이었다면 가르딘도 제법 고생했을 것이다.

 코워드 공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군 진영에 도착한 가르딘은 기사단과 병력을 점검하고, 작전을 설명해 나갔다. 이미 한 번 경험을 했기에 전략에 대한 기본적인 방안만을 간략하게 지시했다.

 “총병력을 8개 병단으로 나누고, 기사단은 각각의 병단을 맞아서 관리하고 위험이 있을 시 반드시 신호를 보내도록.”

 가르딘은 1개 병단을 이끌면서 위험한 병단을 도와주기로 약속되었다. 물론 계획대로 움직이면서 적을 교란시키는 목적도 같이 병행할 것이다.

 멍! 멍! 멍!

 개피리가 울리자 개가 짖었다. 적들이 함정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르딘은 설마 했는데 또 걸리자 허탈한 심정이었다. 설치한 쥐덫은 죄다 걸리고 있었다. 하나도 피하지 못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젠장!”

 필리언, 갈라, 유타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면서 손을 내밀었다.

 가르딘은 머리를 긁적이며,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개라도 걸리지 않으면 가르딘이 이기는 승부였다. 그런데 모두 걸려 버렸으니 가르딘이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웬만해서는 동기들에게 내기에서 지지 않았다. 피닉스기사단 시절에도 불패신화를 이루어나갔던 가르딘이 코워드 공작으로 인해 패배의 쓴맛을 겪고 있었다. 아쉽지만 내기는 내기였다. 가르딘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10골드를 동료들에게 주었다.

 “잘 쓸게!”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그놈은 머리가 안 된다고.”

 “이거 술맛이 더 좋아지겠는데.”

 ‘칫!’

 “내 그놈과 엮이면서 되는 일이 없어.”

 가르딘은 다음 내기에서는 기필코 이기겠다고 승부욕을 불태웠다. 내기에서 진 분풀이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코워드 공작이 진격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가르딘은 계획대로 병력을 나누고 본격적인 전투태세에 임했다. 가르딘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팽팽한 긴장감은 전쟁을 임하는데 필수적인 것이지만 길어지면 한순간에 끊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적절한 긴장감과 함께 여유가 필요하다.

 가르딘이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일장연설을 했다.

 “적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강하다! 적은 이미 예기가 꺾인 패잔병에 불과하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여 발키리 영지를 사수할 것이다. 간악한 코워드 공작에게 발키리 영지의 힘을 보여주어라! 발키리 영지여, 영원하라!”

 “가르딘 영주님! 만세!”

 “발키리 영지 만세!”

 병사들의 기를 잔뜩 살려 놓은 가르딘은 마지막으로 검을 뽑아 오러 블레이드를 보여주었다. 검에서 길게 솟아 오른 오러 블레이드는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이 가르딘을 우러러보았다.

 ‘이 맛에 영주하지.’

 항상 뒤에서 느긋하게 생활하고 싶어 했던 가르딘은 점점 영주로서의 책임감을 느껴가고 있었다. 없던 책임감이 하루아침에 생기지는 않는다. 살아가면서 익숙해지고, 지켜야겠다는 사명감이 드는 것이다.

 필리언, 갈라, 유타가 기사단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진법 안으로 들어가 포진했다.

 가르딘은 군 진영의 정중앙에서 코워드 공작군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전쟁은 희생이 따른다. 소수라도 그것이 자신이 된다면 슬픈 현실이 될 수 있다. 영주는 병사들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책임을 지는 위치다. 그들에게 무관심할 수 없게 된 가르딘이다. 따라서 최대한 냉철하고, 효율적인 전략을 펴서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어야 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가르딘은 그때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일을 한다.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가르딘은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했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죽어 가는 기사와 동료들을 많이 보았다. 직접 지휘한 것은 아니더라도 경험이 되었다. 가르딘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코워드 공작! 이제까지 쥐새끼라고 해서 미안하군. 지금부터는 적장으로서 냉정하게 대접을 해주지.”

 가르딘의 눈빛이 시리도록 차갑게 변했다. 발키리 영주의 영주로서 상대함에 있어 방심은 없다. 이 모습을 코워드 공작이 봤다면 절대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발키리 영지군이 내지른 함성이 코워드 공작에게까지 들렸다. 기세를 잔뜩 품은 자신감 넘치는 함성이었다. 코워드 공작군은 적들의 기세를 느끼자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코워드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 역시도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다! 고작 2만밖에 되지 않는다! 허장성세가 통할 것 이라 보는 것인가!’

 코워드 공작은 가르딘이 일부러 기세를 뿜어낸 것으로 보았다. 아군의 사기를 높이려는 술책이었다.

 “별것 아니다! 고작 2만으로 우리를 막을 수 없다! 모두 전진하라!”

 코워드 공작군의 대군이 평야를 가득 메우며 진격해 나갔다. 진군하는 병사들의 눈빛에 걱정, 두려움, 긴장감이 잔뜩 묻어나왔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기병대는 앞에 나와 적들을 혼란케 하라!”

 처척!

 코워드 공작군의 선봉은 5천으로 이루어진 기병대였다. 전번 핵토르 공국과의 전투에서 기병대가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만들어낸 드레이크 기병대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5천의 기병대가 적군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가르딘은 코워드 공작이 보낸 선봉을 보자 투르에게 눈짓을 보냈다. 코워드 공작에게 드레이크 기병대가 있다면 가르딘에게는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이 있었다. 숫자가 얼마가 됐던 문제는 없었다.

 “가라!”

 척!

 투르가 팔을 들어 군신의 예를 취하고 난 후 창기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영주님이 보고 계신다! 막는 적을 단숨에 부숴 버린다! 알겠나!”

 “악!”

 검은 바람(흑풍). 500기의 다크호스가 일렬로 섰다. 단 한 기의 기병대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사나운 기세가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에게서 흘러나왔다. 광폭한 야수가 우리 안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곧 진면목을 보여줄 것이다.

 가르딘은 창기병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마음에 들었다. 역시 사람은 갈구면 강해진다.

 타아앙!

 말발굽이 지면을 박차는 쇳소리가 들렸다. 탄력이 뛰어난 강궁에서 발사되는 화살처럼 빨랐다. 검은 바람이 일 시간에 앞으로 튀어나가 드레이크 기병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뒤에서 지켜보던 발키리 영지군은 탄성을 내질렀다.

  “와! 빠르다!”

 “역시 대단해!”

 500여 기에 불과한 창기병이 달려 나오자 드레이크 기병대의 대장 쉔카윈은 어이없다는 듯이 비웃었다. 5천의 기병대가 전진하면 1만의 병력도 쓰러버릴 수 있는 위력이었다. 정면 대결을 감행하다니 미치지 않고서는 저런 짓을 할 수 없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미친놈에게는 드레이크 기병대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게 해주는 수밖에 없겠지! 모두 죽여라!”

 “이야야압!”

 기병대 역시 전의를 끌어올렸다. 고작 500기가 돌격하자 자존심이 상했다. 적군을 향해 기세를 끌어올리며 충돌하기 일보직전까지 다가왔다.

 그런데 놈들의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빠른 것을 둘째치고 엄청나게 큰 말이었다. 보통 말보다 족히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멀리서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이 뿜어내는 사나운 맹수의 기세는 5천의 기병대를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기세에서 밀렸다는 생각에 쉔카윈은 이를 악물었다. 뒤에서 코워드 공작이 보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밀리면 자리보존도 하지 못한다.

 “적은 5백기에 불과하다! 쳐랏!”

 수적 우위를 알기에 5천의 기병대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강해도 10배의 차이였다. 일반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었다.

 과아아아앙!

 대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충돌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다.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과 정면으로 부딪친 드레이크 기병대 중 대부분이 3미터 이상 튀어 올랐다.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튕겨나간 것이다. 일순간 5백기의 기병대가 바닥을 뒹굴었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악몽의 시간이 되었다.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의 광룡창법이 발휘되었다.

 광룡창법은 강력한 힘과 회전력에 바탕을 둔 창법이었다. 창대 끝에서부터 시작되는 빠른 회전력이 창끝까지 힘이 실려 극속의 회전을 한다. 회전한 힘은 뻗어나가면서 힘을 배가시켰다.

 푸우응!

 “커어억!”

 광룡창법의 광룡섬에 맞은 기병대원이 배가 뚫어지면서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기병대가 입고 있는 철제 갑옷 따위는 무식하게 찔러 들어오는 광룡섬을 막아낼 수 없었다.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의 대장인 투르의 광룡창법은 물이 오를 때로 올랐다. 신이 그를 위해 광룡창법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투르가 펼치는 광룡창법은 수하들이 펼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무지막지한 힘과 광천패황신공의 공력이 광룡창에 고스란히 옮겨져 있었다. 광룡섬에 이어 펼쳐지는 광룡포를 맞은 기병대원들은 신체의 사분지일이 없어져 버렸다. 마력포에 맞은 것처럼 몸이 뚫려 나가 버리고 만 것이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덜! 덜! 덜!

 정면에서 투르의 창을 맞대는 기병대원들은 정신이 하늘로 승천했다. 대항해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잠시 하늘에 맞닿았던 기병대원은 투르의 창에 의해 영원히 지상에 내려오지 못했다.

 기병대장 쉔카윈은 믿을 수가 없었다. 5천의 기병대 중 1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놈들도 사람이다! 어서 계속 덤벼랏!”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작 쉔카윈은 감히 정면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투르의 광폭한 기세는 기병대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은 모든 힘을 한순간에 폭발시켰다. 힘을 남기는 전투를 하지 않는다. 그저 적들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2천에 가까운 기병대가 죽어가면서도 창기병을 한 명도 죽이지 못했다.

 뒤에서 보고 있던 코워드 공작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창기병이 나타났다. 수가 적기에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대단했다. 압도적인 실력과 광폭한 기세는 사람의 원초적인 공포심을 자극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자 코워드 공작은 화가 났다. 10배가 넘는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모든 기병대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공격하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코워드 공작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사들과 귀족들이 병사들을 움직여 진격해 나갔다.

 적의 본진이 움직이는 것을 본 가르딘이 투르에게 전음을 사용했다. 투르의 창기병으로서는 할 일을 다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적들을 끌어들이는 역할만 하면 되었다.

 - 천천히 돌아오너라.

 전음을 들은 투르가 그 즉시 창기병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사전에 약속이 된 것이기에 무슨 뜻인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 창기병들이 서서히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다크호스는 주인의 마음을 알고 뒷걸음을 쳤다.

 이제야 밀린다는 생각을 한 기병대장 쉔카윈이 창기병의 뒤를 쫓았다. 이대로 당하기만 하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뒤에서 본진이 오고 있었다. 놈들을 묶어 놓기만 하면 전멸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놈들을 추격하라!”

 힘이 빠져서 돌아가는 것으로 여겼지만 창기병은 여전히 힘이 충만했다. 덤벼오는 기병대를 하나씩 착실하게 죽여 나갔다. 오히려 섣불리 덤벼들자 창기병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힘이 아닌 절묘한 타이밍으로 적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푸욱!

 철퍼덕!

 창에 가슴이 뚫린 기병대가 차가운 바닥에 거꾸로 쓰러져 박혔다. 볼썽사납게 쓰러진 기병대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놈들! 비겁하게 도망치지 마라!”

 움찔!

 웬카윈이 소리치다가 투르의 눈빛과 교차되었다. 사나우면서 차가운 기운이 쉔카원의 뇌리를 강타하자 몸이 움찔거렸다. 투르의 입이 벌어지며 험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다크호스의 안장 옆에 꽂아 놓은 배틀 엑스를 들었다.

 투르와 쉔카윈의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쉔카인은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저 거리에서 배틀 엑스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 단정했다. 그러나 투르를 상식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배틀 엑스를 가볍게 들어 올린 투르가 쉔카윈을 향해 배틀 엑스를 던졌다.

 휘잉! 휘잉! 휘잉!

 배틀 엑스가 돌아가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쉔카윈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배틀 엑스를 보자 기겁했다. 그러나 쉽사리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이 검을 들어 쳐내려고 했다.

 싹둑!

 푸욱!

 “이... 럴... 수...!”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절명한 쉔카윈이었다. 검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머리통까지 배틀 엑스에 쪼개졌다. 괜히 말 한 번 잘못했다가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쉔카윈의 죽음은 기병대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쉔카윈은 기병대에서 가장 강한 존재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단 한 방에 죽었다.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투르의 가공할 힘에 주눅이 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자신들도 배틀 엑스에 맞으면 반으로 쪼개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느꼈다.

 잠시 공황상태가 되어 버린 기병대를 뒤로하고 창기병이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창기병이 물러서자 그제야 기병대가 정신을 차리고 추격했다.

 그런데 추격이 시작되자마자 하늘 위에서 거대한 물체가 쏟아져 내려왔다. 30개에 불과한 쇠 활이지만 엄청나게 컸다. 쇠 활에 스치기만 해도 사망이었다.

 푸아아앙! 푸아아앙!

 쇠 활은 사람보다 컸다. 쇠 활을 맞은 기병대가 들고 있던 무기와 함께 박살이 났다. 뚫리는 것이 아니라 박살나고 있었다. 사람의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죽어 나가자 공포감이 시위를 장악했다.

 “피... 해... 으악!”

 몰려 있으면 최악이었다.

 기병대가 몰려 있는 곳에 쇠 활이 정확하게 날아왔다. 모여 있던 기병대원 4명이 화살을 맞고 터져 나갔다. 기병대가 타고 있던 말조차 분시가 되어 살점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일순간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참혹한 광경이 벌어졌다.

 가르딘은 본진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수행한 창기병이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발리스타를 사용했다. 발리스타의 위력은 굉장했다. 기병대를 속수무책으로 박살내고 있었다.

  가르딘의 시야에 분노한 코워드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함정일 것이라는 추측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창기병이 일방적으로 도살한 현장을 봤으면 눈치 챌만도 하건만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파멜라, 진법을 가동시켜.”

 “예!”

 “안젤리카는 파멜라를 지켜줘.”

 “물론이에요.”

 파멜라는 가르딘에게 소중한 인재다. 조금이라도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안젤리카가 지켜준다면 안심이었다.

 파멜라는 가르딘의 지시에 따라 진법을 하나씩 가동했다. 순서는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조화진부터 환영진까지였다. 진법은 2가지 정도로 단순했다. 핵토르 공국에 사용한 진법보다는 한참 모자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가르딘은 코워드 공작이 진법의 영향력 안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자 8개의 병단을 모두 동원하였다. 적들이 쳐들어 올 틈이 전보다 많아서 모든 병력을 동시에 사용하였다. 병력의 수가 많이 차이 난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병력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별다른 피해가 없다면 체력적으로도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가르딘은 진법의 영향력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위험한 곳을 지원하는데 주력했다. 특히 코워드 공작의 주력부대를 집중적으로 살폈다.

 “지금쯤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병력이 분산되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공작의 반열에 올랐으니 마법사들도 구색을 갖추었다. 뛰어난 마법사들은 아니더라도 5서클은 되었다. 감각에 민감한 마법사들이 공간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무능한 놈들과 똑같이 치부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한참 늦은 시기에 코워드 공작이 이상함을 발견했다. 적을 향해 직선으로 움직였는데 병력이 사방으로 분산되었다. 분산된 병력은 공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결국 코워드 공작의 눈에 보이는 병력이 1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마치 공간이 병력을 잡아먹은 것처럼 보였다.

 비적! 비적!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정면을 보았다. 환상은 절대 아니었다. 때마침 마법사들이 코워드 공작에게 이상함을 전달했다. 참! 빨리도 알아차린 마법사들이다.

 하지만 마법사들도 할 말은 있었다. 코워드 공작이 급하게 서두르는 바람에 시간이 부족했었다. 상황을 살필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었다.

 “아무래도 마법진이 펼쳐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발키리 영지에 대규모 마법진을 설치할 마법사가 어디 있다고 그래!”

 “공간이 뒤틀려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공간이 뒤틀릴 수도 있으나 그렇다 해도 이 정도로 뒤틀리지는 않습니다. 마법진이 아니라면 불가능합니다.”

 코워드 공작은 또다시 가르딘에게 한 방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기병을 유인책으로 내세워서 자신을 끌어들인 것이 분명했다. 가르딘에게 화를 풀 수 없었던 코워드 공작은 애꿎은 마법사들에게 화를 토해내었다.

 “지금까지 마법진에 빠진 것도 모르다니! 그러고도 네놈들이 마법사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 쓸모없는 것들!”

 “면... 목 없습니다!”

 마법사들도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마법진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코워드 공작을 무진장 까고 있었다.

 ‘너는 그렇게 잘났냐!’

 ‘함정이란 함정은 다 걸린 주제에!’

 ‘누굴 나무라는 거야!’

 코워드 공작은 마법사들에게 마법진을 해체하도록 명령했다. 현재 코워드 공작 주변의 병력이 고작 1만이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적의 기습을 받으면 위험한 것은 자명했다.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버루거 자작을 비롯한 귀족들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이런 식의 전술은 처음 당해보았기에 두려움은 점점 커졌다.

 와이어트는 코워드 공작의 아들답게 슬금슬금 뒤로 몸을 빼고 있었다. 최후에라도 살아야겠다는 치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조화진에 의해 감각이 무뎌졌고, 환영진에 의해 병력이 분리가 되었다. 진법 공간으로 분리가 된 병력들은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 코워드 공작만이 그나마 제일 한가한 편이다.

 채채애앵! 타타탕! 카카카캉!

 “크아아악! 커억!”

 5천의 병력이 3천 5백의 병력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병력을 이끄는 발키리기사단의 실력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발전했다. 각각의 기사들이 모두 익스퍼트 중급에 다다라 있는 상태였다.

 기사와 병력의 질적인 차이도 있었지만 일방적으로 밀리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공간이 뒤틀리면서 환영을 본 코워드 공작군은 불안감과 공포감이 가득했다. 몸이 굳어있는 상황에서 기습을 받았으니 막아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기사들과 병사들의 피해는 속출했고, 사기는 급감했다.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인 병사들이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를 수 있을 리 만무한 상황이다.

 그에 반해 발키리 영지군은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다. 또한 막상 부딪쳐 보니 별거 아니었다. 기사들은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하면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특히 필리언, 갈라, 유타의 솜씨는 발군을 넘어 환상적이었다. 수명의 적병을 단숨에 숨통을 끊어 놓았다. 코워드 공작의 기사단인 아이언기사단은 발키리기사단이 이처럼 강한지 처음 알았다. 그들이 핵토르 공국과의 전쟁 때 본 발키리기사단은 이렇지 않았다. 모두 피로에 지치고, 부상을 당한 모습이었다.

 아이언기사단의 단장 윌리엄 자작은 필리언의 놀라운 검술에 연신 뒤로 밀렸다. 솔직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필리언을 향해 윌리엄 자작과 5명의 기사가 합공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3명이 죽어 나갔다. 화려한 기술도 아니었다. 그저 검의 기초인 찌르고, 베는 단순한 동작만으로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상승의 경지에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능력이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나! 발키리기사단장 필리언!”

 사아악! 푸욱!

 말을 하면서도 검은 쉬지 않았다. 필리언의 검이 마주하는 기사의 검을 피함과 동시에 목을 잘라내고, 심장에 검을 박았다. 섬광처럼 빠르고 날카로웠다. 검의 궤적이 언제 두 번의 변화를 만들어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윌리엄 자작의 수준은 익스퍼트 중급을 넘었다. 그런데도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인정한다면 상대는 최소 익스퍼트 최상급을 넘어선다. 솔직히 마스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지지 않는다!”

 빠드득!

 죽을 각오를 한 윌리엄 자작은 오러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어이없이 죽고 싶지는 않다. 적에게 단 한 번이라도 치명적인 일격을 날려야 했다.

 필리언은 윌리엄 자작의 단호한 의지를 보았다.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집념을 보였다. 상대가 진심이라면 필리언도 진심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기사는 검으로 말을 한다. 검이 진심이라면 그에 걸맞은 검으로 맞상대 해주어야 한다.

 윌리엄 자작이 한 발짝 나아가 검을 휘둘렸다. 무척이나 빠르고 경쾌했다. 필리언도 앞으로 나아가 검을 휘둘렸다.

 두 개의 검이 서로 부딪쳤다.

 사아악!

 “커어억!”

 윌리엄 자작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보았다. 섬광을 방불케 하는 검의 궤적. 오러를 사용한 검을 단숨에 잘라 버리는 오러 블레이드의 환상과 같은 능력을 말이다. 오러 마스터가 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윌리엄 자작이었다.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검의 절대경지는 아무나 찾아오지 않는다. 선택된 자들, 즉 뛰어난 재능과 끊임없는 노력을 한 자들이나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윌리엄 자작도 그렇게 생각했다.

 “영광... 이오!”

 “잘 가시오.”

 마지막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윌리엄 자작은 오러 마스터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것에 만족한 듯이 숨을 거두었다.

 승부 자체는 싱거웠으나 기사로서 윌리엄 자작은 뛰어난 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필리언은 윌리엄 자작을 기사로서 숨을 거두게 해주었다.

 필리언이 전투를 승리로 장식할 때 갈라와 유타 역시도 가볍게 승리를 쟁취했다. 투르의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이 진법 안을 휘젓고 다니기에 코워드 공작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또한 진법 밖에서 쏘아지는 발리스타의 적절한 지원사격은 발키리 영지군의 능력을 배가시켰다.

  가르딘은 추가 지원을 하지 않아도 전투를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코워드 공작은 전투를 너무 만만히 보는 경향이 있었다. 저런 정신 상태로는 절대 전쟁을 이길 수 없다. 전쟁은 누구보다 냉철하며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만 이길수 있다.

 “슬슬 마무리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5시간 동안 전투는 지속되었다. 그동안에도 코워드 공작은 진격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지켰다. 마법사들이 끙끙거리며 진법을 해체하려고 노력했지만 파멜라의 진법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다.

 코워드 공작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먼저 간 병력이 마법진 안에서 적을 무찔렸다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당장 해체하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네놈들이 그러고도 마법사들이냐!”

 마법사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풀리지 않는 것은 진법이 생소한 마법진이기 때문이다. 마법진을 사용하기 위한 중심도 없을뿐더러 어떤 이유로 발진이 이루어지는 파악하지도 못했다.

 ‘젠장! 알아야 풀 거 아냐!’

 ‘지가 해보지!’

 날이 저물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자 금세 어둠이 찾아왔다. 밤이 되자 불안감은 더욱더 고조되었다. 공포감이 빠르게 전염되었다.

 가르딘은 진법 안에서의 전투가 끝난 것을 확인했다. 적들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자멸하고 말았다. 7만의 병력 중 4만을 죽이고 3만을 생포했다. 생포한 병사들 대부분이 기력이 다해 쓰러져 있었다. 다시 회복하려면 상당시간 지나야 할 것이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전투가 끝이 났다.

 가르딘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기시들과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우리는 이겼다! 발키리 영지를 위해 싸운 그대들의 노고를 잊지 않는다! 오늘은 내일을 위해 푹 쉬도록!”

 “와아아아아!”

 코워드 공작이 오늘밤 안으로 진법을 빠져나오기는 힘들 어 보였다. 전투를 벌인 영지군을 쉬게 하고, 내일 다시 전투를 벌이는 것이 나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것은 코워드 공작일 테니 말이다.

 검을 뽑아보지도 않은 가르딘도 내일을 위해 한숨 때리기로 했다. 막사로 가는 길에 동기들이 다가왔다.

 “씁쓸한 전투다.”

 “병사들만 불쌍하지.”

 가르딘은 동료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소모품이 되다 버려지는 기분. 참으로 더럽다. 무능한 지휘관으로 인해 아쉬운 목숨들이 사라지는 것이 전장의 현실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동정으로 인해 그들의 목숨을 살려줄 수는 없다. 그래서 전쟁이 비정한 것이다. 안타깝지만 죽여야 자신이 산다. 살기 위해 적을 먼저 죽여야, 승리하는 것이 전쟁이다.

  감상적으로 변하는 동기들에게 가르딘이 한마디 했다.

 “그냥 잠이나 자!”

 “그래 야겠다.”

 씁쓸할 때는 그냥 생각 없이 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내일이 되면 전날의 기억은 희미하게 희석될 것이다.

 밤 시간은 처한 상황에 따라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었다. 오늘밤은 무척이나 느리게 흘러갈 것 같았다.

 밤의 고요함이 찾아왔다. 밝게 빛나는 3개의 달이 지면을 내리비추었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취해 잠에 빠지는 가르딘과 병사들이었다. 그에 반해 코워드 공작은 진법 안에서 밤새도록 끙끙거리고 있었다.

 다음 날이 어김없이 밝아왔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능선을 타고 얼굴을 내미는 아침햇살이 밤사이에 내린 이슬비를 투영하여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내었다. 막사 안에서 일어난 취사병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아침식사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사기는 식량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꼬박꼬박 먹여주는 것이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된다.

 취사병들이 만들어낸 구수한 수프 냄새가 진영에 감돌았다.

 빵! 빠라빠라빠라방!

 정겨운 기상나팔소리가 들리자 막사 안에서 숨죽이며 자고 있던 병사들이 벌떡 일어난다. 서열이 낮은 병사들이 먼저 일어나서 선임병사를 깨운다. 조심스럽게 깨우지 않으면 그날 하루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신병에 비해 동작은 느리지만 매번 하던 일이라 간결하고 정확해서 빨랐다.

 군복을 모두 착용하고 난 후 막사 밖으로 나온 병사들을 기사들이 일일이 체크한다. 뒤늦게 나오는 막사가 있다면 단체로 기합을 받게 된다. 잘했든 못했든 군대는 단체행동이다. 하나의 실수가 전체의 실수라는 뜻이다. 억울하면 탈영 하면 된다. 그 뒤로 죽어도 책임은 못 진다.

 영주 이하 기사단장과 선임기사들은 제일 늦게 일어난다. 당연히 가르딘은 늦게까지 잠을 청한 후 마지막에 일어나서 병사가 갖다 주는 빵과 수프를 먹는다. 막 일어나서 그런지 입맛은 별로 없었다.

 “쥐새끼가 간밤에 잘 잤나 확인해 봐야겠군.”

 식사하기 전에 가르딘은 천룡무상신공을 운용하여 굳은 몸을 풀어 주었다. 피로는 전혀 쌓이지 않았다. 어제 검 한 번 뽑아 보지 못한 가르딘이다. 피곤할 리 만무했다.

 식사를 하고 난 후 막사 밖으로 나가자 해가 이미 반쯤 올라와 있었다. 따뜻한 햇살을 동반하여 부는 시원한 바람이 마음까지 상쾌하게 해준다. 청명한 가을 하늘은 늘 푸르기만 했다. 전쟁에서 보이는 참혹한 현실, 붉은 핏물과는 대조적이었다.

 “좋은 아침이야.”

 -좋은 아침입니다! 영주님!

 가르딘의 정면으로 기사단이 전투준비를 모두 마치고 서 있었다. 그 뒤로 3만의 병력이 줄을 맞추어 일대의 장관을 이루었다. 각 모서리를 칼로 반듯하게 잘라 놓은 것 같이 조금의 흐트러짐도 볼 수 없었다.

 가르딘의 말 한마디면 어디라도 뛰어들 수 있는 기사단과 정예병들이다.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포로들에게 식사는 줬겠지.”

 “허기를 때울 정도로 음식을 나눠주었습니다.”

 ‘다행이군.”

 포로에게 식량을 많이 주는 것은 사치였다. 그들의 처지가 안타깝지만 현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었다. 소량의 식사라도 주는 것을 감지덕지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악질의 지휘관에게 걸리면 살아남지도 못한다.

 “간밤에 적의 동향은?”

 “중앙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훗!

 역시나 코워드 공작다웠다. 자신을 중심으로 병사들을 포진시켰을 것이다. 밤새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진격하지 않았다. 진법을 해체하기 전까지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반나절이 넘게 흘렀으면 눈치를 철만도 하건만, 상황파악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투르야!”

 “예, 영주님!”

 “가서 병력을 반으로 쪼개고 와라.”

 “알겠습니다.”

 “궁수부대와 발리스타부대는 창기병을 지원해 주도록.” 가볍게 작전지시를 내렸다. 무리한 정면대결은 절대로 하지 않는 가르딘이었다. 병사들의 희생을 일부러 부추길 필요는 없다.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냉철한 전략을 세우면 그만이었다. 사실 1만밖에 남지 않는 코워드 공작군 정도는 3만의 병력이 출동하면 단숨에 쓰러버릴 수 있었다.

 “창기병이 적병을 혼란스럽게 했을 때 파멜라는 진법을 풀어. 그 즉시 총공격을 한다.”

 1만의 병력을 반으로 쪼개고 난 후 각개 격파할 생각이었다. 적군에게는 굉장히 잔인하고 치사한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감상에 젖었던 밤이 지나고 나자 다시 냉철하게 변한 가르딘이다. 마음을 차갑게 굳혔다.

 눈이 휑하다.

 조금만 의식이 풀리면 곧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코워드 공작을 비롯한 병사들 대부분이 밤을 지새운 흔적이 역력했다. 대부분 눈이 풀려 있는 상태였다. 그냥 밤을 샌 것도 아니고 극도의 긴장감 속에 밤을 보냈다.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아침을 지나 정오가 다가오는 시간에 이르자 병사들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 병사가 진법공간의 앞에 서 있었다. 바로 앞의 공간이 이질적으로 움직였다. 꿈틀거리는 것이 신기했다. 마치 해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밤과 낮의 차이로 인해 어제는 보이지 않았던 신비한 일이었다. 병사는 피곤에 지쳐 있었다. 이대로 물러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쑤욱!

 공간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갈고리 모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편자가 병사의 시야를 가렸다.

 푸아악!

 병사를 잔인하게 밟고 지나갔다. 짓밟힌 병사는 얼굴이 뭉개지면서 즉사했다. 그 즉시 물결 속에서 검은 바람이 튕겨지듯이 쏘아져 나갔다.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다크호스는 둔탁하지만 빨랐다.

 “적... 이닷!”

 삽시간에 긴장감이 전장에 감돌았다. 비호같이 날아가는 검은 바람은 병력의 가장 약한 부근을 향해 창을 찌르듯이 들어갔다. 병사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에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은 이미 절반 이상 들어와 있었다.

 “적은 고작 몇 백기다! 막아탓!”

 코워드 공작과 귀족들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였다.

 하늘을 까맣게 물들이는 시꺼먼 빗물이 떨어져 내렸다.

 슈슈슈슈슈슈슉!

 "파파파파팟! 커억! 카아악!”

 병사들에게 부어지는 빗물은 화살세례였다. 갑자기 쏟아지는 화살비에 병사들은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병력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 틈에 투르의 창기병이 병력을 반으로 가르며 광폭하게 밀고 들어갔다.

 “화살을 방패로 막아! 마법사들은 뭐 하는 것이냐! 실드를 치란 말이야!”

 코워드 공작이 소리를 지르기 전에 마법사들은 알아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화살세례야 막을 수 있다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발리스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실드가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실드에 발리스타가 부딪치자 엄청난 반탄력을 받은 마법사는 마법역류를 경험해야 했다.

 흩어지는 병사들은 잡아둘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다. 1만의 병력이 삽시간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은 코워드 공작군을 사방으로 흩어 놓은 후 공간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창기병을 추격할 틈도 존재하지 않았다. 코워드 공작군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와이어트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저렇게 무서운 놈들은 처음 보았다. 12만의 대군이 이제는 1만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발키리 영지에 오기 전까지 가졌던 자신감은 짓밟힌 지 오래였다.

 ‘도망치고 싶다!’

  도망치고 싶어도 갈 데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버루거 자작과 비린스 자작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기에 눈치를 볼 뿐이었다.

 크레이지 드래곤 창기병이 사라지고 난 후 화살과 발리스타 공격도 멈췄다. 병력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코워드 공작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가르딘에 대한 분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전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부웅!

 공간이 벌려지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나자 가로막고 있던 진법이 사라졌다. 진법으로 인해 가려졌던 평야가 공개되었다. 평야를 뒤덮은 시체들이 산을 이루었다. 전장의 참혹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코워드 공작군은 시체들에게 정신 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코워드 공작군을 포위하며 다가오는 2만의 병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굉장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발키리 영지군을 이끌고 있는 가르딘이 정면에 서서 코워드 공작을 오만하게 노려보았다.

 코워드 공작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가 날 때도 일방적으로 깨졌다. 이제는 이길 가망성이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척!

 가르딘이 검을 뽑아 코워드 공작을 겨냥했다.

 "항복은 없다! 죽기 살기로 덤비다 명예롭게 죽든지! 도망치다 비참하게 죽든지 양자택일을 해라!”

 적을 향한 강력한 선전포고였다. 오러 마스터의 강렬하고 냉정한 기세가 전장을 압도했다.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적의 사기는 떨어뜨렸다.

 귀족에게 명예는 목숨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때론 목숨이 명예보다 중요할 때도 있었다. 코워드 공작은 가르딘의 선전포고에 갈팡질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은 두려움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감에 빠져 있는 것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 모두 코워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코워드 공작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난 여기서 죽을 수 없다!’

 가문의 염원이자 자신의 숙원이었던 공작이 되었다. 공작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목숨을 내놓아야 하다니 절대로 그럴 수 없다. 항복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멤돌았다. 그러나 가르딘의 기세는 항복을 받아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는 대카이로만 제국의 코워드 공작이다! 나는 절대 네 놈에게 항복하지 않는다! 어디 덤벼 보아라!”

 그답지 않은 강경한 대답이었다.

 귀족들은 코워드 공작의 강경하고 대범한 대응에 놀라고 있었다.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장 먼저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할 줄 알았다. 그것이 이제까지 코워드 공작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코워드 공작의 강력한 표현에 병사들도 무기를 잡아야 했다. 수장이 싸우겠다고 한 이상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코 믿음이 생겨서 결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기에 무기를 들은 것이다. 도망쳐봤자 적군에게 죽을 것이고, 이후의 일은 책임질 수 없다.

 피식!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가르딘은 코워드 공작의 같잖은 항변에 숨은 뜻을 파악하고 있었다.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이미 예상했다. 가르딘의 말을 들은 이상 목숨을 구걸해도 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과연, 쥐새끼다운 방식이군.’

 가르딘은 검을 들어 적을 가리켰다.

 “쏴라.”

 대기하고 있던 궁수대가 정면으로 나섰다. 가르딘의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가타부타 이견 없이 활을 발사했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르딘은 활을 사용하였다. 1천의 궁수대가 화살을 연속으로 발사하였다. 궁수대 모두 2연사가 가능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물론 정확성은 일발보다는 떨어졌다. 그러나 대규모 전쟁에서 일 발 정확성은 효용성이 떨어진다. 많은 화살을 얼마나 빠르게 날릴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강력하게 많이 날리다보면 맞게 되어 있었다.

 “안젤리카는 방해마법을 사용해.”

 안젤리카는 마법사들에게 6서클의 간섭마법을 사용하였다.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에 간섭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6서클 마법사라면 가능한 방법이었다. 더군다나 코워드 공작의 마법사들은 어제 밤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마법을 사용하였다. 마력과 정신력이 떨어진 상태이다 보니 간섭마법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파파파팟!

 푸욱! 푸욱!

 날아오는 화살에 막은 병사들이 벌집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동료를 구하려고 방패를 놓는 순간 화살받이가 될 판이었다.

 다급해진 코워드 공작이 기사들과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방패로 막아!”

 안전하게 병사들 뒤로 숨어서 떠드는 코워드 공작의 말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만 저하시킬 뿐이다.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병사들을 보자 코워드 공작은 이를 악물며 가르딘에게 소리쳤다. 이대로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비겁한 놈! 정면대결을 하지 않다니, 네놈은 기사도 아니다!”

 기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다. 가르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코워드 공작은 가르딘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었다. 권력을 지향하고 자기 목숨만 위하는 놈들의 특징을 고스란히 따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말을 해도 알아차리기 쉬웠다.

  가르딘이 비웃는 듯한 탄성을 토해내었다.

 “호오!”

 “그만.”

 코워드 공작의 말을 들은 즉시 가르딘은 화살 공격을 멈추라고 지시했다. 궁수대가 재빨리 병력 뒤로 물러섰다. 궁수대의 역할은 병사들의 지원사격과 기습공격이었다. 역할이 끝났으면 뒤로 빠지는 것이 현명했다. 어차피 가르딘도 화살 공격을 여기까지만 할 생각이었다.

 “정면대결을 원한다면 해주지.”

 가르딘이 2만의 병력을 움직였다. 병사들도 움직이지 못 해 근질거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명령만 떨어지면 적군을 단숨에 전멸시킬 기세였다. 기세를 탄 병사들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기세는 군집된 기운, 그 기운이 하늘로 승천하는 용을 표현해 내었다.

 “나를 따르라!”

 이제까지 검 한 번 사용하지 않던 가르딘이 드디어 검을 뽑아들어 진격했다. 그 뒤를 발키리기사단과 병사들이 따랐다. 전투는 필사적이고, 강렬하게 해야 한다. 가르딘은 아군의 힘을 이끌어낼 줄 아는 기사였다.

 부웅!

 오러 마스터의 전유물이자 최강의 무기인 오러 블레이드가 가르딘의 검에서 찬연하게 솟아올랐다. 순백의 기운은 아름다운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강력한 기운이 적군에게 쏘아졌다. 살갗을 에이는 듯한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을 병사들은 느껴야 했다. 순간 몸이 경직되어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되었다.

 깜짝!

 코워드 공작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설마 덤비라고 했더니 진짜 덤빌 줄은 몰랐다. 그저 한번 객기로 말해 본 것인데 가르딘이 진짜로 총공격을 하고 있었다. 정말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코워드 공작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 되었다.

 ‘빌... 어먹을!’

 속에서 연신 욕이 터져 나왔다. 병시들은 가르딘의 오러 블레이드를 보자 두려운 듯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승산 없는 전투였다. 일방적으로 당할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코워드 공작의 시선이 와이어트에게 향했다. 그를 비롯한 몇몇 귀족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말없는 대화였지만 무슨 뜻인지 확실히 전달되었다.

 눈빛을 교환한 귀족들과 기사들이 병사들에게 달려 나갈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검을 들이대고 협박하듯이 지시하자 병사들은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달려 나가는 병사들이 과연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까!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사아아악!

 푸아아악!

 오러 블레이드가 적군을 향해 가차 없이 휘둘러졌다. 무기를 들고 반항해 봐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검과 방패가 일 검에 잘려 나가면서 몸뚱이마저 절단이 나 버렸다. 일 검에 수 명의 병사들이 죽음을 당했다. 코워드 공작군은 왜 오러 마스터가 무서운 존재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일반 병사들은 오러 마스터의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을 버는 존재 그 이상이 아니었다.

 삽시간에 30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도륙한 가르딘이 거침없이 내달렸다. 수장이 보여준 발군의 능력은 병사들의 실력마저 상승시킨다. 기세를 탄 발키리 영지군은 적군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발키리 영지를 침입한 죄를 묻는 듯했다.

 가르딘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도 적군의 기사들을 단숨에 쓰러뜨렸다. 기사들과 병사들의 질적인 차이가 현격했다.

 코워드 공작군이 전멸당하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남아 있는 병사들은 두려움과 절망에 항복하고 말았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가르딘은 30분 만에 모든 전투를 끝내 버렸다. 죽은 병사들은 어쩔 수 없지만 항복한 병사들에게는 살 기회를 주었다.

 전투는 이겼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자들은 도망치고 말았다. 코워드 공작과 귀족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즉시 몸을 뒤로 뺐다. 병사들은 시간벌이 방패막이로 던져 버린 것이다. 살기 위에 온갖 추잡한 짓을 서슴없이 다하고 있었다. 자기 목숨만 중요하고 병사들의 목숨은 쓰레기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르딘의 시야에 멀어지는 코워드 공작이 보였다.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들의 뒤로 말없이 주시했다.

 ‘하는 짓이 정말 쥐새끼 같군.’

 도망가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곳 지리는 가르딘이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

 “기사단은 나를 따르고, 병사들은 이곳을 정리하고 대기 하도록.”

 “와아아아아!”

 “영주님 만세! 발키리 영지 만세!”

 병사들은 승리를 자축했다. 압도적인 승리에 대한 희열을 맛보았다.

 타다다다닥!

 도망치기 위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채찍을 휘둘렸다.

 코워드 공작과 버루거 자작, 비린스 자작, 와이어트를 비롯한 일부 귀족들 그리고 기사들까지 총 100명이 남았다. 12만을 이끌고 발키리 영지에 와서 남은 것이 고작 100명이다. 12만을 고스란히 발키리 영지에 갖다 바친 꼴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이 패배였다. 사실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패배가 아닐 수 없다. 상대 병력이 더 많았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럴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코워드 공작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본 가르딘은 이처럼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핵토르 공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도 운이 좋았던 것이고, 제국의 신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전투였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막상 부딪친 가르딘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실실 쪼개며 웃고 다닐 때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전투에서 보여준 가르딘의 전략은 치사하지만 확실했다. 또한 무척이나 잔인하고 철저하게 상대를 말살시켰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두 번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는 인물이 바로 가르딘이었다.

 ‘제국의 공작인... 내가 지다니 !’

 전투에서의 패배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도망치는 그를 따라 가르딘이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핵토르 공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직 공국에는 병력이 조금 남아 있었다. 부족하지만 가르딘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살아야 한다!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와이어트와 귀족들도 코워드 공작의 생각과 같았다. 우선은 살고 봐야 했다. 여기서 죽어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무능해도 생존력에 대한 필사적 의지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했다.

 한참을 내달렸다.

 뒤에서 맹추격해 오던 가르딘이 이제는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워드 공작과 귀족들은 멈추지 않았다. 가르딘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두려웠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뼈에 사무치도록 새겨졌다. 아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될 것이다.

 발키리 영지를 공격할 때 돌아갔던 협곡이 오늘따라 더 멀어 보였다. 핵토르 공국까지 도망가야 할 생각을 하니 아찔하기까지 했다.

 버루거 자작과 비린스 자작은 도망치는 내내 코워드 공작을 원망했다.

 ‘젠장! 줄을 잘못 섰어!’

 ‘썩은 줄을 잡고 있는 게 아니었는데!’

 공작이 됐을 때는 이제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출세 길이 보장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목숨도 보존하기 힘들었다. 잘한 것 없기는 버루거 자작과 비린스 자작도 다를 것 없었다. 무능한 것들끼리 모이게 되어 있었다. 어느 누가 능력도 없는 족속들을 끝까지 데리고 있겠는가!

 코워드 공작과 귀족들은 전속력으로 내달리다 멈추어야 했다. 말들이 더 이상 달리지 못하는 지경에 처한 것이다. 말도 쉬어가면서 달려 주어야 한다. 무작정 달리기만 해서는 쉽게 지치고 멀리 가지도 못한다. 코워드 공작도 알고 있었지만 우선은 살고 봐야 한다는 생각에 앞뒤를 재지 못했던 것이다.

 마법사들이라도 있다면 회복마법을 걸 수도 있겠지만 지쳐 있는 마법사들을 버리고서 도망쳤다. 5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흔치 않은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은 코워드 공작이 그만큼 다급했다는 뜻이다.

 “이제 쫓아오지 않는 건가?”

 “아버지, 걸어서라도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와이어트는 지금이라도 당장 가르딘이 추격해 올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가르딘의 검에 반으로 쪼개지던 병사들의 모습이 너무도 무서웠다. 아들의 못난 모습에 코워드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란 떨지 마라!”

 “그렇지만 아버지! 빨리 도망치지...!”

 ‘닥쳐탓!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지 말라 했거늘!”

 도망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코워드 공작은 아들의 말을 듣자 화가 났다. 당연한 이치였다.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었다. 눈치 없는 와이어트다운 행동이었다. 코워드 공작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코워드 공작도 귀족들과 기사들의 눈빛을 읽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을 나무라봐야 자기 얼굴에 침 뱉는 일이었다. 웬만하면 참아 넘기려 했건만 와이어트가 화를 촉진시켰다.

 “이제 어찌할 생각입니까?”

 “능선을 타고 넘어간다. 놈들도 이곳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잘하면 무사히 핵토르 공국으로 벗어날 수 있다.”

 귀족들의 물음에 코워드 공작은 능선을 넘겠다고 했다. 정해진 길로만 가서는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제법 머리를 굴리는 코워드 공작이었다. 생존에 대한 전략만큼은 알아줘야 했다. 전쟁 때 이와 같이 머리를 굴렸다면 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대한 낮은 능선으로 말을 데리고 넘어야 했다. 말은 꼭 가져가야 한다. 이후에 말을 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막 능선을 넘으려고 할 때였다.

 그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 1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코워드 공작이 가장 많이 놀랐다. 뒤에 있어야 할 존재가 버젓이 앞에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여기서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었다. 굼뜨기는!”

 가르딘이 어느새 코워드 공작 앞에 나타나 있었다. 코워드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어찌된 일인지 고민해 보았다. 거리가 제법 벌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미 가르딘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르딘이 여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안젤리카의 공간 이동 마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키리 영지 주변으로 공간 좌표를 제법 많이 연구해 놓은 안젤리카였다. 또한 가르딘은 만일을 대비해 곳곳에 좌표를 지정해 놓았다. 적이 침입한 후 도주할 수 있는 장소를 연구한 것이다. 코워드 공작이 도주할 때부터 이곳으로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마법을... 사용한 것이냐?”

 ‘오오!’

 “제법 눈치가 있네.”

 빈정거리는 듯한 가르딘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코워드 공작은 화를 내지 못했다.

 코워드 공작은 무언가를 찾는 듯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혼자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눈치 보는 것이 가르딘의 시야에 훤히 보였다. 속으로 생각해도 부족한 판국에 얼굴 표정에 다 드러나고 있었다.

 “왜! 한판 뜨려고.”

 움찔!

 속생각을 들키자 놀라는 코워드 공작이었다. 또한 히죽거리며 비아냥거리는 가르딘이 몹시도 얄미웠다. 사람의 신경을 계속 긁고 있었다.

 “쳐랏!”

 코워드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 전원이 가르딘을 향해 검을 들이댔다. 숫자가 제법 되니 자신감이 솟는 모양이다. 그러나 가르딘이 오러 마스터라는 것을 알기에 막무가내로 달려들지는 못했다. 먼저 달려들어 봤자 빨리 죽을 뿐이다. 서서히 포진을 하며 가르딘을 포위해 들어갔다.

 코워드 공작은 망설이는 기사들을 보자 신경질이 난 듯이 소리쳤다.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쳐라!”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다 발키리기사단이 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모두 개죽음이었다. 빨리 죽이고 도망쳐야 했다.

 “지는 가만히 있으면서 왜 남한테 명령이야! 그러고도 네가 사내냐!”

 가르딘의 비아냥은 계속되었다.

 기사들은 가르딘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이다 흠칫 놀랐다.

 부글! 부글!

 공작이 되고 난 후 이처럼 수치스러운 경우는 처음 겪는다. 아니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모욕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라 올랐다. 표정만 보면 가르딘을 육체분시할 것처럼 느껴진다.

 “어서! 저 개 같은 놈을 죽여!”

 히압!

 어차피 정면 대결을 벌여도 1명을 상대로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10명 정도가 합공하면 많이 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시간을 끌며 차륜전을 하기에 합공이 위험한 것이지만 그것도 상대가 어중간한 실력일 때나 가능한 전술이다. 가르딘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그랜드 마스터였다. 기사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는 전술이었다.

 푸육! 푸욱!

 털썩! 털썩!

 가르딘이 언제 움직였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상식적으로 합공을 하는 적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미련한 것으로 판단한다. 차라리 뒤로 물러서며 적들의 공격을 유인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가르딘은 안으로 파고들었다. 기사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 사이로 보이는 미세한 틈을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그 틈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더군다나 10명이 휘두르는 검이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가르딘은 기사들의 궤적을 파고들어 간결하게 검을 찔러 넣었다. 가볍게 적의 사각에서 숨통을 끊어 놓았다. 순식간에 3명의 기사가 혼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기사는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했다. 뜨끔했을 때 의식이 사라 졌을 뿐이다.

 남겨진 기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단한 수법도 아니었다. 그저 빠르게 움직였다 나타났을 때 기사들이 쓰러진 것으로 보였다.

 가르딘은 틈을 주지 않았다. 기사들이 당황한 그 찰나의 틈을 파고들었다. 전후좌우로 검을 휘둘렸다.

 “사아악! 커억!”

 철퍼덕!

 검이 지나간 자리마다 기사들이 어김없이 존재했다. 베어진 살이 미처 벌어지기도 전에 다음 기사의 목이 잘려 나갔다. 기사들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느낌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 순간에 목이 잘리고, 가슴이 베어졌다.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실력 차이였다. 기사들은 지금 시간의 부조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가르딘과 기사들 간의 시간 차이가 존재했다. 가르딘의 시간이 기사들보다 훨씬 빨랐다. 너무 빠르다 보니 기사들의 시간이 느리게 보였던 것이다.

 삽시간에 20명의 기사들이 가르딘의 검에 주검으로 변했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말도 안 되는 압도적인 실력에 기사들은 더 이상 검을 들이대지 못했다. 검을 맞대고 치열하게 대결했다면 계속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본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씨익!

 가르딘의 미소에 기사들은 웃지 못했다.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오러 마스터가 왜 무서운지 절실히 깨달았다. 그들은 일반 기사들이 어찌해 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이, 쥐새끼 ! 어디 남자답게 한 번 붙어볼까.”

 히죽!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르딘은 계속 코워드 공작을 놀렸다. 코워드 공작은 분노할 기력도 없어 보였다. 조금 전에 본 가르딘의 괴물 같은 실력은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놈들! 뭐 하는 것이냐! 어서 쳐라!”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사들을 다그치는 것뿐이다. 그러나 기사들도 사람이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계속 싸울 수 있단 말인가! 무의미한 죽음은 결단코 원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좀 비켜줄래.”

 가르딘이 나아가자 좌우로 공간이 벌려졌다. 기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옆으로 밀려나갔다. 가르딘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기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무형의 기운이 기사들의 정신을 압박하는 것도 모자라서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유유히 기시들 사이로 가르딘은 걸어갔다. 코워드 공작 이하 귀족들은 도망도 치지 못했다. 왜냐! 그들 뒤로 발키리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1백에 달하는 기사단이 포위하고 있었다.

  덜! 덜! 덜!

 죽는다는 공포로 인해 귀족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살아날 방책을 궁리하였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시궁창에 빠진다고 해도 살아남기만 한다면 거리낄 것이 없었다.

 가르딘은 여유롭게 걸어 코워드 공작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코워드 공작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선택을 잘못했을까?”

 “그... 건!,’

 “왜 이제 와서 후회가 되시나.”

 ‘항... 복하겠다!”

 코워드 공작은 죽기 싫었다. 굴욕적이더라도 살아남으면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살기 위해서 코워드 공작은 항복과 동시에 가르딘에게 화친을 제시했다. 어떤 것이든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대의 편에 서면 러쉬 황자님에게 훨씬 유리할 것이네! 그러니 나를 살려 주게!”

 “12만이나 되는 대군을 몰살시킨 네놈이 우리 편에 서면 그게 유리한 거냐.”

 가르딘은 끝까지 코워드 공작은 존대하지 않았다. 코워드 공작은 자신을 막 대하는 가르딘에게 대우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공작이네!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게.”

 “까고 있네. 진 주제에 합당한 대우라고, 너를 위해 희생한 병사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한번이나 해줬나! 자기 목숨 귀한 줄 알면 남의 목숨도 귀한 줄 알아야지. 어디서 같잖은 말로 대우타령이야!”

 가르딘은 화를 내고 있었다. 기세에 눌린 코워드 공작은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했다. 입을 열기만 하면 목이 잘려 나갈 것 같았다. 두려움과 모멸감에 얼굴을 들기 창피했다.

 “뭐! 좋아! 한 번은 기회를 주지.”

 “정... 말인가!”

 “너희들 중 누구라도 내 검을 한 번이라도 받으면 살려 주지.”

 “그... 런 말도 안 되는!”

 당연한 소리였다.

 검을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는 귀족들이 오러 마스터의 검을 어떻게 받는단 말인가! 너무 부당한 처사였다. 코워드 공작 이하 귀족들이 떨면서 반박했다. 이것은 죽으라는 협박보다 더 무서웠다.

 “이... 건 너무 부당합... 니다.”

 “싫은가 보네, 그럼 그냥 뒈지든가.”

 가르딘은 아쉬운 것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냥 죽일 수 있는데 기회를 주는 것도 감지덕지하다는 것 같았다.

  “시간은 점점 가는데, 난 한가한 사람 아냐! 10을 셀 테니 그때까지 결정하라고. 시간 되면 바로 목이 댕강 잘리는 거지.”

 획! 획!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카운트다운을 하는 가르딘이었다. 귀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과 공포감에 의해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급해진 버루거 자작이 결국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해버렸다. 지금 남의 눈치 볼 때가 아니었다.

 “와이어트 공자! 전에 분명 가르딘 후작님을 만나면 검을 한 번 맞대고 싶다 하지 않았소! 그 기회가 지금 찾아왔으니 한번 나가 보시구려!”

 화들짝!

 깜짝 놀란 와이어트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코워드 공작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분명 있었다. 가르딘을 보게 되면 단숨에 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해본 말이다. 결단코 가르딘과 대결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12만 대군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다. 지금은 혼자였다. 비교가 불가능한 상황이 아닌가!

 “너 제법 용기가 있구나. 그럼 한 번 받아봐라!”

 가르딘이 나서라고 하자 와이어트가 뒤로 물러서며 사정했다.

 “아닙니다. 저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저 자식들이 지어낸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죽겠다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이어트였다. 무형의 기운이 온몸을 옥죄고 있었다. 와이어트는 버루거 자작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버루거 자작이 자신을 희생물로 내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고! 후... 작님!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아버지! 저 좀 살려 주세요!”

 가르딘에게 무릎 꿇고 사정하며 코워드 공작을 애처롭게 부르는 와이어트였다. 귀족 망신을 제대로 시키고 있었다. 귀족들은 와이어트를 도와주지 못했다. 오히려 고개를 돌리 며 외면하고 있었다. 이들 간의 의리는 이 정도가 다였다.

 발키리기사단은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하는 짓이 다들 똑같았다.

 마지못한 코워드 공작이 아들 때문에 사정조로 부탁했다.

 “제발 살려 주게!”

 척!

 “허억!”

 코워드 공작이 나서기가 무섭게 가르딘의 검이 뻗어나갔다. 순간 대경실색한 코워드 공작이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찍었다. 넘어진 상태에서 날이 잔뜩 선 검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빛이 번쩍이는 순간에 코워드 공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응?’

 서늘한 기운이 목 앞에서 느껴졌다. 코워드 공작은 간신히 눈을 떠서 상황을 보았다. 가르딘의 검이 코워드 공작의 목에서 멈추어져 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밀려오는 공포감으로 인해 하의가 축축하게 젖어왔다.

 “쌌냐.”

 공작이 오줌을 싸다니 무척 이나 쪽팔린 일이었다. 그러나 코워드 공작은 오줌 싼 것보다 살았다는 것에 위안을 느끼고 있었다.

 가르딘은 한심한 코워드 공작을 보며 귀찮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가.”

 "진... 정인가!”

 “가라고. 싫어? 그럼 여기서 죽든가.”

 “아... 니네! 고맙네! 정말 고맙네!”

 코워드 공작은 가르딘의 말을 고이 믿을 수가 없었다. 다 잡아 놓고 살려준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라면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간신히 일어나서 두려운 듯 가르딘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등을 뒤로 돌릴 때 검으로 찌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코워드 공작다운 의심이 아닐 수 없었다.

 “거 되게 의심 많네. 내가 작정하고 공격하면 등을 돌렸든 말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가랄 때 가지 뭔 잡생각이 그리 많아.”

 찔끔!

 “알... 았네! 그럼 자네의 은혜! 절대 잊지 않겠네.”

 코워드 공작이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와 허리를 조아렸다. 공작이 되어 가지고 무게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면서도 가르딘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갑자기 돌변할까 봐 두려워했다.

 “너희들도 가라.”

 가르딘은 기사들과 귀족들에게도 가라고 했다. 귀족들과 기사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쫓아와서 왜 보내주는지 이해를 못한 것이다.

 “저대로 보내도 될까?”

 “괜찮아.”

 “그래도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가. 그럼 내가 물어보지. 너희들 다음에도 발키리 영지를 공격할 거냐!”

 “그럴 리 없네! 나는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절대로 가르딘 후작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가르딘의 물음에 코워드 공작과 귀족들은 연신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상식이 있다면 죽을 고비에서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일단 살기 위해 어떤 말도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오버하면서 절대 아니라고 항변하는 코워드 공작과 귀족들이었다.

 “아니라는데.”

 “그래도 의심이 가는데!”

  필리언이 계속 아쉽다는 듯이 가르딘을 건드리자 코워드 공작과 귀족들은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필리언이 너무 얄미웠다. 왜 살려준다는 사람을 자꾸 건드리는지 짜증이 치밀기도 했다.

 “믿자. 사람이 사람을 믿어야지.”

 “하도 세상에 믿을 놈이 없어서 그렇지. 그래도 한 번 믿어보지, 뭐.”

 가르딘은 미련 없이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발키리기사단과 함께 영지로 발길을 돌렸다. 가르딘이 사라지고 난 후 한 참이 지날 때까지 코워드 공작은 넋을 잃고 있었다. 오늘 벌어진 일은 평생 기억될 것이다. 아니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일생을 살면서 오늘처럼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빠득!

 이를 악물었다.

 “내 오늘 일을 절대 잊지 않겠다! 반드시 네놈에게 복수하고 말겠다!”

 똥 누기 전 다르고, 똥 싸고 난 후 다르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가르딘이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안색을 바꾸고 복수를 꿈꾸는 코워드 공작이었다. 이대로 물러서게 되면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무너져 버린다. 핵토르 공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병력을 다시 모아야 했다. 복수를 다짐하는 코워드 공작에 비해 귀족들과 기사들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또한 코워드 공작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행여나 복수하시겠다!’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휙!

 움찔!

 코워드 공작이 귀족들과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귀족들과 기사들은 순간 움찔거렸다.

 “오늘 일을 발설하는 놈이 있다면 당장 그놈부터 본보기로 처단할 테니 알아서 입단속 잘하는 게 좋을 거다!”

 “물론입니다! 저희들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구걸하다시피 항복해서 얻은 목숨이었다. 오늘 일이 발설 되면 그들의 명예는 모두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버루거 자작, 그대의 말은 기억해 두지.”

 “저는 그저 공작님과 귀족들을 위해 한 말입니다!”

 “시끄럽다!”

 버루거 자작은 괜한 말을 해서 표적이 되었다는 것에 억울할 따름이었다. 비린스 자작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절대 진리를 간과한 탓이다.

 ‘젠장! 어차피 살려줄 거면 미리 말해야 할 것 아니야!’

 가르딘이 늦게 말을 하는 바람에 꼴이 우습게 되어 버렸다. 이제 자신은 출세 길이 완전히 막혀 버렸다. 또한 코워드 공작의 후계자인 와이어트에게도 찍혀 버렸다. 앞날이 막막하게 변해버린 버루거 자작이었다.

 가르딘은 발키리기사단과 아군 진영으로 돌아왔다. 병사들은 부산하게 움직여 시체들을 치우며 평야를 정리하고 있었다. 2만의 병력이 투입되니 평야는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곳곳에 떨어진 핏물로 인해 참혹한 전장을 보여주었지만 비가 오면 씻겨 내려갈 것이다. 자연은 언제든지 사람이 만든 것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르딘은 조용히 평야를 바라보았다. 그 옆으로 필리언, 갈라, 유타가 나란히 섰다.

 “그놈을 진짜 그냥 보내도 될까? 후환거리는 남겨 두지 않는 게 좋잖아.”

 “그래도 이게 최선이야.”

 “네 말도 일리는 있지만 그래도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야.”

 사실 코워드 공작을 놔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코워드 공작이 당분간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코워드 공작이 끌고 온 12만의 병력은 나름 정규군이다. 다시 그만한 전력을 모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무리하게 병력을 모으다 보면 허술해질 수밖에 없다. 허술한 전력을 가지고 발키리 영지를 다시 도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르딘이 코워드 공작을 놔준 진정한 이유는 발키리 영지의 보전을 위해서다. 내전이 벌어진 이상 가르딘은 전장으로 다시 나가야 한다. 또한 발키리 영지의 주요 병력도 출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황궁에 알려진 발키리 영지의 군사력은 총 2만이다. 그중에서 최소한의 병력을 놔두고 모두 데 리고 가야 한다. 러쉬 황자와 다마트 황자는 이번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다. 또한 전쟁 후 논공행상에서 전시에 세운 공적을 인정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많은 병력을 차출할 수밖에 없다. 명확한 이유 없이 병력을 영지에 남겨두면 다른 귀족들의 지탄을 받을 수 있다.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골치가 아프다. 가르딘은 후작의 반열에 올랐다. 후작은 백작이나 자작, 남작과는 다르다. 모든 일의 중심이 될 만한 작위다. 귀족들은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가르딘을 표적으로 삼을 수도 있다.

 후일 있을 파벌 싸움에도 약점을 잡힐 수도 있는 일이 된다. 그래서 가르딘은 코워드 공작을 살려 두었다. 코워드 공작이 살아 있음으로써 발키리 영지에 병력을 남겨 둘 수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다. 바로 옆에 적이 있는데 영지의 병력을 모두 차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전에서 나와 필리언 발키리기사단이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영지는 2만의 병력과 너희 둘이 영지를 맞아 주어야 해.”

 “그들이 이해해 줄까.”

 “우리 전력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너희들도 알잖아. 코워드 공작이 살아 있는 상황이니 러쉬 황자와 귀족들도 나를 탓하지는 않을 거야.”

 애초에 코워드 공작을 아군 진영에서 잡을 수도 있었다. 좌우에서 포위할 시간도 충분히 있는 상황에서 고의로 코워드 공작이 도망갈 시간을 주었다. 이유는 병사들에게 코워드 공작을 일부러 놓아주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많은 이가 직접 목격하게 되면 이상함을 느낄 수 있다. 일부러 놓아주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추격전에 기사단만을 대동하였다. 사람이 적을수록 비밀은 새어 나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르딘 혼자만 추격하면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세운 작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 작전은 가르딘이 의견을 내고, 파멜라가 작전의 세밀함을 연구하여 마련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르딘의 전력이다.

 가르딘은 오러 마스터로 알려졌다. 또한 가르딘이 데려가는 발키리기사단의 수준 역시 결코 다른 기사단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월등함을 가진다. 그래서 100명 중에 50명을 데려가는 것이다. 병사들의 수준도 강병에 해당하는 전력이다. 이만한 전력이라면 결코 무시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코워드 공작이라는 적이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지의 절반 이상을 출병시켰다는 명분을 가질 수 있다.

 “결정적으로 내가 공을 탐할 위인은 아니잖아.”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전공을 세우기도 귀찮다. 후작에서 더 올라가면 진짜 골치 아플 거다.”

 가르딘의 입장에서 후작이 된 것도 별로 탐탁지 않았다. 원하던 결과는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상급귀족인 후작이 되었다. 정쟁의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귀찮음을 더 감수해야 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진리다. 다른 귀족들이 보면 이상한 놈으로 취급받을 수 있을 수도 있겠으나 가르딘으로서는 별로 환영받을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특히 코워드 공작같이 전공을 세우고 싶어서 안달하는 귀족들에게 가르딘은 재앙덩어리였다. 괜히 같이 엮이면 전공은커녕 가지고 있던 지위마저 위태해질 수 있었다.

 “웬만하면 시간을 조금 더 끄는 게 좋겠지.”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다.”

 “곧 1황자에게서 호출이 올 거야. 출병하기 전까지 영지 방어 상태를 완벽하게 구축해 놓아야 해.”

 아직까지 코워드 공작과의 전투가 끝난 사실은 공개되지 않았다. 1황자도 당분간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때까지 남겨진 시간을 활용하여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가르딘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가족의 안전이었다. 사실 코워드 공작을 살려 주어 영지에 병력을 주둔시키는 이유는 가르딘이 없을 때 가족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들은 가르딘을 흔들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어쎄신을 동원하여 가족을 위협한다면 가르딘은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워진다. 최소한 오러 마스터 2명에 2만의 영지군을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또한 발키리기사단을 삼중으로 저택에 배치하여 저택 침입을 사전에 방지할 생각이다.

 “영지의 주요 길목에 발리스타 배치를 서둘러. 각각의 지역에 2대 정도씩 배치를 하고, 정찰병을 파견해서 수상한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해야 할 거야.”

 “걱정하지 마라. 너 또 오버하는 것 같다. 우리가 네 심정 다 아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흥!’

 “너희들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라이나와 브리안을 놔두고 전쟁에 나가야 하는 가장의 심정을 알기나 해!”

 “미친놈! 너만 가정 있고, 자식 있냐! 우리도 있어! 이놈은 지만 가족 위하는 줄 알아!”

 “닥쳐! 솔직히 나는 라이나와 브리안밖에 보이지 않아!”

 라이나와 브리안을 생각할수록 다 때려치우고 영지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가르딘이다. 내전이야 누가 이기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가기 싫은 마음이 점점 자리 잡는다.

  “가기 싫은데! 정말 가기 싫다! 안 가면 안 될까!”

 “너 진짜 미쳤구나!”

 “미친놈에게는 매가 약이지!”

 “뭐... 하는 거야!”

 가르딘이 뒷걸음치자 동기들이 포위하면서 방위를 차단했다. 갈라와 유타가 두 팔을 잡고, 필리언이 다리를 잡아 막사 안으로 끌어들였다. 영주의 흉한 꼴을 기사들과 병사들이 보게 할 수는 없었다.

 “안... 놔! 나 안 간다니까! 아이씨!”

 “이게 완전히 미치기 전에 밟아!”

 막사 안에 들여다 논 가르딘을 동기들이 마구잡이로 밟았다. 정신 차릴 때까지 냉정하게 밟아 놓은 동기들이다. 사심이 물씬 들어간 발차기라 무지하게 아팠다.

 한참을 바닥을 뒹굴다가 일어선 가르딘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간다. 이놈들아! 치사하긴.”

 “너 하나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잖아.”

 “간다니까! 3황자 이 개 같은 놈!”

 화가 나니까 전쟁을 일으킨 다마트 황자를 향해 신경질을 부리는 가르딘이었다. 황족능멸죄에 해당하는 짓을 하면서도 거리낌 없었다.

 가르딘 후작과 코워드 공작의 전쟁이 끝난 후 5일쯤 지난 후에 전투 결과가 1황자와 3황자에게 전달이 되었다. 1황자는 전투에서 이김으로써 기세를 탈 수 있었고, 3황자는 12만의 병력이 패함으로써 사기가 저하되었다.

 전쟁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부지불식간에 발생할 수 있다. 패할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것이 전쟁이다.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될 수도 있으나 코워드 공작이 이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전쟁이었다. 그런데 가르딘의 전략에 휘말려 씨몰살을 당했다. 결국 코워드 공작과 몇몇 귀족들만 살아서 도주했다고 알려졌다. 가르딘의 위상은 높아져 갔고, 코워드 공작의 권위는 떨어졌다.

 다마트 황자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타이가라 공작을 서늘한 눈빛으로 응시 했다.

 “정말 할 말이 없어지는군요.”

 “면목이 없습나다.”

 ‘'타이가라 공작이 잘못한 것은 아니니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12만의 병력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해야 2만의 병력에 전멸당하는지가 몹시도 궁금하긴 하군요.”

 발키리 영지군이 강병이라고 해도 병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전략전술도 어느 정도 수가 맞아야 펼칠 수가 있다. 그런데도 모든 병력을 잃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다마트 황자도 전술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해야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가르딘 후작의 역량이 그 정도였던가요?”

  “그건 아닙니다. 정보에 의하면 별로 대단한 전략을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전술을 사용한 건가요?”

 타이가라 공작은 수집해 온 정보와 코워드 공작이 전해온 내용을 다마트 황자에게 전했다. 내용을 들으면서 다마트 황자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훗!’

 너무 어이없으면 웃음이 나올 수도 있었다. 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강해질수록 살기가 짙어졌다.

 “고작 그따위 너저분한 전략에 휘말리는 위인이 있다니 기가 막혀서 어이가 없군요.”

 “그저 견제용으로 사용하려던 자였습니다. 설마 그 정도로 역량이 떨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타이가라 공작은 할 말이 없었다. 명색이 제국의 공작이었다. 설마 그런 황당한 전략에 휘말려 맥없이 패할 줄은 타이가라 공작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소식을 전해 받았을 때 둔중한 철퇴로 한 방 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가르딘에 대한 견제는커녕 경각심과 명예만 높여준 꼴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인폴트 성을 중심으로 적의 공세를 막고 공략해야 하는 시점에서 아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가르딘 후작을 다시 공략할 수는 있는 건가요?”

 “지금 당장은 무리입니다. 워낙 피해가 커서 다시 병력을 징집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참 쓸데없는 인간이군요.”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가지기에는 형편없고, 버릴 수도 없는 패가 된 셈이군요.”

 이유가 어찌되었건 코워드 공작이 발키리 영지를 견제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가르딘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럼 알아서 하도록 놔두세요.”

 “알겠습니다.”

 “그보다는 견고한 펠칸 성과 마린 성을 어떤 방식으로 점령하는가겠지요. 상황이 쉽지 않은 것 같더군요.”

 “정면전투에서는 저희 군이 밀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제 부대를 더 투입시켜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이 이끄는 부대는 막강한 위력을 자랑했다. 성을 공략하는 것도 어렵지만 평야에서 벌어진 산발적인 전투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의 주요거점을 확보하기 위해서 치열한 심리전과 전투가 벌어졌다. 지리적으로 유리한 성과 영지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이유를 불문하고 황위계승자가 사라지면 제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요.”

 ‘아!’

  “그럼 지금 당장 러쉬 황자에게 암살자를 보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암살에 대비하고 있을 겁니다. 우선은 적들을 분산시킬 필요성이 있어요.”

 다마트 황자는 전쟁을 이기기 위해 기다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섣불리 암살자를 보냈다가 실패하는 날에는 기회와 명분마저 모두 사라질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사전에 필요한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시키도록 타이가라 공작에게 명했다.

 "황자님이 명하신 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만일 이번에도 실패하면 더 이상 제 인내심이 발휘되지 않을 것 같거든요.”

 검붉은 기운이 순간 형성되었다가 사라졌다.

 잠시지만 타이가라 공작은 그 기운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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