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세력 분리(황궁쟁탈전)@@]
황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세력 싸움이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발리스타 공작이 제시한 의혹이 시간이 지날수록 쟁점으로 떠올랐으며, 그에 대한 서로의 반감과 분쟁은 암중으로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어느 것도 사실이라는확증이 없기에 더 혼란스러운 황궁의 분위가였다.
혼란이 가중되자 황도는 물론 제국마저 혼란스럽게 되어 갔다. 주변 왕국들이 아직은 잠잠히 있지만 은근히 제국의 분열을 기대하고 있었다. 제국이 힘을 잃는다면 왕국들이 다 시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특히 제국 전에서 패배한 코카 왕국은 예전의 영광을 찾기 위해서 아직도 절치부심 중이다.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제국이 흔들리 면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국의 황궁이 계속 혼란스러우면 자중지란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어느 한쪽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압도적인 힘의 우위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팽팽 할수록 내전의 파급력은 커질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양쪽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만큼, 중심을 지켜야 하는 황궁의 책임자인 바이멘 후작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각 진영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병력의 움직임이 포착됐다고.”
“그렇습니다. 북방의 카론 마이어 공작이 병력을 이끌고 황도로 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에 따라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의 병력도 서서히 황도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 는 상황입니다.”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바이멘 후작은 병력의 움직임이 직접적인 공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카론 마이어 공작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황도와 북방의 거리가 너무 먼 상태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움직였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이유도 없이 병력을 움직이는 행위는 당위성이 부족했다. 황제가 살아 있다면 반역의 죄를 물을 수 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현재 황실의 힘은 부족했다. 각 황자들의 힘이 너무 커져 있는 상태다. 제국의 실질적인 힘이 1황자와 3황자에 있는 현실에서 제재를 가하는 것은 힘들었다. 만일 그렇 게 되면 중론이 무너져 버릴 수 있었다.
“전번 발리스타 공작이 제시한 황제 폐하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확실한 증거를 잡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로 인해서 주도권을 잡기가 어렵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음!’
의혹은 있었다.
황궁의 술 주조장이 죽은 것은 의문이다.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으나 누가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느 한쪽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에는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3황자 진영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단 말이야.”
사실 1황자보다 3황자에게 의혹이 더 깊다. 타이가라 공작의 숨겨둔 부대가 갑자기 등장한 것도 문제였다. 그들의 존재는 은밀했다. 그저 부대의 이동이 감지되었을 뿐이다.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부대를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영지와 개인을 지키기 위해 사병을 유지 하는 것은 제국법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의혹은 깊지만 시간이 없구나!”
급격하게 변하는 정세를 따라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조사를 하고, 착실하게 분석해 나갈 여유가 없었다. 바이멘 후작에게도 1황자와 3황자 진영의 사람들이 찾아 왔었다. 지금 당장 중론을 펼치는 진영은 바이멘 후작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바이멘 후작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피닉스윙은 무얼 하고 있지?”
“몇몇은 조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황족을 보호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하긴, 어쩔 수 없겠지.”
황제가 죽은 이상 피닉스윙은 정쟁을 벌이는 1황자와 3황자를 제외한 황족을 지키는데 사력을 다할 것이다. 이후에 벌어지는 쟁탈전에 피해를 줄이기 위한 대처 방안이었다. 황 제 직속 비밀기사단인 피닉스윙의 2번째 존재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피닉스윙은 철저히 중립을 지킨다. 이유를 막론 하고 황제의 말을 듣도록 되어 있다. 다음 대 황제가 정해지 면 곧바로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빠른 시간 내에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다. 그 전까지 최선을 다해 정보를 모으고, 각 진영의 움직임을 철저히 파악하도록 해라.”
“예, 재상님!”
바이멘 후작은 직속 귀족들에 대한 단속을 확실히 한 후 황궁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황궁회의는 요즘 매일 열렸다. 회의는 계속되었지만 서로의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쪽의 반목만 거세지고 있을 뿐이었다.
어두운 밤.
은밀히 대화가 오고 갔다.
다마트 황자와 타이가라 공작이었다. 귀족들의 의견은 이미 모아진 상태였다. 결정만 남겨두었다.
“뜻은 맞추었나요.”
“네벨리언 공작이 시간에 맞춰서 서문을 열 것입니다.”
“잘됐군요. 우리의 움직임이 파악되지 않도록 유의하세요.”
“1황자 진영은 카론 마이어 공작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입 니다. 이쪽을 신경 쓰지는 못할 겁니다.”
카론 마이 어 공작의 북방 부대가 황도로 이동한 것도 계획의 일부였다. 시선을 분산시켜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확실하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다마트 황자가 칼을 뽑아 들었다. 시간만 허락해 준다면 차분하게 암살자를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지루한 소모전보다는 빠르게 해결을 보는 것이 나은 방법이다.
“황궁을 선점하는 게 먼저라는 것을 유념하세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황궁을 확보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그에 덤으로 1황자를 생포한다면 문제는 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니 이번 임무는 철저히 비밀을 유지 해야 한다.
“코워드 공작에게는 연락했나요?”
“그렇습니다.”
“확실하게 처리했으면 좋겠군요.”
“놈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타이가라 공작과 다마트 황자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는 한 사람뿐이다. 그에 대한 대응을 미리부터 준비한 것이다.
투두두두두두!
3일 후 한밤중에 네벨리언 공작이 담당하는 황도의 서쪽 문이 열렸다. 수문이 열리듯이 수많은 무리의 병력이 황궁을 향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족히 3만에 달하는 병력이었 다. 일거에 황궁을 점령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갑작스러운 병력이동이지만 서문 일대를 네벨리언 공작이 장악한 상태라 방비할 틈이 존재하지 않았다.
밤에 잠이 들던 황도 사람들도 갑작스러운 소리에 어리둥절했다. 문밖을 열어 보니 병력이 진군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조 용히 숨죽이며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3만의 병력은 황궁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빠르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확실히 보통 병사들은 아니었다.
착! 착! 착! 착!
이들을 지휘하는 네벨리언 공작도 병사들의 움직임에 놀라고 있었다.
'타이가라 공작에게 이만한 강병들이 있었던가!’
눈빛만 봐도 병사들의 능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투경험이 풍부한 병사들이었다. 5대 공작 중에서도 가장 힘이 떨어 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타이가라 공작이었 다. 은연중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네벨리언 공작이었다. 의혹이 들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무시했다. 우선 중요한 것은 황궁을 안전하게 복속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고 난 후 생각해 보아도 되었다.
현재 네벨리언 공작은 서쪽 문을 중심으로 병력을 주둔시켜 놓은 상태였다. 네벨리언 공작이 병력을 움직일 경우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이 움직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네벨리언 공작은 직속 기사들과 고서클 마법사만 이끌고 병사들을 지휘했다.
“황궁으로 들어간다!”
척!
황궁은 피 닉스기사단이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1황자와 3황자 간의 분쟁이 벌어지면서 피닉스기사단원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상태였다. 또한 피닉스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인 파스트론 공작과 바자바인 후작의 경우 1황자를 지지하는 상태라 황궁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3황자 진영에서 극구 반대한 것이다. 그렇지만 피닉스기사단의 대부분의 전력이 파스트론 공작의 휘하에 위치했다. 아직도 막강한 전력 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궁을 5천의 수비병만으로 기습을 대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네벨리언 공작과 타이가라 공작의 병사들은 쉽게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황궁의 거대한 문이 박살나고 그 안으로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황궁의 문은 총 20개가 존재하고, 각 위치는 모두 알 수 없다. 이유는 황궁 내부의 비밀이었고, 적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차차차차창!
“크아아악!”
병장기 소리가 들리고 난 후 황궁수비병들이 속속 쓰러져 나갔다. 타이가라 공작의 병사들은 치명적인 살수만을 시전했다. 적을 쉽고 빠르게 죽이는 데 익숙한 이들이었다. 마치 일급 어쌔신들을 보는 듯했다.
“내가 동쪽을 맡겠다. 너희들은 본궁과 별궁을 점령하라.”
“예! 공작님!”
황궁의 동쪽으로 병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황후와 공주의 신변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네벨리언 공작이 동쪽으로 병력을 이끌고 움직였다. 가로 막은 적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손을 썼다. 시간이 중요한 상황이다. 때를 놓치면 목적을 잃어버리게 된다. 오늘밤 안으로 모든 것들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서쪽과 동쪽을 한꺼번에 점령 후에 황궁을 단단히 걸어 잠가야 한다. 점령 후 시간을 벌어 카론 마이어 공작과 타이가라 공작이 오기를 기다리면 되었다.
네벨리언 공작이 기사와 병력을 이끌고 황궁의 동쪽으로 이동하려고 할 때였다.
저벅! 저벅!
신경이 쓰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두 명이 움직이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더군다나 감각을 자극하는 기운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네벨리언 공작의 신경을 자극할 수 있 을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고서는 발현할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었다. 기운은 묵직하면서도 항거할 수 없는 박력을 쏘아내었다. 더 이상의 진입은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전면을 향해 달려가던 네벨리언 공작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가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상대라면 망설이 지 않고 검을 출수하겠지만 결코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아니 네벨리언 공작의 전신에 소름이 돋게 만들 수 있는 자였다.
현 카이로만 제국의 공식적인 최강자이 며 피닉스기사단의 단장인 파스트론 공작이 피닉스기사단을 이끌고 전면을 가로막고 있었다. 물론 비공식적인 최강자 가르딘이 있기는 하 지만 드러나지 않았으니 말해도 소용없는 짓이다.
파스트론 공작을 주위로 100명의 피닉스기사단이 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단 1명도 들어갈 수 없다는 철혈의 방패진형이다. 고작 100명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그 들 모두 일당백의 정예기사들이다. 제국이 자랑하는 피닉스 기사단의 진정한 실력자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알... 고 있었나!”
바이멘 후작을 너무 얕보았군.”
황궁제일의 두뇌라고 불리는 바이멘 후작이다. 어쭙잖은 수작에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바이멘 후작은 1황자에 붙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네벨리언 공작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게 되었다. 최악의 악수가 되고 말았다.
“그렇더라도 이처럼 빨리 움직이다니!”
‘*방심은 금물. 피닉스기사단의 원칙 중에 하나를 잊었는 가.”
“그렇겠지.”
코카 제국과의 전쟁에서 파스트론 공작의 작전수행 능력은 검증되고도 남았다. 그가 보여준 능력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빠른 기습작전을 꿰뚫 어 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네벨리언 공작은 이번 작전이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여기에 파스트론 공작이 나타났다면 본궁과 별궁으로 간 병력도 막혔을 가능성이 컸다.
'홋!’
네벨리언 공작의 표정이 변했다. 어딘지 모르게 호승심이 가득한 기사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오랜 시간 최강의 기사라는 칭호를 받아온 파스트론 공작이다. 그의 아성에 도전하는 날이 오늘이 되었다. 네벨리언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은 젊은 시절에 한 번 대결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네벨리언 공작은 처참한 패배를 경험했다. 그의 일생에서 처음 겪는 패배였다. 그 뒤로 공작이라는 지위를 얻기까지 시간이 많이 흘렀다. 잊어버린 줄 알았건만 젊은 시절 패배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패기 넘치고, 호승심 강했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결국 검이 결정을 하게 될 테지.”
“맞는 말이야.”
네벨리언 공작은 그 즉시 검을 들어 파스트론 공작을 겨냥했다. 파스트론 공작도 네벨리언 공작의 결의를 볼 수 있었다. 서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뿜어내었다.
파팟!
상급의 오러 마스터들이 뿜어내는 무형의 기운이 사방으 로 퍼져 나갔다. 중앙을 중심으로 양쪽의 기사들이 한 발씩 물러섰다. 그들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안 것이다.
두 사람의 투기가 공간을 장악했다. 매서운 기운이 형성되었지만 곧바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다. 그와 반대로 극상승의 검사들에게는 공격이 오히 려 허점을 노출시킬 수도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대결은 시작되었다. 상대의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를 시선에서 놓치지 않고 있었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련의 동작이 다음의 움직임을 예측하게 만들었다. 파스트론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 간의 수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속될수록 불리한 사람 은 네벨리언 공작이었다. 마음이 급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우우응!
네벨리언 공작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찬연하게 솟아 올랐다. 오러 마스터 상급의 엄청난 기세가 공간을 장악했다. 그에 대응하여 파스트론 공작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강렬하면서도 모든 것을 양단해 버릴 수 있는 오러 블레이드였다.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스터급 기사들 중에서도 최강의 기사가 격돌하는 순간이었다. 눈 을 델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파팟!
네벨리언 공작이 가볍게 지면을 박차고 뻗어나갔다. 순간적으로 환영이 보일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네벨리언 공작의 독문 스텝이라고 할 수 있는 일루전 스텝(환영보)이었다. 보통 기사라면 분신을 보며 기겁하겠지만 파스트론 공작은 침착했다. 환영은 잔상일 뿐이었다. 진실은 기감에 맞기면 되었다. 감각을 예민하게 가다듬은 파스트론 공작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쏴아아악!
공간이 반으로 갈리자 네벨리언 공작의 빠른 신형이 검에 의해 막혔다. 네벨리언 공작도 검을 뻗어 베어 들어오는 사각을 방비하였다.
처어어어어엉!
귀를 찢는 듯한 파공성이 시끄럽게 울렸다. 오러 블레이드와 오러 블레이드의 검격이 서로 부닺친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가까이 가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흉맹했다. 맹렬한 기세가 순간적으로 뻗어나가 일시에 폭풍처럼 연격을 구사했다.
파파파팡! 퍼퍼퍼펑!
마력탄이 쉼 없이 터지는 듯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일 검, 일 검이 모두 일격필살의 의지를 싣고 있었다. 한 수도 쉬운 공격이 없었다. 또한 둘 다 상대의 공격을 읽고 또 읽었다. 파스트론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 모두 대단히 빠르고 정교했다. 파스트론 공작이 직선적인 움직임에서 우위를 보는 반면에 네벨리언 공작은 좌우로 움직이는 폭이 넓었다.
-토네이도 검법-윈드 드래곤 스트라이크(풍룡참격)!
-아이언 검법-최강의 방패-아이언윌(철벽)!
파아아아앙! 파파팡!
절기가 터져 나왔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돌바닥이 힘없이 부서져 나갔다. 반경 1미터가 초토화되어 버리는 순간이다. 격돌이 가져온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두 공작이 었다. 그들은 가벼운 상처 따위는 무시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경상 따위를 신경 쓰게 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파스트론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의 절기가 연속 적으로 출수되 었다.
파스트론 공작의 검에서 토네이도 검법의 크레이자 스톰 라이트닝(광풍섬)이 형성되어 무섭도록 빠르게 네벨리언 공작의 심장을 노렸다. 그에 반응한 네벨리언 공작이 일루전 스템을 이용하여 한 발 물러섰다 다시 파고들었다. 파고드는 순간에 아이언 검법의 아이언 브레이크(철파)와 아이언 임팩 트(철격)를 동시에 사용하였다.
차차차아앙! 타타탕!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대결이 진행되었다. 누가 확 실한 우위를 점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이전보다 확실히 강해졌군.’
'이전에도 강했지만 지금은 더 강하다.’
둘은 상대를 인정했다.
본궁과 별궁에 쳐들어온 병력을 막기 위해서 피닉스기사단의 부단장인 바자바인 후작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정중앙의 병력을 단단하게 걸어 잠그고, 양옆으로 궁병대를 따로 배치시켰다. 병력 수는 쳐들어오는 타이가라 공작의 병력보다 적지만 무력 면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했다. 피닉스기사단의 정예기사 100명과 파스트론 공작령 산하 제1특전 기동부대 1만, 바자바인 후작이 개인적으로 동원한 1천의 궁병대까지 합하면 어떤 무력부대보다 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적들은 아직 바자바인 후작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일단 피닉스기사단과 병력을 숨기고 난 후 적들이 중앙으로 쳐들어오게 되는 순간에 공격하면 되었다. 바자바인 후작은 파스트론 공작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괜히 피 보거나 능률 떨어지는 전술을 펼치는 위인이 아니었다. 적을 섬멸하는 데 명분과 대의보다 실리를 중요시 여겼다. 가르딘이 처음 피닉스기사단에 들어왔을 때 룰모델로 선택한 인물이 바로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상극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바자바인 후작이 정면을 응시했다. 병력의 움직임이 파악되었다. 본궁의 양옆으로 위치한 건물에 숨어 있는 궁병대에게 신호를 보냈다.
‘제법 날카로운데.’
느껴지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평범한 병사들이 가질 수 있는 기운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성 이 있었다. 적들을 죽이는데 함정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었 다. 죽음에 대한 가책은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면서 털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착! 착! 착! 착!
병력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바자바인 후작은 기사단 일부 병력을 적들에게 보이도록 했다. 대부분의 병력은 적들의 시야밖에 대기시켰다. 너무 조용하면 적이 의심할 수 도 있는 일이었다.
일부 병력을 보자 적들이 공격을 감행해 왔다. 매복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진격하는 데 방해되는 것들은 모두 가볍게 처리한 상태였다. 기세를 타고 있는 병사들에게 적의 출현은 기름에 불을 지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성난 기세를 탄 병력이 탄력을 받으며 뛰어 들어왔다.
바자바인 후작과 30미터를 남긴 지점까지 거침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양옆으로 이어진 건물 위에서 화살비가 쏘아져 나갔다. 적들을 향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발사가 되었다.
슈슈슈슈슉! 슈슈슈슉!
화살 공격을 일반 병사들이 피하기는 어렵다. 한두 방이 아니라 수천 발의 화살이 날아오는데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지금은 어두운 밤이었다. 화살촉이 검게 칠해져 있 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뛰어난 강병이라고 해도 어둠 속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화살을 대처하기는 사실상 불가능 했다.
파악! 파악!
“크아악! 크으윽!”
화살을 막은 병사들의 신음이 밤하늘을 울렸다. 일단 돌진한 병력은 멈추기 힘들었다. 수프가 되었든 빵이 되었든 돌진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타이가라 공작의 병사들을 이끌던 부대장 발런트는 적의 화살 공격에 이를 갈았다. 설마 이런 곳에서 복병이 매복하 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빠른 시간 내에 본궁과 별궁을 점령해야 한다는 생각에 안이하게 대처한 것이다.
“빌어먹을!”
현실은 참혹했다.
타이가라 공작 정예 병사들이 화살 공격에 당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나갔다. 이대로 돌진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우선은 좌우에 숨어 있는 궁병대를 먼저 처리해라!”
병력을 분산시켜 궁병대를 처리하고 난 후 본궁과 별궁을 점령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번 일에 후퇴는 없었다. 만일 후퇴하면 발런트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씨익!
병력이 좌우로 분산되는 것을 본 바자바인 후작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궁병대의 원래 목적이 바로 병력의 분산이었다. 1천의 궁병대로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두 쓰러뜨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선은 군사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기사단은 적군을 처리하라.”
바자바인 후작이 명령을 내리자 매복해 있던 기사단과 병사들이 일거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기동력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파스트론 공작령의 병사들이었다.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어 적군을 가차 없이 도륙해 나갔다.
“쑤우욱! 커어억!”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이다. 병장기가 들어가서 박히자 핏물이 사방으로 흐르고, 사지가 베어져 나갔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타이가라 공작군은 상당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지금 까지 받은 피해만 해도 절반 이상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타이가라 공작의 병사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만큼 죽어나가면 사기가 줄어들거 나 전의를 상실하기 마련이 것만 대단한 투지와 살기였다.
“매복하지 않았으면 상당한 피해를 봤겠어.”
바자바인 후작도 적군의 능력을 인정해야 했다. 정면대결을 벌였다면 만만치 않은 피해를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아비규환의 참혹한 전투였다. 일방적인 도살극이 벌어졌다. 비슷한 군사력이라면 효율적인 병력운용을 한쪽이 이기기 마련이다. 또한 바자바인 후작에게는 피닉스기사단이 존재했다. 일당백의 전투병기가 전투에 참여하는 이상 이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서격! 서걱! 서걱!
병사 3명의 목을 따 버린 발런트는 무참히 죽어 나가는 전황을 막을 여유가 없었다. 이대로는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웠다.
“당... 했구나!”
슈슉!
기습적으로 발런트의 기감을 자극하는 검격이 뻗어 나왔다. 대단히 빠르고 날카로웠다.
순간적으로 반응하여 회피하지 않았다면 큰 상처를 입을 뻔하였다. 바닥을 뒹굴고 일어서는 찰나에 면상으로 향해 날아오는 발길질이 보였다. 발런트가 놀라서 다시 바닥을 뒹굴 었다. 일어설 타이밍이 계속 빗나가고 있었다. 상대의 발길질은 느껴져도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지속적으로 발길질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데굴! 데굴!
‘호오!’
“이거 대단한데.”
발런트를 바닥에 뒹굴게 만든 장본인은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처음 기습도 만만치 않은 일격이었다. 집요하게 노린 발차기도 피하기가 어려운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본능적인 감각을 이용하여 피하고 있었다. 재미가 들린 바자바인 후작인 연속적으로 공격을 가하면서 발런트를 한곳으로 몰아갔다.
파팟!
계속 피하며 기회를 노린 발런트가 지면을 손으로 치면서 몸을 틀어 위로 솟구쳤다. 그러면서 소매 속에 숨겨둔 투명한 비수를 감각적으로 던졌다. 3개의 비수가 섬전처럼 뻗어 나갔다. 트윈 쉐도우 검격이라고 불리는 비도술의 일종이었다. 2개가 쌍으로 날아가 시야를 가리고 그 뒤를 이어 1개의 비수가 그 뒤에 그림자처럼 숨어 치명적인 살격을 날리는 수법이다. 어듬 속에서 던진 트윈 쉐도우 검격은 기사라도 쉽사리 막을 수 없는 위험한 수법이었다.
타탕!
단 한 번 검이 출수되었다. 일검에 날아오던 3개의 비도가 모두 튕겨 나가 버렸다. 상대의 의도를 모두 파악한 검의 출수가 아닐 수 없었다.
발런트가 다시 상대의 신형을 느끼기도 전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유령처럼 다가온 그림자는 망설임 없이 발런트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왔다.
푸육!
신음은 들리지 않았다. 옆구리를 꿰뚫고 들어가 등 뒤로 튀어나온 상황에서도 신음조차 내지 않다니 엄청난 인내력이었다. 상대방의 공격을 받은 즉시 발런트 역시 공격을 감행했다. 죽더라도 상대와 같이 죽겠다는 동귀어진의 살수를 감행했다. 지독한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발런트에게 틈을 줄 정도로 어설프지 않았다. 공격과 동시에 검에 기운을 불어넣어 발런트의 몸에 충격을 주었다.
찌리 릿!
발런트는 온몸이 번개에 맞은 것 같은 충격에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전신이 갈가리 찢기는 극악의 고통을 맛보았다. 움직일 수 없게 된 발런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바자바인 후작을 노려보았다.
“기사복장을 한 놈이 움직임은 어쌔신과 같고, 병사들도 살기가 너무 짙어. 너 진짜 기사 맞냐?”
“...?”
“대답 안 하겠다는 거냐. 그럼 아플 텐데.”
일단 들어간 검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찢겨진 피부가 점점 벌어지며 핏물이 주변을 적셨다. 살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말을 하지 못한다.
“크으옥!”
“독한데.”
극심한 고통을 참고 있는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끈질겼다. 이 정도의 고통에는 면역이 된 놈임에 틀림없었다.
‘좀 전에 날린 공격도 범상치가 않았는데.’
일반 기사가 암격을 자유자재로 날리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범상치 않은 놈이라는 것을 직감한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이대로 죽이기에는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나중에 껍질을 벗겨도 입을 다물 수 있는지 한 번 봐야겠어."
“크크크크!”
오싹!
발런트는 웃으면서 말을 하는 바자바인 후작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의 껍질을 벗긴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발런트는 몸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과과광! 퍼퍼퍼펑!
사방에 부서진 파편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그 안에서도 치열한 대결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패도적인 기운이 지속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절대의 반열에 든 기사일수록 아주 작은 파탄이 큰 손실을 초래하기 마련이었다. 네벨리언 공작의 검에서 다급함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파스트론 공작이 네벨리언 공작의 검에서 초조함을 발견했다. 빠르게 승부가 나지 않는 소모성 공격으로 전략을 바꾼 파스트론 공작이 었다. 그러면서 공격과 방어를 순서적으로 교차했다. 밀고 밀리는 운율이 느껴지고 있었 다.
‘역시 알고 있었나!’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검은 진실했다. 보통 기사라면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변화를 간파한 것이다. 파스 트론 공작이 뒤로 물러서며 네벨리언 공작을 끌어들였다. 절 기를 출수하여 강력한 일 검을 발현하던 네벨리언 공작의 공격을 옆으로 회피했다. 아주 작은 틈이 파스트론 공작의 시야에 보였다. 망설이지 않고 검을 찔러 들였다.
타아아앙!
순간 위기감을 느낀 네벨리언 공작이 급히 허리를 틀며 검을 내리쳤다. 간발의 차이로 검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말았다. 뒤로 밀려나 버린 네벨리언 공작은 패배를 직감했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제부터 주도권은 파스트론 공작이 가지고 있었다. 다시 싸워서 이긴다고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한 네벨리언 공작이 반탄력을 이용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 즉시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하였다.
퍼퍼퍼퍼퍼펑!
시야를 가리고 거리를 벌리기 위한 마법공격이었다. 6서클의 고서클 마법사들의 공격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공격이라 기사들이 반응하는 시간이 조금 늦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네벨리언 공작과 기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피닉스기사단이 적들을 추격하려고 했다. 그때 파스트론 공작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 오늘은 이만 한다.”
“하지만 네벨리언 공작을 이대로 보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를 잡으려면 피닉스기사단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 더군다나 이 근처는 네벨리언 공작령과 가까운 곳이다. 추격하다 오히려 당할 수도 있으니 오늘은 이걸로 그친다.” 파스트론 공작의 적절한 상황판단이었다. 적들을 필사적으로 추격하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어쩔 수 없이 네벨리언 공작은 기사들을 조금씩 희생시키면서 전진을 늦출 것이다. 또한 네벨리언 공작에게는 마법사가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공간이동마법을 사용하면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네벨리언 공작도 시기적절한 후퇴를 명령한 것이다. 만약 심각한 부상을 입은 후 후퇴를 했다면 파스트론 공작이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물러설 때는 과감하게 물러서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파스트론 공작은 황궁을 지켰다는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어차피 이번 전투는 시작에 불과했다. 최후의 전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파스트론 공작이 황궁을 지킴으로써 대 의명분은 1황자가 가지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중론을 지키던 바이멘 후작과의 연계가 가능해졌다. 머리싸움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바이멘 후작이다. 제국의 재상을 얻음으로써 1황자는 훨훨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단 것이나 진배없었다.
검붉은색의 진득하면서도 음습한 기운이 방안에 휘몰아쳤다.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분노가 곧 터질 것 같은 분위기다. 분노의 중심에 다마트 3황자가 서 있었다. 붉은 안광이 타이가라 공작의 뇌리를 강타해 버렸다.
움찔!
오러 마스터인 타이가라 공작은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기운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은 다마트 황자가 자리에 앉았다. 기운은 금세 다마트 황자의 몸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숨쉬기도 힘들어하던 타이가라 공작이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일이 정말 생각지도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설마 했건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적이 한 발짝 먼저 음직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건가요?”
“송구합니다.”
“참, 여러 번 실망을 시키는군요.”
“죄송합니다.”
사실상 이번 일은 타이가라 공작의 의견이 적극 반영이 된 계획이었다. 물론 다마트 황자가 그 의견에 최종 결정을 했지만 책임은 타이가라 공작에게 있었다. 적의 능력을 과소평 가 한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번 일로 인해 오히려 불리하게 돌아가게 생겼군요.”
“놈들의 예기치 못한 대응에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이번 과오를 만회하겠습니다.”
“이만 움직여야겠군요.”
다마트 황자는 궁을 떠나 인폴트 성으로 향했다. 인폴트 성에는 카론 마이어 공작의 북방대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또한 인폴트 성은 네벨리언 공작령과 타이가라 공작령의 중 요거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제국을 반으로 가르는 중요지점으로 이곳을 통과해야만 다른 지역에 대한 공격이 가능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황도를 고스란히 헌납한 상태에서 뒤로 물러섰다는 것에 있었다. 대의명분 또한 1황자 진영에서 가지게 되었다. 물론 누가 옳고 그른지는 최후의 승자가 판가름하게 될 것이다.
치열했던 어두운 밤이 사라지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 왔다. 어제와는 다르게 고요했지만 황궁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시체와 핏물로 인해 참혹함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죽어 있었다.
황궁에 일어난 참혹한 전투는 빠른 시간 안에 퍼져 나갔다. 가린다고 해서 가려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소문의 주도권은 1황자가 가지고 있었다. 3황자가 한밤중에 황궁을 기습 하였고, 이를 눈치 챈 1황자가 미리 대비를 해서 무사히 황궁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먼저 무력을 사용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졌다. 대의명분에서 3황자가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황궁을 장악했다면 반대의 상황이 되었겠지만 이미 지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3황자가 인폴트 성으로 떠나가면서 제국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점화가 되었다. 3황자를 옹립하는 귀족들도 속속 인폴트 성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1황자도 황궁을 거점으로 하여 중요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펠칸 성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펠칸 성과 인폴트 성은 서로의 접경지역이 그리 멀지 않았다. 하루 안에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거리였다.
1황자 진영과 3황자 진영으로 완벽하게 세력이 분리되어 버렸다. 각각 보유한 병력도 최소 100만 명이 넘어 갔다. 사상 초유의 내전이 불가피한 시점이었다. 이긴다고 해도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오욕으로 남을 수 있었다.
러쉬 황자는 출전 전에 황궁에 계신 어미니 세리뉴 황후를 만났다. 세리뉴 황후에게 인사를 올리고 난 후 2황후 글로리아를 찾았지만 방문을 열지 않았다. 글로리아는 아직도 혼란 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1황자를 믿지 못하는 듯했다. 그나마 아이시런 공주가 러쉬 황자를 맞이해 주었다. 3황후 클라우디아는 3황자를 따라가서 황궁에 없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또다시 형제간에 피를 흘리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어느 누가 이겨도 손을 들어 기뻐할 수 없는 처지였다.
러쉬 황자는 아이시런 공주의 마음을 알았다. 그러나 황위 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혈육의 정보다는 권력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다마트 황자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음을 너도 알았으면 한다.”
“알아요. 그래도 오라버니 중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해요.”
“최선을 다해 보마.”
“저...!”
아이시런 공주가 말을 하려다 망설였다. 러쉬 황자가 아이시런 공주의 마음을 눈치 채고 말해 보라고 했다.
“부담 갖지 말고 말해 보아라.”
“어머니랑 발키리 영지로 가서 쉬고 싶어요.”
“발키리 영지는 왜 가려는 것이냐?”
"마음 편히 지내고 싶어서요.”
코스트너 황제가 살아 있을 때도 아이시런 공주가 발키리 영지에 간 것을 러쉬 황자도 알고 있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살아가는 동안 한곳 정도는 마음에 드는 곳이 있 기 마련이었다.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구나.”
“왜요?”
“발키리 영지는 전쟁 중이다. 널 위험한 곳으로 보낼 수는 없구나.”
“그... 런가요.”
아이시런 공주는 더 이상 부탁하지 못했다. 내전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발키리 영지가 가장 먼저 내전을 시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 보고가 올라오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러쉬 황자는 출전하기 전에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었다. 가족들에게도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진심이다.
“난 정말 지니언을 죽이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해도 혈육을 죽이지는 않는다. 비록 지금은 다마트와 결전을 벌이고 있지만 이것은 결코 내 의사가 아니다. 이 것 하나만큼은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오라버니를 믿어요.”
“고맙구나. 이만 나는 가보마.”
“무사히 다녀오세요.”
아이시런 공주는 러쉬 황자의 진심을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 상황이 어려워져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는 해도 믿고 싶은 것이 아이시런 공주의 마음이었다. 만약 아니라면 더욱 가슴이 아플 것이다.
아이시런 공주는 멀어지는 러쉬 황자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편으로 오라버니 들의 다틈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보니 아저씨도 형제간의 다툼이 싫어서 가출했잖아.”
아아러니하게도 아이시런 공주의 상황과 가르딘의 상황이 비슷해졌다. 가르딘이 생각이 나자 전쟁을 무사히 치르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 다. 그동안 가르딘이 보여준 모습은 여유 그 자체였다. 언제 어디서든 음흉하고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가르딘이다. 그의 얼굴에 심각함은 어울리지 않았다.
남 걱정시키지 말고 빨리 전쟁을 끝내란 말이에요.’
아주 조금이지만 걱정이 되었다는 것이 불만인 아이시런공주였다. 한시라도 빨리 전쟁이 끝나야 다시 발키리 영지로 갈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가면 좀더 긴 시간을 가졌으면 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