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5/93)

   @@[제5장 당하고는 못 살지@@]

 오브라이언 남작가가 명명백백하게 이겼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에 반해 제브라 자작가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전력상 질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이상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블리쳐가 미련한 짓을 했으며, 드바인이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며 패배했다.

 빌링턴 백작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제브라 자작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블리쳐를 비롯한 강철 기사단도 고개를 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진 빌링턴 백작은 싸늘하기까지 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는커녕 일이 더 복잡해져 버렸다. 쉬운 길을 마다하고 번거로운 일을 자처한 꼴이다.

 “이제 승패를 정해 주셔야겠습니다.”

 가르딘이 싱글벙글하며 빌링턴 백작에게 다가왔다. 공증인이 승패를 선언해 달라는 뜻이었다.

 빠직!

 빌링턴 백작도 알고 있다. 하지만 가르딘이 말하자 신경질이 났다. 이상하게 성질을 긁는 재주를 타고난 놈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이놈의 농간에 넘어가서 승패가 이상하게 변질하였다.

 빌링턴 백작의 눈빛이 좋을 리 만무했다. 싸늘하게 노려보는데도 가르딘의 면상은 여전히 희희낙락했다.

 꿈틀! 꿈틀!

 미간이 기이하게 뒤틀리는 빌링턴 백작이었다. 순간 살의가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여기에 모인 귀족들은 모두 네벨리언 공작의 수하들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묻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거 공증인이 빌링턴 백작님이었으면, 인포메드를 부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괜히 돈 낭비했네.”

 흠칫!

 중앙에 있는 분지를 제외하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 중턱에 움직임이 보였다. 일부러 눈에 띄는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빌링턴 백작은 순간적으로 들었던 살의가 사라졌다. 만약 앞뒤 재지 않고 일을 저질렀다면 네벨리언 공작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치밀한 놈이다.’

 가르딘이 그냥 운이 좋은 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자신이라도 생명이 오가는 대결이라면 목숨을 구명할 버팀목을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빌링턴 백작은 가르딘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얼굴만 보면 평범한 모습이었다. 평범한 모습 속에 숨겨진 능력이 궁금해 졌다.

 “제법 심기가 깊군.”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뻔뻔하기까지 하군.”

  “일의 선후가 있으니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승리를 인정해 주십시오.”

 “좋네. 이번 대결은 오브라이언 남작가가 승리하였네.”

 빌링턴 백작이 확실하게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승리를 선언하자 제브라 자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산이 모두 무너져가는 남작가를 상대로 진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일의 전모가 알려지면 모든 귀족들이 제브라 자작을 비웃을 것이다.

 가르딘이 협상대상자인 제브라 자작에게 보상 조건을 말 했다. 가르딘의 뒤에서 라이벨과 류카이젠이 기쁨을 만끽하다가 긴장한 듯이 표정을 굳혔다. 두 형제는 가르딘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지 못했다.

 “우선 오브라이언 남작가를 모독한 일을 정식으로 사과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꿈틀!

 제브라 자작의 심기가 찬물을 부은 듯이 차갑게 식었다. 고작 용병 따위가 자신을 앞에 두고 협상을 하고 있었다. 세상을 살면서 이처럼 어이없고 분한 일을 겪을 줄은 몰랐다.

 “그대들은 할 말이 없는가?”

 제브라 자작이 라이벨과 류카이젠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가르딘이 먼저 끼어들었다.

 “협상 권한을 제게 모두 위임하셨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귀족이 용병에게 말인가. 허허!”

 “누가 하건 상관은 없지 않습니까.”

 “자존심도 없군.”

 제브라 자작이 계속 라이벨과 류카이젠을 몰아세웠다. 일부러 도발하는 행위라는 것이 뻔히 보였다. 하급 귀족이 모욕을 참지 못하고 나서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라이벨과 류카이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브라 자작이 더 몰아치려고 할 때 가르딘이 나서서 차단해 버렸다. 상대의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것이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그전에 먼저 정식으로 사과부터 하시지요. 말은 다음에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바쁜 시간을 내주신 빌링턴 백작님이 기다리시지 않습니까!”

 ‘이익!’

 빌링턴 백작을 끌어들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제브라 자작이었다. 가르딘은 이용할 수 있는 자를 모두 동원하여 제브라 자작을 압박하였다. 가뜩이나 심기 불편해진 빌링턴 백작이었다. 이 이상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제브라 자작도 무사하지 못한다.

 “정식으로 오브라이언 남작가에 사과하는 바이네.”

 “거기 두 숙녀 분도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가르딘은 제브라 자작에 이어 비비안과 카밀라의 사과까지 요구했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제브라 자작과 두 자매였다. 원하지 않는 굴욕적인 사과를 라이벨과 류카이젠에게 하고 말았다. 수치심에 제브라 자작과 비비안, 카밀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불난 집에 기름을 붙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오브라이언 남작가에서는 제브라 자작가의 몰지각한 행위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보았습니다. 주변 귀족에게 무시를 받고 가산을 정리하는 등 힘겨운 일을 겪었습니다. 귀족으로서는 권위가 무너진 엄청난 일입니다. 귀족이 파렴치한으로 몰린 일은 결코 작은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한 피해보상을 정식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가르딘은 총 6만 골드를 달라고 했다. 엄청난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제브라 자작으로서도 쉽게 줄 수 없는 무리한 요구였다. 라이벨과 류카이젠마저 입이 쩌억 벌어졌다. 설마 가르딘이 저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줄 몰랐던 것이다.

 “지금 뭐라 했나?”

 “6만 골드라고 했습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충분히 말이 됩니다.”

 “어디 말해 보게. 합당하지 않다면 귀족을 모독한 죄를 물겠다!”

 “우선은 오브라이언 남작가에서 저희들에게 2만 골드를 제시했습니다. 남아 있는 영지를 모두 팔아도 줄 수 없는 금액입니다. 물론 저희들의 실력을 미리 알고 말한 액수입니다.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신뢰를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오브라이언 남작가는 파렴치한으로 몰렸습니다. 귀족을 능멸하는 가장 치욕스런 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브라이언 남작가는 전 재산을 걸었습니다. 이만 하면 6만 골드도 부족하다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가르딘은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을 했다. 그러나 세상사란 일리가 있다고 해서 모두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브라이언 남작가는 제브라 자작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힘이 약하면 알아서 기어야 한다. 그럼에도 자기주장을 한다는 것은 제브라 자작을 우습게 보는 행위였다.

 가르딘의 말은 정당했다. 충분히 일리가 있기에 당장 반박을 할 수 없었던 제브라 자작이었다. 그저 가르딘을 노려보는 것이 다였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 목을 잘라버리고 싶다.

 ‘어차피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테니 들어주마!’

 계획을 세우면 차선책이 있기 마련이다. 빌링턴 백작과 제브라 자작도 차선책을 마련해 놓기는 했다. 그저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을 뿐이다. 일이 틀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또한 당장 돈을 줄 필요도 없다. 결론적으로 보상을 해주지 않아도 되었다.

 “좋다. 돈을 마련해서 3일 후에 주지.”

 “저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당장 돈을 융통해 주셨으면 합니다.”

 기사대결의 승자가 모든 것을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합당하다면 승자의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

 “지금 당장 그만한 돈을 융통할 수 없다.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그럴 줄 알고 사람을 불러 왔습니다.”

 가르딘을 조롱하던 제브라 자작은 누군가가 분지 내의 공터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세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사는 아니었다. 복장을 보니 상인들 같았다.

 가르딘이 대결을 끝내고 유리로 빛을 반사시켜 신호를 세 번 보냈다. 그러자 그때까지 능선 사이에서 대결을 구경하던 세 명의 상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파이트너 상단의 지점장입니다.”

 “데포른 영지의 지점장인 비슈겐이라고 합니다.”

 가르딘이 파이트너 상단의 지점장을 소개하고 난 후 돈을 요구했다.

 “제브라 자작님이 돈을 융통하는 것에 대한 직접 담보를 대주신다면 정확한 서류 작성에 의거하여 오브라이언 남작가에게 돈을 지불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면 돈을 주는데 무리가 없습니다.”

 파이트너 상단의 비슈겐이 서류를 모두 챙겨 온 상태였다. 담보에 대한 빌링턴 백작과 제브라 자작의 서명이라면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부르르르!

 제브라 자작은 가르딘의 대응에 눈빛이 흔들리고 몸이 떨려왔다. 웃고 있는 가르딘이 비웃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모시고 있는 주군이 모욕당하면 아랫것들이 나대기 마련이다. 블리쳐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주제도 모르고 나섰다.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가르딘은 어이 없다는 듯이 블리쳐를 쳐다보았다.

 “지금 신성한 기사대결이 끝나고 난 후의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전권을 위임받은 상태입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블리쳐 경은 무슨 권한으로 나선 것입니까!”

 “나는 …!”

 가르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할 말이 궁색해졌다.

 “물러서라!”

 결국 주인에게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제브라 자작의 차가운 말투에 고개를 숙이며 물러서고만 블리쳐였다. 가르딘에 대한 화만 쌓이는 상황이 되었다.

 “충성심으로 한 말인데 너무 심하게 다그치지는 마십시오. 다 제브라 자작님을 위해서 나선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충성스러운 수하를 두셨습니다!”

 가르딘의 말이 과연 칭찬일까! 말은 상황과 때에 따라 다르게 해석이 가능하다. 현재 가르딘의 말은 제브라 자작을 조롱하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제브라 자작은 간신히 화를 참아내었다. 지금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판단했다. 제브라 자작은 블리쳐보다는 심기가 깊은 자였다.

 “좋다. 서명을 해주지.”

 “역시 깔끔하고 대범합니다. 앞으로도 오브라이언 남작가와 제브라 자작가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절대로 친해질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 이런 말을 하다니 가르딘의 뻔뻔함은 도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이놈! 반드시 죽여주마!’

 다른 놈은 둘째 치고, 가르딘만은 반드시 죽이겠다고 다짐한 제브라 자작이었다.

 협상이 모두 끝나고 난 후 가르딘은 잔금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빌링턴 백작이 잠시 불렀다.

 “자네 내 밑에서 일하지 않겠나. 원한다면 작위를 줄 수도 있네.”

 엄청나게 파격적인 대접이었다.

 실력이 대단하긴 해도 이 정도의 대접을 해주지는 않는다. 라이벨과 류카이젠도 상당히 놀랐다. 자신들이라도 저런 말을 듣는다면 바로 수락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제브라자작은 심기가 불편했다. 빌링턴 백작이 가르딘을 수중으로 끌어들이면 죽일 수 없게 된다. 모든 일이 가르딘 때문에 엉망이 되었고, 자신의 권위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가르딘과는 절대로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수락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가르딘은 두 말없이 거절해 버렸다.

 “저는 자유로운 용병이 좋습니다. 구속은 귀찮거든요.”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텐데.”

 “다시 생각해도 저는 용병이 편합니다.”

 “확고하군. 좋네. 자네의 의견을 존중하지.”

 “감사합니다, 빌링턴 백작님!”

 가르딘이 거절하자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어리둥절했고, 제브라 자작과 블리쳐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브라이언 남작가로 돌아가는 가르딘을 보며 빌링턴 백작은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두 번이나 제의를 했다. 그럼에도 생각도 해보지 않고 거절했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귀족을 능멸한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해 주어야 했다.

 “제브라 자작.”

 “예! 백작님!”

 “계획대로 하게.”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게.”

 “물론입니다.”

 오브라이언 남작의 저택으로 돌아온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마중을 나온 오브라이언 남작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어서지도 못하시던 분이 정정하게 일어난 것이다.

 “아버지, 일어나신 겁니까?”

 “어찌 됐느냐?”

 오브라이언 남작은 자신이 일어난 것보다 대결의 향방을 먼저 물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남작가의 보존과 가족의 안위였다.

  이미 한 번 버린 자식이 있었다. 못내 가슴이 아프다. 냉정하게만 대했고, 따뜻한 말 한 번 해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후처의 자식이었고, 아들을 편들면 소니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병을 털고 일어나자 버린 자식이 더 생각났다. 그리고 현재의 가족과 자식들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오브라이언 남작이 라이벨과 류카이젠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잘했다. 그럼 들어가자꾸나.”

 그저 어깨를 두드려주었을 뿐인데, 두 형제는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은 행위가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뜻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일어났으니 파티를 하죠.”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냐?”

 “가족끼리 모여서 식사하자고요!”

 “오랜만에 좋지 않습니까!”

 “그러자꾸나.”

 모두가 모여서 식사를 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가세가 기울기 전까지 형제끼리 으르렁대느라 가족이 모이지 못했다. 나중에는 오브라이언 남작이 쓰러지고, 남작가가 점차 쇠퇴하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오브라이언 남작을 따라 들어가는 라이벨과 류카이젠을 말없이 뒤에서 지켜보는 가르딘이었다.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저 세 사람이 가는 자리의 마지막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 서운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가르딘은 순간 들었던 감정을 부정해 버렸다. 쉽게 인정하기에는 그동안 쌓인 게 너무 많았다. 가르딘은 대인배가 아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이미 용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들었다.

 “자네들도 어서 오게.”

 라이벨이 뒤에 서 있는 가르딘과 사이론을 불렀다.

 “가죠.”

 “그럴까.”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식당에 가족들이 모였다.

 식탁에는 오브라이언 남작과 아내인 소니아가 앉았고, 양옆으로 라이벨과 류카이젠의 아내와 자식들이 앉았다.

 라이벨의 부인은 아만다이며, 슬하에 아들이 두 명이었다. 큰아들인 앤드류는 벌써 스물다섯 살이나 되었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다. 다 쓰러져가는 가문에 시집올 귀족 여인이 없었던 것이다. 작은아들 데이브는 열 살이라 아직 집안일을 잘 모른다.

 류카이젠의 부인은 샤론이었고, 오랜 기간 자식이 없다가 늦둥이인 에반을 낳았다. 에반은 현재 열여덟 살이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라 모든 정성을 다 쏟고 있다.

 귀족가의 가족이 다 모였는데 아홉 명밖에 되지 않는다. 집사와 시녀들까지 합해 봐야 열다섯 명을 넘지 않았다.

 가르딘과 사이론도 탁자의 맨 끝에 자리했다. 기사대결을 승리로 이끌었기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가르딘은 식사를 하며 살며시 고개를 돌려 가족을 둘러보았다. 형들의 부인들인 아만다와 사론은 25년 전에 본 적이 있다. 물론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그저 무관심으로 일관했을 뿐이다. 형들의 자식들은 기억에도 없다. 그저 얼굴에서 닮았다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제브라 자작가에서 6만 골드를 보상해 주었습니다. 이제 다시 오브라이언 남작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제브라 자작이 그런 큰돈을 쉽사리 줬단 말이냐.”

 “물론입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기사대결에서 승리한 것을 한껏 자랑했다. 술이 들어가니 허풍이 세진 것이다.

 가르딘은 조용히 식사를 하고 난 후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서늘한 저녁 바람이 가르딘의 볼을 두드렸다.

 뒤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오브라이언 남작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 가족을 지켜줘서 고마웠네.”

 “돈을 받고 하는 일입니다.”

 “목숨을 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네.”

 가르딘은 더 이상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없자 돌아가려는 오브라이언 남작에게 뜻하지 않은 질문을 했다. 가르딘도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아버지를 보자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이다.

 “남작님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남작가의 부흥이었네.”

 “지금은 다르다는 말입니까?”

 “사실 처음에는 두 녀석에게 실망했네. 가문을 말아먹었으니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막상 기사대결을 벌인다고 하자 덜컥 겁이 났네. 나야 이미 늙어가는 처지이니 어쩔 수 없지만 녀석들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평생 아들 녀석에게 정을 준 적이 없네. 그것이 오늘 못내 안타까웠지. 그리고 다시 돌아온 아들을 보자 나는 순수하게 기뻤네. 그럼 답이 됐나.”

 오브라이언 남작은 아들을 소중히 여긴다고 대답했다. 가르딘은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려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참아내야만 했다.

  가르딘은 마음을 차분히 하고 난 후 사이론을 불렀다.

 “계획대로 한다.”

 “영주님의 아버님이 허락할까요?”

 “가족이 소중하다면 해야겠지.”

 저녁 시간이 지나갈 무렵까지 오브라이언 남작의 방은 불빛이 켜져 있었다. 오브라이언 남작이 오랜만에 두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브라이언 남작가를 무사히 지킨 것에 안도했다. 오브라이언 남작은 아들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하나에 만족하면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브라 자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는 마라.”

 “모든 원인이 저희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난 너희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당당하게 행동하여라.”

 이처럼 따뜻한 말을 하는 오브라이언 남작은 라이벨과 류카이젠에게도 처음이었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상관없이 자식은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죄송해요!”

 “이제부터 열심히 살겠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아버지와 아들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의 감정들을 털어버렸다.

 끼이익!

 오브라이언 남작의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가르딘이었다. 갑작스럽게 가르딘이 들어오자 오브라이언 남작과 두 형들은 긴장했다. 밤이 다가오는 시간에 느닷없이 들어와서 놀란 것이다.

 “무슨 일인가?”

 “남작가를 버리셔야겠습니다.”

 갑자기 들어와서 한다는 소리가 정말 가관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라이벨이 역성을 내었다. 앞뒤 모두 잘라버리고 이상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무척이나 모욕적이었다.

 “자네가 감히 우리를 쫓아내겠다는 말인가!”

 “설마 제브라 자작이 가만히 있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정당한 기사대결이었는데 보복을 한단 말인가?”

 “기사대결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으니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모든 문제는 저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자네 때문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네!”

 오브라이언 남작과 라이벨, 류카이젠은 가르딘와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르딘이 협상당시에 무리한 조건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것 이외에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 때문에 오브라이언 남작가가 무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버지와 두 형들은 가르딘의 말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이제이해를 하게 될 겁니다.”

 우드드득!

 가르딘의 몸에서 골격과 얼굴이 변하는 소리가 들렸다. 변화를 일으킨 골격은 제 위치를 찾아가기 위해서 빠르게 변형되었다.

 눈앞에서 사람의 몸이 변하는 모습에 기겁할 정도로 놀란 오브라이언 남작과 두 형제들이었다. 이런 괴현상은 그들도 처음 보았다. 마법도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변하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변하는 시간은 짧았다. 변화가 끝나자 헬리언은 능글맞은 중년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떻게?”

 “아니, 그보다 …!”

 어디서 본 듯하다.

 변한 가르딘의 모습에서 오브라이언 남작, 라이벨, 류카이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너는 설마 …!”

 “가르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형님들!”

 아버지와 두 형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동안 용병으로 알고 있던 헬리언이 가르딘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변신한 모습으로 집에 찾아온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하죠. 우선 집은 그대로 놔둡니다. 그리고 제브라 자작에게 받은 돈을 가지고 저를 따라오면 됩니다.”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냐? 왜 우리가 너를 따라가야 한단 말이냐?”

 “저와 네벨리언 공작의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형님들을 건드린 것은 저를 끌어들이기 위한 네벨리언 공작의 흉계였습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제브라 자작가가 시비를 건 것이나, 네벨리언 공작이 일사천리로 제가해 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가르딘을 끌어들이기 위한 비열한 음모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게 너 때문이란 말이냐! 그런데도 너는 가만히 있었던 것이냐?”

 “사실은 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모른 척해도 아버지와 형님들은 모를 것 아닙니까.”

 “뭐라고!”

 가르딘의 차가운 말에 소름이 돋았다. 예전의 가르딘이 아니었다. 가르딘은 오러마스터이며 제국의 후작이다. 25년 전의 어린 동생이 아니라는 말이다. 때에 따라서 비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르딘이 아버지를 응시했다.

 “저는 이미 가정을 꾸렸습니다. 제가 위험한 일을 하게 되면 제 가정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저는 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녁때 오브라이언 남작이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한 가르딘이다. 아버지는 침울했다. 과거의 잘못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시간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미안하구나!”

 “사과한다고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이제까지 자신들을 구해준 것이 가르딘이었다는 것보다 동생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이 창피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모든 치부를 본 것이 아닌가! 가릴 수만 있다면 가리고 싶었다. 또한 오기가 치솟았다.

 “우리는 가지 않겠다!”

 “그렇습니까.”

 가르딘은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사실을 말할 뿐이다.

 “그럼 오늘 다 죽겠지요.”

 “뭐야?”

 “오늘 중으로 놈들이 몰려와서 이 저택에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죽일 겁니다. 그래도 남겠다면 나는 상관하지 않겠 습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입을 다물었다. 만약 가르딘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물론, 자식들까지 모두 죽는다.

 “싫다면 강요하지 않습니다.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이니까요. 물론 책임도 자신이 진다는 것을 알고는 있겠지요.”

 가르딘은 25년 만에 본 아버지와 두 형들에게 따뜻한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누군가 결정을 해주는 시기는 지났다고 볼 수 있다.

 “가자꾸나!”

 우물쭈물하는 두 형들을 대신에 아버지가 결정을 내렸다. 오브라이언 남작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래도 가르딘을 믿었다. 이제까지 관심을 주지 않은 아들이지만 믿었다.

 처음으로 믿음을 준 아버지의 말에 가르딘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곧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갔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물어보세요.”

 “우리가 끝까지 가지 않겠다고 하면 넌 진정 그냥 갈 생각이었느냐?”

  라이벨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습니다.”

 가르딘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이 평범했다. 감정의 변화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가르딘의 냉정한 말투에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오싹한 기분을 맛보았다. 어린 시절의 가르딘은 반항기는 있어도 냉정하지는 않았다.

 “많이 변했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구구절절 옳은 것도 없습니다. 그저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 할뿐입니다.”

 가르딘은 방에 들어오기 전에 사이론에게 식구들을 모두 데려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냉정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가르딘은 강제로라도 데려갈 생각이었다. 끝까지 반항하면 무력을 동원해서 데려가면 되었다.

 ‘차마 외면하지 못하겠군요.’

 씁쓸한 기분이다.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람의 감정이 보고 있는 것과 보지 않는 것에 대한 차이가 크다는 것을 절감했다.

 “아버지, 남작가의 비밀통로가 여기 있지요.”

 “그렇단다.”

 “사이론이 식구들을 데려올 겁니다. 사이론을 따라가십시오.”

 “너는 안 가는 것이냐?”

 “저는 당하고 사는 인간이 아닙니다.”

 가르딘의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이 방 안을 감돌았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새삼 가르딘이 오러마스터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대결에서 왜 그토록 여유 만만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갔다.

 하급 귀족가이지만 특이하게 오브라이언 남작가에는 비밀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예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천연동굴을 개조한 것이다. 오브라이언 남작의 방 한쪽 벽에 있는 촛불 장식을 가로로 돌리면 벽이 열리게 되어있다. 동굴은 저택의 뒤에 있는 맞은편 산까지 연결이 되어있었다.

 사사사사삭!

 달과 별이 어둠에 잠기는 시각. 밤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는 시각에 빠르게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모두 가벼운 차림이지만 검을 찬 상태였다.

 검은 인영은 저택의 담벼락을 가볍게 넘어 목표물을 향해 접근해 나갔다. 빠르고 신속하게 끝을 내고 사라지는 것이 중요했다.

 “살아 있는 것들을 모두 치워라!”

 “예. 자작님!”

 20명의 인영이 저택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저택은 불빛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건만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브라이언 남작이 거하는 방으로 향하려면 저택의 거실을 지나야 한다. 거실은 각 방으로 연결이 되는 중간 통로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은 거실을 반드시 지나도록 되어 있었다.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선대 조상이 집을 지을 때 최대한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었다.

 딸칵!

 20명의 검은 복장을 한 인영이 거실로 들어서자 불빛이 켜졌다. 이제까지 잠잠하던 거실에 불빛이 들어온 것이다.

 거실 안에 들어서자 침입자들은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기사대결에서 마지막 대결을 벌였던 질풍의 용병 헬리언이었다.

 “밤에 잠도 안자고 여기는 무슨 일이지, 제브라 자작?”

 복면을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단번에 알아채는 헬리언이었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혼자라는 것에 별반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반말로 일관하는 헬리언에게 화가 난 제브라 자작이었다.

 “알면서 내게 반말을 하다니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훗! 어차피 죽이려고 왔으면서 그따위 시시껄렁한 말을 하다니, 너야말로 웃기는 놈이구나.”

 “네놈을 곱게 죽이지 않겠다!”

 “맘대로 해.”

 “저놈을 잡아 사지를 잘라 피를 흘리며 발버둥 치다 마지막에 죽게 만들어라.”

 제브라 자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갑자기 튀어나오는 인영이 있었다. 가르딘에게 원한이 많은 블리쳐였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를 당하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판국이었다.

 “죽여주마!”

 “멍청하긴.”

 제 죽을지도 모르고 먼저 나선다. 블리쳐가 최선을 다한 일격을 뻗었다. 일생에서 가장 빠른 일격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단숨에 놈을 제압하여 사지를 잘라버리려고 했다.

 사아악!

 착!

 블리쳐의 일검이 잡혔다. 그것도 두 손가락에 잡힌 것이다. 검에 오러가 뿜어져 나온 상태였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잘려 나가는 오러의 강력함이 손가락 두 개에 막혀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을 다시 회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두 개가 산악의 거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발악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검이 빠지지 않자 블리쳐는 검을 놓았다. 검을 놓는 찰나의 순간에 다시 가르딘에게 달려들었다.

 “기사가 검을 놓다니 죽고 싶다는 뜻이겠지.”

 “닥쳐랏!”

 슈우우욱!

  어쭙잖은 주먹이 가르딘의 신형을 건드릴 리 만무했다. 검을 잡고 있을 때와 놓고 있을 때의 움직임은 다르다. 그것은 평소 하던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블리쳐의 허둥대는 모습은 서커스의 광대처럼 보였다.

 “이놈! 죽어랏!”

 달려드는 블리쳐의 주먹을 크로스로 가로질렀다. 그와 동시에 가르딘은 주먹을 뻗었다. 달려오는 힘과 뻗어나가는 힘이 상충되어 부딪쳤다. 다른 점이 있다면 블리쳐는 안면을 내준 것이고 가르딘은 주먹을 뻗은 것이다.

 퍼어어억!

 뼈가 부러지면서 함몰되는 소리가 들렸다.

 주먹 한 방을 제대로 맞은 블리쳐의 목이 기이하게 꺾였다. 얼굴은 카운터펀치에 함몰되어 버렸다. 즉, 단 한 방에 즉사했다. 얼굴이 완전히 박살난 상태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철퍼덕!

 강철 기사단의 단장이 주먹 한 방에 죽어버린 어이없는 상황을 지켜본 기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블리쳐는 저처럼 어이없이 죽을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다.

 제브라 자작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블리쳐를 주먹 한 방으로 죽일 수 있는 실력자라면 드바인과 난전을 벌일 이유도 없었다. 이제까지는 조금 뛰어난 용병으로 생각했지만 지금부터는 달랐다.

 “네놈은 누구냐?”

 “헬리언.”

 “웃기지 마라! 용병 따위가 기사단장을 한 수에 죽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냐!”

 “그럴 수도 있지.”

 헬리언의 굉장한 실력을 보았지만 물러서지 않는 제브라 자작이었다. 아직 20명의 기사들이 남아 있다. 혼자 아무리 강해도 20명의 기사를 모두 이길 수는 없다고 보았다.

 “비겁하게 정체를 숨기는 것이냐!

 “큭! 도둑고양이처럼 밤에 쳐들어온 주제에 말은 잘하는 구나. 뭐 굳이 알고 싶다면 알려는 주지. 너희들은 설마 위대하고 훌륭한 가르딘 후작님이 가만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냐.”

 “… 그렇구나!”

 그제야 제브라 자작은 자신이 왜 당했는지 이해가 갔다. 이놈들은 오러마스터에게 수련을 받은 놈들이었다. 용병치고는 너무 강한 것이 이상했었다. 오러마스터에게 사사를 받았다면 충분히 이유가 되었다.

 가르딘은 자기 입으로 말하고서도 조금 낯부끄러웠다.

 ‘위대하고 훌륭하다라. 나하고는 안 맞는데.’

 제브라 자작은 일이 계속 틀어지는 것이 못마땅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빌링턴 백작은 물론 네벨리언 공작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르딘이 가족들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놈의 약점을 잡아들이면 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었다.

  “네놈이 아무리 강해도 혼자다. 혼자서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냐!”

 “물론.”

 “용병 주제에 겁이 없구나!”

 “지금 한 말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는 네놈이 하게 될 거다!”

 까닥!

 가르딘의 손가락 염장질이 다시 한 번 발휘되었다. 가볍게 검지를 들어 올려 움직인다. 상대방의 심기를 대단히 불편하게 만드는데 특효약이다.

 “저 시건방진 놈을 쳐라!”

 강철 기사단 20명이 가르딘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만 제압하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브라이언 남작을 비롯한 가족들은 별것 아니었다. 잡히면 바로 죽여버릴 수 있었다.

 가르딘은 압박해 오는 기사들을 보면서도 별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것이 제브라 자작의 심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놈이 뭔가 다른 수작을 부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제브라 자작은 주변을 돌아보며 무엇이 있는지 확인을 해보았다.

 검을 출수해도 목표는 가르딘뿐이다. 20명이 한꺼번에 움직이기에는 공간의 한계가 존재한다. 거실에 있는 의자와 탁자, 여러 가지 가구들이 거치적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사들이 움직임에 제한을 받을 때 가르딘은 제집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가구 사이사이를 유연하게 움직인 가르딘은 다가오는 검을 응시했다. 검을 피한 후 가르딘은 발로 상대 기사의 발을 찍어 밟았다.

 뿌드드득!

 어찌나 세게 밟았는지 기사의 얼굴이 극심하게 일그러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발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기사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다.

 가르딘이 숙이는 기사의 턱을 쳐올렸다.

 투닥!

 둔탁한 소리가 기사의 턱을 울렸다. 주먹 한 방에 턱이 부서지며 충격은 머릿속까지 전달되었다. 턱이 으스러지자 목이 부서지고 뇌가 일그러졌다.

 한 명을 죽이고 난 후 달려오는 기사 세 명과 일직선으로 섰다. 검이 세 방향에서 상단, 중단, 하단을 찌르고 들어왔다.

 슈우우욱!

 검은 허공을 쳤다. 가르딘의 신형은 이미 그들의 사각지대를 지배했다. 왼쪽 사각으로 이동한 가르딘이 기사의 무릎을 찼다.

 우드득!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기사가 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옆으로 기우는 기사의 안면을 발로 차버렸다.

 오른쪽에서 찔러오는 기사의 팔을 잡고 가슴 밖으로 꺾었다. 역으로 꺾인 팔은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비명을 내지를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르딘의 팔꿈치가 기사의 얼굴을 가격했다. 목이 완전히 돌아가 버렸으니 닭이 아닌 이상 살기 힘들었다.

 순식간에 여섯 명의 기사를 지옥으로 보내버린 놀라운 광경이었다. 보고 있던 기사들도 기가 막혔다. 엄청난 기술을 선보인 것은 아니다. 거실의 행동반경을 적절히 이용하여 기사들의 움직임을 차단하며 공격한 것이 다였다. 그런데도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대결에 공백기는 없었다. 한동안 얼이 빠져 있는 기사들을 가르딘은 내버려두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가구를 집어 던졌다. 가구에 오러가 스며들어 있어 강철보다 단단하다.

 타아앙!

 가볍게 생각하며 베어버리려던 기사는 가구의 반탄력에 뒤로 물러서야 했다. 뒷걸음치는 사이에 가르딘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순간에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은 턱을 가격했다. 턱이 으스러지면서 뒤로 넘어가는 기사였다.

 다른 기사들 세 명이 멍하니 있다. 가르딘이 브리안에게 가르쳐준 무영신권의 오의가 권격에 실려 있다. 대충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연거푸 세 번의 주먹이 기사들의 심장을 가격했다.

 퍽! 퍽! 퍽!

 가슴뼈를 지나 심장을 직격한 가르딘의 오러였다. 내공을 이용하여 타격을 가하는 격산타우의 수법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반 충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심장은 터져 있는 상태다.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관인 심장이 부서졌으니 기사들은 죽어 있는 인형이 되었다.

 꽈다다당!

 가르딘은 근접전만을 하고 있었다. 기사들에게 접근하여 검을 휘두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수법이었다. 검격과 권격의 간격은 거의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거리가 멀다면 검이 유리하겠지만 일단 붙어버리면 검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가르딘은 기사와 기사 사이에 스며들어 인간방패를 만들었다. 함부로 검을 휘두르기도 어려운 상태다. 검을 휘두르다가 동료가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력으로 진다면 상관하지 않겠지만 이런 식으로 죽는 것은 너무 허망한 일이었다.

 “치사한 …. 커억!”

 말을 하기도 전에 가르딘이 기사의 얼굴에 권격을 뿌렸다. 권격은 기사의 코와 입을 단숨에 묵사발로 만들었다.

 ‘세상은 원래 비겁한 거다.’

 벌써 열세 명에 달하는 기사들이 가르딘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당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제브라 자작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몸을 떨었다. 이제 남은 기사는 자신을 빼고 일곱 명뿐이다.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목숨마저 위험한 지경이다. 제브라 자작은 어서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 같은 놈!”

 “어! 도망치게!”

  가르딘이 도망치려는 제브라 자작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기겁한 제브라 자작이 기사들에게 놈을 막으라고 소리쳤다.

 “놈을 막아라!”

 기사들이 막아서자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된 가르딘이었다. 기사들을 상대하는데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제브라 자작은 이 모든 것이 가르딘 후작이 꾸민 일임을 보고하기 위해 도망쳤다.

 가르딘은 도망치는 제브라 자작을 편히 가게 놔두지 않았다.

 ‘쉽게 도망치면 안 되지. 조금 고생 좀 하라고!’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가르딘이 무형의 지풍을 날렸다. 두 개의 지풍이 제브라 자작의 허벅지를 집요하게 노리며 날아갔다.

 슈웅! 슈웅!

 “크억!”

 다리가 저릴 정도의 충격을 받은 제브라 자작이 달려가다 바닥에 엎어져서 뒹굴었다. 형편없이 나뒹군 제브라 자작은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귀족이라는 체통도 잊은 채 도망가기 위해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쩔뚝! 쩔뚝!

 가르딘은 제브라 자작이 거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기사들은 집요하게 가르딘을 물고 늘어졌다. 실력은 둘째 치고, 충성심만은 대단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더 이상 못 놀아주겠다.”

 “닥쳐랏! 동료의 원수를 갚겠다!”

 이를 악물며 달려드는 강철 기사단이다. 그러나 상대는 가르딘이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제까지는 그저 놀면서 상대를 했을 뿐이다. 제브라 자작에게 너무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은 제브라 자작이 없다.

 사사사사사삭!

 가르딘의 신형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눈을 깜빡거리는 순간에 기사들 앞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순간에 기사들의 목이 기이하게 꺾여 바닥에 쓰러졌다. 여섯 명이 바닥에 쓰러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호흡 정도였다.

 “이제 가야겠군.”

 가르딘은 아버지의 방으로 가기 전에 켜놓은 촛불을 거실 바닥에 떨어뜨렸다. 떨어진 촛불은 금세 주변에 부어진 기름을 타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불장난을 많이 하는 것 같은 기분이야.”

 전에 산맥을 홀라당 태운 것을 시작해서, 이제는 어린 시절의 집까지 태워버려야 했다. 나이가 어렸다면 밤에 오줌 싸기 딱 좋은 일이다. 스케일이 커서 했다 하면 집 한 채 정도는 우스웠다.

 가르딘이 불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쉽기 때문이다. 증거인멸을 위한 일에 불장난만큼 쉬우면서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불이 제대로 타오르는 것을 확인한 후 가르딘은 아버지의 방으로 갔다.

 불이 나고 있는 저택의 밖으로 쩔뚝거리며 빠져나온 제브라 자작이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했다. 뒤에서 가르딘이 쫓아올지는 모른다는 공포감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가르딘 후작! 무서운 인물이다!”

 모두의 이목을 이처럼 감쪽같이 숨기고 움직일 줄은 몰랐다. 헬리언이나 지토스 같은 용병들을 후일 사용하기 위해 남겨둔 용의주도함까지 보였다. 이번 일은 반드시 네벨리언 공작에게 전해야 한다.

 제브라 자작은 안간힘을 다하고 있지만 현재 상태로는 자작령으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리는 저리고 힘은 바닥이 나고 있었다. 우선은 체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4일은 소모될 것이다.

 “젠장! 다리만 괜찮았어도!”

 다리가 움직일수록 더 아파왔다. 이제는 거의 마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삭!

 검은 인영이 제브라 자작의 시야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브라 자작의 시야는 좁아져 있었다. 검은 인영들이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가르딘은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비밀통로를 통해 빠르게 이동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제브라 자작이 움직이는 시간보다 빨리 움직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가르딘은 섬전행을 극성으로 운용하였다.

 쌔애애앵!

 바람을 가른다. 마치 가르딘을 중심으로 바람이 좌우로 갈라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동굴 내부를 시끄럽게 울렸다.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산 반대편이 나온다.

 찌릿!

 일정 거리를 격하고 어두우면서 짙은 핏기를 머금은 살기가 전해졌다. 오감이 극도로 발달하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있었다.

 가르딘은 섬전행을 시전하면서 감각을 끌어올렸다.

 “싸운다?”

 산 반대쪽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가르딘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설마 반대쪽에서도 놈들이 수작을 부렸을 줄은 몰랐다.

 “이런 젠장!”

 아버지와 형제들을 데려 가는 일이다. 잘못된다면 화를 참지 못할 것이다. 가르딘은 느낄 수 있었다. 미워하는 것도 정이 남아 있기에 생기는 것을 말이다. 남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굳이 상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피로 이어진 관계는 완전한 남이 될 수 없었다.

 ‘침착해야 된다!’

  가르딘은 애써 감정을 억눌렸다. 감정의 흐트러짐은 실수를 가져온다. 그것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이 될 것이다. 차분하게 생각을 해야만 답을 낼 수 있다.

 “내 가족을 위협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쌔애애애애앵!

 가르딘은 바람을 가르며 쏘아져 나갔다.

 “허억! 허억! 허억!”

 사이론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상체와 하체를 가리지 않고 길게 베인 옷자락에서는 핏물이 흘러내렸다.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이론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강렬한 투지를 불태웠다.

 ‘영주님의 가족이다! 반드시 지킨다!’

 사이론의 뒤에는 오브라이언 남작을 비롯한 식구들이 있었다. 사이론이 패하면 이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다.

 ‘문제는 저놈이다!’

 덤벼드는 열 명의 어쌔신들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음습한 놈이야말로 움직인다면 자신의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놈은 지독하게 여유로웠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한 행동이다.

 짝짝짝!

 “이거 놀랄 정도인데, 폭풍의 용병 지토스가 익스퍼트 중급 이상이라니 말이야!”

 정보에는 지토스가 익스퍼트 초급을 갓 넘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몇 년간 사라졌다가 나타나더니 이미 중급을 넘어서 있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용병왕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아무튼 좋아.”

 그가 나서려고 하자 열 명의 어쌔신이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오브라이언 남작의 식솔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방위만 차단하고 있었다. 어차피 도망갈 수 있는 곳도 한 곳뿐이다. 산의 계곡 사이에 나 있는 길목이 전부였다. 길목을 차단하고 있기에 뚫고 지나가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그는 사이론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보고 있는 야수의 눈빛이었다.

 사이론은 놈의 존재감이 보통 이상이라는 것을 느꼈다. 기감수련을 하다 보니 안 좋은 것도 있었다.

 ‘질 것 같다!’

 상대의 강함이 느껴지자 자신감이 떨어졌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사이론은 투지를 불태웠다. 지든 이기든 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사이론은 놈의 전신을 살폈다. 놈은 어깨부터 손까지 미세한 쇠줄로 이어진 그물망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너무 촘촘하고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볼 수 없었다.

 “그럼 한 번 해볼까.”

  놈이 먼저 움직였다. 검을 들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사이론은 놈의 허술한 공격에 의아함을 느꼈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공격이다.

 사이론은 검을 들어 놈의 팔을 잘라버리려고 했다. 갑옷 같은 철망을 입혔다고는 하나 오러를 입힌 검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검과 놈의 손이 부딪치려는 찰나에 사이론은 순간적으로 오싹한 기분을 맛보았다.

 ‘위험하다!’

 푸아아아앙!

 마력탄이 터지는 것 같은 충격이 사방으로 울렸다. 뿌연 연기사이로 사이론이 어기적거리며 물러섰다. 입가에 비릿한 혈향이 감돌았다. 순간 감지한 위험한 감각이 아니었다면 터지는 위력을 몸으로 다 감당해야 했다. 간신히 몸을 틀어 피하기는 했지만 몸의 절반가량이 검게 그을렸다.

 “크윽!”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호흡을 크게 하면 핏물이 역류할 것만 같았다. 사이론은 놈이 다가옴에도 움직일 힘이 별로 없었다.

 “내 붐 익스폴로젼을 본능적으로 피하다니 제법인데.”

 사이론은 칭찬하는 놈의 말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놈이 다시 한 번 같은 공격을 하면 막아낼 자신이 없다. 검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이론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영주님! 언제 올 겁니까?’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가르딘과 함께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생각해 보니 많이도 당했다.

 놈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빨랐다. 아니 전과 같았지만 사이론의 몸이 둔해져서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착!

 놈의 손이 사이론의 오른손을 잡았다. 또다시 폭발이 일어날 줄 알았건만 터지지는 않았다. 대신에 사이론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네놈의 생명력과 오러는 내가 잘 쓰마!”

 “사악한 …. 크윽!”

 사이론은 놈에게 기운이 빨려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반항하지 못했다. 전신의 힘이 순식간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생명력과 오러를 빨아들이는 수법은 사이론도 처음이었다.

 투툭!

 사이론의 얼굴과 몸에서 힘줄이 튀어나왔다. 버티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멈추어라!”

 오브라이언 남작이 참지 못하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소리쳤다.

 “흥!”

 그러자 놈은 가소롭다는 듯이 오브라이언 남작에게 작은 구슬을 던졌다. 구슬은 빠르게 날아가 오브라이언 남작의 가슴을 가격했다.

 “커어억!”

 가슴을 직격당한 오브라이언 남작이 바닥에 쓰러졌다. 죽지는 않았지만 당분간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놈들!”

 라이벨과 류카이젠도 소리쳤다. 그러나 상대는 손속에 가차 없었다. 또다시 구슬이 날아가 라이벨과 류카이젠을 가격했다. 구슬을 받은 두 형제는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놈이 말했다.

 “사로잡으라는 말만 아니라면 모두 죽었을 것이다. … 응?”

 놈이 위험한 감각을 느꼈는지 사이론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에 오러가 공간을 베고 날아갔다. 허공을 격해서 공간을 벤 인물은 순식간에 모습을 나타냈다. 어둠을 가르고 빠른 속도로 날아온 가르딘은 쓰러져 있는 아버지와 두 형들, 사이론을 보았다. 다행히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어쌔신들인가?”

 가르딘을 향해 열 명의 어쌔신들이 덤벼들었다. 침착한 것 같지만 가르딘은 극도의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열 명이 포위를 하듯이 다가섬에도 가르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다가오는 놈들에게 죽음이 얼마나 가혹하고 두려운 것이 보여줄 뿐이다.

 - 무극칠검식-제4절초-극한살인검.

 가르딘의 검에서 무극칠검식의 가장 잔인한 살검이 분출되었다. 인체의 가장 중요한 대혈 중에서도 극한의 고통을 느끼는 열여덟 개의 혈을 끊어버리는 잔인한 수법이 다시 한 번 재현되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무분별하게 죽이는 놈들 따위는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 특히 자신과 연관이 된 사람들을 건드리는 자에게 편안한 죽음은 관용이었다. 어쌔신들에게 자비는 필요 없었다. 태어난 것을 사죄하며 고통스럽게 죽는 것만이 남을 뿐이다.

 사아아아아악!

 살이 베어 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에 열 명의 어쌔신들은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어쌔신들은 또다시 선명하게 느껴지는 극한의 고통에 바닥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고통으로 인해 눈동자는 흰자위만 보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생살이 벗겨지는 고통의 족히 세 배에 달한다. 일정 수준의 고통을 넘어서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극한살인검이었다.

 어쌔신들은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극한살인검의 고통은 그들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쌔신이 되기 위해서 받았던 수련과 고문들도 극한살인검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착! 꽈악!

 “이놈!”

 어느새 놈이 가르딘의 몸을 뒤에서 잡았다. 사이론은 숨을 헐떡이며 위험하다고 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놈은 생명력과 오러를 빨아들입니다.”

 “알고 있다.”

 사이론의 기를 흡수하는 장면을 보았던 가르딘이다. 가르딘의 별것 아닌 대답에 놈은 기분이 상했다.

 “네놈이 아무리 강해도 내 손에 잡힌 이상 죽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내 이름이나 알고 죽어라! 나는 세본 다크 중의 플로젼다크 가솔트라고 한다. 내가 운용하는 데절트컨트롤에 의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가솔트가 익히고 있는 데절트컨트롤은 사람의 생명과 오러를 물이 없는 사막처럼 만들어 버리는 사악한 심법이었다. 마치 마교의 흡정마공과 흡혈마공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가르딘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가솔트의 몸이 가르딘의 오러를 빼앗아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르딘은 별반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고통보다는 분노가 상승할 뿐이다.

 “사람을 뭐로 아는 거지.”

 “그야 먹이지. 크크크크!”

 가솔트는 사람을 그저 먹이로 보고 있었다. 가솔트는 이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자가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는가!

 “큭!”

 가르딘의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뭐가 우습지?”

 “스스로는 강해지지 못하는 놈들이 잘난 체하는 것이 우스울 뿐이지.”

 “이놈! 네놈은 뼛조각도 남지 않을 것이다!”

 “한 번 해봐!”

 “울며불며 매달려도 이미 늦었다!”

 가솔트는 데절트컨트롤을 극성으로 운용하였다. 주변의 기운까지도 가솔트에게 흡수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우우우우웅!

 굉장한 기운이 가솔트에게 흡수되었다. 너무 엄청난 기운이었다. 신성하면서도 맑으며, 대기의 모든 기운을 포함하고 있었다. 기운은 줄어들지 않았다. 점점 더 거대해져만 갔다. 마치 대해의 물을 마시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붕 뜨는 것처럼 좋아지던 가솔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기운을 흡수해도 끝이 없었다. 데절트컨트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뜻이다. 오러마스터의 기운도 흡수할 수 있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일은 처음이었다.

 “말도 안 돼!”

 벗어나야 했다. 이 이상 기운을 흡수하게 되면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 벗어나기 위해 가르딘을 감싸고 있는 팔을 풀었다.

 차악!

 빠져나가려는 가솔트의 팔을 가르딘이 돌아서서 잡았다. 너무 빠르다 보니 미처 잡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했다. 잡힌 손을 뿌리치기 위해서 가솔트는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몸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가르딘의 기운을 다스리는 것도 힘들었다.

 “놔라!”

 “왜 그러지? 먹이를 주는데 먹지 않는 건가.”

 “놓으란 말이 …. 크윽!”

 “배가 불렀군.”

 데절트컨트롤 운용하는데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가솔트의 몸에서 미친 드래곤(광룡)처럼 날뛰는 가르딘의 천룡 무상진기였다.

 “으으으으윽! 이놈! 죽어랏!”

 억지로 기운을 일으켜 붐 익스폴로젼을 시전한 가솔트였다. 사실상 마지막 일격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에서 간신히 공격을 가한 것이다.

 푸아아아아앙!

 잡고 있던 가르딘의 오른팔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굉장한 폭발이었다. 사이론에게 사용한 붐 익스풀로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가르딘에게서 흡수한 기운을 일정 부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이럴 수가! 크아아악!”

 터져야 할 가르딘의 팔은 멀쩡한 대신에 가솔트의 팔이 날아가 버렸다. 가르딘의 응축된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가르딘은 남아 있는 가솔트의 왼팔을 잡았다. 그러면서 천룡무상신공을 운용하였다. 지속적으로 천룡무상신 공을 사용하여 가솔트에게 억지로 집어넣고 있었다. 천지간의 기운 중에서 가장 강력한 기운이 천룡무상진기다. 가솔트 따위가 흡수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유입되는 천룡무상진기로 인해 가솔트의 데절트컨트롤은 포화상태가 되어갔다.

  가솔트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얼굴이 부풀어 오르면서 눈동자도 터져버릴 듯이 튀어나왔다.

 “그 … 만. 제발 그 … 만! 으 … 아아악!”

 “네놈들은 살려 달라는 사람을 살려준 적이 있는가. 하긴 어쌔신 따위가 목표물을 살려둘 리가 없지. 나도 그렇다. 나도 내 가족을 노리는 자를 살려둔 적이 없다.”

 가솔트의 몸은 10여 분 동안 계속 부풀어 올랐다.

 인간의 몸이 늘어나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 고통은 직접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가솔트는 말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푸아아아아아앙!

 결국 터져버렸다.

 온몸을 구성하고 있는 살과 뼈,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무척이나 잔인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핏물을 뒤집어쓴 가르딘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의 형상이었다.

 가솔트가 죽자 곧이어 쓰러져서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던 어쌔신들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오브라이언 남작의 식솔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쌔신들도 무서웠지만 어쌔신들을 잔인하게 죽인 가르딘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아버지와 두 형을 제외하고 나머지 식솔은 가르딘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말을 해봐야 혼란만 자초했다. 자초지종은 발키리 영지로 무사히 도착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사이론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좀 전에 가솔트가 기운을 흡수할 때 솔직히 죽음을 예감했다. 몸에서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것은 겪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순간 흡수된 생명력만으로도 일어설 힘도 없었다. 그런데 한참을 흡수당한 가르딘은 멀쩡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오러마스터라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저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강한 것은 둘째 치고 망설임 없는 잔인한 손속은 정말 알아주어야 했다. 평소에 농담 따먹기나 하는 모습과는 비교 불가였다. 과연 누가 있어 저 인간의 진면목을 알 것인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가르딘은 기절해 있는 아버지와 두 형들에게 다가갔다. 식솔들이 가르딘을 두려워했으나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바로 움직여야 한다.

 가르딘은 아버지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천룡무상진기를 이용하여 기운을 차리도록 만들었다. 두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운을 이용하여 추궁과혈을 한 것이다.

 지쳐 있는 사이론에게도 기운을 불어넣어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아버지와 두 형은 정신을 차리자 주변을 돌아보았다. 가족들이 무사한지를 확인한 것이다. 가족이 무사한 것을 알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가르딘이 눈앞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구나!”

 아버지와 두 형은 진심이었다. 가르딘이 말한 대로 위험한 일이 벌어졌다. 잘못했으면 가족들이 모두 사로잡히거나 죽었을 것이다. 이후에 일어날 끔찍한 일을 생각하면 아찔할 정도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제 영지로 갈 겁니다.”

 “알겠다.”

 가르딘을 따라 아버지와 두 형의 식솔들이 모두 움직였다. 아버지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수백 년을 지내온 영지를 떠나야 하기에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못난 저를 용서하십시오!’

 오브라이언 남작은 조상에게 사죄를 올렸다.

 가르딘이 데포론 영지를 떠나고 정확히 2일 후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은 인포메드와 상인 연합을 통해 퍼져나갔다. 그로 인해 제국에 급속도로 소문이 퍼졌다. 소문의 진위 여부는 확실한 것 같으면서도 모호했다.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제브라 자작이 데포른 영지의 오브라이언 남작가에 있었다고 한다. 불이 난 오브라이언 남작가에 왜 제브라 자작이 있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그가 있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소문의 내용은 이렇다. 범인을 명쾌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문이었다.

 오브라이언 남작가와 제브라 자작가의 기사대결이 이루어졌다. 승패를 떠나 다 쓰러져가는 오브라이언 남작가를 제브라 자작이 왜 건드렸을까? 데포른 영지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과연 이것이 그저 귀족의 명예를 위한 기사대결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제브라 자작이 기사대결에서 패배했다. 그날 밤 오브라이언 남작가에 불이 났다.

 그런데 왜 제브라 자작이 검은색 복장을 하고 불이 난 오브라이언 남작가에 있었을까?

 불이 난 오브라이언 남작가에 의문의 시체가 확인되었다. 오브라이언 남작과 식솔은 아니었다. 모두 검을 들고 있었기에 의문은 더욱 커진다. 과연 이 사건은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일까!

 이번 일을 둘러싸고 가르던 후작이 비밀리에 가족을 피신시켰다고 한다! 이는 가르던 후작의 개입을 위한 일인가?

 어느 것 하나 진실은 밝혀질 기미가 없다.

 주관적인 진실과 객관적인 사실을 섞어놓은 것 같다. 하지만 허위사실은 아니기에 죄를 물을 수도 없다. 사실이기에 누구도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저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단어 선택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과연 사람들은 소문을 통해 다른 추론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문이 나고 3일이 더 지났다.

 소문은 결국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일반 상인들과 인포메드의 정보 파급력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당연히 네벨리언 공작의 귀에도 소문은 들어갔다.

 파아앙!

 탁자를 거세게 쳤다.

 심기가 불편한지 표정이 좋지 않는 네벨리언 공작이었다. 그 앞에서 있는 빌링턴 백작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숨을 죽였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냐?”

 “면목 없습니다!”

 “그놈의 명성을 더럽히라고 했더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죄송합니다! 설마 가르딘 후작이 개입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닥쳐라! 그 정도는 예상했어야지. 그따위 주변머리로 어떻게 일을 추진할 수 있단 말이냐!”

 가르딘을 끌어들여서 제거하지 못한 이상 명성에라도 타격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입장이 뒤바뀌어 버렸다. 가르딘 후작은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이 되었고, 네벨리언 공작은 가르딘 후작을 흔들기 위해 흉계를 꾸민 사람이 되었다.

 네벨리언 공작이 소문에 직접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추해 보면 뒤에 네벨리언 공작이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제국의 5대 공작이기에 함부로 말하지 않을 뿐이었다.

 “소문이 어디까지 퍼졌지?”

 “제국 곳곳으로 퍼진 것으로 보이나 실상 발리스타 공작령과 파스트론 공작령을 중심으로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런 젠장! 그놈이 미리 선수를 친 것이 분명한 것이 아니냐!”

 네벨리언 공작은 가르딘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저 운 좋게 오러마스터가 된 놈이 아니었다. 놈은 처음부터 자신의 계략을 파악하고 손을 써놓고 있었다. 발리스타 공작령과 파스트론 공작령에 소문을 먼저 낸 것은 자신을 위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네벨리언 공작의 명성에 타격을 줄 것이다. 정치 구도에서 작은 오점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판국에 이런 큰 문제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멍청한 그놈은 어찌 됐느냐?”

 “저택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브라 자작이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소문을 미리 차단할 수도 있었다. 4일이나 늦게 오는 바람에 소문은 일파만파로 커져버렸다. 네벨리언 공작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입단속 철저히 시키고 변방으로 보내버려!”

 “예, 공작님!”

 제브라 자작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실수를 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르딘이 개입한 상황에서 일개 자작 따위가 상대가 될리 없다.

  이제까지 탄탄대로였던 출셋길이 막혀버리는 일이 발생해 버렸다. 아무래도 평생 변방에서 썩혀야 할 것이다. 하급 귀족의 비애를 겪게 된 제브라 자작이었다.

 “이만 나가봐!”

 네벨리언 공작은 자신이 애송이에게 크게 한 방 먹었다는 것에 열불이 터졌다. 놈은 지금쯤 자신을 비웃고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놈! 언젠가는 후회하게 해주마!”

 지금은 자중할 때다. 소문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며 모든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먼저였다.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끝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은 어리석은 일이다. 반대편에서 절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끝까지 침묵과 부정으로 일관해야 한다. 자신은 전혀 상관이 없음을 주장해야 한다. 그에 대한 준비도 철저히 해서 파고 들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지니언 황자가 죽은 것을 제외하고 가장 큰 오점이 생긴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가르딘에 대한 증오는 점점 커져서 불타올랐다.

 가르딘으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가만히 있는데 건드리고 지들이 더 화를 내니 말이다. 짜증이 쌓이는 것은 네벨리언 공작만이 아니었다.

 다마트 3황자에게도 소문은 들어왔다. 그전에 이미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라고 타이가라 공작에게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저 단순한 소문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네벨리언 공작의 명성이 타격을 입게 되면 결과적으로 다마트 황자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마트 황자에게는 불리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다마트 황자가 타이가라 공작과 마주 보고 앉았다.

 심기가 불편한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묵묵히 차를 마시는 다마트 황자였다. 무표정한 다마트 황자에 비해 타이가라 공작은 두려운 듯 몸을 움츠렸다. 조용할 때의 다마트 황자에게는 사람을 공포로 젖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상황은 어떻게 됐지요?”

 “생각보다 심각한 편입니다.”

 “귀족들은 어떻지요?”

 “불편한 심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후르르륵!

 다마트 황자는 말을 하고 난 후 차를 마셨다. 은근히 목이 타고 있었다. 침이 바싹 마르기는 타이가라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왜 실패한 건가요?”

 “중간에 가르딘 후작이 개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세력을 동원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후후!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는 다마트 황자였다. 눈빛 사이로 검붉게 피어오르는 진득한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오싹한 소름을 느낀 타이가라 공작이었다. 오러마스터조차 대항하기 힘든 기운이었다.

 “길드에서 모르는 세력이라. 가르딘 후작을 너무 얕보았군요.”

 한 방 제대로 먹은 상황이다.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면 더욱더 불리하게 진행이 된다. 이제는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제국의 멈춰졌던 흐름을 빠르게 움직일 필요성이 있었다. 격동의 시기는 단 하나의 시발점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기름에 불을 붓듯이 더욱더 타오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명령을 내려주신다면 제가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타이가라 공작도 흔들릴 때가 있군요. 가르딘 후작이야 때가 되면 없앨 수 있습니다. 미리 제거하지 못했다고 과오를 저지를 생각입니까! 지금부터는 자잘한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을 겁니다.”

 오러마스터의 존재가 위험한 것은 사실이나, 큰 흐름 속에 존재하는 축에 불과했다. 확실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섣불리 나서게 되면 큰 화를 자초하게 된다.

 “우위를 점하지 못한 것은 대외적으로 보인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길드의 정예병이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그 얘긴 아직 꺼내지 마세요. 우선은 시간이 멈춰진 황도를 시끄럽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현 시점에서 은밀하게 파고드는 정보력이 있었다. 다마트 황자와 타이가라 공작의 주변을 은밀히 감시하던 존재들이 서서히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생각보다 더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기에는 위험이 컸다. 더군다나 시간을 계속 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이상 지체했다가는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들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피닉스윙의 정보력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것 같군요.”

 “황제 직속으로 움직이는 단체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존재들이 있을 겁니다!”

 “날파리들이 귀찮게 하는군요.”

 “그럼 계획을 진행합니까.”

 “증거가 남지 않도록 하세요.”

 “물론입니다! 다마트 황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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