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흉계@@]
가르딘은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군사력 증강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 나갔다.
영지 경영만큼이나 군사력 증강은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아야 한다. 아직까지 발키리 영지는 큰 영지만큼 사람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3만 이상의 병력을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증강 하려는 이유는 내전 시 출병을 하기 때문이다. 출전 후에 영지가 비게 된다. 만약 적들이 비어 있는 발키리 영지를 공격하게 되면 영지민이 위험해진다. 출전 병력 이외에도 영지 자체적으로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 필요성이 있다.
“상시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필요한데.”
병력을 운용하려면 자금이 더 필요하다. 또한 내전 시 사용할 자금도 마련해야 했다.
뜻하지 않은 자금 운용으로 공백기가 발생했다. 가르딘의 영지 경영이 미숙함을 보여주는 사태였다. 여유자금을 확보해 둘 필요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에 이끌려 자금 충당을 제대로 해두지 않은 것이다.
가르딘도 인정해야 했다. 경험이 아직 일천한 상황이라 판단이 항상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골치가 아프군.”
가르딘이 골머리를 썩일 때 파멜라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파멜라는 시종장으로서의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영지 운영의 대부분은 모두 파멜라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멜라가 없었다면 가르딘의 골치는 터져버렸을지도 몰랐다.
“문제가 발생했어요.”
“또?”
“영지에 관한 문제는 아니에요. 다만 ….”
“다만 뭔데? 뜸들이지 말고 말해 봐.”
“오브라이언 남작가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테이란 지부장이 소식을 전해왔어요.”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부채는 이미 탕감해 준 상황이었다. 가르딘은 그 이상 발생하는 문제까지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도와준 것도 많은 출혈을 감소한 것이었다.
“금전적인 도움은 이제 됐어.”
“그것이 아니에요.”
“그럼 무슨 문제라는 거야?”
파멜라는 조심스럽게 오브라이언 남작가에 벌어진 사태를 설명했다.
요점은 오브라이언 남작가와 제브라 자작가가 기사대결을 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오브라이언 남작가는 기사대결을 할 자유기사나 용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두 형제가 직접 나서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실력 있는 기사와 용병을 모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골고루 하는구나!”
도와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고를 쳐대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가르딘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할 일 이다.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
“이상한 것이 있어요.”
“뭐가?”
“제브라 자작의 영애가 왜 갑자기 데포른 영지에 갔느냐는 거예요. 굳이 일을 크게 벌이지 않아도 되는 일을 기사대결로 몰고 가는 것도 이상해요.”
‘흠!’
그제야 가르딘도 이상함을 감지했다. 형들에 대한 악감정으로 인해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미리 단정해 버린 것이다. 가르딘의 명백한 실수였다.
“잠깐! 제브라 자작이 네벨리언 공작가의 직속이지.”
“맞아요.”
“냄새가 나는데. 필리언의 발 냄새만큼이나 지독해!”
제브라 자작은 네벨리언 공작이 인정하는 중요 귀족이었다. 공적이 없어서 그렇지 실력만 놓고 보면 절대 만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제브라 자작이 쓸모없는 데포른 영지를 노리는 것 자체도 이상한 일이었다.
“네벨리언 공작이 직접 수용한 일이겠지.”
네벨리언 공작령 내의 일이라 반드시 네벨리언 공작의 제가가 필요하다. 네벨리언 공작의 제가가 너무 빨리 떨어진 것도 이상했다.
네벨리언 공작의 제가가 떨어진 상황이니, 가르딘이 후작의 지위로 개입하기도 힘들어졌다. 직접적으로 도울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있다면 개인적으로 움직여 오브라이언 남작가를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가르딘은 낌새가 이상함을 느끼자 바로 동기들을 불렀다.
아무래도 각자의 의견을 들어보아야 했다. 가르딘 혼자만의 생각으로 결정을 짓기에는 무리가 있는 사안이었다. 동기들에게 미리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겉으로 보기에는 정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구린 냄새가 많이 나는데.”
“맞아. 필리언의 발 냄새만큼이나 냄새가 나!”
“내가 뭘! 냄새는 무슨 냄새가!”
갈라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말을 했다.
“애초에 네벨리언 공작의 수족이라고 할 수 있는 빌링턴 백작이 돈을 빌려준 것부터가 이상하게 생각이 되는데. 마치 네가 돈을 빌려준 것을 확인하자마자 달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음!’
듣고 보니 갈라의 말에 신빙성이 있었다. 가르딘은 그것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파이트너 상단을 통해 돈을 융통 했기에 자세히 조사하지 않으면 가르딘이 뒤에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벨리언 공작이 작정하고 조사하면 밝혀지기 마련이었다. 숨길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데포른 영지는 이미 망한 상태야. 더 이상 건드려봤자 얻을 것도 없는 곳을 다시 또 건드리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아?”
“더군다나 네벨리언 공작의 제가가 떨어졌어. 이렇게 되면 네가 개입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아. 아니면 개인적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유타의 말을 들어보니, 목표는 오브라이언 남작가가 아닌 것 같았다. 가르딘은 동기들의 말을 분석하고 하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결국 나군.”
“그렇지.”
“내가 단독으로 움직일 거라 생각하는 건가.”
가르딘이 직접 가서 기사대결을 이겨버리면 그만이었다. 솔직히 오러마스터를 상대로 기사대결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가르딘이 네벨리언 공작령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발키리 영지와는 대륙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척이나 먼 거리를 홀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적의를 가진 네벨리언 공작이 가만히 손 놓고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힘들겠지.”
“네벨리언 공작이 가만있지 않을걸.”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도 관여하는 것을 꺼릴 것이다. 만약 관여하게 되면 네벨리언 공작은 물론 타이가라 공작과 마이어 공작까지 들고 일어설 가능성이 있었다. 내전의 향방이 급속하게 변할 수 있었다. 괜히 기름에 불을 지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지 내에 나를 감시하는 수상한 움직임이 있을 텐데.”
“이미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는지 모르지.”
수상한 움직임은 아직까지 없었다. 이미 들어와서 자리 잡고 있는 상태라면 확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가르딘은 직접 가는 것을 제외하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문제는 자신이 가게 되면 발키리 영지가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이미 결별한 혈육을 위해 자신이 움직여야 하는지도 고민이었다. 독하지만 현실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가르딘은 가지 않는 쪽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가지 않겠다.”
“그렇게 되면 네 아버지와 형제들 모두 죽을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지.”
“상대는 너를 끌어들이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어. 그 희생자로 오브라이언 남작가를 선택한 거지. 가르딘! 솔직히 네가 모든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르딘도 책임감을 무겁게 느꼈다. 아버지와 형들을 싫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람은 가르딘이었다. 가르딘과 네벨리언 공작 사이의 악감정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아무 감정이 없을 것이라던 가르딘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와 형들이 죽을 수도 있다. 과연 나는 아무렇지 않은가!’
아무렇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끊고 싶다고 해서 끊을 수 있는 피의 굴레가 아니었다.
“오늘은 생각 좀 해볼 테니 다들 나가봐.”
“무책임한 소리지만 나는 네가 움직였으면 한다.”
냉정하지만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도와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필리언은 가르딘의 동기로서 말을 해주었다. 가르딘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파멜라와 동기들이 나가고 난 후 홀로 남게 되었다. 밤이 깊어가는 시간까지 가르딘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선택의 기로가 이토록 무겁다니 세상 살아가는 일이 정말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밤늦도록 고민하는 가르딘에게 라이나가 찾아왔다.
“라이나, 무슨 일이야?”
“파멜라에게 들었어요.”
“가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겠지.”
“당신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따뜻한 사람이잖아요!”
“나는 당신과 브리안만 지키면 돼. 이미 남이 된 사람을 위해 내 가정을 깨뜨릴 수는 없어.”
“당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아파요. 하지만 버렸다는 자책감에 시달릴 당신이 더 마음 아플 거예요.”
“후우우!”
라이나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르딘이 결심을 굳히게 하는 결정적인 한마디였다.
사실 약간의 위험이 있겠지만 가르딘에게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그랜드마스터라는 엄청난 실력을 가진 가르딘을 위협할 존재는 사실상 없었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실력을 드러내기 꺼렸을 뿐이다.
“방법을 찾아볼 테니 당신은 괴로워할 필요 없어.”
“역시 당신은 착해요.”
라이나가 살며시 가르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마흔 살이 다 되어서 착하다니, 좋아해야 할 일인가.”
당연하죠.”
“그럼 당신도 무지하게 착해!”
가르딘도 라이나의 얼굴과 몸을 쓰다듬었다. 서로에게 칭찬하는 이상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럼 착한 우리를 위해 오늘 밤 불태워 볼까!”
“아이, 당신도 참!”
라이나도 싫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싫을 리 없었다. 불타는 밤은 가르딘만 좋은 것이 아니니 말이다. 베로나를 통해 비법을 전수받은 가르딘과 라이나였다. 잠시 고민을 잊고 2세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불태웠다.
가르딘은 다음 날 다시 회의를 열었다.
결정을 한 가르딘은 한결 편안한 모습이었다. 어제 라이나 와의 불타는 밤이 효과가 큰 것 같았다. 마음속의 고민과 잡념을 모두 털어버렸으니 홀가분했다.
가르딘은 동기들을 비롯해서 한 명 더 불렀다. 평소 뼈 빠지는 수련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사이론이었다. 그동안 가르딘이 바쁜 관계로 동기들이 수련을 대신 가르쳤었다. 마음이 편안해서 수련이 더 잘된 것인지, 실력이 제법 상승했다. 이제 오러익스퍼트 중급에 다다라 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내 얼굴을 보면 느껴지는 게 없냐?”
“못생겼다.”
“닥쳐!”
“왜! 사실을 말하는데.”
필리언의 말에 갈라와 유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론도 은근슬쩍 끄덕이려다가 가르딘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가겠다.”
“그럴 필요 있을까. 차라리 우리 중에 한 명이 가도 되잖아. 어제는 그저 너의 의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아니, 데포튼 영지를 잘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가르딘은 차마 동기들을 위험해 빠뜨릴 수 없다는 낯간지러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해봤자 거짓말이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동기들도 가르딘의 속뜻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 해결한다고 해도 네벨리언 공작령 안에 계속 머물게 되면 다시 비슷한 일이 생길 거야. 내 뜻을 알겠지.”
“만약 싫다고 하면.”
“강제로 해야겠지.”
“역시 할 때는 확실하게 끝장을 봐야지.”
후환은 남겨두지 않는다. 계속 끌려 다니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도 없었다. 그럴 바에는 원인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가르딘이 사이론을 응시했다.
움찔!
가르딘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놀라는 사이론이었다. 요즘 들어 점점 새가슴이 되어갔다.
“놀라긴.”
“누가 놀랐다고 그럽니까!”
“아니면 말고. 그보다 홀로 움직이는 용병 중에 너하고 비슷한 실력을 가진 녀석들을 알고 있냐?”
“과거의 저와 비슷한 실력자는 꽤 됩니다.”
“호오, 과거라. 지금도 그다지 실력은 없어 보이는데.”
‘그건 당신들이 괴물이라서 그렇지!’
오러 익스퍼트 중급이면 상당한 실력자다. 용병 중에 중급을 넘어서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있다면 5대 용병단의 단장 정도뿐이다.
사이론은 무시당했다는 것에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존재들은 모두 오러마스터였다. 오러마스터 앞에서 실력 자랑을 해봤자 자신만 손해 본다.
“그중에서 종적이 묘연한 녀석들이 누가 있지?”
“생각나는 녀석들은 딱 두 명 정도입니다.”
“행적이 사라진 이유를 알고 있나?"
“예전에 지옥의 사막을 건너는 의뢰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 두 사람의 종적이 사라졌습니다.”
지옥의 사막은 대륙의 남쪽 끝에 자리한 사막을 뜻한다. 지옥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곳곳에 사막 몬스터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막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바실리스크는 상대하기가 무척이나 껄끄러운 존재다.
“죽었겠군.”
“모두 죽었다고 단정하지만 시체를 찾지 못했으니 살았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이론이 말한 용병은 질풍의 용병 헬리언과 폭풍의 용병 지토스였다. 둘 다 용병계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들로 지옥의 사막에서 실종만 되지 않았어도 차기 용병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인정받았다.
가르딘은 둘 중에서 헬리언의 얼굴과 사용하는 검법을 상세하게 물었다. 검법은 스톰 검법과 비슷한 허리케인 검법을 시용하고 있었다. 회전력에 바탕을 둔 검법의 일종이었다.
“필리언, 내가 없는 동안 내 역할을 좀 해줘야겠지.”
“맡겨만 둬라.”
“그런 말이 아냐!”
가르딘이 갑자기 움직여 필리언의 마혈을 제압했다. 방심한 순간에 꼼짝없이 당한 필리언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보면 알아.”
“너, 설마!”
“설마가 사람 잡지.”
“안 … 돼!”
“안 되긴 이미 한 번 봤잖아!”
영지의 관리를 맡기는 줄 알았던 필리언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가르딘은 필리언이 당황하든 말든 천변만환술을 시전했다. 천룡무상진기를 미세하게 나누어서 필리언의 12대 요혈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필리언의 12경락에 천룡무상 진기가 흘러들어 이동하자 점차적으로 몸과 골이 바뀌게 되었다.
30분 정도가 소요가 되는 작업이었다. 세밀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최소 2개월 이상을 버텨야 했다.
필리언의 얼굴이 점차적으로 변해 완성이 되어갔다. 변한 얼굴을 본 갈라, 유타, 사이론은 기겁할 정도로 놀랐다. 마법이 아님을 알기에 더 놀랐다. 사람의 얼굴과 몸을 바꾸는 것은 9서클 폴리모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변한 인물이 가르딘이라는 것에 있었다.
“이런 경악스런 일이!”
“가르딘이 두 명이라니! 이건 재앙이야!”
필리언은 죽을 맛이었다. 천룡무상진기가 온몸을 헤집고 다니는 느낌은 그다지 추천해 줄 만하지 않았다. 마치 뱀이 전신을 타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르딘이 되다니! 갑자기 자살하고 싶다!”
“인마, 멋있게 변했으니까 그만 징징거려.”
“시끄러.”
“아무튼 영지를 잘 부탁한다. 멋있는 가르딘 후작!”
“웃기고 있어!”
단, 내 마누라가 예쁘다고 찝쩍거리면 죽을 줄 알아!”
“뭐! 이런 미친!”
가르딘의 말에 필리언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필리언을 변신시키고 난 후 가르딘도 헬리언으로 변했다. 용병으로 활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간단한 방법이었다. 신분을 들킬 염려도 없으니 무난하게 진입이 가능할 것이다.
가르딘은 혼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진행할 수 없음을 알고 동기들과 계획을 짰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무리 없이 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동분서주하며 자유기사와 용병을 모집하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기사대결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다. 제브라 자작가의 블리쳐는 뇌전의 기사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로 뛰어난 기사다.
특히 귀족과 관련된 일에 함부로 발을 들이면 뒤끝이 좋지 않았다. 제브라 자작의 뒤에는 네벨리언 공작이 버티고 있었다. 일이 잘못되면 네벨리언 공작의 노여움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 괜한 일에 목숨을 거는 용병과 기사는 없었다.
더군다나 다 기울어가는 오브라이언 남작가로서는 뛰어난 기사를 섭외하더라도 돈을 지불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현재 남아 있는 데포론 영지를 모두 걸고 용병과 기사를 모집해도 모자라는 금액이었다.
“형님! 이제 어쩌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마! 이대로 당하기에는 억울하잖아!”
“그래도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년들!”
대외적으로 라이벨과 류카이젠만 나쁜 놈이 되었다.
술집 사건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나자 귀족가의 여인을 술 취해서 희롱한 놈들이 되어 있었다. 두 형제가 아니라고 말을 해도 믿어주는 사람들이 없었다. 오히려 싸늘하게 식어버린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제브라 자작이 시간을 주는 것 자체가 관용을 베푼 것으로 보였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너무 억울하다 보니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신해 죽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럼 어쩔 생각이냐! 이대로 손 놓고 모든 것을 빼앗겨야 속이 시원하냐!”
이제 빼앗길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기사대결에 지고 난 후 피해보상까지 하게 되면 모든 것을 잃는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 그리고 자신들의 식솔까지 모두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상황이다.
“차라리 가르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어떠냐?”
“녀석이 우리 상황을 모를 것 같습니까?”
“그럼 알면서도 가만히 있다는 말이냐!”
“그럴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르딘이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는 것을 알자 라이벨은 몹시 서운했다. 아무리 정이 없는 형제 관계라고 해도 같은 아버지를 두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냉정하게 외면하다니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에 대한 원한이 컸을 겁니다.”
“우리는 그렇다 쳐도 아버지까지 모른 척을 하다니 그건 너무한 일이 아니냐!”
“결국 말해 봤자 소용없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따져는 봐야겠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네벨리언 공작과 빌링턴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약속된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목표물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혈육의 끈을 부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처럼 냉담한 반응을 보이다니 그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버렸군.”
“놈이 우리의 목적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약간의 동요 정도는 보여줄 줄 알았건만.”
발키리 영지로 라이벨이 서신을 보낸 것을 확인했다. 도와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가르딘은 냉정하게 거절해 버렸다. 일언반구도 없이 거절해 버리다니 무섭도록 냉철한 놈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니 계획대로 하게. 정말로 버렸다면 놈이 원한다는 대로 끝을 내야지.”
네벨리언 공작의 눈빛에 살의가 번들거렸다. 계획이 어긋난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가르딘을 혈육도 버린 비정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었다. 명성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두 사람이 산을 넘었다.
빠르지도 느리지 않은 속도로 산길을 걸었다. 두 사람의 복장은 평범해 보였다. 평범한 복장에 비해 얼굴은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모습이었다. 또한 왼쪽 옆구리에 잘 만들어진 검이 차여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약간은 투박하면서도 거친 야성이 느껴졌다.
“이 산을 넘으면 데포른 영지다.”
“거의 다 왔군요.”
안도하는 듯한 말투였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자. 자리 만들어라.”
“예, 영주님!”
두 사람은 가르딘과 사이론이었다. 둘 다 헬리언과 지토스로 변한 상태였다. 완벽한 변신이라 가르딘과 사이론이라고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가르딘은 편안한 여정을 위해 사이론을 데려왔다. 이유는 특별수련이라는 거창한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가르딘의 시중이었다. 가르딘은 가만히 있고 노숙할 때 필요한 잡다한 일을 사이론이 다 해야 했다.
“오늘은 고기가 땡긴다. 가서 잡아와라.”
“알겠습니다.”
“명심해! 기감을 죽여. 산짐승은 감각이 예민해서 쉽사리 잡히지 않아. 또한 눈으로만 쫓으려고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 시간 안에 다섯 마리다. 못 잡으면 알지?”
“물 … 론입니다.”
못 잡으면 큰일 난다. 가르딘은 육체적으로 힘들게 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지치게 만든다. 하루 종일 잠도 못 자고 갈굼을 당해야 한다.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다음 날을 생활하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광속의 용병이라는 이름답게 민첩하고 빠르게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동안 다섯 마리를 잡으려면 빠듯했다.
산의 어둠은 더 어둡다. 또한 산짐승은 대단히 빠르다.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서 낌새를 채는 즉시 도망을 친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놓쳤었다. 다행히 가르딘의 가르침대로 기감을 열고, 기척을 죽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간신히 시간 안에 잡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괴롭히려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어!’
확실히 기감 수련을 계속하다 보니 오러에 민감해지고, 영역의 확대를 경험할 수 있었다. 폭넓게 주변을 관찰하는 능력이 생겨났다.
사이론은 한 시간이 걸려 다섯 마리의 산짐승을 잡아서 대령했다. 가르딘은 불을 피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잡아 온 늑대와 토끼의 껍질을 벗기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다. 요리는 투박하게 이루어졌다. 전문 요리사가 아니다 보니 쉽지만은 않았다.
가르딘은 식사를 하고 난 후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다시 데포론 영지로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다시 돌아온 하늘은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가르딘의 모습과 주변의 상황이었다.
‘내일 보게 되는구나!’
남겨진 시간 2개월 중에서 한 달 반이 훌쩍 넘었다. 이제 고작 15일 남은 것이다. 지금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똥줄이 타고 있을 것이다.
발키리 영지를 떠나온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영지에 소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만일을 대비해 가르딘은 필리언에게 거절하라고 했다. 조금의 동요도 없이 영지의 체제를 확고히 하는데 주력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서로 속고 속이는 세상이다. 누가 얼마나 확실한 연기를 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될 것이다. 먼저 속을 내비치는 쪽이 지는 것이다.
가르딘은 밤하늘을 보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첩첩이 자리한 산 능선을 타고 해가 서서히 떠올라 아침을 밝혔다. 햇살이 나무와 수풀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가르딘의 눈꺼풀을 자극했다.
사이론은 먼저 일어나서 주변을 정리하고 짐을 싸놓은 상태였다. 가르딘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심기가 불편한 상황임에도 깊은 수면을 취한 가르딘이다. 몸을 최상으로 만들어놓아야 머리도 잘 돌아갔다.
일어난 가르딘은 가볍게 목만 축이고 길을 나섰다.
“이제부터 너는 지토스라는 것을 명심해.”
“물론입니다.”
“그럼 형님이라고 불러라.”
“예, 형님!”
데포른 영지에 들어서기 전에 미리 용병패를 재발급 받았다. 용병패를 위조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쉽지도 않을 뿐더러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차라리 재발급을 받는 것이 안전했다. 또한 헬리언과 지토스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목적도 있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을 들였다. 그사이에 간단한 의뢰도 두 건이나 마쳤다. 물론 데포론 영지와 거리를 조절하기 위해 근처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마치 돈이 급한 듯한 인상을 비추었다.
산 능선을 타고 넘어가자 데포른 영지가 보였다. 영지의 대부분이 산악지형이라 밀농사나 상권이 발달하지 않은 영지였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가르딘은 과거의 기억이 스치듯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가르딘은 산맥 아래의 마을을 지나 오브라이언 남작가로 향했다. 반나절 정도를 빠르게 이동하자 오브라이언 남작가가 나왔다.
‘전보다 더 낡았네.’
20년 전이 더 나은 듯한 모습이었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건물을 보는 듯했다. 관리라도 제대로 되었다면 지금보다 나았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곳곳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관리의 허술함을 보여주었다.
가르딘이 저택 안을 기웃거리자 안에서 일하던 집사가 나왔다. 집사는 나이가 꽤 든 노인이었다.
‘해롤드.’
20년 전에도 집사를 보던 해롤드였다. 6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집사 일을 보고 있다니 대단한 노익장이었다.
집안에는 사람이 정말 없었다. 해롤드를 제외하고 세 명이 전부였다.
“무슨 일이시오?”
“용병 의뢰가 있다고 해서 왔소.”
“아! 그렇습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해롤드가 저택의 거실로 안내를 했다. 그리고 라이벨과 류카이젠을 불렀다.
용병이 왔다는 소식에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할 일을 마다하고 거실로 뛰쳐나왔다.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
“그대들이 의뢰를 받는다 했는가.”
“그렇습니다.”
두 형을 보는 가르딘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오랜만에 보는 두 형은 많이 늙었다. 과거의 모습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비대해진 몸과 주름 가득한 얼굴. 요 근래 벌어진 일로 인해 더욱더 초췌해 보였다.
다 쓰러져가는 저택과 초라한 두 형을 보자 갑자기 화가 나는 가르딘이었다. 형제끼리 다툼을 해서 얻은 결과가 고작 이것이었다. 참을 수 없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화를 가라앉힌 가르딘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라이벨과 류카이젠을 보았다.
“자네들의 신분을 확인했으면 하네.”
“헬리언이라고 합니다.”
“지토스라고 합니다.”
가르딘과 사이론은 용병패를 꺼내 신분을 확인시켰다. A급 용병이라는 것을 확인한 두 형제는 실력을 확인해 보았다.
가르딘과 사이론은 검을 꺼내 오러를 뿜어내었다. 겉으로 보이기는 A급이지만 진짜 실력은 S급에 달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렇기에 대하는 것이 달라진 라이벨과 류카이젠이었다. S급 용병은 준귀족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실력으로만 따지면 라이벨과 류카이젠보다 훨씬 높았다.
우선은 기본적인 사항을 얘기해 주었다. 상대하는 자와 목적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돈은 얼마나 주실 예상입니까?”
가르딘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용병이기에 철저하게 돈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의뢰비의 경우 원금의 반을 선지급하고, 일이 끝난 후 완불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돈을 먼저 주어야 한다.
의뢰비에 대한 조건이 나오자 라이벨과 류카이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상대는 보통 용병이 아닌 익스퍼트 중급의 S급 용병이었다. 어중간한 액수로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 했다.
“1천 골드를 주겠네.”
“흥!”
가르딘은 콧방귀를 뀌어버렸다. 어림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듯했다. 1천 골드가 많을 수도 있으나 현재 상황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대결이었다. 결코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장난하십니까?”
“얼마를 원하는가?”
“최소 1만 골드를 주셔야겠습니다.”
벌떡!
“자네야말로 장난하는 것인가!”
“목숨이 오가는 대결입니다. 설마 푼돈이나 얻으려고 저희들이 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리고 만약 지기라도 하면 그보다 더한 보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야 의뢰를 취소해도 상관없습니다.”
가르딘은 라이벨과 류카이젠이 화를 내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그저 차분하게 원하던 목적을 밝혔다. 1만 골드를 주지 않는 이상 절대 합의를 보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망설여졌다. 1만 골드는 남아 있는 영지와 저택을 모두 저당 잡혀야 간신히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분명 무리한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거절하지 못했다. 좀 전에 보여준 오러에 이길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주겠네.”
“선금으로 먼저 5천 골드를 주십시오.”
“지금 당장은 없네. 그러니 시간을 주게.”
“곤란하다면 집문서라도 내주십시오.”
“귀족에게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럴 리가요.”
열쇠를 쥐고 있는 자는 가르딘이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으로서는 어떤 요구도 들어줘야 할 상황이다. 거절한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 반대로 이긴다면 저택은 물론 제브라 자작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후르륵!
가르딘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두 형들의 결정을 기다리 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보자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자신들의 신세가 대단히 초라했다. 용병들조차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지 못했다.
가르딘의 말대로 두 형들은 곧장 영지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문서를 내놓았다.
“여기 있다.”
“지토스, 확인해 봐라.”
가르딘이 사이론에게 문서를 주었다. 그 즉시 사이론은 문서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를 확인했다. 귀족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확인하는 행위는 무례한 일이었다. 상대를 믿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이 화를 억누르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만일 대결에서 진다면 너희들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훗!”
두 형제의 위협에도 가르딘은 하찮다는 듯이 비웃었다. 그런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무사하지 못하면 어쩐다는 겁니까.”
작고 조용하지만 매서운 기운이 형성되어 라이벨과 류카이젠을 위협했다.
무형의 기운을 받은 두 형제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상대는 S급 용병이었다. 하찮은 도발 따위가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부들! 부들!
용병의 기운에 몸을 떨었다는 수치심이 들었다. 자신들의 초라함과 한심함으로 인해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더 이상 말해 봤자 라이벨과 류카이젠만 손해였다.
“그럼 이만 저희는 쉬어야겠습니다. 편안히 쉬고 체력을 끌어올려야 대결을 잘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해롤드가 방을 안내해 줄 걸세.”
“저희들이 알아서 다 해결할 테니 마음 푹 놓으십시오.”
가르딘과 사이론이 해롤드의 안내로 거실에서 방으로 사라졌다. 둘만 남겨진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거칠게 탁자를 쳤다.
꽈아앙!
“우리가 이런 처지였단 말인가!”
“형님, 참으세요. 반드시 오늘의 굴욕을 갚을 날이 올 겁니다.”
해롤드가 안내한 방은 참으로 공교로웠다. 가르딘이 어린 시절 생활했던 방으로 안내한 것이다.
방은 제대로 치워놓지 않아서 조금 지저분했다. 손님이 끊긴 후 방을 손보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방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방이 여기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방을 치워 드리겠습니다.”
“괜찮소. 이만 나가보시오.”
가르딘은 해롤드를 보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예전에 자신이 생활했던 시절과는 달랐다. 손님을 맞기 위한 방으로 개조를 한 상태라 쓰던 물건들이 바뀌어 있었다.
가르딘의 시선이 방 안의 모서리 기둥에 향했다. 기둥에는 그림이 작게 조각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조각된 흔적이 많이 옅어져 있었다.
‘어머니!’
투박하고 조악하게 새겨서 사람의 형체는 아니었다. 새겨진 얼굴을 보며 가르딘은 추억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사브리나를 생각하며 기둥에 새긴 것이다. 그림으로만 봤을 뿐 본적이 없었던 가르딘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형제들의 사랑을 한 번도 받지 못했었다. 아련하게 생각나는 어머니의 그림을 작은 손으로 모서리에 새겨 넣었다. 누군가 볼까 봐 잘 보이지 않는 모서리의 끝에 조각했다.
잠시 어린 시절의 상념에 젖은 가르딘이었다.
“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아무리 그대로 형제 아닙니까!”
사이론은 형들이 미운 것은 둘째 치고, 가르딘이 너무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처럼 가세가 기울고 있는데 신경도 쓰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예전에 형들은 나에게 이보다 더했지.”
“어린 시절에 겪은 일은 아직도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까! 이제는 털어버릴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내가 왜! 당했으면 당한 만큼 앙심이 생기는 게 사람이지. 너는 내가 성인군자처럼 보이냐. 그리고 주제넘게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아직 정신교육을 덜 받았나 보구나! 그 치!”
“아 … 닙니다.”
정신교육.
쓸데없는 곳에 한눈팔지 못하도록 가르딘이 몸소 나서서 직접 교육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한 번 정신교육을 받으면 반나절 정도 정신병자가 된다고 생각하면 적당한 비유였다.
‘속 좁다!’
사이론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애송이는 이래서 안 되었다. 표정만 봐도 노련한 가르딘은 눈치 챘다.
“속으로 욕하지 마라!”
‘헛!’
“했구나!”
“아닙니다!”
그냥 찔러본 것인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사이론이었다.
사이론은 가르딘을 괴물 보듯이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면 대단한 것 같지만 실상은 별것 아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이나 어렵지 사이론은 쉬웠다.
“대결할 때까지 신분 들키지 않게 조심해라. 너 보면 걱정이 태산이다.”
대결까지 14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기사대결의 경우 각 영지의 가신이나 기사 중에 세 명을 선발해서 대결을 벌이게 되어 있었다. 세 명이 나와 승부가 날 때까지 대결을 벌이게 된다.
현재 가르딘의 형들은 한 명을 더 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숫자가 부족하면 결국 누군가 한 명을 억지로 끼워 넣어야 한다.
가르딘과 사이론은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를 했다. 시녀가 간단한 식사를 가져온 것이 다였다. 좋은 식사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대접이 너무 성의 없었다. 아무래도 가르딘의 말에 두 형들의 속이 뒤틀린 모양이다. 가르딘만큼이나 뒤끝이 있고 속이 좁은 형제들이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난 후, 가볍게 몸을 풀고 일찍 잠을 청했다.
어둠이 깔리는 늦은 밤에 가르딘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가르딘이 일어나자 옆에서 자고 있던 사이론도 깼다. 기감수련을 하다 보니 작은 움직임에도 예민해졌다.
“제법 민감해졌구나.”
“영주님과 같이 다니다 보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그러냐.”
가르딘은 일부러 잠을 잘 때마다 감각을 테스트한다며 매번 사이론을 깨웠다. 감각이 무뎌질 때마다 깨워서 기감수련을 시켰다.
처음에는 무지하게 짜증나고 괴로웠다. 단잠에 빠질 때마다 사람 건드리니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에 어느 순간부터 기감이 더 확장이 되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잠깐 나갔다 올 거다. 금방 올 테니 알지?”
“알겠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라는 말이었다. 가르딘이 불쑥 나타날 때 깨어 있지 않으면 그날 하루 잠은 다 잤다고 봐도 무방했다. 신기한 것은 같이 안 자는데도 불구하고 가르딘은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여튼 괴물이라니까.’
사이론은 오러마스터가 왜 무서운지 절실하게 느꼈다.
가르딘은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잠영술을 사용하여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가르딘의 신형은 어둠 그 자체였다. 오러마스터라고 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은닉술을 선보였다.
어둠에 숨어 익숙하게 저택의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 사람이 부족한 관계로 저택의 주변을 한 명이 도는 것 같았다. 도둑이 들기 딱 좋은 집이 아닐 수 없다. 가르딘의 움직이기 편해졌다는 것은 괜찮았지만 씁쓸한 기분이었다.
가르딘은 목표했던 방문을 열기 전에 기의 장막을 쳤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지만 작고 끊어질 것 같았다.
방 안의 침상에 노인이 누워 있었다. 어둠 속임에도 불구하고 가르딘은 누워 있는 노인의 작은 주름까지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 일렁이는 그림자, 가르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25년이 흘렀음에도 가르딘은 아버지의 모습이 어제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의 무관심과 냉대를 생각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후우, 아직 저는 어린가 봅니다. 지금도 아버지가 미운 것을 보면 말입니다.’
화가 난다. 당시에 왜 그랬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미리 안다고 좋은 일이 아니다. 자칫 누군가 사실을 알게 되면 상당히 곤란했다.
파파팟!
가르딘의 손이번개처럼 움직였다. 순식간에 오브라이언 남작의 수면혈 세 개를 찍었다. 이 정도 되면 웬만한 충격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화가 많이 나셨나 봅니다.”
오브라이언 남작의 몸은 현재 노한 기운이 극에 달해 화기가 솟구치는 상황이었다. 화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몸 안의 장기도 손상이 되었다. 화를 식히고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면 결국 몸이 쇠약해져 죽을 수도 있었다.
오브라이언 남작은 나이가 이미 60에 달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기에 더 위험한 상태였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명경지수를 이룬 상태에서 천룡무상신 공을 운용하였다. 천룡무상신공은 세상의 모든 기운에 대한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 포용력이 있다면 반대로 어떤 기운이든 사용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천룡무상신공의 기운에서 음한기공을 뽑아내어 두 손에 집중했다.
허공섭물을 사용하여 오브라이언 남작의 몸을 곧추세운 후 추궁과혈을 위한 타혈을 진행 했다. 음한의 기운을 사용하여 화기를 제압하는 방법이었다.
사람의 몸도 만물과 이치가 비슷하다. 어느 한쪽의 기운이 강해져 불균형을 이루게 되면 결국 몸도 마음도 부서지게 되어 있다.
가르딘의 주먹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단 한 수에 수십 개의 권영이 뻗어나가 오브라이언 남작의 혈을 자극했다.
퍼퍼퍼퍼퍼퍽!
음한의 기운이 오브라이언 남작의 혈에 자극을 주자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색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15분 정도를 타혈하던 가르딘이 동작을 멈추고 오브라이언 남작을 침상에 다시 눕혔다.
화기를 조절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이가 있는 오브라이언 남작은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무리한 기운의 주입은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되었다.
“기사대결 전까지는 계속해야겠군.”
가르딘은 편안하게 잠을 청하는 아버지를 뒤로한 채 방을 벗어났다.
기사대결이 있을 때까지 가르딘과 사이론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렸다.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그 모습이 아니꼬웠다. 가끔씩 대화를 나눌 때마다 노기를 참기 힘들었다. 하는 말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듣기 싫어하는 말을 어찌나 집요하게 파고드는지 말을 하다 보면 얼굴은 붉게 물들고, 핏줄은 있는 대로 튀어나와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형님, 참으십시오. 그놈들 말이 틀리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용병 주제에 귀족을 능멸하다니!”
기사대결이 세 명인데 아직도 한 명을 구하지 못했다. 그걸 따지고 드니 할 말 없어지는 두 형제였다. 돈이 없어 더 구하지 못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사이론은 가르딘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독한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형제들 간의 다툼도 잊지 않고 갚아 주었으니 다른 사람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속 진짜 좁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지 몰라 가만히 있는 사이론이었다. 이럴 때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게 상책이다.
“대결 상대가 정해졌다고 하는데요.”
“그러냐.
어차피 대결은 그다지 신경 쓸 것이 못 됐다. 아무리 강해 봤자 가르딘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그것보다 어떻게 하면 여기를 벗어날 수 있는가가 선결 과제였다.
“그보다 조사한 내용은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겠지.”
“지부에 가보니 조사된 내용이 작성되어 있던데요.”
“시간을 잘 맞추어야 한다.”
“파멜라 시종장님이 알아서 잘 하실 겁니다.”
“이번에 한 방 제대로 먹여주어야지.”
당한 만큼 갚아준다. 이대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가르딘이었다.
제브라 자작가에 빌링턴 백작이 찾아왔다.
내일 있을 대결에 대한 의논을 하기 위해서였다. 원하던 목표가 움직이지 않으니 그에 합당한 응징을 해줄 생각이었다.
빌링턴 백작으로서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적을 유인하기 위한 계략을 세운 사람이 빌링턴 백작이다. 그런데 자신의 계획이 적에게 전혀 통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승승장구하던 빌링턴 백작의 오점이 되었다.
“기사대결에 나가는 자들은 확실한가?”
“물론입니다. 강철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 그리고 가장 실력 있는 기사가 출전할 것입니다.”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세 명 모두 익스퍼트 중급에 올라 있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더군다나 오브라이언 남작은 용병을 두 명밖에 못 구했습니다. 수에서도 전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끝을 내서 오브라이언 남작가가 배상할 수 없는 금액을 보상하도록 만들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보다 놈들이 구한 용병들은 어떤 놈들인가?”
“용병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 놈들입니다. A급 용병으로 S급 용병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감히 내 일을 방해하다니 자질은 있어도 상황 판단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백작님의 심중을 어지럽힌 놈들이니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기사대결 날짜가 다가왔다.
결전의 날이 다가왔지만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두 형제는 용병을 더 이상 구하지 못했다. 결국 누군가 한 명이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형님, 제가 나가겠습니다.”
“안 된다. 내가 나간다.”
“아무리 그래도 형님은 장남이십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그게 편합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서로 나서겠다고 다툼을 벌였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르딘과 사이론이었다.
“생각보다 형제간의 정이 깊네요.”
“깊기는 개뿔! 원래부터 저랬다면 집이 이 모양 이 꼴이겠냐!”
가르딘은 두 형들의 우애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늦었어도 후회하고 반성하면 용서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그건 패배자들이나 하는 말이다. 일찍부터 알아채고 준비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지나가고 나서 반성해 봤자 무너진 것들이 다시 복구가 되는가! 아니다. 깨진 유리잔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르딘이 쌓인 것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쉽게 용서가 안 되는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뀔 리도 없었다. 성격 꽁한 것은 집안내력 일지 몰랐다.
‘젠장! 속이 뒤틀린다.’
저런 모습을 예전에 봤다면 집을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알고 있기에 인정하기 싫었다.
결국 기사대결에 나가는 것은 류카이젠이 되었다. 검술 실력에서 류카이젠이 조금 더 앞섰다. 물론 두 형제 모두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래도 실력이 앞서는 자가 나서는 것이 약간의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라 판단을 내렸다.
원래 기사대결 장소는 상위 귀족이 정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제브라 자작은 오브라이언 남작가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관용을 베푸는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 발악해 봤자 소용없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또한 대외적으로 제브라 자작의 관대함을 알리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오브라이언 남작가 내에 적당한 장소를 선택해 놓았다. 어차피 장소 따위가 실력을 높여주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실력 있는 용병을 모집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었다.
분지 형태로 된 장소여서 주변 시선은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분지 내부에 상당히 넓은 공터가 자리했다.
오브라이언 남작가에서는 라이벨, 류카이젠, 가르딘, 사이론 네 사람만 나왔다. 반면에 제브라 자작가는 제브라 자작, 비비안, 카밀라, 불리쳐 등 20명에 달하는 기사가 대결에 나섰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빌링턴 백작을 비롯한 몇몇 귀족이 참석한 상태였다.
빌링턴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브라 자작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선언했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 선임한 신성한 기사대결이기에 결과에 깨끗이 승복할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형식적이고 따분한 관례가 끝이 나고 본격적으로 대결이 시작되었다. 각 귀족들이 선임한 세 명의 기사가 앞으로 나와 섰다.
가르딘, 사이론, 류카이젠이 나오자 제브라 자작가의 블리쳐, 드바인, 라덴이 나와 마주 섰다.
“다 쓰러져가는 영지에서 사람을 구하기는 했구나.”
블리쳐가 마주 보는 상태에서 류카이젠을 조롱했다.
류카이젠의 배와 허리는 상당히 두꺼워졌다. 방탕하게 생활하며 검술을 등한시 한 결과였다. 자신의 한심함을 알기에 화가 나지만 참았다.
그에 비해 가르딘은 참지 않았다. 상대가 빈정거린다면 그에 걸맞은 답변을 해주면 된다.
“다 쓰러져가는 영지에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시비 거는지 몰라. 상당히 궁색한 모양입니다.”
“네놈이 감히!”
“시비는 그쪽이 먼저 걸었습니다. 기사대결에서 상대를 모욕하라고 배웠습니까? 알 만한 분이 나이를 뒤로 잡수신 것 아닙니까.”
가르딘의 빈정거림은 참고 넘기기 힘들 정도였다.
반면에 옆에서 듣고 있던 류카이젠은 속이 시원했다. 어제 까지만 해도 저 빈정거림의 대상이 자신들이었다. 그 당시에도 화가 나다 못해 폭발할 뻔했었다. 상황이 다르다고 통쾌한 감정을 느끼다니 류카이젠은 속으로 어이없어 했다.
“네놈은 누구냐?”
“헬리언이라고 합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뭐, 배려해 줄 분이 아니라는 것은 척 봐도 알겠습니다. 그러니 맘에도 없는 말 안 해도 됩니다.”
부르르르!
끝까지 신경을 긁는다.
보는 눈이 많지 않다면 지금 당장 가르딘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블리쳐였다. 자신 앞에서 이토록 오만 방자한 놈은 처음이었다. 죽고 싶어 발악하는 놈으로 보였다.
“놈! 살아 갈 생각 마라. 네놈의 목을 반드시 베어주마.”
“벨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으면 해보십시오.”
가르딘이 목을 쭈욱 내밀어 보였다. 마치 약을 올리는 듯한 행동이었다.
빠직!
감히 가르딘 앞에서 말로 염장 지르려 한 대가였다. 웬만한 말발을 가지고서는 가르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블리쳐의 위협이 가르딘에게는 별반 타격을 주지 못했다. 애송이가 발악해 봐야 노련한 고수에게는 한방감도 되지 못한다.
얼굴을 붉힌 블리쳐는 다시 돌아가야 했다. 가르딘도 중앙에서 벗어나 오브라이언 남작 진영으로 왔다.
가르딘은 사이론을 먼저 지명했다.
“네 실력으로 블리쳐는 위험하니까. 적당히 상대하고 빠져.”
“걱정 마십시오.”
사이론이 앞으로 나서자 제브라 자작가에서는 불리쳐가 호명한 라덴이 앞으로 나섰다. 라덴은 강철 기사단에서 단장과 부단장을 제외하고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나이도 어린데다가 앞으로의 장래가 유망한 기사였다.
“긴장푸십시오. 얼굴에 긴장한 것이 역력합니다.”
가르딘이 긴장해서 땀을 흘리고 있는 류카이젠과 라이벨에게 안심하라고 했다. 하지만 말처럼 되지 않았다.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사활이 걸린 일이었고,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사이론과 라덴이 마주 섰다.
“강철 기사단의 라덴 바야흐다.”
“지토스입니다.”
대결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서로는 검을 뽑고 노려보았다.
사이론은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파악했다. 예전이라면 승부를 장담 지을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라는 것을 느꼈다. 기감수련을 통해 기감이 발달하다 보니 승패의 결과가 어느 정도는 보였다.
라덴도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검을 들고 서자 사이론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했다.
‘보통이 넘는다.’
‘이거 제법인데.’
서로 노려보며 틈이 생기기를 기다렸다. 사이론은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음을 알고 먼저 움직였다. 당겨진 팔이 앞으로 휘둘러지자 검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간격은 짧고 간결하게, 움직임은 신속해야 했다.
슈슈슉!
카캉!
번개처럼 뻗어오는 검은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호쾌했다. 라덴이 방심했다면 선공을 막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덴은 강철 기사단의 독문검법인 스톤 검법을 사용하였다.
스톤 검법은 돌처럼 묵직하며 단단한 중검법으로 강력한 근력을 바탕으로 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검술이다.
검과 검이 부딪치자 불똥이 튀었다. 한 번 불이 붙자 대결은 치열하게 진행이 되었다.
차차차창! 카카카캉!
묵직한 검법을 정면으로 받는 것은 미련했다. 검을 사선으로 잡고, 미끄러지면서 검면을 스치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뱀처럼 타고 오는 사이론의 공격에 뒤로 주춤하며 물러서야 했던 라덴이었다. 라덴은 상대의 검술이 생각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빠르다!’
‘젠장, 중검이 생각보다 상대하기 힘든데.’
현란하고 화려한 공격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것이 중검법이었다. 결국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일격 필살의 위력은 중검법이 더 강했다.
라덴과 사이론의 검에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까지 숨기고 있던 힘을 발휘한 것이다. 익스퍼트 중급에 달하는 기운이 부딪치자 좀 전과는 천양지차의 대결이 되었다.
벌떡!
빌링턴 백작과 제브라 자작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대결은 예상하지 못했다. 상대가 생각보다 더 강했다. 이긴다고 보장할 수 없는 치열한 상황이다. 팽팽한 대결이 아니라 일방적인 대결이 되어야 정상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직 진 것이 아닙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두고 보지.”
수적으로 오브라이언 남작가가 한 명 부족했다. 류카이젠이야 있어봤자 쓸모없는 존재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실력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저 정도로 강한 줄은 몰랐다. 대결이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쫓지도 못했다. 자신이 나섰다면 일검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론과 라덴의 대결은 30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한 대결은 10분만 지나도 상당히 지친다. 오러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기에 사이론과 라덴은 서로 지쳐가는 것을 체감했다. 결국 승부를 보아야 할 때가 다가왔다.
사이론이 라덴의 움직임을 간파했다. 라덴은 스톤 검법의 절기인 랜드임팩트(대지참)를 시전하기 위해 신형을 뒤로 약간 벌렸다. 간격을 벌려야만 절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순간적인 움직임이라 타이밍을 계산하기 어려운 찰나였다.
그 순간에 사이론은 자연스럽게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빠르고 간결하게 벤다!’
아주 작은 공간이 벌어졌다. 그사이를 검이 비집고 들어오기에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사아악!
베었다.
찰나의 공간을 파고들어 가장 빠르고 간결한 공격으로 상대방의 가슴을 베었다. 검을 휘두르기 직전에 무방비 상태였던 라덴은 가슴을 허용하고 말았다.
“크으으!”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일직선으로 베어졌다. 죽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결코 얕지 않는 상처였다. 베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오러에 당한 상처라 몸 안까지 충격을 받았다.
털썩!
라덴은 피가 흐르는 상황이라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을 뻔했다. 다시 싸우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져 … 졌다.”
모두의 예상을 깬 상황이라 장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빌링턴 백작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노기가 치솟은 것이다. 그가 제브라 자작을 노려보았다.
제브라 자작은 죄를 지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설마 용병 따위가 익스퍼트 중급에 이를 줄은 몰랐다.
빌링턴 백작이 보고 있는 가운데 또 패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제브라 자작은 그 즉시 불리쳐에게 눈짓을 보냈다.
나가서 확실하게 끝을 내라는 신호였다.
사이론은 이기고 난 후 최대한 심호흡을 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체력을 빨리 회복할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한순간에 체력과 오러가 원래대로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르딘은 걸터앉기에 알맞은 바위에 앉아 느긋하게 관전 하며 차례를 기다렸다.
“입에 벌레 들어가겠네. 언제까지 벌리고 있을 겁니까.”
아직까지 입을 다물지 못한 라이벨과 류카이젠이었다. 굉장한 대결을 봤더니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왔다.
후비적! 후비적!
두 형제는 바위에 앉아 콧구멍이나 쑤시는 가르딘의 모습을 한심하게 볼 수 없게 되었다. 행실은 어떨지 몰라도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자신들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순수하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실력이 대단하군!”
“저 정도야 기본 아닙니까. 별것도 아닌데 놀라시긴.”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대결이 시작되었다.
사이론을 마주하는 블리쳐의 눈가에 짙은 살의가 묻어 나왔다.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제법이군. 하지만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건 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건방지군.”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습니다.”
가르딘이나 사이론 모두 블리쳐에게는 건방진 놈이었다. 라덴을 운 좋게 이긴 놈이 감히 자신까지 넘본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단숨에 승부를 내버릴 생각이었다.
“어디 끝까지 건방질 수 있는지 보겠다!”
“지금도 보고 있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가르딘과 있다 보니 저절로 염장 실력이 상승한 사이론이었다. 아직 미숙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점차적으로 완성이 되어가는 상태였다. 그 스승에 그 제자, 또는 그 나물에 그 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파팟!
시작과 동시에 블리쳐가 달려들었다. 지면을 박차며 가속력을 붙였다. 앞으로 뻗어나가는 힘과 동시에 응축된 기운이 검에 집중되었다. 검이 검집에서 벗어나는 마찰력이 가해지자 집중된 힘이 분출되어 나갔다.
무섭도록 빠르고 강력한 발검이었다.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빨라 피하기에는 늦어버린 사이론은 검을 들어 막아야 했다.
타아아아앙!
시끄러운 쇳소리가 울렸다.
힘에서 밀린 사이론이 뒷걸음질을 쳤다. 라덴과의 대결을 벌인 직후라 체력이 완전하지 않았다. 사이론은 발걸음을 빨리하여 공격 사정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블리쳐는 사이론의 의도를 간파하고 빠르게 달려들었다.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시간을 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블리쳐는 라덴과는 다르게 중검과 쾌검을 절묘하게 섞어 사용하고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사이론은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는 블리쳐의 집요한 공격에 진땀을 흘렸다.
“죽어랏!”
스톤 검법의 랜드임팩트가 시전되었다.
라덴의 공격은 시전되기도 전에 막혔다. 그에 비해 블리쳐는 간결하게 베고 들어왔다. 간결하면서도 위력은 엄청났다.
사아아아아악!
대지를 가르는 듯한 묵직한 내려 베기였다. 위에서 아래로 종으로 그어지는 상황에서 사이론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틀었다. 직접적으로 부딪치면 검이 버티지 못하고 잘려 나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데굴! 데굴!
기사들의 경우 바닥을 구르지는 않는다. 반면에 사이론은 용병이었다. 자존심보다는 사는 게 먼저고 이기는 게 중요했다.
“하찮은 용병 놈이 추잡스런 짓을 하는구나!”
사이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최강의 공격을 하였다. 말을 할 틈이 있으면 공격이 먼저였다.
- 패스트검법-마지막 오의-일루젼 스트라이크(환영검).
한 번의 출수로 20개의 환영을 만들어내었다. 완성에 이르면 100개의 환영이 생긴다고 하지만 아직 그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슈슈슈슈슉!
최강의 절초이기에 모든 힘을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환상 같은 찌르기를 보자 블리쳐도 입을 닫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만만한 절초가 아닌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찌르기였다. 모두 방어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그에 걸맞은 절초뿐이다.
- 스톤 검법-디펜스마스터-아이언윌(철벽).
블리쳐의 검이 종, 횡, 사선으로 여러 번 그어졌다. 무섭도록 빠르게 이어진 검속이었다. 그러자 오러가 희미한 막으로 형성되었다.
파아아아아앙!
아이언윌과 일루젼 스트라이크가 부딪치며 굉장한 소리를 시었다. 충격이 퍼지는 가운데 반탄력을 이기지 못한 사이론이 뒤로 튕겨 나가버렸다.
그에 반해 블리쳐는 몇 걸음 물러서는 것이 다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이론이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블리쳐가 마지막에 시전한 절초는 검막이었다. 오러마스터에 이르러야 간신히 사용할 수 있는 검막을 익스퍼트 중급에서 사용했으니 오러 소모가 상당히 심했다. 갑작스런 사이론의 공격이 아니었다면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밀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블리쳐가 사이론을 노려보았다.
“이놈! 죽여주마!”
“항복!”
사이론은 불리함을 알고 항복을 선언해 버렸다. 더 이상 싸워봤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바로 물러섰다.
블리쳐는 항복이라는 말을 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덤벼 들었다. 항복이라고 말하며 웃는 사이론의 면상을 보자 화가 났다.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카앙!
블리쳐의 검은 막혔다. 어느새 가르딘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시기적절하게 먼저 움직인 가르딘이었다. 블리쳐의 행동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그 정도의 도발에 넘어가는 것을 보니 아직 수양이 한참 부족했다.
사이론도 가르딘을 믿고 있었기에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항복한 상대를 공격하다니 예의가 없군요.”
“닥쳐랏!”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정말 과감합니다.”
그제야 정신이 드는 블리쳐였다. 명백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가르딘은 과감한 블리쳐에게 대단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사람을 아주 가지고 논다. 화가 치솟다 못해 화산처럼 폭발할 지경의 블리쳐였다. 뒤에서 지켜보는 빌링턴 백작과 제브라 자작이 없었다면 참지 못했을 것이다.
블리쳐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결을 다시 하겠다는 표현을 나타내었다. 물러서는 내내 가르딘을 노려보았다.
“어디 다시 해보자.”
“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습니다.”
“뭐라고! 이제 와서 목숨이 두려운 것이냐!”
“저야 하고 싶지만.”
“뭐냐! 그 말투는? 두려우면 인정하고 엎드려라!”
블리쳐가 노골적으로 가르딘을 가소롭다는 듯이 다그쳤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가르딘은 침착했다.
가르딘은 자존심으로 사는 인간형이 아니다. 목적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 정도의 자극은 그저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생채기도 내지 못한 블리쳐의 도발은 가르딘의 말에 의해 사라질 뿐이었다.
“블리쳐 경은 실격입니다. 그러니 대결 자격이 없습니다.”
“닥쳐랏! 누구 맘대로 대결 자격을 운운하는 것이냐! 용병 따위가 감히 나를 판단하는 것이냐.”
“훗!”
가르딘의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리는 블리쳐였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살의가 끓어오르게 한다.
가르딘이 공증인으로 나온 빌링턴 백작을 바라보았다. 가르딘은 듣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듯이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제 할말을 해나갔다.
“기사대결은 초대 선황 폐하께서 만들어놓으신 신성한 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소리 지껄이지 마라!”
블리쳐가 껴들어서 말을 잘랐다.
가르딘은 블리쳐가 끼어들든 말든 하던 말을 마저 했다.
“기사대결은 신성한 규칙이 있습니다. 첫째, 항복한 상대에게는 살수를 쓰지 않는다. 둘째, 대결신호가 있기 전까지 검을 뽑을 수 없다입니다.”
씨익!
부르르르!
가르딘이 블리쳐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그러자 블리쳐는 좀 전에 자신이 한 행위가 떠올랐다. 항복한 상대에게 살수를 가했다. 또한 규칙을 어기고 먼저 검을 빼 들었다.
블리쳐의 몸이 심하게 떨려왔다. 실수를 직감한 것이다. 모두가 보는 앞이었다. 아니라고 잡아떼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빌링턴 백작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멍청한 놈!”
한순간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덤벼든 블리쳐의 행동이 못 마땅했다. 저런 놈이 기사단장이라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제브라 자작, 어떻게 저런 놈이 기사단장이 된 것인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놈의 말을 인정하지 …!”
“시끄럽다! 지금 날 웃음거리로 만들 생각인가!”
“아직 드바인이 남아 있습니다. 드바인이라면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만약 실패하는 날에는 그대의 앞날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다른 귀족들도 있고, 주변에 눈과 귀가 깔려 있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지켜본 상황에서 명백한 규칙 위반자를 두둔할 수는 없었다. 자칫 명예가 훼손될 수도 있었다.
빌링턴 백작이 일어서서 결정을 내렸다.
“블리쳐는 기사대결의 신성한 규칙을 어겼으니 자리로 돌아가서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지 …! 예!”
부들! 부들!
블리쳐는 이 순간 자신의 행동이 너무 후회되었다. 눈앞에서 능글맞게 웃고 있는 가르딘의 면상을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 만약 그랬다가는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지독한 살의를 가지고 가르딘을 노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가르딘은 블리쳐가 노려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느긋했다.
‘네가 꼬나보면 어쩔 건데, 애송아.’
감정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놈이 기사단장이라는 거창한 지위를 가진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의 성격이 급하다는 것을 알고 전음으로 사이론에게 지시를 내렸다. 최대한 웃으면서 뻔뻔하게 항복하라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블리쳐가 화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간단한 유인책에 넘어가는 놈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저런 놈은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쓸모가 없는 놈이었다.
“네놈! 지금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어허, 뒤끝이 상당히 강하군요. 협박하는 겁니까!”
“경고다!”
“아!”
가르딘은 그 즉시 크게 소리쳤다.
“이거 용병보다 더 지저분하네! 자기 실수로 대결하지 못한다고 어떻게 협박을 할 수 있지! 나도 승부는 깨끗하게 인정을 하는 편인데.”
가르딘이 혼잣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반면에 소리가 너무 컸다. 모두에게 들리는 혼잣말이 어떻게 혼잣말이 될 수 있는가!
블리쳐는 빌링턴 백작과 제브라 자작의 싸늘한 눈빛을 또 다시 받았다. 더 이상 가르딘을 자극해 봤자 블리쳐만 손해였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짓을 서슴없이 하는 가르딘이었다.
제브라 자작 진영으로 돌아간 블리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심한 놈!”
“죄송합니다. 하지만 놈이 먼저 …!”
“닥쳐랏! 당분간 자중하지 않으면 자리도 보존하지 못할 줄 알아라.”
제브라 자작의 싸늘하고 차가운 대접을 받아야 했다. 이제까지 이런 비참한 대접은 처음이었다. 냉대를 받자 가르딘에 대한 원망이 더 커졌다. 놈을 죽이지 않고서는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제브라 자작이 드바인을 앞으로 내세웠다.
“확실히 끝을 낼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드바인은 강철 기사단의 부단장이다. 블리쳐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명성과 경력에서 블리쳐에게 미치지 못해 부단장의 자리에 있었지만 언젠가는 블리쳐를 넘어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절호의 기회가 드바인에게 찾아왔다. 가르딘만 이기면 블리쳐의 모든 것을 가져올 수 있었다.
‘오늘 부로 내가 단장이다.’
용병 놈들의 실력이 제법이지만 방심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형님! 이거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어.”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희망이 생겼다는 것에 환호했다. 좀 전에 가르딘이 싸우지도 않고 블리쳐를 보내버린 것은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대결을 벌였다면 이겼더라도 지쳐서 기사 대결에서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용병들의 화술이 원래 저렇게 대단했었나!”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라이벨과 류카이젠이 승리에 대한 희망을 느끼고 있을 때 가르딘이 다가왔다. 세 번째 대결 전에 할 얘기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이번 승부를 이기면 어떻게 할 겁니까?”
“이기면 사과를 받고 보상을 받을 생각이네.”
라이벨과 류카이젠의 말투가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가르딘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반증이었다. 능력만 있다면 대접받는다. 그게 세상사 이치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
“보상은 어느 정도나 받을 겁니까?”
“그게 자네하고 무슨 상관인가!”
“오래 말할 시간 없습니다. 보상의 규모를 말하십시오!”
사실 보상이라고 해봤자 무리한 요구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만약 제브라 자작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가 눈 밖에 나게 되면 이후의 오브라이언 남작가는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적당한 보상을 받으면서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안위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는 게 나았다.
“자네들에게 줄 정도의 돈만 요구할 생각이네.”
“너무 작군요. 차라리 제가 협상을 하겠습니다.”
“자네가 뭔데 나서는 겐가! 너무 주제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습니까. 아직 대결이 남아 있는데 …. 갑자기 할 맘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의욕이 상실되니 검을 들 힘도 없습니다.”
가르딘의 능청스런 말에 두 형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지면 안 된다. 지면 끝장이었다. 가르딘의 말이 아니꼬워도 어쩔 수 없다. 들어주어야 대결을 할 것이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동시에 생각했다. 조금 전에 들었던 감사하는 마음을 저주했다.
‘역시나 친해질 수 없는 놈이야!’
“자네가 알아서 하게.”
“탁월한 선택입니다.”
“진다면 보상도 없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결 신호가 울리기 전이었다. 가르딘이 여유만만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드바인은 이미 앞에 나와 있는 상태였다.
가르딘은 대결이 있기 전에 드바인의 눈을 보았다. 눈은 많은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수많은 진실이 숨어 있기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놈, 욕심이 대단한 놈인 것 같은데.’
눈빛에 탐욕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블리쳐가 물러난 것을 기회로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기회를 잡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드바인의 입장에서는 가르딘이 기회로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불행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제브라 자작 진영에서 가만히 화를 누그러뜨리던 블리쳐는 무언가를 잊은 것 같았다. 미심쩍은 것이 있었다.
‘가만, 그리고 보니 놈이 내 검을 막았잖아!’
오러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최후의 일격이었다. 결코 쉽게 막을 수 없는 검격임에 틀림없다. 놈이 너무 쉽게 막은 것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말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괜히 말해 봤자 빌링턴 백작과 제브라 자작의 눈총만 받을 것이다.
순간 블리쳐는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모두가 가르딘의 화술에 속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르딘은 드바인을 앞에 두고 슬쩍 블리쳐를 곁눈질했다.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군. 그래도 말할 수는 없을 거다.’
드바인은 자신을 두고 다른 곳을 본 가르딘에게 적대감을 표출했다.
“감히 나를 두고 다른 곳을 보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구나!”
“상대도 상대 나름입니다.”
“역시 네놈의 입은 그냥 놔둘 수 없구나! 내 반드시 네놈의 입을 찢어주겠다.”
“누차 말했지만 할 수 있으면 해보십시오.”
위이 잉!
대결 신호가 울렸다.
서로가 검을 뽑아 들었다. 시린 기운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드바인은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놈에게서 기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 대결한 사이론과 같은 용병이라면 실력이 결코 낮다고 볼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무시했다. 각자가 익힌 오러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드바인이 먼저 탄력 넘치게 튀어나왔다. 힘과 오러의 비율을 조율하여 검을 휘둘렸다. 빠르면서도 허점이 없는 검격이었다.
가르딘도 드바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검을 중단에서 사선으로 비스듬히 세웠다.
검은 양팔을 들어 올리는 자세가 가장 많은 허점을 드러낸다. 속도에서 자신 있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는 게 나았다.
카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대결의 점화가 붙었다.
드바인은 종과 횡으로 안정적인 검격을 구사했다. 깔끔하면서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방어형 검격이었다. 방어를 중점으로 두며 상대의 검격을 파악한 후 공격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공격을 통해 상대방의 역량을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공격을 할 수 있다.
차차차창! 카카카캉!
검과 검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상대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 드바인이었다. 블리쳐처럼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이상했다.
‘이게 뭐지?’
드바인의 검이 가르딘의 검과 부딪치기는 한다. 문제는 자신이 원하던 타이밍에 맞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부딪칠 것 같을 때 가르딘의 검이 물러서고, 드바인의 검이 물러설 때 가르딘의 검이 부딪쳤다. 타이밍이 계속 어긋나다 보니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르딘은 상대할수록 드바인이 재수 없었다.
‘재수 없게! 바자바인 후작하고 같은 검형을 쓰고 있어!’
같은 검법을 익혀도 익히는 자의 재질과 성향에 따라 특성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면 공격에 주된 역점을 두고, 방어적인 성향이 강하면 방어에 주력하게 된다. 피닉스 기사단의 부단장인 조르크 바자바인 후작의 경우 공격보다는 수비에 중점을 두며 상대를 파악해 요리하는 검술을 사용한다.
상대하는 입장에서 수비형은 상당히 짜증나는 검술이다. 자신의 특성을 탐색당하는 것은 물론, 이후의 대결에서 수비형이 훨씬 유리하다.
가르딘은 바자바인 후작의 수비형 검형을 많이 보아왔다. 완벽에 가까운 수비형 검술을 익힌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드바인의 수비형 검술이 뛰어나다 해도 가르딘에게는 아직 어설퍼 보였다.
또한 바자바인 후작을 엿먹이기 위해서 일부러 파훼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수비형 검형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변형적 검술을 발견해 냈을 뿐이다. 엇박자 타이밍에 치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검술이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반면에 치명적인 결함도 있다. 엇박자 타이밍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검술 수련의 기본은 반복이다. 반복적으로 수련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일정 성향의 똑같은 법칙이 생겨난다. 모르기에 극복하기도 어려울뿐더러 형을 깨뜨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틀을 깨고 무초식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오러마스터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으로 가르딘이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물론 상대가 바자바인 후작과 같이 오러마스터 중급 이상이라는 전제조건이 달린다. 현재 드바인에게 그 정도의 초식은 필요 없었다.
가르딘은 바자바인 후작이 생각났다는 것 자체가 짜증이었다. 그냥저냥 치열하게 대결하다 이기려고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수비형 검술의 최악의 상성인 엇박자 검술의 극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가르딘에게 있었다.
바로 무극칠검식의 1초식인 둔중유극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느리고 둔탁한데다가 형편없어 보인다.
하지만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운 검술이다. 무거움과 느림, 부드러움이 극에 달해 있어 수비형 검술에는 쥐덫이나 마찬가지였다.
익스퍼트 상급 시절의 스필언과 미토스조차 파훼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었다. 드바인이 막아낼 수 있는 평범한 검법이 아니었다.
“이놈! 장난치지 마라!”
“그런 적 없습니다.”
마치 허공을 베는 것 같은 맹물 같은 대결에 드바인은 조바심이 났다. 멋지고 화려한 검술을 지향하지는 않지만 이런 대결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먼저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상대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대로 지속되어 봐야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드바인은 오러를 끌어올려 두 손과 두 발, 허리에 힘을 주었다. 발에서 시작된 기운이 허리를 타고 팔에 흘러 들어간다.
드바인의 움직임에 가르딘은 회심의 미소를 보였다. 이때다 싶은 가르딘이 무극칠검식의 둔중유극을 펼쳤다.
검과 검이 교차했다. 굉장한 소리는 아니어도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야 하건만 나지 않았다.
검이 베어져서 내려가는 극점이 존재한다. 극점에서는 힘이 멈춰지게 된다. 가르딘의 검이 극점까지 내려가서 드바인의 검을 받았기에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드바인은 악몽이 시작되었다. 가르딘의 검이 드바인의 검과 붙어서 이리저리 흐느적거렸기 때문이다. 수비고 공격이고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가르딘의 검형에 이끌려 이리 엎어졌다, 저리 엎어졌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가르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기에는 드바인이 힘을 주어 가르딘이 버티지 못하고 형편없이 뒹구는 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가르딘이 넘어지면서 드바인도 같이 균형점을 찾지 못하고 넘어지기에 가르딘 탓으로 보기 어려웠다. 그저 서로의 검술이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 것이 전부였다.
흐느적! 흐느적!
주르르륵!
드바인은 속이 타들어갔다. 그에 더해 몸은 더 무겁고 느려졌다. 어찌된 일인지 움직일수록 몸이 몇 배는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오러는 끊임없이 소모되고 있었다.
분명 공격이 성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지쳐가는 데도 불구하고 가르딘은 별반 지쳐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이런 젠장!’
형편없이 뒹굴었기에 가르딘과 드바인의 몸은 이곳저곳이 다 흙투성이였다. 기사들이 천하게 여기는 짓을 골고루 다 하고 있었다.
가르딘은 용병의 신분이기에 상관없다고 해도 드바인은 달랐다. 기사가 용병하고 개싸움을 한 것이 아닌가! 개싸움은 둘째 치고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이거 … 지는 것 아냐?’
드바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뜨끔!
제브라 자작은 속이 뜨끔거렸다. 자신을 노려보는 빌링턴 백작의 매서운 눈초리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대결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제라도 잘되기만을 바랐건만, 드바인이 완전 개싸움을 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으니 아니라고 할 수 도 없는 상황이다.
“크흠!”
살기마저 감도는 빌링턴 백작의 모습에서 제브라 자작은 두려움을 느꼈다. 잘못하면 자신의 입지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철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이 저 모양이라니 자네의 능력도 알 만하군.”
“송 … 구합니다. 하지만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조금 전에도 들었네.”
빌링턴 백작이 고개를 돌려버린 탓에 제브라 자작은 더 이상 말도 하지 못했다. 말도 섞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제브라 자작의 노기는 블리쳐와 강철 기사단에 향했다. 만약 오늘 지면 가만두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이제까지 쌓아 놓은 모든 공적들이 무너져 내렸으니 제브라 자작으로서도 속이 좋을 리 만무했다.
“이놈! 떨어져라!”
지겹게 달라붙어서 자신까지 추한 모습으로 만들고 있는 가르딘이 악마처럼 느껴졌다. 어디서 이런 개빵 같은 놈이 나타나서 앞길을 막아서는지 억울할 따름이다.
드바인은 검을 볼썽사납게 휘젓고, 몸을 전후좌우로 흔들었다. 가르딘에게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드바인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런다고 떨어질 가르딘이 아니었다. 마치 드바인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지켜보는 사이론은 드바인을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제대로 걸렸구나!’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드바인이 가르딘의 심경을 자극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처럼 치사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으아아악! 제발! 떨어져!”
화가 나는 것보다 답답했다. 뭔가 해답이 있어야 대결을 할 것이 아닌가! 바로 앞에 착 달라붙어 있어서 검을 휘두를 공간도 주지 않았다.
드바인은 계속 뒷걸음을 쳐야만 했다.
탁!
“이런!”
하필이면 뒤에 돌덩어리가 발뒤꿈치에 걸렸다. 드바인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체력적으로 지쳐 있는 상태라 주의력이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재수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그만 돌덩이에 불과했지만 사실은 흙에 파묻혀 있는 거대한 바윗덩어리였다.
철퍼덕!
균형을 잃은 것은 드바인뿐이 아니었다. 가르딘의 신형도 균형을 잃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르딘이 들고 있는 검이 드바인의 왼쪽 옆구리를 찔러버렸다.
푸욱!
“크아아악!”
검을 맞은 드바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드바인은 정신이 가물거렸다.
멍!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저처럼 억세게 운 좋은 상황은 그들도 처음이었다. 같이 넘어졌는데 검이 박힌 꼴이었다.
“류카이젠, 저게 어떻게 된 거냐?”
“이긴 것 같은데요.”
“저렇게 이겨도 되는 거냐.”
“꼴이 우습지만승부는 결정이 났습니다.”
“이런 행운이 ….”
“저놈은 날 때부터 행운을 타고난 놈 같습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저도 모르게 서로를 부둥켜 앉았다.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고 해도 거의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크아아아악!”
“아이쿠, 미안해서 어쩝니까.”
가르딘이 일어날 때 검을 받침대로 사용했다. 그로 인해 검이 좌우로 움직였다. 검이 박혀 있는 드바인의 입장에서 살이 좌우로 찢겨 나가는 고통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아이구! 이거 무릎이 안 좋아서 그러나, 한 번에 일어나기 힘드네. 다시 한 번 해야 하나.”
허억!
“졌 … 다!”
기겁한 드바인이 바로 항복을 외쳤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것도 생살이 느리게 찢어지는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일이었다.
씨익!
가르딘의 입가에 드리운 사악한 미소를 드바인은 보았다. 온몸에 독거미가 지나다니는 듯한 소름이 끼쳤다.
‘이놈은 하고도 남는다!’
괜히 자존심 때문에 반항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드바인이었다.
모두가 그렇듯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드바인은 피를 많이 흘렀다. 의식도 가물거린다. 간신히 의식을 지탱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차라리 놔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곧 드바인은 기절해 버렸다.
꼴까닥!